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프로그램 정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방송일

방송 시작일 2021. 10. 21 ~
방송 요일,시간 목 22:20~24:00

기획의도

◆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나'의 이야기 어느 날, 그 사건, 그 장면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눈길을 사로잡는 그 날, 그 사건으로부터 한 사람의 소시민으로서 '내'가 느낀 바를, 온전히 '나'의 시점에서 주관적으로 전달한다. ◆ 배워서 '너' 주는, 3人 3色 이야기 '너' 에게 꼭 들려주고 싶어! 친구, 배우자, 동료... 세 명의 '이야기꾼'이 스스로 공부하며 느낀 바를 각자의 '이야기 친구'(가장 가까운 지인)에게, 가장 일상적인 공간에서 1:1 로 전달한다.

프로그램3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

방송일

방송 시작일 2021. 03. 11 ~ 2021. 07. 29
방송 요일,시간 목 22:30~23:50

기획의도

◆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나'의 이야기 어느 날, 그 사건, 그 장면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눈길을 사로잡는 그 날, 그 사건으로부터 한 사람의 소시민으로서 '내'가 느낀 바를, 온전히 '나'의 시점에서 주관적으로 전달한다. ◆ 배워서 '너' 주는, 3人 3色 이야기 '너' 에게 꼭 들려주고 싶어! 친구, 배우자, 동료... 세 명의 '이야기꾼'이 스스로 공부하며 느낀 바를 각자의 '이야기 친구'(가장 가까운 지인)에게, 가장 일상적인 공간에서 1:1 로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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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방송일

방송 시작일 2021. 10. 21 ~
방송 요일,시간 목

기획의도

◆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나'의 이야기 어느 날, 그 사건, 그 장면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눈길을 사로잡는 그 날, 그 사건으로부터 한 사람의 소시민으로서 '내'가 느낀 바를, 온전히 '나'의 시점에서 주관적으로 전달한다. ◆ 배워서 '너' 주는, 3人 3色 이야기 '너' 에게 꼭 들려주고 싶어! 친구, 배우자, 동료... 세 명의 '이야기꾼'이 스스로 공부하며 느낀 바를 각자의 '이야기 친구'(가장 가까운 지인)에게, 가장 일상적인 공간에서 1:1 로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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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1,028
[꼬꼬무 찐리뷰] 수학여행 간 중학생 46명 사망 참사…어른들의 안전 불감증이 부른 비극 [꼬꼬무</font> 찐리뷰] 수학여행 간 중학생 46명 사망 참사…어른들의 안전 불감증이 부른 비극 등록일2026.10.05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1일 방송된 '악몽의 수학여행'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개그우먼 겸 배우 정이랑, 가수 볼빨간사춘기 안지영, 그룹 원어스 멤버 건희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추억의 수학여행 때는 1970년 10월 14일 아침. 서울 마포에 있는 경서중학교. 조회 시간 종소리가 울릴 즈음, 학교 운동장에 버스들이 줄지어 들어서. 왜냐. 이날은 바로 3학년 학생들의 수학여행 날이었거든. 경서중학교의 수학여행 일정은 원래 2박 3일이었어. 그런데 당시엔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수학여행비를 못 내는 친구들이 많이 있었대. 결국 당일치기 일정으로 변경됐지만, 16살 어린 나이에 떠나는 친구들과의 생애 첫 수학여행이잖아. 얼마나 설레고 신났겠어. 그중에도 4반, 종철이는 특히 더 신이 나있어. 엄마가 주신 특별 도시락과 용돈, 그리고 수학여행을 위해서 특별히 준비한 희귀 아이템까지 챙겨왔거든. 그게 뭐였을까? 종철이에게 직접 들어볼게. 경서중학교 3학년 4반에 있었던 최종철입니다. 학교에서 버스 대절해서 간 소풍, 그때는 수학여행이라고 그랬는데. 그건 처음이었고요. 먼 길 간다고 하니까 부모님이 용돈도 두둑하게 주셨고. 특히 어디서 빌려온 걸로 알고 있는데, 카메라를 빌려주셨고. 그때 당시에는 카메라를 쉽게 접하는 것이 아니었고. 친구들이랑 같이 가는 여행이었기 때문에, 그날이 저한테는 아주 대단한, 특별한 날이었단 말입니다. -최종철,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4반 그때만 해도 이런 카메라는 정말 귀한 물건이었어. 종철이는 아버지가 빌려준 새 카메라를 목에 걸고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버스에 올라. 경서중학교 3학년 학생들의 수학여행지는 바로 당시 최고의 핫플레이스, 바로 충남 아산에 있는 현충사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성역화 사업을 통해 의리의리하게 단장했어. 게다가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고 3개월밖에 되지 않았을 때야.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를 달려 멋지게 단장한 현충사를 보며 애국심을 고취하는 게, 당시 최고의 수학여행 코스였어. 이게 그날 찍은 사진들이야. 친구들이랑 계속 웃고 있는 표정이 얼마나 즐거웠는지가 보이지. 학생들은 현충사 참배를 마치고 근처에 있는 신정호수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 그리고 오후 4시, 어느새 돌아갈 시간이야. 학생들은 앞다퉈 버스로 달려가기 시작했어. 늦게 타면 서울까지 계속 서서 가야 했거든. 종철이 역시 타고 왔던 3호차에 오르자마자, 재빨리 찜해둔 자리에 앉았어. 종철이는 운전석 바로 옆, 엔진룸 위 쪽에 앉았어. 옛날 버스는 이렇게 엔진룸이 툭 튀어나와 있었어. 보통은 짐을 올려놓거나 하는데, 자리가 없을 땐 앉기도 했어. 다른 아이들이 일반 좌석으로 몰리는 사이, 종철이는 엔진룸 위에 자리를 잡은 거야. 순식간에 아이들로 가득 찬 버스는 곧바로 출발했어. 얼마나 갔을까? 종철이는 곧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어. 엔진룸 위에 앉아 있으니까 엉덩이가 따뜻해서 스르르 잠이 온 거야. 그런데 그때! 잠에서 깬 종철이는 주위를 살피고는 깜짝 놀랐어. 생각지도 못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거든. (눈을 떠)보니까… 여하튼 피를 많이 흘렸고요. 병원에서 깨어났어요. 한 이틀 정도 뒤에 깨어났다고 했으니까요. 그리고 그때 신문도 보여주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아… 사고가 났었구나…' -최종철,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4반 눈을 떴을 땐 을지로에 있는 한 병원이었대. 그제야 몸을 살펴보니까 온몸이 만신창이더래. 얼굴은 상처투성이에 오른쪽 다리는 뼈가 다 부서졌어. 그리고 왼쪽 다리는 뼈가 보일 만큼 살이 파여서 출혈이 엄청났다고 해.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지금까지도) 사고 난 것 자체를 전혀 기억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냥 자다가 기절해 버린 게 아닌가 추측건대. -최종철,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4반 ▲ 의문의 사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 종철이가 탔던 그 3호차 버스가 가장 먼저 출발을 했어. 당시 상황을 기억한다는 다른 반 친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봤어. 저는 박상준이고요. 3학년 7반이었습니다. 두 번째 차로 우리가 가는데, 안 보였어요 앞차가. 아예. 그리고 한 10분 정도 우리가 탄 차가 서 있었어요. 차들이 막혀서 서 있으니까 서 있던 거죠. '왜 안 가지?' 하는데 옆에 어떤 아주머니 두 분이 가다가 창문을 막 두드리는 거예요. 그리고 '(앞에) 학생들 학교 차 같은데 사고 났어! 사고 났어!'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몇 명인지 몰라도 후다닥 뛰어내려서 계속 뛰었어요. 우리 학교 차가 사고 났다고 하니까. 이제 급한 마음에 선생님도 나가고 막 애들이 쫓아 나간 거죠. -박상준,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7반 그때 한 학생이 찍은 사진이 있거든. 바로 이 사진이야. 까만 연기가 막 피어 오르지. 상준이는 연기가 피어 오르는 곳을 향해 정신없이 뛰었어. 시야를 가로막은 언덕을 넘으니까 그제야 충격적인 광경이 눈에 들어왔어. 앞서 가던 3호차, 종철이가 타고 있던 버스가 불길을 휩싸여 있는 거야. 상준이는 정신없이 버스를 향해 달려갔어. 우리가 접근하기가 힘들었어요. 불이 붙은 게, 어디 한 군데 붙은 게 아니라, 전체가 다 붙은 거예요. 버스가 하도 활활 타오르니까 불길이 유리창으로 나오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진짜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어요. 발을 동동 구르면서 보고 있던 거죠. 난 그 광경이 진짜 안 잊혀져요. 불길, 유리창 안으로 보이는 게… 하얀 머리들 몇 개가 보이는 거예요. 애들이 뭉쳐서 (쓰러져) 있는데. 그게 죽어도 안 잊혀요. 왜 이게 하얄까, 까매야 되는데... -박상준,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7반 처참한 광경 앞에서 멍하니 서 있는 아이들 중에는 학생회장 태선이도 있었어. 1970년 경서중학교 사고 당시 학생회장이었던 최태선입니다. 소방대원일 수도 있고 의용소방대원일 수도 있고 주민일 수도 있는데, 딱 막더라고요. 그리고 버스에 물을 뿌리고 있는 거예요. 제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실상 상황 종료. 그리고 연기가 나고 사랑하는 친구가… 이렇게 (쓰러져) 있더라고요. 여기에(머리쪽) 물을 맞으면서… 제가 그거 보면서 엄청 울었어요. 너무나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체를 모르겠더라고요. -최태선, 당시 경서중학교 학생회장 불타는 버스 안에 남겨져 있는 친구들을 보면서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는 거야. 불길에 휩싸인 3호차 버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당시 촬영된 사진을 보여줄게. 불타고 있는 버스 옆으로 선로와 기차가 보이지. 앞서 가던 3호차 버스가 기차와 충돌한 거야. 어쩌다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사고 차량에 타고 있던 학생들은 알고 있겠지. 하지만 종철이는 사고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래서 버스에 타고 있던 다른 생존자를 찾아봤거든. 다행히 사고 순간을 기억하고 있는 몇몇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어. 그 내용을 바탕으로 사고의 순간을 재구성해 볼게. ▲ 사고의 재구성 사고 당일 오후 4시. 신정호수에서 자유시간이 막 끝났을 때야. 선생님이 각자 타고 온 버스로 돌아가라는 말에, 3학년 4반 용섭이는 바로 버스로 달려가. 올 때 서서 왔더니 너무 힘들었거든. 갈 때는 꼭 앉아서 가고 싶었던 거야. 3호차에 오른 용섭이는 운전석 옆 엔진룸 위에 자리를 잡아. 맞아. 바로 종철이 옆에 앉은 거야. 잠시 후 버스가 시동을 걸고 출발을 했어. 옆에서 꾸벅꾸벅 조는 종철이와 달리, 용섭이는 버스 앞 풍경을 감상하며 가고 있었어. 오후 4시 20분. 천안 방향으로 가던 버스 앞에 철길 건널목이 나타나. 그리고 용섭이의 귀에 소리가 들려와. '땡땡땡땡' 건널목 경보기 소리야. 이 소리를 들었다면 운전자는 멈추는 게 맞잖아? 그런데 3호차 기사는 브레이크 대신 엑셀을 밟았대. 그러니까 앞차를 따라서 빨리 건널목을 통과하려고 했던 거야. 버스가 건널목에 들어서는 그때, 용섭이 눈에 뭔가가 들어와. 아저씨 기차가 와요!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어. 기차는 버스의 왼쪽 가운데 부분을 들이받았어. 용섭이는 엄청난 충격과 함께 버스 앞 유리를 깨고 튕겨나갔어. 그리고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대. 기차는 V자 모양으로 휘어진 버스를 80m 정도 더 밀고 간 후에야 멈춰서. 안에 있던 학생들은 모두 정신을 잃었어. 그런데 그때,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고 말아. 버스에 있는 연료통이 폭발한 거야. 불길은 엔진이 있는 앞쪽에서 시작되더니 삽시간에 버스 뒤쪽을 향해 번지기 시작해. 그때였어. 맨 뒷자리에 앉아있던 학생 하나가 정신을 차렸어. 3학년 3반 54번 김현철이었어요. 얼마 동안 기절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눈을 떴을 때는 벌써 차 안이 연기와 불로 차 있었고. 애들은 다 이렇게 쓰러지고, 이렇게 고개 숙이고. 이런 애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본능적으로 여기를 빠져나가야 되겠다고 생각해서. 옆 창문을 발로 깨고 버스에서 뛰어내려서 보니까. 거기서 (정신이 들어) 고개를 쳐들고 사방을 훑어본 애는 나처럼 뛰어나와서 살았는데, 그냥 거기서 고개 숙이고 있던 애들은 다 거기서 그 화마에 그냥 휩싸일 수 밖에 없죠. 14일이 있을 수밖에 없죠. 대형사고구나 이거는. 정말 큰 사고구나.. -김현철, 경서중학교 버스 참사 생존자 정신을 차린 현철이는 가까스로 탈출했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러지 못했어. 그런데 그 순간, 인근 주민들이 뛰어오기 시작해. 주변에 있는 돌로 유리창을 깨고 안간힘을 쓰며 학생들을 꺼내려고 하는데 쉽지가 않아. 바로 이것 때문이었어. 이 사진은 현충사에서 출발하기 전에 찍은 사진이야. 왜 구조가 어려웠는지 알겠어? 유리창 옆에 쇠파이프 같은게 지나갔어요. 그게 없었으면 더 많은 학생이 빠져나올 수도 있었는데. -김현철, 경서중학교 버스 참사 생존자 게다가 차체는 심하게 찌그러진 상태야. 그러니 구조가 얼마나 힘들었겠어. 주민들이 최선을 다해 몇몇 학생을 끄집어냈지만, 이내 버스 전체가 불길에 휩싸여. 결국 구조를 포기한 채 지켜볼 수밖에 없었대. 당시 현장에 있던 주민의 목격담이야. 바람에 날리는 불덩이처럼 버스가 불에 싸여 기관차에 밀려갔다. 버스 네번째 창가에 앉아있던 한 학생이 온몸에 불투성이가 된 채 '아저씨 나 살려달라'고 외마디 소리를 쳐 유리창을 깨고 그 학생을 구출하려 했으나, 끝내 몸이 밖으로 빠지지 않아 그대로 숨졌다. 그날의 참혹했던 현장을 직접 목격한 주민의 이야기도 들어볼게. 소리는 '쾅!' 소리 났죠. 그러니까 이 주변에 살던 사람들은 많이 나왔죠. 처음에는 불빛이 확 있었어. 그런데 불과 그게 한 30분도 안 돼서 다 타버리더라고. 완전히 싹 타더라고. 마음이 참담했죠. 진짜... 사람이 불에 탔으니까 막… 처참하게 그을려서 그냥 볼 수가 없었죠. 내가 그 당시에 한 18세 됐어요. 나도 어린 나이고 같은 비슷한 나이인데 진짜 마음이 안 좋았죠. -고광재, 사고 당시 목격자 이후 마을 의용소방대와 소방대까지 진화에 나섰고, 불길은 50분 만에 잡히긴 했어. 하지만 눈앞에 드러난 광경에 사람들은 할 말을 잃고 말아.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수학여행의 추억을 가득 싣고 올라오던 버스는 처참히 구겨져 있어. 그리고 그 안에는 새카맣게 타버린 시신들이 가득해. 사람들이 한 구 한 구 버스 밖으로 시신을 옮기는데, 끝나질 않아. 부상자 32명, 그리고 사망자는 45명. 버스 운전기사까지 총 46명이 현장에서 사망했어. 그렇게 경서중학교 수학여행 버스 사고는, 해방 이후 가장 참혹한 버스 참사로 기록이 됐어.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지. ▲ 참혹한 버스 참사 그러면 버스 안에서 가장 많은 사망자가 나왔던 곳은 어디였을까? 기차가 충돌한 버스 중간 좌석 쪽에 앉아있던 학생들은 대부분 살아남지를 못했다고 해. 그런데 버스 중간에 앉았던 아이들 중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학생이 하나 있어. 부상자 중 가장 상태가 심각했다는 그 학생을, 친구들은 아직도 기억해. 박민택이라고 있거든요. 내가 밥을 많이 뺏어 먹었어요 그 친구. 그때는 도시락을 난로에 쫙 쌓아 놓잖아요. 그때 중3 때 엄청들 먹으니까… 미안하죠 지금. 걔네 엄마가 새벽밥 지어서 먹으라고 자기 새끼 만들어 준 걸 엉뚱한 놈이 먹었으니 미안하죠. 특히 걔는 살아남았는데 화상을 제일 많이 입었어요. 그래서 제일 많이 마음이 지금도 많이 아프죠. -김현철,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3반 민택이 걔가 얼굴도 잘생겼거든요. 그랬는데 얼굴이 화상 입고 그래서, 마음이 좀 안 좋았죠. -최종철,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4반 3학년 4반 박민택. 민택이는 사실 너도 아는 얼굴이야. 처음에 봤던 이 사진 속 이 친구가 바로 민택이야. 수학여행 날 아침, 기차를 타고 통학하던 민택이는 학교에 가기 위해서 역에 도착을 했대. 그런데 함께 통학하는 친구 중 한 명이 나타나지 않는 거야. 바로 수학여행비를 내지 못한 친구였어. 민택이와 친구들은 등교도 미룬 채 그 친구의 집으로 우르르 몰려갔대. 야 중학교 시절 한 번뿐인 수학여행인데 같이 가자 친구를 설득한 끝에 민택이와 동네 친구들은 함께 수학여행 길에 오르게 돼. 수학여행 가는 그 버스 안에서도 민택이는 그 친구와 나란히 앉았대. 바로 3호차 중간 자리에. 버스가 불길을 휩싸였을 때 민택이는 구조됐지만, 그 친구는 결국 빠져나오지 못했어. 민택이는 목숨을 건졌지만, 사고 직후 사경을 헤매고 있었어. 얼굴과 머리 등 양팔과 손까지 심한 화상을 입은 상태야. 난생 처음 가본 그 수학여행에서 환하게 웃는 얼굴로 사진을 찍은 지, 불과 몇 시간 후의 일이었어. 그날 저녁, 사고 차량을 제외한 버스들은 다시 서울로 출발해. 버스 안은 그야말로 초상집이야. 올라올 때 분위기는 완전히 참담했죠. 중3이면 어린애잖아요. 다들 울고… 너무나도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정신이 나갔어요. -최태선, 당시 경서중학교 학생회장 서울로 올라오는 내내 라디오에서는 버스 사고에 대한 보도가 흘러나왔어. 