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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찐리뷰] 양심 버린 갓길 운전, 구조 골든타임 놓쳤다…'서해대교 29중 추돌 사고'의 비극
등록일2025.12.12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11일 방송된 '서해대교 29중 추돌사고'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그룹 아일릿 윤아, 배우 이서환, 윤현민이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하얀 그림자 때는 2006년 10월 3일 개천절이야. 그해 개천절은, 추석 연휴가 이어지는 징검다리 황금연휴였어. 연휴가 길다 보니 나라 전체가 축제 분위기였어. 딱 한 곳만 빼고. 바로 고속도로 상황실.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차량이 많아지니 신경 쓸 게 많아. 그런데 거기서 특별히 더 신경 쓰는 도로가 있었어. 바로 여기. 서해대교야. 서해대교는 충남 당진과 경기도 평택을 잇는 해상교량인데, 길이가 7.3km야.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긴 다리래. 근데 고속도로 상황실은 왜 하필 이 서해대교를 예의주시한 걸까? 바로 '안개' 때문이야. 이게 바다 위에 지어진 다리라 평소에도 해무가 자주 끼는데, 그날따라 안개가 심해도 너무 심한 거야. 그날 찍힌 CCTV 화면이야. 오늘 가시거리 너무 안 나오는데. 일단 전광판에 '안개주의' 띄웁시다. 그때였어. 안개가 자욱한 서해대교 한복판에서 사람들의 비명이 들리기 시작해. 그날 당진소방서로 걸려온 신고 전화야. 여기 서해대교 24번 전화국이에요. 3차로에서 추돌사고 나가지고, 대형 사고예요 지금. 안개 많이 껴가지고. 상행선에서. 지금 빨리 오셔야 해요. 지금 계속 충돌해요. 터져요 지금. 불 붙었어요. 짙은 안개가 덮친 서해대교 한복판에서 연쇄 추돌사고가 벌어진 거야. 아침 7시 40분 정도에 구조 출동 신호가 울렸습니다. 차량 한 3대 정도 추돌사고가 일어났다고 신고 접수받고 저희가 차량 탑승해서 출동하는 도중에 1~2분 지나고 나서 바로 한 6대, 10대, 그 후에는 차량 화재까지 발생했다고 무전으로 연락을 받았습니다. '아 이건 대형 사고다' 생각이 들고, 마음이 상당히 조급해졌었습니다 그때는. -이종상, 당시 당진 소방서 구조대원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교통사고로 꼽히는 서해대교 29중 연쇄 추돌사고야. 추석 연휴를 앞두고 사랑하는 부모님, 자식들을 만나러 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서해대교 위에 있어. 영화 속에 나오는 장면이 눈앞에 나타났었습니다. 이렇게 처참한 광경은 처음이었습니다. -이종상, 당시 당진 소방서 구조대원 짙은 안개가 다리를 집어삼키고, 채 10m 앞도 보이지 않던 그날. 이 뒤엉킨 차들 사이에서 지옥을 마주한 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걸까. ▲ 서해대교 29중 연쇄 추돌사고 2006년 10월 3일 새벽 5시 반. 전북 군산에 사는 김미 씨는 아들 민구를 깨우려 방문을 열었어. 추석을 맞아 서울에 있는 친정집에 가려고 고속버스를 예약했는데 늦잠을 잔 거야. 그런데 민구는 엄마보다 먼저 일어나 벌써 준비를 마친 상태였어. 이 아이가 민구야. 올해 14살. 중학교 1학년인 민구는 얼굴은 어려 보이지만, 키가 175cm야. 평소라면 민구는 군산에서 추석을 보내. 그런데 며칠 전 민구아빠가 허리를 삐끗해서 차례를 지내기 어려워졌어. 이참에 민구 아빠는 민구와 민구엄마가 서울 외가댁에 가서 푹 쉬고 오라고 했어. 그렇게 민구는 엄마와 함께 연휴 첫날인 10월 3일에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싣게 돼. 민구와 엄마는 맨 앞에서 두 번째 좌석에 나란히 앉았어. 잠시 뒤 버스가 출입문을 막 닫으려던 그때, 한 남자가 헐레벌떡 버스로 뛰어들었어. 남자의 이름은 정완선. 완선 씨는 어린 아들이 서울에 장기입원 중이라, 아이를 보러 가려고 버스에 탔어. 완선 씨는 민구가 앉은 자리에서 대각선 뒤쪽 창가 자리에 앉았어. 이땐 아무도 알지 못했어. 무심코 앉은 자리가, 이들의 운명을 어떻게 바꿔놓을지. 같은 시각, 서울에 사는 35세의 은미 씨가 막 잠에서 깨어나. 그리고 안방에 가보니 부모님이 없어. 이분은 은미 씨의 어머니 조말예 씨야. 말예 씨는 어제 아침 일찍 남편이 운전하는 검은색 승용차를 타고 당일치기로 충남 서산으로 여행을 떠났어. 그런데 그런 부모님이 다음날에도 오지 않은 거야. 잠시 후, 은미 씨는 어머니 말예 씨의 전화를 받았어. 은미야, 엄마야! 걱정했어? 미안해. 아직 서산인데 이제 출발하려고. 잠시 후, 오전 7시 40분. 새벽부터 시작된 안개는 이제 서해대교를 완전히 집어삼켜서 앞이 거의 보이지 않아. 쌩쌩 달리던 차들도 자욱한 안개에 속도를 슬슬 줄여가던 그때였어. 끼이익!!! 결국 연쇄 추돌이 일어난 거야. 당시 사고 현장에 있던 사람을 만나볼게. 쿵 하고 좀 세게 받음과 동시에 버스 유리창이 다 깨졌어요. 그렇게 충돌하고 나서 계속 뒤에서 차가 충돌을 하는 거예요. 제 기억으로는 한 다섯 여섯 번은 더 충돌이 있었던 거 같아요. 이제 그 생각만 들었어요. 그만 박아라… 차 모양이 그냥 사각형으로, 앞뒤에서 박아버려서 진짜 짜부라졌죠. -정완선, 고속버스 마지막 탑승자 고개를 돌려 밖을 본 완선 씨. 희뿌연한 안개 사이로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광경이 펼쳐졌어. 여기저기 비명이 난무하고 종잇장처럼 구겨진 차 안에는 팔다리가 낀 채 절규하는 사람들이 보여. 도로로 튀어나온 사람들, 유리 파편을 뒤집어쓴 사람들까지. 화물차라든지 뭐 이런 게 사람을 그 사이에 놓고 껴서 비명도 못 지르더라고. 바닥에 (사람들이) 많이 누워계시더라고요. 연료통이 폭발을 하거나 기름이 누유가 돼서 흘러나와서 불이 번지면… -홍성재, 당시 사고 차량 운전자 무슨 영화에서 나오는 그런 장면처럼 이게 사실인가 싶을 정도로 현실이 아닌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들었긴 했죠. -정완선, 고속버스 마지막 탑승자 ▲ 비극의 시작 그런데 이 비극의 시작은, 정말 어처구니없게도 가벼운 접촉 사고였어. 오전 7시 30분 짙은 안개 사이로, 김 씨의 트럭이 3차로를 달리고 있어. 중간쯤 왔을 때, 뒤따라 오던 대형 트럭이 김 씨의 트럭을 들이받았어. 그 충격으로 25톤 대형 트럭은 끼익 한 바퀴를 돌아 2차선에 멈추게 돼. 순식간에 서해대교 3개의 차선 중 2개가 차단이 된 거야. 이런 상황에서 운전자는 서둘러 차를 갓길로 빼야 해. 자칫하면 2차 추돌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니까. 그런데 이 두 사람은, 그냥 있었어. 도로를 반 이상 가로막은 채 사고 수습을 시작한 거야. 결국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어. 뒤따라오던 차들의 연쇄 추돌. 근데 이건 시작에 불과해. 오전 7시 33분,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사고 현장을 향해 달려오고 있어. 맞아. 조말예 씨 부부가 탄 승용차야. 두 사람은 곧 마주할 운명을 꿈에도 모른 채, 신나는 트로트 음악을 들으며 가고 있었어. 그러다 결국, 이들은 앞에 차를 들이받았어. 그래도 천만다행인 건, 부부는 크게 다치진 않았어. 부부는 일단 사고 현장에서 벗어나기 위해 차에서 내리기로 했어. 한편 그 시각, 서해대교 입구로 대형 트레일러 한 대가 들어서. 운전자는 홍성재 씨. 성재 씨는 이 차에 해외 수출용 신차를 가득 싣고 평택항으로 가고 있어. 성재 씨는 무사고 경력 12년차 베테랑 탁송 기사야. 그런데 성재 씨도 오늘만큼은 안개 때문에 운전이 쉽지 않아. 거북이 가듯이 조심조심 다리 위를 지나고 있는데, 먼저 출발한 동료한테서 전화가 걸려와. 앞에 먼저 간 차가 뒤에 오는 차한테, 도로에 이상이 있으면 연락해 주곤 하는데. 그런 동료의 연락을 받은 거야. 동료는 오다 보니까 사고가 났더라. 2차선, 3차선 꽉 막혀 있으니까 1차로로 와 라고 알려줬어. 그 말을 들은 성재 씨는 1차로로 진입했어. 그때였어. 저는 '이 구간을 얼른 빠져나가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1차로로 계속 갔는데, 어떤 아주머니 한 분이 앞에서 확 나타나시는 거예요. 깜짝 놀라서 브레이크를 딱 밟았는데… 부딪히는 소리는 안 나고 안 보이더라고. 그 당시에는 진짜 아무것도 안 보이더라고요. 눈앞이 캄캄해지더라고요. -홍성재, 당시 대형 트레일러 운전자 성재 씨는 중앙분리대를 박고 멈춰 섰어. 비좁은 운전석 문을 열고 내렸어. 바닥을 딛는데,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조심스럽게 차량을 살피는데, 어디선가 아저씨 저 좀 살려주세요 라는 소리가 들려. 제 차에서 내려서 앞바퀴 쪽 말고 뒷바퀴 쪽에 가 보니까, 아주머니가 다리 하나가 끼어 계시더라고요. 아주머니도 아마 피하다가 넘어지면서 그다음에 다리가 제 차 바퀴에 낀 것 같아요. -홍성재, 당시 대형 트레일러 운전자 이 아주머니, 바로 말예 씨였어. 차에서 내린 후 앞이 잘 보이지 않아서 어디로 피해야 하나 우왕좌왕하다가 달려오는 카캐리어에 사고를 당한 거야. 마음은 급하고 머릿속은 하얗고 패닉 상태로 발만 동동 구르던 성재 씨. 갑자기 뭔가 생각이 난 성재 씨는 냅다 중앙분리대를 뛰어넘어. 그리고 하행선 차들을 가로막고 '유압 잭'이라는 리프팅 장비가 있는지 물었어. 이건 유압을 이용해 무거운 물체를 들 수 있는 장비인데, 트럭 운전자 중에는 간혹 이걸 싣고 다니는 경우가 있대. 하지만 유압 잭을 구할 수 없었어. 성재 씨는 최후의 방법을 쓰기로 해. 제 차 바퀴 밑에 다리 하나가 눌려 있으니까, 차를 움직이면 아줌마 다리가 더 망가질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주머니 손을 잡고 한번 당겨봤어요. 당기니까 어떻게 다리가 쏙 빠지더라고요 다행스럽게도. 그래서 그 상태로 거기에다 둘 수는 없고, 좀 멀리 한 20미터 이상 앞으로 아주머니를 이렇게 끌고 옮겨놨던 것 같아요. -홍성재, 당시 대형 트레일러 운전자 ▲ 일촉즉발, 지옥이 된 현장 그런데, 말예 씨가 사고를 당한 직후, 카캐리어를 들이받은 차량이 또 있어. 바로, 완선 씨와 민구가 타고 있는 고속버스야. 잠을 자고 있었기 때문에 고속버스가 직접 딱 쿵 했을 때는 솔직히 기억이 없었죠. 그러다가 유리창이 깨지면서 눈도 좀 찢어졌고, 턱 밑에도 좀 찢어졌고. 따가우니까 잠을 깼죠. 근데 계속 뒤에서 차가 충돌하는 거예요. 어느 시점에서 충돌이 없었고, 그러고 나서 밖을 봤죠. 이제 나가야 할 것 같은데… -정완선, 고속버스 마지막 탑승자 그런데 버스에 큰 문제가 하나 생겨. 대형 탱크로리가 버스 우측면을 들이받으면서 하나밖에 없는 버스 출입구가 막혀 버렸어. 하얗게 질린 완선 씨가 정신없이 주변을 둘러봐. 그리고 버스 뒤쪽 창문이 깨져있는 걸 발견했어. '불붙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옆에는 탱크로리고 '터지면 큰일 나겠다'… 버스가 마침 반대쪽(운전석 방향)에 가드레일이 있잖아요. 가드레일 높이하고 창가 높이가 거의 비슷했어요. -정완선, 고속버스 마지막 탑승자 버스 안의 사람들은 그 깨진 창문으로 나가자고 소리쳤어. 승객들은 창문으로 탈출하기 시작했어. 완선 씨도 서둘러 창틀을 밟고 올라서는데, 그 순간 완선 씨를 멈칫하게 하는 뭔가가 있었어. 그때 옆에 어머니가 울고 있는 걸 봤어요. 아이가 자리에 있었던 게 아니라, 의자 밑으로 들어가 있었어요. 의자 밑바닥에 누워 있는 상태로 피가 이미 흥건하게 많이 났어요.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요. 아이 몸 전체를 피가 적시고 있었으니까. -정완선, 고속버스 마지막 탑승자 민구가 피범벅이 된 채로 의자 밑에 쓰러져 있었던 거야. 다른 승객들은 스스로 탈출하고 있는 상황인데, 왜 민구만 이렇게 크게 다친 걸까. 바로 이거 때문이었어. 카캐리어 2층에 차를 실으려면, 2층 바닥 상판이 아래로 기울어져 내려와야 해. 그런데 상판 끝이 뭉툭하면 바닥과 단차가 생겨 차를 싣기 어려워. 그래서 바닥과 맞닿는 상판의 끝 부분을 납작하게 만드는데, 하필 이게. 버스 앞 유리를 뚫고 들어온 거야. 버스기사와 창가석에 앉은 엄마를 간발의 차이로 비껴간 상판은, 복도 쪽에 앉아있는 민구의 머리로 날아들었어. 그 충격으로 민구는 의자 아래로 떨어진 거야. 제발 우리 민구 좀 살려주세요 라며 우는 엄마를 탈출하던 완선 씨가 발견한 거야. 일단 어머니가 울고 있는데 아이가 그러고 있으니까. 그 모습이 너무 마음이 아파서… -정완선, 고속버스 마지막 탑승자 도와주겠다고 나선 완선 씨는 일단 의자 밑에 쓰러진 민구를 들어 올려봤지만, 쉽지가 않아. 거의 성인 남자와 맞먹는 체격에 몸이 축 처진 상태잖아. 부상을 입은 완선 씨가 혼자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어. 일으켜 세울 순 있는데, 버스 밖으로 끄집어내기가 쉽지는 않더라고요. 더 다칠까 봐. 이 아이를 제가 잘못 들고 꺼냈다가는, 아이가 살 수 있는 상황에서 제가 만약에 잘못하면 안 되잖아요. -정완선, 고속버스 마지막 탑승자 결국 완선 씨는 민구를 겨우 일으켜 의자에 눕힌 뒤에 밖으로 나가서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어. 근데 선뜻 나서는 이가 없어. 왜냐, 사고 현장에서 또 한 번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거든. 앞차를 추돌한 한 화물트럭 엔진이 밖으로 튕겨 나오면서 주변 차들에 불이 붙기 시작한 거야. 그러는 사이 엄마 김미 씨는 여전히 민구 곁을 지키고 있어. 우리 아들 눈 좀 떠봐. 엄마가 정말 미안해 하면서. 사실 아까 버스에 탈 때 아들과 작은 실랑이가 있었어. 민구는 맨 뒷자리에 앉고 싶어 했는데, 엄마가 그냥 앞자리에 앉자고 한 거야. 사실 김미 씨는 다리가 조금 불편해. 그런 엄마의 마음을 금세 알고, 아들은 별다른 불평 없이 앞자리에 앉았어. 엄마는 지금 이 순간 모든 게 자신의 탓 같아. 불길은 서서히 버스로 옮겨 붙기 시작했어. 아무래도 이제 마지막 인사를 건네야 할 거 같아. 엄마는 민구를 꼭 끌어안고 이런 말을 전했어. 아이한테 (마지막) 얘기를 했어요. '의식은 있겠지' 이런 생각에. 민구야 사람들이 저기에 불나서 터질까 봐 못 들어온대. 엄마 너 못 들거든. 너 항상 건강해서 예뻤는데, 이럴 때는 네가 체격이 작았으면 정말 좋겠다… 저거(탱크로리) 터지면 우리 죽을 텐데, 좀 뜨겁겠지만 너랑 나랑 같이 갈 텐데 어떻겠냐. 아빠가 참 안 됐다… -김미, 민구 어머니 ▲ 히어로의 등장 그런데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 갑자기 어떤 남자가 버스 창문으로 뛰어 들어오더니, 민구를 번쩍 들어 안아. 