'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프로그램 정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방송일

방송 시작일 2021. 10. 21 ~
방송 요일,시간 목 22:20~24:00

기획의도

◆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나'의 이야기 어느 날, 그 사건, 그 장면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눈길을 사로잡는 그 날, 그 사건으로부터 한 사람의 소시민으로서 '내'가 느낀 바를, 온전히 '나'의 시점에서 주관적으로 전달한다. ◆ 배워서 '너' 주는, 3人 3色 이야기 '너' 에게 꼭 들려주고 싶어! 친구, 배우자, 동료... 세 명의 '이야기꾼'이 스스로 공부하며 느낀 바를 각자의 '이야기 친구'(가장 가까운 지인)에게, 가장 일상적인 공간에서 1:1 로 전달한다.

프로그램3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

방송일

방송 시작일 2021. 03. 11 ~ 2021. 07. 29
방송 요일,시간 목 22:30~23:50

기획의도

◆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나'의 이야기 어느 날, 그 사건, 그 장면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눈길을 사로잡는 그 날, 그 사건으로부터 한 사람의 소시민으로서 '내'가 느낀 바를, 온전히 '나'의 시점에서 주관적으로 전달한다. ◆ 배워서 '너' 주는, 3人 3色 이야기 '너' 에게 꼭 들려주고 싶어! 친구, 배우자, 동료... 세 명의 '이야기꾼'이 스스로 공부하며 느낀 바를 각자의 '이야기 친구'(가장 가까운 지인)에게, 가장 일상적인 공간에서 1:1 로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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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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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시작일 2021. 10. 21 ~
방송 요일,시간

기획의도

◆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나'의 이야기 어느 날, 그 사건, 그 장면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눈길을 사로잡는 그 날, 그 사건으로부터 한 사람의 소시민으로서 '내'가 느낀 바를, 온전히 '나'의 시점에서 주관적으로 전달한다. ◆ 배워서 '너' 주는, 3人 3色 이야기 '너' 에게 꼭 들려주고 싶어! 친구, 배우자, 동료... 세 명의 '이야기꾼'이 스스로 공부하며 느낀 바를 각자의 '이야기 친구'(가장 가까운 지인)에게, 가장 일상적인 공간에서 1:1 로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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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1,020
[꼬꼬무 찐리뷰] 신안 앞바다서 건진 3억 짜리 도자기…그곳에 700년 전 침몰된 보물선이 있다 [꼬꼬무</font> 찐리뷰] 신안 앞바다서 건진 3억 짜리 도자기…그곳에 700년 전 침몰된 보물선이 있다 등록일2025.01.03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2일 방송된 '보물을 찾는 사람들-1976 신안 보물선'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가수 겸 배우 이준호, 배우 김국희, 그룹 오마이걸 멤버 유빈이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신안 앞바다서 건진 도자기 때는 50년 전인, 1976년 1월이야. 전라남도 신안군에 있는 검산마을. 몇 명의 어부들이 사는, 작고 조용한 마을이야. 목포의 한 초등학교 교사였던 최평호 씨는 오랜만에 고향인 검산마을에 갔어. 형제들이 아버지 묘를 벌초하기로 했거든. 벌초를 마친 후 고향에 있는 셋째 형님 집에 모였어. 오랜만에 만난 형제들이 모여 회포를 풀고 있는데, 갑자기 형님이 이런 말을 하는 거야. 아 거시기 말여, 내가 얼마 전에 물질을 하다가 뭘 하나 건졌는데, 그것이 꽤 볼만하단 말여. 시방 함 보여줘야 쓰겄네. 그러면서 형님이 가져온 건 이거였어. 형님이 집 앞에 있는 바다에서 고기를 잡다가 건졌다는 거야. 높이 44cm, 둘레가 65cm나 되는 큰 청자였어. 보니까 색깔도 좋고, 무늬도 너무 예뻐. 근데 최평호 씨가 가만 보니까, 이거 왠지 예사롭지가 않아. 암만 봐도, 그냥 도자기가 아닌 것 같아. 최평호 씨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도자기를 목포 집으로 가져갔어. 집에 모셔놓고 보니까, 이거 볼수록 엄청난 작품 같아. 최평호 씨는 이 도자기를 들고 목포시청으로 갔어. 시청 공보실에 가면 혹시 무슨 단서를 찾을 수 있을까 싶어서 갔어요. 갔더니 공보실에서도 전혀 감감하더라고요. -최평호, 당시 국민학교 교사 그런데 목포 시청에도 문화재 담당자가 없대. 아쉬운 대로, 신고서라도 쓰고 가기로 했어. 그런데 신고 서식 양식이란 것도 딱히 없어. 그래서 최평호 씨가, 신고 양식을 직접 손으로 그려가며 신고서를 작성했어. 근데 직원이 신고서를 보더니, 신안에서 건진 거면 거기다가 신고해야 한다며, 기껏 가져왔는데 신안으로 다시 가져가라는 거야. 하는 수 없이 최평호 씨는, 도자기를 가지고 다시 신안군청으로 갔어. 거기선 뭐라고 했을까? 신안군청에서 하는 이야기가 신안군 안전면에서 밭갈이를 하다가 돌도끼를 하나 발견했는데, 서류가 왔다 갔다 한 것이 200매가 왔다 갔다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보상금이 얼마가 나왔냐면, 500원이 나왔대요, 그때 돈으로. 500원이 나왔는데 그 왕복 선비가 700원이래요. 그래서 안 찾아가고 포기를 했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제발 좀 신고 안 했으면 쓰겠습니다' 그런 이야기예요. 신안군청에서 하는 이야기가. -최평호, 당시 국민학교 교사 최평호 씨는 포기하지 않고 사정사정했어. 그때, 신안 군청에 근무하던 남상률 씨가 그 도자기를 본 거야. 보니까, 남상률 씨도 이 도자기에 대해 궁금해져. 남상률 씨는 그 도자기를 받아서, 광주에 있는 국립박물관에 감정을 의뢰했어. 최평호 씨가 어느 날 가져왔는데, 저것이 몇 년도 유물인지도 모르고 이제 그랬는데. 그분도 오셔서 내 기억으로는 가지도 않고. 우리보다 더 귀하게 얘기하더라고 신기하게. 그래서 달라고 해서 우리가 확인서 받아 놓고 광주에 있는 국립박물관으로 가지고 갔어요. 학예사한테 감정의뢰를 맡긴 겁니다. -남상률, 당시 신안군청 공무원 그리고 일주일 후, 이 도자기의 정체가 밝혀졌어. 감정 결과, 이건 고려청자가 아니었어. 그럼, 뭐였을까? 자, 여기에 답이 있어. 지난 1월 9일 전남 신안군에서 고기잡이를 하다 대형 청자를 하나 건져냈는데, 이 청자가 국제 시세로 10여만 달러에 상당하는 원나라 청자라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당시 신문 기사 내용 中 고려청자가 아니라, 700년 전 중국 원나라 때 청자였던 거야. 한 일주일 있다가 송원대 유물이라고 판명돼서 온 거예요. 그러니까 보물이라고 해서 저희들이 깜짝 놀랐죠. 이렇게 귀한 것이 나온다고. -남상률, 당시 신안군청 공무원 무려 시가 10만 달러로 추정돼. 그 당시, 3천만 원이 넘는 금액이야. 지금으로 치면 3억 원짜리 도자기인 거야. 이걸 처음 발견한 최평호 씨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정말 큰일을 했다. 지금도 그런 것을 위안하고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 그렇지 않았으면 영원히 파묻혔을지도 몰라요. 지금까지도. -최평호, 최초 신고자 ▲ 보물이 묻힌 마을 이 소식은 곧바로 마을 전체에 퍼졌어. 마을 사람들이 난리가 났어. 왜? 직접 들어봐. 그물에서 크고 작은 것 할 거 없이 잘 걸려 나왔죠. 그래서 옛날 어르신들이 우리 아버지도 그랬지만 '옛날 그릇 귀신 난다' 그래서 그걸 다 버린 거예요. -김정석, 당시 검산마을 주민 옛날부터 그 지역에서 많이 그 어부들이 고기잡이하면서 발견이 됐어요. 굉장히 많은 양이 걸려 나왔는데 심지어는 개밥그릇 또는 재떨이. 또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엿장수들 오면 엿장수하고 엿 바꿔먹고 그런 상황이었어요. -최평호, 최초 신고자 누구 집에 뭐가 있겠다, 누구 집에 가면 뭐가 있겠다, 그때 떠들썩했죠. 거기서 보물 나왔다고 하니까. -남상률, 당시 신안군청 공무원 아주 오래전부터 신안 앞바다에서 도자기들이 나왔대. 근데 어부들은 바다에서 그릇 같은 걸 건지면 바다에 던져 버렸대. 잡히라는 고기는 안 잡히고, 오히려 깨진 그릇 조각 때문에 그물이 찢어지기 일쑤였던 거야. 깨서 버리기도 하고, 개밥그릇으로 쓰기도 했대. 어쩌면 우리 집 앞마당에 있는 개밥그릇이, 몇 억 원짜리일 수도 있는 거야. 그런데 그 그릇들이 700년 전 유물일 수도 있다니, 가치가 억대일 수 있다니, 난리가 나겠어 안 나겠어? 