뉴스에서는 병원에 실려간 30여 명의 생존자 이름을 쭉 말했어. 이게 어떤 상황이냐면, 수학여행을 떠난 470여 명의 학생 중에 30여 명의 부상자만 생존자로 방송이 된 거야. 이름이 불리지 않았던 그 400여 명의 나머지 학생들, 그 부모들은 기절 초풍할 일이야. 그게 아주 저는 제일… 버스 타고 오면서도 마음에 안 들더라고요. 우리 어머니는 제가 수학여행을 갔는데, 이 뉴스를 들으면 생존자 명단에 내가 없는 거예요. 죽었나 살았나 몰라요. -박상준,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7반 결국 경서중학교 교무실로 학부모들의 전화가 빗발쳐. 방송이 불러온 여파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어. 서울에 올라왔을 때 마포 종점 그쪽에서부터 학부모들이 난리가 아니었어요. 모든 학부모들이 다 나와 있으니까. 그러니까 완전히 아수라장이었죠. -박상준,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7반 그날 밤 10시 30분경 버스가 학교에 거의 도착했을 때였어. 학교 운동장은 물론 교문 밖 도로까지 수많은 인파로 가득 차 있어. 사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부모와 형제들, 거기에 취재진과 경찰들까지. 당시 기사에 따르면 무려 3천 명이 넘었대. 버스가 도착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버스를 향해 모여들기 시작해. 버스는 할 수 없이 옆 학교 운동장으로 핸들을 돌려. 하지만 부모들은 버스를 에워싼 채,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옆 학교까지 따라와. 아들이 무사하다는 걸 확인한 부모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려. 하지만 아들을 찾지 못한 부모는 어땠을까. '철수야', '아무개야', '어디 있냐 어디 있냐' 그러니까 (자식을 찾아서) 기뻐서 우는 사람. 자기 자식이 안 와서 슬퍼서 우는 학부형. 그게 막 혼재돼서, 이산가족 찾기의 한 10배쯤 된다고 봐야 할까요. -최태선, 당시 경서중학교 학생회장 난리가 아니었어요 그냥. 엄마들은 이름 부르고 다니는 거야 내 아들 이름을. 전부 다. 누가 살았는지 모르니까.저 같은 경우도 어머니가 오셨더라고요. 막 밖에서 '상준아 상준아' 부르면서 울면서 다녀요. 근데 자식이 산 엄마들은 괜찮은데, 죽은 아이들 엄마는… 그건 생각하기가 싫어요. -박상준,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7반 아들을 만나지 못한 부모들은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어. 뭔가 착오가 있을 거다, 우리 아들은 살아있을 거라 믿었어. 그런데 잠시 후에 누군가 운동장 한쪽에 이걸 갖다 놨어. 칠판 가운데 그어진 선을 기준으로 왼쪽은 사망자, 오른쪽에는 부상자. 생과 사를 나누는 무정한 칠판 앞에 결국 희망의 끈은 끊어지고 말아. 사망자 중에는 4대 독자도 있었어.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 돈을 벌며 힘겹게 동생을 뒷바라지해온 누나의 통곡 소리도 들려. 중학교 3학년, 불과 16살이야. 이 어린 생명들이 한순간에 쓰러지고 말았어. 대체 왜 이렇게 피해가 컸던 걸까? 경찰은 참사의 원인이 무엇인지 조사에 나서. 이제부터 드러난 사실들을 이야기해줄게. ▲ 참사의 이유 먼저 사고 버스를 보여줄게. 당시 사고가 났던 버스는 일본과의 기술 제휴를 통해 만들어진 버스였어. 이 버스의 정원은 39명. 아까 사고 당시 생존자 32명, 사망자는 45명이라고 했지? 사고 차량에는 77명의 학생들이 탑승했었어. 이건 뭐 지금 기준으로는 말이 안 되는 상황이지. 하지만 1970년대 당시에는 이게 일반적인 상황이었대. 통상 그 당시에는 모든 버스들이 그렇게 다 타고 다니고, 아침에 출근할 때는 그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타니까. 그렇게 탔었고. -최종철,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4반 돈이 없어서 못 가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줄여 줄여'한 게 버스 수도 줄이고 그랬을 거예요. 그래서 7대가 간 거죠. -박상준,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7반 총 9개 반이 수학여행을 가는데 버스는 7대를 불렀다고 해. 473명의 학생, 그리고 11명의 선생님. 총 484명이 이 7대의 버스에 나눠 탔던 거야. 계산해 보면 한 대에 약 70명 정도 탄 셈이야. 그런데 하필 사고가 났던 3호차에 특히 더 많은 77명의 학생이 탔던 거지. 3호차 버스에 3반이랑 4반 애들이 많이 탔어요. 3학년 3반 애들은 다 타고, 4반 애들이 한 15명, 20명 가까이 타서 그 버스에 7, 80명이 탔던 것 같아요. -김현철,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3반 그래서 사고가 난 버스 단 한 대에서 40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왔던 거야. 그런데 조사 결과, 또 다른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났어. 학생들을 인솔하고 안전을 책임지는 사람, 선생님이잖아. 그런데 알고 보니 사고 버스에는 선생님이 탑승하지 않았던 거야. 어떻게 버스에 애들만 태우고 출발하냐, 직무유기 아니냐, 여기저기서 교사들이 관리 감독에 소홀했다며 질타했어. 당시에 보도된 기사 내용이 있어. 학생들이 바깥 풍경에 취해 '즐거운 우리 캠프' 등 노래를 한창 신나게 부르고 있을 때, 운전사가 너무 시끄럽다고 고함을 지르며 뒤를 돌아보는 순간, '꽝' 하는 소리와 함께 차와 사람들이 함께 공중 분해됐다. -당시 보도 中 사람들은 어린 학생들이 시끄럽게 떠들었고, 이를 제지할 선생님이 버스 안에 없었다는 걸 사고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목했어. 그런데 취재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어. 56년 만에 처음 공개되는 이야기야. 이 얘기는 꼭 해야 돼요. 학생들이 다 나눠 타고 이제 선생님들이 버스에 올라 타야 되잖아요 인솔 교사들이. 그런데 그 차를 탈 때, 출발하기 전에 안 온 아이들이 있었어요. -박상준,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7반 '회장 다 왔니?' 그래서 '아니요, 두 명이 안 왔습니다' 인원 파악을 했는데 두 명이 안 온 거예요. 그래서 그 두 명 본 사람 없냐고 하니까, '아까 저수지에서 배 타는 거 봤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저수지로 한 200여 미터 정도 되는데 막 뛰어갔어요. 제가 '아무개야!' 막 불렀죠. '빨리 와! 다 탔어! 기다리고 있어!' 그랬더니 '알았어' 그러면서 그 친구들이 막 노를 저어서 오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다시 허겁지겁 뛰어 올라가서 선생님한테 '쟤네 이제 여기 타면 끝입니다' 딱 하는데, 버스 한 대가 갑자기 떠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3반하고 4반 탄 차가 떠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선생님들이 '저 차 왜 떠나지?' -최태선, 당시 경서중학교 학생회장 그래서 선생님들이 3호차에 못 타고, 거기서 이제 뒤죽박죽이 돼버린 거죠. -박상준,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7반 그 당시 뭐 전화기가 있습니까 무전기가 있습니까. 연락할 방법이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다른 선생님들도 '우리도 빨리 타고 갑시다' 이렇게 된 거예요. 그게 그 출발 당시까지의 정확한 팩트입니다. -최태선, 당시 경서중학교 학생회장 3호차 버스가 갑자기 출발하면서, 선생님이 안 탄 게 아니라 못 탄 거였다는 거야. 그리고 아까 내용 중에 학생들이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고 했잖아? 사고 버스에 타고 있던 학생의 말에 따르면, 기사에 나온 '즐거운 우리 캠프'라는 노래는 들어본 적도 없대. '시끄러웠었었다'라는 이런 부분들이 그냥 입담으로 하는 소리지, 사실과는 다른 얘기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통상적으로 애들이 조잘조잘하는 이런 정도. 우리 일반적으로 교실에서도 그렇잖아요. 시끌벅적하잖아요 노는 시간에. 그 정도 수준이지, 더 이상의 정도는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최종철, 경서중학교 버스 참사 생존자 그냥 친구와 잡담 정도 나누거나 잠을 자는 분위기였다는 거야. 그런데 당시 기사 중, 선생님들에 관한 더 충격적인 내용도 있었어. 사고 버스 700m나 뒤떨어져 온 맨 마지막 버스에 탔던 교사들은, 사고로 버스에 불이 나는 것을 보고 마을 건너 불 구경하듯 뒷짐만 지고 있었으며, 버스가 완전히 불길에 싸여 구조작업이 어렵게 되자, 교사들은 주민들의 눈매와 눈초리가 무서워, 사고 현장 인근 중학교 교무실로 피신했다. -당시 보도 중 '꼬꼬무'가 만난 학생들은 56년이 지난 지금이라도 이 부분에 대한 진실을 꼭 밝히고 싶다고 말했어. 기사들 나온 거 보니까 '선생님들이 동네 사람들 무서워서 학교로 도망갔다' 이렇게 나오더라고요. 그건 완전 잘못된 거고. -박상준,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7반 선생님들이 무책임하거나 그런 분들이 아니었어요. 굉장히 훌륭하신 분들이었기 때문에, '도망을 갔다' 이거는 아니에요. 그 부분은 좀 명예회복이 돼야죠. -최태선, 당시 경서중학교 학생회장 하지만 사고 직후 경서중학교 교장, 교감, 피해가 집중된 3학년 3반, 4반 담임교사는 파면되고 말았어. 또 수학여행에 동행됐던 교사 8명은 직위해제돼.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 학생들은 이 사고의 근본적 원인은, 선생님들의 잘못이 아니라 버스기사의 무단 출발 때문이었다고 하나같이 얘기하고 있어. 버스가 임의대로 출발하는 걸 무슨 재간으로 막습니까. -최태선, 당시 경서중학교 학생회장 진짜 선생님 타실 때까지만 기다렸어도, 사고가 안 났다고요. 근데 그런 얘기는 어떤 매스컴을 찾아도 없어요. -박상준,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7반 그리고 버스기사, 잘못한 게 또 하나 있어. 버스기사는 철길 건널목 앞에서 정지신호를 무시하고 엑셀을 밟았잖아.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다름아닌 사고 현장에 있었어. 서울에서 장항으로 가는 단선 철도와 온양에서 천안으로 향하는 도로가 교차하는 곳이야. 사고 직전 3호차 버스는 천안 방향으로, 그리고 기차는 온양 방향으로 가던 중이었어. 그때 경보기 소리가 기차가 오고 있다는 걸 알려. 하지만 버스기사는 멈추지 않고 오히려 더 빨리 건널목을 지나가려고 엑셀을 밟았지. 조사 결과, 현장에 있던 건물들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한 걸로 보인대. 철길 건널목 바로 앞, 불과 2, 3m 거리에 2층짜리 정미소 건물이 있었어. 게다가 그 옆으로도 철길을 따라 민가 여러 채가 늘어서 있었고. 기차가 이렇게 옵니다. 근데 코너에 방앗간이 있어요. 높은 방앗간. 그 방앗간 건물 때문에 기차가 오는 게 안 보입니다. -최태선, 당시 경서중학교 학생회장 원래는 철길 건널목 주변에는 시야를 가리는 건물이 있어서는 안 돼. 하지만 당시 철도청은 건설부와 협의가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미소를 방치했던 거야. 결국 버스기사는 경보기 소리에도 기차가 보이지 않자, 빠르게 건널목을 건너려고 했던 걸로 보여. 또 하나 사고를 불러온 결정적인 이유가 있어. 건널목이라면 꼭 있어야 할 그것, 차단기. 철길 건널목에는 등급이 나뉘어 있어. 먼저 1종 건널목에는 경보기와 차단기. 그리고 24시간 차량을 통제하는 관리원이 배치돼. 그 다음 2종 건널목에는 1종 건널목과 동일하지만, 관리원이 주간에만 배치되게 돼 있어. 그리고 3종 건널목에는 관리원이 아예 없고, 차단기도 없어. 기차가 오는 걸 알려주는 경보기만 있는 거야. 이 사고가 일어난 건널목은 3종 건널목이야. 현충사 성역화가 끝나자,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폭발적으로 증가해. 이 건널목을 지나는 차들이 하루에 5천 대가 넘었대. 그런데 교통량에 비해 건널목 등급이 너무 낮잖아. 등급을 상향시켜달라고 전부터 요청했지만 철도청은 받아들이지 않았어. 예산이 부족해서 안 된대. '재난은 몰래 오지 않는다'는 말이 있어. 대형 사고가 발생하기 전 반드시 수많은 작은 사고들과 징후가 있다는 뜻이야. 이 건널목에서도 여러 차례 사고가 있었지만, 아무런 조치도 이뤄지지 않았어. 만약 시야를 가리는 정미소 건물을 정리했다면, 그리고 건널목의 등급을 조정해서 차단기가 설치가 됐었다면. 그래도 사고가 일어났을까? 이 모든 조치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해도, 건널목 앞 '일단 멈춤'이라는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안전수칙만 지켰다면. 이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결국 각기 다른 어른들의 사정으로 안전을 소홀히 한 결과, 45명의 어린 생명들이 희생된 거야. '운전기사로서 자기가 지켜야 될 의무', '철도청에서 지켜야 될 의무', 그것만 지켰어도 사고 같은 건 충분히 안 일어날 수 있는 확률이 거의 99%가 아니겠나. 이런 생각이 들어요. -김현철, 경서중학교 버스 참사 생존자 ▲ 돌아온 아이들 사고 다음날 새벽, 경서중학교 운동장으로 구급차들이 줄지어 들어서. 그리고 45개의 목관을 내리기 시작해. 수학여행을 떠났던 학생들이 학교로 돌아온 거야. 싸늘한 주검이 된 채로. 아이들이 꿈을 그리던 미술실이, 노래소리가 들려오던 음악실이, 임시 안치소가 됐어. 시신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부모들이 안치소로 달려와. 안 된다고 막아도 막무가내야. 나는 내 아들 얼굴 보기 전엔 못 믿습니다! 왜 못 보게 합니까!! 학교 측은 어쩔 수 없이 안치소 문을 열어줬어. 그리고 시신을 확인한 부모들은 충격과 당혹감에 말문이 막혀. 16년을 키운 내 자식인데 도무지 알아볼 수가 없었거든. 훼손된 시신을 보고 졸도하는 부모님도 많았다고 해. 한 어머니는 손에 바나나를 들고 아들을 애타게 찾고 있어. 네가 그렇게 사달라고 조르던 바나나 엄마가 사왔다. 바나나 먹고 싶다며… 어디 있니? 그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고 해. 오후 1시경, 안치소 문을 열고 들어서는 사람이 있었어. 지금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파견된 인물이야. 경서중학교 수학여행 사고 시신의 개인 식별을 담당한 김종렬입니다. 시신의 손괴 상태가 상당히 심하기 때문에 개인 식별을 가족이라 하더라도 보고 몰라요. 누군지 알 수가 없죠. 얼굴이 타서 시커멓고 숯덩어리가 되니까. 얼굴 윤곽이나 이런 것이 없죠. -김종열, 당시 국과수 소속 시신 식별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어. 첫 번째 유전자 감식. 그런데 이때가 70년대, 유전자 감식 기술이 자리 잡기 전이야. 두 번째 방법, 지문 감식. 하지만 시신들의 상태가 지문 감식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마지막 식별 방법, 바로 치아 감식. 치열의 구조와 치료 흔적 등을 대조해서 사망자의 신원을 확인하는 거지. 이런 걸 '법치의학'이라고 해. 국과수에서 파견된 김종열 교수는 우리나라 제1호 법치의학자야. 김 교수는 조심스럽게 시신을 확인하기 시작해. 다른 현장에 비해 특별히 까다로운 부분이 있었거든. 시신을 식별할 때 가장 기본적인 구분 방법은 성별과 나이라고 해. 그런데 지금 사망한 시신들, 모두 성별이 같고 나이도 같잖아. '남녀, 나이' 이것이 개인 식별의 기본적인 구별 방법 중 하나인데, 이 경우는 그것이 다 동일하기 때문에, 난이도에 있어서 어떤 면에서는 어렵죠. -김종열, 당시 국과수 법치의학자 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었어. 바로 학생들의 건강 기록부야. 거기엔 아이들의 키와 체중은 물론 구강검사 기록까지 나와 있잖아. 김 교수는 그 내용을 대조하며, 피해자의 신원을 한 명씩 확인해 갔어. 그런데 그때, 당신 이거 엉터리로 하는 거 아니야? 이게 어떻게 내 동생이냐고! 하며 항의하는 사람이 있었어. 죽은 아이의 형이 나에게 항의를 했어요. '자기 동생은 목걸이를 한 적이 없는데, 식별한 이 시신에 목걸이가 있다' 이거예요. '당신이 지금 감정을 엉터리로 하는 게 아니냐' (그 말처럼) 잘못됐다고 그러면 이건 큰일이거든요. 그게 틀리면, 그건 다 틀린 거예요. 한 명이 꼬이면, 한 명이 꼬인 게 아니라 다 꼬인 거지. 그런데 제가 침착하게 다시 보니까, 그 목걸이의 펜던트를 뒤집어 보니까, 관광지 기념품이야. 그 학생이 관광지에서 기념품을 사서 목에 건 거였죠. 그러니까 그 자리에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잘못하면 아주 봉변당할 뻔했어요. -김종열, 당시 국과수 법치의학자 김 교수는 아찔한 위기를 무사히 넘기고 45명의 아이들을 부모의 품으로 모두 돌려보냈어. 아들의 시신을 확인한 그 부모님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시신이 확인이 안 돼도 고통스럽고, 확인이 돼도 고통스러운 그 마음. 사고 이틀 후 경서중학교에서는 45명의 합동 장례식이 거행돼. 그리고 이건 그날 찍은 사진들이야. 당시 학생회장이었던 태선이가 친구들을 대표해서 조사를 낭독했어. 이제는 두 번 다시 불러보지 못할 이름들이여. 벗님들께서는 이미 가셨지만, 벗님들의 얼은 이 교정에 있습니다. 귓전에 메아리치는 벗님들의 노랫소리, 눈앞에 아른거리는 벗님들의 다정한 얼굴.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잊지 않겠습니다. 부디 명복을 누리시길… 그건 뭐 비통한 마음이죠. 비통하고 슬프고. 제대로 읽지도 못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울었어요. -최태선, 당시 경서중학교 학생회장 태선이는 조사를 읽는 동안 특히 더 감정이 북받쳐 올라와. 왜냐하면 부상자 중 가장 친한 친구가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거든. 그때 저하고 아주 친했던 친구 병국이가 생존해 있었습니다. 16일에 장례가 치러졌고, 그날 오후인지 기억은 정확하지 않은데, 중환자실에서 (산소호흡기를) 꽂고 있을 때 가서 봤습니다. 중환자실에 들어가니까 침상에 누워있는데, 온몸이 새파랗게 멍이 들었더라고요. '희망이 없는 것 같다' 이런 절망감이 드는 거 있잖아요. '병국아 일어나, 일어나야지' 이런 식의 얘기를 제가 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하고 그 다음날 학교로 왔는데, 이제 병국이가 죽었다 하더라고요. -최태선, 당시 경서중학교 학생회장 부상자 명단에 있던 병국이의 이름은 사망자 명단에 새로 적히게 돼. 