제 기억으로는 그때 슈퍼맨 같은 사람 한 분이 계셨어요. 반대쪽 차선에서 넘어오셔서 사람들 다 구해 주시고 밖으로 끄집어내는 거 도와주시고. 그분이 사람들을 많이 구출하셨죠. 창문으로. 너무 감사한 분인데 얼굴은 기억이 안 나는데 왔다갔다 하시는 것만 봤어요. -정완선, 고속버스 마지막 탑승자 하행선을 지나던 웬 남자가 중앙분리대를 넘어와서 사람들을 구조하기 시작한 거야. 그렇게 이름 모를 영웅의 등장에, 완선 씨를 비롯한 몇몇이 힘을 보태기 시작해. 민구를 꺼내고 도로에 쓰러져 있던 사람들을 불길에서 최대한 먼 곳으로 이동시켜. 그중엔 이불을 뒤집어쓰고 불구덩이 안으로 뛰어든 사람도 있었어. 바로 카캐리어 운전자 성재 씨야. 우리 화물차는 어디 장거리 가면 거기서 자려고 이불 같은 걸 하나씩 가지고 다니거든요. 그거 꺼내다가 제 머리에 뒤집어쓰고 바닥에 누워계신 분들 한 명씩 전부 앞으로 당겼죠. 저 혼자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걸을 수 있는 사람들은 구조 작업을 같이 했어요. -홍성재, 당시 카캐리어 운전자 한 명이라도 더 구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모두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기 시작해. 불구덩이로 뛰어든 작은 영웅들이야. ▲ 구조대가 늦은 이유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아? 사고 현장에서 구조활동 중인 사람들은, 운전자와 탑승객들이야. 구조대원은? 119 최초 신고 시간은 오전 7시 40분이야. 20분이 넘도록 구조대가 오지 않고 있어. 시간을 다시 앞으로 돌려 오전 7시 40분, 당진 소방서에 출동 명령이 떨어진 그 때야. 밤샘 근무를 하고 퇴근을 앞두고 있던 이종상 대원은 사고 소식에 동료들과 함께 출동했어. 당진 소방서에서 서해대교 입구까지는 차로 약 10분 거리. 다행히 입구까진 별문제 없이 도착했어. 이제 사고 현장까지 남은 거리는 약 1km. 그런데, 다리로 진입하던 소방차가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아. 지금 19년이 흘렀는데요. 지금도 기억하기로는 진짜 정확하게 딱 제가 앉아있는 곳에서, 지금 PD님 앉아있는 그 거리. 그 정도밖에 가시거리는 나오지 않았다 생각이 듭니다. 한 3m? -이종성, 당시 구조대원 소방대원은 원래 시야 확보가 어려운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인데, 그런 대원들조차 당황할 정도로 안개가 짙었어. 그래도 다른 차들의 방해 없이 빠르게 현장까지 갈 수 있는 '갓길'이 있잖아. 그런데, 갓길이 완전 주차장이야. 혼잡을 피해 조금이라도 빨리 가려는 사람들이 갓길을 점령한 거야. 차에서 내려 일일이 창문을 두드려가며 부탁하지만, 쉽지 않아. 소방차의 너비가 2.5m 정도인데, 워낙 차들이 많고 서로 엉켜있다 보니, 도저히 틈이 나지 않는 거야. 빼주고 싶은 차량도 있었지만, 비켜줄 수 있는 공간이 그쪽에는 전혀 나오지 않았었습니다. 그 차를 간신히 옆으로 치우고 또 가다 보면 또 앞에 차량이 또 나오고. 계속 그게 반복이 되는 겁니다. -이종성, 당시 구조대원 그래도 어찌어찌 차량 틈새를 비집고 조금씩 앞으로 가고 있는데, 이번엔 다른 게 말썽이야. 저희가 1차 신고 때 구조대하고 구급차가 먼저 출발하고 난 다음에 소방차들이 그 뒤로 따라왔는데, 저희 차들이 다 붙어서 가는 차량은 아니고 중간중간 틈이 있다 보니까, '소방차를 따라가면 조금 더 빨리 가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저희 차 뒤로 바짝 붙어 오는 분들도 있고. 저희가 내려서 일일이 앞에 있는 차량 빼면서도, 뒤에 차량 보고 따라오지 말라고 얘기도 했었거든요. 따라오지 마시라, 지금 안개가 너무 많이 껴서 위험하다, 이렇게 따라오시다가 우리가 급정거하게 되면, 뒤 분들도 위험하니까 따라오지 마시라고 말도 전해드리고 했는데. 그런 분들이 상당히 많았었습니다. -이종성, 당시 구조대원 이렇게 양심을 저버린 몇몇 사람들 때문에, 1분, 2분..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 지나가. 결국 대원들은 구조 장비를 나눠 들고 무작정 뛰기 시작해. 장비 무게만 무려 60kg.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땀이 비오듯 흘러.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데, 누군가 구조대원들의 팔은 붙잡아. 우리 남편이 운전석에 다리가 꼈어요. 얼른 좀 구해주세요. 우리 딸내미가 팔이 부러진 것 같아요. 빨리 어떻게 좀 해줘 봐요. 민구, 말예 씨가 다친 사고 현장 뒤로도, 수십대의 차들이 추돌사고로 뒤엉켜 있었던 거야. 화재 난 곳 말고 그 뒤편으로 앞뒤로 부딪치고 추돌이 일어나서. 차에 끼어 있으셨던 분들, 자가 탈출이 어려우셨던 분들이 상당히 많았었습니다. 구조대상자를 다 일일이 손으로 끄집어내서 옆에다 안전한 곳에 놔드리고, 몇 발짝 안 가서 또 보면 끼어 있으셨던 분들이 또 있으세요. 그럼 또 그분들 가면서 다 구조를 했었습니다. -이종성, 당시 구조대원 그럼 혹시, 이 상황에서 다른 길은 없었을까? 반대편 하행선을 이용한다면? 좀 더 빠르게 사고 현장으로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럼 이번엔, 당진 쪽이 아닌 평택 쪽에서 나서야 해. 오전 7시 50분경, 버스 안에서 민구가 사경을 헤매고, 말예 씨가 구조팀을 애타게 기다리던 그 시각. 평택에서 구급차 3대가 출동했어. 대한응급환자이송단 평택지부의 구조요원들이야. 사고 현장까지는 5분컷. 첫 번째 구급차에 타고 있던 곽요환 요원이 액셀을 밟았어. 그런데 1분 뒤, 힘차게 달리던 구급차가 서해대교 하행선 방향 입구에서 멈춰 섰어. 저희가 하행선을 타고 내려가는데 평택 IC 입구 들어서자마자 차가 움직이지 않았어요. 서해대교가 사고가 나서 그 현장을 구경하시느라고, 갓길이고 뭐고 차들을 다 세워 놓은 상태에서 어떻게 뚫고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이걸 어떻게 가지?' -곽요환, 당시 대한응급환자이송단 평택지부장 나 하나쯤은 괜찮겠지, 하는 생각들이 쌓이고 쌓여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소중한 골든타임을 지킬 수 없게 된 거야. 평상시 같은 경우는 아무리 밀려도 5분에서 7분 그 사이면 그 현장에 도착할 수 있는 상황이었거든요. 제가 알기로는 한 20분에서 23~24분 정도 걸렸을 거예요. '비켜 주십시오. 비켜 주십시오' 앞에서 대원이 신호해 가면서 차를 뚫고 나가니까… -곽요환, 당시 대한응급환자이송단 평택지부장 결국 사고가 발생한 지 20분이 지나서야 곽 요원의 구급차가 현장에 도착해. 그리고 버스 뒤에서 누군가의 절실한 구조 요청이 들려와. 서둘러 가까이 다가가자, 소형 트럭 한 대가 보여. 바로 이 차야. 전면부가 종잇장처럼 구겨졌어. 여기에 사람이 끼어 있는 거야. 그를 구하려는 그 순간,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뭔가가 번쩍 튀어올라. 버스에서 불이 났어요 뒤쪽에서. 불꽃이 약 3~4m 정도, 접근할 정도가 못 됐어요. 이런 얘기까지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트럭에 타신 그 운전자분 구조를 못 한 게 여태까지 트라우마로 남고 있습니다. 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요. 왜 그런 지 알아요? 사람이 생으로 불타는 거 보셨어요? 저는 그 현장을 목격했는데, 그게 아직까지 못 구해준 게 아쉽다는 거. 그분한테는 진짜 미안하고… 거기에 트라우마가 지금까지 있습니다. 서해대교 얘기하면 그렇습니다. -곽요환, 당시 대한응급환자이송단 평택지부장 수많은 삶과 죽음이 단 몇 초 사이로 엇갈렸어. 갓길을 비워두는 사소한 배려만 있었어도, 내 가족의 일이란 생각으로 조금만 양보해 줬더라면. 모두 구할 수 있는 소중한 생명이었어. ▲ 처참했던 그날의 기억 잠시 후, 첫 신고가 들어온 지 40분이 지난 오전 8시 20분경이야. 커다란 장비를 진 대원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사고 현장으로 들어서. 이종상 대원의 눈에 들어온 현장은, 지옥 그 자체야. 그때 당시 구조대원분들 모두가 그 앞을 딱 보는 순간 구조를 한다기보다는 진짜 절망감이 먼저 앞섰다는 표현이 맞는 거 같습니다. 화재 현장 안에 있는 수많은 차량을 봤을 때, 아… 진짜 처참하다는 그런 느낌이 제일 많았습니다. -이종상, 당시 구조대원 여러 현장을 다닌 베테랑 대원조차 처음 보는 참담한 현장. 하지만 대원들은 포기할 수 없어. 단 한 명만이라도 살릴 수 있길, 간절한 마음으로 수색을 시작해. 하지만 생존자는 없었어. 구석구석 안을 살폈지만, 보이는 거라고는 이미 백골이 된 시신들 뿐이야. 지금도 가장 기억나는 그분이, 저희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딱 봤는데, 트럭과 트럭 사이에 옆으로 전도되어 있던 승용차였습니다. 완전히 불에 타서 거의 백골 상태였던 그분이 있었습니다… 그 심정은 사실 그때 겪어보지 않았으면, 진짜 이루 말로 표현하기 상당히 어려운, 그런 심정이었습니다. -이종상, 당시 구조대원 그마저도 뼛조각이 다 흩어져 있어서, 몇 명인지 가늠조차 안돼. 어떻게든 한 명이라도 더 살려보려 기를 쓰고 달려왔는데. 할 수 있는 건 시신을 수습하는 일뿐이었어. 그러던 중, 또 한 번의 참담한 소식이 전해졌어. 가까스로 병원에 도착한 생존자 중 한 명이, 결국 세상을 떠난 거야. 바로 민구였어. 놀랐죠. 많이 놀라기도 했고, 사실이 아니길 바라기도 했고. 한동안 좀 그랬던 것 같아요. 처음 그런 감정을 느껴본 거니까. -정완선, 고속버스 마지막 탑승자 민구는 부상자 중 가장 먼저 병원에 도착했어. 근데 도착한 시각이 오전 9시야. 구급차에서만 무려 50분을 보낸 거야. 돌아오는 길에도 여전히 갓길이 꽉 막혀 있었대. 결국 민구는 심정지 상태로 병원에 도착했어. 하지만 엄마는 아들을 잃고도 소리 내어 울 수 없었어. 시신조차 찾지 못한 유가족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온 병원을 뛰어다니고 있었거든. 또 간신히 화마에서 살아남긴 했지만,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견뎌야 하는 생존자도 있었어. 지옥 같은 현장에서 전신 3도 화상을 입고 가까스로 살아난 경민 씨(가명). 그는 아내와 함께 아들의 대입 수시 면접을 위해 서울로 향하던 길이었어. 안타깝게도 대형 트럭들 사이에 낀 경민 씨 차량에선 아내와 아들이 유골 상태로 발견됐어. 그리고 다른 가족들은 이 사실을 경민 씨에게 알리지 못했어. 하지만 얼마 후 경민 씨도 아내와 아들의 곁으로 떠나게 돼. 서해대교 29중 연쇄 추돌사고는 12명의 사망자, 50명이 넘는 부상자를 남겼어. ▲ 대형 참사, 왜 미리 막지 못했나 이 대형 참사, 사전에 막을 순 없었을까? 최초의 추돌사고는 안개 때문에 일어났어. 평소 서해대교의 가시거리는 1km 이상이래. 하지만 그날 가시거리는 61m에 불과했어. 게다가 운전자들이 직접 느낀 가시거리는 약 10m 정도였대. 하지만 그날 운전자들을 위한 정보는 '안개주의 감속운행'이 8글자가 적힌 도로 전광판뿐이었대. 물론 안개라는 게, 일시적인 현상이기도 하고, 분포 자체가 넓으니까 어디까지 통제해야 할지 애매한 게 사실이야. 그래서 외국은 바다나 호수 위에 도로를 낼 때 안개에 대비해 이런 걸 설치한대. 방무벽이라고 하는 건데, 안개 거름망 같은 거야. 이 막으로 안개의 입자를 물방울로 바꿔 안개가 도로에 머무는 걸 예방한다고 해. 하지만 1년에 30일 이상 짙은 안개가 끼는 이 서해대교에는, 그 어떤 안개 대비책도 없었어. 사고 이후 유족들은 대책위원회를 만들고 지휘통제 의무를 다하지 않은 한국도로공사 측을 상대로 소송에 나섰어. 하지만 도로공사 측은 감속 운행을 하라는 안내를 했는데도 사고가 난 건, 이를 지키지 않은 운전자들의 책임이라는 입장이야. 수십 군데 보험사가 얽힌 긴 법정공방 끝에 법원은 이런 판결을 내렸어. 안개는 하나의 자연현상으로 위험성을 예측하기 어렵고, 도로의 관리상 하자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도로공사 측은 기상상태를 안내하고 안전운전 유도에 최선을 다했다. 도로공사 측 책임은 없다. 명절을 앞두고 설레는 마음으로 길을 나선 가족들, 그들을 기다리던 부모, 친구, 친척들까지, 모두가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했어. ▲ 씻을 수 없는 상처, 반복되지 않으려면? 사고가 난 지 어느덧 19년이 지났어. '꼬꼬무'는 이번 방송을 준비하며 생존자, 유가족, 목격자 등 여러 사람에게 연락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그때 일을 떠올리는 것조차 괴롭고 힘들다 고 했어. 그런 가운데 아주 어렵게 인터뷰에 응해주신 유가족 분이 있어. 카캐리어에 다리가 끼는 사고를 당한, 조말예 씨의 딸 박은미(가명) 씨야. 습관적으로 아침에 일어나서 TV를 켰는데, 뉴스가 나오는 거예요. 서해대교에서 사고가 났다고. 연쇄 추돌 사고가 났다고. 계속 뉴스 속보가 뜨는 거예요. 불이 나고 서해대교가 아수라장이더라고요. 기분이 이상해서 엄마아빠한테 전화를 했죠. 전화를 안 받는 거예요. 너무 큰 교통사고가 났구나. 사고 현장까지 가는데 되게 막혀서, 병원에 도착하니 12시가 넘었던 거 같아요. 3시간 이상 걸렸던 거 같고. 도착해 보니 엄마가 응급실에 계셨고, 의사가 '어머니 많이 다쳤고, 서울에 가서 수술해야 한다'고 얘기했어요. -박은미(가명), 조말예 씨 딸 하반신 전체가 복합 골절된 엄마는 당장 큰 병원으로 옮겨 수술을 받아야 했어. 그런 엄마를 모시고 대학병원으로 향하는데, 구급차 안에서 엄마가 믿을 수 없는 얘기를 해. 은미야, 너희 아빠 죽었을지도 몰라 라고. 그 말을 남기고 말예 씨는 곧 의식을 잃어. 전체 사고에 대해서 물어볼 경황이 없어서, 큰오빠한테 가서 '아버지 찾아라. 어느 병원이든 계시지 않겠냐' 했고, 전 앰뷸런스 타고 서울로 올라갔고. -박은미(가명), 조말예 씨 딸 아빠를 찾는 일은 큰오빠가 맡았어. 그 사이 대학병원에 도착한 엄마는 수술을 시작해. 간절한 마음으로, 제발 아빠가 무사하길, 엄마가 살아서 수술실에서 나오길, 빌고 또 빌었어.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밤 11시, 큰오빠한테 전화가 걸려와. 아버지 찾았다. 영안실에서. 구급대가 발견할 당시엔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고 해. 설상가상 신분증과 소지품이 발견되지 않아서, 아버지는 무연고 시신으로 홀로 영안실에 있어야 했던 거야. 아버지 마지막을 못 봤다는 생각이 괴로웠고, 더 걱정은 엄마까지… 엄마가 그때 68세셨거든요. 