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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마이 보이즈' 파이널 진출 13인, 생애 첫 팬미팅서 에너지 충전 완료
등록일2025.08.25
'비 마이 보이즈' 파이널리스트 13인이 팬들과 특별한 시간을 보냈다. SBS 초대형 글로벌 보이그룹 오디션 프로그램 'B:MY BOYZ'(이하 '비 마이 보이즈')의 파이널 진출 B:GINNER(비기너)들은 지난 24일 서울 마포구 모처에서 미니 팬미팅 'MEET YOUR BOYZ(밋 유어 보이즈)'를 진행했다. 지난 23일 방송된 '비 마이 보이즈' 10회를 통해 효, 문재일, 김보현, 강준성, 카이, 이연태, 양현빈, 박세찬, 하루토, 서준혁, 이윤성, 반다니엘, 아이가 최종 파이널 생방송 진출자로 밝혀졌다. SBS 이인권 아나운서의 진행으로 시작된 'MEET YOUR BOYZ'는 B:GINNER들의 생애 첫 팬미팅이자 B:GINNER들이 팬들과 처음 직접적인 가까운 만남에 나선 자리로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B:GINNER들은 직접 팬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은 물론, 궁금한 질문에 대답하는 Q&&A, 팬들과 가까이에서 배웅하는 하이터치를 성공적으로 진행했다. 특히 서준혁, 박세찬, 강준성은 'Get A Guitar(겟 어 기타)', 효, 반다니엘, 이연태, 이윤성은 'Love Killa(러브 킬라)', 문재일, 카이, 양현빈, 김보현, 하루토, 아이는 'Shoot Out(슛 아웃)' 무대로 방송의 감동을 재현해 큰 환호를 얻었다. 파이널 직전, 팬미팅으로 에너지를 충전한 B:GINNER들이 '비 마이 보이즈' 마지막 생방송에서 어떤 무대를 선보일지 기대가 높아진다. 파이널 라운드 경연은 마스터 후이가 프로듀싱한 신곡 'KNOCKIN' ON HEAVEN(낙킹 온 헤븐)'과 '비스듬히'로 진행된다. 최종 데뷔조 8명이 가려질 '비 마이 보이즈' 최종회는 오는 30일 생방송으로 펼쳐진다. 사전 투표는 29일 오후 6시까지 SBS 공식 홈페이지와 마이원픽, 마이스타에서 진행되고 있다. 강선애 기자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
[꼬꼬무 찐리뷰] 53년 전에도 '비상계엄' 있었다…박정희 유신시대와 긴급조치의 진실
등록일2025.03.14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13일 방송된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방송인 홍석천, 배우 박효주, 아나운서 이인권이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서울 한복판에 나타난 탱크 때는 53년 전 서울, 평범한 가을날 저녁이야. 직장인들은 퇴근을 서두르고, 동네 곳곳에선 저녁을 준비하는 음식냄새가 솔솔 풍기고 있어. 그런데 그때 갑자기, 탱크를 몰고 중무장한 군인들이 서울 도심 한복판에 나타났어. 당시 태평로에 있던 국회의사당, 그리고 광화문 근처 중앙청에 서 있는 탱크의 모습이야. 시간은 저녁 7시, TV와 라디오를 통해 깜짝 놀랄만한 소식이 전해져. 박정희 대통령 각하는 10월 17일 오후 7시를 기해 비상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1972년 10월 17일 19시를 기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현행 헌법의 일부 조항 효력을 정지시킨다. 이와 같은 비상조치를 국민 앞에 선포한 박 대통령 각하는 우리 모두 일치단결하여 민주제도의 건전한 발전과 조국 통일의 기원이 성취되는 그날까지 힘차게 전진해 나갈 것을 촉구했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이 선포된 거야. 비상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있을 때 선포할 수 있어. 보통 이제 한국에서 비상계엄은 어떤 굉장히 큰 사회 혼란기나 아니면 6.25 전쟁과 같은 정말 전시에 주로 선포가 됐어요. 그런데 이 1972년 10월 17일에 선포된 비상계엄은 사실은 굉장히 평온한 때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때에 선포가 됐고.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혼란이라든지 어떤 위기라든지 뭐 전시라든지 이런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던 시기인데 느닷없이, 그야말로 느닷없이 비상계엄이 선포가 되었던 거죠. -오제연,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이렇게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앞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해줄게. ▲비상계엄과 특별선언 박정희 대통령은 비상계엄과 함께 '10.17 특별 선언'을 발표했어. 그 내용은 이래. 1972년 10월 17일 19시를 기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현행헌법의 일부 조항 효력을 정지시킨다. 일부효력이 정지된 헌법조항의 기능은 현행헌법의 국무회의가 수행한다. 비상국무회의는 1972년 10월 27일까지 조국의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헌법개정안을 공고하며 이를 공고한 날로부터 1개월 이내에 국민투표에 부쳐 확정시킨다. 헌법개정안이 확정되면 개정된 헌법절차에 따라 늦어도 금년 연말 이전에 헌정질서를 정상화시킨다. 헌법도 바꾸고, 국회를 해산하겠다는 거야. 아까 사진 봤지? 국회의사당 정문을 딱 가로막고 있는 탱크. '국회 해산'이란 게 가능한 걸까? 당시에도 대통령에게 국회해산권은 없었대. 그때도 사실은 헌법에 의하면 할 수가 없는 거였고, 지금도 역시 뭐 헌법에 의하면 국회 해산권을 갖고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할 수가 없는 거죠.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국회해산권이 없는 대통령이 국회를 그냥 임의로 해산시켜버린 거죠. 군인들이 쫙 깔린 상태에서 뭐 그런 상태에서는 사실 기존 헌법에 어떤 조항이나 범위나 이런 것들에 구애받지 않고, 대통령이 임의로 자신의 권력을 행사할 수가 있었던 거죠. -오제연,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그때도 국회는 계엄 해제를 요구할 수 있었어. 그런데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초법적 조치로 국회를 해산시켜버린 거야. 그래서 해제할 수 없었어. 설사 국회가 해산되지 않았어도, 당시 국회엔 박정희 대통령이 소속되어 있는 여당 의원이 더 많았어. 그러니 야당만으로는 계엄 해제 요구가 어려운 상황이지. 아무리 그래도, 반발이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주요 정치인들이 가택 연금을 당해. 대문 앞을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거야. 게다가, 느닷없이 끌려온 사람들이 옷이 벗겨진 채 사정없이 구타를 당해. 몽둥이질에 잠도 재우지 않고 물고문까지 이어져. 이렇게 고문을 당한 사람들은, 국회의원들이야. 이런 국회의원들에겐 공통점이 하나 있었어. 바로 '블랙리스트'. 비상계엄 한 달 전, 야당 의원들의 이름이 있는 블랙리스트 명단이 만들어졌다고 해.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블랙리스트에 적힌 사람 가운데 13명의 야당 의원들을 보안사에서 끌고 갔다는 거야. 이런 일들은 비상계엄 선포 후, 바로바로 진행됐어. 이렇게 국회도 해산하고, 헌법도 바꾸겠다고 해. 여기서 끝이 아니야. 얼마 뒤에 대통령 선거도 해. 불과 1년 전, 7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거든. 근데 임기 1년 만에 또 대통령 선거를 하는 거야. 왜 그랬을까? ▲ 1년 만에 다시 한 대통령 선거 3년 전인 1969년, 박정희 정권은 헌법을 개정했어. '3선 개헌'이라고 들어봤어? 헌법 제 69조 3항 '대통령의 계속 재임은 3기에 한한다'. 대통령을 3번까지 할 수 있다는 거야. 원래는 두 번까지만 할 수 있었거든. 이렇게 5대 6대 대통령을 역임한 박정희 대통령은 이 헌법 개정으로 3선에 도전하게 돼. 그리고 3선 개헌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하며 등장한 대선 라이벌이 있어. 바로 47살의 젊은 정치인, 김대중 후보. 두 후보의 경쟁은 엄청났어. 여러분 이번에 정권교체를 하지 못하면 이 나라는 박정희 씨의 영구 집권의 총통 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박정희 씨는 '3선 개헌은 절대로 안 한다', '나보고 3선 개헌한다는 것은 야당 놈들의 모략이다' 이렇게 말했어요. 그러더니 2년이 못 가서 재작년에 절대로 안 한단 3선 개헌을 정반대로 절대로 해 버렸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헌법을 고칠 때는 앞으로 이 나라에서 누구든 자기 한 사람의 영구집권을 위해서 헌법을 이리 고치고 저리 고치고 하는 일은 영원히 못 하도록 분명히 하는 것을 여러분에게 내가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김대중 후보의 유세 연설 中 유권자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에게 분명히 말씀드리거니와, '나를 대통령으로 한번 더 뽑아 주십시오' 하는 이런 정치 연설은 오늘 이 기회가 마지막 연설이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말씀드립니다. 지난 5대, 6대 대통령 선거에 있어서 유권자 여러분들은 이 사람을 대통령으로 두 번 뽑아 주셨습니다. 이번만 여러분들이 한번 더 이 사람을 지지를 해주시면, 일할 수 있는 그런 뒷받침을 해 주시면, 앞으로 4년 동안 여러분들을 위해서 있는 정력을 다 해서, 한번 멋있는 수도 서울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정희 후보의 유세 연설 中 그럼, 선거 결과 어땠을까? 결과는, 박정희의 승리였어. 53.2% 대 45.3%의 차이야. 서울에서는 김대중 후보가 앞서기도 했어. 그리고 한달 후, 박정희 대통령의 여당인 민주공화당이 113석, 야당인 신민당이 89석을 차지하면서, 그전에 비해 야당의 의석수가 늘어났어. 김종필 증언록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해. 그 다음엔 김대중이 될지도 몰라. 그러니 내가 좀 특수한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 그 '특수한 것'이 뭘까? 박정희 대통령 취임 1년 뒤인 1972년 5월. '풍년사업'이란 이름의 은밀한 작업이 진행돼. 이름만 보면 농업 관련 사업 같지 않아? 근데, 그 작업이 진행된 장소는 바로 여기야. 일명 '궁정동 안가'라 불리는 곳이야. '안가'는 안전가옥, 이곳은 대통령의 안전가옥이야. 아주 비밀스러운 곳이지. 여기서 뭘 했냐. 대만 총통제, 스페인 총통제, 프랑스 드골 헌법 등 해외사례를 연구하고 있어. 왜 이런 사례들을 연구할까? 대만의 총통이었던 장제스, 스페인 총통 프랑코, 두 사람 모두 본인들이 죽으면서 그 임기가 끝나. 종신 집권을 했다는 거야. 그렇게 은밀하게 진행된 풍년사업의 결과는, 다섯 달 뒤인 1972년 10월 세상에 공개됐어. '유신헌법'이라는 이름으로. ▲ 유신헌법 10월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헌법을 개정하고. 이게 바로 '10월 유신'이야. 유신, 사전적 의미는, 낡은 제도를 고쳐 새롭게 한다는 거야. 유신헌법에는 대통령이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카드들이 있었어. 먼저 '집권' 카드. 대통령 집권에 대한 강력한 변화가 생겨.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지 않는다는 얘기야. 그럼, 누가 뽑냐? 통일주체국민회의, 일명 '통대'라고 하는 기관에서 대통령을 선출하겠다는 거야. 그런데, 이 '통대'의 의장이 누굴까? 대통령 본인이야. 대통령이 의장인 기관에서 대통령을 뽑겠다는 거지. 대통령 임기도 4년에서 6년으로 늘어나. 그리고 대통령 중임 제한 폐지. 사실상 영구집권이 가능해진 거야. 두번째는 '밸런스' 카드. 권력의 밸런스를 파괴하는 카드야. 대통령에게 '국회 해산권'이 생겼어. 10.17 비상계엄 때는 국회 해산권이 없었다고 했잖아? 그걸 만든 거야. 이제 대통령이 입법권을 가진 국회를 해산할 수 있어. 그리고 국회의원 3분의 1을 대통령이 추천하고 이를 '통대'에서 선출하겠대. 게다가 대통령이 사실상 사법부의 모든 법관을 임명할 수 있게 됐어.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이 입법부에 사법부까지 손아귀에 쥐는 거야. 3권분립의 파괴야. 마지막 카드는 아주 강력한 힘이야. 바로 '긴급조치'야. 유신헌법 제53조 1항을 보면, '국정 전반에 걸쳐 필요한 긴급조치를 할 수 있다'는 거야. 필요한 조치라는 게, 어디까지 가능한 걸까? 무서운 거는 헌법에 규정돼 있는 국민의 기본권의 효력을 정지시킬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부여했죠. 조치에 대해서는 사법 심사를 할 수가 없도록 해놨어요. 그것이 헌법에 위반되었는지 이런 것 자체를 심사할 수 없도록, 헌법에 아예 명시해 놨어요. 긴급조치 위반했다고 그래서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이 긴급 조치는 위헌이다', '불법이다', 아무리 주장해 봤자 먹혀들 수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법원이 심사 자체를 못 했기 때문에… -정태호,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대통령의 판단에 따라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정지하고 처벌할 수 있다는 거야.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열흘 만에 공표된 이 유신헌법 개정안은 한달 뒤 국민투표에 부쳐져. 당시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 결과, 찬성률은 91.5%가 나와.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먼저, 유신이 내세운 명분 중 하나는 '평화통일'이었어. 유신 3개월 전,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돼. 분단 이후 남북이 처음으로 평화통일 원칙에 합의한 거야. 국민들의 통일에 대한 열망도 아주 높아졌어. 