결국 경서중학교 학생 사망자 수는 총 46명이 된 거지. 이들은 경기도 김포에 있는 한 공원 묘지에 함께 묻혔어. 학생들은 묘역에서 이별의 노래를 부르며 친구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어. 참사 5일 후, 다시 수업이 재개된 3학년 3반의 모습이야. 교실 한 편의 빈 책상들. 그 빈자리는 채울 수 없는 구멍으로 아이들의 가슴에 남았어. 3학년 3반에 가면 애들이 다 죽었으니까. 죽은 애들 책상은 다 비어있잖아요. 그 책상이. -김현철,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3반 졸업할 때까지 계속 그랬을 거예요. 그게 난 제일 가슴 아프더라고요. -박상준,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7반 이듬해 1월, 경서중학교 3학년 학생들의 졸업식이 치러져. 그리고 이걸 받아. 경서중학교 20회 졸업 앨범. 다행히도 이 앨범엔 모든 친구들의 얼굴이 담길 수 있었어. 참사가 있기 전 미리 졸업사진을 찍어놨거든. 참사로 희생된 아이들 3반 31명, 그리고 4반 15명. 이들이 실린 페이지에는 이렇게 적혀있어. '사라진 별들' 이라고. ▲ 사라진 아이 그런데 참사 이후 생존자 중에 사라진 아이가 한 명 더 있어. 너도 아는 아이야. 맞아. 민택이. 아주 심하게 다친 애들은 메디컬 센터로 갔어요. 박민택 같은 애, 수술해야 되고 이런 사람들. 여기 있네요 박민택. 공부 잘했어요. 그때 헤어지고는 못 봤는데. -김현철,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3반 사고 당시에 가장 큰 화상을 입었던 친구, 3학년 4반 박민택. 민택이는 병원에 실려간 이후 소식이 뚝 끊겼다고 해. 말 그대로 사라져버린 거야. 혹시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다가 사망한 병국이처럼 변고가 생긴 건 아닐까? 그런데 몇 년이 지난 후 민택이를 봤다는 사람이 나타났어. 한 1976~77년 정도? 그 정도였던 것 같은데. 우리 할머니가 파주 문산에 계셨으니까. 그래서 걔가 문산에서 다녔던 게 기억이 났죠. 그래서 그 동네 친구들하고 어울리면서 '여기 내 중학교 동창이 있다'라고 하니까, 그 동네에서는 서로 다 알더라고요. 그래서 연락이 돼서, 만나서 잠깐 얘기했었던 것 같습니다. -최종철,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4반 20대 초반이 돼서야 다시 만나게 된 두 친구. 하지만 반가움도 잠시, 종철이는 민택이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고 해. 민택이의 모습은 많이 달라져 있었어. 화상 때문에 얼굴에 붕대를 감은 채 나타났거든. 당시 얼굴에 화상을 입고 붕대 같은 걸 감고 있으니까, 마음이 좀 안 좋았죠. 민택이랑은 그때 만나고는 전혀 연락이 안 닿습니다. -최종철,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4반 두 사람은 짧은 만남 이후 다시 연락이 끊기고 말았어. 그때 만남이 사고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 된 거야. 그렇게 또 5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민택이를 본 친구는 한 명도 없었어. 당연히 동기들 모임도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해. 왜일까? 친구들은 '어쩌면 화상 때문에 변한 자기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가 아닐까' 생각했어. 수학여행 참사를 겪은 지 올해로 56년. 그 시절 까까머리 친구들은 어느새 70살이 넘어버렸어. 친구들은 여전히 민택이의 소식을 궁금해하고 있어. 더 늦기 전에, 친구들의 바람이 이루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꼬꼬무'가 그를 직접 찾아보기로 했어. 과연 민택이를 찾았을까? 55년생이니까, 올해 일흔 하나 됐죠. 이름은 박민택입니다. 교우 관계는 다 좋았죠. 다 좋았는데 같이 놀고 그랬던 친구들 이름도 생각 안나고 얼굴도 생각 안 나요. 제가 볼 때는 사고를 당했을 때 모든 걸 잊어버린 게 많은 것 같아요. 그때는 참… 뭐 어떤 특별한 심정 그런 거를 갖지도 못한 나이예요. 살아가면서 참 여러 가지를 느꼈죠. 자꾸 움츠러들고 뭐 그렇게 살았죠. 제가 하고 싶은 일을 못하니까요. 왼쪽 손은 신경이 다 훼손돼서, 지금도 안 펴지는 상태죠. 제 자신을 꾹꾹 누르고 살다시피 했다고 보면 돼요. 그런 거예요. -박민택, 경서중학교 버스 참사 생존자 사고 직후 그는 어떤 생활을 했기에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던 걸까. 참사 이후 두 달 정도 지났을 무렵 민택이의 기사가 실린 적이 있어. 좌측 손의 동맥, 다리, 척추, 왼쪽 다리가 모두 화상을 입은 채 기능이 마비된 경서중 3학년 4반 박민택 군은 두 번이나 피부 이식 수술을 했으나 완치되지 못했는데, 이제 더 떼어 옮길 살갗조차 없는 형편. -당시 보도된 기사 중 계속 엎드려 있었어요. 한 4개월을 꼼짝 못하고 엎드려 있었죠. 그 화상 치료를 하느라고. 그때만 해도 화상 치료를 어떤 식으로 했냐면, 터널 같은 걸 만들어 놓고 화상 부위에 거즈를 붙여 식염수를 뿌려줬어요. 그 다음에 하루에 한 번인가 이틀에 한 번씩, 농 같은 게 끼면 그거 긁어내고. 진짜 끔찍해요. 이 생살을 후벼파는 정도. 그때만 해도 제가 피부 이식 수술을 받는 날은, 생일 같았어요. 피부 이식 수술을 하면 붕대로 감아놓고 한 일주일 정도는 치료를 안 하거든요. 치료를 안 하니까, 수술 받는다 그러면 더 좋아했어요. 그러다가 이제 4개월 동안 꼼짝 못하고 있다가 일어나니까, 팔다리가 다 굳고 고개는 이렇게 옆으로 돌아가 있어서. 그러다가 물리치료 한 2개월 하고서는 퇴원을 했죠. -박민택, 경서중학교 버스 참사 생존자 참사의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서 희미해져 갔지만 민택 씨의 아픔은 가시지 않았어. 병원 치료 후에도 꽤 오랜 기간 그는 화상 자국을 가리기 위해 붕대를 감고 살았다고 해. 어머니는 매일 아침 붕대를 새로 갈아주며 아들의 화상 자국을 마주해야 했어. 꿈 많았던 소년은 많은 걸 포기하고 살아야 했어. 그런 민택 씨가 아버지가 된 후, 깨달은 게 있대. 하고 싶은 일을 한 번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꾹꾹 참고 살았죠. 아들을 둘 낳았지만, 같이 데리고 목욕탕도 못 가봤으니까요. 부모가 되고 나서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 부모들은 얼마나 속상했겠습니까. 하나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희생된 46명, 거기에 딸린 가족들. 그 모두가 참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박민택, 경서중학교 버스 참사 생존자 그 날에 참사가 낳은 희생자는 46명의 사망자가 아닌, 마흔 여섯 가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해. 힘겨운 시간을 살아온 민택 씨. 그럼에도 그 고통을 같은 아픔이 있는 친구들과는 나누려고 하질 않았어. 그리움은 있죠. 항상 친했던 친구들에 대해서 그리움은 있죠. 제가 (동참 모임에) 참석을 안 하고 있습니다. 다치지만 않았으면 참석을 했겠죠. 동창회 가는 건 그렇습니다. -박민택, 경서중학교 버스 참사 생존자 친구들을 보고 싶었지만 볼 수 없었다는 민택 씨의 마음. (민택이를) 만나고 싶은 생각이야 있죠. 어디 사냐, 식구들 어떻게 되냐, 우리 통상 그런 얘기 나누고… -최종철, 경서중학교 버스 참사 생존자 (민택이) 얘가 제일… 한 60년을 제일 힘들게 살았을 거예요. 이 친구가. 특별히 할 말은 없어요. 그냥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김현철, 경서중학교 버스 참사 생존자 '꼬꼬무'가 동창생들의 마음을 대신 전해줬어. 민택 씨를 다시 만나기를 바라는 친구들이 있다는 걸. 민택 씨는 친구들의 마음을 받아들였을까? ▲ 친구를 그리며 그로부터 얼마 후, 경서중학교 동기들의 모임이 있었어. 그날, 친구들의 마음을 전달 받은 민택 씨가 용기를 냈어. 50여 년 만에 친구들을 마주한 민택 씨. 드디어 친구의 생사를 확인한 친구들은 감격했어. 어떻게 사는지,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웠어. 종철 씨를 제외하고는 다들 민택 씨를 무려 56년 만에 처음 만나는 거야. 처음엔 살짝 어색했지만, 엊그제 만난 친구들처럼 자연스러웠어. 많이 늦었지만 민택 씨와 친구들의 작은 동창회가 이루어졌어. 이제는 민택 씨한테도 추억을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이 생겼어. 반가운 만남을 가진 이들에게는 보고 싶은 또 다른 친구들이 있어. 바로 묘역에 묻혀있는 친구들. 대부분은 가족들에 의해서 이장이 됐고, 지금은 11분만 남아계시다고 해. 동기들은 민택 씨와 함께 그들을 만나러 갔어. 여름내 자란 잡초로 가득한 묘역. 동창들은 56년 전 떠난 친구들의 묘를 정성껏 정리했어. 그리고 먼저 떠난 친구들에게 오랜만의 인사를 건넸어. 현재 무연고자일 수도 있는 11명의 친구들. 아마 무연고라고 봐야 돼요. 아무도 오질 않으니까요. 부모님은 돌아가셨을 거고, 형제 자매들이 있어도 여기까지 신경 못 쓰죠. 그 유족들도 이제 나이가 거의 70대가 다 됐을 테니까. 너희들 버려졌다고 슬퍼하지 마라. 너희들 기억하는 우리 친구들이 있고, 앞으로도 몇 년이 더 지속될지 모르겠지만. 계속 와서 우리 친구들을 덜 외롭게 할 거야. 잘 있어라. 우리 10월에 또 올 거야. 그래 볼 날이 얼마 안 남았다. 매년 10월이 되면 동창들은 묘역을 찾아서 친구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고 해. 56년이 지났지만 세상을 떠난 친구들을 챙겨주는 이들의 우정. 친구들은 서로를 잊지 않기 위해 수학여행의 그날처럼 사진을 남기기로 했어. 지금부터라도 이들의 학창 시절이 고통스러운 기억이 아닌 소중한 추억으로 남길 바라며,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야. 사고 당시에 마포구에 있다가 지금 강서구로 이전한 경서중학교는 학생수 부족으로 내년 3월에는 폐교가 된다고 해. 학교가 사라지면 자연스레 이날의 비극을 기억하는 사람도 줄어들겠지. 더욱 많은 사람이 이 기억을 이어갔으면 하는 마음에, 오늘의 이야기를 해봤어. 그런데 방송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사고 당사자들 외에도 그날의 참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어. 전혀 의외의 사람들이야. 1971년 사고가 일어난 곳에 위령비가 세워졌어. 충남 아산시 배방읍 청년들은, 참사가 일어났던 10월 14일이 되면 매년 그곳에서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고 해. 이건 누군가가 알아주지 않으면 금방 잊혀져요. '이 사건이 만약에 나에게, 우리 가족에게 일어난 일이라면 어땠을까?' '누군가가 이걸 기억해준다고 하면 얼마나 고마울까' 이 제를 지내면서 우리 배방 주민분들 뿐만 아니라, 전국에 있는 분들께 안전에 대한 경각심을 다시 한 번 세워주고 싶었습니다. -정광재, 배방청년회 회장 경서중학교 버스 참사 이후로도 우리 사회는 어린아이들과 학생들이 희생되는 대형 참사를 겪어왔어. 그때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을 반복해왔던 것 같아. 어른들의 잘못으로 아이들이 희생되는 비극, 이제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아야 돼. 그러기 위해선 절대 무너지지 않는 튼튼한 외양간을 지어야 하지 않을까.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
[꼬꼬무 찐리뷰] 회원 1천만 명 몰렸던 '프리챌'의 몰락…CEO 전제완은 왜 펜션 청소부가 됐나 [꼬꼬무</font> 찐리뷰] 회원 1천만 명 몰렸던 '프리챌'의 몰락…CEO 전제완은 왜 펜션 청소부가 됐나 등록일2026.09.18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17일 방송된 '응답하라, 자유와 도전!'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H.O.T. 토니안, 배우 한소은, 개그우먼 김효진이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사랑은 인터넷을 타고 때는 2003년 2월 23일. 부천에 사는 22살 이시언 씨는 늦은 오후 신촌 번화가를 걷고 있었어. 몇 주째 이날 만에 손꼽아 기다려온 시언 씨는 평소보다 헤어스타일도 신경쓰고 가장 멋진 옷으로 깔끔하게 차려입었어. 어딘가 모르게 긴장한 모습이야. 지금 시언 씨 뭘 하러 가는 걸까? 화려한 간판 시끌벅적한 거리를 지나 발걸음을 멈춘 곳은 한 2층짜리 술집. 계단을 올라 2층에 다다르자 한 2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쫙 모여있어. 시언 씨, 우물쭈물 다가가서 인사를 해. 그러자 너나 할 것 없이 시언 씨를 반갑게 맞이하는데, 시언 씨는 어쩔 줄 몰라 해. 왜냐? 이 사람들 오늘 처음 본 사람들이거든. 정신 차릴 새도 없이 시언 씨 손에는 술잔이 들려있어. 그때 누군가 이제 다들 모인 것 같은데 슬슬 시작해야지 라고 말해. 그리고 어디선가 케이크가 나오고, 생일 축하곡을 다같이 불러.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쌍둥이~ 생일 축하합니다~ 얘들아, 우리 모두 생일 축하한다! 아니, 스무 명이 모였는데 쌍둥이? 이게 무슨 상황이야? 여기 모인 스무 명, 그리고 시연 씨까지 전부 다 오늘이 생일이야. 게다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스물 두 살 동갑이야. 1982년 2월 23일 생인 사람들이 한 곳에 모인 거지. 그때는 쌍둥이라고 얘기를 많이 했어요. 82년 2월 23일 생인 친구들. 말 그대로 쌍둥이들. 재밌었던 게 서울에만 국한되지 않고 부산에 있는 친구, 창녕에 있는 친구, 구미에 있는 친구. 다양하게 각지에 있었던 것 같아요. -이시언, 820223 쌍둥이 모임 회원 생년월일이 같은 사람들이 전국에서 무려 스무 명이나 모였어. 이 사람들 대체 어떻게 만나게 된 걸까? 시언 씨가 쌍둥이들을 어떻게 찾았는지 알려줄게. 추억의 컴퓨터. 바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알게 된 거야. 시언 씨는 컴퓨터를 하다가 우연히 이 커뮤니티를 발견했어. 커뮤니티 이름은 '82년 2월 23일 태어난 쌍둥이'. 회원 수가 무려 200명이야. 수줍음 많은 시언 씨는 한참 온라인 상에서 대화만 나누다가, 22살 생일날 용기를 내서 처음 모임에 나갔어. 난생 처음 만난 사람들인데도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금세 친해졌대. 한참 재밌게 놀고 있는데, 건너편에 앉은 한 여성에게 자꾸 눈길이 가. 이름은 박상미. 나이는 똑같이 22살. 상미 씨는 이 모임에 참석하려고 경북 구미에서 새벽부터 올라온 열혈 멤버야. 동그란 얼굴에 긴 곱슬머리가 너무 귀엽고 성격도 아주 발랄하더래. 완전 이상형이었던 거야. 상미 씨에게 첫눈에 반한 시언 씨. 그 뒤로 모임에 꼬박꼬박 참석하며 적극적으로 구애를 하기 시작해. 오직 그녀를 보러 부천에서 구미까지 서슴없이 달려가. 그냥 좋았어요. 그 친구 딱 보는 순간. '이 친구가 있으면 계속 평생 즐겁게 살겠다' 마음에 딱 들어서요. 적극적으로 왔다 갔다… -이시언, 820223 쌍둥이 이 둘은 과연 어떻게 됐을까? 두 사람은 결국 결혼에 골인했어. 저희 2003년도에 만나서 연애하고 그리고 결혼해서 지금까지 23년 살고 있습니다. -아내 박상미 말 그대로 운명 같아요. 제 인생에 어떻게 보면 신기함을 갖고 살고 호기심이란 걸 갖고 살고, 그걸 아이들한테도 얘기를 많이 해요. 운명은 언제든 겪어볼 수 있는 일이다. -남편 이시언 항상 사람들 만나면 자랑하죠. 우리는 자랑거리예요. -이시언-박상미 부부 소중한 쌍둥이 친구들과 지금의 아내까지 커뮤니티에서 만나게 된 거야. 시언 씨에게 온라인 커뮤니티란 어떤 존재인 것 같아? 이제는 사실 우리 모두 인터넷이랑 때려야 뗄 수 없는 삶을 살고 있잖아. 불과 30년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어. ▲ 응답하라 PC통신 지금은 90년대 후반. 서울의 용산 전자상가야.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한 미국인이 소리치고 있어. 이 그래픽카드를 컴퓨터에 넣으세요. 신세계가 펼쳐질 겁니다! 전자상가 곳곳을 누비면서 영업을 펼치는 이 사람. 너도 아는 사람일 거야. 바로 세계 최대 기업 엔비디아의 젠슨 황이야. 그런데 왜 미국인인 젠슨황이 용산에서 컴퓨터 부품을 팔고 있는 걸까? 이 모든 건 편지 한 통에서 시작됐어. To. 젠슨 황. 제게는 한국을 위한 비전이 있습니다. 정말 놀라운 비전입니다. 저는 한국의 모든 국민을 초고속 인터넷으로 연결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모두가 초고속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젠슨황.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From. 이건희. 저는 누군지 몰랐던 이로부터 그 편지를 받았습니다. 아주 아름답게 적힌 글이었습니다. 편지에는 '나에게는 비전이 있습니다'라고 적혀있었습니다. '한국을 위한 비전이 있습니다'라고요. -젠슨 황, 엔비디아 CEO 우리 아버님 이건희 회장님이 보내신 편지였어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이건희 회장의 편지에 감명 받은 젠슨 황이 직접 한국을 찾아왔던 거야. 젠슨 황은 한국에서 아주 특이한 풍경을 하나 보고는, IT 산업의 미래를 꿈꾸기 시작해. 바로 한국만의 PC방 문화. 세계적으로 독특한 PC방 문화가 시작된 게, 90년대 후반이야. 당시 유행하던 게 두 가지가 있어. 하나는 스타크래프트 게임, 그리고 하나는 이거야. 이건 컴퓨터를 온라인에 연결하는 모뎀이야. 이것을 컴퓨터에 연결하면, 파란 바탕에 하얀 글씨가 뜨는 화면이 나와. 바로 PC통신이야. PC통신은 전국의 모든 곳에서 온라인으로 대화를 할 수 있게 연결해주는 서비스야. 휴대전화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 사람들은 PC통신에 푹 빠져 살았어. PC통신에 접속하면 모르는 사람과 채팅으로 얘기를 나눌 수 있거든. 이걸 소재로 만들어 대박난 영화가 배우 한석규와 전도연 주연의 '접속'.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과 교감을 나누고, 내가 쓴 글이 전국에 퍼져 인기를 끌고. 이게 얼마나 신기하고 재밌는 일이었는지. 하지만 큰 문제가 하나 있었어. 이번 달 전화비가 왜 이렇게 많이 나왔어? 