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프로그램 정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방송일

방송 시작일 2021. 10. 21 ~
방송 요일,시간 목 22:20~24:00

기획의도

◆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나'의 이야기 어느 날, 그 사건, 그 장면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눈길을 사로잡는 그 날, 그 사건으로부터 한 사람의 소시민으로서 '내'가 느낀 바를, 온전히 '나'의 시점에서 주관적으로 전달한다. ◆ 배워서 '너' 주는, 3人 3色 이야기 '너' 에게 꼭 들려주고 싶어! 친구, 배우자, 동료... 세 명의 '이야기꾼'이 스스로 공부하며 느낀 바를 각자의 '이야기 친구'(가장 가까운 지인)에게, 가장 일상적인 공간에서 1:1 로 전달한다.

프로그램3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

방송일

방송 시작일 2021. 03. 11 ~ 2021. 07. 29
방송 요일,시간 목 22:30~23:50

기획의도

◆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나'의 이야기 어느 날, 그 사건, 그 장면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눈길을 사로잡는 그 날, 그 사건으로부터 한 사람의 소시민으로서 '내'가 느낀 바를, 온전히 '나'의 시점에서 주관적으로 전달한다. ◆ 배워서 '너' 주는, 3人 3色 이야기 '너' 에게 꼭 들려주고 싶어! 친구, 배우자, 동료... 세 명의 '이야기꾼'이 스스로 공부하며 느낀 바를 각자의 '이야기 친구'(가장 가까운 지인)에게, 가장 일상적인 공간에서 1:1 로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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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방송일

방송 시작일 2021. 10. 21 ~
방송 요일,시간

기획의도

◆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나'의 이야기 어느 날, 그 사건, 그 장면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눈길을 사로잡는 그 날, 그 사건으로부터 한 사람의 소시민으로서 '내'가 느낀 바를, 온전히 '나'의 시점에서 주관적으로 전달한다. ◆ 배워서 '너' 주는, 3人 3色 이야기 '너' 에게 꼭 들려주고 싶어! 친구, 배우자, 동료... 세 명의 '이야기꾼'이 스스로 공부하며 느낀 바를 각자의 '이야기 친구'(가장 가까운 지인)에게, 가장 일상적인 공간에서 1:1 로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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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852
[꼬꼬무 찐리뷰] 스스로 총 세 발 쏴 죽었다?…허원근 일병 의문사 사건, 진실 위한 아버지의 싸움 [꼬꼬</font>무</font> 찐리뷰] 스스로 총 세 발 쏴 죽었다?…허원근 일병 의문사 사건, 진실 위한 아버지의 싸움 등록일2025.04.18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17일 방송된 '두 발의 총성, 그리고 11명의 목격자'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가수 윤도현, 배우 오대환, 조수향이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아들의 죽음 때는 1984년 4월 2일 아침. 전남 진도에서 김 양식업을 하던 마흔네 살 허영춘 씨는 하루종일 일이 손에 안 잡혀. 새벽녘에 이상한 꿈을 꿨거든. 군대 간 큰아들이 나타나서 '아버지'라고 부르더래. 깨고 나서도 영 불안하고 느낌이 안 좋아. 그래서 일찍 일을 접고 저녁식사를 마쳤을 때였어. 갑자기 마을 방송이 들려와. 아아 허영춘 씨. 언능 와서 전화 좀 받아보쇼 우체국에서 급한 전보가 왔다는 거야. 전보 내용을 듣는 순간, 허 씨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허원근, 귀대 중 사망' 허원근은 허 씨의 큰아들이야. 나이는 22살. 6개월 전 입대해서 강원도 최전방 GOP에서 근무하고 있었어. 내일이면 첫 휴가를 나온다고 해서 기다리던 중이었어. 그런데 갑자기 사망했다는 연락을 받게 된 거야. 허 씨는 황급히 택시를 타고 아들이 근무하는 부대로 향했어. 전남에서 강원도까지 수백 킬로나 되는 길을 밤을 새워 달려갔다고 해. 다음날 아침, 부대에 도착한 허 씨는 헌병대장을 붙잡고 우리 애가 왜 죽었단 말입니까? 라고 물었어. 돌아오는 대답은 충격적이야. 아직 조사중에 있는데... 허 일병이 자살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허 씨는 그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리 아들이 자살할 이유가 없었거든. 원근이는 밝고 온화한 성격이었다고 해. 양식업을 하는 아버지의 뒤를 잇겠다며 수산대에 진학한 기특한 아들이야. 그런 애가 자살이라니? 아들이 사망한 날은 첫 휴가를 하루 앞둔 날이었다고 했잖아. 이미 다른 병사들에게 휴가복도 빌려놨다고 해. 자기가 휴가 나가면 대신 가족들에게 안부를 전해주겠다고 약속도 했대. 그런 애가 유서도 남기지 않고 자살했다고? 이게 이해가 되니? 허 씨는 아들의 시신을 직접 확인하기로 했어. 그런데 시신을 보고는 큰 충격을 받았어. 모포를 벗기고 보니까 총을 세 방을 맞아 있었어요. -허영춘, 故허원근 일병 아버지 아들의 몸에는 총상이 세 군데 남아 있었어. 오른쪽 가슴, 왼쪽 가슴, 그리고 머리. 사인은 총상으로 인한 두부손상. 총알이 빠져나온 왼쪽 머리는 눈 뜨고 보기 힘들 만큼 비참한 모습이야. 헌병대장은 허 일병이 자살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어. '어떻게 사람의 힘으로 이렇게 자기 몸에다 세 발을 쏠 수 있느냐?' 그런 질문을 하니까 거기서 안 싸봤으니까 모르겠다는 거죠. -허영춘, 故허원근 일병 아버지 허 씨는 아들이 자살했다는 말을 절대 믿을 수 없었어. 허 씨는 가해자를 처벌할 생각은 없다,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으니 용서하겠다, 그러니 내 아들이 자살했다고만 하지 말아달라… 그렇게 군 헌병대에 부탁했어. 그때 내 아들의 처참한 죽음 앞에서도 그런 말을 했습니다. '군인이라는 것이 갖고 있는 무기가 칼 하고 총이다. 사람은 언제나 순간적인 생각에서 사고를 저지를 수가 있다. 자살만 아니라고 하면 나는 그대로 여기서 물러나겠다. 처벌을 원치 않겠다'… -허영춘, 故허원근 일병 아버지 ▲ 믿을 수 없는 조사 결과 사건 발생 후 약 한 달이 지나자 군 헌병대의 수사결과가 나왔어. 군 헌병대는 허 일병이 자살했다고 결론을 내려.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밝혔어. 중대장 전령으로 근무하던 허원근은 평소 중대장의 가혹행위와 폭력, 괴팍한 성격 등으로 괴롭힘을 당하여 몇 차례 보직을 변경하여 소대로 배치해 줄 것을 건의하였으나 묵살되었다. 이로 인해 허원근은 군 복무에 심한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군 헌병대 조사 내용 中 당시 헌병대가 수사한 내용을 알려줄게. 소대 소총수로 배치된 허원근은 중대원들로부터 평판이 좋았다고 해. 181cm 훤칠한 키에 근무태도도 성실해서 중대원들과의 관계도 원만했대. 그래서 눈에 띄었던 걸까? 허원근은 일병 진급을 앞두고 중대장 전령으로 발탁이 됐다고 해. 하지만 이때부터 문제가 생겼어. 중대장은 성격이 괴팍한 사람이었거든. 장교든 사병이든, 걸핏하면 폭행을 하고 얼차려를 줘. 한번은 실탄이 장전된 M16소총을 들고 병사들을 죽이겠다며 소동을 피운 적도 있었대. 허 일병은 그런 중대장의 전령으로 남은 군생활을 보내게 된 거야. 허 일병이 사망한 날 아침, 중대장은 전투복 다림질이 이상하다고 허 일병을 심하게 꾸중했다고 해. 게다가 철모 관리를 제대로 못 했다고 눈앞에서 허 일병의 사수를 폭행하기까지 했대. 그러자 심한 압박감을 느낀 허 일병이 자살을 결심했다는 거야. 군 헌병대가 밝힌 그 후의 상황은 이래. 허 일병은 M16 소총을 들고 몰래 내무반 밖으로 나왔대. 그의 손에는 실탄이 든 탄창이 들려 있었어. 중대본부에서 30m 정도 떨어진 폐유류고로 향한 허 일병은 M16 소총을 오른쪽 가슴에 대고 탕! 쐈다고 해. 하지만 바로 죽음에 이르지 않자 다시 소총을 왼쪽 가슴에 대고 탕! 쐈다는 거야. 두 발을 쏘고도 의식이 있던 허 일병은 다시 소총을 머리에 대고 탕! 그렇게 세 방을 쏴서 자살했다는 거야. 이게 가능한 일일까? M16소총은 총신이 길어서 스스로 가슴을 쏘는 자세를 취하기도 힘들어. 그리고 이게 위력이 엄청나. 총기의 위력은 '줄(J)'이라는 단위로 표기하는데, 권총의 위력이 3~400줄이면 M16소총은 1800줄에 달한대. 엄청난 살상력을 가진 총기인 거지. 총을 쏘면 반동도 셀 텐데, 반동과 격통을 이겨내고 여러 번 자기 몸을 겨냥하는 게 가능할까? 하지만 헌병대에서는 가능하다는 입장이야. 몸에 여러 방을 쏴서 자살한 사례가 여럿 있다는 거야. 허 씨는 모든 게 거짓말처럼 느껴졌어. 처음 부대를 찾아갔을 때에도 이상한 일이 있었거든. 아들의 시신을 보고 나오는 허 씨에게 지나가는 병사가 이런 말을 했대. 아버님.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어제 총소리는 두 방 밖에 안 들렸는데 어떻게 총상이 세 군데입니까? 자기는 분명히 총소리를 두 번 들었다는 거야. 병사의 말을 듣고 중대본부로 달려간 허 씨는 그곳에서 이상한 걸 목격했다고 해. 가서 중대장실 안에서 피를 발견했고 문짝에 피가 묻어있는 것을 봤고. 바닥에는 또 흥건히 물이 고여 있고. 나와서 우측으로 이렇게 보니까 바로 그 옆에 피가 상당히 큰 덩어리가 거기 있었어. -허영춘, 故허원근 일병 아버지 아들이 근무했던 내무반 바닥은 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대. 그리고 문짝에 남아있는 검붉은 핏자국, 내무반 막사 바깥에서는 핏덩어리까지 목격했다고 해. 그래서 삽으로 떴어. 떠서 봉투에 담았어요. 헌병 대장이 담았는데, 그 자료가 반드시 기록돼 있어야 하는데 없더라고요. -허영춘, 故허원근 일병 아버지 헌병대에서 조사해보겠다며 핏덩어리를 수거해갔지만 수사기록에는 아무런 언급도 없었어. 사단 헌병대, 군단 헌병대, 군사령부 헌병대가 사건을 조사했지만, 모두 자살로 결론짓고 말았어. 아버지는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었어. 그래서 허 씨는 아들의 죽음 앞에서 약속해. 반드시 네 억울한 죽음을 밝혀주겠다고. ▲ 아버지의 싸움 그후 허 씨는 생업을 내던지고 사건을 파헤치기 시작해. 홀로 법의학 공부를 하면서 의문점들을 다시 조사했어. 그럴수록 확신은 강해져. 내 아들은 절대 자살한 게 아니라는 거. 허 씨는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진정서를 썼어. 대통령, 국방부장관, 군사령관, 사단장 등 떠올릴 수 있는 사람 모두에게 보냈다고 해. 내 아들의 죽음에 얽힌 의혹을 풀어달라고. 정말 평범한 개인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한 거야. 결과는 어땠을까? 이때가 1984년이야. 1980년 이후 전두환 군부정권이 장악하고 있을 때였어. 군부세력이 정권을 잡은 1980년 한 해에만 군에서 사망한 사람이 무려 970명이야. 1991년 걸프전 당시 미군 전사자가 148명이었다고 해. 