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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임세미 父, '꼬꼬무' 출연했던 형사였다…최초 부녀 출연자 탄생 배우 임세미 父, '꼬꼬무' 출연했던 형사였다…최초 부녀 출연자 탄생 등록일2025.05.01 배우 임세미가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서커스 소녀 편'에 출연했던 임만규 형사가 아버지라 밝혔다. 1일 방송될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는 '꿈의 직장 속 수상한 비밀' 편으로, 방직 회사 여공들의 충격적인 인권 유린 사건과 이후 여공들의 명예 회복을 위해 47년 동안 이어지고 있는 치열한 투쟁의 역사를 다룬다. 리스너로는 배우 임세미, 온주완, 정영주가 나서 여공들의 투쟁에 깊이 공감한다. 앞서 진행된 녹화에서 임세미는 '꼬꼬무' 첫 출연 소회를 밝히며 처음 이야기하는 건데 저희 아버지도 여기 출연하셨다 라고 밝혀 장도연을 깜짝 놀라게 했다. 알고 보니 임세미의 아버지는 지난해 2월 방송됐던 '서커스 소녀 편'에서 학대받던 피해자를 친딸처럼 보살펴 화제를 모은 선행 형사 임만규 씨였던 것. 이에 임세미는 아버지 따라서 저도 출연하게 되었다. 영광이다 라며 특별한 출연 소감을 전했다. 이들은 '꼬꼬무' 방송 사상 처음으로 부녀가 함께 출연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한편 정영주는 장도연, 장현성, 장성규 '장트리오' 3MC를 모두 만난 리스너가 됐다. 그는 이번에 만난 MC 장성규에게 응. 말 놔도 괜찮아 라며 능수능란한 '리스너 전문가' 포스를 뽐내 웃음을 자아냈다. 이날 녹화에선 여공들을 향한 한 방직공장의 인권 유린 현장이 소개돼 충격을 안겼다. 1970년대 열악한 환경의 공장과 여공들이 스스로의 권리를 위해 싸워온 투쟁의 기록. 공장은 여공들의 노조 활동을 방해하기 위해 독성 가득한 인분을 투척했다.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외친 여공들의 인권이 철저히 유린된 사건이었다. 당시 방직공장 여공의 노조 활동을 방해하기 위해 사측은 여공들에게 독성 가득한 오래된 인분을 투척했다. 이런 이야기에 온주완은 트라우마로 남을 것 같다 며 여공들이 겪었을 모멸감에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고, 임세미는 영상 속 여공들과 함께 오열하고 말았다. 이후 인분 투척에 그치지 않고 여공 124명 전원에 대한 해고와 여공들이 회사를 나와서도 재취업이 불가능하도록 만든 의문의 블랙리스트 전달이 이어졌고, 충격적인 반전이 연이어 공개됐다. 이에 방직회사 여공 사건의 진실이 무엇일지 궁금증을 증폭시켰다. 일방적인 해고가 아닌 자발적 퇴사를 위해 47년이 지난 현재에도 진행 중에 있는 방직 회사 여공들의 인권 찾기는 '꼬꼬무' 본방송을 통해 공개된다. '꼬꼬무'의 '꿈의 직장 속 수상한 비밀' 편은 1일 밤 10시 20분 방송된다.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
온주완, '투 하트'로 하노이국제영화제 참석 좋은 평 감격스러워 온주완</font>, '투 하트'로 하노이국제영화제 참석  좋은 평 감격스러워 등록일2024.11.12 [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배우 온주완이 영화 '투 하트'를 통해 하노이 국제영화제에 참석했다. '투 하트'는 시한부 판정을 받고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텨가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알콩달콩 우정을 쌓아가는 두 아이 예담과 윤서, 그리고 아이들을 살리기 위한 두 아빠의 처절한 사투를 그린 작품. 지난해 크랭크업해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온주완은 '투 하트'에서 아빠 진수 역을 맡아, 가슴 아픈 부성애를 선보이며 섬세한 열연을 펼쳤다. '투 하트'는 하노이 국제영화제의 월드프리미어 부문에 초청받아 현지에서 공개됐다. 온주완은 지난 7일부터 11일까지 연출을 맡은 정유신 감독, 제작사 미로비전 채희승 대표,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초대 집행위원장과 함께 영화제의 일정을 소화했다. 하노이 국제영화제에서 처음으로 공개된 '투 하트'에 관객들의 호평이 쏟아지면서,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관심 속에 베트남 관객들과의 만남이 이뤄졌다는 후문이다. 생애 처음으로 참석하게 된 하노이 국제영화제의 일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온주완은 소아병동의 희망과 감동을 담은 '투 하트'가 하노이 국제영화제를 통해 첫선을 보이게 된 것은 물론, 작품에 대해 좋은 평을 듣게 돼 뜻깊고 감격스럽다 며, 한국에서도 '투 하트'로 관객분들에게 인사드릴 날이 찾아왔으면 좋겠다 는 소망을 전했다. 이와 함께 아빠 역할을 맡아, 두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하며 진한 여운을 남기게 해 준 작품 이라며, 앞으로도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 더욱 열심히 나아가겠다 는 소감 또한 덧붙였다.
정만식X온주완 주연 '투 하트' 크랭크인…제2의 '7번방의 선물' 될까 정만식X온주완</font> 주연 '투 하트' 크랭크인…제2의 '7번방의 선물' 될까 등록일2023.01.06 배우 정만식, 온주완 주연의 영화 '투 하트'가 크랭크인했다. '투 하트'는 소아병동을 배경으로 시한부판정을 받은 아이들과 그 아이들을 살리려는 두 아빠의 처절하면서도 애틋한 사투를 다룬 가족영화다. 일찌감치 영화계에서는 제2의 '7번방의 선물'이란 입소문이 돈 시나리오였지만 코로나19로 인해 기획 5년 만에 제작에 착수하게 되었다. 이 영화는 지난 2010년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던 영화 '하녀'의 제작사 미로비젼의 창립 25주년 작품이다. 여기에 지난해 영화 '강릉'과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마이 네임'의 투자 제작 및 공동배급까지 진행한 스튜디오 산타클로스가 미로비젼과 의기투합, 첫 메인 투자배급 작품으로 선택했다. '투 하트'는 지난 1월 2일 첫 크랭크인을 맞아 모든 배우들과 제작진들이 한자리에 모여 영화의 대박 흥행을 기리는 기념촬영과 의지를 확인했으며 현재 순조롭게 촬영을 진행하고 있다. 영화는 오는 2월 중순까지 촬영을 마무리한 후 올해 중 개봉할 예정이다. (SBS연예뉴스 김지혜 기자)
정만식X온주완 주연 '투 하트' 크랭크인…제2의 '7번방의 선물' 될까 정만식X온주완</font> 주연 '투 하트' 크랭크인…제2의 '7번방의 선물' 될까 등록일2023.01.06 [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배우 정만식, 온주완 주연의 영화 '투 하트'가 크랭크인했다. '투 하트'는 소아병동을 배경으로 시한부판정을 받은 아이들과 그 아이들을 살리려는 두 아빠의 처절하면서도 애틋한 사투를 다룬 가족영화다. 일찌감치 영화계에서는 제2의 '7번방의 선물'이란 입소문이 돈 시나리오였지만 코로나19로 인해 기획 5년 만에 제작에 착수하게 되었다. 이 영화는 지난 2010년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던 영화 '하녀'의 제작사 미로비젼의 창립 25주년 작품이다. 여기에 지난해 영화 '강릉'과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마이 네임'의 투자 제작 및 공동배급까지 진행한 스튜디오 산타클로스가 미로비젼과 의기투합, 첫 메인 투자배급 작품으로 선택했다. '투 하트'는 지난 1월 2일 첫 크랭크인을 맞아 모든 배우들과 제작진들이 한자리에 모여 영화의 대박 흥행을 기리는 기념촬영과 의지를 확인했으며 현재 순조롭게 촬영을 진행하고 있다. 영화는 오는 2월 중순까지 촬영을 마무리한 후 올해 중 개봉할 예정이다. ebada@sbs.co.kr