너 컴퓨터 작작하라 그랬지 아빠가! PC 통신은 전화선을 통해 온라인으로 연결되는 방식이었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썼다간, 전화 요금 폭탄을 맞는 거야. 또 다른 문제는 전화와 PC 통신을 동시에 사용할 수 없었어. 누군가 통화하는 동안에는 PC 통신에 아예 접속이 안돼. 마음대로 컴퓨터를 사용할 수 없던 시절이었지. ▲ 닷컴 열풍의 시작 그러던 1998년. 우리나라에 초고속 인터넷 시대가 열려. 집집마다 초고속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온라인 세상도 달라졌어. 파란 바탕에 흰 글씨 뿐이던 화면에 이런 알록달록한 웹사이트들이 펼쳐진 거야. 당시에 초고속 인터넷이 뜨면서 같이 떠오른 키워드가 있거든. 바로 '벤처'. 지금으로 치면 스타트업 같은 거야. 너도 나도 인터넷 사이트를 만들겠다고 창업에 뛰어들면서, IT 벤처 기업들이 우후죽순 생겨난 거지. 이른바, '닷컴 열풍'이 불기 시작한 거야. 당시 인터넷 사이트 주소를 '.com' 형태로 짓는 게 유행하면서 생겨난 말이야. 근데 그 열기가 얼마나 대단했냐면, 지금 주식시장에서 반도체 기업들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지? 그때 닷컴 기업들이 그 정도였어. 웹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세상이 열렸고 다음, 한메일, 그리고 네이버. 정말 다양한 기업들이 그때 당시에 회사를 창업했던 것 같아요. 대기업에 다니던 훌륭한 인재들이 새로운 사업을 하려고 했던 그런 가능성도 엄청 넘쳐나던 시기였죠. -김지현, IT 전문가·테크 라이터 코스닥 시장이 사상 최대의 호황을 맞고 있습니다. 연속 16일째 상승이라는 진기록을 수립한 것입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 수상한 회사와 천재 CEO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999년. 25살의 대학생, 최소현 씨는 졸업을 앞두고 있었어. 졸업 직전 대학생의 제일 큰 고민은 취업이지만, 소현 씨는 그런 걱정이 없었어. 일단 학벌이 좋아. 서울대 산업디자인과생이야. 게다가 이미 입사하기로 한 회사가 있어. 그때나 지금이나 평생 직장이라 불리는 대기업, 삼성에 철석 붙은 상태야. 미래가 창창해 보이지. 그러던 어느 날, 평소 친하게 지내던 후배에게 전화가 왔어. 후배는 얼마 전에 새로 생긴 한 IT 벤처 회사에 들어갔는데, 이 회사의 명함을 만들어야 해서 산업디자인과생인 소현 씨한테 도와달라고 부탁한 거야. 소현 씨는 흔쾌히 일을 도와주기로 했어. 그런데 회사 이름을 듣고는 고개를 갸웃해. 회사 이름이 뭔가 이상하거든. 당시 상황을 소현 씨한테 직접 들어볼게. 당시는 일단은 굉장히 다양한 IT 기업들이 막 올라오기 시작했었을 때라, 이미 이런 회사들이 많이 생기고 있구나라는 트렌드는 알고 있었을 때고. 다만 비단 명함 정도밖에 안 만드는 거지만, 이 회사 이름은 왜 '자유와 도전'인가. 굉장히 단순하구나... 처음엔 조금 촌스럽기도 하고 유치하기도 하고. 자유와 도전이 뭐예요… -최소현, 현 네이버 디자인부문장 자유와 도전. 어떤 회사 같아? 소현 씨가 후배한테 너네 회사는 뭘 하는 회사야? 라고 물었어. 그랬더니 후배가 이렇게 말해. 아, 그거는 지금부터 생각을 해봐야 돼요. 이게 무슨 소리야? 황당하지? 그런데 소현 씨는 이때까지만 해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대. 그런데 며칠 뒤 그 후배가 또 연락을 해와. 일을 도와줘서 고맙다고 회사 대표가 한 번 만나자고 했다는 거야. 며칠 뒤에 소현 씨는 이 자유와 도전이라는 회사로 향했어. 서초에 있는 작은 빌딩 안에 사무실이 있어. 문을 열어보니까 크기도 작고 직원도 몇 명 없어. 한쪽에 있는 회의실로 들어갔더니 의자에 한 남자가 앉아있어. 바로 이 사람이야. 자유와 도전의 대표이사 이름은 전제완. 근데 이 사람 이력이 장난 아니야. 서울대 경영학과에 삼성물산 출신이야. 근데 삼성물산에 근무하던 시절 엄청 유명하던 사람이었대.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사건이 하나 있었거든. 때는 1988년. 당시 삼성 이건희 회장이 엄명을 내려. 우리 회사에 왜 젊은 피, 젊은 인재가 없어? 훌륭한 인재들을 좀 데리고 와봐 라고. 그때 삼성 인사팀으로 발령받은 사람이 바로 전제완이었어. 전제완이 인재를 뽑기 위해 향한 곳은 바로 대학교. 수많은 대학교를 발로 뛰면서 인재 발굴에 나섰어. 근데 하루에 만나는 학생들만 100명이 넘어. 워낙 만나는 사람이 많다 보니까 누굴 만났는지 특징이 뭔지 잘 정리가 안 되는 거야. 그때까지만 해도 체계적인 인사관리 전산 시스템이 없던 거야. 그때부터 전제완은 컴퓨터를 독학하기 시작해. 장장 5년에 걸쳐 새로운 인사관리 시스템을 직접 만들어버려. 그리고 그가 만든 이 성과물로 삼성그룹 전체의 인사 시스템이 바뀌었어. 그 공을 인정받아서 '제1회 자랑스러운 삼성인상'까지 수상해. 당시 삼성에서 PC 최고 전문가이자 IT 천재로 불린 사람이 바로 이 전제완이었던 거야. 그러던 1997년. IMF 외환위기로 많은 회사에서 구조조정을 시작해. 삼성그룹 역시 구조조정을 하고 있었어. 다들 회사에서 잘리지 않으려고 노심초사 하는데, 삼성을 제 발로 박차고 나온 사람들이 있었어. 그 중 한 명이 이해진. 지금의 네이버를 만든 사람이야. 그리고 김범수. 지금 국민 메신저 카카오의 총수가 됐지. 그리고 또 한 사람이 바로 전제완이었어. 이때 나와서 만든 회사가 바로 자유와 도전인 거야. 이런 사람이 대표로 있는 회사 어떨 것 같아? 소현 씨와 마주 앉은 전제완 대표. 이렇게 말해. 소현 씨, 삼성 가기로 했다면서? 물론 대기업 좋지. 그런데 기계적으로 일을 하는 것보다 자기 생각을 가지고 자유롭게 일을 해보는 건 어때? 소현 씨를 지금 스카우트 하려는 거야. IMF의 여파가 이어지던 시기. 안정적인 대기업 입사를 앞두고 있는 소현 씨야.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할까? '저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 걸까?'라는 그런 느낌을 처음 받았던 것 같아요. 그때부터 약간 헷갈렸죠. '큰 기업도 좋고 다 좋지만 너만의 문제를 너의 자유로움을 가지고 너의 생각대로 한번 해결해보는 건 어떻겠냐' 라는,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너무너무 멋있는 그렇게 화두를 던지셨던 것 같아요. 그때부터 약간 '이런 벤처라는 게 뭘까?', '이 대표님이 만드시는 회사가 뭘까?'라는 고민을 이제 머릿속에 조금 담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최소현, 현 네이버 디자인부문장 이 알 수 없는 끌림에 결국 소현 씨는 결정을 내려. 대기업 삼성이 아닌 작은 IT 벤처 '자유와 도전'을 선택한 거야. 그때부터 소현 씨는 자유와 도전의 디자인팀에서 일하기 시작해. 그런데 이거 뭐 어떻게 해야 될지 감도 안 와. 명색의 IT 기업인데 디자인팀 그 누구도 인터넷 서비스 디자인 경험이 없었던 거야. 소현 씨가 전 대표를 찾아가 이야기를 했어. 대표님 이대로는 답이 안 나오는데, 좀 괜찮은 선배 한 명만 데려다 주시면 안 돼요? 며칠 뒤 전 대표가 회사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데, 한 남성이 따라 들어와. 소현 씨가 가만 보니까 대학교 과 선배야. 그 이름은 조수용. 훗날 네이버와 카카오의 디자인 혁신을 이끌고, 카카오 공동대표가 되는 사람이야. 서울대 산업디자인과 시절부터 전설로 통하는 엄청난 실력자였대. 산학협력으로 삼성전자에서 디자이너 활동도 했어. 그러던 중 전 대표가 26살이었던 조수용을 디자인팀 총괄로 스카웃을 해온 거야. 이렇게 서울대, 그리고 삼성으로 연결된 선후배들이 하나 둘 '자유와 도전'으로 모이게 돼. ▲ 자유와 도전 그런데 이 회사, 뭐 하는 회사라고 했지? 이제부터 생각을 해봐야 된다 그랬잖아? 직원들이 대표에게 물었어. 근데 대표님, 저희 뭐 하는 회사죠? 라고. 처음에 '자유와 도전은 뭔가요?'부터 '그래서 무슨 서비스를 어떻게 만들고자 하시는 거예요?' 이런 얘기들을 나눴을 때. '결국 사람이 모이면 뭐든 할 수 있어'라는 거, 그럼 과연 인간은 모여서 뭘 하기를 원할까? 그러면 기술은 인간의 삶에 무슨 문제를 해결해줘야 될까? 이거를 정말 정말 매일 말씀을 하셨던 것 같고요. -최소현, 당시 자유와 도전 디자인 팀장 그때 웹은 그냥 'Just Online'이었어요. 이메일, 채팅, 검색, 그 안에서 끝나잖아요. 그런데 대표님이 '결국 인터넷도 사람이 중요하다' 그래서 사람이 모이는 건 모임이고, 그 모임의 영역을 웹으로 가져와야겠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결합시켜야 된다… -신승식, 당시 자유와 도전 마케팅 팀장 전 대표의 이야기는 이거야. 동호회, 동창회 같은 오프라인 모임을 온라인에서 할 수 있게 하자는 거야. 사람과 사람을 온라인으로 연결해주는 커뮤니티 사이트를 만들자! 그때 여기 회사 분위기는, 아주 그냥 자유분방했대. 복장도 남녀불문 반바지에 슬리퍼야. 이때가 1999년이잖아. 보수적이었던 당시 시대상과 비교해, 말도 안되는 회사 분위기지. 저희 마케팅팀에서 엔지니어팀으로 이동할 때 킥보드 타고 이동하고. 우리끼리도 '야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 할 정도로 재밌었어요. -신승식, 당시 자유와 도전 마케팅 팀장 저 야식 담당이었거든요. 킥보드에 봉투 하나 걸고 야식 배달 가고. 아마 '배민'의 전신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그렇습니다. -최소현, 당시 자유와 도전 디자인 팀장 전 대표는 직원들에게 항상 이렇게 말했대. 다 사람이 하는 일이야. 두려워하지 말고 하고 싶은 거 다 해봐. 전 대표는 PC 최고 전문가, IT 천재라고 불렸던 사람이잖아.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젊은 직원들의 도전을 물심양면 지원했어. 엔지니어 분들과 대화할 때 밀리지 않으셨어요. 기술적인 백그라운드가 본인이 공부해서 있었고. -신승식, 당시 자유와 도전 마케팅 팀장 기세도 그렇고 뭔가를 설득하는 기질도 그렇고. 영역을 확장해가는 것들, 그리고 그 이유가 너무나 분명했던 것들. 저는 테크 시대에 태어난 나폴레옹 같다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최소현, 당시 자유와 도전 디자인 팀장 회사 이름처럼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 마음껏 도전할 수 있었던 직원들. 매일같이 밤을 새며 일을 해도 너무너무 즐거웠대. ▲ 프리챌 닷컴 마침내, 2000년 밀레니엄 시대가 열렸어. 그리고 2000년 1월 1일 0시 0분, 인터넷 세상에 자유와 도전의 야심작이 첫 공개돼. 바로 이거야. 아아, 알려드립니다. 마을회의는 인터넷으로 합니다. 주소는 프리챌 컴 다 아시죠? 사이트 이름, '프리챌'. 자유와 도전을 영어로 하면, Freedom(프리덤)과 Challenge(챌린지) 잖아. 그래서 프리덤 앤 챌린지. 프리챌인거야. 당시 프리챌의 정체성은 바로 로고였어. 모자이크처럼 작은 네모 조각들이 모여서 프리챌 로고를 만들어. 그러니까 여러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서 하나가 된다는 뜻이야. 조수용 디자인 총괄의 작품이야. 당시 다른 사이트들의 초창기 모습은 이랬어. 그에 비해 프리챌은 디자인이 다르지? 보기도 편하고, 다양한 정보가 있는데 심플하게 돼 있어. 사람들이 몰려서 와글와글하는 서비스일 것이기 때문에, 차가운 기술의 냄새는 최대한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게 기능이긴 하지만 조금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을까? 이런 얘기를 저희 디자인 팀끼리도 엄청 많이 나눴고, 대표님도 그걸 원하셨던 것 같고요, -최소현, 프리챌 디자이너 ▲ 커뮤니티 전성시대 여기서 '커뮤니티 만들기' 버튼만 누르면 전 국민 누구나 쉽게 커뮤니티를 만들 수 있어.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이 모든 게 다 공짜였다는 거야. 커뮤니티 몇백 개를 만들든, 사진을 몇만 장 올리든, 전부 다 무제한인 거지. 이용자들 반응은 어땠을까? 그야말로 대박이야. 프리챌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더니 오픈 3개월 만에 회원 수 100만을 넘어서고, 3만 5천여 개의 커뮤니티가 생겼어. 그 중엔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한 커뮤니티가 있었어. 대한민국에서 옷 꽤나 입는다는 패셔니스타들이 패션 정보를 주고받기 위해 모인 커뮤니티, 이 커뮤니티의 이름은 '무진장 신발 사진이 많은 곳'. 줄이면 '무신사'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패션 플랫폼 무신사, 그 전신이 바로 프리챌 커뮤니티였던 거야. 제가 프리챌을 알게 된 건 중1 때 여름 이때부터 들어갔던 거 같아요. 패션이나 신발에 관심이 많다 보니까 그때 형들 따라서 많이 활동했던 거 같습니다. 그때는 거기가 패션위크였죠. 좋아하는 애들끼리 모여서 우리끼리 얘기하고 향유하고 이런 게 있었는데, '대박이다 어떻게 조그맣던 게시판 하나가 이렇게까지 커지지?'라는 그런 신기함이었던 거 같아요. -신현우, '무신사' 커뮤니티 유저 그 외에도 이 세상에 없던 재미있고 특이한 커뮤니티들이 마구 생겨나. 그 중 하나가 바로 '팔사모' 커뮤니티. 회원 수가 무려 8000명이었던 커뮤니티야. 제가 좋아하는 게 팔씨름이었는데, 저만 좋아할 수 없다, 다른 사람도 분명히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막연한 호기심에 프리챌에 커뮤니티를 개설했는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가입을 한 거죠 전국적으로. 연령대도 굉장히 다양했어요. 10대부터 40대, 50대까지. -한준희, '팔사모' 회장 10대 때부터 팔씨름을 너무나 좋아했던 사람인데, 한의원 하다가 바빴는데 우연하게 너무 팔씨름이 생각난 거예요. 혹시나 팔씨름 좋아하는 사람도 혹시나 모여 있을까? 이런 데도 있을까? 우연하게 생각해서 팔씨름을 쳐봤더니 모임이 있는 거예요. -김경호, '팔사모' 회원 놀라움의 연속이었죠, 매일매일 하루하루가. 아침에 눈 떠서 커뮤니티에 접속해보면 회원수가 갑자기 100명이 늘어나있고. 또 자고 나면 100명이 늘어나있고. 그런 날의 연속이었죠. -한준희, '팔사모' 회장 팔씨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야. 팔사모엔 매일같이 이런 글들이 올라왔어. 저는 강원도 동해 사는데 팔씨름은 한 번도 져본 적이 없드래요. 이야 반갑구먼유. 저는 충남 사는디 팔씨름으로는 제 적수가 없구먼유. 다들 자기 동네에서 팔씨름을 져본 적이 없다는 거야. 그러던 어느날, 팔사모에 공지가 하나 올라와. 드디어 창과 방패의 대결이 열릴 예정입니다. 전국에 숨어 계신 고수분들의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팔사모 회장 한준희 씨가 거국적으로 팔씨름 대회를 연 거야. 전국 방방곡곡에서 팔씨름 강자들이 모여들었어. 얼마나 재밌었으면 1박 2일동안 잠도 안자고 계속 팔씨름을 했대. 정말 덩치 좋으신 제주도에 한 번도 져본 적이 없는 그분이 올라오셨다가 여러 사람한테 지고 가셨죠. 하하하. 1박 2일동안 팔씨름을 계속 하는 거예요. (그 전까지는) 연결될 수 있는 고리가 아예 없었어요. 각 지역별로 센 사람들끼리 다만 몇 사람끼리나 있었지. 공통분모라는 거를 프리챌이 만들어준 거죠. -김경호, '팔사모' 회원 세상에 나 혼자인 줄 알았던 사람들도 온라인 커뮤니티 덕에 모이고 또 교감하게 됐어. 어떤 커뮤니티는 대부분의 회원들이 30대 초반 여성들로 구성돼 있었어. 이건 어떤 커뮤니티일까? 직접 들어볼게. 저희가 그때 '노처녀 통신'이라는 동호회를 만들었는데, 그 이름 들으면 느낌이 오잖아요. 그 당시에 노처녀라고 불리는 저와 친구들, 30살, 31살, 28살에서 30대 초반 그 사이 친구들이 모여서, 우리가 노처녀라는 소리를 듣고 이렇게 구박을 받으면서 우울하게 살 일이 아니다, 우리끼리 뭉쳐서 즐겁게 살자. 주변에 더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더 잘 지냈어야 노처녀가 안 됐는데, 온라인 세상에서 만나는 새로운 사람이 너무 신기한 거예요.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기쁨? 그런 게 온라인 동호회의 기쁨이었죠. -최재경, 프리챌 '노처녀 통신' 운영자 이 노처녀 통신에선 특별한 정기모임을 열었어. 이름은 '재활용 파티'야. 뭘 재활용했을까? 나랑 잘 될 일 없는 남성 지인들을 데려와서, 다른 회원에게 소개시켜주는 단체 미팅이야. 완전 로테이션 소개팅이지. 결전의 날, 한 카페에 모인 노처녀통신 회원들이 문 쪽을 바라보고 일렬로 쭉 앉아있어. 잠시 후 남자 3명이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일렬로 쭉 앉아있는 여자들을 보고 그대로 나가버린 거야. 이 '웃픈' 에피소드, 지금까지 추억으로 남아있다고 해. 빨리 누굴 만나 결혼해야 한다는 조바심보다, 마음 맞는 친구들을 만난 즐거움이 더 커졌대. ▲ 프리챌의 독주 이렇게 다양한 취미와 사연을 가지고 프리챌에 모인 사람들. 커뮤니티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쌓아갔어. 닷컴 열풍 속, 프리챌이 인기를 끌면서 회사는 승승장구해. 직원들도 삽시간에 늘었어. 직원이 겁이 날 만큼 늘었어요. 내선 번호 백몇십 번까지는 다 외웠는데, 150명 넘어가고 나서부터는 못 외우겠더라고요. 우리 진짜 여기서 대박 나는 거야? -최소현, 프리챌 디자이너 그리고 프리챌은 미국 GE 캐피탈에서 투자까지 받아. GE, 제너럴 일렉트릭. 발명왕 에디슨이 설립한 당시 세계 최대 기업이었어. 지금의 엔비디아, 마이크로소프트처럼 어마어마한 영향력이 있었던 미국의 대표 기업, 그 제너럴 일렉트릭의 금융 자회사가 바로 이 GE 캐피탈이었어. 그런 회사에서 대한민국의 신생 벤처 회사에 투자를 한 거야. 그뿐만이 아니야. 한 남자가 프리챌 사무실에 찾아왔어. 프리챌이 투자 받을 때 기업 조사를 했던 GE 캐피탈 담당자야. 그가 프리챌에 입사하고 싶다는 거야. 그분이 조사하는 과정에서 프리챌이 너무 매력있다고 판단해서 GE 캐피탈을 퇴사하고 프리챌에 입사했습니다. 전 그거 보고 '진짜 우리 회사 대단한가 보다'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신승식, 프리챌 마케팅 팀장 사실 GE 캐피탈이 더 큰 회사인데. 프리챌의 위상 얼마나 대단했는지 보이지? 프리챌에서 만들어진 커뮤니티는 최대 110만 개, 회원수는 천만 명을 달성했어. 2000년대 대한민국 인구가 4600만 명 정도 됐거든. 다섯 명 중에 한 명은 프리챌 커뮤니티에 가입했다는 거지. ▲ 사이좋은 세상 그런데 이 모습을 누구보다 부러워하던 한 IT 벤처 기업이 있었어. 이 기업이 만든 사이트 이름은 '사이좋은 세상'. 사이좋은 세상은 프리챌의 커뮤니티와 비슷한 '클럽'이라는 서비스를 제공했어. 하지만 반응은 처참했어. 회원수가 많은 프리챌 쪽으로 사람들이 계속 몰렸던 거야. 게다가 사이좋은 세상은 사이트 디자인부터 투자 비용까지 프리챌과 비교하면 너무 아마추어 같았던 거지. 거기(프리챌)는 프로고 우리는 아마추어였어요. 지금 생각하면 '오 저렇게 하는 거야?' (프리챌은) TV 광고도 하고 그랬으니까. 