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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시타임] '제네바 협상' 이후 서로 약점 때리기…이번에는?
등록일2025.06.10
■ 머니쇼 &'증시타임&' - 박승찬 용인대 중국학과 교수 [전일장 증시 리뷰와 분석] ◇ 미국과 중국이 영국 런던에서 무역 협상에 나섰습니다. 일단 첫날 6시간 이상의 회의를 마쳤고, 계속해서 2차 회의를 이어가기로 했다고 하죠? - 미중 런던서 무역 협상…첫날 오갔던 이야기는? - 미국- 중국, 英 런던서 6시간 이상 무역 협상 진행 - 현지시간 10일 오전 10시, 미중 협상 재개 예정 - 美 베센트 재무장관 및 상무장관·USTR 대표 참석 - 中 허리펑 부총리가 협상 대표단 이끌며 참석 - 美상무 러트닉 참석…핵심 의제 &'기술 수출 통제&' - 美 &'中 희토류 제한 완화 시 일부 기술 수출 해제&' - 희토류, 중국이 세계 생산량의 약 70% 차지 - 트럼프 &'협상 쉽지 않지만 잘해 나가고 있다&' ◇ 중국과 미국은 제네바 협상 이후에도 서로의 약점을 집중적으로 때리는 전략을 취하고 있었는데요. 양국이 계속 이런 전방위적인 공세를 이어갈까요? - &'제네바 협상&' 이후 서로 약점 때리기…이번에는? - &'타코&' 조롱에 분노…트럼프 &'中 때리기&' 전방위 공세 - 미중 5월 12일 관세 90일간 115% p 인하 합의 - 중국 5월 수출 증가율 4.8%…대미 수출 큰 폭 감소 - 대미수출액 34%↓ 추정…&'팬데믹 이후 최대 낙폭&' - 중국 5월 CPI, 0.1% 하락…4개월 연속 내림세 - 中 당국 내수 활성화 정책에도 여전히 소비 침체 - 미중 무역전쟁 여파에 PPI 2년 만에 최대 하락폭 - 美, 中에 항공·반도체 핵심기술 수출 전면 금지 - 트럼프- 시진핑 통화 후…中, 일부 희토류 수출 허가 - 트럼프, 드론·항만 크레인 규제 행정명령에도 서명 ◇ 중국이 향후 10년간 반도체 등 첨단 과학기술의 자립에 중점을 둔 새로운 버전의 &'중국제조 2035&'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데요. 전략이 현실화될 경우, 기존의 미중 기술 격차나 공급망 균형에 어떤 변화가 생기게 될까요? - &'10년 기술굴기 통해&'…&'제조 2035&' 밑그림 짜는 中? - 시진핑 대표 정책 &'중국제조 2025&' 다음 계획 수립 중 - &'반도체 칩 제조 장비와 첨단 기술 제품 우선 전망&' - &'중국제조 2035&' 韓 반도체 정조준 전망…&'경계 필요&' - 中 제조업 청사진, 내년 3월 양회 전후로 공개 전망 - &'중국제조 2025&' 성공…中 세계 신규 선박 70% 수주 - 전 세계 순 전기자동차의 2대 중 1대는 중국산 - 미·중 제조업 수출액 격차 10년 만에 3배로 증가 - 피지컬 AI 가속화…중국제조 2035 핵심 &'AI 휴머노이드&' - 유비테크·유니트리의 휴머노이드, BYD·지리자동차 투입 ◇ 샤오미 등 중국의 테크주들은 고점에서 횡보하고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저평가 됐다는 분석도 나오는데요, 현재 주가 흐름은 어떻게 보고 계세요? - &'저평가 구간&'…하반기 中증시 움직일 양대 이슈는? - 중국 테크주 관세 협상에 막혀 횡보세…상승 가능성 - &'미중 관세 협상, 中 부양책 살펴야…투자는 신중히&' - 미중 관세 부과 8월 중순까지 유예…미중 협상 주목 - 정부의 규제 불확실성… 中 증시 밸류에이션 낮아 ◇ 중국이 추진 중인 디지털 위안화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습니다. 중국은 디지털 위안화를 국내용이라고 밝혀왔지만, 홍콩에서는 이미 국경 간 결제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향후 국제화를 염두에 둔 움직임으로 봐야 하는 걸까요? - &'디지털 위안화로 세력 넓힌다&'…中달러 패권 도전? - 디지털 위안화, 전 세계 최초로 실용화된 CDBC - 中, &'종이 없는 화폐&'·&'현금 없는 사회&'로 전환 선도 - 中, 알리페이와 위챗페이가 지급 결제 시장을 장악 - 디지털 위안화, &'프로그래머블 머니&'의 가능성 존재 - 홍콩서 디지털 위안화의 국경 간 사용 실험 진행 중 ◇ 통상적으로 역대 대통령들이 취임을 하면 미국, 일본, 중국 순으로 전화 통화한 경우가 많잖아요. 이제 시진핑 주석과 조만간 통화를 할 수도 있겠어요? - 李대통령, 이시바와 25분간 통화…다음은 시진핑? - 이 대통령, 日 총리와 첫 통화…&'시진핑 주석 조율&' - 이재명- 이시바 첫 통화…&'긴밀한 양국 협력 확인&' - 시진핑 &'이재명 대통령 당선 축하…韓 중요한 이웃&' ◇ 중국은 한국 대선 결과에 따라 외교 전략을 달리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앞으로 중국이 한중 관계에서 어떤 방향의 외교 기조를 펼칠 것으로 예상하십니까? - 대선 결과 따라 달라지는 中 외교 전략…이번에는? ◇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우리나라도 중간에서 대응 전략을 잘 짜야할 텐데요. 중국에 대해서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할까요? - 미중 사이에 낀 韓…현명한 외교 전략은? - 서로 견제하는 美中…李대통령 &'실용- 균형&' 외교란? - 李대통령 취임 직후 &'국익 중심의 실용 외교&' 강조 - 백악관 &'한미동맹 철통…中의 간섭과 영향력은 우려&' ◇ 다음 주 캐나다에서 있을 G7 정상회담에 이재명 대통령도 참석을 하잖아요, 이재명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과 실제로 만나서 회담을 가질 수 있을지도 주목받고 있습니다. 한미 정상회담의 성사 가능성은 어떻게 보세요? - 한미 관세 합의 &'정상 간 빅딜&' 가능할까 - 한일 정상 첫 통화…다음 주엔 G7 &'외교 데뷔전&' - 관세 협상·주한미군 방위비 인상 등 현안 직면 - 트럼프 &'원스톱 쇼핑&' 언급…논의 여부 주목 - 비상계엄 사태로 중단된 외교 복원 시급 판단 - 15일 캐나다 G7 회의 참석…NATO 참석은 불투명 ◇ 월가 투자은행들은 대선 이후 우리 경제와 증시 성장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연이어 내놓고 있습니다. 2차 추경 예산 편성이 GDP 충격을 완화시켜 줄 것이란 기대 때문인데요. 하반기 한국 증시 기대해 봐도 되는 걸까요? - 코스피 3000 돌파할까…韓 증시, 하반기 전망은? - 신정부 출범 &'허니문 랠리&'…삼전, 장중 6만 원 돌파 - &'AI에 100조 투자&'…주요 반도체주 상승세 지속 - 李대통령 &'경기 회복 차원서 속도감 있게 추경 편성&' - 2차 추경 급물살…&'20조+α&' 슈퍼 추경 예상 - &'추경 효과&' 기대감…글로벌 IB 성장률 전망 재상향 - 외국인, 대선 후 3조 사들여…코스피 2900 &'눈앞&' ◇ 중국 출장을 앞두고 계시다 들었습니다. 특별히 주목하는 점이 있을까요? - 하반기 주목해야 할 中 산업 분야·정책 신호는? (자세한 내용은 동영상을 시청하시기 바랍니다.)
수포자 없어질 것 …AI 교과서로 '공교육 혁신' 불러올까 (풀영상)
등록일2024.11.29
&<앵커&> 내년부터 학교 수업에 쓰일 AI 디지털 교과서 76종이 최종 확정됐습니다. 수학과 영어, 정보 과목에 우선 도입되고, 국어와 기술, 그리고 가정은 그 대상에서 빠졌습니다. 먼저 손기준 기자입니다. &<손기준 기자&> 내년 3월 도입 예정인 초등학교 3·4학년을 대상으로 한 AI 디지털교과서 수학 과목입니다. 각도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학생이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 AI가 분석해 줍니다. 개인별 오답 노트를 만들게 하고, 풀이 시간을 알려주기도 합니다. 중학교 영어 AI 교과서에선 학생이 영어 단어나 문장을 쓰면, AI가 문장을 고쳐 주기도 합니다. 교육부는 오늘(29일) 검정 심사를 통과한 AI 교과서가 모두 3개 과목, 76종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AI 교과서가 교육 격차를 줄이고, 공교육을 혁신할 수단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주호/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 맞춤 교육이 가능해지기 때문에 수업을 잘 이해 못 할 수도 있고 뒤처진 아이들, 학생들의 경우엔 AI 디지털교과서가 보급되면 수업을 좋아하게 되고….] 내년 3월, 초등 3·4학년, 중1, 고1을 대상으로 수학·영어·정보 과목에 AI 교과서가 도입되고, 2028년까지 초3부터 고1까지 사회·역사·과학을 포함한 6개 과목에 도입이 끝납니다. 다만, 국어와 기술·가정 과목은 대상에서 아예 빠졌습니다. 교육부는 검정 심사를 지난 8월 말 마칠 계획이었지만, 석 달이나 늦춰졌습니다. 일부 교사들은 내년 3월 시행까지 시간이 촉박하단 반응을 보입니다. [현직 초등교사 : 12월이 제일 학교가 바쁠 때거든요. 선생님들이 (아직) 대부분 AIDT(AI 디지털교과서)를 보지도 못했고 개념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거든요.] 이에 대해, 교육부는 현장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AI 교과서 연수가 순차적으로 진행 중인만큼 문제가 없단 입장입니다. (영상취재 : 김균종, 영상편집 : 오영택, 디자인 : 최진회) --- &<앵커&> 내년 시행을 앞두고 정부가 일부 과목은 빼고, 일부는 도입을 늦춘 건, 현장의 우려가 반영된 걸로 보입니다. 국회에서는 AI 교과서의 법적 지위를 교과서가 아닌 교육자료로 낮추려는 움직임도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 교육부는 반발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권지윤 기자입니다. &<권지윤 기자&> AI 디지털 교과서의 주요 과목 가운데 하나였던 '국어'를 아예 뺀 이유를 교육부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이주호/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 학부모, 교육 현장, 전문가와의 의견 수렴, 지방교육 재정 등 정책적 여건 변화를 종합적으로 (검토했습니다.)] 학생들이 '디지털기기에 지나치게 의존할 거다, 문해력이 더 떨어질 것이다' 같은 교육 현장 안팎의 우려를 받아들여 시행의 틀을 조정했다는 얘기입니다. 초등 사회와 과학, 그리고 중학 과학도 기존 계획보다 1년 늦춰 2027년에 시행하는 속도 조절에 나섰습니다. 이주호 부총리는 오늘(29일), 영어 발음 교정 같은 경우 교사가 학생 한명 한명을 봐주는 게 쉽지 않았지만, AI 교과서로는 가능해진다 며 수학이나 영어를 포기하는 수포자, 영포자가 없어질 거 라고 자신감을 내비쳤습니다. 일부 조정은 했지만, 도입 자체에는 변함이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등 126개 교육시민단체는 인지 발달을 저해하고 예산을 낭비한다며 도입 중단을 요구합니다. 국회에서는 야당 의원들이 AI 교과서의 법적 지위를, '교과서'에서 '교육자료'로 격하하는 법 개정에 나섰는데, 이 같은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이 어제 국회 교육위원회를 통과했습니다. '교육자료'로 바뀌면, 학교장 재량으로 선택을 할 수도, 안 할 수도 있는 만큼 전면 보급은 불가능해집니다. 교육부는 균등한 교육 기회를 박탈하는 악법이라고 반발했습니다. AI 교과서의 교육적 효과를 두고도 전문가들의 평가가 정반대로 엇갈리는 상황이라 논란은 계속될 전망입니다. (영상취재 : 김균종, 영상편집 : 이소영, 디자인 : 강혜리, VJ : 신소영)
[꼬꼬무 찐리뷰] 칼에 9번 찔려도, 살인마 끌어안고 놓지 않은 형사…숭고한 희생이 남긴 것
등록일2024.08.30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29일 방송된 '인질범의 흉터'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배우 류승수, 뮤지컬 배우 배다해, 그룹 위너 멤버 이승훈이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대낮의 침입자 때는 2004년 8월 8일, 서울의 한 빌라야. 출근한 딸을 대신해 집에서 할머니 혼자 어린 손자를 돌보고 있었어. 한 2시쯤 됐나? 안방에 손자를 재운 뒤 화장실에서 볼일을 마치고 막 나오는데, 헉! 할머니는 순간 까무러칠 뻔했어. 화장실 문 앞에 웬 남자가 우두커니 서서 할머니를 바라보고 있어. 할머니가 너 누구야! 사람 살려! 라고 외치는데, 남자가 할머니의 목에 쓰윽 뭔가를 들이대. 칼이었어. 그것도 아주 길고 날카로운 회칼. 할머니는 지금도 그날의 공포가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고 해. 내가 화장실에 있다가 문을 열고 딱 나왔는데, 화장실 문 앞에 칼을 들고 딱 서 있더라고. 신발을 신고 선글라스를 끼고. 얼마나 놀랐는지, 베란다 가서 막 사람 살리라고. 그때는 너무 나도 당황하고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사람 살려'라고 외쳤는데. 사람들이… 여름이니까 지나가지도 않았고. 나를 붙잡아서 칼을 목에 대면서 '소리 지르면 죽인다'고 그러더라고. 그 서 있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해요. 아주… -집에서 괴한을 마주한 할머니 얼마나 무서웠을지 상상이 돼? 그런데, 이어지는 남자의 말이 더 소름이야. 남자가 선글라스를 쓱 아래로 내리더니 이렇게 말해 할머니... 나 누군지 알지? 그 순간, 할머니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얼어붙었어. 사실 얼마 전에 할머니는 이 남자를 본 적이 있어. 바로 여기에서. 수배 전단지에서 본 바로 그 얼굴. 역대급 현상금이 걸린 살인사건의 용의자가 할머니의 집에 침입했고, 할머니는 인질이 된 거야.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지금부터 이 충격적인 인질극의 전말을 들려줄게. ▲ 로맨티스트 형사 먼저 시간을 8일 전으로 돌려 2004년 8월 1일, 일요일 새벽 6시. 요란한 알람소리에 한 남자가 잠에서 깨. 남자의 이름은 심재호, 나이는 서른둘이야. 일요일이지만 재호 씨는 오늘 출근을 해야 해. 