작고 조용하던 이 마을에, 소용돌이가 치기 시작해. ▲ 도굴꾼의 등장 이 일이 있고 약 9개월 후인 1976년 10월. 이번엔, 목포경찰서야. 40대 조모 씨라는 사람이 조사를 받고 있어. 도자기, 접시, 이런 것들을 도굴해 비싼 값에 팔다가 검거된 거야. 근데 들어보니까, 신안 앞바다에서 도굴을 했대. 이 조 씨가 도굴했다는 유물, 한두 개가 아냐. 총 117점, 당시 돈으로 5억 원 이상이었어. 조 씨는 유물 하나에 500만 원을 넘게 받았대. 그리고 조 씨는 경찰에 이렇게 말했어. 아따, 그 최 씨 말이요. 신고하고서 포상금 쥐꼬리만큼 받았다는데, 그럼 거 팔아 재끼는 게 낫지, 누가 신고한답니까? 당시 유물 최초 신고자 최평호 씨에게 지급된 포상금 금액은, 36만 5천250원이었어. 도굴꾼이 팔던 금액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금액이긴 하지. 사실 원래 포상금은 100만 원이었어. 그런데, 신안 앞바다라는 국유지에서 나온 유물이라 절반은 국가에 반납해야 했던 거야. 100만 원의 절반 50만 원, 그리고 나머지는 세금이었어. 그 100만 원도 어떻게 됐냐 하면, 국가 수면이기 때문에 국가에서 50% 본인한테 50%. 그 50만 원도 다 나오는 것이 아니고 그 불로소득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세금 떼고 얼마가 나왔냐 하면 36만 5천250원. -최평호, 유물 최초 신고자 신고하면 약 36만 원, 몰래 팔면 500만 원이야. 물론, 이걸 돈으로 비교할 수는 없어. 이건 역사적 가치가 있는 유물이니까. 이대로 도굴을 하게 둬서는 안 돼. ▲ 보물을 찾는 사람들 그래서 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해. 바로 문화재관리국. 지금으로 치면 국가유산청, 얼마 전까지 문화재청으로 불리던 곳이야. 당시 문화재관리국은 이미 유물 발굴작업으로 큰 성과를 얻은 적이 있어. 5년 전인 1971년, 백제 25대 무령왕릉에서 국보급 유물을 발굴한 적이 있어. 1973년에는 경주 천마총에서 유물 11,526점을 발굴하는 데 성공했어. 유물에 있어서는 우리나라 최고의 전문가들이지. 1976년 10월 27일, 신안 해저 유물 발굴단은 유물이 나온다는 신안 도덕도 앞바다로 갔어. 눈앞에, 넓은 신안 앞바다가 펼쳐졌어. 그런데 이거 너무 막막해. 왜였을까? 직접 들어봐. 발굴단을 문화재관리국에서 하려니까 인재가 없어요. 우리가 수중고고학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단 말이에요. 책으로만 봤지. 배에 나가서 수중고고학 할 사람이 없거든 우리나라에. -이호관, 당시 문화재관리국 발굴 부장 아까 말한 무령왕릉, 천마총은 전부 육지에 있잖아. 바다에서 발굴작업을 해본 경험이 전혀 없는 거야. 게다가, 잠수 장비도 없어. 조사단은 어딘가에 도움을 요청했어. 바로 SSU, 해군 해난구조대였어. SSU는 말 그대로 해상 사고 나면 처리해 주는 그런 구조대입니다. 유물 발굴요? 부대 내에서는 그런 건 없죠. 없는데 정부에서 출동 공문이 내려오면 위에서 검토해서, 저희 부대로 지시가 내려옵니다. 군인들이야 위에서 명령 내려오면 뭐 이유불문이죠. 무조건 그냥 출동, 쫓아나가는 거죠. -이복성, 당시 SSU 잠수부 SSU 부대가 신안 앞바다에 도착했어. 3천톤급 함정 'TA3함'을 타고 온 해군들이 고무보트로 옮겨 탔어. 온갖 전문 잠수 장비들에, 수중에서 쓸 수 있는 카메라도 한가득 가져왔어. 그렇게 문화재 전문가, 베테랑 잠수부로 구성된 특수부대원이 한자리에 모였어. 우리나라 최초 수중유물발굴단인, '신안 해저 유물 발굴단'이 탄생했어. 이거 완전 어벤져스야. ▲ 신안 해저 유물 발굴단 근데 기대와 달리, 시작하기 전부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슈트 갈아입고 물 보면, 아이고 저거 정말.. 이런 생각이 들거든요. 겁이 좀 나요. 서해안 쪽은 특히 유속이 빠르다 보니까 펄이 일어나서 아무것도 안 보여서 그런 걸 걱정을 하면서 갔었어요. 시야도 없고 유속이 빠르니까, 줄 놓쳤다 하면 완전히 실종이죠. 못 찾는 거예요. 그냥 어디로 뜨는지도 모르고요. 그 당시 저도 한 6년 이상 다이빙을 한 상태인데도, 겁이 나더라고요 솔직히. -이복성, 당시 SSU 잠수부 신안 앞바다는 바닥이 펄이야. 바로 코 앞도 안 보여. 손을 뻗으면 자기 손도 안 보일 정도야. 게다가 조류가 너무 세. 그래서 하루에 두 번, 밀물과 썰물이 바뀔 때 바다가 잠깐 멈추는 단 한 시간, '정조시간'을 노려야 해. 그리고 서클라인을 이용해 수색하기로 했어. 먼저 굵은 밧줄에 큰 돌을 묶어 부표를 띄워. 그 밧줄을 잡고 천천히 물속으로 내려가. 바닥에 도착하면 또 다른 밧줄을 큰 돌에 묶고, 반대쪽을 자기 몸에 묶어. 그렇게 이 큰 돌을 중심으로 사람이 원을 그리면서 일일이 손으로 바닥을 수색하는 방법이야. 만약에 작업 도중에 밧줄을 놓치면, 그대로 떠내려 가는 거야. 큰일 나죠. 어떻게든 실수로 줄을 놓쳤다면, 유속 빠르고 떠내려가면 끝나는 겁니다. -이복성, 당시 SSU 잠수부 잠수부들이 탄 고무보트 위에는 긴장감이 가득해. 한번 잠수할 수 있는 시간은 단 20분. 그 안에 반드시 보물을 찾아야 해. 드디어 첫 번째 잠수부가 바다 아래로 들어갔어.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다시 바다 위로 올라온 잠수부는 빈 손이었어. 빠른 조류와 코 앞도 안 보이는 시야도 문제지만, 정작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던 거야. 저 넓은 바다에 어디에 보물이 있는지 위치를 전혀 모르는데, 어떻게 맨손으로 찾겠어. 해군이 굉장한 장비를 갖췄다고 하는 군함들이 와서 다이버들이 들어갔는데 못 찾았어요. -이호관, 당시 문화재관리국 발굴 부장 다들 머리를 맞대고 다른 방법을 찾기 시작했어. 이들은 고민 끝에, 어디론가 급하게 전화를 했어. 그리고 한참 뒤, 급하게 차 한 대가 도착했어. 차에서 한 남성이 내리는데, 그의 손엔 수갑이 채워져 있어. 앞서 잡혔던 도굴꾼, 조 씨였어. 최후의 방법으로, 도굴꾼에게 자문을 구해보자 했던 거야. 이건 안 되겠다, 그러면 도굴꾼을 데리고 와라. 그래서 현장에 데리고 왔지. 수갑 찬 채로 데리고 왔어요. -이호관, 당시 문화재관리국 발굴 부장 일단 유물 발굴이 최우선이니, 도굴꾼의 도움이라도 받으려 한 거야. 설득 끝에, 조 씨도 유물 발굴에 협조하기로 했어. 그렇게 최고의 문화재 전문가들과 최고의 특수부대, 그리고 전문 도굴꾼까지 한 배를 타고 다시 바다로 떠났어. ▲ 보물의 발견 도굴꾼 조 씨는 함장 옆에 서서 먼 하늘만 바라보고 있어. 해군이 가져온 최첨단 장비들은 쳐다보지도 않아. 그러면서 이리저리 가라고 지시하는 거야. 한 시간 움직였나? 갑자기 도굴꾼이 이래. 여기, 여기에 부표 띄우쇼 대충 눈짓으로 보더니, 갑자기 부표를 띄우라는 거야. 어떻게 아는 거냐 물으니, 하늘의 별을 보면 딱 알 수 있대. 이 말, 믿을 수 있겠어? 근데, 달리 방법이 없어. 의심 반 기대 반으로, 도굴꾼이 짚어주는 세 곳에 부표를 내렸어. 일단 첫 번째 포인트에 해군 잠수부가 들어갔어. 그런데 실패. 못 찾았어. 이번엔 다른 부표에서, 두 번째 팀이 잠수했어. 그런데 또 실패야. 그러자 배 위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어. 이래서 사기꾼 말을 믿을 수가 있나. 그놈 나중에 출소해서 또 한탕하려고 거짓말한 거 아냐? 어수선한 가운데, 마지막 부표에 세 번째 팀이 잠수를 준비했어. 이때, 이복성 중사가 들어갔어. 유속도 세고, 온통 펄밭이라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 서클라인을 연결한 후 한 손으론 줄을 꽉 잡은 채, 다른 한 손의 감각에 의해서만 유물을 찾아야 해. 이복성 중사가 주변을 더듬으며 유물을 찾기 시작했어. 세 번째 팀 우리가 들어갔을 때, 안 보이니까 눈으로는 볼 수가 없고요. 눈 감은 상태죠. 손을 쭉 펄을 누르면서 훑으면서 쭉 가다 보니까, 술잔 비슷한 접시 같은 동그란 게 잡히더라고요. 이제 잡히니까 이거 같다라고 딱 감이 잡히더라고요. -이복성, 당시 SSU 잠수부 곧바로 손에 든 물건과 함께, 바다 위로 올라갔어. 이복성 중사가 바다 위로 솟구치자 그 순간, 배 위에 있던 사람들이 소리치기 시작했어. 이게 바로 그때 찍힌 사진이야. 발굴단이 최초로 발견한 유물. 연꽃무늬가 그려진 약 700년 전 원나라 접시야. 진짜 말로 표현 못할 정도로 너무 기분 좋았죠. 야 내가 유물을 건졌어? -이복성, 당시 SSU 잠수부 근데, 아직 놀라긴 일러. 그 이후에도 잠수부들이 들어갔는데, 들어가기만 하면 손에 도자기든 접시든 뭐든 잔뜩 들고 나오는 거야. 그러면서 하는 말이, 여기 한두 점 있는 게 아니래. 다이버들이 들어가서 확인하니까 무진장이라는 거예요. 무진장. -이호관, 당시 문화재관리국 발굴 부장 그때는 다들 몇 개씩 들고 올라왔습니다. 두 번째 할 때는. 여기가 틀림없이 그 자리라고 하니까, 전부 다 열심히 했겠죠. 그러다 보니까 항아리도 들고 올라오고. -이복성, 당시 SSU 잠수부 바닷속에서 보물들이 계속해서 올라왔어. 그렇게 발굴단은 10월부터 총 32일 동안 발굴작업을 했어. 그리고 약 2천 점의 유물을 건져 올렸어. 다이버들이 놀랬지. 도굴꾼 말을 들을 수 있나? 그래도 들어가 보자, 한 건데.. 들어가 보니, 있다… -이호관, 당시 문화재관리국 발굴 부장 아직도 바닷속엔 수많은 유물이 잠들어 있어. 하지만, 발굴 작업을 여기서 멈출 수밖에 없었어. 작업하는 사이 겨울이 찾아왔거든. 겨울에 잠수하는 건 무리야. 또 다른 문제는, 작업 가능한 시간이 너무 짧아. 