적지 않은 나이인데, 수술하다가 어떻게 될 수도 있겠다… 아버지에 이어서 엄마까지 그러면.. 삶이 바닥을 치는구나, 일상이 바닥을 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죠. -박은미(가명), 조말예 씨 딸 어느덧 수술이 시작한 지 13시간째. 드디어 수술실 문이 열렸어. 은미 씨의 바람처럼, 엄마는 무사히 살아 나올 수 있었을까. 말예 씨의 근황은 어떨까. 서해대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어요. 서산에서 아침을 먹고 오려다가, 휴게소나 서울 와서 먹자고 해서 새벽에 나섰거든. 아침 일찍 사고가 났어요. 아침 먹고 천천히 왔으면, 이런 일이 없었지. 내 팔자지 뭐. 사고 나려고 일찍 출발했지. 그러니까 입원하고 며칠 있다가, 의사가 말을 하더라고요. 다리에 상처가 나서 썩어 들어가니까 잘라야 한다.. 그래서 절단한 거예요. -조말예, 당시 사고 피해자 그날의 사고로 다리 한쪽을 잃은 말예 씨. 말예 씨는 사고 전, 밝고 호탕한 성격에 여행 가는 걸 좋아했어. 하지만 지금은 밖에 혼자 나가는 것도 힘들어. 삶이 송두리째 바뀐 건 은미 씨도 마찬가지야. 그날 이후 은미 씨는 직장도 관두고 엄마를 간호했어. 여전히 떠올리는 것조차 힘든 그날의 기억이지만, 이렇게 인터뷰에 응한 건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래. 모든 일들은 그렇게 되려고 어떤 행동이나 선택을 하는 게 아니잖아요. 저희가 그런 대형사고의 피해자가 될 거라고는 전혀 상상을 못 했죠. 누구도 완벽하게 안전하게 살 수는 없구나… -박은미(가명), 조말예 씨 딸 사고는 내 가족, 내 친구, 당장 내일의 나에게도 예고 없이 찾아올 수 있는 불행이라는 거. 이번 이야기를 듣는 모두가 무겁게 받아들였으면 하는 마음에 나오셨다고 해. 12명의 소중한 생명이 안개와 함께 사라진 그날 이후, 정부는 부랴부랴 대책 마련에 나섰어. 30억 원을 투자해 시스템도 구축하고 연구 인력도 대거 투입했어. 새로운 관측 장비를 들여서 안개 예측을 좀 더 정확하게 하겠다는 거야. 근데 이 계획은, 어처구니없는 문제로 무산되고 말아. 안개 예보의 적중률이 낮아도 너무 낮았대. 그래서 부랴부랴 수억 원을 들여 안개 저감 장치를 연구, 검토하겠다고 했지만, 이 또한 무산됐어. 이번엔 기술 부족의 이유로. 그러는 사이 비극은 또 찾아왔어. 인천 영종대교에서 차량 106대가 잇따라 들이받는 믿기 어려운 대형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1km 구간에 걸쳐 차량 106대가 연쇄 추돌했습니다. 한 치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갯속에서 차량들은 앞에 사고가 난 줄도 모르고 그대로 달리다 연쇄 추돌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중 2015년 발생한 영종대교 106중 추돌 사고. 사상자는 무려 65명. 서해대교 참사와 똑같이 안갯길에 벌어진 연쇄 추돌사고였어. 사고 후 전문가들은 9년 전 서해대교 사고 때 안개 대비책만 마련했어도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사고다 라고 말했어. 그리고 정부는 영종대교 사고 이후 또다시 예산을 들여, 새 기상 관측 장비를 도입하고, 도로 전광판을 추가 설치하는 등 안개 대비에 나섰어. 왜 우리는 늘 소중한 걸 놓치고 나서야 깨닫는 걸까. '역사를 기억하지 못한 자, 그 역사를 다시 살게 될 거다'라는 말이 있어. 서해대교 연쇄 추돌사고는 양심을 저버리고 갓길을 점령한 운전자들, 부족한 안개 대비 시설, 국가의 안전 시스템 부재까지, 이 모든 게 얽히고설켜 벌어진 명백한 인재야. 이제라도, 이 지긋지긋한 반복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길. 안일함과 부주의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의 평범한 일상이 무너지는 일이 더 이상 없길 바라는 마음이야.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
[스브스夜] '꼬꼬무' 서해대교 29중 추돌사고… 소중한 것은 잃고 나서야 깨달아 대한민국 최악의 교통사고
등록일2025.12.12
대한민국 최악의 교통사고의 날을 추적했다. 11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미스트 - 서해대교 29중 추돌사고'라는 부제로 대한민국 최악의 교통사고가 일어난 그날을 조명했다. 황금연휴의 시작이던 2006년 10월 3일, 고속도로 상황실에서는 서해대교를 예의주시했다. 당진과 평택을 잇는 왕복 6차로 해상 교량인 서해대교는 평소에도 안개가 심한 구간이었던 것. 특히 이날 서해대교는 차량 식별 조차 되지 않는 정도의 해무로 고속도로 상황실에서는 안개주의 감속 운전을 권고했다. 그런데 그때 서해대교 위를 달리던 두 대의 트럭이 접촉 사고를 일으켰고, 그 후 뒤 따르던 차량들이 연쇄 추돌을 일으킨 것. 최초 신고 당시 3중 추돌이었던 사고는 점점 늘어나며 29중 추돌 사건이 되고 이는 대한민국 최악의 교통사고 참사로 기록되었다. 여기저기서 고통 속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비명이 들리고 처참한 모습의 사람들이 눈앞에 보였던 것. 사실인가 싶을 정도로 현실이 아닌 것 같은 아수라장, 사고 현장은 그야말로 지옥 그 자체였다. 당일치기 여행을 떠났다가 귀가가 늦어진 조말예 씨 부부는 연쇄 추돌 사건의 피해자. 이들은 앞에 가던 차량과 부딪히며 사고 현장을 벗어나기 위해 차량에서 급히 내렸다. 카 캐리어에 차량을 잔뜩 싣고 달리던 트레일러 차량 운전자 홍 씨. 무사고 12년 차 베테랑 탁송 기사 홍 씨는 앞서간 동료의 연락을 받고 조심조심 다리를 지나고 있었다. 2차선과 3차선 꽉 막혀있으니 1차로로 오라는 이야기에 1차로로 조심스럽게 운전을 하고 있던 그때 갑자기 차량 앞으로 한 여성이 등장했다. 이에 홍 씨는 브레이크를 밟았고 그 충격으로 중앙분리대를 들이받고 멈춰 섰다. 그리고 그는 차량 뒷바퀴에 다리가 깔린 채 쓰러진 여성을 발견했다. 이 여성은 바로 말예 씨였던 것. 황 씨는 가까스로 말예 씨를 끌어당겼고 사고 현장에서 20미터 이상 떨어진 곳으로 그를 끌고 옮겼다. 그런데 이때 카 캐리어 뒤를 버스가 들이받았다. 이 차량에는 민구와 어머니, 그리고 완선 씨 등이 타고 있었던 것. 그리고 이어 버스 우측면을 탱크로리가 들이받으면서 하나밖에 없는 버스 출입구가 완전히 막혀버렸다. 불이 붙겠다는 공포 속에 완선 씨는 버스 뒤쪽 창문이 깨진 것을 발견했고 이곳으로 승객들이 하나 둘 탈출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때 완선 씨는 피범벅이 되어 의자 밑에 쓰러져 있던 민구와 그를 끌어안고 우는 그의 어머니를 발견했다. 카 캐리어 상판이 버스 앞 유리를 뚫고 들어오며 민구의 머리로 향했고 이에 부딪힌 민구가 의자 아래로 떨어졌던 것이다. 완선 씨는 어머니를 도와 민구를 구조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이에 더 도와줄 사람들을 찾아ㅈ;만 화물 트럭의 엔진이 밖으로 튕겨 나오며 주변 차량에 불이 붙었고 버스에도 불이 서서히 옮겨 붙었다. 민구와 최후의 상황을 생각하고 있던 어머니. 그런데 이때 어디선가 나타난 남성이 민구를 들어 안아 밖으로 끌어내주었다. 하행선을 지나던 한 남자가 중앙분리대를 뛰어 넘어와 사람들을 구조하기 시작했고 이어 황 씨 등 사고 현장에 있던 사고 당사자들이 구조에 가세했던 것. 최악의 상황에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 사람들, 진정한 영웅들의 등장이었다. 최초 신고 시각 7시 40분. 그런데 20분이 넘도록 구조대가 도착하지 않았다. 소방대원들도 당황할 정도로 시야 확보가 어려웠던 짙은 안갯속에서 갓길로 이동한 구조 차량. 그런데 조금이라도 빨리 가기 위해 갓길을 점령한 일반 차량에 구조대원들은 제발 길을 비켜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소방차를 따라가면 빨리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소방차 뒤를 쫓는 일반 차량들 때문에 구조 차량 한 대가 앞으로 가면 뒤에 따르던 다른 구조 차량이 막히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양심을 저버린 사람들 때문에 소중한 시간들이 지나가고 이에 결국 구조대원들은 수십 킬로의 장비를 나눠 들고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때 곳곳에서 도와달라는 사람들의 요청이 이어졌고 구조대원들은 이를 지나치지 못하고 사고 현장으로 향하는 도중 또 다른 피해자들을 구조했다. 이에 사고 현장에 구조대 도착 시간은 더욱 지체되었다. 하행선, 평택 방향에서도 구조대가 출동했다. 그런데 평택 IC 도착하자마자 구조 차량은 꼼짝도 못 하고 멈추고 말았다. 사고 현장을 구경하는 사람들 때문에 차들이 모두 정차하고 있었던 것. 이에 5분이면 도착할 거리를 약 20분 후에 도착하며 그렇게 소중한 골든타임을 놓치고 말았다. 당시 구조에 참여한 구조대원은 당시 트럭에 타고 있던 운전자를 구조하지 못한 게 평생 트라우마로 남는다며 눈물을 보였다. 그는 사람이 생으로 타는 거 보셨어요? 저는 그 현장을 목격했는데 아직까지 못 구해준 게 아쉽다. 그분한테 진짜 미안하고 서해대교 이야기를 하면 그렇다 라며 눈물을 흘려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단 몇 초 사이에 엇갈린 삶과 죽음, 작은 배려가 있었다면 모두 구할 수 있던 소중한 생명이었기에 끝끝내 아쉬움이 남았다. 첫 신고 40분 후 장비를 들고 현장에 도착한 구조대원들. 그런데 이들이 구할 수 있는 생명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들이 도착했을 땐 이미 백골이 된 시신들만 남아있었던 것. 이에 구조대가 할 수 있는 것은 할 시신을 수습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때 병원에 도착한 생존자 중 한 명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버스에서 구조되었던 중학생 민구가 결국 사망하고 말았던 것. 부상자 중 가장 먼저 병원에 도착했지만 구급차량에서만 무려 50분 보낸 민구는 심정지 상태로 병원에 도착했고 그대로 사망했다. 그런데 민구의 어머니는 시신조차 찾지 못한 유가족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견뎌야 하는 생존자들 때문에 소리 내어 울지도 못했다. 사망 12명, 50명이 넘는 부상자의 대참사. 이 대형 참사는 사전에 막을 수 없었을까. 평소 가시거리 1km 이상이었던 서해대교. 그런데 사고 당일 가시거리는 61m에 불과했고 운전자 체감 가시거리 10m 정도였다. 통제가 필요했던 상황이었지만 한국도로공사 측은 안개주의 감속주행 여섯 글자 경고만 했을 뿐이었다. 해외의 경우 방무벽을 설치해 안개의 유입을 차단하지만 서해대교는 어떤 안전시설도 만들어져 있지 않았던 것. 이에 유가족들은 한국도로공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한국도로공사 측은 감속 운행 안내에도 사고가 난 것은 운전자 잘못이라며 책임을 피했다. 그리고 법원도 도로공사 측에 책임이 없다고 판결을 내렸다. 사고 19년 후, 그때 일을 떠올리는 것조차 괴롭고 힘들다는 생존자들과 유가족들. 당시 트럭에 다리가 끼는 사고가 났던 조말예 씨는 가까스로 생존했지만 남편은 잃고 말았다. 신분증과 소지품이 발견되지 않아 무연고 시신으로 영안실에 안치되어 있던 그의 남편은 뒤늦게 가족들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말예 씨는 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고 말았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괴롭다는 말예 씨의 딸은 우리 가족이 대형 사고의 피해자가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누구도 완벽하게 안전하게 살 수는 없다 라며 사고는 당장 내일의 나에게도 예고 없이 찾아올 수 있는 불행이라며 이것에 대한 것을 모두가 무겁게 받아들여주길 바랐다. 서해대교 사고 후 정부는 부랴부랴 대책 마련에 나섰다. 하지만 어처구니없는 문제로 수차례 무산되었고 결국 2015년 2월, 영종대교 106중 추돌 사고가 일어났다. 사상자 65명의 안갯길 참사에 전문가들은 9년 전 서해대교 사고 때 안전 대비책만 제대로 마련했어도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사고다 라고 분석했다. 이에 결국 정부는 또다시 예산을 들여 대비책 마련에 나섰다. 소중한 것을 놓친 후에야 깨닫고 마는 것. 마지막으로 방송은 역사를 기억하지 못한 자 그 역사를 다시 살게 될 것이다라며 더 이상 희생을 통한 뒤늦은 깨달음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빌었다. (SBS연예뉴스 김효정 에디터)
[스브스夜] '꼬꼬무' 초등학생 암매장 살인 사건 추적··· 지수야, 네 잘못이 아니야 아동 학대 피해자 위로
등록일2025.12.05