출근 준비를 다 마친 재호 씨가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아이들 방으로 향했어.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 우연이와 첫돌을 3개월 앞둔 딸 유리가 자고 있었거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재호 씨의 소중한 아이들이야. 나란히 잠든 모습이 어찌나 천사 같은지 출근도 잊은 채 아이들을 봤어. 그때, 아이들 곁에서 같이 자고 있던 아내 옥주 씨가 잠에서 깼어. 어? 우연 아빠, 나가게? 재호 씨는 아내에게 더 자라며, 뽀뽀를 쪽! 해줬어. 아직도 신혼 같은 사이좋은 부부야. 연애 4년, 결혼 4년, 그렇게 8년을 함께 했는데도 재호 씨는 아내가 여전히 예쁘대. 완전 사랑꾼이지. 어느 정도인지, 아내 옥주 씨에게 직접 들어볼게. 저한테 용돈을 항상 받았거든요. 그때 당시에. 그거를 따로 자기는 모았대요. 그래서 봉투에 모아서 제 생일 때 되면 꼭 현금을 봉투에 담아 가지고 몰래 그걸 줬어요. 매일 출근할 때 항상 인사가 '나 갔다 올게' 꼭 그러고. 현관 앞에서 한 번 안아주고. 그리고 제가 그냥 편하게 얘기할 때는 말을 놔요. 그런데 바깥에서 저한테 전화를 할 때는 항상 높여요. '저 이제 들어가요' 이렇게. '내가 당신을 존중해야 주변 사람들도 당신을 존중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는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고요. -황옥주, 심재호 씨 아내 이 로맨티스트 재호 씨, 직업은 경찰이었어. 얼마 전까지 청와대에서 경호를 담당하던 심 형사는 열심히 진급 공부를 한 끝에 2004년 3월, 마침내 꿈에 그리던 강력반 형사가 돼. 근무지는 서울서부경찰서 강력2팀. 동료 눈에 비친 심 형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체육대회나 족구나 배드민턴 하면 항상 그 자리에 재호 형이 끼어 있었습니다. 족구도 잘하고 배드민턴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고. 같이 대화하고 얘기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빠져들 수밖에 없게끔 말도 잘하고. 강력한 카리스마, 또 어떨 때는 부드러운 얼굴로 조언도 많이 해주고. 저희의 롤모델, 가정생활이나 직장생활의 멘토의 역할을 했죠. -황운영 경위, 심재호 형사 후배 그런데, 그런 말 있지? 불행은 가장 행복한 순간에 찾아온다고. 8월 1일 일요일, 평소처럼 남편이 서에 출근한 바로 그날이야. 옥주 씨가 부엌에서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데, 아들 우연이가 아빠 언제 오냐며, 오늘따라 이상하리만치 아빠를 찾아. 그러고 보니 벌써 밤 8시야. 늦으면 늦는다 전화라도 할 텐데 오늘따라 연락도 없는 게 좀 이상해. 결국 옥주 씨가 먼저 전화를 걸었어. 전화를 받은 남편은 무슨 일인지 전화를 그냥 다급하게 끊었어. '다시 할게'도 아니고, 그냥 일방적으로 '나 지금 바쁘니까 끊어' 그러고 전화가 끊긴 거예요. 그러고는 영 전화가 안 오더라고요. -황옥주, 심재호 형사 아내 갑자기 출동 나갔을 수도 있으니, 옥주 씨는 일단 기다려 보기로 해. 얼마나 지났을까? 친정아버지한테 전화가 왔어. '이 밤에 무슨 일이지?' 궁금해하며 전화를 받았는데, 아버지가 다급한 목소리로 빨리 TV를 켜봐! 라고 말씀하셔. '너 지금 TV 좀 틀어보라'고.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TV를 틀었죠. 그랬더니 막 속보가 뜨는 거예요. 밑에 자막이 깔리면서 '서부경찰서 심 모 경사'가 이렇게 막 뜨더라고요. -황옥주, 심재호 형사 아내 옥주 씨는 속보의 자막을 채 끝까지 읽기도 전에 실신하고 말았어. 대체 그날 밤 남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 마지막 출동 사건 당일 오후 7시, 경찰서로 한 통의 제보전화가 걸려와. 퇴근 준비를 마친 심 형사가 막 서를 나서려는데, 갑자기 팀장이 이런 말을 해. 그 얼마 전에 남자친구한테 감금 폭행 당했다는 피해자 있었지? 방금 연락이 왔는데, 오늘 밤에 그놈을 만나기로 했다네? 이틀 전에 한 여성이 112로 신고를 해온 일이 있었어. 남자친구한테 이별을 통보했더니 자신을 모텔에 가둬두고 폭행까지 했다는 거야. 겨우 도망을 나온 피해 여성은 곧바로 경찰에 신고를 했고, 사건은 서부경찰서 강력1팀에 배정됐어. 용의자의 정체는 서른다섯의 '이 씨'야. 사실 이 씨는 6년 전에 이미 혼인신고를 마친 유부남이야. 하지만 결혼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어. 범죄를 저질러 교도소에 가야 했거든. 죄명은 강간치상죄. 결국 이 씨의 아내는 떠났고, 출소 이후 새 여자친구를 만났어. 근데 이번엔 애인을 감금 폭행한 혐의로 경찰의 추적을 받고 있었던 거야. 이 씨는 자신의 연락을 피하는 여자친구에게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만나줄 것을 요구했어. 그럼 두 번 다시 연락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피해 여성은 고민 끝에 이 씨를 만나기로 했고, 곧바로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했어. 이 씨가 약속 장소에 나타나면 그를 꼭 체포해 달라고. 그런데, 하필이면 사건을 담당하고 있던 강력1팀이 다른 사건으로 전부 잠복에 나가 있는 거야. 현장에 투입할 인력이 없어 팀장이 고민하고 있던 그때, 강력2팀 소속의 심 형사가 자신이 가서 잡아오겠다고 나섰어. 담당 사건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제 발로 오겠다는 범인을 놓칠 순 없잖아. 그리고 심 형사 외에 강력2팀에서 또 한 명의 형사가 출동을 자처하고 나섰어. 바로 이분이야. 이름은 이재현. 키 187cm에 다부진 체격의 이 순경은 서부서 강력반에 온 지 세 달밖에 안 된 신입 순경이야. 이 순경 어머니에게 이야기를 들어볼게. 우리 재현이는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좋아했고 엄마도 너무너무 챙기고. 동네 사람 보면 '인사 잘한다고 소문났다' 우리 재현이가. 인사 잘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인사하고. 자기 누나는 여자라도 그런 자상한 게 좀 별로인데, 얘는 덩치도 크고 남자다우면서도 좀 자상해. 자기 아빠하고 나하고 싸워서 딴 방에 거처하잖아. 그러면 엄마 아빠가 따로 자면 안된다고 하면서 와서 날 번뜩 안아서 자기 아빠 자는데 갖다 눕힌다니까. 그 정도로 자상했다니까. -유진숙, 이재현 순경 어머니 효자 이 순경과 사랑꾼 심 형사. 그렇게 두 사람은 잠복 중인 동료 형사들을 대신해 용의자 이 씨 검거 작전에 긴급 투입돼. 범인과의 약속 시간은 밤 9시. 장소는 서울 마포의 지하 커피숍이야. 두 형사의 계획은, 커피숍 밖에서 잠복하고 있다가 범인 이 씨가 나타나는 순간, 뒤따라가 조용히 수갑을 채우는 거야. 일단 피해 여성이 경찰에 신고했다는 사실을 눈치채면 안 되잖아. 게다가 체포 장소가 커피숍이야. 괜히 소란을 피웠다가는 피해자는 물론 손님들도 다칠 수 있어. 그래서 최대한 조용히 검거를 하기로 한거야. 두 형사는 용의자가 나타나길 기다리며 커피숍 입구를 예의주시 했어. 드디어 약속한 9시야. 그때, 두 형사가 몸을 숙여. 드디어 용의자 이 씨가 나타났어. 이 씨는 한참을 두리번대더니 곧이어 지하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해. 심 형사와 이 순경도 그를 따라 조용히 커피숍으로 들어갔어. 일요일 밤 커피숍은 예상대로 만석이야. 심 형사가 빠르게 안을 훑어본 뒤에, 용의자 이 씨에게 다가갔어. 그리고는 신분증을 내밀며 미란다 원칙을 고지해. 서부경찰서 강력 2팀 심재호 형사입니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바로 그때였어. 이 씨가 갑자기 품에서 뭔가를 꺼내 들더니 심 형사의 왼쪽 가슴에 그대로 내리꽂아. 이 씨의 손에 들린 건 칼이야. 손쓸 틈도 없이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어. 곧바로 뒤에 있던 이 순경이 이 씨를 덮쳤어. 우당탕탕. 둘은 격한 몸싸움을 벌이기 시작해. 커피숍 여기저기 비명이 난무하고 아수라장이 됐어. 이 순경은 이 씨의 손에서 칼을 뺏으려 안간힘을 쓰는데, 갑자기 이 순경의 몸이 순식간에 피로 뒤덮여. 하지만 이 순경은 칼을 맞으면서도 용의자의 허리춤을 놓지 않았어. 그리곤 사람들에게 이렇게 소리쳐. 누가 제발 이 사람 좀 같이 좀 잡아 주세요! 라고. 형사 한 사람이 좀 잡아달라고 그랬어요. 순간적으로 그 상황에서도 이걸 잡아야 되나 안 잡아야 되나 이런 생각을 잠시나마 하면서, 한 2미터 안에 그냥 멍하니 서 있었어요. 아마 넋이 빠졌나봐. -커피숍 목격자 다들 겁에 질려 지켜만 볼 뿐 나서는 이는 아무도 없어. 결국 필사적으로 범인을 붙들고 있던 이 순경의 손이 툭, 바닥으로 떨어졌어. 얼마 뒤, 심 형사와 가까웠던 후배 황운영 형사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아. 외근 나와 있는데 전화가 오더라고요. 재호 형 동기한테. '재호가 다쳐서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에 있다' 그래서 병원에 가보니까. 응급실 침상이 있는 곳이 아닌 복도 쪽으로 데리고 가더라고요. 첫 번째 있는 흰 천을 걷으면서 '이분이에요?' 물어보더라고요. 그때는 제가 누군지 몰랐어요. 그래서 '아닌데요' 그랬더니, 지나서 바로 그 옆에 있는 침대 흰 천을 이렇게 딱 걷으니까, 재호 형이더라고요. 아무 표정 없이 창백하게 그냥 얼굴이 있고 그냥 누워 있는 거죠. 잠자는 것처럼. -황운영 경위, 심재호 형사 후배 급소인 왼쪽 가슴을 두 차례 찔린 심 형사, 등을 무려 아홉 차례나 찔린 이 순경은 결국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구급차 안에서 숨을 거뒀어. 아침에 출근한 남편, 그리고 아들이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왔어. 가족들 심정이 어땠을까? 이 비보를 전해 들은 동료 형사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동료를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 형사들은 자신들을 대신해서 떠난 동료들의 마지막 가는 길만큼은 외롭지 않게 지켜주고 싶었지만, 장례식장조차 갈 수가 없었어. 왜? 범인 이 씨가 아직 잡히지 않았으니까. 단순 폭력 혐의로 경찰의 추적을 받던 이 씨는 이제 두 형사를 잔인하게 살해하고 도주한 살인 용의자가 됐어. 이제 그 이 씨의 얼굴을 보여줄게. 누군지 알아보겠어? 할머니 집에 침입했던 그 남자. 수배전단지에서 봤던 그 살인용의자. 그가 바로 두 형사를 살해한 이 씨였던 거야. 자, 지금부터 살인용의자 이 씨가 어떻게 공포의 인질극을 벌이게 된 건지, 범행 직후의 행적부터 따라가 볼게. ▲ 미치도록 잡고 싶다 먼저 사건이 일어난 곳은 마포의 한 커피숍. 그 때 시각이 밤 9시. 이 씨는 3분 뒤에 커피숍에서 도망쳤어. 그 난투극과 경관 살인사건이 일어난 시간이 불과 3분이었어. 그리곤 정신없이 어딘가로 뛰기 시작해. 그 사람도 피투성이 돼서 택시 타는 것까지… 멀리서 봐서 그건 자세히 못 봤어요. -목격자 이 씨가 택시에 타는 게 목격됐어. 사실, 당시 이씨 의 직업은 택시운전기사였어. 이 씨는 범행 현장에 몰고 온 택시를 커피숍 맞은편에 세워뒀어. 이후 자신의 택시에 올라탄 이 씨는 빠르게 현장을 빠져나갔어. 곧바로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따라붙었어. 순찰차의 등장에 마음이 급해진 걸까? 이 씨가 한껏 속도를 올려서 이 도심 속에서 시속 100킬로미터로 도망치다가, 끼이이익- 갑자기 차를 멈춰 세워. 차가 멈춘 곳은 서울에서 가장 복잡한 도로 중 하나인 신촌 로터리야. 그런데 로터리 한복판에서 이 씨가 갑자기 역주행을 하더니 반대편 좁은 골목길로 사정없이 내달리는 거야. 택시기사인 이 씨는 서울 지리에 빠삭했어. 결국 이 씨는 경찰을 따돌리고 유유히 현장을 벗어났어. 하지만 아직 이 씨를 잡을 단서는 있어. 택시 안에 이 씨의 발목을 잡을 뭔가가 있었거든. 바로, 택시 GPS. 지금은 택시 카드단말기에 위치 추적 기능이 포함되어 있지만, 2004년 당시만 해도 운전석 쪽에 이런 위치추적기가 달려 있었대. 경찰은 곧바로 택시의 위치를 추적했어. 그리고, 신호가 잡혔어. 동대문구 용답동의 주택가 골목에서. 그런데 현장으로 향하던 형사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갑자기 신호가 끊겼어. 이 씨가 위치추적기를 빼버린 거야. 택시는 결국 다음 날 아침, 영등포구에서 발견이 돼. 물론 이 씨는 없었어. 택시를 버리고 도주를 한 거야. 빈 택시에는 피 묻은 바지만 남겨져 있었어. 어느덧 도주 3일째. 경찰은 '공개수사' 카드를 꺼내 들어. 경찰은 조금 전 용의자 이**을 전국에 공개 수배했습니다. 용의자 이**은 키 170cm, 몸무게 60kg의 왜소한 몸집에 왼쪽 목 부분에 화상 흉터가 있다고 경찰은 밝혔습니다. 경찰은 이 씨의 사진을 확보해 공개 수배 전단지를 만들어 전국에 배포했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곧바로 이씨의 얼굴이 담긴 3만 여장의 수배전단지가 전국에 뿌려졌어. 효과는 바로 나타났어. 서울은 물론이고 부산 목포 충주 강릉 할 것 없이 전국에서 제보 전화가 빗발쳐. 하루에 무려 70여 통씩 제보가 쏟아졌어. 그런데 그 제보 중에 결정적인 건 없었어. 계속되는 허탕에도 형사들은 절대 포기하지 않았어. 오히려 독이 더 바짝 오르더래. 서부서는 물론 전 지역 경찰들이 퇴근도 반납하고 밤샘 수사에 매달렸어. 빨리 잡아야 결론이 나고 이제 재호 형한테도 '아 그래도 잡혔구나'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는데. 도주가 길어지니까 참 착잡했죠. '빨리 잡혔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죠. -황운영 경위, 故 심재호 형사 후배 사건 발생 3일째인 8월 3일 오후 5시. 그토록 기다리던 소식 하나가 들려와. 경찰관 피살 사건의 용의자 이**의 위치가 경찰에 포착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경찰은 오늘 오후 이**의 아이디와 패스워드로 인터넷에 접속한 사실을 포착했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드디어 범인의 꼬리가 잡혔어. 