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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찐리뷰] 내가 암매장한 시신들, 가족 품으로 돌아가길 …사형수가 전한 '영화숙·재생원' 비극 [꼬꼬무</font> 찐리뷰]  내가 암매장한 시신들, 가족 품으로 돌아가길 …사형수가 전한 '영화숙·재생원' 비극 등록일2026.10.23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22일 방송된 '살인자의 편지-영화숙 재생원'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SBS 파워FM 30주년을 맞아 간판 DJ 배우 주현영, 래퍼 딘딘, 배우 봉태규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살인자의 편지 2025년 3월 24일. '꼬꼬무' 사무실로 편지 한 통이 도착해. 보통 '꼬꼬무' 제작진한테는 제보 사연이나, '방송 잘 보고 있다'는 팬레터가 주로 와. 그런데, 이날 제작진이 열어본 이 편지는 평소랑 달랐어.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담겼어. & 먼저 본인이 수형자 신분이라는 점에 어떠한 편견이 없길 바랍니다. 저는 1990년 살인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지금까지 무기징역으로 살아있는 인간입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뉘우치고 참회한다고 피해 유가족께 위로가 되겠는지요. 저는 이 교도소에서 죽는다 해도 괜찮습니다. 그래도 저는 매일 속죄합니다. -'꼬꼬무' 제작진에게 온 편지 내용 中 편지를 보낸 이는 신경호(가명)이야. 살인죄를 저지르고 지금까지 36년 동안 교도소에 수감 중인 수형자래. 그가 왜 편지를 보내온 걸까? 저는 1963년부터 1974년까지 '그곳'에서 지내며 범행에 필요한 교육을 받고, 부산 전역을 돌아다니며 절도와 강도 같은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모든 것은 여기서 시작됐습니다. 늦었지만 그곳의 진실을 밝히고자 용기를 가지고 서신을 드립니다. -신경호(가명)의 편지 내용 中 이건 '꼬꼬무'가 경호 씨와 주고받은 편지들이야. 양이 꽤나 돼. 여기에는 그동안 경호 씨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리고 그가 말한 그곳에선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졌는지가 담겨있어. 오늘 우리는 이 편지를 읽으면서 이야기를 이어나가 볼 거야. 지금부터 시간을 되돌려 1960년대로 가볼게. ▲ 부랑아 보호소 때는 1961년 11월 부산이야. 5살 꼬마 경호는 늘 궁금했어. 행님아, 우리 아버지는 어디 있노? 아, 내도 모른다. 니가 아버지가 어딨노? 여기 아부지 있는 사람 아무도 없데이. 아무도 아버지가 없다? 경호네 가족. 다른 가족들이랑 어딘가 좀 달라. 가족 구성원이 일단 좀 특이해. 어른만 4, 5명이 있고, 각기 다른 또래 아이들이 한 50명쯤 돼. 경호는 고아원에서 자라는 아이였어. 저는 1957년 6월 19일, 부산 부전동 야채시장 쓰레기통에 유기되어 있다가, 시장 상인에게 구조돼 부전 파출소를 거쳐 여기에 입소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신경호(가명)의 편지 내용 中 경호는 태어난 직후에 쓰레기통에 버려져서 여기로 오게 됐대. 지금은 1961년 부산. 그 당시 부산은 어땠는지 사진으로 보여줄게. 6.25전쟁을 피해 부산까지 내려온 사람들. 그들이 만든 빽빽한 판자촌이야. 한국전쟁 때 부산이 임시수도였던 거 알지? 몰려드는 사람들로 도시는 그야말로 미어터졌어. 전쟁을 피해서 내려온 피란민, 그리고 삶의 터전을 잃은 전재민, 부모를 잃은 아이들까지. 거리엔 온통 전쟁고아와 부랑아들로 넘쳐나. '부랑아' 무슨 뜻인지 알아? 사전적 의미는, 일정하게 사는 곳이나 돌봐주는 이유 없이 떠돌아다니는 아이를 뜻해. 당시 부산은 이런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을 거둘 곳이 필요했어. 경호가 지내고 있는 곳은 바로 부랑아 보호소, 영화숙 그리고 재생원이었어. 우선 이름의 뜻부터 좀 얘기를 해볼게. 영화숙은 영(永) 영원히, 화(華), 꽃이 피는 숙(塾), 배움터. 즉, 영원히 꽃이 피는 배움터라는 좋은 뜻이야. 재생원은 이름 그대로, 삶을 다시 살게 해주는 곳. 이름 자체는 너무나 아이들을 옳은 길로 인도해 줄 것 같은 느낌이지? 얼마 뒤 영화숙에 아주 큰 변화가 생겨. 영화숙에 원장이 바뀐 거야. 그러다 제가 6살 쯤에 한 사람이 왔는데 그 사람을 원장님이라 부르라 했습니다. 굉장히 무섭게 생겼고 말하는 것도 전에 있던 원장님과 달리 무서웠습니다. -신경호(가명)의 편지 내용 中 원장의 이름은 이순영. 바로 이 사람이야. 나이는 32살, 퇴역 군인이래. 아이들은 이순영 원장을 무서워했대. 덩치도 엄청난 데다가 항상 인상을 쓰고 있대. 그 원장이라는 사람이 온 뒤로 갑자기 사람들이 죽기 시작했고, 영화숙에서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신경호(가명)의 편지 내용 中 원장이 온 뒤로 사람이 갑자기 죽기 시작했다? 근데 이 얘기. 그대로 믿을 수 있겠어? 제작진은 깊은 고민에 빠졌어. 그래서 긴 수소문 끝에, 영화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을 찾아냈어. 그리고 직접 만나보기로 했지. 지금부터 세상에서 숨겨졌던 그들의 사연을 들려줄게. ▲ 사라지는 아이들 부산시 지도야. 일단 여기서 부산의 자갈치 시장으로 한번 가볼게. 한 꼬마 아이가 엄마를 찾으며 울고 있어. 아이의 이름은 유옥수, 7살이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엄마랑 동생이랑 같이 시장 구경을 하고 있었는데, 많은 인파에 금한 엄마 손을 놓쳐버린 거야.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엄마를 찾아 헤맸는데, 웬 남자가 옥수에게 말을 걸어와. 꼬마야 니 왜 울고 있노. 니 배 안 고프나? 빵 사줄까? 1960년대면 먹을 게 귀할 때잖아. 옥수는 이게 웬 떡이냐 싶어서, 울음을 뚝 그치고 남자를 따라 나섰지. 그때 이제 내 여동생하고 나하고 손 잡고, 내 왼손은 엄마 손 잡고, 자갈치 시장 갔다가 내가 엄마 손을 잠깐 놓쳤어요. 그래서 이제 손 놓쳐 갖고 있는데 누가 '빵 하나 사줄게. 배고프지? 빵 하나 소리에 얼떨결에 따라갔어요. 따라간 게 진짜 행복 끝, 고생 시작이었습니다. -유옥수, 당시 7살 이 날 이후로 옥수는 엄마를 만날 수 없었어. 그런데, 송도해수욕장에선 더 소름끼치는 일이 생겼어. 아이들 셋이 한꺼번에 사라진 거야. 열두 살 근수는 해수욕장을 찾은 피서객들을 상대로 껌을 팔고 있었어. 껌 한 통 파는 게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해. 왜? 어린 두 동생이 손가락 빨면서 근수만 보고 있었거든. 그런데 그때, 팔에 완장을 찬 남자 둘이 삼남매를 불러세워. 그리고 그날 이후, 근수네 삼남매 역시 해수욕장 어디에서도 그 모습을 볼 수 없었어. 밑에 동생들은 그때 학교도 못 다니고, 나는 5학년까지 다니다가 더 이상 다닐 형편이 안 돼서. 돈 벌이를 해야 되겠다, 이렇게 이제 껌도 가져와서 팔고. 그런데 어느날, 방범대원이 둘이 송도파출소에서 내려와서 셋이 다 강제로 잡혀갔거든요. -이근수, 당시 12살 방범대원이 잡아갔다? 이상하지. 이번엔 해운대야. 국민학교 2학년 8살 만유는 학교에 가려고 씩씩하게 집을 나섰어. 그런데 학교 가는 길에 웬 남자가 말을 걸어. 해운대역이지요. 앞에서 학교 등굣길에 '니 뭐하노?', '지금 학교 가고 있는 중이라' 하니까는, 좀 내가 후줄근하게 보였는 모양인가 봐. 그래서 집어던져 버리더라고 차에. -하만유, 당시 8살 각기 다른 장소에서 아이들이 납치되고 있어. 공통점은, 하나같이 웬 남자들을 만나고 나서 사라졌다는 거야. 시간은 흘러 밤이야. 트럭 한 대가 덜컹거리면서 비탈길을 오르고 있어. 짐칸은 오늘 붙잡혀온 아이들로 가득해. 다들 하나같이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이야. 영문도 모른 채 갑자기 잡혀온 거잖아. 가족들도 없고 혼자 얼마나 무서웠겠어. 하지만, 진짜 공포는 이제부터야. 울기라도 하면, 납치한 남자들이 사정없이 뺨을 내리치고 마구잡이로 주먹을 날려. 어른한테 뺨 한대 맞아보세요. 눈에서 불이 번쩍해요. 그 번쩍이 끝나기도 전에 또 뭣이 날아와 버려요. 그게 쉽게 말해서, 입에서 아무 말도 못 하게끔 딱 만들어버리고 자기들 말을 따라가야 되는 거예요. 안 따라가면 이유가 없어요. 어디서 (주먹이) 날아오는지도 몰라요. -유옥수, 당시 7살 그렇게 두려움에 떨면서 이동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덜컥, 짐칸 문이 열려. 내려보니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낯선 건물 하나가 보여. 그리고 그 안으로 들어가자, 방 안 곳곳에 몽둥이를 든 남자들이 여럿 서 있어. 다들 조용! 니! 앞으로 나온나! 아이가 앞으로 나와서 책상 앞에 앉아 있으면, 제일 먼저 이름을 물어. 그래서 이름을 말하면, 그 이름을 살짝 바꿔서 명단에 기재해. 이름을 거꾸로 돌려버려요. 중간 이름을 바꿔 버리든가, 앞 성을 바꿔 버려요. 그럼 부모는 분명히 자식이 안에 있다고 소식을 듣고 왔는데, 장부를 보니까 장부에 이름이 없어요. 왜? 이름을 바꿔치기해 놔 버렸는데 이름이 있겠습니까? -유옥수, 당시 7살 이제 명부 작성을 마친 아이들은 낡은 막사로 옮겨져. 여전히 앞은 잘 보이지 않아. 길게 늘어선 어두운 복도 천장에 희미한 붉은빛 전구 딱 하나뿐이야. 같이 잡혀온 아이들이 하나 둘 각 방으로 흩어지고, 마지막으로 옥수 차례가 됐어. 철컥, 밖에서 잠근 자물쇠가 풀리고 문이 열리자, 지독한 오물 냄새가 방 안 가득해. 대체 이런 곳에 뭐가 있나 봤더니, 발 디딜 틈도 없는 아주 비좁은 방에서 까까머리한 애들 수십 명이 다닥다닥 붙어 자고 있어. 근데 그 모습이 아주 기괴해. 잠잘 때도 어떻게 하는지 압니까? 칼잠이라고 아시죠? 이렇게 옆으로 머리를 세워야 합니다. 그럼 내가 세우면 머리가 또 한 사람은 또 이쪽에 있어요. 그럼 내가 저쪽에 누운 사람 다리를, 내가 꽉 잡고 끌어안고 있어야 돼요. 편한 건 고사하고 바로 등을 이 방바닥에 대고 자 본 역사가 없어요. 그 정도로 진짜 힘들었던 거야. -유옥수, 당시 7살 몸을 칼처럼 옆으로 세워서 겨우 끼어 자는 일명 칼잠. 어때? 너 같으면 이렇게 잘 수 있겠어? 충격적인 일은 더 있어. 소위 '반장'이란 사람이 옥수 뒤에서 몽둥이로 어깨를 툭툭 치더니, 니는 저 사이에 껴서 자라 이러는 거야. 옥수는 시키는 대로 그 자는 아이들 틈에 겨우 비집고 들어가서 누웠지. (제가 자리에 누워) 그래 갖고 이제 고참이 반장이 들어와 갖고, 끌어안고 있는 상태에서 발을 넣었단 말이에요. 발이 들어갔지요? 또 타작이라요. '이 XX들, 방이 넓은가 봐? 발이 들어가네?' 이것도 거꾸로 누운 놈도 내 발을 꽉 잡고, 나도 걔 발을 꽉 잡았어요. 진짜 있는 힘 없는 힘 막 뭐 피가 쏠릴 정도로. 잘 때마다 마 서로가 꼬랑내 나든가 말든가, 끌어안고 있어야 되지. -유옥수, 당시 7살 ▲ 사회 정화의 그림자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결국 이유는 단 하나겠지. 이 좁은 방에 더 많은 인원을 수용하려고. 아이들 한 명 한 명이 바로 돈이었거든. 그래서 이 아이들을 무분별하게 잡아들였던 거야. 왜냐? 당시 부산시에서 이들을 수용하는 시설에 사람 수만큼 지원금을 줬거든. 이건 당시 시대상과 아주 밀접하게 맞물려 있어. 5.16 쿠데타 나고 난 다음에는 군사정권이 딱 들어오고 나서는, 이거(부랑인, 부랑아)는 다 사회질서를 해치는 거야. 그래서 '사회 정화' 이래서, 정부 스스로가 '저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이 아니고 척결 대상이야' 이렇게 하니까. 경제개발도 해야 하고 외국 자본도 유치하고 해야 하는데, 부랑아처럼 보이거나 약간 불량배처럼 보이거나 가난한 사람처럼 보이면, 잡아다가 차에 싣고. 부모 있다 그러면 때리고, 그렇게 해서 데려가는 거죠. -남찬섭 교수, 동아대학교 사회복지학과 당시 박정희 정부는 부랑아, 부랑인을 '사회 정화'라는 명목으로 거리에서 밀어내고 한 곳에 수용하기로 한 거야. 이순영은 영화숙 원장으로 취임하자마자 부산시와 '부랑인 노숙자 수용 보호 위탁'이라는 계약을 맺어. 18세 미만 부랑아 고아는 영화숙에, 그리고 18세 이상 부랑인과 걸인은 재생원에 위탁 수용을 하기로 한 거지. 경호 씨 편지에도 같은 내용이 담겨 있어. 부산직할시 동네 곳곳에서 어쩌다가 잡혀왔는지 모르는 형님, 누나, 동생들. 학교에서 저녁까지 공부하고 집으로 가다가 잡혀오고, 술 마시고 집에 걸어가다가 잡혀온 사람이 많았습니다. 내 눈으로 똑똑히 보고 두 귀로 들은 것은 형님, 누나, 아이들은 부랑인이 아니었습니다. 불법 납치, 단속으로 끌려온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냥 부산 시민 이었습니다. -신경호(가명)의 편지 내용 中 아까 옥수가 맡았던 오물 냄새 기억나? 처음 방에 들어왔을 때 코를 찌른 지독한 냄새의 정체는 바로 아이들이 밤새 싼 똥, 오줌이야. 이거 무슨 말이냐? 밤에 화장실도 못 가게 했다는 말이야. 왜? 그 틈에 도망갈까 봐. 아이들이 도망가면 지원금이 줄어드는 거니까. ▲ 폭력의 굴레 이제 다음날 새벽이야. 아이들을 깨우는 기상 나팔 소리에 아이들이 순식간에 우르르 몰려나가. 옥수도 얼른 따라갔지. 근데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이 떡 벌어졌어. 생각보다 이곳의 규모가 어마어마해. 마을 같아. 게다가 이게 끝이 아니야. 자 이걸 봐봐. 뿌연 흙먼지가 있는 운동장에 아이들이 빼곡하게 서 있어. 그 수가 족히 수백명은 넘어 보여. 그것도 그냥 서 있는 게 아니야. 오와 열을 딱딱 맞추고 군기가 바짝 들어있어. 그리고 그 제일 앞에 서 있는 건, 바로 원장 이순영. 전체 차렷! 지금부터 점호를 시작한다! 1소대부터 번호! 그동안 많이들 해 봤는지 모두가 일사불란해. 근데 점호? 소대? 이거 완전 군대야. 아까 원장 이순영이 군인 출신이라고 했던 거 기억나지? 그런데 만약에 이 점호를 하다가 한 명이라도 그 번호가 빈다? 그러면 그날로 초 비상이야. 아이들 머릿수 하나하나가 원장한테는 다 돈이니까. 한 명이 비면 그만큼 지원금이 깎이는 거야. 점호가 끝나면, 이제 일과가 시작돼. 이걸 한번 봐. 영화숙 재생원 지도야. 팻말이 있는 입구를 지나 쭉 걸어가다 면 큰 식당이 보이고, 그 건너편엔 원장실과 영화숙 사무실이 있어. 그 옆엔 소대. 아이들이 지내는 막사야. 그리고 그 옆이 바로 재생원. 재생원 뒤로는 축사도 있었어. 주변을 보면 온통 갈대밭과 야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그래서 외부인 눈에 잘 띄지 않았대. 영화숙 신입원생 옥수는, '보충대'에서 지내게 돼. 처음 오면 여기서 적응 기간을 거쳐. 군대로 따지면 훈련소 같은 거야. 그런데 여기서 시키는 게 참 희한해. 여기서는 그냥 앉아있는 게 전부야. 양손은 무릎 위, 고개는 정면 고정. 그 자세 그대로 하루 종일 유지하고 있어야 돼. 그런데 조금이라도 움직였다? 그 즉시 구타와 체벌이 가해져. 다리에 쥐가 나도 등이 아무리 배겨도, 심지어 화장실이 아무리 급해도 참아야 되는 거야. 그러니 어떻겠어? 그 자리에서 오줌을 지리는 아이들이 속출해. 그러면 또, 주먹질과 발길질 세례가 이어지는 거야. 왜 이러는 걸까? 그 이유가 경호 씨의 편지에 나와있어. 실수한 것이 있으면 형님들의 교육이 항상 있었고, 그때마다 발바닥을 맞아야 했고 엉덩이를 몽둥이로 맞아야 했습니다. 실수하지 말라는 뜻이겠죠. 저는 오히려 맞는 날이 편했습니다. 맞지 않는 날은 언제 맞을지 몰라 잠도 못자고 더 불안했습니다. 오로지 충성하는 것이 내게 전부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신경호(가명)의 편지 내용 中 이유도 없어요. 뭐 다른 생각을 아예 요만큼도 못 가지게 하려고. 무조건 갖다가 한 놈이 쭉 가면서 때리고, 또 한 놈이 쭉 가면서 때려버리고. 안 때리면 이거 언제 때릴까, 마음이 조마조마해요. 어떨 땐 자기도 모르게 오줌을 질질 싸요. 불안해서. 맞아버리면 막 이 무릎을 갖다 땅을 기더라도 '아 이제 맞았으니 끝났다'. 안 때리면 불안해서 사람이 못 견뎌요 그걸. -유옥수, 당시 7살 복종심, 그리고 충성심을 기르기 위해서였어. 내 말을 듣지 않으면 폭력뿐이다, 그러니 무조건 내 말에 따라라. 이렇게 반항할 생각조차 못하게 만드는 데야. ▲ 인간 이하의 삶 충성심과 복종심을 기르고 나면 아이들은 이제 각자 노역장으로 배치가 돼. 아까 처음에 아침 등굣길에 끌려왔던 만유 기억나지? 만유는 영화숙 식당에서 일을 하게 됐어. 근데 여기서 밥은 잘 줬을까? 당시 식단을 준비해봤어. 옥수수 가루에 물을 타서 끓인 일명 강냉이죽. 그마저도 제대로 먹을 충분한 시간조차 주지 않아. 한참 먹고 자랄 나이잖아. 그런데 이 그릇이 한 끼 식사의 전부였어. 옥수수 가루 한 말을 삶는다고 합시다. 강냉이로 한 말 붓고 물을 세 도랑 부어갖고 해가지고. 그거를 솥에 뜨면 그냥 물이라요. 주르륵이라요. 뻑뻑한 것도 없고. 그걸 먹고 하루 생활을 해야 됩니다. -유옥수, 당시 7살 한편 옥수는 돼지 막사로 배치가 됐어. 여기선 원생들보다 돼지가 더 귀하신 몸이야. 오죽하면 옥수수는 돼지한테 질투심까지 느꼈대. 이야, 니가 내보다 더 잘 먹네. 내도 돼지로 태어났으면 배는 부르고 죽었겠다 라면서. 실제로는 이런 일도 있었대. 돼지 오물통 갖다 돼지머리 때려버리고 저리 가라 해놓고. 내가 그걸 먹었어요. 돼지 밥을. 거기다 막 손 넣고 막 무조건 건져내요. 건더기를 건져서 막 갖고 와요. 다른 사람 모르게. 그걸 다음에 먹으려고 햇빛에 딱 말려요. 말리는 게 뭐냐면 지금 같으면 멸치 있잖아요 멸치. 멸치 같은 거 뭐 고기 같은 거 있잖아요. 그걸 다 말려요. -유옥수, 당시 7살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저랬을지 이해가 돼? 그마저도 걸리면 그 자리에서 또 두들겨 맞는 거야. 이유는 단순해. 돼지가 굶어서 살이라도 빠지면 어쩌냐는 거지. 오죽하면 원생들 사이에선 이런 말까지 나올 정도였대. '원장은 아이들이 죽으면 박수를 치고, 돼지가 죽으면 눈물을 흘린다'고. 왜냐하면 돼지는 팔면 돈이 되니까. 아이들은 그러니까 돼지보다도 못한 대우를 받고 살았던 거지. 배가 고파서 사실 이런 일도 있습니다. 5살, 6살 된 아이가, 3소대 뒤에 화장실. 그 뒤에 구더기가 많이 나오더라고. 파리가 많이 끓고 하니까. 그걸 주워 먹고 있어서 내가 물어봤습니다. 물어봐도 말도 안하고 그냥 먹는 거야. -하만유, 당시 8살 근데 아이들이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도망칠 생각을 안 했을까? 아까 해수욕장에서 끌려왔던 그 3남매 중 맏이 근수 기억나지? 근수는 하루에도 12번 넘게 담장 밖만 바라봤대. 저 담장만 넘으면 여기서 당장이라도 탈출할 수 있을 것만 같았거든.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어. 도망가면 내 혼자 살려고 한다는 게 아니고. 동생을 데리고 도망가야 해요. 그걸 놔놓고 가면, 내가 도망가면 그 애는 죽는 거죠. 예를 들어서 내 동생이 도망가면, '아 그런가 보다' 하고 단체로 한 대 맞으면 되는데. 내가 도망가면 내 동생이 얼마나 맞겠어요. -이근수, 당시 12살 차마 형으로서 동생을 두고 나갈 수가 없었던 거야. 여긴 무조건 연대 처벌이거든. 원생 한 명이 도망가면 같은 방 쓰는 인원 전체가 단체 기압에 무차별 폭행까지 당하는 거야. 사무실에 있다 보니까 저녁마다 두드려 맞는 애들이. 도망갔다 잡혀 온 애들이 개 맞듯이 맞는데. 그걸 보면 나도 도망갈 생각 자체를 못합니다. 일반인들은 상상을 못합니다. 한 4명이 곡괭이 잡고 막 머리고 어디고 필요 없어요. 죽으면 죽고, 두드려 패고 있으면 어떻겠어요. 이게 몇 번 반복이 되니까 '나는 저렇게 맞으면 죽는다' 그러니까 이걸 보고 나서는 눈곱만큼도 도망칠 생각을 못 합니다. 돼지도 잡을 때 그렇게 안 팰 거예요. 아무리 독한 놈도 그거 한번 봐버리지요? 마음이 달라져요. -유옥수, 당시 7살 만약에 탈출을 했다가 실패하고 잡혀 오기라도 한다? 이게 곡괭이 자루거든. 땅을 파는 이런 곡괭이 자루로 발바닥에 피가 터지도록, 수십 대를 풀 스윙으로 내리쳤다는 거야. 이걸로 맞고 나면 걷지도 못하고 기어다녀야 하는 거야. 식당으로 갈 수가 없어서 밥도 며칠 굶어야 돼. 그래서 아이들은 차마 담장을 넘지 못하고 매일 밤 숨죽여 지낼 수밖에 없었던 거야. 근데 더 충격적인 사실이 있어. 파출소 순경들은 우리를 '까마귀'라고 불렀고, 때때로 '단속'이라는 팔에 차는 것을 찾습니다. 단속 대상자들은 우리를 보면 자기들끼리 '까마귀 떴다'며 피했습니다. 거기서 잡히는 녀석들은 차량에 태워져 재생원에서 온갖 수모를 당해야 했습니다. -신경호(가명)의 편지 내용 中 탈출한 애들을 잡아오는 것도 역시 아이들을 시킨 거야. 경호는 일명 '까마귀'로 불리는 단속반이었대. 게다가 단속반이 하는 일은 이게 다가 아니었어. 아까 처음에 잡혀온 애들 있지. 옥수, 만유 그리고 근수의 삼남매. 이들을 영화숙으로 납치한 사람들 역시, 이 까마귀 단속반이었어. 원생들을 시켜서 다른 원생들을 잡아오게 하는 거야. 옥수는 영화숙에서 무려 8년동안 지냈는데, 돼지 막사에서 일하다가 단속반 생활도 했어. 누가 한 사람은 그러데요. '니 예전에 단속했지?'라고 하더라고요. 지는 내 속을 모르니까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너도 거기 가 있어봐라. 가 있어보면 내 심정 알 거다. 난 그때 안 맞으려고 너 잡았다. 이거는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너하고 무슨 원수를 졌다고 널 잡겠노. 나는 들어가 안 맞기 위해서 널 잡아온 거다' -유옥수, 영화숙 강제수용 그러니까 자기가 잘못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다른 아이들을 붙잡아왔던 거야. 안 그러면 자기가 맞으니까. 누나들이 잡혀와 두들겨 맞고 강간을 당하고, 형들이 잡혀와 폭력과 강제 노역을 당해도. 나만 무사하면 된다는 생각이 있었던 건지 그냥 짐승처럼 본능적으로 충성하였습니다. -신경호(가명)의 편지 내용 中 심지어 아까 아이들을 막 때리고 구타했던 반장, 소대장들 있지? 놀랍게도 그들 역시 피해자들과 같은 원생이었어. 들어온 지 오래된 아이들 중에 이순영에게 그나마 충성심을 좀 보이는 아이들에게 시켰다는 거지.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또 그 가해자가 다시 피해자를 만들게 되는 끔찍한 대물림이 이어지고 있는 거야. 아까 붙잡혀온 아이들. 10살 전후, 많아봐야 10대 중후반이야. 이런 아이들한테 완장을 채우고 권력을 쥐어준다, 당연히 부작용이 있을 수밖에 없어. 영화숙에 9살, 11살 때 두 번이나 붙잡혀온 석주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끔찍한 일을 겪게 돼. 소대장이 저를 노렸나 보더라고요. 그 안에서 예쁘장하게 생긴 애들은 그 소대장한테 다 당했어요. 방에 우리는 칼잠 자지만 소대장 자리는 널찍했습니다. 한쪽에 자기 혼자. 그러더니, '히틀러(당시 손석주 별명) 이리 와봐' 해서 '왜요?' '이리 오라면 빨리 와 이 XX야' 거기서는 거역하면 두드려 맞을 수밖에 없으니까. 마지못해 갔죠. 내가 그렇게 당할 때 그 안에 같이 생활했던 그 사람들이 모르겠습니까. 어느 하나, 말 한마디 못했어요. -손석주, 영화숙 9살, 11살 2차례 강제수용 잡혀온 아이들끼리 폭행과 구타도 모자라서 성폭행까지, 완전 생지옥이 따로 없어. 그런데 이게 전부 다 원장 이순영의 치밀한 계산 아래 짜여진 각본 같은 거였어. 역시 이번에도 돈 때문에 아이들한테 이런 잔인 무도한 짓을 하게 만든 거야. 아동 1인당 보조금은 정해져 있잖아요. 그로부터 돈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은, 아동들에 대해서 최대한 먹을 거를 안 주고 입을 거를 안 주고. 그 다음에 강제 노역해서 착취하고. 그 다음에 최대한 유급 직원을 안 쓰는 방식이죠. 유급 직원을 안 쓰려면 시설에 수용되어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체제를 만들면 되는데. 그래서 군대식으로 소대장, 중대장 이렇게 해서, 그런 방식이 굉장히 군대와 닮아있고. -남찬섭 교수, 동아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아이들을 관리하는 인력을 외부에서 따로 데려오면 월급을 줘야 하잖아. 하지만 원생들끼리 서로 감시하고 통제하게 만들면 돈이 전혀 들지 않는 거지. 이순영의 악행은 여기서 끝이 아니야. 아이들에게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일까지 하게 했대. ▲ 이름없는 죽음들 어느 날 아침이야. 어김없이 울리는 기상 나팔 소리에 석주는 평소처럼 점호 준비로 분주해. 그런데… 석주 옆자리에서 자던 동갑내기 친구 기철이가 통 안 일어나. 석주는 또 혼날까 싶어서, 기철이를 흔들어 깨웠지. 그날도 기철이와 저는 머리를 맞대고 서로' 잘 자'라는 얘기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 다음날 새벽 6시 기상시간에 기상 소리와 함께 다 일어나는데, 얘만 안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야 기철아 일어나 일어나' 하고 몸을 흔드는데 꼼짝을 안 하는 거예요. -손석주, 당시 11살 기철이가 자는 동안 사망한 거야. 석주는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 어제까지만 해도 옆자리에서 자던 친구가 갑자기 죽어버린 거니까. 반장이 와서 기철이를 보더니 소대장에게 보고를 하더라고요. 소대장이 와서 이렇게 발로 툭 차고 보더니 '죽었네?' 그 한마디가 끝이었어요. 그리고 재생원의 어른들 손에 의해서 그냥 덮여 나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죠. 그 이후로 저한테는 여기서 '나도 저렇게 죽을 수 있겠다' 영원히 못 나갈 수 있겠다는 공포감이, 11살의 아동이 그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손석주, 당시 11살 단속반이 우르르 오더니 기철이를 둘러 업고 가는 거야. 어디로 데려가는 걸까. 경호 씨의 편지 다음 장에 있어. 죽은 형님, 누나들을 보며 살기 위해서는 충성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생존을 위해서 형들이 시키는 뭐든 했습니다. 가혹행위로 죽어나오는 어린 동생 7명을 뒷산에 암매장해야 했고 누나, 형, 아저씨 11명을 갈대밭에 암매장을 했으며, '시신을 묻어라' 하면 밤이든 낮이든 갈대밭 야산에 묻었고, 온갖 더러운 성추행과 폭행을 당해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신경호(가명)의 편지 내용 中 다시 지도를 한번 볼게. 영화숙과 재생원 주변에 뭐가 있다고 했지? 그렇지 갈대밭과 야산. 여기에 시신들을 암매장했대. 이순영은 이런 끔찍한 일마저 어린 원생들의 손으로 하게 했어. ▲ 몰락의 그림자 한편 경호가 13살이 되던 1969년, 얼마 전부터 영화숙을 유심히 지켜보는 한 남자가 있어. 영화숙과 재생원은 밖에서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이라고 했잖아? 거기다 인기척도 별로 없어. 왜? 다들 강제 노역하러 나가 있거나 막사 안에 갇혀 있으니까. 그런데 한 남자가 우연히 근처를 지나가다가 여기를 보게 된 거야. 이 남자 사진 먼저 보여줄게. 미국인 신부야. 이름은 소 알로이시오. 별명은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아버지'. 1983년에 막사이사이상을 받고 노벨평화상 후보에 두 번이나 오른 인물이야. 소위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해 일생을 다 바친 사람이지. 소 신부는 1957년 부산교구의 선교사제로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왔어. 1969년 당시엔 부산에서 부랑인 노숙인들을 치료해주는 보호소를 운영하고 있었지. 그런데 그게 바로, 영화숙의 건너편이었던 거야. 소 신부가 수녀에게 물었어. 수녀님, 저기 군부대같이 생긴 곳은 뭐하는 데인가요? 신부님 말도 마세요. 오늘도 거기서 한 아이가 탈출해 왔어요. 온몸이 만신창이인데 오랫동안 치료받지 못한 것 같아요. 거기 누가 사는데요? 저도 자세히는 몰라요. 근데 아무래도 거기서 끔찍한 일이 일어나는 것 같아요. 밤마다 비명소리가 끊이질 않거든요. 소 신부는 깜짝 놀랐어. 이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었지. 대체 저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야 했어. 소 신부는 수녀 여럿을 대동하고 영화숙에 찾아가. 소 신부가 본 영화숙의 아이들, 어땠을까? 그는 이렇게 이야기했어. 그곳에는 무려 1,200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한 방에 50~60명의 아이들이 있었는데, 이곳의 많은 아이들이 폐결핵과, 영양실조, 눈병, 피부병을 앓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런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온 종일 방안에 갇혀 있다시피 했다. 아이들 주위에는 원장의 부하인 사내들이 몽둥이를 들고 사나운 눈초리를 한 채 아이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소 신부 평전 中 아이들이 너무나 열악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 거야. 하지만 아이들을 구해줄 방법이 마땅치 않았대. 왜냐하면 아까 얘기한 것처럼, 이 영화숙은 부산시와 정식으로 부산시와 정식으로 계약을 맺은 시설이니까. 게다가 섣불리 아이들을 구하려고 나섰다가 이순영의 보복이 아이들한테 향할지도 몰라. 그러던 어느 날 이 소 신부가 엄청난 충격에 빠진 사건이 벌어졌어. 사진 한 번 봐줘. 영화숙에서 1년 넘게 지내고 있는 한 소녀야. 폐결핵 말기 중증 환자인데 제대로 된 치료 한 번 받지 못했대. 소 신부가 영화숙에 방문했을 때 상태가 너무 심각해 보여서 급하게 치료소를 데리고 왔어. 하지만 이 소녀 이틀 만에 결국 사망하고 말았어. 소 신부는 이때 결심하게 돼. 어떻게 해서든 이 아이들을 저기서 구해줘야겠다고. 소 신부는 부산시 공무원, 경찰서장, 심지어 부산시장한테까지 찾아가서 영화숙의 실태를 고발했어. 하지만 이들 모두 모르쇠로 일관했지. 심지어 이 일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큰일 칠 줄 아시오 이런 협박까지 받았대.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이걸 보여줄게. 당시 영화숙 재생원의 이사진들이야. '국회의원 당선' '형무소 간수' 등 이 시대에 굉장히 힘센 사람들이야. 소 신부, 여기서 포기했을까? 아니, 소 신부는 더 이상 부산에선 안 통하겠다 싶어서 더 크게 판을 벌이게 됐어. 내무부 장관, 검찰총장, 국무총리, 급기야 박정희 대통령한테까지 투서를 보내버린 거야. 상황이 이러니 부산시에서도 어쩔 수가 없었어. 이순영은 경찰 조사를 받고 마침내 구속이 됐어. 그로부터 며칠 뒤, 소 신부가 운영하는 구호소는 지금 그야말로 난리법석이야. 한센병 환자 수십 명이 구호소 앞을 가로막고 있어. 이들의 정체는 누구냐? 이순영이 운영하고 있는 또 다른 복지시설. 나환자 정착촌에 사는 사람들이었어. 이순영의 지시로 소 신부의 구호소를 습격한 거야. 거짓말쟁이 소 신부를 추방하라! 이런 구호를 외치면서 격렬하게 시위를 벌여. 하지만 어느 누구 하나 나서서 말릴 수가 없어. 당시에 한센병은 스치기만 해도 병이 전염된다는 잘못된 인식이 파다할 때였거든. 그런데 그때, 구호소에서 한 무리가 튀어나와. 그러더니 시위대를 향해 마구 침을 뱉기 시작했대. 소 신부 구호소에 입원 중인 결핵 환자들이 소 신부를 위해서 나선 거야. 그러니까 지금 한센인과 결핵 환자들이 한데 뒤엉켜 싸움을 벌이는 초대형 난동이 벌어진 거야. 이 소동이 며칠 동안이나 계속됐어. 그러는 사이, 이순영이 구속 6일 만에 풀려나. 도주의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하지만 갈등은 끝난 게 아니지. 결국 소 신부와 이순영은 협상 테이블에 앉아. 긴 협상 끝에 나온 결과는 이랬어. 첫째. 2만 달러에 해당하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지원하는 대신, 우리 수녀들이 수시로 영화숙에 드나들며 아이들을 돌볼 수 있게 할 것. 둘째. 200명의 아이들을 수녀회가 인수해 돌보게 할 것. 소 신부는 그 뒤로도 영화숙 아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노력했어. 1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의 서명을 받았고. 모금 운동까지 벌였어. 여론을 움직인 거야. 결국 1971년, 부산시는 영화숙과 체결한 위탁 계약을 취소하기에 이르렀어. 더 이상 아이들을 잡아가도 지원금이 나오지 않게 된 거지. 소 신부의 도움으로 소년의 집에 온 영화숙 아이들은, 소 신부의 보호와 교육 아래 조금씩 일상을 되찾아갔어. 그럼 이제, 영화숙 재생원은 어떻게 됐을까? 이대로 문을 닫았을까? 그렇게만 된다면 이대로 이야기가 끝이겠지만, 사실 이 이야기의 시작, 처음에 편지를 보낸 경호의 이야기는 지금부터가 시작이야. ▲ 악인양성소 한센인과 결핵 환자들이 격렬하게 싸움을 벌이던 그 무렵, 영화숙 운동장을 거닐던 경호를 누군가 은밀하게 불러. 