바다의 유속과 날씨까지 모두 고려해 보면, 신안 앞바다에서 안전하게 작업할 수 있는 기간은 1년에 한 달 정도야. 그리고 하루 중에 작업 가능한 '정조 시간'. 정조 시간은 하루에 2번, 하지만 이것도 어두운 밤일 땐 잠수를 할 수가 없어. 그러니까 일 년에 약 한 달, 그리고 하루에 한 시간 남짓만 안전하게 작업을 할 수 있는 거야. ▲ 700년 만에 나온 보물 본격적인 유물 발굴 작업은 그다음 해인 1977년에 다시 시작했어. 신안 바다는 도깨비방망이처럼 유물들을 쏟아냈어. 바다에서 나온 유물들, 한 번 봐봐. 접시에 항아리, 장식품까지 종류도 다양해. 어떻게 이 보물들이 형태를 그대로 보존할 수 있었을까. 바닷속에 있는 펄, 그 펄층에 가라앉아서 부식이 되지 않고 보존되어 있었던 것 같고요. 그리고 도자기 같은 경우는 워낙 강한 불에 구워졌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강도가 세고, 특히 유약까지 입혀서 훼손되지 않고 보존이 잘 되었던 것 같습니다. -장성욱 학예연구사, 국립중앙박물관 거기엔 청자, 그릇 말고도, 별에 별 것들이 쏟아져 나왔어. 700년 전 중국에서 쓰던 주사위, 바둑알, 장기말 등. 특히 엽전만 무려 800만 개, 28톤이나 되는 양이 나왔대. 이 외에도 온갖 향신료, 비싼 목재 이런 것들이 쉴 새 없이 나왔어. 자, 그럼 궁금하지 않아? 대체 이 신안 앞바다에서 왜 이런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는 걸까? 그때, 발굴 현장에 있던 이호관 발굴부장이 해군잠수부에게 이런 얘기를 들었어. 웬 유물이 이렇게 많이 나오냐는 의심은 했지만 이렇게 한 군데서 많이 나올 수가 없단 말이야. 이게 뭔가 좀 이상하다 했는데. 다이버들이 '배가 있습니다' 놀랐지 우리는. 배가 있다니. 그 펄 바닥에 배가 아직 살아있다니. 이게 믿어지질 않지. 몇 백 년이 지났는데. 펄에 묻혀있는 바람에 배가 남았어. -이호관, 당시 문화재관리국 발굴부장 바다 아래에, 배가 있다는 거야. 그러니까 전설로만 들었던 보물선이, 대한민국 바다에 실존하고 있었던 거야. ▲ 바닷속 보물선 대체 이 배의 정체가 뭘까? 바다 아래서 건진 것 중에, 이런 게 있었어. 청동 저울추. 배에 걸어놓는 저울 추래. 잘 보면, 한자로 '경원로'라고 적혀있어. '경원'은 중국 저장성의 '닝보'라는 지역이야. 당시 원나라의 주요 무역도시였어. 이 배가 중국 닝보에서 출발한 무역선이었던 거야. 이건 뭘 것 같아? 종이가 없던 시절, 나무에 글씨를 쓴 건데, 이걸 '목간'이라고 해. 첫 번째 목간을 보면, 한자로 '지치 3년'이라고 쓰여있어. 이건 중국 원나라 연호로, 서기 1323년이라는 뜻이야. 그리고 다른 목간을 보면, 한자로 '동복사', 그리고 '조적암'이라고 적혀있어. 바로 일본에 있는 절 이름이야. 이 배가, 일본을 오가던 무역선이라고 추측할 수 있겠지. 바다에서 나온 도자기와 그릇들, 모두 일본으로 보낼 무역품이었던 거야. 당시 일본에서 중국 도자기가 인기가 많았대. 그럼 일본으로 가던 배가, 왜 신안 앞바다에서 침몰했을까? 이 부분에 대해선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일본으로 가던 중 태풍을 피하려다 신안 앞바다에서 좌초됐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대. 정리를 해보자면 이래. 1323년, 중국 닝보에서 도자기, 청자 등 무역품들을 싣고 가던 원나라 무역선이 일본으로 가던 중, 신안 앞바다에서 침몰한 거야. 게다가 어느 날 동네 주민이 허겁지겁 오더니 이런 걸 보여주더래. 배가 정박할 때 쓰는 닻. 4년 전 그 어부가 닻을 건져 올렸는데, 어장의 그물추로 사용하다가 발굴단에 신고한 거야. 근데 이 닻의 크기가 엄청 커. 길이만 2m 20cm, 무게는 300kg. 이걸로 볼 때, 배의 길이만 최대 34m, 당시 적재량 200톤이 넘었을 거라 추정돼. 엄청 큰 배야. 발굴단은 유물을 찾으면서, 배를 인양할 계획을 세웠어. 먼저 유물이 나오는 포인트에 철제로 만든 그리드라는 걸 설치해. 그리드에 번호를 매겨서 유물들의 위치를 기록한 뒤, 부서진 배의 조각을 하나씩 연결하는 거야. 그렇게 발굴단의 발굴작업은 1984년까지, 9년에 걸쳐 이뤄졌어. 힘들었던 발굴 과정. 그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건, 뱃멀미였다고 해. 사람이 노래져요. 멀미 때문에. 그 파도가 넘실거리는 데서 작업을 하는 거예요. -이호관, 당시 문화재관리국 발굴부장 또 펄과 조개껍데기 투성이었던 유물들을 일일이 손으로 씻어내느라 항상 온몸이 지저분했대. 저 같은 경우는 이제 그 유물을 펄이 묻었으니까 펄을 먼저 세척한 다음에 유물을 분리하고 하는 작업을 하는 거죠. 유물 발굴을 하면서 느끼는 것은, 상당히 청자가 빛깔이 좋아요. 그래서 그걸 보고 상당히 감탄을 했죠. -강신태, 당시 문화재관리국 소속 직원 그 배에서 무려 2만 4천여 점의 유물을 발굴했어. 한 장소에서, 이렇게 많이 유물이 발견된 건 세계적으로 이례적이래. 세기의 발견이자, 엄청난 성과를 이룬, 최초 해저 유물 발굴인 거지. 그 당시에는 정말 꿈같은 일을 해냈구나 라는 생각 들고. 내가 근무하던 그 부대에서 이렇게 큰 일을 했기 때문에 부대도 자랑스럽기도 하고 그랬었습니다. -이복성, 당시 SSU 잠수부 문화재에 대한 애정과 사명감이 없으면 이건 할 수가 없어요. -강신태, 당시 문화재관리국 소속 직원 공무원으로서 학예직으로서 내게 놓인 일을 한 것뿐이죠. 유문 있으면 됐지 뭐. 그냥 그것뿐이지. 추억이지. -이호관, 당시 문화재관리국 발굴부장 ▲ 보물을 훔치는 사람들 그렇게 발굴이 마무리되던 1984년, 강신태 반장에게 긴급하게 연락이 한 통 왔어. 전화가 온 곳은 문화재관리국 사범단속반. 문화재 도난이나 도굴 사건을 수사하는 전담 부서야. 누군가 문화재를 암거래하려고 한다는 첩보였어. 근데 그 문화재가, 바로 신안 유물이라는 거야. 강신태 반장이 신안 유물 발굴을 담당했으니, 감정 요원으로 함께 가 달라는 거야. 밀매꾼들, 어떻게 잡아야 할까? 강신태 반장은, 덫을 놨어. 구매자인 척, 밀매꾼에게 접근한 거야. 종로에 있는 한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고 약속한 날, 커피숍에서 기다리고 있었어. 얼마나 지났을까, 저 멀리서 남성 두 명이 두리번 두리번 대며 걸어오는 거야. 딱 봐도, 그놈들이야. 광주에서 판매책 2명이 올라온 거였어. 이들과 대면한 강신태 반장이 입을 열었어. 아이고, 식사는 하셨고? 그래서 어떻게... 물건은? 그랬더니 남성 한 명이, 주머니에서 뭔가를 쓱 꺼냈어. 신안 유물, 맞았을까? 사진을 보여주는데 보니까 이제 신안 유물이 맞아. 그래서 이건 얼마나 요구를 하느냐 몇 점 있냐니까, 한 30점 있는데 한 1억 5천만 원 된다는 거야. -강신태, 당시 문화재관리국 소속 직원 30점을 1억 5천 만원에 팔겠대. 강신태 반장은 유물을 직접 보고 사겠다고 했어. 그랬더니 그 유물들, 광주에 있대. 곧바로 강신태 반장은 밀매꾼들과 함께 광주로 내려갔어. 일당들은 강신태 반장을 광주의 한 호텔로 데려갔어. 밤 9시쯤 됐나? 호텔 방문이 열리더니, 한 남성이 들어와. 딱 보니까 이놈이 바로 주범 같아.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테이블에 올려놨어. 가방에서 꺼낸 건 신안 유물 3점. 그걸 본 강신태 반장은 범인들에게 이거 가지고는 택도 없다. 이건 뭐 돈 안 나가는 거다. 1억 5천만 원짜리 거래를 하면서 장난할 수가 있느냐 라며 화를 냈어. 그러자 범인들이 내일 아침에 만나자며 자리를 떠났어. 그리고 다음 날 아침 10시. 근처에서 다시 주범을 만나기로 했어. 강신태 반장이 일당들의 차를 타고 이동하는데, 차를 타고 주변을 계속 빙글빙글 돌기만 하는 거야. 누가 주변에 있나, 따라오는 사람이 있나, 감시하는 거지. 이윽고, 이들은 또 다른 호텔에 들어갔어. 근데 이 주범이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도 안 나타나. 강신태 반장,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해.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던 그때, 문이 탁 열리더니, 주범이 모습을 드러냈어. 그 순간! 꼼짝 마, 경찰이다! 근처에 있던 경찰이 방 안으로 들이닥쳤어. 강신태 반장은 딱 주범만 노렸어. 딱 들이닥치니까 후닥딱 이제 튀는 거지. 그래서 나는 안 되겠다 그래가지고 주범, 유물 가져온 놈만 딱 잡 은 거지. 난 오직 이 친구만 잡으면 유물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일을 한 거죠. 그래서 머리 뒤를 잡고 뒤에 허리띠를 잡은 거예요. 잡고는 얼마나 힘이 센지, 나도 힘이 세지만. 5층부터 1층까지 같이 굴렀어요. -강신태, 당시 문화재관리국 소속 직원 강신태 반장은 주범을 향해 몸을 던졌어. 그리고 주범의 손에 드디어 수갑을 채웠어. 그렇게 일당 세 명을 체포하고, 이들이 가지고 있던 신안 유물 32점을 회수했어. 이건 전부, 신안 유물을 훔쳐서 팔다가 검거된 '신안 유물 도굴 사건'을 정리한 거야. 그런데 날짜를 보면, 좀 묘해. 모두 국가가 발굴 작업을 하던 그 기간에 일어난 일이야. 바다에 발굴단과 특수부대 요원까지 있었는데도 도굴을 했던 거야. 처음에 유물을 신고했던 최평호 씨, 기억나? 신고한 뒤부터 근무지로 그를 찾는 전화가 계속 왔대. 돈을 줄 테니, 유물이 나오는 위치만 알려달라면서. ▲ 발굴단 vs 도굴꾼 당시 문화재관리국에선 발굴 지역 2km 반경을 항해 금지구역으로 정했어. 인근에는 감시 초소까지 설치됐어. 초소에서 교대로 24시간 동안 감시를 했어. 