한마디로 '평화통일을 하려면 법과 체제를 바꿔야 한다', '10월 유신으로 한국적 민주주의를 이룩하자' 이런 명분으로 유신을 홍보한 거야. 유신헌법의 가장 큰 하나의 명분이 되는 것은 당시에 남북 관계가 획기적으로 변했다는 거죠. 그 이전에 남북의 어떤 대결, 특히 68년을 전후로 해서는 한반도의 안보 위기라고 부를 정도의 정말 곧 전쟁이 터질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었거든요. 그런데 이런 것들이 한순간에 갑자기 변해서 지금 남북이 대화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러한 대화 국면에서 어쨌든 우리가 북한과 제대로 대화를 하려면 체제를 바꿔야 된다, 이게 이제 가장 큰 명분이 되는 것이고. 그때 체제를 바꿀 때는 우리가 평화 통일을 지향하는 그런 헌법을 가져야 된다라고 하는 것이 이제 또 하나의 명분이 되는 거죠. -오제연,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실제로 박정희 대통령이 한 얘기가 있어. 만일 국민 여러분이 헌법 개정에 찬성치 않는다면 나는 이것을 남북 대화를 원치 않는다는 국민의 의사 표시로 받아들이고 조국 통일에 대한 새로운 방안을 모색할 것임을 아울러 밝혀두는 바입니다. -박정희, 10.17 대통령 특별선언 中 이런 선언과 함께, 유신 찬성을 위한 본격적인 홍보도 시작했어. 10월 유신, 100억 불 수출, 1,000불 소득 쭉 뻗은 도로, 기계화된 농촌, TV, 자동차까지... 잘 살려면 유신이 필요하다고 홍보하는 거야. 이것도 한 번 봐봐. 반대하면 파멸, 찬성하면 번영이래. 유신을 찬성해야 잘 살 수 있다는 거야. 그리고 효과적인 홍보 수단, 미디어도 활용했어. 이 시기에 모든 신문과 방송은 검열을 거쳐야만 했대. 혹여나 유신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가 나가면 안되니까. 문공부에서 주는 보도 자료를 한 자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써야 되니까.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적절한 법률이다', 그런 식으로 다 신문이 받아 썼었죠. '유신만이 살 길이다' 그런 구호를 신문에 꼭 넣고. 그 다음에 칼럼을 쓸 필자들 풀로 넘겨줘요, 우리 신문사에. 그래서 '이 중에 골라서 해라'. 그런 사람 외에는 쓰지 못하게 했어요. 완전히 언론 탄압을 무지막지하게 했죠 그 당시에는. 유명한 얘기가 있는데 광고 이론에 나오는데 '반복은 진실을 만든다'는 말이 있어요. 계속 반복하면 그렇게 세뇌되는 거예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요. -김동현, 당시 동아일보 기자 비상계엄이 선포된 1972년 10월 17일부터 유신 찬반 국민 투표일인 11월 21일까지, 유신 관련 좌담 방송이 398회, 유신지지 단독 해설이 218회, 유신 비전 제시 특별 프로그램이 58회 방송됐어. 이 정도면, 국민 투표에서 찬성률이 그렇게 높았던 이유가 좀 이해가 가지? 계엄 포고령에 따라 모든 집회, 시위는 금지됐어. 대학가는 계엄군이 지키고 있어. 유신을 반대하는 목소리는 들리기가 어려운 상황이야. 그렇게 비상계엄 체제 하에 유신헌법 국민 투표는 '찬성'이란 결과를 낳았어. 투표한 사람 중에서 90% 이상이 지지를 보냈으니까 '야 이건 정말 국민들이 모두 원했던 것이 아니냐' 얘기할 수도 있겠죠. 근데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역시 고려할 필요가 있겠어요. 일단 계엄령 아래에서 국민투표가 이루어졌다는 거예요. 한마디로 군대를 깔아놓고, 즉 바로 옆에 탱크, 장갑차, 무장한 군인들이 즐비한 상황에서 투표가 이루어졌다는 거죠. 두 번째가 여러 가지로 유신을 지지하고 찬양하는 목소리만이 허용됐던 그런 시절에, 정말 사람들은 그 얘기를 들을 수밖에 없고, 그 얘기 외에는 어떠한 판단의 근거도 마련돼 있지 않은 그런 상황에서는, 정부가 유도하는 대로 선거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숫자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것은 문제가 됩니다. -오제연,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그제서야 비상계엄도 해제됐어. 그렇게 유신 시대가 시작된 거야. ▲ 유신 시대의 시작과 반발 그리고 대통령 선거를 치른지 1년 만에, 8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져. 들어봤을 거야, '체육관 선거'.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대통령 선거가 이루어졌어. 당연히 유신헌법에 따라 국민은 투표를 할 수가 없어. 통일주체국민회의, 일명 '통대'의 대의원들이 대통령을 뽑아. 후보는 단 한 명, 박정희. 결과는? 찬성 2,357표, 반대표는 없어. 무효표만 2개야. 그래서 찬성률이 99.9%야. 앞에 나온 7대 대선 때 박정희 후보의 선거유세 기억나? '나를 한번 더 뽑아 주십시오' 하는 정치 연설은 오늘 이 기회가 마지막이라는 것을 확실히 말씀드립니다 라고 했던 거. 결과적으로 이 약속은 지켜졌어. 국민 앞에서 더 이상 지지를 호소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이때부터 1987년까지 무려 16년간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 직접선거가 이뤄지지 않았어. 그 문제점을 누구라도 조금만 들여다보면 알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오래갈 수가 없었던 거죠. 유신헌법에 대한 반대 투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거였죠. -정태호,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여기저기서 반발이 튀어나오기 시작해. 박정희의 라이벌, 김대중. 그가 일본에서 한 연설이 있거든. 한 번 들어봐. 요새 하고 있는 10월 유신이라는 거는 세상에 말도 안돼. 유신이 뭐야, 유신이. 일본 사람들이 100년 전에 써먹은 소리 아니요? 여러분, 다 기억하실 거예요. 재작년 선거 때 만일 이번에 박정희 정권의 종식을 짓지 못하면 이제 우리에게는 선거조차 없는 영구 집권의 총통제 시대가 온다고. 내가 몇 천 번 말했어요. 상당수 사람들이 '그래도 설마?' 그랬어. 그 설마가 사람 잡아요. 그렇게 됐어. 10월 18일 날 저는 박정희 씨의 조치를 정면으로 부인하고,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성명의 서두에 '박정희 씨의 이번 조치는 통일을 빙자해서 자기 자신의 영구집권을 획책하는 것이다' 이렇게 성명을 했습니다. -김대중 일본 하코네 연설 中 유신 발표 직후부터 김대중은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유신 반대 목소리를 냈어. 그러던 1973년 8월 8일 일본 도쿄의 한 호텔. 김대중은 호텔 스위트룸에서 약속을 마치고 막 방을 나서는 중이었어. 그 순간 웬 남자들이 나타나 김대중의 목을 낚아채고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고는 끌고 가. 중앙정보부가 김대중을 납치한 거야. 이 김대중 납치 사건은 국내외적으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게 돼. 반유신 운동에 불을 붙인 거야. 반유신 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움직인 사람들은, 대학생들이었어. 여러 학교에서 시국선언문을 발표하며 대학생들이 유신체제와의 투쟁을 선언했어. ▲ 긴급 조치의 시대 이 상황을 유신정권은 어떻게 했을까? 유신헌법에 아주 강력한 제재가 있었잖아. 바로 '긴급조치'. 1974년 1월 8일, 박정희 대통령은 긴급조치 1, 2호를 선포해. 1월 8일 박정희 대통령은 헌법 제53조에 의한 대통령 긴급 조치를 선포하여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고,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고 밝혔습니다. 이 조치에 위반하거나 비방한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며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하기로 했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유신헌법에 대해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어. 반대는 물론, 비방도 하면 안돼. 또 유언비어도 금지야. 위반하면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고, 징역이 무려 15년까지 가능해. 그리고 긴급 조치 2호는, 비상군법회의 설치에 대한 내용이야. 실제로 긴급조치 위반으로 학생들은 비상보통군법회의에 세워졌어. 긴급조치의 주된 내용들은 유신 체제를 보호하기 위한 그런 거였죠. '유신헌법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마라' '좋다 나쁘다 평가도 하지 마라' '유신헌법이 나쁘니까 개헌을 하자' 뭐 이런 얘기도 하지 마라. 그러니까 이게 민주주의의 근본 원리, 특히 국민주권 원리를 정면으로 부정한 거거든요. -정태호,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곧이어 발표된 긴급조치 3호에는 국민생활안정을 위한 조치들이 나열돼 있어. 불안해진 민심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을까? 그럼에도 여론은 심상치 않았어. 결국 박정희 대통령은 직접 나서 이야기해. 이런 판국에 전 국민이 혼연일체가 돼서 한 덩어리가 돼도 지금 이러한 난관을 뚫고 나아가기가 힘이 들고 힘이 부족한 판인데. 작년 연말부터 국내 일각에서는 일부 인사들 중에 현 체제에 대해서 정면으로 도전을 해오는가 하면 민심을 자꾸 선동을 하고 사회 혼란만을 조장하기 때문에, 그동안 수차 설득도 해보고 경고도 해 보았습니다만 설득이나 경고만 가지고는 이 사람들의 행동이 중지할 그런 뜻이 전혀 없다는 것을 판단을 해서 만부득이 대통령의 긴급조치를 발동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번에 긴급 조치가 선포된 그 배경, 이유라고 그럴까. 목적, 취지 이런 것을 여러분들이 잘 이해를 해 주시고, 적극적으로 협조를 해주십사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적극적으로 협조를 해 주시면 이 조치는 곧 필요 없게 될 것입니다. -박정희, 1974년 1월 연두 기자회견 중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은 긴급조치에 대한 영화도 만들었어. 영화 속 어머니 역할이 아주 온화한 말투로 정부의 긴급조치에 대한 입장을 줄줄 설명하곤 했어. 하지만, 유신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가. 긴급조치로 억압 받은 학생들은 더 많은 학생들과 연대를 해. 4월 3일, 대학가에서 시위를 준비한 거야. 그런데, 이를 사전에 파악한 유신정권은 대대적인 검거에 나서. 그리고 4월 3일 밤, 긴급조치 4호가 선포돼. 그 내용은 이래.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과 이에 관련되는 단체를 조직 또는 가입하거나, 활동에 동조하거나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이를 위반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긴급조치로 최대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어. 어떻게 학생들의 시위에 사형까지 언급됐을까? 여기에서 언급된 단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줄여서 '민청학련'이라 불러. 긴급조치 4호가 선포된 이유는, 바로 이거였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의 수사 상황을 발표했습니다. 과거 공산 불법단체인 인민혁명당과 제1 조총련, 국내 좌파 혁신계 기독교 학생단체, 그리고 일본 공산당원까지 포함된 약 20명의 배후 조종자가 스며들어 자금을 대는 등 학생들을 뒤에서 조종한 것이 드러났습니다. 4월 3일을 기해 폭동을 일으켜서 정부 주요기관을 점거하고 정권을 인수하려 했으며, 인혁당은 대한민국을 폭력으로 전복하고 공산정권을 수립할 목적으로 북한 괴뢰 지령에 따라 조직되고 활동한 반국가단체라고 밝혔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학생들이 북한의 조종을 받고 있고, 공산계 불법단체가 배후에 있다는 거야. 나라를 전복할 목적이래. 그런데, 이건 조작으로 밝혀졌어.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학생들의 시위를 배후세력까지 조작해서 국가전복 시도라는 시나리오를 쓴 거야. 그렇게 민청학련 사건으로 조사받은 사람만, 천 명이 넘어. 대부분 대학생들이었어. 그중 7명에게 사형이 구형됐고, 무기징역 7명, 징역 20년형이 12명이나 됐어. 이 사건의 변론을 맡았던 강신옥 변호사는 법정에서 이렇게 얘기를 했어. 법은 정치와 권력의 시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랏일을 걱정하는 애국 학생들을 빨갱이로 몰아 사형이니, 무기니 하는 형을 구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법을 악용하는 '사법 살인'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강 변호사가 이렇게 변론을 이어가는 도중, 갑자기 휴정이 선포되고 강 변호사는 연행됐어. 그날 밤, 남산 중정으로 연행된 강 변호사는 잔혹한 구타를 당했대. 그리고 결국 구속됐어. 그의 죄목은, '긴급조치 위반'이었어. ▲ 언론 통제와 저항 이런 사태들이 벌어지고 있지만 언론에선 제대로 보도하지 못했어. 학생들의 시위, 개헌운동 등은 기사가 빠지거나 최소화돼. 고문, 수사, 재판에 대한 문제점에도 침묵했어. 당시 언론사에는 기자도 아닌데 매일 출근 도장을 찍는 사람이 있다고 해. 기관원이라고, 중앙정보부에서 나온 사람이야. 기사를 빼고, 용어를 바꾸고. 중앙정보부에서 각 언론사별로 담당직원을 배치해 통제를 하는 거야. 유신 시기에 들어서서는 신문에 무슨 기사를 내지 말라, 내지 말라는 게 딱 아주 한정돼 있는데. '학생들 데모 기사는 절대로 내지 마라'. '저항하는 움직임에 대해서 아주 손끝 하나도 보도하지 말라' 이렇게 되는 거죠. -김학천, 당시 동아방송 PD 그 당시는 그 모든 걸 전부 통제하고, 누가 자살했다든지 뭐 어제 굶는다든지 어렵다든지 이런 건 기사 못 나가게 돼 있어요. 전부 다 밝은 기사만 쓰라 그러고. -김동현, 당시 동아일보 기자 보도할 때 쓰는 단어에도 제재가 있었어. 예를 들어 '물가 인상'은 '물가 현실화'. '세금 인상'은 '세제 개혁'. 