경호에게 니, 내 말 단디 들으래이. 지금부터 우리가 살 길은 이것 뿐인 기라 그러더니 사무실 뒤편 아무도 없는 곳에 데려가. 제가 열 살이 넘던 시기, 원장의 지시에 따라 연병장 사무실 뒤에 풀밭에서 범죄 교육을 받았습니다. 사람을 묵는 법, 집에 몰래 들어가는 법, 집에 들어가면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배웠고, 노상 강도 범죄도 배웠습니다. -신경호(가명)의 편지 내용 中 원장의 지시로 범행 교육을 받은 거야. 그리고 그날 밤, 부산의 한 번화가야. 길을 걷는 한 여성의 주위를 남자 4명이 순식간에 둘러쌌어. 그리고 옆구리에 흉기를 들이밀고 조용히 따라와 라고 협박했어. 남자들은 여자의 손목시계, 반지, 현금, 통장을 훔쳐서 달아났어. 이게 바로 경호의 첫 번째 범행이었어. 이렇게 경호는 범죄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 거야. 그렇게 부산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범행 대상을 물색하고, 노상 강도를 넘어서 가택 침입까지도 서슴지 않아. 그럼 훔친 물건들, 전부 어디로 갔을까? 영화숙에 있는 원장실 캐비닛. 이순영이 아동착취로는 더 이상 돈을 벌지 못하자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한 거지. 이때부터 영화숙의 분위기는 또 한 번 달라졌어. 구타와 가혹행위가 난무하는 무늬만 아동복지시설에서 거대한 범죄사관학교로. 그러다 어느 날 원장 사무실에서 경호를 콕 집어서 부르더래. 원장님 명령이다. 지금 파출소 가서 손도장 몇 번만 찍고 오면 된다. 경호는 그저 시키는 대로 파출소로 향했지. 손도장을 찍었다고 했잖아? 그 길로 검사를 만나고 재판까지 받았어. 원장이 누군가의 범행을 경호한테 뒤집어 씌우고 대신 소년원을 보낸 거야. 영문도 모른 채 소년원에 가게 됐으니 얼마나 무서워. 하지만 경호 마음은 전혀 달랐어. 그런데 좋았습니다. 하루 세 끼 꼬박꼬박 보리밥을 주고, 가끔씩 어른들이 빵을 비밀봉지에 가져와서 노래도 불러주고 먹을 것도 주고. 누가 때리지도 않고 끔찍한 성추행도 하지 않고. 시설 내에서 자유롭게 생활하는 것이 너무너무 좋았습니다. 몇 개월 후 나가라 할 때 나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신경호(가명)의 편지 내용 中 물론 이미 지나간 일에 '만약'이라는 건 없지만, 만약에 이때라도 경호가 그 영화숙과 인연을 끊고 손을 씻었으면 어땠을까. 하지만 몇 개월 뒤, 소년원에서 나온 경호가 갈 데라고는 영화숙밖에 없어. 태어날 때부터 거기 버려졌으니까. 경호가 영화숙으로 돌아오자 원장이 기다렸다는 듯 두 팔을 벌려 반겼어. 그리고는 씨익 웃으며 이렇게 말해. 경호 니, 오늘부터 특공대 해라. 특공대가 된 경호의 새 무대는 부산의 가장 큰 번화가 서면. 그 중에서도 외국 영화를 틀어주는 한 극장, 그리고 극장 뒤편 좁은 쇠문을 열고 지하로 내려가면 그야말로 완전 딴 세상이 펼쳐졌어. 문을 열고 들어가면 거대한 비밀 작업장이야. 경호가 들어서자 책임자가 반겨. 야 니가 경호가? 반갑데이. 반갑습니다. 지는 뭘 하면 되는교? 어 이거만 가꼬 가가 잘 전달만 하믄 된다. 할 수 있제? 잘해라잉. 경호의 임무는 어떤 물건을 다방이나 술집 마담들에게 배달하는 거였어. 특공대가 되면서 총무님 앞에서 원장님께 충성을 맹세한 후, 부산 서면 로터리 극장을 근거지로 마약을 배달하고. 약담배라 불리는 대마초는 다방, 극장, 술집 앞에서 장사하는 아주머니들에게 배달하고. 판매대금 일부를 경찰과 공무원에게 직접 전달했습니다. -신경호(가명)의 편지 내용 中 이제 이순영이 하다하다 마약 시장에까지 손을 댄 거야. 거기다가 조폭과 손을 잡고 공무원에 상납까지 하며 점점 더 깊숙이 범죄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어. 물론 그 과정에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을 동원했지. 이때 경호의 나이, 고작 14살이었어. 이순영이 점점 더 범죄의 길로 들어설수록, 돈이 안 되는 영화숙 재생원은 뒷전으로 밀려났어. 그리고 1976년, 부산시의 법인 허가가 취소되면서 영화숙 재생원은 영원히 문을 닫게 돼. 그러면 그 이후에 원장 이순영은 어떻게 됐을까? 여러 차례 법적 공방이 있었지만, 최종 판결은 벌금 30만 원. 지금 돈으로 따지면 약 700만 원 정도 돼. 판결의 이유는 이랬어. '원생들이 구타를 당하거나 강제 노역에 동원된 것은 맞으나, 이순영이 시켰거나 지시했다고 볼 근거는 없다' 게다가 원생들의 강제 노역을 통해 불린 재산, 경호를 비롯한 특공대가 불법으로 편취한 자금들 대부분 그대로, 이순영 일가의 소유로 넘어갔어. 그리고 최종 재판으로부터 4년 뒤인 1981년, 이순영은 지병으로 사망했어. 수많은 피해자들을 남겨놓고도 끝내 그 책임을 제대로 지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난 거야. ▲ 지옥 밖의 세상 그럼 피해자들은 영화숙에서 나온 뒤 어떻게 지냈을까? 등굣길에 붙잡혔던 만유, 그리고 동생들하고 같이 끌려간 근수. 이 둘은 영화숙에서 나온 뒤 또다시 어딘가로 끌려가게 돼. 아마 너도 들어본 적 있는 곳일 거야. 바로 '형제복지원'. 70~80년대 전국 최대 규모의 부랑인 수용시설로, 대한민국 현대사에 또 하나의 참혹한 인권침해로 남은 곳이야. 그런데 이 형제복지원에 도착한 두 사람은 깜짝 놀랐대. 영화숙 출신 아이들이 너무 많은 거야. 영화숙에서 나온 아이들 대부분이 가족을 못 찾았거나, 아니면 가족들에게 외면당했거든. 오갈 데가 없는 거야. 그렇게 또 길거리를 헤매다 형제복지원에 다시 붙잡혀 온 거지. 근데 여기서 더 충격적인 얘기가 있어. 형제복지원 운영 방식하고 영화숙 재생원 방식이, 거의 똑같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형제복지원의 박인근 원장이 영화숙 재생원의 이순영 원장의 운영 방식을 벤치마킹한 것이 아닌가. 두 사람이 서로 알았다고 하더라고요. -남찬섭 교수, 동아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최악의 강제 수용소라고 불리는 형제복지원의 시초가, 바로 이 영화숙 재생원이었던 거야. 게다가 이 영화숙 출신 사람들 중엔 이들처럼 형제복지원을 거쳐서 삼천교육대까지, 연달아 강제 수용된 사람들이 아주 많대. 만약에 네가 평생 이런 삶을 살아왔다면, 정상적인 사회생활 할 수 있었을까? 공황장애, 대인기피증, 폐소공포증. '꼬꼬무'가 만난 피해자들의 공통점이야. 게다가 처음 이들이 잡혀왔을 때 기억나? 명부에 아이들의 이름을 다르게 적었잖아. 그 한순간이 이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렸어. 내가 88년도까지 대한민국 사람이지만 88년도까지는, 중간에 뜬 사람 있잖아요.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되고, 딱 중간에 뜬 사람 '나'라요. 내가 70년대에 파출소 끌려가면, 처음에 딱 듣는 게 무슨 말이지 압니까? '너네 몇 명 넘어왔노!' 두드려 패면서. ''너네 이번에 임무가 뭐고!' 그 파출소 보면 옥상 아니면 지하실로 갔지요. 그러면 앉혀서 나무 꼬챙이에 끼워서 딱 놓고 뺑뺑이 돌려요 사람을. 그러다가 수건 딱 덮어 놓고 와사비 막 부어요. 그거 안 먹으면 더 괴로워요. 주는 대로 받아 마셔요. -유옥수, 영화숙 강제수용 피해자 경찰에서 불시검문이라도 하면 간첩으로 오해받고 모진 고문을 당했던 거지. 제대로 된 신분증명서가 없으니까. 한마디로 신원 불상자. 그러니까 이런 일이 영화숙 출신 아이들에게는 비일비재했대. 그리고 처음 옥수 씨 끌려올 때 상황 어땠지? 자갈치 시장에서 엄마 손을 놓쳤다가 영화숙에 오게 됐잖아. 과연 영화숙에서 나가고 엄마를 만날 수 있었을까? 엄마를 만나긴 만났어. 무려 30년이 지난 뒤에야. 그때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어요. 내 보고 딱 하는 말이 '유옥수 씨, 하단동에 안 살았습니까?' 하더라고요. '맞는데 왜요?' 하니까 '일단 좀 오실랍니까?' 하더라고요. 병원에 갔는데 웬 할매가 누워있더라고요. '이 아줌마 압니까?' 물어봐서 '난 모르는데요' 했죠. 난 모르니까, 기억이 없으니까. 기억이 다 지워져 버렸는데. '나 이 할매 모르는데요?' 그러니까 의사가 뭐라고 하니까, 그 할매 피하고 내 피를 뽑더라고요. 또 연락 왔더라고요. '아저씨 그 할매하고 DNA가 일치한대요' '그분이 당신 엄마인데요' 하더라고요. 나를 보더니만 울면서 '내가 니 엄마다' 그런데도 엄마가 울면서 내가 니 엄마다 하는데도, 제 속에서 뭉클한 게 나타나야 되는데, 뭉클한 게 없어요. 그냥 밍밍해요. 이 사람이 내 엄마 맞는가? 가짜 아닌가? -유옥수, 영화숙 강제수용 피해자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버려서 가족에 대한 애틋한 감정까지도 사라져버린 거야. 그럼, 경호 씨의 삶은 어땠을까? 다시 경호 씨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볼게. 아까 14살 경호가 뭐 하고 있었지? 경호는 처음 소년원에 다녀온 뒤 절도, 강도 그리고 마약 유통 등으로 교도소에 여러 번 수감됐어. 그런데 궁금하지 않아? 경호는 어쩌다 살인이라는 이 끔찍한 범죄까지 저지르게 된 걸까?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들려줄게. ▲ 살인자가 된 남자 경호가 8번째 수감 생활을 마친 1984년 서울역이야. 어느덧 경호의 나이는 28살. 아무데도 갈 곳이 없어서 서울역 지하도에서 눈을 붙이고 있었어. 그런데, 눈을 떠보니 어떤 여자가 앞에 있어. 경호보다 나이가 몇 살은 많아 보여. 그리고 옆에 보니까 웬 남자도 함께야. 경호를 데리고 가서 잠바도 사주고 밥도 사주더니, 대뜸 한 가지 제안을 해. 저희랑 같이 일해보지 않으실래요? 다행히 일행들은 경기도 일대 유원지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들이야. 식당에서 같이 일할 직원을 구했던 거지. 경호 입장에선 얼마나 고마워. 경호는 새 삶을 살겠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일을 했대. 그렇게 1년, 2년, 어느덧 6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1990년의 어느날. 경호네 가게랑 옆 가게가 주차구역 문제로 시비가 붙은 거야. 식당들 사이에 종종 벌어지는 자리싸움 같은 거 있잖아. 그런데 여기서 일이 터졌어. 말다툼으로 시작된 싸움이 감정이 격해지면서 몸싸움으로까지 번져. 그리고 그 순간, 경호가 절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만 거야.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경호 씨는 당시를 어떻게 회상할까? 제가 이렇게 된 것은 모두 내 잘못입니다. 영화숙 재생원 일은 일이고, 전혀 영향이 없다고 할 수 없지만 그동안 내가 피해를 드린 피해자 입장에서 나를 생각한다면 저는 국민의 세금으로 평생 살고 있는 파렴치한 흉악 범죄자입니다. -신경호(가명)의 편지 내용 中 편지를 다 읽은 '꼬꼬무' 제작진은 교도소에 찾아가서 경호 씨를 직접 만났어. 지금은 70대가 된 경호 씨. 제작진을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내 죽기 전에 바라는 건 이것뿐입니다 라고 말했대. 경호 씨의 마지막 바람 뭐였을까? 만약 내가 영화숙 재생원의 피해자로 인정받고 보상금을 받게 되면, 불우 이웃을 돕는 복지재단에 기부하여 나 같은 사람이 더 이상 생기지 않게 할 것. -신경호(가명)의 바람 살인을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더 이상 같은 비극이 생기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야.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어. 내가 암매장한 시신들을 포함한 영화숙 주변에 암매장된 시신들을 발굴해 가족들의 품으로 돌려줄 것. -신경호(가명)의 바람 경호 씨는 떠나는 제작진에게 마지막으로 이런 당부의 말도 남겼어. 제가 흉악범임을 잊지 마십시오. 저는 무기수입니다. 그 어떠한 용서도 기회도 바라지 않습니다. 아까 옆자리에서 죽어 있었던 친구를 발견한 석주. 기억나지? 영화숙의 마지막 수용자 중 한 명이었던 석주 씨는 지난 2022년 11월, 세상에 처음 영화숙 재생원의 존재를 알렸어. 그리고 백방으로 뛰어다닌 끝에 185명의 피해자와 유족들과 함께 국가와 부산시를 상대로 511억 원의 배상 판결을 이끌어냈어. 평생을 지옥같은 트라우마 속에서 살았던 분들이잖아. 드디어 국가의 인정과 피해 배상금을 받았을 때, 이분들 어떤 기분이었을까? 피해자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해.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나는 이제 누구를 원망하면서 삽니까? 원장도 죽었고 세월도 흘렀고 나라에서 돈까지 받고 나니, 이제 내 인생이 망가진 이 억울함을 어디에 풀어야 할지 모르게 돼 버린 거야. 석주 씨는 지금도 시간이 날 때마다 부산 사하구 장림동, 그 옛날 영화숙 터를 찾아가. 이 산 어딘가에 묻혀있을 친구 기철이, 그리고 이름도 없이 세상에서 사라진 아이들. 이렇게 억울하게 죽은 친구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서래. 기철아, 여기 어딘가 이 산에 너도 있겠지? 50년이 더 지났지만 하루도 널 잊은 적이 없다. 어둠에서 이제는 너를 빼내야 안 되겠나? 내 형제들, 친구들,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도록 할게. 미안하다 친구야… 언젠가는 저 야산 밑에서 내 친구 기철이를 찾아낼 수 있을까. 11살 석주는 친구를 다시 볼 그날까지, 이 산을 계속 찾아갈 생각이야.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
[스브스夜] '꼬꼬무' 살인자의 편지, 그 어떤 용서도 기회도 바라지 않습니다 ···'영화숙, 재생원' 끔찍한 그곳의 '기억' [스브스夜] '꼬꼬무</font>' 살인자의 편지,  그 어떤 용서도 기회도 바라지 않습니다 ···'영화숙, 재생원' 끔찍한 그곳의 '기억' 등록일2026.10.23 살인자가 꼬꼬무에 편지를 보낸 이유는? 22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살인자의 편지 - 영화숙·재생원'이라는 부제로 1960년대 끔찍한 일이 일어났던 부산의 '영화숙, 재생원'을 조명했다. 지난 2025년 3월, 방송국으로 한 사람의 편지가 도착했다. 자신을 살인을 저지른 무기수라 밝힌 경호 씨는 저는 &&'그곳&&'에서 지내며, 범행에 필요한 교육을 받고 부산 전역을 돌아다니며 절도와 강도 같은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모든 것은 여기에서 시작됐습니다. 라며 부산의 영화숙, 재생원이라는 곳을 언급했다. 그리고 제작진은 믿을 수 없는 편지의 이야기를 확인하기 위해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을 수소문했고 직접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새로운 원장 이순영이 영화숙과 재생원으로 온 후 완전히 달라진 그곳. 그가 온 이후로 매일같이 사람들이 죽어 나갔고 공사가 시작되었다고. 부산 곳곳에서 사라진 아이들은 하나 둘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박정희 정부는 당시 부랑아 부랑인을 사회 정화 목적으로 사회에서 몰아내고자 했고 이에 부산시와 부랑인 노숙자 수용 보호 위탁 계약을 맺은 원장 이순영이 돈을 위해 불법 납치를 해 18세 미만은 영화숙, 19세 이상은 재생원에 수용시켰던 것. 평범한 부산 시민이었던 그들은 대소변이 쌓인 방에서 칼잠을 자고 밤낮없이 감시를 당했다. 그리고 군대같이 매일 통제되며 폭행 속에서 강제 노역까지 했다.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아이들은 먹을 게 없어서 화장실의 구더기를 주워 먹고 돼지의 먹이까지 부러워하는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연대 처벌 때문에 쉽게 도주하지도 못했다. 매일같이 죽어도 괜찮다는 듯 폭행이 이어지니 탈출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 또한 원장은 탈출한 아이들을 잡아 오는 것도 아이들에게 시키고, 원생들에게 또 다른 원생들을 데려오게 하며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구조를 만들었다. 이에 원생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나쁜 일을 반복했다. 아이들은 그곳에서 폭력뿐만 아니라 성폭행까지 당하는 인권 유린을 당했다. 어제까지 옆에서 자던 친구가 다음날이면 죽어나갔고 그렇게 그곳에서 가혹 행위를 당해 죽은 이들은 영화숙과 재생원 주변 갈대밭에 암매장되었다. 그리고 우연히 이곳을 보게 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아버지 미국인 신부, 소 알로이시오는 영화숙과 재생원의 실태를 알게 되고 충격에 빠졌다. 그리고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그곳의 실태를 고발했지만 외면당하고 도리어 협박까지 당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내무부 장관, 국무총리, 박정희에게까지 투서를 보냈고 이에 결국 원장 이순영은 경찰 조사를 받고 구속됐다. 하지만 이순영은 구속 6일 만에 도주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풀려났다. 소 신부님은 이순영과 협상 끝에 아이들을 돌볼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아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노력을 계속 한 끝에 1971년 부산시와 영화숙의 위탁 계약이 취소되었다. 그렇게 그곳 아이들은 일상을 찾아가는 줄 알았다. 하지만 뒤에서 이 원장은 아이들에게 범죄 교육을 시켰다. 그렇게 범죄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 아이들 중 경호가 있었다. 범죄 사관학교가 된 영화숙과 재생원. 이 원장은 누군가의 범행을 다른 아이들에게 덮어 씌우기도 했다. 이에 소년원에 가게 된 경호, 하지만 그는 소년원에서 자유를 찾았다고 말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그리고 또 소년원에서 나온 뒤에는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영화숙. 이 원장은 경호에게 또 다른 임무를 맡겼다. 마약 배달이 그의 새로운 일이었다. 그리고 공무원들에게 상납까지 하도록 했다. 이후 1976년 부산시 법인 허가가 취소되며 영화숙과 재생원은 문을 닫게 되고 이순영은 최종 판결 벌금 30만 원이 고작이었다. 이순영이 지시했다고 볼 근거가 없다는 게 바로 그 이유. 하지만 원생들의 강제노역으로 불린 재산, 불법으로 편취한 자금들 모두 이순영의 일가 재산에 귀속되었다. 최종심 4년 뒤 1981년에 지병으로 사망한 이순영. 그렇게 영화숙을 떠나게 된 피해자들은 이후 형제복지원으로 끌려갔고 이후에는 삼청교육대까지 연달아 강제 수용되며 악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다. 공황장애, 대인기피증, 폐소공포증을 앓은 피해자들. 그리고 그들은 영화숙 수용 당시 명부에 바꾸어 버린 이름 때문에 신원불상자가 되어 간첩으로 몰려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여러 범죄를 저지르다 28살이 된 경호는 우연히 한 식당에서 일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벌어진 싸움에 말려들며 넘지 말아야 선을 넘게 되었다. 현재 70대가 된 경호, 그는 죽기 전 바라는 것은 이것뿐이라며 만약 내가 영화숙 재생원의 피해자로 인정받고 보상금을 받게 되면 불우이웃을 돕는 복지재단에 기부하여 더 이상 나 같은 사람이 생기지 않게 하고 싶다. 그리고 내가 암매장한 시신들을 포함한 영화숙 주변에 암매장된 시신을 발굴해 가족들에게 돌려주고 싶다 라고 자신의 바람을 밝혔다. 그리고 그는 나는 흉악범, 무기수다. 그 어떠한 용서도 기회도 바라지 않는다 라고 말해 씁쓸함을 남겼다. 평생의 지옥 같은 트라우마 속에서 살았던 피해자들은 국가와 부산시를 상대로 511억 원의 배상을 받아냈다. 하지만 그들은 돈은 문제가 아니다. 나는 이제 누구를 원망하며 사냐 라며 돌이킬 수 없는 자신들의 삶에 망연자실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SBS연예뉴스 김효정 에디터)
어린 동생 7명 암매장 '꼬꼬무'에 도착한 살인자의 편지…'영화숙·재생원' 잔혹사 조명  어린 동생 7명 암매장  '꼬꼬무</font>'에 도착한 살인자의 편지…'영화숙·재생원' 잔혹사 조명 등록일2026.10.22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가 교도소에서 날아온 한 통의 편지를 시작으로 '형제복지원'에 앞서 역대급 인권 유린이 자행된 '영화숙·재생원'의 참상을 조명한다. 22일(목) 밤 10시 20분에 방송될 '꼬꼬무'는 '살인자의 편지-영화숙 재생원' 편으로, 36년째 수감 중인 어느 재소자의 편지에 담긴 강제 수용시설의 충격적인 진실이 전격 공개된다. '꼬꼬무' 제작진에게 도착한 편지에서 제보자는 자신을 살인자라고 밝히며, 어린 시절 부랑아 보호시설 '영화숙·재생원'에 보내져 그 안에서 범죄 조직원으로 길러졌다고 자백했다. 특히 생존을 위해서 형들이 시키는 뭐든 했다. 가혹 행위로 죽어 나오는 어린 동생 7명을 뒷산에 암매장해야 했고, 누나, 형, 아저씨 11명을 갈대밭에 암매장했다 며 끔찍한 만행을 50년 만에 고백했다. 부산시와 부랑아 수용 위탁 계약을 맺고 '사회 정화 운동'의 선봉에 섰던 영화숙·재생원은 실상 무고한 아이들과 시민들을 납치·감금하고 폭행을 일삼은 인권 유린의 현장이었다. '꼬꼬무' 제작진은 편지를 보낸 당사자를 직접 찾아가 10분간의 접견을 통해 편지에 담긴 자백과 시설의 진실을 추적했다. 한편 이날 방송에는 SBS 파워FM 30주년을 맞아 간판 DJ 배우 주현영, 래퍼 딘딘, 배우 봉태규가 이야기 친구로 출동한다. 장현성의 이야기 친구로 나선 주현영은 제보자의 편지를 읽으며 경악을 금치 못했고, 장성규의 이야기 친구로 출연한 딘딘은 죗값을 물릴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일 이라며 거침없는 분노를 터뜨렸다. 두 아이의 아빠인 봉태규 역시 장도연의 이야기 친구로서 아이들이 겪은 폭력적인 대우에 안타까움을 가누지 못했다. 살인자의 편지로 시작된 '영화숙·재생원'의 감춰진 잔혹사는 바로 오늘, 22일 밤 10시 20분 방송될 '꼬꼬무'에서 공개된다. 강선애 기자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
[스브스夜] '꼬꼬무' 김귀정 열사 사망 사건… 귀정이의 시신을 지켜라 그들이 '진짜' 지켜내고자 한 것은? [스브스夜] '꼬꼬무</font>' 김귀정 열사 사망 사건… 귀정이의 시신을 지켜라  그들이 '진짜' 지켜내고자 한 것은? 등록일2026.10.16 친구의 시신을 지키기 위한 친구들의 눈물겨운 사수 일지가 공개되었다. 15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귀정이를 지켜라 - 35년간의 사수'라는 부제로 김귀정 열사 사망 사건을 조명했다. 1991년 5월 어느 새벽, 수백 명의 청년들이 서울 명동의 백병원으로 모였다. 그리고 이들은 스크럼을 짜고 영안실 앞을 막아섰다. 어느 누구도 왜 그래야 하는지 설명하지 않았지만 순식간에 수천 명의 학생들이 모이고 그중 100여 명이 영안실을 지키고 있었던 것. 그리고 그들은 우리는 절대 귀정이를 내줄 수 없다 라며 하나의 목소리를 냈다. 몇 시간 전 숨진 스물여섯 살의 대학생 김귀정의 시신을 지키기 위한 성균관대 학생들이 마음을 함께했던 것. 뜻밖의 죽음을 맞은 귀정. 이에 경찰은 귀정의 사망이 단순 사고사라 판단하고 빨리 부검을 하고 장례를 치르자고 했다. 하지만 친구들은 달랐다. 그들은 귀정의 사망에 의문을 갖고 정확한 사망 경위를 파악해 달라 요구한 것. 그러나 검찰은 귀정의 사망 5시간 만에 압수 수색 영장을 발부했다. 그리고 얼마 전 벌어진 경찰의 시신 탈취 사건으로 진실이 가려져 버린 한 노동자의 죽음 앞에 친구들은 스스로 귀정을 지키기 위해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실 낮에는 공장 보조, 밤에는 식당 일을 하며 학비를 벌며 민주주의보다 먹고사는 일이 더 절박했던 귀정은 높은 학비 때문에 학교를 그만두었었다. 하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학업에 대한 의지로 1988년 성균관대 불문과에 다시 입학한 귀정. 그는 앞선 대학 생활과 달리 이번에는 알바도 하며 틈틈이 대학 생활을 즐기며 살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학생 운동을 하다가 수배자가 된 친구를 보며 스스로의 삶을 반성하게 된 귀정은 결국 운동권 동아리에 가입해 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귀정은 나의 일신만을 위해 호의호식하지 않을 것, 결코 그러지 않을 것 이라는 다짐으로 동아리연합회 임원 선거에도 출마하며 학생운동에 앞장섰다. 사망했던 날도 귀정은 집회에 참여했다. 그런데 순식간에 사라진 귀정은 주검이 되어 친구들 앞에 돌아왔던 것이다. 그런 귀정을 지키기 위해 병원으로 모인 학생들. 그리고 시신을 지키던 그날 새벽 영안실 안의 전화기가 울렸다. 그리고 누군가가 다급한 목소리로 오늘 밤에 상황이 있을 거예요, 누군가 정말 죽을지도 몰라요 라고 말했다. 부검을 위한 시신 압수수색 영장 만료일이었던 그날. 새벽 5시 무장한 전경들 1500여 명이 동원되어 학생들을 향해 최루탄과 돌을 던지고 맨몸이나 다름없는 학생들은 귀정이의 시신을 지키고자 이를 막아섰다. 경찰은 거기에 진압용 살수차 동원해 최루액 물대포를 쏘았고 죽음도 불사하며 귀정의 시신을 지키고자 한 사수대는 끝까지 귀정을 지켜냈다. 하지만 경찰은 다시 돌아올 것을 경고하며 영장을 재발부 받았다. 그리고 며칠 후 검찰과 부검의가 귀정의 시신을 부검하고자 찾아왔다. 사수대의 의지와 달리 귀정의 어머니가 부검에 동의했던 것. 누구보다 완강히 부검을 반대했지만 친구들의 안위를 걱정했던 어머니는 난 우리 딸 같은 일이 다시 생기는 것 원하지 않는다 라며 결국 부검을 허락했던 것이다. 1991년 6월 7일 부검이 시작되고 부검 결과는 검경의 주장과 동일한 단순 압박에 의한 질식사로 판명되었다. 앞서 부검에 동의하며 경찰 진압 과정에 대한 수사를 요청한 귀정의 어머니. 하지만 사수대는 검찰을 믿지 못했고 결국 동문들에게 도움을 청해 진상조사단을 결성했다. 국과 공권력을 믿지 못한 이들이 최후의 보루를 만든 것. 그리고 귀정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히고자 당시 귀정이 참여했던 시위에 갔던 많은 이들이 제보를 해왔다. 1991년 5월 25일, 비 내리던 그날 집회에서는 여느 날과 달리 후퇴하는 학생들을 향해 최루탄을 쏘는 토끼몰이를 했다. 그리고 사복 체포조인 백골단까지 등장하며 시위대를 진압했다. 그리고 시위대는 이들의 폭력을 피하기 위해 골목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그곳으로도 경찰의 최루탄이 날아왔고 백골단 역시 시위대의 뒤를 쫓았다. 일명 사과탄인 손에 쥐고 던지는 최루탄을 시위대를 향해 던진 경찰들. 이를 직접 맞은 채수진 학생은 귀정을 위해 자신이 겪은 일을 모두 증언했다. 그는 자신의 옆으로 검고 동그란 머리들이 산처럼 쌓이던 광경을 잊지 못했던 것. 그리고 이 모습을 지켜보며 사진으로 남긴 한 대학의 학보사 기자는 증거 사진을 진상조사단에 제보했다. 이에 과잉 진압에 의한 사망이 명백하다고 판단한 진상조사단. 87년 박종철 이한열 열사의 죽음은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되고 이에 대통령 직선제가 16년 만에 부활했지만 전두환의 친구 노태우가 당선되며 또다시 신군부 출신의 대통령이 집권을 하게 된 대한민국. 노태우는 나는 전두환과 다르다 라며 선을 그었지만 국가 보안법을 앞세워 대학생을 비롯한 수많은 시민을 구속, 시위를 무력 진압했다. 이에 1991년, 대학생이 또다시 공권력에 의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나 일부 경찰의 돌발 행동이라 선을 그은 공권력. 이에 수십만 명이 매일 거리로 나와 정권 퇴진을 요구했고 수많은 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죽음으로 저항했다. 그리고 또다시 시위 현장에서 사망한 대학생 귀정. 이에 학생들은 과잉 진압의 진실을 이번에는 반드시 밝혀내야만 했다. 그리고 공권력은 어떻게든 진실을 막아야 했다. 진상조사단의 증거에도 경찰은 끝까지 과잉 진압을 인정하지 않았고 검찰도 끝까지 귀정의 죽음이 단순 사고사라고 판단했다. 이에 당시 진상조사단 중 한 명은 압박 질식사에 이르게 된 선행 요인이 있었는데 그걸 밝히지 못했다는 게 아직도 부채감으로 남아, 송구하고 미안하다 라고 말했다. 압박 질식사로 종결된 귀정의 사망. 그리고 치르게 된 장례식. 귀정의 친구들과 가족은 귀정의 운구를 끌고 귀정의 학교인 성균관대로 향했다. 그런데 한복에 유건을 쓴 유림들이 유학자들의 위패를 모신 성역과도 같은 성균관대를 시신이 지나갈 수 없다며 막아섰다. 이에 친구들은 빗속에 무릎을 꿇고 간청했다. 귀정을 지키지 못했다는 미안함에 마지막 길만은 후회 없이 보내주고 싶었던 것. 결국 친구들의 진심은 유림을 움직였다. 귀정의 친구들 뿐 아니라 3만여 명이 참여한 귀정의 장례식. 그들의 마음속에 귀정은 김귀정 열사로 남았다. 그리고 2년 뒤 출범한 김영삼의 문민정부. 이에 귀정의 친구들과 어머니는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했고 국가는 김귀정의 사망은 전경들의 직무집행상의 과실로 발생한 것 이라며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인한 사망을 인정했다. 귀정이 사망하고 4년 만에 진실이 인정받은 것이다. 여전히 귀정을 그리워하고, 곁을 지키는 사수 대들은 한 해도 빠지지 않고 귀정이 떠난 날이면 귀정을 찾아간다. 그리고 수백 명의 친구들을 위해 늘 밥을 짓는 귀정의 어머니. 살아남아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귀정의 친구들에게는 나의 일신만을 위해 살지 않겠다 라는 귀정의 다짐이 마음속에 남았다. 그들은 세상을 바꿀 수는 없더라도 억울하게 죽이거나 죽지는 말자 라고 다짐하고 세상을 정의롭고 바르게 살아가기 위해 애쓰고 있다. 내가 사는 오늘은 누군가가 그렇게 소원하였던 일상이었음을 새기며 언젠가 먼 훗날 다시 만날 귀정에게 나 어땠어? 나 괜찮게 살다왔지? 라고 자신 있게 물어볼 수 있는 삶을 살아가겠노라 다짐했다. 지금도 귀정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부채감에 시달리는 친구들. 하지만 지금까지 그를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것만으로도 귀정을 지켜낸 것이 아닐까. (SBS연예뉴스 김효정 에디터)