[꼬꼬무 찐리뷰] 43년 만에 찾은 아들, 71년 만에 벗은 누명…故김복연 할머니의 한 서린 인생 [꼬꼬무 찐리뷰] 43년 만에 찾은 아들, 71년 만에 벗은 누명…故김복연 할머니의 한 서린 인생 등록일2022.08.26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25일 방송된 '꼬꼬무- 두 번의 기적: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배우 오나라, 온주완, 볼빨간 사춘기의 안지영이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43년 만에 찾은 어머니 전 1946년생, 올해 나이 76살의 전철수입니다. 제가 이름이 3개였는데요. 전학철, 맹철수, 전철수. 3개입니다. 여기, 본명만 3개였던 분이 있어. 왜 이름이 3개나 될까. 이 이름엔 가슴 아픈 사연이 숨어있어. 때는 1993년 6월. 이 분이 '맹철수'란 이름으로 살던 시절이야. 당시 나이는 48살. 경남 거제도에 사는 평범한 가장이었어. 어느 날 회사에 출근 후 커피 한잔의 여유를 즐기며 신문을 펼쳤어. 그런데 철수 씨의 시선이 신문 한가운데에 꽂혔어. 그리고 눈을 뗄 수 없었어. 철수 씨가 본 건 이 기사야. '김복연 할머니 한맺힌 역정' 김복연 할머니는 서울에 사는 분인데, 한국전쟁 때 5살 난 아들을 잃어버리셨대. 철수 씨가 왜 놀랐냐면, 자신이 그 잃어버린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야. 철수 씨도 전쟁 당시 부모를 잃어버렸거든. 그때 나이가 바로 5살이었어. 워낙 어렸을 때라 부모님 얼굴이나 이름은 전혀 기억이 안 나. 근데 이 김복연 할머니의 사진을 보는 순간, 묘한 기분에 휩싸인 거야. 피가 당긴다고 하지? 철수 씨는 강렬한 직감을 가지고, 바로 할머니를 찾아갔어. 만약 43년 전에 헤어진 가족을 만난다면, 알아볼 수 있을까? 당시 두 분의 모습을 보여줄게. 너무 닮았지. 누가 봐도 어머니와 아들이야. 두 사람은 가족만이 알 수 있는 신체 특징도 맞췄어. 할머니의 잃어버린 아들은 오른쪽 허벅지에 용머리 모양의 반점이 있었대. 철수 씨는 천천히 바지를 걷어 올렸고, 희미하게 남아있는 용머리 반점을 확인했어. 두 사람은 모자 지간이 맞았어. 철수 씨가 5살 때 헤어진 어머니를 43년 만에 다시 만난 거야. 그런데 눈물도 안 나오고 덤덤했대. 너무 현실감이 없어서. 철수 씨는 오랫동안 마음속에 간직했던 질문을 어머니한테 던졌어. 왜 그동안 날 안 찾았어요? 혹시 날 버린 건가요? 그런데 어머니의 대답은,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거였어. 이걸 보면 깜짝 놀랄 거야. 어머니가 그동안 감옥에 있었던 거야. 그것도 무기수로. 수십 년 만에 찾은 어머니가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범죄자라는 거야. 그런데 어머니의 사연을 들어보니,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어머니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니야. 그래서 철수 씨는 거금을 들여 캠코더를 샀고, 어머니의 증언을 영상으로 기록하기로 했어. 100년이 가도 내가 당한 그 일만은 잊을 수가 없어. 난 죽여만 달라고 했어 -김복연 할머니의 증언 영상 中- 도대체 이 김복연 할머니에겐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지금부터 이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려줄게. ▲ 재앙을 불러온 양복, 억울한 누명 1950년 6월 서울 종로구. 당시 32살이었던 복연 씨는 판잣집 단칸방에서 아들 학철이와 둘이 살고 있었어. 맹철수 씨의 진짜 이름은 '전학철'이야. 학철이는 5살 때 한글을 쓸 정도로 똘똘한 아이였어. 학철이 아버지는 경찰이었는데, 학철이가 생긴 이후 자기는 본처가 있다고 고백하며 두 사람을 떠나 연락도 끊어 버렸대. 그때부터 복연 씨는 더 억척스럽게 살았어. 낮에는 가판에서 물건을 팔고, 저녁엔 남의 빨랫감을 받아 세탁했어. 이런 모자한테 불행이 시작된 건 양 씨라는 이웃 남자가 찾아온 이후였어. 양 씨는 복연 씨에게 양복을 건네며 빨아달라고 부탁했어. 그런데 사실 양 씨의 진짜 용건은 따로 있었어. 양 씨는 자신이 관리하는 유흥업소 여성들이 잠 잘 방을 내어주면 매달 쌀로 사례를 하겠다고 했어. 복연 씨의 집은 단칸방이었는데, 양 씨는 합판을 가져와 뚝딱뚝딱 벽을 만들더니 방을 둘로 나눴어. 그때 양 씨가 데려온 여성들은 김영애와 김정자. 그렇게 복연 씨 모자는 이들과 동거를 시작했어. 그런데 양 씨는 약속한 쌀을 주지도 않았고, 맡겼던 양복 빨래도 찾아가지 않았어. 그리고 며칠 후, 한국전쟁이 터졌어. 38선을 넘은 인민군들이 맹렬한 기세로 내려왔는데, 당시 서울 사람들은 피난을 떠날 생각을 안 했어.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라디오 방송에 나와 이런 연설을 했기 때문이야. 국민 여러분, 지금 유엔군이 오고 있습니다. 굳게 참고 기다리면 적을 물리칠 것입니다. 안심하십시오. 이런 연설을 하니 사람들은 안심하고 그냥 집에 있었지. 근데 이 연설을 했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을 떠나 대전에 있었어. 전쟁 이틀 만에 서울을 빠져나간 거야. 대통령은 인민군의 남하를 막는다며 한강 다리를 끊어버리도록 명령했어. 그렇게 한강 다리가 끊기고, 서울 사람들은 고립됐어. 그 시각, 복연 씨는 온 집안의 불을 끄고 숨을 죽이고 있었어. 밖에선 포성 소리가 들렸어. 그러다 새벽녘에 깜박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집에 누군가 침입한 소리가 들렸어. 처음에는 강도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까 우리 군복을 입은 국군이야. 인민군의 공격을 받고 도망치다가 아무 집이나 보이는 곳에 뛰어들어온 거야. 아주머니, 저 좀 살려주세요. 군복을 입고 있다가 들키면 바로 죽음이야. 복연 씨는 집에 있는 유일한 성인 남성 옷인 양 씨가 맡긴 양복을 군인에게 건넸어. 또 3일 동안 한 끼도 먹지 못한 군인에게 꽁보리밥 한 그릇을 내와 먹게 했어. 허겁지겁 밥을 먹은 군인은 옷을 갈아입고, 동이 트기 전에 복연 씨 집을 떠났어. 깜깜한 곳에서 봐서, 복연 씨는 군인의 얼굴도 제대로 못 봤고 이름도 몰랐어. 다음날 아침 복연 씨는 종로 대로변을 나갔다가 깜짝 놀랐어. 전쟁이 터진 지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돼, 서울 곳곳이 인공기와 김일성의 얼굴로 도배가 됐어. 복연 씨는 마음 한켠이 불안했어. 학철이 아버지의 직업이 경찰이었기 때문이야. 남편과 왕래를 안 한지 오래됐으니 별문제 없겠거니 생각했어. 그런데… 김복연 어디 있어! 반동분자 당장 나와! 집에 인민군이 들이닥치더니 복연 씨와 아들 학철이를 끌고 갔어. 알고 보니, 그 한집에 살던 여자들이 '학철이 아버지가 경찰관이고, 국군 옷을 입혀서 도망시켰다'며 복연 씨를 반동분자라고 밀고한 거야. 인민군은 남편의 행방을 물으며 복연 씨에게 주먹을 휘둘렀어. 심지어 다섯 살 학철이까지 때렸어. 고춧가루 물을 붓고 온갖 고문을 했어. 하지만 자신들이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자 일단 두 사람을 풀어줬어. 죽다 살아난 복연 씨는 학철이를 데리고 피난을 가기로 결심했어. 복연 씨 모자는 7월 10일경에 서울을 떠나 석 달간 경기도 양주에서 피난 생활을 했어. 그리고 10월 초에 다시 서울로 돌아왔어. 9월에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며 국군이 다시 서울에 입성했으니, 이제 집에 돌아가도 되겠구나 생각한 거지. 꼬박 이틀을 걸어 복연 씨 모자는 서울 집에 도착했어. 근데 집에는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었어. 양 씨와 여자들이었어. 복연 씨는 바로 이들을 집에서 쫓아냈어. 그런데 며칠 후, 이번엔 경찰들이 복연 씨의 집에 들이닥쳤어. 그리고 구속영장을 들이밀며, 복연 씨를 체포했어. 피의자 김복연은 북한 괴리군의 정보원으로 일하다 동거하고 있던 김영애, 김정자 등이 '이 대통령 만세, 영원히 돌아오시라' 삐라를 뿌리기로 하자 이를 밀고하여 애국여성인 김정자 등을 피살케 한 자임. 범정의 정도: 극악질 ?구속영장 내용 中 모두 거짓 내용이었어. 심지어 복연 씨가 이들을 밀고했다는 날짜는 7월 30일인데, 이 때는 복연 씨가 양주에 있을 때야. 이번에도 신고자는 양 씨와 여자들이었어. 증거는 이들의 주장뿐인데, 아무도 복연 씨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어. 석 달 전에는 인민군들이 반동분자로 몰더니, 이번엔 우리 경찰이 나라 팔아먹은 빨갱이라고 몰아갔어. 잡혀간 복연 씨는 모진 고문을 당했어. 날 갖다가, '거물'이라고. 빨간 글씨로 가마니에 써 가지고 내 위에다 뒤집어 씌워놓고. 맛을 봐야 알겠느냐고. 전깃줄인지 뭘 갖고 와서는 귀에다 대고, 젖꼭지에 대고 돌렸어. 