묘하게 뉘앙스를 바꾼 거야. 이런 상황에 언론인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 당시에 데모하는 현장에 가면, 서울대학교에 가면 그쪽에서 써 놨어요. '개와 기자는 출입금지' 써놨어요. '기사 나가지도 않는데 왜 오는데, 올 필요 없다'고 해가지고. 그렇게 모욕을 받았어요. 그러니까 얼마나 괴로웠겠어요. 그때 보면서 '부끄럽다'는 걸 느꼈어요. 기자가 참 부끄럽다. 그걸 제대로 해서 국민에게 알려줄 의무가 있는데. '그런 걸 못하면서 말이야. 기자라고 언론이라고' 이거는 너무 창피했어요. 그때 우리들이 울었어요, 사실은… -김동현, 당시 동아일보 기자 이런 상황이 되자 언론도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 이 사진을 한번 볼래. 사진 속 족자에 적힌 글자는 '자유언론 실천선언'. 마지막 사진에 서 있는 분은 인터뷰를 해 주신 김학천 PD야. 그렇게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은 투쟁에 나섰어. 신문방송잡지에 대한 어떠한 외부 간섭도 배제한다 , 기관원의 출입을 거부한다 , 언론인의 불법 연행을 거부한다 라고 외쳤어. 그 후 매일매일이 치열한 싸움이야. 회사 건물 현관에 '기관원 출입 금지'라고 써 붙이고, 학생 시위에 대한 기사를 늘렸어. 그리고 라디오 방송에서는 비판적이고 풍자적인 멘트도 넣었어. 권력이란 무엇입니까. 한 번 잡으면 그렇게 놓기 싫은 겁니까? 라며 비판했어. 그리고 얼마 뒤, 아주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해. 저희는 동아일보에서 광고를 그만해야 할 것 같은데요. 이번 달 광고 예산이 아직 안 나와서. 광고를 더 못할 것 같은데... 무려 90% 정도의 광고가 해약돼. 그리고 12월 26일 동아일보 신문은 이렇게 발행돼. 아예 백지광고로 나간 거야. 무더기로 광고가 빠진 자리를, 그대로 보여준 거지. 그런데, 그 후로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 이건 다른 날 발행된 동아일보야. 빼곡히 채워진 광고의 정체. 격려 광고가 들어오기 시작한 거야. 대학생, 주부, 어린이, 해외 동포까지. 자발적으로 정성을 모아준 거야. '취학하는 석아, 그른 것은 절대 배우지 마라' ?아빠, 엄마 '양심에 호소하여 우리보다 참하게 살았으면 싶다'-어느 여자 직장인 '운전자와 손님이 합심하여 동아일보의 발전을 빌며'-택시 운전사와 손님 '데이트 자금으로 작은 지면을 삽니다'-순과 선 '이 나라에서 법을 공부하는 안타까운 이 마음과…' ?서울대 동창 남매 마침 그것도 이제 시민들이 성금 내듯이 그런 식으로 했으니까. 고무적이었죠. 우리를 후원하는 이런 사람들이 있구나, 우리 우군이 있구나, 우리가 외롭지 않다. 그런 걸 느꼈어요. -김동현, 당시 동아일보 기자 시민들의 격려 광고로 힘을 얻으며 저항을 이어오던 어느날, 김학천 PD는 아주 특별한 방송을 준비해. 주제는 바로, '감옥으로 보내는 편지'였어. 당시 긴급조치 위반으로 수감 중인 사람들의 가족들이 직접 쓴 편지를 방송하기로 한 거야. 방송이 시작되고, 수감 중인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어린 아들이 직접 읽어. 아버지! 난 아버지가 죄가 있어서 거기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요. 그래서... 편지는 이제 시작인데, 그 후는 꺽~꺽~ 우는 소리만 이어져. 그 다음은 자식을 감옥에 보낸 어머니의 편지였어. 아들아, 엄마가 엊그제 면회를 갔는데 면회를 시켜주지 않더구나. 내복 여러 벌 가지고 갔는데 전해주지 못했구나. 다른 재소자들이라도 입으라고 전부 두고 왔단다. 엄마는... 어머니도 더 이상 편지를 읽지 못하셔. 사무치는 울음소리만 전파를 타고 퍼져나가. 상당히 파국까지 왔다라는 생각이고, 꺾일 때 어떻게 꺾일 것인가. 어쨌든 난 아침 시간 15분, 내가 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때 뭐 감옥에 많이 들어가 있었지. 그 감옥에 아이들 또는 부모를 둔 사람들이 5분 동안 원고지 한 6~7장을 써서 읽으라고 했는데. 첫 번째 문장만 그냥 읽다가 그 다음에 다 우는 걸로 끝을 냈어요. '김학천 씨, 이거 여기서 끊을까요? 그냥 훌쩍훌쩍 울기만 하는데' 묻길래, '그냥 둬라. 그것도 메시지 아니냐'.. 한 1~2분 얘기하고 2~3분 우는 프로그램이 나갔어요. -김학천, 당시 동아방송 PD ▲ 분노한 대학생들 1972년에 유신이 시작되고 유신에 대한 저항과 이를 막으려는 조치들이 반복됐어. 긴급조치 5호와 6호는 앞서 선포된 조치들을 해제하려는 조치야. 긴급조치 해제를 위해 또 다른 긴급조치를 선포한 거야. 그리고 7호는, 고려대학교 한 학교를 휴교시키기 위해 선포됐어. 시위를 막으려고. 그리고 1975년 4월 8일. 또 한번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져. 긴급조치 4호 기억나지? 대학생들이 북한 세력의 조종을 받아 국가를 전복할 목적이라며 사형을 구형했던 거. 이날은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 세력으로 지목됐던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들의 최종 판결이 내려지는 날이야. 그리고 8명의 관련자들에게 최종적으로 사형이 선고됐어. 다음날, 사형 선고를 받은 이들의 가족들이 아침 일찍 구치소로 향했어. 구속 이후 1년 가까이 만나지 못해서, 형이 확정됐으니 면회라도 가능하겠지 싶어 만나러 간거야. 그날 찍힌 사진이 있어. 통곡하는 가족들. 이미 사형이 집행된 거야. 대법원 판결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 됐어. 이날은 사법 사상 암흑의 날로 기록돼. 훗날, 이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 사람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어. 이틀 뒤 서울대 백양나무 옆 잔디밭에 3백 명 가량의 학생들이 모였어. 그리고, 한 청년이 이들 앞으로 걸어 나와. 청년의 이름은 김상진이야. 서울대학교에 재학중이었던 상진이는 친구들과 함께 유신 반대 단식 집회를 준비하고 있었어. 김상진 학생에 대해 들어볼게. 우리 상진이가 착하고 진짜 속 썩이는 거 없었어요. 아버지 어머니 말을 잘 들었지. -김상운, 김상진 형 조용했습니다. 얌전하다고 할까요. 차분한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저하고 서울대학교 같은 과를 입학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유신헌법의 그 문제점들이 사회적으로 자꾸 농축돼 갔던 거죠. 75년도부터가 거의 폭발의 단계에 왔습니다. 그 폭발의 불쏘시개를 한 게 제2차 인혁당 사건입니다. 그 사건이 발생해서 8명이 사형 집행이 된 적이 있죠. 상진이가 매우매우 분노했습니다. -이호선, 김상진 친구 상진이는 학생들 앞에 서서 준비해 온 글을 읽기 시작해. 글의 제목은 '양심선언문'이야. 당시 상진이의 목소리를 녹음한 기록이 있어. 우리를 대변한 동지들은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신음하고 있고, 무고한 백성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가고 있다. 합법을 가장한 유신헌법의 모든 부조리와 악을 고발한다. 우리는 유신헌법의 자기중심적 이기성을 고발한다. 학우여 아는가! 민주주의는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투쟁의 결과라는 것을. 이것이 민족과 역사를 위하는 길이고, 이것이 우리 사랑스러운 조국의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길이며, 이것이 영원한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길이라면. 이 보잘 것 없는 생명 바치기에 아까움이 없노라. 나의 앞으로의 행동에 대해서 여러분은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완전한 이성을 되찾아서, 우리가 해야 할 바를 갖다가 명실상부하게 이끌어 나가길 바란다... -김상진의 양심선언문, 1975년 4월 11일 녹음분을 들어보면, 상진이의 이 말을 끝으로 갑자기 현장이 소란스러워져.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건 방송에는 처음 하는 얘기들입니다. 이걸 꼭 기록을 해주셔야 됩니다. 그 계단에서 이런 얘기를 저한테 했군요. '호선아 나는 이제 나의 신념을, 각오를 행동으로 표현할게. 유신이 없어지는 날, 나를 기억해 달라'는 그런 식의 얘기였습니다. 상진이가 서서 낭독하는 그 자리에서 10여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제가 앉아 있었어요. 상진이가 양심선언문을 읽자마자 가방에서 과도를 꺼냈습니다... 5초만 빨라도 됐습니다. 5초만 빨라도 됐어.. 칼로 찌르고 앞으로 넘어지기 직전에 제가 뒤에서 붙잡았습니다. -이호선, 김상진 친구 호선이는 상진이와 함께 병원으로 이동했어. 그 택시 안에서 상진이가 이런 이야기를 했대. 호선아, 애국가 불러줘 호선이는 큰 목소리로 애국가를 불렀어. 그리고 상진이는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어. ▲ 긴급조치 9호 김상진 열사의 죽음 뒤로, 저항의 목소리를 더욱 거세졌어. 그로부터 한 달 뒤, 긴급조치 8호로 긴급조치 7호가 해제되고, 동시에 긴급조치 9호가 선포돼. 유언비어 안 되고, 유신헌법에 대해 말해서도 안 되고, 시위는 물론 학생의 정치 관여도 안돼. 긴급 조치 9호는 어떤 특정한 사건에 대응하기 위해서 발동한 것이 아니라 그냥 항시적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유신 체제에 대해서 저항은 물론이고 어떠한 비판도 할 수 없도록 결국에는 아주 광범위하고 포괄적으로 유신에 대한 반대를 불허하는 그러한 조치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이런 것들을 우리가 보통 '긴급조치의 종합판'이다… -오제현,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이렇게 선포된 긴급조치 9호는 오랫동안 국민의 숨통을 조여왔어. 무려 4년 7개월 동안. 긴급조치가 9호가 이렇게 오래 지속되는 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때는 1978년 11월. 전북에서 꽤 잘 나간다는 한 학원이야. 이 학원에서 영어강사로 일하는 차봉현 씨. 봉현 씨는 여기저기 스카우트가 될 정도로 인기 강사였대. 봉현 씨는 영어뿐 아니라 정치 경제 윤리 강의도 하며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어. 어느날, 봉현 씨는 여느 날처럼 학원으로 출근을 했어. 수업 내용을 살펴보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남자 2명이 들어와. 학원으로 경찰들이 들이닥친 거야. 경찰이 물어보는 거예요. '당신이 유신 헌법 철폐하고 유신 헌법 없애자고 학생들 앞에 주장 안 했냐' 이제 이렇게 나온 거예요. '나는 절대 그런 말 안 했다' 내가 사회의 지도자가 아니고 내가 뭐 정당의 정당인도 아니고 내가 뭐 정치를 하는 사람도 아니고. 절대 부인한 거예요. -차봉현, 당시 영어학원 강사 봉현 씨가 강의 중 유신헌법 철폐를 주장했다는 거야. 봉현 씨는 강의 때 이렇게 얘기를 했대. 국회의 여당 의원 수가 많잖아요. 그건 헌법으로 설치된 통일주체국민회의가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뽑기 때문이에요. 이런 말이 문제 될 거라곤 생각도 못했어. 그 후, 봉현 씨는 여기저기 끌려 다니며 폭행을 당했어. 날이 갈수록 폭행의 강도는 점점 심해졌대. 둘이서 이제 때리기 시작한 거예요. 주먹으로 뺨도 때리고. 취조하는 실인데 거기 데리고 가서 옷을 벗겨요. 옷을 벗겨 가지고 빨가 벗겨서 몽둥이로 이제 때리는 거예요 둘이서. 또 무릎을 꿇고 앉으라고 해서 무릎 사이에 나무를 놔두고 거기서 밟아버려요. 그러면 무릎이 팍 깨져요. 그런 고문을 당했어요. 경찰서 정보과실에서. '나는 비판 정도를 했다' '헌법을 폐지해야 한다.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 이런 말은 절대 한 것 없다. 근데 그게 안 통한다니까. 자기가 써갖고 와서 이렇게 '이대로 해달라' 그러니까 내가 이제 안 맞으려고 사인해 줬죠. -차봉현, 긴급조치 피해자 자백을 받기 위해 봉현 씨를 고문한 거야. 봉현 씨는 1년 6개월의 형을 선고받았어. 근데 이런 일을 겪은 건 봉현 씨 뿐만이 아니야. 긴급조치 9호로 처벌받은 사례들을 보여줄게. 박정희는 군인 출신이기 때문에 정치를 잘할 수 없어. 100억 불 수출이라 하면서도 수입에 대해서는 은폐하고 있잖아. 언론의 자유도 없는 거야. 이런 말을 했다고 징역 8년을 선고받았어. 또 어떤 남자는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박정희 정치는 뭣~도 아니다 이렇게 외쳤어. 판결은 징역 1년. 자기야, 대통령이 내가 잘 아는 친구 언니와 애인 사이래 라는 가벼운 말. 이건 징역 1년을 선고받았어. 긴급조치 9호는 술 먹고 말 한마디 잘못해도 잡혀간다 해서 '막걸리 보안법'이라 불렸어. 심지어 노래도 마음대로 못 불렀어. 국가의 안전 수호와 사회 질서를 문란케 하는 대중문화가 있다는 거야. 그렇게 취한 조치가 '금지곡'. 1975년 한 해 동안 금지된 노래가 국내 가요만 222곡이야. 지금도 들으면 알만한 곡들이 이때 무더기로 금지가 돼. 김추자의 '거짓말이야'. 이 노래는 1971년 발매돼 아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어. 이 노래가 갑자기 금지된 이유는 '거짓말이야'라는 가사 때문에. '가사 내용 불신 조장', 그리고 창법도 저속하대. 신중현의 '미인'. 너무 유명한 노래지. '신중현과 엽전들'의 '미인'은 1974년에 발매돼 약 40만 장 이상의 앨범 판매를 올린 대히트곡이야. 이 곡이 금지된 이유는, 저속한 가사, 퇴폐한 곡이래. 어디가 저속하다는 걸까?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 이 가사를 학생들이 '한 번 하고 두 번 하고 자꾸만 하고 싶네~' 이렇게 개사해서 불렀대. 박정희 대통령이 대통령을 한 번 하고 두 번 한다고, 그렇게 비꼬고 풍자하니까 금지곡이 된 거 아니냐 라는 얘기가 있어. 그리고, 금지곡 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곡이 한 곡 더 있지. 바로 김민기의 '아침이슬'. 양희은이 부른 '아침이슬'이 많이 알려져 있지. 이 노래를 작사, 작곡한 사람이 바로 김민기야. 이 곡이 금지된 이유는, 없어. 기록에 금지 사유가 아예 적혀 있지 않아. 보통 이렇게 금지곡이 되려면 그 옆에 금지 사유가 있어야 돼요. 아무리 엉망으로 하더라도 사유가 있어야 되잖아요. 근데 '아침이슬'은 금지 사유가 없어요. 이걸 대학생들이 시위에 불렀다고 금지를 시키기에는 너무 논리가 옹색한 거죠. 