[꼬꼬무 찐리뷰] 총에 맞는다면 저희가 먼저 맞겠습니다 …뭄바이 테러 속 사람들을 살린 국경 없는 연대 [꼬꼬무</font> 찐리뷰]  총에 맞는다면 저희가 먼저 맞겠습니다 …뭄바이 테러 속 사람들을 살린 국경 없는 연대 등록일2026.10.11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8일 방송된 '불타는 뭄바이-테러에 갇힌 한국인들'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그룹 올데이 프로젝트의 영서, 펜타곤의 후이, 배우 문성현이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혼돈의 뭄바이 때는 2008년 11월 26일. 이곳은 인도 뭄바이야. 일단 사진을 하나 보여줄게. 뭄바이는 무려 1,300만이 거주하는 인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야. 인도 중앙은행, 인도증권거래소가 있는 인도 경제의 심장과도 같은 곳이야. 미국으로 치면 뉴욕과 비슷한 느낌이지. 그래서 이 뭄바이를 찾는 여행객만 연간 수백만 명이 넘어. 당시 스위스에서 살고 있었던 다라 황은 지인의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인도에 처음으로 방문했어. 그녀는 인도에서의 마지막 날을 남자친구와 함께 보내고 있었어. 바로 이곳에서. 10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뭄바이의 명소이자 최고급 호텔. 타지마할 호텔이야. 그 명성에 걸맞게 비틀즈, 마이크 잭슨, 버락 오바마 등 수많은 셀럽과 정치인이 방문했대. 뭄바이의 랜드마크 같은 곳으로 외국인 여행객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곳이야. 다라 황 커플은 인도에서의 마지막 밤을 즐기기 위해서 호텔 근처에 있는 레오폴드라는 카페로 향했어. 이곳은 뭄바이에서 가장 유명한 카페 중 하나야. 여기 또한 외국인 여행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래. 이날도 손님들이 꽉 차서 떠들썩하고 활기 넘치는 분위기였다고 해. 다라 황 커플이 주문한 음식을 막 먹으려던 때야. 뭔가 쨍하고 깨지는 것 같은 날카롭고 요란한 소리가 들렸어. 카페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가, 금방 사람들이 다시 웃고 떠들기 시작해. 무슨 소리가 들려서 갑자기 긴장했다가 별일 아닌 것 같으니까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어. 그런데 잠시 후, 믿을 수 없는 사건이 벌어져. 그녀에게 직접 들어볼게. 떠들썩하던 실내가 몇 초간 조용해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어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탕, 탕, 탕, 탕, 탕' 소리가 연달아 들렸고, 그제야 '아, 뭔가 일이 일어났구나' 싶었죠. 저는 그대로 얼어붙었고, 존(남자친구)이 의자에 앉아있던 저를 바닥으로 밀쳤어요. 완전히 아수라장이었어요. 총격을 당하는 순간에 소지품을 챙길 생각은 아예 안 들더라고요. -다라 황, 당시 26세 여행객 괴한 두 명이 카페에 들어와서 총을 쏜 거야. 다라 황과 남자친구는 황급히 테이블 밑에 엎드렸어. 엎드린 채 보니 남자친구 다리에서 피가 흘러. 아무래도 파편을 맞은 것 같아. 근데 더 무서운 건, 그 순간에도 괴한들이 계속 총을 쏘고 있다는 거야. 그 순간 다라 황은 '빨리 여기서 나가야 해'라는 생각뿐이었대. 그때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은 것 같아요. 어떻게든 빠져나가야 했죠. 그야말로 공황 상태였어요. -다라 황, 여행객 다라 황 커플이 앉은 테이블은 다행히도 출입문에서 가까운 곳이었어. 다라 황과 남자친구는 일어나서 무조건 밖으로 달렸어. 거리로 뛰어나가는데 신발이 벗겨졌어요. 그래도 신경 쓸 겨를이 없었죠. 맨발로 달렸어요. 계속 달릴 수 밖에 없었어요. 길에 유리조각이 있어서 밟았다고 해도 그냥 계속 달렸을 거예요. '안전하려면 어디로 가야 하지?' 생각뿐이었어요. 계속 달려야 할지, 낯선 도시라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는데 호텔로 돌아가야 할지… -다라 황, 여행객 다라 황 커플은 우선 자신들이 묻고 있는 타지마할 호텔로 뛰어갔어. 정신없이 호텔에 도착하자 말끔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만신창이가 된 다라 황 커플을 의아하게 쳐다봐. 다행히 이곳 타지마할 호텔에는 아무 일이 없는 것 같아. '하, 살았다' 안심하며 다라 황 커플이 로비에서 턱까지 차오른 숨을 돌리던 그때, 갑자기! 카페에서 들었던 그 총소리가 지금 호텔에서도 들려. 총격을 피해 도망쳐 왔는데 호텔에서도 총격이 벌어졌어. 평범한 하루가 끝나갈 시간. 지금 이곳 뭄바이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분명해. ▲ 인도판 9.11 테러 그날 상황을 보여줄게. 인도 뭄바이 중심가가 괴한들의 공격으로 아수라장으로 변했습니다. 우리 시각으로 오늘(27일) 새벽 2시 반쯤 뭄바이 시내 철도역 대합실과 호텔, 식당 등지에 괴한들이 난입해 시민과 관광객들에 대한 무차별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자동 소총 등으로 무장한 테러범들은 고급 호텔, 식당 등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공격을 가해 지금까지 80여 명이 숨지고 250여 명이 다쳤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중 2008년 11월 26일, 인도 뭄바이에서 충격적인 테러가 일어났어. 혹시 인도 뭄바이 테러 들어봤어? 아니면 미국에서 일어난 9.11 테러는 들어봤지? 이날 테러를 '인도판 9.11'이라고 얘기해. 무려 60시간이나 이어진 무차별 공격. 그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생사에 갈림길에 서게 돼. 그리고 그중에는 다수의 한국인도 있었어. 그 이야기를 직접 들어볼게. 주 뭄바이 총영사관 영사 강기택입니다. 원래 제 소속은 경찰청이고요. (경찰청에서) 전 세계의 재외 공관 대사관이나 총영사관 등에 사건 사고, 대테러 등을 담당하는 영사를 파견하게 됩니다. 그때 선발이 돼서 인도의 뭄바이로 파견을 간 상태였습니다. 그날 저희가 한-인도 기업인 친선협회를 출범했습니다. 당시에 인도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서 공관 차원에서 그런 모임을 만들어주고, 네트워킹을 할 수 있도록 하는 행사를 개최했었죠. 타지마할 호텔이 뭄바이의 해변가에 있는 5성급 호텔 중에서 가장 명망이 있는 호텔이었고, 그 행사를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서 공관원의 한 명으로 참석했던 겁니다. -강기택, 당시 주 뭄바이 총영사관 영사 테러가 발생한 날, 행사에 참석한 한국인들과 다라 황이 같은 장소에 있었던 거야. 바로 타지마할 호텔에. 호텔은 '팰리스 윙'이라고 불리는 구관과 '타워 윙'이라고 불리는 신관으로 이루어져 있어. 두 건물은 안에서 서로 오갈 수 있게 되어 있어. 호텔의 객실 수는 500개가 훌쩍 넘어. 그러니까 투숙객, 방문객, 직원까지 더하면 천여명이 넘는 사람이 지금 이 호텔에 있는 거야. 뭄바이 테러가 발생한 시간 밤 9시 30분경. 카페에 이어 호텔에서도 총격에 휘말린 다라 황 커플은 일단 눈앞에 보이는 아무 문으로 뛰어들어갔어. 바로 여기. 로비가 있는 G층, 이곳에 위치한 레스토랑이었어. 그러면 다라 황 커플이 뛰어들어간 그 레스토랑 안에 상황은 어땠을까? 레스토랑 안에선, 어떤 남녀가 프로포즈 중이었어. 아직 호텔에서 벌어진 총격 상황을 몰랐던 거지. 그때 어떤 커플이 있었는데 장미 꽃잎으로 하트 모양을 만들어놓은 거예요. 사람들이 전부 멈춘 채 저희를 쳐다봤어요. -다라 황, 여행객 다라 황 커플의 모습에 어리둥절해 하던 레스토랑 손님들도 곧 사태를 알게 돼. 다들 여기저기 숨고 난리가 나. 총성은 계속 들리는데 얼마나 가까운지, 누군지, 몇 명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어요. '여기서 죽는 건가? 이게 끝인가?' 싶었어요. -다라 황, 여행객 로비가 있는 G층에는 몇 개의 레스토랑, 그리고 바가 있었거든. '꼬꼬무'는 당시 바에 있었던 사람도 어렵게 찾을 수 있었어. 어쩌면 이 호텔에서 일어난 테러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인물일 거야. 저는 앙쿠르 차블라입니다. 저는 2008년에 타지마할 호텔에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당시에 '하버' 바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소리가 들려서 무슨 일인지 보려고 '하버' 바 밖으로 나갔어요. 그런데 밖으로 나가보니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게 총을 쏘고 있었고, 로비 바닥에 사람이 쓰러져 있던 것도 어렴풋이 기억나요. 배낭을 메고 총을 든 사람이 뛰어가는 것도 봤어요. -앙쿠르 차블라, 당시 타지마할 호텔 직원 당시 차블라는 4개월 차 새내기 호텔리어였어. 쉬는 날임에도 휴무를 반납하고 일을 하다가 테러에 휘말리게 된 거야. 차블라는 급히 손님들을 일단 이동시켰어. 바 안에 위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있었거든. 로비 쪽이 공격당하고 있으니까 조금이라도 안전한 위층으로 가려고 한 거야. 그렇게 사람들은 모두 위층에 있는 '와사비'라는 일식 레스토랑으로 올라갔어. 저 호텔 상황 어땠을지 상상이 돼? 당시 CCTV를 보여줄게. 호텔에 들어온 테러범은 두 명이었어. 평범한 여행객처럼 자연스럽게 들어왔다가, 갑자기 총을 꺼내서 쏘기 시작한 거야. 그리고 이 시각, 호텔에 또 누가 있지? 행사에 참석한 한국인들. 총 몇 명쯤 됐을까? 당시에 총영사관하고 저희 코트라가 같이 첫 창립총회를 개최를 했고요. 현지에 계시는 한국 기업인들 30~40명하고 인도 기업인들 80여 명들 목표로 창립총회 개설을 하는 행사였어요. 9시 정도에는 이미 식사가 거의 다 끝나고 계속 환담을 나누는 그런 상태였습니다. 전체 인원 중 식사하시고 먼저 출발하신 분들이 한 15분 정도 됐습니다. -김정현, 당시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직원 행사가 끝나갈 무렵이라 대략 20명 정도의 한국인이 호텔에 남아 있었던 상황이야. 바로 이곳 신관 19층에. 연회장에 있는 한국인들이 처음 이상함을 느낀 건 창 밖에서 '팡, 팡' 하는 소리가 들렸을 때였다고 해. 정현 씨는 처음엔 '또 폭죽 터뜨리나 보네'라고 생각했대. 인도는 결혼식, 축제 등 행사 때마다 폭죽을 그렇게 많이 터뜨린대. 그런데, 몇 사람이 행사장으로 다급히 뛰어들어와. There was a shooting! 총격이 일어났어요! 그리고 얼마 후, 연회장 안 사람들 휴대전화로 문자 메시지가 빗발치듯 들어와. 이런 문자였어. 테러범이 호텔 로비를 공격했대. 뭄바이 여기저기에서 총을 쏘고 난리야. 사람들을 무차별로 죽이고 다닌대! 긴급 속보를 본 지인들, 총영사관에 남아있는 직원 등 외부에 있는 사람들이 소식을 전한 거야. 사람들은 너도나도 전화를 하기 시작해. 어 여보, 난데! 당신 괜찮아? 거기 문제없어? 애들은? 밖에 나가지 말고 안전하게 있어야 돼! 알겠지? 자신들의 상황보다 인도에 함께 온 가족이 먼저였던 거지. 대부분 가족이랑 인도에 와서 현지에 있으니까 가족의 안부를 먼저 묻는 거죠, 나보다. 나의 안전보다 가족의 안전을 챙기려고 전화를 돌리시는 모습이 좀 기억나요. -강기택, 당시 주 뭄바이 총영사관 영사 하지만 강기택 영사는 가족에게 전화를 못했다고 해. 아니, 하지 않았다고 해. 총영사관 영사로서 더 급한 일이 있는 거야. 강 형사는 정보 파악을 하기 위해서 이곳저곳에 전화를 하기 시작했어. 총영사관과 대사관에 이 사태를 알리고, 인도 대테러 국장에게도 전화를 해. 그런데 받지를 않아. 얼마 후, 한 외국 공관원을 통해서 알게 된 소식은 너무나 충격적이었어. (그 인도 대테러 국장은) 제가 테러 관련해서 교류를 하던 분인데, 통화를 하려고 했는데 못했어요. '총을 맞고 죽었다'라는 전화를 제가 받았죠. 처음에 이제 길거리에서 테러리스트랑 조우해서 피격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강기택, 당시 주 뭄바이 총영사관 영사 사태를 진압해야 할 대테러 국장이 사망했다는 거야. 상황은 아주 심각해. 도대체 몇 명의 테러범들이 사람들을 공격하고 있는 걸까? 자, 시간을 조금 돌려볼게. 11월 26일 저녁 8시 30분경. 테러 발생 1시간 전이야. 뭄바이 남부 해변에 고무보트 2대가 도착해. 누가 타고 있을까? 맞아 테러범들이야. 총 10명이야. 테러범의 사진을 보여줄게. 테러범들의 나이는 20살에서 28살 사이였어. 이들은 파키스탄에 기반을 둔 무장단체 '라쉬카르 에 타이바' 소속이야. 9.11 테러를 일으킨 알카에다, 들어온 적 있지? 활동 목표는 다르지만 극단주의 이념을 내세운 테러 조직이라는 점은 비슷해. 이 무장단체는 지금 뭄바이를 공격해서 인도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고,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려고 하는 거야. 바로 이렇게. 10명의 테러범은 2명씩 5팀으로 나눴어. 그렇게 동시다발적으로 무차별 공격을 시작한 거야. 레오폴드 카페, 그리고 타지마할 호텔. 그리고 또 어디를 공격했을까? '차트라파티 시바지'라는 기차역이야. 이곳의 하루 이용객은, 약 65만 명이야. 기차역으로 간 2명의 테러범은 사람들이 가득한 대합실에 수류탄을 던졌어. 그리고 테러범들은 서로 등을 맞댄 채 빙글빙글 돌면서 사방을 향해서 무차별 총을 쐈다고 해. 이날 이 기차역에서만 60여 명이 사망을 하고 100명이 넘게 부상을 당했어. 다른 테러범들이 향한 곳, 또 어디였을까? 바로 또 다른 호텔이었어. 타지마할 호텔과 마찬가지로 외국인 여행객이 많이 찾는 곳이야. 그 곳에서 테러범들은 사람들이 보이는 족족 총을 쏘고 확인사살까지 했어. 그리고 마지막 테러범들이 향한 곳은 '나리만 하우스'라고 불리는 곳인데, 주로 유대인들이 이용하는 건물이었어. 자, 공격 장소 이 다섯 군데가 전부일까? 아니. 한 곳에서 상황이 끝나면 다른 장소로 이동하면서 공격을 이어가. 심지어 이동할 때 이용한 택시는 시한폭탄을 설치해서 폭발시켰어. 이 뭄바이 테러는 기존의 다른 테러들과는 양상이 달랐다고 해. 대부분의 테러는 폭탄 테러, 자살 테러 등 한 번에 폭발로 상황이 끝나. 그런데 뭄바이 테러는 최대한 오랜 시간 최대한 많은 피해를 입히고 있는 거야. 지금 뭄바이가 핏빛으로 물들고 있어. ▲ 테러에 갇힌 한국인 그런데 카페를 공격했던 팀이 이동한 장소가 심상치가 않아. 두 명의 테러범이 타지마할 호텔로 합류를 했어. 그렇게 이 호텔에 무려 네 명의 테러범이 있게 된 거야. 호텔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 일단 19층 연회장에 있던 대한 무역투자진흥공사 직원인 정현 씨는, 종이와 펜을 들고 한국인들 사이를 돌아다니고 있어. 연회장에 남은 한국인들의 이름과 인원을 파악하려는 거야. 연회장에 남은 인원은 21명. 이렇게 이름과 인원을 파악하는 이유는 뭘까? 만에 하나 잘못될 경우 명단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행사 참석자 명단을 보며 전화를 걸기 시작해. 먼저 연회장을 나간 사람들의 안위를 체크하려는 거야. 그런데 정현 씨는 유독 걱정되는 한국인이 따로 있었다고 해. 연락이 안 되는 분들이 좀 있었어요. 4명 정도가. 그분들 가신다고 할 때 1층 로비까지 제가 바래다 드리고, '앞으로 좀 잘 좀 부탁드립니다' 이런 얘기하고 저는 올라왔거든요. 로비에서 저는 올라오고 얼마 안 지나서 총소리 들리고 그런 일이 발생한 거죠. 그래서 그분들이 되게 걱정이 되더라고요. -김정현, 당시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직원 처음에 테러범이 공격을 시작한 곳이 어디라고 했지? 맞아, 로비야. 바로 그 로비에 한국인 4명이 더 있었던 거야. 정현 씨는 그들 중 한 명에게 전화를 걸어. 불안한 마음에 손이 떨려와. 다행히 전화가 연결됐어. 저 대한무역공사 직원입니다. 지금 어디세요? 호텔, 나가셨죠? 저 아직 호텔이에요. 지금 구관 커피숍에 있어요. 괜찮으신 거예요? 거기 몇 분 계세요? 지금 저까지 총 4명 숨어있어요. 그리고 테러범들이 지금 이곳에 있어요. 당시 상황을 직접 들어볼게. 그러니까 행사 끝나고 저도 숙소가 있는 푸네로 돌아가야 하는데, 4명이 '그럼 커피 한 잔 마시고 가자', '바다를 바라보면서 커피 한잔 마시고 올라갑시다' 하고 저희는 커피숍으로 갔던 거죠. -현대식, 당시 차량부품 업체 법인장 현대식 씨를 포함한 한국인 4명은 여기, 구관 커피숍에 있어. 이들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신 그 순간, 커피숍 유리문이 와장창 박살나고, 총알들이 날아와서 커피숍 벽에 빠바박 박혔대. 사람들은 커피숍에 있는 대형 기둥 뒤로 모두 엎드렸어. 순간 쥐죽은 듯한 정적이 흐르고, 여러 명의 발소리가 들려. 테러범들이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가려는 것 같아. 그러자 한국인 4명이 기둥 뒤에서 슬며시 나와서 문쪽으로 향했어. 커피숍 문이 휑하잖아요. 누군가라도 들어오면 안되니까. 우리가 거기 엎드린 상태로 '저 문 저렇게 뚫려 있는데, 저거 어떻게든 막아야 되는 거 아니야? 바리케이드 쳐야 되는 거 아니야?' 의자하고 탁자를 날라서 거기다 바리케이드를 쌓았어요. 일단은 그냥 무단으로 들어오지는 못하게. 만약에 (그때 테러범이) 내려온다면 만날 수 있었죠. -현대식, 당시 차량부품 업체 법인장 지금 내 눈에 테러범이 보이지 않는 거지, 그 앞에 나갔다가 어디서 어떤 총알이 날아올지 누가 알아. 무섭지 않은 건 아니었대. 하지만 커피숍에는 자신들만 있는 게 아니었어. 현지인을 포함한 외국인들이 20명도 넘게 있었대. 어떻게든 이들의 안전을 위해서 움직인 거였어. 게다가 대식 씨가 한 일은 또 있어. 수첩과 펜을 들고,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해. 대식 씨는 총소리를 듣고 이걸 카운트했어. 3층에서 1층으로 쐈다, 뭐 몇 발 쐈다, 객실에서 쏘는 것 같은 총이 몇 발이라는 걸, 정확히는 아니지만 들리는 걸 짐작으로 계속 적었어요. 실탄을 구하는 게 쉬운 건 아니니까. 테러범들이 AK소총 갖고 왔으면, 30발이 든 탄창으로 서너 개, 너덧 개 정도 갖고 왔으면, 한 100발 정도면 어떤 결론이 나지 않겠냐, 끝나지 않겠냐, 그 생각으로 적고 있었죠. -현대식, 당시 차량부품 업체 법인장 하지만 이걸 기록하는 일은 굉장히 괴로웠다고 해. 이 총성들은, 사람을 쐈다는 의미잖아. 커피숍 위층으로 모두 객실층이야. 테러범들이 호텔의 객실을 돌아다니면서 무차별 살상을 벌이고 있다는 얘기야. 총성이 울릴 때마다 사람들의 비명소리도 함께 들려와. 당시 처참했던 광경이 CCTV에 고스란히 담겨있어. 이상한 소리에 복도로 나온 손님. 객실로 도망치듯 들어가지만, 이를 발견한 테러범들이 총을 마구 쐈고 결국 손님은 쓰러졌어. 이들은 객실을 돌아다니며 손님들을 사살했어. 테러범들의 잔혹함은 상상 이상이었어. 테러범들과 테러 지시자가 통화한 실제 음성이 있어. 그 내용이 뭔지 알려줄게. 테러 지시자: 그래, 해! 그들을 일으켜 세운 다음, 뒤통수에 총을 쏴! 실행해! 내가 다 듣고 있다고 해! 테러범: 외국인 3명을 붙잡았습니다. 그중에는 여성도 있습니다. 테러 지시자: 전부 죽여. 총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전화기를 끊지 말고 계속 켜둬. 테러 시작부터 이 지시자는 전화로 현장에 있는 테러범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던 거야. 그 내용은 한없이 잔인했고 그들의 행동은 조직적이고 치밀했어. 그렇게 현대식 씨가 있는 구관 커피숍 위 객실층에서는 간간이 총성과 비명소리가 계속되고 있어. 그런데 단발로 들려오던 총성이 갑자기 빗발치듯 들려와. 경찰이 온 거야. 경찰은 로비에서 위로, 테러범은 위층에서 아래로 총을 쏘고 있어. 그리고 그 사이에 대식 씨를 포함한 한국인 4명이 있어. 그런데 테러범들이 이번엔, 경찰을 향해 수류탄을 투척했어. 그 순간 대식 씨는 수첩에 열심히 적던 총소리 카운트를 그만뒀다고 해. 얘네들이 수류탄까지 갖고 있는 거 보면, 카운트하는 게 의미가 없다. 이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렇게 이제 직감을 했죠. -현대식, 당시 차량부품 업체 법인장 이제 뭄바이 경찰만으로는 테러를 진압할 수가 없는 상황이야. 그래서 인도 정부는 블랙캣을 출동시키기로 결정했어. 검은 복장에 검은 복면을 써서 블랙캣이라고 불리는 이 팀은, 정예 요원들로 구성된 대테러 부대야. 근데 문제가 있어. 이 부대가 인도의 수도 뉴델리 근처에 있다는 거야. 뉴델리와 뭄바이, 무려 1,400km가 떨어져 있어. 테러 진압에 곧바로 투입하는 건 어려운 상황이지. 이런 상황에서 호텔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 와사비 레스토랑에 있던 호텔 직원 차블라는 지금은 여기 없어. 지금 차블라는 손님들을 데리고 으슥한 복도를 걷고 있어. 이곳은 직원 전용 통로야. 호텔에는 손님이 주로 사용하는 복도도 있지만, 서비스를 위해 직원들만 다니는 전용 통로가 있거든. 이 통로를 통해 호텔에서 가장 은밀한 공간으로 이동 중이야. 어디로? 직접 들어볼게. 챔버스는 개인 회원제 클럽이기 때문에 누구나 출입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챔버스가 어디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았어요. 입구가 크거나 화려하지도 않아요. 문 위에 챔버스라고 크게 적혀 있지도 않아요. 그냥 돌아다니면서는 찾기 어렵습니다. -앙쿠르 차블라, 당시 타지마할 호텔 직원 호텔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공간, '더 챔버스'라는 곳으로 손님들을 이동시키고 있는 거야. 호텔의 구조를 잘 아는 직원들만 찾을 수 있는 곳, 바로 신관에 있어. 그렇게 호텔 내 가장 안전한 대피 장소로 200명이 넘는 손님이 모이게 돼. ▲ 악몽의 타지마할 호텔 그런데 여기서 좀 의문 들지 않아? 호텔의 구조를 가장 잘 아는 직원들은 테러범을 피해서 호텔을 빠져나갈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그러지 않았을까? 당시 호텔 총주방장이었던 헤먼트 오베로이 셰프가 그곳에서 가장 선임자였는데, 그분이 앞장서서 매니저들에게 상황을 설명했어요. -앙쿠르 차블라, 당시 타지마할 호텔 직원 뭄바이 테러를 모티브로 만든 영화 '호텔 뭄바이'(2018)에 이 이야기가 담겨 있어. 이 영화에서 호텔의 총주방장은 직원용 뒷계단은 안전하다. 하지만 손님들을 호텔에 갇혀 있다. 지금 떠나도 부끄러운 게 아니다 라고 직원들에게 말해. 그러자 한 직원은 전 35년 일했고, 여기가 제 집입니다 라며 호텔에 남겠다는 의지를 밝혀. 그러자 다른 직원들도 저도 남겠어요 라며 손님들을 두고 떠나지 않겠다고 해. (탈출을) 원했다면 가능했겠죠. 저희는 뒷길도 알고, 비상구 위치도 알고 있었으니까요. 누군가 정말 도망치고 싶었다면 뒤쪽으로 호텔을 빠져나갈 수 있었죠. 그리고 아무도 뭐라고 안 할 테니 자유롭게 나가도 좋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하지만 모두가 함께 남아 손님들을 최대한 돕고자 했던 것 같아요. 저희도 당시에 정말 죄송한 마음이었어요. 물론 저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지만요. 손님들이 그런 상황에 놓였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죄송했습니다. 그래서 손님들을 두고 떠난다는 생각은 아예 들지도 않았어요. -앙쿠르 차블라, 당시 타지마할 호텔 직원 레스토랑에 숨어있던 여행객 다라 황은 호텔 직원들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있다고 해. 두려움에 떨며 힘들어하는 손님들에게 직원들이 이걸 건넸대. 물수건이야. 머리에 얹을 수 있도록 차가운 물수건을 만들어준 거야. 이뿐만이 아니야. 갇혀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샌드위치를 만들어 손님들에게 건넸어. 그리고 손님들의 상태를 세심히 살피면서 걱정 마십시오. 다 괜찮을 겁니다 , 손님을 지키는 게 저희의 의무입니다 라는 말을 전해. 직원들은 정말 세심하게 저희를 돌봐줬어요. 그렇게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손님을 돌보는 게 정말 대단했어요. 누가 시켜서 한 게 아니었어요. 그냥 스스로 한 거예요. -다라 황, 여행객 차블라 또한 챔버스에서 손님들을 챙겼어. 손님들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아주 침착하게 말이야. 하지만 직원들만 있는 뒤편 공간에서는 몇 번이고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불안감을 삼켰다고 해. 이렇게 모두 구조를 기다리며 불안한 밤을 보내고 있어. 테러 발생 3시간째. 시간이 갈수록 테러범들의 행동은 극으로 치달아. 테러범과 테러 지시자가 아주 끔찍한 계획을 실행해 옮기려 해. 테러 지시자: (구관) 최상층 객실에 불을 질러라. 객실을 비운 뒤 불을 질러라. 영웅이여, 자네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거다. 모두 아래층으로 내려오게 만들어라. 아직 불을 지르지 않은 건가? 테러범: 네, 지금 실행중입니다. 곧 불이 난 걸 보게 될 겁니다. 테러 지시자: 좋다. 곧 불이 나는지 지켜보겠다. (신관) 19층에서 내려다보면 보이거든요. 불이 이렇게 나서 그걸 봤죠. -김정현, 당시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직원 실내에서 불길 소리가 들렸어요. 바람에 담요 펄럭이는 듯한 소리가 엄청 크게 들렸죠. 불에 타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그 호텔 안에 있었으니까요. -다라 황, 여행객 호텔 상황은 실시간으로 악화되고 있어. 테러범들이 방화를 하고 수류탄을 여기저기 투척하자, 폭발음과 함께 건물 전체가 진동해. 19층 연회장에 있던 정현 씨는 '9.11 테러 때처럼 건물이 무너지는 거 아니야?'라고 생각했대. 건물이 약간 진동이 있을 정도의 느낌이 있었고, 그래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실제로 미국에 9.11 테러가 지나고 나서 있었던 일이니까. 우리가 높은 곳에 있는데 불이나 폭탄이 터지는데, 무너지는 거 아닌가... -김정현, 당시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직원 한 객실 손님은 유서를 썼다고 해. 그리고 욕실에 들어가서 헤어캡을 가지고 나왔어. 만약 잘못된다면 가족에게 전해질 유서에 피가 묻지 않기를 바랐다는 거야. 그런데 21명의 한국인이 있는 신관 19층 연회장의 분위기가 지금 심상치가 않아. 다들 조용하지만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어. 소화기를 든 사람, 신을 벗고 맨발인 사람도 있어. 당시 정현 씨가 19층 연회장을 직접 촬영한 영상을 보여줄게. 회의를 하는 듯한 사람들의 모습. 탈출을 하려는 거야. 사실 이날 저 19층 연회장에는, 다른 곳에서 합류한 인원들이 있었어. 그중 좀 특수한 사람들이 있었던 거야. 바로 이 사람들. 기업인, 정치인, 셀럽, 국제 행사의 경호를 담당하는 전문 경호원이야. 이들은 인도에서 열리는 크리켓 대회 경호를 위해서 남아공에서 방문을 한 거였대. '꼬고무'가 취재할 때 이들에 대한 얘기가 참 많이 나왔거든. 경호팀이 탈출 과정에서 큰 활약을 했다는 거야. 경호를 담당하는, 덩치도 좋고 훈련된 사람들이었는데, 그 사람들하고 같이 회의도 하고 그랬는데. -강기택, 당시 주 뭄바이 총영사관 영사 참 다행이다 싶기도 한데요. 그분들이 경험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의지를 하게 되더라고요. -김정현, 당시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직원 '꼬꼬무'는 경호팀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싶었어. 그래서 수소문을 해서, 이들을 찾았어. 안녕하세요. 저는 페이즐 네이글입니다. 당시 저는 '챔피언스 리그 크리켓 토너먼트' 보안 총괄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게 저희가 하는 일의 본질입니다. 저희 일이 그런 거예요.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돕고 더 나은 결과를 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거죠. 다른 선택지는 없었어요. 오직 '모두 함께 이곳을 탈출한다'는 목표 뿐이었죠. 국적이 어디든, 누구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어요. -페이즐 네이글, 당시 인도 크리켓 대회 경호팀 그런데 테러범들이 장악한 호텔에서 어떻게 탈출하려는 걸까. 새로 합류한 사람까지 포함해서 연회장에 있는 인원은 무려 100명이 훌쩍 넘어. 이들은 모두 탈출할 수 있을까. 지금부터 생사를 넘나드는 숨 막히는 탈출 이야기가 펼쳐질 거야. ▲ 호텔 탈출 작전 경호팀은 연회장의 조명을 전부 낮추고, 사람들을 창과 문에서 떨어진 중앙으로 모이게 했어. 그리고 비상계단을 막고 엘리베이터를 통제했어. 일단 가장 먼저 해야할 건, 저희가 있는 19층으로 아무도 올라오지 못하게 막는 거였어요. 그 층 전체를 봉쇄해야 했죠. 가장 쉬운 방법은 비상계단을 막는 거였어요. 그래서 팀원 리건과 다른 동료 한 명이 가구로 계단 입구를 막았어요. 그리곤 저희가 타고 올라온 엘리베이터 2대를 통제하기 시작했는데, 엘리베이터 1대를 19층으로 부른 뒤, 내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엘리베이터 문 사이에 의자를 끼워서 내려가지 못하게 했어요. 그러면 엘리베이터 1대만 작동하게 되죠. 그렇게 되면, 그 1대의 층수를 보면서 외부인이 어디로 움직이는지 파악할 수 있게 돼요. 그렇게 팀원 2명을 거기에 배치했습니다. -페이즐 네이글, 당시 크리켓 대회 경호팀 이렇게 연회장을 최대한 안전하게 만들고 탈출 계획을 세워. 탈출로는 직원들이 주로 사용하는 비상계단.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소화기와 생수를 챙기고, 여자들은 안전을 위해 높은 구두를 벗게 해. 그러면 이제 그 비상계단으로 내려가기만 하면 될까? 혹시라도 계단에서 테러범을 만날 수도 있으니, 테러범들의 위치 확인, 탈출로의 안전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해. 경호팀과 한국인들은 정보 파악을 위해서 모든 채널을 총동원했어. 이때 여기저기 전화를 하던 강기택 영사에게 희소식이 전해졌어. 현재 테러범들은 구관 쪽에 있는 상황이야. 그때 공유 받았던 건, 구관과 신관을 잇는 연결 통로를 경찰이 장악했다는 거였거든요. 구관과 신관은 확실하게 경찰력으로 분리가 됐다. -강기택, 당시 주 뭄바이 총영사관 영사 곧바로 경호팀은 호텔 보안 책임자에게 연락해. 크리켓 선수들이 이 호텔을 숙소로 사용할 예정이어서 그전부터 호텔 보안팀과 소통을 해왔었거든. 호텔 보안 책임자에게 비상계단을 통해서 탈출을 하려고 하는데 인원이 많아서 안전한지 확인이 필요하다. 혹시 19층까지 좀 올라와 줄 수 있냐 고 요청했어. 수닐(보안 책임자)이 무사히 올라올 수 있다면, 반대로 저희가 아래로 내려갈 수 있다는 뜻이 되겠죠. -페이즐 네이글, 당시 크리켓 대회 경호팀 과연 보안 책임자는 무사히 올라왔을까? 5분, 10분, 시간이 흐리던 바로 그때. 가구로 막아놓았던 비상계단 문을 누군가 두드려. 호텔 보안 책임자야. 탈출 가능성에 청신호가 켜진 거지. 자, 이제 탈출 시작이야. 무려 100명이 넘는 대규모 인원이 움직이기 시작했어. 가장 마지막에 연회장 구석구석을 살피는 사람은 강기택 영사야. 사람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영사로서, 강영사는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후 연회장을 마지막으로 빠져나가. 구관과 신관 사이의 길목이 차단됐다고 하지만, 사태는 언제든 악화될 수 있어. 대규모 탈출이 들키는 순간 테러범들이 무리를 해서라도 신관으로 진입을 할 수가 있으니까. 강영사는 이런 생각을 했대. 누군가 죽어야 한다면 그건 나여야 한다… 그런데 그건 저만의 마음가짐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소방관이든 군인이든, 국민을 지키는 걸 소임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흔히들 하는 생각의 결이라고 저는 믿는 편입니다. -강기택, 당시 주 뭄바이 총영사관 영사 그런데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탈출하고 있는데,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아. 그날의 탈출 현장을 보여줄게. 차분하고 질서정연한 모습이야. 먼저 내려가겠다 빨리 좀 가라 재촉하는 모습이 전혀 없어. 한국, 인도, 미국, 프랑스, 태국 등 말은 잘 통하지 않아도 모두 한마음 한뜻이야. 최대한 조심해서 움직이자, 우리 모두 다 함께 꼭 살아남자… 그렇게 15층, 10층, 5층. 경호팀은 몇 층씩 미리 내려가 안전을 확인한 뒤 다시 올라와서 사람들을 인솔했어. 그리고 3층, 2층, 1층. 드디어 눈앞에 밖으로 나가는 문이 보여. 그런데, 바로 나갈 수는 없어. 또 다른 문제가 생겼어요. 밖으로 곧장 나갈 수 없었어요. 건물 안에는 테러로 인해 사람들이 갇혀 있었고, 건물 밖에서는 경찰과 군인이 테러범을 가려내려고 진을 치고 있었어요. 그래서 문을 열고 무작정 나갔다간 테러범으로 오인 사격 당할 수 있었거든요. -페이즐 네이글, 당시 크리켓 대회 경호팀 이들은 밖을 향해 하얀 손수건을 흔들었어. '항복하겠다, 시키는 대로 하겠다'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저희는 직원에게 흰 손수건을 주며 경찰과 군인에게 보여주라고 했어요. -페이즐 네이글, 당시 크리켓 대회 경호팀 그렇게 테러 발생 5시간 만에, 드디어 한 사람씩 호텔 밖에 땅을 밟게 돼. 호텔 밖으로 나온 그 순간 기분이 어땠을까?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죠. 새벽 공기, 시원한 공기… 안도감이 확 밀려오는 거죠. '살았다'라는 표현이 나오더라고요 입에서. -김정현, 당시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직원 모두에게 기쁨의 순간이었죠. 건물 안에 갇혀 있다가 밖으로 나오고 상황이 다 끝나니 비로소 자유를 느꼈고 정말 기뻤어요. 사람들이 무사히 살아 나가는 모습을 보니 행복하더군요. -페이즐 네이글, 당시 크리켓 대회 경호팀 극도의 긴장감으로 긴 시간을 보냈어. 이제 안전한 장소로, 혹은 걱정하는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가야겠지. 그런데 강 영사는 집으로 향하지 않고 계속 호텔 쪽을 주시하고 있어. 아직 현대식 씨를 포함한 한국인 4명이 저 호텔 안에 갇혀있잖아. 아직 그의 일은 끝나지 않은 거야. 그리고 19층 연회장 탈출 소식은, 신관 챔버스에 숨어있는 사람들에게도 전해졌어. 