우리는 부러웠죠. '이야 저렇게 질러야 되는데'. -이동형 대표, 사이좋은 세상 프리챌은 기본적으로 자금력과 투자도 많이 받고 제대로 전략이나 이런 걸 잘 세워서 치고 나가고. 그런 부분에서 완전히 확연하게 차이가 났죠. -이정태 이사, 사이좋은 세상 이 사이좋은 세상은 직원들 월급도 제대로 못 주는 상황이야. 폐업의 문턱에서 대표는 이 사이트를 살릴 마지막 도전을 하기로 해. 전 직원 앞에서 이렇게 얘기했어. 지금부터 남자와 여자로 나눠서 신규 서비스 하나씩 가져와. 조건은 딱 두 개다. 하나, 사이가 좋을 것, 둘, 돈을 벌 것. 며칠 뒤 남자팀과 여자팀의 발표가 시작돼. 사람들이 사이가 좋으려면 서로 대화를 많이 나눠야 한다 며 남자팀이 가져온 건 바로 채팅 서비스였어. 타 사이트에 이미 넘쳐나던 채팅 서비스는 딱히 신선하지는 않았어. 이어 여자팀의 발표가 시작돼.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으려면, 우선 나라는 존재가 있어야죠. 사람들끼리 만나게 하려면, 먼저 온라인 상에 나라는 정체성이 생겨야 한다 는 거야. 남자팀과 여자팀 중 누가 이겼을까? 사이좋게 지내는 사람들을 관찰해서 서비스를 디자인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딴 사람하고 사이 좋으려면 나의 정체성이 어딘가 있어야 하잖아요. 우리 그룹 커뮤니티는 그게 없었던 거예요. 이제 이쪽(여자팀)이 이긴 거죠. 여기(남자팀)도 사이 좋게 되긴 하는데, 이거(여자팀)만큼 사이 좋은 것 같지는 않아. 기본적으로 우리 철학이 여기 맞는 거예요. 그 프로젝트가 미니홈피 프로젝트고, 그게 성공해서 싸이월드가 살았죠. -이동형 대표, 사이좋은 세상 자신만의 이야기와 사진으로 미니홈피를 꾸밀 수 있는 인터넷 사이트 싸이월드. 사이좋은 세상이라는 철학으로 만든 사이트였어. 벼랑 끝에서 살아남기 위해 만든 서비스가 바로 이 미니홈피. 말 그대로 사람마다 하나씩 주어지는 작은 개인 홈페이지야. 쉽게 말하면 온라인 상의 방을 하나씩 분양을 해 준 거야. 나만의 방을 마음껏 꾸며서 나라는 존재를 표현할 수 있게 하는 거지. 싸이월드는 미니홈피 개발에 사활을 걸었어. 그리고 2001년 9월, 드디어 싸이월드 미니홈피가 세상에 공개돼. 지금은 싸이월드 서비스가 중단돼서 추억의 미니홈피를 만날 수가 없어. 미니홈피에선 대문 사진부터 자기소개, 방 꾸미기까지 모든 걸 내 맘대로 할 수 있어. 싸이월드만의 야심작이 있어. 바로 '일촌' 서비스. 일촌을 맺은 사람들끼리는 서로 미니홈피에 짧은 글을 남길 수가 있어. 그리고 또 빼놓을 수 없는 게 있지. 바로 BGM. 업계 최초로 선보인 서비스, 그야말로 혁신 중에 혁신이었지. 그리고 미니홈피를 꾸미려면 '도토리'가 필요해. 싸이월드 안에서 사용하는 사이버 화폐야. 방도 꾸미고 친구한테 선물도 하고, 그런 용도였지. 근데 왜 하필 도토리였을까? 제 고향이 경상북도에 있는 소백산 밑이거든요. 저는 도토리가 익숙해요. 그걸로 딱지치기 했던 기억도 있고. 화폐가 되려면 흔해야 되고, 둘째 친근해야 되고. 결정적으로 100원보다 비싸면 안 되고. 도토리가 화폐해야 되는 이유를 찾았죠. 사이 좋게 하기 위해서. -이동형 대표, 사이좋은 세상 미니홈피, 싸이월드 대표의 마지막 희망이었다고 했잖아. 반응은 어땠을까? 장난 아니었지. 미니홈피부터 BGM, 도토리, 싸이월드가 처음 시도한 모든 게 다 대박을 치기 시작한 거야. 지금 인플루언서들은 유튜브나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에 내 일상의 모든 것들을 예쁘게 꾸며서 사람들한테 알리려고 노력하잖아요. 미니홈피는 바로 그 내 아이덴티티, 나의 자아성을 주체성을 그대로 고스란히 만들 수 있게끔 축적할 수 있게끔 해준 거죠. 본질적으로 커뮤니티를 바꾼 거죠. 어떻게? 공동의 공간이 아닌, 찾아가는 게 아니라, 나의 공간 속으로 사람들이 찾아오게 만드는 혁신적인 새로운 서비스로 리포지셔닝하면서, 대한민국의 네이버, 다음 버금가는 형태의 서비스로 거듭나게 되죠. -김지현, IT 전문가·테크 라이터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의 욕구도 바뀌어. 수천 명이 모인 커뮤니티의 한 구성원으로서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나만의 공간에서 내 얘기를 하는 걸 더 선호하는 분위기가 된 거야. 그 변화의 중심에 있던 게 바로 싸이월드. 한국형 SNS 시대의 시작이었어. ▲ IT 전쟁의 시대 이를 지켜보고 있는 프리챌. 엄청난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해. 되게 위협적으로 봤고. 우리 대표님이 되게 그때 좀 화도 많이 내셨고 신경질적이셨어요. 대표님 생각은 '우리가 디자인도 기술도 다 쟤네보다 잘하는데, 쟤네들은 다 따돌릴 수 있어'. -신승식, 프리챌 마케팅 팀장 프리챌 역시 시대에 발맞춰서 이런 서비스를 내놨어. 프리챌의 신규 서비스 '마이홈피'. 이름도 비슷해. 사실 당시에 IT 벤처끼리 서로를 모방하는 서비스 경쟁이 치열했어. 다음에서 카페 서비스를 출시하자 네이버에서도 똑같은 이름의 카페 서비스를 내놓은 일도 있었어. 그런데 싸이월드에서 미니홈피는 어떤 존재야? 벼랑 끝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만든 서비스잖아. 프리챌의 마이홈피를 보고, 싸이월드에서는 어떤 마음이었을 것 같아? 싸이월드와 프리챌은 표절 여부를 두고 소송전까지 벌여. 하지만 싸이월드의 패배였어. 왜? 법원의 판단은 개인 홈페이지 서비스를 어느 한 기업이 독점할 수는 없다는 거였어. 싸이월드가 패배로 주눅들었던 그때, 뜻밖의 소식이 들려와. 프리챌에서 커뮤니티 개설자에게 월 3천원씩 돈을 받겠다고 한 거야. 프리챌의 가장 큰 장점이, 커뮤니티를 몇 개를 만들든 무조건 무료였잖아. 그런데 갑자기 유료화를 선언한 거야. 물론 싸이월드에서도 도토리를 사야 미니홈피를 꾸밀 수가 있었잖아. 그런데 이건 개념 자체가 약간 달라. 도토리는 안 사도 미니홈피 쓰는 데는 문제가 없어. 그런데 프리챌은 돈을 안 내면 커뮤니티 운영 자체를 못하게 한 거야. 그럼 이용자들은 어땠을까? 뭐 일단 너무 충격적이었고 배신감이 들었고, '그러면 우리가 돈을 내고서 이거를 해야 되는 거냐' 화가 많이 났던 것 같아요. 되게 분노하고. 게시판에도 막 욕이 올라왔었거든요. -신현우, '무신사' 커뮤니티 유저 '따르지 않을 시에는 운영 권한을 축소하겠습니다' 약간 협박 아닌 협박이 섞인 그런 공지였던 걸로 기억을 해요. 그래서 많은 운영자분들이 굉장히 불쾌했을 겁니다, 그 당시에. -한준희, 프리챌 '팔사모' 커뮤니티 회장 민심이 폭발했어. 심지어는 프리챌 직원들도 반대했어. 유료화는 전제완 대표 개인의 결정이었거든. 대체 왜 그는 이런 결정을 한 걸까? 프리챌 유료화 사태를 두고 국회에서는 공청회까지 열려. 그때부터 프리챌의 분위기는 어수선해지기 시작했어. 이용자가 빠지면서 110만 개였던 커뮤니티는 순식간에 40만 개로 줄어들고 말아. IT 업계가 시끌시끌하던 그때, 프리챌에 제대로 한 방을 날린 곳이 있었어. 바로 싸이월드. 여러분 저희 싸이월드는 약속한대로 평생 무료입니다. 저희는 여러분과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프리챌에서 이탈한 사람들이 전부 싸이월드로 가기 시작해. 그때는 '인터넷이라는 서비스는 무조건 다 기본적으로 무료다' 이게 딱 박혀 있었기 때문에. -이정태, 당시 싸이월드 이사 그래서 잘 하면 우리한테 기회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사이좋은 세상 우리가 만들 수 있을 것 같다고… -이동형, 당시 싸이월드 대표 싸이월드는 그때부터 날개를 달고 훨훨 날았어. 훗날 전 국민의 절반인 2500만 명이 사용하는 대한민국 대표 SNS로 자리매김해. 시간이 흘러서 2010년. 닷컴 기업들은 예상치 못한 흐름에 직면하게 됐어. 스마트폰의 시대가 열린 거야.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서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이 등장을 하면서, 인터넷 사이트들은 점점 이용자들을 잃게 돼. 찬란했던 닷컴 시대가 막을 내리기 시작한 거지. 인스타그램이나 엑스(옛 트위터) 혹은 페이스북 같은 서비스는 찾아오고 찾아가는 게 아니라 콘텐츠가 나한테 옵니다. 그걸 피드라고 해요. 미니홈피는 그 공간으로 찾아오는 거고, 이거는 피드가 나한테 오는 거고. 그래서 기존에 웹에서 잘 나가던 서비스가 그대로 스마트폰에서 이어지기는 어려워요. 서비스의 기본적인 구조가 바뀌거든요 완전히. -김지현, IT 전문가·테크 라이터 잘 나가던 싸이월드 역시 외래 SNS에 밀려나기 시작했어. 프리챌 역시 변화하는 시대 속에 살아남지 못하고 2013년 추억 속으로 사라지게 돼. 그 후 싸이월드 창업자들은 IT 관련 강의, 스타트업 컨설팅을 하는 등 새로운 시대에서 활약하고 있어. 프리챌에서 뿔뿔이 흩어진 직원들은 우리나라 IT 산업을 이끄는 거목들로 성장해. 프리챌의 디자이너 최소현 씨, 지금 네이버의 디자인 부문장을 맡고 있어. 디자인 총괄 조수용 씨는 대한민국 대표 IT 기업 카카오 대표이사를 역임해. 누군가는 청와대 소속 국가인공지능전략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전 세계를 사로잡은 콘텐츠 브랜드 '핑크퐁'을 만든 대표가 됐다고 해. ▲ 프리챌 대표의 근황 근데 중요한 사람이 빠진 것 같지 않아? 이 모든 인재들을 한데 모아 그 시절 인터넷의 흐름을 바꿔놓은 사람. 1세대 벤처 CEO이자 IT 천재라 불리던 프리챌의 전제완 대표. 그는 지금 뭘 하고 있을 것 같아? 어떤 모습일지, 그를 찾아 강원도 양양으로 갔어. 네, 맞습니다. 제가 전제완입니다. 지금 잔디가 많이 자라서 깎고 있거든요. 쓰레기도 버려야 되고, 그다음에 자쿠지에 물도 받아야 되고. (펜션에서 일하는지 묻자) 예 그렇습니다. 청소가 제 전공이고요. 좋은 말로 하면 정원관리사. 거름도 줘야 되고 풀도 뽑아야 되고 잔디도 깎고. 뭐 이게 제 주전공인데… -전제완, 전 프리챌 대표 전제완 대표는 양양의 한 펜션에서 청소부로 일하고 있었어. 사업을 하다가 이게 어려워지는 그 고통은, 사실은 인생이 거의 파탄 지경에 이르는데. 시름을 잊어야 되니까 여기 와서 청소하고 있는 거예요. 한군데 집중을 해야 되거든요. 그래도 자꾸 생각이 나는 게, 그거는 그만큼 제가 마음을 못 비운 거죠. 그게 금방 비워지나요 제가? (프리챌 오픈) 1년 만에 국내 TOP3로 진입을 시킨 구조를 가졌으니까. 회원 천만 명이란 건 사실 우리나라 인터넷 다 쓰는 거하고 똑같잖아요. 그 마음을 다 비울 수 있다면 제가 해탈하는 사람이죠. 머리만 없지 제가 중 같은 수도를 하는 사람도 아니고, 잘 안돼요. -전제완, 전 프리챌 대표 모든 사람들과 연을 끊고 지금은 펜션 청소, 대리운전을 하며 살고 있다고 해. 한때 대한민국 벤처업계에 한 획을 그었던 사람에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IMF 구조조정 시기에 회사를 박차고 나와 야심차게 프리챌을 만든 전제완 대표. 처음에 프리챌이 잘 나갔을 땐 세상 두려울 게 없었다고 해. 시청률 한 50% 가보세요. 우리 PD님, 감독님, 촬영감독님들이 잠 안 자죠. 재방송 보느라고 그거 자겠어요? 그냥 비슷한 거예요. 간이 침대에 있고 막 자빠져 자고 의자 붙이고 자도, 그냥 다들 즐거웠던 거예요. 일하는 것들이. 사용자 엄청 늘지 그러니까 재밌을 수밖에 없었죠. 다 재밌게 일했던 것 같아요. -전제완, 전 프리챌 대표 ▲ 닷컴 버블 붕괴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용자 수가 많아질수록 회사는 계속 적자가 나. 서버 유지비부터 하드웨어 비용, 네트워크 사용료까지 서비스가 커질수록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대. 회원 100만 명 정도의 서비스를 운영하려면 하드웨어 비용만 한 달에 30억 원이 들었대. 이렇다 보니 GE캐피탈에서 받았던 투자금은 금세 떨어졌어. 거기다가 또 큰 문제가 하나 생겼어. IT 관련 주가가 폭락하기 시작한 거야. 묻지마 투자에 주가가 치솟던 코스닥 시장은, 떨어질 때도 기록적이었습니다. 코스닥 시장의 대폭락에 국내 벤처기업들이 몰려있는 테헤란 밸리도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중 이른바 '닷컴 버블 붕괴'. 기대만큼 실적이 따라주지 못하니까 IT 벤처기업들의 거품이 한순간에 꺼져버렸대. 이때 모든 벤처기업이 휘청이기 시작했어. 싸이월드는 한창 잘나가던 시기에 대기업 SK에 매각돼. 전제완 대표는 투자자를 찾아서 백방으로 뛰어다녔어. 프리챌의 가능성과 인터넷 산업의 미래를 설명했어. 이 바닥에서 1등만 하면 시가총액 1조는 거뜬히 넘을 겁니다. 이 양반이 벤처하더니 정신이 나갔나? 지금 삼성물산 시총이 얼마인 줄 알아? 2000년대 말 삼성물산의 시가총액은 약 3조였어. 그러니까 투자자들 입장에서 전제완 대표의 말, 어떻게 들렸겠어?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IT 산업의 잠재력을 가늠하지 못했던 거야. 그런데 2026년, 네이버 시총이 30조야. 겉으로는 화려했던 프리챌. 안에서는 벼랑 끝에 몰리고 있었어. 그래서 선택한 불가피한 방법이 바로 유료화였던 거야. 전 대표는 유료화를 앞두고 프리챌에 이런 편지를 올렸어. 안녕하세요. 프리챌 대표이사 전제완입니다. 갑작스러운 프리챌 커뮤니티 유료화 발표로 많은 당혹감이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회원님들께 진심으로 사과를 올립니다. 프리챌 입장에서는 지속적인 기술 개발을 하기 위하여 회사에 운명을 걸고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프리챌은 가장 좋은 소프트웨어와 시설 인프라로 보답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한 커뮤니티 유료화였음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한 달에 3천 원을 받는 대신 사이트에 광고도 없애고,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어. 우려와는 달리 보름 만에 20만 개의 유료 커뮤니티를 확보했어. 이대로라면 프리챌 문제없이 운영할 수 있을 것 같아. ▲ 몰락과 실패 그러던 2002년 12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벤처 업계를 뒤흔든 사건이 벌어지고 말아. 검찰은 어제 전 씨에 대해 주금가장납입과 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습니다. 회사 유상증자 과정에서 수십억 원대의 주식 납입금을 가짜로 내고 120여억 원을 횡령한 혐의도 받고 있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중 전제완 대표가 갑자기 구속된 거야. 실제로 납입하지 않은 자본금을 납입한 것처럼 꾸민 혐의와, 주식 대금을 회사 돈으로 지급한 횡령 혐의였어. 전 대표는 고의가 아니라고 주장했어. 회사 자금 사정이 어려워서 불가피하게 내린 경영상의 판단이었을 뿐, 개인적인 이득을 취할 목적은 아니었다는 거야. 하지만 그는 결국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받게 돼. 그러니까 (경영상) 위기 관리가 생기니까 역시 제대로 된 판단을 못했어요. 내가 결국은 거기(위기 관리)에 적합하고 거기에 맞는 구조를 못 짠 거죠. 그러니까 실력이 부족한 거야. 부족했어.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금 이 시점에 와서 본다면, 프리챌 유저들한테는 제가 이 자리를 빌려서, 끝까지 데이터를 지켜주지 못한 게 죄송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릴게요. -전제완, 전 프리챌 대표 그렇게 전 대표는 2년의 형기를 마치고 2004년 출소해. 한참 시간이 흘러서 2016년, 싸이월드 창업자들은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듣게 돼. SK가 싸이월드를 더 이상 갖고 있기에 그렇게 미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서, 싸이월드 팀을 분사시켰거든요. 그래서 잘 안 됐어요. 안 되고 있는데 어느 날, 프리챌 사장이 같이 하기로 했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처음에 귀를 의심했죠. -이동형, 전 싸이월드 대표 일종의 적군의 수장이잖아요. 적의 수장이 갑자기 어느 순간, 싸이월드 대표가 된다고? 이게 뭐지?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전확렬, 전 싸이월드 이사 그런데 지금 전 대표, IT와는 전혀 상관없는 생활을 하고 있잖아?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싸이월드가 가지고 있는 그 데이터의 역사성, 중요성을 간과하면 안 된다는 거지 나는. 그게 보존이 돼야 하는 데이터라고요. 좀 어렵지만 끊임없이 해 나가서 진짜 나중에 다 살아나면 고객들이 '열심히 해서 이렇게 만들어줬구나 잘 쓰고 있어' 그런 일들을 해보고 싶었어요. (싸이월드) 열심히 했어요. 돈도 한 300억 이상 투입을 해서 개발을 하다가, 코로나19 딱 터지면서 더 이상 진행을 못 하겠더라고요. 잘 가다가 9부 능선에 갔는데 왜 마지막 발을 디디는데 거기가 낭떠러지인 거야 이게. 뭐 첫째는 제가 실력이 없는 것이겠죠. 그러니까 잘 하지 못한 CEO가 경영자가 못 한 게 첫 번째 잘못이고. 두 번째는 사업은 실력만으로 되는 건 아니고 운이 좀 있어야 되는데. 예기치 않은 어떤 특수한 상황 때문에 두 가지(프리챌, 싸이월드) 다 무너진 걸 보고, 저는 사업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죠. 나로 인해서 시작된 일에 대해서 내가 그걸 연연하면 미래가 없어. 흘러간 물로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단 말이에요. -전제완, 전 프리챌 대표 싸이월드 개발에 필요한 투자를 한창 받으러 다니던 2019년, 코로나19 팬데믹이 터진 거야. 세계적으로 경기가 침체되면서 투자가 뚝 끊겨. 임금 체불과 횡령 혐의로 형사처벌까지 받게 돼. 싸이월드도 살리지 못했던 거지. 1세대 벤처 신화를 이끈 사업가이자 우리나라 IT 산업의 성장에 한 획을 그었던 전제완. 결국 자연으로 낙향해 살게 됐어. 1세대 벤처 기업들은 시대의 뒷문으로 사라졌지만, 그 시절 벤처의 꿈을 품었던 사람들은 지금도 그때를 잊지 못한다고 해. 열정만으로 살았던 시기인 거 같아요. 내 일 회사 일 안 가리고. 정말 열정으로 똘똘 뭉쳐서 일했던 거 같고. -신승식, 전 프리챌 마케팅 팀장 마음껏 상상하고 할 수 있는 거 다 꺼내놔 보고. 저에게는 자유와 도전이 가능하게 했던 첫 번째 운동장이라고 생각하고 싶어요. -최소현, 전 프리챌 디자인 팀장 저는 싸이월드가 감성적으로 말하면 내 딸 같거든. 진짜 농담이 아니고 딸처럼 느껴져요. -이동형, 전 싸이월드 대표 지금도 싸이월드 창업 멤버라고 하면 사람들이 일단 좋게 봐주고. 최고의 레퍼런스다. -전확렬, 전 싸이월드 이사 저에게는 젊음입니다, 젊음. 내 젊음이라고 생각하면 싸이월드를 같이 떼려야 뗄 수 없죠. -이정태, 전 싸이월드 이사 그들의 도전은 오늘날 대한민국이 IT 강국으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됐어. 그 시절 온라인 커뮤니티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현실만큼이나 따뜻한 공간이었어. 우리가 지나간 옛날의 편지를 다시 읽어보면 드는 그런 기분처럼, 나의 진정한 어떤 부분을 거기에 남겨두었는데 내가 그대로 문을 닫았다는 느낌… -최재경, 프리챌 '노처녀 통신' 운영자 그냥 일기장이니까, 언제라도 난 꺼내볼 수 있는 게 있었는데, 이제 그 서랍 자체를 드러낸다 그러니까 많이 많이 아쉬웠죠. -신현우, '무신사' 커뮤니티 유저 '꼬꼬무'가 이번 방송을 준비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있어. '잊고 싶지 않다'는 것. 소중한 기억들이 담긴 이 일기장을 꼭 지키고 싶다는 거지. 그 마음은 언젠가 우리의 추억을 되찾는 열쇠가 되어줄 거야.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