전쟁도, 전투도 없이 한국에선 한 해 천 명에 가까운 젊은이들이 죽어간 거야. 그중 자살로 사망한 사람이 391명. 하루에 한 명 이상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어. 이런 상황에서 이미 자살로 결론이 난 아들의 죽음을 밝혀달라고 아버지가 요청하는 거야. 허 일병의 죽음은 그들이 보기에 수많은 숫자 중에 '1'에 불과했던 게 아닐까? 철저한 무시와 냉대. 침묵을 강요당했던 이 시기가 허 씨는 가장 고통스러웠다고 해. 그때의 심정을 적은 글이 있어. 진즉이 땅에 묻고 잊고서 살았다면 오늘같은 모진 수모 당하지 않았겠지. 안쪽에 모셔놓고 면담을 거절할 때 너무나 비통하고 너무나 서글퍼져. -허영춘 씨 일기 中 그 후 허 씨는 거리로 나섰고, 오랜 투쟁이 이어졌어. 이런 죽음들이 숱하게 많이 있거든요. 더 이상 죽이지 마라... 이왕 우리 자식들은 죽었지만 더 이상은 죽여선 안된다, 외치고 다녔죠. -허영춘, 故허원근 일병 아버지 그 외침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었을까? 1990년 육군 범죄수사단이, 1995년 육군본부 법무감실이 허 일병 사건을 재조사를 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야. '허 일병의 죽음은 자살이 틀림없다' 모두 같은 말을 반복할 뿐이었어. 하지만 아버지 허 씨는 포기하지 않고 탄원을 멈추지 않았어. 그 과정에서 군 관계자들의 협박까지 이어졌다고 해. '백번 천번 탄원해라' 그 정도로 얘기하면서 '너 몸에 지장 있을 거다', '생명에 지장 있을 거다', '몸조심해라', '입조심해라'... 이건 국가가 국민에게 할 얘기는 아니죠. -허영춘, 故허원근 일병 아버지 시간이 흘러 1998년. 아들이 세상을 떠난지 14년이 흘렀어. 어느새 머리가 허옇게 센 허 씨가 국회 앞에 섰어. 그 곁에는 30여 명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모였어. 이들은 모두 군부정권 시절 자식을 잃은 부모님들이야. 자식들 중 누군가는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목숨을 잃고, 또 누군가는 군대에서 의문사로 생을 마감했어. 이들이 바라는 것은 자식의 명예회복, 그리고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이야. 대부분 6~70대 노령인데, 한겨울 칼바람 부는 거리에서 천막 농성을 시작한 거야. 기한은 정해지지 않았어. 특별법이 제정될 때까지 농성을 이어가기로 했어. 살을 에는 강바람에 떨다가 흐드러지는 벚꽃이 피었다 졌어. 한낮의 뙤약볕도, 억수같이 쏟아지는 장맛비도 견뎌야 했어. 보도블록 위 가득 낙엽이 쌓이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해. 오늘이 마지막이기를 바라며 농성에 나선지 1년이 훌쩍 넘었을 때, 마침내 이분들의 노력은 결실을 맺게 돼. 422일간의 투쟁 끝에 의문사 진상규명 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된 거야. 유가족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서로 얼싸 안았어. ▲ 총상은 세 곳, 탄피는 두개 2000년 10월 17일, 대통령 소속 '의문사 진상규명 위원회'가 만들어져. 의문사위에 조사관으로 지원한 김학선 씨에게도 사건이 맡겨져. 바로 '허원근 일병 사망 사건'이야. 의문사 진상규명 위원회가 출범했을 당시에 이 사건을 담당했던 그 당시 조사관 김학선이라고 합니다. 이 죽음이 억울한 죽음이라면 원인을 명명백백하게 밝혀 가지고, 부모님의 한과 죽은 자의 한을 어떻게든지 풀어주고 싶다… -김학선, 당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 김 조사관과 팀원들은 국방부로부터 허 일병 사건에 대한 자료들을 요청했어. 막상 자료를 받고 보니 양이 엄청나. 보통 사건은 캐비닛 한 개 정도의 분량인데, 허 일병 사건은 캐비닛 세 개 정도 분량이야. 이 자료들은 그 당시 헌병대 수사기록 중 일부야. 김 조사관은 먼저 자료들을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어. 그런데 보면 볼수록 물음표가 생겨. 읽어보다 보니까 그 사건 기록철에 모순점이 너무 많이 발견이 되는 거예요. 장소, 시간, 그리고 당시 허원근 일병과 같이 근무했던 중대본부 요원들의 진술들, 기록들이 차이가 있고. 이게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하다 보니까 모순이 있지 않은가 하는 의심도 지울 수가 없었죠. -김학선, 당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 김 조사관은 당시 헌병대 수사기록에서 이상한 걸 발견했어. 헌병대원이 사건현장을 그린 그림이야. 허 일병의 시신에 남은 총상이 세 군데야. 세 발을 쐈다면 탄피도 세 개가 있어야 하잖아. 하지만 이 그림에는 허 일병의 시신 옆에 탄피가 두 개 그려져 있어. 다른 헌병대원이 그린 그림에도 탄피는 두 개야. 다른 기록도 마찬가지야. '당시 의문점. 총상은 3개인데 탄피는 2개 회수' 이 점은 수사기록 상에도 의문점으로 기록돼 있어. 사건 당일, 늦은 밤까지 주위를 정밀 수색했지만 나머지 한 발의 탄피는 찾지 못했대. 부대 안에서 탄피가 없어진다는 건 엄청난 사건이야. 관련자 모두가 징계를 받는 중대한 실수야. 여기서 혹시 생각나는 거 있지 않아? 사건 다음날, 부대를 찾은 허 씨에게 지나가던 병사가 뭐라고 얘기했지? 분명히 총소리가 두 발 들렸다고 했잖아. 김 조사관은 총소리에 관련된 진술을 찾아봤어. 경계 근무중이던 상병 000외 1명의 진술에 의하면, 동일 10시 50분경 변사장소 부근에서 M16 소총 총성이 약 30초에서 1분 간격으로 2발이 들리는 것을 청취할시, 근무호에 투입되었던 000 역시 총성 2발이 30초 간격으로 났다는 상황보고가 들어옴으로써 중대 상황실에 상황 보고. 다른 중대원들도 총성은 두 발이었다고 진술한 거야. 그뿐만이 아냐. 한참 간격을 두고 났어요. 총소리가... '핑' 소리가 나고, 나중에 총소리가 또 났어요. (두 발 정도로 기억을 하는 거예요?) 네. -당시 중대원 순찰하던 도중 총소리를 들었고 두 번 정도 들었거든요. 제가 듣기로는 두 번 들었는데... -당시 중대원 사건 당일 오전 총성을 들었다는 부대원 대부분이 총성은 두 발이었다고 진술하고 있어. 시신은 세 발을 맞았는데 총성은 두 번, 현장에 남은 탄피도 두 개야. 부검의사는 사건 발생 이틀 후까지도 탄피가 두 발만 발견됐다는 말을 들었다고 해. 하지만 수사기록 뒷부분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어. '현장에서 유류된 탄피가 자살자 좌우 50cm 범위에서 발견되므로 동일 장소에서 3발이 발사된 것이 입증' 정밀수색을 했어도 발견하지 못했던 세 번째 탄피. 하지만 어느 순간 탄피가 세 발이 발견됐다고 적혀 있어. 50cm 범위 안에서 세 발 모두 발견됐다는 거야. 누가, 언제, 어떻게 발견했는지는 기재돼 있지 않아. 그 당시에 찾지 못한 탄피를 이후에 어떻게 어디에서 찾았다고 기록을 가지고 근거를 제시했는지, 굉장히 믿기가 어렵죠. -김학선, 당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나타나. 허 일병이 발견된 현장의 사진을 보여줄게. 허 일병은 세 군데 총상을 입고 사망했어. 그중 머리 왼쪽은 크게 손상됐어. 이 경우, 시신 주변에는 뼛조각과 살점들이 흩어진다고 해. 그런데 현장을 찍은 사진은 이상하리만치 깨끗하지 않아? 당시 헌병대가 찍은 사진에 의하면 바닥에 피가 없어요. 다른 사망사건들은, 주변에 검붉은 흙, 핏자국이 이렇게 보이거든요. 그런데 허 일병 같은 경우는 아주 깨끗해요. -김학선, 당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 헌병대 수사기록에는 '사망자의 두부 좌전방 30cm~1m 일대에 골편이 산재해 있는 바, 동 장소가 사건현장임이 입증되었다.'라고 적혀 있어. 하지만 사진을 보면 산재해 있다는 뼛조각은 보이지 않아. 그러면 도대체 헌병대는 무엇을 보고 이렇게 기록한 걸까? 허 일병의 시신에도 물음표는 남아있어. 이 사진을 봐볼래. 시신을 발견한 직후, 촬영한 사진이라고 해. 허 일병의 가슴에 남은 두 군데 총상이 보이지? 왜 색깔이 다를까? 의문사위는 당시 부검의를 만나 이 사실에 대해 물어봤어. 당시 부검의는 자신이 시신을 봤을 때에는 양쪽 다 검은 색에 가까웠다고 진술해. 발견 직후 촬영한 사진은 자신도 처음 본다는 거야. 이어서 그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꺼내. 아마도 오른쪽의 색이 검은 이유는 오른쪽이 먼저 총상이 형성이 되었고 이후 수시간 후에 총상을 입었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부검할 때 찍은 사진은 사망한지 이틀이 지난 후에 찍은 것인데, 건조현상에 의해서 색깔이 비슷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당시 부검의 만약 이 말이 사실이라면, 오른쪽 총상을 입고 몇 시간이 지난 후, 왼쪽 가슴과 머리에 총상을 입었을 수도 있는 거야. ▲ 목격자들 두 발의 총성, 두 개의 탄피, 그리고 사건현장이라고 보기엔 너무 깨끗해보이는 사진과 부검의의 진술까지. 물음표가 너무 많지. 이제 당시 상황을 알고 있을 사람을 만날 차례야. 바로 허 일병과 같은 내무반에서 함께 지냈던 중대본부원들. 같이 생활했을 그들이, 이 사건의 전말을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을까? 근데 중대본부원들이 허 일병 사망 직후 헌병대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고 해. 허원근 일병이 사망하고 나서 중대본부 요원들 전원이 헌병대에 일주일 이상 끌려갔던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근데 그 끌려갔던 중대원들이 돌아왔는데, 같은 중대에서 근무했던 병사들이 그 친구들 얼굴을 처음에는 잘 못 알아봤다고 하더라고요. 너무 맞아가지고. 얼굴이 부어서. -김학선, 당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 그들은 약 보름간 헌병대 조사를 받은 것으로 전해져. 그리고 허 일병이 자살한 것 같다고 진술했어. 그리고 18년이 지났어. 뭔가 다른 숨기는 일이 있었으면 지금 시간도 이렇게 흘렀고 민주화도 되고 그래서 이제 자유로운 분위기인데 말을 하지 않겠느냐. 그래서 그 당시 소대에 근무했던 주요 참고인들을 불러서 GOP까지 데리고 가서 현장 방문까지 했거든요. 근데 그 결과가 헌병대 수사기록하고 그렇게 큰 차이가 안 나는 거예요. 대체적으로 자기들은 기억은 안 난다고 그러면서, '헌병대 수사 기록이 대부분 맞을 거다', '내가 알기로는 거기 기록에 나와 있는 진술이 맞다' 더 막막해지는 거죠. -김학선, 당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 이대로라면 18년 전의 수사결과를 반복할 뿐이야. 이런 막막한 상황에서 김 조사관은 다른 방법을 떠올렸어. 헌병대 수사기록에 나오지 않는 인물들을 찾아냈죠. 산봉우리에는 중대본부가 있었고 양옆으로는 소대가 하나씩 있었거든요. 그 당시 같이 근무했을 당시 그 소대원들의 명단을 구했어요. 그 사람들을 다 조사하기로 했죠. -김학선, 당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 그렇게 찾아낸 인원이 200명 가까이 됐다고 해. 그렇게 한사람 한사람 만나서 18년 전 그날의 일을 물어봤어. 제가 소대에서 근무했던 하사관 한 명을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전혀 헌병대 조사 기록에는 나오지 않는 발언이 나왔던 거죠. 