이 씨가 자신의 아이디로 인터넷에 접속을 한 거야. IP추적 결과 장소는 성북구의 한 아파트. 곧바로 대규모 경찰 병력이 아파트 주변을 에워쌌어. 한 쪽엔 에어매트가, 그 옆엔 구급차도 준비됐어. 궁지에 몰린 이 씨가 투신할 가능성에 대비한 거야. 그 사이 형사들은 아파트 단지 내 집들에 일일이 초인종을 누르고 양해를 구하고 들어가 집 안을 살펴. 그렇게 수색한 집만 무려 700여 곳이야. 그런데 이 씨는 없었어. 분명 여기서 접속한 게 맞는데, 형사들은 꼭 귀신에 홀린 기분이야. 그리고 다음 날, 형사들 앞으로 기절초풍할 소식이 전해져. 특공대까지 투입하며 대대적인 수색 작전을 벌였던 경찰. 은신처 포착의 결정적 단서가 됐던 인터넷 아이디는 알고 보니, 한 초등학생의 것이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인 이 모 군은 어제 낮 4시 반쯤 수배 전단지에 있는 이 씨의 주민등록번호를 보고 새 아이디를 만들어, 게임을 내려받은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그때 당시 수배 전단지에는 용의자의 주민번호를 기재하도록 되어 있었대. 그걸 본 한 초등학생이 엄마 몰래 이 씨의 주민번호로 아이디를 개설한 거야. 게임 하려고... 결국 경찰병력 2백여 명이 투입된 대규모 검거 작전은 수포로 돌아갔어. ▲ 유족의 트라우마 어느덧 사건 발생 5일째. 여전히 범인의 행방은 묘연한 가운데, 유가족과 경찰 200여명이 한자리에 모였어. 두 형사의 합동 영결식이 열렸거든. (사건이) 지하에서 일어났잖아요. 그 1층 중간까지 올라오다가 쓰러졌나 봐요. 거기까지 올라갔나 봐요, 도와달라고… 근데 그 숨 넘어가는 순간에 얼마나… 머리에 뭐가 스쳐 지나갔을까? 가족들? 나 지금 숨이 넘어가는데… 이제는 끝인데 싶었을 텐데... -황옥주, 故 심재호 형사 아내 심 형사는 당시 목표가 하나 있었어. 우연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 경위로 진급하는 것. 무궁화 견장을 어깨에 달고 아들 앞에 누구보다 멋지게 서고 싶었던 거야. 그리고 그 목표는, 너무 슬프게 이뤄졌어. 순직 경관에게 주어지는 1계급 특진을 받았거든. 임명장. 경사 심재호. 경위에 추서함. 2004년 7월 31일. 이걸 받아 든 아내 옥주 씨의 마음은 어땠을까? 훈장? 그거 뭐 필요한데요. 목숨 내놓고 그거 한 개.. 꽃 한 개 더 단 거잖아요. 전 안 올라가도 돼요. 살아있기만 하면 그게 훨씬… 어차피 그 사람은 없는데.. 그게 다 뭐가 소용 있어요. -황옥주, 故 심재호 형사 아내 이재현 형사도 1계급 특진을 받아 순경에서 경장으로 진급했어. 하지만 어머니에겐 역시나 아무 소용 없는 명예였지. 아들을 위해 요리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했던 어머니는, 그날 이후 더 이상 부엌에 들어가지 않았어. 아니, 갈 수가 없었어. 20년이 지났지만 어머니는 아직도 칼을 잡지 못하신대. 그때부터는 내 정신이 아니지 뭐. 안 그렇겠나. 그리고 젊은 사람들만 봐도 내가 못 견디고, 또 경찰 보면 더 하고, 주방에서 음식 하잖아. 칼만 보면 내가 소름이 끼쳐. 그 칼만 보면 지금도 내가 온몸이 오싹해지거든. 자기는 좀 억울할 거야.. 그렇죠? 억울할 거다… 내가 뭐 한다고 공부 시켰는가.. 공부 안 시켰으면, 공부 못했으면 나하고 농사 지을 거 아니야? 농사나 지으면서 여태까지 나하고 살 텐데.... 우리 아들 만나면 안아주고 싶지… -유진숙, 故 이재현 형사 어머니 혹시 '트라우마'라는 말의 어원이 뭔지 알아? 그리스어로 '뚫리다' 라는 뜻 이래. 평생 채워질 수 없는 구멍을 가슴에 안고 사는 기분. 하루아침에 남편과 아들, 그리고 아빠를 잃은 가족들의 시간은 그날에 멈춰져 있어. ▲ 공포의 인질극 가족들이 슬픔에 젖어있는 사이, 형사들은 여전히 이 씨의 행방을 쫓고 있어. 어느덧 도주 8일째, 경찰은 이 씨의 포상금 액수를 더 올려. 탈주범 신창원과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과 같은 액수인 5천만 원으로. 그리고 이날,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돼. 그토록 애타게 찾던 범인 이 씨가 인질범으로 나타난 거야. 다시, 처음 할머니가 인질범 이 씨를 마주친 그 상황으로 돌아가 볼게. 이건 당시 할머니의 집 내부를 그린 거야. 할머니의 집은 빌라 1층에 있어. 오후 2시경, 용의자 이 씨는 작은방 창문을 통해 할머니의 집에 침입해. 맨 처음에 화장실 앞에 서 있던 이 씨가 할머니에게 칼을 들이대며 했던 말 기억나? 할머니, 나 알지? 했던 거. 사실 할머니는 이 씨를 한눈에 알아봤어. 당시 뉴스에서 종일 이 씨에 대한 얘기 뿐이었으니까. 그런데 목에 칼이 들어온 그 순간, 할머니의 눈에 뭔가가 들어와. 바로 안방에 곤히 잠들어 있는 어린 손자. 할머니는 정신이 번쩍 들었어. 잘못하면, 어린 손자가 다칠 수 있어.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할머니는 무슨 일이 있어도 범인을 자극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어. 자신을 아느냐고 묻는 이 씨의 질문에 할머니는 저는 애기 보느라 뉴스고 뭐고 아예 TV를 못 켜요. 그래서 아무것도 몰라요 라고 답했어. 어린 손자를 핑계 대며 모른다고 딱 잡아뗐어. 범인은 이런 할머니의 거짓말을 믿었을까? 이 씨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그 순간 할머니는 보았어. 이 씨의 안심하는 눈빛을. 이제 할머니는 이 씨를 다독이기로 마음을 먹어. 이제 그 사람이, 일주일 동안 산에 숨어서 밥도 못 먹고 물만 마셨다더라고. 그래서 그 사람을 도닥거리기 시작했죠. 그러면 배고프지 않냐고. '배고프다' 그러더라고. 그래 가지고 내가 여름에 먹으려고 육수 내놓은 게 있어서 '국수 삶아줄까' 그랬더니 '국수는 삶아 달라' 하더라고. 국수 몇 숟갈을 먹더니, 앉아서 이제 자기 얘기를 다 하더라고요. -인질이 된 할머니 이 씨는 할머니를 붙잡고 자신이 여자친구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또 경찰에게 흉기를 왜 휘두를 수밖에 없었는지, 한참 동안 자기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해. 그러더니 갑자기 이런 요구를 해. 근데 할머니, 컴퓨터 있어요? 내 기사를 좀 보고 싶은데? 수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 하는 눈치야. 이 집에 컴퓨터가 있는 장소는, 이씨가 창문을 통해 들어온 바로 그 방이야. 할머니는 컴퓨터가 있는 작은 방으로 이 씨를 안내해. 그런데 이때, 할머니의 눈에 또 뭔가가 들어와. 바로, 청소기. 이 청소기 소음을 이용해 아들에게 몰래 전화를 하려는 거야. 이 씨가 할머니네 집에 온 지가 거의 4시간이 다 되어가. 그 사이 국수도 삶아줘, 이야기도 들어줘, 그래서 이 씨는 할머니를 크게 의식하지 않았던 거 같아. 할머니의 이 기막힌 청소기 아이디어는 성공했을까? 물었어요 내가. '청소기계를 좀 밀겠다' 그랬더니, '밀어라'고 하더라고. 그 순간에 '어떻게든 내가 신고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인질이 된 할머니 이 씨의 허락을 구한 할머니는 곧바로 청소기 전원을 켜. 그리고 거실을 청소하는 척 액션을 취한 뒤, 청소기를 바닥에 슬쩍 내려놔. 물론 전원을 켜 놓은 채로. 그리고 재빨리 안방으로 가서 핸드폰으로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어. 잠시 후, 오후 6시 40분. 112로 다급한 신고 전화가 걸려 와. 할머니 아들 : 방화동 **이거든요. 저희 엄마한테 전화가 왔는데 경찰관 죽인 놈 있죠. 그놈이 저희 집에 들어와 있다고 엄마가 몰래 휴대폰으로 전화하셨어요. 자기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애기랑 같이 있는데.. 112 센터 : 감금되어 있대요? 할머니 아들 : 아니 그건 엄마가 달래는 놨다고 하더라고요. 112 센터 : 일단 조용히 경찰관 보내서 주위 에워싸고 시작하겠습니다. 소리 크게 안 나게. -112 신고센터 신고 내용 中 사실 아들은 처음에 엄마의 얘길 믿지 않았대. 아니 살인범한테 붙잡힌 상황에서 몰래 전화를 한다? 말이 안 되잖아. 그렇게 반신반의하며 경찰에 일단 신고 전화를 한 거야. 아들과의 통화에 성공한 할머니는 이번엔 이 씨에게 이런 부탁을 해. 손자가 깨서 목욕을 시키려고 하는데, 해도 될까? 라고. 갑자기 웬 손자 목욕? 아들에게 신고를 부탁했잖아. 곧 경찰이 올 거라고 생각한 거야. 그래서 집에서 안전한 곳으로, 범인을 피해 대피할 수 있는 명분을 떠올린 거야. 할머니는 용의자의 허락을 받은 뒤, 손자를 안고 후다닥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어. 그런 뒤 조심스럽게 손잡이의 잠금 버튼을 눌렀어. 얼마나 지났을까? 밖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어. 경찰이다! 칼 버려! 드디어 경찰이 출동했어. 이 씨는 거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경찰을 보고는 극도의 흥분 상태로 자신의 배에 칼로 상처를 내기 시작했어. 이 씨는 어떻게 됐을까? 이 씨는 검거 직후 병원으로 이송됐어.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상태였대. 그렇게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경관 살해 용의자 이 씨의 8일간의 도주극은 마침내 끝이 났어. 물론 할머니와 손자도 안전하게 구출이 됐지. ▲ 인질범의 흉터 이 씨의 검거 소식에 가장 안도한 이들, 누구였을까? 맞아. 동료 형사들. 당시 서부서 강력반 소속인 이대우 형사는 검거 소식을 듣자마자 이 씨가 있는 병원으로 달려갔어. 그리고 그곳에서 또 한 번 울분을 삼켜야 했대. 범인의 어깨에서 이걸 봤거든. 그때 상의를 탈의하고 자기 자해한 걸 치료하고 있었는데. 이 씨의 오른쪽 어깨에 선명하게 이빨자국이 멍들어 있더라고요. 그게 아마 이재현 순경이 칼을 맞으면서도 끝까지 걔를 잡기 위해 물어뜯었던 그런 흔적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홉 번인가 찔렸다고 하는데, 그런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어떻게든 잡고 부둥켜안고 이빨로 물어서라도 검거하려고 했던 그런 근성이 이제 오버랩되니까… 조금 울컥울컥 합니다. 그때 그거 보고 정말, 걔는 아프다고 응급실 침대에 누워서 그러고 있는데… 참 패 죽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솟아올랐는데. 경찰관이고 또 감정적으로 대하면 안되기 때문에 참았던 기억이 납니다. - 이대우 형사, 당시 서부경찰서 강력 4팀 범인의 어깨에 선명하게 남겨진 흉터. 그건 이 순경의 이빨 자국이었어. 그 흉터를 본 형사들은 지난 8일 동안 참아왔던 눈물을 토해내며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고 해. 그토록 잡고 싶던 범인이 잡혔어. 이제 남은 건 죗값을 치르는 일이겠지? 법원은 경관 두 명을 살해한 이씨에게 사형을 구형했어. 이씨는 형량이 너무 무겁다며 항소를 했어. 그리고 최종 판결은 이렇게 났어. 피고인은 이미 여러 차례 절도나 폭력 범죄로 처벌받은 전력이 있고 정당한 공무를 수행하던 경찰관을 칼로 찔러 잔인하게 살해하였는 바, 중형에 처하여야 할 사정이 있음은 충분히 인정된다. 그러나, 출소 이후 택시 기사로 근무하며 나름대로 사회에 적응하려고 노력해 온 점, 자신을 체포하려는 경찰관들을 보고 저지른 우발적 범행이라는 점, 깊이 참회하고 반성하고 있는 점 등을 비추어 볼 때 사형을 선고한 것은 부당하다. 따라서 피고인을 무기징역에 처한다. 유가족과 동료 형사들이 이 판결문에서 가장 납득하기 힘든 구절은 이거였어. '우발적 범행'. 이 씨가 범행 직후 뭘 타고 도주했는지 기억나? 자신이 몰고 온 택시. 그날 이씨는 커피숍으로 피해 여성을 만나러 가기 전, 자신의 택시를 맞은편 도로에 세워놨어. 아마도 이 씨는 도주할 계획을 미리 세웠던 것 같아. 게다가 범행을 계획한 증거는 또 있어. 사건 당일 오후 3시경, 택시회사 CCTV에 찍힌 이 씨의 모습이 있어. 화면에서 이 씨의 손을 주목해서 잘 봐. 이 씨가 든 저 가방엔 형사들에게 휘두른 칼이 있었어. 길이가 무려 24센티나 되는 회칼이야. 흉기를 소지했다는 것 자체가, '항상 누군가는 찔릴 수 있다'는 미필적 고의도 간직하고 있는 거거든요. 납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 이대우 형사, 당시 서부경찰서 강력 4팀 이 씨의 검거에 도움을 준 할머니는 이 씨의 감형 소식에 해외로 이민을 가야 했어. 얼굴도 알고 어디 사는지도 아니까. 현행법상 아무리 무기수라도 20년의 형을 채우면, 가석방 심사 대상이 될 수 있어. 만에 하나 이 씨가 출소할 가능성 때문에, 도저히 한국에서 살 수가 없었다고 해. ▲ 두 형사의 희생, 남겨진 사람들 그런데 말야. 여기까지 들으면서 한 가지 이상한 점 없었어? 왜 보통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면, 검거 현장에서 범인이 위협을 가할 때 형사들이 총을 꺼내잖아. 하지만 두 형사가 범행 현장에 가져간 건, 삼단봉과 수갑이 전부였어. 그럼 왜 총은 안 가져간 걸까? 2004년 당시, 경찰학교 총기 사용 교육을 어떻게 했나 들여다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어. 경찰학교 교수는 총기 사용에 대해 학생들에게 이렇게 가르쳐. 3회 이상을 꼭 경고를 해야 합니다. 칼 버려! 칼 버려! 칼 버려! 그 다음에 안될 때 그런 상태에서도 사격을 하면 안됩니다. 마지막으로 경찰관한테 칼을 찌를 때 있죠? 찌를 때. 그때 어디를 사격해야 됩니까? 허벅지, 넓적다리, 대퇴부라고 하죠. 거기를 사격해야 됩니다. 만약에 상반신을 맞췄다? 어떻게 됩니까? 비난이 온통 경찰에게 쏟아집니다. -경찰학교 교수 총기 사용에 대해서는 뭐 예전이나 지금이나 신중하고 굉장히 사용하는 걸 꺼려하는 건 사실이에요. 왜냐하면 총기를 사용하고 난 다음에, 거기에 따른 잘했나? 못했나? 수많은 조사를 거쳐야 되는 그런 시달림? 그래서 오죽하면 총을 쏘라고 있는 게 아니라 던져서 맞히라고 영화의 대사처럼 사용될 정도였으니까. 총기 사용을 꺼려하는 거죠. - 이대우 형사, 당시 서부경찰서 강력 4팀 실제로 이 사건이 있기 몇 달 전, 한 형사가 과잉 진압으로 곤욕을 치른 일이 있었대. 