11명의 기묘한 동거, 그중 지수를 살해한 사람은 누구? 4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꼭두각시 엄마의 비밀'이라는 부제로 경기도 용인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아동 학대 사건을 추적했다. 2016년, 경남 고성 경찰서의 여성청소년계 사무실은 비상이 걸렸다. 전국 경찰에 장기 결석 아동을 조사하라는 지시가 내려왔기 때문. 한 겨울에 반바지에 맨발로 탈출한 11살 은지. 당시 열한 살이었던 은지의 몸무게는 고작 16kg이었다. 은지는 2년 동안 친부와 그의 동거녀에게 감금 폭행을 당했던 것. 이들은 은지를 학교에도 보내지 않고 일주일씩 밥을 주지도 않으며 학대했다. 은지 사건이 알려지며 교육부는 경찰과 함께 학대 피해 아동을 찾기 위해 장기 결석 아동 전수 조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고성에서 2년째 무단결석 중이던 아홉 살 지민이가 포착됐다. 경찰은 아이의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의 행방을 물었다. 그러자 지민의 아빠는 애 엄마가 큰 애랑 작은 애까지 데리고 가출한 지 7년째다 라며 행방불명이라고 했던 것. 경찰은 추적 끝에 천안에서 지민의 엄마 수진을 찾아냈다. 그런데 수진의 곁에는 둘째 지민만 있었고 첫째 지수는 없었다. 이에 경찰은 수진을 추궁했고, 이에 수진은 외국에서 친정 부모님이랑 지내고 있다, 아니 거짓말이다. 사실은 입양 보냈다 라며 횡설수설했다. 결국 경찰은 수진에게 범죄 혐의점이 있다고 판단해 긴급 체포했다. 그리고 경찰은 조사를 통해 모든 비극이 시작된 곳으로 향했다. 수진은 딸 지수, 지민과 함께 방이 다섯 개에 발코니만 4개, 30평대 아파트 두 채 규모의 경기도 용인의 고급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경제적 문제로 가출을 했다던 수진의 이야기와는 맞지 않는 부분. 그런데 사실 이 아파트에는 수진의 가족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파트에는 수진의 대학 동창 은하 씨의 가족도 함께 동거 중이었던 것. 수진과 사정이 비슷했던 은하 씨는 수진에게 동거를 제안했다. 남편과 싸우고 가출한 뒤 지인의 도움으로 고급 아파트에서 지내고 있다는 은하 씨. 그는 도움을 준 지인을 박 선생이라 불렀다. 휴대전화 판매업으로 돈을 번 박 선생은 두 여자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며 자신의 매장에 취직도 시켜줬다. 그런데 해당 아파트에 산 지 2년 즈음되었을 무렵의 어느 날 지수가 사라졌다는 것. 수진 씨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사라진 지수. 그런데 수진 씨는 남편이 두려워 실종 신고도 못했다고 주장했다. 수진의 진술을 믿을 수 없었던 경찰은 수진과 라포를 형성한 후 진실을 말하도록 유도했다. 그리고 얼마 후 싸늘한 주검이 된 지수를 발견했다. 수진은 자신이 지수를 살해한 후 암매장했다고 자백했다. 가구에 흠집을 냈다는 이유로 지수를 베란다에 가두고 테이프로 의자에 묶은 후 때려서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 그리고 모든 것은 아이를 위한 훈육이라 주장했다. 그런데 얼마 후 살인 혐의로 기소된 것은 수진이 아닌 박 선생이었다. 혐의를 전면 부인하며 억울함 호소한 박 선생. 그는 수진의 부탁으로 시신 유기만을 도왔다고 주장했고, 은하 씨 가족도 박 선생의 억울함을 주장했다. 그러나 검찰은 주도적으로 학대 지시한 박 선생에게 살인죄, 박 선생 지시대로 한 수진에게는 학대치사죄, 암매장 도운 은하 씨는 사체유기 혐의, 은하 씨의 어머니인 송 씨 할머니는 아동복지법 위반으로 기소했다. 수진의 자백을 석연찮게 생각했던 경찰은 동거인들을 모두 불러 조사했고, 은하 씨의 아들 11살 민찬에게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었다. 민찬은 자신들이 살던 아파트에 박 선생의 가족도 함께 살며 무려 11명이 함께 기묘한 동거를 했다고 진술했다. 그리고 베란다에서 생활한 것은 본인과 지수, 지민 셋이었다는 것. 그리고 민찬은 지수가 수진이 아닌 박 선생에게 맞았다며 의자에 묶인 것도 한두 번이 아니고 12시간에서 24시간 묶여있을 때도 있었다고 했다. 또한 자신도 학대의 대상이었다고 고백했다. 2008년 초, 박 선생을 처음 만난 수진은 휴대전화 판매 사업에 투자하면 나중에 대리점을 내주겠다는 박 선생의 제안에 10억 가량을 투자했다. 남편과 살던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고 그것도 모자라 친정 부모님이 살던 집까지 팔고 사채까지 써서 돈을 마련했다. 그리고 은하 씨 가족도 박 선생에게 2억을 투자했고 그렇게 모두가 함께 박 선생의 아파트에 살게 되었다고. 하루 12시간 쉬는 날 없이 근무한 두 사람. 하지만 박 선생과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대리점은 차치하고 임금도 받은 적 없고 이에 신용불량자까지 되었다는 것. 그런데 그 무렵 박 선생의 아이들에 대한 학대가 시작되었다. 특히 박 선생은 지수를 굶기며 하루에 한 끼, 밥을 물에 말아 간장을 타서 줬다. 그리고 지수의 잘못을 수진의 잘못이라 나무라며 비난했다. 결국 수진은 내가 괴물을 낳았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 박 선생의 지시대로 아이들을 때리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때리며 어떤 날은 연거푸 100대를 때리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박 선생에게는 고마운 마음이었다. 무능력한 본인 대신 아이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 준다고 생각했던 것. 경찰은 수진의 정신 감정을 의뢰했다. 정신과 전문의는 수진의 상태에 대해 사이비 종교의 신도들, 열성 신도들에 준하거나 더 심한 것으로 보였다. 집주인이 신에 가까운 존재다, 신의 계시를 더 잘 받는 존재다 생각했던 것 같다. 집주인의 뜻이 신의 뜻이고 집주인을 거스르면 천벌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라고 분석했다. 전문가는 수진이 박 선생의 말을 믿은 이유가 돈 때문이라고 했다. 전문가는 집주인이 쓴 전략이 전형적인데 종교적인 영험함 더하기 돈을 계속 어필한 거 같다. 속된 표현으로 기도발이 잘 먹혀서 돈을 벌게 하나님이 해주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는데 수진 입장에서는 돈이 확실한 증거가 된 것이다 라고 설명했다. 또한 수진은 의존성 인격 장애가 의심될 만큼 독립성이 없고 자기 결정력이 약한 사람인 것으로 드러났다. 전문가는 그런 수진에게 박 선생은 하늘이 내려준 동아줄 같은 존재 였을 것이라며 박 선생 말만 들으면 큰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고 했다. 지수가 죽던 날 박 선생은 기도를 하다가 말씀을 들었는데 지수가 우리를 다 죽여버린대 라며 지수의 다크서클이 증거라며 수진을 몰아세웠다. 이에 수진은 지수를 의자에 묶고 사정없이 때렸고 온몸이 새빨개진 채 의자에 축 늘어진 지수는 겨우 목소리를 내어 네 엄마 다 죽인다고 생각했어요 라고 말했다. 원하는 대답을 들은 수진은 됐다 싶어서 박 선생에게 보고했고 지수는 그대로 묶어둔 채 출근했다. 그런데 오후 4시쯤 박 선생에게 다급한 연락이 왔다. 지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 그리고 지수는 수진이 도착했을 때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이후 수진과 은하, 박 선생의 동생은 박 선생의 지시에 따라 지수의 시신을 골프가방에 담아 차에 싣고 가서 박 선생의 시댁 선산에 시신을 암매장했다. 이후 박 선생은 이제는 지민을 문제 삼았다. 결국 수진은 쫓겨나듯 지민과 도주했고 천안으로 가게 된 것. 그러나 수진의 박 선생에 대한 믿음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박 선생을 보호하기 위해 본인이 지수를 죽였다고 자백까지 한 것. 이에 전문가는 지수 사망 이후 의존성이 더 깊어졌을 것이다. 믿음이 깨지는 순간 감당할 수 없는 절망에 빠지기 때문이다 라고 했다. 또한 박 선생이 세 아이 중 유독 지수를 괴롭힌 이유에 대해서는 박 선생은 수진이 투자한 10억을 애초에 돌려줄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지수를 핑계로 집에서 내쫓으려고 했던 것이다 라며 돈 때문에 죄 없는 아이를 죽이고 이후 지민이까지 공격하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었다 라고 말했다. 2016년 봄, 첫 번째 공판이 진행됐다. 모든 혐의를 인정한 수진과 다르게 박 선생은 무죄를 주장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아이를 학대했다는 증거가 있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또한 11살 민찬이의 진술이 증거 능력 자체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분석관들은 당시 베란다에 모기가 있었다는 민찬의 감각 정보를 통해 민찬의 진술이 신빙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결국 재판부도 민찬의 진술을 인정했다. 그리고 법의학자는 피의자들과 참고인들의 진술만으로 지수의 사인을 밝혀냈다. 다크서클로 기아 상태였다는 것 확인한 법의학자는 지수가 저혈량성 쇼크로 사망했다는 것. 법의학자는 애는 계속 맞은 거다. 이슬비 맞듯이 맨날 또 맞았다. 매일 루틴으로 일과로 그렇게 맞은 거 같다 라고 말해 충격을 안겼다. 그리고 법의학자는 짚불이 불 피워 놓으면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바깥에는 다 없어진 것 같은데 안에는 남아있다. 이 아이도 그랬다. 처음에는 의식이 없어져도 죽지는 않았다. 그때 병원에 데려갔으면 살았을 가능성도 있다 라며 안타까워했다. 이를 토대로 검찰은 박 선생에 대한 부작위에 의한 살인을 주장했다. 부작위에 의한 살인은 법적 의무를 가진 자가 적극적 행위를 하지 않아 타인을 사망에 이르게 한 범죄. 그리고 이는 살인의 고의성이 있어야만 입증되는 것. 살인의 고의성을 입증해야 하는 중요한 시점에서 모두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공판이 진행 중이던 그때 방청석에서 누군가가 내가 실로폰 채 사다 줬잖아, 당신이 그걸로 애들 때렸잖아 라고 소리쳤던 것. 소리를 지른 사람은 바로 은하 씨의 어머니 송 씨 할머니였다. 그는 거짓말로 일관하는 박 선생을 보면서 그의 실체를 깨달았고 이런 행동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증인석에 서서 그날의 끔찍한 비밀을 털어놓았다. 수진이 출근을 한 후 박 선생이 지수 방에 계속 들어갔다 나오는 것을 목격한 송 씨 할머니. 그는 지수를 더 때리는 것 같았다. 박 선생이 들어간 뒤 지수의 비명이 두 차례 들렸다. 두 번째 비명이 들리고 한 시간 후 방을 나온 박 선생은 지수가 이상하다며 전화를 걸었다 라고 증언했다. 그리고 애랑 애 엄마가 말을 안 들으니까 하나님이 그냥 죽게 내버려 두라고 했다 라는 말을 듣고 지수가 죽었구나 생각하게 됐다 라고 말했다. 박 선생은 수진의 애원에도 119에 신고하지 않고 대신 기도를 하라고 했다. 박 선생은 모든 걸 다 포기할 테니 지수를 살려달라고 기도하면 아이가 살아날 것 이라며 수진이 자신에게 투자한 10억 원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라고 종용했던 것. 끝까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은 박 선생은 송 씨 할머니의 증언도 거짓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를 신빙성 높게 판단했고 박 씨에게는 20년, 친모 수진에게는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잔혹한 범죄에 비해 아쉬운 처벌이었지만 박 씨는 억울하다며 항소에 상고를 거듭했다. 그러나 판결은 바뀌지 않았다. 그리고 수진은 벌주셔서 감사하다 라며 눈물을 쏟아냈다. 사실 박 선생을 만나기 전에는 딸 바보였던 엄마 수진 참 잘 웃고 말을 잘하고, 착하고 똑똑하고 꾸미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 지수. 살아 있었다면 올해 21살이 됐을 지수에게 방송은 늦었지만 반드시 전해야 할 말을 전했다. 이에 앞서 전문가는 아이는 내가 뭔가 많이 잘못해서 엄마가 나를 바르게 가르치려고 때린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엄마가 이유 없이 나를 때린다고 생각하면 무섭다. 그래서 나보다 지혜롭고 어른인 엄마에게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그래서 내가 나쁜 아이이기 때문에 엄마가 때린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라고 말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이에 방송은 스스로를 못된 아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지수에게 지수야, 네 잘못이 아니야 라는 위로를 건네 보는 이들의 눈시울을 붉혔다. 학대 피해 아동 은지로 인해 전국적으로 진행된 전수 조사. 그리고 조사 9개월 만에 시신이 된 여섯 명의 아이들이 세상에 드러났다. 그러나 이후 정기적 전수 조사는 중단되었고 2023년이 되어서야 교육부는 매해 전수 조사를 실시하도록 지시했다. 결국 또 한 명의 희생자가 나온 후 정기 조사가 결정되었던 것. 아동복지법은 아이들의 피를 먹고 자란다. 결국 아이들의 희생을 딛고 법 체계가 잡혀가는 것. 이에 마지막으로 방송은 이제는 어른들이 아이들의 비극보다 한 발 더 앞서길, 그 발걸음이 부지런히 이어지길 빌고 또 빌었다. (SBS연예뉴스 김효정 에디터)
9세 딸 폭행 후 암매장한 친모, 진범은 따로 있다?…'꼬꼬무' 조명
등록일2025.12.04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가 9세 여아가 평생을 견뎌야 했던 친모의 잔혹한 폭력을 조명한다. 4일 방송될 '꼬꼬무'는 '모두가 죽였다-박 선생과 꼭두각시 엄마' 편으로, 9세 아이에게 가해진 베란다 감금, 폭행, 굶주림에서 사체유기까지 이어진 친모의 끔찍한 폭행이 공개된다. 이날 방송에 리스너로는 배우 김소은, 한지현, 음악감독 김문정이 출격한다. 한 야산에서 암매장된 채 발견된 9세 여아 지수(가명)를 살해한 피의자로 지목된 친모는 테이프에 묶어놓고 때렸다 라고 밝혔다. 친모는 지수가 잇따른 폭행에 정신을 잃자 방치하고 암매장까지 했다. 심지어 지수를 더 강하게 혼냈어야 하는데 라고 덧붙였다. 9세 인생을 가득 채운 참혹한 폭행에 '꼬꼬무' 스튜디오는 분노에 휩싸였다. 김소은은 이건 엄마가 아니다. 미친 것 같아 라며 지수가 겪은 참혹한 상황을 목도하고 폭풍 오열했다. 한지현은 사람이 아닌 것 같다 라며 친모의 파렴치한 자백에 경악했고, 김문정은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아. 그냥 확 뒤엎고 싶다 라며 분노를 참지 못하고 끝내 눈물을 보였다. 그러나 밝혀진 살인자는 친모가 아닌, 친모와 지수가 신세 지고 있던 집주인 박 선생이었다. 박 선생의 집에는 지수 가족뿐만 아니라 또 다른 가족까지 함께 지내고 있었고, 서로 얽히고설킨 기묘한 동거의 실체가 드러나며 모두를 충격에 빠뜨렸다. 박 선생의 지속적인 가스라이팅 아래에서 9세 지수가 겪게 된 천인공노할 사건들이 공개되며 모든 이들의 눈물샘을 폭발시켰다. 특히 예상치 못한 돌발 증언과 고성이 오간 법정 현장의 모습이 긴장감을 치솟게 한다. 과연 지수 살해범의 민낯을 확인할 수 있을지, 반전에 반전이 오간 혼돈의 법정과 지수의 참혹한 죽음이 '꼬꼬무'에서 공개된다. '꼬꼬무'의 '모두가 죽였다-박 선생과 꼭두각시 엄마' 편은 4일 밤 10시 20분 방송된다. 강선애 기자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
[핫브리핑] 패널들이 고른 '결정적 장면'…남은 과제는?