그리고 그들도 결정을 내렸어. 탈출하기로. 호텔 직원들이 사용하는 통로를 이용해서 빠져나갈 계획이야. 직원들은 손님을 복도 한쪽 벽에 바짝 붙여서 이동시켜. 그리고 직원들은 하나같이 서로의 팔짱을 낀 채 손님들 앞을 막아서. 손님 여러분 걱정 마십시오. 만약 총을 맞게 된다면 저희가 먼저 맞게 될 겁니다. 직원들이 손님들의 노출을 최대한 막기 위해 인간 방패가 된 거야. 호텔 직원 차블라는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고 해. 호텔 밖까지 한 차례 손님들을 데려다 준 직원이 다시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었어. 그렇게 챔버스에 있는 사람들 중 거의 절반이 무사히 빠져나갔을 무렵, 총소리가 들려. 테러범들이 챔버스에 나타났어. 챔버스는 이 호텔에서 가장 비밀스럽고 안전한 공간이잖아. 그런데 어떻게 이곳에 테러범들이 나타난 걸까? 여기엔 말도 안되는 뒷이야기가 있어. 지금 이 챔버스라는 곳에 사람들이 대피해 있어요. 여기 기업인, 장관, 200~300명이 여기 있습니다. 챔버스에 있던 한 정치인이 전화로 뉴스 생중계 인터뷰를 한 거야. 그 후 어떻게 됐을까? 테러 지시자: 호텔에 3명의 장관과 사무총장 1명이 있다. 테러범: 그거 아주 잘된 일이군요. 금상첨화네요. 그렇게 직원 통로까지 찾아낸 테러범들이 신관으로 넘어와 챔버스에 나타난 거야. 총성이 들리자마자 호텔 직원들은 탈출 중인 사람들을 다시 챔버스에 몰아넣고, 손님들에게 문을 잠그라고 했어. 그리고 직원들은 다른 방향으로 뛰기 시작해. 테러범들의 시선을 분산시키려고. 테러범들은 호텔 직원들을 따라오면서 총을 쏴대. 안타깝게도 이 과정에서 7명의 호텔 직원이 목숨을 잃었다고 해. 솔직히 말하면 정말 슬펐습니다. 아무런 잘못이 없는 사람들이잖아요.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죽은 직원들은 불과 5분 전까지만 해도 저희와 함께 서 있던 분들이었어요. -앙쿠르 차블라, 당시 타지마할 호텔 직원 수많은 사람들의 생사가 오가는 가운데 테러 발생 7시간이 지나고 있어. 한국인들 뿐 아니라 커피숍 안에 사람들 모두 지친 기색이 완연해. 그런데 그 순간 창 밖으로 철커덕 하는 소리가 들려. 뭔가 밖에서 걸쳐지는 느낌이 있어서 봤더니, 어떤 남자 얼굴이 쓱 나타나. 소방관이야. 소방차 사다리가 거기 걸쳐져 있고 소방관이 한 명 올라오더라고요. '이제는 살았다. 이제는 끝났다' 이런 생각을 했죠. -현대식, 당시 차량부품 업체 법인장 이제 탈출이야. 대식 씨를 비롯한 한국인들이 가장 먼저 창가에 도착했어. 그리고 손을 내밀어. 누구에게? 사다리차를 타려는 사람들에게. 한국인들은 커피숍 손님이 모두 내려갈 때까지 그대로 도왔다고 해. 그렇게 한국인들은 제일 마지막으로 커피숍을 빠져나와. 호텔에 갇혀있던 한국인들이 모두 무사히 탈출을 한 거야. 그리고 지금 호텔 앞에서 이들의 탈출 소식을 누구보다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지. 호텔 밖에 서 있던 강기택 영사는 그제야 자리를 떴어. 강영사는 바로 총영사관으로 향했어. 왜냐하면 테러 자체가 아직 다 끝난 건 아니잖아. 당시 뭄바이에는 300명이 넘는 교민이 있었어. 교민들의 안전을 끝까지 확인하려고 한 거야. ▲ 뭄바이 테러가 남긴 것 총성이 멈추지 않은 채 다음날 아침이 밝았어. 그리고 이제야 대테러 부대 블랙캣의 진압이 시작돼. 호텔에 갇혀있던 직원 차블라와 여행객 다라 황은 아침이 돼서야 무사히 구출이 됐어. 하지만 참극은 쉽게 끝나지 않았어. 도심 곳곳에 테러 진압이 최종 완료된 건, 무려 60시간이 지난 후였어. 이번 테러로 170여 명이 사망하고 300명이 넘는 부상자가 발생했어. 테러범 10명 중 9명은 사살이 됐고 1명은 체포가 됐어. 체포된 테러범의 나이는 21살이었어. 그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해. 그들이 돈을 줄 거라고 했어요. 그럼 저는 더 이상 가난하지 않을 수 있었어요. 저는 돈을 벌 수 있다면 뭐든지 괜찮다고 대답했어요. 어떤 이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사람들을 죽였어. 하지만 또 다른 이들은, 아무 이유 없이 사람들을 돕고 살리기 위해 애썼어. '누군가 죽어야 한다면 그건 나여야 한다'는 강기택 영사. 그게 제 일이니까.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들 그런 다짐을 하면서 자기 맡은 일을 하고 있지 않을까. -강기택, 당시 주 뭄바이 총영사관 영사 다른 사람의 안위를 백방으로 챙긴 김정현 씨. 애써 태연한 척 했던 것 같아요. 그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염려하는 연락을 줄 때 '괜찮았다, 아무 일 없었다' 다 똑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김정현, 당시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직원 탈출의 순간에도 다른 사람들을 먼저 배려했던 현대식 씨. 우리 생각에는 '죽을 때 죽더라도 이렇게 하는 게 그냥 상식이다', '기본적으로 해야 되는 거다'. -현대식, 당시 차량부품 업체 법인장 게다가 마음만 먹으면 호텔을 빠져나갈 수 있었지만 손님들과 함께 남는 것을 택한 호텔 직원들. 그리고 우리가 기억하는 또 한 사람이 있지. 페이즐을 비롯한 경호팀. '꼬꼬무'가 그에게 작은 선물을 전달했어. 바로, 신관 19층 생존자 김정현 씨의 영상 편지야. 이 영상을 보고 페이즐 씨는 크게 감동하며 눈물을 보였어.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나서서 도와줬던 그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 덕분에 저희들이 한명도 다치지 않고 무사히 나올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진심으로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김정현, 당시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직원 굉장하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날 밤 그 자리에 있었던 분을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되니 정말 좋네요. 그날 당시에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한 채 오직 훈련받은 대로 행동했어요. 그런데 지금 이렇게 생존자분 얼굴을 직접 보고 목소리를 들으니 이제야 실감이 나네요. 이렇게 직접 보니까 감정이 북받쳐 오르네요. 여러분이 저희를 믿어주지 않았다면 결코 해낼 수 없었을 겁니다. 저희와 함께 하나의 팀으로 함께 해준 모든 분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페이즐 네이글, 당시 크리켓 대회 경호팀 페이블 씨에게 '그날 밤으로 돌아간다면, 같은 선택을 할 거냐'라고 물었어. 그러자 그는 이렇게 답했어. 다시 돌아가도 똑같이 할 겁니다. 하지만 더 빠르게 할 거예요. 더 빨리 구출해서 사람들이 되도록 스트레스 덜 받게 할 거예요. 돌아가도 저는 똑같은 선택을 할 겁니다. -페이즐 네이글, 당시 크리켓 대회 경호팀 페이즐은 테러가 있는 날 이런 감정을 느꼈다고 해. 저에게 그날 밤은, 생명의 존엄함,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대와 협력의 중요성 그 자체였습니다. 분쟁과 갈등이 끊이지 않고 하루가 멀다 하고 극단적인 사건이 벌어지는 지금. 우리가 이런 소중한 가치들에 대해서 한 번쯤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
[꼬꼬무 찐리뷰] 수학여행 간 중학생 46명 사망 참사…어른들의 안전 불감증이 부른 비극 [꼬꼬무</font> 찐리뷰] 수학여행 간 중학생 46명 사망 참사…어른들의 안전 불감증이 부른 비극 등록일2026.10.05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1일 방송된 '악몽의 수학여행'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개그우먼 겸 배우 정이랑, 가수 볼빨간사춘기 안지영, 그룹 원어스 멤버 건희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추억의 수학여행 때는 1970년 10월 14일 아침. 서울 마포에 있는 경서중학교. 조회 시간 종소리가 울릴 즈음, 학교 운동장에 버스들이 줄지어 들어서. 왜냐. 이날은 바로 3학년 학생들의 수학여행 날이었거든. 경서중학교의 수학여행 일정은 원래 2박 3일이었어. 그런데 당시엔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수학여행비를 못 내는 친구들이 많이 있었대. 결국 당일치기 일정으로 변경됐지만, 16살 어린 나이에 떠나는 친구들과의 생애 첫 수학여행이잖아. 얼마나 설레고 신났겠어. 그중에도 4반, 종철이는 특히 더 신이 나있어. 엄마가 주신 특별 도시락과 용돈, 그리고 수학여행을 위해서 특별히 준비한 희귀 아이템까지 챙겨왔거든. 그게 뭐였을까? 종철이에게 직접 들어볼게. 경서중학교 3학년 4반에 있었던 최종철입니다. 학교에서 버스 대절해서 간 소풍, 그때는 수학여행이라고 그랬는데. 그건 처음이었고요. 먼 길 간다고 하니까 부모님이 용돈도 두둑하게 주셨고. 특히 어디서 빌려온 걸로 알고 있는데, 카메라를 빌려주셨고. 그때 당시에는 카메라를 쉽게 접하는 것이 아니었고. 친구들이랑 같이 가는 여행이었기 때문에, 그날이 저한테는 아주 대단한, 특별한 날이었단 말입니다. -최종철,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4반 그때만 해도 이런 카메라는 정말 귀한 물건이었어. 종철이는 아버지가 빌려준 새 카메라를 목에 걸고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버스에 올라. 경서중학교 3학년 학생들의 수학여행지는 바로 당시 최고의 핫플레이스, 바로 충남 아산에 있는 현충사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성역화 사업을 통해 의리의리하게 단장했어. 게다가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고 3개월밖에 되지 않았을 때야.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를 달려 멋지게 단장한 현충사를 보며 애국심을 고취하는 게, 당시 최고의 수학여행 코스였어. 이게 그날 찍은 사진들이야. 친구들이랑 계속 웃고 있는 표정이 얼마나 즐거웠는지가 보이지. 학생들은 현충사 참배를 마치고 근처에 있는 신정호수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 그리고 오후 4시, 어느새 돌아갈 시간이야. 학생들은 앞다퉈 버스로 달려가기 시작했어. 늦게 타면 서울까지 계속 서서 가야 했거든. 종철이 역시 타고 왔던 3호차에 오르자마자, 재빨리 찜해둔 자리에 앉았어. 종철이는 운전석 바로 옆, 엔진룸 위 쪽에 앉았어. 옛날 버스는 이렇게 엔진룸이 툭 튀어나와 있었어. 보통은 짐을 올려놓거나 하는데, 자리가 없을 땐 앉기도 했어. 다른 아이들이 일반 좌석으로 몰리는 사이, 종철이는 엔진룸 위에 자리를 잡은 거야. 순식간에 아이들로 가득 찬 버스는 곧바로 출발했어. 얼마나 갔을까? 종철이는 곧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어. 엔진룸 위에 앉아 있으니까 엉덩이가 따뜻해서 스르르 잠이 온 거야. 그런데 그때! 잠에서 깬 종철이는 주위를 살피고는 깜짝 놀랐어. 생각지도 못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거든. (눈을 떠)보니까… 여하튼 피를 많이 흘렸고요. 병원에서 깨어났어요. 한 이틀 정도 뒤에 깨어났다고 했으니까요. 그리고 그때 신문도 보여주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아… 사고가 났었구나…' -최종철,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4반 눈을 떴을 땐 을지로에 있는 한 병원이었대. 그제야 몸을 살펴보니까 온몸이 만신창이더래. 얼굴은 상처투성이에 오른쪽 다리는 뼈가 다 부서졌어. 그리고 왼쪽 다리는 뼈가 보일 만큼 살이 파여서 출혈이 엄청났다고 해.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지금까지도) 사고 난 것 자체를 전혀 기억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냥 자다가 기절해 버린 게 아닌가 추측건대. -최종철,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4반 ▲ 의문의 사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 종철이가 탔던 그 3호차 버스가 가장 먼저 출발을 했어. 당시 상황을 기억한다는 다른 반 친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봤어. 저는 박상준이고요. 3학년 7반이었습니다. 두 번째 차로 우리가 가는데, 안 보였어요 앞차가. 아예. 그리고 한 10분 정도 우리가 탄 차가 서 있었어요. 차들이 막혀서 서 있으니까 서 있던 거죠. '왜 안 가지?' 하는데 옆에 어떤 아주머니 두 분이 가다가 창문을 막 두드리는 거예요. 그리고 '(앞에) 학생들 학교 차 같은데 사고 났어! 사고 났어!'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몇 명인지 몰라도 후다닥 뛰어내려서 계속 뛰었어요. 우리 학교 차가 사고 났다고 하니까. 이제 급한 마음에 선생님도 나가고 막 애들이 쫓아 나간 거죠. -박상준,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7반 그때 한 학생이 찍은 사진이 있거든. 바로 이 사진이야. 까만 연기가 막 피어 오르지. 상준이는 연기가 피어 오르는 곳을 향해 정신없이 뛰었어. 시야를 가로막은 언덕을 넘으니까 그제야 충격적인 광경이 눈에 들어왔어. 앞서 가던 3호차, 종철이가 타고 있던 버스가 불길을 휩싸여 있는 거야. 상준이는 정신없이 버스를 향해 달려갔어. 우리가 접근하기가 힘들었어요. 불이 붙은 게, 어디 한 군데 붙은 게 아니라, 전체가 다 붙은 거예요. 버스가 하도 활활 타오르니까 불길이 유리창으로 나오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진짜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어요. 발을 동동 구르면서 보고 있던 거죠. 난 그 광경이 진짜 안 잊혀져요. 불길, 유리창 안으로 보이는 게… 하얀 머리들 몇 개가 보이는 거예요. 애들이 뭉쳐서 (쓰러져) 있는데. 그게 죽어도 안 잊혀요. 왜 이게 하얄까, 까매야 되는데... -박상준,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7반 처참한 광경 앞에서 멍하니 서 있는 아이들 중에는 학생회장 태선이도 있었어. 1970년 경서중학교 사고 당시 학생회장이었던 최태선입니다. 소방대원일 수도 있고 의용소방대원일 수도 있고 주민일 수도 있는데, 딱 막더라고요. 그리고 버스에 물을 뿌리고 있는 거예요. 제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실상 상황 종료. 그리고 연기가 나고 사랑하는 친구가… 이렇게 (쓰러져) 있더라고요. 여기에(머리쪽) 물을 맞으면서… 제가 그거 보면서 엄청 울었어요. 너무나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체를 모르겠더라고요. -최태선, 당시 경서중학교 학생회장 불타는 버스 안에 남겨져 있는 친구들을 보면서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는 거야. 불길에 휩싸인 3호차 버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당시 촬영된 사진을 보여줄게. 불타고 있는 버스 옆으로 선로와 기차가 보이지. 앞서 가던 3호차 버스가 기차와 충돌한 거야. 어쩌다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사고 차량에 타고 있던 학생들은 알고 있겠지. 하지만 종철이는 사고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래서 버스에 타고 있던 다른 생존자를 찾아봤거든. 다행히 사고 순간을 기억하고 있는 몇몇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어. 그 내용을 바탕으로 사고의 순간을 재구성해 볼게. ▲ 사고의 재구성 사고 당일 오후 4시. 신정호수에서 자유시간이 막 끝났을 때야. 선생님이 각자 타고 온 버스로 돌아가라는 말에, 3학년 4반 용섭이는 바로 버스로 달려가. 올 때 서서 왔더니 너무 힘들었거든. 갈 때는 꼭 앉아서 가고 싶었던 거야. 3호차에 오른 용섭이는 운전석 옆 엔진룸 위에 자리를 잡아. 맞아. 바로 종철이 옆에 앉은 거야. 잠시 후 버스가 시동을 걸고 출발을 했어. 옆에서 꾸벅꾸벅 조는 종철이와 달리, 용섭이는 버스 앞 풍경을 감상하며 가고 있었어. 오후 4시 20분. 천안 방향으로 가던 버스 앞에 철길 건널목이 나타나. 그리고 용섭이의 귀에 소리가 들려와. '땡땡땡땡' 건널목 경보기 소리야. 이 소리를 들었다면 운전자는 멈추는 게 맞잖아? 그런데 3호차 기사는 브레이크 대신 엑셀을 밟았대. 그러니까 앞차를 따라서 빨리 건널목을 통과하려고 했던 거야. 버스가 건널목에 들어서는 그때, 용섭이 눈에 뭔가가 들어와. 아저씨 기차가 와요!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어. 기차는 버스의 왼쪽 가운데 부분을 들이받았어. 용섭이는 엄청난 충격과 함께 버스 앞 유리를 깨고 튕겨나갔어. 그리고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대. 기차는 V자 모양으로 휘어진 버스를 80m 정도 더 밀고 간 후에야 멈춰서. 안에 있던 학생들은 모두 정신을 잃었어. 그런데 그때,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고 말아. 버스에 있는 연료통이 폭발한 거야. 불길은 엔진이 있는 앞쪽에서 시작되더니 삽시간에 버스 뒤쪽을 향해 번지기 시작해. 그때였어. 맨 뒷자리에 앉아있던 학생 하나가 정신을 차렸어. 3학년 3반 54번 김현철이었어요. 얼마 동안 기절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눈을 떴을 때는 벌써 차 안이 연기와 불로 차 있었고. 애들은 다 이렇게 쓰러지고, 이렇게 고개 숙이고. 이런 애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본능적으로 여기를 빠져나가야 되겠다고 생각해서. 옆 창문을 발로 깨고 버스에서 뛰어내려서 보니까. 거기서 (정신이 들어) 고개를 쳐들고 사방을 훑어본 애는 나처럼 뛰어나와서 살았는데, 그냥 거기서 고개 숙이고 있던 애들은 다 거기서 그 화마에 그냥 휩싸일 수 밖에 없죠. 14일이 있을 수밖에 없죠. 대형사고구나 이거는. 정말 큰 사고구나.. -김현철, 경서중학교 버스 참사 생존자 정신을 차린 현철이는 가까스로 탈출했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러지 못했어. 그런데 그 순간, 인근 주민들이 뛰어오기 시작해. 주변에 있는 돌로 유리창을 깨고 안간힘을 쓰며 학생들을 꺼내려고 하는데 쉽지가 않아. 바로 이것 때문이었어. 이 사진은 현충사에서 출발하기 전에 찍은 사진이야. 왜 구조가 어려웠는지 알겠어? 유리창 옆에 쇠파이프 같은게 지나갔어요. 그게 없었으면 더 많은 학생이 빠져나올 수도 있었는데. -김현철, 경서중학교 버스 참사 생존자 게다가 차체는 심하게 찌그러진 상태야. 그러니 구조가 얼마나 힘들었겠어. 주민들이 최선을 다해 몇몇 학생을 끄집어냈지만, 이내 버스 전체가 불길에 휩싸여. 결국 구조를 포기한 채 지켜볼 수밖에 없었대. 당시 현장에 있던 주민의 목격담이야. 바람에 날리는 불덩이처럼 버스가 불에 싸여 기관차에 밀려갔다. 버스 네번째 창가에 앉아있던 한 학생이 온몸에 불투성이가 된 채 '아저씨 나 살려달라'고 외마디 소리를 쳐 유리창을 깨고 그 학생을 구출하려 했으나, 끝내 몸이 밖으로 빠지지 않아 그대로 숨졌다. 그날의 참혹했던 현장을 직접 목격한 주민의 이야기도 들어볼게. 소리는 '쾅!' 소리 났죠. 그러니까 이 주변에 살던 사람들은 많이 나왔죠. 처음에는 불빛이 확 있었어. 그런데 불과 그게 한 30분도 안 돼서 다 타버리더라고. 완전히 싹 타더라고. 마음이 참담했죠. 진짜... 사람이 불에 탔으니까 막… 처참하게 그을려서 그냥 볼 수가 없었죠. 내가 그 당시에 한 18세 됐어요. 나도 어린 나이고 같은 비슷한 나이인데 진짜 마음이 안 좋았죠. -고광재, 사고 당시 목격자 이후 마을 의용소방대와 소방대까지 진화에 나섰고, 불길은 50분 만에 잡히긴 했어. 하지만 눈앞에 드러난 광경에 사람들은 할 말을 잃고 말아.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수학여행의 추억을 가득 싣고 올라오던 버스는 처참히 구겨져 있어. 그리고 그 안에는 새카맣게 타버린 시신들이 가득해. 사람들이 한 구 한 구 버스 밖으로 시신을 옮기는데, 끝나질 않아. 부상자 32명, 그리고 사망자는 45명. 버스 운전기사까지 총 46명이 현장에서 사망했어. 그렇게 경서중학교 수학여행 버스 사고는, 해방 이후 가장 참혹한 버스 참사로 기록이 됐어.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지. ▲ 참혹한 버스 참사 그러면 버스 안에서 가장 많은 사망자가 나왔던 곳은 어디였을까? 기차가 충돌한 버스 중간 좌석 쪽에 앉아있던 학생들은 대부분 살아남지를 못했다고 해. 그런데 버스 중간에 앉았던 아이들 중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학생이 하나 있어. 부상자 중 가장 상태가 심각했다는 그 학생을, 친구들은 아직도 기억해. 박민택이라고 있거든요. 내가 밥을 많이 뺏어 먹었어요 그 친구. 그때는 도시락을 난로에 쫙 쌓아 놓잖아요. 그때 중3 때 엄청들 먹으니까… 미안하죠 지금. 걔네 엄마가 새벽밥 지어서 먹으라고 자기 새끼 만들어 준 걸 엉뚱한 놈이 먹었으니 미안하죠. 특히 걔는 살아남았는데 화상을 제일 많이 입었어요. 그래서 제일 많이 마음이 지금도 많이 아프죠. -김현철,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3반 민택이 걔가 얼굴도 잘생겼거든요. 그랬는데 얼굴이 화상 입고 그래서, 마음이 좀 안 좋았죠. -최종철,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4반 3학년 4반 박민택. 민택이는 사실 너도 아는 얼굴이야. 처음에 봤던 이 사진 속 이 친구가 바로 민택이야. 수학여행 날 아침, 기차를 타고 통학하던 민택이는 학교에 가기 위해서 역에 도착을 했대. 그런데 함께 통학하는 친구 중 한 명이 나타나지 않는 거야. 바로 수학여행비를 내지 못한 친구였어. 민택이와 친구들은 등교도 미룬 채 그 친구의 집으로 우르르 몰려갔대. 야 중학교 시절 한 번뿐인 수학여행인데 같이 가자 친구를 설득한 끝에 민택이와 동네 친구들은 함께 수학여행 길에 오르게 돼. 수학여행 가는 그 버스 안에서도 민택이는 그 친구와 나란히 앉았대. 바로 3호차 중간 자리에. 버스가 불길을 휩싸였을 때 민택이는 구조됐지만, 그 친구는 결국 빠져나오지 못했어. 민택이는 목숨을 건졌지만, 사고 직후 사경을 헤매고 있었어. 얼굴과 머리 등 양팔과 손까지 심한 화상을 입은 상태야. 난생 처음 가본 그 수학여행에서 환하게 웃는 얼굴로 사진을 찍은 지, 불과 몇 시간 후의 일이었어. 그날 저녁, 사고 차량을 제외한 버스들은 다시 서울로 출발해. 버스 안은 그야말로 초상집이야. 올라올 때 분위기는 완전히 참담했죠. 중3이면 어린애잖아요. 다들 울고… 너무나도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정신이 나갔어요. -최태선, 당시 경서중학교 학생회장 서울로 올라오는 내내 라디오에서는 버스 사고에 대한 보도가 흘러나왔어. 뉴스에서는 병원에 실려간 30여 명의 생존자 이름을 쭉 말했어. 이게 어떤 상황이냐면, 수학여행을 떠난 470여 명의 학생 중에 30여 명의 부상자만 생존자로 방송이 된 거야. 이름이 불리지 않았던 그 400여 명의 나머지 학생들, 그 부모들은 기절 초풍할 일이야. 그게 아주 저는 제일… 버스 타고 오면서도 마음에 안 들더라고요. 우리 어머니는 제가 수학여행을 갔는데, 이 뉴스를 들으면 생존자 명단에 내가 없는 거예요. 죽었나 살았나 몰라요. -박상준,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7반 결국 경서중학교 교무실로 학부모들의 전화가 빗발쳐. 방송이 불러온 여파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어. 서울에 올라왔을 때 마포 종점 그쪽에서부터 학부모들이 난리가 아니었어요. 모든 학부모들이 다 나와 있으니까. 그러니까 완전히 아수라장이었죠. -박상준,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7반 그날 밤 10시 30분경 버스가 학교에 거의 도착했을 때였어. 학교 운동장은 물론 교문 밖 도로까지 수많은 인파로 가득 차 있어. 사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부모와 형제들, 거기에 취재진과 경찰들까지. 당시 기사에 따르면 무려 3천 명이 넘었대. 버스가 도착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버스를 향해 모여들기 시작해. 버스는 할 수 없이 옆 학교 운동장으로 핸들을 돌려. 하지만 부모들은 버스를 에워싼 채,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옆 학교까지 따라와. 아들이 무사하다는 걸 확인한 부모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려. 하지만 아들을 찾지 못한 부모는 어땠을까. '철수야', '아무개야', '어디 있냐 어디 있냐' 그러니까 (자식을 찾아서) 기뻐서 우는 사람. 자기 자식이 안 와서 슬퍼서 우는 학부형. 그게 막 혼재돼서, 이산가족 찾기의 한 10배쯤 된다고 봐야 할까요. -최태선, 당시 경서중학교 학생회장 난리가 아니었어요 그냥. 엄마들은 이름 부르고 다니는 거야 내 아들 이름을. 전부 다. 누가 살았는지 모르니까.저 같은 경우도 어머니가 오셨더라고요. 막 밖에서 '상준아 상준아' 부르면서 울면서 다녀요. 근데 자식이 산 엄마들은 괜찮은데, 죽은 아이들 엄마는… 그건 생각하기가 싫어요. -박상준,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7반 아들을 만나지 못한 부모들은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어. 뭔가 착오가 있을 거다, 우리 아들은 살아있을 거라 믿었어. 그런데 잠시 후에 누군가 운동장 한쪽에 이걸 갖다 놨어. 칠판 가운데 그어진 선을 기준으로 왼쪽은 사망자, 오른쪽에는 부상자. 생과 사를 나누는 무정한 칠판 앞에 결국 희망의 끈은 끊어지고 말아. 사망자 중에는 4대 독자도 있었어.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 돈을 벌며 힘겹게 동생을 뒷바라지해온 누나의 통곡 소리도 들려. 중학교 3학년, 불과 16살이야. 이 어린 생명들이 한순간에 쓰러지고 말았어. 대체 왜 이렇게 피해가 컸던 걸까? 경찰은 참사의 원인이 무엇인지 조사에 나서. 이제부터 드러난 사실들을 이야기해줄게. ▲ 참사의 이유 먼저 사고 버스를 보여줄게. 당시 사고가 났던 버스는 일본과의 기술 제휴를 통해 만들어진 버스였어. 이 버스의 정원은 39명. 아까 사고 당시 생존자 32명, 사망자는 45명이라고 했지? 사고 차량에는 77명의 학생들이 탑승했었어. 이건 뭐 지금 기준으로는 말이 안 되는 상황이지. 하지만 1970년대 당시에는 이게 일반적인 상황이었대. 통상 그 당시에는 모든 버스들이 그렇게 다 타고 다니고, 아침에 출근할 때는 그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타니까. 그렇게 탔었고. -최종철,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4반 돈이 없어서 못 가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줄여 줄여'한 게 버스 수도 줄이고 그랬을 거예요. 그래서 7대가 간 거죠. -박상준,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7반 총 9개 반이 수학여행을 가는데 버스는 7대를 불렀다고 해. 473명의 학생, 그리고 11명의 선생님. 총 484명이 이 7대의 버스에 나눠 탔던 거야. 계산해 보면 한 대에 약 70명 정도 탄 셈이야. 그런데 하필 사고가 났던 3호차에 특히 더 많은 77명의 학생이 탔던 거지. 3호차 버스에 3반이랑 4반 애들이 많이 탔어요. 3학년 3반 애들은 다 타고, 4반 애들이 한 15명, 20명 가까이 타서 그 버스에 7, 80명이 탔던 것 같아요. -김현철,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3반 그래서 사고가 난 버스 단 한 대에서 40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왔던 거야. 그런데 조사 결과, 또 다른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났어. 학생들을 인솔하고 안전을 책임지는 사람, 선생님이잖아. 그런데 알고 보니 사고 버스에는 선생님이 탑승하지 않았던 거야. 어떻게 버스에 애들만 태우고 출발하냐, 직무유기 아니냐, 여기저기서 교사들이 관리 감독에 소홀했다며 질타했어. 당시에 보도된 기사 내용이 있어. 학생들이 바깥 풍경에 취해 '즐거운 우리 캠프' 등 노래를 한창 신나게 부르고 있을 때, 운전사가 너무 시끄럽다고 고함을 지르며 뒤를 돌아보는 순간, '꽝' 하는 소리와 함께 차와 사람들이 함께 공중 분해됐다. -당시 보도 中 사람들은 어린 학생들이 시끄럽게 떠들었고, 이를 제지할 선생님이 버스 안에 없었다는 걸 사고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목했어. 그런데 취재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어. 56년 만에 처음 공개되는 이야기야. 이 얘기는 꼭 해야 돼요. 학생들이 다 나눠 타고 이제 선생님들이 버스에 올라 타야 되잖아요 인솔 교사들이. 그런데 그 차를 탈 때, 출발하기 전에 안 온 아이들이 있었어요. -박상준,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7반 '회장 다 왔니?' 그래서 '아니요, 두 명이 안 왔습니다' 인원 파악을 했는데 두 명이 안 온 거예요. 그래서 그 두 명 본 사람 없냐고 하니까, '아까 저수지에서 배 타는 거 봤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저수지로 한 200여 미터 정도 되는데 막 뛰어갔어요. 제가 '아무개야!' 막 불렀죠. '빨리 와! 다 탔어! 기다리고 있어!' 그랬더니 '알았어' 그러면서 그 친구들이 막 노를 저어서 오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다시 허겁지겁 뛰어 올라가서 선생님한테 '쟤네 이제 여기 타면 끝입니다' 딱 하는데, 버스 한 대가 갑자기 떠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3반하고 4반 탄 차가 떠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선생님들이 '저 차 왜 떠나지?' -최태선, 당시 경서중학교 학생회장 그래서 선생님들이 3호차에 못 타고, 거기서 이제 뒤죽박죽이 돼버린 거죠. -박상준,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7반 그 당시 뭐 전화기가 있습니까 무전기가 있습니까. 연락할 방법이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다른 선생님들도 '우리도 빨리 타고 갑시다' 이렇게 된 거예요. 그게 그 출발 당시까지의 정확한 팩트입니다. -최태선, 당시 경서중학교 학생회장 3호차 버스가 갑자기 출발하면서, 선생님이 안 탄 게 아니라 못 탄 거였다는 거야. 그리고 아까 내용 중에 학생들이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고 했잖아? 사고 버스에 타고 있던 학생의 말에 따르면, 기사에 나온 '즐거운 우리 캠프'라는 노래는 들어본 적도 없대. '시끄러웠었었다'라는 이런 부분들이 그냥 입담으로 하는 소리지, 사실과는 다른 얘기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통상적으로 애들이 조잘조잘하는 이런 정도. 우리 일반적으로 교실에서도 그렇잖아요. 시끌벅적하잖아요 노는 시간에. 그 정도 수준이지, 더 이상의 정도는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최종철, 경서중학교 버스 참사 생존자 그냥 친구와 잡담 정도 나누거나 잠을 자는 분위기였다는 거야. 그런데 당시 기사 중, 선생님들에 관한 더 충격적인 내용도 있었어. 사고 버스 700m나 뒤떨어져 온 맨 마지막 버스에 탔던 교사들은, 사고로 버스에 불이 나는 것을 보고 마을 건너 불 구경하듯 뒷짐만 지고 있었으며, 버스가 완전히 불길에 싸여 구조작업이 어렵게 되자, 교사들은 주민들의 눈매와 눈초리가 무서워, 사고 현장 인근 중학교 교무실로 피신했다. -당시 보도 중 '꼬꼬무'가 만난 학생들은 56년이 지난 지금이라도 이 부분에 대한 진실을 꼭 밝히고 싶다고 말했어. 