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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찐리뷰] 수학여행 간 중학생 46명 사망 참사…어른들의 안전 불감증이 부른 비극
등록일2026.10.05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1일 방송된 '악몽의 수학여행'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개그우먼 겸 배우 정이랑, 가수 볼빨간사춘기 안지영, 그룹 원어스 멤버 건희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추억의 수학여행 때는 1970년 10월 14일 아침. 서울 마포에 있는 경서중학교. 조회 시간 종소리가 울릴 즈음, 학교 운동장에 버스들이 줄지어 들어서. 왜냐. 이날은 바로 3학년 학생들의 수학여행 날이었거든. 경서중학교의 수학여행 일정은 원래 2박 3일이었어. 그런데 당시엔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수학여행비를 못 내는 친구들이 많이 있었대. 결국 당일치기 일정으로 변경됐지만, 16살 어린 나이에 떠나는 친구들과의 생애 첫 수학여행이잖아. 얼마나 설레고 신났겠어. 그중에도 4반, 종철이는 특히 더 신이 나있어. 엄마가 주신 특별 도시락과 용돈, 그리고 수학여행을 위해서 특별히 준비한 희귀 아이템까지 챙겨왔거든. 그게 뭐였을까? 종철이에게 직접 들어볼게. 경서중학교 3학년 4반에 있었던 최종철입니다. 학교에서 버스 대절해서 간 소풍, 그때는 수학여행이라고 그랬는데. 그건 처음이었고요. 먼 길 간다고 하니까 부모님이 용돈도 두둑하게 주셨고. 특히 어디서 빌려온 걸로 알고 있는데, 카메라를 빌려주셨고. 그때 당시에는 카메라를 쉽게 접하는 것이 아니었고. 친구들이랑 같이 가는 여행이었기 때문에, 그날이 저한테는 아주 대단한, 특별한 날이었단 말입니다. -최종철,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4반 그때만 해도 이런 카메라는 정말 귀한 물건이었어. 종철이는 아버지가 빌려준 새 카메라를 목에 걸고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버스에 올라. 경서중학교 3학년 학생들의 수학여행지는 바로 당시 최고의 핫플레이스, 바로 충남 아산에 있는 현충사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성역화 사업을 통해 의리의리하게 단장했어. 게다가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고 3개월밖에 되지 않았을 때야.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를 달려 멋지게 단장한 현충사를 보며 애국심을 고취하는 게, 당시 최고의 수학여행 코스였어. 이게 그날 찍은 사진들이야. 친구들이랑 계속 웃고 있는 표정이 얼마나 즐거웠는지가 보이지. 학생들은 현충사 참배를 마치고 근처에 있는 신정호수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 그리고 오후 4시, 어느새 돌아갈 시간이야. 학생들은 앞다퉈 버스로 달려가기 시작했어. 늦게 타면 서울까지 계속 서서 가야 했거든. 종철이 역시 타고 왔던 3호차에 오르자마자, 재빨리 찜해둔 자리에 앉았어. 종철이는 운전석 바로 옆, 엔진룸 위 쪽에 앉았어. 옛날 버스는 이렇게 엔진룸이 툭 튀어나와 있었어. 보통은 짐을 올려놓거나 하는데, 자리가 없을 땐 앉기도 했어. 다른 아이들이 일반 좌석으로 몰리는 사이, 종철이는 엔진룸 위에 자리를 잡은 거야. 순식간에 아이들로 가득 찬 버스는 곧바로 출발했어. 얼마나 갔을까? 종철이는 곧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어. 엔진룸 위에 앉아 있으니까 엉덩이가 따뜻해서 스르르 잠이 온 거야. 그런데 그때! 잠에서 깬 종철이는 주위를 살피고는 깜짝 놀랐어. 생각지도 못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거든. (눈을 떠)보니까… 여하튼 피를 많이 흘렸고요. 병원에서 깨어났어요. 한 이틀 정도 뒤에 깨어났다고 했으니까요. 그리고 그때 신문도 보여주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아… 사고가 났었구나…' -최종철,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4반 눈을 떴을 땐 을지로에 있는 한 병원이었대. 그제야 몸을 살펴보니까 온몸이 만신창이더래. 얼굴은 상처투성이에 오른쪽 다리는 뼈가 다 부서졌어. 그리고 왼쪽 다리는 뼈가 보일 만큼 살이 파여서 출혈이 엄청났다고 해.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지금까지도) 사고 난 것 자체를 전혀 기억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냥 자다가 기절해 버린 게 아닌가 추측건대. -최종철,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4반 ▲ 의문의 사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 종철이가 탔던 그 3호차 버스가 가장 먼저 출발을 했어. 당시 상황을 기억한다는 다른 반 친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봤어. 저는 박상준이고요. 3학년 7반이었습니다. 두 번째 차로 우리가 가는데, 안 보였어요 앞차가. 아예. 그리고 한 10분 정도 우리가 탄 차가 서 있었어요. 차들이 막혀서 서 있으니까 서 있던 거죠. '왜 안 가지?' 하는데 옆에 어떤 아주머니 두 분이 가다가 창문을 막 두드리는 거예요. 그리고 '(앞에) 학생들 학교 차 같은데 사고 났어! 사고 났어!'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몇 명인지 몰라도 후다닥 뛰어내려서 계속 뛰었어요. 우리 학교 차가 사고 났다고 하니까. 이제 급한 마음에 선생님도 나가고 막 애들이 쫓아 나간 거죠. -박상준,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7반 그때 한 학생이 찍은 사진이 있거든. 바로 이 사진이야. 까만 연기가 막 피어 오르지. 상준이는 연기가 피어 오르는 곳을 향해 정신없이 뛰었어. 시야를 가로막은 언덕을 넘으니까 그제야 충격적인 광경이 눈에 들어왔어. 앞서 가던 3호차, 종철이가 타고 있던 버스가 불길을 휩싸여 있는 거야. 상준이는 정신없이 버스를 향해 달려갔어. 우리가 접근하기가 힘들었어요. 불이 붙은 게, 어디 한 군데 붙은 게 아니라, 전체가 다 붙은 거예요. 버스가 하도 활활 타오르니까 불길이 유리창으로 나오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진짜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어요. 발을 동동 구르면서 보고 있던 거죠. 난 그 광경이 진짜 안 잊혀져요. 불길, 유리창 안으로 보이는 게… 하얀 머리들 몇 개가 보이는 거예요. 애들이 뭉쳐서 (쓰러져) 있는데. 그게 죽어도 안 잊혀요. 왜 이게 하얄까, 까매야 되는데... -박상준,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7반 처참한 광경 앞에서 멍하니 서 있는 아이들 중에는 학생회장 태선이도 있었어. 1970년 경서중학교 사고 당시 학생회장이었던 최태선입니다. 소방대원일 수도 있고 의용소방대원일 수도 있고 주민일 수도 있는데, 딱 막더라고요. 그리고 버스에 물을 뿌리고 있는 거예요. 제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실상 상황 종료. 그리고 연기가 나고 사랑하는 친구가… 이렇게 (쓰러져) 있더라고요. 여기에(머리쪽) 물을 맞으면서… 제가 그거 보면서 엄청 울었어요. 너무나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체를 모르겠더라고요. -최태선, 당시 경서중학교 학생회장 불타는 버스 안에 남겨져 있는 친구들을 보면서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는 거야. 불길에 휩싸인 3호차 버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당시 촬영된 사진을 보여줄게. 불타고 있는 버스 옆으로 선로와 기차가 보이지. 앞서 가던 3호차 버스가 기차와 충돌한 거야. 어쩌다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사고 차량에 타고 있던 학생들은 알고 있겠지. 하지만 종철이는 사고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래서 버스에 타고 있던 다른 생존자를 찾아봤거든. 다행히 사고 순간을 기억하고 있는 몇몇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어. 그 내용을 바탕으로 사고의 순간을 재구성해 볼게. ▲ 사고의 재구성 사고 당일 오후 4시. 신정호수에서 자유시간이 막 끝났을 때야. 선생님이 각자 타고 온 버스로 돌아가라는 말에, 3학년 4반 용섭이는 바로 버스로 달려가. 올 때 서서 왔더니 너무 힘들었거든. 갈 때는 꼭 앉아서 가고 싶었던 거야. 3호차에 오른 용섭이는 운전석 옆 엔진룸 위에 자리를 잡아. 맞아. 바로 종철이 옆에 앉은 거야. 잠시 후 버스가 시동을 걸고 출발을 했어. 옆에서 꾸벅꾸벅 조는 종철이와 달리, 용섭이는 버스 앞 풍경을 감상하며 가고 있었어. 오후 4시 20분. 천안 방향으로 가던 버스 앞에 철길 건널목이 나타나. 그리고 용섭이의 귀에 소리가 들려와. '땡땡땡땡' 건널목 경보기 소리야. 이 소리를 들었다면 운전자는 멈추는 게 맞잖아? 그런데 3호차 기사는 브레이크 대신 엑셀을 밟았대. 그러니까 앞차를 따라서 빨리 건널목을 통과하려고 했던 거야. 버스가 건널목에 들어서는 그때, 용섭이 눈에 뭔가가 들어와. 아저씨 기차가 와요!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어. 기차는 버스의 왼쪽 가운데 부분을 들이받았어. 용섭이는 엄청난 충격과 함께 버스 앞 유리를 깨고 튕겨나갔어. 그리고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대. 기차는 V자 모양으로 휘어진 버스를 80m 정도 더 밀고 간 후에야 멈춰서. 안에 있던 학생들은 모두 정신을 잃었어. 그런데 그때,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고 말아. 버스에 있는 연료통이 폭발한 거야. 불길은 엔진이 있는 앞쪽에서 시작되더니 삽시간에 버스 뒤쪽을 향해 번지기 시작해. 그때였어. 맨 뒷자리에 앉아있던 학생 하나가 정신을 차렸어. 3학년 3반 54번 김현철이었어요. 얼마 동안 기절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눈을 떴을 때는 벌써 차 안이 연기와 불로 차 있었고. 애들은 다 이렇게 쓰러지고, 이렇게 고개 숙이고. 이런 애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본능적으로 여기를 빠져나가야 되겠다고 생각해서. 옆 창문을 발로 깨고 버스에서 뛰어내려서 보니까. 거기서 (정신이 들어) 고개를 쳐들고 사방을 훑어본 애는 나처럼 뛰어나와서 살았는데, 그냥 거기서 고개 숙이고 있던 애들은 다 거기서 그 화마에 그냥 휩싸일 수 밖에 없죠. 14일이 있을 수밖에 없죠. 대형사고구나 이거는. 정말 큰 사고구나.. -김현철, 경서중학교 버스 참사 생존자 정신을 차린 현철이는 가까스로 탈출했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러지 못했어. 그런데 그 순간, 인근 주민들이 뛰어오기 시작해. 주변에 있는 돌로 유리창을 깨고 안간힘을 쓰며 학생들을 꺼내려고 하는데 쉽지가 않아. 바로 이것 때문이었어. 이 사진은 현충사에서 출발하기 전에 찍은 사진이야. 왜 구조가 어려웠는지 알겠어? 유리창 옆에 쇠파이프 같은게 지나갔어요. 그게 없었으면 더 많은 학생이 빠져나올 수도 있었는데. -김현철, 경서중학교 버스 참사 생존자 게다가 차체는 심하게 찌그러진 상태야. 그러니 구조가 얼마나 힘들었겠어. 주민들이 최선을 다해 몇몇 학생을 끄집어냈지만, 이내 버스 전체가 불길에 휩싸여. 결국 구조를 포기한 채 지켜볼 수밖에 없었대. 당시 현장에 있던 주민의 목격담이야. 바람에 날리는 불덩이처럼 버스가 불에 싸여 기관차에 밀려갔다. 버스 네번째 창가에 앉아있던 한 학생이 온몸에 불투성이가 된 채 '아저씨 나 살려달라'고 외마디 소리를 쳐 유리창을 깨고 그 학생을 구출하려 했으나, 끝내 몸이 밖으로 빠지지 않아 그대로 숨졌다. 그날의 참혹했던 현장을 직접 목격한 주민의 이야기도 들어볼게. 소리는 '쾅!' 소리 났죠. 그러니까 이 주변에 살던 사람들은 많이 나왔죠. 처음에는 불빛이 확 있었어. 그런데 불과 그게 한 30분도 안 돼서 다 타버리더라고. 완전히 싹 타더라고. 마음이 참담했죠. 진짜... 사람이 불에 탔으니까 막… 처참하게 그을려서 그냥 볼 수가 없었죠. 내가 그 당시에 한 18세 됐어요. 나도 어린 나이고 같은 비슷한 나이인데 진짜 마음이 안 좋았죠. -고광재, 사고 당시 목격자 이후 마을 의용소방대와 소방대까지 진화에 나섰고, 불길은 50분 만에 잡히긴 했어. 하지만 눈앞에 드러난 광경에 사람들은 할 말을 잃고 말아.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수학여행의 추억을 가득 싣고 올라오던 버스는 처참히 구겨져 있어. 그리고 그 안에는 새카맣게 타버린 시신들이 가득해. 사람들이 한 구 한 구 버스 밖으로 시신을 옮기는데, 끝나질 않아. 부상자 32명, 그리고 사망자는 45명. 버스 운전기사까지 총 46명이 현장에서 사망했어. 그렇게 경서중학교 수학여행 버스 사고는, 해방 이후 가장 참혹한 버스 참사로 기록이 됐어.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지. ▲ 참혹한 버스 참사 그러면 버스 안에서 가장 많은 사망자가 나왔던 곳은 어디였을까? 기차가 충돌한 버스 중간 좌석 쪽에 앉아있던 학생들은 대부분 살아남지를 못했다고 해. 그런데 버스 중간에 앉았던 아이들 중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학생이 하나 있어. 부상자 중 가장 상태가 심각했다는 그 학생을, 친구들은 아직도 기억해. 박민택이라고 있거든요. 내가 밥을 많이 뺏어 먹었어요 그 친구. 그때는 도시락을 난로에 쫙 쌓아 놓잖아요. 그때 중3 때 엄청들 먹으니까… 미안하죠 지금. 걔네 엄마가 새벽밥 지어서 먹으라고 자기 새끼 만들어 준 걸 엉뚱한 놈이 먹었으니 미안하죠. 특히 걔는 살아남았는데 화상을 제일 많이 입었어요. 그래서 제일 많이 마음이 지금도 많이 아프죠. -김현철,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3반 민택이 걔가 얼굴도 잘생겼거든요. 그랬는데 얼굴이 화상 입고 그래서, 마음이 좀 안 좋았죠. -최종철,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4반 3학년 4반 박민택. 민택이는 사실 너도 아는 얼굴이야. 처음에 봤던 이 사진 속 이 친구가 바로 민택이야. 수학여행 날 아침, 기차를 타고 통학하던 민택이는 학교에 가기 위해서 역에 도착을 했대. 그런데 함께 통학하는 친구 중 한 명이 나타나지 않는 거야. 바로 수학여행비를 내지 못한 친구였어. 민택이와 친구들은 등교도 미룬 채 그 친구의 집으로 우르르 몰려갔대. 야 중학교 시절 한 번뿐인 수학여행인데 같이 가자 친구를 설득한 끝에 민택이와 동네 친구들은 함께 수학여행 길에 오르게 돼. 수학여행 가는 그 버스 안에서도 민택이는 그 친구와 나란히 앉았대. 바로 3호차 중간 자리에. 버스가 불길을 휩싸였을 때 민택이는 구조됐지만, 그 친구는 결국 빠져나오지 못했어. 민택이는 목숨을 건졌지만, 사고 직후 사경을 헤매고 있었어. 얼굴과 머리 등 양팔과 손까지 심한 화상을 입은 상태야. 난생 처음 가본 그 수학여행에서 환하게 웃는 얼굴로 사진을 찍은 지, 불과 몇 시간 후의 일이었어. 그날 저녁, 사고 차량을 제외한 버스들은 다시 서울로 출발해. 버스 안은 그야말로 초상집이야. 올라올 때 분위기는 완전히 참담했죠. 중3이면 어린애잖아요. 다들 울고… 너무나도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정신이 나갔어요. -최태선, 당시 경서중학교 학생회장 서울로 올라오는 내내 라디오에서는 버스 사고에 대한 보도가 흘러나왔어. 뉴스에서는 병원에 실려간 30여 명의 생존자 이름을 쭉 말했어. 이게 어떤 상황이냐면, 수학여행을 떠난 470여 명의 학생 중에 30여 명의 부상자만 생존자로 방송이 된 거야. 이름이 불리지 않았던 그 400여 명의 나머지 학생들, 그 부모들은 기절 초풍할 일이야. 그게 아주 저는 제일… 버스 타고 오면서도 마음에 안 들더라고요. 우리 어머니는 제가 수학여행을 갔는데, 이 뉴스를 들으면 생존자 명단에 내가 없는 거예요. 죽었나 살았나 몰라요. -박상준,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7반 결국 경서중학교 교무실로 학부모들의 전화가 빗발쳐. 방송이 불러온 여파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어. 서울에 올라왔을 때 마포 종점 그쪽에서부터 학부모들이 난리가 아니었어요. 모든 학부모들이 다 나와 있으니까. 그러니까 완전히 아수라장이었죠. -박상준,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7반 그날 밤 10시 30분경 버스가 학교에 거의 도착했을 때였어. 학교 운동장은 물론 교문 밖 도로까지 수많은 인파로 가득 차 있어. 사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부모와 형제들, 거기에 취재진과 경찰들까지. 당시 기사에 따르면 무려 3천 명이 넘었대. 버스가 도착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버스를 향해 모여들기 시작해. 버스는 할 수 없이 옆 학교 운동장으로 핸들을 돌려. 하지만 부모들은 버스를 에워싼 채,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옆 학교까지 따라와. 아들이 무사하다는 걸 확인한 부모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려. 하지만 아들을 찾지 못한 부모는 어땠을까. '철수야', '아무개야', '어디 있냐 어디 있냐' 그러니까 (자식을 찾아서) 기뻐서 우는 사람. 자기 자식이 안 와서 슬퍼서 우는 학부형. 그게 막 혼재돼서, 이산가족 찾기의 한 10배쯤 된다고 봐야 할까요. -최태선, 당시 경서중학교 학생회장 난리가 아니었어요 그냥. 엄마들은 이름 부르고 다니는 거야 내 아들 이름을. 전부 다. 누가 살았는지 모르니까.저 같은 경우도 어머니가 오셨더라고요. 막 밖에서 '상준아 상준아' 부르면서 울면서 다녀요. 근데 자식이 산 엄마들은 괜찮은데, 죽은 아이들 엄마는… 그건 생각하기가 싫어요. -박상준,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7반 아들을 만나지 못한 부모들은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어. 뭔가 착오가 있을 거다, 우리 아들은 살아있을 거라 믿었어. 그런데 잠시 후에 누군가 운동장 한쪽에 이걸 갖다 놨어. 칠판 가운데 그어진 선을 기준으로 왼쪽은 사망자, 오른쪽에는 부상자. 생과 사를 나누는 무정한 칠판 앞에 결국 희망의 끈은 끊어지고 말아. 사망자 중에는 4대 독자도 있었어.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 돈을 벌며 힘겹게 동생을 뒷바라지해온 누나의 통곡 소리도 들려. 중학교 3학년, 불과 16살이야. 이 어린 생명들이 한순간에 쓰러지고 말았어. 대체 왜 이렇게 피해가 컸던 걸까? 경찰은 참사의 원인이 무엇인지 조사에 나서. 이제부터 드러난 사실들을 이야기해줄게. ▲ 참사의 이유 먼저 사고 버스를 보여줄게. 당시 사고가 났던 버스는 일본과의 기술 제휴를 통해 만들어진 버스였어. 이 버스의 정원은 39명. 아까 사고 당시 생존자 32명, 사망자는 45명이라고 했지? 사고 차량에는 77명의 학생들이 탑승했었어. 이건 뭐 지금 기준으로는 말이 안 되는 상황이지. 하지만 1970년대 당시에는 이게 일반적인 상황이었대. 통상 그 당시에는 모든 버스들이 그렇게 다 타고 다니고, 아침에 출근할 때는 그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타니까. 그렇게 탔었고. -최종철,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4반 돈이 없어서 못 가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줄여 줄여'한 게 버스 수도 줄이고 그랬을 거예요. 그래서 7대가 간 거죠. -박상준,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7반 총 9개 반이 수학여행을 가는데 버스는 7대를 불렀다고 해. 473명의 학생, 그리고 11명의 선생님. 총 484명이 이 7대의 버스에 나눠 탔던 거야. 계산해 보면 한 대에 약 70명 정도 탄 셈이야. 그런데 하필 사고가 났던 3호차에 특히 더 많은 77명의 학생이 탔던 거지. 3호차 버스에 3반이랑 4반 애들이 많이 탔어요. 3학년 3반 애들은 다 타고, 4반 애들이 한 15명, 20명 가까이 타서 그 버스에 7, 80명이 탔던 것 같아요. -김현철,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3반 그래서 사고가 난 버스 단 한 대에서 40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왔던 거야. 그런데 조사 결과, 또 다른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났어. 학생들을 인솔하고 안전을 책임지는 사람, 선생님이잖아. 그런데 알고 보니 사고 버스에는 선생님이 탑승하지 않았던 거야. 어떻게 버스에 애들만 태우고 출발하냐, 직무유기 아니냐, 여기저기서 교사들이 관리 감독에 소홀했다며 질타했어. 당시에 보도된 기사 내용이 있어. 학생들이 바깥 풍경에 취해 '즐거운 우리 캠프' 등 노래를 한창 신나게 부르고 있을 때, 운전사가 너무 시끄럽다고 고함을 지르며 뒤를 돌아보는 순간, '꽝' 하는 소리와 함께 차와 사람들이 함께 공중 분해됐다. -당시 보도 中 사람들은 어린 학생들이 시끄럽게 떠들었고, 이를 제지할 선생님이 버스 안에 없었다는 걸 사고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목했어. 그런데 취재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어. 56년 만에 처음 공개되는 이야기야. 이 얘기는 꼭 해야 돼요. 학생들이 다 나눠 타고 이제 선생님들이 버스에 올라 타야 되잖아요 인솔 교사들이. 그런데 그 차를 탈 때, 출발하기 전에 안 온 아이들이 있었어요. -박상준,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7반 '회장 다 왔니?' 그래서 '아니요, 두 명이 안 왔습니다' 인원 파악을 했는데 두 명이 안 온 거예요. 그래서 그 두 명 본 사람 없냐고 하니까, '아까 저수지에서 배 타는 거 봤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저수지로 한 200여 미터 정도 되는데 막 뛰어갔어요. 제가 '아무개야!' 막 불렀죠. '빨리 와! 다 탔어! 기다리고 있어!' 그랬더니 '알았어' 그러면서 그 친구들이 막 노를 저어서 오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다시 허겁지겁 뛰어 올라가서 선생님한테 '쟤네 이제 여기 타면 끝입니다' 딱 하는데, 버스 한 대가 갑자기 떠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3반하고 4반 탄 차가 떠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선생님들이 '저 차 왜 떠나지?' -최태선, 당시 경서중학교 학생회장 그래서 선생님들이 3호차에 못 타고, 거기서 이제 뒤죽박죽이 돼버린 거죠. -박상준,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7반 그 당시 뭐 전화기가 있습니까 무전기가 있습니까. 연락할 방법이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다른 선생님들도 '우리도 빨리 타고 갑시다' 이렇게 된 거예요. 그게 그 출발 당시까지의 정확한 팩트입니다. -최태선, 당시 경서중학교 학생회장 3호차 버스가 갑자기 출발하면서, 선생님이 안 탄 게 아니라 못 탄 거였다는 거야. 그리고 아까 내용 중에 학생들이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고 했잖아? 사고 버스에 타고 있던 학생의 말에 따르면, 기사에 나온 '즐거운 우리 캠프'라는 노래는 들어본 적도 없대. '시끄러웠었었다'라는 이런 부분들이 그냥 입담으로 하는 소리지, 사실과는 다른 얘기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통상적으로 애들이 조잘조잘하는 이런 정도. 우리 일반적으로 교실에서도 그렇잖아요. 시끌벅적하잖아요 노는 시간에. 그 정도 수준이지, 더 이상의 정도는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최종철, 경서중학교 버스 참사 생존자 그냥 친구와 잡담 정도 나누거나 잠을 자는 분위기였다는 거야. 그런데 당시 기사 중, 선생님들에 관한 더 충격적인 내용도 있었어. 사고 버스 700m나 뒤떨어져 온 맨 마지막 버스에 탔던 교사들은, 사고로 버스에 불이 나는 것을 보고 마을 건너 불 구경하듯 뒷짐만 지고 있었으며, 버스가 완전히 불길에 싸여 구조작업이 어렵게 되자, 교사들은 주민들의 눈매와 눈초리가 무서워, 사고 현장 인근 중학교 교무실로 피신했다. -당시 보도 중 '꼬꼬무'가 만난 학생들은 56년이 지난 지금이라도 이 부분에 대한 진실을 꼭 밝히고 싶다고 말했어. 기사들 나온 거 보니까 '선생님들이 동네 사람들 무서워서 학교로 도망갔다' 이렇게 나오더라고요. 그건 완전 잘못된 거고. -박상준,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7반 선생님들이 무책임하거나 그런 분들이 아니었어요. 굉장히 훌륭하신 분들이었기 때문에, '도망을 갔다' 이거는 아니에요. 그 부분은 좀 명예회복이 돼야죠. -최태선, 당시 경서중학교 학생회장 하지만 사고 직후 경서중학교 교장, 교감, 피해가 집중된 3학년 3반, 4반 담임교사는 파면되고 말았어. 또 수학여행에 동행됐던 교사 8명은 직위해제돼.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 학생들은 이 사고의 근본적 원인은, 선생님들의 잘못이 아니라 버스기사의 무단 출발 때문이었다고 하나같이 얘기하고 있어. 버스가 임의대로 출발하는 걸 무슨 재간으로 막습니까. -최태선, 당시 경서중학교 학생회장 진짜 선생님 타실 때까지만 기다렸어도, 사고가 안 났다고요. 근데 그런 얘기는 어떤 매스컴을 찾아도 없어요. -박상준,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7반 그리고 버스기사, 잘못한 게 또 하나 있어. 버스기사는 철길 건널목 앞에서 정지신호를 무시하고 엑셀을 밟았잖아.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다름아닌 사고 현장에 있었어. 서울에서 장항으로 가는 단선 철도와 온양에서 천안으로 향하는 도로가 교차하는 곳이야. 사고 직전 3호차 버스는 천안 방향으로, 그리고 기차는 온양 방향으로 가던 중이었어. 그때 경보기 소리가 기차가 오고 있다는 걸 알려. 하지만 버스기사는 멈추지 않고 오히려 더 빨리 건널목을 지나가려고 엑셀을 밟았지. 조사 결과, 현장에 있던 건물들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한 걸로 보인대. 철길 건널목 바로 앞, 불과 2, 3m 거리에 2층짜리 정미소 건물이 있었어. 게다가 그 옆으로도 철길을 따라 민가 여러 채가 늘어서 있었고. 기차가 이렇게 옵니다. 근데 코너에 방앗간이 있어요. 높은 방앗간. 그 방앗간 건물 때문에 기차가 오는 게 안 보입니다. -최태선, 당시 경서중학교 학생회장 원래는 철길 건널목 주변에는 시야를 가리는 건물이 있어서는 안 돼. 하지만 당시 철도청은 건설부와 협의가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미소를 방치했던 거야. 결국 버스기사는 경보기 소리에도 기차가 보이지 않자, 빠르게 건널목을 건너려고 했던 걸로 보여. 또 하나 사고를 불러온 결정적인 이유가 있어. 건널목이라면 꼭 있어야 할 그것, 차단기. 철길 건널목에는 등급이 나뉘어 있어. 먼저 1종 건널목에는 경보기와 차단기. 그리고 24시간 차량을 통제하는 관리원이 배치돼. 그 다음 2종 건널목에는 1종 건널목과 동일하지만, 관리원이 주간에만 배치되게 돼 있어. 그리고 3종 건널목에는 관리원이 아예 없고, 차단기도 없어. 기차가 오는 걸 알려주는 경보기만 있는 거야. 이 사고가 일어난 건널목은 3종 건널목이야. 현충사 성역화가 끝나자,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폭발적으로 증가해. 이 건널목을 지나는 차들이 하루에 5천 대가 넘었대. 그런데 교통량에 비해 건널목 등급이 너무 낮잖아. 등급을 상향시켜달라고 전부터 요청했지만 철도청은 받아들이지 않았어. 예산이 부족해서 안 된대. '재난은 몰래 오지 않는다'는 말이 있어. 대형 사고가 발생하기 전 반드시 수많은 작은 사고들과 징후가 있다는 뜻이야. 이 건널목에서도 여러 차례 사고가 있었지만, 아무런 조치도 이뤄지지 않았어. 만약 시야를 가리는 정미소 건물을 정리했다면, 그리고 건널목의 등급을 조정해서 차단기가 설치가 됐었다면. 그래도 사고가 일어났을까? 이 모든 조치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해도, 건널목 앞 '일단 멈춤'이라는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안전수칙만 지켰다면. 이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결국 각기 다른 어른들의 사정으로 안전을 소홀히 한 결과, 45명의 어린 생명들이 희생된 거야. '운전기사로서 자기가 지켜야 될 의무', '철도청에서 지켜야 될 의무', 그것만 지켰어도 사고 같은 건 충분히 안 일어날 수 있는 확률이 거의 99%가 아니겠나. 이런 생각이 들어요. -김현철, 경서중학교 버스 참사 생존자 ▲ 돌아온 아이들 사고 다음날 새벽, 경서중학교 운동장으로 구급차들이 줄지어 들어서. 그리고 45개의 목관을 내리기 시작해. 수학여행을 떠났던 학생들이 학교로 돌아온 거야. 싸늘한 주검이 된 채로. 아이들이 꿈을 그리던 미술실이, 노래소리가 들려오던 음악실이, 임시 안치소가 됐어. 시신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부모들이 안치소로 달려와. 안 된다고 막아도 막무가내야. 나는 내 아들 얼굴 보기 전엔 못 믿습니다! 왜 못 보게 합니까!! 학교 측은 어쩔 수 없이 안치소 문을 열어줬어. 그리고 시신을 확인한 부모들은 충격과 당혹감에 말문이 막혀. 16년을 키운 내 자식인데 도무지 알아볼 수가 없었거든. 훼손된 시신을 보고 졸도하는 부모님도 많았다고 해. 한 어머니는 손에 바나나를 들고 아들을 애타게 찾고 있어. 네가 그렇게 사달라고 조르던 바나나 엄마가 사왔다. 바나나 먹고 싶다며… 어디 있니? 그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고 해. 오후 1시경, 안치소 문을 열고 들어서는 사람이 있었어. 지금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파견된 인물이야. 경서중학교 수학여행 사고 시신의 개인 식별을 담당한 김종렬입니다. 시신의 손괴 상태가 상당히 심하기 때문에 개인 식별을 가족이라 하더라도 보고 몰라요. 누군지 알 수가 없죠. 얼굴이 타서 시커멓고 숯덩어리가 되니까. 얼굴 윤곽이나 이런 것이 없죠. -김종열, 당시 국과수 소속 시신 식별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어. 첫 번째 유전자 감식. 그런데 이때가 70년대, 유전자 감식 기술이 자리 잡기 전이야. 두 번째 방법, 지문 감식. 하지만 시신들의 상태가 지문 감식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마지막 식별 방법, 바로 치아 감식. 치열의 구조와 치료 흔적 등을 대조해서 사망자의 신원을 확인하는 거지. 이런 걸 '법치의학'이라고 해. 국과수에서 파견된 김종열 교수는 우리나라 제1호 법치의학자야. 김 교수는 조심스럽게 시신을 확인하기 시작해. 다른 현장에 비해 특별히 까다로운 부분이 있었거든. 시신을 식별할 때 가장 기본적인 구분 방법은 성별과 나이라고 해. 그런데 지금 사망한 시신들, 모두 성별이 같고 나이도 같잖아. '남녀, 나이' 이것이 개인 식별의 기본적인 구별 방법 중 하나인데, 이 경우는 그것이 다 동일하기 때문에, 난이도에 있어서 어떤 면에서는 어렵죠. -김종열, 당시 국과수 법치의학자 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었어. 바로 학생들의 건강 기록부야. 거기엔 아이들의 키와 체중은 물론 구강검사 기록까지 나와 있잖아. 김 교수는 그 내용을 대조하며, 피해자의 신원을 한 명씩 확인해 갔어. 그런데 그때, 당신 이거 엉터리로 하는 거 아니야? 이게 어떻게 내 동생이냐고! 하며 항의하는 사람이 있었어. 죽은 아이의 형이 나에게 항의를 했어요. '자기 동생은 목걸이를 한 적이 없는데, 식별한 이 시신에 목걸이가 있다' 이거예요. '당신이 지금 감정을 엉터리로 하는 게 아니냐' (그 말처럼) 잘못됐다고 그러면 이건 큰일이거든요. 그게 틀리면, 그건 다 틀린 거예요. 한 명이 꼬이면, 한 명이 꼬인 게 아니라 다 꼬인 거지. 그런데 제가 침착하게 다시 보니까, 그 목걸이의 펜던트를 뒤집어 보니까, 관광지 기념품이야. 그 학생이 관광지에서 기념품을 사서 목에 건 거였죠. 그러니까 그 자리에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잘못하면 아주 봉변당할 뻔했어요. -김종열, 당시 국과수 법치의학자 김 교수는 아찔한 위기를 무사히 넘기고 45명의 아이들을 부모의 품으로 모두 돌려보냈어. 아들의 시신을 확인한 그 부모님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시신이 확인이 안 돼도 고통스럽고, 확인이 돼도 고통스러운 그 마음. 사고 이틀 후 경서중학교에서는 45명의 합동 장례식이 거행돼. 그리고 이건 그날 찍은 사진들이야. 당시 학생회장이었던 태선이가 친구들을 대표해서 조사를 낭독했어. 이제는 두 번 다시 불러보지 못할 이름들이여. 벗님들께서는 이미 가셨지만, 벗님들의 얼은 이 교정에 있습니다. 귓전에 메아리치는 벗님들의 노랫소리, 눈앞에 아른거리는 벗님들의 다정한 얼굴.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잊지 않겠습니다. 부디 명복을 누리시길… 그건 뭐 비통한 마음이죠. 비통하고 슬프고. 제대로 읽지도 못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울었어요. -최태선, 당시 경서중학교 학생회장 태선이는 조사를 읽는 동안 특히 더 감정이 북받쳐 올라와. 왜냐하면 부상자 중 가장 친한 친구가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거든. 