바다 위에서 발굴단이 파도와 전쟁을 하고 있을 때, 육지에서는 도굴꾼들과 전쟁을 하고 있었던 거야. 도굴꾼은 팀을 어떻게 꾸릴까? 먼저 물주가 팀원을 모집해. 바닷길을 잘 아는 주민, 경력이 많은 잠수부 등으로. 그럼 감시를 피해 바다로는 어떻게 나갈까? 이들은 모터 소리가 나지 않는 배까지 직접 만들었어. 처음에 발굴단은 유물이 가라앉은 위치를 알아내려고 애를 먹었잖아. 그럼 도굴꾼들은 유물을 어떻게 찾았을 것 같아? 사실 이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어. 발굴단이 표시해 놓은 그리드 부표가 딱 있었거든. 고생할 필요도 없이 그것만 딱 들어가면 바로 유물 위치가 나오니깐. 그냥 장님이 눈 감고 들어가 건지다시피 했죠. -이호관, 당시 문화재관리국 발굴부장 부표에 도착하면, 은밀하게 잠수를 시작해. 신안 바다 물속은 유속도 빠르고, 도굴하는 시간이 밤이라 앞은 더 깜깜해.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악으로 깡으로 도굴하는 거야. 그렇게 목숨을 걸고 훔친 도굴품을 누군가는 비싼 값에 팔았고, 누군가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 은밀하게 숨겨놨어. 그 뒤로 문화재 사범단속반에서 쭉 일하게 된 강신태 반장은 경찰 검찰과 합동 수사를 하며, 신안 유물 도굴꾼들을 잡는 데 사활을 걸었어. 근데, 그의 수사방법이 대단했어. 그에게 이런 전화가 와. 아유 반장님, 접니다. 왜 그때 광주에서 잡혔다가 얼마 전에 나온 놈 있잖아요. 걔 이번에 또 작업 들어간다네? 강신태 반장이 잡았던 밀매꾼 중 한 명이 이렇게 정보를 알려주는 거야. 어떻게 된 일일까? 직접 들어봐. 그 친구와 차 타고 가면서 대화를 해보니까 대화가 통하는 친구더라고. 그래서 '이제는 이걸 없애야 되지 않느냐' 했더니, 자기도 이번 기회에 많은 걸 느꼈다, 수사에 또 협조하겠다 그래. 그래 검사하고 약속을 해서 구속을 안 하고 불구속했죠. 그다음에 정보를 주기 시작한 거죠. 내가 단속반에 갔더니 정보가 오는 거예요. 이런 정보가 없으면 안 되죠. 그게 수사의 기법이에요. -강신태, 당시 문화재관리국 소속 직원 이게 보니까, 서로 다 연결이 돼 있어. 그래서 한 명을 잡으면 줄줄이 잡혀. 그런데, 아무리 일망타진을 해도, 암거래한다는 첩보가 계속 들려와. 도굴꾼들의 일종의 '보험' 때문이야. 1980년, 광주에서 수상한 소문이 하나 돌았어. 2년 전, 신안 유물을 도굴해서 팔다가 검거된 이 씨 형제가 있는데, 그 형이 출소한 뒤부터, 동생의 장인 집, 그러니까 사돈집을 매일 들락날락한다는 거야. 사돈집에 매일 갈 이유가 뭐가 있을까? 뭔가 일을 꾸미는 것 같지? 그래서 형사들이 사돈집에 온 이 씨를 덮쳤어. 그런데 이 씨가, 형사들을 보자 오히려 하소연을 하는 거야. 형사님, 제발 저 좀 도와주십쇼, 내가 이놈의 유물인지 고물인지 때문에 아주 돌아가시겄소. 들어보니까 이래. 같이 도굴하다 잡힌 동생이 먼저 출소했는데, 그때 형한테 훔친 유물들을 잘 숨겨놨다고 말했대. 그리고 몇 달 뒤 형이 출소를 했는데, 큰 문제가 생겼어. 글쎄 동생이 사망한 거야. 팔아넘긴 유물 값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화병으로 사망했대. 그럼 형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해? 그걸 찾아야지.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동생이 숨겼다는 유물을 못 찾은 거야. 결국 찾다 찾다, 동생의 장인 집까지 왔던 거지. 그때부터 형사들이, 이 형과 함께 동생의 처갓집을 뒤지기 시작했어. 경찰은 집을 샅샅이 뒤지기로 했다. 유물이 상하지 않도록 도굴꾼들이 사용하는 쇠꼬창이로 땅속을 찔러갔다. 6시간에 걸친 수색 끝에 여기다 하는 함성이 터졌다. 헛간 잿더미 밑바닥에서 청자접시 90점 등 2백40점의 송원대 유물이 가마니에 싸인 채 묻혀 있었다. -당시 기사 내용 中 이뿐만이 아니야. 근처 유채밭 한복판에 묻힌 220점의 유물을 또 발견했어. 이때 회수한 유물만 460점이 넘었대. 이런 식으로 도굴꾼들은, 도굴한 유물을 여러 군데 묻어두고 필요할 때 꺼내서 팔아먹은 거야. 마치 적금이나 보험처럼. 이런 식으로 검거된 도굴꾼은 300여 명이었어. ▲ 모두의 보물 도굴범으로부터 회수한 유물만, 무려 2천 점이 넘는대. 발굴품과 도굴품까지, 신안 앞바다에서 모두 2만 6천여 점의 유물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어. 그 보물들, 지금은 어디 있을까? 박물관의 철통보안 속에, 잘 보관돼 있어. 현재는 국립광주박물관에 있대. 신안해저유물은 발굴 이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지속적으로 관리를 해왔고요.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서 전시, 보존, 관리 중에 있습니다. -장성욱,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사 신안해저유물은 수중고고학의 처음, 효시가 되었는데요. 이 효시를 기반으로 해서 그다음부터 우리나라의 수중고고학의 발전, 그리고 조사를 위한 토대가 마련되었고요. 내 눈앞에 있는 손도 식별이 안되는 곳에서 잠수하는 기술은 우리나라가 제일 뛰어난 수준이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장성욱,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사 모두가 힘쓴 덕분에, 신안 앞바다에서 건져 올린 유물들은 이제 우리가 원하면 언제나 볼 수 있는 소중한 보물로 빛나고 있어. 아마 이건 그 어떤 화폐로도 값을 매길 수 없을 거야. 1984년도, 신안 발굴작업이 끝나고도 도굴한 신안 유물을 밀매하는 사건은 계속 발생했어. 언제까지 사건이 있었을 것 같아? 마지막 사건이, 바로 2019년. 불과 6년 전이야. 30년이 넘게 신안 유물 57점을 보관하다가, 일본에 반출하려던 남성이 또 검거된 거야. 피의자는 30여 년 동안 자택과 친척 집에서 유물들을 보관하다가 사회적으로 신안 유물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다고 판단되자 지난해 8월부터 국내와 일본에서 밀매를 시도했습니다. -2019년 뉴스 보도 中 역사를 증명하는 문화재가 살아있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도 있는 걸 거야. 그런 문화재를 소중히 보호하는 건, 국민으로서 지켜야 할 권리이지 않을까.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
[꼬꼬무 찐리뷰] 신안 앞바다서 건진 3억 짜리 도자기…그곳에 700년 전 침몰된 보물선이 있다 [꼬꼬무</font> 찐리뷰] 신안 앞바다서 건진 3억 짜리 도자기…그곳에 700년 전 침몰된 보물선이 있다 등록일2025.01.03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2일 방송된 '보물을 찾는 사람들-1976 신안 보물선'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가수 겸 배우 이준호, 배우 김국희, 그룹 오마이걸 멤버 유빈이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신안 앞바다서 건진 도자기 때는 50년 전인, 1976년 1월이야. 전라남도 신안군에 있는 검산마을. 몇 명의 어부들이 사는, 작고 조용한 마을이야. 목포의 한 초등학교 교사였던 최평호 씨는 오랜만에 고향인 검산마을에 갔어. 형제들이 아버지 묘를 벌초하기로 했거든. 벌초를 마친 후 고향에 있는 셋째 형님 집에 모였어. 오랜만에 만난 형제들이 모여 회포를 풀고 있는데, 갑자기 형님이 이런 말을 하는 거야. 아 거시기 말여, 내가 얼마 전에 물질을 하다가 뭘 하나 건졌는데, 그것이 꽤 볼만하단 말여. 시방 함 보여줘야 쓰겄네. 그러면서 형님이 가져온 건 이거였어. 형님이 집 앞에 있는 바다에서 고기를 잡다가 건졌다는 거야. 높이 44cm, 둘레가 65cm나 되는 큰 청자였어. 보니까 색깔도 좋고, 무늬도 너무 예뻐. 근데 최평호 씨가 가만 보니까, 이거 왠지 예사롭지가 않아. 암만 봐도, 그냥 도자기가 아닌 것 같아. 최평호 씨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도자기를 목포 집으로 가져갔어. 집에 모셔놓고 보니까, 이거 볼수록 엄청난 작품 같아. 최평호 씨는 이 도자기를 들고 목포시청으로 갔어. 시청 공보실에 가면 혹시 무슨 단서를 찾을 수 있을까 싶어서 갔어요. 갔더니 공보실에서도 전혀 감감하더라고요. -최평호, 당시 국민학교 교사 그런데 목포 시청에도 문화재 담당자가 없대. 아쉬운 대로, 신고서라도 쓰고 가기로 했어. 그런데 신고 서식 양식이란 것도 딱히 없어. 그래서 최평호 씨가, 신고 양식을 직접 손으로 그려가며 신고서를 작성했어. 근데 직원이 신고서를 보더니, 신안에서 건진 거면 거기다가 신고해야 한다며, 기껏 가져왔는데 신안으로 다시 가져가라는 거야. 하는 수 없이 최평호 씨는, 도자기를 가지고 다시 신안군청으로 갔어. 거기선 뭐라고 했을까? 신안군청에서 하는 이야기가 신안군 안전면에서 밭갈이를 하다가 돌도끼를 하나 발견했는데, 서류가 왔다 갔다 한 것이 200매가 왔다 갔다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보상금이 얼마가 나왔냐면, 500원이 나왔대요, 그때 돈으로. 500원이 나왔는데 그 왕복 선비가 700원이래요. 그래서 안 찾아가고 포기를 했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제발 좀 신고 안 했으면 쓰겠습니다' 그런 이야기예요. 