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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찐리뷰] 살인자 김일곤, CCTV에 담긴 섬뜩한 미소…28명 죽이려 만든 충격의 '살생부'
등록일2025.04.11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10일 방송된 '김일곤의 살생부'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배우 임주환, 그룹 아이브 멤버 가을, 배우 박경혜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잘못된 만남 때는 2015년 7월, 어두컴컴한 저녁이야. 가로등도 없고, 인적도 드문 한 골목길에 중형차 한 대가 들어섰어. 운전자는 당시 20대 중반이었던 이성준(가명) 씨.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나오는데, 저 어둠 속에 까만 실루엣이 보여. 자세히 보니 한 남자가 서있어. 그런데, 그 사람 손에서 뭔가가 번쩍거려. 잘 보니, 칼이었어. 그 순간 골목엔, 정적만 흘러. 잠시 후, 성준 씨를 노려보던 그 남자가 입을 열었어. 내가 너, 죽여버릴 거야! 이게 무슨 상황일까? 성준 씨는 서울 영등포에서 가게를 운영하고 있어. 그의 가게는 술을 판매하는 노래방, 즉 노래주점이야. 그래서 보통 늦은 저녁 시간에 가게를 열어. 두 달 전인 5월 어느날 저녁, 성준 씨는 차를 몰고 출근을 하고 있었어. 골목으로 들어가 우회전을 하는데, 갑자기 오토바이 한 대가 차 앞으로 확! 끼어든 거야. 우회전을 하는데 그 틈으로 오토바이가 들어오는 바람에 사고가 날 뻔 했었어요. 그래서 경적을 두 번 울리고, 빨리 가라… 그러고 이제 주차를 했는데… -이성준(가명), 당사자 오토바이 운전자가 성준 씨를 쫓아온 거야. 오토바이 운전자는 40대 남성. 그런데 이 남자, 완전 막무가내야. 그냥 봤을 때 싸한 사람 있잖아요. 봤을 때 그냥 '위험하다'…눈을 뚫어져랴 쳐다보고, 그냥 욕설을 계속 해요. 반말을 하고 욕설이 오고 가다가… -이성준(가명), 당사자 성준 씨 말은 듣지도 않고, 이 오토바이 남자가 갑자기 막 욕을 퍼붓기 시작해. 야! 네가 먼저 길 막아 놓고, 왜 빵빵대고 난리야! 라면서. 성준 씨도 슬슬 열이 받기 시작했어. 결국 큰소리가 오갔고, 분위기는 아주 험악해졌어. 얼굴에다 손을 갖다 대면서 '뭐라 그랬어?' 하길래, '야, 뭐 할 거 아니면 그냥 가라' 그러고 무시했었어요. 근데 그 남자가 저를 잡아당기면서 팔에 상처가 생겼었어요. 손톱으로 긁히면서. 그래서 '이것도 폭력이야. 신고할 거야' 그래서 근방에 고깃집 사장님이 신고를 했어요. -이성준(가명), 당사자 이내 경찰이 도착했고, 둘은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어. 그 결과 성준 씨는 무혐의를 받았고, 그 오토바이 남자는 폭행죄로 벌금 50만 원을 내게 됐어. 성준 씨는 이때만 해도, 그냥 단순 해프닝으로 끝날 줄 알았어. 그런데 두 달 뒤, 성준 씨 앞에 그 남자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거야. 손에 칼을 쥔 채로. 다시 아까 그 때로 돌아가볼게. 칼을 든 남자를 마주한 성준 씨는 할 수 있으면 어디 한번 찔러보든가 라며 세게 나갔어. '할 수 있으면 해 봐라' 그렇게 된 거예요. 속으로는 겁 많이 먹었죠. 왜냐하면 흉기를 보면 달라져요 진짜로요. 근데 겁을 먹으면 죽거든요 그런 애들한테는. 기싸움이라는 게 있잖아요. -이성준(가명), 당사자 남자들만의 기세가 있잖아. 겁먹은 모습을 보여주면 안 되겠다 생각했대. 게다가 성준 씨, 대학생 때 운동선수였어. 그러니 몸이 다부졌어. 칼을 든 그 남자, 가만히 성준 씨를 보다가 이렇게 말해. 근데, 지금은 타이밍이 아니야. 그러더니 그대로 어둠 속으로 사라졌어. 그제야 긴장이 풀린 성준 씨는, 바로 경찰에 신고했어. 신변 보호 요청을 한 거야. 그 일이 있었던 이후, 성준 씨에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어. 하지만 그때만 해도 전혀 몰랐던 거야. 이 만남이, 앞으로 벌어질 끔찍한 일들의 서막이었다는 걸. ▲ 트렁크 살인사건 그리고 두 달이 더 흐른, 9월 11일. 장소는 서울 성동구의 한 빌라야. 오후 2시가 좀 넘은 시각, 조용했던 동네가 갑자기 발칵 뒤집혔어. 여기 불났어요! 라는 외침에,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뛰어 왔어. 빌라 1층 주차장에 있던 차에서 불이 나고 있었어. 흰색 SUV였는데, 차 안에서 불이 난 거야. 이 화재가 119 말고 또 신고가 접수된 곳이 있었어. 바로 경찰서. 성동경찰서 강력2팀 형사들이었어. '차가 불에 타고 있다' 이런 신고를 받게 됐거든요. 그런데 바로 옆에 인접 경찰서에서 한 10분, 15분 간격으로 계속 '흰색 SUV 차량이 뺑소니를 하고 있다'…근데 차가 또 SUV라고 하니까, 연관성이 있지 않나. '혹시 그 차 아닌가?' 했죠. -유태권,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뺑소니 차량에 대한 신고를 받았는데, 뒤에 또 화재 차량 신고가 들어온 거야. 근데 이 뺑소니 차량과 화재 차량, 모두 흰색 SUV야. 형사들은 서둘러 현장으로 갔어. 먼저 도착한 소방대원들이 화재를 진압하고 있었어. 그런데 이 차량 트렁크 안에 부탄가스통이 널브러져 있어. 그것도 세 개나. 그리고 기름 냄새도 나. 화재 원인은 트렁크 쪽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지른 것으로 확인이 됐어요. 누군가 고의적으로 방화를 했다… -김권익,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불이 다 꺼지자, 형사들은 차의 번호판을 확인했는데, 뺑소니로 수배됐던 그 차가 맞았어. 그런데 그때, 한 소방대원이 막 형사님! 여기 좀 빨리 보세요! 라며 소리를 질러. 이 외침과 함께, 이 사건의 진짜 정체가 드러났어. 깨진 차량 뒤 창문으로 보니까, 골판지 밑에 마네킹 비슷하게 형체가 있어 가지고. 이게 과연 사람인지 아니면 마네킹인지 확인을 해야겠더라고요. 그래서 먼저 손을 집어넣는 순간, 왠지 좀 머리가 서는 느낌. 막 촉촉한 그런 느낌이 들더라고요. 막 머리가 서고 굉장히 나쁜 그런 기분, 그런 느낌이 들었거든요. 아 이거 사람이구나… 생각이 딱 그렇게 들었습니다. -유태권,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트렁크에서 여성의 시신이 발견된 거야. 단순 뺑소니인 줄 알았던 게, 방화이자 살인사건이었던 거야. 근데 시신을 확인한 형사들은, 다시 한번 충격에 빠졌어. 그 위에 골판지가 덮여 있었고, 그래서 골판지를 드러내고 그 다음에 사체를 확인했는데. 보통 살아있는 사람이라든가 방금 죽은 사람은 피가 돌기 때문에 대부분 빨갛잖아요. 근데 거의 마네킹처럼 하�R어요. 핏기가 거의 없었으니까. -유태권,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제일 충격적인 게, 시체 훼손된 걸 보고 나서는 너무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너무 심하게 훼손이 됐기 때문에. '와 이건 진짜 큰일이다' 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어요. -김권익,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여러 강력 사건을 맡았던 형사들도, 이런 시신은 처음 봤어. 그만큼 잔인하게 훼손됐던 거야. 이 잔인하고 엽기적인 '트렁크 살인사건'은 그해 9월, 전국을 충격에 몰아 넣었어. ▲ 범인의 정체 형사들은 먼저 차 주인부터 확인해봤어. 불 탄 SUV는 죽은 여성의 차량이었어. 피해자는 30대 중반의 여성. 사인은 경부 압박 질식사. 목이 졸려서 살해당했다는 거야. 이후 범인은 시신을 잔인하게 훼손한 거지. 형사들은 피해자의 주소를 확인했는데, 피해자의 집이 천안이었어. 그러니까 천안에 사는 사람이 서울 한복판에서, 그것도 본인의 차에서 사망한 채 발견된 거야. 형사들은 피해 차량의 행적을 조사했는데, 좀 이상해. 천안에서 서울까지 오는데 이틀이 걸렸고, 그 사이에 경주, 울진, 포항, 강원도까지 전국을 돌아 다녔어. 차가 전국을 돌기 전에, 마지막으로 있던 곳은 충남 아산의 한 대형마트였어. 형사들은 해당 마트의 CCTV를 확인했어. 그런데 마트 주차장에 있는 CCTV에 이런 장면이 찍혀 있었어. 피해자가 차로 걸어가고, 운전석 문을 열어 차에 탔어. 10초 후, 다시 운전석 문이 열리고, 약 30초가 더 지난 뒤, 문이 닫혀. 그리고 와이퍼가 왔다갔다 움직이더니, 다시 3분이 지나. 그후 차는 출발하고, 그렇게 피해자의 SUV는 범인과 함께 사라졌어. 그리고 이틀 뒤, 서울 한복판에서 차량 주인이 살해된 채 발견됐어. 심지어 사체 훼손 정도도 매우 잔인해. 그리고 기름, 부탄가스를 이용해 모든 걸 다 불태우려 했어. 이 범인은, 어떤 사람일까? 시신의 상태나 뭐 이런 걸 볼 때는, 원한 아니면 사이코패스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이제 관련자들을 수사했는데 혐의점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유태권,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빌라 CCTV를 확인했는데, 그 중에서 특이하게 빌라를 바라보면서 살피는 남자가 있다… -김권익,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차량 화재 사건이 발생한 빌라 주변의 CCTV도 확인했어. 화재사건 당일, 흰색 SUV 차량이 빌라로 향해. 그리고 빌라 CCTV에 포착된 한 남성. 빌라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빌라 현관을 맴돌아. 잠시 후 SUV 차량 내부에 불이 붙고, 남자는 이를 멀리서 지켜봐. 불타는 SUV를 재차 확인하더니, 심지어 미소까지 지어. 범죄 개연성이 엄청 많았죠. 범죄 용의자로서 특정했죠 바로. -유태권,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CCTV에 용의자의 모습이 찍혔으니, 이제 잡는 건 시간 문제일까? 그런데, 그렇지 않아. CCTV 얼굴만 보곤, 이름도 나이도 알 수 없잖아. 이 남자가 누군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그런데 CCTV에서 아주 결정적인 장면이 포착됐어. 이 남자, 아주 큰 실수를 저질렀거든. 바로 이 장면이야. 남자가 빌라 문에 손을 댔을 때, 지문이 남았던 거야. 이 지문을 통해, 곧 이 남자의 정체가 밝혀졌어. 48세, 김 씨였어. 그는 과연 피해 여성과 무슨 사이였을까? 이 사람하고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 그 부분을 찾기 위해서 저희들이 계속 수사를 했었는데 그 부분을 찾지를 못했었고.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을 왜 그랬을까, 저희도 굉장히 의문이 많았습니다 그 당시에. -김권익,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전혀 일면식이 없는 사이입니다. 처음 보는 사이입니다. -유태권,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일면식도 없는, 생판 모르는 사람이었던 거야.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어. 김 씨가, 다른 사건으로 이미 수배 중인 거야. 2주 전에, 경기도 일산에서 똑같은 범행을 했던 거야. 마트에서 장을 보고 차에 타는 여성을 쫓아가서, 칼을 들고 위협하면서 납치하려 했대. 다행히 그때 피해 여성이 도망쳐서, 납치 미수 사건이 된 거야. 그걸 파악을 했을 때, 같이 했던 형사들은 다 멘붕이 된 거죠. 김 씨가 실패했기 때문에 또 다른 또 피해자를 노릴 수 있다, 그 전에 잡아야 된다, 이런 강박 관념이 많이 생겼죠. -유태권,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이 위험한 인물, 한시라도 빨리 잡아야 해. ▲ 김 씨의 흔적을 찾아라 형사들은 사건 현장인 빌라 근처 CCTV로 김 씨의 행적을 쫓았어. 보니까 사건 직후, 택시를 타고 빌라 근처에 있는 한 대형마트에 갔어. 마트에서 옷을 사서, 갈아입고 도주한 거야. 문제는, 이 뒤부터 행적을 쫓는 게 쉽지 않아. 10년 전이라, 지금처럼 CCTV가 많이 없었던 거야. 군자동 쪽에서 짜장면 먹은 것까지도 저희가 다 확인했었는데. 거기에서 행적이 안 잡혀 가지고 좀 어려움이 많이 있었습니다. -김권익,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형사들은 김 씨의 거주지로 갔어. 근데, 짐까지 싹 다 없어. 김 씨가 자신을 추적할 증거를 없애고 있는 거야. 형사들은 휴대전화 위치를 추적했어. 근데 위치가 안 나와. 진작에 전원을 꺼놓은 거야. 형사들이 이번엔 신용카드를 확인했어. 아까 마트에서 옷도 샀잖아. 근데, 범행 후 사용 내역이 전혀 없어. 현금만 쓰고 있는 거야. CCTV, 휴대전화, 신용카드… 그 어떤 방법으로도 추적 불가야. 김 씨 명의로 된 차량을 한 대 확인했어. 마침 그 차는 서울에 있는 한 자동차 정비소에 있었어. 근데 가서 보니까 정비소 직원이 차를 맡긴 지 한 달이 다 돼 가는데, 찾아 가지도 않고 연락도 안 된다 라고 하소연해. 김 씨가 차까지 버리고 도망간 거야. 김 씨, 마치 수사 진행상황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아주 교묘하고 철두철미하게 형사들의 추적을 따돌리고 있어. 제가 볼 때 평범한 사람의 패턴이 아니었어요. 쓰던 휴대폰 버리고 현금만 사용하고 걸어서 범행을 하고. 일반 통신 수사라든가 이런 게 전혀 그 작용을 할 수가 없었죠. -유태권,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이건, 김 씨가 저지른 전과들이야. 무려 전과 22범이었어. 교통법규 위반부터 강도, 상해까지. 범죄 종류가 다양해. 게다가 재판을 받은 법원이 전국 곳곳이야. 최초 범죄는 1984년도. 감방 생활만 20년 가까이 했어. 그가 형사들의 추적을 잘 피하는 이유, 이제 알겠지? 범죄 베테랑인 거야. 형사들은 김 씨의 가족들도 찾아봤어. 근데 가족들과도 연을 끊은 지 오래야. 최근엔 한 유통회사에서 식자재 배달일을 했는데, 동료들 말로는 평소에 남들과 교류도 거의 없었대. 그럼 이제 김 씨를 찾을 방법, 뭐가 있을까?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는데, 작은 단서조차 나오지 않아. 분명 어딘가에서 또 다른 범죄를 노리고 있을 거란 말이야. 그래서 형사들은 이 방법을 쓰기로 했어. 공개 수배를 한 거야. 이름, 김일곤. 나이 48세. 이렇게 트렁크 살인사건의 범인, 김일곤의 이름과 얼굴이 전국에 공개됐어. ▲ 김일곤 공개수배 그런데 그 시각, 누군가의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어. 이 전화를 받은 사람은, 성준 씨였어. 이성준 씨, 저 그때 폭행 사건 담당했던 경찰입니다. 당분간 외출 삼가시고요,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신고하셔야 합니다. 처음에 성준 씨에게 시비를 걸었던 그 오토바이 남자, 칼을 들고 죽이겠다고 한 그 남자. 그가 바로 김일곤이었던 거야. '그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도망간 상태고 뭐 공개 수배를 한다'고 그러더라고요. 그 때 알게 된 거예요. TV를 봤는데 그 사람이 나오니까, 이제 현실 직시가 되는 거죠. 그래서 제가 아마 그 사람 잡힐 때까지, 지인 집인가 호텔인가에서 아마 잤을 거예요. -이성준(가명), 당사자 사실, 김일곤이 칼을 들고 성준 씨를 찾아가기 전부터, 계속 이상한 일이 일어났었대. 하루는 옆 가게 사장이 성준 씨에게 이런 말을 하더라는 거야. 지난주부터 차 한 대가 성준 씨를 계속 쫓아다니는 것 같더라고. 내 착각일 수도 있는데, 혹시나 하고. 어느 날은, 성준 씨에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어. 받으니까, 이러더라는 거야. 야! 너 나 기억나지? 내가 너 찾아가서 죽여버릴 거야! 김일곤이었어. 근데 그는 어떻게 성준 씨 전화번호를 알아냈을까? 서로 연락처를 모르잖아요. 제가 '전화번호 어떻게 알아냈냐' 물어봤더니 주소랑 다 알아냈대요. 집을 알고 있어요. 주소를 물어보니까, 알아요. '네가 날 어떻게 죽일 건데?' 그때 했던 얘기가, 휘발유를 뿌린대요. 염산을 갖다 뿌린다 그래서, 인터넷에 검색을 해 보니까, 닿자마자 녹는대요 얼굴이. 그게 엄청 불안했죠 진짜. -이성준(가명), 당사자 성동경찰서에는 긴급하게 수사본부가 차려졌어. 형사들은 몇 날 며칠 집에 가지도 못하고 김일곤 검거 작전에만 매달렸어. 그러다 납치사건 발생 9일째인 2015년 9월 17일. 수사본부에 갑자기 무전이 울렸어. 성수동의 한 동물병원에서 강도 사건이 발생했다는 신고야. 한 남자가 병원에 와서 안락사 약을 달라고 하더래. 개를 안락사시키고 싶다고 얘기했는데, 개가 크다는 거예요. 아니 개도 안 데리고 오고 무슨 일인지 알겠어요? 우리는 '안 된다 약도 없고 줄 수도 없다. 가봐라'고 했어요. -동물병원 관계자 그리고 잠시 후, 이 남자가 칼을 들고 나타나 난동을 부렸다는 거야. 이 신고 내용을 들은 형사들은 촉이 딱 왔어. 직감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다 튀어 나갔어요. 진짜 제일 빨리 어떻게 그렇게 다 튀어 나갔는지. 굉장히 빨리 갔었어요 -김권익,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그 시각, 마침 인근 지구대 경찰 두 명이 그 동물병원 근처를 순찰하고 있었어. 그런 그들의 눈에 한 수상한 남자가 포착됐어. 순찰차를 보더니, 막 머뭇거리면서 피하는 거야. 근데 자세히 보니까 저 얼굴, 낯이 익어. 공개 수배된 그 얼굴이야. 지구대원이 차에서 내려서, 남자에게 다가갔어. 야 너, 김일곤이지? 김일곤은 칼을 꺼냈고, 경찰들과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어. 지나가던 시민들도 합세했고, 결국 남자의 손에 수갑을 채웠어. 드디어 김일곤이 잡힌 거야. ▲ 난 더 살아야 해 김일곤은 수사본부로 압송됐어. 봉고차에 내려서 취재진 앞에 선 김일곤은 이렇게 말했어. 난 잘못한 게 없습니다, 잘못한 게 없어요 난! 난 더 살아야 해... 난 잘못한 게 없고, 나는 더 앞으로 살아야 된다고. -김일곤 김일곤이 반복한 나는 더 살아야 한다 는 말. 이 말을 잘 기억해 봐. 누구도 상상치 못한, 아주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질 거야. 곧바로 김일곤 조사가 시작됐어. 김일곤은 경찰서 안에서 어찌나 난리를 치는지, 조사 자체를 못 할 정도야. 맨 처음에는 일체 진술을 거부했죠. 막 통제가 안 될 정도로 자기 행동을 하려고 했었고. -유태권,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내가 뭘 잘못했냐 고 소리치며 정상적인 대화조차 불가능한 상황이야. 어찌나 난리를 치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어. 형사들은 일단 김일곤을 차분히 달래기로 해. 알았으니까, 우리 밥부터 먹고 하자. 너 그동안 밥도 제대로 못 먹었을 거 아냐, 먹고 싶은 거 다 말해봐 라고 하자 김일곤은 그럼 나는 짜장면으로 시켜주쇼. 이왕이면 두 그릇으로 라고 말했어. 형사들은 짜장면 두 그릇을 시켜줬어. 쉽게 말하면 좀 비위 맞춰주는, 밉지만 정말 안 해주고 싶지만. 뭐 이런 역할도 어쩔 수 없이 할 수 있는. 왜냐하면 저희는 얘 진술을 끌어내야 하기 때문에. -김권익,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천천히 라포를 형성하며, 하나씩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어. 너 먹고 사느라 많이 힘들었지? 너 고생 엄청 하는 거, 내가 다 안다. 아니 그래서, 이번엔 뭐가 널 그렇게 힘들 게 한 거야? 라며 살살 달래자, 김일곤은 이렇게 말했어. 하아… 형사님, 저 담배 하나만 주십쇼. 보통 범인들이 자백을 하기 전에 공통적으로 하는 행동이 있대. 첫 번째, 한숨을 쉬어. 그리고 두 번째, 담배를 달라고 해. 이 자백의 시그널만 나오면 끝나는 거야. 김일곤이, 형사에게 자백을 하기 시작해. ▲ 사건의 전말 김일곤의 자백을 따라, 처음 사건이 발생했던 그때로 돌아가 볼게. 9월 9일, 처음 사건이 발생했던 아산의 한 대형 마트야. 피해 여성이 납치되기 전, 김일곤은 마트 주차장을 돌아다니면서 범행 상대를 물색했어. 그러던 그의 눈에, 피해 여성이 들어왔어. 장을 본 피해자가 차로 이동해. 그때 김일곤은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여성을 뒤따라 가. 여성이 차에 짐을 싣고, 마트의 카트를 원위치하러 가는 모습을, 김일곤은 멀리서 숨어 지켜봐. 피해자가 돌아오자, 김일곤도 움직이기 시작했어. 피해자가 차에 타서 시동을 걸자 마자, 김일곤은 운전석 문을 벌컥 열었어. 소리 지르면 죽는다. 지금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흉기로 위협하며, 김일곤은 피해자를 조수석에 앉혔어. 그리고 자신은 운전석에 앉았어. 마트 주차장에서 벌어진 일인데, 이를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그렇게 운전대를 잡은 김일곤은 마트를 유유히 빠져나갔어. 얼마쯤 달렸을까. 흉기 앞에서 꼼짝 못 하고 끌려가던 피해 여성이,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했어. 김일곤은 근처 공터에 차를 세웠고, 피해 여성은 밖으로 나와 볼일을 보는 척 했어. 그리고 그 때, 살려주세요! 사람 살려! 외치며 온 힘을 다해 달아나기 시작했어. 하지만 뒤따라온 김일곤에게 다시 잡히고 말았어. 그리고 다시 차에 갇혔어. 이때 김일곤이 화가 나서, 피해 여성을 살해했어. 그런데도 분이 풀리지 않아서, 김일곤은 시신을 차 트렁크에 옮겨 잔인하게 훼손했어. 그리고 시신이 있는 차를 몰고, 이틀 동안 전국을 돌아다녔어. 시신을 유기할 곳을 찾아다닌 거지. 그러다 서울로 왔어. 그런데 여기서, 뜻밖의 사고를 쳐. 처음 형사들이 무전으로 들었던 그 뺑소니 사고야. 트렁크에 시신이 있잖아. 사고 처리고 뭐고, 그냥 도망갈 수밖에 없었던 거지. 멀리 도망갈 수는 없다는 걸 직감한 김일곤은 증거 인멸을 위해 근처 빌라에서 차에 불을 지른 거야. 그럼 대체 김일곤은 왜 일면식도 없던 여성을 납치한 걸까. 그가 말하는 범행동기가, 기가 막혀. 영등포에서 시비가 돼서 폭행 사건이 있었는데, 상대방은 무죄가 나왔고 자기는 벌금 50만 원이 나온 거죠. 이 부분이 자기는 억울했던 겁니다. -김권익,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내가 저놈을 한번 손을 봐야 하는데 방법이 없을까 생각한 게, (노래주점에서 일할) 접대부를 소개시킨다는 명목으로 나오게 해서 아마 범행을 하려고 했던 부분 같아요. 그래서 필요한 도구가 여자였고. -유태권,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성준 씨 폭행 사건을 얘기하는 거야. 아까 김일곤이 벌금 50만 원을 내야 했잖아? 그게 너무 억울해서, 성준 씨를 죽이려고 했다는 거야. 성준 씨가 노래주점을 운영했잖아. 여자를 납치해서, 노래방 도우미로 위장시킨 뒤, 성준 씨를 유인하려고 한 거야. 여자한테 성준 씨네 가게에서 일하겠다고 약속을 잡게 한 뒤, 성준 씨가 약속 장소에 나왔을 때 죽이겠다는 시나리오를 짠 거지. 이 허무맹랑한 복수극을, 김일곤은 진짜로 실행하려 했어. 일산에서 있었던 납치 미수 사건, 기억나지? 그게 바로 첫 번째 시도였던 거야. 그때 실패하고, 아산까지 가서 다시 납치사건을 벌였던 거지. 서울에서 전철 타고 천안까지 가서. (아산에서) 먼저 범행 대상이라든가 범행 장소를 물색을 했었죠. 그리고 4일 후에 가서 범행을 한 거고. -유태권,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김일곤 말로는, 처음엔 피해 여성을 죽일 생각은 없었대. 성준 씨를 죽이고 나면, 풀어주려 했다는 거야. 그럼, 왜 피해 여성을 잔혹하게 살인한 걸까. 피해 여성이 달아났다가 다시 잡혔잖아? 차에 다시 강제로 타게 된 피해 여성이, 계속 창문을 두드리면서 살려달라고 소리쳤대. 만약 누군가 이걸 보고 신고라도 할 까봐, 그럼 성준 씨한테 복수도 못 하고 잡힐 수 있으니까. 복수 계획이 틀어질까 미친듯이 화가 나서 살해했다는 거야. 그리고 시신을 잔인하게 훼손했어. ▲ 김일곤의 살생부 그런데, 여기서 더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났어. 처음 김일곤이 검거됐을 때 몸을 수색했거든? 그때 칼 두 자루와 함께, 주머니에서 이런 게 발견됐어. 28명의 사람들 이름이 쭉 적혀 있는 종이야. 성준 씨 이름도 있어. 바로, 살생부였어. 김일곤이 죽이려던 사람, 성준 씨 뿐만이 아니었던 거야. 그래서 그걸 한번 물어봤어요. '이게 다 과연 뭐냐' 그랬더니, 자기를 재판한 판사, 자기를 입건한 형사, 그리고 자기하고 시비 붙었던 업주. 그 다음에 나를 무시했던 간호사, 나한테 혜택을 안 준 동사무소 직원. 다 자기가 손을 봐야 될 죽여야 될 사람이라고 그러더라고요. 경찰에 와서 자백한 거죠. 그게 살생부라고. 섬�하죠. 자기가 죽일 사람의 명단을 갖고 다닌다는 것은. -유태권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김일곤은 이 살생부를 보면서 이것들을 다 죽여야 하는데 라고 중얼거렸대. 아까 김일곤이 잡혔을 때 했던 나는 더 살아야 한다 고 했던 그 말. 이제 무슨 뜻인지 알겠어? 더 살아서, 이 사람들을 다 죽여야 한다는 거야. 근데 좀 이상한 거 없어? 이 살생부, 이름만 있는 게 아냐. 어떤 사람들은 전화번호와 주소, 직장, 심지어 주민등록번호까지 적혀있어. 김일곤은 대체 이런 정보를 어떻게 알았을까? 피고인이 체포 당시 소지하고 있던 메모지에는 A 및 폭행 사건의 목격자 등의 인적사항이 기재되어 있음. 피고인은 위 폭행 사건 기록을 법원에서 열람, 등사하여 A 및 사건 목격자들 인적사항을 확보함. 소송 당사자의 경우, 법원에 요청을 하면 사건 기록을 열람할 수 있어. 재판이 끝난 사건은, 개인정보 보호 규정에 의해 인적사항이 비공개처리 돼. 그런데 재판 중인 사건은, 그 규정이 적용되지 않아. 전과 22범인 김일곤은 이 점을 알고 있었어. 그래서 폭행 사건 재판 때 성준 씨의 전화번호와 주소도 알아낸 거지. 심지어 당시 사건 목격자, 참고인의 인적 사항까지 알고 있었어. 연쇄살인마를 꿈꾸던 김일곤. 그는 납치, 살인, 사체 훼손 등 그 어떤 범죄도 주저하지 않았어. 게다가 피해 여성과 전혀 일면식도 없고, 살해 동기 역시 납득이 안돼. 사체 훼손 정도도 매우 잔인해. 그런데 면담하는 내내, 김일곤은 이렇게 말했대. 저는 그동안 너무 억울하게 살았어요. 항상 무시당하고, 불이익만 받았다니까요. 베테랑 형사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뻔뻔한 태도였어. 이걸 정말, 답이 안 나왔죠. 진짜 답이 없는 얘기를 하는데, 인간으로서 저렇게까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과연 또 있을까… -김권익,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결국 형사들은 프로파일러를 투입 시켰어. 당시 김일곤을 면담한 프로파일러의 이야기를 들어볼게. 김일곤은 체계적이지도 않고, 패턴도 없이 짐작할 수 없는 아주 위험한 사이코패스 성향을 가진 살인범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사이코패스다'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살생부를 확보를 해서 검토를 했을 때도 구체적으로 '이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의 직업' 또 '거주지'. '어떤 방식으로 나한테 해를 끼쳤는지'를 꼼꼼하게 메모를 해놨었기 때문에. 그렇다면 이 사람이 갖고 있는 이 대상자에 대한 분노는 갑작스럽게 생겨난 것이 아니고, 오랫동안 형성되어 온 것이고, 이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지 못한 것이 결국은 쌓이고 쌓여서 이 임계점에 도달하지 않았을까. -권일용, 당시 담당 프로파일러 경찰 조사를 받고 나온 김일곤은 취재진한테 이렇게 말했어. 제가 영등포 폭행 사건 때 피해자였는데, 가해자로 돼서 벌금 50 만 원을 받았어요. OOO이 그놈으로 인해서 내가, OOO이를 죽이기 위해서 내가 이렇게 된 겁니다! ▲ 끝까지 반성은 없었다 얼마 뒤, 김일곤 재판이 시작됐어. 어떤 혐의들이 적용됐을까? 강도 살인, 특수강도미수, 일반자동차방화, 살인 예비, 자동차관리법위반, 사체손괴, 절도, 공기호부정사용, 부정사용공기호행사, 도로교통법위반, 특수공무집행방해, 특수강도,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 혐의만 13개야. 재판장에서 그는, 고개를 꼿꼿이 들고 있었어. 그러면서 이런 말들을 했어. 저는 정말 억울합니다. 제 억울함을 밝히는 게 고인을 위하는 길 같습니다. 어떻게 감히, 고인을 언급할 수 있는지. 하도 이러니까 한 번은, 판사가 이렇게 말했어. 피고, 그냥 시간을 드릴 테니까, 하고 싶은 말 다 하세요 라고. 그러자 김일곤은 이렇게 말했어. 제가 비록 전과는 많지만, 그 사건에선 제가 피해자였습니다. 그러나 법은 제 편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은 항상 저에게만 불리한 거 같아요. 이런 얘기를 무려 1시간 반이 넘도록 했대. 2016년 6월 3일, 김일곤의 선고 날이야. 선고가 나기 직전, 김일곤이 갑자기 소리쳤어. 잠시만요 재판장님! 꼭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저에게 5분만 시간을 주십시오. 판사가 허락하자, 김일곤이 말을 시작했어. 말할 수 있는 시간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형 선고가 내려질 거라고 짐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를 음해하고 모함한 놈들이 계속 잘 먹고 잘 산다면, 이건 죽은 분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겁니다. 끝까지, 반성은 없었어. 그리고 곧, 선고가 내려졌어. 주문, 피고인을 무기징역에 처한다. 그러자 김일곤이 다시 소리치기 시작했어. 잠깐만요! 그렇게 다들 저를 모함하고 음해했으면 사형 주려고 했던 거 아닙니까? 그냥 사형 주세요! 검찰의 항소로 이어진 2심 재판에서 김일곤은 결국 무기징역이 확정됐어. 사건이 있고 10년이 지났어. 살생부에 적힌 사람 중, 실제 살해를 당한 사람은 없어. 하지만 성준 씨는 아직도 그때의 트라우마를 지우지 못하고 있어. 이따금씩 생각이 나요. 뭐 한 달에 그냥 이렇게 멍하니 TV 보다가 살인사건이 나오면 불안한 거예요. 그 생각이 나요. 어쩔 수가 없어요 트라우마 때문에. 꿈도 엄청 꿨어요. 김일곤 나오는 꿈 꾸고. 꿈에서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는데 받으니까, 어떻게 해서 법이 바뀌어서 김일곤이 특사로 막 풀려났대요. 미쳐요 미쳐. -이성준(가명), 당사자 이제는 전과 23범이 된 무기수 김일곤. 무기징역은 말 그대로, 정해진 수감 기간이 없다는 뜻이야. 일정 기간이 지나면 법적 절차에 따라 가석방 대상이 될 수도 있어. 하지만 김일곤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어. 그가 우리 사회로 다시 돌아올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고. 아마 지금도 좁디좁은 감옥에서, 왜곡된 억울함에 사로잡혀서 괴롭게 지내고 있을 거라고. 그 뒤에도 개인정보 유출로 인한 크고 작은 사건들은 계속 발생했어. 2018년엔 성폭행 가해자에게 피해자의 인적사항이 적힌 판결문이 송달된 사건이 발생했고, 작년엔 가해자가 피해자의 주소를 알아내 구치소에서 편지를 보내 2차 가해를 벌인 일도 있었어. 피해자의 권리만큼, 피의자의 방어권도 중요하기 때문에 이를 제지할 제도를 만드는 게 쉽지 않대. 아직 이걸 해결할 답은 명확하게 나오진 않았어. 그리고 우린 이거 때문에 언제 어디서든 위험에 노출될 수 있어. 안전하고 평온한 세상에서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다는 것. 이건 꼭 지켜야 할 중요한 가치가 아닐까.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
백상예술대상 후보 공개됐다…'최우수연기상' 후보 보니
등록일2025.04.08
대중문화 종합 예술 시상식인 백상예술대상이 다음 달 5일 열립니다. 시상식 측은 어제(7일) 방송과 영화, 연극 부문의 후보들을 공개했습니다. 이번 백상예술대상에선 지난해 4월부터 지난달까지 방영되거나 공개된 작품들을 심사합니다. 먼저 영화 작품상에는 '대도시의 사랑법'과 '전, 란', '하얼빈' 등이 후보작으로 선정됐습니다. 최고의 열연을 보여준 배우들을 선정하는 최우수연기상은 치열한 논의 끝에 후보들이 결정됐습니다. 승부의 이병헌 씨와 파일럿의 조정석, 하얼빈의 현빈 씨 등이 남자 최우수연기상 후보에 올랐고, 대도시의 사랑법의 김고은, 검은 수녀들의 송혜교 씨 등이 여자 최우수연기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드라마 부문에선 박보검, 주지훈, 한석규, 고민시, 아이유, 장나라 씨 등이 최우수연기상 트로피를 놓고 경쟁합니다. 또, 예능상 후보로는 방송인 김원훈, 유재석, 이수지, 장도연 씨 등이 각각 올라 있습니다.