그 당시에 총소리가 났는데, 그 총소리 때문에 허겁지겁 중대본부로 뛰어서 몇 명하고 올라갔는데, 중대본부 요원들이 물걸레를 들고 중대본부 안을 청소를 하고 있는데, 핏자국이 있더라. 나는 그걸 분명히 봤다. -김학선, 당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 헌병대 수사기록에 없었던 새로운 진술이 나왔어. 총성이 울린 그 시각, 중대본부 안에서 물청소를 하고 있었다는 거야. 게다가 핏자국을 목격했대. 처음에 허 씨가 했던 말 기억 나? 중대본부에 갔더니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고 했어. 그리고 문짝에 핏자국을 봤다고 했잖아. 그것과도 일치하는 증언이야. 당시 중대본부는 GOP라인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었어. 거기엔 상수도 시설이 있지 않아. 물을 떠오려면 가파른 계곡 밑까지 내려가서 물지게를 지고 올라와야만 해. 그래서 평소 물청소는 거의 하지 않았다는 거야. 그런데 왜 사건이 발생한 날, 물청소를 했던 걸까? 혹시 중대본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 아닐까? 김 조사관은 이후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물어봤어. 혹시 그날 중대본부에서 물청소하는 걸 본 적이 있나요? 라고 물으니, 아 맞다. 그날 중대본부에 갔더니 다들 전투복 바지를 걷고 슬리퍼를 신고 있었어요 라며 물청소하는 걸 봤다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해. 헌병의 수사기록에 의하면 그 시간에는 총소리 듣고 찾으러 다녔다 이런 거거든요? 그런데 물청소를 하고 있다는 건 뭔가 내무반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거잖아요. -김학선, 당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 새로운 증언이 나오며 조사가 활기를 띠기 시작해. 그리고 새로운 사실들이 하나씩 드러나. 허 일병이 사망한 전날 밤, 중대본부에서는 한 간부의 진급을 축하하는 술자리가 있었어. 술자리 참석자는 총 세 명. 중대장과 진급한 중위, 그리고 선임하사. 헌병대 수사기록에는 새벽 두 시까지 술을 마시고 아무 일 없이 돌아갔다고 적혀 있어. 하지만 수사기록과는 다른 진술을 하는 인물이 나타나. 중대본부 계원 전 모 상병이었어. 또 다른 목격자가 말하는, 그날 새벽의 이야기야. 원근이가 그 술상을 보고 찌개 같은 거를 준비를 하고. 중대장실 바로 옆에 침상에 앉아있었던 것 같고. '선임하사가 술이 굉장히 많이 취했구나' 그러면서 나뿐이 아니라 다들 좀 불안감을 좀 느꼈었지. 순식간에 욕을 해버리고 때리고 그 말리는 와중에 어느 순간에 손에 총이 들려 있었고. '탕'하는 그런 소리가 한 번 나면서, 허원근이 옆으로 침상 있는 쪽으로 푹 쓰러졌었던 그런 기억. 피가 꽤나 좀 많은 양이, 한방울씩 나오는 것이 아니라 뭉쳐가지고 이렇게 나오는... 색깔을 보니까 빨간색은 아니고 색깔이 약간 좀 검붉은 그런... -전 상병 전 상병의 진술에 따르면, 사건 당일 새벽 2시에서 4시 사이, 술을 마시던 중대장과 선임하사 사이에 말다툼이 일어났다고 해. 화가 나서 중대장실을 박차고 나온 선임하사는 밖에서 대기 중이던 중대장 전령 허 일병에게 욕을 하고는 폭행을 가했다는 거야. 어느 순간, 선임하사의 손에는 M16소총이 들려 있었다고 해. 그가 개머리판으로 내려치자 허 일병이 왼팔을 들어 막았대. 화가 난 선임하사는 허 일병에게 총을 겨누었고, 실랑이 하는가 싶더니 탕! 그리고는 허 일병이 가슴을 부여잡고 옆으로 쓰러졌다고 해. 중대본부에 있던 전 상병은 이 광경을 직접 목격했다고 진술했어. 그리고 날이 밝자 중대본부 내무반 안에서 물청소를 했대. 구석구석 피 튀긴 데도 닦고 바닥도 쓸고 침상 같은 데도 좀 닦고. 물청소는 하여간 그때 처음 해봤어요. -전 상병 근데 전 상병이 한창 바닥을 닦고 있는 그때, 바깥에서 두 발의 총성이 또 들렸다고 해. 총성을 듣는 순간 찰나에는 '정말 그럴 수 있나'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을 것 같은데, 그런 생각보다는 '아무 죄도 없는 허원근이 저렇게 순간적으로 죽고 나서 저렇게까지 되는데, 나도 잘못하면 그러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이성보다는 본능이 지배하면서 움직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전 상병의 증언 中 엄청난 공포였을 거야. 전 상병이 처음부터 이렇게 이야기한 건 아니야. 첫 진술조사 때에는 사건 당일 아침 허 일병을 목격했다고 진술했어. 하지만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12번째 조사 때 진술을 바꾼 거야. 그는 조사관에게 이렇게 말했어. 그날 새벽, 허 일병의 몸에서 튄 피가 내 옷에 묻었기 때문에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전 상병의 증언 中 전 상병의 증언을 들은 김 조사관은 다른 인물들을 설득하기 시작해. 그 설득하는 과정 중에서 그날 있었던 사실들이 한 꺼풀 한 꺼풀씩 사실관계가 드러나기 시작했죠. -김학선, 당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 그러자 이 증언을 뒷받침하는 인물이 또 하나 등장해. 중대본부에 관측병으로 파견근무 나와있던 이 하사였어. 이 하사의 진술 역시 전 상병의 진술과 같았어. 조사관 : 발사되고 나서 바로 허원근은 어떤 식으로 반응을 했죠? 이 하사 : 옆으로 그냥 기대는 식으로 넘어갔던 거 같아요. 조사관 : 피가 튄 것은 기억 안 나세요? 이 하사 : 튄 것은 기억은 안 나지만, 벽이나 이쪽에 자국이 있었던 그런 기억은... 그 후에도 다른 대원들로부터 이 상황을 뒷받침하는 간접 증언들이 쏟아져 나와. 제가 정확하게 들은 것은 현장에서 그 시체를 옮겼다는 거예요. 옮겨서 위장을 시켰다. 죽은 위치에 시체가 있는 게 아니라, 시체가 발견된 위치가 다른 곳으로 옮겼다. 이 얘기는 제가 정확하게 들었어요. -당시 중대원 그날 새벽 중대본부에 있었던 사람은 모두 12명. 그중 사망한 허 일병을 제외하면 11명이 있었어. 술파티를 벌인 3명의 간부와 8명의 중대본부원들. 중대장은 사건 이후 강제 전역했고 1999년 사망한 것으로 밝혀져. 남은 목격자는 모두 10명. 그중 두 명이 그날 새벽의 오발사고를 증언한 거야. 이 상황에서 나머지 중대본부원들은 어떻게 이야기했을까? 분명히 그날 밤에 잠을 잤어요. 거기서 사고가 일어났으면 과연 잠을 잘 수 있었겠느냐. 사람이라면 절대 못 자요. -당시 중대본부원 A씨 동료가 총에 맞았어요. 동료가. 자, 분명히 안 죽었단 말이야. 그러면 의무대나 어디로 헬기 불러가지고 보내지. 그것을 조작을 해? 생명이 안 끊어졌는데? -당시 중대본부원 B씨 그거 가지고 총을 쐈다고 하면, 기절할 일 아니에요 사람들이? 그리고 7시간 8시간 방치시켜놨다가 물청소? 이건 진짜 시나리오도 아니고 그런 시나리오를 쓸 수도 없어요. 도대체 어떤 근거에서 나왔는지 나는 지금 되묻고 싶은 사람이에요. -당시 중대본부원 C씨 그날 새벽,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거야. 무슨 일이 있어났다면, 모를 수가 없다는 거지. 그러면, 가해자로 지목된 선임하사는 뭐라고 했을까? 저는 그날, 총 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자꾸 총을 쐈다며 제 가정을 파괴하고 살인자의 오명을 쓰게 만듭니까? 이게 될 말입니까? -가해자로 지목된 선임하사 그는 절대로 총을 쏜 일이 없다며 극구 부인했어. 사건 당일 새벽,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린 일은 인정했어. 술김에 소총을 집어들긴 했지만 총을 쏜 기억은 없다고 답했대. 같은 공간에 있었던 사람들의 의견이 엇갈리는 상황이야. 오발 사고를 목격한 사람들, 총성 조차 듣지 못한 사람들, 총을 쏘는 걸 본 사람과, 총을 쏜 기억이 없는 사람. 이중에 누군가는 진실을 말하고 있고, 다른 누군가는 거짓을 말하는 게 분명해. ▲ 진실게임 2002년 9월 10일, 의문사위는 지금까지의 조사결과를 발표했어. 허 일병 사건 재조사에 착수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사고 당시 내무반에서 총기 오발사고가 있었고 허 일병은 자살한 것이 아니라 타살됐다고 밝혔습니다…(중략)… 중대장실에서 술자리 도중 문을 박차고 나온 선임하사 노 모 씨가 술에 취해 내무반 사병들에게 행패를 부리는 도중 총탄이 발사됐다는 것입니다. 이후 허 일병은 누군가의 손에 의해 부대 안 폐유류고 창고 옆으로 옮겨졌고, 그후 누군가가 쏜 총탄 두 발에 의해 허 일병이 살해됐다는 것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결과입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허원근은 총에 맞아 중대장실과 가까운 침상 쪽으로 기대어 쓰러졌습니다. 허원근이 쓰러져 오른쪽으로 기댄 상태에서 오른쪽 가슴에서 피가 흘러나왔고… -김준곤 당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상임위원 사건 당일 새벽, 중대본부 내무반 안에서 총기 오발사고가 있었고 이를 자살사고로 은폐하기 위해 두 발을 더 쏴서 허 일병을 살해한 것으로 보인다고 발표한 거야. 이뿐만이 아냐. 의문사위에서는 84년 당시 작성된 헌병대 수사기록이 조작된 정황을 포착해. '1984년 당시 수사에서 헌병대는 허원근이 4월 2일 오전 9시 50분경에 자살하였고 중대장은 오후 1시 30분이 되어서야 이 사실을 보고받았다고 수사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대대 상황실은 이미 4월 2일 새벽에 허원근의 사망 보고를 받았으며 4월 2일 아침에는 연대본부에서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의문사위 조사 내용 중 헌병대 수사기록에 따르면, 총성이 들린 시간은 오전 9시 50분. 중대장이 보고받은 것은 오후 1시 30분이라고 적혀 있어. 하지만 당시 대대 상황실에서 근무하던 장교는, 그날 새벽에 이미 허 일병의 사망 사실을 보고 받았다고 증언했어. (새벽) 1시 반에서 2시 사이 그쯤에 제가 연락을 받은 것 같고요. 2시라는 생각을 많이 하는게 그때 근무교대 시간이거든요. 그러니까 그날의 그거는 말하자면 저한테는 굉장히 큰, 자주 없는 일이었으니까. 전 또 처음 겪었던 일이었고. 새벽에 왔다가 갔는데 그러고 나서 바로 대대장이 '1호차 대기시켜라'. -당시 대대상황실 근무자 대대장의 운전병은 그날 아침 대대장을 태우고 사건 현장을 방문했다고 진술했어. 도착은 동이 틀 정도 됐고요. (대대장이 그렇게 일찍 나간 경우가?) 잘 없습니다. 그때 부대에 복귀하니까 아침식사를 다 끝낸 상태였고요. -당시 대대장 운전병 연대장 역시 아침 일찍 허 일병의 사망 보고를 받았다고 증언해. 이 증언들이 사실이라면, 수사기록에 적힌 내용은 조작됐다는 얘기가 돼. 의문사위의 발표는 엄청난 충격을 불러오게 돼. 허 일병이 사망한지 18년 만에 자살이 타살로 뒤집혔어. 아들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겠다던 아버지의 약속은 이뤄진 걸까? 새벽 4시에 일어나 생각을 해본다. 무슨 죄가 크기에 좌측 가슴에 총을 맞고 쓰러져 죽지 않고 살아보겠다고 8시간이나 견디며 그 고통을 견디었는데 구조는커녕 확인사살을 하고 말았다니. 이대로 묻어둘 수 없는 괴로움, 어쩔 것인가? -허영춘 씨 일기 中 하지만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아. 의문사위의 발표에 국방부가 즉각 대응에 나섰거든. 국방부는 특별진상조사단을 구성해서 허 일병 사건을 전면 재수사하겠다고 발표해. 국방부는 지난 20일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허원근 일병 사망 사고 조사 결과에 대한 진상규명을 위하여 조사에 착수하였습니다. 