흉기를 휘두르던 범인에게 총을 쐈는데 공교롭게도 대퇴부가 아닌 상체에 맞았거든. 치료를 받고 깨어난 용의자는 인권위에 제소를 했고 형사는 결국 제복을 벗어야 했어. 이런 분위기 속에서 경찰들이 총을 들고 출동할 수 있었을까? 두 형사가 떠난 지 어느덧 20년의 세월이 흘렀어. 그동안 유가족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산에 가다가 내가 내려오면 막 새가 따라오면서 우는 거야 깍깍 하면서 우는 거라. 우리 재현이가 새로 좋은데 태어났는가.. 안 그러면 새가 돼서 다니는가.. 뭐라도 짐승이 내 옆에 오면 우리 재현이가 오는가 싶어서요. 내가 되게 못 살아도 아들만 있었으면 행복할 것 같아.. 죽을 먹고 살아도 아들만 있으면... 행복할 것 같아... -유진숙, 故 이재현 형사 어머니 심 형사의 아내 옥주 씨는 한동안 남편의 사망신고를 하지 못했어. '고인'의 칸에 남편의 이름을 쓰는 순간 정말 남편을 떠나보내야 할 것 같아서 차마 펜을 들 수가 없었다고 해. 하지만 무엇보다 옥주 씨가 힘들었던 건 이거야. 제가 애들 아빠 생각하지 않게 주말마다 데리고 나갔어요. 어디가 됐든. 온 가족이 있는 팀이 있으면 자리를 피해서 없는 데 가서 애들이랑 놀고.. 거기서 놀고 있으면 우연이가, 저기 아빠랑 아들이 공놀이를 하고 있잖아요. 그럼 여기서 걔를 이렇게 쳐다보고 있는데.... 그런 부재를 안 느끼게 하려고 저도 엄청 애를 썼는데, 왜 우린 둘이서 놀아야 되냐고.. 우리도 가족끼리 같이 하면 안되냐고... 그 한 사람 빈자리가 온 가족이 다 파괴가 된 거예요. -황옥주, 故 심재호 형사 아내 4살 우연이, 생후 9개월이 된 유리. 한창 아빠의 품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아빠의 부재를 이해시키는 게 가장 아프고 힘든 일이었대. 그럴 때마다 옥주 씨는 순직 경관들이 모인 추모 공간에 혼자 글을 쓰며 마음을 달랬어. 그렇게 20년 동안 마음을 꼭꼭 눌러 담아 쓴 페이지가 어느새 책 한 권이야. &<2004년 11월 28일&> 우연 아빠! 오늘 유리 돌잔치를 했어. 우리 유리는 착하게 울지도 않고 사진도 잘 찍더라. 아빠가 함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2008년 1월 4일&> 또 새해가 밝았어. 자기가 떠날 때 우연이가 4살이었는데, 초등학교 간다고 벌써 의젓해진 것 같아. 유리는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한글을 읽어. 자기 닮았나 봐. 모든 게 똑소리가 나. &<2012년 6월 26일&> 오늘 우연이가 학교에서 놀림을 받았대. 아빠 없다고. 하지만 자기는 슬프지 않았대. 훌륭한 일 하시다가 하늘나라 가셨기 때문에 괜찮다고 하더라. 이제 함께한 시간보다 헤어져 지낸 시간이 더 많아졌지만, 가족들의 그리움은 세월이 흐를수록 짙어만 갔어. 그럼, 범인 이 씨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이 씨는 몇 년 전, 자신의 사건을 다룬 한 기자에게 편지 한 통을 보냈어. 이건 이 씨가 교도소에서 보낸 편지의 일부를 발췌한 거야. 기자님, 자기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괴로운 순간을 되새기게 하는 건 매우 잔인한 일입니다. 물론 제가 평생 지고 가야 할 짐이고, 죗값이지만 순간의 기억을 되살려 저와 가족이 받는 심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이 있죠. 이런 제 마음을 조금만 이해해 주시고 앞으로 기사 쓰실 때 기사로 인해 상처받을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 주세요. 저는 속죄하고 회개하며 정말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이 씨가 기자에게 보낸 편지 中 유가족들은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 씨는 지금까지도 유가족들에게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어. '꼬꼬무'가 이번에 이 이야기를 준비하면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다 안타깝게 순직한 두 형사를 보며 경찰의 꿈을 키우게 된 한 아이를 만날 수 있었어. 우리가 아는 아이야. 안녕하세요. 저는 경찰을 꿈꾸는 심재호 경위의 아들 심우연이라고 합니다. 경찰이 되고 싶다라는 생각을 가졌던 건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4살 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아빠가 집에 안 들어오고 있고 엄마는 매일같이 울고. 아 우리 아빠가 돌아가신 거구나… 이렇게 인지하고 있었다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제가 혼자 조사를 하고. 범인이 왜 그랬는가, 왜 그런 짓을 했는가에 대한 심리를 좀 더 알고 싶다는 생각들이 더 커져 가지고… 경찰이 더더욱 되고 싶다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심우연, 故 심재호 형사 아들 4살 우연이는 아빠가 못다 이룬 꿈을 이루기 위해 경찰행정학과에 진학해 열심히 목표를 향해 달리는 중이야. 우연이의 최종 꿈은, 아버지와 같은 강력반 형사가 되는 거래. '꼬꼬무'가 우연이에게 경찰 임명장을 받는 그날, 아빠에게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물었어. 나 아빠 없이도 잘 컸다… 엄마도 많이 힘들었을 거고, 나도 동생도 많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나 되게 자랑스럽게 크지 않았어? 하고 얘기를 할 것 같습니다. 어쩔 때 한 번씩 아버지가 꿈에 나올 때가 있어요. 그럼 그때, 매번 아버지 말씀이 없으신데.... 제가 얘기하죠. 아버지 보고. '내가 꼭 아빠 넘는 경찰이 되겠다' '사회에 이바지하겠다'… 그러면 아버지는 항상 흐뭇하게 웃고 가세요. 경찰이 그렇게 순직을 하면, 그 가족들이 힘든 그런 고통… 더 이상 만들지 않도록 많이 노력하겠다, 그거 꼭 계속 지켜봐 줬으면 좋겠다.. 하고 얘기할 것 같아요. 많이 많이 사랑한다고 얘기할 것 같고… -심우연, 故 심재호 형사 아들 이번에 '꼬꼬무' 인터뷰에 응해주신 분들이 20년 전 아픈 상처를 다시 꺼낸 이유는, 단 하나야. 모두가 알지만 또 모두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경찰의 희생과 헌신. 오늘을 계기로 다시 한번 되새겨 줬으면 하는 마음에 나오셨다고 해. 이 사건을 계기로 바뀐 것들이 있어. 테이저건이 도입됐고, 갑옷처럼 무거웠던 방검복도 한결 가벼운 재질의 방검조끼로 바뀌었대. 두 형사의 숭고한 희생이, 오늘날 많은 걸 변화시킨 거지. 서울경찰청 앞에는 순직경찰관들의 추모 공간인 '경찰기념공원'이 있어. 1945년 광복 이후부터 나라를 위해 순직한 경찰관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는데, 거기엔 1만 3700명의 이름이 적혀있어. 수많은 경찰관들이 범인 검거 현장에서, 또 교통정리를 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고 있대. 그리고 이곳엔 아직 300명의 순직경찰관들의 이름을 새길 수 있는 빈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고 해. 부디 이 빈자리가 영원히 채워지지 않기를…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꼬꼬무 찐리뷰] 맨몸으로 일본까지 헤엄쳐 간 조오련…그가 전설이 된 이유
등록일2024.06.14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13일 방송된 '그가 전설이 된 이유,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배우 정희태, 수영선수 출신 박태환, 배우 유이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수영에 미친, 낯선 녀석의 등장 때는 1968년 11월, 서울 종로야. 한 건물 안 사무실이 시끌시끌해. 까까머리 앳된 소년과 중년 남자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어. 소년은 사정사정하며 매달리고,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는 손사래를 쳐. 여기서 큰 목소리가 들리는 이유는, 이 작은 종이 한 장 때문이야. 수영장 회원권이야. 원래 11월 7일에 만료가 된 회원권인데, 소년이 7 앞에 2를 붙여서 27일로 바꿨다가 직원 아저씨한테 딱 걸린 거야. 제가 진짜 성공해서 꼭 갚을게요. 수영만 하게 해 주세요. 소년이 통 사정을 한 끝에, 한 번만 봐주기로 했어. 대신 소년은 벌로 수영장 청소를 하기로 했어. 이때가 1968년이야. 수영, 어떤 스포츠였을까? 수영 선수도 있고, 경기도 있을 때지만, 스포츠로 생각하진 않았어. 수영이란 건 단지, 생존 수영이나 물놀이 정도로 여겨졌지. 굳이 따지자면 특별한 사람들이나 하는 '고급 운동'이야. 이때 우리나라에 수영장이 단 세 개만 있었거든. 하나는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진 동대문운동장 수영장, 하나는 워커힐 호텔 수영장. 그리고 마지막 하나가 바로 여기, 종로에 있는 YMCA 건물 안에 실내 수영장이 있어. 연습용 실내 수영장은 딱 하나, 바로 이 YMCA 수영장뿐이었어. 좋은 기록을 내려면 연습을 많이 해야 하잖아. 근데 실내 수영장이 없으면 연습을 못 해. 겨울에 야외에서 수영할 수가 없으니까. 수영할 환경 자체가 척박한 거야. 아무나 수영을 할 수도 없어. 근데 형편도 넉넉지 않아 보이는 소년은, 왜 회원권을 위조하면서까지 수영을 하려는 걸까? 당시 학교 수영부 쌍두마차는 오산고와 양정고. 유명한 수영 명문고야. 전국체전에 나갔다 하면, 우승을 휩쓰는 게 두 학교야. 두 학교 선수들은, 학교 끝나면 다들 YMCA 수영장에 모여서 같은 꿈을 꾸면서 실력을 겨눴어. 근데 그 사이로, 웬 낯선 녀석이 나타났어. 회원권을 위조해서 수영장 청소를 하게 된 소년.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녀석이 와서 첨벙첨벙 물살을 신나게 가르는 거야. 소위 '개헤엄'이라고 하잖아? 영, 폼도 어설프고 본 적 없는 영법이야. 근데 이상하게 빨라. 까까머리 소년은 금세 수영장 유명인사가 됐어. 소년의 얼굴을 보여줄게. 혹시 누군지 알아보겠어?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이야. ▲ 해남 소년의 잠재력을 알아본 귀인 오련이는 저 멀리 땅끝마을 해남에서 왔어. 수영하겠다고 다니던 학교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왔단 거야. 시골에서 왔다고 툭툭 건드는 친구들도 있었고, 연습을 방해하는 것도 다반사야. 그런데 오련이는 기죽는 법이 없어. 수영장에 마지막까지 남아 끝까지 연습했대. 그런 오련이를 유심히 지켜보는 사람이 있어. 바로, 오산고 1학년 석기. 석기도 오련이처럼 항상 그 수영장에 마지막까지 남았거든. 석기는 수영에 대한 열정도 있었고, 집이 수영장이랑 가까워서 늦게까지 연습했어. 그런데 오련이는 집도 절도 없는 신세야. 그래서 수영장 근처 간판 가게에서 일하며 임시방편으로 숙식을 해결했어. 친구인 석기가 보기에, 오련이는 어떻게 보였을까? 오련아, 합숙소라 생각하고 그냥 내 방에서 지내. 엄마한텐 내가 말씀드릴게. 석기와 오련이는 그렇게 친구가 됐어. 참 따뜻하지? 둘은 신나게 수영장을 돌고, 집에 올 땐 라면을 사 들고 왔어. 둘이 얼마나 먹었을 것 같아? 무려 열 봉지. 운동하느라 얼마나 허기져. 그렇게 허겁지겁 먹고 기절하듯 바로 잠이 들어. 그리고 새벽 5시면, 종로에서 남산까지 매일 같이 뛰는 거야.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뭐라도 해보자는 마음으로 달렸어. 열일곱, 인생을 건 도전은 그렇게 시작됐어. 오련이의 고향은 전라남도 해남. 어린 시절엔 산과 물이 친구였어. 집 앞 저수지에서 신나게 수영하고 산에 올라서 젖은 몸을 말렸어. 그런데 오련이가 고등학교에 가면서 머릿속엔 미래에 대한 걱정이 가득했다. '돈 있는 애들은 다 서울 가서 공부한다는데, 이래서 대학은 가려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 한참 고민 많을 때잖아. 그때마다 생각나는 장면이 하나 있었어. 몇 년 전에 아빠 따라 제주도에 갔다가 우연히 한 수영대회를 봤는데, 1등 하는 학생을 보면서 '뭐야, 저 정도는 나도 하겠는데?' 하는 생각이 든 거야. 그래서 오련이는 결심했어. 내복 하나, 책 두 권 들고, 무작정 상경한 거야. 그리고 들고 온 용돈을 탈탈 털어서, 수영인들의 메카라는 YMCA 수영장에 무작정 등록을 했어. '내가 성공할 길은 수영뿐이다! 성공하기 전엔 안 내려가겠다' 다짐하면서. 오련이의 하루는 엄청 바빠. 아침운동을 하고 나면, 생활비를 벌기 위해 오후엔 간판 집에서 일하고. 오후엔 수영장 청소를 해야 해. 나머지 시간은 온통 수영이야. 이런 일과를 반복했어. 그러던 어느 날, 급히 우동 한 그릇 먹고, 또 수영장으로 뛰어들려고 하는데, 한 남자가 오련이를 붙잡아 세웠어. 학생이 학교도 안 가고 수영만 하는 거야? 그 수영은 대체 어디서 배운 거야? 수영장 회원 중에 장형숙 씨라고, '장 선생님'으로 불리는 분이 있었어. 소싯적에 수영부에서 활동을 좀 하신 분이었거든. 근데 장 선생님이 보니까 학생이 열심히는 하는데 뭔가 어설픈 거야. 장 선생님은 답답한 마음에 오련이한테 발차기하는 법을 좀 알려주고, 물 밖으로 나왔어. 씻고 사우나도 하고 한참 뒤에 탈의실을 나오는데, 저기 수영장 한쪽에서 쉴 새 없이 물보라가 일어. 오련이가 미친 듯이 발차기만 내내 하는 거야. '이놈 봐라?' 장 선생님은 곧장 오련이를 데리고 나가서 국밥 한 그릇을 먹였어. 그리고 '학생, 앞으로 수영비는 내가 내줄 테니 한 번 열심히 해봐'라고 말했어. 장 선생님이 오련이의 후원자가 되기로 한 거야. 왼쪽이 장 선생님이야. 장 선생님은 오련이의 개인 코치가 됐고, 친구들까지 불러다 일명 '조오련 후원회'를 만들었어. 이제 오련이가 할 수 있는 건 연습, 오직 연습뿐이야. 연습을 얼마나 열심히 했을 것 같아? 정말 미친 듯이 연습을 했대. 오련이 형은 기분에 따라 수영을 하지 않아요. 스케줄을 만약에, 이번 주에 10만 km을 잡아놨다 그러면 10만을 오전, 오후 해서 10만을 정확히 채워요. 새벽에 아침에 5시에 물에 들어가서 8시까지 3시간 운동을 해요. 