그때 저하고 아주 친했던 친구 병국이가 생존해 있었습니다. 16일에 장례가 치러졌고, 그날 오후인지 기억은 정확하지 않은데, 중환자실에서 (산소호흡기를) 꽂고 있을 때 가서 봤습니다. 중환자실에 들어가니까 침상에 누워있는데, 온몸이 새파랗게 멍이 들었더라고요. '희망이 없는 것 같다' 이런 절망감이 드는 거 있잖아요. '병국아 일어나, 일어나야지' 이런 식의 얘기를 제가 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하고 그 다음날 학교로 왔는데, 이제 병국이가 죽었다 하더라고요. -최태선, 당시 경서중학교 학생회장 부상자 명단에 있던 병국이의 이름은 사망자 명단에 새로 적히게 돼. 결국 경서중학교 학생 사망자 수는 총 46명이 된 거지. 이들은 경기도 김포에 있는 한 공원 묘지에 함께 묻혔어. 학생들은 묘역에서 이별의 노래를 부르며 친구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어. 참사 5일 후, 다시 수업이 재개된 3학년 3반의 모습이야. 교실 한 편의 빈 책상들. 그 빈자리는 채울 수 없는 구멍으로 아이들의 가슴에 남았어. 3학년 3반에 가면 애들이 다 죽었으니까. 죽은 애들 책상은 다 비어있잖아요. 그 책상이. -김현철,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3반 졸업할 때까지 계속 그랬을 거예요. 그게 난 제일 가슴 아프더라고요. -박상준,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7반 이듬해 1월, 경서중학교 3학년 학생들의 졸업식이 치러져. 그리고 이걸 받아. 경서중학교 20회 졸업 앨범. 다행히도 이 앨범엔 모든 친구들의 얼굴이 담길 수 있었어. 참사가 있기 전 미리 졸업사진을 찍어놨거든. 참사로 희생된 아이들 3반 31명, 그리고 4반 15명. 이들이 실린 페이지에는 이렇게 적혀있어. '사라진 별들' 이라고. ▲ 사라진 아이 그런데 참사 이후 생존자 중에 사라진 아이가 한 명 더 있어. 너도 아는 아이야. 맞아. 민택이. 아주 심하게 다친 애들은 메디컬 센터로 갔어요. 박민택 같은 애, 수술해야 되고 이런 사람들. 여기 있네요 박민택. 공부 잘했어요. 그때 헤어지고는 못 봤는데. -김현철,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3반 사고 당시에 가장 큰 화상을 입었던 친구, 3학년 4반 박민택. 민택이는 병원에 실려간 이후 소식이 뚝 끊겼다고 해. 말 그대로 사라져버린 거야. 혹시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다가 사망한 병국이처럼 변고가 생긴 건 아닐까? 그런데 몇 년이 지난 후 민택이를 봤다는 사람이 나타났어. 한 1976~77년 정도? 그 정도였던 것 같은데. 우리 할머니가 파주 문산에 계셨으니까. 그래서 걔가 문산에서 다녔던 게 기억이 났죠. 그래서 그 동네 친구들하고 어울리면서 '여기 내 중학교 동창이 있다'라고 하니까, 그 동네에서는 서로 다 알더라고요. 그래서 연락이 돼서, 만나서 잠깐 얘기했었던 것 같습니다. -최종철,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4반 20대 초반이 돼서야 다시 만나게 된 두 친구. 하지만 반가움도 잠시, 종철이는 민택이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고 해. 민택이의 모습은 많이 달라져 있었어. 화상 때문에 얼굴에 붕대를 감은 채 나타났거든. 당시 얼굴에 화상을 입고 붕대 같은 걸 감고 있으니까, 마음이 좀 안 좋았죠. 민택이랑은 그때 만나고는 전혀 연락이 안 닿습니다. -최종철, 당시 경서중학교 3학년 4반 두 사람은 짧은 만남 이후 다시 연락이 끊기고 말았어. 그때 만남이 사고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 된 거야. 그렇게 또 5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민택이를 본 친구는 한 명도 없었어. 당연히 동기들 모임도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해. 왜일까? 친구들은 '어쩌면 화상 때문에 변한 자기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가 아닐까' 생각했어. 수학여행 참사를 겪은 지 올해로 56년. 그 시절 까까머리 친구들은 어느새 70살이 넘어버렸어. 친구들은 여전히 민택이의 소식을 궁금해하고 있어. 더 늦기 전에, 친구들의 바람이 이루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꼬꼬무'가 그를 직접 찾아보기로 했어. 과연 민택이를 찾았을까? 55년생이니까, 올해 일흔 하나 됐죠. 이름은 박민택입니다. 교우 관계는 다 좋았죠. 다 좋았는데 같이 놀고 그랬던 친구들 이름도 생각 안나고 얼굴도 생각 안 나요. 제가 볼 때는 사고를 당했을 때 모든 걸 잊어버린 게 많은 것 같아요. 그때는 참… 뭐 어떤 특별한 심정 그런 거를 갖지도 못한 나이예요. 살아가면서 참 여러 가지를 느꼈죠. 자꾸 움츠러들고 뭐 그렇게 살았죠. 제가 하고 싶은 일을 못하니까요. 왼쪽 손은 신경이 다 훼손돼서, 지금도 안 펴지는 상태죠. 제 자신을 꾹꾹 누르고 살다시피 했다고 보면 돼요. 그런 거예요. -박민택, 경서중학교 버스 참사 생존자 사고 직후 그는 어떤 생활을 했기에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던 걸까. 참사 이후 두 달 정도 지났을 무렵 민택이의 기사가 실린 적이 있어. 좌측 손의 동맥, 다리, 척추, 왼쪽 다리가 모두 화상을 입은 채 기능이 마비된 경서중 3학년 4반 박민택 군은 두 번이나 피부 이식 수술을 했으나 완치되지 못했는데, 이제 더 떼어 옮길 살갗조차 없는 형편. -당시 보도된 기사 중 계속 엎드려 있었어요. 한 4개월을 꼼짝 못하고 엎드려 있었죠. 그 화상 치료를 하느라고. 그때만 해도 화상 치료를 어떤 식으로 했냐면, 터널 같은 걸 만들어 놓고 화상 부위에 거즈를 붙여 식염수를 뿌려줬어요. 그 다음에 하루에 한 번인가 이틀에 한 번씩, 농 같은 게 끼면 그거 긁어내고. 진짜 끔찍해요. 이 생살을 후벼파는 정도. 그때만 해도 제가 피부 이식 수술을 받는 날은, 생일 같았어요. 피부 이식 수술을 하면 붕대로 감아놓고 한 일주일 정도는 치료를 안 하거든요. 치료를 안 하니까, 수술 받는다 그러면 더 좋아했어요. 그러다가 이제 4개월 동안 꼼짝 못하고 있다가 일어나니까, 팔다리가 다 굳고 고개는 이렇게 옆으로 돌아가 있어서. 그러다가 물리치료 한 2개월 하고서는 퇴원을 했죠. -박민택, 경서중학교 버스 참사 생존자 참사의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서 희미해져 갔지만 민택 씨의 아픔은 가시지 않았어. 병원 치료 후에도 꽤 오랜 기간 그는 화상 자국을 가리기 위해 붕대를 감고 살았다고 해. 어머니는 매일 아침 붕대를 새로 갈아주며 아들의 화상 자국을 마주해야 했어. 꿈 많았던 소년은 많은 걸 포기하고 살아야 했어. 그런 민택 씨가 아버지가 된 후, 깨달은 게 있대. 하고 싶은 일을 한 번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꾹꾹 참고 살았죠. 아들을 둘 낳았지만, 같이 데리고 목욕탕도 못 가봤으니까요. 부모가 되고 나서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 부모들은 얼마나 속상했겠습니까. 하나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희생된 46명, 거기에 딸린 가족들. 그 모두가 참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박민택, 경서중학교 버스 참사 생존자 그 날에 참사가 낳은 희생자는 46명의 사망자가 아닌, 마흔 여섯 가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해. 힘겨운 시간을 살아온 민택 씨. 그럼에도 그 고통을 같은 아픔이 있는 친구들과는 나누려고 하질 않았어. 그리움은 있죠. 항상 친했던 친구들에 대해서 그리움은 있죠. 제가 (동참 모임에) 참석을 안 하고 있습니다. 다치지만 않았으면 참석을 했겠죠. 동창회 가는 건 그렇습니다. -박민택, 경서중학교 버스 참사 생존자 친구들을 보고 싶었지만 볼 수 없었다는 민택 씨의 마음. (민택이를) 만나고 싶은 생각이야 있죠. 어디 사냐, 식구들 어떻게 되냐, 우리 통상 그런 얘기 나누고… -최종철, 경서중학교 버스 참사 생존자 (민택이) 얘가 제일… 한 60년을 제일 힘들게 살았을 거예요. 이 친구가. 특별히 할 말은 없어요. 그냥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김현철, 경서중학교 버스 참사 생존자 '꼬꼬무'가 동창생들의 마음을 대신 전해줬어. 민택 씨를 다시 만나기를 바라는 친구들이 있다는 걸. 민택 씨는 친구들의 마음을 받아들였을까? ▲ 친구를 그리며 그로부터 얼마 후, 경서중학교 동기들의 모임이 있었어. 그날, 친구들의 마음을 전달 받은 민택 씨가 용기를 냈어. 50여 년 만에 친구들을 마주한 민택 씨. 드디어 친구의 생사를 확인한 친구들은 감격했어. 어떻게 사는지,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웠어. 종철 씨를 제외하고는 다들 민택 씨를 무려 56년 만에 처음 만나는 거야. 처음엔 살짝 어색했지만, 엊그제 만난 친구들처럼 자연스러웠어. 많이 늦었지만 민택 씨와 친구들의 작은 동창회가 이루어졌어. 이제는 민택 씨한테도 추억을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이 생겼어. 반가운 만남을 가진 이들에게는 보고 싶은 또 다른 친구들이 있어. 바로 묘역에 묻혀있는 친구들. 대부분은 가족들에 의해서 이장이 됐고, 지금은 11분만 남아계시다고 해. 동기들은 민택 씨와 함께 그들을 만나러 갔어. 여름내 자란 잡초로 가득한 묘역. 동창들은 56년 전 떠난 친구들의 묘를 정성껏 정리했어. 그리고 먼저 떠난 친구들에게 오랜만의 인사를 건넸어. 현재 무연고자일 수도 있는 11명의 친구들. 아마 무연고라고 봐야 돼요. 아무도 오질 않으니까요. 부모님은 돌아가셨을 거고, 형제 자매들이 있어도 여기까지 신경 못 쓰죠. 그 유족들도 이제 나이가 거의 70대가 다 됐을 테니까. 너희들 버려졌다고 슬퍼하지 마라. 너희들 기억하는 우리 친구들이 있고, 앞으로도 몇 년이 더 지속될지 모르겠지만. 계속 와서 우리 친구들을 덜 외롭게 할 거야. 잘 있어라. 우리 10월에 또 올 거야. 그래 볼 날이 얼마 안 남았다. 매년 10월이 되면 동창들은 묘역을 찾아서 친구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고 해. 56년이 지났지만 세상을 떠난 친구들을 챙겨주는 이들의 우정. 친구들은 서로를 잊지 않기 위해 수학여행의 그날처럼 사진을 남기기로 했어. 지금부터라도 이들의 학창 시절이 고통스러운 기억이 아닌 소중한 추억으로 남길 바라며,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야. 사고 당시에 마포구에 있다가 지금 강서구로 이전한 경서중학교는 학생수 부족으로 내년 3월에는 폐교가 된다고 해. 학교가 사라지면 자연스레 이날의 비극을 기억하는 사람도 줄어들겠지. 더욱 많은 사람이 이 기억을 이어갔으면 하는 마음에, 오늘의 이야기를 해봤어. 그런데 방송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사고 당사자들 외에도 그날의 참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어. 전혀 의외의 사람들이야. 1971년 사고가 일어난 곳에 위령비가 세워졌어. 충남 아산시 배방읍 청년들은, 참사가 일어났던 10월 14일이 되면 매년 그곳에서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고 해. 이건 누군가가 알아주지 않으면 금방 잊혀져요. '이 사건이 만약에 나에게, 우리 가족에게 일어난 일이라면 어땠을까?' '누군가가 이걸 기억해준다고 하면 얼마나 고마울까' 이 제를 지내면서 우리 배방 주민분들 뿐만 아니라, 전국에 있는 분들께 안전에 대한 경각심을 다시 한 번 세워주고 싶었습니다. -정광재, 배방청년회 회장 경서중학교 버스 참사 이후로도 우리 사회는 어린아이들과 학생들이 희생되는 대형 참사를 겪어왔어. 그때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을 반복해왔던 것 같아. 어른들의 잘못으로 아이들이 희생되는 비극, 이제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아야 돼. 그러기 위해선 절대 무너지지 않는 튼튼한 외양간을 지어야 하지 않을까.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
[꼬꼬무 찐리뷰] 회원 1천만 명 몰렸던 '프리챌'의 몰락…CEO 전제완은 왜 펜션 청소부가 됐나
등록일2026.09.18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17일 방송된 '응답하라, 자유와 도전!'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H.O.T. 토니안, 배우 한소은, 개그우먼 김효진이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사랑은 인터넷을 타고 때는 2003년 2월 23일. 부천에 사는 22살 이시언 씨는 늦은 오후 신촌 번화가를 걷고 있었어. 몇 주째 이날 만에 손꼽아 기다려온 시언 씨는 평소보다 헤어스타일도 신경쓰고 가장 멋진 옷으로 깔끔하게 차려입었어. 어딘가 모르게 긴장한 모습이야. 지금 시언 씨 뭘 하러 가는 걸까? 화려한 간판 시끌벅적한 거리를 지나 발걸음을 멈춘 곳은 한 2층짜리 술집. 계단을 올라 2층에 다다르자 한 2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쫙 모여있어. 시언 씨, 우물쭈물 다가가서 인사를 해. 그러자 너나 할 것 없이 시언 씨를 반갑게 맞이하는데, 시언 씨는 어쩔 줄 몰라 해. 왜냐? 이 사람들 오늘 처음 본 사람들이거든. 정신 차릴 새도 없이 시언 씨 손에는 술잔이 들려있어. 그때 누군가 이제 다들 모인 것 같은데 슬슬 시작해야지 라고 말해. 그리고 어디선가 케이크가 나오고, 생일 축하곡을 다같이 불러.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쌍둥이~ 생일 축하합니다~ 얘들아, 우리 모두 생일 축하한다! 아니, 스무 명이 모였는데 쌍둥이? 이게 무슨 상황이야? 여기 모인 스무 명, 그리고 시연 씨까지 전부 다 오늘이 생일이야. 게다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스물 두 살 동갑이야. 1982년 2월 23일 생인 사람들이 한 곳에 모인 거지. 그때는 쌍둥이라고 얘기를 많이 했어요. 82년 2월 23일 생인 친구들. 말 그대로 쌍둥이들. 재밌었던 게 서울에만 국한되지 않고 부산에 있는 친구, 창녕에 있는 친구, 구미에 있는 친구. 다양하게 각지에 있었던 것 같아요. -이시언, 820223 쌍둥이 모임 회원 생년월일이 같은 사람들이 전국에서 무려 스무 명이나 모였어. 이 사람들 대체 어떻게 만나게 된 걸까? 시언 씨가 쌍둥이들을 어떻게 찾았는지 알려줄게. 추억의 컴퓨터. 바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알게 된 거야. 시언 씨는 컴퓨터를 하다가 우연히 이 커뮤니티를 발견했어. 커뮤니티 이름은 '82년 2월 23일 태어난 쌍둥이'. 회원 수가 무려 200명이야. 수줍음 많은 시언 씨는 한참 온라인 상에서 대화만 나누다가, 22살 생일날 용기를 내서 처음 모임에 나갔어. 난생 처음 만난 사람들인데도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금세 친해졌대. 한참 재밌게 놀고 있는데, 건너편에 앉은 한 여성에게 자꾸 눈길이 가. 이름은 박상미. 나이는 똑같이 22살. 상미 씨는 이 모임에 참석하려고 경북 구미에서 새벽부터 올라온 열혈 멤버야. 동그란 얼굴에 긴 곱슬머리가 너무 귀엽고 성격도 아주 발랄하더래. 완전 이상형이었던 거야. 상미 씨에게 첫눈에 반한 시언 씨. 그 뒤로 모임에 꼬박꼬박 참석하며 적극적으로 구애를 하기 시작해. 오직 그녀를 보러 부천에서 구미까지 서슴없이 달려가. 그냥 좋았어요. 그 친구 딱 보는 순간. '이 친구가 있으면 계속 평생 즐겁게 살겠다' 마음에 딱 들어서요. 적극적으로 왔다 갔다… -이시언, 820223 쌍둥이 이 둘은 과연 어떻게 됐을까? 두 사람은 결국 결혼에 골인했어. 저희 2003년도에 만나서 연애하고 그리고 결혼해서 지금까지 23년 살고 있습니다. -아내 박상미 말 그대로 운명 같아요. 제 인생에 어떻게 보면 신기함을 갖고 살고 호기심이란 걸 갖고 살고, 그걸 아이들한테도 얘기를 많이 해요. 운명은 언제든 겪어볼 수 있는 일이다. -남편 이시언 항상 사람들 만나면 자랑하죠. 우리는 자랑거리예요. -이시언-박상미 부부 소중한 쌍둥이 친구들과 지금의 아내까지 커뮤니티에서 만나게 된 거야. 시언 씨에게 온라인 커뮤니티란 어떤 존재인 것 같아? 이제는 사실 우리 모두 인터넷이랑 때려야 뗄 수 없는 삶을 살고 있잖아. 불과 30년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어. ▲ 응답하라 PC통신 지금은 90년대 후반. 서울의 용산 전자상가야.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한 미국인이 소리치고 있어. 이 그래픽카드를 컴퓨터에 넣으세요. 신세계가 펼쳐질 겁니다! 전자상가 곳곳을 누비면서 영업을 펼치는 이 사람. 너도 아는 사람일 거야. 바로 세계 최대 기업 엔비디아의 젠슨 황이야. 그런데 왜 미국인인 젠슨황이 용산에서 컴퓨터 부품을 팔고 있는 걸까? 이 모든 건 편지 한 통에서 시작됐어. To. 젠슨 황. 제게는 한국을 위한 비전이 있습니다. 정말 놀라운 비전입니다. 저는 한국의 모든 국민을 초고속 인터넷으로 연결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모두가 초고속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젠슨황.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From. 이건희. 저는 누군지 몰랐던 이로부터 그 편지를 받았습니다. 아주 아름답게 적힌 글이었습니다. 편지에는 '나에게는 비전이 있습니다'라고 적혀있었습니다. '한국을 위한 비전이 있습니다'라고요. -젠슨 황, 엔비디아 CEO 우리 아버님 이건희 회장님이 보내신 편지였어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이건희 회장의 편지에 감명 받은 젠슨 황이 직접 한국을 찾아왔던 거야. 젠슨 황은 한국에서 아주 특이한 풍경을 하나 보고는, IT 산업의 미래를 꿈꾸기 시작해. 바로 한국만의 PC방 문화. 세계적으로 독특한 PC방 문화가 시작된 게, 90년대 후반이야. 당시 유행하던 게 두 가지가 있어. 하나는 스타크래프트 게임, 그리고 하나는 이거야. 이건 컴퓨터를 온라인에 연결하는 모뎀이야. 이것을 컴퓨터에 연결하면, 파란 바탕에 하얀 글씨가 뜨는 화면이 나와. 바로 PC통신이야. PC통신은 전국의 모든 곳에서 온라인으로 대화를 할 수 있게 연결해주는 서비스야. 휴대전화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 사람들은 PC통신에 푹 빠져 살았어. PC통신에 접속하면 모르는 사람과 채팅으로 얘기를 나눌 수 있거든. 이걸 소재로 만들어 대박난 영화가 배우 한석규와 전도연 주연의 '접속'.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과 교감을 나누고, 내가 쓴 글이 전국에 퍼져 인기를 끌고. 이게 얼마나 신기하고 재밌는 일이었는지. 하지만 큰 문제가 하나 있었어. 이번 달 전화비가 왜 이렇게 많이 나왔어? 너 컴퓨터 작작하라 그랬지 아빠가! PC 통신은 전화선을 통해 온라인으로 연결되는 방식이었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썼다간, 전화 요금 폭탄을 맞는 거야. 또 다른 문제는 전화와 PC 통신을 동시에 사용할 수 없었어. 누군가 통화하는 동안에는 PC 통신에 아예 접속이 안돼. 마음대로 컴퓨터를 사용할 수 없던 시절이었지. ▲ 닷컴 열풍의 시작 그러던 1998년. 우리나라에 초고속 인터넷 시대가 열려. 집집마다 초고속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온라인 세상도 달라졌어. 파란 바탕에 흰 글씨 뿐이던 화면에 이런 알록달록한 웹사이트들이 펼쳐진 거야. 당시에 초고속 인터넷이 뜨면서 같이 떠오른 키워드가 있거든. 바로 '벤처'. 지금으로 치면 스타트업 같은 거야. 너도 나도 인터넷 사이트를 만들겠다고 창업에 뛰어들면서, IT 벤처 기업들이 우후죽순 생겨난 거지. 이른바, '닷컴 열풍'이 불기 시작한 거야. 당시 인터넷 사이트 주소를 '.com' 형태로 짓는 게 유행하면서 생겨난 말이야. 근데 그 열기가 얼마나 대단했냐면, 지금 주식시장에서 반도체 기업들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지? 그때 닷컴 기업들이 그 정도였어. 웹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세상이 열렸고 다음, 한메일, 그리고 네이버. 정말 다양한 기업들이 그때 당시에 회사를 창업했던 것 같아요. 대기업에 다니던 훌륭한 인재들이 새로운 사업을 하려고 했던 그런 가능성도 엄청 넘쳐나던 시기였죠. -김지현, IT 전문가·테크 라이터 코스닥 시장이 사상 최대의 호황을 맞고 있습니다. 연속 16일째 상승이라는 진기록을 수립한 것입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 수상한 회사와 천재 CEO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999년. 25살의 대학생, 최소현 씨는 졸업을 앞두고 있었어. 졸업 직전 대학생의 제일 큰 고민은 취업이지만, 소현 씨는 그런 걱정이 없었어. 일단 학벌이 좋아. 서울대 산업디자인과생이야. 게다가 이미 입사하기로 한 회사가 있어. 그때나 지금이나 평생 직장이라 불리는 대기업, 삼성에 철석 붙은 상태야. 미래가 창창해 보이지. 그러던 어느 날, 평소 친하게 지내던 후배에게 전화가 왔어. 후배는 얼마 전에 새로 생긴 한 IT 벤처 회사에 들어갔는데, 이 회사의 명함을 만들어야 해서 산업디자인과생인 소현 씨한테 도와달라고 부탁한 거야. 소현 씨는 흔쾌히 일을 도와주기로 했어. 그런데 회사 이름을 듣고는 고개를 갸웃해. 회사 이름이 뭔가 이상하거든. 당시 상황을 소현 씨한테 직접 들어볼게. 당시는 일단은 굉장히 다양한 IT 기업들이 막 올라오기 시작했었을 때라, 이미 이런 회사들이 많이 생기고 있구나라는 트렌드는 알고 있었을 때고. 다만 비단 명함 정도밖에 안 만드는 거지만, 이 회사 이름은 왜 '자유와 도전'인가. 굉장히 단순하구나... 처음엔 조금 촌스럽기도 하고 유치하기도 하고. 자유와 도전이 뭐예요… -최소현, 현 네이버 디자인부문장 자유와 도전. 어떤 회사 같아? 소현 씨가 후배한테 너네 회사는 뭘 하는 회사야? 라고 물었어. 그랬더니 후배가 이렇게 말해. 아, 그거는 지금부터 생각을 해봐야 돼요. 이게 무슨 소리야? 황당하지? 그런데 소현 씨는 이때까지만 해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대. 그런데 며칠 뒤 그 후배가 또 연락을 해와. 일을 도와줘서 고맙다고 회사 대표가 한 번 만나자고 했다는 거야. 며칠 뒤에 소현 씨는 이 자유와 도전이라는 회사로 향했어. 서초에 있는 작은 빌딩 안에 사무실이 있어. 문을 열어보니까 크기도 작고 직원도 몇 명 없어. 한쪽에 있는 회의실로 들어갔더니 의자에 한 남자가 앉아있어. 바로 이 사람이야. 자유와 도전의 대표이사 이름은 전제완. 근데 이 사람 이력이 장난 아니야. 서울대 경영학과에 삼성물산 출신이야. 근데 삼성물산에 근무하던 시절 엄청 유명하던 사람이었대.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사건이 하나 있었거든. 때는 1988년. 당시 삼성 이건희 회장이 엄명을 내려. 우리 회사에 왜 젊은 피, 젊은 인재가 없어? 훌륭한 인재들을 좀 데리고 와봐 라고. 그때 삼성 인사팀으로 발령받은 사람이 바로 전제완이었어. 전제완이 인재를 뽑기 위해 향한 곳은 바로 대학교. 수많은 대학교를 발로 뛰면서 인재 발굴에 나섰어. 근데 하루에 만나는 학생들만 100명이 넘어. 워낙 만나는 사람이 많다 보니까 누굴 만났는지 특징이 뭔지 잘 정리가 안 되는 거야. 그때까지만 해도 체계적인 인사관리 전산 시스템이 없던 거야. 그때부터 전제완은 컴퓨터를 독학하기 시작해. 장장 5년에 걸쳐 새로운 인사관리 시스템을 직접 만들어버려. 그리고 그가 만든 이 성과물로 삼성그룹 전체의 인사 시스템이 바뀌었어. 그 공을 인정받아서 '제1회 자랑스러운 삼성인상'까지 수상해. 당시 삼성에서 PC 최고 전문가이자 IT 천재로 불린 사람이 바로 이 전제완이었던 거야. 그러던 1997년. IMF 외환위기로 많은 회사에서 구조조정을 시작해. 삼성그룹 역시 구조조정을 하고 있었어. 다들 회사에서 잘리지 않으려고 노심초사 하는데, 삼성을 제 발로 박차고 나온 사람들이 있었어. 그 중 한 명이 이해진. 지금의 네이버를 만든 사람이야. 그리고 김범수. 지금 국민 메신저 카카오의 총수가 됐지. 그리고 또 한 사람이 바로 전제완이었어. 이때 나와서 만든 회사가 바로 자유와 도전인 거야. 이런 사람이 대표로 있는 회사 어떨 것 같아? 소현 씨와 마주 앉은 전제완 대표. 이렇게 말해. 소현 씨, 삼성 가기로 했다면서? 물론 대기업 좋지. 그런데 기계적으로 일을 하는 것보다 자기 생각을 가지고 자유롭게 일을 해보는 건 어때? 소현 씨를 지금 스카우트 하려는 거야. IMF의 여파가 이어지던 시기. 안정적인 대기업 입사를 앞두고 있는 소현 씨야.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할까? '저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 걸까?'라는 그런 느낌을 처음 받았던 것 같아요. 그때부터 약간 헷갈렸죠. '큰 기업도 좋고 다 좋지만 너만의 문제를 너의 자유로움을 가지고 너의 생각대로 한번 해결해보는 건 어떻겠냐' 라는,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너무너무 멋있는 그렇게 화두를 던지셨던 것 같아요. 그때부터 약간 '이런 벤처라는 게 뭘까?', '이 대표님이 만드시는 회사가 뭘까?'라는 고민을 이제 머릿속에 조금 담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최소현, 현 네이버 디자인부문장 이 알 수 없는 끌림에 결국 소현 씨는 결정을 내려. 대기업 삼성이 아닌 작은 IT 벤처 '자유와 도전'을 선택한 거야. 그때부터 소현 씨는 자유와 도전의 디자인팀에서 일하기 시작해. 그런데 이거 뭐 어떻게 해야 될지 감도 안 와. 명색의 IT 기업인데 디자인팀 그 누구도 인터넷 서비스 디자인 경험이 없었던 거야. 소현 씨가 전 대표를 찾아가 이야기를 했어. 대표님 이대로는 답이 안 나오는데, 좀 괜찮은 선배 한 명만 데려다 주시면 안 돼요? 며칠 뒤 전 대표가 회사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데, 한 남성이 따라 들어와. 소현 씨가 가만 보니까 대학교 과 선배야. 그 이름은 조수용. 훗날 네이버와 카카오의 디자인 혁신을 이끌고, 카카오 공동대표가 되는 사람이야. 서울대 산업디자인과 시절부터 전설로 통하는 엄청난 실력자였대. 산학협력으로 삼성전자에서 디자이너 활동도 했어. 그러던 중 전 대표가 26살이었던 조수용을 디자인팀 총괄로 스카웃을 해온 거야. 이렇게 서울대, 그리고 삼성으로 연결된 선후배들이 하나 둘 '자유와 도전'으로 모이게 돼. ▲ 자유와 도전 그런데 이 회사, 뭐 하는 회사라고 했지? 이제부터 생각을 해봐야 된다 그랬잖아? 직원들이 대표에게 물었어. 근데 대표님, 저희 뭐 하는 회사죠? 라고. 처음에 '자유와 도전은 뭔가요?'부터 '그래서 무슨 서비스를 어떻게 만들고자 하시는 거예요?' 이런 얘기들을 나눴을 때. '결국 사람이 모이면 뭐든 할 수 있어'라는 거, 그럼 과연 인간은 모여서 뭘 하기를 원할까? 그러면 기술은 인간의 삶에 무슨 문제를 해결해줘야 될까? 이거를 정말 정말 매일 말씀을 하셨던 것 같고요. -최소현, 당시 자유와 도전 디자인 팀장 그때 웹은 그냥 'Just Online'이었어요. 이메일, 채팅, 검색, 그 안에서 끝나잖아요. 그런데 대표님이 '결국 인터넷도 사람이 중요하다' 그래서 사람이 모이는 건 모임이고, 그 모임의 영역을 웹으로 가져와야겠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결합시켜야 된다… -신승식, 당시 자유와 도전 마케팅 팀장 전 대표의 이야기는 이거야. 동호회, 동창회 같은 오프라인 모임을 온라인에서 할 수 있게 하자는 거야. 사람과 사람을 온라인으로 연결해주는 커뮤니티 사이트를 만들자! 그때 여기 회사 분위기는, 아주 그냥 자유분방했대. 복장도 남녀불문 반바지에 슬리퍼야. 이때가 1999년이잖아. 보수적이었던 당시 시대상과 비교해, 말도 안되는 회사 분위기지. 저희 마케팅팀에서 엔지니어팀으로 이동할 때 킥보드 타고 이동하고. 우리끼리도 '야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 할 정도로 재밌었어요. -신승식, 당시 자유와 도전 마케팅 팀장 저 야식 담당이었거든요. 킥보드에 봉투 하나 걸고 야식 배달 가고. 아마 '배민'의 전신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그렇습니다. -최소현, 당시 자유와 도전 디자인 팀장 전 대표는 직원들에게 항상 이렇게 말했대. 다 사람이 하는 일이야. 두려워하지 말고 하고 싶은 거 다 해봐. 전 대표는 PC 최고 전문가, IT 천재라고 불렸던 사람이잖아.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젊은 직원들의 도전을 물심양면 지원했어. 엔지니어 분들과 대화할 때 밀리지 않으셨어요. 기술적인 백그라운드가 본인이 공부해서 있었고. -신승식, 당시 자유와 도전 마케팅 팀장 기세도 그렇고 뭔가를 설득하는 기질도 그렇고. 영역을 확장해가는 것들, 그리고 그 이유가 너무나 분명했던 것들. 저는 테크 시대에 태어난 나폴레옹 같다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최소현, 당시 자유와 도전 디자인 팀장 회사 이름처럼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 마음껏 도전할 수 있었던 직원들. 매일같이 밤을 새며 일을 해도 너무너무 즐거웠대. ▲ 프리챌 닷컴 마침내, 2000년 밀레니엄 시대가 열렸어. 그리고 2000년 1월 1일 0시 0분, 인터넷 세상에 자유와 도전의 야심작이 첫 공개돼. 바로 이거야. 아아, 알려드립니다. 마을회의는 인터넷으로 합니다. 주소는 프리챌 컴 다 아시죠? 사이트 이름, '프리챌'. 자유와 도전을 영어로 하면, Freedom(프리덤)과 Challenge(챌린지) 잖아. 그래서 프리덤 앤 챌린지. 프리챌인거야. 당시 프리챌의 정체성은 바로 로고였어. 모자이크처럼 작은 네모 조각들이 모여서 프리챌 로고를 만들어. 그러니까 여러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서 하나가 된다는 뜻이야. 조수용 디자인 총괄의 작품이야. 당시 다른 사이트들의 초창기 모습은 이랬어. 그에 비해 프리챌은 디자인이 다르지? 보기도 편하고, 다양한 정보가 있는데 심플하게 돼 있어. 사람들이 몰려서 와글와글하는 서비스일 것이기 때문에, 차가운 기술의 냄새는 최대한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게 기능이긴 하지만 조금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을까? 이런 얘기를 저희 디자인 팀끼리도 엄청 많이 나눴고, 대표님도 그걸 원하셨던 것 같고요, -최소현, 프리챌 디자이너 ▲ 커뮤니티 전성시대 여기서 '커뮤니티 만들기' 버튼만 누르면 전 국민 누구나 쉽게 커뮤니티를 만들 수 있어.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이 모든 게 다 공짜였다는 거야. 커뮤니티 몇백 개를 만들든, 사진을 몇만 장 올리든, 전부 다 무제한인 거지. 이용자들 반응은 어땠을까? 그야말로 대박이야. 프리챌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더니 오픈 3개월 만에 회원 수 100만을 넘어서고, 3만 5천여 개의 커뮤니티가 생겼어. 그 중엔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한 커뮤니티가 있었어. 대한민국에서 옷 꽤나 입는다는 패셔니스타들이 패션 정보를 주고받기 위해 모인 커뮤니티, 이 커뮤니티의 이름은 '무진장 신발 사진이 많은 곳'. 줄이면 '무신사'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패션 플랫폼 무신사, 그 전신이 바로 프리챌 커뮤니티였던 거야. 제가 프리챌을 알게 된 건 중1 때 여름 이때부터 들어갔던 거 같아요. 패션이나 신발에 관심이 많다 보니까 그때 형들 따라서 많이 활동했던 거 같습니다. 그때는 거기가 패션위크였죠. 좋아하는 애들끼리 모여서 우리끼리 얘기하고 향유하고 이런 게 있었는데, '대박이다 어떻게 조그맣던 게시판 하나가 이렇게까지 커지지?'라는 그런 신기함이었던 거 같아요. -신현우, '무신사' 커뮤니티 유저 그 외에도 이 세상에 없던 재미있고 특이한 커뮤니티들이 마구 생겨나. 그 중 하나가 바로 '팔사모' 커뮤니티. 회원 수가 무려 8000명이었던 커뮤니티야. 제가 좋아하는 게 팔씨름이었는데, 저만 좋아할 수 없다, 다른 사람도 분명히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막연한 호기심에 프리챌에 커뮤니티를 개설했는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가입을 한 거죠 전국적으로. 연령대도 굉장히 다양했어요. 10대부터 40대, 50대까지. -한준희, '팔사모' 회장 10대 때부터 팔씨름을 너무나 좋아했던 사람인데, 한의원 하다가 바빴는데 우연하게 너무 팔씨름이 생각난 거예요. 혹시나 팔씨름 좋아하는 사람도 혹시나 모여 있을까? 이런 데도 있을까? 우연하게 생각해서 팔씨름을 쳐봤더니 모임이 있는 거예요. -김경호, '팔사모' 회원 놀라움의 연속이었죠, 매일매일 하루하루가. 아침에 눈 떠서 커뮤니티에 접속해보면 회원수가 갑자기 100명이 늘어나있고. 또 자고 나면 100명이 늘어나있고. 그런 날의 연속이었죠. -한준희, '팔사모' 회장 팔씨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야. 팔사모엔 매일같이 이런 글들이 올라왔어. 저는 강원도 동해 사는데 팔씨름은 한 번도 져본 적이 없드래요. 이야 반갑구먼유. 저는 충남 사는디 팔씨름으로는 제 적수가 없구먼유. 다들 자기 동네에서 팔씨름을 져본 적이 없다는 거야. 그러던 어느날, 팔사모에 공지가 하나 올라와. 드디어 창과 방패의 대결이 열릴 예정입니다. 전국에 숨어 계신 고수분들의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팔사모 회장 한준희 씨가 거국적으로 팔씨름 대회를 연 거야. 전국 방방곡곡에서 팔씨름 강자들이 모여들었어. 얼마나 재밌었으면 1박 2일동안 잠도 안자고 계속 팔씨름을 했대. 정말 덩치 좋으신 제주도에 한 번도 져본 적이 없는 그분이 올라오셨다가 여러 사람한테 지고 가셨죠. 하하하. 1박 2일동안 팔씨름을 계속 하는 거예요. (그 전까지는) 연결될 수 있는 고리가 아예 없었어요. 각 지역별로 센 사람들끼리 다만 몇 사람끼리나 있었지. 공통분모라는 거를 프리챌이 만들어준 거죠. -김경호, '팔사모' 회원 세상에 나 혼자인 줄 알았던 사람들도 온라인 커뮤니티 덕에 모이고 또 교감하게 됐어. 