그 결과를 국민들께 소상히 밝힘으로써 일말의 의혹도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의문사위는 그동안 조사했던 자료를 국방부에 넘겨주고는 해산했어. ▲ 국방부의 재조사 국방부 특조단은 재수사에 착수한지 3개월 후, 수사 결과를 발표해. 조사 결과. 첫째. 허원근 일병은 자살하였습니다. 둘째 의문사위원회에서 허일병 사건을 타살로 발표한 것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 정수성, 국방부 특조단장 국방부 특조단은 다시 허 일병 사건은 자살이라고 결론을 내린 거야. 의문사에서 제시한 여러 의혹에 대해서는 이렇게 해명했어. 먼저 사건당일 총소리가 두 번이었다는 진술에 대해, 한 발은 못 들었던 거라고 해명했어. 우측 가슴의 총상은 총구를 몸에 대고 쐈기 때문에 소리가 작았을 거라는 거야. 총상의 색깔이 다른 것은, 총구를 몸에 대고 쏜 것과 조금 떨어져서 쏜 것 때문이라고 밝혔어. 사건 현장에 혈흔이 적은 것 역시, 허 일병이 옷을 여러겹 껴입고 있어 피가 밖으로 흐르지 않았다는 거야. 그리고 평소 하지 않던 물청소를 한 이유는 이거래. 그때 대대장님 오신다 그럴 때 높으신 분들 오면 청소하는 거는 그거는 예의 아닙니까? 수건 갖다가 테이블 위에 닦고 그런 청소지. 물청소라고 피를 닦고 한 그런 기억은 전00 상병만 있을 뿐이지. 우리 대원들은 전혀 없어요. 그동안 타살 정황을 뒷받침하는 많은 진술들이 있었잖아. 하지만 특조단 조사 이후, 대부분 진술을 번복했다고 해. 대대장 운전병 배 모씨가 의문사위원회 조사과정에서 사전 각본에 짜여진 유도질문에 대답한 것이 물의를 일으키게 되어 정말 죄송스럽다고 진술하였습니다. - 정수성, 국방부 특조단장 그밖에 중대본부에서 핏자국을 봤다고 진술한 중대원들도 대부분 착각이었다며 말을 바꿨어. 진술을 번복한 대대장 운전병. 그는 왜 진술을 바꾼 걸까? 내가 거기에 대해서 내가 무슨... 뭐라고 얘기를 드릴 수가 없네요. 미안합니다. 그럴 줄 알았으면 좀 신중하게 생각해야 되는데 너무 가볍게 생각해가지고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그 점에 대해선… 내가 내 자신이 그렇게 했다는 게 남들에게 부끄럽고 -대대장 운전병 배 씨 국방부에서 조사를 받으러 오라고 했을 때 배 씨는 거절했다고 해. 그러자 당시 대대장이 직접 배 씨를 찾아왔다고 해. 그의 설득으로 특조단의 조사를 받았다는 거야. 그후 배 씨는 진술을 번복했어. 그날 새벽 오발사고를 목격했다고 진술한 두 명의 목격자 중 한 명인 이 하사도 진술을 번복했어. 이00 하사를 우리가 다 조사할 때는, 자기는 어떤 경우에도 중대 내무반에서 총격사실은 없었고 허원근이 죽은 것은 못 봤다, 확실히 우리에게 얘기했고… -정수성, 국방부 특조단장 10명의 목격자 중, 전 상병을 제외한 9명이 그날 새벽 아무 일도 없었다고 증언한 거야. 전 상병은 국방부의 조사 요구에 끝까지 응하지 않았다고 해. 이제 그는 오발사고가 있었다고 증언하는 유일한 목격자야. 그는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저는 그렇습니다. 그 사실만큼은 제가 누구하고 얘기해도 아닌 건 내가 죽지않는 한 어차피 얘기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저는 오로지 믿음이 그겁니다. 내가 안 본 게 왜 그렇게 생생히 생각날 것이며… 일단 제일 서글픈 게 저 혼자라는 게 서글프고요. 혼자 좀, 유일하게 협조하는 사람이 저 혼자라는 것들이 사실은 그 친구들 이해가 되면서도.. -당시 중대본부원 전 상병 특조단이 허 일병의 죽음을 자살로 결론내린 근거는 또 있어. 재수사 결과 발표 3일 전, 국방부는 법의학자 토론회를 열었어. 토론 주제는 'M16 소총으로 스스로 세 발을 쏠 수 있는가?' 였어. 그 의문을 풀기 위해 법의학자들을 불러 토론회를 연 거야. 수많은 총기 자살하는 사람들이 가슴을 표적으로 하지 않는 이유, 불편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살하는 사람의 심리는 상당히 편한 자세를 원하는데, 굉장히 몸이 불편한 상태에서 두 발을 쏜다는 것은 가능하다는 면에서는 인정을 합니다. 단지 그것이 굉장히 특이하다. 드문 일이다. -이윤성 교수 최초의 부검 감정 결과를 번복할 만한 새로운 사망 상황이나 사실이 없으며 법의학적으로도 자살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만한 소견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본인은 허 일병 사망원인은 다발성 총창이며 사망의 종류는 자살 추정이라고 판단을 합니다. -이상한 교수 부검 소견, 시체에 나온 소견을 가지고서는 그것으로 자살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조 지나치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이상한 소견들이 많은 이 시체 소견을 가지고 자살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쉽게 애들 말로 오버하는 거다 하는 생각이죠. -이윤성 교수 총알의 방향이 아주 낮게 들어가는 거죠. 누운 상태에서 낮게 들어가 줘야 하는데. 먼저 타살이었더라면 엎드려서 쏴줘야하는 그래야 설명이 됩니다. 따라서 저는 이 몇 가지 이유 때문에, 타살보다는 자살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황적준 교수 진실이 밝혀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자살이라고 단정하기에는 아직도 힘들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윤성 교수 6명의 법의학자 중 1명은 결론을 유보했어. 부검기록과 사진만으로는 단정지을 수 없다는 의견이야. 하지만 나머지 5명은 허 일병의 죽음을 자살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어. 국방부는 법의학자들의 의견을 자살의 근거로 내세웠어. ▲ 진실을 밝혀라 2기 의문사위가 출범하며, 당시 허 일병 사건을 재조사하겠다고 나섰어. 2기 의문사위의 조사가 한창이던 어느날, 마침내 두 국가기관이 정면으로 부딪히는 사건이 일어나게 돼. 때는 2004년 2월 26일, 대구에 있는 한 공원에서 세 남자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어. 한 남자가 당장 내놔! , 기록 가져와! 라며 흥분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고 맞은편의 두 남자는 그를 진정시키려고 애쓰고 있어. 그런데 그때!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나고 말아. 갑자기 '탕!' 총소리가 울려 퍼졌어. 흥분한 남자가 기록을 가져오라고 소리치더니, 품에서 가스총을 꺼내 쏜 거야. 가스총을 쏜 사람은, 군 검찰수사관 김 상사. 그를 진정시키던 두 남자는 의문사위의 조사관들이야. 한시간 전에 김 상사의 집을 방문한 의문사위 조사관들이 어떤 자료들을 가져갔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김 상사가 바로 쫓아왔어. 김 상사는 조사관들의 손목에 수갑을 채워. 그리고 허공에 가스총을 쐈어. 자료를 돌려주지 않으면 죽는다고 외치며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갖다 대기까지 했다고 해. 어떤 자료길래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D.B.S라는 제목을 붙여서 파일을 이렇게 하나 해놨더라고요. D는 DIRTY고요. B는 BLACK, S는 SECRET인가? 아마 그랬을 거예요. 그러니까 타살 정황을 쭉 모아놓은 자료예요. -의문사위 조사관 D.B.S는 DIRTY BLACK SECRET. 더럽고 검은 비밀이라는 뜻이야. 당시 육과수로 감정의뢰된 소총이 허원근 일병의 것이라고 확정할 수 없는 상태. 게다가 당시 접수공문 및 접발대장상의 총번 수정 흔적이 있고 총기감식결과를 믿을 수 없음. -'D.B.S 파일자료' 중 당시 사건을 수사했던 헌병대는, 현장에서 발견된 M16소총과 탄피에 대한 감정을 의뢰했어. 그 결과 현장에 있던 허 일병의 총기에서 발사된 탄피가 맞다고 발표했어. 이건, 허 일병이 자기 총으로 쐈다, 자살했다는 증거라는 거야. 근데 여기엔 깜짝 놀랄 만한 비밀이 숨겨져 있어. 이건 육군과학수사연구소에 감정을 의뢰한 증거품 서류야. 감정을 의뢰한 총기 번호가 굵은 글씨로 수정돼 있어. 증거와 관련된 중요한 서류잖아. 총번을 수정한 이유가 뭐였을까? 이 총하고 탄피가 현장에 있던 거예요. 사고자 총, 이것만 의뢰했어요. 그런데 우리가 비교 감정을 해보니까 이 탄피가 이 총에서 안 나갔어요. -지장현, 당시 육군과학수사연구소 총기담식 팀장 현장에 있던 M16 소총과 탄피를 감정해보니까, 총과 탄피가 서로 일치하지 않은 거야. 이 말은 즉, 총알이 허 일병의 M16에서 발사된 것이 아니라는 거야. 우리가 전화로 그 쪽 수사관에게 '이 탄피가 당신들이 의뢰한 탄피가 이 총에서 안 나갔다' 이렇게 연락을 해줘요. 이 총에서, 사고자 총에서 안 나갔으니. 다시 한 번 재수사 해봐… 수사해보니까 여기에 7~8명이 같이 근무하다 한 사람이 죽었어 일곱 사람의 나머지 총이 있다 이거죠. 그래서 그 나머지 총을 추가로 의뢰한 거예요. 처음에 의뢰된 총은 어느 총인지 모를 거예요. 저도 몰라요. 저기 번호가 안 남았으니까. 처음에 그러니까 사고 총이라고 의뢰했던 총이 어떤 총인지 지금도 몰라요 저도. -지장현, 당시 육군과학수사연구소 총기담식 팀장 감정을 맡긴 증거품 서류의 총번이 수정된 이유. 혹시 현장에 있던 탄피가 허 일병의 총기가 아닌 다른 총기에서 발사된 것이 아닐까?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허 일병의 총번을 수정한 게 아닐까? 국방부 툭조단은 단순한 행정상의 착오라고 해명했어. 하지만 DBS 파일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어. 의뢰를 요청한 M16 소총은 허일병의 것이라고 확정할 수 없다. 2기 의문사위는 허 일병 사건을 재조사한 결과를 타살로 발표해. 국방부 특조단의 발표내용을 2년 만에 다시 한번 뒤집은 거야. ▲ 여전한 고통 이를 바탕으로 2007년 4월, 허 씨는 국가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해. 이미 공소시효가 지나서, 형사 책임은 물을 수가 없어. 그리고 3년 후, 1심 법원의 판결이 선고돼. 1심 재판부는 허 일병의 죽음을 타살로 인정했어. 이를 은폐하기 위해 자살로 조작했다고 판단한 거야. 법원이 이렇게 판단한 근거가 있어. 헌병도 수사 기록에 시간적 모순이 있었어. 이 모습을 밝혀내는데는 연대장의 증언이 결정적이었다고 해. 헌병대 수사기록에 적힌 허 일병의 사망시각이 오전 9시 50분. 하지만 법정에 증인으로 선 연대장은 이렇게 증언했다고 해. 허 일병 사망 당일 오전 7시경 출근하여 의자에 앉으니 곧바로 1대대장이 보고를 왔는데, 그때 하는 말이 '중대장 전령이 자살했다'는 보고였습니다. 내가 군 생활하는 동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접한 사건이기에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9시 50분이 되기 전에 이미 총격이 있었고, 이걸 숨기기 위해 자살로 보고했다는 거지. 중대에서 대대, 대대에서 연대로 보고가 이뤄졌을 테니, 연대장이 기억하는 9시 50분보다 더 앞선 시간에 사건이 있었다고 봐야해. 헌병대 수사기록 속 허 일병의 사망 시각은 조작되었다고 볼 수 있지. 1심 재판부는 그날 새벽 중대본부 내무반에서 총격이 있었고, 몇시간이 지난 후에 자살로 은폐하기 위해 두 발을 더 쐈을 거라 판단했어. 