미치도록. 그렇게 발가벗겨 놓고서는 뭔 방망이 같은 걸 가지고 와서. 자궁 안이 무슨 창고야? 상자야? 거기다가 뭐를 감춰. 지령받아서 거기다 감춰 가지고 나왔다고. 그 모진 고문. 그렇게 잔인할 수가 없어. 그렇게 고통을 줄 수가 없어… -김복연 할머니의 증언 영상 中- 폭행에 물고문, 전기고문, 성고문까지. 누명을 쓴 복연 씨는 잔혹한 고문을 당했어. 이를 지켜본 어린 아들 학철이가 우리 엄마 죽어! 악을 쓰면서 경찰에 달려들었어. 경찰은 학철이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려 바깥으로 내쫓았어. 그게 복연 씨가 본 아들의 마지막 모습이야. ▲ 도망자가 된 어머니, 찾지 못한 아들 복연 씨는 바로 재판에 넘겨져 속전속결로 무기징역형을 받았어. 당시 이런 판결이 가능했던 이유는, 국가에 반역하는 일에 동조하거나 가담했다며 '부역자'가 된 사람들을 처벌하려고 따로 '비상사태 하의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 조치령'이란 법을 만들었기 때문이야. 이 법은 이해할 수 없는 특징들이 있어. 재판은 단심으로 진행돼 한번 판결이 나면 끝이야. 또 형량은 10년 이상, 무기징역, 사형, 딱 이 세 가지로만 했어. 그리고 가장 무서운 건, 물증이 없어도 된다는 거야. 누군가 증언만 해도 '부역자'로 몰릴 수 있다는 거지. 이런 법으로 억울한 사람들이 많아지자, 국민들의 원성이 커지고 국회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어. 그러자 무기징역은 15년형으로 감형됐어. 복연 씨도 감형을 받고 대구 교도소로 옮겨졌어. 복연 씨의 운명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동안, 아들 학철이는 어떻게 됐을까? 학철이는 종로경찰서 밖으로 내동댕이 쳐진 이후, 이전 기억들을 거의 잃어버렸어. 기억에 남아있는 첫 장면은, 어떤 아저씨의 허리를 꼭 잡고 자전거 뒷자리에 탄 기억이래. 당시 자전거가 멈춘 곳은 전쟁고아 임시 수용소로 쓰인 종로국민학교. 학철이는 여기서 기다리면 엄마가 찾으러 올 거라 생각했어. 그렇게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아이들은 여의도에 있는 비행장에서 미군 수송기를 타고 어딘가로 보내졌어. 제주도의 고아원이야. 1950년 중공군이 전쟁에 참여하며 연합군과 국군이 다시 밀리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남쪽으로 피난길에 올랐고, 아이들도 제주도로 보내졌어. 이게 학철이의 제주도 고아원 시절 모습이야. 그런데 그 과정에서 황당한 일이 벌어졌어. 학철이의 이름이 '맹철수'로 바뀐 거야. 이유는 모르겠지만, 전쟁통에 착오가 있었을 걸로 여겨지고 있어. 그때부터 학철이는 맹철수로 불렸어. 철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지만 여기서 말 잘 듣고 있으면 엄마가 찾으러 올 거다 란 말만 믿고 엄마를 기다렸어. 그때 복연 씨는 대구 교도소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하혈을 하며 반송장이 된 상태였어. 교도소에서 형 집행정지를 시키고 복연 씨를 병원으로 보냈어. 응급수술을 받고 눈을 뜬 복연 씨는 아들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 하나로 병원에서 탈출을 결심했어. 수술 부위에 실밥도 안 뽑은 상태인데, 복연 씨는 몸을 일으켰어. 그리고 화장실에 가는 척하면서 그대로 도망쳤어. 복연 씨는 다행히 탈출에 성공했어. 형 집행정지 중이긴 하지만 이건 사실상 탈옥이야. 잡히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하지만 복연 씨는 학철이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 학철이가 제주도에 있다는 걸 몰랐던 복연 씨는 종로, 동대문 일대를 뒤지고 다녔어. 탈옥수 신분이라 하루하루가 불안했던 복연 씨는 경찰만 보면 숨었어. 그러다 복연 씨는 안전을 위해 가정을 꾸리기로 결심했어. 때마침 복연 씨를 딱하게 여긴 지인이 박 씨라는 남자를 소개시켜 줬어. 박 씨는 복연 씨가 누명 벗는 걸 도와주겠다고 했어. 복연 씨는 박 씨와 가정을 꾸리면서도 학철이 찾는 걸 포기하지 않았어. 아들을 찾겠단 일념으로 서울 거리를 헤맨 지 10년. 그 사이에 학철이의 동생도 3명이나 생겼어. 복연 씨는 삼 남매에게 늘 학철이에 대해 이야기했대. 그때 맨날 학철이라고, 너희 오빠 있다고 엄마가 말했어요. 9.28 서울 수복 후 피난 갔다가 오면서 엄마는 경찰서로 끌려 들어가고, 거기서 손을 놓치고 잃어버렸다고. -김복연 할머니 막내딸- 그러던 어느 날, 결국 일이 터졌어. 복연 씨가 집에서 막내딸 젖을 먹이고 있는데 양복 입은 남자들이 찾아왔어. 그들은 복연 씨에게 '잔형 집행 지휘서'를 내밀었어. 10년 만에 복연 씨를 찾아내 남은 형기를 채우라며 데리러 온 거야. 복연 씨는 울며불며 봐달라고 사정했지만 소용이 없었어. 그렇게 복연 씨는 다시 교도소에 끌려갔어. 당시 8살이었던 첫째, 4살이었던 둘째는 2년 동안 쓰레기통을 뒤지며 길거리 생활을 했대. 젖먹이 막내딸은 교도소 안에서 같이 자라다가 2년 후 언니 오빠와 함께 고아원으로 보내졌어. 그럼 그때 아빠 박 씨는 뭘 하고 있었냐고? 남편은 복연 씨가 끌려가자마자, 집을 나가버렸어. ▲ 두 번의 기적 삼 남매가 가끔 교도소로 면회를 오면 복연 씨가 늘 하는 말이 있었대. 엄마 진짜 나쁜 짓 안 했어. 이다음에 공부 많이 하면 엄마 누명을 좀 풀어줄래 라고. 죄수복을 입고 아이들을 마주해야 하는 복연 씨의 심정은 어땠을까. 복연 씨가 다시 세상에 나온 건 1973년, 감옥에서 10년을 보낸 후야. 근데 출소 후에도 옥살이는 계속됐어. 한번 빨갱이는 영원한 빨갱이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져 뭘 하던 감시를 받으며 살아간 거야. 그렇게 또 10년이 지난 1983년, 복연 씨가 아주 큰 용기를 냈어. 바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방송에 출연하기로 한 거야. 1983년 6월 30일 첫 방송을 시작해 무려 138일 동안 생방송으로 진행된 이산가족 찾기 방송. 당시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잃어버린 가족을 찾겠다고 방송에 나왔고, 전국이 눈물바다였어. 그때 복연 씨도 피켓을 들고 카메라 앞에 섰어. 복연 씨의 번호는 1534번이었어. 1534번 아드님 되시는 전학철 씨를 찾습니다. 아드님 소식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서울 종로구 낙원동이 고향이십니다. -당시 방송 내용 中 하지만 학철이에게선 아무 연락이 오지 않았어. 그런데 '꼬꼬무'가 취재를 하면서 알게 된, 기가 막힌 사실이 하나 있어. 영화 같은 일이야. 알고 보니 그 당시, 학철이도 이산가족 찾기 방송에 나와 엄마를 찾고 있었던 거야. 49022번, 맹철수 씨는 부모 형제를 찾습니다. 본인 오른쪽 무릎 위에 용머리 형 반점이 있습니다. 복연 씨와 아들 학철이는 같은 자리에 있었던 거야. 근데 그때는 몰랐어. 전학철을 찾는 엄마, 부모를 찾는 맹철수. 이름이 달랐으니까. 이때 학철 씨의 나이가 30대 후반. 제주도 고아원에서 살다가 17살에 서울로 올라와서 공사판도 가고 조선소도 가며 그렇게 살았어. 가정도 꾸리고 귀한 자식도 생겼어. 그럴수록 엄마가 생각나고 그리웠대. 그래서 이산가족 찾기 방송에 나간 거야. 그렇게 다시 또 10년이 흘렀어. 1993년, 75세의 할머니가 된 복연 씨는 또 한 번 방송 출연을 결심했어. 이번엔 자신이 양복과 밥을 내줬던, 당시 군인을 찾기 위해 나섰어. 43년 전 그 군인만 찾으면, 누명을 벗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거야. 어느 날 인민군에게 쫓기던 국군 한 사람이 들창을 넘어 들어와서 좀 살려달라고 하기에. 양 씨라는 사람의 세탁물을 내가 맡아서 빨아 놨는데 그 세탁물을 그 군인을 입혀서 보냈죠. 그랬더니 그 후에 옷 임자가 찾아와서 말하기를 '인민군한테 옷 줘서 보내 놓고 무슨 국군을 줬다고 거짓말하냐'고 뒤집어 씌워서... -당시 김복연 할머니가 출연한 방송 中 찾는 사람 이름도 얼굴도 몰라. 그리고 그 방송이 유명한 프로그램도 아니고, 김복연 할머니의 사연은 딱 2분간 방송됐어. 과연 이 방송이 효과가 있을까?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어. 방송이 나간 바로 다음날, 방송국으로 자신이 그 군인 같다는 전화가 걸려 온 거야. 전남 장성에 사는 김현호 씨였어.