[스브스夜] '꼬꼬무' 초고속 인터넷 시대와 함께 찾아온 '닷컴 열풍'···그때 그 사람들은 어디에? [스브스夜] '꼬꼬무</font>' 초고속 인터넷 시대와 함께 찾아온 '닷컴 열풍'···그때 그 사람들은 어디에? 등록일2026.09.18 닷컴 열풍의 주인공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17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응답하라, 자유와 도전! 이라는 부제로 지금처럼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 사람들을 한 곳에 모이게 했던 문화를 조명했다. 과거 통화 요금 폭탄도 감수하고 몰래 접속하던 PC 통신 시절을 거쳐 초고속 인터넷 시대가 열리며 닷컴 열풍이 불었다. IT 벤처기업들이 우후죽순 생겨나며 닷컴 열풍을 선도하던 그 시절 (주)자유와 도전은 서울대 경영학과와 삼성 물산을 거친 전제완 대표를 중심으로 서울대와 삼성으로 연결된 인재들이 하나 둘 모였고 이들은 프리챌 닷컴을 만들어 오픈했다. 삼성물산 시절 컴퓨터를 독학해 새로운 인사관리 시스템 만들어 당시 삼성의 인사 시스템을 개편시킨 공을 인정받아 제1회 자랑스러운 삼성인상 수상했던 전제완. 그는 1997년, IMF 외환 위기에 삼성을 나와 자유와 도전을 만들었고 인재들을 하나 둘 모았다. 그리고 이들은 누구나 언제 어디서든 손쉽게 커뮤니티를 만들 수 있는 프리챌 닷컴을 만들었고 이는 오픈 3개월 만에 회원수 100만 돌파, 3만 5천여 개의 커뮤니티 개설로 대박이 났다. 대한민국 대표 패션 플랫폼 무신사도 이곳의 커뮤니티가 전신. 온라인 커뮤니티 덕에 모이고 교감하게 된 사람들은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기쁨으로 온라인 커뮤니티에 모여든 이들 덕분에 승승장구하게 된 프리챌. 그리고 비슷한 시기 클럽 서비스를 제공하던 사이좋은 세상은 프리챌의 자본과 인재풀을 부러워하며 자신들만의 새로운 서비스를 만들었다. 이들이 만든 것은 한국형 SNS의 시작인 미니홈피 서비스가 있는 싸이월드를 오픈했고 업계 최초 BGM 서비스, 사이버 화폐 도토리 서비스 등을 도입하며 엄청난 대박을 냈다. 직접 찾아가는 공동의 공간 커뮤니티에서 사람들이 찾아오는 나만의 공간으로 혁신적인 새로운 서비스로 포지셔닝하면서 대한민국의 네이버, 다음 버금가는 형태의 서비스로 거듭난 싸이월드. 싸이월드의 등장으로 위기감을 느낀 프리챌은 미니홈피를 빼닮은 마이홈피 서비스를 오픈했고, 커뮤니티 운영 유료화를 선했다. 그러나 이에 폭발한 민심으로 이용 적어 순식간에 빠지며 반토막이 났다. 그리고 2010년 닷컴 기업들은 예상하지 못한 스마트폰의 시대를 직면하게 되었고 정보가 알아서 찾아오는 피드형 SNS의 등장으로 닷컴 시대의 몰락을 맞이했다. 서비스의 기본적인 구조가 바뀌며 외래 SNS에 밀린 싸이월드. 그리고 급기야 2013년에는 프리챌이 서비스 종료를 선언했다. 이후 싸이월드 창업자들은 새로운 시대에서 맹활약 중이고 프리챌 전 직원들은 현재 네이버 디자인 부문장, 카카오 공동 대표 이사, 청와대 소속 국가인공지능전략위원회 위원, 핑크퐁 탄생시킨 대표 등 우리나라 IT 산업의 거목으로 성장했다. 그런데 그들 속에 프리챌의 대표 전제완은 없었다. 현재 양양의 한 펜션에서 청소부로 일던 그는 사업을 하다가 어려워지는 고통은 엄청나다. 사실 인생이 거의 파탄 지경에 이르는데 시름을 잊어야 하니까 여기 와서 청소를 하고 있는 거다. 한 군데 집중을 해야 해야 잊을 수 있으니까. 그래도 자꾸 생각나는 게 그만큼 마음을 못 비우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쉽게 비워지냐. 1년 만에 국내 TOP3 진입을 시킨 구조를 가졌으니 그 마음을 다 비울 수 있다면 나는 해탈한 사람일 것이다 라고 했다. 모든 이들과 연을 끊고 지금은 펜션 청소, 대리운전을 하며 살고 있다는 전제완 전 프리챌 대표. 사실 프리챌은 사이트가 승승장구할수록 회사는 적자를 안게 되는 구조였다. 이에 투자금은 금세 동이 났고, 그 무렵 IT 관련 주가의 폭락 시작으로 닷컴 버블의 붕괴를 맞았다. 전 대표는 투자를 위해 발 벗고 뛰었지만 IT 기업의 잠재력을 알아주지 않고 벼랑 끝으로 내몰리던 프리챌은 커뮤니티 운영 유료화를 선언했다. 이에 돌파구를 찾았나 싶었던 것도 잠시. 2002년 12월, 전제완 전 대표가 구속된다. 회사 자금난에 따른 불가피한 경영 판단으로 사익 취할 목적이 아니었다고 해명했음에도 징역 1년 실형을 선고받은 전 대표는 프리챌 유저들한테 이 자리를 빌려서 끝까지 데이터를 지켜주지 못해 죄송하다 라고 사과의 마음을 전했다. 이후 그는 싸이월드의 데이터 역사성, 중요성을 간과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싸이월드를 인수해 300억 이상 투자해 개발을 하던 전 대표. 하지만 코로나가 터지며 결국 싸이월드도 살리지 못하고 이제는 그때를 추억하기만 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SBS연예뉴스 김효정 에디터)
[꼬꼬무 찐리뷰] 바닷물 솟구치는데 입구 막아버린 일제…183명을 수중 매장한 '조세이 탄광' 잔혹사 [꼬꼬무</font> 찐리뷰] 바닷물 솟구치는데 입구 막아버린 일제…183명을 수중 매장한 '조세이 탄광' 잔혹사 등록일2026.09.12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10일 방송된 '검은 뼈 - 49년 만에 전해진 부고'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전 국가대표 수영선수이자 SBS 해설위원 박태환, 가수 김종서, 배우 변요한이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낯선 곳에서 온 편지 때는 1991년 11월. 인천에 사는 쉰 살의 박정일 씨한테 편지 한 통이 도착해. 그런데 편지 봉투에 적힌 발신 주소를 보는 순간, 정일 씨가 고개를 갸우뚱 해. 편지는 모두 두 장이야. 한 장은 일본어, 다른 한 장은 한국어 번역본이야. 그런데 이 편지를 읽으면 읽을수록 정일 씨 머릿속이 점점 혼란스러워져. 대체 왜 그랬을까? 이게 그날의 편지 내용이야. 갑자기 편지를 드려서 놀라실 줄은 압니다. 저희는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에 사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돌아가신 분들의 본명을 알 수가 없어, 일본식 이름만 적어 편지를 보냅니다. 부디 억울하게 생을 마감하신 분들의 본명과, 유족분들께서 당시 사망 소식을 알게 되신 경위를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1991년 10월 28일,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에서 타케노부 올림 편지를 보낸 곳은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 보낸 사람의 이름은 타케노부. 갑자기 일본에서 날아온 편지. 그것도 전혀 모르는 사람이 보낸 거야. 정일 씨는 궁금했어. 타케노부가 누구지? 그리고 내 주소는 어떻게 알았을까? 정일 씨는 놀랍고 황당하기까지 해. 그 내용도 충격적이잖아. 그런데 사실 이 편지가 정일 씨한테 오기까지, 그리고 편지를 보낸 타케노부 씨에게도 믿기 힘든 엄청난 사연이 숨어있어. 편지 내용이 어딘가 좀 묘해. 야마구치현 우베시, 돌아가신 분이라… 정일 씨는 편지를 읽고 또 읽었어. 그러다가 문득, 한 사람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어. 바로 아버지야.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없으니까. '나는 왜 아버지가 없나' 싶은 거고. 집안 주변 분들이 '너 아버지 보려면 네 얼굴 봐라' 그런 이야기 하긴 하는데. 몰라요. 사진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어요. -박정일, 일본으로부터 의문의 편지를 받은 남자 정일 씨는 사실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 1942년, 정일 씨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돼서 아버지가 일본에서 돌아가셨다는 것만 알아. 주변 어른들한테 물어봐도 어디에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제대로 말해주질 않아. 그렇게 평생을 살아왔는데 어느 날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한 일본인이, 아버지의 진짜 이름과 죽음에 대해서 묻고 있는 거야. 정일 씨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잊고 지내던 판에 1991년도에. 1991년도면 지금으로부터 35년 전인가 그렇죠? 내 나이가 오십 하나 둘 됐겠네. 어떻게 내 주소를 알았나. 편지를 받으니까 참 깜짝 놀랐지 처음에는. -박정일, 일본으로부터 의문의 편지를 받은 남자 그런데 얼마 뒤, 정일 씨는 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돼. 이런 편지를 받은 사람이 더 있는 거야. 전국 곳곳에서 똑같은 편지를 받았다는 사람이 나타나.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어. 1942년 2월 3일.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에서 가족 가운데 누군가 돌아가셨다는 거야. 한 날 한 시에 벌어진 사건이야. 하지만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어. 그러던 어느 날. 믿기 힘든 소식이 들려왔어. 그날 그 사건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한국에 있다는 거야. 그리고 그중 한 분이 바로 이분이야. 이분의 성함은 설도술. 어르신은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야. 하지만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그날의 기억만큼은 또렷하게 남아있어. 그리고 그 기억을 생생한 증언으로 남겼지. 대체 그날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자, 이제 이 도술 어르신의 목소리를 따라서 지금으로부터 시간을 87년 전으로 거슬러 가 볼게. ▲ 갑자기 끌려간 청년들 때는 1939년 10월, 경상북도 영일군 장기면이야. 한적한 시골 마을에 일본인 순사 두 명이 나타났어. 마을을 가로지르더니 어느 한 집에 들이닥쳐. 바로 21살 청년 도술이의 집이야. 설도술, 당장 나와! 6남매 중 둘째인 도술이는 학업도 포기하고 부모님의 농사일을 거들고 있었어. 그런 도술이한테 지금 당장 장기면 지서, 그러니까 마을 경찰서로 오라는 출두 명령이 떨어진 거야. 일단 도술이는 영문도 모른 채 부랴부랴 지서로 향했어.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깜짝 놀라. 그날 출두 명령을 받은 건 도술이 혼자가 아니었어. 친구 정임출을 포함해서 서른 명이 넘는 청년들이 거기 불려와 있었거든. 며칟날 몇 시까지 경찰서 도착해라, 출두해라, 이런 명령서가 왔다 이 말이지. 관에서 명령이 왔는데 그거 불응할 수도 없고 가볼 수 밖에. 그래서 막상 제가 경찰서 가니, 우리가 사는 그 면 사람이 한 30명 와 있어. 그때 한 사람 한 사람 불러내서, 귀에 뭐가 들리나 안 들리나, 눈에 뭐가 보이나 안 보이나, 이게 신체검사라. -설도술, 당시 사건 목격자 순사들이 청년들을 한 명씩 불러내더니 갑자기 옷을 벗으라고 하고 청년들의 몸을 하나하나 살펴. 그리고 건장한 청년들만 따로 골라내. 도술이와 임출이도 순사들한테 뽑혔어. 선발된 마을 청년들은 일본인 인솔자한테 넘겨져서 갑작스레 기차에 올라.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르는 채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을 달리던 열차가 드디어 멈춰. 내리고 보니 부산항이야. 빨리 정렬해! 라는 인솔자의 고함 속에 청년들은 허둥지둥 커다란 배에 올라탔대. 청년들이 탄 배는 부산항에서 출발해서 일본 시모노세키항에 도착하는 부관 연락선이야. 그제야 도술이는 자신이 일본에 가고 있다는 걸 깨달아. 그리고 주변을 보니 같은 처지의 청년들이 한둘이 아니야. 200명은 넘어 보였대. 밤새 걱정과 뱃멀미에 시달린 끝에, 다음 날 아침 도술이는 시모노세키항에 도착해. 드디어 육지에 발을 디뎌보나 싶었는데, 뭔가 이상해. 승객들이 다 내릴 때까지 꼼짝도 못하게 하는 거야.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갑자기 저 배에 올라타! 라는 소리가 들려. 항구에 내리는 대신에 곧바로 작은 배에 옮겨 타라는 거야. 그럼 어디로 가느냐, 어디로 데리고 가는지 모른다 이 말이지. 그러니까 각자가 다 마음이 불안했지. -설도술, 당시 사건 목격자 그렇게 작은 배를 타고 몇 시간 뒤, 마침내 최종 목적지에 도착해. 청년들이 배에서 줄지어 내리는데, 하나같이 눈앞에 펼쳐진 모습을 보고 놀라. 여기가 바로 그날 도술이가 배에서 내린 곳이야. 배에서부터 뭔가 쭉 뻗어있어. 철로가 깔려있지. 도술이가 배에서 내리자 낯선 일본인들이 다가오더니 청년들을 줄 세워. 일본인 한 명이 앞으로 나서. 나는 하라 감독관이다, 따라와! 그 감독관이라는 사람을 따라서 얼마나 걸었을까. 도술이 앞에 빽빽이 솟은 나무 판자들이 보였대. 뭔가 가까이 다가갈수록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나무 판자가 무려 3m가 훌쩍 넘는 울타리야. 그 울타리 안으로 들어서니 한 층짜리 목조 건물들이 보여. 그리고 곳곳엔 초소 같은 게 보이고, 누군가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어. 하라 감독관이 건물 쪽으로 청년들을 데리고 가. 건물들은 서로 다닥다닥 붙어 있고,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문은 단 하나뿐이야. 그 단 하나뿐인 문 앞에도 감시원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어. 그제야 도술이는 상황 파악이 좀 됐어. 아… 우리 지금 갇혔네. ▲ 조세이 탄광 며칠 뒤, 하라 감독관의 고함이 들려. 전원 집합! 청년들을 공터에 집합시키더니 한 사람씩 앞으로 불러내. 그리고 이번엔 장비를 하나씩 나눠줘. 곡괭이, 소쿠리, 안전모… 도술이와 청년들이 끌려온 곳은 바로 야바구치현 우베시에 위치한 장생탄광. '조세이 탄광'이라 불리는 곳이었어. 겉에서 보면 숙소로 쓰이는 건물들, 그 주변의 울타리들만 보여.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탄광은 안 보이고 바다밖에 없어. 바로 그때, 도술이 눈앞에 굉장한 광경이 펼쳐져. 보니까 바다 쪽에서 뭔가 새까만 무언가가 천천히 올라오는 게 보여. 가까이 올수록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까매. 전구가 달린 안전모랑 흰자위만 겨우 보여.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도 없을 만큼 석탄가루를 온몸에 뒤집어쓴 사람들이 줄줄이 올라오고 있는 거야. 이 사람들 대체 어디서 올라온 걸까? 도술이는 그때 처음 알게 됐어. 조세이 탄광은 마치 개미굴처럼 바다 밑에 뻗어있는 해저 탄광이었던 거야. 며칠 뒤 새벽, 도술이는 갱도 입구에 서. 갱도의 크기는 가로 2.2m, 세로 1.6m, 성인 남성이 허리를 숙여야만 겨우 들어갈 크기야. '그 안에 대체 뭐가 있나' 뚫어져라 쳐다봐도 그 속은 안 보여. 꽉 찬 어둠에 들어가기도 전에 겁부터 나지. 도술이는 바짝 긴장한 채 곡괭이를 들고 앞사람을 따라 갱도로 내려가. 안으로 들어갈수록 숨이 턱턱 막혀. 작업복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은 상태. 더 이상 입고 있을 수가 없으니까 결국 모두 벗어버리고 속옷 차림이 됐어. 깊이는 또 얼마나 깊은지, 한참을 걸어가. 죽을 지경이지 뭐. 굴 안에 들어가면 옷이 필요 없어요. 더우니까. 발가벗고 훈도시(일본식 속옷)만 입고. 내내 걸어가도 한 시간 걸어가서 내 일하는 현장까지 갈 때가 있어요. 그만큼 멀다고요. -설도술,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그렇게 한 시간쯤 들어갔을까? 희미한 불빛이 보이더래. 여기서 정지! 하라 감독관의 고함 소리에 모두 바짝 긴장해. 도착한 곳은 갱도의 끝, 바로 막장이야. 넌 이쪽으로! 그리고 넌 저쪽으로! 이렇게 오늘 일할 장소를 배정받는 거야. 도술이가 감독관의 결정을 기다리던 그때, 이상한 소리가 들리더래. 위에서 나는 소리 같아. 그런데 지금 이 위에 있을 거라고는, 갱도 천장이 전부잖아. 혹시 앞에 걸어가는 선배는 알고 있을까 싶어, 무슨 소리 안 들립니까? 라고 물었어. 그 순간, 입 다물어! 라는 감독관의 호통이 날아와. 왜 말을 못하게 하는 걸까? 기강 잡으려고 그러는 걸까? 사실 갱도 안은 산소가 부족했어. 바다 속이니까. 도술이는 지금 입구에서 1km 넘게 들어와 있어. 한 시간 동안 걸었다고 했잖아. 이 안으로 들어갈수록 환기는 어렵고, 그러니까 불필요한 대화는 철저히 금지한다는 거지. 물론 입구에서 송풍기로 공기를 불어넣고 '피야'라는 굴뚝이 환풍구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갱도 끝 막장까지 충분히 산소를 공급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거야. 도술이는 입을 꾹 닫은 채 귀를 기울였대. '쿵닥, 쿵닥, 쿵닥' 도술이 머리 위에서 들리는 소리. 정체가 뭐였을까? 바다 밑을 파니까 저기(갱도) 가서 일하면 바닷물에 배가 가는 소리가 콩콩콩콩콩 귀에 들렸는데… 그때 쿵닥 쿵닥 쿵닥 기계 소리가 나거든. 그 바닷물에 가는 배가 콩당콩당 가는 게 그 굴속에서 콩콩 들렸으니… 그 하늘(천장)이 얇으니까 저기 (배가) 가는 소리가 들린 거 아닙니까? 아이고 싶은 게 마음이 아찔한 게… 그만큼 위험한 곳에 가서 일을 했다 이 말입니다. -설도술,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머리 위로 배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 그제야 도술이는 실감이 났어. 지금 자기가 서 있는 이곳이 바다 아래라는 걸. 탄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주간반, 야간반 교대근무로 나눠서 12시간씩 석탄을 캐. 주간반인 도술이는 새벽 4시에 탄광에 들어가서 오후 4시에 나오는 거야. 그런데 갱도의 천장이 워낙 낮다 보니 허리 한 번 제대로 펼 수가 없어. 그 상태로 계속 곡괭이를 휘두르는 거지. 