금지 사유가 없어. -강헌, 음악평론가 유신 반대 시위 현장에서 많은 학생들이 김민기의 노래를 불렀어. 그렇게 김민기의 노래는 모두 금지곡이 되었고 그는 보안사 등 여기저기를 끌려 다니며 조사를 받고 활동 또한 탄압을 받았어. 금지라는 행위, 검열이라는 행위가 뭐가 나쁘냐면요. '상상력에 제한이 가해져서는 안 된다'라는 이유인 겁니다. 결국 검열은 상상력의 잠재력을 사실은 원천적으로 파괴시키는 행위예요. 알아서 기게 만드는 행위예요. 그걸 알아서 기는 예술가들이 어떤 작품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결국 그런 표현의 자유를 물리적인 공권력으로 억압한다는 얘기는 그냥 간단한 얘기예요. 그냥 단순히 '이 노래 부르지 마, 이 영화 보지 마, 이 책 읽지마'로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이것은 기본적으로 민주주의가 보장하고 있는, 헌법이 보장하는 모든 기본권이 '전부 구금될 수 있다'는 얘기이고 실제로 그렇게 됩니다. -강헌, 음악평론가 ▲ 유신의 종말 말 한 마디 조심하고, 노래도 마음대로 못 하는 시대는 몇 년 간 이어져. 그러던 중, 1979년 민중의 불만이 폭발하는 사건들이 일어나. 'YH 사건' 혹시 들어봤어? 8월 9일, 가발공장이었던 YH무역의 일방적인 폐업 공고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이 당시 야당인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이게 돼. 여공들의 호소를 받아 주고 당사로 받아준 사람이, 당시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야. 하지만, 곧 야당 당사에 경찰이 투입돼. 농성을 하던 노동자들을 경찰은 무차별 폭력과 강제 연행으로 진압했어. 이를 지켜 본 김영삼 총재는 박정희 정권과의 정면대결에 들어가. 그러다 김영삼 총재는 국회의원 제명을 당해. 제명된 후 이렇게 말했지. 아무리 닭의 목을 비틀지라도 새벽은 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10월 16일 부산. 유신철폐! 독재타도! 를 외치며, 김영삼의 정치적 본거지였던 부산 시민들이 들고 일어났어. 부산대에서 수백 명으로 시작된 시위는 수천 명으로 늘어났고, 결국 수 만명의 군중이 모였어. 그리고 부산에 비상계엄이 선포돼. 부산 시내에 탱크가 등장했어. 그러나 시민들은 물러서지 않았고 시위는 마산으로까지 번졌어. 바로 '부마항쟁'이야. 김재규의 법정 진술에 따르면, 부마항쟁을 보고 받은 박정희 대통령이 이런 말을 했다는 거야. 이제부터 사태가 악화되면 내가 발포 명령을 하겠다. 그리고 부마항쟁 열흘 뒤인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열린 연회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에 맞아 사망해. 이렇게 유신 시대는 끝을 맞게 돼.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궁정동 안가. 유신헌법의 초안이 작성된 장소 어디라고 했지? 그래 궁정동 안가. 거기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며 길고 길었던 유신 시대는 끝이 났어. 7년간 이어진 유신체제. 그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지. 언론의 자유를 위해 싸운 분들은 마지막까지 철야 농성을 하며 저항했지만, 결국 회사에서 강제로 끌려 나왔어. 당시 100 명이 넘는 언론인이 해임을 당하게 돼. 긴급조치 9호로 재판을 받던 학원강사 봉현 씨는 박정희의 사망 후 최종 면소 판결을 받고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어. 하지만 다시 강사로 취업할 수는 없었다고 해. 긴급조치는 30년이 훨씬 지나 2000년대에 들어서야 위헌 판결이 내려졌어. 2010년 대법원은 긴급조치 1호가 유신헌법, 현행헌법에 위험이라고 판단했고, 그 이후 긴급조치 4호, 9호 역시 위헌이라 했어. 2013년 헌법재판소에서는 긴급조치 1호, 2호, 9호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어. 그리고 2018년 대법원에서는 1972년 비상 계엄 포고령에 대해 이렇게 판단했어. 당시의 국내 정치 상황 및 사회 상황이 계엄법에서 정한 '군사상 필요할 때'에 해당한다고 할 수 없다. 계엄 포고는 헌법과 법률에서 정한 발동 요건을 갖추지 못한 채 발령되었고, 구 헌법, 현행 헌법, 구 계엄령에 위배되어 위헌이고 위법하여 무효이다. 노벨문학상 수상한 한강 작가가 이런 말을 했어.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라고.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현재도 언젠간 과거가 될 거야. 현재가 어떻게 기록될지는, 지금 우리의 몫이지 않을까?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
[꼬꼬무 찐리뷰]53년 전에도 '비상계엄' 있었다…박정희 유신시대와 긴급조치의 진실
등록일2025.03.14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13일 방송된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방송인 홍석천, 배우 박효주, 아나운서 이인권이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서울 한복판에 나타난 탱크 때는 53년 전 서울, 평범한 가을날 저녁이야. 직장인들은 퇴근을 서두르고, 동네 곳곳에선 저녁을 준비하는 음식냄새가 솔솔 풍기고 있어. 그런데 그때 갑자기, 탱크를 몰고 중무장한 군인들이 서울 도심 한복판에 나타났어. 당시 태평로에 있던 국회의사당, 그리고 광화문 근처 중앙청에 서 있는 탱크의 모습이야. 시간은 저녁 7시, TV와 라디오를 통해 깜짝 놀랄만한 소식이 전해져. 박정희 대통령 각하는 10월 17일 오후 7시를 기해 비상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1972년 10월 17일 19시를 기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현행 헌법의 일부 조항 효력을 정지시킨다. 이와 같은 비상조치를 국민 앞에 선포한 박 대통령 각하는 우리 모두 일치단결하여 민주제도의 건전한 발전과 조국 통일의 기원이 성취되는 그날까지 힘차게 전진해 나갈 것을 촉구했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이 선포된 거야. 비상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있을 때 선포할 수 있어. 보통 이제 한국에서 비상계엄은 어떤 굉장히 큰 사회 혼란기나 아니면 6.25 전쟁과 같은 정말 전시에 주로 선포가 됐어요. 그런데 이 1972년 10월 17일에 선포된 비상계엄은 사실은 굉장히 평온한 때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때에 선포가 됐고.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혼란이라든지 어떤 위기라든지 뭐 전시라든지 이런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던 시기인데 느닷없이, 그야말로 느닷없이 비상계엄이 선포가 되었던 거죠. -오제연,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이렇게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앞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해줄게. ▲비상계엄과 특별선언 박정희 대통령은 비상계엄과 함께 '10.17 특별 선언'을 발표했어. 그 내용은 이래. 1972년 10월 17일 19시를 기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현행헌법의 일부 조항 효력을 정지시킨다. 일부효력이 정지된 헌법조항의 기능은 현행헌법의 국무회의가 수행한다. 비상국무회의는 1972년 10월 27일까지 조국의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헌법개정안을 공고하며 이를 공고한 날로부터 1개월 이내에 국민투표에 부쳐 확정시킨다. 헌법개정안이 확정되면 개정된 헌법절차에 따라 늦어도 금년 연말 이전에 헌정질서를 정상화시킨다. 헌법도 바꾸고, 국회를 해산하겠다는 거야. 아까 사진 봤지? 국회의사당 정문을 딱 가로막고 있는 탱크. '국회 해산'이란 게 가능한 걸까? 당시에도 대통령에게 국회해산권은 없었대. 그때도 사실은 헌법에 의하면 할 수가 없는 거였고, 지금도 역시 뭐 헌법에 의하면 국회 해산권을 갖고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할 수가 없는 거죠.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국회해산권이 없는 대통령이 국회를 그냥 임의로 해산시켜버린 거죠. 군인들이 쫙 깔린 상태에서 뭐 그런 상태에서는 사실 기존 헌법에 어떤 조항이나 범위나 이런 것들에 구애받지 않고, 대통령이 임의로 자신의 권력을 행사할 수가 있었던 거죠. -오제연,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그때도 국회는 계엄 해제를 요구할 수 있었어. 그런데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초법적 조치로 국회를 해산시켜버린 거야. 그래서 해제할 수 없었어. 설사 국회가 해산되지 않았어도, 당시 국회엔 박정희 대통령이 소속되어 있는 여당 의원이 더 많았어. 그러니 야당만으로는 계엄 해제 요구가 어려운 상황이지. 아무리 그래도, 반발이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주요 정치인들이 가택 연금을 당해. 대문 앞을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거야. 게다가, 느닷없이 끌려온 사람들이 옷이 벗겨진 채 사정없이 구타를 당해. 몽둥이질에 잠도 재우지 않고 물고문까지 이어져. 이렇게 고문을 당한 사람들은, 국회의원들이야. 이런 국회의원들에겐 공통점이 하나 있었어. 바로 '블랙리스트'. 비상계엄 한 달 전, 야당 의원들의 이름이 있는 블랙리스트 명단이 만들어졌다고 해.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블랙리스트에 적힌 사람 가운데 13명의 야당 의원들을 보안사에서 끌고 갔다는 거야. 이런 일들은 비상계엄 선포 후, 바로바로 진행됐어. 이렇게 국회도 해산하고, 헌법도 바꾸겠다고 해. 여기서 끝이 아니야. 얼마 뒤에 대통령 선거도 해. 불과 1년 전, 7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거든. 근데 임기 1년 만에 또 대통령 선거를 하는 거야. 왜 그랬을까? ▲ 1년 만에 다시 한 대통령 선거 3년 전인 1969년, 박정희 정권은 헌법을 개정했어. '3선 개헌'이라고 들어봤어? 헌법 제 69조 3항 '대통령의 계속 재임은 3기에 한한다'. 대통령을 3번까지 할 수 있다는 거야. 원래는 두 번까지만 할 수 있었거든. 이렇게 5대 6대 대통령을 역임한 박정희 대통령은 이 헌법 개정으로 3선에 도전하게 돼. 그리고 3선 개헌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하며 등장한 대선 라이벌이 있어. 바로 47살의 젊은 정치인, 김대중 후보. 두 후보의 경쟁은 엄청났어. 여러분 이번에 정권교체를 하지 못하면 이 나라는 박정희 씨의 영구 집권의 총통 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박정희 씨는 '3선 개헌은 절대로 안 한다', '나보고 3선 개헌한다는 것은 야당 놈들의 모략이다' 이렇게 말했어요. 그러더니 2년이 못 가서 재작년에 절대로 안 한단 3선 개헌을 정반대로 절대로 해 버렸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헌법을 고칠 때는 앞으로 이 나라에서 누구든 자기 한 사람의 영구집권을 위해서 헌법을 이리 고치고 저리 고치고 하는 일은 영원히 못 하도록 분명히 하는 것을 여러분에게 내가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김대중 후보의 유세 연설 中 유권자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에게 분명히 말씀드리거니와, '나를 대통령으로 한번 더 뽑아 주십시오' 하는 이런 정치 연설은 오늘 이 기회가 마지막 연설이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말씀드립니다. 지난 5대, 6대 대통령 선거에 있어서 유권자 여러분들은 이 사람을 대통령으로 두 번 뽑아 주셨습니다. 이번만 여러분들이 한번 더 이 사람을 지지를 해주시면, 일할 수 있는 그런 뒷받침을 해 주시면, 앞으로 4년 동안 여러분들을 위해서 있는 정력을 다 해서, 한번 멋있는 수도 서울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정희 후보의 유세 연설 中 그럼, 선거 결과 어땠을까? 결과는, 박정희의 승리였어. 53.2% 대 45.3%의 차이야. 서울에서는 김대중 후보가 앞서기도 했어. 그리고 한달 후, 박정희 대통령의 여당인 민주공화당이 113석, 야당인 신민당이 89석을 차지하면서, 그전에 비해 야당의 의석수가 늘어났어. 김종필 증언록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해. 그 다음엔 김대중이 될지도 몰라. 그러니 내가 좀 특수한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 그 '특수한 것'이 뭘까? 박정희 대통령 취임 1년 뒤인 1972년 5월. '풍년사업'이란 이름의 은밀한 작업이 진행돼. 이름만 보면 농업 관련 사업 같지 않아? 근데, 그 작업이 진행된 장소는 바로 여기야. 일명 '궁정동 안가'라 불리는 곳이야. '안가'는 안전가옥, 이곳은 대통령의 안전가옥이야. 아주 비밀스러운 곳이지. 여기서 뭘 했냐. 대만 총통제, 스페인 총통제, 프랑스 드골 헌법 등 해외사례를 연구하고 있어. 왜 이런 사례들을 연구할까? 대만의 총통이었던 장제스, 스페인 총통 프랑코, 두 사람 모두 본인들이 죽으면서 그 임기가 끝나. 종신 집권을 했다는 거야. 그렇게 은밀하게 진행된 풍년사업의 결과는, 다섯 달 뒤인 1972년 10월 세상에 공개됐어. '유신헌법'이라는 이름으로. ▲ 유신헌법 10월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헌법을 개정하고. 이게 바로 '10월 유신'이야. 유신, 사전적 의미는, 낡은 제도를 고쳐 새롭게 한다는 거야. 유신헌법에는 대통령이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카드들이 있었어. 먼저 '집권' 카드. 대통령 집권에 대한 강력한 변화가 생겨.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지 않는다는 얘기야. 그럼, 누가 뽑냐? 통일주체국민회의, 일명 '통대'라고 하는 기관에서 대통령을 선출하겠다는 거야. 