[꼬꼬무 찐리뷰 ]임신하면 낙태 시키고, 죽으면 시체 해부까지…'비극의 섬' 소록도의 진실
등록일2025.04.06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3일 방송된 '낙인-아이를 가질 수 없는 섬'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배우 서영희, 배우 최원영, 가수 청하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금단의 장소에 있는 유리병 오늘은 사진 한 장 보여주면서 시작할게. 아이들이 일렬로 나란히 서 있는 사진이야. 이 아이들, 지금 뭘 하는 걸까? 이 사진은 엄청난 이야기를 담고 있어. 이 아이들이 있는 이 곳, 대체 어떤 곳일까 궁금하지? 그곳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들려줄게. 때는 1996년.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한 남자가 친한 형님, 동생들을 만나 아주 신이 났어. 제대로 술판이 벌어졌지. 그러다 술에 취해 깜빡 잠이 들었는데,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깬 남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꼭 해야 할 일이 생각났거든. 그 밤에, 대체 무슨 일이었을까? 술을 얼마나 마셨냐면 소주 너홉 들이를 갖다가 세 명이서 두 병을 마시고 갯벌에 가 가지고 조개 잡고, 바지락 잡고 야단블루스를 췄어요. 그걸 다 마시고 새벽에 딱 깨어났는데, 갑자기 이상하지. 새벽이었는데, 이걸 갖다가 사진을 찍었다는 이야기예요. -이창호(가명), 고향을 찾은 남자 남자는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에서 사진으로 꼭 남기고 싶은 게 있었어. 비몽사몽 술기운에 카메라를 챙겨 집을 나서. 깜깜한 밤, 파도 소리만 철썩철썩. 달빛에 의지해, 기억 속의 그곳을 향해 걸어갔어. 도착한 곳은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한 건물 앞이야. 남자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좌우를 살펴. 사람들 눈에 띄면 안 되거든. 조심스럽게 출입문을 미는데, 어라? 문이 열려.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그토록 카메라에 담고 싶던 그것에 렌즈를 대고 찰칵! 셔터를 눌렀어. 남자가 찍고 싶었다는 사진, 뭐였을지 궁금하지? 그런데 이 사진, 많이 충격적일 수 있어. 하지만 오늘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너무도 중요한 사진이야. 마음의 준비를 하고 봐. 유리병 안에 담긴 건, 태아야. 포르말린 용액에 담긴 태아의 표본. 팔, 다리, 손가락, 발가락, 신체가 온전히 형성돼 있어서 출생 시기가 거의 다 된 걸로 보여. 어떤 유리병엔 여러 태아가 한데 쌓여있기도 해. 태아 표본이 있는 이 붉은 벽돌 건물은 대체 어디일까? 사실, 현장엔 태아 외에도 또 다른 인체 부위 표본들이 있었어. 사람의 뇌나 간, 손이나 장기가 담긴 유리병이 한쪽 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거야. 표본이 담긴 유리병의 개수는 총 122개. 그중 14개의 유리병에 태아가 담겨 있어. 사진을 찍은 남자는 자라면서 내내 이곳이 궁금했어. 어릴 때, 아이들은 가지 못하게 하는 금단의 장소였거든. 나는 그때 초등학교 3학년인가 4학년인가 됐었어. 나처럼 호기심 많은 소년이 거기 가서 이제 심심하니까 어느 날 이걸 들여다본 거야. -이창호(가명), 표본 사진을 찍은 남자 세상 궁금한 게 많던 10살 소년 시절의 어느 날, 기회가 왔어.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슬금슬금 붉은 벽돌 건물로 다가갔는데, 마침 창문을 가렸던 창호지가 살짝 찢어져 있는 거야. 어린 소년은 창문에 눈을 바짝 갖다 댔지. 그리고 으악! 저게 뭐야!!! 소년은 건물의 비밀을 목격한 순간, 깜짝 놀라서 줄행랑을 쳤어. 그리고 어른들에게 가서 물었지. 쉿! 너 어디 가서 너 본 거 얘기하면 큰일난다. 못 본 걸로 해라! 어른들은 못 본 척 하라 했어. 그렇게 묻은 비밀, 살면서 내내 남아있던 잔상. 이건 뭔가 잘못된 거라는 걸 깨달은 소년은 비밀을 묻고 20년 후, 어른이 되어 찾아가 카메라에 담은 거야. 남자가 찾아간 곳은 어디이고, 그가 살았던 마을은 대체 어떤 곳일까. 지도에서 보여줄게. 이곳은 소록도. 혹시 들어본 적 있어? 전라남도 고흥군 녹동항을 마주하고 있는 작은 섬이야. 정부에 의해 외부인의 출입은 금지된 채, 한센병 환자들만 격리돼서 살았던 섬이야. 혹시 '한센병'이라고 알아? 한센병은 과거에 '나병'이라고 불리기도 했지. 한센병균 혹은 나균이 피부나 말초 신경계를 침범해서 조직을 변형시키는 전염병이야. 이 병에 걸리면 피부에 넓게 붉은 반점이 생기고, 손가락과 발가락 감각이 무뎌지면서 떨어져 나가기도 해. 얼굴과 손발 등 외모에 변형이 일어나기 때문에, 사람들은 한센병 환자들을 '문둥이'라고 부르며 노골적으로 꺼리는 경우가 많았어. 그런데 한센병 환자들이 사는 소록도에 왜, 태아 표본이 있는 걸까? 20년 만에 용기를 내어, 금단의 문을 열고 들어간 남자는 더욱 마음이 무거워졌어. 포르말린하고 그 사이에서 이게(용액이) 막 줄줄 흘렀어. 내가 이제 사진을 찍고 나서 했던 일이, 이 뚜껑을 열었어요. 유리병 뚜껑을 열어 가지고, 뭐랄까. 뭐라고 해야 하나… 쓰다듬어 줬단 이야기지. 내가 할 짓이 그거밖에 없으니까. 완전히 방치된 거지. 그러니까 더 서럽잖아. - 이창호(가명), 표본 사진을 찍은 남자 태아 표본이 방치돼 있었던 거야. 대체 왜, 누가, 태아 표본을 모아두고 관리도 안 한 건지. 한센병과 태아가 어떤 관계가 있는 건지, 그 비밀을 파헤쳐 볼게. ▲ 소록도에 격리된 사람들 시간을 거슬러서 때는 1954년 6월, 초여름이야. 출산이 임박한 산모가 있어. 그런데 이 출산 현장은 다른 곳과 좀 달라. 산모의 비명 소리가 문밖으로 새어 나갈까 노심초사야. 왜? 출산을 들키면 안 되거든. 소리를 죽이고 힘겹게 진통한 끝에, 사내아이가 태어났어. 그리고 아가 우는 소리도 조심시켜. 왜 이렇게 조용히, 조심스러워하는 걸까? 사실 여긴, 아이를 낳아서는 안 되는 곳이거든. 여기는 바로, 소록도야. 왜, 소록도에선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걸까. 남철이의 이야기 듣다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어. 전라남도 함평군의 한 초등학교 5학년생이던 남철이 몸에, 갑자기 이상한 증상이 생겨. 피부에 하나 둘, 발진이 생기는가 싶더니, 점점 부위가 넓어지고, 피부에서 감각이 느껴지지 않아. 한센병에 걸린 거야. 이 병 걸리면 후유증이 나와요. 아주 흉한 모습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쳐다봐요. 꺼리고. 그 쳐다보는 거 그게 제일 싫었어요. 얼마나 심하게 꺼리냐 하면은, 마을 공동 우물에 물 길러 가도 물을 못 길러가게 해요. 물동이가 혹시나 균이 오염되지 않았나 해가지고 못 오게 한 거예요. 그리고 사람도 샘가에 오지 마라... - 이남철, 한센병력자, 12세 발병 이웃들은 손가락질을 하고, 학교에 가면 친구들이 놀리고 곁에 오질 않아. 결국 학교에 나오지 말라는 소리를 들었어. 남철이는, 한센병 환자들만 격리해 치료한다는 소록도에 들어가기로 했어. 확실히 기억하죠. 1966년 59년 전에 5월 16일 날, 제가 아버지하고 같이 이곳에 (소록도에) 들어왔습니다. 그때는 치료받는다기 보다도 격리시킨다는 인식을 받고 왔어요. 아버지가 저를 여기다 놔두고 갈 적에 뱃머리까지 같이 나갔거든. 아버지 가는데 배웅하러. 아버지께서 '절대 뒤따라 보지 말고 그냥 가라. 들어가라' 그랬는데, 또 그럴 수가 있나요? 부모님, 아버님인데. 이렇게 뒤로 돌아보니까, 앉아 가지고 울고 계시더라고요. 부모님과 형제들과 영영 이별이구나.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병이 생겼는가… - 이남철, 한센병력자, 12세에 발병 작을 소, 사슴 록, 작은 사슴을 닮은 섬이라고 해서, '소록'이란 이름이 붙은 소록도. 면적은 여의도보다 조금 더 넓은데, 섬 전체가 한센병 환자들이 사는 7개의 마을로 이뤄져 있어. 많을 땐 6천여 명의 한센병 환자가 소록도에 살았어. 소록도는 1번지와 2번지로 나뉘어 있어. 소록도에 도착한 어린 남철이는 2번지에서 살게 됐어. 1번지는 직원 구역, 2번지는 환자 구역. 다른 이름으로 1번지는 무독 지대, 2번지는 유독 지대라고 불렀어. 독이 있는 곳과 없는 곳이란 거지. 1번지와 2번지 사이엔 길게 철조망이 쳐져 있어. 경계선의 감시소를 거치지 않고는 2번지에서 1번지로 갈 수 없어. 외출하려면 허가를 받아야 해. 완전히 단절돼 있는 거지. 뿐만 아니야. 소록도로 올 때 타는 배도, 환자용 배와 직원용 배가 다르고, 선착장마저 달라. 심지어 환자가 직원과 대화할 때의 규칙이 있었다고 해. '직원과 다섯 걸음 이상 거리를 유지해라', '말할 땐 45도 얼굴을 옆으로 돌리고 손으로 입을 가려야 한다', '직원이 바람을 등지고 서야 한다' 같은. 바람을 타고 혹시라도 병이 옮을까 봐. 환경도 열악해. 방 여러 개가 쭉 이어진 공동주택 형태였는데, 작은 방 한 칸을 8명이 같이 썼거든. 먹을 것도 변변치 않고 특히 겨울엔 너무 추워. 아침에 일어나면 걸레가 얼어 있을 정도야. 남철이는 소록도가 병원이나 요양소라기보다 일종의 강제수용소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 하지만 간장에다 밥만 먹어도 남철인 마음이 편했대. 이곳엔 자신을 이상하게 보는 시선이 없었으니까. 고단한 삶이지만, 남철인 어느덧 20대의 청년이 됐고, 소록도에서 일자리도 찾았어. 환자 중 몇 명을 '의료조무원', 일종의 간호조무사로 뽑았는데, 남철이도 뽑힌 거야. 아주 성실했거든. 혈압 재고, 열 재고, 이런 업무를 했지. 그런데 소록도는 몇 천 명이 사는 일종의 큰 마을이잖아. 남녀노소 여럿이 모여 살다 보니, 그 안에서 사랑도 싹 텄어. 바닷가 마을에서 조금 벗어나면 아주 예쁜 바위가 있는데 '연애바위'라는 바위가 있어. 왜 연애바위예요. 그게 거기서 많이 사랑을 나눴는가 보지... -이남철, 한센병력자, 소록도 거주 한센병 환자로 소록도에 들어왔지만, 사랑은 그 무엇도 막을 수 없어. 주변에선 결혼 적령기가 된 처녀, 총각들을 사람들은 막 이어주려고 해. 70년도에 와서 74년도 열아홉 살에, '너 그리 시집 가라' '시집 갈래?' 그러는 거예요. 난 모르겠다고 얘기했었지. 아무것도 몰라 그때는. 그러면 '그리 가라' 해서 (사람들이) 다 결혼 날짜 잡아놓고 다 해줘요. -정월선, 한센병력자, 소록도 거주 같이 한 마을에 살고 교회도 다니고 그러니까 거의 매일 보니까. 나도 장가를 한번 가봐야 될 거 아닙니까. 그래서 간다고 했죠. 결혼하는 날 같이 좋은 날이 없어. 우리는 생일이 한 날이에요. 만나보니까 생일이 같더라고. 그런 사람 없어요 소록도에. 옛날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어요. -이남철, 한센병력자, 소록도 거주 생일이 같은 내 운명의 상대. 그렇게 식을 올린 게 50년 전이야. 생일도 같으시더니 두 분 정말 닮으셨지? ▲ 아이를 가질 수 없다 그런데 소록도엔 결혼의 조건이 있었어. 소록도의 남자들은 결혼 전, 어떤 수술을 해야 했어. 수술의 이름은 '단종수술'이야. 당시 소록도 결혼의 조건이 적힌 문서가 있어. 음성으로 치유되었으나 사회 복귀하여 생활하기 어려운 노령자, 무의무탁자, 신체장애 환자들이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도록 부부 동거를 허용 하고 있다. 그러나, 가임환자가 동거를 원할 때에는 불임시술 후 동거하도록 하고 있다. 결혼을 하려면 불임수술을 하라, '단종수술'은 남성 불임수술을 뜻해. 한센병은 유전병이 아니라는 걸 당시에도 알고는 있었어. 설사, 어떤 병이 유전된다고 해서 임신을 금지한다는 게, 아니 이건 금지 정도가 아니지. 아예 임신을 할 수 없게, 불임수술을 받아야만 결혼을 허가한다는 건, 정말 말이 안 되는 일이잖아. 심지어 음성으로 치유된 사람도 불임수술을 해야 한대. 남철 씨는, 다행히 수술을 피했어. 몇 년마다 소록도 원장이 바뀌었는데, 마침 남철 씨가 결혼식을 올릴 당시의 원장은, 엄격한 스타일이 아니었거든. 얼마 뒤, 남철 씨와 월선 씨 사이엔 곧 아기도 생겼어. 그런데 두 분은 기뻐할 수가 없어. 소록도만의 기막힌 법이 또 하나 있었거든. 여기서 임신 못 하게끔 돼 있거든. 임신했다고 하면 병원 법을 어겼다고 해서 그렇게 낙태를 시켜버려요. 낙태할 때도 애기 엄마들이 많이 죽었대요. -이남철, 한센병력자, 소록도 거주 임신을 하면, 낙태를 시킨다는 거야. 당시 보건사회부는 소록도에 이런 지시 사항을 하달했어. '임신 가능한 자에 대해서는 단종수술을 적극 장려하여 가족계획에 완벽을 기할 것' '임신 가능한 자를 항상 조사 파악하여 출산을 최대한 억제토록 할 것' 이에 따라 소록도 병원은 매월 정기적으로 젊은 부녀자들의 임신 여부를 검진하고, 출산을 금지했어. 혼전 임신이나, 단종수술을 피한 틈에 임신이 되기도 했는데, 임신한 걸 들키면 낙태를 시킨 거야. 남철 씨와 월선 씨는 첫 아이에 이어, 두 번째 아이도 지킬 수 없었어. 그렇게 소록도의 많은 여인들이 아이를 잃었어. 저 같은 경우는 말하자면 이렇게 비밀로 임신했잖아요. 어느 날 간호사하고 의사하고 간호과장하고 다 와서 여자들 싹 나오라는 거예요. 이제 우리 동네에 그런 임신자가 생겼으면, 그거 보고가 들어가면, 딱 이렇게 사람들 다 눈치를 보고 배도 보고 행동도 보고 그래 갖고 딱 집어내. 도살장에 끌려가듯이 그렇게 끌려갔다고. 까마귀가 까마귀 낳지, 까치를 낳을 수가 있느냐고. 말하자면, 한센인이 한센인 낳는다는 그런 식으로. (낙태할 때) 그 주사를 맞았지 싶어요 여기(배)다가. 막 몸부림하다가 뒹굴다가 (태아가) 나와. 뒹굴다가. -장인심, 강제 낙태 피해자, 소록도 거주 아까 앞에 보여준 태아 표본 사진 있었지? 표본으로 만들어졌다 방치된 그 태아들은 소록도의 한센병 환자가 잉태했다는 이유로, 강제 낙태되어 세상을 만나지 못한 태아들이었어. 아이를 잃은 것도 원통한 데, 낙태 직후 너무도 끔찍한 일을 겪은 분도 있어. 세탁소 업무를 하다가 소록도에서 남편을 만나서 연애를 하다가 아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임신 사실을 숨길 수가 있었으나, 결국에는 배가 나오기 시작하자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었고 결국 병원으로 끌려갔습니다. (중략) 낙태 수술을 당하고 집에서 쉬고 있는데 어느 날 경찰이 오더니 아기를 보러 가자고 해서 뭔지 모른 채 끌려갔습니다. 병원에 갔더니 사산해서 낳은 태아를 알코올에 담긴 병에 넣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정말 통곡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나고, 차라리 보여주지를 말지.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악독합니다. - 낙태 피해 진술서 中 태아 표본을 보여준 의도가 뭐였을 거 같아? 한센병 환자는 절대로 임신해서는 안 된다는 법칙을 알려주려는 본보기용이었고 해. 남철 씨와 월선 씨가 두 번째 아이도 잃고 슬픔에 빠져 있는데, 마을 스피커가 떠들썩하게 울려. 이남철 씨, 지금 바로 수술실로 오세요 라며. 이제 더 버티지 말고 남철 씨에게 단종수술을 받으러 오라는 호출이야. 온 동네방네. 그러니까 남이 다 알아. 모르는 사람 없어. -정월선, 한센병력자, 소록도 거주 기분 나쁜 것 보다도, 진짜 진짜 죽겠대. 마음이 아파. 인간인데 인간 대접도 못 하고, 이렇게 살아야 되나. 그 당시에 딴 것이 강제가 아니고 이게 강제 수용소다. 그런 생각도 했었죠. 내 마음대로 못 하니까 강제 수용소나 마찬가지지. -이남철, 한센병력자, 소록도 거주 남철 씨는 결혼 4년 만에 결국 단종 수술대 위에 누웠어. 그마저 전문의사가 수술한 것도 아니야. '의학강습소' 출신에게 수술을 받았어. 한센병 환자 중 몇몇을 선발해 기초의학이나 해부학 공부를 시키는 의학강습소라는 게 있었거든. 여기 출신들에게 수술까지 시켰던 거야. 아예 복원이 불가능하게 수술하는 경우가 많았대. 한센병에 걸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남철 씨와 월선 씨는, 평생 아이를 갖지 못했어. ▲ 섬 안에 있던 아이들 그런데, 아까 무사히 태어났던 아이, 기억해? 그 아이는 어떻게 소록도에서 태어날 수 있었을까? 소록도에는 5~6천명이라는 많은 사람이 살다 보니, 감시의 눈이 닿지 않은 곳도 있었어. 원장마다 관리 스타일이 좀 달랐다고 했잖아. 임신 가능한 여성에 대한 조사가 좀 느슨했던 때였던 거지. 태어난 아이의 부모는 둘 다 한센병에 걸려 소록도에 들어왔다가, 결혼을 했고, 아이를 가졌어. 임신 기간 동안 엄마는, 점점 불러오는 배가 티나지 않게 천으로 배를 꽁꽁 동여맸어. 같은 방을 쓰는 사람들은 아무도 비밀을 말하지 않고 임신 사실을 숨겨줬어. 그렇게 세상에 태어난 아기의 이름은 김인수(가명). 그런데 인수가 몸이 좀 약해 보여. 임신 기간 내내 엄마가 맘을 졸이며 살았으니 그럴 만도 하지. 몸이 약해 오래 못 살 거 같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다행히 인수는 살아 남았어. 저희 어머님이 19살에 소록도 들어왔어요. 저희 아버님하고 소록도에서 만나 가지고 이제 두 분이서 부부의 연을 맺고, 저를 낳은 거지요. 저를 낳으시고, 이제 감춰야 되니까, 애를. 감출 데가 뭐 따로 없어서, 긴 광목 치마를 입고, 그 치마 속에 저를 감췄어요. 그 방 식구들이 여덟 명이 다 와 갖고, 한 집에 저희 어머니를 감추고, 저를 감추고 막 그랬대요. 애다 보니까 울음도 울어야 되고. 배고프면 울어야 되고. 젖을 못 먹으니까 울어야 되고. 그러니까 그게 뭐 얼마나 갔겠습니까? 그래 갖고 이제 발각이 돼 갖고... -김인수(가명), 한센병력자 2세 직원은, 엄마 품에 안겼던 인수를 떼어내서 소록도 안의 보육소로 데려갔어. 한센병에 걸린 부모와 함께 섬에 들어왔거나, 인수처럼 몰래 태어난 아이들을 키우는 보육소가 있었거든. 섬 밖에서 태어났든 섬 안에서 태어났든, 아이들에겐 부모가 있잖아, 그것도 같은 소록도 안에. 왜 아이들을 부모에게서 떼어내 보육소로 데려갔을까? 소록도에선 한센병 부모에게 태어난 아이들을 부르는 단어가 있어. 바로 '미감아'. '한센병 환자 부모에게서 태어나 아직 한센병에 감염되지 않은 아이'라는 뜻이야. 아직 병에 걸리지 않은 아이라는 건, 이건 그냥 건강한 아이라는 거잖아. 근데 '미감아'라는 말엔, 언젠간 걸릴 수 있을 거라는 의미가 내포돼 있는 거야. 아이들이 한센병 부모와 같이 살다가 전염이 될 수 있다며, 보육소에 모아서 키웠어. 보육소는 1번지, 직원 구역에 있었어. 그럼 2번지에 있는 엄마는 보육소를 방문할 수 없어. 면회 불가야. 두 구역을 나눠놓은 철조망을 넘을 수 없으니까. 엄마는 아이를 볼 수도 없다는 의미야.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잡혀 갔다고 그러는데, 뺏어간 거지. 우리 어머니께서 저를 보육원에 뺏기고 나서 3년을 고개 너머, 저를 보지는 못해도 내가 있는 곳을 향해서 3년을 이제 산을 넘었는데. 거기 가서 두세 시간 울고 3년은 우셨답니다. 서로 만나지도 못하고, 있는 곳으로 향해서 이제 내 자식 뺏겼다고. 3년을 하루도 안 빠지고, 365일 1년에 한 번도 안 빠지고, 철조망 밑에서 아들 부르면서 이제 우시는 거지. 너무나 눈이 전부 뭉개져가지고 시력이 완전히 갔어요. 눈이 짓눌려가지고, 봉사가 됐더라고. -김인수(가명), 한센병력자 2세 자식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지만, 매일같이 자식과 가장 가까운 곳까지 찾아와 아들을 부르며 우는 엄마. 한센병 후유증인지, 정말 눈물에 짓무르신 건지, 인수를 뺏긴 엄마는 결국 시력도 잃으셨어. 아기를 가질 수도, 낳을 수도, 키울 수도 없는 소록도. 그럼 보육소로 간 인수는 잘 지냈을까? 보육소 분위기는 소록도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다르지 않아. 아직 어린 아이들인데 완전 군대식 관리를 해. 아침 점호를 하고, 체벌도 있어. 큰 아이들이 어린 아이들을 때리기도 해. 무엇보다 한창 자라나는 아이들인데 먹을 것이 부족해. 최고로 기억에 남는 게 배고픔. 진짜 배고픔은 못 참겠더라고요. 명절이 되면 직원들은 막 고기에 뭐 해서 먹고 이제 구정물 통에 버려요. 그럼 애들이 그 뼈다귀 건져 먹으려고 구정물 통에 손을 넣어서 그 뼈다귀 건져서 뜯어먹고 그랬어요. -김인수(가명), 한센병력자 2세 ▲ 통곡의 수탄장 그런데, 이렇게 항상 배고픈 아이들이 유독 기다리는 날이 있었어. 그날이 오면, 갑자기 보육소에서 아이들을 깨끗이 씻기고 1년에 딱 두 벌 주는 외출복도 입혀. 지금 소록도 가시면 '통곡의 신작로' 일본말로 신작로라고 해요. 이 통곡의 신작로인데 한 달에 두 번도 아니고 세 번도 아니고 딱 한 번이야. '내일 아침에 엄마 아빠 만나러 간다. 먹을 거 많이 갖고 오겠다'… 그래서 저희가 이제 면회 때만 되면 잠을 안 자요. 애들이. -김인수(가명), 한센병력자 2세 한 달에 한 번, 엄마 아빠를 만나는, 면회 날이야. 한 달 내내 이날만 기다려 온 인수 엄마도 밤잠을 못 이뤘어. 추운데 동상은 안 걸렸으려나... 혹시라도... 우리처럼 한센병이 생기지 않았겠지... 아껴뒀던 쌀로 떡을 찌고, 계란을 삶고, 감자와 고구마도 쪄. 드디어 면회 당일이야. 엄마, 아빠들이 먼저 집을 나서. 1번지와 2번지, 직원 지대와 환지 지대 사이, 철조망이 쳐진 경계선 근처에 도착해. 동네별로, 아이 나이별로, 어른들이 먼저 한 줄로 길게 자리를 잡아. 소록도 안의 모든 부모가 한 번에 나와 줄을 서는데, 그 길이가 수백 미터는 됐어. 푸른 바다를 옆에 끼고 길게 늘어선 줄. 직원들은 부모들에게 바람을 마주해서 서라고 지시해. 행여나 부모를 스친 바람이 병을 옮게 할 까봐. 엄마, 아빠들이 자리를 잡으면, 이제 보육소에 있는 아이들이 출발할 차례야. 나이순으로 한 줄로 서서 하나, 둘, 하나, 둘, 발맞춰 가. 드디어 저 멀리, 엄마, 아빠들이 서 있는 모습이 보여. 두리번거리며 각자 자신의 엄마 아빠를 찾아 그 앞에 서. 한걸음, 두 걸음, 아이가 엄마에게 다가가려는 그 순간! 멈춰! 뒤로 뒤로! 2미터 간격 유지한다! 선생님이 호루라기를 불며 제지해. 엄마와 아이는, 2미터 간격을 유지해야 해. 그보다 가까이 다가갈 수는 없어. 엄마를, 아이를, 오직 눈으로만 봐야 해. 바라만 볼 뿐, 만지지도 안을 수도 없어. 아까 처음에 보여줬던 아이들이 일렬로 서 있었던 사진, 기억나? 사실 그게, 아이들을 마주 보고 엄마와 아빠가 서 있었던 거야. 사진 전체를 다시 보니 어때? 여기 서 있었던 아이 중 한 명이었을 인수 씨의 이야기, 들어볼게. 사감 선생이 호루라기를 불면 부모들은 가만히 있고 자녀들은 3보 이상 딱 가요 부모들 앞에. 그런데 바짝도 못 가고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손도 한번 못 잡거든요. 손 한 번 딱 잡으려고 하면 선생이 뛰어와서 부모 있는 데서 막 몽둥이로 때려 버리고 이랬거든요. 부모님들이 바리바리 싸가지고 와요. 내 자식 줄 거라고. 원래 그 자리에서 먹어야 해요. 왜냐하면 그걸 가지고 또 기숙사에 들어가면 큰 애들한테 다 뺏겨요 작은 애들이. 서로 배가 고프니까. 1시간 다 끝나면 면회 시간 끝나면 또 저쪽에서 호루라기 딱 불면 딱 헤어져야 돼. 이제 헤어질 때는 바로 눈물 바다입니다. 통곡하고 땅을 치고 부모들은 난리고 또 한 달을 기다려야 되니까. 한 서려서 울고 그렇습니다. -김인수(가명), 한센병력자 2세 이 길을 사람들은 탄식의 장소라는 의미로 '수탄장'이라고 불렀어.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통곡이 멈추지 않는 엄마와 아빠. 더 슬픈 사실은, 아이들은 너무 어릴 때부터 부모와 떨어져 살다 보니까, 부모에 대한 그리움보다 배고픔이 더 절실해. 한달에 한 번은 배불리 먹을 수 있으니까. 엄마, 아빠가 던져주는 음식을 허겁지겁 주워 먹기 바빠. 엄마는 행여 아이가 선생님에게 혼날세라, 아이를 와락 안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누군가는 이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어. '아이를 엄마에게서 데려간 게 아니라, 아이를 엄마에게서 뜯어갔다'고. 그렇게 눈물의 면회가 이뤄졌던 '수탄장'. 눈앞에 아이가 있는데 얼마나 안고 싶었을까. 이 사진이 참 저한테는 진짜 이 가슴 아프고. 부모가 있는데도 한 달에 한 번을 한 시간을 주어진 시간에서 만나야 되고. 죄인도 아닌데 부모를 함부로 만날 수도 없는 그런 세상이 왜 있었을까. 지금 생각하면 그 당시의 사회가 참 원망스럽고. 한센병이, 병력자들이 무슨 사회적으로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오로지 내가 병을 갖고 싶다 해서 병든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사회적으로 폄훼하고 완전히 죄수 수용하듯이 수용하고 이래 했을까. 생각만 하면 참, 하… 목이 멥니다. -김인수(가명), 한센병력자 2세 한 달에 한 번 면회마저도,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끝이야. 중학교는 소록도 밖으로 가야 했거든. 한센병 환자의 자녀들만 따로 격리해서 교육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삼육학원이란 기숙학교가 대구에 있어. 인수는 엄마, 아빠와 떨어져서 대구삼육학원으로 갔지. 이 곳 생활은 어땠을까? 군대더라고 군대. 신입생 1년동안 외출도 안 돼요. 교육기관이 아니고 순 사람 잡는다더라고. -김인수(가명), 한센병력자 2세 매주 토요일은 이유없이 매를 맞는 날. '빠따 맞는 날'이라고 했을 정도야. 신입생들은 1년 동안 외출도 안 돼. 2학년이 됐어도 엄마를 만나러 갈 수는 없어. 소록도에서 외부인이라고 자녀들의 출입을 통제했거든. 부모님과는 편지나 전보로만 연락할 뿐이야. ▲ 무너진 철조망 삼육학원의 생활이 너무 고돼서 견딜 수가 없던 인수는, 학교를 뛰쳐나왔어. 아는 사람, 기댈 친척 한 명 없다 보니 살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어. 공장, 철길 보수, 양계장, 농사일, 닥치는 대로 일을 하고 지내던 스무 살 무렵. 아버지로부터 전보 한 통이 왔어. '인수야, 철조망이 철거됐다' 직원과 환자 지대를 가로막았던 철조망을 없앴다는 거야. 인수 씨는 곧바로 소록도로 달려갔지. 제가 가장 행복했던 것은요. 철조망이 철거되는 그날이었습니다. 부모를 시간제한 없이 만날 수 있겠다. 이제 부모도 가서 품에 안을 수 있겠다. 철조망이 철거되고 엄마 품에 안겨서. 나이가 들었지만 응석도 부릴 수 있고. 또 엄마 볼도 한번 만져볼 수도 있고. 또 엄마가 주시는 밥도 직접 떠먹여 줄 수도 있고. 제가 어머니 밥을 떠먹였거든요. 그래서 그때가 가장 행복한 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제가 '엄마'라고 부르니까 품에 안고 얼굴을 한 1시간 동안 만지더라고요. 얼마나 보고 싶었겠습니까. 얼굴을 직접 보고 싶은데 한 시간 동안 안 놓고, 좀 놔라 해도 안 놓더라고. -김인수(가명), 한센병력자 2세 그렇게 품에 안고 싶던 내 아가 인수가, 다 큰 어른이 되어서야 엄마 품으로 돌아왔어. 말랑했던 아가의 손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거칠고 굵은 남자 손이 되었어. 덩치는 엄마보다 훨씬 더 커졌지만, 여전한 내 아가. 아들의 얼굴을 끝도 없이 어루만지는 엄마의 마음은 어떠셨을까. ▲ 낙인의 시작 아이를 가질 수도, 낳을 수도, 키울 수도, 그리고 만날 수도 없는 섬, 소록도. 한센병 환자들의 이 한 많은 삶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그 시작은 일제 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잇따라 승리한 일본은, '1등국' '문명국'에 도취돼 있었어. 이때 일본에선 '우생학'이 유행했어. 인간을 유전학적으로 개량해서 우등한 인류를 만들겠다는 게 우생학의 기본 개념이야. 우생학은 우월한 사람이 더 많은 자손을 남기도록 하고, 유전병과 장애를 지닌 사람의 출산을 억제시킨다는 논리로 이어져. 이 우생학을 근거로, 일본에서 '나예방법'이 만들어졌어. 예방이란 이름이 붙었지만, 한센병 환자들을 강제수용하는 법률이야. 일본에선 1909년부터 한센병 환자들을 강제 격리하고, 단종과 낙태 수술을 하기 시작했어. 그로부터 7년 후인 1916년, 일본은 식민지였던 조선의 소록도에도 한센병 치료 병원 자혜의원을 개원했어. '환자심득서'. 심득, 마음에 새기라는 거야. 일본은 소록도의 모든 환자들에게 이걸 암기하도록 시켰어. 입원환자는 치료상은 물론 위생 기타 동작 등에는 직원의 지시를 절대 준수한다. 환자는 허가없이 일정구역 외로 나갈 수 없다. 위 심득을 위반하는 자에 대해서는 그에 상당한 처분을 한다. 일본은 한센병 환자의 치료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환자를 강제 수용하기 위한 곳으로 소록도를 관리했어. 그리고 1933년, 악명높은 스오 마사토가 4대 원장으로 부임하면서부터 소록도 최악의 암흑기가 펼쳐져. 스오 원장은 소록도 자혜의원을 '소록도 갱생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한센병 환자는 전국 어디에서든 발각되는 즉시 소록도로 강제 이송하도록 했어. 700명 정도였던 환자 수는 5,000 명으로 급증해. 이 많은 환자를 수용하려면 건물이 필요하잖아. 스오는 환자들을 동원해 건물을 신축하고, 도로를 확장했어. 치료하라고 강제 수용해 놓고, 강제 노역을 시킨 거지. 소록도 환자들의 분노도 쌓여가는 가운데, 스오 원장이 이번엔 환자들의 돈을 걷어 가기 시작해. 돈을 걷은 이유는? 자신의 동상을 건립한다고. 이 사진을 봐. 동상을 만드는 데 쓸 커다란 바위를 환자들이 옮기고 있는데, 그 바위 위에 남자 한 명이 우뚝 서 있어. 이 남자는, 스오의 양아들이자 오른팔이었던 사토야. 바위 위에 올라서서 일하는 환자들에게 채찍을 휘둘렀어. 이런 상황이 자랑스럽다는 듯 포즈를 잡고 사진 찍은 걸 봐. 얼마 후, 동상이 완성되자 스오 원장은 아주 성대한 제막식을 열었지. 그리고 매일 새벽, 환자들이 동상 앞에서 참배하도록 했어. 심지어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군수품 생산에도 환자들을 동원했어. 연료로 쓸 송진 6,000kg, 가마니 30만장, 토끼 가죽 1500장, 숯 3만포를 매년 생산했다고 해. 그러다보니 환자들의 손발은 상처투성이가 되고, 병세는 나날이 악화돼. 가혹한 매질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생겨. 도주하려고 바다에 뛰어들었다가 거센 조류에 휩쓸려 물에 빠져 죽기도 했어. 만약에 소록도를 탈출하다 잡히면, 강제 단종수술을 시키는 거야. 한센병 환자들은 죽음조차 편안히 맞지 못했어. '환자심득서' 마지막 조항엔 이런 문구가 있어. '27항. 학술 연구를 위해 시체 해부가 필요한 경우 이에 응해야 한다.' 소록도 사람들의 특별한 기도문이 하나 있었다고 해. '주님, 부디 저를 부르실 땐 주일날 불러 주소서'라고. 그럴 수만 있다면, 일요일에 죽게 해달라는 거야. 일요일엔 직원들이 쉬어서, 해부를 피할 수 있었거든. 죽으면 무조건 해부를 다 해버려요. 그러니까 이제 공휴일 날 주일날은 해부를 안 해. 그러니까 죽더라도 해부 안 하고 화장하면 좋겠다. 그래서 그렇게 원을 해. 그러니까 이제 병들어 죽고 그냥 죽고 해부해서 죽고 세 번 죽는다고 그러잖아요. 그 누가 해부하는 걸 좋아하겠어. -강선봉, 한센병력자, 소록도 거주 몇 년 뒤, 해방이 됐어. 일본 직원들은 다 떠나고, 소록도엔 우리나라 직원들이 왔어. 우리나라 직원은 일본 직원과 달랐을까? '환자심득서' 대신 우리나라 직원들이 만든 '소록도 환자 준수사항' 문서에는 이런 내용이 있어. '환자는 치료는 물론, 위생 기타 일상생활에 있어서 직원의 지시를 엄수하여야 한다.' '부부동거는 정관수술을 받은 자에 한하여 이를 허가한다.' '미감아동은 절대로 환자와 동거함을 엄금한다.' '환자가 사망하였을 때는 학술 연구상 필요에 따라 사체를 해부할 수 있다.' - 수용 환자 준수사항 中 한센병 환자를 대하는 태도는 해방 후에도 다를 것이 없었어. 시신 해부도 1960년까지 이어졌고, 한센인에 대한 강제 격리 정책은 1970년대까지 유지됐어. 낙태 수술은 1980년대 후반까지 공공연히 이루어졌고, 심지어 단종수술은 1992년까지 시행됐어. 그런데, 이런 의문 들지 않아?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이 모든 말도 안 되는 정책들은, 한센병의 전염력에 대한 우려 때문이잖아. 옆에 서 있거나, 바람만 불어도 쉽게 전염된다고 생각했지. 그럼, 소록도에 근무했던 수많은 직원 중 한센병에 전염된 사람은 몇 명일까? 정답은 0명, 아무도 걸리지 않았어. 애초에 한센병은 전염력이 매우 낮아. 같은 3종 전염병인 결핵과 비교해도 2000분의 1 수준이야. 더구나 한센병 치료약도 있었어. 1940년대 초반 한센병 특효약인 DDS가 발명됐고, 1955년경에는 전국적으로 확대 보급됐어. 1958년, 동경 국제 나학회에선 '한센병은 완치된다'고 선언도 했어. 소록도에서도 1950년대 후반부터 치료약 덕분에 음성 환자가 늘고, 1960년대부터는 대부분의 환자가 완치되고 있었다고 해. 두 아이를 낙태시키고, 단종 수술을 받아야 했던 남철 씨와 월선 씨가 결혼식을 올린 게 1974년이었거든. 두 분은 이미 음성 판정을 받은 후였어. ▲ 소록도를 떠나지 못한 이유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하기도 해. 1970년대에 강제 격리 정책이 폐지됐으니, 그렇게 힘든 소록도에서 나와도 됐던 거 아니냐고. 그러면 아이를 가질 수도, 지킬 수도 있었던 거 아니냐고 말이지. 그럼, 한센병 환자들이 소록도를 떠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직접 안 겪어본 사람들이 하는 소리예요. -이남철, 한센병력자, 소록도 거주 건강하면 남의 일이라도 할 수 있지. 우리는 남의 일도, 누가 시켜줘요? 다른 한센 말고 장애자들 다 지금에 와서는 할 수 있어도, 우리 병 걸린 사람 중에는 직장 갖고 사는 사람 없어요. 안 받아주잖아. -정월선, 한센병력자, 소록도 거주 한센병 환자란 낙인이 찍힌 순간, 평범한 삶은 사라져. 마을 사람들이 단체로 한센병 환자 가정으로 몰려와서 마을을 떠나라고 강요해. 가족들이 호적을 파버려서 호적이 없는 분들도 많아. 이발소, 목욕탕, 식당... 너무도 일상적인 장소에서도 한센병 환자들은 눈총을 받고, 쫓겨나곤 했어. 항구의 상인들은 한센병 환자들이 물건을 사면, 손 대신 집게로 돈을 받아서 바닷물에 담그는 사람도 있었대. 소독해야 한다면서 말이지. 한센병 환자들이 치료를 목적으로 어린이를 공격한다는 헛소문이 돌기도 해. '개구리소년 실종 사건' 알지? 초등학생 다섯 명이 도롱뇽 알을 주우러 간다며 집을 나선 뒤 실종된 사건. 이때도 한센병 환자들이 범인이라는 허위 제보 전화가 들어왔어. 성서초등학교 학생들이 실종되고 경북 경찰청 폭력계에 한 제보가 들어왔다. '나환자 수용소의 지하실에 매장되어 있으니 파도록 하라'… 00일보는 매우 구체적으로 '칠곡나환자촌 건물지하실에 실종성서국교생 5명 암매장'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실었다. -개구리소년 실종 사건 한센환자 관련 기사 차별과 편견으로 부풀려지는 헛소문. 허위제보 전화 한 통에 한센병 환자들을 의심하는 기사가 나왔어. 한센병 환자들이 항의하자 그들은 '한센병 환자들이 폭력적이다'는 기사를 덧붙여. 얼마 지나지 않아 한센병 환자와 개구리소년 실종사건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어떤 곳에서도 사과나 정정 기사는 찾아볼 수 없었어. 현실이 이러니 한센병 환자들은 소록도를 나간다는 건 꿈도 못 꿔. 음성 판정을 받았어도, 그들에겐 여전히 한센병 환자라는 낙인이 찍혀 있으니까. 소록도를 나온 사람들이 살만한 정착촌이 전국 곳곳에 만들어졌지만, 주변 마을 사람들의 반대가 극심해. 정착촌 아이들과 자신의 아이들이 같은 학교에 다닐 수 없다고, 강력하게 반대 시위를 벌였지. 차별은 한센병 환자 2세까지도 이어졌어. 엄마가 꽁꽁 숨겨 낳은 인수 씨는, 본인은 병에 걸린 적이 없는데도, 한센병력자 자녀라는 게 알려지면서 취직도 어려워. 우리나라는 이미 1980년대에 한센병 퇴치 국가가 됐지만,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편견은 그 이후에도, 어쩌면 최근까지도 계속되고 있어. ▲ 치유를 위해 나선 사람들 2004년 5월. 서울의 한 변호사 사무실로 일본인 변호사가 연락을 해왔어. 소록도와 관련해서 한국 변호사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다는 거야. 일본인 변호사가 소록도를? 그것도 도움을 청한다? 대체 어떤 내용이었을까? 일본에 많은 한센병 환자들이 있었고, 우리보다 먼저 강제 격리의 피해를 당했다고 했지. 2001년, 일본의 한센병 강제 격리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대상으로 국가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고, 승소했어. 한센병 피해자에 대해 조사하던 일본 변호인단은 한국에도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소록도 갱생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 그래서 한국 변호사들에게 연락했던 거야. 정말 저희로서는 정말 놀랐죠. 그리고 좀 민망하기도 했고요. 나름은 그래도 우리가 인권 활동을 하고 있다고 조금 생각을 했는데 한센인들에 대해서 너무 무지하고 무관심했다는 그런 내용. 일본 변호사들은 이렇게 오래전부터 그런 문제에 천착해서 이렇게 소송을 해서 승소하고. 한국에까지 와서 한국 피해자들에게까지 이런 활동을 하려 하고 있고. 좀 부끄럽기도 하고 그래서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했죠. -박영립 변호사, 한센병 관련 소송 담당 피고는 일본 정부, 원고는 소록도의 한센병 환자들이야. 한센병 환자들로부터 피해 내용에 대한 진술을 듣고 증거를 찾아야 해. 한국 변호사가 몇 사람이 나눠가지고 빠르게 요점만 정리해서 그걸 일본에 보내면, 공동작업을 직접 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 그러니까 그 일본 변호사, 도쿠다 변호사님의 말씀이, 사실은 저희들이 좀 신선한 충격 같은 것을 받았는데. 이 진술서 작업을 하면서 그분들에게 진술할 기회를 드림으로써 그분들이 가슴에 가지고 있는 그 한을 풀어내고, 조금이라도 치유의 기회를 드리고 회복할 수 있는 그런 기회를 드리는 것이 또 중요하다… 승소를 받게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과정이 더 중요할 수 있다… -박영립 변호사, 한센병 관련 소송 담당 일본 변호사들은 진술서 작업을 위해 한 달에 한두 번 소록도를 꾸준히 찾았다고 해. 일본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들어와서 녹동항까지 버스와 택시를 타고 이동하고, 또다시 녹동항에서 배를 타고 소록도로. 힘든 여정일 텐데도 3년을 쉬지 않고 찾아왔어. 일본 변호사들은 오히려 가해자가 내민 손을 기꺼이 잡아 준 소록도 주민들에게 감사하다 고 했대. 그때마다 우리 한국 변호사님들도 함께 했지. 그들과 포옹하고, 손을 잡으며, 그동안 아무도 피해라고 말해주지 않았던, 그들의 피해 사실을, 일생을, 기록하셨어. 변호사들이나 그런 분들이 우리를 찾아서 가까이 하고 그러니까, 우리 인권이 살아나더라고. 인간적으로 대해주고 그러니까. 인간 대접받은 거… 가장 행복해요. -이남철, 한센병력자, 소록도 거주 우여곡절 끝에 2006년 일본 정부는, 일제 강점기 소록도에서 강제 격리, 강제 노역으로 피해를 본 우리나라 한센병 환자들에게도 피해 보상을 하기로 결정했어. 그렇게 우리나라 정부에 대한 국가 배상 청구 소송도 진행됐어. 1심 재판부는 정부의 책임을 인정하고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어. 하지만 우리 정부는 판결 보름 만에 항소했어. 낙태와 단종수술은, '당사자들의 동의를 받은 것으로 강제성이 없었다'고 주장했어. 소록도 사람들은 말해. 소록도에 살기 위해서는 낙태 수술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도 아이를 키우고 싶었다 라고. 그렇게 재판은 2심에 3심까지 이어졌어. 그리고 6년 만에, 마침내 '정부는 단종 낙태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배상하라'는 대법원 판결이 내려졌어. '신체를 훼손당하지 않을 권리'는 생명권과 더불어 인간 생존의 기본적 권리이며, 신체의 자유 중에서도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다. 또한 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하며, 국가는 이를 보장하고, 모성의 보호를 위하여 노력할 의무가 있으며, 모든 국민은 보건에 관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도록 되어 있다. -판결문 中 ▲ 소록도에 없는 두가지 소록도엔 두 가지가 없다는 말이 있어. 바로 '아이'와 '무덤'이야. 소록도에서 생을 마친 환자들은 화장 후 '만령당'이란 곳에 안치돼. 10년간 유골을 찾아가는 사람이 없으면, 만령당 뒤 봉분에 합장돼. 자식이 없는 분이 많다 보니까, 지금 그 곳엔 1만기가 넘는 유해가 잠들어 있어. 한센병은 완전히 정복된 병이야. '리팜피신'이란 항생제를 한 번만 복용하면 나균의 전염력이 99.99% 없어져. 결핵이나 성병 등과 달리 유독 한센병에 대해서만 강제격리정책이 시행됐던 이유는, 다른 전염병과 달리 외모에 변형이 생겼기 때문일 거야. 눈에 보이는 것에 따른 차별과 편견. 지금, 우리는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서울에서 5시간 차를 타고 가면 소록도까지 이어져. 2009년 소록대교가 완공돼서 차로도 갈 수 있거든. 현재 소록도는 주민 거주지 외엔 누구나 방문이 가능해. 지금 소록도에 계신 분들은 모두 한센병이 완치된 분들이고, 전염력도 없는 분들이야. 힘겨운 인생이 담겨 있었지만, 고향이 되어버린 소록도에서 여생을 보내고 계신 분들. 이제라도 그분들이 편안한 시간을 보내실 수 있길 기원해.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