기사들 나온 거 보니까 '선생님들이 동네 사람들 무서워서 학교로 도망갔다' 이렇게 나오더라고요. 그건 완전 잘못된 거고. -박상준,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7반 선생님들이 무책임하거나 그런 분들이 아니었어요. 굉장히 훌륭하신 분들이었기 때문에, '도망을 갔다' 이거는 아니에요. 그 부분은 좀 명예회복이 돼야죠. -최태선, 당시 경서중학교 학생회장 하지만 사고 직후 경서중학교 교장, 교감, 피해가 집중된 3학년 3반, 4반 담임교사는 파면되고 말았어. 또 수학여행에 동행됐던 교사 8명은 직위해제돼.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 학생들은 이 사고의 근본적 원인은, 선생님들의 잘못이 아니라 버스기사의 무단 출발 때문이었다고 하나같이 얘기하고 있어. 버스가 임의대로 출발하는 걸 무슨 재간으로 막습니까. -최태선, 당시 경서중학교 학생회장 진짜 선생님 타실 때까지만 기다렸어도, 사고가 안 났다고요. 근데 그런 얘기는 어떤 매스컴을 찾아도 없어요. -박상준,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7반 그리고 버스기사, 잘못한 게 또 하나 있어. 버스기사는 철길 건널목 앞에서 정지신호를 무시하고 엑셀을 밟았잖아.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다름아닌 사고 현장에 있었어. 서울에서 장항으로 가는 단선 철도와 온양에서 천안으로 향하는 도로가 교차하는 곳이야. 사고 직전 3호차 버스는 천안 방향으로, 그리고 기차는 온양 방향으로 가던 중이었어. 그때 경보기 소리가 기차가 오고 있다는 걸 알려. 하지만 버스기사는 멈추지 않고 오히려 더 빨리 건널목을 지나가려고 엑셀을 밟았지. 조사 결과, 현장에 있던 건물들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한 걸로 보인대. 철길 건널목 바로 앞, 불과 2, 3m 거리에 2층짜리 정미소 건물이 있었어. 게다가 그 옆으로도 철길을 따라 민가 여러 채가 늘어서 있었고. 기차가 이렇게 옵니다. 근데 코너에 방앗간이 있어요. 높은 방앗간. 그 방앗간 건물 때문에 기차가 오는 게 안 보입니다. -최태선, 당시 경서중학교 학생회장 원래는 철길 건널목 주변에는 시야를 가리는 건물이 있어서는 안 돼. 하지만 당시 철도청은 건설부와 협의가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미소를 방치했던 거야. 결국 버스기사는 경보기 소리에도 기차가 보이지 않자, 빠르게 건널목을 건너려고 했던 걸로 보여. 또 하나 사고를 불러온 결정적인 이유가 있어. 건널목이라면 꼭 있어야 할 그것, 차단기. 철길 건널목에는 등급이 나뉘어 있어. 먼저 1종 건널목에는 경보기와 차단기. 그리고 24시간 차량을 통제하는 관리원이 배치돼. 그 다음 2종 건널목에는 1종 건널목과 동일하지만, 관리원이 주간에만 배치되게 돼 있어. 그리고 3종 건널목에는 관리원이 아예 없고, 차단기도 없어. 기차가 오는 걸 알려주는 경보기만 있는 거야. 이 사고가 일어난 건널목은 3종 건널목이야. 현충사 성역화가 끝나자,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폭발적으로 증가해. 이 건널목을 지나는 차들이 하루에 5천 대가 넘었대. 그런데 교통량에 비해 건널목 등급이 너무 낮잖아. 등급을 상향시켜달라고 전부터 요청했지만 철도청은 받아들이지 않았어. 예산이 부족해서 안 된대. '재난은 몰래 오지 않는다'는 말이 있어. 대형 사고가 발생하기 전 반드시 수많은 작은 사고들과 징후가 있다는 뜻이야. 이 건널목에서도 여러 차례 사고가 있었지만, 아무런 조치도 이뤄지지 않았어. 만약 시야를 가리는 정미소 건물을 정리했다면, 그리고 건널목의 등급을 조정해서 차단기가 설치가 됐었다면. 그래도 사고가 일어났을까? 이 모든 조치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해도, 건널목 앞 '일단 멈춤'이라는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안전수칙만 지켰다면. 이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결국 각기 다른 어른들의 사정으로 안전을 소홀히 한 결과, 45명의 어린 생명들이 희생된 거야. '운전기사로서 자기가 지켜야 될 의무', '철도청에서 지켜야 될 의무', 그것만 지켰어도 사고 같은 건 충분히 안 일어날 수 있는 확률이 거의 99%가 아니겠나. 이런 생각이 들어요. -김현철, 경서중학교 버스 참사 생존자 ▲ 돌아온 아이들 사고 다음날 새벽, 경서중학교 운동장으로 구급차들이 줄지어 들어서. 그리고 45개의 목관을 내리기 시작해. 수학여행을 떠났던 학생들이 학교로 돌아온 거야. 싸늘한 주검이 된 채로. 아이들이 꿈을 그리던 미술실이, 노래소리가 들려오던 음악실이, 임시 안치소가 됐어. 시신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부모들이 안치소로 달려와. 안 된다고 막아도 막무가내야. 나는 내 아들 얼굴 보기 전엔 못 믿습니다! 왜 못 보게 합니까!! 학교 측은 어쩔 수 없이 안치소 문을 열어줬어. 그리고 시신을 확인한 부모들은 충격과 당혹감에 말문이 막혀. 16년을 키운 내 자식인데 도무지 알아볼 수가 없었거든. 훼손된 시신을 보고 졸도하는 부모님도 많았다고 해. 한 어머니는 손에 바나나를 들고 아들을 애타게 찾고 있어. 네가 그렇게 사달라고 조르던 바나나 엄마가 사왔다. 바나나 먹고 싶다며… 어디 있니? 그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고 해. 오후 1시경, 안치소 문을 열고 들어서는 사람이 있었어. 지금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파견된 인물이야. 경서중학교 수학여행 사고 시신의 개인 식별을 담당한 김종렬입니다. 시신의 손괴 상태가 상당히 심하기 때문에 개인 식별을 가족이라 하더라도 보고 몰라요. 누군지 알 수가 없죠. 얼굴이 타서 시커멓고 숯덩어리가 되니까. 얼굴 윤곽이나 이런 것이 없죠. -김종열, 당시 국과수 소속 시신 식별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어. 첫 번째 유전자 감식. 그런데 이때가 70년대, 유전자 감식 기술이 자리 잡기 전이야. 두 번째 방법, 지문 감식. 하지만 시신들의 상태가 지문 감식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마지막 식별 방법, 바로 치아 감식. 치열의 구조와 치료 흔적 등을 대조해서 사망자의 신원을 확인하는 거지. 이런 걸 '법치의학'이라고 해. 국과수에서 파견된 김종열 교수는 우리나라 제1호 법치의학자야. 김 교수는 조심스럽게 시신을 확인하기 시작해. 다른 현장에 비해 특별히 까다로운 부분이 있었거든. 시신을 식별할 때 가장 기본적인 구분 방법은 성별과 나이라고 해. 그런데 지금 사망한 시신들, 모두 성별이 같고 나이도 같잖아. '남녀, 나이' 이것이 개인 식별의 기본적인 구별 방법 중 하나인데, 이 경우는 그것이 다 동일하기 때문에, 난이도에 있어서 어떤 면에서는 어렵죠. -김종열, 당시 국과수 법치의학자 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었어. 바로 학생들의 건강 기록부야. 거기엔 아이들의 키와 체중은 물론 구강검사 기록까지 나와 있잖아. 김 교수는 그 내용을 대조하며, 피해자의 신원을 한 명씩 확인해 갔어. 그런데 그때, 당신 이거 엉터리로 하는 거 아니야? 이게 어떻게 내 동생이냐고! 하며 항의하는 사람이 있었어. 죽은 아이의 형이 나에게 항의를 했어요. '자기 동생은 목걸이를 한 적이 없는데, 식별한 이 시신에 목걸이가 있다' 이거예요. '당신이 지금 감정을 엉터리로 하는 게 아니냐' (그 말처럼) 잘못됐다고 그러면 이건 큰일이거든요. 그게 틀리면, 그건 다 틀린 거예요. 한 명이 꼬이면, 한 명이 꼬인 게 아니라 다 꼬인 거지. 그런데 제가 침착하게 다시 보니까, 그 목걸이의 펜던트를 뒤집어 보니까, 관광지 기념품이야. 그 학생이 관광지에서 기념품을 사서 목에 건 거였죠. 그러니까 그 자리에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잘못하면 아주 봉변당할 뻔했어요. -김종열, 당시 국과수 법치의학자 김 교수는 아찔한 위기를 무사히 넘기고 45명의 아이들을 부모의 품으로 모두 돌려보냈어. 아들의 시신을 확인한 그 부모님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시신이 확인이 안 돼도 고통스럽고, 확인이 돼도 고통스러운 그 마음. 사고 이틀 후 경서중학교에서는 45명의 합동 장례식이 거행돼. 그리고 이건 그날 찍은 사진들이야. 당시 학생회장이었던 태선이가 친구들을 대표해서 조사를 낭독했어. 이제는 두 번 다시 불러보지 못할 이름들이여. 벗님들께서는 이미 가셨지만, 벗님들의 얼은 이 교정에 있습니다. 귓전에 메아리치는 벗님들의 노랫소리, 눈앞에 아른거리는 벗님들의 다정한 얼굴.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잊지 않겠습니다. 부디 명복을 누리시길… 그건 뭐 비통한 마음이죠. 비통하고 슬프고. 제대로 읽지도 못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울었어요. -최태선, 당시 경서중학교 학생회장 태선이는 조사를 읽는 동안 특히 더 감정이 북받쳐 올라와. 왜냐하면 부상자 중 가장 친한 친구가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거든. 그때 저하고 아주 친했던 친구 병국이가 생존해 있었습니다. 16일에 장례가 치러졌고, 그날 오후인지 기억은 정확하지 않은데, 중환자실에서 (산소호흡기를) 꽂고 있을 때 가서 봤습니다. 중환자실에 들어가니까 침상에 누워있는데, 온몸이 새파랗게 멍이 들었더라고요. '희망이 없는 것 같다' 이런 절망감이 드는 거 있잖아요. '병국아 일어나, 일어나야지' 이런 식의 얘기를 제가 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하고 그 다음날 학교로 왔는데, 이제 병국이가 죽었다 하더라고요. -최태선, 당시 경서중학교 학생회장 부상자 명단에 있던 병국이의 이름은 사망자 명단에 새로 적히게 돼. 결국 경서중학교 학생 사망자 수는 총 46명이 된 거지. 이들은 경기도 김포에 있는 한 공원 묘지에 함께 묻혔어. 학생들은 묘역에서 이별의 노래를 부르며 친구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어. 참사 5일 후, 다시 수업이 재개된 3학년 3반의 모습이야. 교실 한 편의 빈 책상들. 그 빈자리는 채울 수 없는 구멍으로 아이들의 가슴에 남았어. 3학년 3반에 가면 애들이 다 죽었으니까. 죽은 애들 책상은 다 비어있잖아요. 그 책상이. -김현철,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3반 졸업할 때까지 계속 그랬을 거예요. 그게 난 제일 가슴 아프더라고요. -박상준,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7반 이듬해 1월, 경서중학교 3학년 학생들의 졸업식이 치러져. 그리고 이걸 받아. 경서중학교 20회 졸업 앨범. 다행히도 이 앨범엔 모든 친구들의 얼굴이 담길 수 있었어. 참사가 있기 전 미리 졸업사진을 찍어놨거든. 참사로 희생된 아이들 3반 31명, 그리고 4반 15명. 이들이 실린 페이지에는 이렇게 적혀있어. '사라진 별들' 이라고. ▲ 사라진 아이 그런데 참사 이후 생존자 중에 사라진 아이가 한 명 더 있어. 너도 아는 아이야. 맞아. 민택이. 아주 심하게 다친 애들은 메디컬 센터로 갔어요. 박민택 같은 애, 수술해야 되고 이런 사람들. 여기 있네요 박민택. 공부 잘했어요. 그때 헤어지고는 못 봤는데. -김현철,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3반 사고 당시에 가장 큰 화상을 입었던 친구, 3학년 4반 박민택. 민택이는 병원에 실려간 이후 소식이 뚝 끊겼다고 해. 말 그대로 사라져버린 거야. 혹시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다가 사망한 병국이처럼 변고가 생긴 건 아닐까? 그런데 몇 년이 지난 후 민택이를 봤다는 사람이 나타났어. 한 1976~77년 정도? 그 정도였던 것 같은데. 우리 할머니가 파주 문산에 계셨으니까. 그래서 걔가 문산에서 다녔던 게 기억이 났죠. 그래서 그 동네 친구들하고 어울리면서 '여기 내 중학교 동창이 있다'라고 하니까, 그 동네에서는 서로 다 알더라고요. 그래서 연락이 돼서, 만나서 잠깐 얘기했었던 것 같습니다. -최종철,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4반 20대 초반이 돼서야 다시 만나게 된 두 친구. 하지만 반가움도 잠시, 종철이는 민택이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고 해. 민택이의 모습은 많이 달라져 있었어. 화상 때문에 얼굴에 붕대를 감은 채 나타났거든. 당시 얼굴에 화상을 입고 붕대 같은 걸 감고 있으니까, 마음이 좀 안 좋았죠. 민택이랑은 그때 만나고는 전혀 연락이 안 닿습니다. -최종철,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4반 두 사람은 짧은 만남 이후 다시 연락이 끊기고 말았어. 그때 만남이 사고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 된 거야. 그렇게 또 5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민택이를 본 친구는 한 명도 없었어. 당연히 동기들 모임도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해. 왜일까? 친구들은 '어쩌면 화상 때문에 변한 자기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가 아닐까' 생각했어. 수학여행 참사를 겪은 지 올해로 56년. 그 시절 까까머리 친구들은 어느새 70살이 넘어버렸어. 친구들은 여전히 민택이의 소식을 궁금해하고 있어. 더 늦기 전에, 친구들의 바람이 이루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꼬꼬무'가 그를 직접 찾아보기로 했어. 과연 민택이를 찾았을까? 55년생이니까, 올해 일흔 하나 됐죠. 이름은 박민택입니다. 교우 관계는 다 좋았죠. 다 좋았는데 같이 놀고 그랬던 친구들 이름도 생각 안나고 얼굴도 생각 안 나요. 제가 볼 때는 사고를 당했을 때 모든 걸 잊어버린 게 많은 것 같아요. 그때는 참… 뭐 어떤 특별한 심정 그런 거를 갖지도 못한 나이예요. 살아가면서 참 여러 가지를 느꼈죠. 자꾸 움츠러들고 뭐 그렇게 살았죠. 제가 하고 싶은 일을 못하니까요. 왼쪽 손은 신경이 다 훼손돼서, 지금도 안 펴지는 상태죠. 제 자신을 꾹꾹 누르고 살다시피 했다고 보면 돼요. 그런 거예요. -박민택, 경서중학교 버스 참사 생존자 사고 직후 그는 어떤 생활을 했기에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던 걸까. 참사 이후 두 달 정도 지났을 무렵 민택이의 기사가 실린 적이 있어. 좌측 손의 동맥, 다리, 척추, 왼쪽 다리가 모두 화상을 입은 채 기능이 마비된 경서중 3학년 4반 박민택 군은 두 번이나 피부 이식 수술을 했으나 완치되지 못했는데, 이제 더 떼어 옮길 살갗조차 없는 형편. -당시 보도된 기사 중 계속 엎드려 있었어요. 한 4개월을 꼼짝 못하고 엎드려 있었죠. 그 화상 치료를 하느라고. 그때만 해도 화상 치료를 어떤 식으로 했냐면, 터널 같은 걸 만들어 놓고 화상 부위에 거즈를 붙여 식염수를 뿌려줬어요. 그 다음에 하루에 한 번인가 이틀에 한 번씩, 농 같은 게 끼면 그거 긁어내고. 진짜 끔찍해요. 이 생살을 후벼파는 정도. 그때만 해도 제가 피부 이식 수술을 받는 날은, 생일 같았어요. 피부 이식 수술을 하면 붕대로 감아놓고 한 일주일 정도는 치료를 안 하거든요. 치료를 안 하니까, 수술 받는다 그러면 더 좋아했어요. 그러다가 이제 4개월 동안 꼼짝 못하고 있다가 일어나니까, 팔다리가 다 굳고 고개는 이렇게 옆으로 돌아가 있어서. 그러다가 물리치료 한 2개월 하고서는 퇴원을 했죠. -박민택, 경서중학교 버스 참사 생존자 참사의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서 희미해져 갔지만 민택 씨의 아픔은 가시지 않았어. 병원 치료 후에도 꽤 오랜 기간 그는 화상 자국을 가리기 위해 붕대를 감고 살았다고 해. 어머니는 매일 아침 붕대를 새로 갈아주며 아들의 화상 자국을 마주해야 했어. 꿈 많았던 소년은 많은 걸 포기하고 살아야 했어. 그런 민택 씨가 아버지가 된 후, 깨달은 게 있대. 하고 싶은 일을 한 번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꾹꾹 참고 살았죠. 아들을 둘 낳았지만, 같이 데리고 목욕탕도 못 가봤으니까요. 부모가 되고 나서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 부모들은 얼마나 속상했겠습니까. 하나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희생된 46명, 거기에 딸린 가족들. 그 모두가 참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박민택, 경서중학교 버스 참사 생존자 그 날에 참사가 낳은 희생자는 46명의 사망자가 아닌, 마흔 여섯 가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해. 힘겨운 시간을 살아온 민택 씨. 그럼에도 그 고통을 같은 아픔이 있는 친구들과는 나누려고 하질 않았어. 그리움은 있죠. 항상 친했던 친구들에 대해서 그리움은 있죠. 제가 (동참 모임에) 참석을 안 하고 있습니다. 다치지만 않았으면 참석을 했겠죠. 동창회 가는 건 그렇습니다. -박민택, 경서중학교 버스 참사 생존자 친구들을 보고 싶었지만 볼 수 없었다는 민택 씨의 마음. (민택이를) 만나고 싶은 생각이야 있죠. 어디 사냐, 식구들 어떻게 되냐, 우리 통상 그런 얘기 나누고… -최종철, 경서중학교 버스 참사 생존자 (민택이) 얘가 제일… 한 60년을 제일 힘들게 살았을 거예요. 이 친구가. 특별히 할 말은 없어요. 그냥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김현철, 경서중학교 버스 참사 생존자 '꼬꼬무'가 동창생들의 마음을 대신 전해줬어. 민택 씨를 다시 만나기를 바라는 친구들이 있다는 걸. 민택 씨는 친구들의 마음을 받아들였을까? ▲ 친구를 그리며 그로부터 얼마 후, 경서중학교 동기들의 모임이 있었어. 그날, 친구들의 마음을 전달 받은 민택 씨가 용기를 냈어. 50여 년 만에 친구들을 마주한 민택 씨. 드디어 친구의 생사를 확인한 친구들은 감격했어. 어떻게 사는지,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웠어. 종철 씨를 제외하고는 다들 민택 씨를 무려 56년 만에 처음 만나는 거야. 처음엔 살짝 어색했지만, 엊그제 만난 친구들처럼 자연스러웠어. 많이 늦었지만 민택 씨와 친구들의 작은 동창회가 이루어졌어. 이제는 민택 씨한테도 추억을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이 생겼어. 반가운 만남을 가진 이들에게는 보고 싶은 또 다른 친구들이 있어. 바로 묘역에 묻혀있는 친구들. 대부분은 가족들에 의해서 이장이 됐고, 지금은 11분만 남아계시다고 해. 동기들은 민택 씨와 함께 그들을 만나러 갔어. 여름내 자란 잡초로 가득한 묘역. 동창들은 56년 전 떠난 친구들의 묘를 정성껏 정리했어. 그리고 먼저 떠난 친구들에게 오랜만의 인사를 건넸어. 현재 무연고자일 수도 있는 11명의 친구들. 아마 무연고라고 봐야 돼요. 아무도 오질 않으니까요. 부모님은 돌아가셨을 거고, 형제 자매들이 있어도 여기까지 신경 못 쓰죠. 그 유족들도 이제 나이가 거의 70대가 다 됐을 테니까. 너희들 버려졌다고 슬퍼하지 마라. 너희들 기억하는 우리 친구들이 있고, 앞으로도 몇 년이 더 지속될지 모르겠지만. 계속 와서 우리 친구들을 덜 외롭게 할 거야. 잘 있어라. 우리 10월에 또 올 거야. 그래 볼 날이 얼마 안 남았다. 매년 10월이 되면 동창들은 묘역을 찾아서 친구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고 해. 56년이 지났지만 세상을 떠난 친구들을 챙겨주는 이들의 우정. 친구들은 서로를 잊지 않기 위해 수학여행의 그날처럼 사진을 남기기로 했어. 지금부터라도 이들의 학창 시절이 고통스러운 기억이 아닌 소중한 추억으로 남길 바라며,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야. 사고 당시에 마포구에 있다가 지금 강서구로 이전한 경서중학교는 학생수 부족으로 내년 3월에는 폐교가 된다고 해. 학교가 사라지면 자연스레 이날의 비극을 기억하는 사람도 줄어들겠지. 더욱 많은 사람이 이 기억을 이어갔으면 하는 마음에, 오늘의 이야기를 해봤어. 그런데 방송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사고 당사자들 외에도 그날의 참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어. 전혀 의외의 사람들이야. 1971년 사고가 일어난 곳에 위령비가 세워졌어. 충남 아산시 배방읍 청년들은, 참사가 일어났던 10월 14일이 되면 매년 그곳에서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고 해. 이건 누군가가 알아주지 않으면 금방 잊혀져요. '이 사건이 만약에 나에게, 우리 가족에게 일어난 일이라면 어땠을까?' '누군가가 이걸 기억해준다고 하면 얼마나 고마울까' 이 제를 지내면서 우리 배방 주민분들 뿐만 아니라, 전국에 있는 분들께 안전에 대한 경각심을 다시 한 번 세워주고 싶었습니다. -정광재, 배방청년회 회장 경서중학교 버스 참사 이후로도 우리 사회는 어린아이들과 학생들이 희생되는 대형 참사를 겪어왔어. 그때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을 반복해왔던 것 같아. 어른들의 잘못으로 아이들이 희생되는 비극, 이제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아야 돼. 그러기 위해선 절대 무너지지 않는 튼튼한 외양간을 지어야 하지 않을까.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
[꼬꼬무 찐리뷰] 회원 1천만 명 몰렸던 '프리챌'의 몰락…CEO 전제완은 왜 펜션 청소부가 됐나 [꼬꼬무</font> 찐리뷰] 회원 1천만 명 몰렸던 '프리챌'의 몰락…CEO 전제완은 왜 펜션 청소부가 됐나 등록일2026.09.18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17일 방송된 '응답하라, 자유와 도전!'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H.O.T. 토니안, 배우 한소은, 개그우먼 김효진이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사랑은 인터넷을 타고 때는 2003년 2월 23일. 부천에 사는 22살 이시언 씨는 늦은 오후 신촌 번화가를 걷고 있었어. 몇 주째 이날 만에 손꼽아 기다려온 시언 씨는 평소보다 헤어스타일도 신경쓰고 가장 멋진 옷으로 깔끔하게 차려입었어. 어딘가 모르게 긴장한 모습이야. 지금 시언 씨 뭘 하러 가는 걸까? 화려한 간판 시끌벅적한 거리를 지나 발걸음을 멈춘 곳은 한 2층짜리 술집. 계단을 올라 2층에 다다르자 한 2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쫙 모여있어. 시언 씨, 우물쭈물 다가가서 인사를 해. 그러자 너나 할 것 없이 시언 씨를 반갑게 맞이하는데, 시언 씨는 어쩔 줄 몰라 해. 왜냐? 이 사람들 오늘 처음 본 사람들이거든. 정신 차릴 새도 없이 시언 씨 손에는 술잔이 들려있어. 그때 누군가 이제 다들 모인 것 같은데 슬슬 시작해야지 라고 말해. 그리고 어디선가 케이크가 나오고, 생일 축하곡을 다같이 불러.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쌍둥이~ 생일 축하합니다~ 얘들아, 우리 모두 생일 축하한다! 아니, 스무 명이 모였는데 쌍둥이? 이게 무슨 상황이야? 여기 모인 스무 명, 그리고 시연 씨까지 전부 다 오늘이 생일이야. 게다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스물 두 살 동갑이야. 1982년 2월 23일 생인 사람들이 한 곳에 모인 거지. 그때는 쌍둥이라고 얘기를 많이 했어요. 82년 2월 23일 생인 친구들. 말 그대로 쌍둥이들. 재밌었던 게 서울에만 국한되지 않고 부산에 있는 친구, 창녕에 있는 친구, 구미에 있는 친구. 다양하게 각지에 있었던 것 같아요. -이시언, 820223 쌍둥이 모임 회원 생년월일이 같은 사람들이 전국에서 무려 스무 명이나 모였어. 이 사람들 대체 어떻게 만나게 된 걸까? 시언 씨가 쌍둥이들을 어떻게 찾았는지 알려줄게. 추억의 컴퓨터. 바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알게 된 거야. 시언 씨는 컴퓨터를 하다가 우연히 이 커뮤니티를 발견했어. 커뮤니티 이름은 '82년 2월 23일 태어난 쌍둥이'. 회원 수가 무려 200명이야. 수줍음 많은 시언 씨는 한참 온라인 상에서 대화만 나누다가, 22살 생일날 용기를 내서 처음 모임에 나갔어. 난생 처음 만난 사람들인데도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금세 친해졌대. 한참 재밌게 놀고 있는데, 건너편에 앉은 한 여성에게 자꾸 눈길이 가. 이름은 박상미. 나이는 똑같이 22살. 상미 씨는 이 모임에 참석하려고 경북 구미에서 새벽부터 올라온 열혈 멤버야. 동그란 얼굴에 긴 곱슬머리가 너무 귀엽고 성격도 아주 발랄하더래. 완전 이상형이었던 거야. 상미 씨에게 첫눈에 반한 시언 씨. 그 뒤로 모임에 꼬박꼬박 참석하며 적극적으로 구애를 하기 시작해. 오직 그녀를 보러 부천에서 구미까지 서슴없이 달려가. 그냥 좋았어요. 그 친구 딱 보는 순간. '이 친구가 있으면 계속 평생 즐겁게 살겠다' 마음에 딱 들어서요. 적극적으로 왔다 갔다… -이시언, 820223 쌍둥이 이 둘은 과연 어떻게 됐을까? 두 사람은 결국 결혼에 골인했어. 저희 2003년도에 만나서 연애하고 그리고 결혼해서 지금까지 23년 살고 있습니다. -아내 박상미 말 그대로 운명 같아요. 제 인생에 어떻게 보면 신기함을 갖고 살고 호기심이란 걸 갖고 살고, 그걸 아이들한테도 얘기를 많이 해요. 운명은 언제든 겪어볼 수 있는 일이다. -남편 이시언 항상 사람들 만나면 자랑하죠. 우리는 자랑거리예요. -이시언-박상미 부부 소중한 쌍둥이 친구들과 지금의 아내까지 커뮤니티에서 만나게 된 거야. 시언 씨에게 온라인 커뮤니티란 어떤 존재인 것 같아? 이제는 사실 우리 모두 인터넷이랑 때려야 뗄 수 없는 삶을 살고 있잖아. 불과 30년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어. ▲ 응답하라 PC통신 지금은 90년대 후반. 서울의 용산 전자상가야.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한 미국인이 소리치고 있어. 이 그래픽카드를 컴퓨터에 넣으세요. 신세계가 펼쳐질 겁니다! 전자상가 곳곳을 누비면서 영업을 펼치는 이 사람. 너도 아는 사람일 거야. 바로 세계 최대 기업 엔비디아의 젠슨 황이야. 그런데 왜 미국인인 젠슨황이 용산에서 컴퓨터 부품을 팔고 있는 걸까? 이 모든 건 편지 한 통에서 시작됐어. To. 젠슨 황. 제게는 한국을 위한 비전이 있습니다. 정말 놀라운 비전입니다. 저는 한국의 모든 국민을 초고속 인터넷으로 연결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모두가 초고속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젠슨황.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From. 이건희. 저는 누군지 몰랐던 이로부터 그 편지를 받았습니다. 아주 아름답게 적힌 글이었습니다. 편지에는 '나에게는 비전이 있습니다'라고 적혀있었습니다. '한국을 위한 비전이 있습니다'라고요. -젠슨 황, 엔비디아 CEO 우리 아버님 이건희 회장님이 보내신 편지였어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이건희 회장의 편지에 감명 받은 젠슨 황이 직접 한국을 찾아왔던 거야. 젠슨 황은 한국에서 아주 특이한 풍경을 하나 보고는, IT 산업의 미래를 꿈꾸기 시작해. 바로 한국만의 PC방 문화. 세계적으로 독특한 PC방 문화가 시작된 게, 90년대 후반이야. 당시 유행하던 게 두 가지가 있어. 하나는 스타크래프트 게임, 그리고 하나는 이거야. 이건 컴퓨터를 온라인에 연결하는 모뎀이야. 이것을 컴퓨터에 연결하면, 파란 바탕에 하얀 글씨가 뜨는 화면이 나와. 바로 PC통신이야. PC통신은 전국의 모든 곳에서 온라인으로 대화를 할 수 있게 연결해주는 서비스야. 휴대전화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 사람들은 PC통신에 푹 빠져 살았어. PC통신에 접속하면 모르는 사람과 채팅으로 얘기를 나눌 수 있거든. 이걸 소재로 만들어 대박난 영화가 배우 한석규와 전도연 주연의 '접속'.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과 교감을 나누고, 내가 쓴 글이 전국에 퍼져 인기를 끌고. 이게 얼마나 신기하고 재밌는 일이었는지. 하지만 큰 문제가 하나 있었어. 이번 달 전화비가 왜 이렇게 많이 나왔어? 너 컴퓨터 작작하라 그랬지 아빠가! PC 통신은 전화선을 통해 온라인으로 연결되는 방식이었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썼다간, 전화 요금 폭탄을 맞는 거야. 또 다른 문제는 전화와 PC 통신을 동시에 사용할 수 없었어. 누군가 통화하는 동안에는 PC 통신에 아예 접속이 안돼. 마음대로 컴퓨터를 사용할 수 없던 시절이었지. ▲ 닷컴 열풍의 시작 그러던 1998년. 우리나라에 초고속 인터넷 시대가 열려. 집집마다 초고속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온라인 세상도 달라졌어. 파란 바탕에 흰 글씨 뿐이던 화면에 이런 알록달록한 웹사이트들이 펼쳐진 거야. 당시에 초고속 인터넷이 뜨면서 같이 떠오른 키워드가 있거든. 바로 '벤처'. 지금으로 치면 스타트업 같은 거야. 너도 나도 인터넷 사이트를 만들겠다고 창업에 뛰어들면서, IT 벤처 기업들이 우후죽순 생겨난 거지. 이른바, '닷컴 열풍'이 불기 시작한 거야. 당시 인터넷 사이트 주소를 '.com' 형태로 짓는 게 유행하면서 생겨난 말이야. 근데 그 열기가 얼마나 대단했냐면, 지금 주식시장에서 반도체 기업들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지? 그때 닷컴 기업들이 그 정도였어. 웹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세상이 열렸고 다음, 한메일, 그리고 네이버. 정말 다양한 기업들이 그때 당시에 회사를 창업했던 것 같아요. 대기업에 다니던 훌륭한 인재들이 새로운 사업을 하려고 했던 그런 가능성도 엄청 넘쳐나던 시기였죠. -김지현, IT 전문가·테크 라이터 코스닥 시장이 사상 최대의 호황을 맞고 있습니다. 연속 16일째 상승이라는 진기록을 수립한 것입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 수상한 회사와 천재 CEO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999년. 25살의 대학생, 최소현 씨는 졸업을 앞두고 있었어. 졸업 직전 대학생의 제일 큰 고민은 취업이지만, 소현 씨는 그런 걱정이 없었어. 일단 학벌이 좋아. 서울대 산업디자인과생이야. 게다가 이미 입사하기로 한 회사가 있어. 그때나 지금이나 평생 직장이라 불리는 대기업, 삼성에 철석 붙은 상태야. 미래가 창창해 보이지. 그러던 어느 날, 평소 친하게 지내던 후배에게 전화가 왔어. 후배는 얼마 전에 새로 생긴 한 IT 벤처 회사에 들어갔는데, 이 회사의 명함을 만들어야 해서 산업디자인과생인 소현 씨한테 도와달라고 부탁한 거야. 소현 씨는 흔쾌히 일을 도와주기로 했어. 그런데 회사 이름을 듣고는 고개를 갸웃해. 회사 이름이 뭔가 이상하거든. 당시 상황을 소현 씨한테 직접 들어볼게. 당시는 일단은 굉장히 다양한 IT 기업들이 막 올라오기 시작했었을 때라, 이미 이런 회사들이 많이 생기고 있구나라는 트렌드는 알고 있었을 때고. 다만 비단 명함 정도밖에 안 만드는 거지만, 이 회사 이름은 왜 '자유와 도전'인가. 굉장히 단순하구나... 처음엔 조금 촌스럽기도 하고 유치하기도 하고. 자유와 도전이 뭐예요… -최소현, 현 네이버 디자인부문장 자유와 도전. 어떤 회사 같아? 소현 씨가 후배한테 너네 회사는 뭘 하는 회사야? 라고 물었어. 그랬더니 후배가 이렇게 말해. 아, 그거는 지금부터 생각을 해봐야 돼요. 이게 무슨 소리야? 황당하지? 그런데 소현 씨는 이때까지만 해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대. 그런데 며칠 뒤 그 후배가 또 연락을 해와. 일을 도와줘서 고맙다고 회사 대표가 한 번 만나자고 했다는 거야. 며칠 뒤에 소현 씨는 이 자유와 도전이라는 회사로 향했어. 서초에 있는 작은 빌딩 안에 사무실이 있어. 문을 열어보니까 크기도 작고 직원도 몇 명 없어. 한쪽에 있는 회의실로 들어갔더니 의자에 한 남자가 앉아있어. 바로 이 사람이야. 자유와 도전의 대표이사 이름은 전제완. 근데 이 사람 이력이 장난 아니야. 서울대 경영학과에 삼성물산 출신이야. 근데 삼성물산에 근무하던 시절 엄청 유명하던 사람이었대.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사건이 하나 있었거든. 때는 1988년. 당시 삼성 이건희 회장이 엄명을 내려. 우리 회사에 왜 젊은 피, 젊은 인재가 없어? 훌륭한 인재들을 좀 데리고 와봐 라고. 그때 삼성 인사팀으로 발령받은 사람이 바로 전제완이었어. 전제완이 인재를 뽑기 위해 향한 곳은 바로 대학교. 