어떤 커뮤니티는 대부분의 회원들이 30대 초반 여성들로 구성돼 있었어. 이건 어떤 커뮤니티일까? 직접 들어볼게. 저희가 그때 '노처녀 통신'이라는 동호회를 만들었는데, 그 이름 들으면 느낌이 오잖아요. 그 당시에 노처녀라고 불리는 저와 친구들, 30살, 31살, 28살에서 30대 초반 그 사이 친구들이 모여서, 우리가 노처녀라는 소리를 듣고 이렇게 구박을 받으면서 우울하게 살 일이 아니다, 우리끼리 뭉쳐서 즐겁게 살자. 주변에 더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더 잘 지냈어야 노처녀가 안 됐는데, 온라인 세상에서 만나는 새로운 사람이 너무 신기한 거예요.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기쁨? 그런 게 온라인 동호회의 기쁨이었죠. -최재경, 프리챌 '노처녀 통신' 운영자 이 노처녀 통신에선 특별한 정기모임을 열었어. 이름은 '재활용 파티'야. 뭘 재활용했을까? 나랑 잘 될 일 없는 남성 지인들을 데려와서, 다른 회원에게 소개시켜주는 단체 미팅이야. 완전 로테이션 소개팅이지. 결전의 날, 한 카페에 모인 노처녀통신 회원들이 문 쪽을 바라보고 일렬로 쭉 앉아있어. 잠시 후 남자 3명이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일렬로 쭉 앉아있는 여자들을 보고 그대로 나가버린 거야. 이 '웃픈' 에피소드, 지금까지 추억으로 남아있다고 해. 빨리 누굴 만나 결혼해야 한다는 조바심보다, 마음 맞는 친구들을 만난 즐거움이 더 커졌대. ▲ 프리챌의 독주 이렇게 다양한 취미와 사연을 가지고 프리챌에 모인 사람들. 커뮤니티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쌓아갔어. 닷컴 열풍 속, 프리챌이 인기를 끌면서 회사는 승승장구해. 직원들도 삽시간에 늘었어. 직원이 겁이 날 만큼 늘었어요. 내선 번호 백몇십 번까지는 다 외웠는데, 150명 넘어가고 나서부터는 못 외우겠더라고요. 우리 진짜 여기서 대박 나는 거야? -최소현, 프리챌 디자이너 그리고 프리챌은 미국 GE 캐피탈에서 투자까지 받아. GE, 제너럴 일렉트릭. 발명왕 에디슨이 설립한 당시 세계 최대 기업이었어. 지금의 엔비디아, 마이크로소프트처럼 어마어마한 영향력이 있었던 미국의 대표 기업, 그 제너럴 일렉트릭의 금융 자회사가 바로 이 GE 캐피탈이었어. 그런 회사에서 대한민국의 신생 벤처 회사에 투자를 한 거야. 그뿐만이 아니야. 한 남자가 프리챌 사무실에 찾아왔어. 프리챌이 투자 받을 때 기업 조사를 했던 GE 캐피탈 담당자야. 그가 프리챌에 입사하고 싶다는 거야. 그분이 조사하는 과정에서 프리챌이 너무 매력있다고 판단해서 GE 캐피탈을 퇴사하고 프리챌에 입사했습니다. 전 그거 보고 '진짜 우리 회사 대단한가 보다'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신승식, 프리챌 마케팅 팀장 사실 GE 캐피탈이 더 큰 회사인데. 프리챌의 위상 얼마나 대단했는지 보이지? 프리챌에서 만들어진 커뮤니티는 최대 110만 개, 회원수는 천만 명을 달성했어. 2000년대 대한민국 인구가 4600만 명 정도 됐거든. 다섯 명 중에 한 명은 프리챌 커뮤니티에 가입했다는 거지. ▲ 사이좋은 세상 그런데 이 모습을 누구보다 부러워하던 한 IT 벤처 기업이 있었어. 이 기업이 만든 사이트 이름은 '사이좋은 세상'. 사이좋은 세상은 프리챌의 커뮤니티와 비슷한 '클럽'이라는 서비스를 제공했어. 하지만 반응은 처참했어. 회원수가 많은 프리챌 쪽으로 사람들이 계속 몰렸던 거야. 게다가 사이좋은 세상은 사이트 디자인부터 투자 비용까지 프리챌과 비교하면 너무 아마추어 같았던 거지. 거기(프리챌)는 프로고 우리는 아마추어였어요. 지금 생각하면 '오 저렇게 하는 거야?' (프리챌은) TV 광고도 하고 그랬으니까. 우리는 부러웠죠. '이야 저렇게 질러야 되는데'. -이동형 대표, 사이좋은 세상 프리챌은 기본적으로 자금력과 투자도 많이 받고 제대로 전략이나 이런 걸 잘 세워서 치고 나가고. 그런 부분에서 완전히 확연하게 차이가 났죠. -이정태 이사, 사이좋은 세상 이 사이좋은 세상은 직원들 월급도 제대로 못 주는 상황이야. 폐업의 문턱에서 대표는 이 사이트를 살릴 마지막 도전을 하기로 해. 전 직원 앞에서 이렇게 얘기했어. 지금부터 남자와 여자로 나눠서 신규 서비스 하나씩 가져와. 조건은 딱 두 개다. 하나, 사이가 좋을 것, 둘, 돈을 벌 것. 며칠 뒤 남자팀과 여자팀의 발표가 시작돼. 사람들이 사이가 좋으려면 서로 대화를 많이 나눠야 한다 며 남자팀이 가져온 건 바로 채팅 서비스였어. 타 사이트에 이미 넘쳐나던 채팅 서비스는 딱히 신선하지는 않았어. 이어 여자팀의 발표가 시작돼.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으려면, 우선 나라는 존재가 있어야죠. 사람들끼리 만나게 하려면, 먼저 온라인 상에 나라는 정체성이 생겨야 한다 는 거야. 남자팀과 여자팀 중 누가 이겼을까? 사이좋게 지내는 사람들을 관찰해서 서비스를 디자인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딴 사람하고 사이 좋으려면 나의 정체성이 어딘가 있어야 하잖아요. 우리 그룹 커뮤니티는 그게 없었던 거예요. 이제 이쪽(여자팀)이 이긴 거죠. 여기(남자팀)도 사이 좋게 되긴 하는데, 이거(여자팀)만큼 사이 좋은 것 같지는 않아. 기본적으로 우리 철학이 여기 맞는 거예요. 그 프로젝트가 미니홈피 프로젝트고, 그게 성공해서 싸이월드가 살았죠. -이동형 대표, 사이좋은 세상 자신만의 이야기와 사진으로 미니홈피를 꾸밀 수 있는 인터넷 사이트 싸이월드. 사이좋은 세상이라는 철학으로 만든 사이트였어. 벼랑 끝에서 살아남기 위해 만든 서비스가 바로 이 미니홈피. 말 그대로 사람마다 하나씩 주어지는 작은 개인 홈페이지야. 쉽게 말하면 온라인 상의 방을 하나씩 분양을 해 준 거야. 나만의 방을 마음껏 꾸며서 나라는 존재를 표현할 수 있게 하는 거지. 싸이월드는 미니홈피 개발에 사활을 걸었어. 그리고 2001년 9월, 드디어 싸이월드 미니홈피가 세상에 공개돼. 지금은 싸이월드 서비스가 중단돼서 추억의 미니홈피를 만날 수가 없어. 미니홈피에선 대문 사진부터 자기소개, 방 꾸미기까지 모든 걸 내 맘대로 할 수 있어. 싸이월드만의 야심작이 있어. 바로 '일촌' 서비스. 일촌을 맺은 사람들끼리는 서로 미니홈피에 짧은 글을 남길 수가 있어. 그리고 또 빼놓을 수 없는 게 있지. 바로 BGM. 업계 최초로 선보인 서비스, 그야말로 혁신 중에 혁신이었지. 그리고 미니홈피를 꾸미려면 '도토리'가 필요해. 싸이월드 안에서 사용하는 사이버 화폐야. 방도 꾸미고 친구한테 선물도 하고, 그런 용도였지. 근데 왜 하필 도토리였을까? 제 고향이 경상북도에 있는 소백산 밑이거든요. 저는 도토리가 익숙해요. 그걸로 딱지치기 했던 기억도 있고. 화폐가 되려면 흔해야 되고, 둘째 친근해야 되고. 결정적으로 100원보다 비싸면 안 되고. 도토리가 화폐해야 되는 이유를 찾았죠. 사이 좋게 하기 위해서. -이동형 대표, 사이좋은 세상 미니홈피, 싸이월드 대표의 마지막 희망이었다고 했잖아. 반응은 어땠을까? 장난 아니었지. 미니홈피부터 BGM, 도토리, 싸이월드가 처음 시도한 모든 게 다 대박을 치기 시작한 거야. 지금 인플루언서들은 유튜브나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에 내 일상의 모든 것들을 예쁘게 꾸며서 사람들한테 알리려고 노력하잖아요. 미니홈피는 바로 그 내 아이덴티티, 나의 자아성을 주체성을 그대로 고스란히 만들 수 있게끔 축적할 수 있게끔 해준 거죠. 본질적으로 커뮤니티를 바꾼 거죠. 어떻게? 공동의 공간이 아닌, 찾아가는 게 아니라, 나의 공간 속으로 사람들이 찾아오게 만드는 혁신적인 새로운 서비스로 리포지셔닝하면서, 대한민국의 네이버, 다음 버금가는 형태의 서비스로 거듭나게 되죠. -김지현, IT 전문가·테크 라이터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의 욕구도 바뀌어. 수천 명이 모인 커뮤니티의 한 구성원으로서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나만의 공간에서 내 얘기를 하는 걸 더 선호하는 분위기가 된 거야. 그 변화의 중심에 있던 게 바로 싸이월드. 한국형 SNS 시대의 시작이었어. ▲ IT 전쟁의 시대 이를 지켜보고 있는 프리챌. 엄청난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해. 되게 위협적으로 봤고. 우리 대표님이 되게 그때 좀 화도 많이 내셨고 신경질적이셨어요. 대표님 생각은 '우리가 디자인도 기술도 다 쟤네보다 잘하는데, 쟤네들은 다 따돌릴 수 있어'. -신승식, 프리챌 마케팅 팀장 프리챌 역시 시대에 발맞춰서 이런 서비스를 내놨어. 프리챌의 신규 서비스 '마이홈피'. 이름도 비슷해. 사실 당시에 IT 벤처끼리 서로를 모방하는 서비스 경쟁이 치열했어. 다음에서 카페 서비스를 출시하자 네이버에서도 똑같은 이름의 카페 서비스를 내놓은 일도 있었어. 그런데 싸이월드에서 미니홈피는 어떤 존재야? 벼랑 끝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만든 서비스잖아. 프리챌의 마이홈피를 보고, 싸이월드에서는 어떤 마음이었을 것 같아? 싸이월드와 프리챌은 표절 여부를 두고 소송전까지 벌여. 하지만 싸이월드의 패배였어. 왜? 법원의 판단은 개인 홈페이지 서비스를 어느 한 기업이 독점할 수는 없다는 거였어. 싸이월드가 패배로 주눅들었던 그때, 뜻밖의 소식이 들려와. 프리챌에서 커뮤니티 개설자에게 월 3천원씩 돈을 받겠다고 한 거야. 프리챌의 가장 큰 장점이, 커뮤니티를 몇 개를 만들든 무조건 무료였잖아. 그런데 갑자기 유료화를 선언한 거야. 물론 싸이월드에서도 도토리를 사야 미니홈피를 꾸밀 수가 있었잖아. 그런데 이건 개념 자체가 약간 달라. 도토리는 안 사도 미니홈피 쓰는 데는 문제가 없어. 그런데 프리챌은 돈을 안 내면 커뮤니티 운영 자체를 못하게 한 거야. 그럼 이용자들은 어땠을까? 뭐 일단 너무 충격적이었고 배신감이 들었고, '그러면 우리가 돈을 내고서 이거를 해야 되는 거냐' 화가 많이 났던 것 같아요. 되게 분노하고. 게시판에도 막 욕이 올라왔었거든요. -신현우, '무신사' 커뮤니티 유저 '따르지 않을 시에는 운영 권한을 축소하겠습니다' 약간 협박 아닌 협박이 섞인 그런 공지였던 걸로 기억을 해요. 그래서 많은 운영자분들이 굉장히 불쾌했을 겁니다, 그 당시에. -한준희, 프리챌 '팔사모' 커뮤니티 회장 민심이 폭발했어. 심지어는 프리챌 직원들도 반대했어. 유료화는 전제완 대표 개인의 결정이었거든. 대체 왜 그는 이런 결정을 한 걸까? 프리챌 유료화 사태를 두고 국회에서는 공청회까지 열려. 그때부터 프리챌의 분위기는 어수선해지기 시작했어. 이용자가 빠지면서 110만 개였던 커뮤니티는 순식간에 40만 개로 줄어들고 말아. IT 업계가 시끌시끌하던 그때, 프리챌에 제대로 한 방을 날린 곳이 있었어. 바로 싸이월드. 여러분 저희 싸이월드는 약속한대로 평생 무료입니다. 저희는 여러분과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프리챌에서 이탈한 사람들이 전부 싸이월드로 가기 시작해. 그때는 '인터넷이라는 서비스는 무조건 다 기본적으로 무료다' 이게 딱 박혀 있었기 때문에. -이정태, 당시 싸이월드 이사 그래서 잘 하면 우리한테 기회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사이좋은 세상 우리가 만들 수 있을 것 같다고… -이동형, 당시 싸이월드 대표 싸이월드는 그때부터 날개를 달고 훨훨 날았어. 훗날 전 국민의 절반인 2500만 명이 사용하는 대한민국 대표 SNS로 자리매김해. 시간이 흘러서 2010년. 닷컴 기업들은 예상치 못한 흐름에 직면하게 됐어. 스마트폰의 시대가 열린 거야.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서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이 등장을 하면서, 인터넷 사이트들은 점점 이용자들을 잃게 돼. 찬란했던 닷컴 시대가 막을 내리기 시작한 거지. 인스타그램이나 엑스(옛 트위터) 혹은 페이스북 같은 서비스는 찾아오고 찾아가는 게 아니라 콘텐츠가 나한테 옵니다. 그걸 피드라고 해요. 미니홈피는 그 공간으로 찾아오는 거고, 이거는 피드가 나한테 오는 거고. 그래서 기존에 웹에서 잘 나가던 서비스가 그대로 스마트폰에서 이어지기는 어려워요. 서비스의 기본적인 구조가 바뀌거든요 완전히. -김지현, IT 전문가·테크 라이터 잘 나가던 싸이월드 역시 외래 SNS에 밀려나기 시작했어. 프리챌 역시 변화하는 시대 속에 살아남지 못하고 2013년 추억 속으로 사라지게 돼. 그 후 싸이월드 창업자들은 IT 관련 강의, 스타트업 컨설팅을 하는 등 새로운 시대에서 활약하고 있어. 프리챌에서 뿔뿔이 흩어진 직원들은 우리나라 IT 산업을 이끄는 거목들로 성장해. 프리챌의 디자이너 최소현 씨, 지금 네이버의 디자인 부문장을 맡고 있어. 디자인 총괄 조수용 씨는 대한민국 대표 IT 기업 카카오 대표이사를 역임해. 누군가는 청와대 소속 국가인공지능전략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전 세계를 사로잡은 콘텐츠 브랜드 '핑크퐁'을 만든 대표가 됐다고 해. ▲ 프리챌 대표의 근황 근데 중요한 사람이 빠진 것 같지 않아? 이 모든 인재들을 한데 모아 그 시절 인터넷의 흐름을 바꿔놓은 사람. 1세대 벤처 CEO이자 IT 천재라 불리던 프리챌의 전제완 대표. 그는 지금 뭘 하고 있을 것 같아? 어떤 모습일지, 그를 찾아 강원도 양양으로 갔어. 네, 맞습니다. 제가 전제완입니다. 지금 잔디가 많이 자라서 깎고 있거든요. 쓰레기도 버려야 되고, 그다음에 자쿠지에 물도 받아야 되고. (펜션에서 일하는지 묻자) 예 그렇습니다. 청소가 제 전공이고요. 좋은 말로 하면 정원관리사. 거름도 줘야 되고 풀도 뽑아야 되고 잔디도 깎고. 뭐 이게 제 주전공인데… -전제완, 전 프리챌 대표 전제완 대표는 양양의 한 펜션에서 청소부로 일하고 있었어. 사업을 하다가 이게 어려워지는 그 고통은, 사실은 인생이 거의 파탄 지경에 이르는데. 시름을 잊어야 되니까 여기 와서 청소하고 있는 거예요. 한군데 집중을 해야 되거든요. 그래도 자꾸 생각이 나는 게, 그거는 그만큼 제가 마음을 못 비운 거죠. 그게 금방 비워지나요 제가? (프리챌 오픈) 1년 만에 국내 TOP3로 진입을 시킨 구조를 가졌으니까. 회원 천만 명이란 건 사실 우리나라 인터넷 다 쓰는 거하고 똑같잖아요. 그 마음을 다 비울 수 있다면 제가 해탈하는 사람이죠. 머리만 없지 제가 중 같은 수도를 하는 사람도 아니고, 잘 안돼요. -전제완, 전 프리챌 대표 모든 사람들과 연을 끊고 지금은 펜션 청소, 대리운전을 하며 살고 있다고 해. 한때 대한민국 벤처업계에 한 획을 그었던 사람에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IMF 구조조정 시기에 회사를 박차고 나와 야심차게 프리챌을 만든 전제완 대표. 처음에 프리챌이 잘 나갔을 땐 세상 두려울 게 없었다고 해. 시청률 한 50% 가보세요. 우리 PD님, 감독님, 촬영감독님들이 잠 안 자죠. 재방송 보느라고 그거 자겠어요? 그냥 비슷한 거예요. 간이 침대에 있고 막 자빠져 자고 의자 붙이고 자도, 그냥 다들 즐거웠던 거예요. 일하는 것들이. 사용자 엄청 늘지 그러니까 재밌을 수밖에 없었죠. 다 재밌게 일했던 것 같아요. -전제완, 전 프리챌 대표 ▲ 닷컴 버블 붕괴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용자 수가 많아질수록 회사는 계속 적자가 나. 서버 유지비부터 하드웨어 비용, 네트워크 사용료까지 서비스가 커질수록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대. 회원 100만 명 정도의 서비스를 운영하려면 하드웨어 비용만 한 달에 30억 원이 들었대. 이렇다 보니 GE캐피탈에서 받았던 투자금은 금세 떨어졌어. 거기다가 또 큰 문제가 하나 생겼어. IT 관련 주가가 폭락하기 시작한 거야. 묻지마 투자에 주가가 치솟던 코스닥 시장은, 떨어질 때도 기록적이었습니다. 코스닥 시장의 대폭락에 국내 벤처기업들이 몰려있는 테헤란 밸리도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중 이른바 '닷컴 버블 붕괴'. 기대만큼 실적이 따라주지 못하니까 IT 벤처기업들의 거품이 한순간에 꺼져버렸대. 이때 모든 벤처기업이 휘청이기 시작했어. 싸이월드는 한창 잘나가던 시기에 대기업 SK에 매각돼. 전제완 대표는 투자자를 찾아서 백방으로 뛰어다녔어. 프리챌의 가능성과 인터넷 산업의 미래를 설명했어. 이 바닥에서 1등만 하면 시가총액 1조는 거뜬히 넘을 겁니다. 이 양반이 벤처하더니 정신이 나갔나? 지금 삼성물산 시총이 얼마인 줄 알아? 2000년대 말 삼성물산의 시가총액은 약 3조였어. 그러니까 투자자들 입장에서 전제완 대표의 말, 어떻게 들렸겠어?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IT 산업의 잠재력을 가늠하지 못했던 거야. 그런데 2026년, 네이버 시총이 30조야. 겉으로는 화려했던 프리챌. 안에서는 벼랑 끝에 몰리고 있었어. 그래서 선택한 불가피한 방법이 바로 유료화였던 거야. 전 대표는 유료화를 앞두고 프리챌에 이런 편지를 올렸어. 안녕하세요. 프리챌 대표이사 전제완입니다. 갑작스러운 프리챌 커뮤니티 유료화 발표로 많은 당혹감이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회원님들께 진심으로 사과를 올립니다. 프리챌 입장에서는 지속적인 기술 개발을 하기 위하여 회사에 운명을 걸고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프리챌은 가장 좋은 소프트웨어와 시설 인프라로 보답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한 커뮤니티 유료화였음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한 달에 3천 원을 받는 대신 사이트에 광고도 없애고,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어. 우려와는 달리 보름 만에 20만 개의 유료 커뮤니티를 확보했어. 이대로라면 프리챌 문제없이 운영할 수 있을 것 같아. ▲ 몰락과 실패 그러던 2002년 12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벤처 업계를 뒤흔든 사건이 벌어지고 말아. 검찰은 어제 전 씨에 대해 주금가장납입과 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습니다. 회사 유상증자 과정에서 수십억 원대의 주식 납입금을 가짜로 내고 120여억 원을 횡령한 혐의도 받고 있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중 전제완 대표가 갑자기 구속된 거야. 실제로 납입하지 않은 자본금을 납입한 것처럼 꾸민 혐의와, 주식 대금을 회사 돈으로 지급한 횡령 혐의였어. 전 대표는 고의가 아니라고 주장했어. 회사 자금 사정이 어려워서 불가피하게 내린 경영상의 판단이었을 뿐, 개인적인 이득을 취할 목적은 아니었다는 거야. 하지만 그는 결국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받게 돼. 그러니까 (경영상) 위기 관리가 생기니까 역시 제대로 된 판단을 못했어요. 내가 결국은 거기(위기 관리)에 적합하고 거기에 맞는 구조를 못 짠 거죠. 그러니까 실력이 부족한 거야. 부족했어.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금 이 시점에 와서 본다면, 프리챌 유저들한테는 제가 이 자리를 빌려서, 끝까지 데이터를 지켜주지 못한 게 죄송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릴게요. -전제완, 전 프리챌 대표 그렇게 전 대표는 2년의 형기를 마치고 2004년 출소해. 한참 시간이 흘러서 2016년, 싸이월드 창업자들은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듣게 돼. SK가 싸이월드를 더 이상 갖고 있기에 그렇게 미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서, 싸이월드 팀을 분사시켰거든요. 그래서 잘 안 됐어요. 안 되고 있는데 어느 날, 프리챌 사장이 같이 하기로 했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처음에 귀를 의심했죠. -이동형, 전 싸이월드 대표 일종의 적군의 수장이잖아요. 적의 수장이 갑자기 어느 순간, 싸이월드 대표가 된다고? 이게 뭐지?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전확렬, 전 싸이월드 이사 그런데 지금 전 대표, IT와는 전혀 상관없는 생활을 하고 있잖아?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싸이월드가 가지고 있는 그 데이터의 역사성, 중요성을 간과하면 안 된다는 거지 나는. 그게 보존이 돼야 하는 데이터라고요. 좀 어렵지만 끊임없이 해 나가서 진짜 나중에 다 살아나면 고객들이 '열심히 해서 이렇게 만들어줬구나 잘 쓰고 있어' 그런 일들을 해보고 싶었어요. (싸이월드) 열심히 했어요. 돈도 한 300억 이상 투입을 해서 개발을 하다가, 코로나19 딱 터지면서 더 이상 진행을 못 하겠더라고요. 잘 가다가 9부 능선에 갔는데 왜 마지막 발을 디디는데 거기가 낭떠러지인 거야 이게. 뭐 첫째는 제가 실력이 없는 것이겠죠. 그러니까 잘 하지 못한 CEO가 경영자가 못 한 게 첫 번째 잘못이고. 두 번째는 사업은 실력만으로 되는 건 아니고 운이 좀 있어야 되는데. 예기치 않은 어떤 특수한 상황 때문에 두 가지(프리챌, 싸이월드) 다 무너진 걸 보고, 저는 사업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죠. 나로 인해서 시작된 일에 대해서 내가 그걸 연연하면 미래가 없어. 흘러간 물로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단 말이에요. -전제완, 전 프리챌 대표 싸이월드 개발에 필요한 투자를 한창 받으러 다니던 2019년, 코로나19 팬데믹이 터진 거야. 세계적으로 경기가 침체되면서 투자가 뚝 끊겨. 임금 체불과 횡령 혐의로 형사처벌까지 받게 돼. 싸이월드도 살리지 못했던 거지. 1세대 벤처 신화를 이끈 사업가이자 우리나라 IT 산업의 성장에 한 획을 그었던 전제완. 결국 자연으로 낙향해 살게 됐어. 1세대 벤처 기업들은 시대의 뒷문으로 사라졌지만, 그 시절 벤처의 꿈을 품었던 사람들은 지금도 그때를 잊지 못한다고 해. 열정만으로 살았던 시기인 거 같아요. 내 일 회사 일 안 가리고. 정말 열정으로 똘똘 뭉쳐서 일했던 거 같고. -신승식, 전 프리챌 마케팅 팀장 마음껏 상상하고 할 수 있는 거 다 꺼내놔 보고. 저에게는 자유와 도전이 가능하게 했던 첫 번째 운동장이라고 생각하고 싶어요. -최소현, 전 프리챌 디자인 팀장 저는 싸이월드가 감성적으로 말하면 내 딸 같거든. 진짜 농담이 아니고 딸처럼 느껴져요. -이동형, 전 싸이월드 대표 지금도 싸이월드 창업 멤버라고 하면 사람들이 일단 좋게 봐주고. 최고의 레퍼런스다. -전확렬, 전 싸이월드 이사 저에게는 젊음입니다, 젊음. 내 젊음이라고 생각하면 싸이월드를 같이 떼려야 뗄 수 없죠. -이정태, 전 싸이월드 이사 그들의 도전은 오늘날 대한민국이 IT 강국으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됐어. 그 시절 온라인 커뮤니티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현실만큼이나 따뜻한 공간이었어. 우리가 지나간 옛날의 편지를 다시 읽어보면 드는 그런 기분처럼, 나의 진정한 어떤 부분을 거기에 남겨두었는데 내가 그대로 문을 닫았다는 느낌… -최재경, 프리챌 '노처녀 통신' 운영자 그냥 일기장이니까, 언제라도 난 꺼내볼 수 있는 게 있었는데, 이제 그 서랍 자체를 드러낸다 그러니까 많이 많이 아쉬웠죠. -신현우, '무신사' 커뮤니티 유저 '꼬꼬무'가 이번 방송을 준비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있어. '잊고 싶지 않다'는 것. 소중한 기억들이 담긴 이 일기장을 꼭 지키고 싶다는 거지. 그 마음은 언젠가 우리의 추억을 되찾는 열쇠가 되어줄 거야.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
[스브스夜] '꼬꼬무' 초고속 인터넷 시대와 함께 찾아온 '닷컴 열풍'···그때 그 사람들은 어디에?
등록일2026.09.18
닷컴 열풍의 주인공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17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응답하라, 자유와 도전! 이라는 부제로 지금처럼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 사람들을 한 곳에 모이게 했던 문화를 조명했다. 과거 통화 요금 폭탄도 감수하고 몰래 접속하던 PC 통신 시절을 거쳐 초고속 인터넷 시대가 열리며 닷컴 열풍이 불었다. IT 벤처기업들이 우후죽순 생겨나며 닷컴 열풍을 선도하던 그 시절 (주)자유와 도전은 서울대 경영학과와 삼성 물산을 거친 전제완 대표를 중심으로 서울대와 삼성으로 연결된 인재들이 하나 둘 모였고 이들은 프리챌 닷컴을 만들어 오픈했다. 삼성물산 시절 컴퓨터를 독학해 새로운 인사관리 시스템 만들어 당시 삼성의 인사 시스템을 개편시킨 공을 인정받아 제1회 자랑스러운 삼성인상 수상했던 전제완. 그는 1997년, IMF 외환 위기에 삼성을 나와 자유와 도전을 만들었고 인재들을 하나 둘 모았다. 그리고 이들은 누구나 언제 어디서든 손쉽게 커뮤니티를 만들 수 있는 프리챌 닷컴을 만들었고 이는 오픈 3개월 만에 회원수 100만 돌파, 3만 5천여 개의 커뮤니티 개설로 대박이 났다. 대한민국 대표 패션 플랫폼 무신사도 이곳의 커뮤니티가 전신. 온라인 커뮤니티 덕에 모이고 교감하게 된 사람들은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기쁨으로 온라인 커뮤니티에 모여든 이들 덕분에 승승장구하게 된 프리챌. 그리고 비슷한 시기 클럽 서비스를 제공하던 사이좋은 세상은 프리챌의 자본과 인재풀을 부러워하며 자신들만의 새로운 서비스를 만들었다. 이들이 만든 것은 한국형 SNS의 시작인 미니홈피 서비스가 있는 싸이월드를 오픈했고 업계 최초 BGM 서비스, 사이버 화폐 도토리 서비스 등을 도입하며 엄청난 대박을 냈다. 직접 찾아가는 공동의 공간 커뮤니티에서 사람들이 찾아오는 나만의 공간으로 혁신적인 새로운 서비스로 포지셔닝하면서 대한민국의 네이버, 다음 버금가는 형태의 서비스로 거듭난 싸이월드. 싸이월드의 등장으로 위기감을 느낀 프리챌은 미니홈피를 빼닮은 마이홈피 서비스를 오픈했고, 커뮤니티 운영 유료화를 선했다. 그러나 이에 폭발한 민심으로 이용 적어 순식간에 빠지며 반토막이 났다. 그리고 2010년 닷컴 기업들은 예상하지 못한 스마트폰의 시대를 직면하게 되었고 정보가 알아서 찾아오는 피드형 SNS의 등장으로 닷컴 시대의 몰락을 맞이했다. 서비스의 기본적인 구조가 바뀌며 외래 SNS에 밀린 싸이월드. 그리고 급기야 2013년에는 프리챌이 서비스 종료를 선언했다. 이후 싸이월드 창업자들은 새로운 시대에서 맹활약 중이고 프리챌 전 직원들은 현재 네이버 디자인 부문장, 카카오 공동 대표 이사, 청와대 소속 국가인공지능전략위원회 위원, 핑크퐁 탄생시킨 대표 등 우리나라 IT 산업의 거목으로 성장했다. 그런데 그들 속에 프리챌의 대표 전제완은 없었다. 현재 양양의 한 펜션에서 청소부로 일던 그는 사업을 하다가 어려워지는 고통은 엄청나다. 사실 인생이 거의 파탄 지경에 이르는데 시름을 잊어야 하니까 여기 와서 청소를 하고 있는 거다. 한 군데 집중을 해야 해야 잊을 수 있으니까. 그래도 자꾸 생각나는 게 그만큼 마음을 못 비우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쉽게 비워지냐. 1년 만에 국내 TOP3 진입을 시킨 구조를 가졌으니 그 마음을 다 비울 수 있다면 나는 해탈한 사람일 것이다 라고 했다. 모든 이들과 연을 끊고 지금은 펜션 청소, 대리운전을 하며 살고 있다는 전제완 전 프리챌 대표. 사실 프리챌은 사이트가 승승장구할수록 회사는 적자를 안게 되는 구조였다. 이에 투자금은 금세 동이 났고, 그 무렵 IT 관련 주가의 폭락 시작으로 닷컴 버블의 붕괴를 맞았다. 전 대표는 투자를 위해 발 벗고 뛰었지만 IT 기업의 잠재력을 알아주지 않고 벼랑 끝으로 내몰리던 프리챌은 커뮤니티 운영 유료화를 선언했다. 이에 돌파구를 찾았나 싶었던 것도 잠시. 2002년 12월, 전제완 전 대표가 구속된다. 회사 자금난에 따른 불가피한 경영 판단으로 사익 취할 목적이 아니었다고 해명했음에도 징역 1년 실형을 선고받은 전 대표는 프리챌 유저들한테 이 자리를 빌려서 끝까지 데이터를 지켜주지 못해 죄송하다 라고 사과의 마음을 전했다. 이후 그는 싸이월드의 데이터 역사성, 중요성을 간과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싸이월드를 인수해 300억 이상 투자해 개발을 하던 전 대표. 하지만 코로나가 터지며 결국 싸이월드도 살리지 못하고 이제는 그때를 추억하기만 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SBS연예뉴스 김효정 에디터)
[꼬꼬무 찐리뷰] 바닷물 솟구치는데 입구 막아버린 일제…183명을 수중 매장한 '조세이 탄광' 잔혹사
등록일2026.09.12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10일 방송된 '검은 뼈 - 49년 만에 전해진 부고'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전 국가대표 수영선수이자 SBS 해설위원 박태환, 가수 김종서, 배우 변요한이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낯선 곳에서 온 편지 때는 1991년 11월. 인천에 사는 쉰 살의 박정일 씨한테 편지 한 통이 도착해. 그런데 편지 봉투에 적힌 발신 주소를 보는 순간, 정일 씨가 고개를 갸우뚱 해. 편지는 모두 두 장이야. 한 장은 일본어, 다른 한 장은 한국어 번역본이야. 그런데 이 편지를 읽으면 읽을수록 정일 씨 머릿속이 점점 혼란스러워져. 대체 왜 그랬을까? 이게 그날의 편지 내용이야. 갑자기 편지를 드려서 놀라실 줄은 압니다. 저희는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에 사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돌아가신 분들의 본명을 알 수가 없어, 일본식 이름만 적어 편지를 보냅니다. 부디 억울하게 생을 마감하신 분들의 본명과, 유족분들께서 당시 사망 소식을 알게 되신 경위를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1991년 10월 28일,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에서 타케노부 올림 편지를 보낸 곳은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 보낸 사람의 이름은 타케노부. 갑자기 일본에서 날아온 편지. 그것도 전혀 모르는 사람이 보낸 거야. 정일 씨는 궁금했어. 타케노부가 누구지? 그리고 내 주소는 어떻게 알았을까? 정일 씨는 놀랍고 황당하기까지 해. 그 내용도 충격적이잖아. 그런데 사실 이 편지가 정일 씨한테 오기까지, 그리고 편지를 보낸 타케노부 씨에게도 믿기 힘든 엄청난 사연이 숨어있어. 편지 내용이 어딘가 좀 묘해. 야마구치현 우베시, 돌아가신 분이라… 정일 씨는 편지를 읽고 또 읽었어. 그러다가 문득, 한 사람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어. 바로 아버지야.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없으니까. '나는 왜 아버지가 없나' 싶은 거고. 집안 주변 분들이 '너 아버지 보려면 네 얼굴 봐라' 그런 이야기 하긴 하는데. 몰라요. 사진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어요. -박정일, 일본으로부터 의문의 편지를 받은 남자 정일 씨는 사실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 1942년, 정일 씨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돼서 아버지가 일본에서 돌아가셨다는 것만 알아. 주변 어른들한테 물어봐도 어디에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제대로 말해주질 않아. 그렇게 평생을 살아왔는데 어느 날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한 일본인이, 아버지의 진짜 이름과 죽음에 대해서 묻고 있는 거야. 정일 씨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잊고 지내던 판에 1991년도에. 1991년도면 지금으로부터 35년 전인가 그렇죠? 내 나이가 오십 하나 둘 됐겠네. 어떻게 내 주소를 알았나. 편지를 받으니까 참 깜짝 놀랐지 처음에는. -박정일, 일본으로부터 의문의 편지를 받은 남자 그런데 얼마 뒤, 정일 씨는 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돼. 이런 편지를 받은 사람이 더 있는 거야. 전국 곳곳에서 똑같은 편지를 받았다는 사람이 나타나.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어. 1942년 2월 3일.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에서 가족 가운데 누군가 돌아가셨다는 거야. 한 날 한 시에 벌어진 사건이야. 하지만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어. 그러던 어느 날. 믿기 힘든 소식이 들려왔어. 그날 그 사건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한국에 있다는 거야. 그리고 그중 한 분이 바로 이분이야. 이분의 성함은 설도술. 어르신은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야. 하지만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그날의 기억만큼은 또렷하게 남아있어. 그리고 그 기억을 생생한 증언으로 남겼지. 대체 그날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자, 이제 이 도술 어르신의 목소리를 따라서 지금으로부터 시간을 87년 전으로 거슬러 가 볼게. ▲ 갑자기 끌려간 청년들 때는 1939년 10월, 경상북도 영일군 장기면이야. 한적한 시골 마을에 일본인 순사 두 명이 나타났어. 마을을 가로지르더니 어느 한 집에 들이닥쳐. 바로 21살 청년 도술이의 집이야. 설도술, 당장 나와! 6남매 중 둘째인 도술이는 학업도 포기하고 부모님의 농사일을 거들고 있었어. 그런 도술이한테 지금 당장 장기면 지서, 그러니까 마을 경찰서로 오라는 출두 명령이 떨어진 거야. 일단 도술이는 영문도 모른 채 부랴부랴 지서로 향했어.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깜짝 놀라. 그날 출두 명령을 받은 건 도술이 혼자가 아니었어. 친구 정임출을 포함해서 서른 명이 넘는 청년들이 거기 불려와 있었거든. 며칟날 몇 시까지 경찰서 도착해라, 출두해라, 이런 명령서가 왔다 이 말이지. 관에서 명령이 왔는데 그거 불응할 수도 없고 가볼 수 밖에. 그래서 막상 제가 경찰서 가니, 우리가 사는 그 면 사람이 한 30명 와 있어. 그때 한 사람 한 사람 불러내서, 귀에 뭐가 들리나 안 들리나, 눈에 뭐가 보이나 안 보이나, 이게 신체검사라. -설도술, 당시 사건 목격자 순사들이 청년들을 한 명씩 불러내더니 갑자기 옷을 벗으라고 하고 청년들의 몸을 하나하나 살펴. 