등록일2025.12.03
[편상욱의 뉴스브리핑] 인터뷰를 인용 보도할 때는 프로그램명 'SBS &<편상욱의 뉴스브리핑&>'을 정확히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저작권은 SBS에 있습니다. ■ 방송 : SBS &<편상욱의 뉴스브리핑&> 월~금 (14:00~15:00) ■ 진행 : 편상욱 앵커 ■ 대담 : 김준일 시사평론가, 최선호 SBS 논설위원 -------------------------------------------- ● 핫 브리핑 ▶ 계엄 1년, 그날 그 순간 시민들의 저항·군경 소극적 업무 수행, 대한민국 민주주의 회복에 큰 힘 ▶ 계엄 1년, 뭘 더 밝혀야 하나? 계엄 선포, 김건희 사법 리스크가 가장 큰 영향 줬단 의견 다수 ▶ 김건희 결심공판 시작 김건희 구형량, 10~15년 예상…추가 기소 병합돼 재판 진행될 가능성 -------------------------------------------- ▷ 편상욱 / 앵커 : 김준일 시사평론가 또 최선호 논설위원 두 분 어서 오세요. ▷ 편상욱 / 앵커 : 먼저 최선호 논설위원은 지금 숨 가빴던 지난 1년의 장면들 가운데 시민의 힘을 꼽으셨더군요. ▶ 최선호 / SBS 논설위원 : 그렇습니다. 아주 결정적인 건 결국 계엄 해제 결의안인데요. 아까 문형배 헌법재판소장의 결정문에도 나오지만 신속한 계엄 해제 결의가 가능했던 것은 바로 시민들의 저항과 군경의 소극적인 업무 수행, 이게 결정적인 것이었다라고 이야기를 했던 부분인데요. 그래서 저는 여러 장면이 있어요.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마는 첫 번째 장면은 제가 생각할 때는 계엄 작전차라고 그러죠. 지휘차 군용차가 이렇게. ▷ 편상욱 / 앵커 : 장갑차죠. ▶ 최선호 / SBS 논설위원 : 그렇습니다. 서강대교 남단에서 국회 쪽으로 들어오는 사거리에 들어오는데 그걸 한 청년이 가서 몸으로 막는 장면이 있습니다. ▷ 편상욱 / 앵커 : 맨몸으로. ▶ 최선호 / SBS 논설위원 : 그게 외신에서 그걸 촬영해서 동영상으로 올리고 나중에 한국에서도 화제가 되고 했었는데 그분이 아마 김동현 씨라고 청년 주거권 관련 활동하시는 시민운동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맨몸으로 막았던 그 장면. 그리고 2박 3일 동안 폭설이 쏟아지는데 그 아스팔트에서 지키면서 시위를 했던 그래서 키세스 시위단. ▷ 편상욱 / 앵커 : 은박담요. ▶ 최선호 / SBS 논설위원 : 그렇습니다. 그런 장면들 그리고 또 하나가 저희 아마 방송에서도 그때 소개해 드렸는데 707 특임단 부대원이 이렇게 계엄 해제가 되고 난 다음에 떠나면서 시민들한테. ▷ 편상욱 / 앵커 : 꾸벅 인사를 했습니다. ▶ 최선호 / SBS 논설위원 :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면서 인사하고 갔잖아요. 그런 장면들. 그게 그야말로 시민들의 저항 그리고 군경의 소극적인 업무 수행. 이런 것들이 어떻게 보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데 있어서 굉장히 큰 힘이 되지 않았나. 그래서 그 장면들을 꼽아봤습니다. ▷ 편상욱 / 앵커 : 김준일 평론가, 지금 화면에도 나옵니다만 저렇게 계엄 극복 시위를 아이돌 응원봉으로 하는 나라는 아마 대한민국이 최초 아니었을까 싶어요. 외신에도 많이 소개가 됐었는데 기상천외하면서도 정말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이렇게 보이지 않습니까. ▶ 김준일 / 시사평론가 : 일단 예전에 학생 운동을 경험했던 분들은 굉장히 낯설 거예요. 집회 하면 일단은 구호하고 '아지를 뜬다'는 은어도 쓰는데 이렇게 외치면서 이런 걸 해야 하는데. ▷ 편상욱 / 앵커 : 최루탄도 터뜨려야 하고. ▶ 김준일 / 시사평론가 : 그런데 그런 경험이 없잖아요. 사실 그러면 시위에서 무엇을 해야 하느냐. 공감대는 평화적으로 해야 한다는 그런 공감대가 있었고, 우리가 이걸 우리 시민의 힘으로 이거를 극복해야 한다. 그러면 새롭게 응원가도 대중가요에서 이를테면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 이런 걸 부른다든지 하면서 평화적으로 하려는 그런 노력들이 반영된 것 같고요. 그리고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을 만하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저도 충분히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10위권 정도, 전 세계 10위권 정도의 나라에서 이런 내란이라고 불리는 친위 쿠데타, 외신에서는 다 이걸 친위 쿠데타라고 지금 불렀거든요. 이런 게 일어난 적도 없었고. ▷ 편상욱 / 앵커 : 그렇죠. ▶ 김준일 / 시사평론가 : 이거를 평화적으로 이렇게 극복한 적도 없습니다. 통계적으로 보면 친위 쿠데타가 일어나면 80% 이상으로 성공을 하거든요. 그런데 이걸 시민의 힘으로 막아냈다. 이건 정말로 노벨평화상감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다만 이 뉴스를 트럼프 대통령이 별로 좋아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 편상욱 / 앵커 : 저도 이 계엄 선포했다는 뉴스를 처음 접했을 때 저희 프로에 '꼬꼬무'를 하고 있습니다. 옛날 역사를 토크하는 프로인데 그 예고인가? 이렇게 잘못 봤을 정도로 정말 눈을 의심했어요. 그렇다면 두 번째로 김준일 시사평론가 픽한 그날의 그 순간 영상으로 보겠습니다. ▷ 편상욱 / 앵커 : 저날의 그 순간 다 모두들 기억하시겠습니다마는 저도 생중계를 보면서 아니 왜 빨리 의결을 안 하지? 이렇게 계엄군은 막 들어오고 있는 상황에서 소화기를 뿌려서 저지하고 정말 가슴을 졸이지 않았습니까. ▶ 김준일 / 시사평론가 : 앞서 MZ세대들이 새로운 응원, 시위 문화도 얘기했는데 국회 일단 보좌진들을 칭찬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상당수가 운동권 출신이거든요. 80년대에서 90년대 초반. 이분들이 경찰과 저렇게 몸싸움을 해본 경력이 굉장히 많습니다. ▷ 편상욱 / 앵커 : 그렇죠. ▶ 김준일 / 시사평론가 : 바리케이드도 쌓아보고 이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어쨌든 군을 저지하는 데 굉장히 큰 공을 세웠고, 우원식 국회의장의 리더십도 좀 칭찬을 안 할 수가 없는데 사실 그때 많은 의원들이 빨리 하자, 성원됐으니까 그랬을 때 여러분 절차를 지켜야 합니다. 그때 전원을 전자 투표하는 전원이 아직 안 켜진 상황이었거든요. 그런데 이거를 절차를 지키지 않으면 나중에 무슨 꼬투리가 잡힐지 모른다고 하면서 모든 절차를 다 지키면서 평화롭게 계엄 해제를 한 것. 그리고 야당 의원들은 그러니까 국민의힘 의원들, 당시에는 여당이었죠. 상당히 표결에 참여하는 게 부담스러웠음에도 불구하고 한동훈 대표를 비롯해서 18명의 국민의힘 의원들이 같이 참석해서 계엄 해제를 했다는 것은 결국은 이게 모든 정치 정파가 잘못됐던 것으로 인식을 하고 그게 계엄 해제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 편상욱 / 앵커 : 최선호 논설위원, 그 당시 한동훈 당시 대표는 국회의원이 아니지만 본회의장에 갔고 국회의원 신분이던 장동혁 의원이죠, 당시에. 계엄 해제 요구안에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 최선호 / SBS 논설위원 : 그렇습니다. 18명 중의 1명입니다. ▷ 편상욱 / 앵커 : 전광판에 나와요. 그런데 지금의 행보를 보면 너무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 최선호 / SBS 논설위원 : 지난 1년 돌이켜 봤을 때 가장 드라마틱하게 정치적 행보가 바뀐 사람 중에 한 명이 이 장동혁 대표죠. 말씀하신 대로 그때 18명 중에 1명입니다. 그리고 한동훈 당시 대표의 아주 측근처럼 오른팔처럼 했다가 탄핵 국면에서 완전히 갈라섰고 그 이후에는 지금은 이른바 윤어게인 세력이 가장 정치적으로 강력한 기반이 되어 있는 이런 상황이죠. 오늘 같은 경우에도 입장, 사과할까 말까 이거 가지고 굉장히 며칠 동안 관심이 모아졌는데 오늘 나온 입장도 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입장. 그러니까 윤어게인 입장 그대로 나온 것이죠. 그리고 책임을 통감한다고 말을 했는데 책임을 통감하는 이유가 정권을 잃어서 그 부분에 대해서 책임을 통감한다, 이런 취지의 얘기였거든요. 그래서 상당히 드라마틱하게 지금 정치 행보가 바뀌었고 지금 앞서 국회의원 두 분의 이야기도 했었습니다마는 국민의힘 내부의 갈등 상황이 조금씩 증폭되고 있지 않습니까. 결국은 국민의힘이 지금 이 상황을 최종적으로 어떻게 마침표를 찍고 당의 항로를 정할 것인가. 여기에 따라서 앞으로 남은 기간 장동혁 대표의 운명은 한 차례 더 이렇게 한 번 더 크게 출렁이지 않을까. 이런 예상을 해 봅니다. ▷ 편상욱 / 앵커 : 계엄 사태 벌써 1년을 맞았습니다만 아직도 해결해야 할 과제가 적지 않죠. 김준일 평론가, 일단 지금까지 가장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가 과연 그 때 왜 계엄령을 선포했는가 아니겠습니까. ▶ 김준일 / 시사평론가 : 표면적으로는 대통령, 윤석열 전 대통령이 밝힌 표면적인 이유는 일단은 야당 그다음에 민주당이었죠. 민주당의 줄탄핵 그리고 예산 삭감, 특활비를 포함해서 여러 예산 삭감 그리고 부정 선거 의혹을 밝히겠다. 이런 거였거든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은 김건희 여사의 어떤 사법 리스크가 영향을 준 것 아니냐. 이런 의혹들이 나옵니다. 왜그러냐 하면 지금 최근에 내란 특검에서도 그 부분을 들여다보고 있잖아요. 김건희 여사가 과거에 박성재 법무부 장관에게 문자메시지, 텔레그램 메시지를 했다라든지 본인의 의혹과 관련해서. 그래서 지금 당시 상황을 돌이켜 보면 그때 국민의힘에서 당원 게시판, 한동훈 대표의 당원 게시판 가족이 댓글에 달았다는 의혹이 불거졌고 그러다 친한계에서 익명으로 이렇게 하면 우리 김건희 특검 통과시킬 수도 있어라는 그런 메시지들이 막 나오기 시작했어요, 언론에. 그리고 갑자기 12월 3일에 이게 비상계엄이 터졌다는 말입니다. 사실은 다음 날 본회의가 잡혀 있어서 의원들이 다 주변에 있었어요. 그래서 이게 날이 적절한 날이 아니다라는 얘기들이 굉장히 많았거든요. 주말에 했었어야 하는데, 하려면. 이렇게 긴급하게 된 것은 결국은 김건희 여사와 관련이 있는 거 아니냐. 그래서 그 부분 그러면 그걸 알고 있었느냐. 혹시 이거를 같이 공모한 것이냐. 이 부분이 지금 특검의 숙제가 아닌가. 그렇게 보여집니다. ▷ 편상욱 / 앵커 : 현재까지는 추측입니다만 김건희 여사 때문에 계엄을 선포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렇게 여론이 모아져 가는 중인 것 같아요. ▶ 김준일 / 시사평론가 : 그 전에도 저 같은 정치평론가나 많은 분들 정치를 좀 많이 아는 고관여층은 이거는 김건희 때문이다라는 것들을 굉장히 의심을 했고 그 앞단에 또 무슨 일이 있었냐면 명태균 게이트. ▷ 편상욱 / 앵커 : 그렇죠. ▶ 김준일 / 시사평론가 : 이것도 11월에 지금 명태균 씨가 구속되면서 검찰의 수사 보고서가 지금 그때 대통령실에 보고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거든요. 그러면 이게 여러 다방면으로 지금 압박이 됐을 거다. 이렇게 보입니다. ▷ 편상욱 / 앵커 : 알겠습니다. 검찰에서부터 군검찰, 지난 6월 출범한 내란 특검까지 계엄과 관련해서 재판에 넘겨진 사람 윤석열 전 대통령을 포함해서 모두 2 5명이나 됩니다. 구속과 불구속은 서로 갈렸습니다만 대통령과 고위 관료, 윤석열 전 대통령, 한덕수 전 총리, 김용현 국방장관 그리고 군 출신에는 박완수 전 육군참모총장, 계엄사령관이었죠. 포함해서 6명 그리고 경찰에서는 조지호 경찰청장과 김봉식 전 서울경찰청장까지 이렇게 재판에 넘겨졌고 현재 추경호 국민의힘 국회의원, 박성재 전 법무장관, 황교안 전 국무총리는 수사를 받고 있습니다. 최선호 논설위원 이달 말까지 3대 특검 중 채 상병 특검은 이미 활동이 종료가 됐고 내란 특검 김건희 특검 순서로 활동이 모두 끝나지 않습니까. 오늘도 내란 특검이 청구한 추경호 전 국민의힘 원내대표에 대한 영장이 기각이 됐는데 현재까지 특검의 수사 성과 어떻게 평가합니까. ▶ 최선호 / SBS 논설위원 : 글쎄요, 간단하게 한마디로 정리하기는 힘든 건데 지금 많이 나오는 이야기들이 영장 기각률이 너무 높다. 얘기가 나오지 않습니까. 내란 특검 같은 경우에 13명 기소했는데 6명이 기각이 됐어요. 영장을 청구를 했는데 6명이 영장 기각이 됐습니다. 그리고 김건희 특검 같은 경우에는 아마 25명 정도 했는데 그중에서 8명 정도가 영장 기각이 됐고 채 상병 특검은 10명 중에서 9명이 기각이 됐죠. 그래서 일반 사건 같은 경우에 구속영장 기각률이 한 20% 수준입니다. 거기에 비해 보면 굉장히 높잖아요. ▷ 편상욱 / 앵커 : 그렇죠. ▶ 최선호 / SBS 논설위원 : 그런데 그런 부분에서 아쉬움 을 나타내는 목소리가 꽤 있는 것이고 그런데 또 그것만 가지고 판단할 수 없는 게 지금 상황에서 예를 들어서 일반 사건 같으면 검찰이 조사를 해서 이거는 기소는 한다, 기소해서 재판까지는 가지만 구속은 좀 애매할 수 있겠다. 이렇게 판단할 수도 있을 텐데 지금 특검은 그런 판단이 가능할까요? 만약에 오늘 기각된 추경호 전 원내대표 같은 경우에 특검이 구속영장을 안 칠 수 있겠습니까. 지금 현재 상황에서 그런 부분들까지 같이 봐야 되고 그다음에 또 하나가 이런 부분이죠. 특검의 임무에 명시돼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진상 규명입니다. 그러니까 죄 지은 사람 벌주는 것뿐만 아니라 도대체 누가, 왜, 어떤 이유로 어떤 과정을 통해서 계엄을 일으켰는가 라는 진상 규명을 해야 한다. 이게 있거든요. 그 부분에서 좀 속 시원하게 안 밝혀졌기 때문에 조금 답답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정말 22년 말에 처음 비상대권을 말하기 시작했다는데 그리고 작년 3월에 갑자기 군 관계자들 앉혀놓고 비상대권 이야기하고 그렇게 하기 시작했다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따지면 왜 계엄을 했을까. 또 복잡해지는 거죠. 그래서 이 전체의 진상 규명의 과제가 과연 이 남은 기간 동안 죄지은 사람 벌 주는 것뿐만 아니라 정말 계엄의 전 과정, 배경 이걸 아마 속 시원하게 특검이 설명할 수 있을지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 편상욱 / 앵커 : 계엄 1년인 오늘 민중기 특검이 기소한 김건희 여사의 재판도 열렸습니다 . 오늘이 결심 공판이었는데 최선호 논설위원, 재판부가 언론사에 법정 촬영을 허가했죠. 공개가 됐습니까. ▶ 최선호 / SBS 논설위원 : 그렇습니다. 앞에 재판 시작하기 전까지의 모습만 공개됐고 아마 부축을 받으면서 입장하는 모습 이런 거 계속 나왔던 지금 화면 보고 계십니다마는 이렇게 됐고요. 그런데 원래 오늘 결심이 예고됐었다가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공범으로 도주했다가 붙잡힌 이 모 씨 있지 않습니까. 김건희 씨와 문자를 많이 주고받았다는 걸로 더 이슈가 됐던 사람인데 이 사람 오늘 증인신문하겠다고 해서 결심이 연기되는 거 아니냐, 이런 얘기가 있었는데 또 이제 이 씨가 불출석했어요. 출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바람에 그냥 예고됐던 대로 결심이 진행이 됐고요. 오전에 피고인 심문을 하는데 재판부가 이 부분을 또 김건희 여사가 증언을 거부했습니다. 김건희 씨가. 그래서 오전에는 그게 그냥 간단하게 끝나버렸고 오후 한 2시 10분 정도부터 속개돼서 검찰이 구형을 하고 여기에 대해서 최후 변론을 하고 김건희 씨가 자기의 입장을 밝힐지 안 밝힐지는 모르겠는데 입장을 밝히는 것까지 결심이 진행될 겁니다. 그래서 아마 조금 있다가 속보로 검찰의 구형 내용이 일단 전해질 수 있습니다. ▷ 편상욱 / 앵커 : 검찰의 구형이 얼마나 나올까가 가장 큰 관심이죠. ▶ 김준일 / 시사평론가 : 일단 김건희 여사가 그때 구속될 때 그때 혐의가 세 가지였거든요. 하나는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관련해서 자본시장법 위반, 하나는 명태균 씨 여론조사와 관련해서 정치자금법 위반 그리고 또 하나는 알선수재 지금까지 받은 뇌물이 그러니까 금품이라든지 이런 것들. 그런데 이게 생각보다 형량이 그렇게 높지는 않습니다. 알선수재 같은 경우에는 5년 이하의 징역 이렇게 돼어 있고요. 정치자금법은 2년에서 5년 정도 이렇게 돼 있고요. 자본시장법은 금액에 따라서 다른데 50억에서 300억, 50억 이상 300억 이하 같은 경우에는 기본 형량이 5년 에서 9년이에요. 그러면 종합을 해보면 대략적으로 한 15년, 10년에서 15년 사이에 구형이 나오지 않을까. 이렇게 되는데 사실 중요하게 있는 많은 혐의들이 아직 안 밝혀졌거든요. 지금 진행 중인 게 굉장히 많기 때문에 추후에 추가로 기소가 돼서 또 구형이 되고 병합돼서 재판이 진행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렇게 봐야 될 것 같습니다. (SBS 디지털뉴스부)