그럼 밥 먹고 좀 쉬었다가 10시부터 또 2시간 더 하잖아요. 그다음 또 쉬었다가 4시부터 6시, 7시까지 또 하잖아요. 연습량이 너무 많고. 그 사람들이 1년간 했던 걸 자기는 한 달 만에 해본다든가. 이런 정도의 악이, 근성이 있었죠. -이관웅, 조오련의 수영 후배 ▲ 슈퍼스타의 탄생 오련이는 성공하겠다는 의지가 엄청났어. 그런데 이때 우리나라 수영 수준이라는 게, 수영에 기술이 필요하단 생각도 못 하던 때야. 그래서 장 선생님은 오련이에게 턴 기술을 집중적으로 가르쳤어. 자유형 때 턴하는 거 본 적 있지? 앞구르기 하듯 발로 벽을 힘껏 밀면서 나오잖아. 그 추진력으로 속도를 내는 거야. 일명, '퀵 턴', '플립 턴'이라고 해. 수영선수한테는 기본적인 기술이지. 근데 당시에는 플립 턴이 아니라, 헤엄치던 손으로 벽을 치고 도는 게 당연했어. 그러던 어느 날 '꼭 손으로 벽을 터치해야 하나?' 누군가 이런 생각을 한 거지. 당시 우리나라에 플립 턴은 아주 선구적인 기술이었어. 오련이는 이 기술을 집중적으로 연습했어. 그저 반복, 열심히 하는 것만이 답이야. 그리고 마침내, 기회가 찾아와. 1969년 6월, 전국체전. 학교 소속이 없던 오련이는 성인들이 뛰는 '일반부' 소속으로 경기에 출전했어. 결과는 어땠을까? 조오련 군이 남대부 자유형 1500 미터에 출전, 21분 18초로 대회 신기록을 수립해 주목을 끌었다. -당시 신문 기사 中 오련이는 쟁쟁한 일반부 선수들을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어. 사람들은 깜짝 놀랐어. 이때, 엄청난 일이 일어나. 대한체육회 회장님이 그 경기를 직관한 거야. 저 친구, 태릉 선수촌에 당장 입촌시켜! 이때가 마침, 태릉선수촌에 수영장이 막 만들어지던 때야. 타이밍 기가 막히지? 오련이에겐 그야말로 기적이 일어난 거야. 그 뒤론 일사천리였어. 해남에서 못다 마친 학교까지 다니게 됐어. 수영 명문, 양정고에 입학허가가 난 거야. 태릉선수촌에 입촌한 오련이는, 이제 돈 걱정 없이 온종일 수영을 할 수 있다는 게 가장 좋았대. 오련이는 연습에 더 박차를 가했어. 선수촌에서도 독한 놈으로 통해.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대. 저희들이 이제 50미터 잠수를 하고 다시 돌아서 75미터 이쯤에 물 위로 나온단 말이에요. 우리 같은 같이 하는 사람들은 75미터에서도 물 위로 나오고, 80미터에서도 나오잖아요. 오련이 형은 그거를 안 지려고, 오다가 기절해서 물속에 빠져버린 적도 있어요. 우리가 가서 끄집어내서 나오죠. 그러면 '또 하자, 또 하자' 그래요. 그 사람이 기본적으로 독한 거, 독한 면이 많아요. -이관웅, 조오련의 수영 후배 오련이는 승부욕이 어마어마해. 그렇게 태릉 선수촌에서 실력을 갈고닦았어. 그 뒤로 연달아 전국 대회에 나갔는데, 나가는 대회마다 우승을 휩쓸어. 그것도 매번 기록 경신. 한 해에만 11번의 한국 신기록을 깼어. 그야말로 혜성처럼, 한국에 수영 천재가 등장한 거야. 그리고 오련이는 마침내, 왼쪽 가슴에 태극 마크를 달게 됐어. 국가대표 발탁이야. 수영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채 1년도 안 됐을 무렵이야. 1970년, 제6회 아시안게임. 태국 방콕에서 열리는 경기야. 대한민국을 대표해서 레인 앞에 선 사람, 조오련. 불과 1년 전에 해남 저수지를 헤엄치던 소년이 국제무대에 서게 된 거야. 당시 아시아의 수영 강자는 일본. 지난 아시안게임에서 경영 남녀 종목은 총 26개였는데, 금메달 26개를 일본이 싹쓸이했어. 사실상 오련이에겐 한일전을 앞둔 거야. 첫 경기를 앞둔 오련이는 코치에게 이렇게 말했대. 어떻게 되든 일본 선수들과 한번 겨뤄 보겠습니다. 지쳐 자빠지면, 물에서 건져나 주십시오. 첫 경기는 자유형 400미터. 출발선에 일곱 명의 선수가 도열하고, 탕! 운명의 레이스가 시작돼. 오련이는 있는 힘을 다해 팔을 휘저었어. 치열한 접전에 장내는 고요해졌어. 일본의 독주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거지. 어느덧, 마지막 50미터. 선수들의 막판 스퍼트가 이어져. 오련이도 필사적으로 피치를 높였어. 그리고 마침내, 터치패드에 손을 찍었어. 눈꺼풀의 물방울을 털고 전광판을 보는데, 전광판 가장 위에 랭크된 건 'KOR'. 대한민국이었어. 만세!!! 조오련! 금메달!! 대한민국 경영 첫 금메달이 탄생하는 순간이야. 일본 선수를 무려 1초 앞지르고 승리했어. 당시 아시아 신기록이었어. 오련이의 기록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어. 이번 대회 영웅 조오련 선수는 수영 400미터 경기에서 아시아 신기록을 세운 뒤, 다시 남자 자유형 1500미터에서 17분 25초 7로 아시아 신기록을 세우고 우승, 우리나라 최초의 수영 2관왕이 됐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조오련은 무려 아시안게임 2관왕을 기록했어. 수영으로는 최초야. 일본을 꺾고,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선 거야. 어떻게 우리가 수영을 일본을 이길 수가 있지? 너무나 감격적이었고, 우리가 일본을 이겼다고 난리가 났었죠. -이관웅, 조오련 수영 후배 한국에 돌아온 오련이에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자마자 헹가래에, 여의도에서 시청을 가로질러 카퍼레이드까지 쫙 펼쳐졌어. 스포츠계를 뒤흔든 수영 스타의 등장이었어. 해남 소년은 '국민 영웅', '국민 남동생'이 됐어. 이때 생긴 별명이 바로 '아시아의 물개'야. 조오련의 등장으로 우리나라엔 수영 열풍이 불기 시작해. 전국에 수영장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하고, 수영을 배우겠단 강습생도 엄청 늘었어. '수영으로 성공할 수 있다' 이런 꿈을 꾸게 된 거야. 그중엔 우리가 잘 아는 분도 있어. 학교를 가는데 라디오에 온종일 그게 나오는 거예요. 조오련 선배에 대해서 뉴스에. '나도 수영을 해야 되겠다' 이미 금메달을 따고 나서의 그 일화는, 해남 섬마을 소년이 어떻게 고생했고 그런 게 쭉 나오는 거였어요. 그건 저뿐만이 아니라, 그거를 듣고 종로 YMCA에 와서 끊어서 하는 꿈을 안고 오는 친구들이 참 많았어요. 수영을 하려고. -노민상, 전 수영 국가대표 감독 전 수영 국가대표 감독인 노민상 감독도 조오련을 보면서 꿈을 키웠대. 손짓하나 눈빛 하나하나까지 다 닮으려고 했대. 우상이 하는 건 다 영웅같이 보이는 거예요. 아무리 그게 나쁘고 좋고 하더래도, 다 멋있게 보이는 거예요. 하물며 벙거지 모자 자체도 멋있게 보였으니까. -노민상, 전 수영 국가대표 감독 근데 진짜 닮고 싶은 건 정신력이었어. 조오련이 직접 쓴 수기가 있어. 선수촌에서 다른 선수들은 크로스컨트리를 맨몸으로 하나, 나는 8킬로의 모래주머니를 메고 뛰며, 선수촌에서 합숙 중 잠이 안 올 때면 운동장을 뛰곤 했다. 건방진 말인지 몰라도 적어도 남을 이기려면 남모르는 고통을 통한 무단의 노력이 필요하다. 나는 방콕에 와서도 복싱 선수들이 6시부터 시작하는 로드 워킹을 기다려 함께 뛰었다. '이 시간에는 일본 선수들이 잠자고 있겠지' 생각하면서. 그러나 나는 뛴다는 자부심을 가졌다. -조오련의 수기 中 그로부터 4년 후, 1974년 테헤란에서 열린 제7회 아시안게임. 오련이는 이번에도 출전했어. 이전 대회와 달리, 어느 정도 오련이의 전력이 다른 나라에 노출된 상태잖아. 당연히 견제가 들어오겠지. 하지만 조오련은, 이번에도 금메달을 땄어. 한국의 조오련 선수는 아시아대회 신기록으로 우승, 6회 대회에 이어 2연패 했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그런데 경기를 끝낸 오련이가 가방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 흰 모시옷과 고무신, 그리고 태극 머리띠야. 시상대에 오를 때, 보통 트레이닝복을 입잖아? 그런데 오련이는 한복을 입고 고무신을 신고 머리에 태극띠를 두르고 나타났어. 스물셋, 애국청년 오련이의 모습은 국민들에게 큰 위로와 감동을 줬어. 특히 오련이는 1500미터에 사활을 걸었대. 1500미터는 레이스가 길잖아? 자기가 선두에서 앞서가면, 그만큼 오래 대한민국을 뽐낼 수 있으니까. 하지만, 거기까지였어. 4년 후, 3연패를 꿈꾸며 아시안게임에 다시 출전했지만, 성적은 접영 200미터 동메달. 물론 새로운 종목에서 따낸 값진 메달이었지만, 찬란했던 시절은 지나고 있었어. 당시 나이 스물일곱. 지금이야 관리를 잘하면 선수들이 더 나이가 들어서도 선수 생활을 하지만, 그때만 해도 20대 후반이면 선수로서 전성기가 지났다고 했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가 이제 사라지고 있던 거야. 조오련은 이 아시안게임을 끝으로, 사실상 선수 생활 은퇴를 하게 돼. 근데 오련이의 이야기는 여기가 끝이 아니야. 진짜는 지금부터야. ▲ 수영장 밖, 원대한 계획 다시 땅끝마을, 해남이야. 고향 후배인 관웅 씨가 전화를 받았어. 목포 선착장에서 보자는 오련이 형의 연락이야. 호출을 받고 나갔더니, 오련이 형이 대뜸 배 한 척을 띄우고 그 배를 따라서 저 멀리 섬까지, 바다 수영을 하자는 거야. 전국 체전 끝나면 시간이 많잖아요. 그럼 목포에서 배를 갖고 가요. 배는 천천히 가고, 우리는 뒤에 따라 수영하고. '저 섬까지 가자' 하면 저 섬까지 가고요. 또 내려서 좀 쉬었다가 밥 먹고 또 '저 섬까지 가자'… -이관웅, 조오련 수영 후배 수영장도 아니고 종일 바다를 수영으로 돌면, 힘이 남아나겠어? 근데 오련이 형은 지치는 법이 없어. 현역인 관웅 씨가 못 따라갈 정도야. 저희들은 하루 바다 수영하면 입안이 팅팅 불어 터져 갖고, 입술이 여기까지 오거든요. 근데 그 형님은 다음 날 아침에 또 나가자고 해요. 밥만 먹고 나가자 그 얘기야. 그래서 '이상한 사람이네' 우리는 놀러 가는 걸로 생각을 하는데. 막 기를 쓰고 훈련하는 거예요. -이관웅, 조오련 수영 후배 한동안 그렇게 바다를 헤엄치던 어느 날. 조오련은 누군가를 찾아가. 바로 수영 선배, 지봉규 씨야. 지봉규 씨는 지금도 그날을 잊지 못한대. 하루는 오더니, '나 저기 대한해협을 건너가려는데 어떻겠어요?' 그래. '뭐 안 될 게 뭐 있어 하면 되지'. 다른 사람들한테 다 물어봤더니 안된다고 그러더래요. '네가 아시아의 1등인데, 아 그럼 못할 게 뭐 있냐. 하면 되지'… -지봉규, 조오련 수영 선배 대한해협을 건너겠다는 계획이야. 그러니까, 일본까지 헤엄 쳐서 가겠다는 거야. 장난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야. 대한해협은, 대한민국과 일본 규슈지방 사이의 바다를 말해. 일본까지의 최단 거리는, 부산 태종대에서 대마도 북단 사오자키 등대까지 약 48km야. 근데, 바다를 헤엄쳐 건너는 건 직선거리와는 달라. 해류를 생각하면 60km 정도로 봐야 해. 60km면 마라톤 풀코스를 한참 넘는 거리야. 시속 3km 정도로 간대도, 20시간을 헤엄쳐야 해. 이게 가능한 일일까? 만약 성공한다면, 대한해협을 건넌 최초의 인류가 되는 거야. 조오련이 도전장을 던진 것도, 그 이유야. 많은 사람들이 만류했지만, 선배 지봉규 씨는 확신했어. 이 사람은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이니까. 지봉규 씨는 대한해협 횡단 감독을 맡기로 해. 실내 수영과 바다 수영은 천지 차이야. 낮은 수온과 조류의 영향을 다 버텨내야 해. 물길을 안내해 줄 선장, 훈련을 함께할 코치와 감독, 도전을 기록할 기자단까지 한 팀이 꾸려졌어. 디데이는 그나마 수온이 오르는 7월에서 8월 사이로 정했어. 남은 시간은 8개월 정도.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엄청난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거야. ▲ 인간 한계에 도전하다 장거리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건 지구력이야. 횡단 팀의 첫 코스는 도보 행군이었어. 서울에서 조오련의 고향, 땅끝 해남까지 걸었어. 이어지는 건, 잠 안 자고 버티기 훈련. 제주도를 무려 22시간 동안 쉬지 않고 돌았어. 이동한 거리만 91km야. 그 사이, 지 감독은 바다 상황을 계속 확인했어. 지역 어부들을 만나 자문을 구하는데, 흔한 일은 아니지만 상어가 나타날 가능성도 있대. 상어가 아니더라도, 여러 해상동물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거야. 며칠 동안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지 감독님은 고기 잡을 때 쓰는 족대를 활용하기로 했어. 커다란 그물 안전망을 제작하는 거야. 배에 그물을 연결해서 끌고 그 안에서 안전하게 헤엄치게 하는 거야. 조오련은 이제, 바다 적응 훈련에 집중해. 장거리 연습부터 캄캄한 밤 수영까지, 실전에 가까운 연습을 이어갔어. 그사이 몸에 큰 변화도 생겼어. 70킬로였던 몸무게가 85킬로까지 분 거야. 대한해협의 수온은 낮아도 한참 낮아. 그런 바다에서 장시간 수영하면, 저체온증으로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대. 그래서 지방을 늘리기로 한 거야. 한 달에 먹는 고기만 무려 100근이었대. 1980년 8월 11일 자정. 8개월을 준비한 도전, 바로 그날이야. 기상상황을 고려해 한밤중에 출발하는 거야. 바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누구도 알 수 없어. 칠흑같이 어두운 방파제 앞. 하얀 모자와 수영복을 입은 조오련이 나타나자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져. 8월 11일 00시 5분. 사람들의 응원을 뒤로한 채 풍덩! 조오련은 힘차게 물을 가르며 다대포항을 떠났어. 출발은 아주 좋아. 커다란 안전망이 조오련을 감싸고, 조오련은 빠른 속도로 앞으로 나아가. 시속 4km 정도의 속도로 한 시간을 가더니, 그다음 한 시간은 무려 시속 7km를 넘어섰어. 그런데 그때, 조오련이 신호를 보내. 금세 에너지가 떨어져 배가 고프다는 거야. 바다 수영하면서 식사, 어떻게 할 것 같아? 조오련은 바다에 뜬 채 따끈한 깨죽으로 첫 해상 식사를 했어. 그리곤 속이 거북할지 몰라 소화제를 탄 더운 물을 들이켰어. 따뜻한 죽을 먹이려고 배 안에선 종일 죽을 쑤고 있었대.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갑자기 문제가 생겼어. 갑자기 조오련이 괴로워하는 거야. 한두 시간 갔거든. 그랬더니 딱 멈춰달라고 그래요. '왜 그러냐' 그랬더니, '몸이 따가워서 아주 못하겠다'는 거야. 물에 들어가서 보니까, 그냥 해파리가 안전망에 꽉 붙었어요. -지봉규, 대한해협횡단 감독 지 감독이 급히 바다로 뛰어들었어. 