수많은 대학교를 발로 뛰면서 인재 발굴에 나섰어. 근데 하루에 만나는 학생들만 100명이 넘어. 워낙 만나는 사람이 많다 보니까 누굴 만났는지 특징이 뭔지 잘 정리가 안 되는 거야. 그때까지만 해도 체계적인 인사관리 전산 시스템이 없던 거야. 그때부터 전제완은 컴퓨터를 독학하기 시작해. 장장 5년에 걸쳐 새로운 인사관리 시스템을 직접 만들어버려. 그리고 그가 만든 이 성과물로 삼성그룹 전체의 인사 시스템이 바뀌었어. 그 공을 인정받아서 '제1회 자랑스러운 삼성인상'까지 수상해. 당시 삼성에서 PC 최고 전문가이자 IT 천재로 불린 사람이 바로 이 전제완이었던 거야. 그러던 1997년. IMF 외환위기로 많은 회사에서 구조조정을 시작해. 삼성그룹 역시 구조조정을 하고 있었어. 다들 회사에서 잘리지 않으려고 노심초사 하는데, 삼성을 제 발로 박차고 나온 사람들이 있었어. 그 중 한 명이 이해진. 지금의 네이버를 만든 사람이야. 그리고 김범수. 지금 국민 메신저 카카오의 총수가 됐지. 그리고 또 한 사람이 바로 전제완이었어. 이때 나와서 만든 회사가 바로 자유와 도전인 거야. 이런 사람이 대표로 있는 회사 어떨 것 같아? 소현 씨와 마주 앉은 전제완 대표. 이렇게 말해. 소현 씨, 삼성 가기로 했다면서? 물론 대기업 좋지. 그런데 기계적으로 일을 하는 것보다 자기 생각을 가지고 자유롭게 일을 해보는 건 어때? 소현 씨를 지금 스카우트 하려는 거야. IMF의 여파가 이어지던 시기. 안정적인 대기업 입사를 앞두고 있는 소현 씨야.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할까? '저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 걸까?'라는 그런 느낌을 처음 받았던 것 같아요. 그때부터 약간 헷갈렸죠. '큰 기업도 좋고 다 좋지만 너만의 문제를 너의 자유로움을 가지고 너의 생각대로 한번 해결해보는 건 어떻겠냐' 라는,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너무너무 멋있는 그렇게 화두를 던지셨던 것 같아요. 그때부터 약간 '이런 벤처라는 게 뭘까?', '이 대표님이 만드시는 회사가 뭘까?'라는 고민을 이제 머릿속에 조금 담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최소현, 현 네이버 디자인부문장 이 알 수 없는 끌림에 결국 소현 씨는 결정을 내려. 대기업 삼성이 아닌 작은 IT 벤처 '자유와 도전'을 선택한 거야. 그때부터 소현 씨는 자유와 도전의 디자인팀에서 일하기 시작해. 그런데 이거 뭐 어떻게 해야 될지 감도 안 와. 명색의 IT 기업인데 디자인팀 그 누구도 인터넷 서비스 디자인 경험이 없었던 거야. 소현 씨가 전 대표를 찾아가 이야기를 했어. 대표님 이대로는 답이 안 나오는데, 좀 괜찮은 선배 한 명만 데려다 주시면 안 돼요? 며칠 뒤 전 대표가 회사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데, 한 남성이 따라 들어와. 소현 씨가 가만 보니까 대학교 과 선배야. 그 이름은 조수용. 훗날 네이버와 카카오의 디자인 혁신을 이끌고, 카카오 공동대표가 되는 사람이야. 서울대 산업디자인과 시절부터 전설로 통하는 엄청난 실력자였대. 산학협력으로 삼성전자에서 디자이너 활동도 했어. 그러던 중 전 대표가 26살이었던 조수용을 디자인팀 총괄로 스카웃을 해온 거야. 이렇게 서울대, 그리고 삼성으로 연결된 선후배들이 하나 둘 '자유와 도전'으로 모이게 돼. ▲ 자유와 도전 그런데 이 회사, 뭐 하는 회사라고 했지? 이제부터 생각을 해봐야 된다 그랬잖아? 직원들이 대표에게 물었어. 근데 대표님, 저희 뭐 하는 회사죠? 라고. 처음에 '자유와 도전은 뭔가요?'부터 '그래서 무슨 서비스를 어떻게 만들고자 하시는 거예요?' 이런 얘기들을 나눴을 때. '결국 사람이 모이면 뭐든 할 수 있어'라는 거, 그럼 과연 인간은 모여서 뭘 하기를 원할까? 그러면 기술은 인간의 삶에 무슨 문제를 해결해줘야 될까? 이거를 정말 정말 매일 말씀을 하셨던 것 같고요. -최소현, 당시 자유와 도전 디자인 팀장 그때 웹은 그냥 'Just Online'이었어요. 이메일, 채팅, 검색, 그 안에서 끝나잖아요. 그런데 대표님이 '결국 인터넷도 사람이 중요하다' 그래서 사람이 모이는 건 모임이고, 그 모임의 영역을 웹으로 가져와야겠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결합시켜야 된다… -신승식, 당시 자유와 도전 마케팅 팀장 전 대표의 이야기는 이거야. 동호회, 동창회 같은 오프라인 모임을 온라인에서 할 수 있게 하자는 거야. 사람과 사람을 온라인으로 연결해주는 커뮤니티 사이트를 만들자! 그때 여기 회사 분위기는, 아주 그냥 자유분방했대. 복장도 남녀불문 반바지에 슬리퍼야. 이때가 1999년이잖아. 보수적이었던 당시 시대상과 비교해, 말도 안되는 회사 분위기지. 저희 마케팅팀에서 엔지니어팀으로 이동할 때 킥보드 타고 이동하고. 우리끼리도 '야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 할 정도로 재밌었어요. -신승식, 당시 자유와 도전 마케팅 팀장 저 야식 담당이었거든요. 킥보드에 봉투 하나 걸고 야식 배달 가고. 아마 '배민'의 전신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그렇습니다. -최소현, 당시 자유와 도전 디자인 팀장 전 대표는 직원들에게 항상 이렇게 말했대. 다 사람이 하는 일이야. 두려워하지 말고 하고 싶은 거 다 해봐. 전 대표는 PC 최고 전문가, IT 천재라고 불렸던 사람이잖아.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젊은 직원들의 도전을 물심양면 지원했어. 엔지니어 분들과 대화할 때 밀리지 않으셨어요. 기술적인 백그라운드가 본인이 공부해서 있었고. -신승식, 당시 자유와 도전 마케팅 팀장 기세도 그렇고 뭔가를 설득하는 기질도 그렇고. 영역을 확장해가는 것들, 그리고 그 이유가 너무나 분명했던 것들. 저는 테크 시대에 태어난 나폴레옹 같다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최소현, 당시 자유와 도전 디자인 팀장 회사 이름처럼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 마음껏 도전할 수 있었던 직원들. 매일같이 밤을 새며 일을 해도 너무너무 즐거웠대. ▲ 프리챌 닷컴 마침내, 2000년 밀레니엄 시대가 열렸어. 그리고 2000년 1월 1일 0시 0분, 인터넷 세상에 자유와 도전의 야심작이 첫 공개돼. 바로 이거야. 아아, 알려드립니다. 마을회의는 인터넷으로 합니다. 주소는 프리챌 컴 다 아시죠? 사이트 이름, '프리챌'. 자유와 도전을 영어로 하면, Freedom(프리덤)과 Challenge(챌린지) 잖아. 그래서 프리덤 앤 챌린지. 프리챌인거야. 당시 프리챌의 정체성은 바로 로고였어. 모자이크처럼 작은 네모 조각들이 모여서 프리챌 로고를 만들어. 그러니까 여러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서 하나가 된다는 뜻이야. 조수용 디자인 총괄의 작품이야. 당시 다른 사이트들의 초창기 모습은 이랬어. 그에 비해 프리챌은 디자인이 다르지? 보기도 편하고, 다양한 정보가 있는데 심플하게 돼 있어. 사람들이 몰려서 와글와글하는 서비스일 것이기 때문에, 차가운 기술의 냄새는 최대한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게 기능이긴 하지만 조금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을까? 이런 얘기를 저희 디자인 팀끼리도 엄청 많이 나눴고, 대표님도 그걸 원하셨던 것 같고요, -최소현, 프리챌 디자이너 ▲ 커뮤니티 전성시대 여기서 '커뮤니티 만들기' 버튼만 누르면 전 국민 누구나 쉽게 커뮤니티를 만들 수 있어.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이 모든 게 다 공짜였다는 거야. 커뮤니티 몇백 개를 만들든, 사진을 몇만 장 올리든, 전부 다 무제한인 거지. 이용자들 반응은 어땠을까? 그야말로 대박이야. 프리챌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더니 오픈 3개월 만에 회원 수 100만을 넘어서고, 3만 5천여 개의 커뮤니티가 생겼어. 그 중엔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한 커뮤니티가 있었어. 대한민국에서 옷 꽤나 입는다는 패셔니스타들이 패션 정보를 주고받기 위해 모인 커뮤니티, 이 커뮤니티의 이름은 '무진장 신발 사진이 많은 곳'. 줄이면 '무신사'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패션 플랫폼 무신사, 그 전신이 바로 프리챌 커뮤니티였던 거야. 제가 프리챌을 알게 된 건 중1 때 여름 이때부터 들어갔던 거 같아요. 패션이나 신발에 관심이 많다 보니까 그때 형들 따라서 많이 활동했던 거 같습니다. 그때는 거기가 패션위크였죠. 좋아하는 애들끼리 모여서 우리끼리 얘기하고 향유하고 이런 게 있었는데, '대박이다 어떻게 조그맣던 게시판 하나가 이렇게까지 커지지?'라는 그런 신기함이었던 거 같아요. -신현우, '무신사' 커뮤니티 유저 그 외에도 이 세상에 없던 재미있고 특이한 커뮤니티들이 마구 생겨나. 그 중 하나가 바로 '팔사모' 커뮤니티. 회원 수가 무려 8000명이었던 커뮤니티야. 제가 좋아하는 게 팔씨름이었는데, 저만 좋아할 수 없다, 다른 사람도 분명히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막연한 호기심에 프리챌에 커뮤니티를 개설했는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가입을 한 거죠 전국적으로. 연령대도 굉장히 다양했어요. 10대부터 40대, 50대까지. -한준희, '팔사모' 회장 10대 때부터 팔씨름을 너무나 좋아했던 사람인데, 한의원 하다가 바빴는데 우연하게 너무 팔씨름이 생각난 거예요. 혹시나 팔씨름 좋아하는 사람도 혹시나 모여 있을까? 이런 데도 있을까? 우연하게 생각해서 팔씨름을 쳐봤더니 모임이 있는 거예요. -김경호, '팔사모' 회원 놀라움의 연속이었죠, 매일매일 하루하루가. 아침에 눈 떠서 커뮤니티에 접속해보면 회원수가 갑자기 100명이 늘어나있고. 또 자고 나면 100명이 늘어나있고. 그런 날의 연속이었죠. -한준희, '팔사모' 회장 팔씨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야. 팔사모엔 매일같이 이런 글들이 올라왔어. 저는 강원도 동해 사는데 팔씨름은 한 번도 져본 적이 없드래요. 이야 반갑구먼유. 저는 충남 사는디 팔씨름으로는 제 적수가 없구먼유. 다들 자기 동네에서 팔씨름을 져본 적이 없다는 거야. 그러던 어느날, 팔사모에 공지가 하나 올라와. 드디어 창과 방패의 대결이 열릴 예정입니다. 전국에 숨어 계신 고수분들의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팔사모 회장 한준희 씨가 거국적으로 팔씨름 대회를 연 거야. 전국 방방곡곡에서 팔씨름 강자들이 모여들었어. 얼마나 재밌었으면 1박 2일동안 잠도 안자고 계속 팔씨름을 했대. 정말 덩치 좋으신 제주도에 한 번도 져본 적이 없는 그분이 올라오셨다가 여러 사람한테 지고 가셨죠. 하하하. 1박 2일동안 팔씨름을 계속 하는 거예요. (그 전까지는) 연결될 수 있는 고리가 아예 없었어요. 각 지역별로 센 사람들끼리 다만 몇 사람끼리나 있었지. 공통분모라는 거를 프리챌이 만들어준 거죠. -김경호, '팔사모' 회원 세상에 나 혼자인 줄 알았던 사람들도 온라인 커뮤니티 덕에 모이고 또 교감하게 됐어. 어떤 커뮤니티는 대부분의 회원들이 30대 초반 여성들로 구성돼 있었어. 이건 어떤 커뮤니티일까? 직접 들어볼게. 저희가 그때 '노처녀 통신'이라는 동호회를 만들었는데, 그 이름 들으면 느낌이 오잖아요. 그 당시에 노처녀라고 불리는 저와 친구들, 30살, 31살, 28살에서 30대 초반 그 사이 친구들이 모여서, 우리가 노처녀라는 소리를 듣고 이렇게 구박을 받으면서 우울하게 살 일이 아니다, 우리끼리 뭉쳐서 즐겁게 살자. 주변에 더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더 잘 지냈어야 노처녀가 안 됐는데, 온라인 세상에서 만나는 새로운 사람이 너무 신기한 거예요.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기쁨? 그런 게 온라인 동호회의 기쁨이었죠. -최재경, 프리챌 '노처녀 통신' 운영자 이 노처녀 통신에선 특별한 정기모임을 열었어. 이름은 '재활용 파티'야. 뭘 재활용했을까? 나랑 잘 될 일 없는 남성 지인들을 데려와서, 다른 회원에게 소개시켜주는 단체 미팅이야. 완전 로테이션 소개팅이지. 결전의 날, 한 카페에 모인 노처녀통신 회원들이 문 쪽을 바라보고 일렬로 쭉 앉아있어. 잠시 후 남자 3명이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일렬로 쭉 앉아있는 여자들을 보고 그대로 나가버린 거야. 이 '웃픈' 에피소드, 지금까지 추억으로 남아있다고 해. 빨리 누굴 만나 결혼해야 한다는 조바심보다, 마음 맞는 친구들을 만난 즐거움이 더 커졌대. ▲ 프리챌의 독주 이렇게 다양한 취미와 사연을 가지고 프리챌에 모인 사람들. 커뮤니티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쌓아갔어. 닷컴 열풍 속, 프리챌이 인기를 끌면서 회사는 승승장구해. 직원들도 삽시간에 늘었어. 직원이 겁이 날 만큼 늘었어요. 내선 번호 백몇십 번까지는 다 외웠는데, 150명 넘어가고 나서부터는 못 외우겠더라고요. 우리 진짜 여기서 대박 나는 거야? -최소현, 프리챌 디자이너 그리고 프리챌은 미국 GE 캐피탈에서 투자까지 받아. GE, 제너럴 일렉트릭. 발명왕 에디슨이 설립한 당시 세계 최대 기업이었어. 지금의 엔비디아, 마이크로소프트처럼 어마어마한 영향력이 있었던 미국의 대표 기업, 그 제너럴 일렉트릭의 금융 자회사가 바로 이 GE 캐피탈이었어. 그런 회사에서 대한민국의 신생 벤처 회사에 투자를 한 거야. 그뿐만이 아니야. 한 남자가 프리챌 사무실에 찾아왔어. 프리챌이 투자 받을 때 기업 조사를 했던 GE 캐피탈 담당자야. 그가 프리챌에 입사하고 싶다는 거야. 그분이 조사하는 과정에서 프리챌이 너무 매력있다고 판단해서 GE 캐피탈을 퇴사하고 프리챌에 입사했습니다. 전 그거 보고 '진짜 우리 회사 대단한가 보다'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신승식, 프리챌 마케팅 팀장 사실 GE 캐피탈이 더 큰 회사인데. 프리챌의 위상 얼마나 대단했는지 보이지? 프리챌에서 만들어진 커뮤니티는 최대 110만 개, 회원수는 천만 명을 달성했어. 2000년대 대한민국 인구가 4600만 명 정도 됐거든. 다섯 명 중에 한 명은 프리챌 커뮤니티에 가입했다는 거지. ▲ 사이좋은 세상 그런데 이 모습을 누구보다 부러워하던 한 IT 벤처 기업이 있었어. 이 기업이 만든 사이트 이름은 '사이좋은 세상'. 사이좋은 세상은 프리챌의 커뮤니티와 비슷한 '클럽'이라는 서비스를 제공했어. 하지만 반응은 처참했어. 회원수가 많은 프리챌 쪽으로 사람들이 계속 몰렸던 거야. 게다가 사이좋은 세상은 사이트 디자인부터 투자 비용까지 프리챌과 비교하면 너무 아마추어 같았던 거지. 거기(프리챌)는 프로고 우리는 아마추어였어요. 지금 생각하면 '오 저렇게 하는 거야?' (프리챌은) TV 광고도 하고 그랬으니까. 우리는 부러웠죠. '이야 저렇게 질러야 되는데'. -이동형 대표, 사이좋은 세상 프리챌은 기본적으로 자금력과 투자도 많이 받고 제대로 전략이나 이런 걸 잘 세워서 치고 나가고. 그런 부분에서 완전히 확연하게 차이가 났죠. -이정태 이사, 사이좋은 세상 이 사이좋은 세상은 직원들 월급도 제대로 못 주는 상황이야. 폐업의 문턱에서 대표는 이 사이트를 살릴 마지막 도전을 하기로 해. 전 직원 앞에서 이렇게 얘기했어. 지금부터 남자와 여자로 나눠서 신규 서비스 하나씩 가져와. 조건은 딱 두 개다. 하나, 사이가 좋을 것, 둘, 돈을 벌 것. 며칠 뒤 남자팀과 여자팀의 발표가 시작돼. 사람들이 사이가 좋으려면 서로 대화를 많이 나눠야 한다 며 남자팀이 가져온 건 바로 채팅 서비스였어. 타 사이트에 이미 넘쳐나던 채팅 서비스는 딱히 신선하지는 않았어. 이어 여자팀의 발표가 시작돼.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으려면, 우선 나라는 존재가 있어야죠. 사람들끼리 만나게 하려면, 먼저 온라인 상에 나라는 정체성이 생겨야 한다 는 거야. 남자팀과 여자팀 중 누가 이겼을까? 사이좋게 지내는 사람들을 관찰해서 서비스를 디자인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딴 사람하고 사이 좋으려면 나의 정체성이 어딘가 있어야 하잖아요. 우리 그룹 커뮤니티는 그게 없었던 거예요. 이제 이쪽(여자팀)이 이긴 거죠. 여기(남자팀)도 사이 좋게 되긴 하는데, 이거(여자팀)만큼 사이 좋은 것 같지는 않아. 기본적으로 우리 철학이 여기 맞는 거예요. 그 프로젝트가 미니홈피 프로젝트고, 그게 성공해서 싸이월드가 살았죠. -이동형 대표, 사이좋은 세상 자신만의 이야기와 사진으로 미니홈피를 꾸밀 수 있는 인터넷 사이트 싸이월드. 사이좋은 세상이라는 철학으로 만든 사이트였어. 벼랑 끝에서 살아남기 위해 만든 서비스가 바로 이 미니홈피. 말 그대로 사람마다 하나씩 주어지는 작은 개인 홈페이지야. 쉽게 말하면 온라인 상의 방을 하나씩 분양을 해 준 거야. 나만의 방을 마음껏 꾸며서 나라는 존재를 표현할 수 있게 하는 거지. 싸이월드는 미니홈피 개발에 사활을 걸었어. 그리고 2001년 9월, 드디어 싸이월드 미니홈피가 세상에 공개돼. 지금은 싸이월드 서비스가 중단돼서 추억의 미니홈피를 만날 수가 없어. 미니홈피에선 대문 사진부터 자기소개, 방 꾸미기까지 모든 걸 내 맘대로 할 수 있어. 싸이월드만의 야심작이 있어. 바로 '일촌' 서비스. 일촌을 맺은 사람들끼리는 서로 미니홈피에 짧은 글을 남길 수가 있어. 그리고 또 빼놓을 수 없는 게 있지. 바로 BGM. 업계 최초로 선보인 서비스, 그야말로 혁신 중에 혁신이었지. 그리고 미니홈피를 꾸미려면 '도토리'가 필요해. 싸이월드 안에서 사용하는 사이버 화폐야. 방도 꾸미고 친구한테 선물도 하고, 그런 용도였지. 근데 왜 하필 도토리였을까? 제 고향이 경상북도에 있는 소백산 밑이거든요. 저는 도토리가 익숙해요. 그걸로 딱지치기 했던 기억도 있고. 화폐가 되려면 흔해야 되고, 둘째 친근해야 되고. 결정적으로 100원보다 비싸면 안 되고. 도토리가 화폐해야 되는 이유를 찾았죠. 사이 좋게 하기 위해서. -이동형 대표, 사이좋은 세상 미니홈피, 싸이월드 대표의 마지막 희망이었다고 했잖아. 반응은 어땠을까? 장난 아니었지. 미니홈피부터 BGM, 도토리, 싸이월드가 처음 시도한 모든 게 다 대박을 치기 시작한 거야. 지금 인플루언서들은 유튜브나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에 내 일상의 모든 것들을 예쁘게 꾸며서 사람들한테 알리려고 노력하잖아요. 미니홈피는 바로 그 내 아이덴티티, 나의 자아성을 주체성을 그대로 고스란히 만들 수 있게끔 축적할 수 있게끔 해준 거죠. 본질적으로 커뮤니티를 바꾼 거죠. 어떻게? 공동의 공간이 아닌, 찾아가는 게 아니라, 나의 공간 속으로 사람들이 찾아오게 만드는 혁신적인 새로운 서비스로 리포지셔닝하면서, 대한민국의 네이버, 다음 버금가는 형태의 서비스로 거듭나게 되죠. -김지현, IT 전문가·테크 라이터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의 욕구도 바뀌어. 수천 명이 모인 커뮤니티의 한 구성원으로서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나만의 공간에서 내 얘기를 하는 걸 더 선호하는 분위기가 된 거야. 그 변화의 중심에 있던 게 바로 싸이월드. 한국형 SNS 시대의 시작이었어. ▲ IT 전쟁의 시대 이를 지켜보고 있는 프리챌. 엄청난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해. 되게 위협적으로 봤고. 우리 대표님이 되게 그때 좀 화도 많이 내셨고 신경질적이셨어요. 대표님 생각은 '우리가 디자인도 기술도 다 쟤네보다 잘하는데, 쟤네들은 다 따돌릴 수 있어'. -신승식, 프리챌 마케팅 팀장 프리챌 역시 시대에 발맞춰서 이런 서비스를 내놨어. 프리챌의 신규 서비스 '마이홈피'. 이름도 비슷해. 사실 당시에 IT 벤처끼리 서로를 모방하는 서비스 경쟁이 치열했어. 다음에서 카페 서비스를 출시하자 네이버에서도 똑같은 이름의 카페 서비스를 내놓은 일도 있었어. 그런데 싸이월드에서 미니홈피는 어떤 존재야? 벼랑 끝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만든 서비스잖아. 프리챌의 마이홈피를 보고, 싸이월드에서는 어떤 마음이었을 것 같아? 싸이월드와 프리챌은 표절 여부를 두고 소송전까지 벌여. 하지만 싸이월드의 패배였어. 왜? 법원의 판단은 개인 홈페이지 서비스를 어느 한 기업이 독점할 수는 없다는 거였어. 싸이월드가 패배로 주눅들었던 그때, 뜻밖의 소식이 들려와. 프리챌에서 커뮤니티 개설자에게 월 3천원씩 돈을 받겠다고 한 거야. 프리챌의 가장 큰 장점이, 커뮤니티를 몇 개를 만들든 무조건 무료였잖아. 그런데 갑자기 유료화를 선언한 거야. 물론 싸이월드에서도 도토리를 사야 미니홈피를 꾸밀 수가 있었잖아. 그런데 이건 개념 자체가 약간 달라. 도토리는 안 사도 미니홈피 쓰는 데는 문제가 없어. 그런데 프리챌은 돈을 안 내면 커뮤니티 운영 자체를 못하게 한 거야. 그럼 이용자들은 어땠을까? 뭐 일단 너무 충격적이었고 배신감이 들었고, '그러면 우리가 돈을 내고서 이거를 해야 되는 거냐' 화가 많이 났던 것 같아요. 되게 분노하고. 게시판에도 막 욕이 올라왔었거든요. -신현우, '무신사' 커뮤니티 유저 '따르지 않을 시에는 운영 권한을 축소하겠습니다' 약간 협박 아닌 협박이 섞인 그런 공지였던 걸로 기억을 해요. 그래서 많은 운영자분들이 굉장히 불쾌했을 겁니다, 그 당시에. -한준희, 프리챌 '팔사모' 커뮤니티 회장 민심이 폭발했어. 심지어는 프리챌 직원들도 반대했어. 유료화는 전제완 대표 개인의 결정이었거든. 대체 왜 그는 이런 결정을 한 걸까? 프리챌 유료화 사태를 두고 국회에서는 공청회까지 열려. 그때부터 프리챌의 분위기는 어수선해지기 시작했어. 이용자가 빠지면서 110만 개였던 커뮤니티는 순식간에 40만 개로 줄어들고 말아. IT 업계가 시끌시끌하던 그때, 프리챌에 제대로 한 방을 날린 곳이 있었어. 바로 싸이월드. 여러분 저희 싸이월드는 약속한대로 평생 무료입니다. 저희는 여러분과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프리챌에서 이탈한 사람들이 전부 싸이월드로 가기 시작해. 그때는 '인터넷이라는 서비스는 무조건 다 기본적으로 무료다' 이게 딱 박혀 있었기 때문에. -이정태, 당시 싸이월드 이사 그래서 잘 하면 우리한테 기회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사이좋은 세상 우리가 만들 수 있을 것 같다고… -이동형, 당시 싸이월드 대표 싸이월드는 그때부터 날개를 달고 훨훨 날았어. 훗날 전 국민의 절반인 2500만 명이 사용하는 대한민국 대표 SNS로 자리매김해. 시간이 흘러서 2010년. 닷컴 기업들은 예상치 못한 흐름에 직면하게 됐어. 스마트폰의 시대가 열린 거야.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서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이 등장을 하면서, 인터넷 사이트들은 점점 이용자들을 잃게 돼. 찬란했던 닷컴 시대가 막을 내리기 시작한 거지. 인스타그램이나 엑스(옛 트위터) 혹은 페이스북 같은 서비스는 찾아오고 찾아가는 게 아니라 콘텐츠가 나한테 옵니다. 그걸 피드라고 해요. 미니홈피는 그 공간으로 찾아오는 거고, 이거는 피드가 나한테 오는 거고. 그래서 기존에 웹에서 잘 나가던 서비스가 그대로 스마트폰에서 이어지기는 어려워요. 서비스의 기본적인 구조가 바뀌거든요 완전히. -김지현, IT 전문가·테크 라이터 잘 나가던 싸이월드 역시 외래 SNS에 밀려나기 시작했어. 프리챌 역시 변화하는 시대 속에 살아남지 못하고 2013년 추억 속으로 사라지게 돼. 그 후 싸이월드 창업자들은 IT 관련 강의, 스타트업 컨설팅을 하는 등 새로운 시대에서 활약하고 있어. 프리챌에서 뿔뿔이 흩어진 직원들은 우리나라 IT 산업을 이끄는 거목들로 성장해. 프리챌의 디자이너 최소현 씨, 지금 네이버의 디자인 부문장을 맡고 있어. 디자인 총괄 조수용 씨는 대한민국 대표 IT 기업 카카오 대표이사를 역임해. 누군가는 청와대 소속 국가인공지능전략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전 세계를 사로잡은 콘텐츠 브랜드 '핑크퐁'을 만든 대표가 됐다고 해. ▲ 프리챌 대표의 근황 근데 중요한 사람이 빠진 것 같지 않아? 이 모든 인재들을 한데 모아 그 시절 인터넷의 흐름을 바꿔놓은 사람. 1세대 벤처 CEO이자 IT 천재라 불리던 프리챌의 전제완 대표. 그는 지금 뭘 하고 있을 것 같아? 어떤 모습일지, 그를 찾아 강원도 양양으로 갔어. 네, 맞습니다. 제가 전제완입니다. 지금 잔디가 많이 자라서 깎고 있거든요. 쓰레기도 버려야 되고, 그다음에 자쿠지에 물도 받아야 되고. (펜션에서 일하는지 묻자) 예 그렇습니다. 청소가 제 전공이고요. 좋은 말로 하면 정원관리사. 거름도 줘야 되고 풀도 뽑아야 되고 잔디도 깎고. 뭐 이게 제 주전공인데… -전제완, 전 프리챌 대표 전제완 대표는 양양의 한 펜션에서 청소부로 일하고 있었어. 사업을 하다가 이게 어려워지는 그 고통은, 사실은 인생이 거의 파탄 지경에 이르는데. 시름을 잊어야 되니까 여기 와서 청소하고 있는 거예요. 한군데 집중을 해야 되거든요. 그래도 자꾸 생각이 나는 게, 그거는 그만큼 제가 마음을 못 비운 거죠. 그게 금방 비워지나요 제가? (프리챌 오픈) 1년 만에 국내 TOP3로 진입을 시킨 구조를 가졌으니까. 회원 천만 명이란 건 사실 우리나라 인터넷 다 쓰는 거하고 똑같잖아요. 그 마음을 다 비울 수 있다면 제가 해탈하는 사람이죠. 머리만 없지 제가 중 같은 수도를 하는 사람도 아니고, 잘 안돼요. -전제완, 전 프리챌 대표 모든 사람들과 연을 끊고 지금은 펜션 청소, 대리운전을 하며 살고 있다고 해. 한때 대한민국 벤처업계에 한 획을 그었던 사람에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IMF 구조조정 시기에 회사를 박차고 나와 야심차게 프리챌을 만든 전제완 대표. 처음에 프리챌이 잘 나갔을 땐 세상 두려울 게 없었다고 해. 시청률 한 50% 가보세요. 우리 PD님, 감독님, 촬영감독님들이 잠 안 자죠. 재방송 보느라고 그거 자겠어요? 그냥 비슷한 거예요. 간이 침대에 있고 막 자빠져 자고 의자 붙이고 자도, 그냥 다들 즐거웠던 거예요. 일하는 것들이. 사용자 엄청 늘지 그러니까 재밌을 수밖에 없었죠. 다 재밌게 일했던 것 같아요. -전제완, 전 프리챌 대표 ▲ 닷컴 버블 붕괴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용자 수가 많아질수록 회사는 계속 적자가 나. 서버 유지비부터 하드웨어 비용, 네트워크 사용료까지 서비스가 커질수록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대. 회원 100만 명 정도의 서비스를 운영하려면 하드웨어 비용만 한 달에 30억 원이 들었대. 이렇다 보니 GE캐피탈에서 받았던 투자금은 금세 떨어졌어. 거기다가 또 큰 문제가 하나 생겼어. IT 관련 주가가 폭락하기 시작한 거야. 묻지마 투자에 주가가 치솟던 코스닥 시장은, 떨어질 때도 기록적이었습니다. 코스닥 시장의 대폭락에 국내 벤처기업들이 몰려있는 테헤란 밸리도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중 이른바 '닷컴 버블 붕괴'. 기대만큼 실적이 따라주지 못하니까 IT 벤처기업들의 거품이 한순간에 꺼져버렸대. 이때 모든 벤처기업이 휘청이기 시작했어. 싸이월드는 한창 잘나가던 시기에 대기업 SK에 매각돼. 전제완 대표는 투자자를 찾아서 백방으로 뛰어다녔어. 프리챌의 가능성과 인터넷 산업의 미래를 설명했어. 이 바닥에서 1등만 하면 시가총액 1조는 거뜬히 넘을 겁니다. 이 양반이 벤처하더니 정신이 나갔나? 지금 삼성물산 시총이 얼마인 줄 알아? 2000년대 말 삼성물산의 시가총액은 약 3조였어. 그러니까 투자자들 입장에서 전제완 대표의 말, 어떻게 들렸겠어?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IT 산업의 잠재력을 가늠하지 못했던 거야. 그런데 2026년, 네이버 시총이 30조야. 겉으로는 화려했던 프리챌. 안에서는 벼랑 끝에 몰리고 있었어. 그래서 선택한 불가피한 방법이 바로 유료화였던 거야. 전 대표는 유료화를 앞두고 프리챌에 이런 편지를 올렸어. 안녕하세요. 프리챌 대표이사 전제완입니다. 갑작스러운 프리챌 커뮤니티 유료화 발표로 많은 당혹감이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회원님들께 진심으로 사과를 올립니다. 프리챌 입장에서는 지속적인 기술 개발을 하기 위하여 회사에 운명을 걸고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프리챌은 가장 좋은 소프트웨어와 시설 인프라로 보답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한 커뮤니티 유료화였음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한 달에 3천 원을 받는 대신 사이트에 광고도 없애고,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어. 우려와는 달리 보름 만에 20만 개의 유료 커뮤니티를 확보했어. 이대로라면 프리챌 문제없이 운영할 수 있을 것 같아. ▲ 몰락과 실패 그러던 2002년 12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벤처 업계를 뒤흔든 사건이 벌어지고 말아. 검찰은 어제 전 씨에 대해 주금가장납입과 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습니다. 회사 유상증자 과정에서 수십억 원대의 주식 납입금을 가짜로 내고 120여억 원을 횡령한 혐의도 받고 있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중 전제완 대표가 갑자기 구속된 거야. 실제로 납입하지 않은 자본금을 납입한 것처럼 꾸민 혐의와, 주식 대금을 회사 돈으로 지급한 횡령 혐의였어. 전 대표는 고의가 아니라고 주장했어. 회사 자금 사정이 어려워서 불가피하게 내린 경영상의 판단이었을 뿐, 개인적인 이득을 취할 목적은 아니었다는 거야. 하지만 그는 결국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받게 돼. 그러니까 (경영상) 위기 관리가 생기니까 역시 제대로 된 판단을 못했어요. 내가 결국은 거기(위기 관리)에 적합하고 거기에 맞는 구조를 못 짠 거죠. 그러니까 실력이 부족한 거야. 부족했어.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금 이 시점에 와서 본다면, 프리챌 유저들한테는 제가 이 자리를 빌려서, 끝까지 데이터를 지켜주지 못한 게 죄송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릴게요. -전제완, 전 프리챌 대표 그렇게 전 대표는 2년의 형기를 마치고 2004년 출소해. 한참 시간이 흘러서 2016년, 싸이월드 창업자들은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듣게 돼. SK가 싸이월드를 더 이상 갖고 있기에 그렇게 미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서, 싸이월드 팀을 분사시켰거든요. 그래서 잘 안 됐어요. 안 되고 있는데 어느 날, 프리챌 사장이 같이 하기로 했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처음에 귀를 의심했죠. -이동형, 전 싸이월드 대표 일종의 적군의 수장이잖아요. 적의 수장이 갑자기 어느 순간, 싸이월드 대표가 된다고? 이게 뭐지?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전확렬, 전 싸이월드 이사 그런데 지금 전 대표, IT와는 전혀 상관없는 생활을 하고 있잖아?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싸이월드가 가지고 있는 그 데이터의 역사성, 중요성을 간과하면 안 된다는 거지 나는. 그게 보존이 돼야 하는 데이터라고요. 좀 어렵지만 끊임없이 해 나가서 진짜 나중에 다 살아나면 고객들이 '열심히 해서 이렇게 만들어줬구나 잘 쓰고 있어' 그런 일들을 해보고 싶었어요. (싸이월드) 열심히 했어요. 돈도 한 300억 이상 투입을 해서 개발을 하다가, 코로나19 딱 터지면서 더 이상 진행을 못 하겠더라고요. 잘 가다가 9부 능선에 갔는데 왜 마지막 발을 디디는데 거기가 낭떠러지인 거야 이게. 뭐 첫째는 제가 실력이 없는 것이겠죠. 그러니까 잘 하지 못한 CEO가 경영자가 못 한 게 첫 번째 잘못이고. 두 번째는 사업은 실력만으로 되는 건 아니고 운이 좀 있어야 되는데. 예기치 않은 어떤 특수한 상황 때문에 두 가지(프리챌, 싸이월드) 다 무너진 걸 보고, 저는 사업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죠. 나로 인해서 시작된 일에 대해서 내가 그걸 연연하면 미래가 없어. 흘러간 물로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단 말이에요. -전제완, 전 프리챌 대표 싸이월드 개발에 필요한 투자를 한창 받으러 다니던 2019년, 코로나19 팬데믹이 터진 거야. 세계적으로 경기가 침체되면서 투자가 뚝 끊겨. 임금 체불과 횡령 혐의로 형사처벌까지 받게 돼. 싸이월드도 살리지 못했던 거지. 1세대 벤처 신화를 이끈 사업가이자 우리나라 IT 산업의 성장에 한 획을 그었던 전제완. 결국 자연으로 낙향해 살게 됐어. 1세대 벤처 기업들은 시대의 뒷문으로 사라졌지만, 그 시절 벤처의 꿈을 품었던 사람들은 지금도 그때를 잊지 못한다고 해. 열정만으로 살았던 시기인 거 같아요. 내 일 회사 일 안 가리고. 정말 열정으로 똘똘 뭉쳐서 일했던 거 같고. -신승식, 전 프리챌 마케팅 팀장 마음껏 상상하고 할 수 있는 거 다 꺼내놔 보고. 저에게는 자유와 도전이 가능하게 했던 첫 번째 운동장이라고 생각하고 싶어요. -최소현, 전 프리챌 디자인 팀장 저는 싸이월드가 감성적으로 말하면 내 딸 같거든. 진짜 농담이 아니고 딸처럼 느껴져요. -이동형, 전 싸이월드 대표 지금도 싸이월드 창업 멤버라고 하면 사람들이 일단 좋게 봐주고. 최고의 레퍼런스다. -전확렬, 전 싸이월드 이사 저에게는 젊음입니다, 젊음. 내 젊음이라고 생각하면 싸이월드를 같이 떼려야 뗄 수 없죠. -이정태, 전 싸이월드 이사 그들의 도전은 오늘날 대한민국이 IT 강국으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됐어. 그 시절 온라인 커뮤니티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현실만큼이나 따뜻한 공간이었어. 우리가 지나간 옛날의 편지를 다시 읽어보면 드는 그런 기분처럼, 나의 진정한 어떤 부분을 거기에 남겨두었는데 내가 그대로 문을 닫았다는 느낌… -최재경, 프리챌 '노처녀 통신' 운영자 그냥 일기장이니까, 언제라도 난 꺼내볼 수 있는 게 있었는데, 이제 그 서랍 자체를 드러낸다 그러니까 많이 많이 아쉬웠죠. -신현우, '무신사' 커뮤니티 유저 '꼬꼬무'가 이번 방송을 준비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있어. '잊고 싶지 않다'는 것. 소중한 기억들이 담긴 이 일기장을 꼭 지키고 싶다는 거지. 그 마음은 언젠가 우리의 추억을 되찾는 열쇠가 되어줄 거야.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