[꼬꼬무 찐리뷰] 피 뽑아 DNA 굿즈 만들던 시절 …K팝 '혼문'의 시작, 1세대 아이돌 신드롬과 팬덤
등록일2025.11.28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27일 방송된 '꼬꼬무'의 '케이팝 혼문의 탄생'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가수 윤하, NCT DREAM 마크, 댄서 허니제이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마이클 잭슨 공연에 선 한국 그룹 때는 1999년 6월, 사람들의 관심이 잠실종합운동장에 있는 올림픽 주경기장으로 쏠렸어. 세계 불우아동을 돕기 위한 자선공연, '마이클 잭슨과 친구들'이 열렸거든. 세계적인 팝스타 마이클 잭슨이 내한한 거야. 이걸 현장에서 봤다면 어땠을까? 제가 그 당시에 문화부 출입기자였는데. 당시 조명이라든가 수많은 사람들의 안무라든가, 스케일이 어마어마한 장비들이 동원돼서 현장에서 보는 사람들도 너무 놀랐고, 역시 명불허전이구나. 마이클 잭슨의 퍼포먼스나 이런 것들이 대단했었죠. -배재학, 당시 SBS 기자 장장 4시간의 공연이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어. 이제 엔딩 무대만 남은 상황이야. 보통 가수들의 엔딩 무대는 가장 심혈을 기울여 강력한 메시지나 감정을 전달하고 싶을 거야. 근데 이 공연을 준비하며, 마이클 잭슨 측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대. 마지막 무대는, 신나고 즐겁게 마무리했으면 합니다. 한국 가수 중에서 인기 있는 가수가 하면 좋겠네요. 한국 가수가 마이클 잭슨 공연에서 엔딩 무대를 한다고? 그렇게 한국 측 공연 대행사는 최정상급 한국 가수를 섭외했어. 그리고 엔딩 무대를 장식할 가수가 결정됐어. 바로 그룹 H.O.T.야. 문희준, 토니안, 강타, 장우혁, 이재원, 다섯 명의 멤버로 구성된 H.O.T. 이들은 여기서 'We are the Future(위 아 더 퓨처)'를 불렀어. 마이클 잭슨 공연에서 마지막을 장식한 심경은 어땠을까? 직접 들어볼게. 저희는 반대 의견을 냈어요. 저희가 마이클 잭슨 님의 공연을 앞에 무대에서 보고, 그 느낌을 딱 받고 이제 무대로 올라가는데. 막 저희 되게 그때 흥분했었어요. 황홀한 상황이여서. -토니안, H.O.T. 꿈같은 일이었죠. 사실 마이클 잭슨과 그냥 같은 무대에 섰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일이죠. -문희준, H.O.T. 당시 이 공연을 쭉 지켜본 배재학 기자는 이런 생각을 했대. H.O.T.가 그 무대에서 마지막 무대를 출연함으로써, 전 세계 사람들한테 약간 각인이 되는 그런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 이제 우리의 아이돌 그룹들도 세계에 진출까지 할 수 있지 않을까? -배재학, 당시 SBS 기자 1990년대 세계 진출을 꿈꿨던 그 시절. 지금은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선 케이팝, 그 시작. 오늘의 이야기는 1세대 아이돌의 등장과 팬덤이 뜨겁게 달아올랐던 그때의 이야기야. ▲ H.O.T.의 시작 넷플릭스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 등장하는 '혼문'. 들어봤어? 혼문은 악귀를 막아내는 결계야. 영화 속 케이팝 걸그룹 헌트릭스가 진심을 다해서 그 무대를 하면, 관객의 감동과 공감이 더해져 혼문이 만들어지지. 그 혼문의 탄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거야. 1995년. 서울의 한 고등학교야. 학생 한 명이 종이 한 장을 들고 교실로 뛰어 들어와. 잡지에서 찢어 왔다는 종이에 쓰인 내용. '신인가수 모집' 오디션 공고야. 너 이거 한 번 해봐. 춤 잘 추잖아 라며 친구에게 오디션 권유를 받은 이 학생. 동네에서 춤 좀 춘다고 알아주는 끼쟁이였어. 일명, '송파구 노란 바지'. 바로 이 사람이야. H.O.T. 문희준. 그렇게 친구의 권유로 희준은 오디션을 보게 돼. 결과는 일주일 뒤쯤 통보되는 거였는데, 오디션 직후 희준을 따로 부르더래. 이수만 선생님 앞에서 춤을 추고 노래하고, 그리고 개인기를 제가 한 8개를 써놨는데. 그거 한 다음에 원래 한 일주일 뒤에 통보해 가지고 합격자를 발표하겠다라고 공고에는 써 있었는데. 저 같은 경우는 이 선생님이 부르셔서 '야, 너 내일부터 나와'라고. 바로 거기서 그냥 합격이 됐었던 그런 스토리가 있습니다. -문희준, H.O.T. 이 당시 이 오디션에 도전한 사람은, 한국에만 있었던 게 아냐. 미국에서 한인신문에 실린 오디션 공고를 본 또 한 사람이 있어. 바로 당시 17세 토니 안. 토니는 공고에 쓰인 번호에 전화를 걸어, 자동응답기에 음성 메시지를 남겼어. 안녕하세요. 저는 캘리포니아에 사는 안승호라고 하는데요. 아까 메시지 남겼는데요. 좀 부족한 것 같아서 다시 드립니다. 지금 만 17살이고요. 이번 겨울에 18살이 됩니다. 가수가 되는 게 언젠가 꿈이었는데, 이런 기회가 생기니 너무 좋습니다. 노래도 자신 있습니다. 정말로 기회만 있다면 성공할 수 있는 자신 있습니다. 전화 연락 꼭 부탁드립니다. -토니 안, 당시 17세 간절함이 절절하게 묻어나는 음성 메시지. 그 후 토니는 미국에 온 이수만 대표를 한 주유소 앞에서 만나. 그리고 두 사람은 장소를 옮겨. 바로 노래방으로. 거기서 토니는 김정민의 '슬픈 언약식'을 부르고, 공원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의 '컴백홈' 댄스까지 선보였어. 그리고는 합격. 강타는 중학교 때 놀이동산에서 기획사 명함을 받았고, 구미에서 춤으로 알아주던 우혁도 희준과 같이 오디션을 봤어. 막내 재원은 기획사에 직접 찾아갔대. 이렇게 가수를 꿈꾸던 다섯 전사가 모이게 됐어. 그렇게 1996년 9월 7일 H.O.T.가 데뷔해. 데뷔곡은 '전사의 후예'. 데뷔 무대에서 H.O.T.의 이름이 '핫'으로 쓰일 정도로 인지도가 없던 시절이야. '전사의 후예'는 학교폭력 문제를 다룬 노래야. 근데 데뷔 무대를 앞두고 H.O.T.는 너무 걱정이 됐다고 해. 공식 데뷔 전에 한 행사에서 먼저 '전사의 후예'를 부른 적이 있는데, 그때의 반응은 무반응이었어. 정말 무반응이었어요. 놀란 표정들이었어요. '이거 뭐야?' 너무 센 눈빛으로 막, '아악! 네가 네가 뭔데!' 막 이러니까. 어른들이 보시기에는 '저 친구들 봐라'. 그때 제 기억에 또 강렬하게 남아 있는 기억은, 강타가 내려온 다음에 또 울었어요. 왜냐하면 '형 우리 망한 것 같아요'라고 얘기를 하면서… -문희준, H.O.T. 열심히 준비한 무대에서 그런 반응을 봤으니, 멤버들의 실망이 컸겠지. 그렇게 의기소침해진 멤버들에게 회사에서는 이런 말을 했대. 당연히 이런 반응일 거라고, 나는 알고 있었다, 너희들은 10대들이 좋아할 그런 그룹이기 때문에 어른들이 보기에는 놀랄 수밖에 없는 팀이고, 그렇게 놀라라고 만든 팀이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냥 이제 열심히 해가지고 데뷔하면 된다. 그냥 무대 경험 쌓으라고 오늘 무대에 선 거다… -문희준, H.O.T. ▲ 10대가 들썩이다 그럼, 진짜 데뷔 무대 이후 대중의 반응은 어땠을까? 걱정과 달리, 완전 먹혔어. 10대들이 들썩이기 시작해. 그리고 H.O.T.의 1집 후속곡 '캔디'가 대박이 났어. 데뷔곡과 달리 발랄하고 귀엽게 돌아온 H.O.T. 이 곡으로 H.O.T.는 10대 팬을 넘어 인기 신드롬을 일으켰지. H.O.T.는 '캔디'로 음악방송에서 첫 1위를 차지했어. 이때 H.O.T. 멤버들에겐 각자 고유 컬러와 고유 번호가 있었어. 요즘 케이팝 마케팅의 필수 조건 중 하나잖아. 세계관을 만들고, 서사를 주고, 멤버별 고유 능력이 있는 거. H.O.T.가 그 시초라고 볼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캔디'는 난리가 났어. H.O.T.가 착용하던 털모자, 털장갑, 털가방이 거리에 쫙 깔렸어. 그리고 또 하나 난리였던 게 있어. 바로 '단지'. 토니가 부른 '캔디' 가사 중 단지 널 사랑해, 이렇게 말했지 라는 부분 때문에 생긴 에피소드야. 그때 당시 토니오빠의 여자친구가 '단지'다. 그다음에 캔디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외국인 여자분이 있어요. 그분이 단지라고. 그래서 토니 오빠 팬들이 펑펑 울었던… -모경민, 29년차 H.O.T. 팬 그러니까 단지가 누구냐 그러면서 막 팬들끼리 싸우고 막 그랬던 기억이 있어. 단지가 토니 여자친구 아니냐 막 이러면서. -문희준, H.O.T. 나는 근데 사실 저 때는 몰랐어. 그런 이야기가 있다는 걸. -토니안, H.O.T. 나는 편지로 많이 받았어. 왜냐하면 토니 팬이 토니한테 안 물어보죠. 조심스러운 얘기죠. 저한테 편지가 오잖아요. 그러면 '희준 오빠 이번에 1위 해서 축하드려요. 근데 혹시 김단지라고, 토니 오빠 여자친구가 단지가 맞나요?' 그러면서… 너무 귀엽지 않나요? -문희준, H.O.T. 그 정도로 H.O.T.의 일거수일투족이 팬들의 관심을 받았다는 거지. ▲ 세기의 라이벌 이렇게 H.O.T.가 '캔디로' 인기를 끌고 있을 무렵, 서울 서래마을의 한 사무실에선 그래, 우리는 한 명 더 많게 하고. 이름은 '마그마' 어때? 라는 말이 흘러나와. 이게 대체 무슨 이야기일까? 그래 맞아. H.O.T.의 영원한 라이벌, 젝스키스에 대한 이야기야. 안녕하세요. 젝키의 리더 은지원입니다. 사장님께서 심경의 변화가 오신 거죠. '우리는 5명보다 더 많은, 한 명 더 많은 6명으로 가자' 어떻게 보면 의식을 하셨겠죠. 아무래도 H.O.T.가 탑이니까 H.O.T.를 대항하기 위한 예비명들이 좀 몇 개 있었는데 H.O.T.가 핫이니까 그것보다 더 뜨거운 용암, '마그마'로 나가자. -은지원, 젝스키스 리더 이렇게 나훈아VS남진 이후, 최고의 라이벌로 회자되는 H.O.T.와 젝스키스가 출격하게 됐어. 1997년 젝스키스의 데뷔곡은 '학원별곡'. 여기에 후속곡 '폼생폼사'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어. 그런데 '학원별곡' 활동 당시 리더 지원은 마음에 들지 않는 하나가 있었다고 해. 의상 콘셉트가 너무 직관적이고 노골적이라 입고 다니기 창피했다는 거야. 뭔가 방정식, 국어 영어 이런 것들이 옷에 다 적혀 있었죠. 그런 것들이 너무 창피했어요 솔직히. 방송국에서 그런 걸 입고 나가는 게. -은지원, 젝스키스 리더 그리고 후속곡 '폼생폼사'의 인기는 뭐 말이 필요 없어. 당시 학교에서 장기 자랑하면 무조건 '폼생폼사'야. 97년 같은 해에 젝스키스는 1집에 이어 2집도 공개했어. 타이틀곡은 '기사도'. 이 노래로 음악방송 첫 1위를 차지해. 실감 나지 않아요 진짜로. '진짜 맞아?' 막 나한테 계속 되묻게 되지, 아니 믿어지지도 않고. 그냥 뭐 잠깐 이러다가 혹시 또 뭐 사라지는 거 아니야? 막 오만 걱정들이 막 다 들고. -은지원, 젝스키스 리더 항상 비교를 당했잖아요 우리는. H.O.T.랑 너무 비교를 당하니까. 악바리가 좀 있었어요. 우리가 지켜야지. '오빠는 우리가 지킨다' 이런. 1위가 진짜 중요하잖아요. 그리고 그때는 1위가 전화해 가지고 (ARS 집계로) 막 올릴 때니까. '오빠들 안 되면 어떡하냐' 하면서 전화해서 번호 누르고… -송임선, 28년차 젝키 팬 세기말을 앞둔 90년대 중후반, H.O.T. 대 젝스키스의 대결 구도로 가요계가 불타올라. 그리고 그 중심엔 거대한 팬덤이 있었어. H.O.T. 팬클럽 'Club H.O.T.', 젝스키스의 팬클럽 '옐로우 키스'. 사실 H.O.T.도 대단했지만 젝스키스의 당시에 또 히트곡은 굉장했습니다. 그리고 서로 어떻게 보면 다른 취향들을 공략을 하면서 서로 간의 시너지를 또 굉장히 많이 불러일으켰었고. 이런 것들이 또 팬덤 간의 일종의 전쟁 양상으로 치달으면서 진짜 K팝의 한 시대를 화려하게 수놓았다고 볼 수 있겠죠. -김영대, 음악평론가 팬클럽에 가입하면 이런 팬클럽 회원증도 받았어. 그 시절의 굿즈, 궁금하지 않아? 전국의 팬들을 통해서, 그 시절의 굿즈를 모아봤어. 팬 컬러 우의. H.O.T.는 흰색, 젝키는 노란색. 같은 색깔의 우의를 입으며 같은 가수를 좋아하는 팬들과 유대감을 느꼈지. 멤버의 이름 명찰을 단 가방. 이런 목걸이도 있어. 이건 평범한 목걸이가 아냐. DNA 목걸이야. 멤버들의 DNA가 들어있다는 거야. 이거 때문에 피를 뽑았어요 저희가. 머리카락도 뽑고 -문희준, 토니안, H.O.T. 다마고찌라 불리던,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도 있었어. 팬들의 열망을 게임으로 승화시킨 거지. 캐릭터 과즙음료. 피아노 악보. 문구점에서 팔던 포토카드. 사진, 브로마이드가 문구점에서 불티나게 팔렸어. 당시 1세대 아이돌의 인기, 짐작되지? ▲ 아이돌, 주류가 되다 그럼 우리는, 특히 10대들은 그들을 왜 그렇게 좋아했을까? H.O.T.와 젝스키스는 명확하게 10대의 우상이라는 타깃팅을 했던 것이지만, 이제 음악 장르나 가사에 있어서 애매한 포지션을 띠지 않았어요. 이게 저는 그게 성공 요인이라고 보는데. 말하고자 하는 게 학교 폭력이라든지 혹은 청소년들로서의 어떤 느끼는 울분 같은 거. 그러니까 명확했던 거죠. 같은 또래, H.O.T.라는 아티스트와 같은 또래의 청소년들이 공감할 수 있는 정확한 그 이야기를 대변하듯 해줬고. 이게 막연한 청춘을 대변하는 게 아니라 딱 그 연령대를 대변해 줬단 말이죠. -김영대, 음악평론가 H.O.T.는 그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어. 'H'IGH-FIVE 'O'F 'T'EENAGER. '10대들의 승리'라는 의미야. 기획 자체도 철저하게 10대에게 맞추고, 멤버들도 전부 10대로 구성했어. 젝키도 멤버들이 전부 10대였어. 또래 아티스트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대변해 준다, 10대 문화를 겨냥한 음악과 컨셉이 적중했던 거야. 당시 이들의 인기는 시상식에서도 확인됐어. 