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복연 할머니의 방송을 봤는데, 그 짧은 사연을 듣고 '이건 내 얘기다'라는 생각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대. 43년 전에는 23살의 국군 일병이었던 김현호 씨는 그날 할머니의 도움 덕에 무사히 부대에 복귀할 수 있었다며 고마워했어. 그런데 이 기적이 또 다른 기적을 만들었어. 김복연 할머니와 김현호 씨의 사연이 신문에 실렸고, 그 기사를 거제도에 살던 맹철수, 아니 학철 씨가 본거야. 그렇게 애타게 찾고 있던 아들이 기적적으로 기사를 봤고, 또 기적처럼 기사 속 사진을 보자마자 43년 전에 헤어진 엄마라는 걸 알아본 거야. ▲ 누명을 벗기까지 71년, 하지만 이미 세상을 떠난 할머니 먼 길을 돌아 드디어 만난 엄마와 아들. 일평생 불행의 연속이었던 할머니의 삶에 마치 하늘이 내린 보상처럼 두 번의 기적이 찾아왔어. 그리고 비로소 맹철수 씨는 자신의 진짜 이름이 전학철이란 걸 알게 됐어. 근데 이름이 3개라고 했잖아? 학철 씨의 지금 현재 이름은 '전철수'야. 당시 개명이 쉽지 않아서, 성만 되찾으셨대. 그래서 자기 원래 성 전 씨, 43년 동안 썼던 이름 철수를 합쳐서 세 번째 이름 전철수가 된 거야. 자신의 이름만큼이나 기구했던 어머니의 사연을 알게 된 철수 씨는 43년 전에 잘못된 재판을 바로잡자며 재심을 신청했어. 아들도 찾고 이제 아무도 부러울 게 없지만, 내가 죽고 없어도 빨갱이라는 누명만은 벗고 가고 싶다 는 할머니의 바람이 있었어. 철수 씨는 생업도 접고 혼자 법원, 검찰청, 기록보존소에 출퇴근하며 재판 기록을 찾아다녔어. 그렇게 어렵게 찾아낸 재판 자료들은 다 한자로 써진 옛날 문서였어. 변호사도 판사도 읽지 못했어. 이에 철수 씨는 혼자 옥편을 찾아가면서 한 글자 한 글자 한글로 옮겼어. 오로지 어머니의 억울함을 풀어 드리기 위해서. 국군 일병 김현호 씨도 법정에서 증언해주기로 했어. 그리고 경기도 양주에 피난 갔을 때 같이 살았던 사람도 찾아냈어. 이 정도면 재심에서 좋은 결과가 나올 거라 생각했어. 할머니도 드디어 누명을 벗겠다는 기대에 부풀었어. 그리고 1996년 7월, 할머니 부역 혐의에 대한 재심 판결이 내려졌어. 재심 청구인들의 재심 청구를 모두 기각한다 할머니의 억울함을 재판부는 인정하지 않았어. 무죄라는 새로운 증거가 없다는 거야. 김일병과 피난처 증인들의 말보다, 할머니를 부역자로 몬 양 씨의 증언이 더 신빙성이 있다는 거야. 그렇다고 재판부가 양 씨를 불러 대질심문을 한 것도 아냐. 그냥 1950년 당시 재판 내용으로만 판단한 거야. 결과를 받은 복연 할머니는 몸져누웠어. 그리고 2010년 4월, 김복연 할머니는 끝내 누명을 벗지 못 한 채 세상을 떠나셨어.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아들 철수 씨는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어. 어머니 살아생전에 이걸 못 해드렸다는 죄송한 마음이 들어서 이번엔 더 악착같이 매달렸어. 2017년 다시 재심을 신청했어. 이번엔 간첩 누명 사건에 경험이 많은 장경욱, 신윤경 변호사가 도와주기로 했어. 그리고 5년이 지나 2021년 5월, 드디어 판결이 나왔어. 이번에 나온 판결문이야. 피고인 망(亡) 김복연. 1950년 8월 초순경, 피고인이 서울이 아닌 양주에 거주하였을 개연성이 있는 점에 비추어 증인 양 씨의 진술을 그대로 믿기 어렵다. 1950년 6월 28일 새벽, 국군을 구조한 전력이 있는 피고인이 한 달 뒤 세 들어 살던 김정자 등을 밀고할 특별한 계기나 이유를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 공소사실을 인정하기 부족하고 달리 이를 인정할 증거가 없으므로 이 사건 공소사실은 범죄의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 주문 피고인은 면소 재판부는 할머니한테 죄가 없다고 봤어. 사실상의 무죄 판결이야. 근데 왜 무죄라고 하면 되는데 '면소'라고 했을까? 면소는 소를 면제한다, 소송 절차를 종결시킨다는 뜻이야. 더 이상 재판을 진행시킬 필요가 없을 때 내려지는 판결이야. 할머니한테 무기징역을 내린 그 특별 조치령 법이 1960년에 이미 없어졌어. 법이 사라졌으니, 유죄 무죄 판결을 못하고 면소라는 판결을 내릴 수밖에 없다는 거야. 김복연 할머니가 누명을 벗기까지 무려 71년이야. 그 모진 세월을 견뎠지만 할머니는 끝내 '당신은 부역자 빨갱이가 아닙니다' 이 말을 듣지 못하고 떠나셨어. 끝나고 나니까 허무한 생각도 들죠. 그동안 한 게 꿈이었나 현실이었나 그런 생각도 들고. 내려가는 열차 칸에서 울었어요. 이 판결문을 드리지 못한 생각에. 살아 계신다면, 무사히 해결했다고 그랬겠죠. -아들 전철수 씨 이제 고생 그만하시고 하늘에서 편히 눈 감고 마음의 짐 덜고 사셨으면. 다음 생애에 태어나신다면 그런 힘든 일 겪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김복연 할머니 막내딸 김복연 할머니는 자신의 억울함과 떳떳함을 밝히기 위해 수없이 방송, 신문, 법원의 문을 두드리고 포기하지 않았어. 결국 자신의 결백을 끝까지 지킨 건, 할머니 본인이 아닐까.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
[꼬꼬무 찐리뷰] 43년만에 찾은 아들, 71년만에 벗은 누명…故김복연 할머니의 한 서린 인생 [꼬꼬무 찐리뷰] 43년만에 찾은 아들, 71년만에 벗은 누명…故김복연 할머니의 한 서린 인생 등록일2022.08.26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25일 방송된 '꼬꼬무- 두 번의 기적: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배우 오나라, 온주완, 볼빨간 사춘기의 안지영이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43년만에 찾은 어머니 전 1946년생, 올해 나이 76살의 전철수입니다. 제가 이름이 3개였는데요. 전학철, 맹철수, 전철수. 3개 입니다. 여기, 본명만 3개였던 분이 있어. 왜 이름이 3개나 될 까. 이 이름엔 가슴 아픈 사연이 숨어있어. 때는 1993년 6월. 이 분이 '맹철수'란 이름으로 살던 시절이야. 당시 나이는 48살. 경남 거제도에 사는 평범한 가장이었어. 어느날 회사에 출근 후 커피 한잔의 여유를 즐기며 신문을 펼쳤어. 그런데 철수 씨의 시선이 신문 한 가운데에 꽂혔어. 그리고 눈을 뗄 수 없었어. 철수 씨가 본 건 이 기사야. '김복연 할머니 한맺힌 역정' 김복연 할머니는 서울에 사는 분인데, 한국전쟁 때 5살 난 아들을 잃어버리셨대. 철수 씨가 왜 놀랐냐면, 자신이 그 잃어버린 아들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야. 철수 씨도 전쟁 당시 부모를 잃어버렸거든. 그때 나이가 바로 5살이었어. 워낙 어렸을 때라 부모님 얼굴이나 이름은 전혀 기억이 안나. 근데 이 김복연 할머니의 사진을 보는 순간, 묘한 기분에 휩싸인 거야. 피가 당긴다고 하지? 철수 씨는 강렬한 직감을 가지고, 바로 할머니를 찾아 갔어. 만약 43년 전에 헤어진 가족을 만난다면, 알아볼 수 있을까? 당시 두 분의 모습을 보여줄게. 너무 닮았지. 누가 봐도 어머니와 아들이야. 두 사람은 가족만이 알 수 있는 신체 특징도 맞췄어. 할머니의 잃어버린 아들은 오른쪽 허벅지에 용머리 모양의 반점이 있었대. 철수 씨는 천천히 바지를 걷어 올렸고, 희미하게 남아있는 용머리 반점을 확인했어. 두 사람은 모자 지간이 맞았어. 철수 씨가 5살 때 헤어진 어머니를 43년만에 다시 만난 거야. 그런데 눈물도 안 나오고 덤덤했대. 너무 현실감이 없어서. 철수 씨는 오랫동안 마음 속에 간직했던 질문은 어머니한테 던졌어. 왜 그동안 날 안 찾았어요? 혹시 날 버린 건가요? 그런데 어머니의 대답은,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거였어. 이걸 보면 깜짝 놀랄 거야. 어머니가 그동안 감옥에 있었던 거야. 그것도 무기수로. 수십년 만에 찾은 어머니가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범죄자라는 거야. 그런데 어머니의 사연을 들어보니,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어머니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니야. 그래서 철수 씨는 거금을 들여 캠코더를 샀고, 어머니의 증언을 영상으로 기록하기로 했어. 100년이 가도 내가 당한 그 일만은 잊을 수가 없어. 난 죽여만 달라고 했어 -김복연 할머니의 증언 영상 中- 도대체 이 김복연 할머니에겐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지금부터 이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려줄게. ▲ 재앙을 불러온 양복, 억울한 누명 1950년 6월 서울 종로구. 