신안군청에서 하는 이야기가. -최평호, 당시 국민학교 교사 최평호 씨는 포기하지 않고 사정사정했어. 그때, 신안 군청에 근무하던 남상률 씨가 그 도자기를 본 거야. 보니까, 남상률 씨도 이 도자기에 대해 궁금해져. 남상률 씨는 그 도자기를 받아서, 광주에 있는 국립박물관에 감정을 의뢰했어. 최평호 씨가 어느 날 가져왔는데, 저것이 몇 년도 유물인지도 모르고 이제 그랬는데. 그분도 오셔서 내 기억으로는 가지도 않고. 우리보다 더 귀하게 얘기하더라고 신기하게. 그래서 달라고 해서 우리가 확인서 받아 놓고 광주에 있는 국립박물관으로 가지고 갔어요. 학예사한테 감정의뢰를 맡긴 겁니다. -남상률, 당시 신안군청 공무원 그리고 일주일 후, 이 도자기의 정체가 밝혀졌어. 감정 결과, 이건 고려청자가 아니었어. 그럼, 뭐였을까? 자, 여기에 답이 있어. 지난 1월 9일 전남 신안군에서 고기잡이를 하다 대형 청자를 하나 건져냈는데, 이 청자가 국제 시세로 10여만 달러에 상당하는 원나라 청자라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당시 신문 기사 내용 中 고려청자가 아니라, 700년 전 중국 원나라 때 청자였던 거야. 한 일주일 있다가 송원대 유물이라고 판명돼서 온 거예요. 그러니까 보물이라고 해서 저희들이 깜짝 놀랐죠. 이렇게 귀한 것이 나온다고. -남상률, 당시 신안군청 공무원 무려 시가 10만 달러로 추정돼. 그 당시, 3천만 원이 넘는 금액이야. 지금으로 치면 3억 원짜리 도자기인 거야. 이걸 처음 발견한 최평호 씨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정말 큰일을 했다. 지금도 그런 것을 위안하고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 그렇지 않았으면 영원히 파묻혔을지도 몰라요. 지금까지도. -최평호, 최초 신고자 ▲ 보물이 묻힌 마을 이 소식은 곧바로 마을 전체에 퍼졌어. 마을 사람들이 난리가 났어. 왜? 직접 들어봐. 그물에서 크고 작은 것 할 거 없이 잘 걸려 나왔죠. 그래서 옛날 어르신들이 우리 아버지도 그랬지만 '옛날 그릇 귀신 난다' 그래서 그걸 다 버린 거예요. -김정석, 당시 검산마을 주민 옛날부터 그 지역에서 많이 그 어부들이 고기잡이하면서 발견이 됐어요. 굉장히 많은 양이 걸려 나왔는데 심지어는 개밥그릇 또는 재떨이. 또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엿장수들 오면 엿장수하고 엿 바꿔먹고 그런 상황이었어요. -최평호, 최초 신고자 누구 집에 뭐가 있겠다, 누구 집에 가면 뭐가 있겠다, 그때 떠들썩했죠. 거기서 보물 나왔다고 하니까. -남상률, 당시 신안군청 공무원 아주 오래전부터 신안 앞바다에서 도자기들이 나왔대. 근데 어부들은 바다에서 그릇 같은 걸 건지면 바다에 던져 버렸대. 잡히라는 고기는 안 잡히고, 오히려 깨진 그릇 조각 때문에 그물이 찢어지기 일쑤였던 거야. 깨서 버리기도 하고, 개밥그릇으로 쓰기도 했대. 어쩌면 우리 집 앞마당에 있는 개밥그릇이, 몇 억 원짜리일 수도 있는 거야. 그런데 그 그릇들이 700년 전 유물일 수도 있다니, 가치가 억대일 수 있다니, 난리가 나겠어 안 나겠어? 작고 조용하던 이 마을에, 소용돌이가 치기 시작해. ▲ 도굴꾼의 등장 이 일이 있고 약 9개월 후인 1976년 10월. 이번엔, 목포경찰서야. 40대 조모 씨라는 사람이 조사를 받고 있어. 도자기, 접시, 이런 것들을 도굴해 비싼 값에 팔다가 검거된 거야. 근데 들어보니까, 신안 앞바다에서 도굴을 했대. 이 조 씨가 도굴했다는 유물, 한두 개가 아냐. 총 117점, 당시 돈으로 5억 원 이상이었어. 조 씨는 유물 하나에 500만 원을 넘게 받았대. 그리고 조 씨는 경찰에 이렇게 말했어. 아따, 그 최 씨 말이요. 신고하고서 포상금 쥐꼬리만큼 받았다는데, 그럼 거 팔아 재끼는 게 낫지, 누가 신고한답니까? 당시 유물 최초 신고자 최평호 씨에게 지급된 포상금 금액은, 36만 5천 250원이었어. 도굴꾼이 팔던 금액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금액이긴 하지. 사실 원래 포상금은 100만 원이었어. 그런데, 신안 앞바다라는 국유지에서 나온 유물이라 절반은 국가에 반납해야 했던 거야. 100만 원의 절반 50만 원, 그리고 나머지는 세금이었어. 그 100만 원도 어떻게 됐냐 하면, 국가 수면이기 때문에 국가에서 50% 본인한테 50%. 그 50만 원도 다 나오는 것이 아니고 그 불로소득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세금 떼고 얼마가 나왔냐 하면 36만 5천 250원. -최평호, 유물 최초 신고자 신고하면 약 36만 원, 몰래 팔면 500만 원이야. 물론, 이걸 돈으로 비교할 수는 없어. 이건 역사적 가치가 있는 유물이니까. 이대로 도굴을 하게 둬서는 안 돼. ▲ 보물을 찾는 사람들 그래서 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해. 바로 문화재관리국. 지금으로 치면 국가유산청, 얼마 전까지 문화재청으로 불리던 곳이야. 당시 문화재관리국은 이미 유물 발굴작업으로 큰 성과를 얻은 적이 있어. 5년 전인 1971년, 백제 25대 무령왕릉에서 국보급 유물을 발굴한 적이 있어. 1973년에는 경주 천마총에서 유물 11,526점을 발굴하는 데 성공했어. 유물에 있어서는 우리나라 최고의 전문가들이지. 1976년 10월 27일, 신안 해저 유물 발굴단은 유물이 나온다는 신안 도덕도 앞바다로 갔어. 눈앞에, 넓은 신안 앞바다가 펼쳐졌어. 그런데 이거 너무 막막해. 왜였을까? 직접 들어봐. 발굴단을 문화재관리국에서 하려니까 인재가 없어요. 우리가 수중고고학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단 말이에요. 책으로만 봤지. 배에 나가서 수중고고학 할 사람이 없거든 우리나라에. -이호관, 당시 문화재관리국 발굴 부장 아까 말한 무령왕릉, 천마총은 전부 육지에 있잖아. 바다에서 발굴작업을 해본 경험이 전혀 없는 거야. 게다가, 잠수 장비도 없어. 조사단은 어딘가에 도움을 요청했어. 바로 SSU, 해군 해난구조대였어. SSU는 말 그대로 해상 사고 나면 처리해 주는 그런 구조대입니다. 유물 발굴요? 부대 내에서는 그런 건 없죠. 없는데 정부에서 출동 공문이 내려오면 위에서 검토해서, 저희 부대로 지시가 내려옵니다. 군인들이야 위에서 명령 내려오면 뭐 이유불문이죠. 무조건 그냥 출동, 쫓아나가는 거죠. -이복성, 당시 SSU 잠수부 SSU 부대가 신안 앞바다에 도착했어. 3천톤급 함정 'TA3함'을 타고 온 해군들이 고무보트로 옮겨 탔어. 온갖 전문 잠수 장비들에, 수중에서 쓸 수 있는 카메라도 한가득 가져왔어. 그렇게 문화재 전문가, 베테랑 잠수부로 구성된 특수부대원이 한자리에 모였어. 우리나라 최초 수중유물발굴단인, '신안 해저 유물 발굴단'이 탄생했어. 이거 완전 어벤져스야. ▲ 신안 해저 유물 발굴단 근데 기대와 달리, 시작하기 전부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슈트 갈아입고 물 보면, 아이고 저거 정말.. 이런 생각이 들거든요. 겁이 좀 나요. 서해안 쪽은 특히 유속이 빠르다 보니까 펄이 일어나서 아무것도 안 보여서 그런 걸 걱정을 하면서 갔었어요. 시야도 없고 유속이 빠르니까, 줄 놓쳤다 하면 완전히 실종이죠. 못 찾는 거예요. 그냥 어디로 뜨는지도 모르고요. 그 당시 저도 한 6년 이상 다이빙을 한 상태인데도, 겁이 나더라고요 솔직히. -이복성, 당시 SSU 잠수부 신안 앞바다는 바닥이 펄이야. 바로 코 앞도 안 보여. 손을 뻗으면 자기 손도 안 보일 정도야. 게다가 조류가 너무 세. 그래서 하루에 두 번, 밀물과 썰물이 바뀔 때 바다가 잠깐 멈추는 단 한 시간, '정조시간'을 노려야 해. 그리고 서클라인을 이용해 수색하기로 했어. 먼저 굵은 밧줄에 큰 돌을 묶어 부표를 띄워. 그 밧줄을 잡고 천천히 물속으로 내려가. 바닥에 도착하면 또 다른 밧줄을 큰 돌에 묶고, 반대쪽을 자기 몸에 묶어. 그렇게 이 큰 돌을 중심으로 사람이 원을 그리면서 일일이 손으로 바닥을 수색하는 방법이야. 만약에 작업 도중에 밧줄을 놓치면, 그대로 떠내려 가는 거야. 큰일 나죠. 어떻게든 실수로 줄을 놓쳤다면, 유속 빠르고 떠내려가면 끝나는 겁니다. -이복성, 당시 SSU 잠수부 잠수부들이 탄 고무보트 위에는 긴장감이 가득해. 한번 잠수할 수 있는 시간은 단 20분. 그 안에 반드시 보물을 찾아야 해. 드디어 첫 번째 잠수부가 바다 아래로 들어갔어.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다시 바다 위로 올라온 잠수부는 빈 손이었어. 빠른 조류와 코 앞도 안 보이는 시야도 문제지만, 정작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던 거야. 저 넓은 바다에 어디에 보물이 있는지 위치를 전혀 모르는데, 어떻게 맨손으로 찾겠어. 해군이 굉장한 장비를 갖췄다고 하는 군함들이 와서 다이버들이 들어갔는데 못 찾았어요. -이호관, 당시 문화재관리국 발굴 부장 다들 머리를 맞대고 다른 방법을 찾기 시작했어. 이들은 고민 끝에, 어디론가 급하게 전화를 했어. 그리고 한참 뒤, 급하게 차 한 대가 도착했어. 차에서 한 남성이 내리는데, 그의 손엔 수갑이 채워져 있어. 앞서 잡혔던 도굴꾼, 조 씨였어. 최후의 방법으로, 도굴꾼에게 자문을 구해보자 했던 거야. 이건 안 되겠다, 그러면 도굴꾼을 데리고 와라. 그래서 현장에 데리고 왔지. 수갑 찬 채로 데리고 왔어요. -이호관, 당시 문화재관리국 발굴 부장 일단 유물 발굴이 최우선이니, 도굴꾼의 도움이라도 받으려 한 거야. 설득 끝에, 조 씨도 유물 발굴에 협조하기로 했어. 