손에는 금방 물집이 잡히고 석탄을 캘 때마다 튄 조각에 여기저기 상처투성이야. 그리고 천장에서는 계속 물이 떨어져. 바닥은 이미 바닷물로 흥건해. 다행히 갱도 안에는 물을 빼내는 안전장치가 있어. 여기 움푹 들어간 곳이 바로 펌프실이었거든. 물이 이 웅덩이 깊은 곳에 고이면, 전기 펌프로 그 물을 퍼 올려. 그리고 물을 밖으로 빼내는 거야. 갱도 안으로 물이 계속 스며들었기 때문에 펌프는 1년 365일 24시간 내내 멈출 수 없었어. 탄광에 끌려온 도술이와 청년들의 삶도 마치 멈추지 못하는 펌프와 마찬가지였어. 쉬는 날이 거의 없이 일했거든. 매일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가, 온몸이 새까매진 채로 계속 떠오르는 삶이야. 너무 일이 사납고 천장도 낮고 밑엔 물이 질척질척하고, 그게 뭐 마음이 좋을리가 없고. 굴 안에서 일하고 나와보면 새까맣게… 말도 마세요. 우리 많이 고생했어요. -설도술,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편지를 보여줄게. 한 조선인 노동자가 감독관 몰래 고향에 보낸 거야. 어머님, 저는 지금 일본 야마구치현이라는 곳에서 탄광일을 하고 있습니다. 숙소는 마치 포로수용소 같은 곳입니다. 폭력을 가하고 밥도 주지 않고 굶기는 일이 허다합니다. 어쨌든 간에 반드시 탈출하여 반드시 어머니가 계시는 곳으로 돌아가겠습니다. -故김원달,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도술이도 매일 도망갈 생각만 했대. 하지만 그게 쉽지가 않지. 아까 처음 얘기했을 때 숙소 주변이 높은 울타리로 막혀있다고 했었잖아. 그게 전부가 아니었어. 울타리 위엔 이런 센서 선까지 설치돼 있었대. 여길 탈출하려면 깜깜한 밤을 틈타서 3m 넘는 울타리를 넘어야 하는데, 울타리 위 이 선을 잘못 건드리기라도 하면 발각이 되는 거네. 가까스로 울타리를 넘는데 성공을 했다 해도, 그게 끝이 아니야. 한쪽은 바다고 다른 한쪽은 산이야. 그러다 붙잡히기라도 하면, 모진 매질이 이어졌어. 쓰러져도 멈추질 않아. 달아난 사람이 달아나다가 사무실에 딱 붙들려서 오면, 그 사무실 바닥에다가 '그 녀석 나쁜 녀석, 이 자식 나쁜 놈이다' 하고 무조건 들고 패대니까 죽는다고 아우성을 치고 고함을 치고 그랬거든. 그렇게 두드려 맞아서 영구적인 장애를 얻은 사람도 있어요. -설도술,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그렇게 맞다가 목숨을 잃기도 했대. 구타를 해서 많이 죽어 나갔고, 매일 죽어나가죠, 사람이. 자꾸 죽어나가고 맞아 죽어나가고 하는 게 눈에 지금도 훤하게 보여요 앉아 있으면… 눈 감고 있어도 보이고, 그래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을 새울 때가 많아요. 너무… 매를 맞았어요. -故김경봉,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2016년 인터뷰) 결국 도술이는 도망치지 않았어. 근데 구타가 무서워서가 아니야. 고향에 있는 가족들 때문이야. '가족이 편하려면 내가 많이 벌어야지' 생각했어. 이 탄광에서는 얼마나 캤느냐가 곧 돈이었거든. 적정한 보상은 아닐지라도, 대가는 주는 그런 시스템이었거든. 조금이라도 돈을 많이 벌려면, 곡괭이를 더 빨리 더 많이 휘둘러야겠지. 도술이는 부모님과 형제들한테 조금이라도 돈을 보태기 위해 이를 악물고 버텼어. 1941년 12월, 도술이가 탄광에서 일한지도 벌써 2년이 넘었어. 어느새 23살이야. 이젠 새로운 사람들한테 일을 알려줄 정도야. 그런데 그 무렵에 도술이가 처음 왔을 때와 달라진 게 하나 있었어. 식당에 갈 때마다 줄이 길게 늘어서 있어. 새로운 사람들이 탄광에 계속 밀려들어오는 거야. 대부분 조선에서 끌려온 사람들이야. 도술이가 끌려온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이 조세이 탄광에 강제동원된 것으로 확인된 조선인의 수는 무려 1,258명. 도술이처럼 경찰의 출두명령을 받고 끌려온 사람, 돈 많이 주는 일자리라고 속아서 바다를 건넌 사람도 있어. 그 중 눈에 띄는 사람들에게는 사택을 마련해줄 테니까 가족을 데리고 오라거나, 결혼을 하라고 탄광 쪽에서 권하기도 했대. 어쩌면 그건 가족을 인질로 삼아서 오래 붙잡아 두려는 속셈이었는지도 몰라. 이렇게 탄광 주변에 하나의 마을이 형성된 거지. 그래서 조세이 탄광은 이렇게 불리기도 했어. 바로 '조센탄코', 바로 조선탄광. 결국 이 바다 아래로 내려간 사람들은, 대부분 바다 건너에서 끌려온 조선사람들이었던 거야. ▲ 운명을 바꾼 선택 그렇게 해가 바뀌고 1942년 1월의 어느 날, 도술이의 운명을 바꿀 일이 벌어져. 아까 도술이가 일을 악물고 정말 열심히 일을 했다고 했잖아? 그래서일까. 야간반의 감독관 나카무라의 눈에 띈 거야. 도술, 야간반으로 와라. 그럼 석탄이 많은 막장으로 보내줄게 라는 감독관의 제안을 도술이는 몇 번이나 거절했지만, 나카무라도 끈질겨. 결국 도술이는 야간반으로 옮겨. 오후 4시에 들어가서 밤새워 일하고, 새벽에 탄광에서 나오는 근무 일정인 거지. 아까 하고 시간이 완전히 반대가 된 거야. 그런데 이 선택이 불과 며칠 뒤에 그의 생사를 가르게 됐어. 1942년 2월 3일, 운명의 그날이야. 새벽 4시 도술이가 막 12시간의 야간작업을 마치고 갱도 밖으로 올라와. 안에서는 숨이 턱턱 막힐 만큼 덥고 습한데, 밖으로 나오니 겨울바람이 매서워. 도술이가 서둘러 그날 캔 석탄을 정리하고 있는데, 그때 눈에 익은 얼굴이 보였어. 고향에서 함께 온 친구 임출이야. 도술아, 고생 많았데이. 오늘 진짜 디네, 니도 고생해래이. 사실 그럴 때 고향친구만한 의지가 되는 게 없지. 평소와 다름없이 인사를 나누고, 도술이는 그대로 숙소로 향해. 이때까지만 해도 몰랐지. 몇 시간 뒤 탄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눈을 붙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갑자기 밖에서 다급한 고함 소리가 들려. 야! 일어나! 빨리 나와! 외치며 나카무라 감독관이 막 사람들을 깨우는 소리야. 목욕하고 와서 밥 먹고 방에 들어가 잠이 들었는데, 나카무라 감독관이 와서 막 일어나라고 고함을 지르고, '작업복 입고 일하는 것 같이 준비를 해 나오너라' 그래서… -설도술,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영문도 모르채 도술이는 급히 작업복을 걸치고 숙소 밖으로 뛰어나왔어. 그리고 식당 쪽을 지나는데,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어. '저기 내려다봐라' 그래서 여기 식당 가서 내려다보니까 바닷물이 막 천장 만장 튀어 올라오는데, 한 군데뿐만 아니에요. 여러 군데가 하얗게 뒤집어지는데 '저기 왜 저럽니까?' 그러니까… -설도술,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숙소에서 바다를 바라보니 바닷물이 기둥처럼 하늘로 솟구치고 있어. 여러 개의 물기둥이 솟아오르면서 바다가 온통 하얀 거품으로 가득해졌어. 탄광이 수몰되고 있어. 바다 밑 갱도에 구멍이 뚫리고, 바닷물이 갱도 안으로 쏟아져 들어가면서, 그 안에 있던 공기가 밖으로 밀려 나오면서 물을 기둥처럼 쏘아 올린 거야. 도술이는 곧장 갱도 앞으로 달려가. 매일 광부들이 들락날락하던 입구는 물이 흘러넘쳐. 입구 근처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어. 그날 아침 일하러 들어간 광부의 가족들이야. 아이고 아버지요! 아이고 행님! 왜 답이 없는겨! 어야노. 바깥양반 저 안에 있는데! 사람들이 광부들의 이름을 부르며, 물이 가득한 입구로 달려들어. 한겨울인데도 아무도 망설임이 없어. '우리 아들은 일하러 가서 안 왔다', '우리 남편은 일하러 가서 안 왔다' 아버지, 형님, 동생 이러고 굴 안에서 들여다본다 이 말이야. 이건 뭐 죽을 판 살 판, 물이고 어쩌고 자꾸 달려든다 이 말이지. -설도술,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붙잡아서 물가로 데리고 나오면 또다시 물속으로 들어가려고 해. 남편의 이름을 부르짖는 아내, 아버지를 찾는 아이, 탄광촌 전체가 울음바다야. 그때 한 여자가 입구 앞에 쓰러졌대. 그 옆엔 3살짜리 막내 아들 재봉이가 있었어. 그날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볼게. 제 이름은 신재봉입니다. 나이는 지금 1939년생, 만 87살입니다. 내가 태어난 게 일본 야마구치현 탄광촌, 우베시. 제 위로 네 분이 계시는데, 형 세 분이고 누님 한 분인데. 저 혼자만 남아서 지금 인터뷰를 하고 있어요. 제가 3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아침에 밥 잘 잡숫고 새벽에 나가신 분인데… 서른일곱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까. 어머니는 30대 초반입니다. 그 젊은 나이에 혼자 돼가지고, 탄광촌 탄광 입구에 가서 물이 철렁철렁 입구까지 차 있는데, 거기 가서 쓰러지신 거예요 그냥. -신재봉,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故신용업의 아들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갱도 안은 어떤 상황인지, 구조는 어떻게 할지, 알려주는 사람이 없어. 가족들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그때, 갑자기 수십 명의 헌병대가 나타났대. 돌아가! 여기 오지 마라! 헌병들이 울고 있는 가족들을 밀어내더니 갱구 앞으로 가. 손에는 판자와 각목, 그리고 각종 연장이 들려있어. 헌병들은 들고 있던 판자와 각목으로 갱구를 막아버려. 아직 안에 사람이 있는데, 가족들이 애타게 기다리던 구조대는 끝내 오지 않아. 1942년 2월 3일, 조세이 탄광의 갱구는 그렇게 가족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대로 닫혔어. 몇 명이 사망했고 어쩌다 사고 났는지도 모르는 채로. 남은 가족들은 그 후에 어떻게 했을까. 갱구 앞에 쓰러졌던 재봉이의 엄마, 남편의 시신을 찾을 엄두도 내지 못했대. 집에 돌아오면 5남매가 엄마만 쳐다보고 있는데, 울고 있을 틈이 없잖아. 당장 먹고 살 길이 급해. 그래서 근처 다른 탄광으로 일을 하러 가. 남편을 집어삼킨 탄광으로. 그런 어머니를 보며 아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머니는요. 자꾸 어머니 얘기하려니까 내 슬픈 마음이 들어서 말이 잘 안 나오는데. 이 세상에 여자로 태어나서 참 어머니같이 고생을 많이 하신 분은 없어요. 눈만 뜨면 우리 밥해놓고 딱 먹을 거 차려놓고는 탄광으로 일하러 나갑니다. 할 일은 없고 애는 먹여 살려야 되고. 슬퍼서 울고 통곡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어요. 3살 먹은 놈이 뭘 알겠어요? 내가 이렇게 나이 들 보니까, 참 슬픈 일이에요. -신재봉,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故신용업의 아들 그렇다면 살아남은 도술이는 어땠을까. 그날 이후 도술이는 숙소 밖으로 나가지 않아. 임출이를 비롯해서 두만이, 만조, 영출이 고향 친구들이 많이 죽었거든. 도술이는 조를 바꿨기 때문에 살아남은 거야. 그래서 친구들의 가족이 도술이만 마주치면 늘 이렇게 말했대. 아이고 도술아… 니는 우찌 살았노? 라고. 그 시내 쪽은 못 나갔어요. 나는 못 나갔어요. 왜 못 나가냐 하면, 죽은 사람의 어머니, 아버지, 형제, 부인, 아이들 이 사람들이 많이 면(얼굴)을 안다 이 말이에요. '아이고, 니는 어떻게 안 죽고 살았노' 하며 달려들어서 붙들고 울고 하니. 나도 눈물이 나오고… -설도술,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그날 이후 탄광은 아수라장이야. 사무실을 지키던 감독관들도 하나 둘 자취를 감춰. 그래서 급여도 제대로 받지 못했대. 결국 많은 사람들이 울타리를 넘어 달아나. 도술이는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을까? 아까 도술이가 어떻게 탄광에 왔다고 했지? 배를 타고 강제로 끌려왔다고 했잖아. 강제 동원된 조선인이 배를 타고 조선으로 돌아간다? 이건 아무래도 어렵겠지. 현실적으로 도술이는 살아는 남았지만, 일본을 빠져나갈 수는 없었어. 산 사람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가 없는데, 갑작스럽게 이 탄광에서 돌아가신 분들은 어땠겠어? 입구가 닫힌 갱도 안에 그대로 남겨지게 돼. 그리고 그 위로 긴 세월이 흘러. 그 사이에 조선은 해방을 맞이했고, 탄광촌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할아버지가 됐어. 하지만 바다 아래에 남은 분들의 시간은, 1942년 2월 3일 그날에 멈춰있어. ▲ 진짜 이름을 찾아서 멈춰있던 그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49년이 지난 1991년 가을이야. 아까 그 편지, 일본어와 함께 온 편지 기억나? 편지를 보낸 사람은 야마부치 타케노부라는 사람이야. 바로 이 분이야. 조세이 탄광이 있던 우베시의 고등학교 교사였어. 타케노부 씨는 우베시에서 나고 자랐어. 조세이 탄광이 수몰됐을 땐 초등학생이었지. 그땐 이 일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대. 그러다 20년이 흐른 1960년대 중반, 고향으로 돌아와서 고등학교 교사가 된 타케노부 씨는 우연히 한 학생의 집에 가정 방문을 하게 됐어. 그런데 그 집에 들어서는 순간, 깜짝 놀라. 어린 시절, 자기가 탄광촌에서 봤던 집들과 똑같이 생긴 거야. 그 학생의 집이 알고 봤더니 예전 조세이 탄광의 사택이었거든. 그 집에 들어서자, 잊고 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던 거지. 타케노부 씨는 이 일을 자세히 알아보려고 했어. 하지만 남아있는 건 사고 직후 나온 짧은 기사 몇 개가 다야. 그마저도 원인과 피해 상황은 조사 중이라는 내용이 전부였어. 그러니까 제대로 밝혀진 게 아무것도 없는 거야. 그때부터였대. 타케노부 씨는 조세이 탄광에 대한 기록을 하나씩 모으기 시작해. 그날 정확히 몇 명이 숨졌는지, 그들이 대체 누구였는지, 시간 속에 묻혀있던 이 일을 다시 들여다보게 된 거야. 그리고 1991년, 마음맞는 사람들끼리 모임을 하나 만들었대. 이름하여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 줄여서 '새기는 모임'. 타케노부 씨는 오래된 기록을 뒤지고 그날의 일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녔어. 그러던 어느 날,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어. 어느 한 절에, 사망자들의 명부가 보관돼 있다는 거야. 곧바로 달려간 타케노부 씨가 명부를 한 장 한 장 넘겨보는데,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해. 이름이 하나 둘 셋,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 거야. 대체 이름이 몇 명이나 적혀 있었을까? 타케노부 씨와 오랫동안 활동을 함께한, 현재 새기는 모임의 대표 이노우에 요코 씨에게 들어볼게. 저는 일본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의 대표인 이노우에 요코라고 합니다. 그게 우연인데요. 재일교포 스님이 계신 절에 조세이 탄광의 사망자 명부가 있었습니다. 원래 일본에서 한두 명 죽은 건 기록에 잘 남기지 않지만, 183명이나 되는 분들이 일본의 국가정책이었던 석탄 산업으로 인해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것이 기록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던 거죠. -이노우에 요코, &<조세이 탄광 수몰 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 현 대표 1942년 2월 3일, 그날 탄광이 물에 잠기면서 목숨을 잃은 사람은 모두 183명. 그 중 조선인은 136명으로 추정돼. 남아있는 기록마다 사망자의 숫자가 달라서 추정할 수 밖에 없어. 그런데, 명부를 확인하는 타케노부 씨와 요코 씨의 눈에 뭔가가 들어와. 조선인 사망자들의 이름이 대부분 일본식으로 적혀 있는 거야. 거기에 적힌 이름들은 모두 창씨개명된 이름들이었습니다. 창씨개명된 이름 자체가 조선인분들에게는 정말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을 거라고 저희도 생각하고 있었기에, 이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는 건 돌아가신 분들의 존엄을 해치는 일이라는 생각에, 가능한 한 원래 이름을 찾아내서 추도비에 새겨 넣고 싶었습니다. -이노우에 요코, &<새기는 모임&> 현 대표 '새기는 모임'의 첫 번째 목표가 사망자들의 이름을 새긴 추도비를 세우는 거였거든. 근데 이게 왜 첫 번째 목표였을 것 같아? 일본인으로서 사죄의 마음을 전하는 첫 걸음이라고 생각한 거지. 정부가 안 하니까. 강제로 바꾼 일본식 이름으로 비석에 그 이름을 새겨둔다? 말이 안 되는 거지. 이 이름으로는 추도비를 세울 수 없다고 생각한 이들은, '진짜 이름'을 찾기로 했어. 근데 어떻게 찾지? 두 사람이 명부를 자세히 살펴보니까 이름 옆에 뭔가가 써있더래. 바로 사망자들이 원래 살던 조선의 주소야. 근데 반세기나 흘렀기 때문에 가족이나 아는 사람이 거기 있을지는 알 수 없어. 그래도 이 주소가 유일한 희망이었어. 한반도에서의 옛 주소도 적혀있었기 때문에 저희는 1991년 가을에 한국과 북한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그분들(사망자)의 이름으로 옛날 주소 그대로 말이죠. 한 분이라도 좋고 두 분이라도 좋으니, 원래 이름만 찾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그 희망의 끈을 이어가고자 보낸 편지였습니다. -이노우에 요코, &<새기는 모임&> 현 대표 그런 간절한 마음으로 한국에 100통이 넘는 편지를 보냈어. 답장, 몇 통이나 왔을 것 같아? 한 통, 두 통, 세 통… 놀랍게도 무려 열일곱 통이나 답장이 왔어. 편지 속엔 그토록 찾던 원래 이름이 담겨 있었어. 반세기 전 주소만 믿고 무작정 보낸 편지. 가족한테 닿기만 해도 이건 기적이라고 생각했는데, 답장까지 온 거야. 대단한 일이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둘은 편지를 읽어 내려가. 그런데, 그 답장에 적힌 내용이 정말 뜻밖이야. 뜻 밖에도 무려 17통이나 되는 답장이 왔습니다. 그 답장의 대부분은 아버지가 일본으로 떠난 뒤 어디에 계신지, 살아 계신지 돌아가셨는지도 알 수 없었던 상황에서, 50년이 지난 뒤 저희가 보낸 이 편지를 통해 아버지가 이곳에서 돌아가셨다는 것, 즉 조세이 탄광의 사망자였다는 사실을 아신 거죠. -이노우에 요코, &<새기는 모임&> 현 대표 아버지가 일본으로 떠나신 뒤에 생사도 모르고 지냈다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던 거야. 편지를 받고서야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걸 처음 알게 된 사람도 있었대. 일본에서 날아온 그 편지 한 통이 50년 만에 아버지의 마지막 소식을 전한 셈이지. ▲ 다시 찾은 아버지 그때부터 전국에 흩어져 있던 유족들이 한자리에 모였어. 