당시 32살이었던 복연 씨는 판잣집 단칸방에서 아들 학철이와 둘이 살고 있었어. 맹철수 씨의 진짜 이름은 '전학철'이야. 학철이는 5살 때 한글을 쓸 정도로 똘똘한 아이였어. 학철이 아버지는 경찰이었는데, 학철이가 생긴 이후 자기는 본처가 있다고 고백하며 두 사람을 떠나 연락도 끊어 버렸대. 그때부터 복연 씨는 더 억척스럽게 살았어. 낮에는 가판에서 물건을 팔고, 저녁엔 남의 빨랫감을 받아 세탁했어. 이런 모자한테 불행이 시작된 건 양 씨라는 이웃 남자가 찾아온 이후였어. 양 씨는 복연 씨에게 양복을 건네며 빨아달라고 부탁했어. 그런데 사실 양 씨의 진짜 용건은 따로 있었어. 양 씨는 자신이 관리하는 유흥업소 여성들이 잠 잘 방을 내어주면 매달 쌀로 사례를 하겠다고 했어. 복연 씨의 집은 단칸방이었는데, 양 씨는 합판을 가져와 뚝딱뚝딱 벽을 만들더니 방을 둘로 나눴어. 그 때 양 씨가 데려온 여성들은 김영애와 김정자. 그렇게 복연 씨 모자는 이들과 동거를 시작했어. 그런데 양 씨는 약속한 쌀을 주지도 않았고, 맡겼던 양복 빨래도 찾아가지 않았어. 그리고 며칠 후, 한국전쟁이 터졌어. 38선을 넘은 인민군들이 맹렬한 기세로 내려왔는데, 당시 서울 사람들은 피난을 떠날 생각을 안 했어.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라디오 방송에 나와 이런 연설을 했기 때문이야. 국민 여러분, 지금 유엔군이 오고 있습니다. 굳게 참고 기다리면 적을 물리칠 것입니다. 안심하십시오. 이런 연설을 하니 사람들은 안심하고 그냥 집에 있었지. 근데 이 연설을 했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을 떠나 대전에 있었어. 전쟁 이틀 만에 서울을 빠져나간 거야. 대통령은 인민군의 남하를 막는다며 한강 다리를 끊어버리도록 명령했어. 그렇게 한강 다리가 끊기고, 서울 사람들은 고립됐어. 그 시각, 복연 씨는 온 집안의 불을 끄고 숨을 죽이고 있었어. 밖에선 포성 소리가 들렸어. 그러다 새벽녘에 깜박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집에 누군가 침입한 소리가 들렸어. 처음에는 강도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까 우리 군복을 입은 국군이야. 인민군의 공격을 받고 도망치다가 아무 집이나 보이는 곳에 뛰어들어온 거야. 아주머니, 저 좀 살려주세요. 군복을 입고 있다가 들키면 바로 죽음이야. 복연 씨는 집에 있는 유일한 성인 남성 옷인 양 씨가 맡긴 양복을 군인에게 건넸어. 또 3일동안 한 끼도 먹지 못한 군인에게 꽁보리밥 한 그릇을 내와 먹게 했어. 허겁지겁 밥을 먹은 군인은 옷을 갈아입고, 동이 트기 전에 복연 씨 집을 떠났어. 깜깜한 곳에서 봐서, 복연 씨는 군인의 얼굴도 제대로 못 봤고 이름도 몰랐어. 다음날 아침 복연 씨는 종로 대로변을 나갔다가 깜짝 놀랐어. 전쟁이 터진지 3일만에 서울이 함락돼, 서울 곳곳이 인공기와 김일성의 얼굴로 도배가 됐어. 복연 씨는 마음 한 켠이 불안했어. 학철이 아버지의 직업이 경찰이었기 때문이야. 남편과 왕래를 안 한지 오래 됐으니 별문제 없겠거니 생각했어. 그런데… 김복연 어디 있어! 반동분자 당장 나와! 집에 인민군이 들이닥치더니 복연 씨와 아들 학철이를 끌고 갔어. 알고보니, 그 한집에 살던 여자들이 '학철이 아버지가 경찰관이고, 국군 옷을 입혀서 도망시켰다'며 복연 씨를 반동분자라고 밀고한 거야. 인민군은 남편의 행방을 물으며 복연 씨에게 주먹을 휘둘렀어. 심지어 다섯살 학철이까지 때렸어. 고춧가루 물을 붓고 온갖 고문을 했어. 하지만 자신들이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자 일단 두 사람을 풀어줬어. 죽다 살아난 복연 씨는 학철이를 데리고 피난을 가기로 결심했어. 복연씨 모자는 7월 10일경에 서울을 떠나 석달간 경기도 양주에서 피난 생활을 했어. 그리고 10월 초에 다시 서울로 돌아왔어. 9월에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며 국군이 다시 서울에 입성했으니, 이제 집에 돌아가도 되겠구나 생각한 거지. 꼬박 이틀을 걸어 복연 씨 모자는 서울 집에 도착했어. 근데 집에는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었어. 양 씨와 여자들이었어. 복연 씨는 바로 이들을 집에서 쫓아냈어. 그런데 며칠 후, 이번엔 경찰들이 복연 씨의 집에 들이 닥쳤어. 그리고 구속영장을 들이밀며, 복연 씨를 체포했어. 피의자 김복연은 북한 괴리군의 정보원으로 일하다 동거하고 있던 김영애, 김정자 등이 '이 대통령 만세, 영원히 돌아오시라' 삐라를 뿌리기로 하자 이를 밀고하여 애국여성인 김정자 등을 피살케 한 자임. 범정의 정도: 극악질 ?구속영장 내용 中 모두 거짓 내용이었어. 심지어 복연 씨가 이들을 밀고했다는 날짜는 7월 30일인데, 이 때는 복연 씨가 양주에 있을 때야. 이번에도 신고자는 양 씨와 여자들이었어. 증거는 이들의 주장 뿐인데, 아무도 복연 씨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어. 석달 전에는 인민군들이 반동분자로 몰더니, 이번엔 우리 경찰이 나라 팔아 먹은 빨갱이라고 몰아갔어. 잡혀간 복연 씨는 모진 고문을 당했어. 날 갖다가, '거물'이라고. 빨간 글씨로 가마니에 써 가지고 내 위에다 뒤집어 씌워놓고. 맛을 봐야 알겠느냐고. 전깃줄인지 뭘 갖고 와서는 귀에다 대고, 젖꼭지에 대고 돌렸어. 미치도록. 그렇게 발가벗겨 놓고서는 뭔 방망이 같은 걸 가지고 와서. 자궁 안이 무슨 창고야? 상자야? 거기다가 뭐를 감춰. 지령 받아서 거기다 감춰 가지고 나왔다고. 그 모진 고문. 그렇게 잔인할 수가 없어. 그렇게 고통을 줄 수가 없어… -김복연 할머니의 증언 영상 中- 폭행에 물고문, 전기고문, 성고문까지. 누명을 쓴 복연 씨는 잔혹한 고문을 당했어. 이를 지켜 본 어린 아들 학철이가 우리 엄마 죽어! 악을 쓰면서 경찰에 달려 들었어. 경찰은 학철이의 멱살을 잡고 들어올려 바깥으로 내쫓았어. 그게 복연 씨가 본 아들의 마지막 모습이야. ▲ 도망자가 된 어머니, 찾지 못한 아들 복연 씨는 바로 재판에 넘겨져 속전속결로 무기징역형을 받았어. 당시 이런 판결이 가능했던 이유는, 국가에 반역하는 일에 동조하거나 가담했다며 '부역자'가 된 사람들을 처벌하려고 따로 '비상사태 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 조치령'이란 법을 만들었기 때문이야. 이 법은 이해할 수 없는 특징들이 있어. 재판은 단심으로 진행돼 한번 판결이 나면 끝이야. 또 형량은 10년 이상, 무기징역, 사형, 딱 이 세가지로만 했어. 그리고 가장 무서운 건, 물증이 없어도 된다는 거야. 누군가 증언만 해도 '부역자'로 몰릴 수 있다는 거지. 이런 법으로 억울한 사람들이 많아지자, 국민들의 원성이 커지고 국회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어. 그러자 무기징역은 15년형으로 감형됐어. 복연 씨도 감형을 받고 대구 교도소로 옮겨졌어. 복연 씨의 운명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동안, 아들 학철이는 어떻게 됐을까? 학철이는 종로경찰서 밖으로 내동댕이 쳐진 이후, 이전 기억들을 거의 잃어 버렸어. 기억에 남아있는 첫 장면은, 어떤 아저씨의 허리를 꼭 잡고 자전거 뒷자리에 탄 기억이래. 당시 자전거가 멈춘 곳은 전쟁고아 임시 수용소로 쓰인 종로국민학교. 학철이는 여기서 기다리면 엄마가 찾으러 올 거라 생각했어. 그렇게 한달쯤 지난 어느 날, 아이들은 여의도에 있는 비행장에서 미군 수송기를 타고 어딘가로 보내졌어. 제주도의 고아원이야. 1950년 중공군이 전쟁에 참여하며 연합군과 국군이 다시 밀리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남쪽으로 피난길에 올랐고, 아이들도 제주도로 보내졌어. 이게 학철이의 제주도 고아원 시절 모습이야. 그런데 그 과정에서 황당한 일이 벌어졌어. 학철이의 이름이 '맹철수'로 바뀐 거야. 이유는 모르겠지만, 전쟁통에 착오가 있었을 걸로 여겨지고 있어. 그때부터 학철이는 맹철수로 불렸어. 철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지만 여기서 말 잘 듣고 있으면 엄마가 찾으러 올 거다 란 말만 믿고 엄마를 기다렸어. 그때 복연씨는 대구 교도소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하혈을 하며 반송장이 된 상태였어. 교도소에서 형집행정지를 시키고 복연 씨를 병원으로 보냈어. 