그리고 건장한 청년들만 따로 골라내. 도술이와 임출이도 순사들한테 뽑혔어. 선발된 마을 청년들은 일본인 인솔자한테 넘겨져서 갑작스레 기차에 올라.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르는 채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을 달리던 열차가 드디어 멈춰. 내리고 보니 부산항이야. 빨리 정렬해! 라는 인솔자의 고함 속에 청년들은 허둥지둥 커다란 배에 올라탔대. 청년들이 탄 배는 부산항에서 출발해서 일본 시모노세키항에 도착하는 부관 연락선이야. 그제야 도술이는 자신이 일본에 가고 있다는 걸 깨달아. 그리고 주변을 보니 같은 처지의 청년들이 한둘이 아니야. 200명은 넘어 보였대. 밤새 걱정과 뱃멀미에 시달린 끝에, 다음 날 아침 도술이는 시모노세키항에 도착해. 드디어 육지에 발을 디뎌보나 싶었는데, 뭔가 이상해. 승객들이 다 내릴 때까지 꼼짝도 못하게 하는 거야.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갑자기 저 배에 올라타! 라는 소리가 들려. 항구에 내리는 대신에 곧바로 작은 배에 옮겨 타라는 거야. 그럼 어디로 가느냐, 어디로 데리고 가는지 모른다 이 말이지. 그러니까 각자가 다 마음이 불안했지. -설도술, 당시 사건 목격자 그렇게 작은 배를 타고 몇 시간 뒤, 마침내 최종 목적지에 도착해. 청년들이 배에서 줄지어 내리는데, 하나같이 눈앞에 펼쳐진 모습을 보고 놀라. 여기가 바로 그날 도술이가 배에서 내린 곳이야. 배에서부터 뭔가 쭉 뻗어있어. 철로가 깔려있지. 도술이가 배에서 내리자 낯선 일본인들이 다가오더니 청년들을 줄 세워. 일본인 한 명이 앞으로 나서. 나는 하라 감독관이다, 따라와! 그 감독관이라는 사람을 따라서 얼마나 걸었을까. 도술이 앞에 빽빽이 솟은 나무 판자들이 보였대. 뭔가 가까이 다가갈수록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나무 판자가 무려 3m가 훌쩍 넘는 울타리야. 그 울타리 안으로 들어서니 한 층짜리 목조 건물들이 보여. 그리고 곳곳엔 초소 같은 게 보이고, 누군가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어. 하라 감독관이 건물 쪽으로 청년들을 데리고 가. 건물들은 서로 다닥다닥 붙어 있고,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문은 단 하나뿐이야. 그 단 하나뿐인 문 앞에도 감시원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어. 그제야 도술이는 상황 파악이 좀 됐어. 아… 우리 지금 갇혔네. ▲ 조세이 탄광 며칠 뒤, 하라 감독관의 고함이 들려. 전원 집합! 청년들을 공터에 집합시키더니 한 사람씩 앞으로 불러내. 그리고 이번엔 장비를 하나씩 나눠줘. 곡괭이, 소쿠리, 안전모… 도술이와 청년들이 끌려온 곳은 바로 야바구치현 우베시에 위치한 장생탄광. '조세이 탄광'이라 불리는 곳이었어. 겉에서 보면 숙소로 쓰이는 건물들, 그 주변의 울타리들만 보여.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탄광은 안 보이고 바다밖에 없어. 바로 그때, 도술이 눈앞에 굉장한 광경이 펼쳐져. 보니까 바다 쪽에서 뭔가 새까만 무언가가 천천히 올라오는 게 보여. 가까이 올수록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까매. 전구가 달린 안전모랑 흰자위만 겨우 보여.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도 없을 만큼 석탄가루를 온몸에 뒤집어쓴 사람들이 줄줄이 올라오고 있는 거야. 이 사람들 대체 어디서 올라온 걸까? 도술이는 그때 처음 알게 됐어. 조세이 탄광은 마치 개미굴처럼 바다 밑에 뻗어있는 해저 탄광이었던 거야. 며칠 뒤 새벽, 도술이는 갱도 입구에 서. 갱도의 크기는 가로 2.2m, 세로 1.6m, 성인 남성이 허리를 숙여야만 겨우 들어갈 크기야. '그 안에 대체 뭐가 있나' 뚫어져라 쳐다봐도 그 속은 안 보여. 꽉 찬 어둠에 들어가기도 전에 겁부터 나지. 도술이는 바짝 긴장한 채 곡괭이를 들고 앞사람을 따라 갱도로 내려가. 안으로 들어갈수록 숨이 턱턱 막혀. 작업복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은 상태. 더 이상 입고 있을 수가 없으니까 결국 모두 벗어버리고 속옷 차림이 됐어. 깊이는 또 얼마나 깊은지, 한참을 걸어가. 죽을 지경이지 뭐. 굴 안에 들어가면 옷이 필요 없어요. 더우니까. 발가벗고 훈도시(일본식 속옷)만 입고. 내내 걸어가도 한 시간 걸어가서 내 일하는 현장까지 갈 때가 있어요. 그만큼 멀다고요. -설도술,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그렇게 한 시간쯤 들어갔을까? 희미한 불빛이 보이더래. 여기서 정지! 하라 감독관의 고함 소리에 모두 바짝 긴장해. 도착한 곳은 갱도의 끝, 바로 막장이야. 넌 이쪽으로! 그리고 넌 저쪽으로! 이렇게 오늘 일할 장소를 배정받는 거야. 도술이가 감독관의 결정을 기다리던 그때, 이상한 소리가 들리더래. 위에서 나는 소리 같아. 그런데 지금 이 위에 있을 거라고는, 갱도 천장이 전부잖아. 혹시 앞에 걸어가는 선배는 알고 있을까 싶어, 무슨 소리 안 들립니까? 라고 물었어. 그 순간, 입 다물어! 라는 감독관의 호통이 날아와. 왜 말을 못하게 하는 걸까? 기강 잡으려고 그러는 걸까? 사실 갱도 안은 산소가 부족했어. 바다 속이니까. 도술이는 지금 입구에서 1km 넘게 들어와 있어. 한 시간 동안 걸었다고 했잖아. 이 안으로 들어갈수록 환기는 어렵고, 그러니까 불필요한 대화는 철저히 금지한다는 거지. 물론 입구에서 송풍기로 공기를 불어넣고 '피야'라는 굴뚝이 환풍구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갱도 끝 막장까지 충분히 산소를 공급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거야. 도술이는 입을 꾹 닫은 채 귀를 기울였대. '쿵닥, 쿵닥, 쿵닥' 도술이 머리 위에서 들리는 소리. 정체가 뭐였을까? 바다 밑을 파니까 저기(갱도) 가서 일하면 바닷물에 배가 가는 소리가 콩콩콩콩콩 귀에 들렸는데… 그때 쿵닥 쿵닥 쿵닥 기계 소리가 나거든. 그 바닷물에 가는 배가 콩당콩당 가는 게 그 굴속에서 콩콩 들렸으니… 그 하늘(천장)이 얇으니까 저기 (배가) 가는 소리가 들린 거 아닙니까? 아이고 싶은 게 마음이 아찔한 게… 그만큼 위험한 곳에 가서 일을 했다 이 말입니다. -설도술,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머리 위로 배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 그제야 도술이는 실감이 났어. 지금 자기가 서 있는 이곳이 바다 아래라는 걸. 탄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주간반, 야간반 교대근무로 나눠서 12시간씩 석탄을 캐. 주간반인 도술이는 새벽 4시에 탄광에 들어가서 오후 4시에 나오는 거야. 그런데 갱도의 천장이 워낙 낮다 보니 허리 한 번 제대로 펼 수가 없어. 그 상태로 계속 곡괭이를 휘두르는 거지. 손에는 금방 물집이 잡히고 석탄을 캘 때마다 튄 조각에 여기저기 상처투성이야. 그리고 천장에서는 계속 물이 떨어져. 바닥은 이미 바닷물로 흥건해. 다행히 갱도 안에는 물을 빼내는 안전장치가 있어. 여기 움푹 들어간 곳이 바로 펌프실이었거든. 물이 이 웅덩이 깊은 곳에 고이면, 전기 펌프로 그 물을 퍼 올려. 그리고 물을 밖으로 빼내는 거야. 갱도 안으로 물이 계속 스며들었기 때문에 펌프는 1년 365일 24시간 내내 멈출 수 없었어. 탄광에 끌려온 도술이와 청년들의 삶도 마치 멈추지 못하는 펌프와 마찬가지였어. 쉬는 날이 거의 없이 일했거든. 매일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가, 온몸이 새까매진 채로 계속 떠오르는 삶이야. 너무 일이 사납고 천장도 낮고 밑엔 물이 질척질척하고, 그게 뭐 마음이 좋을리가 없고. 굴 안에서 일하고 나와보면 새까맣게… 말도 마세요. 우리 많이 고생했어요. -설도술,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편지를 보여줄게. 한 조선인 노동자가 감독관 몰래 고향에 보낸 거야. 어머님, 저는 지금 일본 야마구치현이라는 곳에서 탄광일을 하고 있습니다. 숙소는 마치 포로수용소 같은 곳입니다. 폭력을 가하고 밥도 주지 않고 굶기는 일이 허다합니다. 어쨌든 간에 반드시 탈출하여 반드시 어머니가 계시는 곳으로 돌아가겠습니다. -故김원달,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도술이도 매일 도망갈 생각만 했대. 하지만 그게 쉽지가 않지. 아까 처음 얘기했을 때 숙소 주변이 높은 울타리로 막혀있다고 했었잖아. 그게 전부가 아니었어. 울타리 위엔 이런 센서 선까지 설치돼 있었대. 여길 탈출하려면 깜깜한 밤을 틈타서 3m 넘는 울타리를 넘어야 하는데, 울타리 위 이 선을 잘못 건드리기라도 하면 발각이 되는 거네. 가까스로 울타리를 넘는데 성공을 했다 해도, 그게 끝이 아니야. 한쪽은 바다고 다른 한쪽은 산이야. 그러다 붙잡히기라도 하면, 모진 매질이 이어졌어. 쓰러져도 멈추질 않아. 달아난 사람이 달아나다가 사무실에 딱 붙들려서 오면, 그 사무실 바닥에다가 '그 녀석 나쁜 녀석, 이 자식 나쁜 놈이다' 하고 무조건 들고 패대니까 죽는다고 아우성을 치고 고함을 치고 그랬거든. 그렇게 두드려 맞아서 영구적인 장애를 얻은 사람도 있어요. -설도술,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그렇게 맞다가 목숨을 잃기도 했대. 구타를 해서 많이 죽어 나갔고, 매일 죽어나가죠, 사람이. 자꾸 죽어나가고 맞아 죽어나가고 하는 게 눈에 지금도 훤하게 보여요 앉아 있으면… 눈 감고 있어도 보이고, 그래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을 새울 때가 많아요. 너무… 매를 맞았어요. -故김경봉,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2016년 인터뷰) 결국 도술이는 도망치지 않았어. 근데 구타가 무서워서가 아니야. 고향에 있는 가족들 때문이야. '가족이 편하려면 내가 많이 벌어야지' 생각했어. 이 탄광에서는 얼마나 캤느냐가 곧 돈이었거든. 적정한 보상은 아닐지라도, 대가는 주는 그런 시스템이었거든. 조금이라도 돈을 많이 벌려면, 곡괭이를 더 빨리 더 많이 휘둘러야겠지. 도술이는 부모님과 형제들한테 조금이라도 돈을 보태기 위해 이를 악물고 버텼어. 1941년 12월, 도술이가 탄광에서 일한지도 벌써 2년이 넘었어. 어느새 23살이야. 이젠 새로운 사람들한테 일을 알려줄 정도야. 그런데 그 무렵에 도술이가 처음 왔을 때와 달라진 게 하나 있었어. 식당에 갈 때마다 줄이 길게 늘어서 있어. 새로운 사람들이 탄광에 계속 밀려들어오는 거야. 대부분 조선에서 끌려온 사람들이야. 도술이가 끌려온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이 조세이 탄광에 강제동원된 것으로 확인된 조선인의 수는 무려 1,258명. 도술이처럼 경찰의 출두명령을 받고 끌려온 사람, 돈 많이 주는 일자리라고 속아서 바다를 건넌 사람도 있어. 그 중 눈에 띄는 사람들에게는 사택을 마련해줄 테니까 가족을 데리고 오라거나, 결혼을 하라고 탄광 쪽에서 권하기도 했대. 어쩌면 그건 가족을 인질로 삼아서 오래 붙잡아 두려는 속셈이었는지도 몰라. 이렇게 탄광 주변에 하나의 마을이 형성된 거지. 그래서 조세이 탄광은 이렇게 불리기도 했어. 바로 '조센탄코', 바로 조선탄광. 결국 이 바다 아래로 내려간 사람들은, 대부분 바다 건너에서 끌려온 조선사람들이었던 거야. ▲ 운명을 바꾼 선택 그렇게 해가 바뀌고 1942년 1월의 어느 날, 도술이의 운명을 바꿀 일이 벌어져. 아까 도술이가 일을 악물고 정말 열심히 일을 했다고 했잖아? 그래서일까. 야간반의 감독관 나카무라의 눈에 띈 거야. 도술, 야간반으로 와라. 그럼 석탄이 많은 막장으로 보내줄게 라는 감독관의 제안을 도술이는 몇 번이나 거절했지만, 나카무라도 끈질겨. 결국 도술이는 야간반으로 옮겨. 오후 4시에 들어가서 밤새워 일하고, 새벽에 탄광에서 나오는 근무 일정인 거지. 아까 하고 시간이 완전히 반대가 된 거야. 그런데 이 선택이 불과 며칠 뒤에 그의 생사를 가르게 됐어. 1942년 2월 3일, 운명의 그날이야. 새벽 4시 도술이가 막 12시간의 야간작업을 마치고 갱도 밖으로 올라와. 안에서는 숨이 턱턱 막힐 만큼 덥고 습한데, 밖으로 나오니 겨울바람이 매서워. 도술이가 서둘러 그날 캔 석탄을 정리하고 있는데, 그때 눈에 익은 얼굴이 보였어. 고향에서 함께 온 친구 임출이야. 도술아, 고생 많았데이. 오늘 진짜 디네, 니도 고생해래이. 사실 그럴 때 고향친구만한 의지가 되는 게 없지. 평소와 다름없이 인사를 나누고, 도술이는 그대로 숙소로 향해. 이때까지만 해도 몰랐지. 몇 시간 뒤 탄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눈을 붙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갑자기 밖에서 다급한 고함 소리가 들려. 야! 일어나! 빨리 나와! 외치며 나카무라 감독관이 막 사람들을 깨우는 소리야. 목욕하고 와서 밥 먹고 방에 들어가 잠이 들었는데, 나카무라 감독관이 와서 막 일어나라고 고함을 지르고, '작업복 입고 일하는 것 같이 준비를 해 나오너라' 그래서… -설도술,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영문도 모르채 도술이는 급히 작업복을 걸치고 숙소 밖으로 뛰어나왔어. 그리고 식당 쪽을 지나는데,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어. '저기 내려다봐라' 그래서 여기 식당 가서 내려다보니까 바닷물이 막 천장 만장 튀어 올라오는데, 한 군데뿐만 아니에요. 여러 군데가 하얗게 뒤집어지는데 '저기 왜 저럽니까?' 그러니까… -설도술,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숙소에서 바다를 바라보니 바닷물이 기둥처럼 하늘로 솟구치고 있어. 여러 개의 물기둥이 솟아오르면서 바다가 온통 하얀 거품으로 가득해졌어. 탄광이 수몰되고 있어. 바다 밑 갱도에 구멍이 뚫리고, 바닷물이 갱도 안으로 쏟아져 들어가면서, 그 안에 있던 공기가 밖으로 밀려 나오면서 물을 기둥처럼 쏘아 올린 거야. 도술이는 곧장 갱도 앞으로 달려가. 매일 광부들이 들락날락하던 입구는 물이 흘러넘쳐. 입구 근처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어. 그날 아침 일하러 들어간 광부의 가족들이야. 아이고 아버지요! 아이고 행님! 왜 답이 없는겨! 어야노. 바깥양반 저 안에 있는데! 사람들이 광부들의 이름을 부르며, 물이 가득한 입구로 달려들어. 한겨울인데도 아무도 망설임이 없어. '우리 아들은 일하러 가서 안 왔다', '우리 남편은 일하러 가서 안 왔다' 아버지, 형님, 동생 이러고 굴 안에서 들여다본다 이 말이야. 이건 뭐 죽을 판 살 판, 물이고 어쩌고 자꾸 달려든다 이 말이지. -설도술,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붙잡아서 물가로 데리고 나오면 또다시 물속으로 들어가려고 해. 남편의 이름을 부르짖는 아내, 아버지를 찾는 아이, 탄광촌 전체가 울음바다야. 그때 한 여자가 입구 앞에 쓰러졌대. 그 옆엔 3살짜리 막내 아들 재봉이가 있었어. 그날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볼게. 제 이름은 신재봉입니다. 나이는 지금 1939년생, 만 87살입니다. 내가 태어난 게 일본 야마구치현 탄광촌, 우베시. 제 위로 네 분이 계시는데, 형 세 분이고 누님 한 분인데. 저 혼자만 남아서 지금 인터뷰를 하고 있어요. 제가 3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아침에 밥 잘 잡숫고 새벽에 나가신 분인데… 서른일곱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까. 어머니는 30대 초반입니다. 그 젊은 나이에 혼자 돼가지고, 탄광촌 탄광 입구에 가서 물이 철렁철렁 입구까지 차 있는데, 거기 가서 쓰러지신 거예요 그냥. -신재봉,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故신용업의 아들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갱도 안은 어떤 상황인지, 구조는 어떻게 할지, 알려주는 사람이 없어. 가족들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그때, 갑자기 수십 명의 헌병대가 나타났대. 돌아가! 여기 오지 마라! 헌병들이 울고 있는 가족들을 밀어내더니 갱구 앞으로 가. 손에는 판자와 각목, 그리고 각종 연장이 들려있어. 헌병들은 들고 있던 판자와 각목으로 갱구를 막아버려. 아직 안에 사람이 있는데, 가족들이 애타게 기다리던 구조대는 끝내 오지 않아. 1942년 2월 3일, 조세이 탄광의 갱구는 그렇게 가족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대로 닫혔어. 몇 명이 사망했고 어쩌다 사고 났는지도 모르는 채로. 남은 가족들은 그 후에 어떻게 했을까. 갱구 앞에 쓰러졌던 재봉이의 엄마, 남편의 시신을 찾을 엄두도 내지 못했대. 집에 돌아오면 5남매가 엄마만 쳐다보고 있는데, 울고 있을 틈이 없잖아. 당장 먹고 살 길이 급해. 그래서 근처 다른 탄광으로 일을 하러 가. 남편을 집어삼킨 탄광으로. 그런 어머니를 보며 아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머니는요. 자꾸 어머니 얘기하려니까 내 슬픈 마음이 들어서 말이 잘 안 나오는데. 이 세상에 여자로 태어나서 참 어머니같이 고생을 많이 하신 분은 없어요. 눈만 뜨면 우리 밥해놓고 딱 먹을 거 차려놓고는 탄광으로 일하러 나갑니다. 할 일은 없고 애는 먹여 살려야 되고. 슬퍼서 울고 통곡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어요. 3살 먹은 놈이 뭘 알겠어요? 내가 이렇게 나이 들 보니까, 참 슬픈 일이에요. -신재봉,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故신용업의 아들 그렇다면 살아남은 도술이는 어땠을까. 그날 이후 도술이는 숙소 밖으로 나가지 않아. 임출이를 비롯해서 두만이, 만조, 영출이 고향 친구들이 많이 죽었거든. 도술이는 조를 바꿨기 때문에 살아남은 거야. 그래서 친구들의 가족이 도술이만 마주치면 늘 이렇게 말했대. 아이고 도술아… 니는 우찌 살았노? 라고. 그 시내 쪽은 못 나갔어요. 나는 못 나갔어요. 왜 못 나가냐 하면, 죽은 사람의 어머니, 아버지, 형제, 부인, 아이들 이 사람들이 많이 면(얼굴)을 안다 이 말이에요. '아이고, 니는 어떻게 안 죽고 살았노' 하며 달려들어서 붙들고 울고 하니. 나도 눈물이 나오고… -설도술,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그날 이후 탄광은 아수라장이야. 사무실을 지키던 감독관들도 하나 둘 자취를 감춰. 그래서 급여도 제대로 받지 못했대. 결국 많은 사람들이 울타리를 넘어 달아나. 도술이는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을까? 아까 도술이가 어떻게 탄광에 왔다고 했지? 배를 타고 강제로 끌려왔다고 했잖아. 강제 동원된 조선인이 배를 타고 조선으로 돌아간다? 이건 아무래도 어렵겠지. 현실적으로 도술이는 살아는 남았지만, 일본을 빠져나갈 수는 없었어. 산 사람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가 없는데, 갑작스럽게 이 탄광에서 돌아가신 분들은 어땠겠어? 입구가 닫힌 갱도 안에 그대로 남겨지게 돼. 그리고 그 위로 긴 세월이 흘러. 그 사이에 조선은 해방을 맞이했고, 탄광촌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할아버지가 됐어. 하지만 바다 아래에 남은 분들의 시간은, 1942년 2월 3일 그날에 멈춰있어. ▲ 진짜 이름을 찾아서 멈춰있던 그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49년이 지난 1991년 가을이야. 아까 그 편지, 일본어와 함께 온 편지 기억나? 편지를 보낸 사람은 야마부치 타케노부라는 사람이야. 바로 이 분이야. 조세이 탄광이 있던 우베시의 고등학교 교사였어. 타케노부 씨는 우베시에서 나고 자랐어. 조세이 탄광이 수몰됐을 땐 초등학생이었지. 그땐 이 일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대. 그러다 20년이 흐른 1960년대 중반, 고향으로 돌아와서 고등학교 교사가 된 타케노부 씨는 우연히 한 학생의 집에 가정 방문을 하게 됐어. 그런데 그 집에 들어서는 순간, 깜짝 놀라. 어린 시절, 자기가 탄광촌에서 봤던 집들과 똑같이 생긴 거야. 그 학생의 집이 알고 봤더니 예전 조세이 탄광의 사택이었거든. 그 집에 들어서자, 잊고 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던 거지. 타케노부 씨는 이 일을 자세히 알아보려고 했어. 하지만 남아있는 건 사고 직후 나온 짧은 기사 몇 개가 다야. 그마저도 원인과 피해 상황은 조사 중이라는 내용이 전부였어. 그러니까 제대로 밝혀진 게 아무것도 없는 거야. 그때부터였대. 타케노부 씨는 조세이 탄광에 대한 기록을 하나씩 모으기 시작해. 그날 정확히 몇 명이 숨졌는지, 그들이 대체 누구였는지, 시간 속에 묻혀있던 이 일을 다시 들여다보게 된 거야. 그리고 1991년, 마음맞는 사람들끼리 모임을 하나 만들었대. 이름하여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 줄여서 '새기는 모임'. 타케노부 씨는 오래된 기록을 뒤지고 그날의 일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녔어. 그러던 어느 날,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어. 어느 한 절에, 사망자들의 명부가 보관돼 있다는 거야. 곧바로 달려간 타케노부 씨가 명부를 한 장 한 장 넘겨보는데,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해. 이름이 하나 둘 셋,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 거야. 대체 이름이 몇 명이나 적혀 있었을까? 타케노부 씨와 오랫동안 활동을 함께한, 현재 새기는 모임의 대표 이노우에 요코 씨에게 들어볼게. 저는 일본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의 대표인 이노우에 요코라고 합니다. 그게 우연인데요. 재일교포 스님이 계신 절에 조세이 탄광의 사망자 명부가 있었습니다. 원래 일본에서 한두 명 죽은 건 기록에 잘 남기지 않지만, 183명이나 되는 분들이 일본의 국가정책이었던 석탄 산업으로 인해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것이 기록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던 거죠. -이노우에 요코, &<조세이 탄광 수몰 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 현 대표 1942년 2월 3일, 그날 탄광이 물에 잠기면서 목숨을 잃은 사람은 모두 183명. 그 중 조선인은 136명으로 추정돼. 남아있는 기록마다 사망자의 숫자가 달라서 추정할 수 밖에 없어. 그런데, 명부를 확인하는 타케노부 씨와 요코 씨의 눈에 뭔가가 들어와. 조선인 사망자들의 이름이 대부분 일본식으로 적혀 있는 거야. 거기에 적힌 이름들은 모두 창씨개명된 이름들이었습니다. 창씨개명된 이름 자체가 조선인분들에게는 정말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을 거라고 저희도 생각하고 있었기에, 이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는 건 돌아가신 분들의 존엄을 해치는 일이라는 생각에, 가능한 한 원래 이름을 찾아내서 추도비에 새겨 넣고 싶었습니다. -이노우에 요코, &<새기는 모임&> 현 대표 '새기는 모임'의 첫 번째 목표가 사망자들의 이름을 새긴 추도비를 세우는 거였거든. 근데 이게 왜 첫 번째 목표였을 것 같아? 일본인으로서 사죄의 마음을 전하는 첫 걸음이라고 생각한 거지. 정부가 안 하니까. 강제로 바꾼 일본식 이름으로 비석에 그 이름을 새겨둔다? 말이 안 되는 거지. 이 이름으로는 추도비를 세울 수 없다고 생각한 이들은, '진짜 이름'을 찾기로 했어. 근데 어떻게 찾지? 두 사람이 명부를 자세히 살펴보니까 이름 옆에 뭔가가 써있더래. 바로 사망자들이 원래 살던 조선의 주소야. 근데 반세기나 흘렀기 때문에 가족이나 아는 사람이 거기 있을지는 알 수 없어. 그래도 이 주소가 유일한 희망이었어. 한반도에서의 옛 주소도 적혀있었기 때문에 저희는 1991년 가을에 한국과 북한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그분들(사망자)의 이름으로 옛날 주소 그대로 말이죠. 한 분이라도 좋고 두 분이라도 좋으니, 원래 이름만 찾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그 희망의 끈을 이어가고자 보낸 편지였습니다. -이노우에 요코, &<새기는 모임&> 현 대표 그런 간절한 마음으로 한국에 100통이 넘는 편지를 보냈어. 답장, 몇 통이나 왔을 것 같아? 한 통, 두 통, 세 통… 놀랍게도 무려 열일곱 통이나 답장이 왔어. 편지 속엔 그토록 찾던 원래 이름이 담겨 있었어. 반세기 전 주소만 믿고 무작정 보낸 편지. 가족한테 닿기만 해도 이건 기적이라고 생각했는데, 답장까지 온 거야. 대단한 일이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둘은 편지를 읽어 내려가. 그런데, 그 답장에 적힌 내용이 정말 뜻밖이야. 뜻 밖에도 무려 17통이나 되는 답장이 왔습니다. 그 답장의 대부분은 아버지가 일본으로 떠난 뒤 어디에 계신지, 살아 계신지 돌아가셨는지도 알 수 없었던 상황에서, 50년이 지난 뒤 저희가 보낸 이 편지를 통해 아버지가 이곳에서 돌아가셨다는 것, 즉 조세이 탄광의 사망자였다는 사실을 아신 거죠. -이노우에 요코, &<새기는 모임&> 현 대표 아버지가 일본으로 떠나신 뒤에 생사도 모르고 지냈다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던 거야. 편지를 받고서야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걸 처음 알게 된 사람도 있었대. 일본에서 날아온 그 편지 한 통이 50년 만에 아버지의 마지막 소식을 전한 셈이지. ▲ 다시 찾은 아버지 그때부터 전국에 흩어져 있던 유족들이 한자리에 모였어. 그 후 사고 현장에서 매년 함께 추도식을 열게 돼. 1993년도에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을 갔어요. 차례대로 잔 올리고 절하고… 같이 합동 절하고 그랬죠. 내가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아버지 제사를 바닷가 현장에 와서 지내니, 이런 날이 오는구나 싶은 게, 감회가 말할 수가 없지. -박정일,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故박맹문의 아들 어떤 힘으로 던졌는지, 던졌는데 꽃을 바다로 향해서. 처음 불러봤어요. '아버지'라는 것이 내 입에서 나오겠습니까? 그 한마디 딱 해보고는 지금까지 못 해봤어요. -신재봉,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故신용업의 아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저 왔습니다! -故전석호,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故전성도의 아들 그래도 매년 보고 싶었을 겁니다. 원래 제사 지내고 하면 누군가의 제사를 지내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잖아요. 똑같은 그런 감정이 있을 겁니다. -전영복,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故전성도의 손자, 故전석호의 아들 그리고 2006년, 믿기 힘든 소식이 들려왔어. 그날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 나타난 거야. 21살의 나이에 강제 동원되었다가 이제는 아흔을 바라보는 설도술 어르신. 2007년 2월, 어르신은 일본으로 향했어. 건강을 이유로 가족들은 극구 말렸지만 어르신은 고령에도 뜻을 굽히지 않으셨어. 어르신의 목적지는 단 한 곳. 65년 전 친구들을 남기고 떠나온 바로 그 바다야. 끌려 갔었던 그 탄광에 다시 오는 데 걸린 시간 65년. 청년은 그 사이 노인이 되었어. 탄광은 모두 폐허가 되었고, 남은 건 바다 위로 솟은 '피야' 뿐이었어. 65년 동안에 다 변해버렸어. 코구치(갱구)도 다 망가져 버리고 없고… 솔밭에 같이 들어가 얼마를 찾았나. 나무만 수북하고 찾지도 못하고. 그저 여기, 시멘트 있는 여기가 그때 굴 안에 들어가는 입구다, 이것만 짐작할 따름이지 아무 형체가 없어요. -설도술,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탄광이 있던 곳엔 수풀만 무성해. 입구로 짐작되는 곳은 여전히 막혀 있었어. 65년의 세월이 모든 흔적을 다 덮어버린 거지. 끝내 갱구는 찾지 못했어. 눈에 보이는 탄광의 흔적이라고는, 바다 위에 떠 있는 두 개의 기둥뿐. 도술 어르신은 한참 동안 그 바다만 바라 보셨대. 그때 죽은 사람들은 죽은 뒤에도 저 사람들은 물속에 들어앉아 있으니. 바닷물 때문에 빼낼 수가 없어. 저 물 때문에 못 간단 말이야, 물 때문에. 저 큰 바닷물은 어떤 장사가 퍼내나? 우리 친구들이 183명이 저기 누워있는데 참 가엾다 싶은 게, 생각하니 눈물밖에 안 나요. 안 나는데… 눈물 난들 그 사람들과 말을 한번 해 볼 건가, 그 사람들 하나 데리고 올 수가 있나… -설도술,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이 바다에 다시 오는데 정말 긴 시간이 걸렸잖아. 그런데 누구 하나 데리고 나올 수도 없어. 그래서 그저 바다만 바라보며 눈물만 삼킬 수밖에 없었대. 그러다 문득,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라. 고향에서 함께 바다를 건너왔던 그 친구, 임출. 어르신은 곧바로 근처의 한 절로 향해. 사망자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곳이야. 정임출이, 그 위패를 보니까, 하이고… '이 사람들이 여기 안에 있는데' 싶은 게, 막 눈물이 주룩 나서 울었어요. -설도술,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65년 만에 다시 만난 친구는 낯선 일본식의 이름으로 위패에 남아 있었어. 도술 어르신이 할 수 있는 건 그 이름 앞에 절을 올리는 것 뿐이었대. ▲ 참사가 사고였을까? 근데 그날 참사는 누구도 예상 못한 사고였을까? 대체 뭐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도술 어르신은 그날 새벽에 본 장면을 잊지 못해. 그날의 참사를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장면이야. 그 자리에 두 사람이 밤낮 지키고 있었다 이 말이요. 그 사람들이 많이 원망스러워요. -설도술,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지금부터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들어야 돼. 다시 그날로 돌아가볼게. 1942년 2월 3일 새벽 4시경. 물기둥이 솟아오르기 약 6시간 전이야. 야간 작업을 마친 도술이가 갱도 밖으로 올라오고 있었어. 그런데 갱도 한쪽에 일본인 감독관 둘이 앉아 있더래. 그 옆엔 전화기가 놓여있고, 물이 새는 곳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거야. 사실 광부들이 전혀 몰랐던 일이 있었어. 사고 이틀 전인 2월 1일 새벽 6시. 갱도에 새어 나오는 물의 양이 평소보다 3배나 많았던 거야. 2월 1일은 일요일이라 휴일이었는데, 갱내 관계자가 탄광 내부를 순찰하던 중 평소 출수량보다 약 3배 정도 많은 비정상적인 출수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결국 20시간이나 걸려서야 겨우 멈출 수 있었습니다. -나가사와 시게루, 일본 역사 연구자 20시간에 걸친 보수작업 끝에 겨우 물이 새는 걸 막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야. 사고 전날인 2월 2일에도 평소의 2배가 넘는 물이 새어 나왔거든. 광부들이 이 사실을 전혀 몰랐대. 그 굴 안에 들어가 일하는 사람들은 그 감독관만 믿고 설마 '거기 지키고 있으니까 애로사항이 생기면 우리도 나오라고 할 거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고 그 굴 안에 들어가 땅 파고 일만 했는데… -설도술,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교대로 물이 새는 걸 지켜보는 감독관이 있으니, 위험해지면 작업을 멈추게 할 거라고 믿었던 거지. 그럼 왜 갑자기 갱도에서 평소보다 많은 양의 물이 새어나온 걸까? 그 배경에는 바로 '전쟁'이 있었어.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해.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 거야. 당시 석탄은 공장, 기차, 군함을 움직이는 핵심 자원이었어. 그러니까 이게 없으면 전쟁을 못해. 전선이 넓어질수록 더 많은 석탄이 필요해져. 탄광에는 더 빨리, 더 많이 석탄을 캐라는 명령이 내려와. 조세이 탄광도 예외는 아니었지. 1942년 1월, 조세이 탄광에선 특별한 작업이 이뤄졌어. 이른바 '오오다시'(대량채굴). 평소보다 훨씬 많이 석탄을 캐는 날이야. 그냥 작업량을 조금 늘리는 수준이 아니야. 광부들은 물론이고 당시 갱도를 관리하고 보수하던 직원들까지 모두 석탄을 캐는 데 투입됐어. 탄광의 안전을 지켜야 할 사람들까지 석탄 캐는 데 동원한 거지. 사고 직전 1942년 1월 30일 금요일, 1월 31일 토요일, 이틀 연속으로 오오다시를 했는데, 1942년 1월에는 오오다시를 무려 네 번이나 했습니다. 그날은 갱내에 있는 지주부(보수작업 담당 노동자)나 갱내 다른 직종의 사람들까지 채굴 작업에 투입시켜서, 평소보다 석탄을 더 많이 캐는 날을 말합니다. 저는 그것이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나가사와 시게루, 일본 역사 연구자 나중에 밝혀진 기록에 따르면, 조세이 탄광이 무너진 결정적인 이유는 탄주라고 불리는 석탄 기둥까지 제거해서야. 갱도가 무너지는 걸 막기 위해선 석탄 일부를 기둥처럼 남겨둬야 하는데, 그마저 다 손을 댔다는 거야. 생산량을 늘려야 하니까 그냥 막 캐낸 거야. 사고 이틀 전부터 새어 들어온 물은 이미 약해지고 있던 그 갱도가 보낸 경고가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그날의 참사는 사고가 아니야. 사고가 아니라 사람이 만든 사건인 거야. ▲ '양심'에 귀 기울이기 그런데 말이야. 지금까지 얘기한 사고의 원인, 그리고 사망자의 정보. 이 모든 건 한국이나 일본 정부가 조사한 게 아니야. 전부 타케노부 씨와 새기는 모임의 노력 덕분에 이 세상에 여기까지 드러날 수 있었던 거야. 