헌병대는 초기에는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한 수사를 시작하였다가 어느 순간부터 초기의 수사 방향을 변경하여 이 사건사고의 진상을 알면서도 은폐하기로 하여 결국 망인의 사인을 자살로 처리하였다고 판단된다. -1심 판결문 中 재판부는 허 일병의 죽음에 국가의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어. 지난 26년간 유가족들이 감내해야 했던 고통을 인정한 거지. 하지만 이걸로 모든 게 끝난 걸까? 아니. 피고측, 대한민국의 항소로 이 사건은 고등법원으로 올라가. 2013년 2심 판결이 선고돼. 그런데 판결이, 또 뒤집어졌어. 항소심 법정은 허 일병의 죽음을 자살이라고 본 거야. 항소심 재판부는 참고인들의 진술이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했어. 1, 2차에 걸친 의문사위, 국방부 특조단. 반복된 조사를 거치면서 유입된 정보로 기억의 오염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다는 거야. 같은 사건을 두고 판결이 정반대로 나온 상황이야. 결국 허 일병 사건은 대법원에 판단을 맡기게 돼. 2015년 9월 10일. 마침내 대법원의 판결이 선고돼. 허 씨는 법정에 앉아 판결을 기다렸어. 아들을 잃은지 어느덧 31년이 흘렀어. 길고 긴 싸움의 종지부가 찍히는 날이야. 대법원의 판결은 어땠을까? 허원근이 타살되었다는 점에 부합하는 듯한 증거들과 이를 의심하게 하는 정황들만으로는 허원근이 소속 부대원 등 다른 공무원의 위법한 직무집행으로 인하여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고 보기 어렵고, 그렇다고 하여 허원근이 이 사건 사고 발생일 오전에 폐유류고에서 스스로 소총 3발을 발사하여 자살하였다고 단정하여 허원근의 타살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도 없다. -대법원 판결문 중 쉽게 이야기하면 자살인지, 타살인지 알 수 없다 는 거야. 31년동안 자살이냐 타살이냐 공방이 이어졌는데, 대법원이 내놓은 최종 판단은 '알 수 없다'였어. 당시 헌병대의 부실한 수사로 이제는 진실을 밝히기 어렵다는 거야. 대법원 판결이 내려지고 10년이 지난 지금. 허 씨는 군대 가기 전 큰아들과 함께 지은 집에서 지내고 있어. 지금 그는 어떤 마음으로 지내는지 만나봤어. 자식 잃은 슬픔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국가에서 국민한테 그렇게 처리해서는 안 되잖아요. 죽였으면 죽였다, 잘못했다, 미안하다라고 해야지. 어느 놈이 잘못했다는 사람이 하나도 안 나와. 어떤 누가 내 아들한테 총을 쐈는지는 아직도 모르고 있으니까. 세상 살아보니까, 아버지 죽고도 살고 엄마 죽고도 살고 자식들 죽고도 사는데, 제일 가슴 아픈 것이 자식들을 낳아 먼저 죽게 만드는 것이 가장 어려움을 견디는 것 같아요. 자식들은 죽고 보니까 지금도 늘 눈물이 난답니다. 더 이상 죽이지 마라. 그 말 밖에 할 수가 없어요. -허영춘, 故허원근 일병 아버지 올해 4월은 허 일병이 세상을 떠난지 41년이 되는 달이야. 아들과 함께 지낸 시간보다 아들을 잃고나서 보낸 시간이 훨씬 더 오래됐어. 만약 살아있다면 환갑이 넘었을 아들은, 여전히 22살 앳된 모습으로만 기억에 남아있어. 41년의 세월동안 8번의 조사가 있었고 세 번의 재판이 있었어. 9명의 대통령이 바뀌는 동안에도 아들의 죽음에는 여전히 물음표가 남아있는 상황이야. 아들의 몸에 남아있던 총상처럼 아버지의 가슴에 뚫린 구멍은 여전히 메워지지 않고 있어. 1980년부터 92년까지 군대에서는 해마다 평균 620명이 사망했다고 해. 그럼 지금은 어떨까? 군 인권센터에 따르면, 최근 5년간 군에서 사망한 자는 397명. 한해 평균 70~80명 정도라고 해. 지금도 1주일에 1명 이상이 목숨을 잃고 있는 거야. 과거에 비해 많이 줄긴 했지만, 누군가의 소중한 아들, 딸이 여전히 목숨을 잃고 있어. 국방의 의무가 있다면, 국가는 군 복무중인 자식을 건강하게 돌려보내야 할 책임이 있어. 만약 사고가 생기면 공정하고 투명하게 수사해서 한 점의 의혹도 남기지 말아야 해. 만약 유가족이 의문을 갖고 있다면 그 의문을 정성껏 풀어주는 것도 국가가 해야 할 의무가 아닐까. '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
'꼬꼬무' 윤도현 '너를 보내고', 군대 간 남자친구 의문사 토대로 쓴 가사 '꼬꼬</font>무</font>' 윤도현  '너를 보내고', 군대 간 남자친구 의문사 토대로 쓴 가사 등록일2025.04.17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 리스너로 출격한 가수 윤도현이 히트곡 '너를 보내고'의 작사 비하인드를 전격 공개한다. 17일 방송될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171회는 휴가를 하루 앞두고 군에서 사망한 '허원근 일병 의문사 사건'을 다룬다. 가수 윤도현, 배우 오대환, 조수향이 리스너로 출격하는 가운데 자살과 타살, 허 일병의 사인을 두고 오갔던 국가 기관들의 공방을 이야기한다. 이 가운데 윤도현은 '먼 산 언저리마다 너를 남기고 돌아서는'이라는 가사가 유명한 히트곡 '너를 보내고'의 작가 비하인드를 공개한다. YB의 '너를 보내고'의 가사는, 작사가가 겪은 남자친구의 군 의문사를 토대로 쓰인 가사 라고 고백해 모두를 놀라게 한 것. 윤도현의 고백에 장현성은 그 노래를 아는데 그게 그런 내용인 줄 몰랐네 라며 안타까움을 드러낸다. 허 일병은 오른쪽 가슴, 왼쪽 가슴, 머리까지 세 개의 총상을 입었지만, 초기 수사 기록엔 두 개의 탄피만이 기록됐다. 특히 당시 허 일병의 사망 사건을 기억하는 중대본부 군인들의 진술이 모두 엇갈렸던 가운데 허 일병을 향해 총을 쏘는 걸 봤다는 사람과 총을 쏜 기억은 없다는 가해 용의자, 총성조차 들은 적 없다고 주장하는 부대원까지 '허원근 일병 사망 사건'의 진실이 무엇일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무엇보다 아들의 죽음에 의혹을 품은 허 일병 아버지의 한 맺힌 부정이 리스너들의 안타까움을 더한다. 조수향은 내 아들 죽음의 진실을 알고 싶으셨던 거 같아 라며 허 일병 아버지의 마음에 깊이 공감한다. 심지어 허 일병 아버지가 군 관계자로부터 협박까지 받았다는 사실이 공개돼 공분을 일으킨다. 윤도현은 너무 화가 나서 할 말을 잃게 되네 라며 울분을 토하고, 오대환 역시 뭔가를 말하고 싶은데, 차마 말을 못 하겠어 너무 화가 나 라며 분노를 터트린다. 과연 22세 청년의 죽음에 숨겨진 진실은 무엇일지, '허원근 일병 사망 사건'을 둘러싼 의혹들의 전말을 공개할 '꼬꼬무'는 17일 밤 10시 20분 방송된다. 강선애 기자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
[꼬꼬무 찐리뷰] 살인자 김일곤, CCTV에 담긴 섬뜩한 미소…28명 죽이려 만든 충격의 '살생부' [꼬꼬</font>무</font> 찐리뷰] 살인자 김일곤, CCTV에 담긴 섬뜩한 미소…28명 죽이려 만든 충격의 '살생부' 등록일2025.04.11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10일 방송된 '김일곤의 살생부'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배우 임주환, 그룹 아이브 멤버 가을, 배우 박경혜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잘못된 만남 때는 2015년 7월, 어두컴컴한 저녁이야. 가로등도 없고, 인적도 드문 한 골목길에 중형차 한 대가 들어섰어. 운전자는 당시 20대 중반이었던 이성준(가명) 씨.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나오는데, 저 어둠 속에 까만 실루엣이 보여. 자세히 보니 한 남자가 서있어. 그런데, 그 사람 손에서 뭔가가 번쩍거려. 잘 보니, 칼이었어. 그 순간 골목엔, 정적만 흘러. 잠시 후, 성준 씨를 노려보던 그 남자가 입을 열었어. 내가 너, 죽여버릴 거야! 이게 무슨 상황일까? 성준 씨는 서울 영등포에서 가게를 운영하고 있어. 그의 가게는 술을 판매하는 노래방, 즉 노래주점이야. 그래서 보통 늦은 저녁 시간에 가게를 열어. 두 달 전인 5월 어느날 저녁, 성준 씨는 차를 몰고 출근을 하고 있었어. 골목으로 들어가 우회전을 하는데, 갑자기 오토바이 한 대가 차 앞으로 확! 끼어든 거야. 우회전을 하는데 그 틈으로 오토바이가 들어오는 바람에 사고가 날 뻔 했었어요. 그래서 경적을 두 번 울리고, 빨리 가라… 그러고 이제 주차를 했는데… -이성준(가명), 당사자 오토바이 운전자가 성준 씨를 쫓아온 거야. 오토바이 운전자는 40대 남성. 그런데 이 남자, 완전 막무가내야. 그냥 봤을 때 싸한 사람 있잖아요. 봤을 때 그냥 '위험하다'…눈을 뚫어져랴 쳐다보고, 그냥 욕설을 계속 해요. 반말을 하고 욕설이 오고 가다가… -이성준(가명), 당사자 성준 씨 말은 듣지도 않고, 이 오토바이 남자가 갑자기 막 욕을 퍼붓기 시작해. 야! 네가 먼저 길 막아 놓고, 왜 빵빵대고 난리야! 라면서. 성준 씨도 슬슬 열이 받기 시작했어. 결국 큰소리가 오갔고, 분위기는 아주 험악해졌어. 얼굴에다 손을 갖다 대면서 '뭐라 그랬어?' 하길래, '야, 뭐 할 거 아니면 그냥 가라' 그러고 무시했었어요. 근데 그 남자가 저를 잡아당기면서 팔에 상처가 생겼었어요. 손톱으로 긁히면서. 그래서 '이것도 폭력이야. 신고할 거야' 그래서 근방에 고깃집 사장님이 신고를 했어요. -이성준(가명), 당사자 이내 경찰이 도착했고, 둘은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어. 그 결과 성준 씨는 무혐의를 받았고, 그 오토바이 남자는 폭행죄로 벌금 50만 원을 내게 됐어. 성준 씨는 이때만 해도, 그냥 단순 해프닝으로 끝날 줄 알았어. 그런데 두 달 뒤, 성준 씨 앞에 그 남자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거야. 손에 칼을 쥔 채로. 다시 아까 그 때로 돌아가볼게. 칼을 든 남자를 마주한 성준 씨는 할 수 있으면 어디 한번 찔러보든가 라며 세게 나갔어. '할 수 있으면 해 봐라' 그렇게 된 거예요. 속으로는 겁 많이 먹었죠. 왜냐하면 흉기를 보면 달라져요 진짜로요. 근데 겁을 먹으면 죽거든요 그런 애들한테는. 기싸움이라는 게 있잖아요. -이성준(가명), 당사자 남자들만의 기세가 있잖아. 겁먹은 모습을 보여주면 안 되겠다 생각했대. 게다가 성준 씨, 대학생 때 운동선수였어. 그러니 몸이 다부졌어. 칼을 든 그 남자, 가만히 성준 씨를 보다가 이렇게 말해. 근데, 지금은 타이밍이 아니야. 그러더니 그대로 어둠 속으로 사라졌어. 그제야 긴장이 풀린 성준 씨는, 바로 경찰에 신고했어. 신변 보호 요청을 한 거야. 그 일이 있었던 이후, 성준 씨에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어. 하지만 그때만 해도 전혀 몰랐던 거야. 이 만남이, 앞으로 벌어질 끔찍한 일들의 서막이었다는 걸. ▲ 트렁크 살인사건 그리고 두 달이 더 흐른, 9월 11일. 장소는 서울 성동구의 한 빌라야. 오후 2시가 좀 넘은 시각, 조용했던 동네가 갑자기 발칵 뒤집혔어. 여기 불났어요! 라는 외침에,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뛰어 왔어. 빌라 1층 주차장에 있던 차에서 불이 나고 있었어. 흰색 SUV였는데, 차 안에서 불이 난 거야. 이 화재가 119 말고 또 신고가 접수된 곳이 있었어. 바로 경찰서. 성동경찰서 강력2팀 형사들이었어. '차가 불에 타고 있다' 이런 신고를 받게 됐거든요. 그런데 바로 옆에 인접 경찰서에서 한 10분, 15분 간격으로 계속 '흰색 SUV 차량이 뺑소니를 하고 있다'…근데 차가 또 SUV라고 하니까, 연관성이 있지 않나. '혹시 그 차 아닌가?' 했죠. -유태권,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뺑소니 차량에 대한 신고를 받았는데, 뒤에 또 화재 차량 신고가 들어온 거야. 