그런데, 이 '통대'의 의장이 누굴까? 대통령 본인이야. 대통령이 의장인 기관에서 대통령을 뽑겠다는 거지. 대통령 임기도 4년에서 6년으로 늘어나. 그리고 대통령 중임 제한 폐지. 사실상 영구집권이 가능해진 거야. 두번째는 '밸런스' 카드. 권력의 밸런스를 파괴하는 카드야. 대통령에게 '국회 해산권'이 생겼어. 10.17 비상계엄 때는 국회 해산권이 없었다고 했잖아? 그걸 만든 거야. 이제 대통령이 입법권을 가진 국회를 해산할 수 있어. 그리고 국회의원 3분의 1을 대통령이 추천하고 이를 '통대'에서 선출하겠대. 게다가 대통령이 사실상 사법부의 모든 법관을 임명할 수 있게 됐어.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이 입법부에 사법부까지 손아귀에 쥐는 거야. 3권분립의 파괴야. 마지막 카드는 아주 강력한 힘이야. 바로 '긴급조치'야. 유신헌법 제53조 1항을 보면, '국정 전반에 걸쳐 필요한 긴급조치를 할 수 있다'는 거야. 필요한 조치라는 게, 어디까지 가능한 걸까? 무서운 거는 헌법에 규정돼 있는 국민의 기본권의 효력을 정지시킬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부여했죠. 조치에 대해서는 사법 심사를 할 수가 없도록 해놨어요. 그것이 헌법에 위반되었는지 이런 것 자체를 심사할 수 없도록, 헌법에 아예 명시해 놨어요. 긴급조치 위반했다고 그래서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이 긴급 조치는 위헌이다', '불법이다', 아무리 주장해 봤자 먹혀들 수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법원이 심사 자체를 못 했기 때문에… -정태호,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대통령의 판단에 따라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정지하고 처벌할 수 있다는 거야.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열흘 만에 공표된 이 유신헌법 개정안은 한달 뒤 국민투표에 부쳐져. 당시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 결과, 찬성률은 91.5%가 나와.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먼저, 유신이 내세운 명분 중 하나는 '평화통일'이었어. 유신 3개월 전,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돼. 분단 이후 남북이 처음으로 평화통일 원칙에 합의한 거야. 국민들의 통일에 대한 열망도 아주 높아졌어. 한마디로 '평화통일을 하려면 법과 체제를 바꿔야 한다', '10월 유신으로 한국적 민주주의를 이룩하자' 이런 명분으로 유신을 홍보한 거야. 유신헌법의 가장 큰 하나의 명분이 되는 것은 당시에 남북 관계가 획기적으로 변했다는 거죠. 그 이전에 남북의 어떤 대결, 특히 68년을 전후로 해서는 한반도의 안보 위기라고 부를 정도의 정말 곧 전쟁이 터질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었거든요. 그런데 이런 것들이 한순간에 갑자기 변해서 지금 남북이 대화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러한 대화 국면에서 어쨌든 우리가 북한과 제대로 대화를 하려면 체제를 바꿔야 된다, 이게 이제 가장 큰 명분이 되는 것이고. 그때 체제를 바꿀 때는 우리가 평화 통일을 지향하는 그런 헌법을 가져야 된다라고 하는 것이 이제 또 하나의 명분이 되는 거죠. -오제연,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실제로 박정희 대통령이 한 얘기가 있어. 만일 국민 여러분이 헌법 개정에 찬성치 않는다면 나는 이것을 남북 대화를 원치 않는다는 국민의 의사 표시로 받아들이고 조국 통일에 대한 새로운 방안을 모색할 것임을 아울러 밝혀두는 바입니다. -박정희, 10.17 대통령 특별선언 中 이런 선언과 함께, 유신 찬성을 위한 본격적인 홍보도 시작했어. 10월 유신, 100억 불 수출, 1,000불 소득 쭉 뻗은 도로, 기계화된 농촌, TV, 자동차까지... 잘 살려면 유신이 필요하다고 홍보하는 거야. 이것도 한 번 봐봐. 반대하면 파멸, 찬성하면 번영이래. 유신을 찬성해야 잘 살 수 있다는 거야. 그리고 효과적인 홍보 수단, 미디어도 활용했어. 이 시기에 모든 신문과 방송은 검열을 거쳐야만 했대. 혹여나 유신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가 나가면 안되니까. 문공부에서 주는 보도 자료를 한 자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써야 되니까.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적절한 법률이다', 그런 식으로 다 신문이 받아 썼었죠. '유신만이 살 길이다' 그런 구호를 신문에 꼭 넣고. 그 다음에 칼럼을 쓸 필자들 풀로 넘겨줘요, 우리 신문사에. 그래서 '이 중에 골라서 해라'. 그런 사람 외에는 쓰지 못하게 했어요. 완전히 언론 탄압을 무지막지하게 했죠 그 당시에는. 유명한 얘기가 있는데 광고 이론에 나오는데 '반복은 진실을 만든다'는 말이 있어요. 계속 반복하면 그렇게 세뇌되는 거예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요. -김동현, 당시 동아일보 기자 비상계엄이 선포된 1972년 10월 17일부터 유신 찬반 국민 투표일인 11월 21일까지, 유신 관련 좌담 방송이 398회, 유신지지 단독 해설이 218회, 유신 비전 제시 특별 프로그램이 58회 방송됐어. 이 정도면, 국민 투표에서 찬성률이 그렇게 높았던 이유가 좀 이해가 가지? 계엄 포고령에 따라 모든 집회, 시위는 금지됐어. 대학가는 계엄군이 지키고 있어. 유신을 반대하는 목소리는 들리기가 어려운 상황이야. 그렇게 비상계엄 체제 하에 유신헌법 국민 투표는 '찬성'이란 결과를 낳았어. 투표한 사람 중에서 90% 이상이 지지를 보냈으니까 '야 이건 정말 국민들이 모두 원했던 것이 아니냐' 얘기할 수도 있겠죠. 근데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역시 고려할 필요가 있겠어요. 일단 계엄령 아래에서 국민투표가 이루어졌다는 거예요. 한마디로 군대를 깔아놓고, 즉 바로 옆에 탱크, 장갑차, 무장한 군인들이 즐비한 상황에서 투표가 이루어졌다는 거죠. 두 번째가 여러 가지로 유신을 지지하고 찬양하는 목소리만이 허용됐던 그런 시절에, 정말 사람들은 그 얘기를 들을 수밖에 없고, 그 얘기 외에는 어떠한 판단의 근거도 마련돼 있지 않은 그런 상황에서는, 정부가 유도하는 대로 선거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숫자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것은 문제가 됩니다. -오제연,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그제서야 비상계엄도 해제됐어. 그렇게 유신 시대가 시작된 거야. ▲ 유신 시대의 시작과 반발 그리고 대통령 선거를 치른지 1년 만에, 8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져. 들어봤을 거야, '체육관 선거'.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대통령 선거가 이루어졌어. 당연히 유신헌법에 따라 국민은 투표를 할 수가 없어. 통일주체국민회의, 일명 '통대'의 대의원들이 대통령을 뽑아. 후보는 단 한 명, 박정희. 결과는? 찬성 2,357표, 반대표는 없어. 무효표만 2개야. 그래서 찬성률이 99.9%야. 앞에 나온 7대 대선 때 박정희 후보의 선거유세 기억나? '나를 한번 더 뽑아 주십시오' 하는 정치 연설은 오늘 이 기회가 마지막이라는 것을 확실히 말씀드립니다 라고 했던 거. 결과적으로 이 약속은 지켜졌어. 국민 앞에서 더 이상 지지를 호소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이때부터 1987년까지 무려 16년간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 직접선거가 이뤄지지 않았어. 그 문제점을 누구라도 조금만 들여다보면 알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오래갈 수가 없었던 거죠. 유신헌법에 대한 반대 투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거였죠. -정태호,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여기저기서 반발이 튀어나오기 시작해. 박정희의 라이벌, 김대중. 그가 일본에서 한 연설이 있거든. 한 번 들어봐. 요새 하고 있는 10월 유신이라는 거는 세상에 말도 안돼. 유신이 뭐야, 유신이. 일본 사람들이 100년 전에 써먹은 소리 아니요? 여러분, 다 기억하실 거예요. 재작년 선거 때 만일 이번에 박정희 정권의 종식을 짓지 못하면 이제 우리에게는 선거조차 없는 영구 집권의 총통제 시대가 온다고. 내가 몇 천 번 말했어요. 상당수 사람들이 '그래도 설마?' 그랬어. 그 설마가 사람 잡아요. 그렇게 됐어. 10월 18일 날 저는 박정희 씨의 조치를 정면으로 부인하고,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성명의 서두에 '박정희 씨의 이번 조치는 통일을 빙자해서 자기 자신의 영구집권을 획책하는 것이다' 이렇게 성명을 했습니다. -김대중 일본 하코네 연설 中 유신 발표 직후부터 김대중은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유신 반대 목소리를 냈어. 그러던 1973년 8월 8일 일본 도쿄의 한 호텔. 김대중은 호텔 스위트룸에서 약속을 마치고 막 방을 나서는 중이었어. 그 순간 웬 남자들이 나타나 김대중의 목을 낚아채고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고는 끌고 가. 중앙정보부가 김대중을 납치한 거야. 이 김대중 납치 사건은 국내외적으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게 돼. 반유신 운동에 불을 붙인 거야. 반유신 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움직인 사람들은, 대학생들이었어. 여러 학교에서 시국선언문을 발표하며 대학생들이 유신체제와의 투쟁을 선언했어. ▲ 긴급 조치의 시대 이 상황을 유신정권은 어떻게 했을까? 유신헌법에 아주 강력한 제재가 있었잖아. 바로 '긴급조치'. 1974년 1월 8일, 박정희 대통령은 긴급조치 1, 2호를 선포해. 1월 8일 박정희 대통령은 헌법 제53조에 의한 대통령 긴급 조치를 선포하여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고,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고 밝혔습니다. 이 조치에 위반하거나 비방한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며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하기로 했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유신헌법에 대해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어. 반대는 물론, 비방도 하면 안돼. 또 유언비어도 금지야. 위반하면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고, 징역이 무려 15년까지 가능해. 그리고 긴급 조치 2호는, 비상군법회의 설치에 대한 내용이야. 실제로 긴급조치 위반으로 학생들은 비상보통군법회의에 세워졌어. 긴급조치의 주된 내용들은 유신 체제를 보호하기 위한 그런 거였죠. '유신헌법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마라' '좋다 나쁘다 평가도 하지 마라' '유신헌법이 나쁘니까 개헌을 하자' 뭐 이런 얘기도 하지 마라. 그러니까 이게 민주주의의 근본 원리, 특히 국민주권 원리를 정면으로 부정한 거거든요. -정태호,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곧이어 발표된 긴급조치 3호에는 국민생활안정을 위한 조치들이 나열돼 있어. 불안해진 민심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을까? 그럼에도 여론은 심상치 않았어. 결국 박정희 대통령은 직접 나서 이야기해. 이런 판국에 전 국민이 혼연일체가 돼서 한 덩어리가 돼도 지금 이러한 난관을 뚫고 나아가기가 힘이 들고 힘이 부족한 판인데. 작년 연말부터 국내 일각에서는 일부 인사들 중에 현 체제에 대해서 정면으로 도전을 해오는가 하면 민심을 자꾸 선동을 하고 사회 혼란만을 조장하기 때문에, 그동안 수차 설득도 해보고 경고도 해 보았습니다만 설득이나 경고만 가지고는 이 사람들의 행동이 중지할 그런 뜻이 전혀 없다는 것을 판단을 해서 만부득이 대통령의 긴급조치를 발동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번에 긴급 조치가 선포된 그 배경, 이유라고 그럴까. 목적, 취지 이런 것을 여러분들이 잘 이해를 해 주시고, 적극적으로 협조를 해주십사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적극적으로 협조를 해 주시면 이 조치는 곧 필요 없게 될 것입니다. -박정희, 1974년 1월 연두 기자회견 중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은 긴급조치에 대한 영화도 만들었어. 영화 속 어머니 역할이 아주 온화한 말투로 정부의 긴급조치에 대한 입장을 줄줄 설명하곤 했어. 하지만, 유신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가. 긴급조치로 억압 받은 학생들은 더 많은 학생들과 연대를 해. 4월 3일, 대학가에서 시위를 준비한 거야. 그런데, 이를 사전에 파악한 유신정권은 대대적인 검거에 나서. 그리고 4월 3일 밤, 긴급조치 4호가 선포돼. 그 내용은 이래.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과 이에 관련되는 단체를 조직 또는 가입하거나, 활동에 동조하거나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이를 위반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긴급조치로 최대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어. 어떻게 학생들의 시위에 사형까지 언급됐을까? 여기에서 언급된 단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줄여서 '민청학련'이라 불러. 긴급조치 4호가 선포된 이유는, 바로 이거였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의 수사 상황을 발표했습니다. 과거 공산 불법단체인 인민혁명당과 제1 조총련, 국내 좌파 혁신계 기독교 학생단체, 그리고 일본 공산당원까지 포함된 약 20명의 배후 조종자가 스며들어 자금을 대는 등 학생들을 뒤에서 조종한 것이 드러났습니다. 