[스브스夜] '꼬꼬무' 초고속 인터넷 시대와 함께 찾아온 '닷컴 열풍'···그때 그 사람들은 어디에? [스브스夜] '꼬꼬무</font>' 초고속 인터넷 시대와 함께 찾아온 '닷컴 열풍'···그때 그 사람들은 어디에? 등록일2026.09.18 닷컴 열풍의 주인공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17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응답하라, 자유와 도전! 이라는 부제로 지금처럼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 사람들을 한 곳에 모이게 했던 문화를 조명했다. 과거 통화 요금 폭탄도 감수하고 몰래 접속하던 PC 통신 시절을 거쳐 초고속 인터넷 시대가 열리며 닷컴 열풍이 불었다. IT 벤처기업들이 우후죽순 생겨나며 닷컴 열풍을 선도하던 그 시절 (주)자유와 도전은 서울대 경영학과와 삼성 물산을 거친 전제완 대표를 중심으로 서울대와 삼성으로 연결된 인재들이 하나 둘 모였고 이들은 프리챌 닷컴을 만들어 오픈했다. 삼성물산 시절 컴퓨터를 독학해 새로운 인사관리 시스템 만들어 당시 삼성의 인사 시스템을 개편시킨 공을 인정받아 제1회 자랑스러운 삼성인상 수상했던 전제완. 그는 1997년, IMF 외환 위기에 삼성을 나와 자유와 도전을 만들었고 인재들을 하나 둘 모았다. 그리고 이들은 누구나 언제 어디서든 손쉽게 커뮤니티를 만들 수 있는 프리챌 닷컴을 만들었고 이는 오픈 3개월 만에 회원수 100만 돌파, 3만 5천여 개의 커뮤니티 개설로 대박이 났다. 대한민국 대표 패션 플랫폼 무신사도 이곳의 커뮤니티가 전신. 온라인 커뮤니티 덕에 모이고 교감하게 된 사람들은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기쁨으로 온라인 커뮤니티에 모여든 이들 덕분에 승승장구하게 된 프리챌. 그리고 비슷한 시기 클럽 서비스를 제공하던 사이좋은 세상은 프리챌의 자본과 인재풀을 부러워하며 자신들만의 새로운 서비스를 만들었다. 이들이 만든 것은 한국형 SNS의 시작인 미니홈피 서비스가 있는 싸이월드를 오픈했고 업계 최초 BGM 서비스, 사이버 화폐 도토리 서비스 등을 도입하며 엄청난 대박을 냈다. 직접 찾아가는 공동의 공간 커뮤니티에서 사람들이 찾아오는 나만의 공간으로 혁신적인 새로운 서비스로 포지셔닝하면서 대한민국의 네이버, 다음 버금가는 형태의 서비스로 거듭난 싸이월드. 싸이월드의 등장으로 위기감을 느낀 프리챌은 미니홈피를 빼닮은 마이홈피 서비스를 오픈했고, 커뮤니티 운영 유료화를 선했다. 그러나 이에 폭발한 민심으로 이용 적어 순식간에 빠지며 반토막이 났다. 그리고 2010년 닷컴 기업들은 예상하지 못한 스마트폰의 시대를 직면하게 되었고 정보가 알아서 찾아오는 피드형 SNS의 등장으로 닷컴 시대의 몰락을 맞이했다. 서비스의 기본적인 구조가 바뀌며 외래 SNS에 밀린 싸이월드. 그리고 급기야 2013년에는 프리챌이 서비스 종료를 선언했다. 이후 싸이월드 창업자들은 새로운 시대에서 맹활약 중이고 프리챌 전 직원들은 현재 네이버 디자인 부문장, 카카오 공동 대표 이사, 청와대 소속 국가인공지능전략위원회 위원, 핑크퐁 탄생시킨 대표 등 우리나라 IT 산업의 거목으로 성장했다. 그런데 그들 속에 프리챌의 대표 전제완은 없었다. 현재 양양의 한 펜션에서 청소부로 일던 그는 사업을 하다가 어려워지는 고통은 엄청나다. 사실 인생이 거의 파탄 지경에 이르는데 시름을 잊어야 하니까 여기 와서 청소를 하고 있는 거다. 한 군데 집중을 해야 해야 잊을 수 있으니까. 그래도 자꾸 생각나는 게 그만큼 마음을 못 비우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쉽게 비워지냐. 1년 만에 국내 TOP3 진입을 시킨 구조를 가졌으니 그 마음을 다 비울 수 있다면 나는 해탈한 사람일 것이다 라고 했다. 모든 이들과 연을 끊고 지금은 펜션 청소, 대리운전을 하며 살고 있다는 전제완 전 프리챌 대표. 사실 프리챌은 사이트가 승승장구할수록 회사는 적자를 안게 되는 구조였다. 이에 투자금은 금세 동이 났고, 그 무렵 IT 관련 주가의 폭락 시작으로 닷컴 버블의 붕괴를 맞았다. 전 대표는 투자를 위해 발 벗고 뛰었지만 IT 기업의 잠재력을 알아주지 않고 벼랑 끝으로 내몰리던 프리챌은 커뮤니티 운영 유료화를 선언했다. 이에 돌파구를 찾았나 싶었던 것도 잠시. 2002년 12월, 전제완 전 대표가 구속된다. 회사 자금난에 따른 불가피한 경영 판단으로 사익 취할 목적이 아니었다고 해명했음에도 징역 1년 실형을 선고받은 전 대표는 프리챌 유저들한테 이 자리를 빌려서 끝까지 데이터를 지켜주지 못해 죄송하다 라고 사과의 마음을 전했다. 이후 그는 싸이월드의 데이터 역사성, 중요성을 간과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싸이월드를 인수해 300억 이상 투자해 개발을 하던 전 대표. 하지만 코로나가 터지며 결국 싸이월드도 살리지 못하고 이제는 그때를 추억하기만 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SBS연예뉴스 김효정 에디터)
[꼬꼬무 찐리뷰] 바닷물 솟구치는데 입구 막아버린 일제…183명을 수중 매장한 '조세이 탄광' 잔혹사 [꼬꼬무</font> 찐리뷰] 바닷물 솟구치는데 입구 막아버린 일제…183명을 수중 매장한 '조세이 탄광' 잔혹사 등록일2026.09.12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10일 방송된 '검은 뼈 - 49년 만에 전해진 부고'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전 국가대표 수영선수이자 SBS 해설위원 박태환, 가수 김종서, 배우 변요한이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낯선 곳에서 온 편지 때는 1991년 11월. 인천에 사는 쉰 살의 박정일 씨한테 편지 한 통이 도착해. 그런데 편지 봉투에 적힌 발신 주소를 보는 순간, 정일 씨가 고개를 갸우뚱 해. 편지는 모두 두 장이야. 한 장은 일본어, 다른 한 장은 한국어 번역본이야. 그런데 이 편지를 읽으면 읽을수록 정일 씨 머릿속이 점점 혼란스러워져. 대체 왜 그랬을까? 이게 그날의 편지 내용이야. 갑자기 편지를 드려서 놀라실 줄은 압니다. 저희는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에 사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돌아가신 분들의 본명을 알 수가 없어, 일본식 이름만 적어 편지를 보냅니다. 부디 억울하게 생을 마감하신 분들의 본명과, 유족분들께서 당시 사망 소식을 알게 되신 경위를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1991년 10월 28일,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에서 타케노부 올림 편지를 보낸 곳은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 보낸 사람의 이름은 타케노부. 갑자기 일본에서 날아온 편지. 그것도 전혀 모르는 사람이 보낸 거야. 정일 씨는 궁금했어. 타케노부가 누구지? 그리고 내 주소는 어떻게 알았을까? 정일 씨는 놀랍고 황당하기까지 해. 그 내용도 충격적이잖아. 그런데 사실 이 편지가 정일 씨한테 오기까지, 그리고 편지를 보낸 타케노부 씨에게도 믿기 힘든 엄청난 사연이 숨어있어. 편지 내용이 어딘가 좀 묘해. 야마구치현 우베시, 돌아가신 분이라… 정일 씨는 편지를 읽고 또 읽었어. 그러다가 문득, 한 사람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어. 바로 아버지야.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없으니까. '나는 왜 아버지가 없나' 싶은 거고. 집안 주변 분들이 '너 아버지 보려면 네 얼굴 봐라' 그런 이야기 하긴 하는데. 몰라요. 사진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어요. -박정일, 일본으로부터 의문의 편지를 받은 남자 정일 씨는 사실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 1942년, 정일 씨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돼서 아버지가 일본에서 돌아가셨다는 것만 알아. 주변 어른들한테 물어봐도 어디에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제대로 말해주질 않아. 그렇게 평생을 살아왔는데 어느 날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한 일본인이, 아버지의 진짜 이름과 죽음에 대해서 묻고 있는 거야. 정일 씨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잊고 지내던 판에 1991년도에. 1991년도면 지금으로부터 35년 전인가 그렇죠? 내 나이가 오십 하나 둘 됐겠네. 어떻게 내 주소를 알았나. 편지를 받으니까 참 깜짝 놀랐지 처음에는. -박정일, 일본으로부터 의문의 편지를 받은 남자 그런데 얼마 뒤, 정일 씨는 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돼. 이런 편지를 받은 사람이 더 있는 거야. 전국 곳곳에서 똑같은 편지를 받았다는 사람이 나타나.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어. 1942년 2월 3일.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에서 가족 가운데 누군가 돌아가셨다는 거야. 한 날 한 시에 벌어진 사건이야. 하지만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어. 그러던 어느 날. 믿기 힘든 소식이 들려왔어. 그날 그 사건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한국에 있다는 거야. 그리고 그중 한 분이 바로 이분이야. 이분의 성함은 설도술. 어르신은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야. 하지만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그날의 기억만큼은 또렷하게 남아있어. 그리고 그 기억을 생생한 증언으로 남겼지. 대체 그날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자, 이제 이 도술 어르신의 목소리를 따라서 지금으로부터 시간을 87년 전으로 거슬러 가 볼게. ▲ 갑자기 끌려간 청년들 때는 1939년 10월, 경상북도 영일군 장기면이야. 한적한 시골 마을에 일본인 순사 두 명이 나타났어. 마을을 가로지르더니 어느 한 집에 들이닥쳐. 바로 21살 청년 도술이의 집이야. 설도술, 당장 나와! 6남매 중 둘째인 도술이는 학업도 포기하고 부모님의 농사일을 거들고 있었어. 그런 도술이한테 지금 당장 장기면 지서, 그러니까 마을 경찰서로 오라는 출두 명령이 떨어진 거야. 일단 도술이는 영문도 모른 채 부랴부랴 지서로 향했어.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깜짝 놀라. 그날 출두 명령을 받은 건 도술이 혼자가 아니었어. 친구 정임출을 포함해서 서른 명이 넘는 청년들이 거기 불려와 있었거든. 며칟날 몇 시까지 경찰서 도착해라, 출두해라, 이런 명령서가 왔다 이 말이지. 관에서 명령이 왔는데 그거 불응할 수도 없고 가볼 수 밖에. 그래서 막상 제가 경찰서 가니, 우리가 사는 그 면 사람이 한 30명 와 있어. 그때 한 사람 한 사람 불러내서, 귀에 뭐가 들리나 안 들리나, 눈에 뭐가 보이나 안 보이나, 이게 신체검사라. -설도술, 당시 사건 목격자 순사들이 청년들을 한 명씩 불러내더니 갑자기 옷을 벗으라고 하고 청년들의 몸을 하나하나 살펴. 그리고 건장한 청년들만 따로 골라내. 도술이와 임출이도 순사들한테 뽑혔어. 선발된 마을 청년들은 일본인 인솔자한테 넘겨져서 갑작스레 기차에 올라.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르는 채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을 달리던 열차가 드디어 멈춰. 내리고 보니 부산항이야. 빨리 정렬해! 라는 인솔자의 고함 속에 청년들은 허둥지둥 커다란 배에 올라탔대. 청년들이 탄 배는 부산항에서 출발해서 일본 시모노세키항에 도착하는 부관 연락선이야. 그제야 도술이는 자신이 일본에 가고 있다는 걸 깨달아. 그리고 주변을 보니 같은 처지의 청년들이 한둘이 아니야. 200명은 넘어 보였대. 밤새 걱정과 뱃멀미에 시달린 끝에, 다음 날 아침 도술이는 시모노세키항에 도착해. 드디어 육지에 발을 디뎌보나 싶었는데, 뭔가 이상해. 승객들이 다 내릴 때까지 꼼짝도 못하게 하는 거야.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갑자기 저 배에 올라타! 라는 소리가 들려. 항구에 내리는 대신에 곧바로 작은 배에 옮겨 타라는 거야. 그럼 어디로 가느냐, 어디로 데리고 가는지 모른다 이 말이지. 그러니까 각자가 다 마음이 불안했지. -설도술, 당시 사건 목격자 그렇게 작은 배를 타고 몇 시간 뒤, 마침내 최종 목적지에 도착해. 청년들이 배에서 줄지어 내리는데, 하나같이 눈앞에 펼쳐진 모습을 보고 놀라. 여기가 바로 그날 도술이가 배에서 내린 곳이야. 배에서부터 뭔가 쭉 뻗어있어. 철로가 깔려있지. 도술이가 배에서 내리자 낯선 일본인들이 다가오더니 청년들을 줄 세워. 일본인 한 명이 앞으로 나서. 나는 하라 감독관이다, 따라와! 그 감독관이라는 사람을 따라서 얼마나 걸었을까. 도술이 앞에 빽빽이 솟은 나무 판자들이 보였대. 뭔가 가까이 다가갈수록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나무 판자가 무려 3m가 훌쩍 넘는 울타리야. 그 울타리 안으로 들어서니 한 층짜리 목조 건물들이 보여. 그리고 곳곳엔 초소 같은 게 보이고, 누군가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어. 하라 감독관이 건물 쪽으로 청년들을 데리고 가. 건물들은 서로 다닥다닥 붙어 있고,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문은 단 하나뿐이야. 그 단 하나뿐인 문 앞에도 감시원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어. 그제야 도술이는 상황 파악이 좀 됐어. 아… 우리 지금 갇혔네. ▲ 조세이 탄광 며칠 뒤, 하라 감독관의 고함이 들려. 전원 집합! 청년들을 공터에 집합시키더니 한 사람씩 앞으로 불러내. 그리고 이번엔 장비를 하나씩 나눠줘. 곡괭이, 소쿠리, 안전모… 도술이와 청년들이 끌려온 곳은 바로 야바구치현 우베시에 위치한 장생탄광. '조세이 탄광'이라 불리는 곳이었어. 겉에서 보면 숙소로 쓰이는 건물들, 그 주변의 울타리들만 보여.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탄광은 안 보이고 바다밖에 없어. 바로 그때, 도술이 눈앞에 굉장한 광경이 펼쳐져. 보니까 바다 쪽에서 뭔가 새까만 무언가가 천천히 올라오는 게 보여. 가까이 올수록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까매. 전구가 달린 안전모랑 흰자위만 겨우 보여.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도 없을 만큼 석탄가루를 온몸에 뒤집어쓴 사람들이 줄줄이 올라오고 있는 거야. 이 사람들 대체 어디서 올라온 걸까? 도술이는 그때 처음 알게 됐어. 조세이 탄광은 마치 개미굴처럼 바다 밑에 뻗어있는 해저 탄광이었던 거야. 며칠 뒤 새벽, 도술이는 갱도 입구에 서. 갱도의 크기는 가로 2.2m, 세로 1.6m, 성인 남성이 허리를 숙여야만 겨우 들어갈 크기야. '그 안에 대체 뭐가 있나' 뚫어져라 쳐다봐도 그 속은 안 보여. 꽉 찬 어둠에 들어가기도 전에 겁부터 나지. 도술이는 바짝 긴장한 채 곡괭이를 들고 앞사람을 따라 갱도로 내려가. 안으로 들어갈수록 숨이 턱턱 막혀. 작업복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은 상태. 더 이상 입고 있을 수가 없으니까 결국 모두 벗어버리고 속옷 차림이 됐어. 깊이는 또 얼마나 깊은지, 한참을 걸어가. 죽을 지경이지 뭐. 굴 안에 들어가면 옷이 필요 없어요. 더우니까. 발가벗고 훈도시(일본식 속옷)만 입고. 내내 걸어가도 한 시간 걸어가서 내 일하는 현장까지 갈 때가 있어요. 그만큼 멀다고요. -설도술,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그렇게 한 시간쯤 들어갔을까? 희미한 불빛이 보이더래. 여기서 정지! 하라 감독관의 고함 소리에 모두 바짝 긴장해. 도착한 곳은 갱도의 끝, 바로 막장이야. 넌 이쪽으로! 그리고 넌 저쪽으로! 이렇게 오늘 일할 장소를 배정받는 거야. 도술이가 감독관의 결정을 기다리던 그때, 이상한 소리가 들리더래. 위에서 나는 소리 같아. 그런데 지금 이 위에 있을 거라고는, 갱도 천장이 전부잖아. 혹시 앞에 걸어가는 선배는 알고 있을까 싶어, 무슨 소리 안 들립니까? 라고 물었어. 그 순간, 입 다물어! 라는 감독관의 호통이 날아와. 왜 말을 못하게 하는 걸까? 기강 잡으려고 그러는 걸까? 사실 갱도 안은 산소가 부족했어. 바다 속이니까. 도술이는 지금 입구에서 1km 넘게 들어와 있어. 한 시간 동안 걸었다고 했잖아. 이 안으로 들어갈수록 환기는 어렵고, 그러니까 불필요한 대화는 철저히 금지한다는 거지. 물론 입구에서 송풍기로 공기를 불어넣고 '피야'라는 굴뚝이 환풍구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갱도 끝 막장까지 충분히 산소를 공급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거야. 도술이는 입을 꾹 닫은 채 귀를 기울였대. '쿵닥, 쿵닥, 쿵닥' 도술이 머리 위에서 들리는 소리. 정체가 뭐였을까? 바다 밑을 파니까 저기(갱도) 가서 일하면 바닷물에 배가 가는 소리가 콩콩콩콩콩 귀에 들렸는데… 그때 쿵닥 쿵닥 쿵닥 기계 소리가 나거든. 그 바닷물에 가는 배가 콩당콩당 가는 게 그 굴속에서 콩콩 들렸으니… 그 하늘(천장)이 얇으니까 저기 (배가) 가는 소리가 들린 거 아닙니까? 아이고 싶은 게 마음이 아찔한 게… 그만큼 위험한 곳에 가서 일을 했다 이 말입니다. -설도술,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머리 위로 배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 그제야 도술이는 실감이 났어. 지금 자기가 서 있는 이곳이 바다 아래라는 걸. 탄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주간반, 야간반 교대근무로 나눠서 12시간씩 석탄을 캐. 주간반인 도술이는 새벽 4시에 탄광에 들어가서 오후 4시에 나오는 거야. 그런데 갱도의 천장이 워낙 낮다 보니 허리 한 번 제대로 펼 수가 없어. 그 상태로 계속 곡괭이를 휘두르는 거지. 손에는 금방 물집이 잡히고 석탄을 캘 때마다 튄 조각에 여기저기 상처투성이야. 그리고 천장에서는 계속 물이 떨어져. 바닥은 이미 바닷물로 흥건해. 다행히 갱도 안에는 물을 빼내는 안전장치가 있어. 여기 움푹 들어간 곳이 바로 펌프실이었거든. 물이 이 웅덩이 깊은 곳에 고이면, 전기 펌프로 그 물을 퍼 올려. 그리고 물을 밖으로 빼내는 거야. 갱도 안으로 물이 계속 스며들었기 때문에 펌프는 1년 365일 24시간 내내 멈출 수 없었어. 탄광에 끌려온 도술이와 청년들의 삶도 마치 멈추지 못하는 펌프와 마찬가지였어. 쉬는 날이 거의 없이 일했거든. 매일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가, 온몸이 새까매진 채로 계속 떠오르는 삶이야. 너무 일이 사납고 천장도 낮고 밑엔 물이 질척질척하고, 그게 뭐 마음이 좋을리가 없고. 굴 안에서 일하고 나와보면 새까맣게… 말도 마세요. 우리 많이 고생했어요. -설도술,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편지를 보여줄게. 한 조선인 노동자가 감독관 몰래 고향에 보낸 거야. 어머님, 저는 지금 일본 야마구치현이라는 곳에서 탄광일을 하고 있습니다. 숙소는 마치 포로수용소 같은 곳입니다. 폭력을 가하고 밥도 주지 않고 굶기는 일이 허다합니다. 어쨌든 간에 반드시 탈출하여 반드시 어머니가 계시는 곳으로 돌아가겠습니다. -故김원달,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도술이도 매일 도망갈 생각만 했대. 하지만 그게 쉽지가 않지. 아까 처음 얘기했을 때 숙소 주변이 높은 울타리로 막혀있다고 했었잖아. 그게 전부가 아니었어. 울타리 위엔 이런 센서 선까지 설치돼 있었대. 여길 탈출하려면 깜깜한 밤을 틈타서 3m 넘는 울타리를 넘어야 하는데, 울타리 위 이 선을 잘못 건드리기라도 하면 발각이 되는 거네. 가까스로 울타리를 넘는데 성공을 했다 해도, 그게 끝이 아니야. 한쪽은 바다고 다른 한쪽은 산이야. 그러다 붙잡히기라도 하면, 모진 매질이 이어졌어. 쓰러져도 멈추질 않아. 달아난 사람이 달아나다가 사무실에 딱 붙들려서 오면, 그 사무실 바닥에다가 '그 녀석 나쁜 녀석, 이 자식 나쁜 놈이다' 하고 무조건 들고 패대니까 죽는다고 아우성을 치고 고함을 치고 그랬거든. 그렇게 두드려 맞아서 영구적인 장애를 얻은 사람도 있어요. -설도술,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그렇게 맞다가 목숨을 잃기도 했대. 구타를 해서 많이 죽어 나갔고, 매일 죽어나가죠, 사람이. 자꾸 죽어나가고 맞아 죽어나가고 하는 게 눈에 지금도 훤하게 보여요 앉아 있으면… 눈 감고 있어도 보이고, 그래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을 새울 때가 많아요. 너무… 매를 맞았어요. -故김경봉,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2016년 인터뷰) 결국 도술이는 도망치지 않았어. 근데 구타가 무서워서가 아니야. 고향에 있는 가족들 때문이야. '가족이 편하려면 내가 많이 벌어야지' 생각했어. 이 탄광에서는 얼마나 캤느냐가 곧 돈이었거든. 적정한 보상은 아닐지라도, 대가는 주는 그런 시스템이었거든. 조금이라도 돈을 많이 벌려면, 곡괭이를 더 빨리 더 많이 휘둘러야겠지. 도술이는 부모님과 형제들한테 조금이라도 돈을 보태기 위해 이를 악물고 버텼어. 1941년 12월, 도술이가 탄광에서 일한지도 벌써 2년이 넘었어. 어느새 23살이야. 이젠 새로운 사람들한테 일을 알려줄 정도야. 그런데 그 무렵에 도술이가 처음 왔을 때와 달라진 게 하나 있었어. 식당에 갈 때마다 줄이 길게 늘어서 있어. 새로운 사람들이 탄광에 계속 밀려들어오는 거야. 대부분 조선에서 끌려온 사람들이야. 도술이가 끌려온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이 조세이 탄광에 강제동원된 것으로 확인된 조선인의 수는 무려 1,258명. 도술이처럼 경찰의 출두명령을 받고 끌려온 사람, 돈 많이 주는 일자리라고 속아서 바다를 건넌 사람도 있어. 그 중 눈에 띄는 사람들에게는 사택을 마련해줄 테니까 가족을 데리고 오라거나, 결혼을 하라고 탄광 쪽에서 권하기도 했대. 어쩌면 그건 가족을 인질로 삼아서 오래 붙잡아 두려는 속셈이었는지도 몰라. 이렇게 탄광 주변에 하나의 마을이 형성된 거지. 그래서 조세이 탄광은 이렇게 불리기도 했어. 바로 '조센탄코', 바로 조선탄광. 결국 이 바다 아래로 내려간 사람들은, 대부분 바다 건너에서 끌려온 조선사람들이었던 거야. ▲ 운명을 바꾼 선택 그렇게 해가 바뀌고 1942년 1월의 어느 날, 도술이의 운명을 바꿀 일이 벌어져. 아까 도술이가 일을 악물고 정말 열심히 일을 했다고 했잖아? 그래서일까. 야간반의 감독관 나카무라의 눈에 띈 거야. 도술, 야간반으로 와라. 그럼 석탄이 많은 막장으로 보내줄게 라는 감독관의 제안을 도술이는 몇 번이나 거절했지만, 나카무라도 끈질겨. 결국 도술이는 야간반으로 옮겨. 오후 4시에 들어가서 밤새워 일하고, 새벽에 탄광에서 나오는 근무 일정인 거지. 아까 하고 시간이 완전히 반대가 된 거야. 그런데 이 선택이 불과 며칠 뒤에 그의 생사를 가르게 됐어. 1942년 2월 3일, 운명의 그날이야. 새벽 4시 도술이가 막 12시간의 야간작업을 마치고 갱도 밖으로 올라와. 안에서는 숨이 턱턱 막힐 만큼 덥고 습한데, 밖으로 나오니 겨울바람이 매서워. 도술이가 서둘러 그날 캔 석탄을 정리하고 있는데, 그때 눈에 익은 얼굴이 보였어. 고향에서 함께 온 친구 임출이야. 도술아, 고생 많았데이. 오늘 진짜 디네, 니도 고생해래이. 사실 그럴 때 고향친구만한 의지가 되는 게 없지. 평소와 다름없이 인사를 나누고, 도술이는 그대로 숙소로 향해. 이때까지만 해도 몰랐지. 몇 시간 뒤 탄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눈을 붙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갑자기 밖에서 다급한 고함 소리가 들려. 야! 일어나! 빨리 나와! 외치며 나카무라 감독관이 막 사람들을 깨우는 소리야. 목욕하고 와서 밥 먹고 방에 들어가 잠이 들었는데, 나카무라 감독관이 와서 막 일어나라고 고함을 지르고, '작업복 입고 일하는 것 같이 준비를 해 나오너라' 그래서… -설도술,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영문도 모르채 도술이는 급히 작업복을 걸치고 숙소 밖으로 뛰어나왔어. 그리고 식당 쪽을 지나는데,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어. '저기 내려다봐라' 그래서 여기 식당 가서 내려다보니까 바닷물이 막 천장 만장 튀어 올라오는데, 한 군데뿐만 아니에요. 여러 군데가 하얗게 뒤집어지는데 '저기 왜 저럽니까?' 그러니까… -설도술,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숙소에서 바다를 바라보니 바닷물이 기둥처럼 하늘로 솟구치고 있어. 여러 개의 물기둥이 솟아오르면서 바다가 온통 하얀 거품으로 가득해졌어. 탄광이 수몰되고 있어. 바다 밑 갱도에 구멍이 뚫리고, 바닷물이 갱도 안으로 쏟아져 들어가면서, 그 안에 있던 공기가 밖으로 밀려 나오면서 물을 기둥처럼 쏘아 올린 거야. 도술이는 곧장 갱도 앞으로 달려가. 매일 광부들이 들락날락하던 입구는 물이 흘러넘쳐. 입구 근처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어. 그날 아침 일하러 들어간 광부의 가족들이야. 아이고 아버지요! 아이고 행님! 왜 답이 없는겨! 어야노. 바깥양반 저 안에 있는데! 사람들이 광부들의 이름을 부르며, 물이 가득한 입구로 달려들어. 한겨울인데도 아무도 망설임이 없어. '우리 아들은 일하러 가서 안 왔다', '우리 남편은 일하러 가서 안 왔다' 아버지, 형님, 동생 이러고 굴 안에서 들여다본다 이 말이야. 이건 뭐 죽을 판 살 판, 물이고 어쩌고 자꾸 달려든다 이 말이지. -설도술,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붙잡아서 물가로 데리고 나오면 또다시 물속으로 들어가려고 해. 남편의 이름을 부르짖는 아내, 아버지를 찾는 아이, 탄광촌 전체가 울음바다야. 그때 한 여자가 입구 앞에 쓰러졌대. 그 옆엔 3살짜리 막내 아들 재봉이가 있었어. 그날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볼게. 제 이름은 신재봉입니다. 나이는 지금 1939년생, 만 87살입니다. 내가 태어난 게 일본 야마구치현 탄광촌, 우베시. 제 위로 네 분이 계시는데, 형 세 분이고 누님 한 분인데. 저 혼자만 남아서 지금 인터뷰를 하고 있어요. 제가 3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아침에 밥 잘 잡숫고 새벽에 나가신 분인데… 서른일곱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까. 어머니는 30대 초반입니다. 그 젊은 나이에 혼자 돼가지고, 탄광촌 탄광 입구에 가서 물이 철렁철렁 입구까지 차 있는데, 거기 가서 쓰러지신 거예요 그냥. -신재봉,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故신용업의 아들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갱도 안은 어떤 상황인지, 구조는 어떻게 할지, 알려주는 사람이 없어. 가족들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그때, 갑자기 수십 명의 헌병대가 나타났대. 돌아가! 여기 오지 마라! 헌병들이 울고 있는 가족들을 밀어내더니 갱구 앞으로 가. 손에는 판자와 각목, 그리고 각종 연장이 들려있어. 헌병들은 들고 있던 판자와 각목으로 갱구를 막아버려. 아직 안에 사람이 있는데, 가족들이 애타게 기다리던 구조대는 끝내 오지 않아. 1942년 2월 3일, 조세이 탄광의 갱구는 그렇게 가족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대로 닫혔어. 몇 명이 사망했고 어쩌다 사고 났는지도 모르는 채로. 남은 가족들은 그 후에 어떻게 했을까. 갱구 앞에 쓰러졌던 재봉이의 엄마, 남편의 시신을 찾을 엄두도 내지 못했대. 집에 돌아오면 5남매가 엄마만 쳐다보고 있는데, 울고 있을 틈이 없잖아. 당장 먹고 살 길이 급해. 그래서 근처 다른 탄광으로 일을 하러 가. 남편을 집어삼킨 탄광으로. 그런 어머니를 보며 아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머니는요. 자꾸 어머니 얘기하려니까 내 슬픈 마음이 들어서 말이 잘 안 나오는데. 이 세상에 여자로 태어나서 참 어머니같이 고생을 많이 하신 분은 없어요. 눈만 뜨면 우리 밥해놓고 딱 먹을 거 차려놓고는 탄광으로 일하러 나갑니다. 할 일은 없고 애는 먹여 살려야 되고. 슬퍼서 울고 통곡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어요. 3살 먹은 놈이 뭘 알겠어요? 내가 이렇게 나이 들 보니까, 참 슬픈 일이에요. -신재봉,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故신용업의 아들 그렇다면 살아남은 도술이는 어땠을까. 그날 이후 도술이는 숙소 밖으로 나가지 않아. 임출이를 비롯해서 두만이, 만조, 영출이 고향 친구들이 많이 죽었거든. 도술이는 조를 바꿨기 때문에 살아남은 거야. 그래서 친구들의 가족이 도술이만 마주치면 늘 이렇게 말했대. 아이고 도술아… 니는 우찌 살았노? 라고. 그 시내 쪽은 못 나갔어요. 나는 못 나갔어요. 왜 못 나가냐 하면, 죽은 사람의 어머니, 아버지, 형제, 부인, 아이들 이 사람들이 많이 면(얼굴)을 안다 이 말이에요. '아이고, 니는 어떻게 안 죽고 살았노' 하며 달려들어서 붙들고 울고 하니. 나도 눈물이 나오고… -설도술,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그날 이후 탄광은 아수라장이야. 사무실을 지키던 감독관들도 하나 둘 자취를 감춰. 그래서 급여도 제대로 받지 못했대. 결국 많은 사람들이 울타리를 넘어 달아나. 도술이는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을까? 아까 도술이가 어떻게 탄광에 왔다고 했지? 배를 타고 강제로 끌려왔다고 했잖아. 강제 동원된 조선인이 배를 타고 조선으로 돌아간다? 이건 아무래도 어렵겠지. 현실적으로 도술이는 살아는 남았지만, 일본을 빠져나갈 수는 없었어. 산 사람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가 없는데, 갑작스럽게 이 탄광에서 돌아가신 분들은 어땠겠어? 입구가 닫힌 갱도 안에 그대로 남겨지게 돼. 그리고 그 위로 긴 세월이 흘러. 그 사이에 조선은 해방을 맞이했고, 탄광촌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할아버지가 됐어. 하지만 바다 아래에 남은 분들의 시간은, 1942년 2월 3일 그날에 멈춰있어. ▲ 진짜 이름을 찾아서 멈춰있던 그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49년이 지난 1991년 가을이야. 아까 그 편지, 일본어와 함께 온 편지 기억나? 편지를 보낸 사람은 야마부치 타케노부라는 사람이야. 바로 이 분이야. 조세이 탄광이 있던 우베시의 고등학교 교사였어. 타케노부 씨는 우베시에서 나고 자랐어. 조세이 탄광이 수몰됐을 땐 초등학생이었지. 