근데 이 뺑소니 차량과 화재 차량, 모두 흰색 SUV야. 형사들은 서둘러 현장으로 갔어. 먼저 도착한 소방대원들이 화재를 진압하고 있었어. 그런데 이 차량 트렁크 안에 부탄가스통이 널브러져 있어. 그것도 세 개나. 그리고 기름 냄새도 나. 화재 원인은 트렁크 쪽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지른 것으로 확인이 됐어요. 누군가 고의적으로 방화를 했다… -김권익,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불이 다 꺼지자, 형사들은 차의 번호판을 확인했는데, 뺑소니로 수배됐던 그 차가 맞았어. 그런데 그때, 한 소방대원이 막 형사님! 여기 좀 빨리 보세요! 라며 소리를 질러. 이 외침과 함께, 이 사건의 진짜 정체가 드러났어. 깨진 차량 뒤 창문으로 보니까, 골판지 밑에 마네킹 비슷하게 형체가 있어 가지고. 이게 과연 사람인지 아니면 마네킹인지 확인을 해야겠더라고요. 그래서 먼저 손을 집어넣는 순간, 왠지 좀 머리가 서는 느낌. 막 촉촉한 그런 느낌이 들더라고요. 막 머리가 서고 굉장히 나쁜 그런 기분, 그런 느낌이 들었거든요. 아 이거 사람이구나… 생각이 딱 그렇게 들었습니다. -유태권,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트렁크에서 여성의 시신이 발견된 거야. 단순 뺑소니인 줄 알았던 게, 방화이자 살인사건이었던 거야. 근데 시신을 확인한 형사들은, 다시 한번 충격에 빠졌어. 그 위에 골판지가 덮여 있었고, 그래서 골판지를 드러내고 그 다음에 사체를 확인했는데. 보통 살아있는 사람이라든가 방금 죽은 사람은 피가 돌기 때문에 대부분 빨갛잖아요. 근데 거의 마네킹처럼 하�R어요. 핏기가 거의 없었으니까. -유태권,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제일 충격적인 게, 시체 훼손된 걸 보고 나서는 너무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너무 심하게 훼손이 됐기 때문에. '와 이건 진짜 큰일이다' 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어요. -김권익,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여러 강력 사건을 맡았던 형사들도, 이런 시신은 처음 봤어. 그만큼 잔인하게 훼손됐던 거야. 이 잔인하고 엽기적인 '트렁크 살인사건'은 그해 9월, 전국을 충격에 몰아 넣었어. ▲ 범인의 정체 형사들은 먼저 차 주인부터 확인해봤어. 불 탄 SUV는 죽은 여성의 차량이었어. 피해자는 30대 중반의 여성. 사인은 경부 압박 질식사. 목이 졸려서 살해당했다는 거야. 이후 범인은 시신을 잔인하게 훼손한 거지. 형사들은 피해자의 주소를 확인했는데, 피해자의 집이 천안이었어. 그러니까 천안에 사는 사람이 서울 한복판에서, 그것도 본인의 차에서 사망한 채 발견된 거야. 형사들은 피해 차량의 행적을 조사했는데, 좀 이상해. 천안에서 서울까지 오는데 이틀이 걸렸고, 그 사이에 경주, 울진, 포항, 강원도까지 전국을 돌아 다녔어. 차가 전국을 돌기 전에, 마지막으로 있던 곳은 충남 아산의 한 대형마트였어. 형사들은 해당 마트의 CCTV를 확인했어. 그런데 마트 주차장에 있는 CCTV에 이런 장면이 찍혀 있었어. 피해자가 차로 걸어가고, 운전석 문을 열어 차에 탔어. 10초 후, 다시 운전석 문이 열리고, 약 30초가 더 지난 뒤, 문이 닫혀. 그리고 와이퍼가 왔다갔다 움직이더니, 다시 3분이 지나. 그후 차는 출발하고, 그렇게 피해자의 SUV는 범인과 함께 사라졌어. 그리고 이틀 뒤, 서울 한복판에서 차량 주인이 살해된 채 발견됐어. 심지어 사체 훼손 정도도 매우 잔인해. 그리고 기름, 부탄가스를 이용해 모든 걸 다 불태우려 했어. 이 범인은, 어떤 사람일까? 시신의 상태나 뭐 이런 걸 볼 때는, 원한 아니면 사이코패스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이제 관련자들을 수사했는데 혐의점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유태권,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빌라 CCTV를 확인했는데, 그 중에서 특이하게 빌라를 바라보면서 살피는 남자가 있다… -김권익,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차량 화재 사건이 발생한 빌라 주변의 CCTV도 확인했어. 화재사건 당일, 흰색 SUV 차량이 빌라로 향해. 그리고 빌라 CCTV에 포착된 한 남성. 빌라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빌라 현관을 맴돌아. 잠시 후 SUV 차량 내부에 불이 붙고, 남자는 이를 멀리서 지켜봐. 불타는 SUV를 재차 확인하더니, 심지어 미소까지 지어. 범죄 개연성이 엄청 많았죠. 범죄 용의자로서 특정했죠 바로. -유태권,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CCTV에 용의자의 모습이 찍혔으니, 이제 잡는 건 시간 문제일까? 그런데, 그렇지 않아. CCTV 얼굴만 보곤, 이름도 나이도 알 수 없잖아. 이 남자가 누군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그런데 CCTV에서 아주 결정적인 장면이 포착됐어. 이 남자, 아주 큰 실수를 저질렀거든. 바로 이 장면이야. 남자가 빌라 문에 손을 댔을 때, 지문이 남았던 거야. 이 지문을 통해, 곧 이 남자의 정체가 밝혀졌어. 48세, 김 씨였어. 그는 과연 피해 여성과 무슨 사이였을까? 이 사람하고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 그 부분을 찾기 위해서 저희들이 계속 수사를 했었는데 그 부분을 찾지를 못했었고.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을 왜 그랬을까, 저희도 굉장히 의문이 많았습니다 그 당시에. -김권익,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전혀 일면식이 없는 사이입니다. 처음 보는 사이입니다. -유태권,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일면식도 없는, 생판 모르는 사람이었던 거야.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어. 김 씨가, 다른 사건으로 이미 수배 중인 거야. 2주 전에, 경기도 일산에서 똑같은 범행을 했던 거야. 마트에서 장을 보고 차에 타는 여성을 쫓아가서, 칼을 들고 위협하면서 납치하려 했대. 다행히 그때 피해 여성이 도망쳐서, 납치 미수 사건이 된 거야. 그걸 파악을 했을 때, 같이 했던 형사들은 다 멘붕이 된 거죠. 김 씨가 실패했기 때문에 또 다른 또 피해자를 노릴 수 있다, 그 전에 잡아야 된다, 이런 강박 관념이 많이 생겼죠. -유태권,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이 위험한 인물, 한시라도 빨리 잡아야 해. ▲ 김 씨의 흔적을 찾아라 형사들은 사건 현장인 빌라 근처 CCTV로 김 씨의 행적을 쫓았어. 보니까 사건 직후, 택시를 타고 빌라 근처에 있는 한 대형마트에 갔어. 마트에서 옷을 사서, 갈아입고 도주한 거야. 문제는, 이 뒤부터 행적을 쫓는 게 쉽지 않아. 10년 전이라, 지금처럼 CCTV가 많이 없었던 거야. 군자동 쪽에서 짜장면 먹은 것까지도 저희가 다 확인했었는데. 거기에서 행적이 안 잡혀 가지고 좀 어려움이 많이 있었습니다. -김권익,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형사들은 김 씨의 거주지로 갔어. 근데, 짐까지 싹 다 없어. 김 씨가 자신을 추적할 증거를 없애고 있는 거야. 형사들은 휴대전화 위치를 추적했어. 근데 위치가 안 나와. 진작에 전원을 꺼놓은 거야. 형사들이 이번엔 신용카드를 확인했어. 아까 마트에서 옷도 샀잖아. 근데, 범행 후 사용 내역이 전혀 없어. 현금만 쓰고 있는 거야. CCTV, 휴대전화, 신용카드… 그 어떤 방법으로도 추적 불가야. 김 씨 명의로 된 차량을 한 대 확인했어. 마침 그 차는 서울에 있는 한 자동차 정비소에 있었어. 근데 가서 보니까 정비소 직원이 차를 맡긴 지 한 달이 다 돼 가는데, 찾아 가지도 않고 연락도 안 된다 라고 하소연해. 김 씨가 차까지 버리고 도망간 거야. 김 씨, 마치 수사 진행상황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아주 교묘하고 철두철미하게 형사들의 추적을 따돌리고 있어. 제가 볼 때 평범한 사람의 패턴이 아니었어요. 쓰던 휴대폰 버리고 현금만 사용하고 걸어서 범행을 하고. 일반 통신 수사라든가 이런 게 전혀 그 작용을 할 수가 없었죠. -유태권,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이건, 김 씨가 저지른 전과들이야. 무려 전과 22범이었어. 교통법규 위반부터 강도, 상해까지. 범죄 종류가 다양해. 게다가 재판을 받은 법원이 전국 곳곳이야. 최초 범죄는 1984년도. 감방 생활만 20년 가까이 했어. 그가 형사들의 추적을 잘 피하는 이유, 이제 알겠지? 범죄 베테랑인 거야. 형사들은 김 씨의 가족들도 찾아봤어. 근데 가족들과도 연을 끊은 지 오래야. 최근엔 한 유통회사에서 식자재 배달일을 했는데, 동료들 말로는 평소에 남들과 교류도 거의 없었대. 그럼 이제 김 씨를 찾을 방법, 뭐가 있을까?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는데, 작은 단서조차 나오지 않아. 분명 어딘가에서 또 다른 범죄를 노리고 있을 거란 말이야. 그래서 형사들은 이 방법을 쓰기로 했어. 공개 수배를 한 거야. 이름, 김일곤. 나이 48세. 이렇게 트렁크 살인사건의 범인, 김일곤의 이름과 얼굴이 전국에 공개됐어. ▲ 김일곤 공개수배 그런데 그 시각, 누군가의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어. 이 전화를 받은 사람은, 성준 씨였어. 이성준 씨, 저 그때 폭행 사건 담당했던 경찰입니다. 당분간 외출 삼가시고요,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신고하셔야 합니다. 처음에 성준 씨에게 시비를 걸었던 그 오토바이 남자, 칼을 들고 죽이겠다고 한 그 남자. 그가 바로 김일곤이었던 거야. '그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도망간 상태고 뭐 공개 수배를 한다'고 그러더라고요. 그 때 알게 된 거예요. TV를 봤는데 그 사람이 나오니까, 이제 현실 직시가 되는 거죠. 그래서 제가 아마 그 사람 잡힐 때까지, 지인 집인가 호텔인가에서 아마 잤을 거예요. -이성준(가명), 당사자 사실, 김일곤이 칼을 들고 성준 씨를 찾아가기 전부터, 계속 이상한 일이 일어났었대. 하루는 옆 가게 사장이 성준 씨에게 이런 말을 하더라는 거야. 지난주부터 차 한 대가 성준 씨를 계속 쫓아다니는 것 같더라고. 내 착각일 수도 있는데, 혹시나 하고. 어느 날은, 성준 씨에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어. 받으니까, 이러더라는 거야. 야! 너 나 기억나지? 내가 너 찾아가서 죽여버릴 거야! 김일곤이었어. 근데 그는 어떻게 성준 씨 전화번호를 알아냈을까? 서로 연락처를 모르잖아요. 제가 '전화번호 어떻게 알아냈냐' 물어봤더니 주소랑 다 알아냈대요. 집을 알고 있어요. 주소를 물어보니까, 알아요. '네가 날 어떻게 죽일 건데?' 그때 했던 얘기가, 휘발유를 뿌린대요. 염산을 갖다 뿌린다 그래서, 인터넷에 검색을 해 보니까, 닿자마자 녹는대요 얼굴이. 그게 엄청 불안했죠 진짜. -이성준(가명), 당사자 성동경찰서에는 긴급하게 수사본부가 차려졌어. 형사들은 몇 날 며칠 집에 가지도 못하고 김일곤 검거 작전에만 매달렸어. 그러다 납치사건 발생 9일째인 2015년 9월 17일. 수사본부에 갑자기 무전이 울렸어. 성수동의 한 동물병원에서 강도 사건이 발생했다는 신고야. 