[꼬꼬무 찐리뷰] 53년 전에도 '비상계엄' 있었다…박정희 유신시대와 긴급조치의 진실
등록일2025.03.14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13일 방송된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방송인 홍석천, 배우 박효주, 아나운서 이인권이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서울 한복판에 나타난 탱크 때는 53년 전 서울, 평범한 가을날 저녁이야. 직장인들은 퇴근을 서두르고, 동네 곳곳에선 저녁을 준비하는 음식냄새가 솔솔 풍기고 있어. 그런데 그때 갑자기, 탱크를 몰고 중무장한 군인들이 서울 도심 한복판에 나타났어. 당시 태평로에 있던 국회의사당, 그리고 광화문 근처 중앙청에 서 있는 탱크의 모습이야. 시간은 저녁 7시, TV와 라디오를 통해 깜짝 놀랄만한 소식이 전해져. 박정희 대통령 각하는 10월 17일 오후 7시를 기해 비상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1972년 10월 17일 19시를 기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현행 헌법의 일부 조항 효력을 정지시킨다. 이와 같은 비상조치를 국민 앞에 선포한 박 대통령 각하는 우리 모두 일치단결하여 민주제도의 건전한 발전과 조국 통일의 기원이 성취되는 그날까지 힘차게 전진해 나갈 것을 촉구했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이 선포된 거야. 비상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있을 때 선포할 수 있어. 보통 이제 한국에서 비상계엄은 어떤 굉장히 큰 사회 혼란기나 아니면 6.25 전쟁과 같은 정말 전시에 주로 선포가 됐어요. 그런데 이 1972년 10월 17일에 선포된 비상계엄은 사실은 굉장히 평온한 때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때에 선포가 됐고.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혼란이라든지 어떤 위기라든지 뭐 전시라든지 이런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던 시기인데 느닷없이, 그야말로 느닷없이 비상계엄이 선포가 되었던 거죠. -오제연,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이렇게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앞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해줄게. ▲비상계엄과 특별선언 박정희 대통령은 비상계엄과 함께 '10.17 특별 선언'을 발표했어. 그 내용은 이래. 1972년 10월 17일 19시를 기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현행헌법의 일부 조항 효력을 정지시킨다. 일부효력이 정지된 헌법조항의 기능은 현행헌법의 국무회의가 수행한다. 비상국무회의는 1972년 10월 27일까지 조국의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헌법개정안을 공고하며 이를 공고한 날로부터 1개월 이내에 국민투표에 부쳐 확정시킨다. 헌법개정안이 확정되면 개정된 헌법절차에 따라 늦어도 금년 연말 이전에 헌정질서를 정상화시킨다. 헌법도 바꾸고, 국회를 해산하겠다는 거야. 아까 사진 봤지? 국회의사당 정문을 딱 가로막고 있는 탱크. '국회 해산'이란 게 가능한 걸까? 당시에도 대통령에게 국회해산권은 없었대. 그때도 사실은 헌법에 의하면 할 수가 없는 거였고, 지금도 역시 뭐 헌법에 의하면 국회 해산권을 갖고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할 수가 없는 거죠.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국회해산권이 없는 대통령이 국회를 그냥 임의로 해산시켜버린 거죠. 군인들이 쫙 깔린 상태에서 뭐 그런 상태에서는 사실 기존 헌법에 어떤 조항이나 범위나 이런 것들에 구애받지 않고, 대통령이 임의로 자신의 권력을 행사할 수가 있었던 거죠. -오제연,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그때도 국회는 계엄 해제를 요구할 수 있었어. 그런데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초법적 조치로 국회를 해산시켜버린 거야. 그래서 해제할 수 없었어. 설사 국회가 해산되지 않았어도, 당시 국회엔 박정희 대통령이 소속되어 있는 여당 의원이 더 많았어. 그러니 야당만으로는 계엄 해제 요구가 어려운 상황이지. 아무리 그래도, 반발이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주요 정치인들이 가택 연금을 당해. 대문 앞을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거야. 게다가, 느닷없이 끌려온 사람들이 옷이 벗겨진 채 사정없이 구타를 당해. 몽둥이질에 잠도 재우지 않고 물고문까지 이어져. 이렇게 고문을 당한 사람들은, 국회의원들이야. 이런 국회의원들에겐 공통점이 하나 있었어. 바로 '블랙리스트'. 비상계엄 한 달 전, 야당 의원들의 이름이 있는 블랙리스트 명단이 만들어졌다고 해.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블랙리스트에 적힌 사람 가운데 13명의 야당 의원들을 보안사에서 끌고 갔다는 거야. 이런 일들은 비상계엄 선포 후, 바로바로 진행됐어. 이렇게 국회도 해산하고, 헌법도 바꾸겠다고 해. 여기서 끝이 아니야. 얼마 뒤에 대통령 선거도 해. 불과 1년 전, 7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거든. 근데 임기 1년 만에 또 대통령 선거를 하는 거야. 왜 그랬을까? ▲ 1년 만에 다시 한 대통령 선거 3년 전인 1969년, 박정희 정권은 헌법을 개정했어. '3선 개헌'이라고 들어봤어? 헌법 제 69조 3항 '대통령의 계속 재임은 3기에 한한다'. 대통령을 3번까지 할 수 있다는 거야. 원래는 두 번까지만 할 수 있었거든. 이렇게 5대 6대 대통령을 역임한 박정희 대통령은 이 헌법 개정으로 3선에 도전하게 돼. 그리고 3선 개헌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하며 등장한 대선 라이벌이 있어. 바로 47살의 젊은 정치인, 김대중 후보. 두 후보의 경쟁은 엄청났어. 여러분 이번에 정권교체를 하지 못하면 이 나라는 박정희 씨의 영구 집권의 총통 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박정희 씨는 '3선 개헌은 절대로 안 한다', '나보고 3선 개헌한다는 것은 야당 놈들의 모략이다' 이렇게 말했어요. 그러더니 2년이 못 가서 재작년에 절대로 안 한단 3선 개헌을 정반대로 절대로 해 버렸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헌법을 고칠 때는 앞으로 이 나라에서 누구든 자기 한 사람의 영구집권을 위해서 헌법을 이리 고치고 저리 고치고 하는 일은 영원히 못 하도록 분명히 하는 것을 여러분에게 내가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김대중 후보의 유세 연설 中 유권자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에게 분명히 말씀드리거니와, '나를 대통령으로 한번 더 뽑아 주십시오' 하는 이런 정치 연설은 오늘 이 기회가 마지막 연설이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말씀드립니다. 지난 5대, 6대 대통령 선거에 있어서 유권자 여러분들은 이 사람을 대통령으로 두 번 뽑아 주셨습니다. 이번만 여러분들이 한번 더 이 사람을 지지를 해주시면, 일할 수 있는 그런 뒷받침을 해 주시면, 앞으로 4년 동안 여러분들을 위해서 있는 정력을 다 해서, 한번 멋있는 수도 서울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정희 후보의 유세 연설 中 그럼, 선거 결과 어땠을까? 결과는, 박정희의 승리였어. 53.2% 대 45.3%의 차이야. 서울에서는 김대중 후보가 앞서기도 했어. 그리고 한달 후, 박정희 대통령의 여당인 민주공화당이 113석, 야당인 신민당이 89석을 차지하면서, 그전에 비해 야당의 의석수가 늘어났어. 김종필 증언록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해. 그 다음엔 김대중이 될지도 몰라. 그러니 내가 좀 특수한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 그 '특수한 것'이 뭘까? 박정희 대통령 취임 1년 뒤인 1972년 5월. '풍년사업'이란 이름의 은밀한 작업이 진행돼. 이름만 보면 농업 관련 사업 같지 않아? 근데, 그 작업이 진행된 장소는 바로 여기야. 일명 '궁정동 안가'라 불리는 곳이야. '안가'는 안전가옥, 이곳은 대통령의 안전가옥이야. 아주 비밀스러운 곳이지. 여기서 뭘 했냐. 대만 총통제, 스페인 총통제, 프랑스 드골 헌법 등 해외사례를 연구하고 있어. 왜 이런 사례들을 연구할까? 대만의 총통이었던 장제스, 스페인 총통 프랑코, 두 사람 모두 본인들이 죽으면서 그 임기가 끝나. 종신 집권을 했다는 거야. 그렇게 은밀하게 진행된 풍년사업의 결과는, 다섯 달 뒤인 1972년 10월 세상에 공개됐어. '유신헌법'이라는 이름으로. ▲ 유신헌법 10월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헌법을 개정하고. 이게 바로 '10월 유신'이야. 유신, 사전적 의미는, 낡은 제도를 고쳐 새롭게 한다는 거야. 유신헌법에는 대통령이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카드들이 있었어. 먼저 '집권' 카드. 대통령 집권에 대한 강력한 변화가 생겨.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지 않는다는 얘기야. 그럼, 누가 뽑냐? 통일주체국민회의, 일명 '통대'라고 하는 기관에서 대통령을 선출하겠다는 거야. 그런데, 이 '통대'의 의장이 누굴까? 대통령 본인이야. 대통령이 의장인 기관에서 대통령을 뽑겠다는 거지. 대통령 임기도 4년에서 6년으로 늘어나. 그리고 대통령 중임 제한 폐지. 사실상 영구집권이 가능해진 거야. 두번째는 '밸런스' 카드. 권력의 밸런스를 파괴하는 카드야. 대통령에게 '국회 해산권'이 생겼어. 10.17 비상계엄 때는 국회 해산권이 없었다고 했잖아? 그걸 만든 거야. 이제 대통령이 입법권을 가진 국회를 해산할 수 있어. 그리고 국회의원 3분의 1을 대통령이 추천하고 이를 '통대'에서 선출하겠대. 게다가 대통령이 사실상 사법부의 모든 법관을 임명할 수 있게 됐어.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이 입법부에 사법부까지 손아귀에 쥐는 거야. 3권분립의 파괴야. 마지막 카드는 아주 강력한 힘이야. 바로 '긴급조치'야. 유신헌법 제53조 1항을 보면, '국정 전반에 걸쳐 필요한 긴급조치를 할 수 있다'는 거야. 필요한 조치라는 게, 어디까지 가능한 걸까? 무서운 거는 헌법에 규정돼 있는 국민의 기본권의 효력을 정지시킬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부여했죠. 조치에 대해서는 사법 심사를 할 수가 없도록 해놨어요. 그것이 헌법에 위반되었는지 이런 것 자체를 심사할 수 없도록, 헌법에 아예 명시해 놨어요. 긴급조치 위반했다고 그래서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이 긴급 조치는 위헌이다', '불법이다', 아무리 주장해 봤자 먹혀들 수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법원이 심사 자체를 못 했기 때문에… -정태호,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대통령의 판단에 따라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정지하고 처벌할 수 있다는 거야.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열흘 만에 공표된 이 유신헌법 개정안은 한달 뒤 국민투표에 부쳐져. 당시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 결과, 찬성률은 91.5%가 나와.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먼저, 유신이 내세운 명분 중 하나는 '평화통일'이었어. 유신 3개월 전,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돼. 분단 이후 남북이 처음으로 평화통일 원칙에 합의한 거야. 국민들의 통일에 대한 열망도 아주 높아졌어. 한마디로 '평화통일을 하려면 법과 체제를 바꿔야 한다', '10월 유신으로 한국적 민주주의를 이룩하자' 이런 명분으로 유신을 홍보한 거야. 유신헌법의 가장 큰 하나의 명분이 되는 것은 당시에 남북 관계가 획기적으로 변했다는 거죠. 그 이전에 남북의 어떤 대결, 특히 68년을 전후로 해서는 한반도의 안보 위기라고 부를 정도의 정말 곧 전쟁이 터질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었거든요. 그런데 이런 것들이 한순간에 갑자기 변해서 지금 남북이 대화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러한 대화 국면에서 어쨌든 우리가 북한과 제대로 대화를 하려면 체제를 바꿔야 된다, 이게 이제 가장 큰 명분이 되는 것이고. 그때 체제를 바꿀 때는 우리가 평화 통일을 지향하는 그런 헌법을 가져야 된다라고 하는 것이 이제 또 하나의 명분이 되는 거죠. -오제연,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실제로 박정희 대통령이 한 얘기가 있어. 만일 국민 여러분이 헌법 개정에 찬성치 않는다면 나는 이것을 남북 대화를 원치 않는다는 국민의 의사 표시로 받아들이고 조국 통일에 대한 새로운 방안을 모색할 것임을 아울러 밝혀두는 바입니다. -박정희, 10.17 대통령 특별선언 中 이런 선언과 함께, 유신 찬성을 위한 본격적인 홍보도 시작했어. 10월 유신, 100억 불 수출, 1,000불 소득 쭉 뻗은 도로, 기계화된 농촌, TV, 자동차까지... 잘 살려면 유신이 필요하다고 홍보하는 거야. 이것도 한 번 봐봐. 반대하면 파멸, 찬성하면 번영이래. 유신을 찬성해야 잘 살 수 있다는 거야. 그리고 효과적인 홍보 수단, 미디어도 활용했어. 이 시기에 모든 신문과 방송은 검열을 거쳐야만 했대. 혹여나 유신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가 나가면 안되니까. 문공부에서 주는 보도 자료를 한 자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써야 되니까.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적절한 법률이다', 그런 식으로 다 신문이 받아 썼었죠. '유신만이 살 길이다' 그런 구호를 신문에 꼭 넣고. 그 다음에 칼럼을 쓸 필자들 풀로 넘겨줘요, 우리 신문사에. 그래서 '이 중에 골라서 해라'. 그런 사람 외에는 쓰지 못하게 했어요. 완전히 언론 탄압을 무지막지하게 했죠 그 당시에는. 유명한 얘기가 있는데 광고 이론에 나오는데 '반복은 진실을 만든다'는 말이 있어요. 계속 반복하면 그렇게 세뇌되는 거예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요. -김동현, 당시 동아일보 기자 비상계엄이 선포된 1972년 10월 17일부터 유신 찬반 국민 투표일인 11월 21일까지, 유신 관련 좌담 방송이 398회, 유신지지 단독 해설이 218회, 유신 비전 제시 특별 프로그램이 58회 방송됐어. 이 정도면, 국민 투표에서 찬성률이 그렇게 높았던 이유가 좀 이해가 가지? 계엄 포고령에 따라 모든 집회, 시위는 금지됐어. 대학가는 계엄군이 지키고 있어. 유신을 반대하는 목소리는 들리기가 어려운 상황이야. 그렇게 비상계엄 체제 하에 유신헌법 국민 투표는 '찬성'이란 결과를 낳았어. 투표한 사람 중에서 90% 이상이 지지를 보냈으니까 '야 이건 정말 국민들이 모두 원했던 것이 아니냐' 얘기할 수도 있겠죠. 근데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역시 고려할 필요가 있겠어요. 일단 계엄령 아래에서 국민투표가 이루어졌다는 거예요. 한마디로 군대를 깔아놓고, 즉 바로 옆에 탱크, 장갑차, 무장한 군인들이 즐비한 상황에서 투표가 이루어졌다는 거죠. 두 번째가 여러 가지로 유신을 지지하고 찬양하는 목소리만이 허용됐던 그런 시절에, 정말 사람들은 그 얘기를 들을 수밖에 없고, 그 얘기 외에는 어떠한 판단의 근거도 마련돼 있지 않은 그런 상황에서는, 정부가 유도하는 대로 선거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숫자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것은 문제가 됩니다. -오제연,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그제서야 비상계엄도 해제됐어. 그렇게 유신 시대가 시작된 거야. ▲ 유신 시대의 시작과 반발 그리고 대통령 선거를 치른지 1년 만에, 8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져. 들어봤을 거야, '체육관 선거'.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대통령 선거가 이루어졌어. 당연히 유신헌법에 따라 국민은 투표를 할 수가 없어. 통일주체국민회의, 일명 '통대'의 대의원들이 대통령을 뽑아. 후보는 단 한 명, 박정희. 결과는? 찬성 2,357표, 반대표는 없어. 무효표만 2개야. 그래서 찬성률이 99.9%야. 앞에 나온 7대 대선 때 박정희 후보의 선거유세 기억나? '나를 한번 더 뽑아 주십시오' 하는 정치 연설은 오늘 이 기회가 마지막이라는 것을 확실히 말씀드립니다 라고 했던 거. 결과적으로 이 약속은 지켜졌어. 국민 앞에서 더 이상 지지를 호소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이때부터 1987년까지 무려 16년간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 직접선거가 이뤄지지 않았어. 그 문제점을 누구라도 조금만 들여다보면 알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오래갈 수가 없었던 거죠. 유신헌법에 대한 반대 투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거였죠. -정태호,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여기저기서 반발이 튀어나오기 시작해. 박정희의 라이벌, 김대중. 그가 일본에서 한 연설이 있거든. 한 번 들어봐. 요새 하고 있는 10월 유신이라는 거는 세상에 말도 안돼. 유신이 뭐야, 유신이. 일본 사람들이 100년 전에 써먹은 소리 아니요? 여러분, 다 기억하실 거예요. 재작년 선거 때 만일 이번에 박정희 정권의 종식을 짓지 못하면 이제 우리에게는 선거조차 없는 영구 집권의 총통제 시대가 온다고. 내가 몇 천 번 말했어요. 상당수 사람들이 '그래도 설마?' 그랬어. 그 설마가 사람 잡아요. 그렇게 됐어. 10월 18일 날 저는 박정희 씨의 조치를 정면으로 부인하고,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성명의 서두에 '박정희 씨의 이번 조치는 통일을 빙자해서 자기 자신의 영구집권을 획책하는 것이다' 이렇게 성명을 했습니다. -김대중 일본 하코네 연설 中 유신 발표 직후부터 김대중은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유신 반대 목소리를 냈어. 그러던 1973년 8월 8일 일본 도쿄의 한 호텔. 김대중은 호텔 스위트룸에서 약속을 마치고 막 방을 나서는 중이었어. 그 순간 웬 남자들이 나타나 김대중의 목을 낚아채고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고는 끌고 가. 중앙정보부가 김대중을 납치한 거야. 이 김대중 납치 사건은 국내외적으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게 돼. 반유신 운동에 불을 붙인 거야. 반유신 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움직인 사람들은, 대학생들이었어. 여러 학교에서 시국선언문을 발표하며 대학생들이 유신체제와의 투쟁을 선언했어. ▲ 긴급 조치의 시대 이 상황을 유신정권은 어떻게 했을까? 유신헌법에 아주 강력한 제재가 있었잖아. 바로 '긴급조치'. 1974년 1월 8일, 박정희 대통령은 긴급조치 1, 2호를 선포해. 1월 8일 박정희 대통령은 헌법 제53조에 의한 대통령 긴급 조치를 선포하여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고,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고 밝혔습니다. 이 조치에 위반하거나 비방한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며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하기로 했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유신헌법에 대해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어. 반대는 물론, 비방도 하면 안돼. 또 유언비어도 금지야. 위반하면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고, 징역이 무려 15년까지 가능해. 그리고 긴급 조치 2호는, 비상군법회의 설치에 대한 내용이야. 실제로 긴급조치 위반으로 학생들은 비상보통군법회의에 세워졌어. 긴급조치의 주된 내용들은 유신 체제를 보호하기 위한 그런 거였죠. '유신헌법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마라' '좋다 나쁘다 평가도 하지 마라' '유신헌법이 나쁘니까 개헌을 하자' 뭐 이런 얘기도 하지 마라. 그러니까 이게 민주주의의 근본 원리, 특히 국민주권 원리를 정면으로 부정한 거거든요. -정태호,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곧이어 발표된 긴급조치 3호에는 국민생활안정을 위한 조치들이 나열돼 있어. 불안해진 민심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을까? 그럼에도 여론은 심상치 않았어. 결국 박정희 대통령은 직접 나서 이야기해. 이런 판국에 전 국민이 혼연일체가 돼서 한 덩어리가 돼도 지금 이러한 난관을 뚫고 나아가기가 힘이 들고 힘이 부족한 판인데. 작년 연말부터 국내 일각에서는 일부 인사들 중에 현 체제에 대해서 정면으로 도전을 해오는가 하면 민심을 자꾸 선동을 하고 사회 혼란만을 조장하기 때문에, 그동안 수차 설득도 해보고 경고도 해 보았습니다만 설득이나 경고만 가지고는 이 사람들의 행동이 중지할 그런 뜻이 전혀 없다는 것을 판단을 해서 만부득이 대통령의 긴급조치를 발동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번에 긴급 조치가 선포된 그 배경, 이유라고 그럴까. 목적, 취지 이런 것을 여러분들이 잘 이해를 해 주시고, 적극적으로 협조를 해주십사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적극적으로 협조를 해 주시면 이 조치는 곧 필요 없게 될 것입니다. -박정희, 1974년 1월 연두 기자회견 중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은 긴급조치에 대한 영화도 만들었어. 영화 속 어머니 역할이 아주 온화한 말투로 정부의 긴급조치에 대한 입장을 줄줄 설명하곤 했어. 하지만, 유신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가. 긴급조치로 억압 받은 학생들은 더 많은 학생들과 연대를 해. 4월 3일, 대학가에서 시위를 준비한 거야. 그런데, 이를 사전에 파악한 유신정권은 대대적인 검거에 나서. 그리고 4월 3일 밤, 긴급조치 4호가 선포돼. 그 내용은 이래.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과 이에 관련되는 단체를 조직 또는 가입하거나, 활동에 동조하거나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이를 위반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긴급조치로 최대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어. 어떻게 학생들의 시위에 사형까지 언급됐을까? 여기에서 언급된 단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줄여서 '민청학련'이라 불러. 긴급조치 4호가 선포된 이유는, 바로 이거였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의 수사 상황을 발표했습니다. 과거 공산 불법단체인 인민혁명당과 제1 조총련, 국내 좌파 혁신계 기독교 학생단체, 그리고 일본 공산당원까지 포함된 약 20명의 배후 조종자가 스며들어 자금을 대는 등 학생들을 뒤에서 조종한 것이 드러났습니다. 4월 3일을 기해 폭동을 일으켜서 정부 주요기관을 점거하고 정권을 인수하려 했으며, 인혁당은 대한민국을 폭력으로 전복하고 공산정권을 수립할 목적으로 북한 괴뢰 지령에 따라 조직되고 활동한 반국가단체라고 밝혔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학생들이 북한의 조종을 받고 있고, 공산계 불법단체가 배후에 있다는 거야. 나라를 전복할 목적이래. 그런데, 이건 조작으로 밝혀졌어.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학생들의 시위를 배후세력까지 조작해서 국가전복 시도라는 시나리오를 쓴 거야. 그렇게 민청학련 사건으로 조사받은 사람만, 천 명이 넘어. 대부분 대학생들이었어. 그중 7명에게 사형이 구형됐고, 무기징역 7명, 징역 20년형이 12명이나 됐어. 이 사건의 변론을 맡았던 강신옥 변호사는 법정에서 이렇게 얘기를 했어. 법은 정치와 권력의 시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랏일을 걱정하는 애국 학생들을 빨갱이로 몰아 사형이니, 무기니 하는 형을 구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법을 악용하는 '사법 살인'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강 변호사가 이렇게 변론을 이어가는 도중, 갑자기 휴정이 선포되고 강 변호사는 연행됐어. 그날 밤, 남산 중정으로 연행된 강 변호사는 잔혹한 구타를 당했대. 그리고 결국 구속됐어. 그의 죄목은, '긴급조치 위반'이었어. ▲ 언론 통제와 저항 이런 사태들이 벌어지고 있지만 언론에선 제대로 보도하지 못했어. 학생들의 시위, 개헌운동 등은 기사가 빠지거나 최소화돼. 고문, 수사, 재판에 대한 문제점에도 침묵했어. 당시 언론사에는 기자도 아닌데 매일 출근 도장을 찍는 사람이 있다고 해. 기관원이라고, 중앙정보부에서 나온 사람이야. 기사를 빼고, 용어를 바꾸고. 중앙정보부에서 각 언론사별로 담당직원을 배치해 통제를 하는 거야. 유신 시기에 들어서서는 신문에 무슨 기사를 내지 말라, 내지 말라는 게 딱 아주 한정돼 있는데. '학생들 데모 기사는 절대로 내지 마라'. '저항하는 움직임에 대해서 아주 손끝 하나도 보도하지 말라' 이렇게 되는 거죠. -김학천, 당시 동아방송 PD 그 당시는 그 모든 걸 전부 통제하고, 누가 자살했다든지 뭐 어제 굶는다든지 어렵다든지 이런 건 기사 못 나가게 돼 있어요. 전부 다 밝은 기사만 쓰라 그러고. -김동현, 당시 동아일보 기자 보도할 때 쓰는 단어에도 제재가 있었어. 예를 들어 '물가 인상'은 '물가 현실화'. '세금 인상'은 '세제 개혁'. 묘하게 뉘앙스를 바꾼 거야. 이런 상황에 언론인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 당시에 데모하는 현장에 가면, 서울대학교에 가면 그쪽에서 써 놨어요. '개와 기자는 출입금지' 써놨어요. '기사 나가지도 않는데 왜 오는데, 올 필요 없다'고 해가지고. 그렇게 모욕을 받았어요. 그러니까 얼마나 괴로웠겠어요. 그때 보면서 '부끄럽다'는 걸 느꼈어요. 기자가 참 부끄럽다. 그걸 제대로 해서 국민에게 알려줄 의무가 있는데. '그런 걸 못하면서 말이야. 기자라고 언론이라고' 이거는 너무 창피했어요. 그때 우리들이 울었어요, 사실은… -김동현, 당시 동아일보 기자 이런 상황이 되자 언론도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 이 사진을 한번 볼래. 사진 속 족자에 적힌 글자는 '자유언론 실천선언'. 마지막 사진에 서 있는 분은 인터뷰를 해 주신 김학천 PD야. 그렇게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은 투쟁에 나섰어. 신문방송잡지에 대한 어떠한 외부 간섭도 배제한다 , 기관원의 출입을 거부한다 , 언론인의 불법 연행을 거부한다 라고 외쳤어. 그 후 매일매일이 치열한 싸움이야. 회사 건물 현관에 '기관원 출입 금지'라고 써 붙이고, 학생 시위에 대한 기사를 늘렸어. 그리고 라디오 방송에서는 비판적이고 풍자적인 멘트도 넣었어. 권력이란 무엇입니까. 한 번 잡으면 그렇게 놓기 싫은 겁니까? 라며 비판했어. 그리고 얼마 뒤, 아주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해. 저희는 동아일보에서 광고를 그만해야 할 것 같은데요. 이번 달 광고 예산이 아직 안 나와서. 광고를 더 못할 것 같은데... 무려 90% 정도의 광고가 해약돼. 그리고 12월 26일 동아일보 신문은 이렇게 발행돼. 아예 백지광고로 나간 거야. 무더기로 광고가 빠진 자리를, 그대로 보여준 거지. 그런데, 그 후로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 이건 다른 날 발행된 동아일보야. 빼곡히 채워진 광고의 정체. 격려 광고가 들어오기 시작한 거야. 대학생, 주부, 어린이, 해외 동포까지. 자발적으로 정성을 모아준 거야. '취학하는 석아, 그른 것은 절대 배우지 마라' ?아빠, 엄마 '양심에 호소하여 우리보다 참하게 살았으면 싶다'-어느 여자 직장인 '운전자와 손님이 합심하여 동아일보의 발전을 빌며'-택시 운전사와 손님 '데이트 자금으로 작은 지면을 삽니다'-순과 선 '이 나라에서 법을 공부하는 안타까운 이 마음과…' ?서울대 동창 남매 마침 그것도 이제 시민들이 성금 내듯이 그런 식으로 했으니까. 고무적이었죠. 우리를 후원하는 이런 사람들이 있구나, 우리 우군이 있구나, 우리가 외롭지 않다. 그런 걸 느꼈어요. -김동현, 당시 동아일보 기자 시민들의 격려 광고로 힘을 얻으며 저항을 이어오던 어느날, 김학천 PD는 아주 특별한 방송을 준비해. 주제는 바로, '감옥으로 보내는 편지'였어. 당시 긴급조치 위반으로 수감 중인 사람들의 가족들이 직접 쓴 편지를 방송하기로 한 거야. 방송이 시작되고, 수감 중인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어린 아들이 직접 읽어. 아버지! 난 아버지가 죄가 있어서 거기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요. 그래서... 편지는 이제 시작인데, 그 후는 꺽~꺽~ 우는 소리만 이어져. 그 다음은 자식을 감옥에 보낸 어머니의 편지였어. 아들아, 엄마가 엊그제 면회를 갔는데 면회를 시켜주지 않더구나. 내복 여러 벌 가지고 갔는데 전해주지 못했구나. 