응급수술을 받고 눈을 뜬 복연 씨는 아들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 하나로 병원에서 탈출을 결심했어. 수술 부위에 실밥도 안 뽑은 상태인데, 복연 씨는 몸을 일으켰어. 그리고 화장실에 가는 척 하면서 그대로 도망쳤어. 복연 씨는 다행히 탈출에 성공했어. 형집행정지 중이긴 하지만 이건 사실상 탈옥이야. 잡히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하지만 복연 씨는 학철이를 찾아야한다는 생각 뿐이었어. 학철이가 제주도에 있다는 걸 몰랐던 복연 씨는 종로, 동대문 일대를 뒤지고 다녔어. 탈옥수 신분이라 하루하루가 불안했던 복연 씨는 경찰만 보면 숨었어. 그러다 복연 씨는 안전을 위해 가정을 꾸리기로 결심했어. 때마침 복연 씨를 딱하게 여긴 지인이 박 씨라는 남자를 소개시켜 줬어. 박 씨는 복연씨가 누명 벗는 걸 도와주겠다고 했어. 복연 씨는 박 씨와 가정을 꾸리면서도 학철이 찾는 걸 포기하지 않았어. 아들을 찾겠단 일념으로 서울 거리를 헤맨 지 10년. 그 사이에 학철이의 동생도 3명이나 생겼어. 복연 씨는 삼남매에게 늘 학철이에 대해 이야기했대. 그때 맨날 학철이라고, 너희 오빠 있다고 엄마가 말했어요. 9.28 서울 수복 후 피난 갔따가 오면서 엄마는 경찰서로 끌려 들어가고, 거기서 손을 놓치고 잃어버렸다고. -김복연 할머니 막내딸- 그러던 어느 날, 결국 일이 터졌어. 복연 씨가 집에서 막내딸 젖을 먹이고 있는데 양복 입은 남자들이 찾아 왔어. 그들은 복연 씨에게 '잔형 집행 지휘서'를 내밀었어. 10년만에 복연 씨를 찾아내 남은 형기를 채우라며 데리러 온 거야. 복연 씨는 울며불며 봐달라고 사정했지만 소용이 없었어. 그렇게 복연 씨는 다시 교도소에 끌려갔어. 당시 8살이었던 첫째, 4살이었던 둘째는 2년 동안 쓰레기통을 뒤지며 길거리 생활을 했대. 젖먹이 막내딸은 교도소 안에서 같이 자라다가 2년 후 언니 오빠와 함께 고아원으로 보내졌어. 그럼 그때 아빠 박 씨는 뭘하고 있었냐고? 남편은 복연 씨가 끌려가자 마자, 집을 나가버렸어. ▲ 두 번의 기적 삼남매가 가끔 교도소로 면회를 오면 복연 씨가 늘 하는 말이 있었대. 엄마 진짜 나쁜 짓 안 했어. 이 다음에 공부 많이 하면 엄마 누명을 좀 풀어줄래 라고. 죄수복을 입고 아이들을 마주해야 하는 복연 씨의 심정은 어땠을까. 복연씨가 다시 세상에 나온 건 1973년, 감옥에서 10년을 보낸 후야. 근데 출소 후에도 옥살이는 계속 됐어. 한번 빨갱이는 영원한 빨갱이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져 뭘 하던 감시를 받으며 살아간 거야. 그렇게 또 10년이 지난 1983년, 복연 씨가 아주 큰 용기를 냈어. 바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방송에 출연하기로 한 거야. 1983년 6월 30일 첫 방송을 시작해 무려 138일동안 생방송으로 진행된 이산가족 찾기 방송. 당시 1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잃어버린 가족을 찾겠다고 방송에 나왔고, 전국이 눈물바다였어. 그 때 복연 씨도 피켓을 들고 카메라 앞에 섰어. 복연 씨의 번호는 1534번이었어. 1534번 아드님 되시는 전학철 씨를 찾습니다. 아드님 소식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서울 종로구 낙원동이 고향이십니다. -당시 방송 내용 中 하지만 학철이에게선 아무 연락이 오지 않았어. 그런데 '꼬꼬무'가 취재를 하면서 알게 된, 기가 막힌 사실이 하나 있어. 영화 같은 일이야. 알고보니 그 당시, 학철이도 이산가족 찾기 방송에 나와 엄마를 찾고 있었던 거야. 49022번, 맹철수 씨는 부모 형제를 찾습니다. 본인 오른쪽 무릎 위에 용머리 형 반점이 있습니다. 복연 씨와 아들 학철이는 같은 자리에 있었던 거야. 근데 그때는 몰랐어. 전학철을 찾는 엄마, 부모를 찾는 맹철수. 이름이 달랐으니까. 이때 학철 씨의 나이가 30대 후반. 제주도 고아원에서 살다가 17살에 서울로 올라와서 공사판도 가고 조선소도 가며 그렇게 살았어. 가정도 꾸리고 귀한 자식도 생겼어. 그럴수록 엄마가 생각나고 그리웠대. 그래서 이산가족 찾기 방송에 나간 거야. 그렇게 다시 또 10년이 흘렀어. 1993년, 75세의 할머니가 된 복연 씨는 또 한번 방송 출연을 결심했어. 이번엔 자신이 양복과 밥을 내줬던, 당시 군인을 찾기 위해 나섰어. 43년 전 그 군인만 찾으면, 누명을 벗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거야. 어느날 인민군에게 쫓기던 국군 한 사람이 들창을 넘어 들어와서 좀 살려달라고 하기에. 양 씨라는 사람의 세탁물을 내가 맡아서 빨아 놨는데 그 세탁물을 그 군인을 입혀서 보냈죠. 그랬더니 그 후에 옷 임자가 찾아와서 말하기를 '인민군한테 옷 줘서 보내놓고 무슨 국군을 줬다고 거짓말 하냐'고 뒤집어 씌워서... -당시 김복연 할머니가 출연한 방송 中 찾는 사람 이름도 얼굴도 몰라. 그리고 그 방송이 유명한 프로그램도 아니고, 김복연 할머니의 사연은 딱 2분간 방송됐어. 과연 이 방송이 효과가 있을까?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어. 방송이 나간 바로 다음날, 방송국으로 자신이 그 군인 같다는 전화가 걸려 온거야. 전남 장성에 사는 김현호 씨였어.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복연 할머니의 방송을 봤는데, 그 짧은 사연을 듣고 '이건 내 얘기다'라는 생각에 심장이 미친듯이 뛰었대. 43년 전에는 23살의 국군 일병이었던 김현호 씨는 그날 할머니의 도움 덕에 무사히 부대에 복귀할 수 있었다며 고마워 했어. 그런데 이 기적이 또 다른 기적을 만들었어. 김복연 할머니와 김현호 씨의 사연이 신문에 실렸고, 그 기사를 거제도에 살던 맹철수, 아니 학철 씨가 본거야. 그렇게 애타게 찾고 있던 아들이 기적적으로 기사를 봤고, 또 기적처럼 기사 속 사진을 보자마자 43년 전에 헤어진 엄마라는 걸 알아본 거야. ▲ 누명을 벗기까지 71년, 하지만 이미 세상을 떠난 할머니 먼 길을 돌아 드디어 만난 엄마와 아들. 일평생 불행의 연속이었던 할머니의 삶에 마치 하늘이 내린 보상처럼 두 번의 기적이 찾아왔어. 그리고 비로소 맹철수 씨는 자신의 진짜 이름이 전학철이란 걸 알게 됐어. 근데 이름이 3개라고 했잖아? 학철 씨의 지금 현재 이름은 '전철수'야. 당시 개명이 쉽지 않아서, 성만 되찾으셨대. 그래서 자기 원래 성 전씨, 43년동안 썼던 이름 철수를 합쳐서 세번째 이름 전철수가 된 거야. 자신의 이름만큼이나 기구했던 어머니의 사연을 알게 된 철수 씨는 43년 전에 잘못된 재판을 바로잡자며 재심을 신청했어. 아들도 찾고 이제 아무도 부러울 게 없지만, 내가 죽고 없어도 빨갱이라는 누명만은 벗고 가고 싶다 는 할머니의 바람이 있었어. 철수 씨는 생업도 접고 혼자 법원, 검찰청, 기록보존소에 출퇴근 하며 재판 기록을 찾아 다녔어. 그렇게 어렵게 찾아낸 재판 자료들은 다 한자로 써진 옛날 문서였어. 변호사도 판사도 읽지 못했어. 이에 철수 씨는 혼자 옥편을 찾아가면서 한글자 한글자 한글로 옮겼어. 오로지 어머니의 억울함을 풀어 드리기 위해서. 국군 일병 김현호 씨도 법정에서 증언해주기로 했어. 그리고 경기도 양주에 피난 갔을 때 같이 살았던 사람도 찾아냈어. 이 정도면 재심에서 좋은 결과가 나올 거라 생각했어. 할머니도 드디어 누명을 벗겠다는 기대에 부풀었어. 그리고 1996년 7월, 할머니 부역 혐의에 대한 재심 판결이 내려졌어. 재심 청구인들의 재심 청구를 모두 기각한다 할머니의 억울함을 재판부는 인정하지 않았어. 무죄라는 새로운 증거가 없다는 거야. 김일병과 피난처 증인들의 말보다, 할머니를 부역자로 몬 양 씨의 증언이 더 신빙성이 있다는 거야. 그렇다고 재판부가 양 씨를 불러 대질심문을 한 것도 아냐. 그냥 1950년 당시 재판 내용으로만 판단한 거야. 결과를 받은 복연 할머니는 몸져 누웠어. 그리고 2010년 4월, 김복연 할머니는 끝내 누명을 벗지 못 한 채 세상을 떠나셨어.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아들 철수 씨는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어. 어머니 살아 생전에 이걸 못 해드렸다는 죄송한 마음이 들어서 이번엔 더 악착같이 매달렸어. 2017년 다시 재심을 신청했어. 이번엔 간첩 누명 사건에 경험이 많은 장경욱, 신윤경 변호사가 도와주기로 했어. 그리고 5년이 지나 2021년 5월, 드디어 판결이 나왔어. 이번에 나온 판결문이야. 