근데 해파리가 많아도 너무 많아. 지 감독은 안전망 밖으로 오련이를 나가게 하고, 안전망을 반대로 돌렸어. 물살을 이용해 해파리를 떼내려고 한 거야. 다행히 해파리떼가 사라졌어. 그 뒤론 평온한 시간이 이어졌어. 컴컴한 망망대해의 물살을 가르는 사람 하나. 어둠 속의 바다, 헤엄쳐 본 적 있어? 조오련은 무섭기보단 환상적이었대. 수면 위로는 저 멀리 오징어잡이 배 불빛이 비추고, 바닷속은 형형의 빛이 가득 해. 플랑크톤이 빛을 받으면서 빛나는 거야. 조오련은 힘든 와중에도, 조명을 꺼달라 요청을 해왔대. 꿈같은 바다를 즐기려는 거야. 이때 마치 은하수 속을 떠가는 기분이었대. 어느덧 새벽 5시를 넘어섰어. 조오련은 무려 5시간 넘게 쉬지 않고 헤엄을 친 거야. 기진맥진하지. 그리고 같은 걸 무한 반복하니 지치고 지루해. 응원할 방법이 있을까? 조오련 팀은 음악을 준비했어. 넓고 푸른 바다 위로 신나는 음악이 울려 퍼져. 조오련은 음악의 효과인지, 더 힘차게 물살을 갈랐어. 하지만 위기가 또다시 찾아와. 새벽 되기 전에, 오련이가 자꾸 이상한 행동을 하는 거예요. '야 너 왜 그러냐' 하니까, 멀미가 난다는 거예요. 자꾸만 몸이. 물속 해류에 섞여 있는 것들이 물보라를 이렇게 치면 그게 싹 움직이면서 새파랗게 돼. 그러니까 바깥에 무덤가에 도깨비불 파랗게 떠다니는 것 같이 그렇게 돼. 하다가 보니까 어지러운 거지. -지봉규, 대한해협횡단 감독 오랜 시간 아무런 좌표도 없는 망망대해를 헤엄치고 있잖아. 그러다 보니 어지럽고 환각까지 보인다는 거야. 조오련은 그 와중에도 쉼 없이 팔을 젓고 있어. 이건 그냥,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 상황이지. ▲ 대한해협 횡단, '인류 최초'의 기록 어느덧 출발 12시간 째야. 그때, 지 감독 눈에 저 멀리 뭔가 보여. 저 멀리 어렴풋이 수평선이 펼쳐지더니 대마도 등대가 모습을 드러낸 거야. 예상보다도 엄청나게 빠른 페이스였어. 조오련의 얼굴엔 드디어 미소가 번져. 필사의 힘을 다해 팔을 내 저었어. 어느새 목적지가 1km 앞으로 다가와. 여기서부턴 배가 안전망을 끌고 갈 수 없어. 조류가 엄청 세거든. 이제 오련이 혼자 가야 해. 안전망 속을 헤엄치던 조오련은 힘차게 그물을 빠져나왔어. 혼신의 힘을 다해 이를 악물고 양쪽 팔을 저었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리고 마침내, 목적지인 대마도 등대에 도착해. 맨몸으로 수영해서 일본까지 건넌 거야. 조오련은 힘차게 태극기를 흔들었어. 기록은 13시간 16분 10초. 예상했던 기록을 6시간이나 앞당긴 거야. 그만큼 초인적인 힘으로 물살을 갈랐어. 입항 절차를 마치고 부두에 발을 딛자, 엄청난 환호가 쏟아졌어. 소식을 듣고 찾아온 재일 동포들이야. 기진맥진한 조오련을 향해 꽃다발을 막 안겨. 도전 후, 조오련은 이런 말을 했어. 내가 수영을 끊임없이 하는 진짜 이유는, 나를 이기는 힘. 있는 힘을 끝까지 다 써서 마지막에서 뭍으로 나와서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 때 쾌감을 자꾸만 다시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그때 느낀 희열과 쾌감, 엄청났겠지? 조오련은 다시 한번 아시아의 물개란 걸 증명했어. 영화 '친구'에 그런 대사가 나오잖아.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하고 바다 거북이하고 둘이 헤엄치기 시합하면 누가 이길 것 같노?'라는 대사. 그만큼, 조오련이란 이름은 이제 '수영' 하면 떠오르는 고유대명사가 됐어. 그 후 조오련은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오랜 꿈이던 수영 교실도 열었어. 이제 힘들었던 시절은 추억으로 남겨놓고 평온한 삶을 즐기기만 하면 돼. ▲ 다시 바다로, 20년 만의 도전 그런데, 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나 봐. 대한해협 횡단에 성공한 지 20년 후. 마흔아홉의 조오련은 다시 바다에 나타났어. 2000년 방영됐던, SBS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뷰티풀 라이프'의 '대한해협 횡단 프로젝트'를 통해서. 안녕하십니까? 조오련입니다. 제가 1980년도 8월 11일 날 대한해협을 횡단했지마는 그 당시에 한 50살이 넘으면 다시 한번 횡단해 봐야겠다, 국민들하고 약속을 했었는데. 계주로서, 훌륭하신 분들과 함께 릴레이로 대한해협을 횡단코자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배우 이훈, 소지섭, 그룹 베이비복스 등이 출연했던, 이 프로젝트 알아? 당시 2002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한국과 일본을 이어 줄 초대형 이벤트로 마련됐어. 조오련이 빠질 수 없잖아. 다시 한번 대한해협을 건너기로 한 거야. 근데 여러 사람이 하는 프로젝트라, 어찌 보면 더 험난할 지도 몰라. 저는 그때까지 수영을 못했어요. 그래서 '나는 안 한다'고 했는데, 조오련 선생님이 가능하다는 거예요. 제가 매일 수영 연습을 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아킬레스건염이 오고요. 수영을 한 일주일 쉬었어야 됐고. 그런데 조오련 선생님이 전화 오신 거예요. '너 더 이상 쉬면, 못 건너간다' 진짜로 저를 야단치기도 하고, 독하게 가르쳤죠 진짜. 고생 많이 했어요. -이훈, 연예인 횡단 팀장 횡단팀 팀장이었던 배우 이훈. 수영 실력은 부족했어. 하지만, 조오련은 열정적으로 팀원들을 챙겼어. 차츰 서로에 대한 믿음도 생기고 팀원 모두가 의기투합하기 시작해. 어느새 실력도 많이 발전했어. 마침내 그날이 됐어. 2000년 8월 12일, 대망의 대한해협 횡단 날이야. 횡단팀은 각자 소중한 사람들과 반드시 성공해 돌아오겠다는 인사를 나눴어. 떨리는 그 시작, 횡단 첫 주자는 누구일까? 바로 조오련. 조오련이 바위 위에 홀로 섰어. 스물아홉 나이로 대한해협을 건넜던 조오련이, 마흔아홉이 되어 다시 출발점에 선 거야.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 포기를 모르는 위대한 여정 시작은 순탄했는데, 예상치 못한 샛바람이 엄청나게 부는 거야. 파도가 높아지면서 안전망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배 안으로도 바닷물이 들이쳐. 기상이 더 나빠지면 위험해. 배가 전복될 수 있어. 결국 철수를 결정했어. 횡단을 시작한 지 벌써 10시간, 반 이상 오긴 했는데 거기까지였어. 안전이 중요하니까. 횡단팀은 다시 의지를 다지면서 2차 도전을 시작했어. 그런데 하늘이 맑은가 싶더니, 시간이 쌓일수록 파도가 높아져. 게다가 해파리 떼의 공격까지 시작됐어. 갖가지 역경을 헤치며, 그래도 바다를 계속 헤엄쳐 갔어. 내가 24년 동안 살면서 제일 길었던 한 시간이예요. -배우 소지섭 어느덧 출발한 지 15시간을 넘어섰어. 다들 지칠 대로 지쳤어. 그런데 그때! 대마도다 대마도! 마침내 대마도가 모습을 드러냈어. 20년 만에 맨몸으로 대마도에 다다른 거야. 마지막에 17명이 다 입수했어요. 그래도 대마도 땅을 밟을 때는… 지금 생각해도 짜릿할 정도로 성취감. 짜릿할 정도로 행복했죠. -이훈, 연예인 횡단 팀장 꼬박 18시간 11분을 헤엄친 끝에, 75km 대한해협 횡단에 성공했어. 여정이 마무리되는 순간, 다들 만세를 부르며 얼싸안았어. 20년 전 조오련이 홀로 싸워온 길을, 이번에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이겨낸 거지. 그런데, 조오련의 도전은 끝나지 않았어. 2005년, 일명 '물개가족 독도 횡단' 프로젝트. 두 아들과 함께 울릉도에서 독도까지 120km를 헤엄쳤어. 독도가 우리 땅인 걸 알리려고. 또 3년 후엔, 민족대표 33인을 기리는, 독도를 33바퀴 도는 도전을 했어. 7월 1일 도전을 시작해서 31일, 마지막 33바퀴를 도는 데 성공했어. 그때 그의 나이, 56세였어. 조오련은 왜, 이런 도전을 계속했을까. 주변에서 그를 본 사람들은, 조오련은 새로운 도전을 통해 국민들에게 계속 희망을 전하려 하는 거 같았대. 그에게 도전은, 삶의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2010년, 환갑을 앞둔 나이. 조오련은 고향 해남으로 돌아와서 마지막 도전을 선언했어. 30년 만에 대한해협을 다시 건너겠단 거야. 이번엔 혼자서. 조오련의 각오는 남달랐어. 한 기자가 물었어. 내일모레면 환갑을 바라보는데 힘들지 않으십니까 라고. 그러자 이렇게 대답했어. 힘든 게 걱정이겠소.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온몸을 내 던져야제. 그 어느 때보다 들뜬 모습이었어. 그런데, 그렇게 한창 바다로 갈 준비를 하던 어느 날, 조오련은 쓰러진 채로 발견돼. 심장마비였어. 그리고 그 길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버렸어. 너무도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된 거야. 국민들은 물론이고 동료들에게도 엄청난 충격이었어. 자기는 운동선수가 직업이니까 그것밖에 없다. 최선을 다해서 죽을 때까지 그걸 해야 된다, 그걸 딱 머릿속에 갖고 있었던 사람이에요. 다른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잖아요. 수영장도 했었고. 근데 자기는 그 수영장, 편한 것이 안 맞은 거예요. 자기는 도전을 해야 돼… 저희 형님 곁에 가서 다시 한번 수영하며 사는 그런 세상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형님, 보고 싶네요. -이관웅, 조오련 수영 후배 바다를 사랑한 만큼, 바다가 저한테 사랑을 주더라고요. 언제가 제일 좋냐 그러면, 전 배는 좀 나왔지만 수영복 입을 때가 제일 행복합니다. -조오련 생전 인터뷰 中 얻은 명성만으로 편안한 삶을 살 수도 있었는데, 조오련은 도전을 멈추지 않았어. 2020년, 조오련은 대한민국 스포츠 영웅으로 선정됐고, 체육인 중 6번째로 국립 현충원에 안장됐어. 조오련의 오랜 벗, 서울에 상경했을 때 방까지 내줬던 박석기 감독이 이런 이야기를 전해왔어. 저는 학교라는 울타리 속에서 성장을 했어요. 하지만 오련이는 일단 시작 자체가 도전이잖아요. 서울에 올라온 것 자체가 도전일 테고. 잠시도 그 친구는 긴장을 풀지 못했을 거예요. 처음부터 집념과 야망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라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면서 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오련이 덕에 저도 마음속으로 경주를 하면서 더 성장한 것 같습니다. 참 부러우면서도 응원하지 않을 수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이 서글펐어요. -박석기, 조오련 친구 양정고에 있는 조오련 기념비엔 조오련이 했던 말이 적혀 있어. '무모해 보일지 모르지만 시작하는 순간 도전이 된다'라고. 그에게 도전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
[꼬꼬무 찐리뷰] 맨몸으로 일본까지 헤엄쳐 간 조오련…그가 전설이 된 이유
등록일2024.06.14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13일 방송된 '그가 전설이 된 이유,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배우 정희태, 수영선수 출신 박태환, 배우 유이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수영에 미친, 낯선 녀석의 등장 때는 1968년 11월, 서울 종로야. 한 건물 안 사무실이 시끌시끌해. 까까머리 앳된 소년과 중년 남자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어. 소년은 사정사정하며 매달리고,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는 손사래를 쳐. 여기서 큰 목소리가 들리는 이유는, 이 작은 종이 한 장 때문이야. 수영장 회원권이야. 원래 11월 7일에 만료가 된 회원권인데, 소년이 7 앞에 2를 붙여서 27일로 바꿨다가 직원 아저씨한테 딱 걸린거야. 제가 진짜 성공해서 꼭 갚을게요. 수영만 하게 해 주세요. 소년이 통 사정을 한 끝에, 한 번만 봐주기로 했어. 대신 소년은 벌로 수영장 청소를 하기로 했어. 이 때가 1968년이야. 수영, 어떤 스포츠였을까? 수영 선수도 있고, 경기도 있을 때지만, 스포츠로 생각하진 않았어. 수영이란 건 단지, 생존 수영이나 물놀이 정도로 여겨졌지. 굳이 따지자면 특별한 사람들이나 하는 '고급 운동'이야. 이때 우리나라에 수영장이 단 세 개만 있었거든. 하나는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진 동대문운동장 수영장, 하나는 워커힐 호텔 수영장. 그리고 마지막 하나가 바로 여기, 종로에 있는 YMCA 건물 안에 실내 수영장이 있어. 연습용 실내 수영장은 딱 하나, 바로 이 YMCA 수영장뿐이었어. 좋은 기록을 내려면 연습을 많이 해야 하잖아. 근데 실내 수영장이 없으면 연습을 못 해. 겨울에 야외에서 수영할 수가 없으니까. 수영할 환경 자체가 척박한 거야. 아무나 수영을 할 수도 없어. 근데 형편도 넉넉지 않아 보이는 소년은, 왜 회원권을 위조하면서까지 수영을 하려는 걸까? 당시 학교 수영부 쌍두마차는 오산고와 양정고. 유명한 수영 명문고야. 전국체전에 나갔다 하면, 우승을 휩쓰는 게 두 학교야. 두 학교 선수들은, 학교 끝나면 다들 YMCA 수영장에 모여서 같은 꿈을 꾸면서 실력을 겨눴어. 근데 그 사이로, 웬 낯선 녀석이 나타났어. 회원권을 위조해서 수영장 청소를 하게 된 소년.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녀석이 와서 첨벙첨벙 물살을 신나게 가르는 거야. 소위 '개헤엄'이라고 하잖아? 영, 폼도 어설프고 본적 없는 영법이야. 근데 이상하게 빨라. 까까머리 소년은 금세 수영장 유명인사가 됐어. 소년의 얼굴을 보여줄게. 혹시 누군지 알아보겠어?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이야. ▲ 해남 소년의 잠재력을 알아본 귀인 오련이는 저 멀리 땅끝마을 해남에서 왔어. 수영하겠다고 다니던 학교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왔단 거야. 시골에서 왔다고 툭툭 건드는 친구들도 있었고, 연습을 방해하는 것도 다반사야. 그런데 오련이는 기죽는 법이 없어. 수영장에 마지막까지 남아 끝까지 연습했대. 그런 오련이를 유심히 지켜보는 사람이 있어. 