한 남자가 병원에 와서 안락사 약을 달라고 하더래. 개를 안락사시키고 싶다고 얘기했는데, 개가 크다는 거예요. 아니 개도 안 데리고 오고 무슨 일인지 알겠어요? 우리는 '안 된다 약도 없고 줄 수도 없다. 가봐라'고 했어요. -동물병원 관계자 그리고 잠시 후, 이 남자가 칼을 들고 나타나 난동을 부렸다는 거야. 이 신고 내용을 들은 형사들은 촉이 딱 왔어. 직감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다 튀어 나갔어요. 진짜 제일 빨리 어떻게 그렇게 다 튀어 나갔는지. 굉장히 빨리 갔었어요 -김권익,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그 시각, 마침 인근 지구대 경찰 두 명이 그 동물병원 근처를 순찰하고 있었어. 그런 그들의 눈에 한 수상한 남자가 포착됐어. 순찰차를 보더니, 막 머뭇거리면서 피하는 거야. 근데 자세히 보니까 저 얼굴, 낯이 익어. 공개 수배된 그 얼굴이야. 지구대원이 차에서 내려서, 남자에게 다가갔어. 야 너, 김일곤이지? 김일곤은 칼을 꺼냈고, 경찰들과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어. 지나가던 시민들도 합세했고, 결국 남자의 손에 수갑을 채웠어. 드디어 김일곤이 잡힌 거야. ▲ 난 더 살아야 해 김일곤은 수사본부로 압송됐어. 봉고차에 내려서 취재진 앞에 선 김일곤은 이렇게 말했어. 난 잘못한 게 없습니다, 잘못한 게 없어요 난! 난 더 살아야 해... 난 잘못한 게 없고, 나는 더 앞으로 살아야 된다고. -김일곤 김일곤이 반복한 나는 더 살아야 한다 는 말. 이 말을 잘 기억해 봐. 누구도 상상치 못한, 아주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질 거야. 곧바로 김일곤 조사가 시작됐어. 김일곤은 경찰서 안에서 어찌나 난리를 치는지, 조사 자체를 못 할 정도야. 맨 처음에는 일체 진술을 거부했죠. 막 통제가 안 될 정도로 자기 행동을 하려고 했었고. -유태권,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내가 뭘 잘못했냐 고 소리치며 정상적인 대화조차 불가능한 상황이야. 어찌나 난리를 치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어. 형사들은 일단 김일곤을 차분히 달래기로 해. 알았으니까, 우리 밥부터 먹고 하자. 너 그동안 밥도 제대로 못 먹었을 거 아냐, 먹고 싶은 거 다 말해봐 라고 하자 김일곤은 그럼 나는 짜장면으로 시켜주쇼. 이왕이면 두 그릇으로 라고 말했어. 형사들은 짜장면 두 그릇을 시켜줬어. 쉽게 말하면 좀 비위 맞춰주는, 밉지만 정말 안 해주고 싶지만. 뭐 이런 역할도 어쩔 수 없이 할 수 있는. 왜냐하면 저희는 얘 진술을 끌어내야 하기 때문에. -김권익,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천천히 라포를 형성하며, 하나씩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어. 너 먹고 사느라 많이 힘들었지? 너 고생 엄청 하는 거, 내가 다 안다. 아니 그래서, 이번엔 뭐가 널 그렇게 힘들 게 한 거야? 라며 살살 달래자, 김일곤은 이렇게 말했어. 하아… 형사님, 저 담배 하나만 주십쇼. 보통 범인들이 자백을 하기 전에 공통적으로 하는 행동이 있대. 첫 번째, 한숨을 쉬어. 그리고 두 번째, 담배를 달라고 해. 이 자백의 시그널만 나오면 끝나는 거야. 김일곤이, 형사에게 자백을 하기 시작해. ▲ 사건의 전말 김일곤의 자백을 따라, 처음 사건이 발생했던 그때로 돌아가 볼게. 9월 9일, 처음 사건이 발생했던 아산의 한 대형 마트야. 피해 여성이 납치되기 전, 김일곤은 마트 주차장을 돌아다니면서 범행 상대를 물색했어. 그러던 그의 눈에, 피해 여성이 들어왔어. 장을 본 피해자가 차로 이동해. 그때 김일곤은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여성을 뒤따라 가. 여성이 차에 짐을 싣고, 마트의 카트를 원위치하러 가는 모습을, 김일곤은 멀리서 숨어 지켜봐. 피해자가 돌아오자, 김일곤도 움직이기 시작했어. 피해자가 차에 타서 시동을 걸자 마자, 김일곤은 운전석 문을 벌컥 열었어. 소리 지르면 죽는다. 지금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흉기로 위협하며, 김일곤은 피해자를 조수석에 앉혔어. 그리고 자신은 운전석에 앉았어. 마트 주차장에서 벌어진 일인데, 이를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그렇게 운전대를 잡은 김일곤은 마트를 유유히 빠져나갔어. 얼마쯤 달렸을까. 흉기 앞에서 꼼짝 못 하고 끌려가던 피해 여성이,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했어. 김일곤은 근처 공터에 차를 세웠고, 피해 여성은 밖으로 나와 볼일을 보는 척 했어. 그리고 그 때, 살려주세요! 사람 살려! 외치며 온 힘을 다해 달아나기 시작했어. 하지만 뒤따라온 김일곤에게 다시 잡히고 말았어. 그리고 다시 차에 갇혔어. 이때 김일곤이 화가 나서, 피해 여성을 살해했어. 그런데도 분이 풀리지 않아서, 김일곤은 시신을 차 트렁크에 옮겨 잔인하게 훼손했어. 그리고 시신이 있는 차를 몰고, 이틀 동안 전국을 돌아다녔어. 시신을 유기할 곳을 찾아다닌 거지. 그러다 서울로 왔어. 그런데 여기서, 뜻밖의 사고를 쳐. 처음 형사들이 무전으로 들었던 그 뺑소니 사고야. 트렁크에 시신이 있잖아. 사고 처리고 뭐고, 그냥 도망갈 수밖에 없었던 거지. 멀리 도망갈 수는 없다는 걸 직감한 김일곤은 증거 인멸을 위해 근처 빌라에서 차에 불을 지른 거야. 그럼 대체 김일곤은 왜 일면식도 없던 여성을 납치한 걸까. 그가 말하는 범행동기가, 기가 막혀. 영등포에서 시비가 돼서 폭행 사건이 있었는데, 상대방은 무죄가 나왔고 자기는 벌금 50만 원이 나온 거죠. 이 부분이 자기는 억울했던 겁니다. -김권익,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내가 저놈을 한번 손을 봐야 하는데 방법이 없을까 생각한 게, (노래주점에서 일할) 접대부를 소개시킨다는 명목으로 나오게 해서 아마 범행을 하려고 했던 부분 같아요. 그래서 필요한 도구가 여자였고. -유태권,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성준 씨 폭행 사건을 얘기하는 거야. 아까 김일곤이 벌금 50만 원을 내야 했잖아? 그게 너무 억울해서, 성준 씨를 죽이려고 했다는 거야. 성준 씨가 노래주점을 운영했잖아. 여자를 납치해서, 노래방 도우미로 위장시킨 뒤, 성준 씨를 유인하려고 한 거야. 여자한테 성준 씨네 가게에서 일하겠다고 약속을 잡게 한 뒤, 성준 씨가 약속 장소에 나왔을 때 죽이겠다는 시나리오를 짠 거지. 이 허무맹랑한 복수극을, 김일곤은 진짜로 실행하려 했어. 일산에서 있었던 납치 미수 사건, 기억나지? 그게 바로 첫 번째 시도였던 거야. 그때 실패하고, 아산까지 가서 다시 납치사건을 벌였던 거지. 서울에서 전철 타고 천안까지 가서. (아산에서) 먼저 범행 대상이라든가 범행 장소를 물색을 했었죠. 그리고 4일 후에 가서 범행을 한 거고. -유태권,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김일곤 말로는, 처음엔 피해 여성을 죽일 생각은 없었대. 성준 씨를 죽이고 나면, 풀어주려 했다는 거야. 그럼, 왜 피해 여성을 잔혹하게 살인한 걸까. 피해 여성이 달아났다가 다시 잡혔잖아? 차에 다시 강제로 타게 된 피해 여성이, 계속 창문을 두드리면서 살려달라고 소리쳤대. 만약 누군가 이걸 보고 신고라도 할 까봐, 그럼 성준 씨한테 복수도 못 하고 잡힐 수 있으니까. 복수 계획이 틀어질까 미친듯이 화가 나서 살해했다는 거야. 그리고 시신을 잔인하게 훼손했어. ▲ 김일곤의 살생부 그런데, 여기서 더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났어. 처음 김일곤이 검거됐을 때 몸을 수색했거든? 그때 칼 두 자루와 함께, 주머니에서 이런 게 발견됐어. 28명의 사람들 이름이 쭉 적혀 있는 종이야. 성준 씨 이름도 있어. 바로, 살생부였어. 김일곤이 죽이려던 사람, 성준 씨 뿐만이 아니었던 거야. 그래서 그걸 한번 물어봤어요. '이게 다 과연 뭐냐' 그랬더니, 자기를 재판한 판사, 자기를 입건한 형사, 그리고 자기하고 시비 붙었던 업주. 그 다음에 나를 무시했던 간호사, 나한테 혜택을 안 준 동사무소 직원. 다 자기가 손을 봐야 될 죽여야 될 사람이라고 그러더라고요. 경찰에 와서 자백한 거죠. 그게 살생부라고. 섬�하죠. 자기가 죽일 사람의 명단을 갖고 다닌다는 것은. -유태권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김일곤은 이 살생부를 보면서 이것들을 다 죽여야 하는데 라고 중얼거렸대. 아까 김일곤이 잡혔을 때 했던 나는 더 살아야 한다 고 했던 그 말. 이제 무슨 뜻인지 알겠어? 더 살아서, 이 사람들을 다 죽여야 한다는 거야. 근데 좀 이상한 거 없어? 이 살생부, 이름만 있는 게 아냐. 어떤 사람들은 전화번호와 주소, 직장, 심지어 주민등록번호까지 적혀있어. 김일곤은 대체 이런 정보를 어떻게 알았을까? 피고인이 체포 당시 소지하고 있던 메모지에는 A 및 폭행 사건의 목격자 등의 인적사항이 기재되어 있음. 피고인은 위 폭행 사건 기록을 법원에서 열람, 등사하여 A 및 사건 목격자들 인적사항을 확보함. 소송 당사자의 경우, 법원에 요청을 하면 사건 기록을 열람할 수 있어. 재판이 끝난 사건은, 개인정보 보호 규정에 의해 인적사항이 비공개처리 돼. 그런데 재판 중인 사건은, 그 규정이 적용되지 않아. 전과 22범인 김일곤은 이 점을 알고 있었어. 그래서 폭행 사건 재판 때 성준 씨의 전화번호와 주소도 알아낸 거지. 심지어 당시 사건 목격자, 참고인의 인적 사항까지 알고 있었어. 연쇄살인마를 꿈꾸던 김일곤. 그는 납치, 살인, 사체 훼손 등 그 어떤 범죄도 주저하지 않았어. 게다가 피해 여성과 전혀 일면식도 없고, 살해 동기 역시 납득이 안돼. 사체 훼손 정도도 매우 잔인해. 그런데 면담하는 내내, 김일곤은 이렇게 말했대. 저는 그동안 너무 억울하게 살았어요. 항상 무시당하고, 불이익만 받았다니까요. 베테랑 형사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뻔뻔한 태도였어. 이걸 정말, 답이 안 나왔죠. 진짜 답이 없는 얘기를 하는데, 인간으로서 저렇게까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과연 또 있을까… -김권익,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결국 형사들은 프로파일러를 투입 시켰어. 당시 김일곤을 면담한 프로파일러의 이야기를 들어볼게. 김일곤은 체계적이지도 않고, 패턴도 없이 짐작할 수 없는 아주 위험한 사이코패스 성향을 가진 살인범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사이코패스다'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살생부를 확보를 해서 검토를 했을 때도 구체적으로 '이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의 직업' 또 '거주지'. '어떤 방식으로 나한테 해를 끼쳤는지'를 꼼꼼하게 메모를 해놨었기 때문에. 그렇다면 이 사람이 갖고 있는 이 대상자에 대한 분노는 갑작스럽게 생겨난 것이 아니고, 오랫동안 형성되어 온 것이고, 이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지 못한 것이 결국은 쌓이고 쌓여서 이 임계점에 도달하지 않았을까. -권일용, 당시 담당 프로파일러 경찰 조사를 받고 나온 김일곤은 취재진한테 이렇게 말했어. 제가 영등포 폭행 사건 때 피해자였는데, 가해자로 돼서 벌금 50 만 원을 받았어요. OOO이 그놈으로 인해서 내가, OOO이를 죽이기 위해서 내가 이렇게 된 겁니다! ▲ 끝까지 반성은 없었다 얼마 뒤, 김일곤 재판이 시작됐어. 어떤 혐의들이 적용됐을까? 