피고인 망(亡) 김복연. 1950년 8월 초순경, 피고인이 서울이 아닌 양주에 거주하였을 개연성이 있는 점에 비추어 증인 양 씨의 진술을 그대로 믿기 어렵다. 1950년 6월 28일 새벽, 국군을 구조한 전력이 있는 피고인이 한 달 뒤 세들어 살던 김정자 등을 밀고할 특별한 계기나 이유를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 공소사실을 인정하기 부족하고 달리 이를 인정할 증거가 없으므로 이 사건 공소사실은 범죄의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 주문 피고인은 면소 재판부는 할머니한테 죄가 없다고 봤어. 사실상의 무죄 판결이야. 근데 왜 무죄라고 하면 되는데 '면소'라고 했을까? 면소는 소를 면제한다, 소송 절차를 종결 시킨다는 뜻이야. 더 이상 재판을 진행시킬 필요가 없을 때 내려지는 판결이야. 할머니한테 무기징역을 내린 그 특별 조치령 법이 1960년에 이미 없어졌어. 법이 사라졌으니, 유죄 무죄 판결을 못하고 면소라는 판결을 내릴 수 밖에 없다는 거야. 김복연 할머니가 누명을 벗기까지 무려 71년이야. 그 모진 세월을 견뎠지만 할머니는 끝내 '당신은 부역자 빨갱이가 아닙니다' 이 말을 듣지 못하고 떠나셨어. 끝나고 나니까 허무한 생각도 들죠. 그동안 한 게 꿈이었나 현실이었나 그런 생각도 들고. 내려가는 열차 칸에서 울었어요. 이 판결문을 드리지 못한 생각에. 살아 계신다면, 무사히 해결했다고 그랬겠죠. -아들 전철수 씨 이제 고생 그만 하시고 하늘에서 편히 눈 감고 마음의 짐 덜고 사셨으면. 다음 생애에 태어나신다면 그런 힘든 일 겪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김복연 할머니 막내딸 김복연 할머니는 자신의 억울함과 떳떳함을 밝히기 위해 수없이 방송, 신문, 법원의 문을 두드리고 포기하지 않았어. 결국 자신의 결백을 끝까지 지킨 건, 할머니 본인이 아닐까.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난 죄를 짓지 않았어 무기수 어머니의 한 맺힌 증언…'꼬꼬무' 조명  난 죄를 짓지 않았어  무기수 어머니의 한 맺힌 증언…'꼬꼬무' 조명 등록일2022.08.25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가 故 김복연 할머니의 이야기를 조명한다. 25일 방송될 '꼬꼬무'는 '두 번의 기적: 나의 마음을 지지 않았다' 편으로, 세 개의 이름을 가진 아들과 무기수 어머니에게 숨겨진 엄청난 사연이 소개된다. 지난 6월, '꼬꼬무' 카메라 앞에 앉은 '그날' 이야기의 주인공은 난 이름이 세 개다 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평범한 외모와 달리 영화보다 더 기구한 사연을 가졌다는 거제도에 사는 그는 자신의 진짜 이름을 찾기 위해 떠올리기도 힘든 시간을 지나왔다고 말했다. 1993년 6월, 그가 48세 '맹철수'라는 이름으로 살던 시절. 평소와 다름없이 하루를 시작한 철수 씨는 우연히 펼친 신문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신문에 실린 사진 속 70대 할머니의 얼굴을 보고 너무나 기묘한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5살에 부모를 잃은 후 평생 고아로 살아온 철수 씨의 '핏줄'이 당긴 것이다. 강렬한 직감 하나만 갖고 찾아간 그곳에 그토록 찾던 어머니 김복연 씨가 있었다. 43년 만에 극적으로 상봉한 모자는 세월이 무색할 만큼 서로를 단번에 알아봤다. 그리고 맹철수 씨는 자신의 진짜 이름이 '전학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모자에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장트리오' 장현성, 장성규, 장도연이 전한다. 아들은 43년 만에 찾은 어머니에게 오랜 시간 마음속에 간직해왔던 말을 건넸다. 어쩌다 자신과 헤어지게 된 것인지, 혹시 버린 건 아니었는지 물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충격적이었다. 어머니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감옥에 있었다는 것. 왜 5살 아들과 헤어져 감옥에 가게 되었는지, 어머니가 들려주는 도저히 납득 할 수 없는 이야기에 철수 씨는 어머니의 증언을 직접 녹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상상을 초월하는 사연을 들으며 카메라 뒤에서 소리 없는 울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70년의 세월, 김복연 씨는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단 한 사람을 찾기 위해 용기 있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렇게 70년간 단 한 순간도 포기하지 않은 '마음'은 '기적'을 불러오고, 놀랍게도 그 기적은 또 다른 기적을 일으켰다. 이번 '장트리오'의 이야기를 듣는 친구로는 배우 오나라, 온주완, 가수 볼빨간 사춘기의 안지영이 나선다. 오나라가 '꼬꼬무'에 찾아와 장현성과 반갑게 재회했다. 등장부터 '꼬꼬무'에 대한 진한 팬심을 드러낸 오나라는 이를 증명하듯 거침없는 추리를 선보였다. 가식 없이 투명한 리액션을 보인 그는 드라마도 이렇게는 쓸 수 없겠다 며 고개를 저었다. 장도연의 이야기 친구는 볼빨간 사춘기 안지영이다. 안지영은 첫 출연의 해사한 모습도 잠시, 연신 한숨을 내뱉으며 주인공에게 완벽히 동기화됐다. 녹화가 끝난 뒤 그동안 귀 기울이지 못했던 이야기를 들려준 '꼬꼬무'에 고마움을 전하기도 했다. 온주완은 장성규의 이야기 친구로 반가운 얼굴을 비췄다. 세 번째 출연답게 경력자의 면모를 보여주며 정답 행진을 하던 그는 충격적인 이야기 전개에 감이 전혀 안 잡힌다 며 답변을 포기했다. 대표 '꼬물이' 온주완도 예상치 못한 놀라운 이야기가 방송된다. 비틀린 인생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노력에 마침내 놀라운 기적이 찾아온 '꼬꼬무'의 '두 번의 기적 :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편은 25일 목요일 밤 10시 30분에 방송된다.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뮤지컬 '모래시계' 배우들의 뜨거운 열연 호평 받으며 종연 뮤지컬 '모래시계' 배우들의 뜨거운 열연 호평 받으며 종연 등록일2022.08.16 [SBS 연예뉴스 l 강경윤 기자] 한국 근현대사 속 방황하던 청춘의 이야기를 담아낸 뮤지컬 &<모래시계&>가 뜨거운 함성과 박수 갈채 속에 진한 여운을 남기며 지난 14일(일),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뮤지컬 &<모래시계&>는 최고 시청률 64.5%라는 대기록을 세우며 전설로 기억된 동명의 드라마를 무대로 옮겨오며 격변의 시대에 휘말린 태수, 우석, 혜린 세 사람의 우정과 사랑 그리고 작은 움직임이 쌓여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묵직한 메시지를 전하는 작품이다. 5년만에 재연으로 돌아온 이번 시즌에는 대본, 음악, 무대를 새롭게 선보이며 한층 집중력 있고 속도감 있는 전개와 작품의 시대적 배경을 극대화시키는 회전무대, 극의 몰입도를 높이는 배우들의 뜨거운 열연이 더해지며 호평을 받았으며 다양한 세대의 관객들을 극장으로 불러모았다. 이번 시즌 공연을 본 관객들은 배우들의 열연 덕분에 푹 빠져봤어요 , 80년대 이야기이지만 뭔가 요즘과 많이 닮아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아서 중간중간 많이 울컥했습니다. , 최고의 배우들 덕분에 좋았던 공연! 예전 그 시절을 조금이나마 그려볼 수 있었던 공연이었습니다. , 혼란스러웠던 시대 속에 함께 방황하며 성장하는 청춘을 잘 담아낸 극인 것 같아요. 재밌게 잘 봤습니다. , 뮤지컬 만의 감동이 있고 또 배우들이 다 너무 잘해서 추천합니다, 드라마 안보고 가도 꿀잼! 등 작품의 가슴 벅찬 감동과 배우들의 열연에 연일 극찬을 남겼다. 특히 이번 시즌에는 배우들의 열연이 연일 회자되며 더욱 눈길을 끌었다. 민우혁은 거칠고 마초 같은 '태수' 캐릭터를 탁월한 연기력과 디테일한 감정선으로 완벽하게 표현해냄과 동시에 파워풀한 가창력으로 독보적인 존재감을 발휘했으며 온주완은 폭 넓은 연기 스펙트럼으로 내면에 여린 감성을 가지고 있는 '태수' 캐릭터를 섬세하게 그려낸 연기력에 서정적인 보컬이 더해지며 큰 박수 세례를 받았다. 또한 조형균은 눈빛부터 표정까지 '태수' 그 자체로 분해 강렬한 임팩트를 남겼으며 유려한 가창력이 극의 몰입도를 더욱 높이며 관객들을 작품 속에 빠져들게 만드는 저력을 보여줬다. '우석' 역에 최재웅은 작품을 촘촘하게 채워주는 밀도 높은 연기력과 따뜻한 보이스가 돋보이는 가창력으로 무대를 진중하고 카리스마 있게 장악했으며 송원근은 무게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와 깊이 있는 연기력으로 '우석'의 감정선을 흡인력 있게 그려내며 호평을 받았다. 