4월 3일을 기해 폭동을 일으켜서 정부 주요기관을 점거하고 정권을 인수하려 했으며, 인혁당은 대한민국을 폭력으로 전복하고 공산정권을 수립할 목적으로 북한 괴뢰 지령에 따라 조직되고 활동한 반국가단체라고 밝혔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학생들이 북한의 조종을 받고 있고, 공산계 불법단체가 배후에 있다는 거야. 나라를 전복할 목적이래. 그런데, 이건 조작으로 밝혀졌어.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학생들의 시위를 배후세력까지 조작해서 국가전복 시도라는 시나리오를 쓴 거야. 그렇게 민청학련 사건으로 조사받은 사람만, 천 명이 넘어. 대부분 대학생들이었어. 그중 7명에게 사형이 구형됐고, 무기징역 7명, 징역 20년형이 12명이나 됐어. 이 사건의 변론을 맡았던 강신옥 변호사는 법정에서 이렇게 얘기를 했어. 법은 정치와 권력의 시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랏일을 걱정하는 애국 학생들을 빨갱이로 몰아 사형이니, 무기니 하는 형을 구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법을 악용하는 '사법 살인'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강 변호사가 이렇게 변론을 이어가는 도중, 갑자기 휴정이 선포되고 강 변호사는 연행됐어. 그날 밤, 남산 중정으로 연행된 강 변호사는 잔혹한 구타를 당했대. 그리고 결국 구속됐어. 그의 죄목은, '긴급조치 위반'이었어. ▲ 언론 통제와 저항 이런 사태들이 벌어지고 있지만 언론에선 제대로 보도하지 못했어. 학생들의 시위, 개헌운동 등은 기사가 빠지거나 최소화돼. 고문, 수사, 재판에 대한 문제점에도 침묵했어. 당시 언론사에는 기자도 아닌데 매일 출근 도장을 찍는 사람이 있다고 해. 기관원이라고, 중앙정보부에서 나온 사람이야. 기사를 빼고, 용어를 바꾸고. 중앙정보부에서 각 언론사별로 담당직원을 배치해 통제를 하는 거야. 유신 시기에 들어서서는 신문에 무슨 기사를 내지 말라, 내지 말라는 게 딱 아주 한정돼 있는데. '학생들 데모 기사는 절대로 내지 마라'. '저항하는 움직임에 대해서 아주 손끝 하나도 보도하지 말라' 이렇게 되는 거죠. -김학천, 당시 동아방송 PD 그 당시는 그 모든 걸 전부 통제하고, 누가 자살했다든지 뭐 어제 굶는다든지 어렵다든지 이런 건 기사 못 나가게 돼 있어요. 전부 다 밝은 기사만 쓰라 그러고. -김동현, 당시 동아일보 기자 보도할 때 쓰는 단어에도 제재가 있었어. 예를 들어 '물가 인상'은 '물가 현실화'. '세금 인상'은 '세제 개혁'. 묘하게 뉘앙스를 바꾼 거야. 이런 상황에 언론인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 당시에 데모하는 현장에 가면, 서울대학교에 가면 그쪽에서 써 놨어요. '개와 기자는 출입금지' 써놨어요. '기사 나가지도 않는데 왜 오는데, 올 필요 없다'고 해가지고. 그렇게 모욕을 받았어요. 그러니까 얼마나 괴로웠겠어요. 그때 보면서 '부끄럽다'는 걸 느꼈어요. 기자가 참 부끄럽다. 그걸 제대로 해서 국민에게 알려줄 의무가 있는데. '그런 걸 못하면서 말이야. 기자라고 언론이라고' 이거는 너무 창피했어요. 그때 우리들이 울었어요, 사실은… -김동현, 당시 동아일보 기자 이런 상황이 되자 언론도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 이 사진을 한번 볼래. 사진 속 족자에 적힌 글자는 '자유언론 실천선언'. 마지막 사진에 서 있는 분은 인터뷰를 해 주신 김학천 PD야. 그렇게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은 투쟁에 나섰어. 신문방송잡지에 대한 어떠한 외부 간섭도 배제한다 , 기관원의 출입을 거부한다 , 언론인의 불법 연행을 거부한다 라고 외쳤어. 그 후 매일매일이 치열한 싸움이야. 회사 건물 현관에 '기관원 출입 금지'라고 써 붙이고, 학생 시위에 대한 기사를 늘렸어. 그리고 라디오 방송에서는 비판적이고 풍자적인 멘트도 넣었어. 권력이란 무엇입니까. 한 번 잡으면 그렇게 놓기 싫은 겁니까? 라며 비판했어. 그리고 얼마 뒤, 아주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해. 저희는 동아일보에서 광고를 그만해야 할 것 같은데요. 이번 달 광고 예산이 아직 안 나와서. 광고를 더 못할 것 같은데... 무려 90% 정도의 광고가 해약돼. 그리고 12월 26일 동아일보 신문은 이렇게 발행돼. 아예 백지광고로 나간 거야. 무더기로 광고가 빠진 자리를, 그대로 보여준 거지. 그런데, 그 후로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 이건 다른 날 발행된 동아일보야. 빼곡히 채워진 광고의 정체. 격려 광고가 들어오기 시작한 거야. 대학생, 주부, 어린이, 해외 동포까지. 자발적으로 정성을 모아준 거야. '취학하는 석아, 그른 것은 절대 배우지 마라' ?아빠, 엄마 '양심에 호소하여 우리보다 참하게 살았으면 싶다'-어느 여자 직장인 '운전자와 손님이 합심하여 동아일보의 발전을 빌며'-택시 운전사와 손님 '데이트 자금으로 작은 지면을 삽니다'-순과 선 '이 나라에서 법을 공부하는 안타까운 이 마음과…' ?서울대 동창 남매 마침 그것도 이제 시민들이 성금 내듯이 그런 식으로 했으니까. 고무적이었죠. 우리를 후원하는 이런 사람들이 있구나, 우리 우군이 있구나, 우리가 외롭지 않다. 그런 걸 느꼈어요. -김동현, 당시 동아일보 기자 시민들의 격려 광고로 힘을 얻으며 저항을 이어오던 어느날, 김학천 PD는 아주 특별한 방송을 준비해. 주제는 바로, '감옥으로 보내는 편지'였어. 당시 긴급조치 위반으로 수감 중인 사람들의 가족들이 직접 쓴 편지를 방송하기로 한 거야. 방송이 시작되고, 수감 중인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어린 아들이 직접 읽어. 아버지! 난 아버지가 죄가 있어서 거기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요. 그래서... 편지는 이제 시작인데, 그 후는 꺽~꺽~ 우는 소리만 이어져. 그 다음은 자식을 감옥에 보낸 어머니의 편지였어. 아들아, 엄마가 엊그제 면회를 갔는데 면회를 시켜주지 않더구나. 내복 여러 벌 가지고 갔는데 전해주지 못했구나. 다른 재소자들이라도 입으라고 전부 두고 왔단다. 엄마는... 어머니도 더 이상 편지를 읽지 못하셔. 사무치는 울음소리만 전파를 타고 퍼져나가. 상당히 파국까지 왔다라는 생각이고, 꺾일 때 어떻게 꺾일 것인가. 어쨌든 난 아침 시간 15분, 내가 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때 뭐 감옥에 많이 들어가 있었지. 그 감옥에 아이들 또는 부모를 둔 사람들이 5분 동안 원고지 한 6~7장을 써서 읽으라고 했는데. 첫 번째 문장만 그냥 읽다가 그 다음에 다 우는 걸로 끝을 냈어요. '김학천 씨, 이거 여기서 끊을까요? 그냥 훌쩍훌쩍 울기만 하는데' 묻길래, '그냥 둬라. 그것도 메시지 아니냐'.. 한 1~2분 얘기하고 2~3분 우는 프로그램이 나갔어요. -김학천, 당시 동아방송 PD ▲ 분노한 대학생들 1972년에 유신이 시작되고 유신에 대한 저항과 이를 막으려는 조치들이 반복됐어. 긴급조치 5호와 6호는 앞서 선포된 조치들을 해제하려는 조치야. 긴급조치 해제를 위해 또 다른 긴급조치를 선포한 거야. 그리고 7호는, 고려대학교 한 학교를 휴교시키기 위해 선포됐어. 시위를 막으려고. 그리고 1975년 4월 8일. 또 한번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져. 긴급조치 4호 기억나지? 대학생들이 북한 세력의 조종을 받아 국가를 전복할 목적이라며 사형을 구형했던 거. 이날은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 세력으로 지목됐던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들의 최종 판결이 내려지는 날이야. 그리고 8명의 관련자들에게 최종적으로 사형이 선고됐어. 다음날, 사형 선고를 받은 이들의 가족들이 아침 일찍 구치소로 향했어. 구속 이후 1년 가까이 만나지 못해서, 형이 확정됐으니 면회라도 가능하겠지 싶어 만나러 간거야. 그날 찍힌 사진이 있어. 통곡하는 가족들. 이미 사형이 집행된 거야. 대법원 판결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 됐어. 이날은 사법 사상 암흑의 날로 기록돼. 훗날, 이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 사람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어. 이틀 뒤 서울대 백양나무 옆 잔디밭에 3백 명 가량의 학생들이 모였어. 그리고, 한 청년이 이들 앞으로 걸어 나와. 청년의 이름은 김상진이야. 서울대학교에 재학중이었던 상진이는 친구들과 함께 유신 반대 단식 집회를 준비하고 있었어. 김상진 학생에 대해 들어볼게. 우리 상진이가 착하고 진짜 속 썩이는 거 없었어요. 아버지 어머니 말을 잘 들었지. -김상운, 김상진 형 조용했습니다. 얌전하다고 할까요. 차분한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저하고 서울대학교 같은 과를 입학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유신헌법의 그 문제점들이 사회적으로 자꾸 농축돼 갔던 거죠. 75년도부터가 거의 폭발의 단계에 왔습니다. 그 폭발의 불쏘시개를 한 게 제2차 인혁당 사건입니다. 그 사건이 발생해서 8명이 사형 집행이 된 적이 있죠. 상진이가 매우매우 분노했습니다. -이호선, 김상진 친구 상진이는 학생들 앞에 서서 준비해 온 글을 읽기 시작해. 글의 제목은 '양심선언문'이야. 당시 상진이의 목소리를 녹음한 기록이 있어. 우리를 대변한 동지들은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신음하고 있고, 무고한 백성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가고 있다. 합법을 가장한 유신헌법의 모든 부조리와 악을 고발한다. 우리는 유신헌법의 자기중심적 이기성을 고발한다. 학우여 아는가! 민주주의는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투쟁의 결과라는 것을. 이것이 민족과 역사를 위하는 길이고, 이것이 우리 사랑스러운 조국의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길이며, 이것이 영원한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길이라면. 이 보잘 것 없는 생명 바치기에 아까움이 없노라. 나의 앞으로의 행동에 대해서 여러분은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완전한 이성을 되찾아서, 우리가 해야 할 바를 갖다가 명실상부하게 이끌어 나가길 바란다... -김상진의 양심선언문, 1975년 4월 11일 녹음분을 들어보면, 상진이의 이 말을 끝으로 갑자기 현장이 소란스러워져.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건 방송에는 처음 하는 얘기들입니다. 이걸 꼭 기록을 해주셔야 됩니다. 그 계단에서 이런 얘기를 저한테 했군요. '호선아 나는 이제 나의 신념을, 각오를 행동으로 표현할게. 유신이 없어지는 날, 나를 기억해 달라'는 그런 식의 얘기였습니다. 상진이가 서서 낭독하는 그 자리에서 10여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제가 앉아 있었어요. 상진이가 양심선언문을 읽자마자 가방에서 과도를 꺼냈습니다... 5초만 빨라도 됐습니다. 5초만 빨라도 됐어.. 칼로 찌르고 앞으로 넘어지기 직전에 제가 뒤에서 붙잡았습니다. -이호선, 김상진 친구 호선이는 상진이와 함께 병원으로 이동했어. 그 택시 안에서 상진이가 이런 이야기를 했대. 호선아, 애국가 불러줘 호선이는 큰 목소리로 애국가를 불렀어. 그리고 상진이는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어. ▲ 긴급조치 9호 김상진 열사의 죽음 뒤로, 저항의 목소리를 더욱 거세졌어. 그로부터 한 달 뒤, 긴급조치 8호로 긴급조치 7호가 해제되고, 동시에 긴급조치 9호가 선포돼. 유언비어 안 되고, 유신헌법에 대해 말해서도 안 되고, 시위는 물론 학생의 정치 관여도 안돼. 긴급 조치 9호는 어떤 특정한 사건에 대응하기 위해서 발동한 것이 아니라 그냥 항시적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유신 체제에 대해서 저항은 물론이고 어떠한 비판도 할 수 없도록 결국에는 아주 광범위하고 포괄적으로 유신에 대한 반대를 불허하는 그러한 조치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이런 것들을 우리가 보통 '긴급조치의 종합판'이다… -오제현,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이렇게 선포된 긴급조치 9호는 오랫동안 국민의 숨통을 조여왔어. 무려 4년 7개월 동안. 긴급조치가 9호가 이렇게 오래 지속되는 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때는 1978년 11월. 전북에서 꽤 잘 나간다는 한 학원이야. 이 학원에서 영어강사로 일하는 차봉현 씨. 봉현 씨는 여기저기 스카우트가 될 정도로 인기 강사였대. 봉현 씨는 영어뿐 아니라 정치 경제 윤리 강의도 하며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어. 어느날, 봉현 씨는 여느 날처럼 학원으로 출근을 했어. 수업 내용을 살펴보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남자 2명이 들어와. 학원으로 경찰들이 들이닥친 거야. 경찰이 물어보는 거예요. '당신이 유신 헌법 철폐하고 유신 헌법 없애자고 학생들 앞에 주장 안 했냐' 이제 이렇게 나온 거예요. '나는 절대 그런 말 안 했다' 내가 사회의 지도자가 아니고 내가 뭐 정당의 정당인도 아니고 내가 뭐 정치를 하는 사람도 아니고. 절대 부인한 거예요. -차봉현, 당시 영어학원 강사 봉현 씨가 강의 중 유신헌법 철폐를 주장했다는 거야. 봉현 씨는 강의 때 이렇게 얘기를 했대. 국회의 여당 의원 수가 많잖아요. 그건 헌법으로 설치된 통일주체국민회의가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뽑기 때문이에요. 이런 말이 문제 될 거라곤 생각도 못했어. 그 후, 봉현 씨는 여기저기 끌려 다니며 폭행을 당했어. 날이 갈수록 폭행의 강도는 점점 심해졌대. 둘이서 이제 때리기 시작한 거예요. 주먹으로 뺨도 때리고. 취조하는 실인데 거기 데리고 가서 옷을 벗겨요. 옷을 벗겨 가지고 빨가 벗겨서 몽둥이로 이제 때리는 거예요 둘이서. 또 무릎을 꿇고 앉으라고 해서 무릎 사이에 나무를 놔두고 거기서 밟아버려요. 그러면 무릎이 팍 깨져요. 그런 고문을 당했어요. 경찰서 정보과실에서. '나는 비판 정도를 했다' '헌법을 폐지해야 한다.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 이런 말은 절대 한 것 없다. 