이 모임의 첫 번째 목표, 사망자들의 진짜 이름을 새긴 추도비를 세우는 것. 그래서 한국에 있는 유족들에게 답장을 받은 뒤, 사고 당시의 사망자 명부와 위패 기록, 그리고 유족의 기억을 맞춰나가. 그렇게 한 사람, 또 한 사람 맞춰 나간 끝에, 2013년 조세이 탄광 근처 해안에 마침내 추도비가 세워졌어. 사건 발생 후 71년 만이었어. 이게 일본에서 먼저 시작됐다는 것도 놀라운데, 타케노부 씨, 요코 씨 그리고 수많은 새기는 모임의 회원들까지. 이 모든 일을 국가가 아닌 개인들이 해낸 거야. 어쩌면 일본인 입장에선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일 수도 있잖아. 그런데 이 타케노부 씨와 요코 씨는 왜 이렇게까지 한 걸까? 이런 질문에 요코 씨는 한 단어로 답을 했어. 바로 '양심'이야.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 양심. 한국인이냐 일본인이냐의 문제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오랜 세월동안 모두가 외면해왔던 이 비극을 그냥 모르척 할 수가 없었다는 거야. 그 양심이 자신들을 계속 행동하게 만들었다는 거야. 안타깝게도 그 타케노부 씨는 2015년도에 세상을 떠나셨지만, 요코 씨와 새기는 모임 회원들은 여전히 계속해서 활동하고 있어. 사망자들의 진짜 이름을 찾는 데만 무려 22년이 걸렸어. 추도비를 세웠으니 이제 다 끝난 걸까? 이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해. 일본이 일으킨 전쟁 때문에 한반도에서 오신 분들이 유골조차 방치된 채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 역시 그것은 일본으로서 또는 일본인으로서 반드시 돌려 드려야 한다는 생각이 제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으로서의 양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말 많은 분들의 유골을 어떻게든 구해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지요. -이노우에 요코, &<새기는 모임&> 현 대표 바다 아래 잠들어있는 유골을 찾아서 고향 땅으로 돌려보내는 것. 그분들이 원해서 간 것도 아닌데, 여전히 타국의 깊은 바다 아래 둔 채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 그러면 가장 먼저 뭐부터 해야 될까? 사건이 벌어진 그날 굳게 다친 갱구, 그것부터 열어야겠지. 새기는 모임의 회원들이 옛 도면을 뒤지고 생존자들의 증언을 맞춰가면서 나무를 베고 수풀을 걷어내고 흙을 파내. 그렇게 얼마나 팠을까, 흙 속에서 오래된 나무 판자를 발견해. 사건 직후 헌병들이 막았던 그 갱도 입구야. 그럼 입구를 여는 데 성공했을까? 쌓여있는 흙을 파내자 조금씩 드러나는 갱도 입구. 흙을 걷어내자 갑자기 쏟아져 나오는 물. 그렇게 82년 만에 갱도에 다시 빛이 들어가기 시작했어. 저희들은 갱구를 열었다는 것이 사망자분들에게도 의미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그분들은 갱구를 향해 도망쳐 오셨는데, 그 갱구가 그날 바로 닫혀버렸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갱구를 여는 일은 가장 먼저 해야만 했던 일이었습니다. 그 안에 어떻게든 빛을 비춰주는 것이죠. 그 일을 두고는 정말… 갱구를 열었을 땐 희망밖에 없었습니다. -이노우에 요코, &<새기는 모임&> 현 대표 2024년 9월 25일, 마침내 갱구가 열렸어. 그 앞에서 이봐! 들리는가? 갱구가 열렸다고! 라고 힘껏 외쳤어. 어떤 마음으로 이렇게 외쳤을 것 같아? 단순히 옛 탄광 입구를 찾는 일만이 아니야. 82년 만에 어둠 속에 갇힌 공간에 빛을 들여보내는 일이야. 그리고 무엇보다 유골의 위치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 거야. 사실 그간 새기는 모임에서 계속해서 일본 정부한테 책임지고 유해를 수습해달라고 했지만, 유골의 위치를 알 수 없다는 이유로 조사할 수 없다라는 답변만 받아왔거든. 정부를 설득할 수 있는 증거, 그 유골을 찾아야만 했던 거지. ▲ 83년만의 퇴근 자, 이제 유골을 찾아서 모시고 나오면 돼. 잠수사들이 갱구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해. 그런데 곧바로 문제가 생겼어. 온통 흙탕물이라 바로 앞도 보이질 않아. 게다가 무너진 구조물들이 많아서 너무 위험한 거야. 유해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점은 갱구에서 약 1.1km 거리야. 거기까지는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어. 자, 그럼 이제 포기해야 하는 걸까? 그럴 수 없지. 여기까지 왔는데. 2025년 8월 25일, 김경수, 김수은 두 한국인 잠수사가 새로운 곳으로 들어가. 바로 바다 위에 남아있는 기둥, '피야'. 이곳으로 들어가도 갱도로 연결돼. 보이면 무조건 찾는다. 무조건 찾는다. -김수은 잠수사 '좋은 결과를 가지고 나오자' 그런 생각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유해들을 발굴해서 모시고 나와서 가족분들 품에 돌려다 드렸으면 좋겠다. 그런 감정이 좀 컸습니다. -김경수 잠수사 수면 아래로 내려간 두 잠수사가 손으로 벽을 더듬으면서 천천히,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 칠흑같은 갱도 안, 돌, 철로, 벽, 천장. 손에 잡히는 대로 하나씩 확인해 나가. 얼마나 지났을까? 앞서 가던 김수은 잠수사가 다급하게 외쳐. 찾았다, 찾았다! 어두운 갱도 속에서 발견된 머리뼈. 이 소식은 곧바로 바다 위 사람들에게도 전해졌어. 그렇게 83년 만에 뭍으로 올라온 뼈는 검게 변해 있었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기다리고 계시는 유족 분들이 있잖아요. 그래도 뭔가 좀 해야 할 일을 했구나. -김수은 잠수사 '80년 넘게 우리 안 잊고 이렇게 데리러 와주려고 노력해서 고맙다' 그런 생각들을 하지 않을까요? 잊지 않고 기억해줘서 고맙다고… -김경수 잠수사 이어진 몇 차례 탐사에서 추가로 발견된 유골들. 1942년 2월 3일 그날 이후 83년 동안 갇혀있던 사망자들이 드디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거야. 길었던 기다림을 말하는 듯, 뼈는 검게 물들어 있었어. 유족들의 입장에서는 이것보다 고맙고 기쁜 일은 없겠지. 이 기쁜 소식을 뒤늦게 듣게 된 사람이 있어. 조세이 탄광에서 근무했던 설 도자 술자 할아버지의 맏아들 설정수입니다. 2019년도에 돌아가셨으니까 지금 한 6년 정도 됐네요. (2007년) 그때 위령제 지내러 간다고 할 때가 집에서는 반대를 많이 했습니다. 못 가게. 그런데도 아버지가 꼭 가시겠다고 그래서, 막지를 못하고 갔다 오셨는데. '내가 그래도 잘 다녀왔다' -설정수,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故설도술의 아들 정수 씨는 갱도 입구가 2024년도에 열렸다는 소식을 듣지 못 했다고 해. 아… 그거 참. 그게 열렸구나. (아버지가) '늦게라도 유골을 발견했으니까 그래도 다행이다. 그거라도 다행이다' 이런 말씀 당연히 안 했겠습니까? -설정수,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故설도술의 아들 안타깝게도 도술 어르신은 갱구가 열린 것도, 유골이 발견됐다는 소식도, 듣지 못한 채 떠나셨어. 하지만 어르신께서 기억을 더듬어 남긴 그 목소리는 사라진 조세이 탄광의 모습을 되살리는 중요하고 소중한 기록이 됐지. ▲ 마지막 귀향길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많은 유족이 세상을 떠났어. 하지만 그렇다고 이 일이 끝난 게 아니야. 새기는 모임의 요코 씨는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하셨어. 일본과 한국, 그리고 한반도의 유족 여러분. 정말 오랜 시간 기다리게 해 드린 것에 대해 사죄의 말씀을 드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유족 여러분의 마음을, 제가 정말 유족이 될 수는 없지만 그 마음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그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은 사람이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족 여러분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제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여러분께서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노우에 요코, &<새기는 모임&> 현 대표 올해 1월 한일정상회담에서 발견된 유골의 신원 확인을 위한 DNA 감정에 함께 협력을 하기로 했어. 조세이 탄광에서 발견된 유골에 관해서는 DNA 감정에 대한 협력을 위해…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 과거사 문제에서 작지만 의미 있는 진전을 이루어낼 수 있어 참으로 뜻깊게 생각합니다. -이재명, 대한민국 대통령 그리고 바다 아래에 있는 그분들의 귀향길, 이제부터가 시작 아닐까. 그 유골이 아버지 것 같으면 얼마나 좋겠어? 딴 거 없습니다. 제발 아버지 것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내 살아생전에. -신재봉, 조세이 탄광 강제동원 노동자 故신용업의 아들 지금은 무덤 안에 아무것도 없어요. 오랫동안 차가운 물 속에 계셨스니까요. 그러니 유골이 나오면 빨리 모셔가서 무덤에 잘 안치해 드리고 싶습니다. -츠네니시 카즈히코, 조세이탄광 노동자 故츠네니시 하츠타다의 아들 조세이 탄광 사건은 아직도 풀어야 할 매듭이 여전히 많이 남아있어. 사진으로 봤던 검은 뼈도 누구의 것인지 모르고, 몇 명의 것인지조차 몰라. 심지어 바다 아래 남아있는 유해를 언제 어떻게 발굴할지, 일본 정부는 아직 구체적인 계획을 내놓지 않고 있거든. 그래도 우리는 지치지 말고 끈기 있게 그 매듭을 계속해서 풀어 나가야겠지. 언젠가 아직도 그 바다 아래 남아계신 분들이, 기다리는 가족분들의 곁에 모두 무사히 잘 돌아가실 수 있을 때까지.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
[꼬꼬무 찐리뷰] 피해자에 미안한 적 없고 앞으로도 없다 …9명 살해하고도 웃었던 '악인전' 진짜 주인공
등록일2026.08.15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13일 방송된 '악인전 - 죽음의 사냥꾼들'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배우 김동준, 가수 윤보미, 배우 배해선이 출연했습니다. (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남편의 납치 때는 2005년 11월 18일, 금요일 밤. 충남 천안의 한 가정집이야. 아내가 동료들과 술 한잔하고 온다는 남편을 기다리고 있어. 때마침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찜질방에서 자고 다음날 들어오겠다는 거야. 평소 가정적이고 건실한 남편이라 아내는 그냥 알았다고 했어. 그런데 다음날, 찜질방에서 자고 온다던 남편이 점심때가 다 되도록 오지를 않아. 게다가 연락도 안 돼. 시간이 지나 날은 점점 어스름해지고 오후 6시가 지났을 무렵이야. 집 초인종이 울렸고, 아내는 급히 문을 열어봤어. 그런데 문 앞에 한 남자가 서있어. 처음 보는 남자야. 아 저 택시기사인데요. 이거 좀 전해주라고 부탁을 받았어요. 택시기사라는 남자가 흰색 봉투를 하나 건네. 봉투를 받은 아내가 경황이 없는 사이, 택시기사는 그냥 떠나버렸어. 아내는 급히 봉투를 열어봤어. 봉투에 든 건 청첩장이야. 갑자기 웬 청첩장일까? 그런데 청첩장 내용을 확인한 아내는 그대로 털썩 주저앉고 말아. 바로 이날, 급히 연락을 받은 사람이 또 있어. 일단 그 사람을 먼저 만나볼게. 그날 집에서 쉬는 날이었는데, 사건을 접수 받아서 갑자기 저녁에 동원됐어요. 형사들 나오라고 해서 나갔는데, 갔다 금방 올 줄 알았는데. -김태용, 당시 천안경찰서 형사 휴무인 형사들까지 동원될 정도의 사건이 일어났다는 거지. 청첩장에는 도대체 어떤 내용이 적혀있던 걸까? 평범해 보이는 청첩장인데, 뒷면에 수상한 편지가 적혀 있었어. 여보 난데, 내가 지금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어. 나의 생명이 달려있는 일이야. 내가 요구하는 5천만 원을 현금으로 준비해서 2005년 11월 21일 16시 정각에 천안광장 택시 승강장으로 5천만 원을 가방에 넣어 승용차에 놓고 비상깜빡이를 켜고 대기하면 돈을 받으러 간 사람에게 바로 건네주기 바람. 혹 노파심에 강조하는데 신고를 하면 남편은 죽는다. 집으로 협박 편지가 온 거야. 5천만 원을 주지 않으면 남편이 위험하대. 편지를 읽은 아내는 남편이 납치 당한 거 같다 고 곧바로 경찰에 신고를 했어. 그런데 협박 편지에서 눈에 띄는 게 있었어. 글씨체가 우선 2개야. 위는 남편 글씨체 같은데, 아래에 쓰인 내용 부분은 글씨체가 달라. 남편과의 마지막 연락은, 11월 18일이었어. 충남에 있는 한 대학교의 직원인 남편 정 씨(가명)는 동료들과 식사를 하고 2차로 맥주집에 갔다가, 밤 9시경에 헤어졌다고 해. 함께했던 동료들에게 물어봐도 특별한 일은 없었어. 그런데 밤 10시 30분경 남편 정 씨에게서 찜질방에서 자고 다음 날 들어간다는 연락이 왔던 거야. 그리고 19일 협박 편지가 도착했어. 정 씨의 휴대전화는 꺼져 있었고, 타고 나갔던 고급 승용차도 어디 있는지 모르는 상황이야. 차가 없다, 피해자 차가 없으니까 차 찾으라고 그러고. 새벽 4시, 5시까지 계속 있었어요. -김태용, 당시 천안경찰서 형사 그리고 다음날은 11월 20일 일요일. 협박 편지에 처음에 21일에 돈을 전달하라고 했잖아? 은행이 쉬는 일요일은 현금을 준비하기 힘들 테니까. 그동안 형사들은 정 씨의 동선 파악, CCTV 확인, 주변 수색에 목격자 탐문까지 다 해봤어. 하지만 별다른 단서는 나오지 않아. 그러는 사이, 돈을 전달하라고 한 21일 날이 밝았어. 아직 범인에 대한 단서는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야. 돈을 전달하는 그 순간이 어쩌면 범인을 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일지 몰라. 자, 그럼 11월 21일 긴박했던 그날로 가볼게. ▲ 약속의 그날 협박 편지에 적힌 택시 승강장이야. 수많은 택시가 오가고 행인들은 바쁘게 걸어다녀.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모습이야. 하지만 이건 단지 겉으로만 보이는 모습일 뿐, 지금 이곳은 극도의 긴장감으로 가득해. 우리는 (약속 시간이) 4시면 벌써 12시~1시면 배치돼 있어요. 한 개 팀이 7명이니까, 49명? 더 동원됐죠. 지방청에서도 오고 그랬으니까. 다 주변에 있었어요. 왜냐하면 어디로 차를 돌릴지 모르기 때문에, 주변에 위장하고 멀리 떨어져 있었죠. -김태용, 당시 천안경찰서 형사 지금 수십 명의 경찰들이 행인, 택시기사, 노점상으로 위장한 채 매의 눈으로 주의를 지켜보고 있어. 어느새 약속한 시간인 오후 4시야. 정 씨의 가족이 돈가방을 실은 차를 택시 승강장에 세웠어. 그리고 협박편지에 적힌 대로 비상깜빡이를 켜고 기다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형사 한 명이 짐칸 쪽에 몸을 숨기고 있어. 일촉즉발 폭풍전야의 상황. 1분, 2분, 3분… 그때! 어떤 남자가 자동차 문을 두드려. 퀵서비스 기사가 왔어. 가족은 일단 그 기사에게 돈가방을 건네줘. 가방을 받은 이 남자는 그대로 떠나버려. 이 남자 범인일까? 형사들은 돈가방을 받아 간 그 퀵서비스 기사를 은밀하게 따라가서, 한가한 지점에서 잡았어. 저 그냥 이거 의뢰받은 건데요. 이거 물건 받아서 식당으로 갖다 달라고요. 진짜 퀵서비스 기사였어. 범인은 퀵서비스를 이용해서 돈가방을 받으려는 거지. 형사들은 퀵서비스 기사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퀵서비스 기사로 위장해 직접 돈가방을 배달하면서 동태를 살피기로 했어. 퀵서비스 기사로 위장한 형사는 의뢰받은 대로 그 식당으로 향했어. 식당은 택시 승강장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설렁탕집이었어. 위장한 형사가 돈가방을 들고 식당으로 들어가. 식당 안을 쭉 살펴보는데, 이상한 낌새는 없어. 그리고 식당 주인에게 물건 배달 왔다 라고 말을 했어. 그러자 주인이 돈가방을 받아서 식당 한 구석에 뒀어. 뒤쫓던 형사 몇 명이 곧바로 손님인 척 식당 안으로 들어가고, 식당 밖에서도 물샐 틈 없는 감시가 펼쳐져. 계속 지켜보고 있었죠 우선은. 돈가방이 여기 있으니까. 납치범이 찾으러 오나 안 오나. -김태용, 당시 천안경찰서 형사 바로 그때, 식당 문이 열려. 남자 한 명이 들어오더니 바로 카운터로 향해. 여기 물건 맡겨진 거 있죠? 그거 좀 찾으러 왔는데요. 대기 중인 형사들의 눈빛, 순간 날카로워졌어. 그런데 식당에 들어온 남자, 택시기사로 보여. 식당 앞에 택시를 세워놓고 들어온 거였어. 또 다른 사람을 이용해서 돈가방을 옮기려는 걸까? 택시기사로 보이는 남자는 돈가방을 받아서 그대로 택시를 타고 가버렸어. 이번에도 당연히 형사들이 따라붙었지. 그리고 택시가 도착한 곳은, 식당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장소야. 이번엔 한 포장마차야. 돈가방을 옮긴 택시기사를 확인해 보니 진짜 택시기사야. 범인이 다른 사람들을 시켜 계속 돈가방의 위치를 바꾸고 있는 거야. 어느새 해는 지고, 주위는 어둑해져. 이번엔 직접 나타날까? 그때, 포장마차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와. 주인이 전화를 받았는데 남자야. 이 남자는 거기 물건 맡겨진 거 있죠? 지금 찾으러 가겠습니다 라고 말했어. 이번엔 진짜 나타날까? 안 왔어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때 당시에, 설렁탕집에서 눈치를 채고. 혹시나 한 번 더 포장마차를 돌려본 것 같아요. (그러고 나서는) 포기한 것 같아요. -김태용, 당시 천안경찰서 형사 결국 인질범은 5천만 원을 포기하고 나타나지 않았어. 정말 이대로 범인을 놓치고 마는 걸까? 앞으로 인질범한테 또 연락이 올 거라는 보장도 없잖아. 그러니까 어떻게든 범인에 대한 단서를 찾아야 돼. 그럼 어떻게 단서를 찾아볼 수 있을까? ▲ 소주병에 남겨진 단서 우선 범인이 퀵서비스 기사에게 의뢰할 때 쓴 번호는, 대포폰이야. 형사들은 그 대포폰의 판매자를 찾는 한편, 퀵서비스 기사, 택시기사, 식당 주인, 포장마차 주인을 싹 다 조사를 했어. 그러던 중 식당 주인에게 결정적인 이야기를 듣게 돼. 전날 남자 둘이 점심 먹으러 와서, 소주 한 병도 먹고 가면서 '내일 오후쯤에 택배 물건이 하나 올 건데 보관 좀 해달라'고 그러면서 한 2, 3만 원 더 주고 갔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김태용, 당시 천안경찰서 형사 안 그래도 형사들은 단독범의 소행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 성인 남자를 납치하고 피해자의 자동차까지 끌고 간 걸로 봐서는 최소한 2인 이상의 범행이라고 생각한 거지. 그럼 지금까지 용의자에 대해 알 수 있는 게 뭐가 있지? 남자 두 명, 그리고 용의자들의 몽타주. 사실 몽타주만으로는 찾기가 어렵겠지. 그렇다면 용의자에 대해 더 알 수 있는 건 없을까? 사실 정말 중요한 단서는 이미 나왔어. 바로 지문! 테이블은 닦고 식기들은 청소를 했겠지만, 혹시 그들이 마신 소주병이 남아있다면? 거기서 지문이 나올 수 있겠지? 다행히 소주병은 남아 있었어. 형사들은 소주병을 모두 수거해서 긴급 감식을 의뢰했어. 지문이 나왔어. 근데 아주 많이 나왔어. 그런데 그 중에 하나가 탁 걸렸어. 지문 중에 전과 5범인 남자가 확인된 거야. 40대 중반의 노 씨. 그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불량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다가 상해 치사죄를 저지른 적이 있었어. 그 후에도 상해, 특수 강도 등으로 교도소를 수차례 들락거린 인물이야. 남자들의 얼굴을 봤던 사람들에게 노 씨의 사진을 보여줬어. 그랬더니 자신들이 본 남자가 맞다는 거야. 용의자 한 명이 특정됐어. 그럼 바로 이 노 씨를 찾아야겠지? 지금 납치당한 정 씨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이잖아. 그런데 주민등록상 주소지를 찾아가 봐도, 통신, 금융, 차량을 조회하고 탐문을 해도, 노 씨의 행방이 오리무중이야. 형사들의 마음이 새카맣게 타들어가. 그러던 중 용의자 노 씨를 추적할 수 있는 단서가 나와. 범칙금 납부 통고서. 노 씨가 다른 사람 차를 운전하다가 교통단속에 걸린 적이 있는 거야. 차를 빌려준 사람은 노 씨와 가까운 사람일 가능성이 높겠지? 형사들은 그 길로 자동차 명의자를 찾아가. 명의자는 어떤 여자였어. 그 사람이랑 이미 헤어졌다고요. 그래서 저도 어디 있는지 모른다니까요. 노 씨의 전 연인이었어. 형사들은 작은 실마리라도 얻으려고 노 씨에 관해 끈질기게 물었어. 그리고 노 씨와 친하다는 친구 심 씨(가명)의 존재를 알아냈어. 심 씨는 노 씨의 동창이자 고향 친구 사이였어. 그렇다면 이 심 씨가 2인조 인질범 중에 하나일까? 심 씨는 그동안 평범하게 사회생활을 해왔다고 해. 숱하게 교도소를 들락거린 노 씨와는 달리 심 씨는 금고 이상의 전과도 없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용의자가 맞을까? 확인해봤더니 식당에 왔던 그 또 다른 남자 심 씨가 맞았어. 식당에서 밥과 소주를 먹고 물건을 맡아달라고 한 그 남자들의 정체, 노 씨와 심 씨로 확인된 거야. 그런데 문제는 심 씨 또한 찾을 수가 없어. 용의자 두 명을 모두 특정했지만 둘 다 행방이 묘연한 상황인 거야. ▲ 외제차 타면 죽는다? 그러는 사이, 사람들 사이에 흉흉한 소문이 떠돌고 있어. 외제차를 타고 다니면 죽는다 는 거야. 이게 무슨 말일까? 저는 최진섭이라고 합니다. 2005년에는 지방 언론사에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당시에 천안 담당 기자였어요. 대부분 경찰서 출입 기자는 신입 기자들이 많이 합니다. 막내 기자다 보니까 경찰서에 거의 매일 출근을 했거든요. 그때 사건 사고가 많이 있었죠. 지역 분위기가 그야말로 좀 흉흉했어요. 실제 그런 얘기들 많이 돌았었어요. '외제차 타면 잡혀간다' 또 고급차도요. 그때만 해도 벌써 20년 전이니까요. 일단 그 경리부장(피해자 정 씨) 차가 그랜저였던 걸로 기억을 하고요. 처음에 한 두건 사건이 있을 때는, 그렇게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사건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차량들이 그래도 좀 고가의 차량이다 보니까. 좋은 차 타고 다니면 죽는다는 흉흉하는 소리도 있고 그랬었죠. -최진섭, 당시 지방 언론사 기자 비슷한 사건이 더 있다는 거야. 고급 승용차를 탄 사람을 노리는 범죄가 말이야. 도대체 어떤 사건들이 있었던 걸까? 우리가 처음 다룬 대학교 직원 정 씨 사건은 2005년 11월 18일 충남 천안에서 발생을 했어. 그리고 이 사건 9개월 전 2월 25일에도 천안에서 또 살인사건이 한 건 더 있었어. 어떤 사건인지 들어볼게. 천안시 백석동 노인회관 앞 공터에 주차된 승용차에서 O 모 씨가 흉기에 찔려 숨져 있는 것을 O 씨의 처남 A씨가 발견, 경찰에 신고했다 발견 당시 O 씨는 목과 등 부위를 예리한 흉기에 찔린 채 뒷좌석에 쓰러져 있었다. -당시 기사 내용 中 차가 외제차였던 걸로 기억하거든요. 원한에 의한 또는 계획적인 살인이 아니고, 우발적인 살인으로 처음에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최진섭, 당시 지방 언론사 기자 이 사건은 별다른 단서가 나오지 않은 채 미제로 남아있었어. 그리고 열흘 뒤인 3월 5일, 또 다른 살인사건이 터져. 이번에는 충북 청주야. 그런데 피해자는 천안에서 옷가게를 하는 사람이었어. 옷가게 사장은 무슨 일을 당한 걸까? '꼬꼬무'가 피해자의 지인을 만나봤어. 여기서 장사하던 사람이 집에 가다가 죽었으니까 잘 알지. 그 사람이 차를 외제차를 타고 다니니까. 그런 범죄자들이 그걸 노렸겠지. 그 사람(피해자)네 집이 청주인데, 거의 청주 으슥한 국도변이야. 그러니까 아마 이 사람을 범행 대상으로 지목을 했었겠지 그 범죄자가. -당시 피해자 지인 또 외제차가 나오지? 당시 이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한테 좀 더 자세한 얘기를 들어볼게. 미귀가자 신고가 들어왔는데요. 스포츠 의류매장을 하는 30대 초반의 남성인데, 평소와 다르게 퇴근해서 출발한다고 그랬는데 연락이 안 되고. 또 외제차를 타고. 그런 상태에서 차량 유기 신고가 들어온 거죠. 뒤 범퍼 부분에 추돌 흔적도 있고. 손괴 부분이 있어서, 이상하다고 신고가 들어온 거예요. 그래서 그 신고를 받자마자 '피해자 차량인가 보다' 그래서 바로 현장에 나갔죠. 차량하고 이 피해자분하고 떨어져 있었어요. 차량에서 한 3km 정도 떨어져 있는 곳, 거기에 엎어진 상태로 발견됐는데. 케이블 타이라 그래서 전선 묶을 때 쓰는 게 있거든요. 크고 작은 게 있는데, 큰 거로 뒤로 결박돼 있는 상태였어요. -이찬호, 당시 청주 흥덕경찰서 형사 피해자 차량에 추돌 흔적이 있었다고 했지? 누군가 일부러 뒤에서 차를 박고 범행을 한 걸까? 이찬호 형사는 사건 현장과 시신을 보자마자 떠오른 게 있었다고 해. 열흘 전 천안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이 떠오른 거야. 이 두 사건이 유사한 점이 있거든. 2005년 당시에는 외제차가 많지 않았어요. 그런 상태에서 외제차가 피해 대상이다, 외제차 운전자가. 범행 수법 중에 피해자들 결박한 도구가 케이블 타이라고, 전선 묶을 때 쓰는 거거든요. 이게 또 동일했습니다. 온몸에 반항한 같은 게 없었거든요. 그 얘기는 뭐냐면, 일시에 제압했다는 얘기거든요. 그러면 혼자가 아니고 2인 이상이다, 이거는 단독 범행이 아니다. 그랬을 때 충남 천안 건하고 매우 유사했어요. -이찬호, 당시 청주 흥덕경찰서 형사 그렇게 비슷한 사건이 연이어서 터지니까, 연쇄 범죄의 가능성이 당연히 의심됐던 거야. 이찬호 형사를 비롯한 많은 형사가 밤낮 없이 뛰어다녔어. 비슷한 사건이 또 생길까. 조바심이 났거든. 출근하고 퇴근 시간이 정해지지 않고 계속 일했던 느낌? 그래도 빨리 잡아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지나가는 차량을 일일이 다 세워서 탐문하고. 며칠째 계속 굉장히 노력했던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범인이) 나오지 않으니까 정말 힘들었었어요. -이찬호, 당시 청주 흥덕경찰서 형사 ▲ 동창들의 연쇄살인? 그런데 불과 10여일 뒤. 천안에서 또 사건이 일어나게 돼. 혹시 영화 '악인전' 본 적 있어? 마동석, 김무열 배우가 출연했던 바로 그 영화. 이 사건이 '악인전'의 모티브가 된 사건이야. 피해자는 차를 타고 집으로 가고 있었어. 그런데, 피해자의 차를 누가 뒤에서 박은 거야. 근데 이거 들어본 이야기 아니야? 청주 사건 차량도 뒤에서 추돌한 흔적이 있었잖아. 뭔가 비슷하지? 피해자가 차에서 내렸고, 가해 차량에서도 남자가 내려. 그런데 이 남자, 경찰 점퍼를 입고 있네? 남자는 악수를 청하며 자신을 경찰이라고 소개했어. 그렇게 피해자의 상태를 살피며 한동안 대화를 나눴다는 거야. 그리고 피해자가 자신의 차로 돌아가려는 그때, 머리를 공격당해. 그 순간 남자 한 명이 더 가세해서 피해자를 함께 폭행하며 강제로 차에 태웠다는 거야. 자, 이 사람들 경찰일까? 당연히 아니지. 그런데 지금 이 사건, 사건 설명이 상당히 자세하지 않아? 납치를 시도하다가 미수에 그친 사건이 발생한 거야. 당시에 피해자가 진술한 내용이, 경찰복도 입고 있었고 굉장히 어설프기도 하고 이상했다고. 얘네가 경찰이 아니다라는 걸 직감했다고. 그래서 저항하면서 싸웠던 걸로 기억하고 있어요. -최진섭, 당시 취재 기자 피해자가 무사했던 거야. 그런데 피해자가 '얘네 경찰이 아니다'라고 바로 직감했다고 했잖아.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이유가 있었어. 피해자가 동네에서 알아주는 폭력배였대. 그러다 보니까 경찰들을 많이 접했을 거 아니야. 그래서 수상한 점을 확 알아볼 수 있었던 거래. 어쨌든 이렇게 천안에서 또 다른 강도상해 사건에 있었던 거야. 피해자는 범인 두 명 중 한 명의 얼굴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어. 대화를 했으니까. 대학교 직원 납치 사건의 용의자가 특정되고 나서, 강도상해 사건 피해자한테도 용의자 사진을 보여줬다고 해. 대답은 역시 자신을 납치하고 폭행하려고 했던 그 남자가 맞다는 거야. 그러면, 이 사건들 모두 동일범의 연쇄 범죄일까? 그렇다면 용의자 노 씨와 심 씨가 연쇄살인범일 수 있다는 거야. 두 사람은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의 고향 친구 사이였어. 노 씨는 서울에서 심 씨는 천안에서 각자 생활을 하다가 최근 채석장에서 함께 일을 했대. 노 씨의 경우에는 교도소를 들락거렸지만, 심 씨의 경우에는 40대 중반까지 평범한 생활을 해왔다고 했잖아. 이 두 사람 정말 연쇄살인범이 맞을까? 전문가의 이야기를 들어볼게. 우리가 통상 이런 사건들이 발생이 되면 사건하고 사건 간에 있어서의 사건 연계 분석을 우리가 시도합니다. 우선적으로 피해자 선정 문제인데요. 피해자 선정은 철저하게 금전을 목적으로 해서 그 대상은 겉으로 봤을 때 외제 차량이라든가 고급 차량을 타고 있는 사람을 선정했다라고 하는 그런 공통점이 있고요. 또 하나는 범행수법. 이제 피해자를 제압을 하는데 통상적으로 노끈을 묶는다든지 테이프를 묶는다라는 그런 것이 있는데, 테이블 타이로 묶고 있어요. 그것도 이제 공통점이고. 또 살해를 하고 난 이후에 차량과 시신을 유기를 해서 처리를 한다라고 하는 그런 점. 이런 여러 가지 것들이 일치하고 있다는 거죠. 이 사건이 연쇄살인일 가능성은 대단히 높다라고 볼 수 있어요. -오윤성 교수, 순천향대학교 경찰행정학과 형사들 역시 이 사건들은 연쇄 범죄, 연쇄살인범 소행으로 심증을 굳혔어. ▲ 마침내 잡은 범인 그렇게 납치 발생 한 달이 지나갈 무렵이야. 경찰서로 전화가 왔어. 용의자 노 씨의 위치를 알고 있다는 제보가 왔어. 제보자는, 또 다른 용의자 심 씨의 형이었어. 심 씨의 형은 어떻게 노 씨의 위치를 알고 있는 걸까? 형사들은 노 씨와 심 씨의 행방을 찾으면서 용의자 가족들에게도 협조를 구해놓았다고 해. 그런데 심 씨가 형에게 전화를 해서 이 짓 더 못하겠다 는 말을 했다는 거야. 그러곤 노 씨의 위치를 알려주고 신고하라고 했대. 전화를 건 심 씨의 형은 이렇게 말했어. 동생이 노 씨가 지금 다리 수술 받고 서울의 한 병원에 있다고 했어요. 전화를 받은 형사들은 급히 서울의 한 병원으로 출동을 했어. 그날은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날 저녁이야. 도착해서 보니 병원에 노 씨는 없었어. 외출을 나갔대. 혹시 눈치채고 도망을 간 걸까? 아니면 거짓 제보였던 걸까? 즐거운 크리스마스 날, 형사들은 밤새 잠복에 들어가.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저 앞에서 목발을 짚고 절뚝거리면서 한 남자가 들어오고 있어. 노 씨야. 사건 발생 39일째에 드디어 노 씨가 검거돼. 노 씨는 크리스마스라 여자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었대. 마침내 진술실에서 노 씨와 마주 앉은 형사들. 몽타주와 사진으로 정말 눈 빠지게 봐온 얼굴이야. 실물로 본 노 씨는 어땠을까? 눈빛은 약간 눈동자가 회색빛이 나는데, 살기로 가득했습니다. 눈에 살기가 얼마나 띠어있는지, 유치장 여직원이 눈을 못 마주칠 정도로 살기가 심했어요. -김태용, 당시 천안경찰서 형사 형사가 납치된 정 씨 어디 있냐고 물었어. 그러자 정 씨요? 전 모르는 사람인데요? 라고 말해. 형사들은 골프채와 시계를 꺼내 보여주며, 이 물건들을 아냐고 물었어. 이건 노 씨의 은신처에서 찾은 피해자 정 씨의 물건들이야. 노 씨는 이거요? 문 열린 차가 있길래 훔친 겁니다 라고 해. 절도는 인정한대. 하지만 정 씨를 납치한 적은 없다는 거야. 그러면서 형사에게 이런 말을 해. 형사님, 짜장면 좀 시켜줘요. 감방 가면 다른 건 다 먹을 수 있는데, 짜장면은 좀 힘들더라고. 형사들은 정말 환장할 노릇이야. 하루라도 빨리 피해자 정 씨를 찾아야 되는데, 노 씨는 어떤 증거를 내밀어도 그저 모르쇠야. 조사를 하다 보면 (노 씨가) 다혈질이거나 이러진 않고 냉철하죠. 선을 딱 지키고 이걸 넘어가면 안 되겠다 싶으면 그 이상은 답변 안 하고. -김태용, 당시 천안경찰서 형사 이런 노 씨에게 김 형사가 '아들' 얘기를 꺼냈어. 노 씨가 다른 이야기에는 입을 다물어 버렸으면서, 유독 자신의 아들 이야기는 많이 했다는 거야. 김 형사는 말해. 여봐요. 그 피해자 정 씨도 아들이 있어요. 해 바뀌기 전에 아버지 생사는 알아야 될 거 아니에요. 그러자 노 씨가 입을 열어.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니… 형사님, 전 정말 납치랑 전혀 상관이 없는데. 제가 심 씨한테 들은 게 하나 있어요. 심 씨가 자기가 정 씨를 납치했다고 하면서 얘기한 장소가 있거든요. 노 씨는 자신은 범행과 무관하며 친구 심 씨에게 들은 얘기가 있다는 거야. 그렇게, 사라졌던 정 씨를 마침내 찾았어. 지난해 11월 납치됐던 충남 아산의 한 대학 경리부장 52살 정 모 씨가 하수구에서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정 씨는 지난해 11월 18일 밤 연락이 끊긴 뒤 다음 날 5천만 원을 요구하는 협박 편지가 가족에게 배달됐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정 씨는 결국 시신으로 발견됐어. 이 뉴스가 보도된 날이 1월 1일이었어. 그리고 얼마 뒤 또 한 건의 뉴스가 보도돼. 아산 모 대학 경리부장 살인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경찰이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43살 심 씨를 붙잡아 조사하고 있습니다. 경찰은 어제 저녁 10시쯤 안산시 OO동 한 원룸에 숨어있던 심 씨를 긴급 체포한 뒤 천안경찰서로 이송해 이 시각 현재까지 조사를 벌이고 있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원룸 앞에서 한 3시간, 4시간 잠복하고 기다렸더니 한 50~60미터 앞에 롱패딩이 파란색이라 확 튀는 색이었거든요. 터벅터벅 비닐봉지 하나 들고 비틀비틀 걸어 오더라고요. 그걸 발견하고 쫓아가서 바로 잡았죠. 비밀봉지 안에 중국어 교재책이 있더라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중국으로 밀항 준비 중이었더라고요. -김태용, 당시 천안경찰서 형사 또 다른 용의자 심씨가 체포됐어. 결국 이렇게 용의자들이 모두 체포됐어. 그럼 심 씨는 범행을 인정했을까? 심 씨는 범행을 인정했어. 정 씨를 납치하고 살해했대. 