남우현은 회를 거듭할수록 무르익은 연기력과 빈틈없는 탄탄한 가창력으로 뮤지컬 배우로서 입지를 굳히며 인정받았다. '혜린' 역에 박혜나는 심금을 울리는 절절한 감정 표현과 전율이 느껴지는 가창력으로 무대를 사로잡았으며 유리아는 관객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완벽한 캐릭터 해석력과 뛰어난 가창력으로 작품의 감동을 배가시켰다. 나하나는 맑은 목소리의 빼어난 가창력과 섬세한 연기력으로 내면의 단단함이 느껴지는 '혜린'을 보여주며 눈길을 끌었다. 또한 카리스마 넘치는 냉혈한 악역 '종도' 역으로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이율과 임정모, '윤회장' 역으로 작품의 축을 든든하게 지켜준 황만익과 정의욱, 새롭게 추가된 캐릭터로 작품의 메시지를 더욱 극대화시킨 '영진' 역에 송문선과 김수연, 뜨거운 열정의 에너지로 무대를 가득 채운 앙상블까지 모든 배역이 흠잡을 곳 없는 명품 연기로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뮤지컬 &<모래시계&>는 격동과 혼란의 시기를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낸 세 명의 인물을 통해 현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하며 성황리에 공연을 마쳤다. kykang@sbs.co.kr
윤계상X차혜영 부부, '억'소리 나는 결혼식…식대만 20만 원 윤계상X차혜영 부부, '억'소리 나는 결혼식…식대만 20만 원 등록일2022.06.17 [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배우 윤계상, 차혜영 부부의 '억'소리 나는 결혼식이 화제를 모았다. 지난 16일 방송된 KBS 2TV '연중 라이브'에서는 윤계상의 결혼식을 조명했다. 윤계상은 지난 9일 5세 연하의 뷰티 사업가 차혜영과 신라호텔 영빈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 장소는 배우 장동건 고소영 부부, 전지현, 이정현 등이 결혼식을 올린 곳이기도 하다. 이날 방송에 출연한 한 웨딩플래너는 윤계상씨가 결혼한 홀은 야외 웨딩 홀은 '꿈의 베뉴'로 불린다 라면서 대관료가 다른 식장의 3배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1인당 식대는 10만 원 후반~20만 원 후반대라 엄청 비싼 편이다. 기본 생화 장식이 2200만 원인데 2~3배 정도 더 들어갔을 것 같다 라고 말했다. 그는 윤계상 결혼식에 최소 1억 원 정도 들어가지 않았을까 싶다 라면서 이는 평균 예식의 5배 정도 라고 덧붙였다. 가요계와 영화계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윤계상답게 god, 마동석, 온주완, 이상엽, 김동욱, 임지연 등 수많은 연예인 동료가 결혼식을 찾았다. 이날 축사는 신부의 절친인 배우 정유미가 맡았으며 축가는 god가 불렀다.
[나이트라인 초대석] 무대로 옮겨진 '모래시계', 드라마와 차이점은? [나이트라인 초대석] 무대로 옮겨진 '모래시계', 드라마와 차이점은? 등록일2022.06.08 &<앵커&> 1995년 '귀가 시계'라 불리며 당시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 &<모래시계&>를 무대로 옮긴 작품입니다. 5년 만에 새롭게 돌아온 뮤지컬 &<모래시계&>의 두 주인공, 배우 온주완, 박혜나 씨 함께합니다. Q. 5년 만에 돌아온 작품…호평이 이어지는데? [박혜나/배우 : 이 작품을 더 좋게 하기 위해서 3년 동안 창작진들이 정말 심혈을 기울여서 만들었거든요. 그래서 더 잘 전달하고 싶은 욕심과 그리고 책임감이 따르는 작품이에요. 그래서 매 회 최선을 다해서 하고 있습니다.] Q. 무대에서 관객 보면 기분이 어떤지? [온주완/배우 : 이게 이제 함성과 박수 소리를 들으면, 공연을 다시 이렇게 하는 게 너무 자랑스럽고. 그분들 때문에 여기에 서 있는 거고, 이런 생각이 너무 감사하죠. 그래서 매 회 매 회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Q. 뮤지컬 '모래시계'…어떤 작품인가? [박혜나/배우 :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격동의 시대를 살아간 세 젊은이들의 삶과 사랑과 우정을 다룬 이야기인데요, 거기에 이제 좀 각색을 덧붙여서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물음표와 느낌표를 던져서 바통을 다시 넘겨요. 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우리는 이렇게 살았는데, 라는 주제를 담아서 펼쳐지는 대서사시 뮤지컬입니다.] Q. 당대 최고 인기 누렸던 원작…부담 없었나? [온주완/배우 : 제가 이 모래시계 태수를 연기를 함에 있어서, 최민수 선배님이 너무 한 획을 그으신 캐릭터잖아요. 그래서 남자로서 그리고 배우로서 굉장히 부담감이 조금 느껴졌었어요. 그런데 제가 표현하는 태수는 조금 더 인간적인, 연약함도 가지고 있을 줄 아는, 그리고 그런 저희가 3시간 안에 다 표현을 해야 되기 때문에 약함도 표현하고 그리고 친구와의 우정, 사랑도 표현해야 되고. 그래서 조금 세심한 감정 같은 거에 조금 저는 주력을 했던 것 같아요.] Q. 강인한 '혜린' 역할…연기하기 어땠는지? [박혜나/배우 : 사실은 요즘 시대가 점점 주체성을 가진 여자의 인물을 다루는 공연들이 많이 나와서 되게 여자 배우로서 기분이 너무 좋고요. 그리고 그 시대가 너무 어려웠었기 때문에 뭐랄까, 좀 연기를 하는 데 있어서 조금 책임감이 더 따르는 것 같아요. 그래서 아무래도 모래시계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사실 저희 뮤지컬은 또 다른 무대 공연으로 각색이 되었기 때문에 새로 주어진 대본 안에서 얼마나 많은 고민을 담아서 표현한 작가님과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무대 위에서 그림을 표현하고자 하는 연출님의 의도를 잘 파악해서 그 안에서 새로운 혜린의 모습을 보여드리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Q. 2006년에 뮤지컬 시작…기억에 남는 작품은? [박혜나/배우 : 아무래도 저에게 있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위키드라는 작품인데, 제가 그 당시만 해도 배우라는 직업이 좀 불확실성을 가진 직업이잖아요. 그래서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일이지만 이 좋아하는 일 끝까지 할 수 있을까라는 좀 미래에 대한 의심도 있었고 두려움도 있었는데 정말 어려웠던 그 순간에 저한테 선물같이 다가온 기회로 인해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이 직업을 끝까지 해도 되겠구나, 그리고 너무나 감사한 작품이잖아요, 저한테는. 많은 경험들을 해줄 수 있게 기회를 줬거든요. 그래서 더 감사하고 겸손한 배우로 성장하는 계기가 됐던 것 같아요.] Q. '무대'가 주는 매력이 있다면? [온주완/배우 : 매일 제 컨디션이 다르잖아요. 그래서 그 컨디션에 따라서 연기도 달라질 수 있고 소리도 달라질 수 있고 그리고 관객분들한테 전해줄 수 있는 감동이 달라질 수도 있는 거라서 그럴 때 매일매일 제가 발전이 되는 모습이 발견이 될 때가 있거든요. 그때 약간 카타르시스 같은 게 조금 이렇게 확 오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매력이 아닐까, 라이브의 매력이 아닐까.] Q. 앞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박혜나/배우 : 사실 계획이나 목표는 뚜렷하지 않아요. 하지만 하고 싶은 일은 저에게 다가오는 모든 작품들 매 회 최선을 다해서 그리고 어제보다 오늘이 더 나아지는 배우가 되는 것 그게 저의 욕심입니다.] [온주완/배우 : 저는 이 질문을 듣고 예전에, 제가 데뷔 19년 차인데, 신인 때를 생각을 해 봤어요. 그때는 내가 뭐라고 대답을 했을까. 그런데 잔향이 많이 남는 배우가 되자. 그러니까 어떤 캐릭터로서 굳혀지는 게 아니고 잠깐 스쳐 지나가더라도 사람들이 냄새를 기억할 때 어, 이 잔향은 뭐지라고 할 그런 기억이 되자, 라는 대답을 했었거든요. 그래서 지금도 변함없이 누군가가 온주완을 떠올렸을 때 아, 그 온주완이란 배우는 이런 향을 남겼구나. 그런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