바로, 오산고 1학년 석기. 석기도 오련이처럼 항상 그 수영장에 마지막까지 남았거든. 석기는 수영에 대한 열정도 있었고, 집이 수영장이랑 가까워서 늦게까지 연습했어. 그런데 오련이는 집도 절도 없는 신세야. 그래서 수영장 근처 간판 가게에서 일하며 임시 방편으로 숙식을 해결했어. 친구인 석기가 보기에, 오련이는 어떻게 보였을까? 오련아, 합숙소라 생각하고 그냥 내 방에서 지내. 엄마한텐 내가 말씀드릴게. 석기와 오련이는 그렇게 친구가 됐어. 참 따뜻하지? 둘은 신나게 수영장을 돌고, 집에 올 땐 라면을 사 들고 왔어. 둘이 얼마나 먹었을 것 같아? 무려 열 봉지. 운동하느라 얼마나 허기져. 그렇게 허겁지겁 먹고 기절하듯 바로 잠이 들어. 그리고 새벽 5시면, 종로에서 남산까지 매일 같이 뛰는 거야.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뭐라도 해보자는 마음으로 달렸어. 열일곱, 인생을 건 도전은 그렇게 시작됐어. 오련이의 고향은 전라남도 해남. 어린 시절엔 산과 물이 친구였어. 집 앞 저수지에서 신나게 수영하고 산에 올라서 젖은 몸을 말렸어. 그런데 오련이가 고등학교에 가면서 머릿속엔 미래에 대한 걱정이 가득했다. '돈 있는 애들은 다 서울 가서 공부한다는데, 이래서 대학은 가려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 한참 고민 많을 때잖아. 그때마다 생각나는 장면이 하나 있었어. 몇 년 전에 아빠 따라 제주도에 갔다가 우연히 한 수영대회를 봤는데, 1등 하는 학생을 보면서 '뭐야, 저 정도는 나도 하겠는데?' 하는 생각이 든 거야. 그래서 오련이는 결심했어. 내복 하나, 책 두 권 들고, 무작정 상경한 거야. 그리고 들고 온 용돈을 탈탈 털어서, 수영인들의 메카라는 YMCA 수영장에 무작정 등록을 했어. '내가 성공할 길은 수영 뿐이다! 성공하기 전엔 안 내려가겠다' 다짐하면서. 오련이의 하루는 엄청 바빠. 아침운동을 하고 나면, 생활비를 벌기 위해 오후엔 간판 집에서 일하고. 오후엔 수영장 청소를 해야 해. 나머지 시간은 온통 수영이야. 이런 일과를 반복했어. 그러던 어느날, 급히 우동 한 그릇 먹고, 또 수영장으로 뛰어들려고 하는데, 한 남자가 오련이를 붙잡아 세웠어. 학생이 학교도 안 가고 수영만 하는 거야? 그 수영은 대체 어디서 배운 거야? 수영장 회원 중에 장형숙 씨라고, '장 선생님'으로 불리는 분이 있었어. 소싯적에 수영부에서 활동을 좀 하신 분이었거든. 근데 장 선생님이 보니까 학생이 열심히는 하는데 뭔가 어설픈 거야. 장 선생님은 답답한 마음에 오련이한테 발차기하는 법을 좀 알려주고, 물 밖으로 나왔어. 씻고 사우나도 하고 한참 뒤에 탈의실을 나오는데, 저기 수영장 한쪽에서 쉴 새 없이 물보라가 일어. 오련이가 미친 듯이 발차기만 내내 하는 거야. '이놈 봐라?' 장 선생님은 곧장 오련이를 데리고 나가서 국밥 한 그릇을 먹였어. 그리고 '학생, 앞으로 수영비는 내가 내줄 테니 한 번 열심히 해봐'라고 말했어. 장 선생님이 오련이의 후원자가 되기로 한 거야. 왼쪽이 장 선생님이야. 장 선생님은 오련이의 개인 코치가 됐고, 친구들까지 불러다 일명 '조오련 후원회'를 만들었어. 이제 오련이가 할 수 있는 건 연습, 오직 연습뿐이야. 연습을 얼마나 열심히 했을 것 같아? 정말 미친 듯이 연습을 했대. 오련이 형은 기분에 따라 수영을 하지 않아요. 스케줄을 만약에, 이번 주에 10만km을 잡아놨다 그러면 10만을 오전, 오후 해서 10만을 정확히 채워요. 새벽에 아침에 5시에 물에 들어가서 8시까지 3시간 운동을 해요. 그럼 밥 먹고 좀 쉬었다가 10시부터 또 2시간 더 하잖아요. 그 다음 또 쉬었다가 4시부터 6시, 7시까지 또 하잖아요. 연습량이 너무 많고. 그 사람들이 1년간 했던 걸 자기는 한 달 만에 해본다든가. 이런 정도의 악이, 근성이 있었죠. -이관웅, 조오련의 수영 후배 ▲ 슈퍼스타의 탄생 오련이는 성공하겠다는 의지가 엄청났어. 그런데 이때 우리나라 수영 수준이라는 게, 수영에 기술이 필요하단 생각도 못 하던 때야. 그래서 장 선생님은 오련이에게 턴 기술을 집중적으로 가르쳤어. 자유형 때 턴하는 거 본 적 있지? 앞구르기 하듯 발로 벽을 힘껏 밀면서 나오잖아. 그 추진력으로 속도를 내는 거야. 일명, '퀵 턴', '플립 턴'이라고 해. 수영선수한테는 기본적인 기술이지. 근데 당시에는 플립 턴이 아니라, 헤엄치던 손으로 벽을 치고 도는 게 당연했어. 그러던 어느 날 '꼭 손으로 벽을 터치해야 하나?' 누군가 이런 생각을 한 거지. 당시 우리나라에 플립 턴은 아주 선구적인 기술이었어. 오련이는 이 기술을 집중적으로 연습했어. 그저 반복, 열심히 하는 것만이 답이야. 그리고 마침내, 기회가 찾아와. 1969년 6월, 전국체전. 학교 소속이 없던 오련이는 성인들이 뛰는 '일반부' 소속으로 경기에 출전했어. 결과는 어땠을까? 조오련 군이 남대부 자유형 1500 미터에 출전, 21분 18초로 대회 신기록을 수립해 주목을 끌었다. -당시 신문 기사 中 오련이는 쟁쟁한 일반부 선수들을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어. 사람들은 깜짝 놀랐어. 이때, 엄청난 일이 일어나. 대한체육회 회장님이 그 경기를 직관한 거야. 저 친구, 태릉 선수촌에 당장 입촌시켜! 이때가 마침, 태릉선수촌에 수영장이 막 만들어지던 때야. 타이밍 기가 막히지? 오련이에겐 그야말로 기적이 일어난 거야. 그 뒤론 일사천리였어. 해남에서 못다 마친 학교까지 다니게 됐어. 수영 명문, 양정고에 입학허가가 난 거야. 태릉선수촌에 입촌한 오련이는, 이제 돈 걱정 없이 온종일 수영을 할 수 있다는 게 가장 좋았대. 오련이는 연습에 더 박차를 가했어. 선수촌에서도 독한 놈으로 통해.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대. 저희들이 이제 50미터 잠수를 하고 다시 돌아서 75미터 이쯤에 물 위로 나온단 말이에요. 우리 같은 같이 하는 사람들은 75미터에서도 물 위로 나오고, 80미터에서도 나오잖아요. 오련이 형은 그거를 안 지려고, 오다가 기절해서 물속에 빠져버린 적도 있어요. 우리가 가서 끄집어내서 나오죠. 그러면 '또 하자, 또 하자' 그래요. 그 사람이 기본적으로 독한 거, 독한 면이 많아요. -이관웅, 조오련의 수영 후배 오련이는 승부욕이 어마어마해. 그렇게 태릉 선수촌에서 실력을 갈고 닦았어. 그 뒤로 연달아 전국 대회에 나갔는데, 나가는 대회마다 우승을 휩쓸어. 그것도 매번 기록 경신. 한 해에만 11번의 한국 신기록을 깼어. 그야말로 혜성처럼, 한국에 수영 천재가 등장한 거야. 그리고 오련이는 마침내, 왼쪽 가슴에 태극 마크를 달게 됐어. 국가대표 발탁이야. 수영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채 1년도 안 됐을 무렵이야. 1970년, 제6회 아시안게임. 태국 방콕에서 열리는 경기야. 대한민국을 대표해서 레인 앞에 선 사람, 조오련. 불과 1년 전에 해남 저수지를 헤엄치던 소년이 국제 무대에 서게 된 거야. 당시 아시아의 수영 강자는 일본. 지난 아시안게임에서 경영 남녀 종목은 총 26개였는데, 금메달 26개를 일본이 싹쓸이 했어. 사실상 오련이에겐 한일전을 앞둔 거야. 첫 경기를 앞둔 오련이는 코치에게 이렇게 말했대. 어떻게 되든 일본 선수들과 한번 겨뤄 보겠습니다. 지쳐 자빠지면, 물에서 건져나 주십시오. 첫 경기는 자유형 400미터. 출발선에 일곱 명의 선수가 도열하고, 탕! 운명의 레이스가 시작돼. 오련이는 있는 힘을 다해 팔을 휘저었어. 치열한 접전에 장내는 고요해졌어. 일본의 독주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거지. 어느덧, 마지막 50미터. 선수들의 막판 스퍼트가 이어져. 오련이도 필사적으로 피치를 높였어. 그리고 마침내, 터치패드에 손을 찍었어. 눈꺼풀의 물방울을 털고 전광판을 보는데, 전광판 가장 위에 랭크된 건 'KOR'. 대한민국이었어. 만세!!! 조오련! 금메달!! 대한민국 경영 첫 금메달이 탄생하는 순간이야. 일본 선수를 무려 1초 앞지르고 승리했어. 당시 아시아 신기록이었어. 오련이의 기록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어. 이번 대회 영웅 조오련 선수는 수영 400미터 경기에서 아시아 신기록을 세운 뒤, 다시 남자 자유형 1500미터에서 17분 25초 7로 아시아 신기록을 세우고 우승, 우리나라 최초의 수영 2관왕이 됐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조오련은 무려 아시안게임 2관왕을 기록했어. 수영으로는 최초야. 일본을 꺾고,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선 거야. 어떻게 우리가 수영을 일본을 이길 수가 있지? 너무나 감격적이었고, 우리가 일본을 이겼다고 난리가 났었죠. -이관웅, 조오련 수영 후배 한국에 돌아온 오련이에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자마자 헹가래에, 여의도에서 시청을 가로질러 카퍼레이드까지 쫙 펼쳐졌어. 스포츠계를 뒤흔든 수영 스타의 등장이었어. 해남 소년은 '국민 영웅', '국민 남동생'이 됐어. 이때 생긴 별명이 바로 '아시아의 물개'야. 조오련의 등장으로 우리나라엔 수영 열풍이 불기 시작해. 전국에 수영장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하고, 수영을 배우겠단 강습생도 엄청 늘었어. '수영으로 성공할 수 있다' 이런 꿈을 꾸게 된 거야. 그 중엔 우리가 잘 아는 분도 있어. 학교를 가는데 라디오에 온종일 그게 나오는 거예요. 조오련 선배에 대해서 뉴스에. '나도 수영을 해야 되겠다' 이미 금메달을 따고 나서의 그 일화는, 해남 섬마을 소년이 어떻게 고생했고 그런게 쭉 나오는 거였어요. 그건 저 뿐만이 아니라, 그거를 듣고 종로 YMCA에 와서 끊어서 하는 꿈을 안고 오는 친구들이 참 많았어요. 수영을 하려고. -노민상, 전 수영 국가대표 감독 전 수영 국가대표 감독인 노민상 감독도 조오련을 보면서 꿈을 키웠대. 손짓하나 눈빛 하나하나까지 다 닮으려고 했대. 우상이 하는 건 다 영웅같이 보이는 거예요. 아무리 그게 나쁘고 좋고 하더래도, 다 멋있게 보이는 거예요. 하물며 벙거지 모자 자체도 멋있게 보였으니까. -노민상, 전 수영 국가대표 감독 근데 진짜 닮고 싶은 건 정신력이었어. 조오련이 직접 쓴 수기가 있어. 선수촌에서 다른 선수들은 크로스컨트리를 맨몸으로 하나, 나는 8킬로의 모래주머니를 메고 뛰며, 선수촌에서 합숙 중 잠이 안 올 때면 운동장을 뛰곤 했다. 건방진 말인지 몰라도 적어도 남을 이기려면 남모르는 고통을 통한 무단의 노력이 필요하다. 나는 방콕에 와서도 복싱 선수들이 6시부터 시작하는 로드 워킹을 기다려 함께 뛰었다. '이 시간에는 일본 선수들이 잠자고 있겠지' 생각하면서. 그러나 나는 뛴다는 자부심을 가졌다. -조오련의 수기 中 그로부터 4년 후, 1974년 테헤란에서 열린 제7회 아시안게임. 오련이는 이번에도 출전했어. 이전 대회와 달리, 어느 정도 오련이의 전력이 다른 나라에 노출된 상태잖아. 당연히 견제가 들어오겠지. 하지만 조오련은, 이번에도 금메달을 땄어. 한국의 조오련 선수는 아시아대회 신기록으로 우승, 6회 대회에 이어 2연패 했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그런데 경기를 끝낸 오련이가 가방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 흰 모시옷과 고무신, 그리고 태극 머리띠야. 시상대에 오를 때, 보통 트레이닝복을 입잖아? 그런데 오련이는 한복을 입고 고무신을 신고 머리에 태극띠를 두르고 나타났어. 스물셋, 애국청년 오련이의 모습은 국민들에게 큰 위로와 감동을 줬어. 특히 오련이는 1500미터에 사활을 걸었대. 1500미터는 레이스가 길잖아? 자기가 선두에서 앞서가면, 그만큼 오래 대한민국을 뽐낼 수 있으니까. 하지만, 거기까지였어. 4년 후, 3연패를 꿈꾸며 아시안게임에 다시 출전했지만, 성적은 접영 200미터 동메달. 물론 새로운 종목에서 따낸 값진 메달이었지만, 찬란했던 시절은 지나고 있었어. 당시 나이 스물일곱. 지금이야 관리를 잘하면 선수들이 더 나이가 들어서도 선수 생활을 하지만, 그때만 해도 20대 후반이면 선수로서 전성기가 지났다고 했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가 이제 사라지고 있던 거야. 조오련은 이 아시안게임을 끝으로, 사실상 선수 생활 은퇴를 하게 돼. 근데 오련이의 이야기는 여기가 끝이 아니야. 진짜는 지금부터야. ▲ 수영장 밖, 원대한 계획 다시 땅끝마을, 해남이야. 고향 후배인 관웅 씨가 전화를 받았어. 목포 선착장에서 보자는 오련이 형의 연락이야. 호출을 받고 나갔더니, 오련이 형이 대뜸 배 한 척을 띄우고 그 배를 따라서 저 멀리 섬까지, 바다 수영을 하자는 거야. 전국 체전 끝나면 시간이 많잖아요. 그럼 목포에서 배를 갖고 가요. 배는 천천히 가고, 우리는 뒤에 따라 수영하고. '저 섬까지 가자' 하면 저 섬까지 가고요. 또 내려서 좀 쉬었다가 밥 먹고 또 '저 섬까지 가자'… -이관웅, 조오련 수영 후배 수영장도 아니고 종일 바다를 수영으로 돌면, 힘이 남아나겠어? 근데 오련이 형은 지치는 법이 없어. 현역인 관웅 씨가 못 따라갈 정도야. 저희들은 하루 바다 수영하면 입안이 팅팅 불어 터져 갖고, 입술이 여기까지 오거든요. 근데 그 형님은 다음 날 아침에 또 나가자고 해요. 밥만 먹고 나가자 그 얘기야. 그래서 '이상한 사람이네' 우리는 놀러 가는 걸로 생각을 하는데. 막 기를 쓰고 훈련하는 거예요. -이관웅, 조오련 수영 후배 한동안 그렇게 바다를 헤엄치던 어느 날. 조오련은 누군가를 찾아가. 바로 수영 선배, 지봉규 씨야. 지봉규 씨는 지금도 그날을 잊지 못한대. 하루는 오더니, '나 저기 대한해협을 건너가려는데 어떻겠어요?' 그래. '뭐 안 될 게 뭐 있어 하면 되지'. 다른 사람들한테 다 물어봤더니 안된다고 그러더래요. '네가 아시아의 1등인데, 아 그럼 못할 게 뭐 있냐. 하면 되지'… -지봉규, 조오련 수영 선배 대한해협을 건너겠다는 계획이야. 그러니까, 일본까지 헤엄 쳐서 가겠다는 거야. 장난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야. 대한해협은, 대한민국과 일본 규슈지방 사이의 바다를 말해. 일본까지의 최단 거리는, 부산 태종대에서 대마도 북단 사오자키 등대까지 약 48km야. 근데, 바다를 헤엄쳐 건너는 건 직선거리와는 달라. 해류를 생각하면 60km 정도로 봐야 해. 60km면 마라톤 풀코스를 한참 넘는 거리야. 시속 3km 정도로 간대도, 20시간을 헤엄쳐야 해. 이게 가능한 일일까? 만약 성공한다면, 대한해협을 건넌 최초의 인류가 되는 거야. 조오련이 도전장을 던진 것도, 그 이유야. 많은 사람들이 만류했지만, 선배 지봉규 씨는 확신했어. 이 사람은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이니까. 지봉규 씨는 대한해협 횡단 감독을 맡기로 해. 