다른 재소자들이라도 입으라고 전부 두고 왔단다. 엄마는... 어머니도 더 이상 편지를 읽지 못하셔. 사무치는 울음소리만 전파를 타고 퍼져나가. 상당히 파국까지 왔다라는 생각이고, 꺾일 때 어떻게 꺾일 것인가. 어쨌든 난 아침 시간 15분, 내가 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때 뭐 감옥에 많이 들어가 있었지. 그 감옥에 아이들 또는 부모를 둔 사람들이 5분 동안 원고지 한 6~7장을 써서 읽으라고 했는데. 첫 번째 문장만 그냥 읽다가 그 다음에 다 우는 걸로 끝을 냈어요. '김학천 씨, 이거 여기서 끊을까요? 그냥 훌쩍훌쩍 울기만 하는데' 묻길래, '그냥 둬라. 그것도 메시지 아니냐'.. 한 1~2분 얘기하고 2~3분 우는 프로그램이 나갔어요. -김학천, 당시 동아방송 PD ▲ 분노한 대학생들 1972년에 유신이 시작되고 유신에 대한 저항과 이를 막으려는 조치들이 반복됐어. 긴급조치 5호와 6호는 앞서 선포된 조치들을 해제하려는 조치야. 긴급조치 해제를 위해 또 다른 긴급조치를 선포한 거야. 그리고 7호는, 고려대학교 한 학교를 휴교시키기 위해 선포됐어. 시위를 막으려고. 그리고 1975년 4월 8일. 또 한번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져. 긴급조치 4호 기억나지? 대학생들이 북한 세력의 조종을 받아 국가를 전복할 목적이라며 사형을 구형했던 거. 이날은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 세력으로 지목됐던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들의 최종 판결이 내려지는 날이야. 그리고 8명의 관련자들에게 최종적으로 사형이 선고됐어. 다음날, 사형 선고를 받은 이들의 가족들이 아침 일찍 구치소로 향했어. 구속 이후 1년 가까이 만나지 못해서, 형이 확정됐으니 면회라도 가능하겠지 싶어 만나러 간거야. 그날 찍힌 사진이 있어. 통곡하는 가족들. 이미 사형이 집행된 거야. 대법원 판결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 됐어. 이날은 사법 사상 암흑의 날로 기록돼. 훗날, 이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 사람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어. 이틀 뒤 서울대 백양나무 옆 잔디밭에 3백 명 가량의 학생들이 모였어. 그리고, 한 청년이 이들 앞으로 걸어 나와. 청년의 이름은 김상진이야. 서울대학교에 재학중이었던 상진이는 친구들과 함께 유신 반대 단식 집회를 준비하고 있었어. 김상진 학생에 대해 들어볼게. 우리 상진이가 착하고 진짜 속 썩이는 거 없었어요. 아버지 어머니 말을 잘 들었지. -김상운, 김상진 형 조용했습니다. 얌전하다고 할까요. 차분한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저하고 서울대학교 같은 과를 입학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유신헌법의 그 문제점들이 사회적으로 자꾸 농축돼 갔던 거죠. 75년도부터가 거의 폭발의 단계에 왔습니다. 그 폭발의 불쏘시개를 한 게 제2차 인혁당 사건입니다. 그 사건이 발생해서 8명이 사형 집행이 된 적이 있죠. 상진이가 매우매우 분노했습니다. -이호선, 김상진 친구 상진이는 학생들 앞에 서서 준비해 온 글을 읽기 시작해. 글의 제목은 '양심선언문'이야. 당시 상진이의 목소리를 녹음한 기록이 있어. 우리를 대변한 동지들은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신음하고 있고, 무고한 백성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가고 있다. 합법을 가장한 유신헌법의 모든 부조리와 악을 고발한다. 우리는 유신헌법의 자기중심적 이기성을 고발한다. 학우여 아는가! 민주주의는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투쟁의 결과라는 것을. 이것이 민족과 역사를 위하는 길이고, 이것이 우리 사랑스러운 조국의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길이며, 이것이 영원한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길이라면. 이 보잘 것 없는 생명 바치기에 아까움이 없노라. 나의 앞으로의 행동에 대해서 여러분은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완전한 이성을 되찾아서, 우리가 해야 할 바를 갖다가 명실상부하게 이끌어 나가길 바란다... -김상진의 양심선언문, 1975년 4월 11일 녹음분을 들어보면, 상진이의 이 말을 끝으로 갑자기 현장이 소란스러워져.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건 방송에는 처음 하는 얘기들입니다. 이걸 꼭 기록을 해주셔야 됩니다. 그 계단에서 이런 얘기를 저한테 했군요. '호선아 나는 이제 나의 신념을, 각오를 행동으로 표현할게. 유신이 없어지는 날, 나를 기억해 달라'는 그런 식의 얘기였습니다. 상진이가 서서 낭독하는 그 자리에서 10여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제가 앉아 있었어요. 상진이가 양심선언문을 읽자마자 가방에서 과도를 꺼냈습니다... 5초만 빨라도 됐습니다. 5초만 빨라도 됐어.. 칼로 찌르고 앞으로 넘어지기 직전에 제가 뒤에서 붙잡았습니다. -이호선, 김상진 친구 호선이는 상진이와 함께 병원으로 이동했어. 그 택시 안에서 상진이가 이런 이야기를 했대. 호선아, 애국가 불러줘 호선이는 큰 목소리로 애국가를 불렀어. 그리고 상진이는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어. ▲ 긴급조치 9호 김상진 열사의 죽음 뒤로, 저항의 목소리를 더욱 거세졌어. 그로부터 한 달 뒤, 긴급조치 8호로 긴급조치 7호가 해제되고, 동시에 긴급조치 9호가 선포돼. 유언비어 안 되고, 유신헌법에 대해 말해서도 안 되고, 시위는 물론 학생의 정치 관여도 안돼. 긴급 조치 9호는 어떤 특정한 사건에 대응하기 위해서 발동한 것이 아니라 그냥 항시적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유신 체제에 대해서 저항은 물론이고 어떠한 비판도 할 수 없도록 결국에는 아주 광범위하고 포괄적으로 유신에 대한 반대를 불허하는 그러한 조치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이런 것들을 우리가 보통 '긴급조치의 종합판'이다… -오제현,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이렇게 선포된 긴급조치 9호는 오랫동안 국민의 숨통을 조여왔어. 무려 4년 7개월 동안. 긴급조치가 9호가 이렇게 오래 지속되는 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때는 1978년 11월. 전북에서 꽤 잘 나간다는 한 학원이야. 이 학원에서 영어강사로 일하는 차봉현 씨. 봉현 씨는 여기저기 스카우트가 될 정도로 인기 강사였대. 봉현 씨는 영어뿐 아니라 정치 경제 윤리 강의도 하며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어. 어느날, 봉현 씨는 여느 날처럼 학원으로 출근을 했어. 수업 내용을 살펴보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남자 2명이 들어와. 학원으로 경찰들이 들이닥친 거야. 경찰이 물어보는 거예요. '당신이 유신 헌법 철폐하고 유신 헌법 없애자고 학생들 앞에 주장 안 했냐' 이제 이렇게 나온 거예요. '나는 절대 그런 말 안 했다' 내가 사회의 지도자가 아니고 내가 뭐 정당의 정당인도 아니고 내가 뭐 정치를 하는 사람도 아니고. 절대 부인한 거예요. -차봉현, 당시 영어학원 강사 봉현 씨가 강의 중 유신헌법 철폐를 주장했다는 거야. 봉현 씨는 강의 때 이렇게 얘기를 했대. 국회의 여당 의원 수가 많잖아요. 그건 헌법으로 설치된 통일주체국민회의가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뽑기 때문이에요. 이런 말이 문제 될 거라곤 생각도 못했어. 그 후, 봉현 씨는 여기저기 끌려 다니며 폭행을 당했어. 날이 갈수록 폭행의 강도는 점점 심해졌대. 둘이서 이제 때리기 시작한 거예요. 주먹으로 뺨도 때리고. 취조하는 실인데 거기 데리고 가서 옷을 벗겨요. 옷을 벗겨 가지고 빨가 벗겨서 몽둥이로 이제 때리는 거예요 둘이서. 또 무릎을 꿇고 앉으라고 해서 무릎 사이에 나무를 놔두고 거기서 밟아버려요. 그러면 무릎이 팍 깨져요. 그런 고문을 당했어요. 경찰서 정보과실에서. '나는 비판 정도를 했다' '헌법을 폐지해야 한다.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 이런 말은 절대 한 것 없다. 근데 그게 안 통한다니까. 자기가 써갖고 와서 이렇게 '이대로 해달라' 그러니까 내가 이제 안 맞으려고 사인해 줬죠. -차봉현, 긴급조치 피해자 자백을 받기 위해 봉현 씨를 고문한 거야. 봉현 씨는 1년 6개월의 형을 선고받았어. 근데 이런 일을 겪은 건 봉현 씨 뿐만이 아니야. 긴급조치 9호로 처벌받은 사례들을 보여줄게. 박정희는 군인 출신이기 때문에 정치를 잘할 수 없어. 100억 불 수출이라 하면서도 수입에 대해서는 은폐하고 있잖아. 언론의 자유도 없는 거야. 이런 말을 했다고 징역 8년을 선고받았어. 또 어떤 남자는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박정희 정치는 뭣~도 아니다 이렇게 외쳤어. 판결은 징역 1년. 자기야, 대통령이 내가 잘 아는 친구 언니와 애인 사이래 라는 가벼운 말. 이건 징역 1년을 선고받았어. 긴급조치 9호는 술 먹고 말 한마디 잘못해도 잡혀간다 해서 '막걸리 보안법'이라 불렸어. 심지어 노래도 마음대로 못 불렀어. 국가의 안전 수호와 사회 질서를 문란케 하는 대중문화가 있다는 거야. 그렇게 취한 조치가 '금지곡'. 1975년 한 해 동안 금지된 노래가 국내 가요만 222곡이야. 지금도 들으면 알만한 곡들이 이때 무더기로 금지가 돼. 김추자의 '거짓말이야'. 이 노래는 1971년 발매돼 아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어. 이 노래가 갑자기 금지된 이유는 '거짓말이야'라는 가사 때문에. '가사 내용 불신 조장', 그리고 창법도 저속하대. 신중현의 '미인'. 너무 유명한 노래지. '신중현과 엽전들'의 '미인'은 1974년에 발매돼 약 40만 장 이상의 앨범 판매를 올린 대히트곡이야. 이 곡이 금지된 이유는, 저속한 가사, 퇴폐한 곡이래. 어디가 저속하다는 걸까?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 이 가사를 학생들이 '한 번 하고 두 번 하고 자꾸만 하고 싶네~' 이렇게 개사해서 불렀대. 박정희 대통령이 대통령을 한 번 하고 두 번 한다고, 그렇게 비꼬고 풍자하니까 금지곡이 된 거 아니냐 라는 얘기가 있어. 그리고, 금지곡 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곡이 한 곡 더 있지. 바로 김민기의 '아침이슬'. 양희은이 부른 '아침이슬'이 많이 알려져 있지. 이 노래를 작사, 작곡한 사람이 바로 김민기야. 이 곡이 금지된 이유는, 없어. 기록에 금지 사유가 아예 적혀 있지 않아. 보통 이렇게 금지곡이 되려면 그 옆에 금지 사유가 있어야 돼요. 아무리 엉망으로 하더라도 사유가 있어야 되잖아요. 근데 '아침이슬'은 금지 사유가 없어요. 이걸 대학생들이 시위에 불렀다고 금지를 시키기에는 너무 논리가 옹색한 거죠. 금지 사유가 없어. -강헌, 음악평론가 유신 반대 시위 현장에서 많은 학생들이 김민기의 노래를 불렀어. 그렇게 김민기의 노래는 모두 금지곡이 되었고 그는 보안사 등 여기저기를 끌려 다니며 조사를 받고 활동 또한 탄압을 받았어. 금지라는 행위, 검열이라는 행위가 뭐가 나쁘냐면요. '상상력에 제한이 가해져서는 안 된다'라는 이유인 겁니다. 결국 검열은 상상력의 잠재력을 사실은 원천적으로 파괴시키는 행위예요. 알아서 기게 만드는 행위예요. 그걸 알아서 기는 예술가들이 어떤 작품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결국 그런 표현의 자유를 물리적인 공권력으로 억압한다는 얘기는 그냥 간단한 얘기예요. 그냥 단순히 '이 노래 부르지 마, 이 영화 보지 마, 이 책 읽지마'로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이것은 기본적으로 민주주의가 보장하고 있는, 헌법이 보장하는 모든 기본권이 '전부 구금될 수 있다'는 얘기이고 실제로 그렇게 됩니다. -강헌, 음악평론가 ▲ 유신의 종말 말 한 마디 조심하고, 노래도 마음대로 못 하는 시대는 몇 년 간 이어져. 그러던 중, 1979년 민중의 불만이 폭발하는 사건들이 일어나. 'YH 사건' 혹시 들어봤어? 8월 9일, 가발공장이었던 YH무역의 일방적인 폐업 공고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이 당시 야당인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이게 돼. 여공들의 호소를 받아 주고 당사로 받아준 사람이, 당시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야. 하지만, 곧 야당 당사에 경찰이 투입돼. 농성을 하던 노동자들을 경찰은 무차별 폭력과 강제 연행으로 진압했어. 이를 지켜 본 김영삼 총재는 박정희 정권과의 정면대결에 들어가. 그러다 김영삼 총재는 국회의원 제명을 당해. 제명된 후 이렇게 말했지. 아무리 닭의 목을 비틀지라도 새벽은 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10월 16일 부산. 유신철폐! 독재타도! 를 외치며, 김영삼의 정치적 본거지였던 부산 시민들이 들고 일어났어. 부산대에서 수백 명으로 시작된 시위는 수천 명으로 늘어났고, 결국 수 만명의 군중이 모였어. 그리고 부산에 비상계엄이 선포돼. 부산 시내에 탱크가 등장했어. 그러나 시민들은 물러서지 않았고 시위는 마산으로까지 번졌어. 바로 '부마항쟁'이야. 김재규의 법정 진술에 따르면, 부마항쟁을 보고 받은 박정희 대통령이 이런 말을 했다는 거야. 이제부터 사태가 악화되면 내가 발포 명령을 하겠다. 그리고 부마항쟁 열흘 뒤인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열린 연회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에 맞아 사망해. 이렇게 유신 시대는 끝을 맞게 돼.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궁정동 안가. 유신헌법의 초안이 작성된 장소 어디라고 했지? 그래 궁정동 안가. 거기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며 길고 길었던 유신 시대는 끝이 났어. 7년간 이어진 유신체제. 그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지. 언론의 자유를 위해 싸운 분들은 마지막까지 철야 농성을 하며 저항했지만, 결국 회사에서 강제로 끌려 나왔어. 당시 100 명이 넘는 언론인이 해임을 당하게 돼. 긴급조치 9호로 재판을 받던 학원강사 봉현 씨는 박정희의 사망 후 최종 면소 판결을 받고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어. 하지만 다시 강사로 취업할 수는 없었다고 해. 긴급조치는 30년이 훨씬 지나 2000년대에 들어서야 위헌 판결이 내려졌어. 2010년 대법원은 긴급조치 1호가 유신헌법, 현행헌법에 위험이라고 판단했고, 그 이후 긴급조치 4호, 9호 역시 위헌이라 했어. 2013년 헌법재판소에서는 긴급조치 1호, 2호, 9호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어. 그리고 2018년 대법원에서는 1972년 비상 계엄 포고령에 대해 이렇게 판단했어. 당시의 국내 정치 상황 및 사회 상황이 계엄법에서 정한 '군사상 필요할 때'에 해당한다고 할 수 없다. 계엄 포고는 헌법과 법률에서 정한 발동 요건을 갖추지 못한 채 발령되었고, 구 헌법, 현행 헌법, 구 계엄령에 위배되어 위헌이고 위법하여 무효이다. 노벨문학상 수상한 한강 작가가 이런 말을 했어.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라고.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현재도 언젠간 과거가 될 거야. 현재가 어떻게 기록될지는, 지금 우리의 몫이지 않을까?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
[꼬꼬무 찐리뷰]53년 전에도 '비상계엄' 있었다…박정희 유신시대와 긴급조치의 진실
등록일2025.03.14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13일 방송된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방송인 홍석천, 배우 박효주, 아나운서 이인권이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서울 한복판에 나타난 탱크 때는 53년 전 서울, 평범한 가을날 저녁이야. 직장인들은 퇴근을 서두르고, 동네 곳곳에선 저녁을 준비하는 음식냄새가 솔솔 풍기고 있어. 그런데 그때 갑자기, 탱크를 몰고 중무장한 군인들이 서울 도심 한복판에 나타났어. 당시 태평로에 있던 국회의사당, 그리고 광화문 근처 중앙청에 서 있는 탱크의 모습이야. 시간은 저녁 7시, TV와 라디오를 통해 깜짝 놀랄만한 소식이 전해져. 박정희 대통령 각하는 10월 17일 오후 7시를 기해 비상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1972년 10월 17일 19시를 기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현행 헌법의 일부 조항 효력을 정지시킨다. 이와 같은 비상조치를 국민 앞에 선포한 박 대통령 각하는 우리 모두 일치단결하여 민주제도의 건전한 발전과 조국 통일의 기원이 성취되는 그날까지 힘차게 전진해 나갈 것을 촉구했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이 선포된 거야. 비상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있을 때 선포할 수 있어. 보통 이제 한국에서 비상계엄은 어떤 굉장히 큰 사회 혼란기나 아니면 6.25 전쟁과 같은 정말 전시에 주로 선포가 됐어요. 그런데 이 1972년 10월 17일에 선포된 비상계엄은 사실은 굉장히 평온한 때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때에 선포가 됐고.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혼란이라든지 어떤 위기라든지 뭐 전시라든지 이런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던 시기인데 느닷없이, 그야말로 느닷없이 비상계엄이 선포가 되었던 거죠. -오제연,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이렇게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앞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해줄게. ▲비상계엄과 특별선언 박정희 대통령은 비상계엄과 함께 '10.17 특별 선언'을 발표했어. 그 내용은 이래. 1972년 10월 17일 19시를 기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현행헌법의 일부 조항 효력을 정지시킨다. 일부효력이 정지된 헌법조항의 기능은 현행헌법의 국무회의가 수행한다. 비상국무회의는 1972년 10월 27일까지 조국의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헌법개정안을 공고하며 이를 공고한 날로부터 1개월 이내에 국민투표에 부쳐 확정시킨다. 헌법개정안이 확정되면 개정된 헌법절차에 따라 늦어도 금년 연말 이전에 헌정질서를 정상화시킨다. 헌법도 바꾸고, 국회를 해산하겠다는 거야. 아까 사진 봤지? 국회의사당 정문을 딱 가로막고 있는 탱크. '국회 해산'이란 게 가능한 걸까? 당시에도 대통령에게 국회해산권은 없었대. 그때도 사실은 헌법에 의하면 할 수가 없는 거였고, 지금도 역시 뭐 헌법에 의하면 국회 해산권을 갖고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할 수가 없는 거죠.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국회해산권이 없는 대통령이 국회를 그냥 임의로 해산시켜버린 거죠. 군인들이 쫙 깔린 상태에서 뭐 그런 상태에서는 사실 기존 헌법에 어떤 조항이나 범위나 이런 것들에 구애받지 않고, 대통령이 임의로 자신의 권력을 행사할 수가 있었던 거죠. -오제연,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그때도 국회는 계엄 해제를 요구할 수 있었어. 그런데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초법적 조치로 국회를 해산시켜버린 거야. 그래서 해제할 수 없었어. 설사 국회가 해산되지 않았어도, 당시 국회엔 박정희 대통령이 소속되어 있는 여당 의원이 더 많았어. 그러니 야당만으로는 계엄 해제 요구가 어려운 상황이지. 아무리 그래도, 반발이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주요 정치인들이 가택 연금을 당해. 대문 앞을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거야. 게다가, 느닷없이 끌려온 사람들이 옷이 벗겨진 채 사정없이 구타를 당해. 몽둥이질에 잠도 재우지 않고 물고문까지 이어져. 이렇게 고문을 당한 사람들은, 국회의원들이야. 이런 국회의원들에겐 공통점이 하나 있었어. 바로 '블랙리스트'. 비상계엄 한 달 전, 야당 의원들의 이름이 있는 블랙리스트 명단이 만들어졌다고 해.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블랙리스트에 적힌 사람 가운데 13명의 야당 의원들을 보안사에서 끌고 갔다는 거야. 이런 일들은 비상계엄 선포 후, 바로바로 진행됐어. 이렇게 국회도 해산하고, 헌법도 바꾸겠다고 해. 여기서 끝이 아니야. 얼마 뒤에 대통령 선거도 해. 불과 1년 전, 7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거든. 근데 임기 1년 만에 또 대통령 선거를 하는 거야. 왜 그랬을까? ▲ 1년 만에 다시 한 대통령 선거 3년 전인 1969년, 박정희 정권은 헌법을 개정했어. '3선 개헌'이라고 들어봤어? 헌법 제 69조 3항 '대통령의 계속 재임은 3기에 한한다'. 대통령을 3번까지 할 수 있다는 거야. 원래는 두 번까지만 할 수 있었거든. 이렇게 5대 6대 대통령을 역임한 박정희 대통령은 이 헌법 개정으로 3선에 도전하게 돼. 그리고 3선 개헌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하며 등장한 대선 라이벌이 있어. 바로 47살의 젊은 정치인, 김대중 후보. 두 후보의 경쟁은 엄청났어. 여러분 이번에 정권교체를 하지 못하면 이 나라는 박정희 씨의 영구 집권의 총통 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박정희 씨는 '3선 개헌은 절대로 안 한다', '나보고 3선 개헌한다는 것은 야당 놈들의 모략이다' 이렇게 말했어요. 그러더니 2년이 못 가서 재작년에 절대로 안 한단 3선 개헌을 정반대로 절대로 해 버렸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헌법을 고칠 때는 앞으로 이 나라에서 누구든 자기 한 사람의 영구집권을 위해서 헌법을 이리 고치고 저리 고치고 하는 일은 영원히 못 하도록 분명히 하는 것을 여러분에게 내가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김대중 후보의 유세 연설 中 유권자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에게 분명히 말씀드리거니와, '나를 대통령으로 한번 더 뽑아 주십시오' 하는 이런 정치 연설은 오늘 이 기회가 마지막 연설이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말씀드립니다. 지난 5대, 6대 대통령 선거에 있어서 유권자 여러분들은 이 사람을 대통령으로 두 번 뽑아 주셨습니다. 이번만 여러분들이 한번 더 이 사람을 지지를 해주시면, 일할 수 있는 그런 뒷받침을 해 주시면, 앞으로 4년 동안 여러분들을 위해서 있는 정력을 다 해서, 한번 멋있는 수도 서울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정희 후보의 유세 연설 中 그럼, 선거 결과 어땠을까? 결과는, 박정희의 승리였어. 53.2% 대 45.3%의 차이야. 서울에서는 김대중 후보가 앞서기도 했어. 그리고 한달 후, 박정희 대통령의 여당인 민주공화당이 113석, 야당인 신민당이 89석을 차지하면서, 그전에 비해 야당의 의석수가 늘어났어. 김종필 증언록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해. 그 다음엔 김대중이 될지도 몰라. 그러니 내가 좀 특수한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 그 '특수한 것'이 뭘까? 박정희 대통령 취임 1년 뒤인 1972년 5월. '풍년사업'이란 이름의 은밀한 작업이 진행돼. 이름만 보면 농업 관련 사업 같지 않아? 근데, 그 작업이 진행된 장소는 바로 여기야. 일명 '궁정동 안가'라 불리는 곳이야. '안가'는 안전가옥, 이곳은 대통령의 안전가옥이야. 아주 비밀스러운 곳이지. 여기서 뭘 했냐. 대만 총통제, 스페인 총통제, 프랑스 드골 헌법 등 해외사례를 연구하고 있어. 왜 이런 사례들을 연구할까? 대만의 총통이었던 장제스, 스페인 총통 프랑코, 두 사람 모두 본인들이 죽으면서 그 임기가 끝나. 종신 집권을 했다는 거야. 그렇게 은밀하게 진행된 풍년사업의 결과는, 다섯 달 뒤인 1972년 10월 세상에 공개됐어. '유신헌법'이라는 이름으로. ▲ 유신헌법 10월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헌법을 개정하고. 이게 바로 '10월 유신'이야. 유신, 사전적 의미는, 낡은 제도를 고쳐 새롭게 한다는 거야. 유신헌법에는 대통령이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카드들이 있었어. 먼저 '집권' 카드. 대통령 집권에 대한 강력한 변화가 생겨.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지 않는다는 얘기야. 그럼, 누가 뽑냐? 통일주체국민회의, 일명 '통대'라고 하는 기관에서 대통령을 선출하겠다는 거야. 그런데, 이 '통대'의 의장이 누굴까? 대통령 본인이야. 대통령이 의장인 기관에서 대통령을 뽑겠다는 거지. 대통령 임기도 4년에서 6년으로 늘어나. 그리고 대통령 중임 제한 폐지. 사실상 영구집권이 가능해진 거야. 두번째는 '밸런스' 카드. 권력의 밸런스를 파괴하는 카드야. 대통령에게 '국회 해산권'이 생겼어. 10.17 비상계엄 때는 국회 해산권이 없었다고 했잖아? 그걸 만든 거야. 이제 대통령이 입법권을 가진 국회를 해산할 수 있어. 그리고 국회의원 3분의 1을 대통령이 추천하고 이를 '통대'에서 선출하겠대. 게다가 대통령이 사실상 사법부의 모든 법관을 임명할 수 있게 됐어.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이 입법부에 사법부까지 손아귀에 쥐는 거야. 3권분립의 파괴야. 마지막 카드는 아주 강력한 힘이야. 바로 '긴급조치'야. 유신헌법 제53조 1항을 보면, '국정 전반에 걸쳐 필요한 긴급조치를 할 수 있다'는 거야. 필요한 조치라는 게, 어디까지 가능한 걸까? 무서운 거는 헌법에 규정돼 있는 국민의 기본권의 효력을 정지시킬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부여했죠. 조치에 대해서는 사법 심사를 할 수가 없도록 해놨어요. 그것이 헌법에 위반되었는지 이런 것 자체를 심사할 수 없도록, 헌법에 아예 명시해 놨어요. 긴급조치 위반했다고 그래서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이 긴급 조치는 위헌이다', '불법이다', 아무리 주장해 봤자 먹혀들 수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법원이 심사 자체를 못 했기 때문에… -정태호,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대통령의 판단에 따라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정지하고 처벌할 수 있다는 거야.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열흘 만에 공표된 이 유신헌법 개정안은 한달 뒤 국민투표에 부쳐져. 당시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 결과, 찬성률은 91.5%가 나와.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먼저, 유신이 내세운 명분 중 하나는 '평화통일'이었어. 유신 3개월 전,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돼. 분단 이후 남북이 처음으로 평화통일 원칙에 합의한 거야. 국민들의 통일에 대한 열망도 아주 높아졌어. 한마디로 '평화통일을 하려면 법과 체제를 바꿔야 한다', '10월 유신으로 한국적 민주주의를 이룩하자' 이런 명분으로 유신을 홍보한 거야. 유신헌법의 가장 큰 하나의 명분이 되는 것은 당시에 남북 관계가 획기적으로 변했다는 거죠. 그 이전에 남북의 어떤 대결, 특히 68년을 전후로 해서는 한반도의 안보 위기라고 부를 정도의 정말 곧 전쟁이 터질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었거든요. 그런데 이런 것들이 한순간에 갑자기 변해서 지금 남북이 대화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러한 대화 국면에서 어쨌든 우리가 북한과 제대로 대화를 하려면 체제를 바꿔야 된다, 이게 이제 가장 큰 명분이 되는 것이고. 그때 체제를 바꿀 때는 우리가 평화 통일을 지향하는 그런 헌법을 가져야 된다라고 하는 것이 이제 또 하나의 명분이 되는 거죠. -오제연,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실제로 박정희 대통령이 한 얘기가 있어. 만일 국민 여러분이 헌법 개정에 찬성치 않는다면 나는 이것을 남북 대화를 원치 않는다는 국민의 의사 표시로 받아들이고 조국 통일에 대한 새로운 방안을 모색할 것임을 아울러 밝혀두는 바입니다. -박정희, 10.17 대통령 특별선언 中 이런 선언과 함께, 유신 찬성을 위한 본격적인 홍보도 시작했어. 10월 유신, 100억 불 수출, 1,000불 소득 쭉 뻗은 도로, 기계화된 농촌, TV, 자동차까지... 잘 살려면 유신이 필요하다고 홍보하는 거야. 이것도 한 번 봐봐. 반대하면 파멸, 찬성하면 번영이래. 유신을 찬성해야 잘 살 수 있다는 거야. 그리고 효과적인 홍보 수단, 미디어도 활용했어. 이 시기에 모든 신문과 방송은 검열을 거쳐야만 했대. 혹여나 유신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가 나가면 안되니까. 문공부에서 주는 보도 자료를 한 자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써야 되니까.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적절한 법률이다', 그런 식으로 다 신문이 받아 썼었죠. '유신만이 살 길이다' 그런 구호를 신문에 꼭 넣고. 그 다음에 칼럼을 쓸 필자들 풀로 넘겨줘요, 우리 신문사에. 그래서 '이 중에 골라서 해라'. 그런 사람 외에는 쓰지 못하게 했어요. 완전히 언론 탄압을 무지막지하게 했죠 그 당시에는. 유명한 얘기가 있는데 광고 이론에 나오는데 '반복은 진실을 만든다'는 말이 있어요. 계속 반복하면 그렇게 세뇌되는 거예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요. -김동현, 당시 동아일보 기자 비상계엄이 선포된 1972년 10월 17일부터 유신 찬반 국민 투표일인 11월 21일까지, 유신 관련 좌담 방송이 398회, 유신지지 단독 해설이 218회, 유신 비전 제시 특별 프로그램이 58회 방송됐어. 이 정도면, 국민 투표에서 찬성률이 그렇게 높았던 이유가 좀 이해가 가지? 계엄 포고령에 따라 모든 집회, 시위는 금지됐어. 대학가는 계엄군이 지키고 있어. 유신을 반대하는 목소리는 들리기가 어려운 상황이야. 그렇게 비상계엄 체제 하에 유신헌법 국민 투표는 '찬성'이란 결과를 낳았어. 투표한 사람 중에서 90% 이상이 지지를 보냈으니까 '야 이건 정말 국민들이 모두 원했던 것이 아니냐' 얘기할 수도 있겠죠. 근데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역시 고려할 필요가 있겠어요. 일단 계엄령 아래에서 국민투표가 이루어졌다는 거예요. 한마디로 군대를 깔아놓고, 즉 바로 옆에 탱크, 장갑차, 무장한 군인들이 즐비한 상황에서 투표가 이루어졌다는 거죠. 두 번째가 여러 가지로 유신을 지지하고 찬양하는 목소리만이 허용됐던 그런 시절에, 정말 사람들은 그 얘기를 들을 수밖에 없고, 그 얘기 외에는 어떠한 판단의 근거도 마련돼 있지 않은 그런 상황에서는, 정부가 유도하는 대로 선거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숫자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것은 문제가 됩니다. -오제연,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그제서야 비상계엄도 해제됐어. 그렇게 유신 시대가 시작된 거야. ▲ 유신 시대의 시작과 반발 그리고 대통령 선거를 치른지 1년 만에, 8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져. 들어봤을 거야, '체육관 선거'.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대통령 선거가 이루어졌어. 당연히 유신헌법에 따라 국민은 투표를 할 수가 없어. 통일주체국민회의, 일명 '통대'의 대의원들이 대통령을 뽑아. 후보는 단 한 명, 박정희. 결과는? 찬성 2,357표, 반대표는 없어. 무효표만 2개야. 그래서 찬성률이 99.9%야. 앞에 나온 7대 대선 때 박정희 후보의 선거유세 기억나? '나를 한번 더 뽑아 주십시오' 하는 정치 연설은 오늘 이 기회가 마지막이라는 것을 확실히 말씀드립니다 라고 했던 거. 결과적으로 이 약속은 지켜졌어. 국민 앞에서 더 이상 지지를 호소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이때부터 1987년까지 무려 16년간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 직접선거가 이뤄지지 않았어. 그 문제점을 누구라도 조금만 들여다보면 알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오래갈 수가 없었던 거죠. 유신헌법에 대한 반대 투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거였죠. -정태호,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여기저기서 반발이 튀어나오기 시작해. 박정희의 라이벌, 김대중. 그가 일본에서 한 연설이 있거든. 한 번 들어봐. 요새 하고 있는 10월 유신이라는 거는 세상에 말도 안돼. 유신이 뭐야, 유신이. 일본 사람들이 100년 전에 써먹은 소리 아니요? 여러분, 다 기억하실 거예요. 재작년 선거 때 만일 이번에 박정희 정권의 종식을 짓지 못하면 이제 우리에게는 선거조차 없는 영구 집권의 총통제 시대가 온다고. 내가 몇 천 번 말했어요. 상당수 사람들이 '그래도 설마?' 그랬어. 그 설마가 사람 잡아요. 그렇게 됐어. 10월 18일 날 저는 박정희 씨의 조치를 정면으로 부인하고,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성명의 서두에 '박정희 씨의 이번 조치는 통일을 빙자해서 자기 자신의 영구집권을 획책하는 것이다' 이렇게 성명을 했습니다. -김대중 일본 하코네 연설 中 유신 발표 직후부터 김대중은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유신 반대 목소리를 냈어. 그러던 1973년 8월 8일 일본 도쿄의 한 호텔. 김대중은 호텔 스위트룸에서 약속을 마치고 막 방을 나서는 중이었어. 그 순간 웬 남자들이 나타나 김대중의 목을 낚아채고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고는 끌고 가. 중앙정보부가 김대중을 납치한 거야. 이 김대중 납치 사건은 국내외적으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게 돼. 반유신 운동에 불을 붙인 거야. 반유신 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움직인 사람들은, 대학생들이었어. 