근데 그게 안 통한다니까. 자기가 써갖고 와서 이렇게 '이대로 해달라' 그러니까 내가 이제 안 맞으려고 사인해 줬죠. -차봉현, 긴급조치 피해자 자백을 받기 위해 봉현 씨를 고문한 거야. 봉현 씨는 1년 6개월의 형을 선고받았어. 근데 이런 일을 겪은 건 봉현 씨 뿐만이 아니야. 긴급조치 9호로 처벌받은 사례들을 보여줄게. 박정희는 군인 출신이기 때문에 정치를 잘할 수 없어. 100억 불 수출이라 하면서도 수입에 대해서는 은폐하고 있잖아. 언론의 자유도 없는 거야. 이런 말을 했다고 징역 8년을 선고받았어. 또 어떤 남자는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박정희 정치는 뭣~도 아니다 이렇게 외쳤어. 판결은 징역 1년. 자기야, 대통령이 내가 잘 아는 친구 언니와 애인 사이래 라는 가벼운 말. 이건 징역 1년을 선고받았어. 긴급조치 9호는 술 먹고 말 한마디 잘못해도 잡혀간다 해서 '막걸리 보안법'이라 불렸어. 심지어 노래도 마음대로 못 불렀어. 국가의 안전 수호와 사회 질서를 문란케 하는 대중문화가 있다는 거야. 그렇게 취한 조치가 '금지곡'. 1975년 한 해 동안 금지된 노래가 국내 가요만 222곡이야. 지금도 들으면 알만한 곡들이 이때 무더기로 금지가 돼. 김추자의 '거짓말이야'. 이 노래는 1971년 발매돼 아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어. 이 노래가 갑자기 금지된 이유는 '거짓말이야'라는 가사 때문에. '가사 내용 불신 조장', 그리고 창법도 저속하대. 신중현의 '미인'. 너무 유명한 노래지. '신중현과 엽전들'의 '미인'은 1974년에 발매돼 약 40만 장 이상의 앨범 판매를 올린 대히트곡이야. 이 곡이 금지된 이유는, 저속한 가사, 퇴폐한 곡이래. 어디가 저속하다는 걸까?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 이 가사를 학생들이 '한 번 하고 두 번 하고 자꾸만 하고 싶네~' 이렇게 개사해서 불렀대. 박정희 대통령이 대통령을 한 번 하고 두 번 한다고, 그렇게 비꼬고 풍자하니까 금지곡이 된 거 아니냐 라는 얘기가 있어. 그리고, 금지곡 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곡이 한 곡 더 있지. 바로 김민기의 '아침이슬'. 양희은이 부른 '아침이슬'이 많이 알려져 있지. 이 노래를 작사, 작곡한 사람이 바로 김민기야. 이 곡이 금지된 이유는, 없어. 기록에 금지 사유가 아예 적혀 있지 않아. 보통 이렇게 금지곡이 되려면 그 옆에 금지 사유가 있어야 돼요. 아무리 엉망으로 하더라도 사유가 있어야 되잖아요. 근데 '아침이슬'은 금지 사유가 없어요. 이걸 대학생들이 시위에 불렀다고 금지를 시키기에는 너무 논리가 옹색한 거죠. 금지 사유가 없어. -강헌, 음악평론가 유신 반대 시위 현장에서 많은 학생들이 김민기의 노래를 불렀어. 그렇게 김민기의 노래는 모두 금지곡이 되었고 그는 보안사 등 여기저기를 끌려 다니며 조사를 받고 활동 또한 탄압을 받았어. 금지라는 행위, 검열이라는 행위가 뭐가 나쁘냐면요. '상상력에 제한이 가해져서는 안 된다'라는 이유인 겁니다. 결국 검열은 상상력의 잠재력을 사실은 원천적으로 파괴시키는 행위예요. 알아서 기게 만드는 행위예요. 그걸 알아서 기는 예술가들이 어떤 작품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결국 그런 표현의 자유를 물리적인 공권력으로 억압한다는 얘기는 그냥 간단한 얘기예요. 그냥 단순히 '이 노래 부르지 마, 이 영화 보지 마, 이 책 읽지마'로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이것은 기본적으로 민주주의가 보장하고 있는, 헌법이 보장하는 모든 기본권이 '전부 구금될 수 있다'는 얘기이고 실제로 그렇게 됩니다. -강헌, 음악평론가 ▲ 유신의 종말 말 한 마디 조심하고, 노래도 마음대로 못 하는 시대는 몇 년 간 이어져. 그러던 중, 1979년 민중의 불만이 폭발하는 사건들이 일어나. 'YH 사건' 혹시 들어봤어? 8월 9일, 가발공장이었던 YH무역의 일방적인 폐업 공고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이 당시 야당인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이게 돼. 여공들의 호소를 받아 주고 당사로 받아준 사람이, 당시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야. 하지만, 곧 야당 당사에 경찰이 투입돼. 농성을 하던 노동자들을 경찰은 무차별 폭력과 강제 연행으로 진압했어. 이를 지켜 본 김영삼 총재는 박정희 정권과의 정면대결에 들어가. 그러다 김영삼 총재는 국회의원 제명을 당해. 제명된 후 이렇게 말했지. 아무리 닭의 목을 비틀지라도 새벽은 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10월 16일 부산. 유신철폐! 독재타도! 를 외치며, 김영삼의 정치적 본거지였던 부산 시민들이 들고 일어났어. 부산대에서 수백 명으로 시작된 시위는 수천 명으로 늘어났고, 결국 수 만명의 군중이 모였어. 그리고 부산에 비상계엄이 선포돼. 부산 시내에 탱크가 등장했어. 그러나 시민들은 물러서지 않았고 시위는 마산으로까지 번졌어. 바로 '부마항쟁'이야. 김재규의 법정 진술에 따르면, 부마항쟁을 보고 받은 박정희 대통령이 이런 말을 했다는 거야. 이제부터 사태가 악화되면 내가 발포 명령을 하겠다. 그리고 부마항쟁 열흘 뒤인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열린 연회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에 맞아 사망해. 이렇게 유신 시대는 끝을 맞게 돼.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궁정동 안가. 유신헌법의 초안이 작성된 장소 어디라고 했지? 그래 궁정동 안가. 거기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며 길고 길었던 유신 시대는 끝이 났어. 7년간 이어진 유신체제. 그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지. 언론의 자유를 위해 싸운 분들은 마지막까지 철야 농성을 하며 저항했지만, 결국 회사에서 강제로 끌려 나왔어. 당시 100 명이 넘는 언론인이 해임을 당하게 돼. 긴급조치 9호로 재판을 받던 학원강사 봉현 씨는 박정희의 사망 후 최종 면소 판결을 받고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어. 하지만 다시 강사로 취업할 수는 없었다고 해. 긴급조치는 30년이 훨씬 지나 2000년대에 들어서야 위헌 판결이 내려졌어. 2010년 대법원은 긴급조치 1호가 유신헌법, 현행헌법에 위험이라고 판단했고, 그 이후 긴급조치 4호, 9호 역시 위헌이라 했어. 2013년 헌법재판소에서는 긴급조치 1호, 2호, 9호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어. 그리고 2018년 대법원에서는 1972년 비상 계엄 포고령에 대해 이렇게 판단했어. 당시의 국내 정치 상황 및 사회 상황이 계엄법에서 정한 '군사상 필요할 때'에 해당한다고 할 수 없다. 계엄 포고는 헌법과 법률에서 정한 발동 요건을 갖추지 못한 채 발령되었고, 구 헌법, 현행 헌법, 구 계엄령에 위배되어 위헌이고 위법하여 무효이다. 노벨문학상 수상한 한강 작가가 이런 말을 했어.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라고.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현재도 언젠간 과거가 될 거야. 현재가 어떻게 기록될지는, 지금 우리의 몫이지 않을까?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지금 시국과 딱…'꼬꼬무', 10월 유신과 긴급조치 다룬다
등록일2025.03.13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가 1972년 10월 유신과 긴급조치, 이후 발생한 사건들을 공개한다. 13일 방송될 '꼬꼬무'는 '유신 헌법과 긴급조치'를 주제로, 방송인 홍석천, 배우 박효주, 아나운서 이인권이 리스너로 출격한다. 앞서 진행된 녹화에서 '10월 유신과 긴급조치'에 대해 장도연이 오늘의 회차는 말에 관한 이야기이다 라고 밝히자 박효주는 요즘 말이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올해 들어서 말을 많이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고 말해 그 이유를 궁금케 했다. 미리 공개된 '꼬꼬무' 예고 영상에는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 선포 그리고 대통령의 특별선언, 그 후의 이야기가 예고됐다. 리스너들은 70년대 서울 도심 한복판에 군인과 탱크가 등장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고, 박정희 대통령 각하는 비상계염령을 선포해 조국 통일의 기원이 성취되는 그날까지 라는 멘트의 당일 뉴스 화면이 등장해 긴장감을 높였다. 이어 대통령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카드 3장과 함께 장현성, 장성규, 장도연은 각각 긴급조치 1호와 2호가 , 긴급조치 4호가 ,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됐어 라고 밝혀 리스너 이인권과 박효주를 놀라게 했다. 이번 '꼬꼬무'에서는 '술 먹고 말 한마디 잘 못해도 잡혀간다'는 의미에서 일명 '막걸리 보안법'이라 불렸던 '긴급조치 9호' 뿐만 아니라, 언론을 통제하던 중앙정보부에 저항한 매체에서 발생한 사건, 부산과 마산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부마민주항쟁'의 전후까지 공개된다. 이에 박효주는 와, 나 소름 돋았어 라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홍석천은 장현성에게 너랑 나랑은 좋은 어른이 됐으면 좋겠다 고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등 다채로운 반응을 보인다. '꼬꼬무'의 '유신 헌법과 긴급조치' 편은 13일 밤 10시 20분 방송된다.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영화로 만들어도 욕먹어 …'세상에 이런 일이', 믿을 수 없는 '도플갱어' 사연
등록일2025.01.16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영화에서 볼 법한 '도플갱어' 스토리가 공개된다. 16일 방송될 SBS '와!진짜? 세상에 이런일이'에서는 운명 같은 만남을 경험한 두 명의 이초희의 사연이 소개된다. 일본 여행에서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이 이름부터 생일, 혈액형, MBTI 등 무려 인생의 10가지 궤적이 동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MC 김용명은 이 믿기지 않는 우연에 영화에서나 볼 법한 스토리 라고 감탄했고, 전현무는 영화로 만들었으면 현실성 없다고 욕먹을 이야기 라며 혀를 내둘렀다. 출연자들은 이 희박한 확률을 수학적으로 확인하기 위해 수학 강사 정승제에게 전화 연결을 시도했다. 그는 이 두 사람의 만남이 '10해분의 1' 확률에 해당한다고 밝혀 모두를 놀라게 했다. 이 놀라운 확률을 실제로 겪은 두 사람, 과연 그들의 사연이 무엇일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이날 방송에는 SBS 아나운서 이인권이 게스트로 출격했다. 이인권은 현재 화제의 코너인 '친목회'의 진행자로 활약 중이다. 그의 등장에 MC들은 TV로만 보던 사람을 실제로 보니, 연예인 만난 것 같다 라며 반갑게 맞이했다. 전현무는 이인권을 'SBS의 전현무를 꿈꾸는 욕망 아나운서'로 소개하며, 그가 퇴사를 꿈꾸고 있다는 짓궂은 농담을 던졌다. 등장 30초 만에 진행된 '마라 맛 토크'를 통해 이인권은 본격적인 예능 신고식을 치렀다. 그가 예능에서 어떤 매력을 보여줄지 기대를 모은다. 한편, 보기만 해도 행운이 가득한 '초 럭키비키(?)'한 사연도 공개된다. 군산의 한 중국집 사장 부부가 요리용으로 산 달걀에서 무려 37개 연속 쌍란이 나오자, 이를 제작진에게 제보한 것. 이에 제작진이 현장에서 남은 달걀을 깨 본 결과, 달걀 59개가 연달아 쌍란으로 나왔다. 이를 본 MC들은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고 급기야 김용명은 스테비아 토마토처럼 뭔가 안에 넣은 거 아니냐 며 농담 섞인 의혹을 제기했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이 행운의 순간은 첫 영상으로 소개될 예정이다. '아귀' 코너에서는 놀라운 손아귀 힘을 가진 19살 소년이 등장한다. 그의 악력은 평균 '100kg'대로, 소방관 체력 시험 만점 기준인 60kg을 훌쩍 웃도는 기록을 자랑한다. 그는 손가락 하나로 콜라 캔을 뚫어버리는 것은 물론, 한 손으로 배를 박살, 단단한 타조알도 두 손바닥으로 으깨버리는 괴력의 소유자다. 이를 지켜보던 백지영은 19살인데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라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제작진은 그의 실력을 입증하기 위해 국내 팔씨름 동호회 회원들과 함께 '팔씨름왕 선발대회'를 개최했다. 과연 19살 소년이 왕좌에 오를 수 있을지 궁금증을 더한다. 이어지는 '순정남 특집'에서는 한 우물만 파는 이 시대 진정한 순정남들을 소개한다. 첫 번째 주인공은 9살 소년으로 엄마 뱃속에서부터 9년 동안 함께 한 애착 이불에, 두 번째 주인공은 75년 인생의 반을 함께 달려온 올드카 'H사 프레스토'에 순정을 바친다. 두 주인공 모두 순정의 대상인 이불과 자동차를 분신처럼 여기며 깊은 애정을 과시한다. 이에 지켜보던 아나운서 이인권은 본인이 태어났을 때 선물 받은 35년 된 애착 인형을 꺼내며 이게 침대 한 편에 있어야 잠을 잔다 라고 밝혔는데, 원형을 잃은 충격적인 애착 인형의 모습에 스튜디오가 발칵 뒤집혔다는 후문이다. 마지막으로 소개되는 코너에서는 50년 동안 고주박(썩은 소나무의 그루터기)을 모아온 남성의 사연이 공개된다. 제보를 받고 찾아간 주인공의 집은 마당부터 집안까지 꽉 들어찬 고주박으로 발 디딜 틈 하나 없이 가득 차 있었다. 이를 본 아나운서 이인권은 파묘를 보는 것 같다 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혹시라도 불이 나서 고주박이 타 버릴까, 겨울에도 전기를 거의 쓰지 않고 난방용 텐트를 치고 생활한다는 주인공, 그가 고주박에 빠지게 된 이유가 공개된다. '와!진짜? 세상에 이런일이'는 16일 목요일 밤 9시 방송된다.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김민기 부고 기사를 쓰려 했는데 이런 글이 되었습니다 [스프]
등록일2024.07.24