그땐 이 일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대. 그러다 20년이 흐른 1960년대 중반, 고향으로 돌아와서 고등학교 교사가 된 타케노부 씨는 우연히 한 학생의 집에 가정 방문을 하게 됐어. 그런데 그 집에 들어서는 순간, 깜짝 놀라. 어린 시절, 자기가 탄광촌에서 봤던 집들과 똑같이 생긴 거야. 그 학생의 집이 알고 봤더니 예전 조세이 탄광의 사택이었거든. 그 집에 들어서자, 잊고 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던 거지. 타케노부 씨는 이 일을 자세히 알아보려고 했어. 하지만 남아있는 건 사고 직후 나온 짧은 기사 몇 개가 다야. 그마저도 원인과 피해 상황은 조사 중이라는 내용이 전부였어. 그러니까 제대로 밝혀진 게 아무것도 없는 거야. 그때부터였대. 타케노부 씨는 조세이 탄광에 대한 기록을 하나씩 모으기 시작해. 그날 정확히 몇 명이 숨졌는지, 그들이 대체 누구였는지, 시간 속에 묻혀있던 이 일을 다시 들여다보게 된 거야. 그리고 1991년, 마음맞는 사람들끼리 모임을 하나 만들었대. 이름하여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 줄여서 '새기는 모임'. 타케노부 씨는 오래된 기록을 뒤지고 그날의 일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녔어. 그러던 어느 날,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어. 어느 한 절에, 사망자들의 명부가 보관돼 있다는 거야. 곧바로 달려간 타케노부 씨가 명부를 한 장 한 장 넘겨보는데,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해. 이름이 하나 둘 셋,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 거야. 대체 이름이 몇 명이나 적혀 있었을까? 타케노부 씨와 오랫동안 활동을 함께한, 현재 새기는 모임의 대표 이노우에 요코 씨에게 들어볼게. 저는 일본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의 대표인 이노우에 요코라고 합니다. 그게 우연인데요. 재일교포 스님이 계신 절에 조세이 탄광의 사망자 명부가 있었습니다. 원래 일본에서 한두 명 죽은 건 기록에 잘 남기지 않지만, 183명이나 되는 분들이 일본의 국가정책이었던 석탄 산업으로 인해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것이 기록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던 거죠. -이노우에 요코, &<조세이 탄광 수몰 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 현 대표 1942년 2월 3일, 그날 탄광이 물에 잠기면서 목숨을 잃은 사람은 모두 183명. 그 중 조선인은 136명으로 추정돼. 남아있는 기록마다 사망자의 숫자가 달라서 추정할 수 밖에 없어. 그런데, 명부를 확인하는 타케노부 씨와 요코 씨의 눈에 뭔가가 들어와. 조선인 사망자들의 이름이 대부분 일본식으로 적혀 있는 거야. 거기에 적힌 이름들은 모두 창씨개명된 이름들이었습니다. 창씨개명된 이름 자체가 조선인분들에게는 정말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을 거라고 저희도 생각하고 있었기에, 이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는 건 돌아가신 분들의 존엄을 해치는 일이라는 생각에, 가능한 한 원래 이름을 찾아내서 추도비에 새겨 넣고 싶었습니다. -이노우에 요코, &<새기는 모임&> 현 대표 '새기는 모임'의 첫 번째 목표가 사망자들의 이름을 새긴 추도비를 세우는 거였거든. 근데 이게 왜 첫 번째 목표였을 것 같아? 일본인으로서 사죄의 마음을 전하는 첫 걸음이라고 생각한 거지. 정부가 안 하니까. 강제로 바꾼 일본식 이름으로 비석에 그 이름을 새겨둔다? 말이 안 되는 거지. 이 이름으로는 추도비를 세울 수 없다고 생각한 이들은, '진짜 이름'을 찾기로 했어. 근데 어떻게 찾지? 두 사람이 명부를 자세히 살펴보니까 이름 옆에 뭔가가 써있더래. 바로 사망자들이 원래 살던 조선의 주소야. 근데 반세기나 흘렀기 때문에 가족이나 아는 사람이 거기 있을지는 알 수 없어. 그래도 이 주소가 유일한 희망이었어. 한반도에서의 옛 주소도 적혀있었기 때문에 저희는 1991년 가을에 한국과 북한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그분들(사망자)의 이름으로 옛날 주소 그대로 말이죠. 한 분이라도 좋고 두 분이라도 좋으니, 원래 이름만 찾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그 희망의 끈을 이어가고자 보낸 편지였습니다. -이노우에 요코, &<새기는 모임&> 현 대표 그런 간절한 마음으로 한국에 100통이 넘는 편지를 보냈어. 답장, 몇 통이나 왔을 것 같아? 한 통, 두 통, 세 통… 놀랍게도 무려 열일곱 통이나 답장이 왔어. 편지 속엔 그토록 찾던 원래 이름이 담겨 있었어. 반세기 전 주소만 믿고 무작정 보낸 편지. 가족한테 닿기만 해도 이건 기적이라고 생각했는데, 답장까지 온 거야. 대단한 일이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둘은 편지를 읽어 내려가. 그런데, 그 답장에 적힌 내용이 정말 뜻밖이야. 뜻 밖에도 무려 17통이나 되는 답장이 왔습니다. 그 답장의 대부분은 아버지가 일본으로 떠난 뒤 어디에 계신지, 살아 계신지 돌아가셨는지도 알 수 없었던 상황에서, 50년이 지난 뒤 저희가 보낸 이 편지를 통해 아버지가 이곳에서 돌아가셨다는 것, 즉 조세이 탄광의 사망자였다는 사실을 아신 거죠. -이노우에 요코, &<새기는 모임&> 현 대표 아버지가 일본으로 떠나신 뒤에 생사도 모르고 지냈다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던 거야. 편지를 받고서야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걸 처음 알게 된 사람도 있었대. 일본에서 날아온 그 편지 한 통이 50년 만에 아버지의 마지막 소식을 전한 셈이지. ▲ 다시 찾은 아버지 그때부터 전국에 흩어져 있던 유족들이 한자리에 모였어. 그 후 사고 현장에서 매년 함께 추도식을 열게 돼. 1993년도에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을 갔어요. 차례대로 잔 올리고 절하고… 같이 합동 절하고 그랬죠. 내가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아버지 제사를 바닷가 현장에 와서 지내니, 이런 날이 오는구나 싶은 게, 감회가 말할 수가 없지. -박정일,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故박맹문의 아들 어떤 힘으로 던졌는지, 던졌는데 꽃을 바다로 향해서. 처음 불러봤어요. '아버지'라는 것이 내 입에서 나오겠습니까? 그 한마디 딱 해보고는 지금까지 못 해봤어요. -신재봉,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故신용업의 아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저 왔습니다! -故전석호,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故전성도의 아들 그래도 매년 보고 싶었을 겁니다. 원래 제사 지내고 하면 누군가의 제사를 지내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잖아요. 똑같은 그런 감정이 있을 겁니다. -전영복,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故전성도의 손자, 故전석호의 아들 그리고 2006년, 믿기 힘든 소식이 들려왔어. 그날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 나타난 거야. 21살의 나이에 강제 동원되었다가 이제는 아흔을 바라보는 설도술 어르신. 2007년 2월, 어르신은 일본으로 향했어. 건강을 이유로 가족들은 극구 말렸지만 어르신은 고령에도 뜻을 굽히지 않으셨어. 어르신의 목적지는 단 한 곳. 65년 전 친구들을 남기고 떠나온 바로 그 바다야. 끌려 갔었던 그 탄광에 다시 오는 데 걸린 시간 65년. 청년은 그 사이 노인이 되었어. 탄광은 모두 폐허가 되었고, 남은 건 바다 위로 솟은 '피야' 뿐이었어. 65년 동안에 다 변해버렸어. 코구치(갱구)도 다 망가져 버리고 없고… 솔밭에 같이 들어가 얼마를 찾았나. 나무만 수북하고 찾지도 못하고. 그저 여기, 시멘트 있는 여기가 그때 굴 안에 들어가는 입구다, 이것만 짐작할 따름이지 아무 형체가 없어요. -설도술,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탄광이 있던 곳엔 수풀만 무성해. 입구로 짐작되는 곳은 여전히 막혀 있었어. 65년의 세월이 모든 흔적을 다 덮어버린 거지. 끝내 갱구는 찾지 못했어. 눈에 보이는 탄광의 흔적이라고는, 바다 위에 떠 있는 두 개의 기둥뿐. 도술 어르신은 한참 동안 그 바다만 바라 보셨대. 그때 죽은 사람들은 죽은 뒤에도 저 사람들은 물속에 들어앉아 있으니. 바닷물 때문에 빼낼 수가 없어. 저 물 때문에 못 간단 말이야, 물 때문에. 저 큰 바닷물은 어떤 장사가 퍼내나? 우리 친구들이 183명이 저기 누워있는데 참 가엾다 싶은 게, 생각하니 눈물밖에 안 나요. 안 나는데… 눈물 난들 그 사람들과 말을 한번 해 볼 건가, 그 사람들 하나 데리고 올 수가 있나… -설도술,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이 바다에 다시 오는데 정말 긴 시간이 걸렸잖아. 그런데 누구 하나 데리고 나올 수도 없어. 그래서 그저 바다만 바라보며 눈물만 삼킬 수밖에 없었대. 그러다 문득,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라. 고향에서 함께 바다를 건너왔던 그 친구, 임출. 어르신은 곧바로 근처의 한 절로 향해. 사망자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곳이야. 정임출이, 그 위패를 보니까, 하이고… '이 사람들이 여기 안에 있는데' 싶은 게, 막 눈물이 주룩 나서 울었어요. -설도술,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65년 만에 다시 만난 친구는 낯선 일본식의 이름으로 위패에 남아 있었어. 도술 어르신이 할 수 있는 건 그 이름 앞에 절을 올리는 것 뿐이었대. ▲ 참사가 사고였을까? 근데 그날 참사는 누구도 예상 못한 사고였을까? 대체 뭐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도술 어르신은 그날 새벽에 본 장면을 잊지 못해. 그날의 참사를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장면이야. 그 자리에 두 사람이 밤낮 지키고 있었다 이 말이요. 그 사람들이 많이 원망스러워요. -설도술,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지금부터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들어야 돼. 다시 그날로 돌아가볼게. 1942년 2월 3일 새벽 4시경. 물기둥이 솟아오르기 약 6시간 전이야. 야간 작업을 마친 도술이가 갱도 밖으로 올라오고 있었어. 그런데 갱도 한쪽에 일본인 감독관 둘이 앉아 있더래. 그 옆엔 전화기가 놓여있고, 물이 새는 곳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거야. 사실 광부들이 전혀 몰랐던 일이 있었어. 사고 이틀 전인 2월 1일 새벽 6시. 갱도에 새어 나오는 물의 양이 평소보다 3배나 많았던 거야. 2월 1일은 일요일이라 휴일이었는데, 갱내 관계자가 탄광 내부를 순찰하던 중 평소 출수량보다 약 3배 정도 많은 비정상적인 출수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결국 20시간이나 걸려서야 겨우 멈출 수 있었습니다. -나가사와 시게루, 일본 역사 연구자 20시간에 걸친 보수작업 끝에 겨우 물이 새는 걸 막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야. 사고 전날인 2월 2일에도 평소의 2배가 넘는 물이 새어 나왔거든. 광부들이 이 사실을 전혀 몰랐대. 그 굴 안에 들어가 일하는 사람들은 그 감독관만 믿고 설마 '거기 지키고 있으니까 애로사항이 생기면 우리도 나오라고 할 거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고 그 굴 안에 들어가 땅 파고 일만 했는데… -설도술,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교대로 물이 새는 걸 지켜보는 감독관이 있으니, 위험해지면 작업을 멈추게 할 거라고 믿었던 거지. 그럼 왜 갑자기 갱도에서 평소보다 많은 양의 물이 새어나온 걸까? 그 배경에는 바로 '전쟁'이 있었어.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해.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 거야. 당시 석탄은 공장, 기차, 군함을 움직이는 핵심 자원이었어. 그러니까 이게 없으면 전쟁을 못해. 전선이 넓어질수록 더 많은 석탄이 필요해져. 탄광에는 더 빨리, 더 많이 석탄을 캐라는 명령이 내려와. 조세이 탄광도 예외는 아니었지. 1942년 1월, 조세이 탄광에선 특별한 작업이 이뤄졌어. 이른바 '오오다시'(대량채굴). 평소보다 훨씬 많이 석탄을 캐는 날이야. 그냥 작업량을 조금 늘리는 수준이 아니야. 광부들은 물론이고 당시 갱도를 관리하고 보수하던 직원들까지 모두 석탄을 캐는 데 투입됐어. 탄광의 안전을 지켜야 할 사람들까지 석탄 캐는 데 동원한 거지. 사고 직전 1942년 1월 30일 금요일, 1월 31일 토요일, 이틀 연속으로 오오다시를 했는데, 1942년 1월에는 오오다시를 무려 네 번이나 했습니다. 그날은 갱내에 있는 지주부(보수작업 담당 노동자)나 갱내 다른 직종의 사람들까지 채굴 작업에 투입시켜서, 평소보다 석탄을 더 많이 캐는 날을 말합니다. 저는 그것이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나가사와 시게루, 일본 역사 연구자 나중에 밝혀진 기록에 따르면, 조세이 탄광이 무너진 결정적인 이유는 탄주라고 불리는 석탄 기둥까지 제거해서야. 갱도가 무너지는 걸 막기 위해선 석탄 일부를 기둥처럼 남겨둬야 하는데, 그마저 다 손을 댔다는 거야. 생산량을 늘려야 하니까 그냥 막 캐낸 거야. 사고 이틀 전부터 새어 들어온 물은 이미 약해지고 있던 그 갱도가 보낸 경고가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그날의 참사는 사고가 아니야. 사고가 아니라 사람이 만든 사건인 거야. ▲ '양심'에 귀 기울이기 그런데 말이야. 지금까지 얘기한 사고의 원인, 그리고 사망자의 정보. 이 모든 건 한국이나 일본 정부가 조사한 게 아니야. 전부 타케노부 씨와 새기는 모임의 노력 덕분에 이 세상에 여기까지 드러날 수 있었던 거야. 이 모임의 첫 번째 목표, 사망자들의 진짜 이름을 새긴 추도비를 세우는 것. 그래서 한국에 있는 유족들에게 답장을 받은 뒤, 사고 당시의 사망자 명부와 위패 기록, 그리고 유족의 기억을 맞춰나가. 그렇게 한 사람, 또 한 사람 맞춰 나간 끝에, 2013년 조세이 탄광 근처 해안에 마침내 추도비가 세워졌어. 사건 발생 후 71년 만이었어. 이게 일본에서 먼저 시작됐다는 것도 놀라운데, 타케노부 씨, 요코 씨 그리고 수많은 새기는 모임의 회원들까지. 이 모든 일을 국가가 아닌 개인들이 해낸 거야. 어쩌면 일본인 입장에선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일 수도 있잖아. 그런데 이 타케노부 씨와 요코 씨는 왜 이렇게까지 한 걸까? 이런 질문에 요코 씨는 한 단어로 답을 했어. 바로 '양심'이야.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 양심. 한국인이냐 일본인이냐의 문제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오랜 세월동안 모두가 외면해왔던 이 비극을 그냥 모르척 할 수가 없었다는 거야. 그 양심이 자신들을 계속 행동하게 만들었다는 거야. 안타깝게도 그 타케노부 씨는 2015년도에 세상을 떠나셨지만, 요코 씨와 새기는 모임 회원들은 여전히 계속해서 활동하고 있어. 사망자들의 진짜 이름을 찾는 데만 무려 22년이 걸렸어. 추도비를 세웠으니 이제 다 끝난 걸까? 이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해. 일본이 일으킨 전쟁 때문에 한반도에서 오신 분들이 유골조차 방치된 채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 역시 그것은 일본으로서 또는 일본인으로서 반드시 돌려 드려야 한다는 생각이 제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으로서의 양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말 많은 분들의 유골을 어떻게든 구해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지요. -이노우에 요코, &<새기는 모임&> 현 대표 바다 아래 잠들어있는 유골을 찾아서 고향 땅으로 돌려보내는 것. 그분들이 원해서 간 것도 아닌데, 여전히 타국의 깊은 바다 아래 둔 채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 그러면 가장 먼저 뭐부터 해야 될까? 사건이 벌어진 그날 굳게 다친 갱구, 그것부터 열어야겠지. 새기는 모임의 회원들이 옛 도면을 뒤지고 생존자들의 증언을 맞춰가면서 나무를 베고 수풀을 걷어내고 흙을 파내. 그렇게 얼마나 팠을까, 흙 속에서 오래된 나무 판자를 발견해. 사건 직후 헌병들이 막았던 그 갱도 입구야. 그럼 입구를 여는 데 성공했을까? 쌓여있는 흙을 파내자 조금씩 드러나는 갱도 입구. 흙을 걷어내자 갑자기 쏟아져 나오는 물. 그렇게 82년 만에 갱도에 다시 빛이 들어가기 시작했어. 저희들은 갱구를 열었다는 것이 사망자분들에게도 의미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그분들은 갱구를 향해 도망쳐 오셨는데, 그 갱구가 그날 바로 닫혀버렸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갱구를 여는 일은 가장 먼저 해야만 했던 일이었습니다. 그 안에 어떻게든 빛을 비춰주는 것이죠. 그 일을 두고는 정말… 갱구를 열었을 땐 희망밖에 없었습니다. -이노우에 요코, &<새기는 모임&> 현 대표 2024년 9월 25일, 마침내 갱구가 열렸어. 그 앞에서 이봐! 들리는가? 갱구가 열렸다고! 라고 힘껏 외쳤어. 어떤 마음으로 이렇게 외쳤을 것 같아? 단순히 옛 탄광 입구를 찾는 일만이 아니야. 82년 만에 어둠 속에 갇힌 공간에 빛을 들여보내는 일이야. 그리고 무엇보다 유골의 위치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 거야. 사실 그간 새기는 모임에서 계속해서 일본 정부한테 책임지고 유해를 수습해달라고 했지만, 유골의 위치를 알 수 없다는 이유로 조사할 수 없다라는 답변만 받아왔거든. 정부를 설득할 수 있는 증거, 그 유골을 찾아야만 했던 거지. ▲ 83년만의 퇴근 자, 이제 유골을 찾아서 모시고 나오면 돼. 잠수사들이 갱구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해. 그런데 곧바로 문제가 생겼어. 온통 흙탕물이라 바로 앞도 보이질 않아. 게다가 무너진 구조물들이 많아서 너무 위험한 거야. 유해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점은 갱구에서 약 1.1km 거리야. 거기까지는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어. 자, 그럼 이제 포기해야 하는 걸까? 그럴 수 없지. 여기까지 왔는데. 2025년 8월 25일, 김경수, 김수은 두 한국인 잠수사가 새로운 곳으로 들어가. 바로 바다 위에 남아있는 기둥, '피야'. 이곳으로 들어가도 갱도로 연결돼. 보이면 무조건 찾는다. 무조건 찾는다. -김수은 잠수사 '좋은 결과를 가지고 나오자' 그런 생각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유해들을 발굴해서 모시고 나와서 가족분들 품에 돌려다 드렸으면 좋겠다. 그런 감정이 좀 컸습니다. -김경수 잠수사 수면 아래로 내려간 두 잠수사가 손으로 벽을 더듬으면서 천천히,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 칠흑같은 갱도 안, 돌, 철로, 벽, 천장. 손에 잡히는 대로 하나씩 확인해 나가. 얼마나 지났을까? 앞서 가던 김수은 잠수사가 다급하게 외쳐. 찾았다, 찾았다! 어두운 갱도 속에서 발견된 머리뼈. 이 소식은 곧바로 바다 위 사람들에게도 전해졌어. 그렇게 83년 만에 뭍으로 올라온 뼈는 검게 변해 있었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기다리고 계시는 유족 분들이 있잖아요. 그래도 뭔가 좀 해야 할 일을 했구나. -김수은 잠수사 '80년 넘게 우리 안 잊고 이렇게 데리러 와주려고 노력해서 고맙다' 그런 생각들을 하지 않을까요? 잊지 않고 기억해줘서 고맙다고… -김경수 잠수사 이어진 몇 차례 탐사에서 추가로 발견된 유골들. 1942년 2월 3일 그날 이후 83년 동안 갇혀있던 사망자들이 드디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거야. 길었던 기다림을 말하는 듯, 뼈는 검게 물들어 있었어. 유족들의 입장에서는 이것보다 고맙고 기쁜 일은 없겠지. 이 기쁜 소식을 뒤늦게 듣게 된 사람이 있어. 조세이 탄광에서 근무했던 설 도자 술자 할아버지의 맏아들 설정수입니다. 2019년도에 돌아가셨으니까 지금 한 6년 정도 됐네요. (2007년) 그때 위령제 지내러 간다고 할 때가 집에서는 반대를 많이 했습니다. 못 가게. 그런데도 아버지가 꼭 가시겠다고 그래서, 막지를 못하고 갔다 오셨는데. '내가 그래도 잘 다녀왔다' -설정수,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故설도술의 아들 정수 씨는 갱도 입구가 2024년도에 열렸다는 소식을 듣지 못 했다고 해. 아… 그거 참. 그게 열렸구나. (아버지가) '늦게라도 유골을 발견했으니까 그래도 다행이다. 그거라도 다행이다' 이런 말씀 당연히 안 했겠습니까? -설정수,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故설도술의 아들 안타깝게도 도술 어르신은 갱구가 열린 것도, 유골이 발견됐다는 소식도, 듣지 못한 채 떠나셨어. 하지만 어르신께서 기억을 더듬어 남긴 그 목소리는 사라진 조세이 탄광의 모습을 되살리는 중요하고 소중한 기록이 됐지. ▲ 마지막 귀향길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많은 유족이 세상을 떠났어. 하지만 그렇다고 이 일이 끝난 게 아니야. 새기는 모임의 요코 씨는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하셨어. 일본과 한국, 그리고 한반도의 유족 여러분. 정말 오랜 시간 기다리게 해 드린 것에 대해 사죄의 말씀을 드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유족 여러분의 마음을, 제가 정말 유족이 될 수는 없지만 그 마음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그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은 사람이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족 여러분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제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여러분께서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노우에 요코, &<새기는 모임&> 현 대표 올해 1월 한일정상회담에서 발견된 유골의 신원 확인을 위한 DNA 감정에 함께 협력을 하기로 했어. 조세이 탄광에서 발견된 유골에 관해서는 DNA 감정에 대한 협력을 위해…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 과거사 문제에서 작지만 의미 있는 진전을 이루어낼 수 있어 참으로 뜻깊게 생각합니다. -이재명, 대한민국 대통령 그리고 바다 아래에 있는 그분들의 귀향길, 이제부터가 시작 아닐까. 그 유골이 아버지 것 같으면 얼마나 좋겠어? 딴 거 없습니다. 제발 아버지 것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내 살아생전에. -신재봉,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故신용업의 아들 지금은 무덤 안에 아무것도 없어요. 오랫동안 차가운 물 속에 계셨스니까요. 그러니 유골이 나오면 빨리 모셔가서 무덤에 잘 안치해 드리고 싶습니다. -츠네니시 카즈히코, 조세이탄광 노동자 故츠네니시 하츠타다의 아들 조세이 탄광 사건은 아직도 풀어야 할 매듭이 여전히 많이 남아있어. 사진으로 봤던 검은 뼈도 누구의 것인지 모르고, 몇 명의 것인지조차 몰라. 심지어 바다 아래 남아있는 유해를 언제 어떻게 발굴할지, 일본 정부는 아직 구체적인 계획을 내놓지 않고 있거든. 그래도 우리는 지치지 말고 끈기 있게 그 매듭을 계속해서 풀어 나가야겠지. 언젠가 아직도 그 바다 아래 남아계신 분들이, 기다리는 가족분들의 곁에 모두 무사히 잘 돌아가실 수 있을 때까지.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
[스브스夜] '꼬꼬무' 조세이 탄광 수몰 사고··· 이 봐, 갱구가 열렸다고 82년 만에 진실이 세상에 드러난 '그 날' [스브스夜] '꼬꼬무</font>' 조세이 탄광 수몰 사고··· 이 봐, 갱구가 열렸다고  82년 만에 진실이 세상에 드러난 '그 날' 등록일2026.09.11 조세이 탄광에서는 그날 무슨 일이 있었나 10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검은 뼈 - 49년 만에 전해진 부고'라는 부제로 조세이 탄광에 대한 그날을 조명했다. 1991년, 전국 곳곳에서 일본에서 출발한 편지를 받은 이들이 등장했다. 편지를 받은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 1942년 2월 3일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에서 가족 중 누군가가 사망했다는 것. 유족들은 어느 것 하나 아는 게 없었다. 그런데 그날에 대한 생생히 기억하는 이들이 있었다. 1939년 갑자기 일본으로 끌려간 스물한 살의 청년 설도술. 같은 처지의 청년들은 수백 명이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이들이 도착한 곳은 야마구치현 우베시에 있던 조세이 탄광. 이들은 철저한 감시 속에 바다 밑에 뻗어있는 해저 탄광인 조세이 탄광에서 일을 시작했다. 머리 위로 지나가는 배의 엔진 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열악한 환경에서 수많은 청년들은 허리 한번 제대로 펴지도 못하고 일을 했다. 이에 청년들은 항상 이곳을 벗어날 궁리를 했지만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청년들은 매일매일 일본인들의 가혹 행위를 당했고 맞아 죽지 않기 위해 그곳을 벗어나는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무려 천여 명의 조선 청년들이 강제로 끌려왔다. 1942년 운명의 그날, 일을 마치고 잠을 자던 설도술. 감독관의 다급한 외침에 밖으로 나온 설도술은 탄광이 수몰되는 모습을 직접 마주했다. 갱도 앞에는 수많은 이들이 가득했다. 바닷물로 막혀버린 갱도 입구 앞에서 수많은 이들이 울부짖었다. 작업을 하러 들어간 가족들을 찾고 있었던 것. 시간이 지나도 갱도 안이 어떤 상황인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알려주는 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등장한 일본 헌병대는 갱도로 들어간 이들을 애타게 찾는 가족들 앞에서 갱구를 막아 버렸다. 몇 명이 사망하고 어쩌다 사고가 났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유족들은 가족의 시신을 찾지도 못했고, 남은 유족들은 가족들의 생활을 위해 가족을 집어삼킨 탄광으로 일을 하러 갔다. 그날 이후 도술은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하며 두문분출했다. 그리고 이후 시간은 흘러 흘러 해방을 맞았고 시간은 더욱더 흘러 1991년이 되었다. 야마구치 타케노부라는 우베시의 고등학교 교사. 조세이 탄광에 대해 뒤늦게 알게 된 야마구치. 그는 조세이 탄광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이에 대한 정보들을 하나둘씩 모았다. 그리고 또 시간이 흘러 그는 조세이 탄광 수몰 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을 만들어 마음 맞는 이들과 모여 사건에 대한 정보 수집을 했다. 어느 날, 한 절에 사망한 이들의 명부가 있다는 소식을 접한 야마구치. 그는 명부를 보고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명부에는 183명의 사망한 이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당시 일본의 국가정책이었던 석탄 산업으로 인해 사망한 이들의 이름. 그중 조선인은 136명에 달했다. 그런데 그곳에 적힌 이름들은 모두 창씨개명된 일본식 이름이었다. 새기는 모임의 첫 번째 목표는 사망자들의 이름을 새긴 추도비 세우기. 이들은 창씨개명한 이름으로 불리던 이들의 아픔을 알았고 그들을 기리기 위해서는 일본식 이름이 아닌 진짜 이름을 찾아서 추도비에 새겨 넣고 싶었다. 이름 아래 적힌 고향 주소를 발견한 새기는 모임. 이에 새기는 모임은 1991년 한국과 북한으로 편지를 보냈다. 이들은 본명을 찾기 위해 118통의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17통의 답장을 받았다. 답장의 내용은 대부분 사망한 가족의 생사나 소식을 전혀 알지 못했던 가족들이 새기는 모임의 편지로 조세이 탄광의 희생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50년 만의 편지가 가족들의 부고장이었던 것. 편지를 받은 이들은 가족을 추모하기 위해 조세이 탄광을 찾았다. 이들은 바다 어딘가에 있을 가족의 이름을 부르며 떠난 이들을 그리워했다. 2006년, 조세이 탄광의 생존자 설도술. 그는 65년 전 친구들을 남기고 온 그 바다로 다시 돌아갔다. 그리고 옛 탄광 자리의 남은 흔적만 바라보며 떠나간 친구들을 안타까워하고 눈물만 흘렸다. 사망한 이들의 위패가 모여진 절에 가서 친구의 낯선 이름 앞에 절을 하는 것 말고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설도술 씨. 그는 당시 갱내 관계자가 비정상적 출수 현상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갱도에서 일하던 광부들은 감독관이 상황을 지켜보니 그들만 믿고 작업을 했지만 감독관들은 제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 전쟁을 위해 석탄의 꾸준한 공급이 필요했던 일본. 그리고 평소보다 석탄을 많이 캐는 작업을 며칠에 걸쳐했고 그 과정에서 탄주라고 불리는 석탄 기둥까지 제거하며 붕괴가 된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안겼다. 그리고 새기는 모임의 노력 덕분에 2013년 조세이 탄광 희생자를 기리는 추도비가 세워졌다. 그들이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양심 때문이었다. 새기는 모임의 다음 모임은 희생자들의 유해 발굴이었다. 이 또한 인간으로서의 양심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끊임없는 노력 끝에 갱도 입구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고 막혀있던 갱구를 열었다. 이 봐, 갱구가 열렸다고 라고 외친 새기는 모임. 82년 만에 희망의 빛을 본 이들. 이들은 이어 유골 발굴을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어두운 갱도 속에서 발견된 희생자의 유골. 2025년 이윽고 세상 밖으로 나온 유골은 검게 변해 있었다. 갱도가 열린 것도 유골이 발견된 것도 모른 채 세상을 떠난 설도술 씨. 모든 이들을 대신해 사죄의 마음을 전한 새기는 모임. 새기는 모임의 요코 씨는 제가 유족이 될 수는 없겠지만 그 마음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그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은 사람이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유족들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제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다 라고 머리를 숙여 눈길을 끌었다. 올해 1월 한일 정상회담에 유골 DNA 감정에 협력하기로 한 양국 정부. 바다 아래 잠든 이들의 귀향길은 이제부터가 시작 아닐까. (SBS연예뉴스 김효정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