노 씨하고 함께 말이야. 노 씨는 범행을 부인했었잖아. 친구 심 씨가 체포되고 함께 범행했다고 진술까지 했으니, 이제 노 씨도 인정했겠지? 노 씨는 이렇게 말해. 심 씨가 거짓말하는 거예요. 전 납치도 살인도 안했습니다. 그러나 심 씨 말은 달라. 아니 저도 처벌받는 마당에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노 씨랑 같이 한 게 맞습니다. 심지어 그 노 씨가 주도한 거예요. 아니 사실 계속 같이 다니다간 노 씨가 저까지 죽일까봐, 저도 무서웠습니다. 노 씨는 끝까지 범행을 부인하고 있어. 심 씨가 딴 놈이랑 해놓고 저한테 덮어씌우는 거예요. 저 절대 아니라고요. ▲ 살인 의혹 그런데 이것만이 아니잖아? 노 씨와 심 씨가 저질렀다고 의심되는 사건들이 아까 더 있었잖아. 앞에 나온 천안 담당 기자가 쓴 내용이야. &<대학 경리부장 납치 사건 제2의 유영철 우려&> 모 대학 경리부장 납치 피살 사건의 용의자가 지난 2003년 전 국민을 경악케했던 유영철만큼이나 많은 범죄를 저질렀을 수 있다는 의견이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이들이 다른 범행을 저질렀을 가능성은 유사한 범죄 유형 외에 압수한 증거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압수한 증거품 중 300개가 한 묶음인 케이블 타이가 40여개가량 부족한 것으로 드러나, 한 사람에게 2, 3개가량의 케이블 타이를 사용했다면 최악의 경우 최소 15명에서 20명까지의 희생자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당시 기사 내용 中 기자가 취재 과정에서 알게 된 내용이 있었어. 노 씨의 은신처에서 나온 압수품 중에 케이블 타이가 든 봉지가 있었대. 봉지에 표시된 개수 300개. 그런데 그 중에 한 40개 정도가 비어 있었다는 거야. 없어진 40개는 범행에 사용된 걸까? 그때 당시에 사진을 봤었던 기억이 나요. 사체 사진. 사진을 봤을 때 팔이나 이런 데 케이블 타이로 묶어놓은 게, 1인당 많게는 4개까지. 한 2, 3개 정도가 사용이 됐었고. 경찰한테 물어봤을 때 '케이블 타이가 어느 정도 없다' '몇 개짜리 한묶음인데 몇 개 정도가 없다' 이런 얘기를 듣고 추정을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또 생각한 거는, 이 사람들은 스스로가 인간이기를 포기한 범죄자들이 아닌가. 사냥 같은 거? 이런 거를 좀 느꼈어요. 범죄를 저지르면서 범죄 자체를 즐긴 게 아닌가. -최진섭, 당시 취재 기자 정말 기자의 추정대로 이들은 10여 건이 넘는 범죄를 저지른 걸까? 드디어 노 씨와 심 씨가 재판정에 섰어. 과연 두 사람은 몇 개의 살인으로 재판을 받게 된 걸까? 강도 살인 두 건. 강도 살인 미수 한 건. 강도 상해 한 건. 특수절도 두 건. 이렇게 총 여섯 건에 대해서 재판 중인 거야. 어쨌든 의심까지 진행된 재판 결과 노 씨는 사형, 심 씨는 무기징역이 선고됐어. 그리고 이제는 대법원 최종 판결만을 앞두고 있어. 그런데, 이들이 저지른 범죄가 정말 이것뿐일까? ▲ 살인마의 편지 사건이 일어난 2005년 이후. 시간은 흘러서 어느새 2007년 새해가 밝았어. 외근 중인 김태용 형사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와. 경찰서에서 다급하게 김 형사를 찾는 거야. 서둘러 서로 들어온 김 형사를 기다린 건 바로 이 편지 한 통이야. 교도소에서 온 편지야. 보낸 사람은 노 씨였어. 나에게 정을 베풀어준 은혜는 알고 있습니다. 내가 힘들 때 꼭 무엇을 내게 줘서가 아니라. 단 한마디의 따뜻한 말들이 가슴 속 깊이 묻혀있던 양심을 꿈틀거리게 했었기에. 더 이상 긴 얘기하지 않고 수일 내에 한번 만나서. 가슴 속 꽁꽁 숨겨 무덤까지 가져가려 했던 진실을 모두 고백하려 합니다. 그럼 이만 낙필하고 만나서… -노 씨의 편지 내용 中 편지 쓴 날짜는 2007년 1월 1일. 김 형사는 이 편지를 받고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반갑고 이런 건 없었고. '또 거짓말하려고 부르나'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 사람 스타일이 얘기하다 보면 사람이 사람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든 상태였기 때문에… 그 생각이 났죠. 이전에 조사받을 때, '무죄 주장하는데 뜻대로 안 되면 편지 쓰겠다' 그 생각이 번뜩 들길래, 진짜 편지 썼네? 이런 생각도 들었어요. -김태용, 당시 천안경찰서 형사 현재 노 씨는 사형을 선고받고 대법원 최종 판결을 앞두고 있는 상태야. 재판 결과가 자기 뜻대로 안 되고 있다는 걸까? 그리고 또, 노 씨가 무덤까지 가져가려고 했던 진실은 과연 뭘까? 김 형사는 노 씨를 만나기 위해 교도소로 찾아갔어. 접견실에 앉아서 기다리는데, 얼마 뒤에 문이 열리고 노 씨가 들어와. 김 형사가 오랜만이네요 라고 인사를 하니 노 씨는 네 잘 지내셨죠? 라고 인사했어. 두 사람은 의례적으로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았어. 김 형사가 먼저 입을 열었어. 할 얘기가 있다고 해서 왔습니다 이 말에 노 씨가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뭔가를 쓱 꺼내. 커피믹스였어. 그냥 커피 한 잔씩 하자는 거지.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는데 노 씨가 별다른 얘기는 안 하더래. 시답지 않게 안부 나누고 의미 없는 얘기를 하다가 면회 시간이 끝나버려. 김 형사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일 또 올게요 라고 말했어. 그리고 다음날 김 형사는 다시 노 씨를 찾아왔어. 그럼 오늘은 무덤까지 가져가려던 그 진실을 얘기할까? 오늘도 허탕이야. 뭐 아들 얘기, 교도소 얘기, 그냥 시답지 않게 사는 얘기만 하다가 또 시간이 끝났어. 김 형사는 일어나며 말해. 내일 또 올게요 라고. 왜 닦달하거나 보채지 않냐고? 김 형사의 작전은 '천하태평'. 관심 없는 척, 궁금하지 않은 척 하는 거야. 네가 얘기를 하면 내가 들어 줄게, 이런 작전이야. 일종의 주도권 싸움이지. 이야기 하겠다면서 편지를 보낸 사람은 노 씨잖아. 노 씨가 스스로 입을 열기를 기다리는 거야. 그리고 또 다음 날. 숨 막히는 수싸움 끝에 마침내 노 씨가 입을 열었어. 형사님. 제가… 사람을 더 죽였습니다. 이미 재판받고 있는 두 건의 강도살인이 다가 아니라는 소리야. 살인을 일곱 건이나 더 저질렀다는 거야. 지금 재판 중인 사건, 두 건의 강도살인을 포함해서 총 여섯 건이야. 그리고 노 씨가 추가로 밝힌 살인 일곱 건은 이거야. 범행지역이 생각보다 훨씬 넓었어. 추가로 서울에서 세 건, 경기도에서 두 건, 충청도에서 두 건의 살인을 자백했어. 이렇게 지역을 옮겨가며 지금까지 총 아홉 명의 소중한 생명을 빼앗았다는 거야. 끔찍한 얘기인데,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거야. 강도살인미수, 강도상해, 특수강도까지 포함하면 이들이 저질렀다는 범죄는, 총 18건이야. 2005년 2월부터 12월까지 불과 11개월 동안 이들은 무려 18건의 범행을 저지른 거야. 노 씨의 이 말 전부 사실일까? 만약 이 모든 게 사실이라면, 범죄를 자백한 이유는 뭘까? 전문가의 의견 한번 들어볼게. 추가적인 여죄를 본인이 발설하게 된 가장 근본적인 목적이 과연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공범이었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이렇게 경찰에 의해서 검거가 되고 사형선고까지 받게 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지금까지 자기하고 믿고 같이 범행을 했었던 그 심 씨가 여러 정보를 경찰에 제공을 함으로써 자기도 검거가 됐단 말이죠. 자기는 사형수이기 때문에 가석방이 없어요.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은 제로예요. 그런데 바로 나를 이렇게 나름대로의 구렁텅이에 몰아놓은 심 씨는 무기수니까, 가석방에 의해서 언젠가는 바깥 공기를 맡아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너도 못 나가'. 이런 생각을 했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아요. -오윤성 교수, 순천향대학교 경찰행정학과 노 씨가 자백하면서 덧붙인 이야기가 있었어. 처음에 그 얘기를 했어요. '심 씨 쌍무기 받아서 못 나가게 한다' -김태용, 당시 천안경찰서 형사 그러니까 무기징역을 두 번 받게 하겠다는 거야. 그래서 교도소에서 나갈 수 없게 만들겠다 이 말이야. 이렇게 노 씨가 밝힌 추가 범행에 대한 진술이 시작돼. 그런데 무턱대고 그 사람 말을 다 믿을 수는 없잖아. 그래서 김 형사는 노 씨가 사건을 하나씩 얘기할 때마다 종이와 펜을 줬다고 해. 사건 현장을 최대한 자세히 그려봐요. 알려진 내용을 그냥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였어. 종이와 펜을 받은 노 씨 어떻게 했을까? 여기 노인회관 앞에서 죽이고 다시 운전해서 마을회관 쪽이 한적하길래 여기에 차를 세우고. 그다음에 쭉 가다가 여기에 숲이 하나 있었는데…. 사건 현장을 아주 자세하게 그렸대. 사건 자료랑 대조해 보니 정확히 일치해. 그리고 노 씨는 범행 과정에 대해서도 아주 자세히, 그리고 무덤덤하게 말했대. 그 칼이 그거 보기에 뭉뚝해 보여도, 생각보다 잘 들어요. 이렇게 진술 받고 확인하고, 또 진술하고 확인하고. 이 과정이 하루, 이틀, 일주일 무려 30일 넘게 계속됐어. 노 씨 얘기를 들은 형사들은 어땠을까? 내가 이 인간 얘기를 왜 들어주고 있나…라는 생각도 들고. 답답한 공간에서 4시간, 5시간 얘기하고 있으면 어질어질해서 밖에 한동안 나갔다 들어온 적도 있고. -김태용, 당시 천안경찰서 형사 그렇다면 공범 심 씨는 노 씨가 털어놓은 추가 범행들 인정했을까? 형사들이 찾아가자 심 씨는 이렇게 얘기해. 네, 오실 줄 알았습니다. 이제 제 차례입니까? 심 씨는 노 씨가 자백한 상황을 눈치채고 체념한 듯 범행을 인정했대. 이들은 9건의 살인을 포함해 총 18건의 범죄를 저지른 거야. 그리고 조사 과정에서 한 가지 더 확인이 된 게 있어. 또 다른 공범이 두 명이 더 있었던 거야. 대학 경리부장을 납치해 살해한 혐의로 재판을 받던 피고인이 대법원 최종 선고를 앞두고 추가 범행을 털어놨습니다. 미궁에 빠졌던 살인사건 7건을 자신이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43살 노모 씨 등 2명이 추가로 자백한 범죄는 7건으로 전국을 망라합니다. 지난 2005년 한 해 동안 모두 9명을 살해했는데, 2월부터 석 달 사이 희생된 사람만 7명입니다. 경찰은 공범인 노 씨의 친형 56살 노 씨 등 2명을 추가로 검거해 구속영장을 신청했습니다. 노 씨는 사업에 실패하고 이혼하게 되자 큰 돈을 벌기 위해 친형과 친구들을 범행에 끌어들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공범이 친형. 형제가 함께 범죄를 저지른 거야. 이들 4인조는 둘 혹은 셋이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한 달에 두 건씩 범행을 저질렀어. 피해자의 성별도 나이도 가리지 않고, 범행 장소도 도로, 가정집, 상점 심지어 택시까지 그야말로 무차별이었어. 범행의 이유, 돈 때문이래. 그렇다면 9명을 살해하고 뺏은 현금 얼마일까? 1,500만 원 정도였어. 애초에 돈이 문제였다면 살해의 이유는 뭐였을까? 자신들의 얼굴을 봤기 때문이래. 이들은 애초에 얼굴을 가리지 않고 범행했어. 본인의 얼굴을 가리는 수고보다, 사람의 생명을 뺏는 게 더 쉬웠던 걸까? 진짜 나는… 뿌듯하고 그런 기분 하나도 없었어요. 그래도 나중에 생각 들은 거는, 미제사건으로 남은 건을 살해한 사람은 누군지를 밝혀냈으니까. 그거에 대한 피해자들한테 가족들한테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김태용, 당시 천안경찰서 형사 ▲ 남겨진 사람들 그리고 얼마 후 경찰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은 사람이 있어. 피해자 가족이야. '꼬꼬무'가 이분을 직접 만났어. 희생당한 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가족들에게는 어떤 존재였는지, 소중한 사람을 앗아가는 범죄가 더 이상 없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인터뷰에 응해주셨어. 이 이야기를 들어볼게. 뭐… 착하고 법 없이도 살 사람이었죠. 그 정도로 사람이 좋았죠. 애들한테 잘했죠. 원래 잘해줘요. 싸움도 저희는 안 하고. 꼭 밥 먹을 때마다 전화가 오는데, 나 밥 먹었냐고 전화가 와요. 매일 전화를 해요. -피해자 아내 그 사건이 있던 날, 남편은 오후 3시경에 집을 나섰다고 해. 택시 운전을 하시는데, 다음날 새벽까지 하루 12시간씩 일을 했거든. 남편이 식사 때마다 전화를 했다고 했잖아. 그런데 아내는 이 전화를 받지 못했어. 그날따라 몸이 너무 아파서 방에 누워있는데 집 전화로 연락이 온 거야. 아이들이 대신 받았다고 해. 아빠, 엄마? 엄마 몸이 좀 안 좋아서 방에 누워계신데. 알았어요, 아빠. 엄마 잘 챙길게요. 아내가 방에 누워 이 통화 내용을 듣는데, 그날따라 이 상황이 그렇게 섭섭하더래. 아파서 누워있으면, 핸드폰으로 연락하면 되잖아요. 그냥 끊어버리고 안 하는 거야. 그게 굉장히 섭섭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후회되는 게, 내가 핸드폰을 들고 있는데. 제가 하면 되잖아요… 근데 전화 안 한 거야. 왜냐하면 상대가 항상 해 버릇 하니까. -피해자 아내 이 전화가 남편의 마지막 연락이었던 거야. 아내는 당신은 밥 챙겨 먹었어요? 조심해서 들어와요 이 말을 못해준 게 지금도 한이 된다고 해. 그리고 그날 새벽. 집으로 경찰이 찾아왔어. 그리고 남편의 시신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게 됐어. 그 후 남편 사건을 담당하는 형사를 만났는데, 아내는 깜짝 놀랐대. 남편이 사고 당하기 2주 전에 우리가 등산을 갔어요. 계속 삐용삐용 경찰차가 계속 사이렌이 울리는 거예요. 그래서 뭔 일이지, 하고 산에서 내려오는데. 형사분들이 있는 거예요. 그분들이. 그래서 무슨 일이 있냐 했더니, 산에서 사람이 죽었다고. 그러고서 2주 뒤에 우리 사고 나서, 담당이 그분들이에요. 그 형사분들. 그러니까 2주 전에 우리 아저씨도 보고 다 본 거예요. 그 형사분들은. 그분들은 기억을 하더라고요. 얼마나 열심히 수사하셨는지 몰라요. 그분들 고생하셨죠. 열심히 하셨죠. -피해자 아내 담당 형사들이 수사에 총력을 기울였지만, 범인이 누군지 모른 채 2년의 세월이 흘렀어. 그리고 이제야 누가 무엇 때문에 남편을 앗아갔는지 알게 된 거야. 그런데 범행 목적이 돈이었잖아. 고급 승용차도 외제차도 아닌 택시를 왜 노렸을까? 택시를 범행 대상으로 한 게 택시를 뺏어서 강남에 가서 돈 많은 사람을 납치해서 돈을 뺏으려고 했다고… -김태용, 당시 천안경찰서 형사 그래서 한 가장의 소중한 생명을 앗아간 거였어. 남편이 떠난 후 아내의 꿈에 가끔 나온다고 하거든. 꿈에 가끔 나왔죠. 가끔 나오면 또 뭐… 얘기 좀 하려고 하면 '나 빨리 돈 벌러 가야 된다' 그러고. 돈 벌어서 나 줘야 한다 그러고. 꿈속에서 그랬어요. -피해자 아내 아내의 기억 속 남편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가족을 위해서 매일같이 열심히 살았던 남편. 그 돈을 벌어서 가족들과 맛있는 걸 먹고, 가끔 손잡고 나들이도 가고. 소파에 앉아 함께 TV를 보는 평범한 행복을 오랜 시간 누리고 싶었을 거야. 범죄는 피해자 한 사람의 삶만 앗아가는 게 아니야. 정신이 하나도 없었죠. 꿈인지 생시인지 꿈속을 걷고 있는 그런 기분이 있죠. 몸이 붕 떠가지고. 그때 당시 누구나 당했을 땐 잘 모르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현실로 다가오니까. 그때부터 힘든 거죠 더. -피해자 아내 이들이 저지른 범죄는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아픔을 주었을까. 범인들은 그들이 어떤 사람들의 삶을 앗아갔는지 알고 있을까. 마지막 접견날. 김 형사가 노 씨에게 물어본 게 있었대. 피해자들에게 할 말 없습니까? 라고. 나중에 마지막 조사 끝날 때도 '나는 지금까지 피해자들한테 미안한 적 한 번도 없다'고. '앞으로 미안할 생각도 없다'고. 그렇게 얘기하는 거에요. -김태용, 당시 천안경찰서 형사 ▲ 9 플러스 알파 노 씨와 공범들 제대로 된 죗값을 치러야 되겠지. 심 씨는 무기징역을 또 선고받았어. 무기징역이 두 개가 되면서 영원히 세상 밖으로 나오기 힘들게 됐어. 그리고 노 씨의 형도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나머지 공범은 7년형을 받았어. 그렇다면 노 씨의 재판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기록에 첨부된 의사가 발행한 사망증단서에 의하면, 피고인은 2007년 3월 5일 사망하였음이 분명함으로 이 사건 공소를 기각한다. -판결문 中 노 씨가 구치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거야. 노 씨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대. 자기는 교도소 들어가면 못 산다고. 옛날에 교도소 살아본 경험이 있어서, 자기는 절대 교도소 가서는 생활 못한다고 그러더라고요. -김태용, 당시 천안경찰서 형사 그런데 오늘 이야기가. 여기서 끝일까? 9 플러스 알파. 접견 마지막 날 노 씨는 김 형사에게 아주 섬뜩한 이야기를 남겼어. 형사님 내가 원하는 대로 되면요. 3탄이 있으니까 기대하세요. 1탄은 처음 드러난 2건의 살인이었지. 2탄은 추가로 자백한 7건의 살인. 그리고 3탄, 9 플러스 알파. 아직 밝혀지지 않은 사건이 더 있다는 걸까? 하지만 노 씨로부터 더 이상 확인할 방법이 없어. 9 플러스 알파죠. 또 다른 3탄이 있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자기가 뭔가를 터뜨리겠다라고 예고를 한 것이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노 씨같이 자기 과시를 하고 또 통제를 하겠다는 그런 욕구가 강한 사람들은, 가지고 있는 카드를 한꺼번에 다 안 써요. 통상 우리가 카드를 내놓을 때도 카드 중에서 결정적 카드는 제일 마지막에 내놔요. 내용에 있어서의 임팩트가 상당히 강한, 정말 이 세상이 그게 만약에 밝혀진다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그런 결정적인 사건을 갖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그 강도살인을 전체적으로 전국적으로 묶어서, 단일범에 의해서 이 사건들이 발생됐다고 추정하는 것은 쉽지가 않거든요. 또 범행수법도 차량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지는 것도 있고, 심지어는 경찰을 가장해서 검문을 한다든지. 또는 검침원, 방송국 PD, 취재 나왔다. 이런 식으로 굉장히 다양한 그런 범죄수법들을 사용을 했기 때문에, 그 연관성을 분석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죠. 중요한 거는 바로 그 시기가 중요한 거예요. 시기는 고정이 됐죠. 사건들이 발생됐던 게 2005년에 집중이 돼 있잖아요. 그 고정된 시기 내에서 미제사건들을 한번 종합적으로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는 있다. -오윤성 교수, 순천향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꼬꼬무'가 오늘 이 사건을 이야기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어. 혹시나 2005년 벌어진 미제사건, 9 플러스 알파가 있다면 꼭 밝혀야 하니까.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
[꼬꼬무 찐리뷰] '왕사남'에 다 못 담은 단종의 피눈물…17세 어린 왕의 참혹했던 피의 역사
등록일2026.08.07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6일 방송된 '홍위, 노산, 단종-왕의 이름을 찾아서'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그룹 프로미스나인 이채영과 가수 적재가 출연했고, 장항준 감독이 깜짝 이야기꾼으로 활약했습니다. (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준비된 왕, 문종 때는 1452년, 조선의 다섯 번째 임금 문종이 다스리던 때야. 5월 14일 늦은 오후 한양 도성 안 경복궁 강녕전 앞에서 누군가 울부짖으며 큰 소리로 외쳐. 어이는 대체 뭘 하느냐! 어째서 청심원을 올리지 않느냐! 병석에 누워있던 문종의 병세가 갑자기 위급해진 거야. 어이를 찾으며 통곡하는 이는, 문종의 동생 수양대군이었어. 어이가 황급히 청심원을 올리려는데, 이미 늦었어. 문종은 즉위한 지 2년 3개월 만에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돼. 문종의 때이른 죽음은 조선왕조사를 통틀어 가장 안타까운 순간 중 하나로 꼽혀. 그 이유를 들어볼게. 통치자로 봤었을 때는 모두가 준비된 세자, 국왕으로서의 문종이라는 존재는 굉장히 좀 기대가 됐던 군주. 만약에 그의 치세가 좀 오래됐다면, '세종 시즌2' 이렇게 볼 수 있었겠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세종 때 주요 업적들의 과정들, 한글 창제라든지 국정 운영, 세금 제도 개선, 그리고 국방의 강화 같은 많은 정책에서 문종이 직접 수업도 받았고. 또 직접 참여하면서 특히 세종의 말년이나 후반기 때는 그 일을 대행해서 처리를 했었기 때문에. 문종이 만약에 오래 살았다 하면 굉장히 기대되는 군주가 아니었을까.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한마디로 준비된 왕. 성군이 될 자질을 타고난 임금이었거든. 실록에 기록된 내용이야. 문종이 세자였을 때 명나라에서 온 사신을 맞이한 적이 있거든. 사신들이 문종을 보고는 감탄하며 말했대. 이 나라는 산수가 빼어나 이렇게 아름답고 훌륭한 세자가 태어났구려. -세종실록 세종 7년 윤7월 19일- 그 정도로 인물이 좋았나 봐. 그럼 단순히 잘생기기만 했냐? 아니야. 시와 글씨에도 뛰어났어. 당대 제일의 명필로 유명했는데. 간혹 등불 아래에서 종이를 대하면 정치하고도 미묘하여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문종실록 문종 2년 5월 14일- 게다가 무예도 능해서 화를 쏘면 백발백중. 잘생겼는데 공부 잘하고 싸움도 잘하는 거야. 그야말로 문과 무 모두 재능을 갖춘 인물이었던 거야. 천성이 너그럽고 효성이 지극해서 아버지 세종도 그렇게 아끼는 아들이었대. 세자 시절부터 아버지를 도와 많은 업적을 남겼고, 훈민정음 창제에도 힘을 보탰다고 해. 이게 다가 아니야. 비가 얼마나 왔는지 측정하는 측우기. 국가 단위로 표준화된 기상 측정기구로는 세계 최초야. 측우기를 누가 발명했는지 혹시 알아? 장영실이라고 알고 있잖아. 근데 문종이 발명한 거야. 문종이 측우기를 만든 이 날은, 발명의 날로 지정돼서 지금도 기념하고 있어. 문종이 만들어낸 게 또 있어. 이 물건의 이름은 화차야. 문종의 지시로 만들어진 화차는 화약의 힘으로 중신기전 100개를 연달아 발사하는 최첨단 신무기야. 요즘 시대로 하면 다연장 미사일이야. 화차는 훗날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물리치는데 큰 활약을 하게 돼. 앞날을 내다본 문종의 이 대비가 조선을 지키는데 일조한 셈이야. 세종의 뒤를 이어서 국방력 강화, 특히 화약무기나 이런 무기들을 개발해서 결국 임진왜란 때의 왜적을 막아낼 수 있는 힘에 있어서는 문종 때의 어떤 군사력 확충이나 시스템 확충이 있었다.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8살 나이에 세자로 책봉돼서 무려 29년간 왕세자 교육을 받은 문종은, 직위하기 7년 전부터 세종을 대신해 국정을 돌보기도 했어. 말 그대로 준비된 왕이었던 거지. 모두들 기대했을 거야. 세종이 닦은 기반 위에 다시 한 번 문화 정치가 펼쳐지겠구나. 하지만 그 기대는 오래가지 못했어. 문종의 죽음에 대해 실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어. 신하들이 모두 목놓아 통곡하는 소리가 궁정에 진동하였지만 스스로 그치지 못하였으며. 거리에 백성들도 슬퍼서 울부짖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문종실록 문종 2년 5월 14일- 이렇게 모두가 정말 진심으로 통곡을 한다는 건 어떤 분이었는지 알 수 있는 거지. 이들의 슬픔이 더욱 컸던 이유가 있어. 바로 왕위를 물려받을 세자가 너무 어렸거든. 이때 사왕은 나이가 어려 사람들이 믿을 곳이 없었으니. 신하와 백성의 슬픔이 세종의 훙서 때보다 더하였다. -문종실록 문종 2년 5월 14일- 문종의 뒤를 이어 왕에 오른 세자. 그게 단종이지. 조선의 여섯 번째 왕 단종이야. 이건 단종의 어진이야. 어진은 왕의 얼굴을 그린 초상화를 말해. 1452년 5월 18일. 단종은 12살 어린 나이로 왕에 올라. 지금 같으면 초등학교 5학년, 너무 어릴 때잖아. 단종은 그 나이에 지엄한 왕의 자리에 올랐어. ▲ 홍위(弘暐) 단종은 문종이 28살 때 태어났어. 혼인 나고 14년 만에 힘들게 얻은 금지옥엽 외아들이야. 이 아이에게는 '홍위(弘暐)'라는 이름이 주어져. '넓을 홍'자에 '햇빛 위'자야. 밝은 햇살을 세상에 넓게 비추는 훌륭한 왕이 되기를, 그런 마음을 담지 않았을까. 세종실록에 보면 어린 홍위에 대한 기록이 있어. 너 원손 이홍위는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품성이 영명하니… -세종실록 세종30년 4월 3일- 홍위는 할아버지 세종의 총리를 받으며 왕이 될 교육을 받게 돼. 공부를 잘했을까? 아버지 문종이 아들 홍위를 평한 기록이 있어. 너 원자 홍위는 덕이 온화하고 자질이 뛰어나며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니. 인과 효는 천성으로 타고났고. 스승을 중히 여기고 높이어 학문이 날로 진취하였다. -문종실록 문종 즉위년 7월 20일- 온화한 성품에 총명함까지. 그야말로 훌륭한 왕이 될 재질을 타고났던 거야. 게다가 홍위는 조선 건국 이래 유래 없는 정통성까지 지니고 있었어. 유교 국가였던 조선에서는 적장자, 그러니까 즉 정실 왕후가 낳은 맏아들이 왕위를 계승하는 게 원칙이야. 하지만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때까지는 한 번도 적장자가 왕이 된 적이 없었거든. 세종의 맏아들 문종이 최초의 적장자 출신 왕이었어. 그런데 단종은 그런 문종의 적장자야. 2대에 걸쳐서 적장자의 혈통을 계승한, 왕수저. 이건 조선 왕조 사회 최고의 정통성이야. 하지만 그런 그에게 딱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어. 혹자는 이렇게 말해. 단종은 누구보다 외롭고 쓸쓸한 왕이었다고. 홍위가 태어난 날 모두가 탄생을 기뻐했어. 그중에서도 뒤늦게 손자를 보게 된 세종이 크게 기뻐했대. 그런데 정각 안에 있던 커다란 초가 갑자기 땅에 떨어져. 혹시 불길한 징조일까? 그 이튿날이 되자 궐 안에는 비통한 울음소리가 가득해. 홍위를 낳은 어머니 현덕왕후가 산후병으로 숨을 거둔 거야. 홍위는 어머니 품에 제대로 안겨 보지도 못하고, 세종의 후궁 혜빈 양씨의 손에 크게 돼. 그래서 홍위가 왕위에 올랐을 때에는, 자신을 끔찍이 아껴주던 할아버지 세종과 할머니 소헌왕후. 거기에 아버지 문종까지 모두 세상을 떠난 후였어. 이 어린 왕을 돌봐줄 왕실의 어른이 단 한 명도 없었던 거야. 고아와 같은 외로운 임금이었던 거지. 그에게 남은 유일한 혈육은 친누나 경혜공주뿐이야. 그래서일까? 홍위는 왕이 되고 난 후에도 자주 경혜공주의 집을 찾아 잠을 잤다고 해. 친누나 한 명 있는 거죠. 누나는 15살에 결혼했거든요. 옆에 같이 지내다가 친누나가 떠난 거죠. 왕으로 즉위한 다음에, 또 즉위 전에도 틈이 나면 항상 단종이 계속 경혜 공주를 만나러 가요. 그러니까 둘간의 사이가 좋았구나를 알 수 있는 거고 애틋했던 거는 좀 분명했던 것 같습니다.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넓은 궁과 많은 신하들도 홍위의 외로움을 달래주지 못했던 것 같아. 혼자 남게 될 어린 아들이 염려가 됐던 걸까. 아버지 문종은 눈을 감기 전, 조정의 원로 대신들을 불러서 이런 부탁을 남겨. 경들에게 이르니, 부디 어린 세자를 잘 보필하라. 이렇게 임금이 유언으로 뒷일을 부탁하는 걸 '고명'이라고 해. 이때 문종의 고명을 받은 대신이, 당시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 등이었어. 이들을 '고명대신'이라고 불러. 이들은 어린 왕을 보좌해서 나라일을 결정하도록 했어. 어떤 식으로 했는지 보여줄게. 예를 들어, 새로운 관리를 뽑아야 하는 상황이야. 어린 왕은 누가 일을 잘하는지 못하는지 잘 모를 거 아니야. 그래서 대신들이 후보자 명단을 올려. 대신들은 명단에 누런 종이를 붙여서, 가장 적합한 인물을 미리 정해 표시를 해뒀어. 그럼 왕은 이 이름 밑에 점만 찍으면 돼. 누런 종이로 표시해서 정사를 결정했다고 해서 이를 '황표정사'라고 불러. 어린 왕을 우리가 잘 보좌하기 위해서 왕이 쉽게 결정할 수 없는 내용들을 우리가 알아서 해야겠다, 그렇게 해서 나온 대표적인 형태가 황표정사라 해서, 이것을 김종서나 황보인과 같은 신하들이 주도를 해나가는 거죠. -신병주 교수, 건국대 사학과 이렇게 도와주시는 분들이 계시면, 왕이 아무리 어려도 할 수 있겠지? 그런데 이게 말이 좀 있었어. 황표정사를 통해서 고명대신들의 권한이 엄청 강해졌거든. 인사권을 가지게 되니까.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김종서. 문신이면서도 국방개척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야. 세종 때 함길도 도절제사로 파견된 김종서는 육진개척을 총지휘해서 두만강 이남을 조선의 영토로 만들었어. 지금의 한반도 지도로 만든 인물이지. 몸집은 작은데 얼마나 기세가 대단했냐 하면, 별명이 '대호'. 큰 호랑이라 불렀어. 단종 즉위 후 김종서는 조선 최고의 실력자로 떠오르게 돼. 그런데 황표정사를 두고 '그럼 어린 왕은 그냥 허수아비 아니야? 김종서가 대신 권력을 휘두르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잖아. 황표정사 자체는 군주를 보좌하기 위한 방법이 맞습니다. 국왕의 나이가 어렸다라는 것이고, 국가를 이끌어가는 과정에 대해서 김종서가 선택을 해야 되는 부분은 분명히 있잖아요. 김종서라는 존재가 보여줬던 삶이라는 것은, 책임 있고 정말 독실하게 국가를 이끌어가는 전형적인 훌륭한 선비의 모습, 거의 그대로예요. 그 정도로 훌륭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김종서의 황표정사가 권력을 뺏기 위함이다. 이렇게 볼 수는 없습니다.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그렇다면 단종은 그냥 허수아비 왕이었나? 그렇진 않아. 대신들의 의견을 묻지 않고 직접 처리하는 일도 적지 않았어. 8살 때부터 왕도 교육을 잘 받아왔잖아. 황표정사를 하는 와중에도 또박또박 의견을 내고 판단력도 뛰어났다고 해. 설령 대신들이 반대하더라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뜻을 꺾지 않았대. 한 가지 일례가 있는데, 단종이 왕이 된 다음에 문종의 큰 비석을 세워야 되는 거야. 신하들이 돌을 채취해서 가장 큰 비석을 만들어서 위대한 업적을 기려야 된다고 했어. 그런데 단종이 반대해. 지금 한겨울인데 그 돌을 캐느라고 우리 백성들이 고생을 한다. 겨울이 지나고 날이 따뜻하면 해라 는 거야. 다시 신하들이 안 된다고 했지만, 단종은 끝까지 자신의 뜻을 관철시켜. 애민정신, 백성들을 생각하는 마음이야. 어린 나이지만 단종도 이미 8살에 세손으로 책봉이 되어서 기본적으로 왕이 되는 수업도 많이 받았고. 또 스스로도 할아버지가 세종이고 아버지가 문종. 그런 영향력 속에서 왕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알고 나름대로 그 역할을 하려고 했던 점은 분명합니다. -신병주 교수, 건국대 사학과 국가의 정책을 논하는 신하들과의 대화 장면을 보더라도, 고집도 있고 판단도 좀 분별하고 했기 때문에 상당히 좀 똘똘했다. 몇 년 있으면 내가 정무를 다스린다, 이 단계로 가고 있었어요.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 수양대군의 등장 하지만 이런 상황에 불만을 느낀 인물이 있었어. 바로 수양대군. 문종의 동생이자 단종의 숙부였던 수양대군. 훗날 세조가 되는 인물이야. 신하들의 권력이 상당히 비대해지고 왕은 제대로 권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왕권을 약화시키면서 김종서와 같은 신하들이 권력을 행사하는 이런 상황에서는 뭔가 이제 우리 왕실이 나서야 된다, 이 비정상적인 상황을 나는 바로 잡아야 되겠다… -신병주 교수, 건국대 사학과 수양대군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올라? 내가 왕이 될 상인가? 실제 수양대군은 이렇게 생겼대. 수양대군은 세종의 둘째 아들로 다방면에서 뛰어났다고 해. 특히 무인의 기질을 타고 났는데 13살 때 아버지 세종과 사냥을 나간 자리에서 7개의 화살로 사슴 7마리를 잡았대. 백발 백중이었지. 잡고 봤더니 전부 목을 관통했다고 전해져. 게다가 행정적인 능력도 뛰어났어. 세종의 명에 따라 형 문종과 함께 여러 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거든. 수양대군 본인은 사실 되게 대단한 사람입니다. 개인적인 유능함은 정말 뛰어나요. 뛰어났기 때문에 세종이 자신의 업적과 일에 참여를 많이 시켰고요. 대부분 다 유능했기 때문에 했던 거죠.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하지만 그는 서열상 왕이 될 수 없었어. 모든 면에서 뛰어난 형이 있었기 때문이지. 형이 왕위에 오르면서 수양은 점차 권력에서 멀어지게 돼. 하지만 형이 죽고 어린 조카가 왕위에 오르자 점차 권력에 대한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한 거야. 겉으로는 어린 조카를 위해 권력을 손에 쥐려는 간신배들을 처내야 한다 했지만, 속으로는 스스로 왕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그가 놓지 못한 게 있죠. 욕망을 놓지 못한 거죠. 이 모든 것들을 다 무너뜨리더라도 난 왕이 되고 싶다.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당시 조선의 권력은 삼각 구도로 나뉘어. 단종을 보좌하며 고명대신들을 이끄는 김종서. 그 반대편에선 수양대군. 그리고 세 번째로 안평대군. 안평대군은 세종의 셋째 아들이자 문종과 수양대군의 친동생이야. 그를 '삼절'이라고 불렀어. 시, 서, 화에 모두 능한 인물을 삼절이라고 해. 시도 잘 짓고 글씨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리는, 한마디로 최고의 아티스트였던 거지. 