여러 학교에서 시국선언문을 발표하며 대학생들이 유신체제와의 투쟁을 선언했어. ▲ 긴급 조치의 시대 이 상황을 유신정권은 어떻게 했을까? 유신헌법에 아주 강력한 제재가 있었잖아. 바로 '긴급조치'. 1974년 1월 8일, 박정희 대통령은 긴급조치 1, 2호를 선포해. 1월 8일 박정희 대통령은 헌법 제53조에 의한 대통령 긴급 조치를 선포하여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고,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고 밝혔습니다. 이 조치에 위반하거나 비방한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며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하기로 했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유신헌법에 대해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어. 반대는 물론, 비방도 하면 안돼. 또 유언비어도 금지야. 위반하면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고, 징역이 무려 15년까지 가능해. 그리고 긴급 조치 2호는, 비상군법회의 설치에 대한 내용이야. 실제로 긴급조치 위반으로 학생들은 비상보통군법회의에 세워졌어. 긴급조치의 주된 내용들은 유신 체제를 보호하기 위한 그런 거였죠. '유신헌법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마라' '좋다 나쁘다 평가도 하지 마라' '유신헌법이 나쁘니까 개헌을 하자' 뭐 이런 얘기도 하지 마라. 그러니까 이게 민주주의의 근본 원리, 특히 국민주권 원리를 정면으로 부정한 거거든요. -정태호,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곧이어 발표된 긴급조치 3호에는 국민생활안정을 위한 조치들이 나열돼 있어. 불안해진 민심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을까? 그럼에도 여론은 심상치 않았어. 결국 박정희 대통령은 직접 나서 이야기해. 이런 판국에 전 국민이 혼연일체가 돼서 한 덩어리가 돼도 지금 이러한 난관을 뚫고 나아가기가 힘이 들고 힘이 부족한 판인데. 작년 연말부터 국내 일각에서는 일부 인사들 중에 현 체제에 대해서 정면으로 도전을 해오는가 하면 민심을 자꾸 선동을 하고 사회 혼란만을 조장하기 때문에, 그동안 수차 설득도 해보고 경고도 해 보았습니다만 설득이나 경고만 가지고는 이 사람들의 행동이 중지할 그런 뜻이 전혀 없다는 것을 판단을 해서 만부득이 대통령의 긴급조치를 발동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번에 긴급 조치가 선포된 그 배경, 이유라고 그럴까. 목적, 취지 이런 것을 여러분들이 잘 이해를 해 주시고, 적극적으로 협조를 해주십사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적극적으로 협조를 해 주시면 이 조치는 곧 필요 없게 될 것입니다. -박정희, 1974년 1월 연두 기자회견 중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은 긴급조치에 대한 영화도 만들었어. 영화 속 어머니 역할이 아주 온화한 말투로 정부의 긴급조치에 대한 입장을 줄줄 설명하곤 했어. 하지만, 유신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가. 긴급조치로 억압 받은 학생들은 더 많은 학생들과 연대를 해. 4월 3일, 대학가에서 시위를 준비한 거야. 그런데, 이를 사전에 파악한 유신정권은 대대적인 검거에 나서. 그리고 4월 3일 밤, 긴급조치 4호가 선포돼. 그 내용은 이래.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과 이에 관련되는 단체를 조직 또는 가입하거나, 활동에 동조하거나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이를 위반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긴급조치로 최대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어. 어떻게 학생들의 시위에 사형까지 언급됐을까? 여기에서 언급된 단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줄여서 '민청학련'이라 불러. 긴급조치 4호가 선포된 이유는, 바로 이거였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의 수사 상황을 발표했습니다. 과거 공산 불법단체인 인민혁명당과 제1 조총련, 국내 좌파 혁신계 기독교 학생단체, 그리고 일본 공산당원까지 포함된 약 20명의 배후 조종자가 스며들어 자금을 대는 등 학생들을 뒤에서 조종한 것이 드러났습니다. 4월 3일을 기해 폭동을 일으켜서 정부 주요기관을 점거하고 정권을 인수하려 했으며, 인혁당은 대한민국을 폭력으로 전복하고 공산정권을 수립할 목적으로 북한 괴뢰 지령에 따라 조직되고 활동한 반국가단체라고 밝혔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학생들이 북한의 조종을 받고 있고, 공산계 불법단체가 배후에 있다는 거야. 나라를 전복할 목적이래. 그런데, 이건 조작으로 밝혀졌어.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학생들의 시위를 배후세력까지 조작해서 국가전복 시도라는 시나리오를 쓴 거야. 그렇게 민청학련 사건으로 조사받은 사람만, 천 명이 넘어. 대부분 대학생들이었어. 그중 7명에게 사형이 구형됐고, 무기징역 7명, 징역 20년형이 12명이나 됐어. 이 사건의 변론을 맡았던 강신옥 변호사는 법정에서 이렇게 얘기를 했어. 법은 정치와 권력의 시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랏일을 걱정하는 애국 학생들을 빨갱이로 몰아 사형이니, 무기니 하는 형을 구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법을 악용하는 '사법 살인'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강 변호사가 이렇게 변론을 이어가는 도중, 갑자기 휴정이 선포되고 강 변호사는 연행됐어. 그날 밤, 남산 중정으로 연행된 강 변호사는 잔혹한 구타를 당했대. 그리고 결국 구속됐어. 그의 죄목은, '긴급조치 위반'이었어. ▲ 언론 통제와 저항 이런 사태들이 벌어지고 있지만 언론에선 제대로 보도하지 못했어. 학생들의 시위, 개헌운동 등은 기사가 빠지거나 최소화돼. 고문, 수사, 재판에 대한 문제점에도 침묵했어. 당시 언론사에는 기자도 아닌데 매일 출근 도장을 찍는 사람이 있다고 해. 기관원이라고, 중앙정보부에서 나온 사람이야. 기사를 빼고, 용어를 바꾸고. 중앙정보부에서 각 언론사별로 담당직원을 배치해 통제를 하는 거야. 유신 시기에 들어서서는 신문에 무슨 기사를 내지 말라, 내지 말라는 게 딱 아주 한정돼 있는데. '학생들 데모 기사는 절대로 내지 마라'. '저항하는 움직임에 대해서 아주 손끝 하나도 보도하지 말라' 이렇게 되는 거죠. -김학천, 당시 동아방송 PD 그 당시는 그 모든 걸 전부 통제하고, 누가 자살했다든지 뭐 어제 굶는다든지 어렵다든지 이런 건 기사 못 나가게 돼 있어요. 전부 다 밝은 기사만 쓰라 그러고. -김동현, 당시 동아일보 기자 보도할 때 쓰는 단어에도 제재가 있었어. 예를 들어 '물가 인상'은 '물가 현실화'. '세금 인상'은 '세제 개혁'. 묘하게 뉘앙스를 바꾼 거야. 이런 상황에 언론인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 당시에 데모하는 현장에 가면, 서울대학교에 가면 그쪽에서 써 놨어요. '개와 기자는 출입금지' 써놨어요. '기사 나가지도 않는데 왜 오는데, 올 필요 없다'고 해가지고. 그렇게 모욕을 받았어요. 그러니까 얼마나 괴로웠겠어요. 그때 보면서 '부끄럽다'는 걸 느꼈어요. 기자가 참 부끄럽다. 그걸 제대로 해서 국민에게 알려줄 의무가 있는데. '그런 걸 못하면서 말이야. 기자라고 언론이라고' 이거는 너무 창피했어요. 그때 우리들이 울었어요, 사실은… -김동현, 당시 동아일보 기자 이런 상황이 되자 언론도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 이 사진을 한번 볼래. 사진 속 족자에 적힌 글자는 '자유언론 실천선언'. 마지막 사진에 서 있는 분은 인터뷰를 해 주신 김학천 PD야. 그렇게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은 투쟁에 나섰어. 신문방송잡지에 대한 어떠한 외부 간섭도 배제한다 , 기관원의 출입을 거부한다 , 언론인의 불법 연행을 거부한다 라고 외쳤어. 그 후 매일매일이 치열한 싸움이야. 회사 건물 현관에 '기관원 출입 금지'라고 써 붙이고, 학생 시위에 대한 기사를 늘렸어. 그리고 라디오 방송에서는 비판적이고 풍자적인 멘트도 넣었어. 권력이란 무엇입니까. 한 번 잡으면 그렇게 놓기 싫은 겁니까? 라며 비판했어. 그리고 얼마 뒤, 아주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해. 저희는 동아일보에서 광고를 그만해야 할 것 같은데요. 이번 달 광고 예산이 아직 안 나와서. 광고를 더 못할 것 같은데... 무려 90% 정도의 광고가 해약돼. 그리고 12월 26일 동아일보 신문은 이렇게 발행돼. 아예 백지광고로 나간 거야. 무더기로 광고가 빠진 자리를, 그대로 보여준 거지. 그런데, 그 후로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 이건 다른 날 발행된 동아일보야. 빼곡히 채워진 광고의 정체. 격려 광고가 들어오기 시작한 거야. 대학생, 주부, 어린이, 해외 동포까지. 자발적으로 정성을 모아준 거야. '취학하는 석아, 그른 것은 절대 배우지 마라' ?아빠, 엄마 '양심에 호소하여 우리보다 참하게 살았으면 싶다'-어느 여자 직장인 '운전자와 손님이 합심하여 동아일보의 발전을 빌며'-택시 운전사와 손님 '데이트 자금으로 작은 지면을 삽니다'-순과 선 '이 나라에서 법을 공부하는 안타까운 이 마음과…' ?서울대 동창 남매 마침 그것도 이제 시민들이 성금 내듯이 그런 식으로 했으니까. 고무적이었죠. 우리를 후원하는 이런 사람들이 있구나, 우리 우군이 있구나, 우리가 외롭지 않다. 그런 걸 느꼈어요. -김동현, 당시 동아일보 기자 시민들의 격려 광고로 힘을 얻으며 저항을 이어오던 어느날, 김학천 PD는 아주 특별한 방송을 준비해. 주제는 바로, '감옥으로 보내는 편지'였어. 당시 긴급조치 위반으로 수감 중인 사람들의 가족들이 직접 쓴 편지를 방송하기로 한 거야. 방송이 시작되고, 수감 중인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어린 아들이 직접 읽어. 아버지! 난 아버지가 죄가 있어서 거기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요. 그래서... 편지는 이제 시작인데, 그 후는 꺽~꺽~ 우는 소리만 이어져. 그 다음은 자식을 감옥에 보낸 어머니의 편지였어. 아들아, 엄마가 엊그제 면회를 갔는데 면회를 시켜주지 않더구나. 내복 여러 벌 가지고 갔는데 전해주지 못했구나. 다른 재소자들이라도 입으라고 전부 두고 왔단다. 엄마는... 어머니도 더 이상 편지를 읽지 못하셔. 사무치는 울음소리만 전파를 타고 퍼져나가. 상당히 파국까지 왔다라는 생각이고, 꺾일 때 어떻게 꺾일 것인가. 어쨌든 난 아침 시간 15분, 내가 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때 뭐 감옥에 많이 들어가 있었지. 그 감옥에 아이들 또는 부모를 둔 사람들이 5분 동안 원고지 한 6~7장을 써서 읽으라고 했는데. 첫 번째 문장만 그냥 읽다가 그 다음에 다 우는 걸로 끝을 냈어요. '김학천 씨, 이거 여기서 끊을까요? 그냥 훌쩍훌쩍 울기만 하는데' 묻길래, '그냥 둬라. 그것도 메시지 아니냐'.. 한 1~2분 얘기하고 2~3분 우는 프로그램이 나갔어요. -김학천, 당시 동아방송 PD ▲ 분노한 대학생들 1972년에 유신이 시작되고 유신에 대한 저항과 이를 막으려는 조치들이 반복됐어. 긴급조치 5호와 6호는 앞서 선포된 조치들을 해제하려는 조치야. 긴급조치 해제를 위해 또 다른 긴급조치를 선포한 거야. 그리고 7호는, 고려대학교 한 학교를 휴교시키기 위해 선포됐어. 시위를 막으려고. 그리고 1975년 4월 8일. 또 한번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져. 긴급조치 4호 기억나지? 대학생들이 북한 세력의 조종을 받아 국가를 전복할 목적이라며 사형을 구형했던 거. 이날은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 세력으로 지목됐던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들의 최종 판결이 내려지는 날이야. 그리고 8명의 관련자들에게 최종적으로 사형이 선고됐어. 다음날, 사형 선고를 받은 이들의 가족들이 아침 일찍 구치소로 향했어. 구속 이후 1년 가까이 만나지 못해서, 형이 확정됐으니 면회라도 가능하겠지 싶어 만나러 간거야. 그날 찍힌 사진이 있어. 통곡하는 가족들. 이미 사형이 집행된 거야. 대법원 판결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 됐어. 이날은 사법 사상 암흑의 날로 기록돼. 훗날, 이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 사람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어. 이틀 뒤 서울대 백양나무 옆 잔디밭에 3백 명 가량의 학생들이 모였어. 그리고, 한 청년이 이들 앞으로 걸어 나와. 청년의 이름은 김상진이야. 서울대학교에 재학중이었던 상진이는 친구들과 함께 유신 반대 단식 집회를 준비하고 있었어. 김상진 학생에 대해 들어볼게. 우리 상진이가 착하고 진짜 속 썩이는 거 없었어요. 아버지 어머니 말을 잘 들었지. -김상운, 김상진 형 조용했습니다. 얌전하다고 할까요. 차분한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저하고 서울대학교 같은 과를 입학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유신헌법의 그 문제점들이 사회적으로 자꾸 농축돼 갔던 거죠. 75년도부터가 거의 폭발의 단계에 왔습니다. 그 폭발의 불쏘시개를 한 게 제2차 인혁당 사건입니다. 그 사건이 발생해서 8명이 사형 집행이 된 적이 있죠. 상진이가 매우매우 분노했습니다. -이호선, 김상진 친구 상진이는 학생들 앞에 서서 준비해 온 글을 읽기 시작해. 글의 제목은 '양심선언문'이야. 당시 상진이의 목소리를 녹음한 기록이 있어. 우리를 대변한 동지들은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신음하고 있고, 무고한 백성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가고 있다. 합법을 가장한 유신헌법의 모든 부조리와 악을 고발한다. 우리는 유신헌법의 자기중심적 이기성을 고발한다. 학우여 아는가! 민주주의는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투쟁의 결과라는 것을. 이것이 민족과 역사를 위하는 길이고, 이것이 우리 사랑스러운 조국의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길이며, 이것이 영원한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길이라면. 이 보잘 것 없는 생명 바치기에 아까움이 없노라. 나의 앞으로의 행동에 대해서 여러분은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완전한 이성을 되찾아서, 우리가 해야 할 바를 갖다가 명실상부하게 이끌어 나가길 바란다... -김상진의 양심선언문, 1975년 4월 11일 녹음분을 들어보면, 상진이의 이 말을 끝으로 갑자기 현장이 소란스러워져.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건 방송에는 처음 하는 얘기들입니다. 이걸 꼭 기록을 해주셔야 됩니다. 그 계단에서 이런 얘기를 저한테 했군요. '호선아 나는 이제 나의 신념을, 각오를 행동으로 표현할게. 유신이 없어지는 날, 나를 기억해 달라'는 그런 식의 얘기였습니다. 상진이가 서서 낭독하는 그 자리에서 10여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제가 앉아 있었어요. 상진이가 양심선언문을 읽자마자 가방에서 과도를 꺼냈습니다... 5초만 빨라도 됐습니다. 5초만 빨라도 됐어.. 칼로 찌르고 앞으로 넘어지기 직전에 제가 뒤에서 붙잡았습니다. -이호선, 김상진 친구 호선이는 상진이와 함께 병원으로 이동했어. 그 택시 안에서 상진이가 이런 이야기를 했대. 호선아, 애국가 불러줘 호선이는 큰 목소리로 애국가를 불렀어. 그리고 상진이는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어. ▲ 긴급조치 9호 김상진 열사의 죽음 뒤로, 저항의 목소리를 더욱 거세졌어. 그로부터 한 달 뒤, 긴급조치 8호로 긴급조치 7호가 해제되고, 동시에 긴급조치 9호가 선포돼. 유언비어 안 되고, 유신헌법에 대해 말해서도 안 되고, 시위는 물론 학생의 정치 관여도 안돼. 긴급 조치 9호는 어떤 특정한 사건에 대응하기 위해서 발동한 것이 아니라 그냥 항시적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유신 체제에 대해서 저항은 물론이고 어떠한 비판도 할 수 없도록 결국에는 아주 광범위하고 포괄적으로 유신에 대한 반대를 불허하는 그러한 조치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이런 것들을 우리가 보통 '긴급조치의 종합판'이다… -오제현,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이렇게 선포된 긴급조치 9호는 오랫동안 국민의 숨통을 조여왔어. 무려 4년 7개월 동안. 긴급조치가 9호가 이렇게 오래 지속되는 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때는 1978년 11월. 전북에서 꽤 잘 나간다는 한 학원이야. 이 학원에서 영어강사로 일하는 차봉현 씨. 봉현 씨는 여기저기 스카우트가 될 정도로 인기 강사였대. 봉현 씨는 영어뿐 아니라 정치 경제 윤리 강의도 하며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어. 어느날, 봉현 씨는 여느 날처럼 학원으로 출근을 했어. 수업 내용을 살펴보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남자 2명이 들어와. 학원으로 경찰들이 들이닥친 거야. 경찰이 물어보는 거예요. '당신이 유신 헌법 철폐하고 유신 헌법 없애자고 학생들 앞에 주장 안 했냐' 이제 이렇게 나온 거예요. '나는 절대 그런 말 안 했다' 내가 사회의 지도자가 아니고 내가 뭐 정당의 정당인도 아니고 내가 뭐 정치를 하는 사람도 아니고. 절대 부인한 거예요. -차봉현, 당시 영어학원 강사 봉현 씨가 강의 중 유신헌법 철폐를 주장했다는 거야. 봉현 씨는 강의 때 이렇게 얘기를 했대. 국회의 여당 의원 수가 많잖아요. 그건 헌법으로 설치된 통일주체국민회의가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뽑기 때문이에요. 이런 말이 문제 될 거라곤 생각도 못했어. 그 후, 봉현 씨는 여기저기 끌려 다니며 폭행을 당했어. 날이 갈수록 폭행의 강도는 점점 심해졌대. 둘이서 이제 때리기 시작한 거예요. 주먹으로 뺨도 때리고. 취조하는 실인데 거기 데리고 가서 옷을 벗겨요. 옷을 벗겨 가지고 빨가 벗겨서 몽둥이로 이제 때리는 거예요 둘이서. 또 무릎을 꿇고 앉으라고 해서 무릎 사이에 나무를 놔두고 거기서 밟아버려요. 그러면 무릎이 팍 깨져요. 그런 고문을 당했어요. 경찰서 정보과실에서. '나는 비판 정도를 했다' '헌법을 폐지해야 한다.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 이런 말은 절대 한 것 없다. 근데 그게 안 통한다니까. 자기가 써갖고 와서 이렇게 '이대로 해달라' 그러니까 내가 이제 안 맞으려고 사인해 줬죠. -차봉현, 긴급조치 피해자 자백을 받기 위해 봉현 씨를 고문한 거야. 봉현 씨는 1년 6개월의 형을 선고받았어. 근데 이런 일을 겪은 건 봉현 씨 뿐만이 아니야. 긴급조치 9호로 처벌받은 사례들을 보여줄게. 박정희는 군인 출신이기 때문에 정치를 잘할 수 없어. 100억 불 수출이라 하면서도 수입에 대해서는 은폐하고 있잖아. 언론의 자유도 없는 거야. 이런 말을 했다고 징역 8년을 선고받았어. 또 어떤 남자는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박정희 정치는 뭣~도 아니다 이렇게 외쳤어. 판결은 징역 1년. 자기야, 대통령이 내가 잘 아는 친구 언니와 애인 사이래 라는 가벼운 말. 이건 징역 1년을 선고받았어. 긴급조치 9호는 술 먹고 말 한마디 잘못해도 잡혀간다 해서 '막걸리 보안법'이라 불렸어. 심지어 노래도 마음대로 못 불렀어. 국가의 안전 수호와 사회 질서를 문란케 하는 대중문화가 있다는 거야. 그렇게 취한 조치가 '금지곡'. 1975년 한 해 동안 금지된 노래가 국내 가요만 222곡이야. 지금도 들으면 알만한 곡들이 이때 무더기로 금지가 돼. 김추자의 '거짓말이야'. 이 노래는 1971년 발매돼 아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어. 이 노래가 갑자기 금지된 이유는 '거짓말이야'라는 가사 때문에. '가사 내용 불신 조장', 그리고 창법도 저속하대. 신중현의 '미인'. 너무 유명한 노래지. '신중현과 엽전들'의 '미인'은 1974년에 발매돼 약 40만 장 이상의 앨범 판매를 올린 대히트곡이야. 이 곡이 금지된 이유는, 저속한 가사, 퇴폐한 곡이래. 어디가 저속하다는 걸까?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 이 가사를 학생들이 '한 번 하고 두 번 하고 자꾸만 하고 싶네~' 이렇게 개사해서 불렀대. 박정희 대통령이 대통령을 한 번 하고 두 번 한다고, 그렇게 비꼬고 풍자하니까 금지곡이 된 거 아니냐 라는 얘기가 있어. 그리고, 금지곡 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곡이 한 곡 더 있지. 바로 김민기의 '아침이슬'. 양희은이 부른 '아침이슬'이 많이 알려져 있지. 이 노래를 작사, 작곡한 사람이 바로 김민기야. 이 곡이 금지된 이유는, 없어. 기록에 금지 사유가 아예 적혀 있지 않아. 보통 이렇게 금지곡이 되려면 그 옆에 금지 사유가 있어야 돼요. 아무리 엉망으로 하더라도 사유가 있어야 되잖아요. 근데 '아침이슬'은 금지 사유가 없어요. 이걸 대학생들이 시위에 불렀다고 금지를 시키기에는 너무 논리가 옹색한 거죠. 금지 사유가 없어. -강헌, 음악평론가 유신 반대 시위 현장에서 많은 학생들이 김민기의 노래를 불렀어. 그렇게 김민기의 노래는 모두 금지곡이 되었고 그는 보안사 등 여기저기를 끌려 다니며 조사를 받고 활동 또한 탄압을 받았어. 금지라는 행위, 검열이라는 행위가 뭐가 나쁘냐면요. '상상력에 제한이 가해져서는 안 된다'라는 이유인 겁니다. 결국 검열은 상상력의 잠재력을 사실은 원천적으로 파괴시키는 행위예요. 알아서 기게 만드는 행위예요. 그걸 알아서 기는 예술가들이 어떤 작품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결국 그런 표현의 자유를 물리적인 공권력으로 억압한다는 얘기는 그냥 간단한 얘기예요. 그냥 단순히 '이 노래 부르지 마, 이 영화 보지 마, 이 책 읽지마'로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이것은 기본적으로 민주주의가 보장하고 있는, 헌법이 보장하는 모든 기본권이 '전부 구금될 수 있다'는 얘기이고 실제로 그렇게 됩니다. -강헌, 음악평론가 ▲ 유신의 종말 말 한 마디 조심하고, 노래도 마음대로 못 하는 시대는 몇 년 간 이어져. 그러던 중, 1979년 민중의 불만이 폭발하는 사건들이 일어나. 'YH 사건' 혹시 들어봤어? 8월 9일, 가발공장이었던 YH무역의 일방적인 폐업 공고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이 당시 야당인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이게 돼. 여공들의 호소를 받아 주고 당사로 받아준 사람이, 당시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야. 하지만, 곧 야당 당사에 경찰이 투입돼. 농성을 하던 노동자들을 경찰은 무차별 폭력과 강제 연행으로 진압했어. 이를 지켜 본 김영삼 총재는 박정희 정권과의 정면대결에 들어가. 그러다 김영삼 총재는 국회의원 제명을 당해. 제명된 후 이렇게 말했지. 아무리 닭의 목을 비틀지라도 새벽은 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10월 16일 부산. 유신철폐! 독재타도! 를 외치며, 김영삼의 정치적 본거지였던 부산 시민들이 들고 일어났어. 부산대에서 수백 명으로 시작된 시위는 수천 명으로 늘어났고, 결국 수 만명의 군중이 모였어. 그리고 부산에 비상계엄이 선포돼. 부산 시내에 탱크가 등장했어. 그러나 시민들은 물러서지 않았고 시위는 마산으로까지 번졌어. 바로 '부마항쟁'이야. 김재규의 법정 진술에 따르면, 부마항쟁을 보고 받은 박정희 대통령이 이런 말을 했다는 거야. 이제부터 사태가 악화되면 내가 발포 명령을 하겠다. 그리고 부마항쟁 열흘 뒤인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열린 연회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에 맞아 사망해. 이렇게 유신 시대는 끝을 맞게 돼.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궁정동 안가. 유신헌법의 초안이 작성된 장소 어디라고 했지? 그래 궁정동 안가. 거기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며 길고 길었던 유신 시대는 끝이 났어. 7년간 이어진 유신체제. 그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지. 언론의 자유를 위해 싸운 분들은 마지막까지 철야 농성을 하며 저항했지만, 결국 회사에서 강제로 끌려 나왔어. 당시 100 명이 넘는 언론인이 해임을 당하게 돼. 긴급조치 9호로 재판을 받던 학원강사 봉현 씨는 박정희의 사망 후 최종 면소 판결을 받고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어. 하지만 다시 강사로 취업할 수는 없었다고 해. 긴급조치는 30년이 훨씬 지나 2000년대에 들어서야 위헌 판결이 내려졌어. 2010년 대법원은 긴급조치 1호가 유신헌법, 현행헌법에 위험이라고 판단했고, 그 이후 긴급조치 4호, 9호 역시 위헌이라 했어. 2013년 헌법재판소에서는 긴급조치 1호, 2호, 9호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어. 그리고 2018년 대법원에서는 1972년 비상 계엄 포고령에 대해 이렇게 판단했어. 당시의 국내 정치 상황 및 사회 상황이 계엄법에서 정한 '군사상 필요할 때'에 해당한다고 할 수 없다. 계엄 포고는 헌법과 법률에서 정한 발동 요건을 갖추지 못한 채 발령되었고, 구 헌법, 현행 헌법, 구 계엄령에 위배되어 위헌이고 위법하여 무효이다. 노벨문학상 수상한 한강 작가가 이런 말을 했어.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라고.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현재도 언젠간 과거가 될 거야. 현재가 어떻게 기록될지는, 지금 우리의 몫이지 않을까?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지금 시국과 딱…'꼬꼬무', 10월 유신과 긴급조치 다룬다
등록일2025.03.13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가 1972년 10월 유신과 긴급조치, 이후 발생한 사건들을 공개한다. 13일 방송될 '꼬꼬무'는 '유신 헌법과 긴급조치'를 주제로, 방송인 홍석천, 배우 박효주, 아나운서 이인권이 리스너로 출격한다. 앞서 진행된 녹화에서 '10월 유신과 긴급조치'에 대해 장도연이 오늘의 회차는 말에 관한 이야기이다 라고 밝히자 박효주는 요즘 말이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올해 들어서 말을 많이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고 말해 그 이유를 궁금케 했다. 미리 공개된 '꼬꼬무' 예고 영상에는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 선포 그리고 대통령의 특별선언, 그 후의 이야기가 예고됐다. 리스너들은 70년대 서울 도심 한복판에 군인과 탱크가 등장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고, 박정희 대통령 각하는 비상계염령을 선포해 조국 통일의 기원이 성취되는 그날까지 라는 멘트의 당일 뉴스 화면이 등장해 긴장감을 높였다. 이어 대통령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카드 3장과 함께 장현성, 장성규, 장도연은 각각 긴급조치 1호와 2호가 , 긴급조치 4호가 ,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됐어 라고 밝혀 리스너 이인권과 박효주를 놀라게 했다. 이번 '꼬꼬무'에서는 '술 먹고 말 한마디 잘 못해도 잡혀간다'는 의미에서 일명 '막걸리 보안법'이라 불렸던 '긴급조치 9호' 뿐만 아니라, 언론을 통제하던 중앙정보부에 저항한 매체에서 발생한 사건, 부산과 마산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부마민주항쟁'의 전후까지 공개된다. 이에 박효주는 와, 나 소름 돋았어 라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홍석천은 장현성에게 너랑 나랑은 좋은 어른이 됐으면 좋겠다 고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등 다채로운 반응을 보인다. '꼬꼬무'의 '유신 헌법과 긴급조치' 편은 13일 밤 10시 20분 방송된다.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꼬꼬무 찐리뷰] 은행 현금수송차량 탈취, 단 10초면 충분했다…범인 잡은 집념의 형사들
등록일2025.03.07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6일 방송된 '범죄꾼의 시나리오'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배우 진서연, 뮤지컬배우 김호영, 가수 테이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은행 현금수송차가 털렸다 때는 2001년 12월 18일, 경주경찰서야. 시간은 오후 5시 42분. 강력반에서 근무하는 주재정 형사는 퇴근을 앞두고 있었어. 그런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려. 사건이 터진 거야. 형사들은 곧장 사건 현장으로 출동했는데, 사건이 벌어진 곳이 예상 밖이야. 경찰서에서 불과 100미터 정도 떨어진 아주 가까운 곳이었거든. 현장에 도착한 주 형사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듣고 깜짝 놀랐어. 그때 근무중에 연락을 받고 가까우니까 바로 나왔죠. 나오니까 현장에는 아무것도 없고. 여기가 사람이 많은데, 제일 중심가 사거리거든요. 처음에는 '이게 진짜 실화야?' 이럴 정도였어요. 경주 이 지역에서는 접해본 적이 없었죠. 그러니까 진짜 생소했고, 영화에서나 보는 그런 거라 생각했죠.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주재정 형사, 당시 경주경찰서 근무 어떤 사건이길래, 형사도 생소하다고 한 걸까. 당시 뉴스야. 은행 현금 수송 차량이 털렸습니다. 범인들은 경찰서 코앞에서 보란 듯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어제 오후 5시 35분 조흥은행 경주지원 출장소 소속 현금수송 차량이 본점에 입금하러 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오토바이를 탄 20대 남자 두 명이 접근해 현금 3,100여만원이 든 가방을 들고 골목길로 달아났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은행으로 현금을 수송하던 차량이 털린 거야. 피해금액은 현금 3,100만원. 범인들이 들고 간 돈가방에는 수표랑 수입인지도 있어서 이걸 다 합하면, 총 피해액이 1억 8천여만 원이야. 큰 돈이지. 백주 대낮에 중심가 사거리, 그것도 경찰서 코 앞에서 거액이 도난을 당한거야. 여기가 조흥은행 사거리야. 은행직원 남 대리는 대구지방법원에 있는 조흥은행 출장소에서 현금과 수표가 든 돈 가방을 차 트렁크에 싣고 주차장을 나왔어. 승용차 안에는 남 대리와 다른 직원 김 씨, 청원 경찰까지 총 3명이 타고 있었어. 주차장부터 목적지 은행까진 단 100m의 아주 짧은 거리야. 남 대리는 주차장을 나와서 은행 앞 사거리로 차를 몰았어. 이제 신호를 받고 좌회전만 하면 되는데 바로 그 때, 철컥 하는 소리가 들렸어. 남 대리는 이상한 예감에 백미러를 쳐다봤어. 보니까, 차 트렁크가 활짝 열려있는 거야. 놀라서 차에서 내렸지만, 이미 늦었어. 젊은 남자 두 명이 탄 오토바이가 반대쪽 골목으로 사라지는 걸 목격했고, 그들의 손에는 트렁크 속 돈가방이 들려 있어. 백미러로 보니까 트렁크가 열리고 돈이 나가는 느낌이어서, 청원경찰과 제가 바로 문을 열고 뛰어나갔으나 쫓아가지 못했습니다. -당시 은행직원 좌회전을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에 트렁크가 열리고 돈가방이 털린 거야. 불과 10초도 걸리지 않은 짧은 시간에. 범인들은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어떤 방식으로 트렁크를 열었을까?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이 구간에서 불과 100m 되는 거리에서 트렁크 문을 순식간에 열고. 10초도 안 걸렸을 거예요 아마. 저 문을 어떻게 열었을까. -주재정 형사, 당시 경주경찰서 근무 ▲ 범행 시간 단 10초, '트렁크 따기 수법'에 당했다 그 의문은 곧 풀렸어. 범인이 남기고 간 물건이 현장에 있었거든. 바로, 차 열쇠. 범인은 차 열쇠로 트렁크를 열고 돈가방을 훔쳤어. 그리고 도망가면서 미처 이 열쇠를 회수하지 못한 거야. 그렇다면 범인들은 어떻게 차 열쇠를 준비할 수 있었을까? 범인이 두고 간 열쇠는, 진짜 차 열쇠를 복사한 걸까? 왼쪽이 진짜 승용차 열쇠. 오른쪽이 트렁크에 꽂혀 있던 범인이 남긴 열쇠야. 열쇠 모양이 완전히 다르지. 형사들은 범인이 두고 간 열쇠로 승용차의 문을 열어 봤어. 열리지 않았어. 근데 그 열쇠를 차 트렁크에 넣고 돌려봤더니, 바로 열려. 이게 어떻게 가능해? 비밀은 바로, 트렁크 잠금장치에 있어. 보통 자물쇠 내부는 이런 식이야. 길이가 각각 다른 핀들로 잠겨있고, 핀 길이에 딱 맞는 열쇠가 들어가야 해. 이런 식의 잠금장치를 '핀 텀블러' 방식이라 불러. 당시 현금을 수송하던 그 차의 트렁크도 이런 잠금장치였어. 근데 형사들이 그 트렁크의 잠금장치를 뜯어보니까, 8개의 핀 중에서 4개가 부러져 있었어. 그래서 진짜 열쇠가 아닌, 모양이 다른 열쇠로 돌려도 쉽게 열렸던 거야. 처음엔 이상했죠. 키 뭉치를 빼서 보니까 톱날이 있는데, 톱날을 일부 중간에 만능키 같이 웬만한 키가 들어가면 그냥 열릴 정도로 깎아놨으니까. 쉽게 열렸던 거죠. -주재정 형사, 당시 경주경찰서 근무 주어진 시간, 단 10초. 이 안에 트렁크 잠금장치를 조작하는 건 불가능해. 그러니까 범인들은 사전에 잠금장치를 조작해 둔 거야. 그래서 신호대기 중인 현금수송차의 트렁크를 쉽게 연 거지. 일명, '트렁크 따기' 수법이야. 주 형사도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신종 범죄수법이야. 운전 중에 트렁크의 물건을 도둑 맞을 거란 생각, 지금은 하기 힘들지. 하지만 2000년대 초반 당시만 해도, 트렁크 따기 수법은 획기적인 범죄 방식이었어. 원래 은행 현금 수송에는 여러 보안 단계가 있어. 먼저 현금 수송은 전용 차량을 이용해야 해. 그리고 현금 수송하는 가방에도 보안장치가 있어. 만약에 누군가 돈 가방에 허락없이 손을 댄다면, 리모콘을 눌러 전기가 흐르게 할 수 있어. 이런 보안 단계가 있는데, 범인들은 어떻게 돈가방을 털 수 있었을까. 먼저 현금을 수송하는 전용 차량. 당시 경주에 은행 출장소만 14곳, 근데 전용 수송차량은 단 3대였어. 그래서 은행 직원의 일반 승용차로 현금을 수송한 거야. 그럼 보안가방은? 그것도 작동하지 않았어. 왜? 일반 가방을 가져갔거든. 100미터 밖에 안되는데, 설마 무슨 일 있겠어, 하는 그 설마하는 방심이 엄청난 피해를 불러온 거야. 범인들은 이런 허술함을 모두 알고 있었던 걸로 보여. 그래서 트렁크 잠금장치를 미리 조작해 둘 수 있었던 거지. 이 범인들, 보통은 아닌 거 같지? 형사들을 놀라게 한 건 또 있었어. 불과 좌회전 할 수 있는 시간이 10초 정도 밖에 안되기 때문에. 그 시간 동안 본인들이 범행을 해야하는 거죠. 