강도 살인, 특수강도미수, 일반자동차방화, 살인 예비, 자동차관리법위반, 사체손괴, 절도, 공기호부정사용, 부정사용공기호행사, 도로교통법위반, 특수공무집행방해, 특수강도,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 혐의만 13개야. 재판장에서 그는, 고개를 꼿꼿이 들고 있었어. 그러면서 이런 말들을 했어. 저는 정말 억울합니다. 제 억울함을 밝히는 게 고인을 위하는 길 같습니다. 어떻게 감히, 고인을 언급할 수 있는지. 하도 이러니까 한 번은, 판사가 이렇게 말했어. 피고, 그냥 시간을 드릴 테니까, 하고 싶은 말 다 하세요 라고. 그러자 김일곤은 이렇게 말했어. 제가 비록 전과는 많지만, 그 사건에선 제가 피해자였습니다. 그러나 법은 제 편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은 항상 저에게만 불리한 거 같아요. 이런 얘기를 무려 1시간 반이 넘도록 했대. 2016년 6월 3일, 김일곤의 선고 날이야. 선고가 나기 직전, 김일곤이 갑자기 소리쳤어. 잠시만요 재판장님! 꼭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저에게 5분만 시간을 주십시오. 판사가 허락하자, 김일곤이 말을 시작했어. 말할 수 있는 시간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형 선고가 내려질 거라고 짐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를 음해하고 모함한 놈들이 계속 잘 먹고 잘 산다면, 이건 죽은 분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겁니다. 끝까지, 반성은 없었어. 그리고 곧, 선고가 내려졌어. 주문, 피고인을 무기징역에 처한다. 그러자 김일곤이 다시 소리치기 시작했어. 잠깐만요! 그렇게 다들 저를 모함하고 음해했으면 사형 주려고 했던 거 아닙니까? 그냥 사형 주세요! 검찰의 항소로 이어진 2심 재판에서 김일곤은 결국 무기징역이 확정됐어. 사건이 있고 10년이 지났어. 살생부에 적힌 사람 중, 실제 살해를 당한 사람은 없어. 하지만 성준 씨는 아직도 그때의 트라우마를 지우지 못하고 있어. 이따금씩 생각이 나요. 뭐 한 달에 그냥 이렇게 멍하니 TV 보다가 살인사건이 나오면 불안한 거예요. 그 생각이 나요. 어쩔 수가 없어요 트라우마 때문에. 꿈도 엄청 꿨어요. 김일곤 나오는 꿈 꾸고. 꿈에서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는데 받으니까, 어떻게 해서 법이 바뀌어서 김일곤이 특사로 막 풀려났대요. 미쳐요 미쳐. -이성준(가명), 당사자 이제는 전과 23범이 된 무기수 김일곤. 무기징역은 말 그대로, 정해진 수감 기간이 없다는 뜻이야. 일정 기간이 지나면 법적 절차에 따라 가석방 대상이 될 수도 있어. 하지만 김일곤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어. 그가 우리 사회로 다시 돌아올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고. 아마 지금도 좁디좁은 감옥에서, 왜곡된 억울함에 사로잡혀서 괴롭게 지내고 있을 거라고. 그 뒤에도 개인정보 유출로 인한 크고 작은 사건들은 계속 발생했어. 2018년엔 성폭행 가해자에게 피해자의 인적사항이 적힌 판결문이 송달된 사건이 발생했고, 작년엔 가해자가 피해자의 주소를 알아내 구치소에서 편지를 보내 2차 가해를 벌인 일도 있었어. 피해자의 권리만큼, 피의자의 방어권도 중요하기 때문에 이를 제지할 제도를 만드는 게 쉽지 않대. 아직 이걸 해결할 답은 명확하게 나오진 않았어. 그리고 우린 이거 때문에 언제 어디서든 위험에 노출될 수 있어. 안전하고 평온한 세상에서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다는 것. 이건 꼭 지켜야 할 중요한 가치가 아닐까.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
[스브스夜] '꼬꼬무' 럭비공 같은 사이코패스 김일곤···연쇄 살인 계획하며 '살생부' 작성한 이유는? [스브스夜] '꼬꼬</font>무</font>' 럭비공 같은 사이코패스 김일곤···연쇄 살인 계획하며 '살생부' 작성한 이유는? 등록일2025.04.11 연쇄 살인을 꿈꾼 김일곤, 그의 범행 이유는? 10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럭비공 같은 사이코패스의 그날을 추적했다. 2015년 7월 저녁, 20대 중반의 이성준 씨 앞에 흉기를 손에 든 40대 남성이 등장했다. 그는 내가 너 죽여버릴 거야 라며 성준 씨를 협박했다. 사실 이 남성은 두 달 전 성준 씨에게 시비를 걸어왔던 남성.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지자 주민들이 신고했고 이에 성준 씨는 무혐의, 남성은 폭행죄가 되었다. 그랬던 그가 두 달 뒤 다시 찾아와 성준 씨를 협박한 것. 이에 성준 씨는 해볼 테면 해봐라 라고 했고, 남성은 지금은 타이밍이 아니다 라며 발길을 돌렸다. 성준 씨는 이 남성을 다시 신고했고 신변 보호 요청까지 했고 다행히도 성준 씨에게는 이후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성준 씨와 이 남성의 만남은 끔찍한 일들의 서막이었다. 성동구의 한 빌라에서 발생한 화재 사고. 흰색 SUV 차량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그런데 이 차량은 앞서 쫓고 있던 뺑소니 차량과 동일한 차량이었다. 현장에서 차량 화재 사고가 방화 사건임이 드러났고, 그리고 이때 차량 내부에서 사람 형체의 무언가가 포착됐다. 마네킹인가 했던 이것은 한 여성의 시신이었다. 시신의 훼손된 상태가 충격적이었던 현장을 확인한 형사들은 이 사건이 단순한 사건이 아님을 짐작했다. 단순한 화재 사고에서 순간 뺑소니, 방화, 살인 사건까지 복잡한 사건이 된 것이다. 30대 중반의 피해 여성의 사인은 경부압박질식사. 범인이 피해자의 목을 졸라 살해한 후 시신을 훼손한 것이었다. 피해자의 행적을 추적한 끝에 그가 한 대형 마트에서 납치된 후 살해된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형사들은 이 사건의 형태로 보아 원한 아니면 사이코패스의 범행일 것이라 판단했다. 그러나 주변인들에게서는 어떠한 혐의점도 찾지 못했고 조사 과정에서 수상한 행동을 하는 한 남성이 포착됐다. 빌라 주변을 맴돌던 남성은 불타는 SUV를 확인하고 웃으면 떠났던 것. 용의자를 특정했지만 CCTV에 포착된 인상착의만으로 신원을 확인하는 것은 어려웠다. 그러던 중 그가 빌라의 문을 직접 닫았던 것이 포착되었고 지문 감식을 통해 용의자가 48세 김 씨라는 것이 드러났다. 피해 여성과 일면식도 없는 김 씨는 2주 전 일산에서 똑같은 범죄를 시도하며 수배 중인 인물이었다. 형사들은 그를 빨리 잡지 않으면 또 다른 피해자가 나올 수 있다고 판단 수사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휴대전화도 꺼두고 현금을 사용하며 걸어서 범행을 저지른 그의 행적을 쫓는 것은 쉽지 않았다. 전과 22범으로 1984년부터 30년 동안 감방 생활만 20년 해온 김 씨는 베테랑 범죄자였다. 결국 형사는 그에 대해 공개 수배를 했다. 그리고 48세 김일곤의 또 다른 범죄가 또 드러났다. 그는 바로 앞서 성준 씨에게 시비를 일으킨 후 그를 죽이겠다고 협박했던 인물이었다. 납치 사건 9일 만에 발생한 한 강도 사건. 현장 주변을 순찰 중이던 지구대 대원들이 그를 알아보고 격렬한 몸싸움 끝에 검거에 성공했다. 수사본부로 압송된 김일곤은 난 잘못한 게 없다. 난 더 살아야 된다 라며 당당한 얼굴로 도리어 화를 냈다. 그리고 취조가 시작되자 그는 통제 불능으로 정상적인 대화도 불가능했다. 형사들은 그를 달래어 자백을 유도했고 곧 김일곤은 자신의 범행을 자백했다. 마트 주차장에서 범행 대상을 물색하다가 피해자를 납치한 김 씨. 그는 화장실에 가고 싶다며 탈출하려는 피해자에 격분하여 살해했다. 살해 후에도 분이 풀리지 않은 김 씨는 시신을 훼손했고 트렁크에 시신을 싣고 이틀 만에 서울로 복귀했다. 그리고 증거 인멸을 위해 뺑소니를 하고 방화까지 벌인 것. 김 씨는 피해자를 살해한 이유에 대해 성준 씨에게 보복을 하려고 여성을 납치한 것 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성준 씨를 살해한 후 풀어주려고 했지만 피해자를 놓치고 자신이 잡히면 성준 씨를 살해할 수 없고 복수를 못할 수 있다는 생각에 분노하여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했다는 이해할 수 없는 주장을 했다. 검거 당시 김 씨는 칼 두 자루와 총 28명의 이름이 적힌 살생부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조사 과정에서 내가 이것들 다 죽여야 하는데 라며 끝내 자신이 계획한 범죄를 해내지 못한 것에 분노했다. 그런데 김 씨의 살생부에는 자신이 복수할 대상의 이름뿐만 아니라 주소, 연락처 등의 인적 사항까지 적혀있어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이는 그가 법원에 사건 기록 열람을 요청하여 얻어낸 정보임을 밝혔다. 재판 중인 사건은 개인정보보호규정 미적용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김 씨가 재판 당시 사건을 열람하여 성준 씨와 목격자 등의 인적 사항을 파악했던 것. 어떤 범죄도 주저하지 않고 살해 동기도 납득이 안 가는 김일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너무 억울하고 불이익만 받고 살았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수사관들은 프로파일러를 투입하여 김일곤을 분석했다. 당시 사건에 투입되었던 권일용 프로파일러는 김일곤에 대해 체계적이지도 않고 패턴도 없이 짐작할 수 없는 아주 위험한 사이코패스 성향을 가진 살인범이다. 이 사람이 갖고 있는 대상자에 분노는 오랫동안 쌓여온 것,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지 못한 것이 쌓이고 쌓여서 임계점에 도달하지 않았을까 싶다 라고 분석했다. 끝까지 남 탓을 하던 김일곤은 총 13개의 혐의로 기소되었고 재판 중에도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내 억울함을 밝히는 게 고인을 위하는 것 같다. 세상은 항상 나에게 불리했다 라는 이해할 수 없는 주장을 펼쳤다. 특히 그는 최종 판결 전 발언할 시간 달라며 나를 음해하고 모함한 놈들이 계속 잘 먹고 잘 산다면 이건 죽은 분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겁니다 라고 망언을 했다. 그리고 무기징역이 선언되자 다들 나한테 사형 주려고 여태껏 나를 모함한 거 아니냐. 차라리 사형 달라 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2심에서도 원심 유지되며 김일곤은 최종 무기징역이 확정되었다. 결국 김일곤의 살생부에 적힌 이들 중 실제로 살해된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의 타깃이 된 성준 씨는 여전한 트라우마로 힘들어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마지막으로 전문가들은 김일곤이 오랜 수감생활을 했다고 해도 여전히 왜곡된 억울함에 사로잡혀서 괴로워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가석방을 받고 사회로 돌아올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입을 모아 눈길을 끌었다. (SBS연예뉴스 김효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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