그렇게 최고의 문화재 전문가들과 최고의 특수부대, 그리고 전문 도굴꾼까지 한 배를 타고 다시 바다로 떠났어. ▲ 보물의 발견 도굴꾼 조 씨는 함장 옆에 서서 먼 하늘만 바라보고 있어. 해군이 가져온 최첨단 장비들은 쳐다보지도 않아. 그러면서 이리저리 가라고 지시하는 거야. 한 시간 움직였나? 갑자기 도굴꾼이 이래. 여기, 여기에 부표 띄우쇼 대충 눈짓으로 보더니, 갑자기 부표를 띄우라는 거야. 어떻게 아는 거냐 물으니, 하늘의 별을 보면 딱 알 수 있대. 이 말, 믿을 수 있겠어? 근데, 달리 방법이 없어. 의심 반 기대 반으로, 도굴꾼이 짚어주는 세 곳에 부표를 내렸어. 일단 첫 번째 포인트에 해군 잠수부가 들어갔어. 그런데 실패. 못 찾았어. 이번엔 다른 부표에서, 두 번째 팀이 잠수했어. 그런데 또 실패야. 그러자 배 위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어. 이래서 사기꾼 말을 믿을 수가 있나. 그놈 나중에 출소해서 또 한탕하려고 거짓말한 거 아냐? 어수선한 가운데, 마지막 부표에 세 번째 팀이 잠수를 준비했어. 이때, 이복성 중사가 들어갔어. 유속도 세고, 온통 펄밭이라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 서클라인을 연결한 후 한 손으론 줄을 꽉 잡은 채, 다른 한 손의 감각에 의해서만 유물을 찾아야 해. 이복성 중사가 주변을 더듬으며 유물을 찾기 시작했어. 세 번째 팀 우리가 들어갔을 때, 안 보이니까 눈으로는 볼 수가 없고요. 눈 감은 상태죠. 손을 쭉 펄을 누르면서 훑으면서 쭉 가다 보니까, 술잔 비슷한 접시 같은 동그란 게 잡히더라고요. 이제 잡히니까 이거 같다라고 딱 감이 잡히더라고요. -이복성, 당시 SSU 잠수부 곧바로 손에 든 물건과 함께, 바다 위로 올라갔어. 이복성 중사가 바다 위로 솟구치자 그 순간, 배 위에 있던 사람들이 소리치기 시작했어. 이게 바로 그때 찍힌 사진이야. 발굴단이 최초로 발견한 유물. 연꽃무늬가 그려진 약 700년 전 원나라 접시야. 진짜 말로 표현 못할 정도로 너무 기분 좋았죠. 야 내가 유물을 건졌어? -이복성, 당시 SSU 잠수부 근데, 아직 놀라긴 일러. 그 이후에도 잠수부들이 들어갔는데, 들어가기만 하면 손에 도자기든 접시든 뭐든 잔뜩 들고 나오는 거야. 그러면서 하는 말이, 여기 한두 점 있는 게 아니래. 다이버들이 들어가서 확인하니까 무진장이라는 거예요. 무진장. -이호관, 당시 문화재관리국 발굴 부장 그때는 다들 몇 개씩 들고 올라왔습니다. 두 번째 할 때는. 여기가 틀림없이 그 자리라고 하니까, 전부 다 열심히 했겠죠. 그러다 보니까 항아리도 들고 올라오고. -이복성, 당시 SSU 잠수부 바닷속에서 보물들이 계속해서 올라왔어. 그렇게 발굴단은 10월부터 총 32일 동안 발굴작업을 했어. 그리고 약 2천 점의 유물을 건져 올렸어. 다이버들이 놀랬지. 도굴꾼 말을 들을 수 있나? 그래도 들어가 보자, 한건데.. 들어가 보니, 있다… -이호관, 당시 문화재관리국 발굴 부장 아직도 바닷속엔 수많은 유물이 잠들어 있어. 하지만, 발굴 작업을 여기서 멈출 수밖에 없었어. 작업하는 사이 겨울이 찾아왔거든. 겨울에 잠수하는 건 무리야. 또 다른 문제는, 작업 가능한 시간이 너무 짧아. 바다의 유속과 날씨까지 모두 고려해 보면, 신안 앞바다에서 안전하게 작업할 수 있는 기간은 1년에 한 달 정도야. 그리고 하루 중에 작업 가능한 '정조 시간'. 정조 시간은 하루에 2번, 하지만 이것도 어두운 밤일 땐 잠수를 할 수가 없어. 그러니까 일 년에 약 한 달, 그리고 하루에 한 시간 남짓만 안전하게 작업을 할 수 있는 거야. ▲ 700년 만에 나온 보물 본격적인 유물 발굴 작업은 그다음 해인 1977년에 다시 시작했어. 신안 바다는 도깨비방망이처럼 유물들을 쏟아냈어. 바다에서 나온 유물들, 한 번 봐봐. 접시에 항아리, 장식품까지 종류도 다양해. 어떻게 이 보물들이 형태를 그대로 보존할 수 있었을까. 바닷속에 있는 펄, 그 펄층에 가라앉아서 부식이 되지 않고 보존되어 있었던 것 같고요. 그리고 도자기 같은 경우는 워낙 강한 불에 구워졌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강도가 세고, 특히 유약까지 입혀서 훼손되지 않고 보존이 잘 되었던 것 같습니다. -장성욱 학예연구사, 국립중앙박물관 거기엔 청자, 그릇 말고도, 별에 별 것들이 쏟아져 나왔어. 700년 전 중국에서 쓰던 주사위, 바둑알, 장기말 등. 특히 엽전만 무려 800만 개, 28톤이나 되는 양이 나왔대. 이 외에도 온갖 향신료, 비싼 목재 이런 것들이 쉴 새 없이 나왔어. 자, 그럼 궁금하지 않아? 대체 이 신안 앞바다에서 왜 이런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는 걸까? 그때, 발굴 현장에 있던 이호관 발굴부장이 해군잠수부에게 이런 얘기를 들었어. 웬 유물이 이렇게 많이 나오냐는 의심은 했지만 이렇게 한군데서 많이 나올 수가 없단 말이야. 이게 뭔가 좀 이상하다 했는데. 다이버들이 '배가 있습니다' 놀랐지 우리는. 배가 있다니. 그 펄 바닥에 배가 아직 살아있다니. 이게 믿어지질 않지. 몇 백 년이 지났는데. 펄에 묻혀있는 바람에 배가 남았어. -이호관, 당시 문화재관리국 발굴부장 바다 아래에, 배가 있다는 거야. 그러니까 전설로만 들었던 보물선이, 대한민국 바다에 실존하고 있었던 거야. ▲ 바닷속 보물선 대체 이 배의 정체가 뭘까? 바다 아래서 건진 것 중에, 이런 게 있었어. 청동 저울추. 배에 걸어놓는 저울 추래. 잘 보면, 한자로 '경원로'라고 적혀있어. '경원'은 중국 저장성의 '닝보'라는 지역이야. 당시 원나라의 주요 무역도시였어. 이 배가 중국 닝보에서 출발한 무역선이었던 거야. 이건 뭘 것 같아? 종이가 없던 시절, 나무에 글씨를 쓴 건데, 이걸 '목간'이라고 해. 첫 번째 목간을 보면, 한자로 '지치 3년'이라고 쓰여있어. 이건 중국 원나라 연호로, 서기 1323년이라는 뜻이야. 그리고 다른 목간을 보면, 한자로 '동복사', 그리고 '조적암'이라고 적혀있어. 바로 일본에 있는 절 이름이야. 이 배가, 일본을 오가던 무역선이라고 추측할 수 있겠지. 바다에서 나온 도자기와 그릇들, 모두 일본으로 보낼 무역품이었던 거야. 당시 일본에서 중국 도자기가 인기가 많았대. 그럼 일본으로 가던 배가, 왜 신안 앞바다에서 침몰했을까? 이 부분에 대해선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일본으로 가던 중 태풍을 피하려다 신안 앞바다에서 좌초됐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대. 정리를 해보자면 이래. 1323년, 중국 닝보에서 도자기, 청자 등 무역품들을 싣고 가던 원나라 무역선이 일본으로 가던 중, 신안 앞바다에서 침몰한 거야. 게다가 어느 날 동네 주민이 허겁지겁 오더니 이런 걸 보여주더래. 배가 정박할 때 쓰는 닻. 4년 전 그 어부가 닻을 건져 올렸는데, 어장의 그물추로 사용하다가 발굴단에 신고한 거야. 근데 이 닻의 크기가 엄청 커. 길이만 2m 20cm, 무게는 300kg. 이걸로 볼 때, 배의 길이만 최대 34m, 당시 적재량 200톤이 넘었을 거라 추정돼. 엄청 큰 배야. 발굴단은 유물을 찾으면서, 배를 인양할 계획을 세웠어. 먼저 유물이 나오는 포인트에 철제로 만든 그리드라는 걸 설치해. 그리드에 번호를 매겨서 유물들의 위치를 기록한 뒤, 부서진 배의 조각을 하나씩 연결하는 거야. 그렇게 발굴단의 발굴작업은 1984년까지, 9년에 걸쳐 이뤄졌어. 힘들었던 발굴 과정. 그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건, 뱃멀미였다고 해. 사람이 노래져요. 멀미 때문에. 그 파도가 넘실거리는 데서 작업을 하는 거예요. -이호관, 당시 문화재관리국 발굴부장 또 펄과 조개껍데기 투성이었던 유물들을 일일이 손으로 씻어내느라 항상 온몸이 지저분했대. 저 같은 경우는 이제 그 유물을 펄이 묻었으니까 펄을 먼저 세척한 다음에 유물을 분리하고 하는 작업을 하는 거죠. 유물 발굴을 하면서 느끼는 것은, 상당히 청자가 빛깔이 좋아요. 그래서 그걸 보고 상당히 감탄을 했죠. -강신태, 당시 문화재관리국 소속 직원 그 배에서 무려 2만 4천여 점의 유물을 발굴했어. 한 장소에서, 이렇게 많이 유물이 발견된 건 세계적으로 이례적이래. 세기의 발견이자, 엄청난 성과를 이룬, 최초 해저 유물 발굴인 거지. 그 당시에는 정말 꿈같은 일을 해냈구나 라는 생각 들고. 내가 근무하던 그 부대에서 이렇게 큰 일을 했기 때문에 부대도 자랑스럽기도 하고 그랬었습니다. -이복성, 당시 SSU 잠수부 문화재에 대한 애정과 사명감이 없으면 이건 할 수가 없어요. -강신태, 당시 문화재관리국 소속 직원 공무원으로서 학예직으로서 내게 놓인 일을 한 것뿐이죠. 유문 있으면 됐지 뭐. 그냥 그것뿐이지. 추억이지. -이호관, 당시 문화재관리국 발굴부장 ▲ 보물을 훔치는 사람들 그렇게 발굴이 마무리되던 1984년, 강신태 반장에게 긴급하게 연락이 한 통 왔어. 전화가 온 곳은 문화재관리국 사범단속반. 문화재 도난이나 도굴 사건을 수사하는 전담 부서야. 누군가 문화재를 암거래하려고 한다는 첩보였어. 근데 그 문화재가, 바로 신안 유물이라는 거야. 강신태 반장이 신안 유물 발굴을 담당했으니, 감정 요원으로 함께 가 달라는 거야. 밀매꾼들, 어떻게 잡아야 할까? 강신태 반장은, 덫을 놨어. 구매자인 척, 밀매꾼에게 접근한 거야. 종로에 있는 한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고 약속한 날, 커피숍에서 기다리고 있었어. 얼마나 지났을까, 저 멀리서 남성 두 명이 두리번 두리번 대며 걸어오는 거야. 딱 봐도, 그놈들이야. 광주에서 판매책 2명이 올라온 거였어. 이들과 대면한 강신태 반장이 입을 열었어. 아이고, 식사는 하셨고? 그래서 어떻게... 