안평을 중심으로 많은 문인들이 모여들면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가진 인물로 떠올랐어. 그런데 이 삼각 구도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해. 김종서가 이끄는 고명대신들이 안평대군과 왕래하면서 친분을 다지는 거야. 김종서와 안평, 그들이 같은 편에 서게 되면서 큰 세력을 이루게 돼. 수양이 무쪽이었다면 안평대군은 문쪽이에요. 시, 서, 화에 능했고 상당히 좀 부드러운 인물.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안평대군과 함께 교류하고 손을 잡는 그런 모습을 보였고, 수양의 입장에서는 결과적으로 김종서뿐만 아니라 안평대군도 제거를 해야 되겠다라는 판단을 하게 된 것입니다. -신병주 교수, 건국대 사학과 ▲ 수양대군과 한명회 이들에 비하면 수양대군의 세력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야. 그때 수양대군의 최측근 인사였던 권람이 이런 제안을 해. 대군저하, 모름지기 삶과 죽음을 맡길 만한 자 두어 사람을 얻으시어 언제 닥칠지 모를 사태에 대비하소서. 그 말에 수양은 고개를 끄덕여. 그 말이 심히 옳다. 헌데 그런 일을 맡길 만한 자가 누가 있느냐. 그러자 권람이 기다렸다는 듯 수양한테 한 사람을 추천해. 한명회라는 자가 그럴 만하옵니다. 권람이 한명회를 추천한 거야. 한명회는 어려서부터 기개가 범상치 않고 포부도 잡지 않았으나. 시운이 어긋나 벼슬이 낮아서 알아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공께서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을 뜻이 있으시다면 이 사람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단종실록 단종 즉위년 7월 28일- 권람의 말을 들은 수양대군은 바로 한명회를 만나게 돼. 그리고 만나자마자 푹 빠져. 한명회의 손을 덥석 잡고는 진작에 만나지 못한 걸 아쉬워했대. 김종서를 중심으로 하는 김종서, 안평대군 세력 대 수양대군과의 충돌인데, 결국 수양대군 입장에서도 김종서에 맞먹을 수 있는 자기 사람을 심어야 될 거 아니에요. 그때 바로 스카우트 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한명회었습니다. -신병주 교수, 건국대 사학과 수양이 현 상황에 대해 어찌하면 좋을지 묻자 한명회는 이렇게 말해. 대군께서는 종실의 맏어른으로 명분이 있으니 성공하지 못할 리가 만무합니다. 결단해야 할 때 하지 못하면 도리어 화를 입는다 하였으니 익히 생각해보소서. 한명회가 붙게 되면서 완전히 바뀝니다. 수양대군과 권람과 한명회가 붙게 되면서부터는 굉장히 노골적인 유능한 권력 집단이 바뀌어 가게 되고요. 한명회의 어떤 모사와 천재적인 조직 능력도 있겠지만, 최고의 명문 거족들이 모여서 라인들을 활용하고, 조직화된 그런 포섭의 과정이 있었다는 것도 같이 얘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한명회와의 만남 이후 수양은 결심하게 돼. 권력을 쥐고 있는 김종서와 안평대군을 처내기로. 수양과 한명회의 만남. 어쩌면 이 만남이 조선의 역사를 크게 뒤바꾼 사건이지 않을까. 이후 수양대군은 집현전 학사 신숙주를 포섭해. 그밖에도 용맹한 무인들을 끌어모으며 세를 키워가기 시작해. 그리고 마침내 운명의 날을 맞게 돼. 1453년 10월 10일 새벽. 수양대군은 권람, 한명회 등 신복들을 불러 이렇게 말해. 오늘은 요망한 도적을 소탕하여 종사를 편안히 하겠다. 내가 무사 몇을 데리고 김종서의 집에 가서 그를 벨 것이야. 마침내 수양대군이 칼을 빼든 거야. 수양대군이 명분을 취한 거거든요. 어린 왕을 지키기 위해서 내가 부득이하게 나섰다.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그는 신복 무사들을 불러 활 쏘기를 하고 낮부터 술자리를 가져. 전에도 종종 있었던 일이라 다들 마음껏 즐겼어. 해가 지자 수양은 무사들을 불러 모으고는 거사를 치르겠다는 뜻을 밝혀. 무사들은 어떤 반응이었을까? 일부는 찬성했지만 반대하는 사람도 많아. 이 일은 마땅히 조종에 먼저 알려야 합니다 , 단종께 먼저 보고해야 됩니다 라면서. 심지어 겁을 먹고 도망가는 일들도 있었대. 다급해진 수양대군이 어쩌면 좋을지 망설이자 한명희가 말해. 길 옆에 집을 짓는 일도 3년 안에 이루지 못하는 법입니다. 작은 일도 그러한데 하물며 큰 일은 어떠하겠습니까? 이미 정하였으니 의견이 나뉜다 하여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수양대군은 마침내 마음을 정해. 옷을 붙잡고 만류하는 자들을 뿌리치고는 벌떡 일어나. 내 한몸에 종사가 달렸으니 운명을 하늘에 맡긴다. 따를 자는 따르고 갈 자는 가라. 말 위에 오른 수양대군은 수하 몇 명만 거느리고 김종서의 집으로 향해.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났어. 이제 되돌릴 수 없는 거야. 잠시 후 김종서의 집. 쉬고 있는 김종서에게 수양대군이 왔다는 소식이 전해져. 김종서는 몇이나 데려왔더냐? 사람이 적으면 맞이하고 많으면 쏘거라 라고 말했어. 그러자 적습니다 라는 대답이 들려와. 그 말을 듣고 김종서가 밖으로 나와 수양대군을 맞이해.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해. 수양대군이 멀찍이 서서 다가오질 않아. 해가 저물었으니 문에는 들어가지 못하겠고, 대감께 한 가지 일을 청하고자 왔습니다. 김종서가 여러 번 들기를 청했지만 끝까지 거절해. 하는 수 없이 김종서가 앞으로 나왔어. 안 들어오니까. 그러자 수양이 말해. 내 오는 길에 사모 뿔이 떨어져 잃어버렸지 뭡니까. 대감의 사모 뿔을 좀 빌립시다. 사모는 관복을 입을 때 쓰는 검은색 비단 모자를 말해. 그 뒤쪽에 달린 뿔을 빌려달라는 거야. 이 말에 김종서는 긴장을 풀고는 바로 자신의 사모 뿔을 건네줬어. 수양대군이 이어서 말해. 또 청을 드리는 편지가 있습니다. 그러자 함께 온 시종이 김종서에게 편지를 건네줘. 근데 밤이잖아. 어두워서 잘 보이지가 않아가. 김종서가 편지를 들어 달빛에 비춰보던 그때였어. 수양대군이 시종에게 눈짓을 보내. 그러자 시종이 품에서 철퇴를 꺼내더니, 김종서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쳐. 그의 아들이 놀라서 쓰러진 김종서 위에 엎드리자, 수양을 따라 무사가 칼을 뽑더니 휘둘러. 이렇게 개유년 10월 10일 밤, 마침내 수양대군의 쿠데타가 시작된 거야. ▲ 계유정난 한편 단종은 그날도 경혜공주의 집에서 자고 있었어. 늦은 밤 숙부가 찾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을 거야. 수양대군이 이렇게 말해. 김종서가 반역을 도모하였는데 일이 급하여 먼저 아뢰지 못하고 이미 베어 죽였습니다. 단종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부모님과 할아버지 다 돌아가시고 정말 믿었던 사람인데. 단종 실록에는 이렇게 적혀있어. 단종이 환관에게 명해 궁중에 술과 음식을 내려 수양대군 이하 여러 재상들을 먹였다. 숙부의 공을 치하했다는 거야. 하지만 훗날 문신 이정형이 쓴 동각잡기에는 전혀 다르게 적혀있어. 왕이 나이가 어리므로 놀라 일어나며 '숙부 나를 살려주오' 하였다. 수양이 말하기를 '그것은 어렵지 아니하니 신이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하고. 곧 명패를 내어 모든 재상을 부르고 금군을 부서를 나누어 각 곳에 지키게 하고. 또 사람으로 세 겹 문을 만들어 한명회로 하여금 살생부를 가지고 문 안에 앉았다가. 재상들이 첫 문에 들어오면 따르는 하인을 떼게 하고, 둘째 문에 들어오면 이름이 살부에 있는 사람은 무사를 시켜 철퇴로 쳐 죽였는데. 황보인 및 이조판서 조극관 등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동각잡기- 단종이 두려움에 떨면서 수양의 협박을 따랐다는 거야. 흔히 정사라고 말하는 단종실록의 내용과 후대에 기록된 내용은 왜 다른 걸까. 조선왕조 실록은 왕이 재위하는 동안 쓰여지는 게 아니야. 왕이 사망한 후, 다음 왕의 신하들이 편찬하게 돼 있어. 단종실록은 세조의 신하들이 쓴 거야. 그래서 세조의 입장에서 미화된 게 많다고 해. 어느 쪽이 진실인지는 잘 가려서 판단해야겠지. 그 다음 부분은 실록의 내용도 거의 같아. 그날 밤 대신들은 왕명을 받고 급히 입궐했어.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한명회였어. 한명회는 살생부를 보고 살려야 할 자 죽여야 할 자를 가려냈다고 해. 그렇게 수양대군의 반대편에 섰던 인물들은 죽임을 당하게 돼. 수양의 칼바람이 몰아치던 그때였어. 죽은 줄 알았던 김종서가 정신을 차려. 머리에 큰 부상을 입었지만 죽지는 않았던 거야. 수양대군은 그때 김종서가 이미 사망한 것으로 판단을 하고. 바로 자신의 집으로 가서 병력들을 다시 지휘를 하게 되는데. 그런데 놀랍게도 이때 김종서가 죽지는 않아요. 부상을 입습니다. -신병주 교수, 건국대 사학과 김종서가 다시 깨어나서 원구를 시켜 돈의문을 지키는 자에게 달려가 고하게 하기를, '내가 밤에 어떤 사람에게 상처를 입어 죽게 되었으니. 속히 의정부에 고하여 의원으로 하여금 약을 싸 가지고 와서 구제하게 하고. 또 속히 안평대군에게 고하고 내금위를 보내도록 주상께 아뢰라. 내가 나를 다치게 한 자를 잡으려 한다. -단종실록 단종 1년 10월 10일 그렇게 김종서는 신분을 숨기기 위해 여자 옷을 입고 가마에 탄 채 황급히 입궐하려고 했어. 궁 안에 알려서 사태를 바로잡고자 했던 거야. 조정에 들어가서 내가 충분히 소명하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혹은 응당 신하라 하면 이런 억울한 상황에서도 조정에 가서 억울함을 호소해서 국왕이 풀게 해야지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되게 강직하거나 고지식한 선비죠.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하지만 도성문이 굳게 닫혀 있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해. 할 수 없이 몸을 숨긴 김종서는 수양의 무사들에게 발각돼서 결국 죽임을 당하게 돼. 그렇게 하룻밤만에 조선의 권력 지도가 완전히 바뀌었어. 다음 날에도 어김없이 해가 떴지만 전날과는 다른 세상이야. 이제 수양대군의 세상이 열린 거지. 계유년 10월 10일 밤에 일어난 이 사건을 계유정난(癸酉靖難)이라고 해. 정난은 말 그대로 난을 평정했다는 뜻이야. 하지만 실상은 권력을 잡기 위해 칼을 휘두른 수양대군의 쿠데타였어. 정난은 사실은 그냥 '혼란스러움을 바로잡는다' 한자 뜻 그대로예요. 내가 국익의 결단을 해서 김종서 무리를 처단함을 통해서 나라를 바로세웠다는 뜻입니다. 말 그대로 승자의 기록이거든요. 조금 불쾌하죠.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계유정난 이튿날 단종은 교지를 내려. 과인이 어리고 부덕한 소치로 이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때를 만났으니 마땅히 종친의 견고함에 의지해야 할 것이다. 수양대군으로 하여금 정사를 보좌하게 해서 군국의 중한 일을 모두 위임하여 총괄해 다스리게 하여 내가 직접 정무를 볼 날을 기다릴 것이다. -단종실록 단종 1년 10월 11일 숙부에게 정사의 모든 권한을 맡기겠다는 얘기야. 과연 단종의 진심이었을까? 얼마나 무서웠을까. 수양대군은 스스로 관직에 올라. 관직 이름이 아주 길어. 영의정 부사 영경연 서운관사 겸판이병조사. 영의정과 이조판서, 병조판서까지 겸직한 거야. 요즘으로 치면 국무총리 겸 행안부 장관 겸 국방부 장관이야. 그냥 혼자 다 해먹겠다는 거지. 그리고 자신을 도운 이들을 공신으로 책봉해서 굵직한 벼슬을 내려. 이제 조정은 수양대군의 세력이 완전히 장악해버렸어. 이 얘기를 들으니까 생각나는 사건 있지 않나? 우리 가까운 현대사에서 12.12 군사 쿠데타 이후에 기억하실 거예요. 전두환이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장, 중앙정보부장 서리, 사회정화위원장, 다 요직을 겸직을 해요. 그런 장면하고도 매우 유사하고. -신병주 교수, 건국대 사학과 전두환 씨도 또 노태우 씨도 결국은 한국의 민주화의 시간을 지연시키고 그로 인해서 대단히 부정부폐라든지 군사문화의 악패 같은 것들을 사회에 남기고 5.18 민주화운동 같은 인권유린이나 유혈사태같은 것들을 벌이면서 너무나 많은 피해를 남겼단 말이에요. 그 부분에서 똑같지는 않지만 사실은 수양대군도 비판받을 만합니다.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무력적인 수단을 동원해서 하룻밤만에 권력을 쥐게 되는 과정. 쿠데타를 일으킨 이들이 주요 요직을 차지하면서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이 1979년 일어난 12.12 군사 쿠데타와 아주 흡사해. 이렇게 보면 역사는 반복되는 게 아닐까 싶어. 권력을 쥔 후에도 수양의 칼춤은 계속 됐어. 남아있는 김종서 일파를 모두 죽이고, 친동생 안평대군과 그의 아들을 강화도로 귀향을 보내. 그리고 얼마 후 사약을 내려 죽이게 돼. 혈육도 죽이는 거야. 단종은 자신의 손발이 끊어져 나가는 걸 지켜보면서도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 왕이면서도 뜻대로 할 수 없는 고립무원의 신세. 오히려 숙부가 언제 자신을 죽일지 모르는 공포스러운 상황이야. 김종서 같은 사람한테 휘둘린다고 했을 때 그때가 허수아비가 아니라 수양대군이 계유정난 이후에 모든 권력을 집중했을 때 그때부터 사실은 허수아비 왕으로 이제 전락을 하게 됩니다. -신병주 교수, 건국대 사학과 정책 결정 같은 것들은 다 수양대군이 할 수밖에 없고. 수양대군에게 정책 결정을 올리는 사람들은 다 수양대군의 측근들인 거죠. 이때부터는 사실은 단종은 살아있는 산송장과 다름없다. 죽을 날을 기다리는, 이런 과정이라 볼 수 있습니다.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 왕위에서 물러나다 이제 실질적인 조선의 왕은 수양대군이야. 결국 이듬해인 단종 3년 윤달 6월 11일. 단종은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해. 이제 대임을 숙부에게 전해주고자 한다.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힌 거야. 그때 그의 나이 열다섯.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의 일이었어. 왕위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는 거. 우리가 이런 걸 선위라고 하는데. 그 바로 직전에 수양대군이 주도해가지고 금성대군, 한남군, 영풍군, 또 혜빈 양씨, 그리고 단종의 자형이었던 정종. 이런 사람들이 다 '역모를 꾀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을 처벌해야 된다'라는 주장을 강력하게 해요. 결과적으로 여기에 떠밀려서 공식적으로는 단종이 이들의 유배를 명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계속 왕으로 있는 한, 이 사람들의 생명을 보장할 수 없다. 이런 판단까지 하는 거죠. 자신이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주변 사람들의 희생은 불을 보듯 뻔하다.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한 방법은 내가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다. -신병주 교수, 건국대 사학과 금성대군은 어릴 적부터 단종을 아껴주던 삼촌이야. 혜빈 양씨는 아기 때부터 단종을 맡아 키워준 어머니와 다름없어. 명목상으로는 아직 왕이었기 때문에 자기 손으로 이들을 귀향 보내라고 명할 수밖에 없는 거야. 자신이 왕위에 있는 한 숙부는 내 주변 사람들을 경계하고 죽일 게 뻔해. 그들을 위해서라도 왕위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거지. 단종이 옥새를 건네는 순간에 대해 실록에는 이렇게 적혀있어. 수양이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사양했지만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어 받아들였다 라고. 이게 과연 진실일까? 그렇게 단종은 상왕이 되어 창덕궁으로 물러나고 수양은 마침내 왕위를 차지했어. 이제 그는 조선의 7대 임금 세조가 된 거야. 왕위에 오른 후에도 그는 단종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사정없이 쳐내. 단종에게는 어머니와 같은 혜빈 양씨, 풍수로 단종을 지키고자 했던 목효지도 이때 죽임을 당했다. ▲ 상왕복위운동 한편 이 상황을 지켜보면서 분한 눈물을 삼키는 이들이 있었어.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 세종이 키워낸 집현전 출신의 문관들. 이들은 김종서 일파가 숙청당할 때는 소리를 내지 않았어. 딱 돌아가는 모습을 보니까 성삼문, 박팽년 등은 '아 이거 아니구나. 결국은 왕을 몰아내는구나.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려고 하는 거구나' 깨닫고 뒤늦게 반응을 하는 거거든요. 너무 늦은 거죠.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왕이 되기 위해 조카를 내몰고 자신의 형제까지 죽이는 세조의 모습은 사대부들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어. 이들에게 세조는 선왕의 유훈을 저버린 반역자. 자신들이 섬길 왕은 단종이라고 생각한 거지. 이들은 뜻을 같이하는 문관들과 함께 은밀히 계획을 세우기 시작해. 목적은 단종을 다시 왕으로 모시는 거야. 상왕의 복위를 도모한 거야. 이들의 계획은 이랬어. 6월 초하루 명나라 사신들을 위한 연회가 있을 것이오. 그때 세조를 쳐야만 합니다. 명나라 사신을 위한 연회는 정해진 예식대로 진행하게 돼. 연회장에선 아무도 무기를 지닐 수가 없어. 단, 별운검이라 불리는 호위 무관들은 무기를 지닌 채 왕을 호위하도록 되어 있어. 마침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 무인이었던 유응부가 별운검이라 해서 특별 경호원으로 그 자리에 임명이 되요. 진짜 하늘이 주신 기회다 해서, 이때 세조와 세조의 세자인 의경세자를 암살하자. -신병주 교수, 건국대 사학과 그런데 거사가 다가올수록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해. 조선시대에는 국가에서 늘 하늘의 변화를 살폈어. 그런데 밤하늘에 빛을 내는 별이 긴 꼬리를 달고 움직이는 게 목격돼. 이런 걸 '혜성'이라고 하지. 이 조선시대 때는 혜성이 보이면 자연재해나 변란이 일어날 징조라고 얘기했거든. 그런데 5월 한 달에만 혜성이 나타났다고 기록된 게 11번이나 돼. 심지어 훤한 대낮에도 혜성이 보였다고 해. 혜성이 나타났다. 어떤 별이 남쪽으로 흘렀는데 모양이 주먹만 하고 꼬리 길이가 1장이나 되었다. -세조실록 세조 2년 5월 10일- 게다가 궁중 안에 음식을 만드는 사홍방에서, 시루가 혼자 울었다는 얘기도 떠돌아. 떡시루. 과연 이게 좋은 징조일까? 아니면 불길한 징조일까? 그러는 사이 6월 초하루 거사일이 다가왔어. 이제 곧 조선의 운명이 정해지는 거야. 그런데 그때,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 사신을 맞이할 때는 어전 안이 좁으니, 별운검을 없애도록 하라. 갑자기 세조가 별운검을 들이지 말라고 명한 거야. 그렇게 되면 거사는 시작도 못하잖아. 명을 들은 성삼문은 즉시 아뢰. 사신을 맞이하는 의식은 정해진 예법에 따라야 하니 별운검을 없애서는 아니 되옵니다. 하지만 세조는 명을 거두지 않았어. 알고 보니 별운검을 없앤 것 역시, 한명회의 책략이었다고 해. 미리 연회장을 점검하고 오더니 어떤 촉을 느꼈던 걸까, 바로 세조에게 아뢰. 연회 장소가 좁고 찌는 듯이 더우니 별운검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시옵소서. 세조에게 별운검을 없애라고 청한 거야. 결국 거사는 실행하기도 전에 무산되고 말아. 별운검으로 뽑혔던 유응부는 그래도 거사를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해. 하지만 성삼문 등 다른 문관들은 신중했어. 지금은 때가 아닌 듯하니 훗날을 기약하도록 합시다 라며. 그리고 이 선택은 최악의 최악의 결과를 불러오고 말아. 연회가 끝난 다음날, 그날은 낮인데도 어두웠다고 해. 두 명의 인물이 입궐에서 세조를 만나. 그의 정체는 성균관에서 문관으로 있는 김질과 그의 장인이었어. 성삼문의 제안을 받고 함께 상왕복위를 도모하던 그는 거사가 미뤄지자 불안에 떨다가 세조에게 밀고 하기로 한 거야. 상왕 복위를 도모하던 이들은 모두 의금부로 끌려와. 세조는 직접 국문에 나서 먼저 성삼문에게 말해. 너는 나를 안지가 가장 오래되었고, 나 또한 너를 후하게 대접하였다. 내가 친히 묻는 것이니 숨기지 말고 고하라. 그러고는 불에 달군 인두로 몸을 지지고 매질을 해서 뼈를 으스러뜨리는 등 고통스러운 고문이 가해져. 친국을 하는 사이에서 성삼문이 신음 소리 하나 안 내면서 버텼다. '내가 이 싸움에선 졌지만 누가 올바른가를 따졌을 땐 내가 옳다' 라고 하니까 어마어마한 고통을 참아서 버틴 거고.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그 과정에서 성삼문이나 박팽년은 끝까지 저항을 하죠. 대표적인 게 당시 왕이잖아요 세조를. 왕이라고 부르지 않아요. 나으리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세조가 더 열받는 거예요. 너희가 그래도 내가 준 녹까지 받지 않았느냐고 했는데, 집에 가보니까 그 당시에 월급으로 받은 녹봉이 그대로 남아있더라. 하나도 손을 안 댔다. -신병주 교수, 건국대 사학과 세조를 왕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지. 세조는 박팽년에게도 이렇게 말해. 너는 내게 장계를 올릴 때마다 나의 신하라 칭하지 않았느냐. 그러자 박팽년이 답해. 나으리께선 내가 보낸 장계들을 확인해보시오. 세조가 박팽년이 관찰사로 있을 때 올린 장계를 다시 들여다보더니 부르르 떨어. 이 글씨가 '신하신'이야. 장계에는 분명히 그렇게 적혀 있었거든.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니까 글씨가 좀 이상해. '신하신'이라는 글자에 획이 빠져있어. 그러면 '클거'자가 되거든. '난 당신의 신하가 아니다. 나는 단종 임금의 신하다'라는 뜻이야. 박팽년은 한 번도 세조에게 자기 자신을 신하라고 칭한 적이 없었던 거야. 세조는 바로 명을 내려. 간악한 역도의 무리를 거열형에 처하라. 거열형은 목과 팔, 다리에 줄을 묶어 소나 말이 끌면서 사지를 찢어 죽이는 잔인한 형벌이야. 세조는 이들의 목을 잘라 내걸고, 나머지 육신은 팔도 각지에 흩어 놓으라고 명해. 세조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상상이 되지? 처형장으로 향하는 길. 성삼문은 한 편의 시를 읊었다고 해. 제목은 '절명시'. 북소리가 목숨을 재촉하고 돌아보니 해가 지려하네. 저승에는 주막도 없다는데 오늘 밤은 누구 집에서 묵으려나. 이들은 죽는 순간까지 단종에 대한 충심을 꺾지 않았어. 훗날 이들은 '사육신'이라 불리게 돼. 세조는 이 사건을 가리켜 혜성이 나타나고 변이 일어났다 하여 '성변'이라고 표현했어. 이렇게 상왕 복위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어. 세조는 이렇게 생각했어. '조카가 궁 안에 남아있는 한, 반역을 꾀하는 무리들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결국 단종을 유배시킬 것을 명해. 역모의 배후에 단종이 있었다는 죄목이었어. 뒷수습을 해야 되잖아요. 이게 빌미가 돼서 반정이 일어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여기에 단종이라는 빌미를 남겨둔다? 이건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죠.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단종은 상왕의 지휘마저 빼앗겨. 세조는 그를 노산군으로 강등시키고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보냈어. 이제 단종은 더 이상 왕이 아니게 된 거야. ▲ 노산(魯山) 태조 3년 6월 노산군은 가마를 타고 유배길에 올라. 그의 나이 열일곱. 태어날 때부터 살았던 궁에서 쫓겨나게 된 거야. 한양의 동쪽 문을 나와서 청계천 돌다리를 건너기 전, 유배 행렬이 멈춰서. 이곳에서 노산군은 한 사람과 가슴 아픈 이별의 순간을 맞이하게 돼. 단종의 부인. 정순왕후 송씨. 왕위에 오른 뒤 혼인하게 된 두 사람이었어. 하지만 3년 만에 생이별을 하게 된 거야. 두 사람에게 허락된 시간은 아주 짧았어. 송씨는 노산군의 옷 매무새를 만져주고는 떠나는 모습을 눈에 담아. 두 사람은 그 후로 평생 다시 만나지 못했어. 두 사람이 손을 놓게 된 돌다리는 영도교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그 자리에 남아있어.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을 건너갔다는 뜻이야. 송씨는 정업원이라는 비구니 사찰에서 지내게 돼. 그녀는 매일 새벽 산에 올라 동쪽을 바라보며 지아비를 위해 기도했다고 해. 사람들은 그 산을 가르쳐 동쪽을 바라본다. 이 뜻으로 '동망봉'이라고 불렀어. 노산군은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여주 이포나루에서 내려. 거기서부터 원주를 지나 영월까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700리길.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었을 거야. '내가 다시 이 길에 돌아올 수는 없겠구나'. 유배를 떠나는 길은 매 순간이 고통이지 않았을까. 7일 후 노산군은 영월에 도착해. 그가 지내게 될 유배지가 바로, 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 나왔던 청령포야. 여기가 단종 임금이 유배됐던 곳인가요? 맞습니다. 이 자리가 바로 단종 임금이 귀양 오셨다가 두 달을 사셨던 곳. 청령포 한문을 좀 보셔야 돼요. 푸른 청, 맑을 령, 물가 포를 쓰거든요. 글자마다 삼수변이 다 들어갑니다. 이 땅이 그렇게 생겼거든요. 삼면은 전부 강이고, 뒤에는 봉오리가 여섯 개인 육육봉이고. 배를 타야만 건너올 수 있는 천연 감옥 같은 곳. 관리하기가 좀 좋습니까? 누군가 이 강을 건너가는 것만 확인하면 기가 막히잖아요. 거기다 단종 임금 알아서 본인이 나올 수 있는 이런 곳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아마 단종 임금이 유배되시기에는 가장 적합하지 않았나. -이갑순, 문화해설사 강물은 어디론가 흘러가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은 흘러갈 수 없는 곳, 벗어날 수 없는 곳. 노산군도 이렇게 예감했을 거야. '내가 죽기 전에 이곳을 벗어날 수 없겠구나'라고. 이게 수순이 정해져 있습니다. 죄를 물어서 유배를 보내고 유배를 보낸 다음에 거기서 처리한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처하게 된 거죠.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노산군이 유배 생활 중 썼다고 전해지는 시가 하나 있어. 한 마리 원통한 새 궁중을 떠나온 뒤 외로운 그림자 하나 푸른 산 중 헤메누나. 밤마다 잠을 청해도 잠은 이룰 수 없고 해마다 한을 풀려 해도 한은 끝이 없네. 울음소리마저 끊긴 새벽 봉우리 달빛만 희고. 피 뿌린 듯 봄 골짜기에 붉은 꽃이 지네. 하늘은 귀먹어서 슬픈 하소연 못 듣는데, 어찌하여 설움 많은 내 귀만 홀로 밝은고. 이 시의 제목은 '자규시'야. 자규는 두견새를 가리켜. 노산군은 깊은 밤 잠들지 못하고 두견새 소리를 들으며 비통한 눈물을 흘렸을 거야. 그런데 노산군의 비통한 울음소리를 들은 이가 있었어. 너무 억울하고 속상하잖아요 단종이. 그러니까 단종이 평소에도 울적하게 지내고 때로는 울기도 하고 고함을 치고 이랬을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날 고종실록에 따르면, 꿈에 사육신이 나온 거예요. 자기들의 억울한 사연 그리고 비탄함을 쏟아내니까 얼마나 괴로웠겠어요. 너무나 한스러운 마음에 나와서 막 통곡을 했대요. 그런데 그 소식을 호장 엄흥도가 듣고 달려온 거예요.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바로 영월 호장 엄흥도였어. 호장은 관아에서 일하는 관리야. 요즘으로 치면 아전이라고 하는데, 행정실장쯤 되는 사람이에요. 그러면 당연히 단종이 유배를 왔으니까 음식 공급이라든가 단종이 이렇게 머무시는 곳 관리도 하고. 그러니까 실질적으로 단종을 접촉을 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단종하고 상당한 교분을 형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신병주 교수, 건국대 사학과 여기 와서 묵은 지 오래되었으나 나를 위로하는 이가 없었는데. 오늘 네가 찾아왔으니 그 정성이 참으로 기특하구나. 첫 만남 이후 엄흥도는 감시를 피해 밤마다 강을 헤엄쳐 건너와 노산군을 만났다고 해. 이 이야기는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야. 사실 노산군의 유배 생활에 대해 더 이상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아. 그러니까 영화는 실록이 다루지 않았던 빈칸을 채워넣는 거지. 하지만 외로운 유배지의 생활에서 엄흥도는 원통한 마음을 달래줄 유일한 인물이지 않았을까? ▲ 내 아들을 홀로 두지 마라 그리고 아직 어린 왕을 잊지 않은 사람이 있었어. 경상북도 순흥, 지금의 영주야. 이곳에서 은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인물이 있어. 그는 바로 금성대군. 세종의 여섯 번째 아들로, 문종과 세조의 친동생이야. 그는 단종이 어릴 적에 가장 따랐던 삼촌이었어. 문종은 숨을 거두기 전 금성대군을 불러 이런 말을 전했다고 해. 부디 내 아들을 홀로 두지 마라. 그것은 임금의 명이 아니라 형의 부탁이었어. 수양의 세상이 된 후 금성대군은 형의 유언을 따르기로 해. 다른 대군들이 침묵할 때 어린 조카의 편에 선 거야. 그 결과 세조에 의해서 순흥으로 귀양을 와 있는 상태야. 그런 그가 지금 무슨 일을 하려는 걸까. 군사들을 모아 한양으로 치고 올라가면 능히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이오. 금성대군은 순흥 부사 이보흠 그리고 지역의 선비들과 뜻을 모아 단종을 복위시킬 계획이야. 금성대군은 정말 수양대군 입장에서 보면 '야 쟤 진짜 왜 저래' 라고 할 정도로 집요하게 단종 복위 운동을 일으켜요. 그래서 여러 곳에 유배됐다가 순흥이라는 곳에 유배되었을 때, 순흥군수 이보흠이라는 인물하고 같이 힘을 모아서 무사들도 키우고 서울까지도 이렇게 진격을 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밀고자가 생겨서 이게 미리 이제 누설이 되어서. -신병주 교수, 건국대 사학과 금성대군이 쓴 격문 한 장이 안동 감영에 들어가고 말아. 누군가 밀고를 한 거야. 이 소식은 즉시 한양에 있는 세조에게 알려져. '이유(금성대군)가 순흥에 있으면서 몰래 군소배와 결탁하여 불궤한 짓을 도모합니다' 하고 또한 이유가 준 명주 띠를 바쳐서 증거로 삼았다. -세조실록 세조 3년 6월 27일- 결국 체포되어서 사약을 받게 돼. 금부도사가 사약을 가지고 금성대군 앞에 서. 임금이 내린 것이니 왕이 계신 곳을 향해 절을 하고 이 사약을 받으라 세조가 있는 한양을 향해 절을 하라는 거야. 금성대군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절을 올려. 그런데 한양 쪽이 아니라 북쪽을 향해서 절을 올려. 단종 쪽을 향해서. '나의 왕은 영월에 계신다' 하면서 영월을 향해 절을 하고 사약을 받았다라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신병주 교수, 건국대 사학과 이 이야기는 실록에는 적혀있지 않아. 오랜 세월 민담으로 전해져온 이야기야. 부디 내 아들을 홀로 두지 마라 금성대군은 죽는 순간까지 형의 부탁을 지켰어. 그런데 세조의 분노는 금성대군의 죽음으로도 가라앉지 않았어. 역모와 관련된 인물들은 모두 죽임을 당해. 순흥의 죽계천이라고 있는데 이 죽계천이 온통 피로 물들어. 붉은 강물이 10리를 흘렀다고 해. 그래서 죽계 그 위쪽에 그 마을 이름도 피끝마을이다. 그런 이야기가 전해올 정도로 그 지역이 완전히 쑥대밭이 되는. -신병주 교수, 건국대 사학과 ▲ 승자의 기록 금성대군이 죽었다는 소식은 영월에 있는 노산군에게도 전해져. 세조 3년 10월 21일, 실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어. 노산군이 이를 듣고 또한 스스로 목 매어서 졸하니 예로써 장사 지냈다. -세조실록 세조 3년 10월 21일- '졸하다', 대부 혹은 왕족이 죽었을 때 사용되는 말이야. 금성대군의 죽음 그리고 자신의 장인마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노산군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단종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실록에서는 굉장히 단순하게 나와요. '스스로 졸하니 예로써 장사 지냈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우리는 예를 다해서 장사 지냈다. 진짜 기만적이죠. 왕실의 책임, 수양대군의 책임을 피하기 위해서 간단하게 쓰게 된 거고요. 현재 강원도 일대에 남겨져 있는 민담들은 100% 타살이에요. 정확한 진실의 전달자는 여기서는 사료라기보다는 민담이에요. 강원도 일대에 남겨져 있는 신빙성 높은 민담들은 100% 보낸 관리에서 죽였다. 즉 세조가 단종을 죽였다라고 정확하게 계승되고 있습니다. -심용환 소장, 역사학자 후대에 적힌 연려실기술에서는 노산군의 죽음을 이렇게 이야기해. 의금부도사 왕방연이라는 자가 세조가 내린 사약을 들고 찾아와. 하지만 차마 사약을 건네지 못하고 망설였다고 해. 그때 대신 나선 사람이 하나 있었어. 통인 하나가 항상 노산을 모시고 있었는데 스스로 할 것을 자청하고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앉은 좌석 뒤에 창문으로 그 끈을 잡아당겼다. 단종이 스스로 죽었다고 기록한 것은 세조실록뿐, 그 밖의 기록에서는 모두 타살로 기록돼 있어. 내용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일치하는 게 있거든. '세조가 사약을 내렸다'는 내용이야. 음의일기라는 문헌에서는 이렇게 말해. 노산이 영월에서 금성군의 실패를 듣고 자진하였다 하였는데 이것은 당시에 여우나 쥐 같은 놈들의 간악하고 아첩하는 붓장난이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실록을 작성한 건 다음 대 왕의 신하들이야. 