실내 수영과 바다 수영은 천지 차이야. 낮은 수온과 조류의 영향을 다 버텨내야 해. 물길을 안내해 줄 선장, 훈련을 함께할 코치와 감독, 도전을 기록할 기자단까지 한 팀이 꾸려졌어. 디데이는 그나마 수온이 오르는 7월에서 8월 사이로 정했어. 남은 시간은 8개월 정도.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엄청난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거야. ▲ 인간 한계에 도전하다 장거리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건 지구력이야. 횡단 팀의 첫 코스는 도보 행군이었어. 서울에서 조오련의 고향, 땅끝 해남까지 걸었어. 이어지는 건, 잠 안 자고 버티기 훈련. 제주도를 무려 22시간 동안 쉬지 않고 돌았어. 이동한 거리만 91km야. 그 사이, 지 감독은 바다 상황을 계속 확인했어. 지역 어부들을 만나 자문을 구하는데, 흔한 일은 아니지만 상어가 나타날 가능성도 있대. 상어가 아니더라도, 여러 해상동물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거야. 며칠 동안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지 감독님은 고기 잡을 때 쓰는 족대를 활용하기로 했어. 커다란 그물 안전망을 제작하는 거야. 배에 그물을 연결해서 끌고 그 안에서 안전하게 헤엄치게 하는 거야. 조오련은 이제, 바다 적응 훈련에 집중해. 장거리 연습부터 캄캄한 밤 수영까지, 실전에 가까운 연습을 이어갔어. 그사이 몸에 큰 변화도 생겼어. 70킬로였던 몸무게가 85킬로까지 분 거야. 대한해협의 수온은 낮아도 한참 낮아. 그런 바다에서 장시간 수영하면, 저체온증으로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대. 그래서 지방을 늘리기로 한 거야. 한 달에 먹는 고기만 무려 100근이었대. 1980년 8월 11일 자정. 8개월을 준비한 도전, 바로 그 날이야. 기상상황을 고려해 한밤중에 출발하는 거야. 바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누구도 알 수 없어. 칠흑같이 어두운 방파제 앞. 하얀 모자와 수영복을 입은 조오련이 나타나자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져. 8월 11일 00시 5분. 사람들의 응원을 뒤로한 채 풍덩! 조오련은 힘차게 물을 가르며 다대포항을 떠났어. 출발은 아주 좋아. 커다란 안전망이 조오련을 감싸고, 조오련은 빠른 속도로 앞으로 나아가. 시속 4km 정도의 속도로 한 시간을 가더니, 그 다음 한 시간은 무려 시속 7km를 넘어섰어. 그런데 그때, 조오련이 신호를 보내. 금세 에너지가 떨어져 배가 고프다는거야. 바다 수영하면서 식사, 어떻게 할 것 같아? 조오련은 바다에 뜬 채 따끈한 깨죽으로 첫 해상 식사를 했어. 그리곤 속이 거북할지 몰라 소화제를 탄 더운 물을 들이켰어. 따뜻한 죽을 먹이려고 배 안에선 종일 죽을 쑤고 있었대.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갑자기 문제가 생겼어. 갑자기 조오련이 괴로워하는 거야. 한두 시간 갔거든. 그랬더니 딱 멈춰달라고 그래요. '왜 그러냐' 그랬더니, '몸이 따가워서 아주 못하겠다'는 거야. 물에 들어가서 보니까, 그냥 해파리가 안전망에 꽉 붙었어요. -지봉규, 대한해협횡단 감독 지 감독이 급히 바다로 뛰어 들었어. 근데 해파리가 많아도 너무 많아. 지 감독은 안전망 밖으로 오련이를 나가게 하고, 안전망을 반대로 돌렸어. 물살을 이용해 해파리를 떼내려고 한 거야. 다행히 해파리떼가 사라졌어. 그 뒤론 평온한 시간이 이어졌어. 컴컴한 망망대해의 물살을 가르는 사람 하나. 어둠 속의 바다, 헤엄쳐 본 적 있어? 조오련은 무섭기보단 환상적이었대. 수면 위로는 저 멀리 오징어잡이 배 불빛이 비추고, 바닷속은 형형의 빛이 가득 해. 플랑크톤이 빛을 받으면서 빛나는 거야. 조오련은 힘든 와중에도, 조명을 꺼달라 요청을 해왔대. 꿈 같은 바다를 즐기려는 거야. 이때 마치 은하수 속을 떠가는 기분이었대. 어느덧 새벽 5시를 넘어섰어. 조오련은 무려 5시간 넘게 쉬지 않고 헤엄을 친 거야. 기진맥진하지. 그리고 같은 걸 무한 반복하니 지치고 지루해. 응원할 방법이 있을까? 조오련 팀은 음악을 준비했어. 넓고 푸른 바다 위로 신나는 음악이 울려 퍼져. 조오련은 음악의 효과인지, 더 힘차게 물살을 갈랐어. 하지만 위기가 또다시 찾아와. 새벽 되기 전에, 오련이가 자꾸 이상한 행동을 하는 거예요. '야 너 왜 그러냐' 하니까, 멀미가 난다는 거예요. 자꾸만 몸이. 물 속 해류에 섞여 있는 것들이 물보라를 이렇게 치면 그게 싹 움직이면서 새파랗게 돼. 그러니까 바깥에 무덤가에 도깨비불 파랗게 떠다니는 것 같이 그렇게 돼. 하다가 보니까 어지러운 거지. -지봉규, 대한해협횡단 감독 오랜 시간 아무런 좌표도 없는 망망대해를 헤엄치고 있잖아. 그러다 보니 어지럽고 환각까지 보인다는 거야. 조오련은 그 와중에도 쉼 없이 팔을 젓고 있어. 이건 그냥,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 상황이지. ▲ 대한해협 횡단, '인류 최초'의 기록 어느덧 출발 12시간 째야. 그때, 지 감독 눈에 저 멀리 뭔가 보여. 저 멀리 어렴풋이 수평선이 펼쳐지더니 대마도 등대가 모습을 드러낸 거야. 예상보다도 엄청나게 빠른 페이스였어. 조오련의 얼굴엔 드디어 미소가 번져. 필사의 힘을 다해 팔을 내 저었어. 어느새 목적지가 1km 앞으로 다가와. 여기서부턴 배가 안전망을 끌고 갈 수 없어. 조류가 엄청 세거든. 이제 오련이 혼자 가야해. 안전망 속을 헤엄치던 조오련은 힘차게 그물을 빠져나왔어. 혼신의 힘을 다해 이를 악물고 양쪽 팔을 저었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리고 마침내, 목적지인 대마도 등대에 도착해. 맨몸으로 수영해서 일본까지 건넌 거야. 조오련은 힘차게 태극기를 흔들었어. 기록은 13시간 16분 10초. 예상했던 기록을 6시간이나 앞당긴 거야. 그만큼 초인적인 힘으로 물살을 갈랐어. 입항 절차를 마치고 부두에 발을 딛자, 엄청난 환호가 쏟아졌어. 소식을 듣고 찾아온 재일 동포들이야. 기진맥진한 조오련을 향해 꽃다발을 막 안겨. 도전 후, 조오련은 이런 말을 했어. 내가 수영을 끊임없이 하는 진짜 이유는, 나를 이기는 힘. 있는 힘을 끝까지 다 써서 마지막에서 뭍으로 나와서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 때 쾌감을 자꾸만 다시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그때 느낀 희열과 쾌감, 엄청났겠지? 조오련은 다시 한번 아시아의 물개란 걸 증명했어. 영화 '친구'에 그런 대사가 나오잖아.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하고 바다 거북이하고 둘이 헤엄치기 시합하면 누가 이길 것 같노?'라는 대사. 그만큼, 조오련이란 이름은 이제 '수영' 하면 떠오르는 고유대명사가 됐어. 그 후 조오련은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오랜 꿈이던 수영 교실도 열었어. 이제 힘들었던 시절은 추억으로 남겨놓고 평온한 삶을 즐기기만 하면 돼. ▲ 다시 바다로, 20년 만의 도전 그런데, 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나봐. 대한해협 횡단에 성공한 지 20년 후. 마흔 아홉의 조오련은 다시 바다에 나타났어. 2000년 방영됐던, SBS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뷰티풀 라이프'의 '대한해협 횡단 프로젝트'를 통해서. 안녕하십니까? 조오련입니다. 제가 1980년도 8월 11일날 대한해협을 횡단했지마는 그 당시에 한 50살이 넘으면 다시 한 번 횡단해봐야겠다, 국민들하고 약속을 했었는데. 계주로서, 훌륭하신 분들과 함께 릴레이로 대한해협을 횡단코자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배우 이훈, 소지섭, 그룹 베이비복스 등이 출연했던, 이 프로젝트 알아? 당시 2002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한국과 일본을 이어줄 초대형 이벤트로 마련됐어. 조오련이 빠질 수 없잖아. 다시 한번 대한해협을 건너기로 한 거야. 근데 여러 사람이 하는 프로젝트라, 어찌 보면 더 험난할 지도 몰라. 저는 그때까지 수영을 못했어요. 그래서 '나는 안 한다'고 했는데, 조오련 선생님이 가능하다는 거예요. 제가 매일 수영 연습을 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아킬레스건염이 오고요. 수영을 한 일주일 쉬었어야 됐고. 그런데 조오련 선생님이 전화 오신 거예요. '너 더 이상 쉬면, 못 건너간다' 진짜로 저를 야단치기도 하고, 독하게 가르쳤죠 진짜. 고생 많이 했어요. -이훈, 연예인 횡단 팀장 횡단팀 팀장이었던 배우 이훈. 수영 실력은 부족했어. 하지만, 조오련은 열정적으로 팀원들을 챙겼어. 차츰 서로에 대한 믿음도 생기고 팀원 모두가 의기투합하기 시작해. 어느새 실력도 많이 발전했어. 마침내 그날이 됐어. 2000년 8월 12일, 대망의 대한해협 횡단 날이야. 횡단팀은 각자 소중한 사람들과 반드시 성공해 돌아오겠다는 인사를 나눴어. 떨리는 그 시작, 횡단 첫 주자는 누구일까? 바로 조오련. 조오련이 바위 위에 홀로 섰어. 스물아홉 나이로 대한해협을 건넜던 조오련이, 마흔 아홉이 되어 다시 출발점에 선 거야.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 포기를 모르는 위대한 여정 시작은 순탄했는데, 예상치 못한 샛바람이 엄청나게 부는 거야. 파도가 높아지면서 안전망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배 안으로도 바닷물이 들이쳐. 기상이 더 나빠지면 위험해. 배가 전복될 수 있어. 결국 철수를 결정했어. 횡단을 시작한 지 벌써 10시간, 반 이상 오긴 했는데 거기까지였어. 안전이 중요하니까. 횡단팀은 다시 의지를 다지면서 2차 도전을 시작했어. 그런데 하늘이 맑은가 싶더니, 시간이 쌓일수록 파도가 높아져. 게다가 해파리 떼의 공격까지 시작됐어. 갖가지 역경을 헤치며, 그래도 바다를 계속 헤엄쳐 갔어. 내가 24년 동안 살면서 제일 길었던 한시간이예요. -배우 소지섭 어느덧 출발한 지 15시간을 넘어섰어. 다들 지칠 대로 지쳤어. 그런데 그때! 대마도다 대마도! 마침내 대마도가 모습을 드러냈어. 20년 만에 맨몸으로 대마도에 다다른 거야. 마지막에 17명이 다 입수했어요. 그래도 대마도 땅을 밟을 때는… 지금 생각해도 짜릿할 정도로 성취감. 짜릿할 정도로 행복했죠. -이훈, 연예인 횡단 팀장 꼬박 18시간 11분을 헤엄친 끝에, 75km 대한해협 횡단에 성공했어. 여정이 마무리되는 순간, 다들 만세를 부르며 얼싸 안았어. 20년 전 조오련이 홀로 싸워온 길을, 이번에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이겨낸거지. 그런데, 조오련의 도전은 끝나지 않았어. 2005년, 일명 '물개가족 독도 횡단' 프로젝트. 두 아들과 함께 울릉도에서 독도까지 120km를 헤엄쳤어. 독도가 우리 땅인 걸 알리려고. 또 3년 후엔, 민족대표 33인을 기리는, 독도를 33바퀴 도는 도전을 했어. 7월 1일 도전을 시작해서 31일, 마지막 33바퀴를 도는 데 성공했어. 그때 그의 나이, 56세였어. 조오련은 왜, 이런 도전을 계속 했을까. 주변에서 그를 본 사람들은, 조오련은 새로운 도전을 통해 국민들에게 계속 희망을 전하려 하는 거 같았대. 그에게 도전은, 삶의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2010년, 환갑을 앞둔 나이. 조오련은 고향 해남으로 돌아와서 마지막 도전을 선언했어. 30년 만에 대한해협을 다시 건너겠단 거야. 이번엔 혼자서. 조오련의 각오는 남달랐어. 한 기자가 물었어. 내일모레면 환갑을 바라보는데 힘들지 않으십니까 라고. 그러자 이렇게 대답했어. 힘든 게 걱정이겠소.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온몸을 내 던져야제. 그 어느 때보다 들뜬 모습이었어. 그런데, 그렇게 한창 바다로 갈 준비를 하던 어느 날, 조오련은 쓰러진 채로 발견돼. 심장마비였어. 그리고 그길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버렸어. 너무도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된 거야. 국민들은 물론이고 동료들에게도 엄청난 충격이었어. 자기는 운동선수가 직업이니까 그것밖에 없다. 최선을 다해서 죽을 때까지 그걸 해야 된다, 그걸 딱 머릿속에 갖고 있었던 사람이에요. 다른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잖아요. 수영장도 했었고. 근데 자기는 그 수영장, 편한 것이 안 맞은 거예요. 자기는 도전을 해야 돼… 저희 형님 곁에 가서 다시 한번 수영하며 사는 그런 세상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형님, 보고싶네요. -이관웅, 조오련 수영 후배 바다를 사랑한 만큼, 바다가 저한테 사랑을 주더라고요. 언제가 제일 좋냐 그러면, 전 배는 좀 나왔지만 수영복 입을 때가 제일 행복합니다. -조오련 생전 인터뷰 中 얻은 명성만으로 편안한 삶을 살 수도 있었는데, 조오련은 도전을 멈추지 않았어. 2020년, 조오련은 대한민국 스포츠 영웅으로 선정됐고, 체육인 중 6번째로 국립 현충원에 안장됐어. 조오련의 오랜 벗, 서울에 상경했을 때 방까지 내줬던 박석기 감독이 이런 이야기를 전해왔어. 저는 학교라는 울타리 속에서 성장을 했어요. 하지만 오련이는 일단 시작 자체가 도전이잖아요. 서울에 올라온 것 자체가 도전일 테고. 잠시도 그 친구는 긴장을 풀지 못했을 거예요. 처음부터 집념과 야망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라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면서 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오련이 덕에 저도 마음속으로 경주를 하면서 더 성장한 것 같습니다. 참 부러우면서도 응원하지 않을 수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이 서글펐어요. -박석기, 조오련 친구 양정고에 있는 조오련 기념비엔 조오련이 했던 말이 적혀 있어. '무모해 보일지 모르지만 시작하는 순간 도전이 된다'라고. 그에게 도전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