차가 대기하는 순간 바로 뒤에 오토바이를 붙여서 트렁크를 따고 가방을 가져가야 한다는 거죠. 시간적으로 봤을 때도, 사실 엄청나게 불가능한 일이었는데. 본인들이 사전에 여러가지 장소라든가 시간 체크가 정확하게 되지 않았나. 그래서 진짜 치밀한 계획이 아니었으면 이런 건 불가능하다… -주재정 형사, 당시 경주경찰서 근무 범인들은 현금 수송시간은 물론, 동선까지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거로 보여. 사전에 철저하게 계획된 범행이었다는 거지. ▲ 증거도 목격자도 없다 범인을 잡으려면 일단, 증거를 찾아야 해. '사건 해결의 열쇠는 현장에 있다'는 말이 있지? 이번 현장에도 차 열쇠 말고 범인이 남겨둔 게 또 있었어. 트렁크 잠금장치에 범인의 것으로 보이는 머리카락이 두 가닥 정도 끼어 있었대. 트렁크를 열고 돈가방을 꺼내다가 머리를 부딪쳐 남은 걸로 추정돼. 게다가 범인의 것으로 보이는 지문 일부도 발견했어.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용의자를 특정할 수가 없었대. 그때 당시 쪽지문이 나왔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당시에 우리 과학수사 기술로는 쪽지문 분석은 불가능했어요. 원래 지문의 삼각도를 찾거든요. 삼각도 세 개를 찾아서 그 기준점을 기준으로 삼아서 동일인 분석을 하는데, 한 개 점 가지고서는 분석 데이터에 넣으면 안 나오죠. 동일인을 찾을 수 없죠. 그리고 모발 두 가닥 가지고는 DNA 분석이 어려워요. 여러 가닥이 되어야 하거든요. 요즘은 소량도 분석 가능하다고 하던데, 그때 당시의 기술로는 힘들었죠. '모든 범죄는 현장에 있다'라고 배웠거든요. 현장에 아무 것도 없었어요. 결국에는 증거가 하나도 없었으니까. 완전 백지상태였죠. -주재정 형사, 당시 경주경찰서 근무 지금은 우리나라 과학 기술이 발전해서 이 정도 증거로 용의자를 특정할 수 있을 거야. 그런데 2000년대 초반에는 과학 수사가 어려웠어. 그렇다고 수사를 포기할 순 없지. 이제부턴 형사의 경험, 집념과 끈기로 범인을 잡아야 해. 먼저 용의자를 추려야 하잖아. 가장 의심스러운 사람이 누구야? 은행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사람. 내부자의 소행은 아닐까 싶어 형사들은 은행 직원들을 상대로 수사했지만, 아무런 혐의점을 발견할 수 없었어. 이제 내부자는 아니야. 그럼? 이제 목격자를 찾아야해. 환한 대낮에 번화한 시내 중심에서 일어난 사건이니, 목격자가 있을 거야. 하지만, 목격자도 없었어. 범행 시간이 단 10초.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범행 순간을 제대로 목격한 사람이 없었대. 지금은 CCTV나 블랙박스를 보면 되지만, 당시엔 그게 힘들었지. 피해자의 진술을 토대로 했을 때, 범인은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 두 명이었어. 한 명은 붉은색 125cc 오토바이를 몰고 있었고, 나머지 한명은 돈가방을 들고 오토바이 뒤에 탔어. 범행에 사용된 이 오토바이는 사건 전날, 도난당한 오토바이로 추정돼. 근데 누가 이 오토바이를 훔쳐 갔는지는 알 수 없어. 마찬가지로, 단서가 하나도 없었거든. 증거도 목격자도 없는 사건. 수사는 다시 벽에 부딪쳤어. 하지만 포기할 순 없어. 이 사건, 반드시 해결해야 할 이유가 또 있어. 사건이 일어난 2001년 12월은 연말방범비상령이 내려진 상황이었어. 근데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전국 각지에서 은행 강도 사건이 유행처럼 일어났어. 경주 사건 일주일 전, 대구에서 엽총으로 무장한 강도가 은행을 털었어. 범행에 쓰인 총기는, 인근 총포사에서 탈취한 거야. 총포사 주인은 무참히 살해된 채 발견됐어. 범행에 쓰인 차량도, 차에 붙어있던 번호판도, 모두 도난당한 것들로 밝혀져. 그렇게 은행에서 1억 2천만원을 훔친 범인은, 모든 증거를 불에 태우고 사라졌어. 이뿐만이 아니야. 경주 사건 3일 후, 또 다시 사건이 터져. 이번엔 대전이야. 은행 현금수송 차량이 또 털렸습니다. 얼굴을 가린 범인 두 명은 반항하는 은행직원을 권총으로 쏴 숨지게 한 뒤 현금 3억 원을 챙겨 달아났습니다. 현금을 내리는 순간 미리 기다리고 있던 2인조 복면 강도가 승용차로 현금수송차의 뒤를 막았습니다. 그러나 은행직원이 반항하자 가슴과 팔과 다리에 실탄 4발을 발사했습니다. 은행직원을 살해한 강도들은 현금 3억원이 들어있는 돈 가방을 빼앗아 승용차를 타고 달아났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2001년 12월에 은행의 현금을 노린 범죄가 대구, 경주, 대전에서 무려 3건이나 터졌어. 경찰은 세 사건의 연관성을 분석했어. 대구 은행 엽총 강도사건과 대전 현금수송차 살인강도 사건. 경주 사건과 관련이 있을까? 다른 두 사건에선 총기가 사용됐어. 사망한 피해자도 있었고. 하지만 경주는, 신상 노출을 최대한 피한 채, 은행 직원과 어떠한 접촉 없이 돈가방만 들고 사라졌어. 다른 두 사건은 강도 사건이지만, 이건 절도 사건이야. 범행 수법이 완전 달라. 그래서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기 어려워. 공교롭게 이때는 신임 경찰청장이 취임한 직후였어. 경찰청장은 이 사건에 관심을 갖고, 빨리 해결하라는 지시를 내렸어. 이제부터는 총력전이야. ▲ 다른 장소, 같은 수법 강력반 전체가 달라붙어 수사를 이어 나가던 그때, 마침내 사건의 실마리가 드러나. 경찰 전산망에서 동종 수법 범죄를 찾던 주 형사가 1년 전 부산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거야. 전산상에 수법 조회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건 좀 특이한 사건이니까. 이런 사건이 다른 지역에서 발생한 게 있나 해서 검색하는 과정에 부산 사건을 알았죠. -주재정 형사, 당시 경주경찰서 근무 때는 설 명절을 앞둔 2000년 2월 1일. 부산에서 이상한 사건이 발생해. 당시 사건을 담당한 형사는 부산에서도 손꼽히는 베테랑이야. 1970년대부터 형사 생활을 한 부산 경찰 역사의 산 증인. 부산 조직폭력배 칠성파가 벌인 영락공원 칼부림 사건, 부산을 발칵 뒤집어 놨던 김길태 사건 등 굵직한 사건을 담당했던 분이야. 저는 부산북부경찰서 형사과장으로 경찰 생활 38년 정도 하고 2016년도 6월 말에 정년퇴직 했습니다. 제가 2000년도에 부산남부경찰서 형사과 강력팀장을 맡고 있을 때였습니다. 저도 그때 당시만 해도 형사를 20년 정도 했었는데, 부산 시내에서는 그런 사건들이 한번도 없었어요. 한빛은행 출장소에 직원들이 현금을 이송하려고 사거리에서 신호 대기를 받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뒤에 트렁크가 탁 열리는 소리가 나서, 뭐지? 하고 뒤를 쳐다보니까 트렁크가 열려있고. 쫓아 나가보니 오토바이에 젊은 사람이 타고 있고 현금을 훔쳐가지고 오토바이를 타고 도주한 사건이 발생했었습니다. 이런 사건은 너무나, 신출귀몰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제 기억에 오래 남아 있었죠. -김삼식, 당시 부산 사건 담당 형사 1년 전 부산에서도 트렁크 따기 범죄가 일어났던 거야. 피해액은 무려 3억 6천 5백만 원. 당시 20년 경력 넘는 김 형사도 처음 보는 수법이라 깜짝 놀랐대. 꽂고 돌리고 열고 바로니까. 불과 뭐 5초 안에 그냥 빼갔으니까. 완전히 신출귀몰한 사건이었죠. 흔히 말하는, 귀신이 곡할 노릇이지. 갑작스럽게 차를 타고 가는데 뒤에서 트렁크가 딱 열리면서, 가져가 버리니까. 은행직원들도 조금도 이게 털릴 것이라는 의심은, 0.1%도 못 할 상황이었어요. 이게 있을 수 있는 이야기가? 이런 사건이 있을 수 있는 이야기가? 할 정도로 신종 수법이었습니다. -김삼식, 당시 부산 사건 담당 형사 운행 중인 차 트렁크를 어떻게 열 수 있었는지, 김 형사도 그게 의문이었다고 해. 혹시 차 열쇠를 복사한 게 아닐까 싶어, 김 형사 본인의 차 열쇠를 피해차량 트렁크에 넣고 돌려 봤어. 그러자 덜컥, 트렁크가 열려. 역시나 안에 있는 핀이 모두 빠져 있었대. 뭘 넣어도 열리는 거야. 제 차 열쇠도 넣어가지고 돌려보니까, 돌아가는 거예요. 아무 열쇠나 꽂고 돌리면 열리도록 이렇게 조작을 해놨던 겁니다. 그래서 아 이게 열쇠를 복사를 한 게 아니고, 잠금장치를 조작했다는 걸, 우리가 알게 됐죠. -김삼식, 당시 부산 사건 담당 형사 부산 사건과 경주 사건. 동일범의 소행같지? 부산 사건을 살펴본 주 형사도 느낌이 왔어. 그래서 주 형사는 바로 부산으로 내려가 작년에 일어난 은행 현금수송차 탈취 사건의 수사기록을 보여달라 했어. 지난 23개월 동안 쌓인 수사기록. 그 자리에서 수사 자료를 훑어봤어. 그리고 마침내 결정적인 단서를 발견했어. 부산 현금수송차 탈취사건의 용의자, 윤 씨의 이름이었어. 주 형사는 윤 씨의 자료를 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어. 아 이 놈이다! 경주에 올라와서 저녁에 회의하면서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는데 봤을 때, 맞다. 부산에 거기 수사보고 한 장에서 한 사람의 이름을 가져옴으로 해서 완전히 수사가 활기를 띠었죠. -주재정 형사, 당시 경주경찰서 근무 ▲ 청송교도소 출신들 부산 사건의 용의자 윤 씨. 나이 35세에 전과 12범. 19살에 특수절도로 처벌 받은 후 수시로 교도소를 드나들었어. 혹시 '청송교도소'라고 들어봤어? 청송교도소의 정식 명칭은 경북북부교도소야. 3개의 일반 교도소와 직업훈련 교도소로 이루어졌어. 전국의 교도소는 4단계 등급이 있는데, 그 중 경북북부제2교도소는 가장 높은 S4 등급이야. 국내 유일의 중경비시설 교도소야. 이곳은 대부분 독방으로 되어 있대. 이곳 수용자들은 작업도 하지 않아. 하루 한 번 운동시간 외에는 독방에 있어야해. 운동할 때도 격리된 곳에서 혼자 한다고 해. 다른 수용자와 접촉할 수 없게 격리하는 거야. 교도소 수용자들도 경비 등급이 있어. 그중 가장 높은 S4 등급 수용자 400여명이, 이 곳 경북북부제2교도소에 수감돼 있어. 살인, 성범죄 등을 저지를 흉악 범죄자, 다른 교도소에서 문제를 일으킨 수용자들. 그런 자들이 이곳에 수용돼. 유영철, 신창원, 조두순이 이 곳을 거쳐갔고, 현재 오원춘, 김길태, 장대호가 수용돼 있어. 육지 속의 섬 같은 곳이야. 지금까지 한 명도 탈옥을 한 사람이 없어. 부산 사건 용의자 윤 씨는, 바로 여기 청송교도소 출신이었어. 그가 용의자로 떠오르게 된 건, 한 형사의 첩보 때문이었어. 바로, 서울경찰청 기동수사대에서 근무하는 장영권 형사. 장 형사는 강력범죄 수사로 정평이 난, 베테랑 형사야. 원래는 국가대표 유도선수였어. 영화 '범죄도시'에서 마동석 배우의 실제 모델이 장 형사라고 해. 장 형사는 수년간 홀로 윤 씨를 쫓고 있었대. 왜 서울에서 근무하는 장 형사가 어떻게 윤 씨를 알게 된 걸까? 장 형사한테는 특이한 별명이 하나 있었어. 바로 '청송맨'. 34년 6개월 지금 근무를 하면서, 형사만 30년 4개월 정도 근무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신창원 사건이 우리나라에 떠들썩한 사건이 아니었습니까? 신창원 사건을 수사하면서 그 당시에 청송교도소에 있었던 사람하고 인연이 되면서, 청송교도소에 교육도 하고 하면서, 청송교도소의 사람들하고 3,000여명 정도 알게 돼서, 많은 사건을 해결하게 된 거죠. 방송에 큰 사건이 나가면 사건에 대해서 제보를 해주는 거죠. '아 형사님 참 고마웠는데, 이 사건은 누가 했을 것이다' 이렇게 제보하는 거죠. 조직폭력배 사건이라든지, 강도 사건, 서울 강남 전국으로 다니는 아파트 털이, 이런 사건을 청송 사람들을 알면서 많이 해결해 왔습니다. -장영권 형사, 당시 서울경찰청 근무 매주 주말, 서울에서 경북 청송을 오간지 무려 15년. 그렇게 알게 된 3천명의 청송 출신들은 장 형사의 정보원이 됐어. 그러다 청송 출신 한 명이 장 형사에게 깜짝 놀랄 제보를 해. 형사님, 97년도에 옥천에서 현금수송차 털었던 놈. 그 놈 제가 알아요. -청송 출신 정보원의 제보 부산 사건 발생 3년 전, 충북 옥천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던 거야. 1997년 8월 26일, 오전 9시. 은행 직원 황 씨는 은행 출장소로 향하던 길이었어. 차에는 당일 사용할 현금과 수표 2억 2천만원이 든 돈가방이 실려 있었어. 출장소에 도착해서 차에서 내리던 그 순간, 갑자기 들이닥친 괴한이 알루미늄 야구 방망이로 황 씨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려쳤어. 그리고 범인은 대기하고 있던 공범의 오토바이를 타고 유유히 사라져. 눈 깜짝할 사이에 발생한 사건. 이 사건, 앞선 두 사건과 동일범의 소행일까? 용의자가 체포된 건 보름 뒤인 9월 10일이었어. 그 용의자가 바로, 부산 사건의 용의자 윤 씨였어. 윤 씨는 자신이 공범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제보로 경찰에 붙잡혔어. 제보자는 윤 씨와 함께 범행을 모의했지만, 마약 중독자라는 이유로 범행에서 배제되자, 화가 나서 윤 씨를 제보하는 거라고 경찰에 주장했어. 하지만 붙잡힌 윤 씨는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어. 심지어 억울하다면서 자해까지 했어. 그런데 11개월 후, 윤 씨는 법정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나. 증거불충분으로. 윤 씨를 제보했던 제보자는 법정에 증인으로 서지 못했어. 재판 전에 사망했거든. 마약을 투약한 채 운전하다가 사고로 사망했어. 판사는 제보자의 진술 말고는 윤 씨가 범인이라는 증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했어. 무죄를 받은 윤 씨는 풀려나자마자 관계 기관에 진정을 넣었어. 그로 인해 담당 형사는 징계를 받았다고 해. 옥천 사건 이후, 장 형사는 청송 출신 정보원으로부터 윤 씨에 대한 제보를 받게 돼. 옥천 사건이 터지고 방송이 나가다 보니, 제보자 중에 한 사람이 저한테 이런 사건이 있었는데, '범인이 제가 알고 있는 동료 중 한 사람인 거 같다'고 제보해줬어요. 자기가 자랑스럽게, 옥천 사건도 자기가 했다고 한다고… -장영권 형사, 당시 서울경찰청 근무 장 형사는 그 뒤로 윤 씨를 주목했어. 다른 청송 출신들에게도 윤 씨에 대한 제보를 모으기 시작했어. 그 제보들 중 공통적으로 들어온 키워드가 '은행'과 '오토바이'였어. 은행시간, 수송차량 움직이는 시간을 체크해서 범행을 한다는 이야기를 제보자한테 들었거든요. 아무리 범죄자가 제보를 한다고 해도 '아 이 제보는 아닌 거 같다'라는 와 닿는 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제보는 분명한 건 맞다, 윤 씨가 범죄자들이 하는 행동을 한다는 거죠. 그래서 아 이놈들이 범인은 맞구나… -장영권 형사, 당시 서울경찰청 근무 제보가 쌓일수록 심증은 커져. 하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어. 그러던 중, 부산에서 현금수송차가 털리는 사건이 일어난 거야. 부산 사건은 옥천 사건과 좀 달라. 은행 직원을 공격하지 않고, 트렁크 속 돈가방만 들고 사라졌어. 그럼, 동일범의 소행일까 아닐까? ▲ 증거를 찾아라 부산 사건이 터지자, 장 형사를 찾는 전화가 빗발쳐. 첩보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연락이 오는 거야. 사건이 나고 나서 부산청에서 저한테 연락이 많이 왔어요 청송 사람들도 많이 알고. 제가 수사를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용의자들이 누구냐, 어떻게 움직이냐. 제가 알고 있는 용의자들은 맞는 것 같은데 증거가 없다… -장영권 형사, 당시 서울경찰청 근무 일단 부산에선 장 형사의 첩보를 바탕으로 윤 씨 수사를 시작했어. 하지만 얼마 후 윤 씨를 용의선상에서 배제했어. 윤 씨가 부산이 아닌 울산에 있었다는 알리바이가 입증됐어. 부산 사건 현장에는 범인이 조작한 트렁크 잠금장치 외에는 아무런 증거가 남아있지 않았었어. 수사할 만한 단서가 없었어요. 거기에 단지 잠금장치가 조작됐다는 그 하나밖에 없고. 딱 꽂아서 들고 딱 들고 가버렸으니까요. 지문도 일절 안 나왔고. 그러니까 수사가 전혀 단서를 잡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단 말입니다. -김삼식, 당시 부산 사건 담당 형사 확실한 알리바이와 불확실한 증거. 그렇게 부산 현금수송차 탈취 사건은 미궁 속으로 빠져. 하지만 장 형사는 포기하지 않았어. 이 제보가 확실하다는 감이 있었으니까. 어떻게든 증거를 찾아야겠다 생각했어. 은행에서 도난당한 수표. 그것만 찾으면 범인을 잡을 수 있어. 하지만 윤 씨는 전혀 빈틈을 보이지 않아. 룸살롱 갔다고 하면 몇백만 원이 나오더라도 절대로 수표로 계산을 안 하는 거죠. 밥 먹고 나서 돈을 내면, 만원짜리다 그러면 수거를 해오는 거죠. 은행이나 다른 범행에 썼던 넘버인가 싶어서, 확인을 해도 아니라는 거죠. 그만큼 철저했다는 거죠 그들이. -장영권 형사, 당시 서울경찰청 근무 결국 장 형사는 다른 방법을 생각했어. 청송 출신 정보원들을 통해 사건의 증거를 직접 수집하기로 한 거지. 이 수표를 꺼내기 위해서, 세운상가 다방 거기서 이제 몰래카메라를 해놓고, 제보자와 주범하고 친구다 보니까, '네가 훔친 수표, 현금으로 바꿔줄 수 있다' '너 그 수표 혼자 못 쓸 것 아니냐, 수표 바꿔줄 수 있다' 술 한잔 먹으면서 이야기 한 거죠. -장영권 형사, 당시 서울경찰청 근무 몰래카메라야. 윤 씨의 지인이었던 정보원을 통해서, 수표를 현금으로 바꿔주겠다고 제안한 거야. 카메라를 숨겨두고 그 현장을 녹화하기로 했어. 만약 윤 씨가 은행에서 도난당한 수표를 가져온다면,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있어. 그렇게 윤 씨가 수표를 현금으로 바꾸는 장면을 영상으로 녹화했어. 그 영상에는 윤 씨가 이런 말을 하는 게 포착됐어. 농담이라도 술 먹고 특히 입조심 해야 돼. 그랬다가는 언젠가는 다 탄로가 난다고. -윤 씨 윤 씨는 5백만원 짜리 수표 한 장을 들고 나타나. 수표를 현금으로 바꾸면서, 이렇게 과거 범행을 자연스럽게 얘기 했어. 그 대화가 영상에 고스란히 담겼어. 그럼 수표는, 은행 도난 수표가 맞을까? 장 형사는 수집한 수표를 조회해 봤어. 그 결과, 도난 수표가 맞았어. 그런데, 은행이 아닌, 다른 데서 도난당한 수표야. 이 은행과는 관련이 없어. 결국 이건 증거가 될 수 없는 수표야. 그럼 범행을 했다고 말하는 영상? 그것도 말뿐이야. 그냥 농담이었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거야. 직접 증거가 되지 못한 수표와 영상. 그런데 장 형사는 그런 생각이 들었대. 윤 씨가 왜 수표를 한장만 가져왔던 걸까? 한 장을 줬거든요. 한 장을 줬는데, 이거는 더 큰 것을 가지기 위한 테스트라는 걸, 감으로 알 수 있는 거죠 바로. -장영권 형사, 당시 서울경찰청 근무 수표를 바꿔도 탈이 없는지, 정말 믿어도 될지, 시험을 해 본거야. 그렇게 장 형사가 다른 방법을 고민하던 중에, 2001년 경주에서 세번째 사건이 터졌어. ▲ 전국구 합동수사의 시작 사건 며칠 후 경찰청장의 지시로, 경주 경찰서, 경북 경찰청, 서울 경찰청의 대규모 합동 수사가 시작됐어. 신출귀몰한 범인을 잡기 위해, 총 39명의 베테랑 형사들로 구성된 어벤져스 수사단이 구성됐어. 이 합동수사단이 가장 처음 한 일은? 옥천 사건과 부산 사건이 동시에 가리키는 유력 용의자 윤 씨의 행적을 조사하는 거였어. 그러다 윤 씨의 주변에 있는 또 다른 인물들을 알게 돼. 전과 10범의 최 씨, 전과 8범의 김 씨. 3명 다 동갑내기에, 청송교도소 출신이야. 윤 씨와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들이야. 동선을 추적해도, 서로 겹치는 부분이 많아. 형사들은 매일 잠복수사를 하며 세 사람의 동태를 살폈어. 그런데 너무 평범해. 이들은 카센터와 세차장에서 일했는데, 아침에 출근해서 일하다가 저녁에 퇴근하는 평범한 생활이야. 게다가 알리바이도 확인됐어. 경주 사건이 일어났을 때 윤 씨가 울산에 있었던 게 확인됐어. 울산의 한 은행에서 현금을 인출하는 모습이 CCTV에 남아 있었거든. 금융거래 내역을 봤으니까요. 돈을 찾았잖아요. 그 시간대에 돈을 찾았으니까 당연히 우리가 은행에 가서 CCTV를 보니까 어? 윤씨가 여기 있는 거죠. 콱 막히니까 수사 진행 과정에서 좀 막막했죠 그때 당시에. -주재정 형사, 당시 경주경찰서 근무 다른 용의자들도 마찬가지야. 범행 당일, 경주가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통화한 기록이 확인됐어. 그래도 아직 의심을 지우기엔 일러. 계속 지켜는 보는데, 지켜보다 보니, 용의자들의 행동이 어딘가 수상해. 이놈들이 뭔가 자꾸 왜 주위를 살피고 하는, 사무실에서 나올 때도 이렇게 주위를 살피고. 보통 그렇지 않거든요. 들어갈 때도 누가 보는가 보고 들어가고. 일반인들이 봤을 땐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형사들이 보는 눈은 다르죠. -주재정 형사, 당시 경주경찰서 근무 보니까 이 사람들, 길을 건널 때도 행동이 이상해. 파란불이 켜져도 가만히 있다가, 신호가 깜박거리기 시작하면 그제서야 뛰어서 건너. 가까운 길도 빙빙 돌아서 가. 따라오는 사람이 있는지, 또 본인을 살피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이런 것을 본인도 계속 살피는 거죠. 두 사람 다 마찬가지였어요. 윤 씨도 그랬고 최 씨도 그랬고. -주재정 형사, 당시 경주경찰서 근무 아직 확실한 단서가 없어서, 당장 체포할 수도 없어. 심증은 가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지 않는 답답한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어. 그러던 어느날, 마침내, 결정적인 단서를 잡게돼 잠복근무 중에 최 씨가 세차장에 계속 있었는데, 나중에 통화 내역을 보니까 다른 지역에 있었던 걸로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휴대폰을 가지고 썼을 수도 있다는 게 나오는 거죠. 그때 당시 최 씨가 가정을 꾸렸는데, 김 씨라고 여자가 있었거든요. 그 사람에 대해서 동선을 우리가 다시 본 거죠. 다시 쭉 살펴보니까, 그 사람이 휴대폰을 범행 시각에 가지고 있었던 거죠. 일부러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 휴대폰을 부인한테 줘서 다른 지역에 보냈다… -주재정 형사, 당시 경주경찰서 근무 당시 윤 씨는 알리바이가 확실했어. 울산에서 현금을 인출한 CCTV 영상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또 다른 용의자 최 씨가 일리바이를 조작한 정황이 드러났어. 형사들은 윤 씨가 범행을 설계하고, 같은 청송 출신 최 씨와 김 씨가 범행을 실행했을 것이라 추측했어. 형사들은 그동안 모은 증거들을 정리했어. 장 형사가 촬영한 윤 씨의 영상, 윤 씨에게서 회수한 도난수표, 청송 출신 정보원들의 제보, 최 씨가 알리바이를 조작한거까지. 모든 수사 자료를 증거로 체포영장을 신청했어. 체포영장, 나왔을까? 경찰은 오늘 울산의 한 카센터 사무실에서 35살 윤 모 씨 등 용의자 세 명을 붙잡았습니다. 용의자들의 위장 사업체였습니다. 범행에 사용된 승합차와 오토바이도 발견됐습니다. 이들은 이 승합차 뒤에 오토바이를 싣고 다니며 전국을 무대로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이들은 충북 옥천 은행 현금수송차량을 턴 혐의로 지난 1997년 체포됐지만 무죄판결을 받고 풀려났습니다. 그러나 경찰의 용의선상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용의자들을 체포했지만, 주 형사는 마음이 여전히 무거웠어. 그때 더 무거웠죠. 다른 사람들은 몰랐지만 이 내용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 우리 반장이나 저나 우리팀 5명은, 직접적인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말로 이걸 어떻게 요리를 해서 자백을 받아내지, 그것만 생각을 한 거죠. -주재정 형사, 당시 경주경찰서 근무 용의자를 체포하면 경찰은 36시간 내에 구속영장을 신청해야 해. 하지만 아직 정황 증거만 있을 뿐, 다른 증거를 찾지 못하면 그대로 풀어줘야 할 수도 있어. 이제는 범행을 인정하는 자백을 꼭 받아야 하는 거야. ▲ 자백과 증거 그럼 자백만 받으면 될까? 이 자백도, 말뿐이잖아. 나중에 법정에 가서 뒤집으면 도로아미타불이야. 자백을 받고, 그걸 바탕으로 직접적인 증거까지 찾아야 하는 거야. 합동수사반은 용의자들을 체포하기 전, 미리 철저한 시나리오를 준비했어. 체포하는 과정부터 조사하는 것까지, 모든 시나리오를 짠 거죠. 그래서 제일 센 용의자 윤 씨는 우리 후배가 있어요. 후배가 약간 강성이거든요. 거기 맡기고, 최 씨는 내가 맡겠다. 체포 이틀 전부터 담당을 정했죠. 누구를 어떻게 조사할 것이냐, 세부 계획을 다 짰거든요. -주재정 형사, 당시 경주경찰서 근무 가장 먼저 용의자들을 분리했어. 따로따로 심문 조사에 들어가. 구속영장실질 심사는 바로 다음날이야. 시간이 별로 없어. 그때까지 자백을 받고 직접적인 증거를 찾아야 해. 그럼 체포된 세 명은 자백을 했을까? 아무 잘못도 없다면서 딱 잡아 떼. 주 형사는 공범 최 씨의 심문을 맡게 됐어. 하지만 두 차례에 걸친 조사에도 요지부동이야. 그런 상황이 되면 보통 형사에 따라서 달라지는데, 마음을 움직여야 돼요. 본인의 마음을 자극해야 해요. 본인도 이제 가정을 꾸렸는데, 나와서 새 출발 한다고 생각해야지. 빨리 살고 나와서, 부인하고 지금 하는 거 유지하면서 살면 새 사람처럼 살면 안되겠나? 한번 생각을 해봐라. 이렇게 계속 설득을 하는 거죠. -주재정 형사, 당시 경주경찰서 근무 최 씨의 마음을 흔들었던 주 형사. 첫날 조사는 아무런 성과없이 끝났어. 다음날 오전 11시에 구속영장실질심사가 잡혀있는 상황이야. 하지만 이 상태라면 영장이 나올 가능성은 희박해. 그렇게 다음날 아침, 주 형사가 무거운 마음으로 사무실에 앉아 있는데, 유치장에서 전화가 걸려왔어. 최 씨가 주 형사를 만나게 해달라 했다는 거야. 주 형사는 최 씨를 찾아갔어. 그러자 최 씨가 사실대로 말하겠다는 거야. '사실대로 얘기하겠습니다' 하더라고요 그 순간에. 아 진짜 이건 형사 하면서, 그때는 그 순간이 대단한 상황이죠. 말이 안나올 정도로. -주재정 형사, 당시 경주경찰서 근무 밤 사이에 최 씨가 마음을 돌린 거야. 주 형사의 가슴을 누르고 있던 그 무거운 돌이 싹 사라지는 기분이었어. 그런데 아직은 기뻐할 때가 아니야. 얼른 자백 받고, 다른 증거를 찾아야 해. 최 씨는 훔친 돈가방이 자기 집에 있다고 자백했어. 굳게 잠긴 최 씨의 입이 열리면서, 수사는 급물살을 타. 형사들은 곧바로 최 씨를 차에 태웠어. 울산 외곽에 있는 한 주택에 도착한 형사들은, 최 씨가 알려준 창고로 향해. 악간 집이 오르막 쪽에 있는데, 문을 열고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까, 왼편에 차고지 같은 창고가 있었어요. 처음엔 우리도 잘 모르겠더라고. 근데 최씨가 '저기 있습니다' 손짓을 하더라고요. -주재정 형사, 당시 경주경찰서 근무 창고 구석에 놓인 물건들을 치우니, 시멘트 바닥이 나와. 형사들은 창고에 있던 해머로 시멘트 바닥을 힘껏 내리쳤어. 그렇게 10cm 정도 깨부수자 뭔가가 보여. 랩과 호일로 단단히 싼, 경주에서 도난당한 수입인지였어. 경찰이 최 씨 집 창고에 들어가 망치로 두께 10cm 정도의 콘크리트벽을 깨자 랩과 은박지로 싼 뭉치가 나타납니다. 랩을 뜯어내자 용의자들이 훔친 가방에 들어있던 9천만 원어치의 수입증지가 나타납니다. -당시 뉴스 보도 중 드디어 증거를 찾아낸 거야. 형사들은 또 다시 최 씨에게 물었어. 수표는 어떻게 했냐고. 방어진에 버렸대. 울산에 있는 바닷가 방어진. 수표가 든 가방을 방어진 앞바다에 버렸다는 거야. 거긴 수심 10미터가 넘는 곳이야. 건지는 건 불가능해. 초조하게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그 순간, 저기 바다 위에 떠있는 뭔가가 눈에 들어와. 해녀들이 작업을 하고 있었어요 마침. 그래서 이제 불렀죠. -주재정 형사, 당시 경주경찰서 근무 형사들은 해녀들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가방을 건져 달라 부탁했어. 그러자 해녀 두 분께서 물 속으로 사라져. 형사들은 초조한 마음으로 바다만 쳐다 봤어. 잠시 후, 해녀들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 그리고 줄을 당겨보라 해. 한참 줄을 당기자, 마침내 물 속에서 가방이 모습을 드러내. 경주에서 도난당한 바로 그 돈가방이야. 형사들은 가방을 받자마자 그 자리에서 열었어. 울산시 남부 방어진 앞바다에서 용의자들이 경주 조흥은행 현금 수송차량에서 훔친 가방이 올라옵니다. 경찰이 가방을 열자 커다란 돌이 나오고 곧이어 자기앞 수표 다발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경찰이 용의자 서른다섯 살 최 모 씨로부터 범행 일체를 자백받고 오늘 해녀를 동원해 바다를 수색한 끝에 찾아낸 겁니다. 용의자 세 명은 훔친 현금 3,100만원을 나눠 가진 뒤 흔적을 없애기 위해 사용할 수 없는 수표를 바다에 버린 것입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가슴이 확 뚫리는 기분이었죠. 물이 주르륵 흐르는 가방 끈을 받으면서. 그게 형사의 마지막 단계에서 오는 희열이죠. 이 맛이지. 지금 생각해도 짜릿하다 참. -주재정 형사, 당시 경주경찰서 근무 ▲ 범행을 철저히 연구했던 '범죄꾼' 이제 확실한 증거를 손에 넣었어. 그러자, 굳게 입을 다물고 있던 주범 윤 씨도 마침내 입을 열기 시작했어. 범행에 걸린 시간 단 10초. 어떻게 가능했을까? 범인들은 2개월 전부터 은행 수송차를 감시했다고 해. 시간, 동선, 인원 등 모든 것을 파악했어. 신호마다 걸리는 시간까지 꼼꼼히 체크했어. 고성능 망원경, 야간 투시경까지 사용했다고 해. 카센터를 운영하면서 견인차를 끌고 다니다 보니까 시민들이 의심을 하지 않지 않습니까? 견인차로 움직이면서 은행직원들의 동태를 다 파악하고 있었던 거죠. -장영권 형사, 당시 서울경찰청 근무 그렇게 모든 걸 파악한 뒤, 사건 전날 밤, 현금수송차량이 주차된 곳을 찾아가 미리 트렁크 잠금장치를 조작했던 거야. 그리고 범행 당일, 설계자 윤 씨는 직접 범행에 나서지 않아. 자신이 경찰의 주목을 받고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거든. 용의자로 조사받은 적이 있기 때문에, 이 사건이 터지면 본인을 찾아올 것이란 걸 예상했겠죠. 그러니까 본인은 빠지고 다른 사람 둘을 시킨 거죠. -주재정 형사, 당시 경주경찰서 근무 경주에서 범행이 있던 그 시각, 윤 씨는 울산에 있는 은행을 찾아갔어. 일부러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 당시엔 은행이 CCTV가 있는 몇 안되는 장소였어. 공범인 최 씨와 김 씨도 핸드폰을 지인에게 맡기고 범행 장소로 향했어. 지인들이 범행 시간에 맞춰 통화를 하게 만들었어. 이렇게 알리바이를 조작한 거야. 그리고 범행을 마친 다음날, 이들은 아무렇지 않게 카센터와 세차장으로 출근해서 평범한 직원들처럼 일했어. 세 사람은 범죄수익금을 똑같이 나눴다고 해. 배신하는 사람이 생기는 걸 방지하기 위해. 범행 준비부터 실행, 사후 대처까지, 모든 과정에 빈틈이 없어. 어렵게 받아낸 자백과 증거들 때문에, 마침내 윤 씨와 공범들은 재판에 넘겨졌어. 재판 결과, 부산 사건과 경주 사건에 대한 윤 씨의 혐의가 인정됐어. 다만 97년도 옥천 사건은 제외됐어. 윤 씨는 징역 5년, 공범 최 씨와 김 씨도 징역 5년형과 4년형을 선고 받아. 이들 검거 후 발견된 또 다른 증거가 있어. '무죄' 판결을 받은 기사만 모아놓은 스크랩북이야. 만약 붙잡힌 경우 어떻게 하면 무죄로 풀려날 수 있을지 까지 연구한거지. 밑줄까지 쳐가면서 공부한 흔적이 남아 있었어. 돌이켜 보면, 체포된 이후에 당당했던 그들의 태도. 이렇게 하면 피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던 거야. 교도소를 제집처럼 드나들며 범죄를 연구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 있어. 바로 '범죄꾼'. 그 친구들은 전과가 벌써 10개 이상씩 되는 사람들이고, 실형을 살았던 사람이기 때문에. 거기 안에 교도소에 있으면 연구하는 게 그런 거죠. 범죄꾼이라고 하죠. 그 친구들을 항상 앉아서 '내가 나가서 열심히 해서 잘 살아야지' 이런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떻게 하면 안 붙잡히고 범행을 할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아요. -주재정 형사, 당시 경주경찰서 근무 범죄꾼들은 경찰의 수사 방식은 물론, 법적 지식까지 꿰뚫고 있대. 범죄를 연구하며 완벽한 범죄를 위한 시나리오를 쓰는 거야. 이번에 만난 형사들에게 '완전 범죄 가능한 걸까요?'라고 질문했어. 그러자 이런 답변이 돌아왔어. 완전범죄는 없다. 언젠가는 완전 범죄라는 게 없기 때문에 잡힌다. -장영권 형사, 당시 서울경찰청 근무 완전범죄는 없습니다. 범행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짓이다, 100% 다 잡힌다. -김삼식, 당시 부산 사건 담당 형사 완전범죄, 그거는 있을 수가 없죠. 완전범죄를 막으려고 하면 뒷받침돼야 하는 것은 형사의 역량 또 집념이 있어야 합니다. 나쁜놈들 잡아야지 범죄꾼들 잡아야지, 그게 형사라고 생각하니까. -주재정 형사, 당시 경주경찰서 근무 범죄꾼들이 노력하는 만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애쓰는 사람들. 우리나라 형사들이야. 포기하지 않는 끈기와 열정이야말로, 완전범죄를 풀 수 있는 마스터키가 아닐까. 은행을 노린 범죄들. 만약 똑 같은 범죄가 오늘날, 지금 발생한다면? 보안 때문에 구체적은 내용은 밝힐 수 없지만, 그때보다 훨씬 더 강력한 보안 장치들이 마련됐다고 해. 만에 하나 그 모든걸 뚫고 돈가방을 뺏는데 성공해도, 금방 잡힐 수 밖에 없어. 모든 도로에 있는 CCTV, 우리나라의 과학 수사도 세계적인 수준이니까. 은행 강도는 이제 영화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야. 오늘 말한 사건의 범인들. 전과가 있고, 같은 교도소 출신이야. 그래서 교도소에서 출소한 뒤, 3년 이내 재범을 저지를 확률을 조사해 봤어. 2023년 기준, 한국은 22.6% 정도래. 미국의 재범률은 37%, 호주는 42.7%야. 외국에 비해 우리나라 재범률은 상당히 낮은 수치야. 그러니까 오늘 말한 범죄꾼들은 극히 일부의 이야기라는 거야. 무엇보다, 교정시설을 통해 교화과정을 거친 후, 마음을 잡고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 훨씬 많아.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꼬꼬무 찐리뷰]'150억' 일본 돈 탈취 성공했지만…밀정 때문에 무너진 '철혈광복단'