그 후 사고 현장에서 매년 함께 추도식을 열게 돼. 1993년도에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을 갔어요. 차례대로 잔 올리고 절하고… 같이 합동 절하고 그랬죠. 내가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아버지 제사를 바닷가 현장에 와서 지내니, 이런 날이 오는구나 싶은 게, 감회가 말할 수가 없지. -박정일,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故박맹문의 아들 어떤 힘으로 던졌는지, 던졌는데 꽃을 바다로 향해서. 처음 불러봤어요. '아버지'라는 것이 내 입에서 나오겠습니까? 그 한마디 딱 해보고는 지금까지 못 해봤어요. -신재봉,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故신용업의 아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저 왔습니다! -故전석호,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故전성도의 아들 그래도 매년 보고 싶었을 겁니다. 원래 제사 지내고 하면 누군가의 제사를 지내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잖아요. 똑같은 그런 감정이 있을 겁니다. -전영복,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故전성도의 손자, 故전석호의 아들 그리고 2006년, 믿기 힘든 소식이 들려왔어. 그날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 나타난 거야. 21살의 나이에 강제 동원되었다가 이제는 아흔을 바라보는 설도술 어르신. 2007년 2월, 어르신은 일본으로 향했어. 건강을 이유로 가족들은 극구 말렸지만 어르신은 고령에도 뜻을 굽히지 않으셨어. 어르신의 목적지는 단 한 곳. 65년 전 친구들을 남기고 떠나온 바로 그 바다야. 끌려 갔었던 그 탄광에 다시 오는 데 걸린 시간 65년. 청년은 그 사이 노인이 되었어. 탄광은 모두 폐허가 되었고, 남은 건 바다 위로 솟은 '피야' 뿐이었어. 65년 동안에 다 변해버렸어. 코구치(갱구)도 다 망가져 버리고 없고… 솔밭에 같이 들어가 얼마를 찾았나. 나무만 수북하고 찾지도 못하고. 그저 여기, 시멘트 있는 여기가 그때 굴 안에 들어가는 입구다, 이것만 짐작할 따름이지 아무 형체가 없어요. -설도술,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탄광이 있던 곳엔 수풀만 무성해. 입구로 짐작되는 곳은 여전히 막혀 있었어. 65년의 세월이 모든 흔적을 다 덮어버린 거지. 끝내 갱구는 찾지 못했어. 눈에 보이는 탄광의 흔적이라고는, 바다 위에 떠 있는 두 개의 기둥뿐. 도술 어르신은 한참 동안 그 바다만 바라 보셨대. 그때 죽은 사람들은 죽은 뒤에도 저 사람들은 물속에 들어앉아 있으니. 바닷물 때문에 빼낼 수가 없어. 저 물 때문에 못 간단 말이야, 물 때문에. 저 큰 바닷물은 어떤 장사가 퍼내나? 우리 친구들이 183명이 저기 누워있는데 참 가엾다 싶은 게, 생각하니 눈물밖에 안 나요. 안 나는데… 눈물 난들 그 사람들과 말을 한번 해 볼 건가, 그 사람들 하나 데리고 올 수가 있나… -설도술,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이 바다에 다시 오는데 정말 긴 시간이 걸렸잖아. 그런데 누구 하나 데리고 나올 수도 없어. 그래서 그저 바다만 바라보며 눈물만 삼킬 수밖에 없었대. 그러다 문득,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라. 고향에서 함께 바다를 건너왔던 그 친구, 임출. 어르신은 곧바로 근처의 한 절로 향해. 사망자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곳이야. 정임출이, 그 위패를 보니까, 하이고… '이 사람들이 여기 안에 있는데' 싶은 게, 막 눈물이 주룩 나서 울었어요. -설도술,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65년 만에 다시 만난 친구는 낯선 일본식의 이름으로 위패에 남아 있었어. 도술 어르신이 할 수 있는 건 그 이름 앞에 절을 올리는 것 뿐이었대. ▲ 참사가 사고였을까? 근데 그날 참사는 누구도 예상 못한 사고였을까? 대체 뭐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도술 어르신은 그날 새벽에 본 장면을 잊지 못해. 그날의 참사를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장면이야. 그 자리에 두 사람이 밤낮 지키고 있었다 이 말이요. 그 사람들이 많이 원망스러워요. -설도술,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지금부터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들어야 돼. 다시 그날로 돌아가볼게. 1942년 2월 3일 새벽 4시경. 물기둥이 솟아오르기 약 6시간 전이야. 야간 작업을 마친 도술이가 갱도 밖으로 올라오고 있었어. 그런데 갱도 한쪽에 일본인 감독관 둘이 앉아 있더래. 그 옆엔 전화기가 놓여있고, 물이 새는 곳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거야. 사실 광부들이 전혀 몰랐던 일이 있었어. 사고 이틀 전인 2월 1일 새벽 6시. 갱도에 새어 나오는 물의 양이 평소보다 3배나 많았던 거야. 2월 1일은 일요일이라 휴일이었는데, 갱내 관계자가 탄광 내부를 순찰하던 중 평소 출수량보다 약 3배 정도 많은 비정상적인 출수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결국 20시간이나 걸려서야 겨우 멈출 수 있었습니다. -나가사와 시게루, 일본 역사 연구자 20시간에 걸친 보수작업 끝에 겨우 물이 새는 걸 막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야. 사고 전날인 2월 2일에도 평소의 2배가 넘는 물이 새어 나왔거든. 광부들이 이 사실을 전혀 몰랐대. 그 굴 안에 들어가 일하는 사람들은 그 감독관만 믿고 설마 '거기 지키고 있으니까 애로사항이 생기면 우리도 나오라고 할 거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고 그 굴 안에 들어가 땅 파고 일만 했는데… -설도술,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교대로 물이 새는 걸 지켜보는 감독관이 있으니, 위험해지면 작업을 멈추게 할 거라고 믿었던 거지. 그럼 왜 갑자기 갱도에서 평소보다 많은 양의 물이 새어나온 걸까? 그 배경에는 바로 '전쟁'이 있었어.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해.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 거야. 당시 석탄은 공장, 기차, 군함을 움직이는 핵심 자원이었어. 그러니까 이게 없으면 전쟁을 못해. 전선이 넓어질수록 더 많은 석탄이 필요해져. 탄광에는 더 빨리, 더 많이 석탄을 캐라는 명령이 내려와. 조세이 탄광도 예외는 아니었지. 1942년 1월, 조세이 탄광에선 특별한 작업이 이뤄졌어. 이른바 '오오다시'(대량채굴). 평소보다 훨씬 많이 석탄을 캐는 날이야. 그냥 작업량을 조금 늘리는 수준이 아니야. 광부들은 물론이고 당시 갱도를 관리하고 보수하던 직원들까지 모두 석탄을 캐는 데 투입됐어. 탄광의 안전을 지켜야 할 사람들까지 석탄 캐는 데 동원한 거지. 사고 직전 1942년 1월 30일 금요일, 1월 31일 토요일, 이틀 연속으로 오오다시를 했는데, 1942년 1월에는 오오다시를 무려 네 번이나 했습니다. 그날은 갱내에 있는 지주부(보수작업 담당 노동자)나 갱내 다른 직종의 사람들까지 채굴 작업에 투입시켜서, 평소보다 석탄을 더 많이 캐는 날을 말합니다. 저는 그것이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나가사와 시게루, 일본 역사 연구자 나중에 밝혀진 기록에 따르면, 조세이 탄광이 무너진 결정적인 이유는 탄주라고 불리는 석탄 기둥까지 제거해서야. 갱도가 무너지는 걸 막기 위해선 석탄 일부를 기둥처럼 남겨둬야 하는데, 그마저 다 손을 댔다는 거야. 생산량을 늘려야 하니까 그냥 막 캐낸 거야. 사고 이틀 전부터 새어 들어온 물은 이미 약해지고 있던 그 갱도가 보낸 경고가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그날의 참사는 사고가 아니야. 사고가 아니라 사람이 만든 사건인 거야. ▲ '양심'에 귀 기울이기 그런데 말이야. 지금까지 얘기한 사고의 원인, 그리고 사망자의 정보. 이 모든 건 한국이나 일본 정부가 조사한 게 아니야. 전부 타케노부 씨와 새기는 모임의 노력 덕분에 이 세상에 여기까지 드러날 수 있었던 거야. 이 모임의 첫 번째 목표, 사망자들의 진짜 이름을 새긴 추도비를 세우는 것. 그래서 한국에 있는 유족들에게 답장을 받은 뒤, 사고 당시의 사망자 명부와 위패 기록, 그리고 유족의 기억을 맞춰나가. 그렇게 한 사람, 또 한 사람 맞춰 나간 끝에, 2013년 조세이 탄광 근처 해안에 마침내 추도비가 세워졌어. 사건 발생 후 71년 만이었어. 이게 일본에서 먼저 시작됐다는 것도 놀라운데, 타케노부 씨, 요코 씨 그리고 수많은 새기는 모임의 회원들까지. 이 모든 일을 국가가 아닌 개인들이 해낸 거야. 어쩌면 일본인 입장에선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일 수도 있잖아. 그런데 이 타케노부 씨와 요코 씨는 왜 이렇게까지 한 걸까? 이런 질문에 요코 씨는 한 단어로 답을 했어. 바로 '양심'이야.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 양심. 한국인이냐 일본인이냐의 문제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오랜 세월동안 모두가 외면해왔던 이 비극을 그냥 모르척 할 수가 없었다는 거야. 그 양심이 자신들을 계속 행동하게 만들었다는 거야. 안타깝게도 그 타케노부 씨는 2015년도에 세상을 떠나셨지만, 요코 씨와 새기는 모임 회원들은 여전히 계속해서 활동하고 있어. 사망자들의 진짜 이름을 찾는 데만 무려 22년이 걸렸어. 추도비를 세웠으니 이제 다 끝난 걸까? 이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해. 일본이 일으킨 전쟁 때문에 한반도에서 오신 분들이 유골조차 방치된 채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 역시 그것은 일본으로서 또는 일본인으로서 반드시 돌려 드려야 한다는 생각이 제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으로서의 양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말 많은 분들의 유골을 어떻게든 구해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지요. -이노우에 요코, &<새기는 모임&> 현 대표 바다 아래 잠들어있는 유골을 찾아서 고향 땅으로 돌려보내는 것. 그분들이 원해서 간 것도 아닌데, 여전히 타국의 깊은 바다 아래 둔 채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 그러면 가장 먼저 뭐부터 해야 될까? 사건이 벌어진 그날 굳게 다친 갱구, 그것부터 열어야겠지. 새기는 모임의 회원들이 옛 도면을 뒤지고 생존자들의 증언을 맞춰가면서 나무를 베고 수풀을 걷어내고 흙을 파내. 그렇게 얼마나 팠을까, 흙 속에서 오래된 나무 판자를 발견해. 사건 직후 헌병들이 막았던 그 갱도 입구야. 그럼 입구를 여는 데 성공했을까? 쌓여있는 흙을 파내자 조금씩 드러나는 갱도 입구. 흙을 걷어내자 갑자기 쏟아져 나오는 물. 그렇게 82년 만에 갱도에 다시 빛이 들어가기 시작했어. 저희들은 갱구를 열었다는 것이 사망자분들에게도 의미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그분들은 갱구를 향해 도망쳐 오셨는데, 그 갱구가 그날 바로 닫혀버렸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갱구를 여는 일은 가장 먼저 해야만 했던 일이었습니다. 그 안에 어떻게든 빛을 비춰주는 것이죠. 그 일을 두고는 정말… 갱구를 열었을 땐 희망밖에 없었습니다. -이노우에 요코, &<새기는 모임&> 현 대표 2024년 9월 25일, 마침내 갱구가 열렸어. 그 앞에서 이봐! 들리는가? 갱구가 열렸다고! 라고 힘껏 외쳤어. 어떤 마음으로 이렇게 외쳤을 것 같아? 단순히 옛 탄광 입구를 찾는 일만이 아니야. 82년 만에 어둠 속에 갇힌 공간에 빛을 들여보내는 일이야. 그리고 무엇보다 유골의 위치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 거야. 사실 그간 새기는 모임에서 계속해서 일본 정부한테 책임지고 유해를 수습해달라고 했지만, 유골의 위치를 알 수 없다는 이유로 조사할 수 없다라는 답변만 받아왔거든. 정부를 설득할 수 있는 증거, 그 유골을 찾아야만 했던 거지. ▲ 83년만의 퇴근 자, 이제 유골을 찾아서 모시고 나오면 돼. 잠수사들이 갱구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해. 그런데 곧바로 문제가 생겼어. 온통 흙탕물이라 바로 앞도 보이질 않아. 게다가 무너진 구조물들이 많아서 너무 위험한 거야. 유해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점은 갱구에서 약 1.1km 거리야. 거기까지는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어. 자, 그럼 이제 포기해야 하는 걸까? 그럴 수 없지. 여기까지 왔는데. 2025년 8월 25일, 김경수, 김수은 두 한국인 잠수사가 새로운 곳으로 들어가. 바로 바다 위에 남아있는 기둥, '피야'. 이곳으로 들어가도 갱도로 연결돼. 보이면 무조건 찾는다. 무조건 찾는다. -김수은 잠수사 '좋은 결과를 가지고 나오자' 그런 생각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유해들을 발굴해서 모시고 나와서 가족분들 품에 돌려다 드렸으면 좋겠다. 그런 감정이 좀 컸습니다. -김경수 잠수사 수면 아래로 내려간 두 잠수사가 손으로 벽을 더듬으면서 천천히,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 칠흑같은 갱도 안, 돌, 철로, 벽, 천장. 손에 잡히는 대로 하나씩 확인해 나가. 얼마나 지났을까? 앞서 가던 김수은 잠수사가 다급하게 외쳐. 찾았다, 찾았다! 어두운 갱도 속에서 발견된 머리뼈. 이 소식은 곧바로 바다 위 사람들에게도 전해졌어. 그렇게 83년 만에 뭍으로 올라온 뼈는 검게 변해 있었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기다리고 계시는 유족 분들이 있잖아요. 그래도 뭔가 좀 해야 할 일을 했구나. -김수은 잠수사 '80년 넘게 우리 안 잊고 이렇게 데리러 와주려고 노력해서 고맙다' 그런 생각들을 하지 않을까요? 잊지 않고 기억해줘서 고맙다고… -김경수 잠수사 이어진 몇 차례 탐사에서 추가로 발견된 유골들. 1942년 2월 3일 그날 이후 83년 동안 갇혀있던 사망자들이 드디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거야. 길었던 기다림을 말하는 듯, 뼈는 검게 물들어 있었어. 유족들의 입장에서는 이것보다 고맙고 기쁜 일은 없겠지. 이 기쁜 소식을 뒤늦게 듣게 된 사람이 있어. 조세이 탄광에서 근무했던 설 도자 술자 할아버지의 맏아들 설정수입니다. 2019년도에 돌아가셨으니까 지금 한 6년 정도 됐네요. (2007년) 그때 위령제 지내러 간다고 할 때가 집에서는 반대를 많이 했습니다. 못 가게. 그런데도 아버지가 꼭 가시겠다고 그래서, 막지를 못하고 갔다 오셨는데. '내가 그래도 잘 다녀왔다' -설정수,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故설도술의 아들 정수 씨는 갱도 입구가 2024년도에 열렸다는 소식을 듣지 못 했다고 해. 아… 그거 참. 그게 열렸구나. (아버지가) '늦게라도 유골을 발견했으니까 그래도 다행이다. 그거라도 다행이다' 이런 말씀 당연히 안 했겠습니까? -설정수,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故설도술의 아들 안타깝게도 도술 어르신은 갱구가 열린 것도, 유골이 발견됐다는 소식도, 듣지 못한 채 떠나셨어. 하지만 어르신께서 기억을 더듬어 남긴 그 목소리는 사라진 조세이 탄광의 모습을 되살리는 중요하고 소중한 기록이 됐지. ▲ 마지막 귀향길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많은 유족이 세상을 떠났어. 하지만 그렇다고 이 일이 끝난 게 아니야. 새기는 모임의 요코 씨는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하셨어. 일본과 한국, 그리고 한반도의 유족 여러분. 정말 오랜 시간 기다리게 해 드린 것에 대해 사죄의 말씀을 드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유족 여러분의 마음을, 제가 정말 유족이 될 수는 없지만 그 마음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그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은 사람이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족 여러분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제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여러분께서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노우에 요코, &<새기는 모임&> 현 대표 올해 1월 한일정상회담에서 발견된 유골의 신원 확인을 위한 DNA 감정에 함께 협력을 하기로 했어. 조세이 탄광에서 발견된 유골에 관해서는 DNA 감정에 대한 협력을 위해…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 과거사 문제에서 작지만 의미 있는 진전을 이루어낼 수 있어 참으로 뜻깊게 생각합니다. -이재명, 대한민국 대통령 그리고 바다 아래에 있는 그분들의 귀향길, 이제부터가 시작 아닐까. 그 유골이 아버지 것 같으면 얼마나 좋겠어? 딴 거 없습니다. 제발 아버지 것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내 살아생전에. -신재봉,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故신용업의 아들 지금은 무덤 안에 아무것도 없어요. 오랫동안 차가운 물 속에 계셨스니까요. 그러니 유골이 나오면 빨리 모셔가서 무덤에 잘 안치해 드리고 싶습니다. -츠네니시 카즈히코, 조세이탄광 노동자 故츠네니시 하츠타다의 아들 조세이 탄광 사건은 아직도 풀어야 할 매듭이 여전히 많이 남아있어. 사진으로 봤던 검은 뼈도 누구의 것인지 모르고, 몇 명의 것인지조차 몰라. 심지어 바다 아래 남아있는 유해를 언제 어떻게 발굴할지, 일본 정부는 아직 구체적인 계획을 내놓지 않고 있거든. 그래도 우리는 지치지 말고 끈기 있게 그 매듭을 계속해서 풀어 나가야겠지. 언젠가 아직도 그 바다 아래 남아계신 분들이, 기다리는 가족분들의 곁에 모두 무사히 잘 돌아가실 수 있을 때까지.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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