'SBS가요대전'은 지금 축제 형태로 하고 있지만, 과거엔 달랐어. SBS가요대전은 1996년에 처음 시작됐어. 그땐 연말 시상식 형태로 진행됐어. 당시 각 방송국의 연말 가요 시상식은 별들의 전쟁이었어. 96년 첫 번째 SBS가요대전에서 H.O.T.는 신인상을 수상해. 클론, 양파, 이지훈 등 쟁쟁한 신인들을 제친 거야. 그리고 97년 젝스키스가 데뷔했지. 젝키는 그해 방송 3사 연말 가요 시상식에서 10대 가수상과 본상을 수상해. 그럼 97년 그 해 H.O.T.는? 당시 H.O.T.는 2집으로 활동했는데, 2집 타이틀 곡은 '늑대와 양'. 이어 활동했던 '행복'. 그리고 '위 아 더 퓨처'까지. 1997년 데뷔 2년차였던 H.O.T.는 SBS가요대전에서 대상을 받았어. 그때는 제가 기억으로는 어쨌든 나올 때까지 저희 다 늠름하게 이렇게 막 나왔거든요. 그러고 차에 딱 타서 되게 다 눈물을 많이 흘렸던 기억이 좀 나는 것 같아요. -토니안, H.O.T. '대상!' 전 그게 아직도 기억나요. 대상 외치면서 저희 팀 이름을 부르면 팬들이 막 엄청난 함성으로 기뻐해 주시고. -문희준, H.O.T. 전 당연하게 무조건 오빠들이 대상을 받을 거라 생각하고, 집에서 우의를 입고 풍선을 들고 그리고 보면서. 자랑스러운 건 당연한 거였고요. -배수빈, 29년차 H.O.T. 팬 처음에는 정말 좋아서 소리 지르다가 나중엔 울었던 거 같아요. TV 보면서 좀 뭉클했던 거 같아요. '우리 오빠들이다'라는 자존감도 높아지고. -모경민, 29년차 H.O.T. 팬 1997년 H.O.T., 젝스키스 모두 뜨거운 사랑을 받으며, 누구보다 빛나는 한 해를 보냈어. 그리고 1998년이 밝아. '꼬꼬무'가 H.O.T.와 젝스키스를 인터뷰하면서 활동 당시 영상을 좀 보여줬는데, 똑같이 흠칫하는 순간이 있었어. 일종의 '흑역사'가 있거든. 젝키가 출연한 청춘 영화 '세븐틴'과 H.O.T.가 출연한 한일합작 3D 판타지 영화 '평화의 시대'야. 이 영화에서 H.O.T.는 2200년 우주 공간에서 개최하는 축구 대회에 지구 대표로 출전하는 주인공 역을 맡았어. 제작비 무려 70억 원의 영화야. 젝키 멤버들은 '세븐틴'에서 전원 연기에 도전했어. 거기서 주인공 준태 역을 맡았던 은지원은 당시를 이렇게 기억해. 이거는 뭐. 사실 저는 이 비디오를 제가 봐야 합니다. 내용을 아직도 모릅니다. 저는. 정확한 풀스토리를 잘 이해를 못 할 정도로 뮤지컬과 영화와 앨범 작업이 그 한 해에 다 겹쳤던 시기라. 촬영이 끝난 친구는 바로 뮤지컬 연습실에 가서 연습을 해야 되고, 그리고 그 뮤지컬 연습이 끝나면 바로 녹음실에 가서 자기 파트 분량 녹음 연습을 하고 녹음을 해야 됐던, 활동 중에 가장 바빴던 한 해였던 것 같아요. -은지원, 젝스키스 리더 ▲ H.O.T. vs 젝키, 우리가 사랑한 노래들 98년 '세븐틴' 개봉 후 젝스키스는 영화 OST와 신곡을 엮어서 스페셜 3.5집을 내. 여기에 지금도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노래가 실려 있어. 바로 '커플'이야. 그런데 이 노래의 성공에 비밀이 있었어. 원래는 다른 타이틀 곡이 정해져 있었대. 안무도 나왔고 연습도 해야 하는데, 멤버들은 이 '커플'이란 곡에 너무 끌렸던 거야. 리더인 지원이 대표로 말했어. '아닙니다. 저희 커플로 가야 됩니다. 안 되면 진짜 저희가 다 책임지겠습니다'라고 해서 사장님을 진짜 한 달을 설득했을 거예요. 저희 입장에서는 곡을 바꿔야 하는 입장이니까 그 타이틀곡에 나왔던 안무들을 연습을 할 수도 없는 입장이고. 앨범 발매고 첫 방은 나가야 되는 입장이니까. 저희는 마음은 급하고 그래서 사실 '커플' 안무가 굉장히 쉬울 수도 있는 게 급하게 만든 안무고 뮤직비디오도 사무실에서 막 찍었고.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됐던 상황이지만 저희가 다 의기 투합해서 우겨서 '커플'로 곡을 바꾼 거죠. -은지원, 젝스키스 리더 선견지명이었어. 젝스키스는 '커플'로 활동하며 엄청난 인기를 끌게 돼. 그리고 당시 3집으로 활동했던 H.O.T.도 사랑받는 대표곡을 남기게 돼. 강타가 작사 작곡한 곡. 바로 '빛'이야. 이 노래는 당시 대중에게 국민위로송 같은 곡이었어. 1997년에 IMF가 터지고, 회사가 부도나고 직장을 잃고, 삶의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많았거든. IMF 때 직격타가 있었어요. 그때 오빠들 노래가 이제 3집 활동의 때였어요. 그래서 '빛' 노래 들으면서 뮤직비디오가 나오잖아요. 근데 그 희준 오빠 에피소드가 그런 이야기예요. 아빠의 사업이 기울면서… 이게 너무 공감이 돼서 그때 더 빠져들었었던 것 같아요. -모경민, 29년차 H.O.T. 팬 '빛'을 통해 함께 힘든 시기를 이겨 나가자고 외쳤던 H.O.T. 그 외침은 10대를 넘어 국민 모두의 가슴에 닿았어. 그리고 이번 인터뷰에 응해준 젝키팬 두 분. 이들은 부부라고 해. 남편분이 아내분을 따라 젝키 팬이 됐다고 해. 아내 만나면서 옛날 1집부터 시작해서 다 들어보니까 너무 좋아서 또 그렇게 됐죠. -노우빈, 젝키 팬 내가 너무 좋아하니까. TV를 틀어도 막 이렇게 오빠들 나오는 것만 보고 이러니까. 자꾸 왜 보는데 하다가 스며든 거죠. 저희는 중학교 때부터 만났어요. -송임선, 28년차 젝키 팬 전 젝키 노래 중 '라스트'가 힘이 됐어요. 이별 노래인데, 마음이 너무 그냥… 노래가 차분하고 뇌에 가사가 쏙쏙 박혀요. '라스트'는 진짜 저한테는 잊을 수 없는, 듣다 보면 힘도 나고. -노우빈, 젝키 팬 저와 사이가 안 좋을 때 많이 울었대요 그 노래 듣고. 저한테 항상 그 얘기예요. '라스트'를 들으면서 많이 생각했다는. -송임선, 28년차 젝키 팬 젝키 팬클럽 소속의 두 사람의 결혼식은 어땠을까. 결혼식은 젝키 멤버 장수원의 영상 축전으로 시작했어. 신랑 입장곡은 젝키의 '로드 파이터'. 신부 입장곡은 젝키의 '아프지 마요'. 신랑 셀프 축하무대 젝키의 '예감'. 퇴장 곡까지 전부 젝키 노래였어. 이렇게 '커플'과 '빛'으로. 1998년 힘들었던 국민들에게 힘이 돼준 두 그룹은 그해 서울가요대상에서 공동 대상을 수상하게 됐어. 그렇다면 연말 방송 3사 가요 시상식에선 어땠을까? SBS가요대전에서는 H.O.T.가 대상을 받았어. 젝키는 SBS, MBC, KBS에서 상을 받았고. H.O.T.는 아이돌 최초로 방송3사 대상을 모두 휩쓸며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어. SBS KBS MBC를 다 받는, 그런 상황이었는데. '이렇게 받으면 진짜 대박이다' 막 이랬는데 그렇게 진짜 그때 받아가지고. 그때 뭐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뻤던 것 같아요. -문희준, H.O.T. 대중에게 다소 낯설었던 아이돌 음악이 대한민국 가요계에 인정받는 순간이었어. 그렇게 H.O.T.와 젝키가 가요계에 새 역사를 쓰는 동안, 멀지 않은 곳에서 또 다른 별의 탄생이 시작되고 있었어. ▲ 다섯 남자의 생존기 여기는 경기도 일산. 산속에 있는 한 건물의 반지하야. 앞에는 논, 뒷산엔 무덤. 아무도 없는 이곳에 꾀죄죄한 몰골의 남자들이 주린 배를 부여잡고 있어. 누구였을까? 바로 '국민그룹' god야. 처음부터 일산 숙소는 아니었고요. 거기가 원래 녹음 스튜디오였어요. 본격적으로 녹음실이 있는 곳에서 녹음을 하고 연습을 하자 하고 갔다가, 간 곳이 일산이었고요. 그때는 저희가 이동 수단이 저희의 따로 차도 있는 게 아니고 해서 자연스럽게 거기서 지내다가 그게 고립이 된 거죠. -손호영, god 거기에서 호영이 말대로 뭔가 연습을 하다가 눌러앉게 됐고. 회사는 이제 그때 IMF가 터져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저희는 거기에서 뭔가 그 생존을 하기 위해서 버텼던 것 같아요. -데니안, god 도대체 이 예비 god가 일산 숙소에서 어떻게 생활한 걸까. 이건 god가 데뷔 전 일산 숙소에서 실제로 먹었던 음식이야. 눅눅해진 새우과자를 물에 끓여서 만든 죽. 그리고 물에 고추장만 풀어 만든 순도 100% 고추장찌개. 보통 데뷔 전 다들 어렵다지만, 이건 그야말로 레전드 급이야. 같은 희망, 같은 꿈을 꾸고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 있어서 좀 버틸 수 있었던 것 같고. 우리끼리 힘들지만 집에는 거짓말을 하거든요. '잘 먹고 있다' '연습 잘하고 있다'. 왜냐하면 지금 상태를 보시면 그냥 바로 끌고 가실 테니까 거짓말을 하고. -데니안, god 고추장에 밥만 먹어도, 배는 고프지만, 그걸 뛰어넘는 꿈이 있었던 거 같아요. 그래서 모두가 거짓말을 다 했어요. -손호영, god 그러던 1998년 7월 21일. 힘들지만 꿈이 있어 행복했던 청년들에게, 이날은 아주 중요한 날이야. 그룹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팀의 메인 보컬이 온다는 거야. 박준형, 윤계상, 데니안, 손호영. 이들의 기대감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어. god의 프로듀서인 박진영이 메인 보컬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거든. 키가 크고 눈이 살짝 처진 이미지가, 정우성이나 류시원 느낌이야. 잠시 후 숙소 앞마당에 승합차 한 대가 들어서. 정우성 닮은꼴을 기다리며, 멤버들의 시선은 차 문으로 향해. 그런데… 사람들이 한 명씩 내리는데, 우리가 원하는 사람이 안 내렸는데 문을 닫더라고요. -데니안, god 긴 반바지에 큰 반팔 티를 입은 큰 아이가 내리는 거예요. -손호영, god god의 메인보컬, 김태우의 등장이야. 멤버들이 '설마?' 하고 있는데, 태우의 표정도 그리 좋지 않아. 박진영 프로듀서가 태우에겐 만날 형들이 춤도 잘 추고 잘생기고 멋진 형들이야 라고 말했는데, 근데 막상 만난 형들의 몰골이 말이 아닌 거야. 서로 첫인상이 안 좋았어요. 되게 별로였습니다. 서로. -데니안, 손호영, god 이렇게 태우가 마지막으로 합류했어. 태우의 집은 당시 경북 구미였대. 경북 구미에 살던 고등학생 태우가 이 팀에 어떻게 합류한 걸까. 캐스팅의 비밀은? 바로 이거야. 1998년 박진영 4집 앨범 테이프. 열어서 속지를 보면, 이런 문구가 작게 써있어. 새로운 음악을 함께 추구할 친구를 찾습니다. 데모테이프는 VIDEO TAPE로 보내주세요. 바로 이 작은 공지가 시작이었대. 당시 가수를 꿈꾸던 소년 태우는 열심히 노래한 데모 테이프를 만들었어. 근데 이걸 어디로 보낼지 막막하던 그때, 태우의 작은 누나가 박진영한테 보내봐 추천했어. 당시 박진영의 팬이었던 누나가 4집 앨범을 구매했는데, 이 문구를 본 거야. 근데 데모 테이프를 보낸 지 한 달이 넘도록 연락이 없는 거야. 그러던 중 태우가 학교에 있었는데, 갑자기 태우엄마가 학교로 전화를 했어. 태우야, 박진영한테 연락 왔다. 그렇게 god 다섯 남자가 모이게 된 거야. ▲ '국민그룹'의 탄생 시간이 흘러 1999년 1월, 연습에 매진하던 god에게 매니저가 뛰어와. 생방송 스케줄을 잡았대. god의 데뷔무대, 어땠을까? 어머님은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신인의 풋풋함으로 채워진 데뷔 무대. 리듬에 맞춰 고개를 까닥 거리며 데뷔곡 '어머님께'를 불렀어. 이게 뭔가 힙합의 리듬인데 앉아서만 부르면 좀 이상하니까. 그러면 우리가 고개를 한번 이렇게 해보자. -데니안, god 같이 한번 했더니 막 서로 다른 데를 막 하는 거예요. 그래서 각자 하지 말고 고개를 맞추자. 그래서 왼쪽 오른쪽 막 이거 맞췄어요. 심지어 근데 맞추면 맞출수록 이상하더라고요. 그래서 저게 나온 겁니다. 그래서 왼쪽 오른쪽도 하지 말고 그럼 제 자리에서 하자. 이렇게 된 거예요. -손호영, god god의 데뷔 무대, 시청자 반응은 어땠을까? 그때 대표님이랑 진영 형이 숙소로 뛰쳐 들어오시면서 '태우 어디 있어?' 그래서. 진영 형이 태우 눈을 딱 잡고. 대표님이 보시고 '야 어디 뭐 안경 없어? 쟤 안경 씌워' 이렇게 돼서 그 안경을 쓰게 된 거예요. 태우 눈 좋아요. 1.5인가 그래요. 시청자 게시판 난리가 났고. 놀랐다, 얘네 뭐냐. -데니안, god 제일 충격받았던 게 '아이가 울었어요'라는 피드백을 저희가 들은 거예요. TV를 보다가 아이가 너무 놀라서 울었다는 피드백을 받았어요. -손호영, god 그래서 저 녹화 테이프를 보고 태우가 조용히 화장실에 가서 많이 울었어요. 자기 때문에 망할까 봐. -데니안, god 하지만 그해 연말, god는 2집 활동으로 본격적인 인기 가도에 돌입해. '사랑해 그리고 기억해'라는 노래야. 1집 때 같이 신인으로 활동했던 원타임, 코요태, 샵, 이 분들은 다 1위를 했을 거예요. 저희만 공중파 1위를 못했거든요. 앨범 판매량도 아마 저희가 제일 좀 적게 팔렸어. -데니안, god 그런데 드디어 '사랑해 그리고 기억해'로 1위를 차지한 god. 그리고 이듬해 2000년. 그들에게 큰 기회가 찾아와. 바로 'god의 육아일기'라는 육아예능에 출연한 거야. 아기 재민이와의 일상을 통해 대중에게 god의 순수한 매력을 각인시켰어. 그 시절에는 연예인은 정말 신비주의 그런 연예인 분들이 대부분이셨는데, god는 정말 그때 '옆집 오빠' 같은 느낌으로. -익명의 팬지, 27년차 god 팬 god는 이미 육아일기를 통해서 일상생활을 모두 공개했어요.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은 가수여서 그게 더 좋았던 것 같습니다. -조수진, 27년차 god 팬 신비주의를 벗어나 친근한 이미지로 사랑받았던 god. 특히 그 가운데 손호영은 '왕엄마' 이미지로 큰 사랑을 받았어. 저한테는 아직까지도 제가 왕엄마이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저의 인생에 약간 최고의 캐릭터로 자리 잡고 있어요. 제 기억 속에도 그렇고. -손호영, god 전 자신 있게 얘기해요. 모든 아이돌의 멤버들을 통틀어서 그때 호영이가 전 인기가 제일 많았다고 생각해요. 아니 호영이는 유치원 친구들부터 할머니 할아버지들까지 다 좋아하셨거든요. 저희끼리 얘기한 건데 '아 엄마를 내가 할 걸' -데니안, god 음악으로 국민들의 귀를 사로잡고, 예능으로 국민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은, 그야말로 '국민그룹 god'의 탄생이야. 이후에도 god는 2000년 3집 '거짓말', 2001년 4집 '길'까지 연타석 홈런을 쳤어. 그리고 2001년엔, 방송 3사 연말 가요대상을 모두 휩쓸며, 가요계를 제패했어. 3사 대상을 다 받는다는 게, 그런 일이 많지 않다고 들었는데. 처음엔 '받았구나' 했는데, 이걸 너무 다 받으니까. 와… -손호영, god 저희는 앨범을 다 연말에 내거든요. 연말쯤에 앨범을 내고, 그해 연말에 대상을 받은 거예요. -데니안, god ▲ 그 시절 팬덤 문화 이렇게 96년 H.O.T., 97년 젝스키스, 99년 god까지. 1세대 아이돌 라인업. 대단하지? 그 시절 그들을 사랑한 소녀들도, 참 열심히 뛰어다녔어. 요즘은 콘서트 티켓팅, 모니터 앞에서 하지? 과거엔 어땠을까? 지금은 '손'이지만, 그땐 '발'이었어. 콘서트 티켓을 사러 은행을 가야 했거든. 그 당시 인터넷 뱅킹이 어딨어요. 다 은행 창구 가서 입금해요. -조수진, 27년차 god 팬 예매하러 제일은행에 갔죠. 저희 또 시골이라 제일은행이 없었어요. 천안까지 갔다 왔어요. 학교 빼고 그래서 천안까지 가고 천안 제일은행 앞에서 줄 서서. 은행도 창구 언니마다 속도가 다르잖아요. 어떤 창구에 어떤 언니가 해줬냐의 차이예요. 정말 그래서 제 앞에서 끊긴 언니 막 주저앉아서 울고. 그게 모두 다 선착순인 거예요. -모경민, 29년차 H.O.T. 팬 저 때 당시 아이돌을 좋아한다는 건, 열정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어. 추우나 더우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전날밤, 최소 새벽에는 은행 앞에 가서 오픈런을 하는 거야. 