등록일2025.02.28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27일 방송된 '철혈광복단-역사를 뒤바꿀 비밀 작전'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배우 추상미, 코미디언 신기루, 야구 해설위원 이택근이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미지의 땅, 블라디보스토크 때는 1994년 7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야. 조용한 한 마을에, 작은 버스 한 대가 멈추고, 그 안에서 열댓 명 되는 사람들이 내려. 며칠 전 한국에서 단체로 온 사람들이야. 사람들은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있어. 누군가는 열심히 사진과 영상을 찍고, 또 누군가는 수첩과 펜을 들고 일일이 기록을 하고 있어. 당시 찍은 영상이야. 이곳에 보고 있는 이 탑은 1918년부터 1922년까지 한국인들이 투쟁하다 죽은 걸 기념하여 세운 탑입니다. 여기에 유물들이 한국의 것과 상당히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바다에서 들어오는 일본군에 대항하여 기관총을 놓고 지켜준 장소입니다. 이들은, 우리나라 역사를 연구하는 한 재단의 연구원들이야. 이 영상을 찍 사람은 사학자 박환 교수. 러시아에 있는 독립운동 사적지를 조사하고 있는 거야. 1994년 7월에 러시아 연해주에 독립운동 사적지 탐방을 한 팀은 아마 저희가 최초일 것입니다. 1990년에 한국과 러시아가 국교를 수교했거든요. 독립운동의 성지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블라디보스토크 같은 경우는 1992년이 돼서야 비로소 민간인들한테 개방이 됐습니다. 그래서 독립운동사를 조금 더 입체적으로 잘 알기 위해서 답사라든가 이해가 상당히 필요했습니다. -박환, 당시 연구팀원, 한국학 박사 블라디보스토크는 그 전까지만 해도 우리에게 금단의 구역이자 베일에 싸인 장소였어. 박환 교수는, 또 언제 이곳에 올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연구에 몰두했어. 유물과 유적 발굴은 물론이고, 독립운동가 묘소를 찾아다니며 그 모든 흔적들을 영상으로 남겼어. 그 중에서도, 특히 박환 교수가 조사하고 싶었던 한 독립운동가가 있었어. 그 흔적을 꼭 찾고 싶어. 해외에서 활동했다는 이 독립운동가는 국내엔 자료가 거의 없었대. 그래서 혹시나 러시아에는 그 흔적이 있을까, 찾아보기로 한 거야. ▲ 버스기사의 뜻밖의 정체 근데, 러시아가 좀 넓어? 게다가 블라디보스토크는 이제 막 개방이 된 미지의 영역이야. 조사는 한 달 가까이 이어졌어. 박환 교수는 버스 맨 앞자리에 앉아서 캠코더로 바깥 풍경을 찍었어. 그렇게 몇 시간을 이동하는데, 꾸벅꾸벅 졸음이 쏟아져. 근데 그 순간, 대뜸 누군가 말을 걸었어. 버스기사였어. 버스기사님이 함경도 말을 쓰는 고려인이라 대화가 통했어. 버스기사가 박환 교수에게 이런 걸 물었어. 혹시... 최계립이라고 아십네까? 최계립. 좀 생소한 이름일 수도 있지만, 박환 교수는 최계립이라는 이름을 너무 잘 알고 있었어. 왜인지 직접 들어봐. 저는 사실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러시아 유적지, 독립운동 사적지를 조사하고 탐방할 때, 제가 체크한 리스트에도 들어가 있는, 만주와 러시아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한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흔히들 저희가 홍범도 장군, 김좌진 장군을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거의 그런 급이다, 라고 말씀을 드려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분의 활동이라든가 이런 것은 독립운동에 있어서 대단한 그러지위를 차지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최계립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었고요. -박환, 당시 연구팀원, 한국학 박사 건국 훈장, 대한민국 건국에 큰 공로를 한 사람들에게 주는 훈장이지. 최계립은 우리나라 건국 훈장 중 세 번째로 높은 독립장을 받은 인물이었어. 근데 그런 이름을, 버스기사가 갑자기 툭 꺼낸 거지. 최계립 선생이요? 그럼요 잘 알지요, 아주 큰 일을 하신 분 아닙니까. 아이고, 정말 그 이름을 아십네까? 그분이 우리 아바이입니다. 엥? 이게 무슨 소리야? 이 버스기사의 아버지가, 바로 최계립이라는 거야. '우리 아바이' 뭐 이런 식으로 표현을 하셨는데, '우리 아버님이 최계립이다'라고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바로 옆에 그분의 후손이 있을 줄이야 꿈에도 생각을 못했던 거죠. -박환, 당시 연구팀원, 한국학 박사 한국에서부터 오랫동안 그 흔적을 쫓던 인물인데. 바로 옆에, 최계립의 아들이라는 사람이 딱! 있었던 거야. 이 버스기사의 이름은 최다니엘이야. 우선 성은 최계립과 같아. 근데, 진짜 아들이 맞을까? 박환 교수는 확인을 위해 캠코더를 세우고, 최다니엘 씨를 인터뷰하기 시작했어. 그런데 최다니엘 씨는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언제 돌아가셨는지, 외형이 어땠는지, 독립활동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아버지의 인상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했어. 사실 이런 건 누구나 독립군에 대해 흔히 말할 수 있는 부분이지. 그래서 박환 교수가, 그에게 물었어. 혹시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이나, 아버지에 대한 자료가 있냐고. 아, 사진은 지금 내한테 있지 아니한데, 집에 우리 아바이게 있는지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최다니엘 씨가 이런 걸 가져왔어. '간도 15만원 사건에 대한 40주년을 맞으면서, 최계립' 이라고 쓰여 있는 종이 뭉치. 이게 아버지 최계립이 직접 쓴, 41장짜리 수기래. '간도 15만원 사건' 들어봤어? 일제강점기 때 일제에 엄청난 충격을 줬던 독립군의 비밀 작전이자, 해외 독립운동 역사상 가장 긴박했던 사건 중에 하나야. 근데 '간도 15만원 사건'에 대해 쓴 수기가 있다? 지금껏 들은 바가 전혀 없어. 게다가 독립운동가가 직접 본인의 활동을 기록한 경우는 흔치 않아. 박환 교수는 이 수기를 차근차근 읽어봤어. 한 장 한 장 넘기는데, 내용이 장난 아니야. 지금껏 역사에 빈칸으로 남아있던 내용들이 술술 나와. 진짜 최계립의 수기인 거야. 최다니엘 씨는 최계립의 아들이 맞았어. 대단한 항일운동가가 직접 쓴 수기를 보기는 처음이거든요. 그 감동은 어마어마하지 않겠습니까. 수기가 발견이 됨으로써 간도 15만 원 의거의 내면적인 이야기들, 그리고 우리 독립운동계의 또 그 속살. 이런 것까지도 아주 생생하게. 독립운동가 중심의 어떤 간도 15만 원 의거를 부활시키고 복원할 수 있는… -박환, 당시 연구팀원, 한국학 박사 국내에는 남아있는 사료가 많지 않아, 그동안 단편적인 내용만 알려졌었대. 그런데 이 수기가 드러나면서, 이 사건의 전말이 모두 밝혀진 거야. '간도 15만 원 사건'이 어떤 사건일지, 이 수기를 따라서 106년 전으로 돌아가 볼게. ▲ 독립 비밀 결사, 철혈광복단 1919년 3월 1일, 우리나라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어. 대한민국의 독립을 염원하는 만세운동이 일어났잖아. 만세운동의 열기는 우리나라를 시작으로, 해외에 사는 동포들에게도 전해졌어. 그중 제일 분위기가 달아오른 곳이 있었어. 간도 지역에 용정이라는 곳이야. 만세운동이 시작되고 열흘 만인 3월 13일, 용정에선 독립을 기원하는 만세운동이 벌어졌어. 당시 약 2만 명의 사람들이, 손에 태극기를 들고 뛰쳐 나왔대. 다 같이 만세를 외치며 용정에 있는 일본 총영사관으로 향했어. 행진의 끝이 보이던 그때, 무장을 한 군인들이 보여. 그러더니 갑자기, 총소리와 함께 만세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 쓰러지기 시작했어. 바닥엔 핏자국이 가득하고, 사람들은 혼비백산하며 울부짖었어.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고, 열 명이 넘는 사람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넘는 사람이 중상을 입었어. 그날 이후,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선 총칼을 든 왜놈에, 우리도 총칼을 들고 맞서야 한다 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어. 이런 분위기 속 무장 투쟁을 준비하는 독립운동 단체가 하나 있어. 그 단체의 이름이 뭐냐, 鐵血光復團(철혈광복단). 쇠 철, 피 혈 자를 써. 이름부터 굉장히 강렬하지? 이 철혈광복단, 언제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정확히 알려진 게 없어. 일제에 들키지 않게 은밀하게 활동하던, 비밀결사 단체니까. 그나마 알려진 건, 민족학교에서 군사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 정도야. 그리고 용정에서 있었던 만세운동도, 바로 이 철혈광복단이 주도했던 거래.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 있는 독립운동, 3.1운동을 준비하거나, 실질적으로 활동하고 그걸 이끌어 나가는 주력으로 3.1운동 이후에 어떤 모든 독립운동 과정을 철혈광복단 세력들이 주도적인 활동을 한 거죠. -반병률, 한국외대 명예교수, 역사학 박사 근데 용정 만세운동 때, 사람들이 많이 죽고 다쳤잖아. 철혈광복단은 이제 무기를 들고, 일제에 맞서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아주 큰 문제가 있었어. 무기를 살 돈이 없는 거야. 일제의 수탈 때문에, 나랏돈이 없었던 거야. 특히 일제의 수탈이 심했던 1919년 한 해에만, 약 1억 2천 만원이 넘는 돈을 빼앗아 갔대. 지금으로 치면 12조원에 달하는 돈이야. 당시 노동자의 하루 임금은 1원이었어. 그러면 우리나라를 벗어나 간도나 러시아에서 지내는 한인들 사정은 어땠을까? 이들이 할 수 있는 건, 농사를 짓는 게 전부였어. 독립군을 위한 무장에는 엄청난 군자금이 필요하단 말이에요. 그런데 실질적으로 만주나 러시아에 살고 있는 한인들은 대부분 다 빈농들이에요. 한반도에서 살기가 어려워서 그냥 할 수 없이 떠난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자금을 내지만 한계가 있단 말이에요. -반병률, 한국외대 명예교수, 역사학 박사 ▲ 일제에 빼앗긴 돈을 되찾자 이렇게 군자금 문제로 고민하던 사이, 6개월이 지났어. 1919년 9월, 북간도에 있는 한 마을이야. 철혈광복단원 최봉설의 집에 누군가 찾아왔어. 누구시오? 우죽 선생, 나요 우죽 선생은, 철혈광복단원들끼리 부르던 암호야. 최봉설을 찾아온 건, 같은 단원인 윤준희라는 남성이었어. 둘은 그 집에서, 은밀하게 대화를 나눴어. 그나저나 걱정이오. 빨리 무기를 사야 왜놈과 싸울텐데, 그 금전을 어찌하면 좋겠소? 안 그래도 얼마 전 그 문제에 대해 우죽 선생들과 얘길 나눴소. 그때 나온 방편이 하나 있긴 한데... 그가 말하는 방편, 일제가 빼앗은 우리 돈을 다시 찾아오자는 거였어. 수탈당한 돈을 되찾아, 그 돈으로 무기를 사자는 거야. 일제로부터 돈을 되찾을 방법, 뭐가 있을까? 고민하던 중, 이들이 떠올린 한 사람이 있었어. 전홍섭이라고, 바로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이야. 용정에 있는 조선은행. 조선은행은 일제가 식민지 통치 자금을 관리하기 위해 세운 은행이야. 전홍섭은 일본은행에서 일하는 조선인이었던 거야. 전홍섭에게 원하는 건 은행 내부 정보. 근데 아무리 조선인이라지만 일제 치하에서 일하는 사람이잖아. 이런 사람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단원들이 전홍섭을 떠올린 이유가 있었어. 용정 만세운동 때, 다친 사람들을 병원으로 옮겼는데, 그때 그 일을 도와준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전홍섭이었어. 일본 은행에서 일하지만, 분명 애국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거지. 며칠 뒤, 용정에 있는 조선은행이야. 전홍섭이 자리에 앉아,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어. 그런데 돈 사이에서 '전홍섭 동지, 긴히 요담할 일이 있으니, 해가 지면 병원 뒤쪽 공동묘지로 나오시오'라는 서신을 발견했어. 이걸 받은 전홍섭은 고민 끝에 약속 장소로 갔어. 그러자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비췄어. 윤준희였어. 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소. 만세 시위 때부터 자네를 지켜보았소. 우리를 도와주시오. 이 말을 들은 전홍섭, 말이 없어. 한참동안 정적이 흘렀어. 우린 목숨을 걸고 이 일을 하려는 것이오. 왜놈들로부터 돈을 되찾으려면, 우린 당신의 도움이 꼭 필요하오. 한참을 망설이던 전홍섭이, 입을 열었어. 곧 우리 쪽으로 큰돈이 들어올 일이 있을 것이오 전홍섭의 말은 이랬어. 일제가 대륙 침탈에 필요한 철도 부설금을 용정 조선은행으로 보내기로 했다는 거야. 바로, 그 돈을 확보하면 되는 거야.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중국과의 전쟁 또는 러시아와 전쟁할 때에 일본군의 수송, 그걸 편하게 하기 위해서는 철도를 부설하는 게 제일 우선이고, 철도를 일본이 관리하는 자금의 일환이었다고 그러죠. 근데 그거를 확보를 한다는 거니 기막힌 아이디어죠. -반병률, 사학자 철도 부설금은, 함경북도 회령에 있는 조선은행에서, 간도에 있는 용정 조선은행으로 이동한대. 회령에서 용정까지는 약 120리, 지금으로 치면 50km가 거리야. 근데 차도나 철도가 없는 지역이야. 그래서 말에 실어서 이동해야 해. 호송대가 돈을 가지고 말로 이동하는 그때! 습격을 하는 거야. ▲ 목숨을 건 작전 현금 소송은, 삼엄한 경비가 필요하지. 호송대는 중무장을 할거야. 이에 맞설 철혈광복단도 최정예 멤버를 모집해야 해. 어떤 사람이 적합할까? 현장 지리도 잘 알아야 하고, 무기를 다루는 능력, 말 타는 실력, 격투 기술까지 있어야 해. 그렇게 선발된 인원이야. 전홍섭과 접촉했던 윤준희, 최봉설을 비롯해, 임국정, 한상호, 박웅세, 김준 까지. 20대 초반의 청년 6명이 모였어. 이들은 본격적으로 계획을 준비하기 시작해. 우선 단원 몇 명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갔어. 작전에 쓸 총을 사러 간 거였어. 당시 러시아에선 독립군들도 무기 구매가 가능했대. 자기가 키우던 송아지를 팔고, 그 돈으로 총을 샀다고 해. 바로 이 총이야. 러시아제 브라우닝 권총. 안중근 의사가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을 때 쓴 총과 같은 거래. 이 총은 치명적인 단점이 있어. 사거리가 짧고 명중률이 낮아. 심지어 불발하는 경우도 있어. 그야말로 목숨을 건 계획이야. 완벽하게 준비해야 해. 호송대가 밤에는 대응하기 힘들 것이니 해가 떨어진 후 습격하기로 했어. 그럼 아침에 출발한 호송대가 동량어구 쯤을 지날 거야. 그렇게 매복 장소는, 동량어구로 정해졌어. 매복 해서 급습하려면 호송대와 가까워야해. 용정으로 진입하는 좁은 길이자 유일한 길목이야. 그리고 인원 배치는 세 명씩 두 조로 나눴어. 윤준희, 박웅세, 김준이 한 조가 되고, 최봉설, 임국정, 한상호가 한 조가 됐어. 윤준희 조가 앞쪽에 있다가, 호송대가 오는 걸 확인하면 최봉설 조에게 신호를 보내. 그리고 호송대가 그곳을 지나갈 때, 6명이 앞뒤에서 동시에 습격하기로 했어. 탈취에 성공하면 박웅세와 김준은 마을로 도주해 숨고, 최소 인원만 목적지로 이동하기로 했어. 계획을 완수하기 위한 마지막 목적지는, 일제에 대항할 무기를 살 수 있는 곳. 바로 블라디보스토크야. 근데 아직 파악을 하지 못한 정보가 있어. 바로 현금 호송 날짜. 철혈광복단원들은 애타게 전홍섭의 연락을 기다렸어. 단원들이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던 그때, 은밀하게 서신이 하나 전달됐어. 붓에 먹물을 묻혀 문지르니, 비밀서신에서 글씨가 나왔어. 一月 四日. 거사 날은 1월 4일이야. ▲ 운명의 그날 드디어 1920년 1월 4일. 함경북도 회령에 있는 조선은행이야. 아침 이른 시간부터, 호송대가 돈이 든 궤짝을 말에 실었어. 호송대는 일본 순사와 은행원, 우편물 호송인 등 총 6명. 호송대는 허리에 도검을 차고, 장총에 권총까지 장착했어. 완전 철통 보안인 거지. 그날 오후, 동량어구야. 길목 아래 언덕에는, 철혈광복단원들이 매복했어. 손에는 총을 들고, 호송대가 지나가기만 기다리고 있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숨죽여 있다가, 호송대가 이 길을 지나갈 때, 정확히 덮쳐야 해. 기회는 단 한 번이야.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호송대는 오질 않았어. 해는 졌고 날은 추워. 단원들은 하나 둘 지쳐가기 시작했어. 다들 뭔가 잘못된 거 아닌가 하던 그때, 멀리서 말굽 소리가 들려와. 잠시 후, 말굽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어렴풋이 일본어가 들려. 호송대가 드디어 동량어구에 온 거야. 호송대원들은 목적지에 거의 도착해 안심한 듯 했어. 그 순간! 사격!! 신호와 함께, 철혈광복단 여섯명이 동시에 뛰어올랐어. 탕! 탕! 총소리와 함께, 말에 탄 순사와 호송 대원이 굴러 떨어지고, 다른 사람들도 혼비백산이 돼서 여기저기 도망가기 바빴어. 예상치 못한 습격에, 호송대가 손도 쓰지 못하고 순식간에 당한 거야. 윤준희와 최봉설은 궤짝이 실린 말에 올라탔어. 단원들은 약속한 대로 움직이기 시작했어. 박웅세, 김준은 재빠르게 마을로 숨고, 나머지 넷은 산 깊은 곳으로 향했어. 한 10리쯤 달려왔을까? 산 중턱이야. 주변을 확인하고 궤짝을 내렸어. 어두운 산속, 유일한 빛인 달빛에 비춰 둘은 짐을 풀었어. 10원권 100장씩 묶여서 50개, 5만 원 이야. 5원권 200장씩 묶여서 100개, 10만 원이야. 총 15만 원이야. 1920년에 15만 원, 지금으로 치면 얼마나 될 것 같아? 15만 원은 학자들마다 여러 견해가 있는데 현재 금액으로는 학자들에 따라서는 한 150억 정도 된다, 라고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마어마한 돈이었어요. 1919년에 4인 가족 기준으로 해서 한 25원 정도면 됐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이게 15만 원이니까요. 어마어마한 어떤 무장을 할 수 있는. 그 당시에 북로군정서가 이제 대원이 한 500명 정도 됐는데 그런 게 한 9개 부대 정도가 편성될 수 있는, 그러한 정도의 화력 무장력을 갖추는 그 정도의 어마어마한 돈이 그 당시에 의거로 갖고 온 것이죠. -박환, 사학자 지금으로 치면 150억, 엄청난 금액이었던 거야. 그때 러시아에서 총과 탄환 세트가 35원에 거래됐어. 그럼 이거 4천 개 이상을 살 수 있는 돈이야. 이제 서둘러 이 돈을 가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야 해. 그런데 임국정이 말에 올라타더니, 정반대 방향인 백두산 쪽으로 향했어. 이것도 작전이었어. 겨울이라 발자국이 남으니, 추적에 혼선을 주려 한 거야. ▲ 최종 목적지, 블라디보스토크 그 무렵, 일제 측에서 현금을 수송하던 호송대가 습격당했다는 걸 알게 됐어. 현장에서 두 명이 사망했고, 돈 15만 원까지 빼앗긴 상황이야. 일제는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고 일본 경찰 11명을 현장에 급파시켰어. 이건 분명 현금 수송 일을 아는 자의 짓이라고, 은행 안에 범인과 내통한 자가 있을 거라 여겼어. 내부자 색출에 나선 일본 경찰은, 평소 한인과 교류가 잦다는 전홍섭을 의심하기 시작해. 사건 당일 밤, 전홍섭은 체포되고 말아. 그리고 강도 높은 고문을 받아. 어떻게 됐을 것 같아? 조선은행 회령지점에서 용정지점으로 15만원의 현금을 운송하던 도중 십여 명의 무기를 가진 자들이 달려들어 두명을 살해하고 현금 15만원 전부를 빼앗아 가지고 달아났다는 데 범인은 아직 잡지 못한다더라. -매일신보, 1920년 1월 8일 기사 中 사건 나흘 후의 기사야. 아직도 범인을 잡지 못했다는 내용이야. 그리고 범인을 10여 명이라고 추정하고 있지? 범인의 숫자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단 거지. 왜였겠어? 이때까지, 전홍섭이 입을 열지 않았다는 얘기야. 같은 시각, 철혈광복단원들 역시 한시가 급해. 체포된 전홍섭이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빨리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배에 올라타야 하거든. 견대에 싼 돈을 몸에 묶고, 두루마기를 겉에 두른 채, 일제의 눈을 피해 3일을 쉬지 않고 걸었어. 그렇게 항구에 도착한 네 사람은, 무사히 블라디보스토크행 배에 탔어. 캄캄한 망망대해를 지나 다음날 이른 새벽. 저 멀리 어두운 항구에 번쩍번쩍 불빛이 가득해. 드디어 러시아에 도착한 거야. 배에서 내려 러시아 땅을 밟는 순간, 단원 한 명이 말해. 잠깐만, 아직 긴장을 풀지 마시오. 지금 왜놈들이 여기저기 깔려있소 보니까, 여기저기 일본군들이 깔려있어. 당시 일본은 러시아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어. 근데 러시아 내에서 정부군과 혁명군이 내전을 벌인 거야. 그동안 러시아 정부군과 협력했던 일본은, 러시아 정권이 바뀌면 손해야. 그래서 러시아 정부군을 도우려고, 일본군이 이곳에 상주하고 있었던 거지. 다행히 단원들은, 일본군들의 눈을 피해,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으로 갔어. 한인들이 제일 많이 사는 곳이자, 독립운동의 성지와도 같은 곳이었어. 다행히 신한촌 한인들은 이들을 반겼어. 그중 한 한인이, 이들에게 도움을 줬어. 그의 도움으로 은신처에 몸을 숨길 수 있었어. 몸을 녹인 이들은 곧 비밀회의를 열었어. 돈은 윤준희 동지가 관리하고, 무기는 임국정 동지가 사는 걸로 하지요. 그 사이, 사건이 일어난 용정에서 일본 경찰은 아직도 헤매고 있어. 게다가 러시아 내전에서 혁명군이 승기를 잡았어. 그리고 점점 동진해 오고 있어. 일본 입장에선 발 등에 불이 붙었어. 상황에 따라, 되려 일본군이 도망쳐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어. 일본 경찰은 4-50명씩 나서서 간도 전역을 수색했어. 조선은행 권을 가진 자는 모두 체포한다! 무슨 수를 써서든 입을 열게 하라! 조선은행권을 쓰는 모든 사람을 다 잡아들이기로 한 거야. 죄 없는 조선인 농민들을 무작정 체포해서 악행을 가한 거야. 그리고 이런 걸 배포하기도 했어. 포고 제2호. 조선은행에서 발행한 5원권과 10원 권을 사용하는 자가 있으면 즉시 보고할 것. 신고자에겐 대가를 지불하겠음. 이들을 잡으려고, 현상금까지 걸은 거야. 무기를 살 때 조선은행권을 쓰면, 일제의 레이더에 걸릴 거야. 그러니 환전을 해야 해. 이 환전도 암암리에 해야 해. 그리고 은밀하게 무기를 구매해야 하는 거지. 이걸 안 들키고 하려면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 마침 무기 구매를 맡은 임국정이 이렇게 말했어. 내가 우리 일을 도와줄 적합한 자를 알고 있소. 아마 그 자라면 가능할 거요. 그가 말한 자의 이름은, 엄인섭이었어. ▲ 마지막 임무의 적임자, 엄인섭 엄인섭, 바로 이 사람이야.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홍범도 장군이야. 그 옆에 있는 자가, 바로 엄인섭. 어떤 인물일 것 같아? 이토 히로부미를 척결한 안중근의 의형제였다는 거죠. 안중근 의사가 1907년에 가거든요. 러시아 연해주로. 그래서 연해주로 갔을 때, 자기가 만난 의기투합 된 두 사람을 딱 뽑는데 한 사람이 엄인섭이고요. 안중근 의사와 같이 동의회 의병의 국내진공작전 때 같이 들어왔던 사람, 러시아 지역의 3.1운동을 이끌고 지도할 수 있는 지도자로까지 지명될 정도로, 애국자로서 알려진 사람이에요. -반병률, 사학자 엄인섭은 독립운동가 사이에서, 신뢰도가 높은 사람이었어. 안중근 의사와 함께 단지 동맹을 맺고 의형제처럼 지냈다고 알려졌어. 1908년 안중근 의사와 함께 의병부대를 이끌고 일본군과 싸우기도 한 자야. 게다가 러시아어도 잘했어. 임국정은 무기를 살 돈을 들고 엄인섭을 만나러 떠났어. 거래가 성사될 때까지 며칠이 걸릴 거야. 1분 1초가 급하지만, 이 거래만 잘 끝나면 모든 게 술술 풀리는 거야. 시간이 지나고, 어느새 설 연휴야. 집마다 새해를 맞이하는 들뜬 분위기 속에서, 남은 세 청년만 초초한 마음이었어. 무기를 사러 떠난 임국정을 기다리고 있는 거야. 당최 올 때가 됐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오질 않고 있어. 며칠이 더 지나, 1월 30일이야. 기다리던 임국정이 돌아왔어. 근데 한 명이 아니야. 임국정 옆에, 처음 보는 얼굴이 있어. 바로 무기 구매를 도와준, 엄인섭이었어. 둘의 표정이, 아주 좋아. 일은 잘 치렀소. 내일 저녁 총과 탄환, 기관총을 거래하기로 했소. 이게 다 엄인섭 동지 덕분이오. 이제 가서 돈을 주고 무기만 받아오면 된다는 거야. 날만 밝으면, 무기를 받고 그렇게 염원하던 독립투쟁을 할 수 있는 거야. 단원들은 간만에 소박하게나마 국수에 술 한잔을 먹고 잠을 청했어. 다음 날인 1월 31일, 어떻게 됐을 것 같아? 이 기사를 한 번 봐봐. 31일 오전 3시쯤 되어 잠복하고 있는 신한촌을 격한 결과 범인을 체포…도적질 한 돈과 혈포 탄약 가방 등을 발견하여 압수하였다. -매일신보, 1920.02.06 기사 단원들은 체포되고 탈취한 돈도 다시 빼앗겼어. 대체 어떻게 된 걸까? 그날 새벽, 3시로 돌아가볼게. ▲ 수포로 돌아간 계획 철혈광복단원은 은신처에 모여서, 다 같이 잠을 자고 있었어.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이들의 은신처를 찾아와 문을 두드렸어. 그리고 문을 박차고선, 단원들이 자고있는 방으로 들이닥쳤어. 일본 헌병대였어. 잠에서 깬 이들은, 손 쓸 새도 없이 헌병대에게 제압당했어. 헌병대는 포승줄로 이들을 결박하기 시작했어. 그 순간, 최봉설이 주먹으로 헌병대의 얼굴을 가격했어. 그리곤 밖으로 재빠르게 도망쳤어. 그때 헌병대가 쏜 총에, 최봉설이 오른쪽 어깨를 맞았어. 최봉설은 총에 맞은 어깨를 부여잡은 채 무작정 뛰어갔어. 하지만 최봉설을 제외한 나머지 단원들은 꼼짝 못 하고 그 자리에서 모두 체포됐어. 일제가 어떻게 알고 온 걸까? 이들의 체포 과정에서, 아주 큰 공을 세운 일본 경찰이 있었어. 이름은 기토 가쓰미.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통역관으로 활동했는데, 사실은 비밀리에 경찰로 일하고 있었어. 주로 비밀결사, 독립운동가를 사찰하고, 체포하는 일을 했대. 기토 가쓰미는, 독립운동가를 색출하는 능력이 뛰어났대. 그만의 특별한 방법이 있었거든. 일본 영사관 직원들이 자기가 관리하는 밀정들이 몇 명씩 있었던 모양이에요. '기토'라는 사람이 제일 유명한 한인 밀정을 관리했던 한국어 통역이었죠.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 총영사관에 소속됐던 사람인데요. 첩보 보고서나 일본 외무성 기록을 보면 기토 이름이 많이 나와요. -반병률, 사학자 바로, 밀정을 이용하는 거였어. 그럼 이 사건, 어떻게 된 거겠어? 내부에, 기토에게 보고한 밀정이 있었다는 얘기지. 누가 밀정이었을까? 이 밀정, 아주 오래전부터, 밀정으로 활약한 걸로 보여. 한국어 신문의 간행을 막으려 활자 15000개를 훔치기도 했고, 을사늑약을 체결시킨 일본 외교관을 암살하려 한다는 내용도 일제에 일러바쳤대. 고급 정보를 전부 넘겨주던, 어마어마한 밀정이었던 거야. 그게 누구냐, 일제가 쓴 명단에, 그 이름이 나와 있어. 밀정의 정체는 엄인섭. 철혈광복단 무기 구매를 도운 자, 안중근과 단지 동맹을 맺고, 의형제처럼 지냈던 자. 독립군이 그토록 신뢰했던 엄인섭이, 바로 밀정이었던 거야. ▲ 변절자 엄인섭 이 사람의 애국심에 대해서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단 말이에요. 1910년대 내내. 러시아 지역의 3.1운동을 이끌어갈 지도할 수 있는 그런 지도자로까지 지명될 정도로 1919년까지는 몰랐던 거죠. 그러니까 1920년 이 15만 원 사건 주역들이 갔을 때, 엄인섭이라는 사람을 누가 의심을 했겠어요? -반병률, 사학자 항일독립 운동에 있어서는 거물 중에 이제 거물로 알려져 있던 인물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제 그 엄인섭을 믿었던 거죠. 그렇게 대단한 항일운동가가 밀정이었을까? 라는 데 많은 의구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본 외무성 사료관에 있는 정보 보고에 엄인섭이 밀정이고, 유명한 독립운동가였던 의암 유인석 체포에 있어서도 기여를 했고. 그런 기록들이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그럼으로써 그게 이제 알려진 것이 몇 년 되지 않습니다. -박환, 사학자 게다가 그는, 일본 경찰 중에서도 한 사람과 아주 긴밀한 사이였던 걸로 보여. 바로 기토 가쓰미였어. 1911년 6월 1일. 홍범도가 흑룡강 철도 공사에 인부를 보낼 계획인데, 노동의 대가로 무기 구입을 약속했다. -기토 가쓰미가 엄인섭으로부터 얻은 정보- 홍범도 장군이 무기를 사려 한다는 걸 엄인섭이 보고했단 내용이야. 아까 홍범도 장군이랑 같이 찍은 사진, 기억나? 뒤에선 홍범도 장군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고 있었던 거야. 근데 엄인섭은 처음부터 밀정이었던 건 아니야. 그가 변절한 이유가 뭘까? 그가 밀정 행각을 한 기록은, 근 10년 전인 1911년부터 등장해. 1년 전인 1910년은, 우리나라가 일제에 의해 국권을 상실한 해야. 그게 영향을 미친 걸까. 결국 밀정의 보고로, 철혈광복단원들은 체포됐어. 체포된 세 사람은, 경찰에 끌려가던 그제야, 엄인섭이 밀정이었다는 걸 눈치챘대. 다른 이유도 아닌, 믿었던 사람의 배신 때문에, 오랫동안 치밀하게 준비한 거사가 물거품이 된 거야. 기분이 어땠을까? 더 안타까운 일이 있어. 이들이 체포되고 몇 시간 뒤, 러시아 정부군과 싸우던 혁명군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진입했어. 이게 무슨 얘기야? 만약 몇 시간만 늦어졌더라면, 일제가 힘을 못 쓰고, 체포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는 얘기야.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으면 혁명 세력에 의해서 다 완전히 보호받고, 또 자금도 있는 데다가 충분히 그 후 지원을 받아서 군수품들을 다 마련을 해가지고, 북간도로 가서. 이미 청년들은 엄청나게 몰려 있는 상태고 독립군이 되려고 하는 그런 인적 자원이 있는 상태에서 독립전쟁을 제대로 멋있게 크게 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이 다 물거품이 된 거잖아요. 그것이 남긴 후유증이라는 거는 이루 말할 수가 없죠. -반병률, 사학자 체포 당한 단원들은 끔찍한 고문을 당했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함경북도 청진, 서울을 다니며 재판은 3심까지 이어졌어. 1년 넘게 이어진 최종 재판 결과는 이렇게 나왔어. &<주문&> 피고 준희, 국정, 상호를 각각 사형에 처한다. 피고 홍섭을 징역 15년에 처한다. 1921년 8월, 이들의 사형이 집행되고, 이렇게 간도 15만 원 사건은 끝이 났어. 임국정, 윤준희, 한상호 세 동무가 사형장에 나가면서 '일본강도놈들이 자그마한 우리 육체는 죽이지만 조선 독립할 정신과 강경심은 점점 살아있다. 조선은 해방될 것이다, 일본은 멸망하고야 말 것이다' 하였다. -최계립 수기 中 만약 밀정이 고발하지 않아, 예정대로 무기를 샀다면, 그래서 계획대로 독립운동을 했다면, 과연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아무래도 북간도 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국내 진공 작전이 활발히 벌어졌을 것이고요. -박환, 사학자 독립전쟁 독립 무장투쟁의 양상이 크게 달라졌겠죠. 군사력이 크게 훨씬 더 강화됐을 거고, 우리 독립군들의 군사력 수준이 엄청 달라졌겠죠. -반병률, 사학자 ▲ 유일한 생존자, 최봉설 그럼 체포되지 않았던, 최봉설은 어떻게 됐을까? 재판 결과를 보면, 최봉설은 궐석 재판으로 사형을 받았어. 재판에 참석하지 않았단 뜻이야. 이게 무슨 뜻이야? 끝까지 그를 잡지 못했던 거야. 철혈광복단원들이 체포되던 날, 총상을 입고 달아난 최봉설은 다행히 목숨을 건졌어. 그 뒤로도, 항일무장투장 단체에 들어가 독립을 위해 싸웠어. 하지만 1937년,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정책으로 우즈베키스탄으로 갔어. 그곳에서, 남은 여생은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대. 그는 자신이 겪은 일, 독립을 위해 모두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후손들에게 아낌없이 전해줬대. 그리고 독립을 위해 한 몸 바쳤던 시절, 함께 싸웠던 동료들을 기억하며, 눈을 감았대. 최봉설의 후손들은, 그의 독립을 위한 마음, 희생정신을 계속 기억하고 있어. 그중 한 명이, 대한민국에 살고 있어. 저는 증손이고요. 독립운동가 최봉설의 후손입니다. 최계립 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요, 진짜 이름은 최봉설입니다. 이모할머니가 저한테 최봉설이 전쟁에서 대한민국을 위해 어떻게 싸우셨는지 얘기해주셨습니다. 첫 느낌.. 처음에는 정말 영웅 같았고, 한국의 영웅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정말 기뻤죠. 말로는 감정을 설명을 못할 정도네요. -최 알렉산드르, 최봉설의 증손자 최봉설의 다른 이름, 뭐라고? 최계립. 사형당한 최봉설은 죽었고, 새로 태어나 다시 조국을 위해 싸운다는 의미로 이름을 최계립이라고 바꾼 거야. 자필로 쓴 수기를 통해, 간도 15만 원 사건의 전말을 우리에게 전해준, 바로 그 사람이야. 그가 쓴 수기, 다시 한번 볼게. 임국정이는 순사놈들이 언덕 위에 나란히 하고 오는 것을 보고 사격 소리를 쳤다. 사격 소리와 같이 여섯 청년은 언덕 위에 뛰어오르며 순사놈들을 사격하여 말 위에서 뒹글뒹굴 굴러 떨어진다. 오백리 길을 삼일동안 왔다. 음력 동짓달 19일 저녁 아홉시에 해상 위로 떠나가는 륜선(배)은 고동소리를 크게 친다. 륜선에 앉은 네 청년은 세상만사를 성공한 줄로 생각했다. 십오만원 사건이 일시적으로 실패한 듯 하나 조선 해방 투쟁은 날이 갈수록 점점 강경해지고 승리하고야 말 것이다. 이 판결과 같이 최봉설이 이름을 고쳐 계립이라고 하였다. -최계립 수기 中 간도 15만 원 의거 같은 경우는 단순하게 보면 러시아에 가서 무기를 구입해서 무장투쟁한다, 라는 것이지만, 넓은 의미에 있어서는 민주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대한민국의 건설을 앞당기려고 하는 끊임없는 노력의 한 점이었다, 라고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박환, 사학자 사회나 민족에 대해서 아주 강렬한 책임의식, 내가 그거를 해야 된다고 하는 그 희생 정신. 이런 것들이 아주 체질화된 사람이고, 그것을 위해서는 자기 목숨도 아낌없이 바칠 수 있는 각오가 되어 있던 그런 분들이었죠. 별 볼 일 없는 미미한 사건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엄청난 그런 대사건이다. 이렇게 볼 수가 있고.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그런 활동, 사건이었다, 이렇게 볼 수가 있어요. -반병률, 사학자 사형당한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 선생은 서울 형무소 수인 묘지에 암장됐다가, 1966년이 되어서야 현충원에 안치됐어. 최봉설의 묘는, 마지막으로 생활한 카자흐스탄에 모시고 있대. 지금도 후손들은 독립을 위한 희생정신을 기리면서,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어. 곧 있으면, 3.1절이야. 단순히 우리가 독립을 위해 싸운 날이 아니라,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목숨 바쳐 싸웠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걸, 그 덕에 지금의 우리가 있다는 걸. 한번쯤 되새겨보는 건 어떨까.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꼬꼬무 찐리뷰] 박정희가 지시한 극비 임무…한국은 핵무기를 만들 수 있었다