물건은? 그랬더니 남성 한 명이, 주머니에서 뭔가를 쓱 꺼냈어. 신안 유물, 맞았을까? 사진을 보여주는데 보니까 이제 신안 유물이 맞아. 그래서 이건 얼마나 요구를 하느냐 몇 점 있냐니까, 한 30점 있는데 한 1억 5천만 원 된다는 거야. -강신태, 당시 문화재관리국 소속 직원 30점을 1억 5천 만원에 팔겠대. 강신태 반장은 유물을 직접 보고 사겠다고 했어. 그랬더니 그 유물들, 광주에 있대. 곧바로 강신태 반장은 밀매꾼들과 함께 광주로 내려갔어. 일당들은 강신태 반장을 광주의 한 호텔로 데려갔어. 밤 9시쯤 됐나? 호텔 방문이 열리더니, 한 남성이 들어와. 딱 보니까 이놈이 바로 주범 같아.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테이블에 올려놨어. 가방에서 꺼낸 건 신안 유물 3점. 그걸 본 강신태 반장은 범인들에게 이거 가지고는 택도 없다. 이건 뭐 돈 안 나가는 거다. 1억 5천만 원짜리 거래를 하면서 장난할 수가 있느냐 라며 화를 냈어. 그러자 범인들이 내일 아침에 만나자며 자리를 떠났어. 그리고 다음 날 아침 10시. 근처에서 다시 주범을 만나기로 했어. 강신태 반장이 일당들의 차를 타고 이동하는데, 차를 타고 주변을 계속 빙글빙글 돌기만 하는 거야. 누가 주변에 있나, 따라오는 사람이 있나, 감시하는 거지. 이윽고, 이들은 또 다른 호텔에 들어갔어. 근데 이 주범이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도 안 나타나. 강신태 반장,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해.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던 그때, 문이 탁 열리더니, 주범이 모습을 드러냈어. 그 순간! 꼼짝 마, 경찰이다! 근처에 있던 경찰이 방 안으로 들이닥쳤어. 강신태 반장은 딱 주범만 노렸어. 딱 들이닥치니까 후닥딱 이제 튀는 거지. 그래서 나는 안 되겠다 그래가지고 주범, 유물 가져온 놈만 딱 잡 은 거지. 난 오직 이 친구만 잡으면 유물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일을 한 거죠. 그래서 머리 뒤를 잡고 뒤에 허리띠를 잡은 거예요. 잡고는 얼마나 힘이 센지, 나도 힘이 세지만. 5층부터 1층까지 같이 굴렀어요. -강신태, 당시 문화재관리국 소속 직원 강신태 반장은 주범을 향해 몸을 던졌어. 그리고 주범의 손에 드디어 수갑을 채웠어. 그렇게 일당 세 명을 체포하고, 이들이 가지고 있던 신안 유물 32점을 회수했어. 이건 전부, 신안 유물을 훔쳐서 팔다가 검거된 '신안 유물 도굴 사건'을 정리한 거야. 그런데 날짜를 보면, 좀 묘해. 모두 국가가 발굴 작업을 하던 그 기간에 일어난 일이야. 바다에 발굴단과 특수부대 요원까지 있었는데도 도굴을 했던 거야. 처음에 유물을 신고했던 최평호 씨, 기억나? 신고한 뒤부터 근무지로 그를 찾는 전화가 계속 왔대. 돈을 줄 테니, 유물이 나오는 위치만 알려달라면서. ▲ 발굴단 vs 도굴꾼 당시 문화재관리국에선 발굴 지역 2km 반경을 항해 금지구역으로 정했어. 인근에는 감시 초소까지 설치됐어. 초소에서 교대로 24시간 동안 감시를 했어. 바다 위에서 발굴단이 파도와 전쟁을 하고 있을 때, 육지에서는 도굴꾼들과 전쟁을 하고 있었던 거야. 도굴꾼은 팀을 어떻게 꾸릴까? 먼저 물주가 팀원을 모집해. 바닷길을 잘 아는 주민, 경력이 많은 잠수부 등으로. 그럼 감시를 피해 바다로는 어떻게 나갈까? 이들은 모터 소리가 나지 않는 배까지 직접 만들었어. 처음에 발굴단은 유물이 가라앉은 위치를 알아내려고 애를 먹었잖아. 그럼 도굴꾼들은 유물을 어떻게 찾았을 것 같아? 사실 이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어. 발굴단이 표시해 놓은 그리드 부표가 딱 있었거든. 고생할 필요도 없이 그것만 딱 들어가면 바로 유물 위치가 나오니깐. 그냥 장님이 눈 감고 들어가 건지다시피 했죠. -이호관, 당시 문화재관리국 발굴부장 부표에 도착하면, 은밀하게 잠수를 시작해. 신안 바다 물속은 유속도 빠르고, 도굴하는 시간이 밤이라 앞은 더 깜깜해.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악으로 깡으로 도굴하는 거야. 그렇게 목숨을 걸고 훔친 도굴품을 누군가는 비싼 값에 팔았고, 누군가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 은밀하게 숨겨놨어. 그 뒤로 문화재 사범단속반에서 쭉 일하게 된 강신태 반장은 경찰 검찰과 합동 수사를 하며, 신안 유물 도굴꾼들을 잡는 데 사활을 걸었어. 근데, 그의 수사방법이 대단했어. 그에게 이런 전화가 와. 아유 반장님, 접니다. 왜 그때 광주에서 잡혔다가 얼마 전에 나온 놈 있잖아요. 걔 이번에 또 작업 들어간다네? 강신태 반장이 잡았던 밀매꾼 중 한 명이 이렇게 정보를 알려주는 거야. 어떻게 된 일일까? 직접 들어봐. 그 친구와 차 타고 가면서 대화를 해보니까 대화가 통하는 친구더라고. 그래서 '이제는 이걸 없애야 되지 않느냐' 했더니, 자기도 이번 기회에 많은 걸 느꼈다, 수사에 또 협조하겠다 그래. 그래 검사하고 약속을 해서 구속을 안 하고 불구속했죠. 그다음에 정보를 주기 시작한 거죠. 내가 단속반에 갔더니 정보가 오는 거예요. 이런 정보가 없으면 안 되죠. 그게 수사의 기법이에요. -강신태, 당시 문화재관리국 소속 직원 이게 보니까, 서로 다 연결이 돼 있어. 그래서 한 명을 잡으면 줄줄이 잡혀. 그런데, 아무리 일망타진을 해도, 암거래한다는 첩보가 계속 들려와. 도굴꾼들의 일종의 '보험' 때문이야. 1980년, 광주에서 수상한 소문이 하나 돌았어. 2년 전, 신안 유물을 도굴해서 팔다가 검거된 이 씨 형제가 있는데, 그 형이 출소한 뒤부터, 동생의 장인 집, 그러니까 사돈집을 매일 들락날락한다는 거야. 사돈집에 매일 갈 이유가 뭐가 있을까? 뭔가 일을 꾸미는 것 같지? 그래서 형사들이 사돈집에 온 이 씨를 덮쳤어. 그런데 이 씨가, 형사들을 보자 오히려 하소연을 하는 거야. 형사님, 제발 저 좀 도와주십쇼, 내가 이놈의 유물인지 고물인지 때문에 아주 돌아가시겄소. 들어보니까 이래. 같이 도굴하다 잡힌 동생이 먼저 출소했는데, 그때 형한테 훔친 유물들을 잘 숨겨놨다고 말했대. 그리고 몇 달 뒤 형이 출소를 했는데, 큰 문제가 생겼어. 글쎄 동생이 사망한 거야. 팔아넘긴 유물 값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홧병으로 사망했대. 그럼 형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해? 그걸 찾아야지.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동생이 숨겼다는 유물을 못 찾은 거야. 결국 찾다 찾다, 동생의 장인 집까지 왔던 거지. 그때부터 형사들이, 이 형과 함께 동생의 처갓집을 뒤지기 시작했어. 경찰은 집을 샅샅이 뒤지기로 했다. 유물이 상하지 않도록 도굴꾼들이 사용하는 쇠꼬창이로 땅속을 찔러갔다. 6시간에 걸친 수색 끝에 여기다 하는 함성이 터졌다. 헛간 잿더미 밑바닥에서 청자접시 90점 등 2백 40점의 송원대 유물이 가마니에 싸인 채 묻혀 있었다. -당시 기사 내용 中 이뿐만이 아니야. 근처 유채밭 한복판에 묻힌 220점의 유물을 또 발견했어. 이때 회수한 유물만 460점이 넘었대. 이런 식으로 도굴꾼들은, 도굴한 유물을 여러 군데 묻어두고 필요할 때 꺼내서 팔아먹은 거야. 마치 적금이나 보험처럼. 이런 식으로 검거된 도굴꾼은 300여 명이었어. ▲ 모두의 보물 도굴범으로부터 회수한 유물만, 무려 2천 점이 넘는대. 발굴품과 도굴품까지, 신안 앞바다에서 모두 2만 6천여 점의 유물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어. 그 보물들, 지금은 어디 있을까? 박물관의 철통보안 속에, 잘 보관돼 있어. 현재는 국립광주박물관에 있대. 신안해저유물은 발굴 이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지속적으로 관리를 해왔고요.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서 전시, 보존, 관리 중에 있습니다. -장성욱,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사 신안해저유물은 수중고고학의 처음, 효시가 되었는데요. 이 효시를 기반으로 해서 그다음부터 우리나라의 수중고고학의 발전, 그리고 조사를 위한 토대가 마련되었고요. 내 눈앞에 있는 손도 식별이 안되는 곳에서 잠수하는 기술은 우리나라가 제일 뛰어난 수준이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장성욱,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사 모두가 힘쓴 덕분에, 신안 앞바다에서 건져 올린 유물들은 이제 우리가 원하면 언제나 볼 수 있는 소중한 보물로 빛나고 있어. 아마 이건 그 어떤 화폐로도 값을 매길 수 없을 거야. 1984년도, 신안 발굴작업이 끝나고도 도굴한 신안 유물을 밀매하는 사건은 계속 발생했어. 언제까지 사건이 있었을 것 같아? 마지막 사건이, 바로 2019년. 불과 6년 전이야. 30년이 넘게 신안 유물 57점을 보관하다가, 일본에 반출하려던 남성이 또 검거된 거야. 피의자는 30여 년 동안 자택과 친척 집에서 유물들을 보관하다가 사회적으로 신안 유물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다고 판단되자 지난해 8월부터 국내와 일본에서 밀매를 시도했습니다. -2019년 뉴스 보도 中 역사를 증명하는 문화재가 살아있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도 있는 걸 거야. 