인터뷰를 해주신 팬분들이 화려한 덕질 스토리를 풀어주셨어. 우선 학교에 가면 눈치 작전이 펼쳐져. 쉬는 시간, 학생들이 교실 앞으로 달려 나가. 쉬는 시간마다 TV는 한 대잖아요. 전쟁이에요. 내 오빠 영상을 틀어야 하니까. 쉬는 시간 10분 이 시간에도. 그래서 제일 많이 튼 게 '99 드림콘서트'. 이런 거를 딱 들고 있다가 종소리 울리지 말자 가서 넣고. 지는 날에는 어쩔 수 없이 다른 반에 가고. 방송부에 노래 신청하는 게 있었어요. 무조건 젝키 노래 무조건 넣고. 그런 경쟁이 심했어요. -송임선, 28년차 젝키 팬 쉬는 시간,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곳이 또 있어. 바로 공중전화. 그땐 휴대폰이 없었으니까. 음성사서함을 들으려 공중전화에 몰리는 거야. 전화를 걸면 음성이 녹음된 스케줄을 관계자분께서 읽어주십니다. 그럼 전화기를 들고 계속 받아 적어요. 놓치잖아요? 다시 들어요. 좋은 건 가끔 오빠들이 음성편지를 남겨줘요. 그것도 들어야 해요. 전화료가 많이 나왔어요. -조수진, 27년차 god 팬 클럽 H.O.T. 4기 팬클럽 여러분 안녕하세요. H.O.T.의 토니입니다. 저희는 4집 준비 열심히 하고 있고요. 이번 여름쯤이면 여러분들 앞에 또 좋은 앨범으로 찾아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그리고 행복하세요. 여러분 안녕. -당시 토니안이 남긴 음성메시지 말 그대로 전화 사서함 안에 젝키를 만날 수 있어요. 멤버들이 한 번씩 거기다가 인사를 해준다거나 그 다음에 스케줄, 몇월 며칠에 무슨 스케줄이 있고 이런 걸 알려주는 홈페이지가 따로 없었습니다. -송임선, 28년차 젝키 팬 홈페이지가 없던 시절. 스타와 나의 유일한 연결고리였어. 그걸 전화기에 대고 '안녕하세요 H.O.T. 입니다' 단체인사를 하고, '안녕하세요. 저는 리더 희준입니다. 요즘 날씨가 굉장히 추운데 감기 조심하고, 잠깐만요. 토니가 옆에서 바꿔달라고 그러네요' 하고 바꿔줘요. -문희준, H.O.T. '안녕하세요. 토니입니다. 여러분 요즘 다 행복하시죠?' 이걸 이제 스케줄 끝나면 항상 했거든요. 사무실 가서. 1시간씩 넘게 했어요. 한 명이 틀리면 또 다 다시 해야 되고. -토니안, H.O.T. 그리고 같은 학교 안에도, 서로 다른 아이돌의 팬이 있을 거 아냐? 그러다 보니 싸움도 많이 일어났어. 너희 오빠들, 한 물 갔잖아? 말 다 했어? 그 친구랑 책상 위로 올라가 싸웠던 기억이 있어요. -모경민, 29년차 H.O.T. 팬 오빠들 무시는, 전쟁이야. 그렇다고 사이가 안 좋기만 했던 건 아냐. 마음이 맞는 날도 있어. 전문용어로 '분철'. 한 잡지에 H.O.T.도 젝키도 실렸다. 그럼 사진이랑 인터뷰 페이지당 돈을 분배해서 같이 사는 거야. 그렇게 부족한 용돈을 아껴가며 만든, 소중한 최애 스크랩북이야.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 초비상이 걸려. 아이돌의 콘서트가 있는 날은, '조퇴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했어. 이때부터 선생님과 학생 간의 치열한 눈치싸움이 벌어져. 지금은 무조건 증빙 서류를 내야 하는데, 그땐 구두였어요. 수돗물로 눈을 막 씻어요. 그럼 눈이 빨개져요. 눈병 걸렸다고. 그래도 조퇴를 안 시켜준다? 째죠. 학교를 안갔습니다. 오빠들이 '꼭 학교 다녀오세요' 했지만 지방은 학교를 가면 오빠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안 갔습니다. 집전화 코드 뽑아버리고. 학교에서 전화 올까 봐. 휴대폰이 없어서 좋은 시대였어요. -송임선, 28년차 젝키 팬 당시엔 놀토가 없었거든요. 0교시하고, 선생님께 거짓말을 하고 서울로 올라갔죠. '엄마가 아프세요' 하고. -모경민, 29년차 H.O.T. 팬 전국 학교에서 이런 진풍경이 펼쳐지는 거야. 그리고 당시 팬들에겐, 5-6월경 중요한 일정이 있었어. 1년에 한 번 있는, 결전의 날이 돌아온 거야. 당대 최고 스타들의 총집합, 색색깔 풍선의 향연. 매년 가요계의 가장 큰 행사였던 '드림콘서트'야. 고유의 응원법으로 하나가 되는 가수와 팬. 통일된 풍선 색깔로 함께 사랑을 노래했던 낭만의 시대. 가수별로 구분되는 풍선. 목이 터져라 외치는 응원법. 지금은 풍선이 응원봉으로 바뀌긴 했지만, 지금이랑 모습과 비슷해. 인기의 실감도는 사실 드림 콘서트라는 걸 매년 했어요. 그때 팬들이 얼마만큼 왔냐로 지금 누가 1등이냐를 사실 가수들끼리는. 왜냐하면 이게 누구의 팬이 제일 많은지가 각인이 되는 거예요 항상. -문희준, H.O.T. 유일한 공연장이었어요. 유일한 순간이었거든요. 1년에 한 번 딱 드림콘서트를 하면 그때 풍선 색깔로 아는 거예요. -손호영, god 진짜 그때는 너무 소름 끼치고. -데니안, god 드림콘서트는 눈앞에 펼쳐진 풍선의 파도로 어느 가수의 팬이 많은지 한눈에 보이잖아. 당연히 경쟁의식이 생길 수밖에 없어. 콘서트 날짜가 다가올수록 팬들은 화력을 활활 불태워야 해. 기싸움에서 제일 대표적인건 3층을 얼마나 채우냐 예요. 3층이 제일 크고, 제일 잘 보이고, 제일 사람이 많이 들어갈 수 있고. 그게 인기의 척도였어요. 요즘이야 소속사에서 공지를 띄우고, 팬들한테 시안을 받고 제작해서 걸어주지만. 저희 땐 다 몸빵이었거든요. 잠실 주경기장에 현수막을 걸려면 최소 10m가 넘어야 해요. 그걸 누가 걸어주는 것도 아니야. 여자애들이 다 노끈 묶어서 3층에서 던져서 1층에서 받아서 그렇게. 그러다가 누가 '야 우리 현수막 누가 찢었대' 진짜 찢긴 적이 있었어요. 그럼 난리가 나는 거예요. 누구냐, 어느 팬덤에서 우리 현수막을 찢은 거냐. 싸움이 나죠. -조수진, 27년차 god 팬 풍선을 더 보여줘야 한다. 그래서 어떻게 했냐면, 풍선을 양 옆으로 잡아요. (한 손에) 3개, 4개씩 잡으면 풍선이 엄청 많아 보여요. -송임선, 28년차 젝키 팬 무대에서 별들이 전쟁이 펼쳐지는 동안, 객선에선 팬들의 전쟁이 벌어졌던 거야. 이렇게 좌충우돌도 있었지만, 아이돌을 향한 사랑만큼은 어느 때보다 순수했던 시절이야. '따르릉 한 통화에 천 원입니다' ARS로 이웃에게 사랑을 전해온 사랑의 리퀘스트.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H.O.T.와 젝스키스도 거쳐갔어요. 이때는 두 팬클럽이 서로 경쟁하느라 열심히 전화를 걸어서 모금액이 늘었지요. 전국 투어 콘서트 중인 그룹 god가 팬과 뜻을 모아 강원도 산불 재해 피해 돕기 성금을 모금한다. -당시 기사 내용 中 팬들은 풍선 개수로만 싸운 게 아니야. 기부를 할 때도 경쟁이 벌어진 거지. 질서. 젝키팬 왔다 가면 깨끗하더라. 젝키가 '사랑의 리퀘스트'를 나갔어요. 그러면 (성금 모금액) 최고를 찍어줘야 되는 거예요. 젝키가 나왔던 그 순간에 제일 많이 제일 많이 찍어주기. -송임선, 28년차 젝키 팬 지금도 그렇지만 오빠들 이름으로 기부도 많이 하고, 어디에 무슨 콘서트가 있다거나 할 때는 줄을 항상 잘 서고. 질서정연하게 잘했던 것 같아요. 그건 우리가 잘못하면 오빠들이 욕먹는 거니까. -배수빈, 29년차 H.O.T. 팬 이런 것도 있어. 한국조폐공사가 제작한 기념 메달이야. 이 메달은 불우 이웃 돕기 성금 마련을 위해 국내 최정상의 그룹 H.O.T.의 캐릭터로 만든 기념 메달로 한국조폐공사에서 그 품질을 보증합니다. 나의 스타와 관련된 선행이라면, 우리도 최대 화력으로 동참한다. 케이팝 팬덤은 단순히 가수를 좋아하는 행동을 넘어서,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가는 긍정적 요소가 특징이야. 그런 독특한 문화가 지금까지도 선한 영향력으로 이어지고 있지. ▲ 1세대 아이돌이 만든 '혼문' 그런데 그 시절, 우리나라 아이돌을 사랑하던 팬덤이 국내에만 있던 건 아니었어. 2000년 H.O.T. 베이징 단독 콘서트. 유례없는 대성공을 거뒀어. 중국에서 노래 발표한 그룹은 있었지만 이렇게 정규 음반을 찍어서 낸 데는 없었거든요 그 당시에는. H.O.T.가 중국 판에서 성공을 했거든요. 만약에 실패를 해서 우리 음악이 맞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더라면 중국 시장 진출은 훨씬 더 뒤로 갔을 거예요. -서병기 대중문화 전문 기자 오죽하면 중국 언론에서 한국 가수들의 인기에 대해 '한류풍폭(韓流風暴)'이라는 표현을 했다고 해. 한류가 사납게 몰아친다는 뜻이야. 당시 H.O.T.의 중국에서의 성공이 왜 가능했었냐면, 당시에 없었던 문화였기 때문이거든요. 그런 종류의 파격적인 음악이 당시에 중국이나 대만에는 없었어요. 어떻게 보면 문화적 충격에 가까웠다고 봅니다. 단순히 인기 스타가 아니라 과거에 한국이 비틀즈를 보고 정말 까무러칠 듯 놀랐고, 뉴 키즈 온더 블록 같은 팀을 보면서 우리가 충격을 느꼈듯이 당시에 중국은 H.O.T.를 보면서 그런 충격을 느꼈던 거죠. -김영대, 음악평론가 1세대 아이돌을 기점으로, 현재와 유사한 아이돌 시스템과 팬덤 문화가 본격화되고, 한국의 대중음악이 세계로 뻗어나갈 가능성이 열렸어. 그리고 그 시절의 음악엔 오늘 언급한 그룹들 뿐만 아니라, 한국 대중음악의 판도를 바꾼 서태지와 아이들을 비롯해, S.E.S., 핑클, NRG, 신화 등, 많은 아이돌 가수들과 재능 있는 프로듀서, 작사 작곡가, 안무가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열정 헌신이 녹아있는 거야. 그리고 K컬처를 이끌고 있는 오늘날의 케이팝. BTS, 블랙핑크 등 수많은 가수들이 전 세계에서 국적, 나이, 성별과 상관없이 사랑받고 있어. 세계 음악사를 다시 쓰고 있는 케이팝. 전 세계가 케이팝에 열광하고 있어. 이제 해외 언론에 등장하는 '케이팝'이란 단어가 익숙해. 매번 가슴이 웅장해져. 특히 올해엔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인기가 상상이상이었지. '케데헌'의 메기강 감독이 한 인터뷰에서 본인이 학창 시절 H.O.T.의 팬이었고, 영화에 등장한 사자보이즈의 레퍼런스가 H.O.T.였다고 했어. '사자보이즈'의 아이디어는 제가 어릴 때 정말 좋아했던 H.O.T.에서 영감 받았습니다. 제게 있어 원조 아이돌 그룹은 H.O.T.예요. -메기 강, '케이팝 데몬 헌터스' 감독 학창 시절 H.O.T.를 좋아했던 한 소녀가 자라서, 전 세계에 케이팝을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한 거지. 아이돌 1세대의 팬이었던 경험이 또 다른 케이팝 콘텐츠를 만들어낸 거야. 기대되지 않아? 현재의 케이팝을 좋아하는 어떤 소년, 소녀가, 미래에 또 어떤 엄청난 일을 하지 않을까. 김구 선생님의 '백범일지'에 수록된 글이야. 나의 소원,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로 말미암아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상상하지 못한 미래를 후배들이 만든 거 같아요. 항상 연예계에는 그런 말이 있었어요. '금방 시든다' '한류는 금세 꺼진다' 이런 얘기가 사실 굉장히 오래전부터 있었는데, 그걸 지금 후배들이 개척해 나가고 있는 것 같아서 굉장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고. 그때는 우리가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이 케이팝 아이돌의 시초라는 게 엄청나게 영광스러운 자리가 됐구나. 저희도 덩달아 좀, 그거에 대한 시조새로서. -토니안, H.O.T. 너무 좋죠. 우리 후배들 너무 잘하고 있다. -은지원, 젝스키스 리더 세계 무대의 중심은 케이팝이니까. 지금 계속 봐도 너무 신기한 것 같아요. -데니안, god 역사적으로 해서 뭐 포문을 열었지만, 지금 케이팝에 있는 우리 가수분들은 더 잘해주셨기 때문에 이 정도가 된 것 같아요. 정말 아낌없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고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손호영, god 지금까지 케이팝 혼문의 탄생, 열정과 열광의 그 역사의 첫 페이지를 살펴봤어. 감히 짐작해 본다면, 김구 선생님께서 후손들이 이룩한 현재 케이팝을 비롯한 케이무비, 케이푸드의 성취를 아신다면, 마치 그 소원을 이룬 듯 활짝 미소 짓지 않으실까.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
사자보이즈 실제 모델은 H.O.T. …'꼬꼬무', 케이팝 혼문의 탄생 '1세대 아이돌' 조명
등록일2025.11.27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가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케이팝의 시작점, '1세대 아이돌'을 조명한다. 27일 방송될 '꼬꼬무'는 '케이팝 혼문의 탄생'을 주제로, 글로벌 케이팝의 시작점이 된 '1세대 아이돌' H.O.T., 젝스키스, god의 탄생 과정과 팬덤을 집중 조명한다. 여기에 가수 윤하, NCT DREAM 마크, 댄서 허니제이가 리스너로 출격해 의미를 더한다. 앞서 진행된 촬영에선 윤하가 H.O.T.의 성덕임을 밝혀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좋아하는 아이돌에 대한 질문에 윤하는 주저없이 저는 H.O.T.팬이라서 H.O.T.밖에 모르고 살았다 고 답했고 장현성은 진짜? 라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어 윤하는 H.O.T.는 대한민국 최고의 그룹 이라며 저는 팬클럽 5기였다 고 덧붙여 장현성을 또 한번 놀라게 했다. 곧이어 당시의 다양한 굿즈가 등장하자, 윤하는 1세대 아이돌 팬다운 생생한 리액션을 보여 웃음을 자아냈다. H.O.T. 멤버 문희준 사진을 단박에 알아본 윤하는 오 희준 오빠다! 와~ 저 이거 가져가면 안돼요? 라며 찐팬 면모를 폭발시키는가 하면, 팬클럽 회원증을 바라보며 이걸 보고 꿈을 키웠다. 제가 가수가 된 결정적인 계기가 H.O.T. 오빠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고 털어놓으며 성덕 서사까지 완성했다. 이어 30년 가까운 시간의 굿즈들이 대량으로 공개되자 윤하는 박수를 치며 어머어머. 우와 잠깐만 , 이야~ 대박이다 라며 성공한 덕후의 리얼한 환호성으로 가득 채웠다. 한편, 허니제이는 예상치 못한 양다리(?) 고백으로 현장을 술렁이게 했다. H.O.T. '캔디' 영상을 보며 안무를 처음 외워서 췄던 게 '캔디' 라며 팬심을 인증하는가 하면, 젝스키스가 등장하자 젝스키스 앨범도 있다. 사실 전 둘 다 좋아했었다. 양다리였다 고 파격 고백을 해 장성규를 당황시켰다. H.O.T.의 대표 히트곡 '캔디'를 최근 리메이크했던 마크는 '캔디'를 리메이크를 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영광. 역시 레전드는 레전드 라며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감동과 존경심을 드러냈다. 이와 더불어 선풍적인 인기로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넷플릭스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메기강 감독이 사자보이즈의 실제 모델은 H.O.T. 라고 밝히며 1세대 아이돌이 글로벌 케이팝의 시작점이었음을 증명한다. 이에 출연자 모두를 '덕질 모드'로 만든 전설적인 '1세대 아이돌', 세계를 뒤흔든 케이팝의 서막이 모두 공개될 이번 '꼬꼬무' 방송에 대한 기대감이 상승한다. '꼬꼬무'의 '케이팝 혼문의 탄생' 편은 27일 밤 10시 20분에 방송된다. 강선애 기자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