등록일2025.02.21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20일 방송된 '극비임무-대한민국 핵무기를 개발하라'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배우 한채아, 최다니엘, 모델 겸 방송인 정혁이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엄친아의 엄친아 때는 1948년. 이 시대의 엄청난 '엄친아'가 있었어. 일단 이 엄친아의 아버지부터가 또, 엄친아야. 그 아버지의 이름을 딴 건물도 있어. 그분의 이름은 '한영교'. 연세대학교에 '한영교 기념 도서관'이 있어. 이분이 연세대학교 초대 신학대학원장이시거든. 이런 집안에서 태어난 맏아들이,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그 엄친아야. 서울대 공대생인 그의 이름은 '한창석'이야. 한창석은 대학에 입학한 뒤, 부유한 사업가 집안의 맏딸 피아니스트를 만나 결혼을 하고, 귀여운 아들도 낳았어. 친가, 외가 모두 매우 유복한 집안의 맏손주가 태어난 거야. 이런 집안, 걱정이 없겠지? 그런데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던 아버지 한영교 씨가 아들에게 갑자기 이런 권유를 해. 미국에 가서 우리나라에 도움이 될 공부를 하고 와라. 어떤 공부를 하고 오라는 걸까? 바로 핵물리학이야. 이 시기는 세계적으로 핵물리학이란 학문이 엄청 주목받던 시기야. 6년간 지속된 2차 세계대전이 일본에 떨어진 원자폭탄 두 방으로 끝났잖아. 히로시마에 '리틀보이', 나가사키에 '팻맨'이란 원폭이 투하됐지. 그렇게 종전은 됐지만, 이때부터 전 세계적으로 핵무기 경쟁이 시작된 거야. 가장 먼저 자극받은 나라는, 미국의 라이벌 소련이었어. 미국은 소련이 핵무기를 만든다 해도 최소 20년 이상 걸릴 거라고 예측했어. 근데 소련은 불과 4년 만에 핵무기를 만들었어. 예상보다 훨씬 빠른 1949년, 소련은 미국보다 적은 비용으로 핵무기 개발에 성공했어. 미국의 핵무기 개발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 내부에, 소련에 정보를 전한 스파이가 있었다고 해. '미국의 핵무기 설계도가 스탈린 책상에 있었다'는 설이 있을 정도야. 그 후 미국과 소련의 핵무기 경쟁은 점점 격해져. 그렇게 인류는 점점 더 강력한 핵폭탄을 만들어가고 있었어. 그 위력을 비교해 볼게.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 '리틀보이'로 8만 명이 즉사했어. 그때 생긴 버섯구름 높이가 에베레스트 산보다 높아. 인류역사상 가장 강력한 무기인 소련의 수소폭탄, 차르봄바의 총 에너지를 지진 규모로 환산하면, 규모 8.3 정도가 된대. 리틀보이보다 3,800배 정도 강력했어. 100km 밖에서 지켜보던 연구원들도 화상을 입었고, 1,000km 떨어진 핀란드에서 유리창이 깨질 정도였대. 근데, 이런 의문이 들지 않아? 1949년, 소련이 처음 핵실험에 성공하고 다음 해인 1950년, 한반도에 6.25 전쟁이 일어났어. 그렇다면 6.25 전쟁 당시, 핵무기 사용이 검토되지 않았을까? 당시 맥아더 장군은 핵 사용을 제안했다고 해. 그때 이미 미국은 약 300개, 소련은 20개 정도의 핵폭탄을 보유하고 있었거든. 이후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한반도 핵공격 디데이까지 잡아놨었대. 디데이는 바로 1954년 5월, 대상지는 개성이 유력했어. 근데 다행히도 디데이 10개월 전에 정전협정이 체결된 거야. 만일 그때 한반도에서 핵을 사용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당시 정세가 이러니, 한창석 씨 아버지는 똑똑한 아들을 미국에 보내 핵기술을 배워오는 것이 나라에 도움이 될 것이란 판단을 하신 거야. 하지만, 이땐 한창석 씨의 아들이 태어난 지 100일이 갓 넘었을 때야. 한창석 씨는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그는 100일 된 아들과 어린 아내를 한국에 남겨 두고, 혼자 미국 동부의 명문대인 코넬대로 떠났어. 이 시기 코넬대는 핵폭탄에서 한발 더 나아간 수소폭탄을 연구하고 있었어.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다 보니 6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이제 한국에 돌아올 때가 되어 가는데, 엄청난 일이 발생해. 거짓말처럼, 한창석 씨가 실종된 거야. 한창석 씨의 행방을 어디서도 알 수가 없어. ▲ 핵물리학자의 실종 미스터리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한국의 가족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가장 안쓰러운 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어린 아들이지. 한창석 씨는 100일 된 아들에게 '대수'란 이름을 지어주고 떠나 왔었어. 그 아들이 바로, 가수 한대수 씨야. '행복의 나라로'를 부른 그 가수야.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겼어요. 사라져 버렸어요. 실종, 완벽한 실종. -한대수, 한창석의 아들 가족들은 FBI에 실종 신고를 하고, 사설탐정까지 동원해서 한창석 씨를 찾아 나섰어. 하지만 마치 증발이라도 한 듯 핵물리학자 아들은 사라져 버렸어. 그렇게 속절없이 한 해, 두 해, 시간이 흘러. 어느덧 아들 한대수는 17살 고등학생이 됐어. 그런데 이때 또 엄청난 일이 일어나. FBI로부터 한대수 씨의 아버지를 찾았다는 연락이 온 거야. 놀랍게도 한창석 씨는 여전히 미국에 살고 있었어. 부랴부랴 가족들은 그를 만나러 갔지. 17년 만에 그를 본 가족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어. 핵물리학자였던 아버지가 동네 인쇄소 사장이 되어 있어. 백인 여자와 결혼도 했어. 무엇보다 한국에서 온 가족들도 못 알아보고, 한국말을 못 해. 가보니까 완전히 사람이 미국화 됐더라고요. 말하는 것이 스무 살에 미국으로 간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완벽한 영어를 할 수 있는가 상상이 안 돼. 'I don't know. What's up?' 이렇게 표정 하는데 완전히 미국 사람이야. 발음도 완벽하게 하고 악센트가 없어. 그래서, 이 사람은 한국 사람 아니구나… -한대수, 한창석의 아들 한대수 씨는 언어와 기억을 잊었다는 점 때문에 아버지가 '브레인워시', 즉 세뇌를 당한 게 아닌가 의심했어. 핵기밀을 빼내갈까 봐 미국 모종의 세력이 아버지의 귀국을 막고 세뇌시킨 게 아니냐는 거지. 너무 영화 같은 얘기지? 그런데, 정말로 미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어. 이름하여, 'MK 울트라 프로젝트'. 마약, 전기 충격 등을 이용해서 사람을 세뇌하고 조정하려 했던 비밀 심리실험이야. 실험을 당한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기억이 사라지거나 말하는 법을 잊어. 미국 중앙정보국, CIA가 극비로 주도한 공식 프로젝트야.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이 1950년대 행정부를 대신해 공식 사과까지 했던 일이야. 정부 지원의 수많은 실험이 미국의 병원, 대학, 군대 시설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실험의 대상이 되었던 우리 국민에게, 그 가족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1995년 10월 3일, 빌 클린턴 대통령 그린 박사는 제 머리를 포함한 전신에 전기 충격을 가했습니다. 그는 프로젝터를 사용해 빨간불이 제 이마를 비추는 동안 제 뇌 속에 다른 이미지가 생긴다고 반복해서 말했습니다. - 크리스틴 드니콜라, MK 울트라 프로젝트 피해자 고학력 엘리트들도 프로젝트의 실험 대상이 되었어. 이로 인해 미 육군 소속 프랭크 올슨은 MK 울트라 프로젝트의 부작용으로 사망했고, 천재교수 시어도어 카진스키는 후유증 때문에 연쇄 폭탄 테러범이 됐어. MK 울트라 프로젝트가 진행된 시기는 1953년부터 1960년대까지. 한창석 씨가 미국에서 공부한 시기와 절묘하게 겹치지. 한창석 씨가 MK울트라 프로젝트의 피해자가 됐을 가능성, 있을까? 근데 CIA가 자료 대부분을 폐기 처분해서 피해자 정보를 찾아낼 수는 없어. 한창석 씨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한 번은 한대수 씨가 아버지와 취하도록 술을 마시다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저는 아들로서 알 권리가 있어요 라고 물었어. 그러자 아버지는 늦었다. 이제 집에 가자 라고만 대답했어. 한대수 씨의 할머니도 돌아가시기 전에 아들에게 간절히 애원했어. 마지막 소원이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발 말해달라 고. 돌아온 대답은 뭐였을까? Passed is the past.(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입니다). 한창석 씨는 살아생전에 그렇게 된 이유는 말할 수 없는 아주 개인적인 문제 때문이다 라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어. 이런 말을 한 걸 보면, 기억을 하고 있기는 하다는 거 같은데. 왜 말하지 않는 걸까? 난 꿈이 너무 컸지. 낚시도 가고, 야구장도 가고, 같이 소풍도 가고. 난 그런 생각하고 있었는데… 분명히 뭔가 비밀스러운 것을 안 했으면, 정상적인 사람이 공부를 하고 돌아왔어야 하는데. 사라진 이후 모든 것이 너무 수수께끼라서… -한대수, 한창석의 아들 끝내 비밀을 말하지 않고 한창석 씨는 2009년 세상을 떠났어. 그의 갑작스러운 실종과 기억상실은, 그가 핵물리학자였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을까? 진실은 알 수 없어. 그렇게 핵물리학자의 실종과 기억상실은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았어. 그럼, 우리나라의 핵무기 개발의 비밀은 어떨까? 전 세계로 퍼진 핵무기 개발 경쟁 구도 속에서, 우리나라도 핵무기를 개발하려고 한 적이 있어. '대한민국의 핵무기를 개발하라'는 극비 임무.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파헤쳐 볼게. ▲ 천재 과학자들을 모아라 때는 한창석 씨를 찾았을 즈음인, 1965년이야. 25명의 젊은이들이 미국으로 가는 커다란 배에 탑승했어. 이들은 장학생으로 선발된 유학생들이야. 그중에 김철이란 젊은이도 있었어. 그는 서울대 화학공학과 졸업생이었어. 장학금을 많이 준다는 미국의 한 대학에서 입학 허가를 받은 거야. 바로 스토니브룩 뉴욕 주립대학교. 당시 이 학교엔 한국 출신의 세계적인 과학자 한 명이 교수로 있었어. 바로, 이휘소 박사야. 혹시 이휘소란 이름 들어본 적 있어? 그럼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소설 알아? 1993년 출간된 소설인데 무려 600만 부가 팔린 초대박 베스트셀러야. 우리나라 핵물리학자의 의문의 죽음을 파헤치는 내용으로, 실존했던 이휘소 박사를 모티브로 한 소설이야. 물론 소설은 실제 사실과 많이 달라. 이휘소 박사는 안타깝게도 42세의 나이로 교통사고로 사망했는데, 일찍 사망하지 않았다면 노벨상 수상이 유력했을 거라고 거론되는 입자물리학자야. 맨해튼 프로젝트를 주도했던 오펜하이머도 이휘소 박사의 천재성을 극찬했다고 해. 그러니까 이휘소 박사는 한인 유학생들에게는 영웅 같은 존재였어. 이 이휘소 박사가 한국에서 온 똑똑한 젊은이 김철을 매우 아꼈다고 해. 김철은 공부도 잘해서 같은 박사과정 학생들을 가르쳤을 정도였대. 그 후 김철 박사는 미국 군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들어갔어. 그렇게 미국에서 안정된 직장도 잡고, 원하는 연구에 몰두하고 있던 어느 날. 연구소로 한국인 남성이 김철 박사를 찾아왔어. 남자의 정체는 주재양 박사. 한국 원자력연구소 제1부소장직을 맡고 있대. 원자력연구소, 원자력 기술을 연구 개발하기 위해 1959년에 설립된 기관이야. 갑자기 찾아온 주재양 박사가 꺼낸 용건은 뜻밖이었어. 국가를 위한 아주 중요한 일에 김철 박사가 필요하니, 한국으로 같이 가자는 거야. 그 중요한 일이 뭔지는 자세히 밝힐 수 없대. 사실, 당시 김철 박사는 미국의 석유회사로부터 스카우트 제안을 받은 참이었어. 아주 연봉이 센 회사야. 또 호주의 대학교수 자리를 놓고도 고민 중이었어. 이런 상황에서 당장 한국에 돌아갈 수 있을까? 얼마 후, 김철 박사의 손엔 이게 들려 있어. '인바이티드 게스트 싸이언티스트(Invited Guest Scientist)'. '해외 유치 과학자'란 티켓을 들고 한국행 비행기를 탄 거야. 고국행을 택한 건 김철 박사만이 아니었어. 당시 12명의 과학자들이 입국했어. 그 후에도 주재양 박사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우리나라 출신 과학자들을 찾아가 고국으로 돌아와 달라 부탁했어. 그렇게 2차로 40여 명의 박사들이 요청에 응답했고, 총 250여 명의 과학자들이 귀국해 프로젝트에 합류했어. 그들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연봉을 얼마인지, 프로젝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각 부서에 배치되기 시작했어. 하지만 아무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아도, 얼마 후 과학자들은 깨달았지. 자신이 '핵무기 개발 비밀 프로젝트'의 일원이 됐다는 사실을 말이야. 가족들에게도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철저하게 함구했어. 과학자들이 그때 비밀로 가족들에게도 제대로 말하지 않고 그냥 비밀로 갖고 계셨던 것 같아요. 어머니께서도 (이후에) 신문 보고 아셨다고 해요. - 김윤, 故 김철 박사의 아들 심지어 연봉은 해외에서 받던 것에서 4분의 1 수준이었다고 해. 하지만 과학자들은 밤을 새도 힘든 줄 모르고, 모두 열정이 넘쳐 일했어. 중도에 일을 그만두거나 이직한 사람도 없었어. 당시 과학자들뿐만 아니라 지금이랑 비교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애국심이라는 걸 탑재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어떤 프로젝트를 한다', '국가 발전을 위해서 어떤 중요한 프로젝트를 한다' 하시니까 그쪽으로 결심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 김윤, 故 김철 박사의 아들 그곳에서 김철 박사의 직책은 원자력연구소 제2소장. 핵연료 개발을 담당했어. 그렇게 최고의 과학자들이 모여 대한민국 핵개발을 시작했어. 세계의 눈을 피해 은밀히 진행해야 하는 비밀의 프로젝트야. 과학자들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면, 정말 깜짝 놀랄 거야. 일단 프로젝트가 시작된 최초의 시점으로 돌아가 볼게. ▲ 핵개발 극비 작전 1972년 9월, 청와대. 국가안보회의가 열리고 있어. 참석자는 대통령, 국방장관, 합참의장, 그리고 중앙정보부장.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이후락 부장의 보고가 시작돼. 각하, 김일성이 핵개발을 시작했다는 첩보가 있습니다. 북한이 핵개발에 뛰어들었다니, 큰일이야. 안 그래도 북한은 60년대 후반부터 빈번하게 무력 도발을 일으키고 있었어. 1968년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습격하는 사건이 터졌고, 같은 해 울진·삼척에 무장공비 120명이 침투했어. 이런 상황에서 1970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닉슨 독트린을 발표해. 아시아 각국의 방어는 당사국의 책임하에 있다고 선언한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 북한이 침범해 오면 한국 방어는 한국 스스로 책임지라는 얘기야. 이때 북한은 탱크까지 자체 생산이 가능했는데, 우리나라는 소총 한 자루도 못 만드는 나라였거든. 게다가 북한뿐 아니라, 중동의 이스라엘과 이집트, 리비아도 핵개발에 착수했고, 인도, 파키스탄, 남아공, 브라질, 칠레, 일본까지 핵폭탄을 만든다는 정보가 입수돼. 그러자 박정희 대통령은 오원철 청와대 제2경제수석을 호출했어. 당시 오 수석과 청와대에서 같이 일했던 비서관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어. 오 수석 말씀에 의하면, 혼자 앉아있는데 따르릉 울려서 가보니까. 난데없이 '핵개발을 해볼 것' 이거예요. 핵개발이라는 건, 핵폭탄입니다. -김광모, 박정희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관 핵개발을 검토해서 보고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는 거야. 이게 바로, 김광모 비서관이 최초 기안하고, 오원철 수석이 대통령에게 보고한 극비 보고서야. 이게 작성 30년 만인 지난 2003년에 처음으로 공개됐어. '원자 핵연료 개발계획' 보고서. 총 9장 분량의 보고서야. 이 보고서의 '결론'에는 이런 내용이 나와. 우리나라의 기술 수준, 재정 능력으로 보아 플루토늄 탄을 개발한다. 1974년부터 건설계획을 추진하여 1980년대 초에 고순도 플루토늄을 개발한다. 해외 한국인 원자력 기술자를 채용하여 인원을 보강한다. 한마디로, '플루토늄 핵폭탄을 개발한다'는 거야. 그렇다면, 이 비밀 프로젝트의 최종 책임자는 누구였을까? 바로 박정희 대통령. 대통령이 직접 나서고, 실무는 오원철 수석이 총괄했어. 박 대통령은 국방과학연구소 등 7개 연구기관에 각각의 연구과제를 지시했어. 자기가 담당한 일밖에 모르는 점조직 방식이고, 컨트롤 타워는 오직 청와대뿐이야. 게다가 핵개발과 관련해서는 그 누구에게도 문서로 지시하지 않았다고 해. 증거가 남으면 안 되니까. 이렇게 착착 계획을 다 세웠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핵무기야. 당시 우리나라가 핵무기를 개발할 역량이 됐을까? (당시) 핵을 만들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1970년대 경제 위상이 1인당 GNP가 318불, 수출이 17.8억 불. 그런 나라입니다. 지금은 우리나라가 3만 5천불 아닙니까? 그런 나라가 핵 개발한다? 이게 가능하지 않죠. 박정희 대통령이 시키셨으니까 하는 수 없죠. 그래서 '극비로 하라' 이렇게 된 거죠. -김광모, 청와대 전 비서관 (우리나라 무기 개발 수준은) 전무였습니다. 우리가 일본 치하에 있을 때 남쪽은 농업에 치중을 했고 북쪽은 산업, 공업에 치중을 했어요. 병기 개발이라든지 그런 것들이 북쪽이 훨씬 더 먼저 시작을 했고. 남쪽에는 전혀 없었습니다. -이경서, 전 국방과학연구소장 맨땅에 헤딩과도 같은 핵무기 개발 비밀작전, 과연 어떻게 진행했고,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앞서 보고서를 보면, 우리나라의 계획은 '플루토늄 탄을 개발한다'는 거야. 핵폭탄을 만드는 원료로는 우라늄과 플루토늄이 있어. 우라늄은 석탄이나 석유처럼 자연에서 채굴하는 천연자원이야. 반면 플루토늄은 우라늄을 원자로에서 중성자와 충돌시켜서 만들어내는 인공 물질이야. 이게 바로, 플루토늄 핵폭탄의 제조 과정이야. 플루토늄을 얻기 위해선 원자로, 그리고 생성된 플루토늄을 분리하는 재처리 공장이 필요해. 원자로와 재처리, 두 가지 기술이 핵심인 거지. 쉽게 설명하면, 원자로는 연탄을 때는 아궁이야. 원자로에서 핵연료를 넣고 때면 일종의 연탄재가 발생하겠지. 이걸 '사용 후 핵연료'라고 해. 그리고 '사용 후 핵연료'를 특수처리해서 '플루토늄'을 만드는 과정을 재처리 기술이라고 하는 거야. 이것저것 섞여 있는 재에서 플루토늄만 추출해 내는 거지. 원자로는 경수로 방식과 중수로 방식이 있어. 경수로는 핵연료를 많이 태워서, 플루토늄의 순도가 낮아. 반면 중수로 방식은, 핵연료를 조금 태우기 때문에 플루토늄의 순도가 높아. 발전용인 중수로, 경수로 외에도, '연구용 원자로'라는 게 있어. 말 그대로 각종 연구와 기술 개발을 목적으로 한 원자로인데, 핵연료를 태우는 속도를 조절할 수 있어. 그러니까 연구용 원자로로도 순도 높은 플루토늄을 얻는 게 가능해.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에는 아무런 기술도 없었어. 겨우 미국산 경수로를 들여와서, 우리나라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인 고리원전을 막 건설 중이었을 때야.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다른 나라에서 시설을 도입해, 자체 개발하기로 했어. 1973년 당시 핵보유국은,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중국, 5개국이야. 캐나다는 핵무기를 갖고 있는 건 아니고 원자력 발전용 제조 기술이 있어. 이 중에서 우리나라에 기술을 제공해 줄 만한 나라는 어딜까? 일단, 소련과 중국은 우리와 노선이 다르지. 생각해 볼 것도 없어. 미국은 기존 핵보유국으로서 전 세계에 핵무기가 확산되는 걸 매우 우려하고 있었어. 세계 평화와 안전에 도움이 안 된다고 보는 거지. 그래서 NPT, 핵확산금지조약을 1970년에 발효시키기도 했어. 그럼 미국도 안 되겠지. 영국? 영국은 미국의 우방국이라 정책 노선을 같이 해. 그럼 영국도 아니야. 남은 건, 프랑스와 캐나다. 두 나라의 입장은 미국과 같을까? 캐나다는 연구용 원자로인 NRX 원자로를 인도에 판 적이 있어. 그때 마침, 캐나다의 원자력 공사 사장이 방한해서 솔깃한 제안을 해와. 우리나라는 추가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추진 중이었는데, 만일 캐나다형 중수로를 구입할 경우, NRX 원자로를 제공하겠다는 거야. 완전 땡큐지. 이렇게 원자로 도입 문제는 해결됐어. 이제 남은 건, 재처리 기술이야. 프랑스는 파키스탄에 재처리 기술을 수출한 적 있어. 그래서 김철 박사팀은 재처리 기술을 보유한 프랑스의 생고방사라는 회사에 접촉했어. 그랬더니 아주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환영의 답신을 보내와. 김철 박사팀은 당장 파리로 날아가서 협상을 시작했어. 그런데 프랑스와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가장 중요한 게 뭘까? 핵심은, '위장'이야. 우리나라가 핵무기 개발을 시도하는 걸 미국이 알아채면, 못하도록 막을 거야. 그래서 미국에 들키면 안 되는 거야. 김철 박사팀은 프랑스 출장을 다니며, 일반 관광객처럼 자연스럽게 다녔어. 그러다 중요한 자료를 국내로 보내야 할 땐, 반드시 대사관의 외교 행낭을 이용했어. 외교 행낭은, 외교관들이 문서나 공공 물품을 수송하는 가방인데, 세관 검사를 거치지 않거든. 그 누구도 내용물을 들여다볼 수 없어. 또, 너무 자주 프랑스만 들락거리면 의심을 살 수 있잖아. 일부러 인근 국가로 입국해서 프랑스까지는 기차로 이동하기도 해. 과학자인데 무슨 요원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지? 김철 박사는 뒤늦게 프랑스어까지 배운다고 밤잠도 자지 않고 공부하셨대. 이런 노력 덕분인지 다행히 프랑스와의 협상은 술술 잘 풀렸어. 제가 어머니께 듣기로는, 아버지가 한국에 계신 거는 그냥 한 달 두 달이었고 주로 외국에 많이 나가셨다고 해요. 프랑스를 중심으로 벨기에 독일 이런 데 많이 갔다 오셨다고 그래요. 기억나는 거 한 가지는, 어느 날 프랑스 길거리 음식 크레페. 이거 보고 '프랑스에서 길거리에서 노인네들이 이런 거 사 먹더라' 뭐 이런 얘기하셨던 게 기억이 납니다. - 김윤, 故 김철 박사의 아들 연구용 원자로는 캐나다에서, 재처리 시설은 프랑스에서 받기로 했어. 이제 어느 정도 기본 틀이 잡혔지. 플루토늄을 얻고 핵폭탄을 만드는 것은 시간문제야. 계획한 핵폭탄의 파괴력은 서울 광화문 네거리 상공 580m 위치에서 터뜨릴 경우, 파주 교문리 일대까지 잿더미로 만들고, 최소한 200만 명의 인명을 살상하는 정도의 규모였다. 75년 초, 이미 핵폭탄 설계는 거의 끝마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핵폭탄 설계 연구 책임자 A씨의 증언 中 이대로 일사천리 진행만 잘 되면 돼. 그런데, 핵 개발팀 주변에서 조금씩 묘한 일이 발생하기 시작해. 74년 11월 9일, 한국의 핵 과학자 3명이 극비리에 프랑스 파리 공항에 도착했어. 생고방사와 재처리 기술 도입에 대한 가계약을 체결하기 위한 비밀출장이야.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숙소로 향하는데, 택시 기사가 깜짝 놀랄 말을 건네. 한국에서 온 핵과학자들이신가요? 깜짝 놀랐지. 다음날 한국의 과학자들은 생고방 회사로 향했어. 그런데 직원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생고방사의 기술 외에 또 다른 핵원료 기술이 필요해서 계약을 논의 중인 서커사란 회사가 있었는데, 간밤에 그 회사에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했다는 거야. 수상한 일은 끝이 아니었어. 생고방사와 가계약을 체결한 바로 그날, 생고방사의 기술 담당이었던 직원 한 명이 차 안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된 거야. 또 그날 저녁, 숙소 옆 건물에서 갑자기 폭발 사고가 일어났어. 이 모든 일이 불과 이틀 동안 일어난 거야. 그리고 그들이 불안해하는 이유, 또 있었어. 그 무렵, 인도가 기습적으로 지하 핵실험을 실시했거든. 인도의 핵개발에 미국은 깜짝 놀랐어. 그때부터 미국은 정보 채널을 총동원해서 다른 나라의 핵개발 동향을 파악하기 시작했어. 본 대사관은 현재 한국의 핵무기 개발 잠재력을 분석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스나이더 주한 미 대사가 미 국무장관에게 보낸 전문(2017년 공개) 미국이 처음으로 우리나라의 이상한 낌새를 알아챈 거지. 핵 개발 계획이 시작된 지 2년이 지났을 때야. 얼마 후, 미국 국무장관에게 보고된 비밀메모에는 이런 게 적혀있어. 박 대통령은 1977년까지 한국 과학자들에게 '원자폭탄'을 개발하도록 지시했음. 한국이 프랑스 기업과 관련된 시설을 구매하는 협상을 하고 있다는 징후를 가지고 있음. 한국의 이러한 움직임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핵 주요 공급국들, 특히 프랑스와 협력해야 함. -1974.11.20, 미 국무장관에게 보고된 비밀 메모 中 미국의 감시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는데, 프랑스는 어떻게 대응했을까? 프랑스는 미국과 입장이 달랐어. 프랑스는 핵 확산 금지보다, 재처리 기술을 판매해 얻는 경제적 이익에 관심이 더 많았던 거야.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1975년 4월, 드디어 우리나라와 프랑스의 생고방사 간에 본계약을 하는 날이야. 생고방사의 사장이 한국을 방문했어. 그리고 우리나라의 원자력 연구소장과 서명식을 가질 예정이야. 책임자들이 원자력연구소장실에 모였어. 그런데, 정체불명의 불청객들이 계속 서성이는 거야. 아무래도 꺼림칙해. 시청 옆에 원자력병원이 있어요. 그곳 회의실에서 2시간 뒤에 다시 만나지요. 서명 장소를 바꾸기로 했어. 뿔뿔이 흩어져서 각자 이동하기로 해. 미국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007작전' 을 펴는 거지. 과연, 계약서에 사인을 할 수 있었을까? 이 사진을 봐봐. 첩보전 끝에 드디어 싸인 끝!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김철 박사님이야. 군사적 목적으로 이 시설의 제품을 쓰려고 했다면, 그게 최소 핵무기 한두 개는 만들 수 있지 않느냐… - 故 김철 박사 설계도의 연구로 얻을 수 있는 플루토늄은 하루 0.85그램. 핵개발이 점점 더 구체화되어 가고 있어. 미국은 가만히 있었을까? 우리나라의 핵무기 개발을 막기 위한 압박은 더 직접적이고, 거세졌어. 한국이 재처리 계획을 강행할 경우 의회가 한국에 대한 원자로 건설을 보증하는 수출입 은행 대출을 거부할 것이라고 한국에 경고할 수도 있다고 말함. -미 국무부가 주한 미대사에 보낸 비밀문서 中 우리나라가 계속 프로젝트를 진행하면, 미국이 빌려주기로 했던 돈을 안 줄 거라는 얘기야. 이 상황에서 우리의 과학자들은 어떻게 했을까? 공공연히 우리가 핵개발을 한다고 표방은 못 해요. 지금도 그 말을 하기는 좀 난처한 점이 있지만. 핵개발 의도가 분명히 있었다는 건 틀림이 없어요. 근데 우리가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운 것은 '피스플 유즈 오브 뉴클리 에너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었어요. -故김철 박사, 1998년 인터뷰 中 '우리는 전쟁이 아니라 빵을 구할 목적으로 핵을 이용한다' 한마디로 속인 거야. 미국은 우리 말을 믿지 않았어. 미국의 의심이 확신으로 바뀐 결정적인 이유가 또 있어. 한 농장 때문이야. ▲ 농장의 비밀 처음에는 '신성농장'이라고 그랬습니다. 충남경찰청장이 순시를 돌다가 가서, 농장이라고 간판이 붙어 있고 트럭이 왔다 갔다 하니까 그곳에 들어오라고 했어요. 경찰청장인데 못 들어가게 딱 막았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경찰청장이 화가 나서 그 지역 담당 안기부장한테 항의를 했다는 말씀이에요. 그러니까 그분이 '야 나도 못 들어가는데 네가 들어갈 생각 하지도 마라' 그러니까 이제 그때 이제 감을 잡은 거예요. -이경서, 전 국방과학연구소장 대전 외곽에 지역 안전의 최고 책임자도, 국가 정보기관 요원도 들어갈 수 없는 금단의 농장. 이 농장 정체가 뭘까? 농장의 비밀은,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메모에서 시작돼. 극비. 국방과학연구소는 즉시 지대지 유도탄 개발계획을 작성해 보고할 것. 지대지의 '지'는 땅'지'자야. 그러니까 지대지 유도탄은, 지상에서 발사해 지상에 있는 목표물로 유도해서 공격하는 미사일을 말해. 그러니까 이 농장은, 미사일을 만드는 곳이었어. 그런데, 미사일과 핵개발, 어떤 관련이 있을까? 미사일을 만들어 핵탄두를 실으면, 그게 곧 핵미사일이 되는 거야. 핵폭탄을 실을 수 있는 미사일 자체 개발에 나선 거지. 먼저 우리나라가 미사일 개발이 가능할지, 국방과학연구소 과학자들은 검토를 시작했어. 저한테 주어진 시간이 4개월이었었어요. 한강변에 아파트들 그때 짓기 시작을 했는데 그 아파트 중에 하나를 임대를 해서 거기에 들어갔죠. 처음에 소장님께서 거기에 참여하시는 분들의 부인들을 전부 불러가지고 식사를 한번 같이 하면서 '4개월 동안은 접촉이 안 될 테니까 그렇게 알고 계십시오'… -이경서, 전 국방과학연구소장 국방과학연구소 이경서 박사팀이 4개월간 연구를 해봤더니, 미사일 개발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려면, 일단 필요한 기술들을 배워야 해. 이경서 박사는 미국의 맥도널 더글라스사란 방위산업 업체에 기술 이전을 요청했어. 맥도날 사는 일단 반겨. 냉전 시대라 무기 수요가 줄어 회사 매출도 줄어들던 시기였거든. 그런데 미사일 기술 이전은 절대 안 된대. 미국은 기술 이전 대신, 오래된 다른 미사일을 직접 지대지 유도탄으로 개조해 주겠대. 기술은 안 주고, 완성품을 사라는 거지. 가격은 무려 2,000만 달러. 너무 비싸. 당연히 거절할 거 같지? 근데 이경서 박사는 이 제안, 받아들이기로 했어. 대신 이 박사에게는 한 수가 더 있었어. 미국의 완성품을 사는 대신, 개조하는 과정에 예비설계를 같이 하자고 했어. 예비설계를 검토한 뒤, 괜찮으면 나머지 금액을 내고 미사일을 사겠다는 조건을 붙인 거지. 예비설계 단계까지 가격은 총액의 10% 수준을 제시했어. 왜 이런 제안을 했을까? 제가 당장 아이디어 얻은 것이 '아 여기서 우리가 기술을 빼낼 수 있겠다' 예비설계를 하면서 우리 팀이 거기 가서 기술을 가져다 배우자. 저는 뭔가 하면, 그걸(예비설계) 해서 그걸(미사일) 살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이경서, 전 국방과학연구소장 10%의 가격만 낸 예비설계 과정에서 기술만 빼올 생각이었던 거야. 맥도널 사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어. 원래 단계별로 나눠 계약하고, 한 단계가 끝날 때마다 계속 진행 여부를 검토하는 게, 미국의 계약 방식이기도 했거든. 그러니 거리낌 없이 오케이 한 거야. 사실, 미국 유학파였던 이경서 박사는 미국인들이 이런 식으로 계약을 한다는 걸 알고 있던 거야. 그렇게 우리나라 국방과학연구소 소속 과학자 10여 명이 미국으로 날아갔어. 그런데 미국도 호락호락하지 않지. 같이 있을 땐 흔쾌히 자료를 보여주지만, 퇴근할 때 모든 자료를 회수하고 자물쇠를 채워. 당연히 복사도 불가해. 자료를 충분히 보고 익혀야 하는데, 애가 타. 우리 과학자들은, 인간 복사기가 됐어. 엄청난 양의 자료들을 눈으로 스캔해서 머리에 담았어. 그리고 숙소에 와서 열심히 옮겨 적는 거야. 근데 아무리 똑똑해도, 자료 양이 점점 많아지니 한계가 있잖아. 결국 다른 방법을 택해야 해. 어떤 방법이었을까? '에라이 모르겠다. 그냥 들고 나오자' 였어. 사실 참 위험한 일이었어요. 옷 속에도 숨기고 다들 재주껏 자기 필요한 것들을, 참 용감했어요. -이경서, 전 국방과학연구소장 미국 직원들 앞을 지날 때면 자연스럽게 미소 지으며 내일 보자 고 하고, 그리고 숙소에 가서 복사기로 밤새 복사를 했어. 그렇게 차곡차곡 자료들을 모으고 '이제 됐다' 싶었을 때, 여기까지만 합시다. 이후 계약은 없던 걸로 하죠 라며 계약을 중단했어. 유도탄에 대해서 저희들 90% 이상은 거기서 다 배워서 나왔습니다. 연구소에 나중에 돌아와서 그것이 저희들 바이블이 됐습니다. -이경서, 전 국방과학연구소장 ▲ 극비임무의 종료, 봉투의 행방은? 위험까지 감수한 과학자들의 애국심으로 미사일 제조방법까지 얻어냈지만, 미사일 개발하는 걸 안 미국은 캐나다와 프랑스에 직접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어. 캐나다에 원자로를 팔지 말라고 하고, 프랑스에는 계약 파기에 따르는 손해 비용까지 보상해 주겠다고 제의했어. 계속되는 미국의 압박에 결국 1976년 초, 생고방사와의 계약은 최종 파기가 됐어. 캐나다도 원자로 판매계획 철회를 통보해 왔지. 하지만 우리 과학자들은 포기하지 않았어. '핵연료개발공단'이란 이름의 기구를 발족시키고, 자체적으로 핵연료에 대한 연구를 이어나갔어. 초대 소장은, 주재양 박사. 김철 박사는 개발 연구부장을 맡았어. 공식적으로 '국내에 매장된 우라늄을 연료로 가공하는 방식을 연구하는 거다' 라고 했지만, 미국은 여전히 믿지 않았어. 밀착 감시를 위해 주한 미국대사관에 로버트 스텔라라는 과학무관까지 파견했어. 원자력 분야의 전문 훈련을 받고 파견된 미 CIA 요원이야. 그는 수시로 우리 연구소를 급습하듯 찾아왔다고 해. 사전에 전화도 없이 불시에 달려오곤 했어요. 승용차에 성조기를 펄럭이며 나타날 때는 정말 위세등등 했습니다. 아무 방이나 '문 열라'고 하고 시설 측정도 제멋대로 했어요. 화가 나 '여자 화장실 문을 열어 조사하라'고 한 적도 있습니다. 이게 우리의 위상인가 싶어 서글픈 생각도 들고, 자존심이 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故김철 박사의 증언 中 그렇게 버텨오던 핵개발 프로젝트는 결정적인 사건으로 완전히 종료돼. 때는 1979년 10월 26일. 연구소에서 일하던 과학자들은 TV에서 나오는 뉴스를 보고 깜짝 놀랐어.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소식이 전해졌거든. 대통령 서재 뒤편에 금고가 있었다고 해. 박 전 대통령은 그 금고에 많은 현금과 함께, 아주 중요한 이걸 보관했어. 봉투엔 핵무기 관련 보안 문서가 담겨 있었어. 오원철 수석은 박 대통령 서거 후 서재로 가서 이 금고를 열었어. 현금은 사라졌는데, 다행히 봉투는 아직 남아있어. 오 수석은 이 봉투를 봉인해서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에게 넘겼어. 이 문서들은 나중에 전두환 정권에 전달됐다고 해. 훗날, 오 수석이 핵무기 관련 문서들을 영구 비밀문서로 바꾸기 위해 국가기록원에 갔는데, 노란 봉투 속에 담겨 있던 문서들이 보이질 않았대. 오 수석은 핵 관련 문서들이 미국으로 넘어갔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어. 당시 전두환 정권은 미국으로부터 정권을 인정받기 위해, 더 이상 핵 개발을 추진하지 않았던 걸로 추정돼. 그리고 과학자들도 대거 해고됐어. 국방과학연구소에서만 1000명 중 무려 800명이 쫓겨났어. 이경서 박사도 이직을 했고, 김철 박사 역시 연구소를 떠났어. 자신이 가진 능력과 지식을, 조국을 위해 아낌없이 쏟아냈던 과학자들. 젊음을 바쳤던 직장을 한순간에 읽게 된 참담함. 그 마음은 어땠을까? 그렇다면 과학자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핵무기 개발이 완전히 중단되던 이 시점, 우리나라의 핵무기 개발 수준은 어느 정도까지 도달했었을까? 당시 미 국무부 비밀문서에 그 내용이 적혀 있어. 현재 정보로 추정해 볼 때, 한국은 1980년경까지 핵 장비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미국이 파악한 한국의 기술 수준은 이 정도였어. 우리나라는 어쩌면, 핵무기 개발에 정말 근접해 있었을지 모르지. 2023년 기준, 현존하는 핵탄두의 수는 12,522기라고 해. 만약에 12,522기의 핵무기가 한꺼번에 폭발한다면, 이 지구는 어떻게 될까? 만일, 세계 핵무기의 90%를 보유한 미국과 러시아가 전면전을 벌인다면? 핵폭발로 인한 직접 사망자가 3억 6,000만 명. 그리고 1억 5,000만 톤의 그을음과 먼지, 방사성 낙진이 대기를 뒤덮으면서 햇빛이 차단되는 핵겨울이 발생해서 지구 기온이 뚝 떨어진다고 해. 세계 식량 생산량이 90% 줄어들고, 굶어 죽는 인구가 53억 명으로 추산된대. '인류 전멸' 수준인 거지. 그렇다면, 또 만일, 지금 존재하는 핵무기가 모두 사라진다면, 인류에게 평화가 찾아올까? 핵무기뿐 아니라, 현존하는 모든 무기를 몰수하더라도, 인간들의 싸우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한, 돌멩이나 막대기를 주워서라도 서로를 죽고 죽이는 일을 계속할지 몰라. 사람들이 진정으로 평화를 추구할 때, 자연스럽게 손에 들고 있는 무기를 내려놓게 되지 않을까.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