오비추어리(Obituary). 부고 기사를 뜻합니다. 해외 언론에서는 부고 기사가 굉장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필력 뛰어난 기자들이 부고 기사를 맡습니다. 이코노미스트는 마지막 페이지를 부고 기사에 모두 할애하고, 뉴욕타임스는 부고 기사만을 모아 책으로 낼 정도입니다. 학전 김민기 대표가 별세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22일, '김민기 오비추어리'를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러겠다고 하고, 예정됐던 팟캐스트 녹화를 끝내고, 책상 앞에 앉아 '오비추어리'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가요. 영 글이 써지지 않았습니다.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다가 포기하고, 퇴근 후 김민기 대표의 빈소를 찾았습니다. 영정 속 김민기 대표는 활짝 웃고 있었습니다. 영전에 헌화하고 묵념하고 마음속으로 인사를 전했습니다. 대표님, 항상 그 자리에 계셔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학전을 취재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많이 그리울 거예요. 잊지 않겠습니다. 고통 없는 곳에서 편히 쉬세요. 다시 눈을 뜨고 영정을 마주하는데, 그 환한 웃음 앞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유족들과 인사하고 나와서도 한동안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문득 10여 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갑작스럽게 암 선고를 받고 투병 생활 1년도 안 되어 70대 초반에 돌아가셨습니다. 김민기 대표는 올해 73세로, 역시 떠나기엔 아직 이른 나이였습니다. 빨리 자리를 뜨기 싫었습니다. 빈소를 지키는 학전 옛 직원들, 안면 있는 배우들을 만나 인사하고, 김민기 대표를 추억했습니다. 문상객 중에 김민기 대표의 대학 시절 친구인 한 어르신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그분은 '민기는 정말 그가 부른 노래 가사처럼 아름다운 사람이었다'며, 김민기 대표 이야기를 잘 써서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을 들으며 밤늦게 집에 돌아왔고, 계속 뒤척이다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그 어르신의 당부를 떠올리며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역시 글이 써지지 않았습니다. 할 말이 너무 많기도 하고, 할 말이 없기도 했습니다. 김민기 대표를 떠올리면 자꾸 눈물이 났습니다. 이제 왜 글이 안 써지는지 깨달았습니다. 저는 고인의 가족도 친구도 아니지만, 마치 아주 가까운 사람을 떠나보낸 듯한 슬픔에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1998년 뮤지컬 '의형제'를 취재하며 김민기 대표를 처음 만났으니 취재원과 취재기자로 맺은 관계는 꽤 오래되었지만, 사실 자주 왕래하며 가깝게 지냈던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그저 학전에서 새로운 공연이 올라갈 때 취재 가서 김민기 대표 이야기를 들었고, 공연을 봤고, 가끔 공연 뒤풀이에 함께 간 정도입니다. 코로나19 이후 몇 년간은 거의 만나지 못했고, 학전 직원들을 통해 안부를 전해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저에게 단순한 '취재원' 이상이었습니다. 그 유명한 '아침이슬'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학전에서 올라가는 공연들이 좋았습니다. 김민기 대표는 말수가 적었지만 항상 '진심'이 느껴졌습니다. '지하철 1호선' 3천 회 공연 같은 특별한 날마다, 학전을 거쳐 간 배우들이 다시 모여 정말 행복해하는 걸 봤습니다. 학전을 드나들며 취재한 시간이 쌓이면서, 학전을 거쳐 간 배우들이, 가수들이, 스태프들이 왜 그렇게 그를 따르고 사랑하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어른'이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 이익이 아니라 원칙을 중시하는 고집, '앞것'을 빛나게 하려는 '뒷것' 정신,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려는 헌신, 정직하고 치열한 예술혼. 그는 이렇게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명감에 불타서' 그렇게 살았다기보다는, '선량하고 따뜻한 사람'이었기에, 그래서 '남들이 안 하니까 나라도 해야지' 생각했기에, 어렵고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시선은 항상 화려하고 밝은 곳보다는 그늘 쪽을, 약자를 향했습니다.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은 대도시 서울 서민들의 고단한 삶을 그린 작품이었습니다. 그리고 잘 나가던 '지하철 1호선'을 멈추고 그가 몰두했던 것은 어린이 청소년 연극이었습니다. 상업적인 어린이 문화는 범람하는데, 진정 어린이들을 중심에 놓은 어린이 문화는 없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습니다. 다른 물가는 올라만 가는데, 더 많은 어린이들이 봐야 한다며 오히려 티켓값을 내리기까지 했죠. 그러려고만 했다면 돈 많고 힘 있는 사람들 덕을 볼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오롯이 혼자서 자신의 소명을 감당했습니다. 학전의 폐관 소식이 전해졌을 때, 많은 이들이 '학전이 배출한 그 많은 스타들이 조금씩만 도와주면 살리는 건 문제가 아닐 텐데' 하고 의아해했지만, 그는 이런 도움을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학전에서 가장 오래 일한 김성민 총무팀장이 김민기 대표의 별세 소식을 전하면서 밝혔듯이 말이죠. 그는 자신이 시작한 일은 자신이 감당하겠다는 뜻이 강했습니다. 누구한테 이 짐을 맡기겠느냐며 학전 소극장을 닫기로 한 것도, 이름을 남기는 것조차 원하지 않았던 것도 그래서였을 겁니다. 학전은 곧 김민기였습니다. 유족들이 조의금과 조화를 사양한다고 한 것도 평소의 그를 떠올리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덕스럽고 이상하게 돌아가도, 돈과 명예를 좇는 이들의 아귀다툼이 아무리 심해져도, 김민기 대표는 항상 그 자리에서, 자신이 해야 한다고 믿는 일을 한결같이 묵묵히 하고 있었습니다. 대학로에 가면 변함없이 학전이 있고 김민기 대표가 있다는 사실이, 당시엔 깨닫지 못했지만 저에게도 커다란 위안 혹은 버팀목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학전은 저에게도 고향집과 비슷한 곳이었습니다. 자주 가지는 못하더라도 찾아가면 항상 반겨주는 부모님이 계신 고향집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진 것만 같습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저는 지금 큰 상실감에 휩싸여 있습니다. 김민기 대표가 떠난 지금, 새삼 그가 저에게 얼마나 큰 존재였는지 깨달았습니다. 아아. 저는 아무래도 오비추어리를 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미 고인의 삶을 잘 정리한 부고 기사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SNS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김민기 대표를 나름의 방식으로 추모하는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저도 그래서 조심스럽지만 김민기 대표에 대한 개인적인 추억을 공유하기로 했습니다. 오래전 일입니다. 학전에서 공연을 보고 뒤풀이로 몇몇이 맥주를 한 잔 했습니다. 당시 고양시에 살았던 저는 방향이 비슷해 귀갓길 김민기 대표와 함께 택시를 타게 되었습니다. 서울 근교와 도심을 오가는 '총알택시'가 있었던 시절인데, 신촌 기차역 앞이 총알택시 집결지 중 하나였죠. 역 앞에 택시를 쭉 세워놓고 모여 있던 택시기사들이 멀리서도 김민기 대표를 알아보고 '형님! 오늘은 좀 일찍 오셨네' 했습니다. 김민기 대표는 사실 유명 인사였으니까요. 기사들끼리 '오늘은 자네가 형님 모셔다 드려!' 하더라고요. 그렇게 택시를 타고 출발하는데 이전에도 자주 타서 아는 사이였나 봅니다. 기사 아저씨가 말을 걸어왔고 김민기 대표와 대화가 시작됐습니다. 오늘은 많이 안 드셨냐, 어떻게 지내시냐, 이런 가벼운 이야기들 끝에 뜻밖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제가 어제 시 한 번 써봤는데 말이죠, 형님 이런 거 잘 아실 거 같아서... 한번 좀 봐줘요. 에이, 내가 뭘 잘 알아. 그래도 우리보단 많이 배운 분이잖아요. 기사가 주섬주섬 꺼내 뒷좌석으로 넘겨준 종이쪽지에는 짧은 시가 한 편 적혀 있었습니다. 저는 옆자리였고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무언가 풍경을 묘사한 시였던 것 같습니다. 김민기 대표는 시를 읽더니 웃으면서 '잘 썼네!' 하고 칭찬했습니다. 택시기사는 쑥스러워하며 '정말요 형님? 그냥 끄적거려 본 건데' 했고요. 택시기사가 시를 쓰고, 택시를 탄 김민기 대표한테 품평을 받는 상황이라니.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어 웃음이 나왔습니다. 다음 신호등에 차가 서자 기사는 얼마 전에 표가 생겼는데, 이 공연 어떨는지, 한 번 가봐도 될지 모르겠네요? 하면서 무슨 공연 할인권을 보여줬습니다. 얼핏 봐도 엉성한 게 제대로 된 공연 같진 않았습니다. 김민기 대표는 아이고 이런 데 가지 말고, 다음에 우리 공연 초대할 테니 한 번 와서 보라고 했습니다. 택시기사와 나누는 이야기를 듣다가, 저도 그날은 평소 하던 공연 관련 질문이 아니라, '왜 '아침이슬'을 안 부르시냐'고 물었던 것 같습니다. 그 노래는 내 손을 떠났어요. 이미 내 것이 아니야 했던 것도, 요즘 오디션 가보면 '아침이슬'을 부르는 놈들이 있다 면서 살짝 역정을 냈던 것도 기억납니다. '아침이슬' 부르면 바로 '탈락'이라는 그에게 이유를 물었습니다. 뮤지컬 노래가 아닌데 그걸 굳이 왜 부르냐고. 오디션에서 부를 노래가 아니지. 세월이 흘러 그날 밤 택시 안에서 나눴던 이야기들이 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저희 집이 멀지 않아 금방 택시를 내려야 했기에 아쉬워했던 건 생각납니다. 택시 안이 참 따뜻했다는 느낌도 남아 있습니다. 그는 그렇게 표 내지는 않지만 정 많고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김민기 대표를 지난해 말 정재일 음악감독이 세종문화회관에서 연 콘서트에서 마지막으로 만났습니다. 그날의 앙코르는 김민기 대표에게 바치는 무대였습니다. '아름다운 사람' 음원에서 추출해낸 김민기 대표의 목소리에 정재일 감독의 기타 반주가 어우러졌습니다. 그날 객석에는 김민기 대표도 앉아 있었습니다. 공연장을 나서다가 안면 있는 학전 직원과 마주친 덕분에 김민기 대표와 인사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아끼는 후배의 공연을 보기 위해 힘겨운 외출을 한 그는 지팡이를 짚고 병색이 완연했지만, 낮고 깊고 따뜻한 목소리, 소탈한 웃음과 장난기는 여전했습니다. 저를 보자마자 '저기 편파 방송 기자 왔다. 학전만 좋아하는 편파 방송 기자!' 하고 농담을 던졌고, 정재일 감독에게는 '그렇게 남의 목소리 맘대로 갖다 써도 돼? 응?' 하고 짐짓 으름장을 놓으며 환하게 웃었습니다. 그날이 마지막 만남이 되지 않기를 바랐지만, 결국 마지막이 되어버렸습니다. 학전이 있던 자리에 어린이 청소년 전용극장인 꿈밭극장이 문을 연 지난 17일, 객석에서 즐거워하는 어린이들의 웃음 소리를 들으며 김민기 대표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습니다. 빈소에서 만난 학전의 한 직원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그도 저와 똑같은 생각을 했다 했습니다. 대표님께 보여드리려고 그날 사진을 많이 찍었거든요. 아직 보여드리지 못했는데 며칠 만에 이렇게 돌아가실 줄은...... 24일 오전, 고 김민기 대표의 발인이었습니다. 고인은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꿈밭극장을 거쳐 장지로 향했습니다. 저도 꿈밭극장 앞으로 달려갔습니다. 정말 마지막으로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학전을 거쳐 간 배우와 가수들, 수많은 사람들이 아침 일찍 모여 고인의 가는 길을 배웅했습니다. 고인의 영정을 모신 상주가 극장 앞마당과 극장 내부까지 돌아보고 나왔습니다. 저는 좀 많이 울었습니다. 지금은 일선 취재 부서가 아니라 뉴미디어 부서에서 문화 콘텐츠를 기획하고 있어, 제가 현장 '취재'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현재 아시테지 여름 공연축제가 열리고 있는 꿈밭극장은 날마다 어린이들의 즐거운 웃음으로 가득합니다. 눈시울이 붉어진 꿈밭극장 관계자에게 김민기 대표님이 생전에 보셨다면 정말 좋아하셨을 텐데요 했더니 김민기 선생님이 보셨대요! 보시고 좋아하셨대요! 했습니다. 김민기 대표가 별세 얼마 전에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꿈밭극장을 봤다는 겁니다. 감염 우려 때문에 차에서 내리지는 못했지만 학전이 어린이 청소년 전용극장 '꿈밭극장'으로 단장한 모습을 보고 기뻐했다고 합니다. 꿈밭극장을 들른 장례 차량이 장지를 향해 출발하기 조금 전부터 그쳤던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 부르기 시작한 '아침이슬'이 합창이 되었고, 차량이 빠져나간 극장 앞길 가운데 선 색소폰 주자가 홀로 '아름다운 사람'을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의 '무임승차' 밴드 멤버인 이인권 씨의 연주였습니다. 저는 이 노래를 부른 김민기 대표의 목소리를 떠올렸습니다. 어두운 비 내려오면 처마 밑의 한 아이 울고 서 있네 그 맑은 두 눈에 빗물 고이면 으으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세찬 바람 불어오면 벌판의 한 아이 달려가네 그 더운 가슴에 바람 안으면 으으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새하얀 눈 내려오면 산 위의 한 아이 우뚝 서 있네 그 고운 마음에 노래 울리면 으으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그이는 아름다운 사람이어라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