그런 문화재를 소중히 보호하는 건, 국민으로서 지켜야 할 권리이지 않을까.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스브스夜] '꼬꼬무' 1976 신안 보물선…700년 만에 세상 밖으로 나온 '모두의 보물' [스브스夜] '꼬꼬무</font>' 1976 신안 보물선…700년 만에 세상 밖으로 나온 '모두의 보물' 등록일2025.01.03 [SBS연예뉴스 | 김효정 에디터] 700년 만에 세상 밖으로 나온 보물선은 현실이었다. 2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보물을 찾는 사람들 - 1976 신안 보물선'이라는 부제로 700년 동안 바닷속에 잠들어있던 보물을 찾아낸 그날의 이야기를 공개했다. 1976년 1월,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최평호 씨는 형제들과 벌초를 한 후 술 한 잔을 나눴다. 그리고 자신의 형님이 어업을 하다가 그물에 걸린 것이라며 보여준 청자에 시선을 사로잡혔다. 예사 물건이 아니라는 생각에 곧바로 신고를 하게 된 최 씨. 군청 공무원의 도움을 받아 감정을 맡기고 이것이 무려 중국 원나라 때 만들어진 청자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현재 기준으로 3억 상당의 도자기였던 것. 그리고 신안 앞바다에서 이 같은 물건을 건져 올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모두 알렸다. 이에 최고의 전문가들이 전문 장비를 가지고 신안 해저 유물 발굴단을 조직해 신안 앞바다로 향한다. 그런데 아무리 발굴을 해도 유물이 묻혀있는 지점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아 곤욕을 겪는다. 이때 유물 발굴단은 어떤 한 사람을 떠올렸다. 최 씨의 신고 소식을 듣고 도굴꾼들이 신안 앞바다로 향했고 무려 117점을 도굴해 최대 500만 원에 팔다 검거가 되었던 것. 이에 유물 발굴단은 도굴꾼을 포섭해 유물이 묻힌 포인트를 찾아냈고 이에 순조롭게 발굴을 시작했다. 그러나 1년에 한 달, 하루에 한 시간 남짓만 가능한 작업에 발굴 작업은 장기전이 되었다. 그러던 중 바닷속에 묻혀있는 유물의 정체도 드러났다. 전설로만 생각하던 보물선이 바다에 가라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원나라의 주요 무역도시 중 하나였던 닝보에서 출발해 일본으로 가던 중 신안 앞바다에 침몰한 무역선이었다. 700년 만에 세상 밖으로 드러난 보물선의 정체. 이에 유물 발굴단은 유물 발굴과 동시에 무역선 인양 작업도 함께 했다. 총 9년 동안 험난한 발굴 작업을 멈추지 않고 총 2만 4천여 점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그리고 이는 세기의 발견이자 대한민국 최초의 해저 유물 발굴이었다. 그런데 유물 발굴이 마무리되던 1984년, 유물이 암거래되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온다. 이에 경찰과 문화재 관리국은 수소문해 밀매꾼을 체포하고 유물을 회수했다. 그런데 이 밀매가 유물이 한창 발굴되던 시기에도 진행되었던 것. 당시 문화재 관리국은 밀매꾼들의 도굴을 막기 위해 감시 소초까지 설치하고 유물 발굴 지점 반경 2km를 항해 금지 구역으로 설정해 24시간 감시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잡지 못한 밀매꾼들과 그들이 숨긴 유물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실마리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풀린다. 1980년대 광주에서 유물을 팔다가 검거된 형제 중 한 명이 무엇인가를 계속 찾고 있다는 첩보를 듣게 되어 그를 찾아가 예상 밖의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출소 후 사망한 동생이 숨긴 유물을 찾아달라는 것. 이에 경찰들은 그와 함께 유물을 찾아 나섰고 집 근처와 텃밭 등 곳곳에 숨겨진 유물을 무사히 찾아냈다. 그런 식으로 검거된 도굴꾼이 무려 300여 명에 회수한 유물만 2천여 점에 달했다. 그렇게 유물 발굴단이 발굴한 유물 포함 총 2만 6천여 점의 보물이 700년 만에 바다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현재 이 유물들은 현재 국립광주박물관에서 전시, 보존, 관리 중으로 더 이상 전설 속의 보물이 아닌 모두의 보물이 된 것이다.
어부가 건진 도자기, 무려 3억 원 …'꼬꼬무', 신안 앞바다에 가라앉은 보물선 조명  어부가 건진 도자기, 무</font>려 3억 원 …'꼬꼬무</font>', 신안 앞바다에 가라앉은 보물선 조명 등록일2025.01.02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가 조용한 마을을 뒤흔든 신안 바닷속 유물의 정체와 유물들이 세상 밖으로 빛을 보게 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공개한다. 2일 방송될 '꼬꼬무'는 '보물을 찾는 사람들-1976 신안 보물선' 편이다. 때는 1976년 1월, 전라남도 신안군 검산마을. 이곳은 몇 명의 어부들이 사는 작고 조용한 마을이다. 목포의 한 초등학교에서 교사 일을 하던 최평호 씨는 벌초를 하러 막 고향 신안으로 내려온 참이었다. 벌초가 끝나고, 형제들과 술 한잔을 기울이던 그는 형님에게서 뜻밖의 말을 듣게 된다. 어업을 하던 형님이, 얼마 전 뭔가를 건졌다는 것이다. 형님이 신안 앞바다에서 건진 건, 높이 44cm, 둘레가 65cm나 되는 큰 청자였다. 오묘하고 예쁜 자태에 보통 물건이 아니라 예상한 최평호 씨는 도자기를 신고하기로 한다. 군청 공무원의 도움으로 감정을 맡기고, 며칠 뒤 감정 결과가 나오자 최평호 씨는 물론이고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다. 무려 700년 전, 중국 원나라 때 만들어진 청자였던 것. 당시 10만 달러, 한화 3천만 원짜리로, 지금으로 치면 3억 원 상당의 도자기였던 셈이다. 알고 보니 마을에선 청자를 건져 올린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난리가 났다. 마을에 굴러다니던 개밥 그릇과 재떨이가 3천만 원짜리 보물일 수도 있다는 것. 마을 앞바다가 비밀을 품은 거대한 보물 창고였던 것이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마을에 은밀히 찾아온 자들이 있었다. 그들의 정체는 다름 아닌 도굴꾼. 그들은 신안 앞바다에서 무려 117점을 도굴해, 한 점당 최대 500만 원에 팔다 검거됐다. 이 소식에 문화재관리국은 발칵 뒤집혔다. 도굴꾼으로부터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관리국 직원과 문화재 전문 교수들이 나섰다. 하지만 문화재 발굴에 일가견이 있는 그들도 신안 앞바다에 도착하자마자 얼어붙고 말았다. 당시 해저에서 유물을 발굴한 사례가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고민 끝에 조사단은 해군 해난구조대, SSU에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유속이 험한 서해 바다, 망망대해에서 유물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 결국 발굴단은 최후의 방법을 쓰기로 했다. 특별한(?) 방법을 동원해, 대한민국 최초 해양 유물 발굴단은 바다로 나섰다. 우여곡절 끝에 모습을 드러낸 첫 유물. 그런데, 바다에 들어갔다 나온 해군들이 놀라운 이야기를 꺼냈다. 들어가서 확인해보니 유물이 무진장 많다는 것. 도자기에 엄청난 양의 엽전까지, 대체 신안 앞바다에서 유물이 잔뜩 발견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사실을 안 전국의 도굴꾼들은 신안 앞바다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유물을 지키려는 발굴단과 훔치려는 도굴꾼의 전쟁에 대해, '꼬꼬무'의 장트리오 장현성, 장성규, 장도연이 전한다. 이번 '꼬꼬무'의 이야기에는 가수 겸 배우 이준호, 배우 김국희, 그룹 오마이걸 멤버 유빈이 리스너로 함께 했다. 이준호는 장현성의 이야기 친구로 등장했다. '만약 오늘 이야기가 영화로 나오면 어떤 배역을 맡고 싶은지' 묻는 장현성에게 이준호는 줄곧 한 역할만을 답해 모두를 포복절도하게 했다. 캐스팅만으로 화제를 몰고 다니는 이준호가 일찌감치 찜한 등장인물의 정체는 누구일지 관심이 모인다. 김국희는 장도연의 이야기 친구로 자리했다. 등장부터 장도연과의 85년생 동갑내기 케미를 선보인 그녀는 녹화 말미, 돈보다 귀한 가치를 알게 되었다며 인상적인 소감을 남기기도 했다.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이야기의 전말이 공개된다. 장성규의 이야기 친구는 유빈이다. 풋풋하고 밝은 모습으로 단숨에 '리액션의 여왕'으로 등극한 유빈은 장성규를 놀라게 할 정도로 엄청난 추리력까지 선보이며 전천후 활약을 펼쳤다. 최초였기에 험난했지만, 최초여서 가슴 벅찬 이야기 '보물을 찾는 사람들-1976 신안 보물선' 편은 2일 목요일 밤 10시 10분 방송될 '꼬꼬무'에서 공개된다.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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