세조를 따르던 당시의 신하들은 왕이 조카를 죽였다는 내용을 차마 적을 수 없었던 게 아닐까. 어차피 역사의 본질은 승자의 기록이야. 역사학자가 왜 필요하냐면 이 승자의 기록과 다른 야사의 기록들을 종합해서 정말로 진실에 가까운 것은 무엇이냐. 그런 것들을 판단하는 게 아닐까. 백성들의 입을 통해서 전해져 오는 이야기야. 한때 조선의 왕이었던 소년의 시신이 동강에 버려졌어. 그의 나이 불과 열일곱. 너무 어린 나이지. 이때가 음력 10월이니까 한겨울이야. 차가운 강물 위에 옥채가 둥둥 떠다니는데, 가냘프고 고운 열 손가락이 물 위에 떠있어. 하지만 시신을 수습하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해. 노산군은 역모죄로 죽은 거잖아. 자칫 엮이기라도 하면 나도 역모야. 그런데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도 막을 수 없는 게 있었어. 어린 왕을 향한 백성들의 마음이겠지. 영월 호장 엄흥도는 이른 새벽, 세 아들과 함께 집에서 나왔어. 단종의 시신을 그냥 둘 수 없었던 거야. 주위에서는 모두 그를 말렸어. 하지만 엄흥도는 이렇게 말했다고 해. 의로운 일을 하다가 죽더라도 나는 달게 받겠다 라고. 노모를 위해 준비한 수의와 관을 짊어지고 동강으로 향해. 얼음장같이 차가운 강물에 들어가 단종의 옥체를 수습했어. 얼어붙은 시신을 펴서 관에 넣고는 지게에 지고 선산에 올라. 좋은 자리를 정해 장사를 지낸 엄흥도는 그 길로 세 아들과 함께 전국 각지로 흩어졌다고 해. 세조의 눈밖에 났으니 죽을 짓을 한 거 아니야. 모여 있으면 안 되니까 피한 거야. 사실 엄흥도의 이름은 당대에 실록에는 남아있지 않아. 그의 이름은 60년이 흘러 중종 때에 처음으로 등장해. 사람들 말이 '당초 노산군이 돌아갔을 때 온 고울이 황급하였는데 고을 아전 엄흥도란 사람이 찾아가 곡하고 관을 갖추어 장사했다' 하며 고을 사람들이 지금도 슬프고 가슴 아프게 여긴다 하였다. -중종실록 중종 11년 12월 10일- 다시 시간이 흘러 선조 때, 한 관리가 임금의 명을 받고 노산군 묘에 제사를 지내러 영월로 가게 돼. 오랫동안 방치된 묘는 황폐해져 있을 거라고 당연히 생각하잖아? 몰래 했으니까. 그런데 노산군의 묘에 도착해서는 깜짝 놀라. 묘로 이어지는 길도 잘 정리가 되어 있고, 제대로 관리가 되고 있었던 거야. 알고 보니 영월 백성들이 계속 돌봐왔던 거였어. 비통한 삶을 살다간 어린 왕을 백성들이 잊지 않고 있었던 거지. ▲ 단종(端宗) 이런 백성들의 바람이 전해진 걸까. 그 후 조선의 19대 임금 숙종은 마침내 어린 왕을 복권시키게 돼. 그리고 단종이라는 묘호를 내려. 정식으로 왕의 이름을 갖게 된 거야. 숙종은 그 이름에 담긴 의미를 이렇게 밝혀. 예를 지키고 의를 잡음을 '단(端)'이라 한다. 우리가 기억하는 단종이라는 이름은 이때 지어진 거야. 단종이 세상을 떠난 지 241년이 지난 때의 일이었어. 단종이 복권되면서 역사는 다시 쓰여져. 부인 송 씨도 다시 정순왕후로 추숭됐어. 죽음으로 단종에 대한 절개를 지킨 사육신도 충절의 상징으로 칭송을 받게 돼. 그리고 단종의 마지막을 지켜준 인물 엄흥도. 왕을 향한 충성심을 인정받아 공조판서 벼슬을 받게 돼. 훗날 고종 황제는 충의공이라는 시호를 하사하면서 그의 업적을 기렸어. '꼬꼬무'가 엄흥도의 후손을 직접 만나봤어. 충의공, 엄흥도 충신의 정려각이죠. 엄흥도 충신이 3족을 멸한다는 위험 속에서도 장롱에다가 단종을 모셨기 때문에 그 충의를 높이 표시해서 이곳에 정려각을 세우게 됐습니다. 엄흥도 선생이 단종의 어의를 가지고 공주 동학사로 왔어요. 그곳에서 생육신 김시습을 만나서 함께 초혼제를 지내고 그리고 3년상을 지냈죠. 그 이야기가 우리 엄씨들 가문에 전해오고 있습니다. -엄홍용, 엄흥도 후손 단종과 그를 왕으로 따랐던 신하들은 한때 역모를 꾀했던 반역도라고 기록됐어. 비록 긴 시간이 흘렀지만 마침내 명예를 회복할 수 있게 된 거지. 단종 사후 이제 569년이 지났어. 지금 사람들에게 단종은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 여기가 바로 단종 어소입니다. 어가라고 그러죠. 그 당시에는 이렇게 크질 않았어요. 아궁이의 불도 안 들이는 방 두 칸에 방 한 칸은 단종 임금이 사셨고 방 한 칸은 시녀 궁녀가 살았다더라. 지붕에 기와가 얹어있는 것이 참 신기하다. 얼마나 작은 초막이면 그렇게 기록이 됐겠습니까? 이 소나무가 이게 지금 단종 임금 어소를 향해서 절을 하고 있는 소나무다. 뭐 어떤 분들은 충절 소나무다. 그런데 요즘에는요. 제가 '엄흥도 소나무다' 이러면요. 꼭 나오는 말 있죠. '유해진 소나무'다. 지금은 아주 당연히 '왕사남' 때문에 '유해진 소나무입니다' 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아졌어요. 주말에는 이 데크가 버글버글해요. 하루에 기본으로 6천 명 오시니까. 세상에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어요. '&<왕사람&> 봤잖아요. 영월에 안 가면 큰일 나는 줄 알아요' 어머 이 말이요. 그렇게 고맙더라고요. 한 분이 '저요' 그러더니 '저는 여섯 번 봤어요' 이래요. 그랬더니 옆에 분이 손을 딱 들더니 '저는 일곱 번 봤어요' 이래요. 저는 그리고 많은 줄 알았죠. 이쪽 구석에 어떤 분이 손을 들더니 '저는 열한 번 봤어요' 이러는데 제가 속으로 '그렇게 볼 건 아닌 것 같은데'… 우리 영월 사람들은 단종 임금이 그냥 임금이 아닙니다. 정말 힘들고 어려울 때 좀 더 힘을 얻기 위해서 참배하고 나면 모든 게 다 잘 될 것 같은, 이런 희망이 있었고. 지금까지도 영월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갑순, 문화해설사 흔히 단종을 '비운의 왕'이라 부르잖아.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고 자신을 아껴주고 사랑해주던 할아버지 할머니도 잃었어. 든든하게 지켜줄 거라고 생각했던 아버지도 세상을 일찍 떠나. 12살에 왕위에 올랐지만 숙부에 의해 모든 걸 잃은 채 유배지에서 짧은 생을 마감했어. 그의 삶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외로움이 아니었을까. 단종 사후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많은 이들이 그의 흔적을 찾고 그를 기억하고 안타까워하고 있어. 그러니 이제는 더 이상 외롭지 않으셨으면 하는 바람이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단종은 그저 어리고 유약한 왕. 세조는 그를 대신해 왕위에 올라 많은 업적을 남겼다고 배웠어. 하지만 지금은 그 평가가 완전히 달라졌지. 그동안 우리가 배웠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잖아. 그렇지만 이제 어린 조카의 왕위를 빼앗고 죽음으로 내몰았던, 그 과정이 옳지 못했다는 걸 이제는 알잖아. 우리가 단종을 연민하고 세조에게 분노하는 이유. 누군가의 목적을 위해 약자가 억울하게 희생당하는 그런 역사는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라는 의미가 아닐까. 다시는 그런 일이 역사 속에서 반복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기억해줬으면 해.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
[꼬꼬무 찐리뷰] 아빠 꽉 잡아 거친 물살 속 놓쳐버린 딸의 손…태풍 '루사', 우리가 잊고 있던 그날의 비극
등록일2026.07.31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30일 방송된 '잊혀진 사람들 - 태풍 루사'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가수 김정민과 산다라박, 배우 박정화가 출연했습니다. (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태풍 속 결혼 때는 2002년 9월 1일 일요일. 26살 박나영 씨에게 이 날은 일생일대의 중요한 날이야. 바로 나영 씨의 결혼식 날이야. 친구의 소개로 처음 만난 나영 씨와 예비신랑은 금세 서로에게 푹 빠져버렸어. 그리고 어느 날 놀러 간 바다에서 예비신랑이 나영 씨에게 프러포즈를 했고, 나영 씨는 받아들였어. 그렇게 둘은 만난 지 3개월 만에 결혼을 결심했어. 모든 신부가 그렇듯 결혼식에 대한 로망이 있잖아. 흔히 말하는 '스.드.메'부터 결혼식장, 그리고 결혼식 날짜까지 아주 신중하게 골랐어. 그렇게 정한 날짜가 2002년 9월 1일이었어. 그날은 정말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을 만큼 날씨가 화창했어. 이른 아침 식장에 온 나영 씨는 예쁘게 신부 화장을 하고 꿈에 그리던 웨딩드레스를 입었어. 그런데 나영 씨의 표정이 좀 이상해. 어딘지 모르게 좀 초조해 보이고 왠지 모르게 좀 불안해 보여. 누군가를 기다리듯 식장 입구만 계속 쳐다보고 있어.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를 않아. 결혼식 당일날 예비 신랑이 갑자기 사라진 거야. 지금 결혼식까지 겨우 한 시간 남았어. 어느새 나영 씨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 자, 결혼식 하루 전날인 2002년 8월 31일로 돌아가 볼게. 그날 나영 씨는 예비 신랑과 함께 시댁에 가기로 했어. 식구들이 다 모여서 잔치를 열기로 했거든. 나영 씨의 시댁은 경상북도 김천이야. 출발 직전에 나영 씨가 시댁에 전화를 걸었어. 전화를 받은 건 예비 신랑의 형님, 그러니까 아주버님이었어. 아주버님, 저희 지금 가려고요 제수씨, 안 돼! 여기 절대 오지 마! 그러더니 전화가 뚝 끊겨버린 거야.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아. 대체 어떻게 된 걸까? 나영 씨, 불안한 마음에 TV를 켜봤어. 태풍 루사가 오늘 오후 남해안에 상륙하면서 우리나라 전체가 태풍의 직접 영향권에 들어섰습니다. 높은 파도에 강풍으로 방파제 위로 넘쳐난 바닷물이 도로 위를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강풍의 높이 2m, 길이 10여m의 담장이 붕괴되고 그 옆의 승용차 6개도 파손됐습니다. 2002년 8월 31일, 태풍 '루사'가 한반도를 강타했어. 그날 전국에는 엄청난 강풍이 불고 폭우가 쏟아졌어. 그리고 나영 씨의 시댁도 태풍 때문에 난리가 났던 거야. 산사태가 나고 침수가 된 지역에 시부모님이 계시고. 걱정이 되니까 연락은 안 되고 상황을 알 수는 없고. 그때부터 계속 재난대책본부 전화하고 파출소 전화하고 동네 어르신들 집에 전화하고. 전화를 못 잡고 진짜 수십 통, 수백 통을 했어요. 하나도 통화가 안 되는 거야. 그 어떤 곳도. -박나영 나영 씨와 예비신랑은 시댁 식구 걱정에 뜬 눈으로 밤을 새웠어. 결국 예비신랑이 나영 씨에게 이렇게 말을 했어. 안 되겠다. 내가 가서 부모님 모셔올 테니까 너 먼저 식장에 가 있어. 결혼식 직전 예비신랑은 시댁으로 향했고 나영 씨 혼자 결혼식장에 가게 됐던 거지. 그렇게 화장까지 다 마쳤는데 예비신랑마저 연락이 두절된 거야. 메이크업하는 사람이 나영 씨에게 신부님 제발 그만 좀 우세요. 지금 화장을 몇 번째 고치는지 모르겠어요 라고 말해.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벌써 화장을 스무 번 가까이 고쳤어. 결혼식장에서는 '신랑님이 결혼식 시작하기 10분 전까지 도착을 안 하시면 결혼식을 진행을 못할 수도 있다' 그렇게 얘기하니까 '아 이걸 못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들고. -박나영 어느덧 결혼식까지 남은 시간 단 30분이야. 식을 취소해야 하나, 하던 그 순간! 나영아, 나영아! 정말 미안해! 나 왔어! 예비신랑 목소리야. 그런데 예비신랑의 모습을 본 나영 씨가 깜짝 놀라. 머리는 다 헝클어져 있고 옷은 다 젖어있는 거야. 근데 그 지역들 다리가 그 교량만 남겨놓고 주변이 다 떠내려가거나 교량 전체가 떠내려가거나 진입이 불가능한 상태였었거든요. 아예 김천 진입을 못하게 하니까. 들어가는 입구부터 다 침수가 돼가지고. 그냥 차를 세워놓고 걸어갔었대요. 갈 수 있는 데까지를. 그러니까 세워놓고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본다고 자기가 걸어갔었다 하더라고요. 근데 얼마 못 가고 되돌아오긴 했대요. 옷도 다 젖었고. 아주 폐인 돼서 왔더라고요. -박나영 아예 진입조차 못하고 돌아온거야. 다행히 극적으로 예비 신랑이 도착해 결혼식을 올릴 준비를 했어. 그런데 아직 시부모님이 오지 못했어. 게다가 지금 생사도 모르잖아. 어쩌면 결혼식 날이 시댁 식구들의 장례식 날이 될 수도 있는 거야. 그렇게 결혼식이 마무리되고 신랑 신부가 퇴장하던 그 순간. 나영 씨가 비명을 지르며 버진 로드에 그대로 넘어졌어. 일어나서 보니까 시부모님과 아주버님이 쫄딱 젖은 채 버진 로드 끝에 서 있는 거야. 귀신 본 줄 알았어요. 저는 정말로. 그래서 드레스 자락을 다 밟고 넘어졌어요. 너무 놀라서. 생사를 몰랐잖아요. 그때까지는. 그러니까 계시니까 막 울고 넘어져서 울고 불고 난리가 났죠. -박나영 어떻게든 그 결혼식에 참석을 하시겠다고, 쏟아지는 비를 맞으시면서 산비탈을 오르고 개울을 건너서 오셨다고 해. 무려 4시간이 넘게 말이야. 그야말로 목숨을 건 여정이었던 거지.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찍은 결혼식 사진이야. 원래 하객이 300명 가까이 오기로 했지만 이날 온 하객은 단 30명이었어. 생애 단 한 번뿐인 결혼식 날이 평생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악몽의 날이 됐다고 해. 결혼한 지 24년이 지났잖아. 그동안 이 결혼식 사진을 단 한 번도 꺼내본 적이 없대. 그리고 결혼기념일도 챙긴 적이 없대. 누구보다 가장 행복해야 할 그날을 눈물의 결혼식으로 만들었던 비바람의 정체, 태풍 루사. 혹시 태풍 루사에 대해 기억나는 게 있어? 2002년 8월 31일 엄청난 비바람을 몰고 대한민국에 상륙한 태풍 루사는 전무후무한 기록들을 남겼어. 전국에 실종자 8명, 사망자 238명으로, 21세기에 발생한 태풍 중에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낸 태풍이야. 그리고 재산 피해액은 5조 1479억 원. 역대 태풍 재산 피해액 중 1위를 차지했어. 오늘은 그 태풍 루사가 한반도를 강타했던 바로 그날.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볼 거야. ▲ 수마에 삼켜진 강릉시 2002년 8월 30일 밤. 이 엄청난 위력의 태풍 루사는 우리나라 제주 해상으로 접근해. 제15호 태풍 루사가 빠른 속도로 북상하면서 제주 지역에는 강한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습니다. 기상청은 오늘 밤과 내일 오전 사이가 최대 고비가 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태풍 루사 반경이 최대 500km거든. 서울에서 부산까지 직선거리는 약 320km래. 그러니까 지금 이 반경 500km라는 건, 우리나라를 전부 덮고도 남을 대형 태풍인 거야. 그 말은 전국이 태풍의 영향권이 된다는 거지. 그리고 그중에서도 루사의 공격을 직격탄으로 맞은 곳이 있었어. 강원도 강릉시야. 그날 밤 강릉에 살던 20살 김진호 씨는 뉴스로 태풍 소식을 들었어. 그때만 해도 진호 씨는 사실 별일 없겠지 싶었대. 그전에도 강릉에 몇 번의 태풍이 불었지만 큰일 없이 지나갔거든. 그런데 그날따라 왠지 기분이 이상했던 진호 씨는 잠들기 전 이걸 꺼내 들었어. 무전기. 진호 씨는 아마추어 무선기사였어. 무선기사들은 자연재해 혹은 비상사태로 통신이 어려운 상황이 생겼을 때 무전으로 통신을 할 수 있게 도움을 주는 거야. 그날 밤 진호 씨는 이 무전기를 켜놓고 자기로 했어. 태풍이 불 때 혹시라도 통신이 필요한 일이 생기지 않을까 싶었던 거지. 그날은 켜고 잤어요. 늦은 밤에는 끄고 자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혹시나 문제가 되면 통신이 또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 집에 있는 무전기 건전지들을 좀 찾아서 충전을 시켜놨었던 기억이 나요. -김진호, 당시 강릉시 거주 아마추어 무선 기사 그리고 다음 날인 2002년 8월 31일 아침. 메이데이, 메이데이! 현재 수신되는 분 계십니까? 갑자기 울리는 무전 소리에 진호 씨가 잠에서 깨. '메이데이' 조난자가 구조 신호를 보내는 거야. 아주 다급한 상황이라는 거지. 현재 신호 수신되고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오버. 아, 예. 지금 강물이 범람해서 차들이 고립됐습니다. 물이 턱까지 차올랐어요. 빨리 신고 부탁드립니다. 이 무전기 속에 대화를 들은 진호 씨.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됐어. 그 시각 강릉의 대동마을에 사는 42살 연규태 씨는 가족과 집에 있었어. 그의 가족이야. 6년 전 규태 씨는 지인이 소개해 준 아내 박경숙 씨와 결혼했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딸. 첫째 딸 7살 은미와 둘째 딸 4살 은희까지. 보기만 해도 그냥 웃음이 나는 화목한 가정이야. 아내와 막내 은희는 몸이 조금 불편했지만, 네 식구는 서로를 의지하며 오순도순 함께 살고 있었어. 그날 아침 규태 씨의 가족들은 다 같이 거실에 모여 있었어. 8월 31일 그날이 막내 은희의 네 번째 생일이었어. 규태 씨는 은희의 생일을 기념해서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어. 바로 가족 여행. 은희가 며칠 전부터 바다에 가고 싶다고 했거든. 온 가족이 설레는 마음으로 바다에 갈 채비를 하던 그때! 갑자기 집 안으로 물이 막 들어오더니, 발 밑으로 차 오르기 시작하는 거야. 규태 씨가 무슨 일인가 싶어 급히 밖으로 나갔어. 그리고 그의 눈엔 이런 광경이 펼쳐져. 강릉시 전체가 물바다야. 거리엔 버려진 차들이 물에 둥둥 떠다니고 있어. 허리까지 불어난 물에 사람들은 겨우 몸을 움직여. 태풍 온다고 했는데 그렇게 크게 올 줄 몰랐죠. 와봐야 조금 오고 말겠지 이랬는데, 갑자기 내려서 비가 그리 오기는 처음이라고. 갑자기 쏟아지는 건 그때 처음이라고. -염규태, 당시 강릉 대동 마을 주민 깜짝 놀란 규태 씨는 가족들에게 소리쳤어. 다 나오라고 그랬죠. 물이 찼으니까. 일단 대피를 하고 봐야 되니까 다 나오라 그랬죠. 건너마을에는 조금 지대가 높으니까 가려고 했어요. -염규태, 당시 강릉 대동 마을 주민 일단 규태 씨가 가족을 차에 태워서 고지대 쪽으로 대피하기 시작해. 아까 강릉이 루사의 공격을 직격탄으로 맞았다고 했잖아. 그 이유를 알려줄게. 1991년부터 2020년까지 30년간 우리나라 장마철의 평균 강수량 약 356.7mm라고 해. 사람 종아리까지 올 정도야. 그런데 이날 강릉에 하루 동안 쏟아진 비는 870.5mm야. 이건 사람 허리까지 차오르는 양이야. 이 기록은 우리나라 일일 강수량 1위였다고 해. 우리나라에서 기상관측을 처음 시작한 게 1904년이었대. 그러니까 올해 기준으로 122년 동안 역대 최고 일일 강수량인 거야. 그러면 왜 유독 강릉에만 비가 많이 온 걸까? 보통 태풍은 편서풍을 타고 동쪽으로 빠져나가면서 세력이 약해져. 그런데 그해엔 이례적으로 우리나라 동쪽에 북태평양 고기압이 장벽을 이루고 있었어. 이 태풍이 이 장벽에 막혀버린 거지. 그래서 루사는 완전히 빠져나가기까지 무려 22시간이 걸린 거야. 이때 루사 때문에 강릉에는 따뜻한 바람이 불게 돼. 그런데 이 따뜻한 공기가 태백산맥에 부딪혀. 이 따뜻한 공기가 태백산맥을 타고 올라가면서 위에 있는 찬 공기랑 만나는 거야. 그럼 어떻게 된다? 엄청난 수증기, 곧 거대한 비구름이 만들어지는 거야. 그리고 이 태백산맥 아래에 바로 강릉시가 있었어. 그래서 강릉에 폭발적인 비가 쏟아졌던 거지. 이날 쏟아지는 비에 강릉 곳곳이 침수되고 있었어. 산사태가 일어나고 도로가 무너져 내리기까지 했어. 강릉시 전체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된 거야. 그 시각. 아침부터 또 쉬지 않고 전화가 울리는 이곳. 바로 강릉 소방서야. 얼마나 많은 신고 전화가 왔는지 이거 다 받지도 못할 정도였대. 당시 경력 7년에 열정 가득했던 권영각 소방대원도 현장으로 나갔어. 그가 향한 곳은 장현마을이라는 곳이야. 거센 비를 뚫고 마침내 권영각 대원이 현장에 도착해. 그런데 마을 입구에 들어선 순간 권 대원은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대. 현장 상황을 보니까 주택지가 거의 수몰이 돼있는 상황이었어요. 계속 물 수량은 많아지고 물살도 세지는데 주택을 찾지 못하는 게 가장 큰 어려움이었습니다. 진입할 당시는 저희 한 배 이상 정도 허리춤 이상의 물이 있었는데 저희가 진입하는 과정에 잠깐 넘어지면 그냥 쓸려서 내려가는 정도. 내리는 비에 눈이 따가워서 시야가 확보가 안 될 지경이었어요. 구조 현장에서 눈으로 물체도 보고 해야 되는데 고개를 못 듭니다. 따가워서. 비가 그 정도로 많이 왔습니다. -권영각, 당시 현장 출동 소방대원 쏟아지는 폭우가 순식간에 장현마을을 통째로 집어삼킨 거야. 그 안에서 권영각 대원이 목숨을 걸고 구조작업을 벌이기 시작해. 그리고 곧바로 시청엔 비상대책본부가 세워져. 그런데 그때. 비상사태입니다. 지금 오봉댐 수문이 안 열린답니다. 오봉댐. 강릉에 홍수가 나면 저지대의 피해를 막는 역할을 하는 곳이야. 그런데 이 오봉댐의 수문이 안 열린다는 거야. 쏟아지는 비 때문에 강릉 일대가 정전이 됐거든. 이 오봉댐은 강릉 시민들의 식수를 제공하는 댐이야. 무려 물 1,400만 톤을 저장하고 있어. 오봉댐의 만수위는 121m야. 지금 수위가 118.5m야. 그러면 만수위까지 고작 2.5m 남은 거야. 여의도 면적을 1m 깊이로 채우는데 약 290만 톤이 필요하대. 그런데 이 오봉 저수지의 용량이 1,400만 톤이야. 1,400만 톤이면 여의도 전체 면적의 5배가 차는 양이야. 이런 양의 물이 쏟아진다고 생각해 봐. 오봉댐이 범람해서 터졌다 그러면 강릉시 전체가 없어지는 거거든요. 그래서 문을 열 수밖에 없죠. 수문이 지금 작동이 안 된다고 해서, 그러면 '다이너마이트로 밑을 터뜨려라' 그렇게 해서라도 물을 빼라 할 정도였어요. -김오경, 당시 강릉 부시장 이 오봉댐이 터지면 강릉시 전체가 물에 휩쓸려 떠내려가. 그러니까 지금 강릉시가 통째로 사라질 수도 있는 거야. ▲ 사라질 위기에 놓인 강릉시 그 시각 아마추어 무선기사 진호 씨는 강릉 시내로 가고 있었어. 아까 강릉 일대가 정전이 됐다고 했잖아. TV나 라디오가 안 되는 건 물론이고 전화까지 안 터지는 상태야. 그래서 진호 씨가 무선기사로서 도움이 될 게 없을까 직접 나선 거야. 시내에 도착해 보니까 이건 뭐 그냥 전쟁터나 마찬가지였어. 일단 제일 먼저 눈에 보이는 게 '저거 차 지붕 아니야?' 였어요. 나무가 이렇게 있으면 차가 쓸려 내려와서 거기 부딪혀 있고, 차 지붕만 물에 찰랑찰랑 보일락 말락 할 정도. 그 차 위에 한 대가 더 엎어져 있는 상황. 그러니까 두 대가 포개져 있는 거죠. 우와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김진호, 당시 강릉시 거주 아마추어 무선 기사 진호 씨는 허리까지 차오른 물을 헤쳐가면서 수재민들을 돕기 시작했어. 그런데 그때. 웬 사이렌 소리와 함께 안내 방송이 들려왔어. 그런데 시내가 난리통이라 뭐라고 하는지 안 들려. 진호 씨는 무전기로 상황을 물었어. 여기는 강릉 시내, 강릉 시내입니다. 방금 사이렌이 울렸는데 무슨 일입니까? 여기는 강릉시청 상황실. 지금 오봉댐이 붕괴될 위험이 있습니다. 지금 바로 대피하십시오. 그 순간 진호 씨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어. 그리고는 소리쳤어. 여러분 지금 대피해야 합니다! 다들 고지대로 올라가세요! 라고. 정말 바로 뒤돌아서 전력 질주를 하면서 뛰는데. 물이 이만큼 오니까 뛰어지질 않더라고요. 그러면서 나와 계신 분들한테 '대피하세요'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뛰었던 기억이 나요. 정말 그때 당시는 진짜. 다시는 겪어보고 싶지 않은 그런 순간이었던 것 같아요. 너무 무서웠어요. -김진호, 당시 강릉시 거주 아마추어 무선 기사 그리고 진호 씨는 사람들과 함께 전력을 다해 대피하기 시작했어. 규태 씨 역시 가족들과 함께 차를 타고 고지대로 대피하고 있었어. 그런데 그때! 갑자기 저쪽에서 도랑이 터지면서 물이 쓸려가는 바람에 차가 갑자기 팍 밀렸거든요. 갑자기 물이 확 불으니까. 차가 뜨면서 좀 이따 보니까 컨테이너도 떠내려오고. 물이 허리만큼 오니까 사람 막 밀어내는 것처럼. 그냥 세게 미는 것처럼. 더군다나 제가 이 오른쪽을 못 써요. 장애가 있다 보니까 좀 힘도 부치더라고요. -염규태, 당시 강릉 대동 마을 주민 차가 물살에 휩쓸리자 규태 씨가 차 밖으로 나가려 문을 열었어. 그런데 물살 때문에 문도 열리지가 않아. 창문을 통해 먼저 벗어난 규태 씨가 두 딸과 아내를 차 밖으로 간신히 꺼냈어. 그리고 한쪽 팔엔 두 아이를, 다른 쪽 팔엔 아내를 안은 채 그곳을 벗어나기 시작해. 물은 허리춤까지 차오른 데다 물살이 너무 세서 발을 내딛기도 힘든 상황이야. 안간힘을 써서 앞으로 나가는데 아내의 손에서 힘이 점점 풀리는 게 느껴지더래. 여보 얼마 안 남았어. 여기만 벗어나면 되니까 조금만 기운 내. 그런데 그때 규태 씨가 발을 내딛는 순간, 땅이 푹 꺼지면서 그대로 중심을 잃으면서 팔에 힘이 풀렸대. 다행히 두 딸은 규태 씨 품에 안겨 있었어. 하지만 안고 있던 아내가 보이지 않아. 도랑과 도랑 사이에, 물이 갑자기 깊어지거든요. 물이 제 키만큼 되더라고. 그래서 훅 다 들어가니까 나도 눈을 떠야 하는데, 이렇게 하는 사이 애 엄마는 떠내려가는 거죠. -염규태, 당시 강릉 대동 마을 주민 고개를 돌려보니 저 멀리 아내가 급류에 휩쓸려가고 있어. 규태 씨는 그 모습을 눈앞에서 볼 수밖에 없었어. 여보. 은미 엄마! 미안해. 내가 정말 미안해. 아내를 구할 새도 없이, 양팔에 두 딸을 다시 꼭 안고 이렇게 외쳤어. 은미야 은희야! 아빠 꽉 잡고 있어야 돼. 절대 놓치면 안 돼. 규태 씨가 퍼붓는 비를 맞으면서 물길을 간신히 헤쳐 나오고 있었어. 정신없이 걷던 그때. 규태 씨가 아이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는데, 둘째 딸 은미가 보이질 않아. 언제 어디서 놓친 건지도 모르겠어. 첫째 딸 은미를 꼭 안은 채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회오리 치는 물속에서 은미까지 놓치고 말아. 망연자실한 규태 씨는 순간 온몸에 힘이 빠져 버렸어. 급기야 규태 씨도 거센 물살에 떠내려가고 말았어. 그렇게 얼마나 떠내려갔을까. 규태 씨가 정신을 차렸을 땐, 집에서 1km 정도 떨어진 양식장이었어. 규태 씨는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지만 아내와 두 딸의 생사는 알 수 없어. 그때부터 그는 가족들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어. 그 시각, 강릉엔 비가 쏟아지다 못해 들이붓고 있었대. 강릉시청 대책본부 직원들 전부 발로 뛰면서 오봉댐 수문을 열 방법을 찾는 중이야. 그런데 그때. 댐을 관리하는 담당자가 오더니 얼굴이 사색이 된 채 소리쳐. 오봉댐 수문이 열렸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드디어 드디어 열렸잖아.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있다는 거야. 다행히 수문이 열리고. 그런데 하루에 비가 오는 양이 875mm라면, 우리가 상상을 초월한 비예요. 이거는 물동이로 물을 이렇게 붓는 거예요. 오봉댐의 물이 차고 있는 거죠. 그러니 건설과장님이 들어와서 '최대 수위까지 1m 정도 남았습니다' -김오경, 당시 강릉 부시장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수문으로 빠져나가는 물보다 댐으로 밀려 들어오는 물이 훨씬 더 많은 거야. 그래서 지금 오봉댐의 수위가 119.6m나 찼어. 만수위가 1.4m밖에 안 남은 상황이야. 그때 직원 한 명이 뛰어오더니 이걸 내밀었어. 바로 대피명령서야. 살면서 시 전체 대피령, 들은 적 있어? 이건 전쟁이 일어났을 때나 생길 만한 상황이야. 그야말로 전례 없는 사상 초유의 사태인 거야. 지금 이 판단을 해야 하는 사람, 바로 강릉시장이야. 하지만 섣불리 사인을 하지 못해. 지금 강릉시 상황이 어떻다고 했지? 물바다가 됐잖아. 비가 엄청나게 계속 오는 데다가 물살도 너무나 세서 젊은 사람도 그냥 서 있기는 힘들어. 게다가 정전까지 돼서 시내가 온통 깜깜하단 말이야. 이 상황에서 시민 전체가 대피한다고 생각해 봐. 더 큰일이 벌어질 수도 있어. 직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고 있어. 긴 시간 심사숙고하던 그가 결의에 찬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어. 오늘 안에 태풍 지나갑니다. 기다립시다. 과연 이날 강릉시 사람들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 남편과의 마지막 통화 그 시각 30살 이윤정 씨는 32개월 된 딸과 함께 경남 삼천포에 있었어. 그때 윤정 씨가 있던 곳도 엄청난 바람이 불었지만 다행히 비가 많이 오지는 않았대. 그런데 문제는 윤정 씨의 남편이었어. 윤정 씨의 남편. 그는 강릉 23보병사단 철벽부대에서 중대장으로 근무하는 김영곤 대위야. 23사단 철벽부대는 복잡한 동해안의 경계를 책임지는 부대야. 게다가 이 부대는 아주 큰 일을 겪은 뒤 새로 창설된 곳이었어. 1996년 26명의 북한 특수부대원들이 침투했던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 그 뒤로 생긴 곳이기 때문에 그만큼 아주 중대한 임무를 맡는 부대인 거지. 김영곤 대위, 그런 부대의 중대장인 거야. 그는 장병들과 상관으로부터 큰 신임을 받았다고 해. 이 얘기까지 들었을 때 이분 어떤 분인 것 같아? 김 대위는 평소 힘든 일을 도맡아서 할 만큼 의협심이 강한 사람이었대. 그리고 나라에선 훌륭한 군인이자 집안에선 듬직한 남편. 그리고 또 엄청난 딸바보였어. 김영곤 대위는 8개월 전인 2002년 1월, 강릉 철벽부대로 발령이 났어. 그런데 가족이 함께 살 사택이 아직 나오질 않은 거야. 그래서 아내인 윤정 씨는 딸과 함께 고향인 경남 삼천포로 내려가서 사택이 나올 날만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있는 거야. 태풍이 오던 2002년 8월 31일 밤. 윤정 씨는 온통 남편 걱정뿐이야. 매일 저녁만 되면 전화를 하던 남편이었는데 오늘따라 연락이 없어. 걱정되는 마음에 잠도 못 이루던 그때, 윤정 씨의 휴대전화가 울려. 윤정아 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 여기 지금 장난 아니다. 그토록 기다리던 남편의 전화야. '여기 장난이 아니다' 할 때는 밤 10시 정도 됐었던 것 같고. 여기 물이 많이 잠겨서 사병들 다 안전한 데로 피신했다, 다 피신하고 돌아가는 길이다…근데 그때 저는 강원도가 그 정도인 줄 몰랐거든요. 그때 정전이 돼서 TV를 못 봤어요. 그 전화를 받고 그래도 제가 엎드려서 기도를 했던 것 같아요. 별일 없게 해 달라고. -이윤정, 김영곤 대위 아내 김대위는 사병들을 전부 안전하게 대피시키고 돌아가고 있다는 거야. 그 얘기를 들은 윤정 씨는 그나마 마음을 놓을 수가 있었어. 윤정 씨가 남편과 전화를 끊은 그 무렵, 오봉댐 수위는 어느새 120.2m까지 차올랐어. 오봉댐의 만수위가 121m잖아. 범람까지 고작 80cm 남은 거야. 0.8m. 그러니까 대책본부에는 숨 막히는 침묵만이 흐르고 있어. 그때 댐 담당자가 거친 숨을 내쉬며 들어와. 시장님! 오봉댐의 수위가 내려가고 있습니다. 비가 멈추고 있다고요. 창밖을 보니까 비가 점점 잦아들고 있어. 이대로라면 금세 물이 빠질 거야. 그때가 밤 12시를 넘긴 시각이야. 이제 살아났다. 강릉시가 이거 하느님이 보우했다. '비가 줄고 오봉댐 수위가 좀 내려가고 있습니다.' 강릉시의 경우는 비가 딱 그치면 물이 금방 바다로 쭉 빠집니다. -김오경, 당시 강릉 부시장 무려 22시간 동안 모든 걸 쏟아부었던 루사는 전라남도 고흥을 시작으로 전북 남원, 무주, 경북 상주, 충북 제천을 거쳐 동해 앞바다 부근에서 소멸했어. 태풍이 지나간 다음 날 아침인 2002년 9월 1일. 강릉의 하늘은 거짓말같이 맑았어. 하지만 하늘 아래 상황은 180도 달랐어. 빗물이 빠져나간 강릉 일대는 전쟁터를 방불케 할 만큼 쑥대밭이 됐어. 콘크리트, 아스팔트도 다 갈라지고. 침수된 차나 가구들이 도로 곳곳에 처박혀 있고, 집이고 뭐고 전부 쓸려가서 폐허가 됐어. 제가 시내를 나가서 다니면서 본 풍경은 모든 게 진흙 펄밭이었어요. 완전히 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다 하얗게 펄이 묻어있었고. 집에서 꺼낸 어떤 집기류들, 가구들 하나도 쓸 수 있는 게 없을 정도로. 그 정도로 많은 물이 밀고 들어오면서 그 흙을 몰고 왔으니까. 거의 뭐 도로가 펄밭 그 자체였죠. -김진호, 당시 강릉시 거주 아마추어 무선 기사 할아버지는 밖으로 밀려 나가서, 저쪽 바깥에 감나무 밑에 목이 걸려서. 그래도 할아버지는 동네 사람들이 꺼내셨거든요. 근데 할머니는 여기 그냥 묻혀서 119 구조대도 못 오고 사람들이 와서 굴착기 한 대 끌고 와서 시신 찾았어요. -동네 주민 이날 강릉에서 집과 재산을 잃은 수재민만 2만 3천여 명이었대. 그리고 전날 새벽까지 구조작업을 했던 권영각 소방대원은 아침부터 펄밭이 된 강릉 일대에서 여전히 수색작업을 하고 있어. 실종자를 찾는 거야. 이날 강릉에서만 5명이 실종이 됐고 48명이 사망을 했어. 산사태로 인한 주택을 덮쳐서 주택 내에서 시신도 나오고 이런 경우도 많이 있었습니다. 바다까지 떠내려가서 바다에서도 찾지도 못하고, 차량 내에서 발견되신 분들도 있고.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습니다. -권영각, 당시 현장 출동 소방대원 피해가 많이 발생한 건 오전 출근 시간대였어. 그래서 생업을 위해 출근하던 직장인, 학교를 향하던 학생들이 순식간에 들이닥친 수마에 휩쓸려 행방불명되거나 목숨을 잃었어. 그리고 그날 아침, 다급한 전화벨 소리가 울린 건 윤정 씨의 휴대전화였어. 시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온 거야. 아침에 어머니한테 휴대전화로 전화가 와서 '영곤이가 연락이 안 된단다' 이렇게 다급한 소리 듣고. 이게 무슨 소리지? 갑자기 뭐지? 그때부터 저는 사실 강원도까지는 어떻게 왔는지 기억이 잘 안 나요. -이윤정, 김영곤 대위 아내 윤정 씨가 강릉으로 도착하자 부대 관계자들이 다 나와 있어. 참담한 표정으로 윤정 씨에게 말해. 죄송합니다. 중대장님이 어젯밤 실종되셨습니다. 어제 분명히 다 대피시키고 잘 돌아간다고 했잖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전화를 끊고 김영곤 대위는 다른 사병과 함께 교통통제를 하러 가고 있었어. 그런데 그때, 대피하던 마을 주민이 김영곤 대위를 붙잡더니 마을회관에 몸이 불편한 노부부가 고립돼 있으니까 구출을 좀 해달라고 한 거야. 김 대위가 어둠 속에서 등불을 비춰서 살피는데, 보니까 한 10여 미터 떨어진 곳에 마을회관이 하나 있어. 잘 들어보니까 희미하게 살려달라는 구조 요청 소리가 들려. 김영곤 대위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곧바로 구조 장비를 챙기기 시작해. 그때 함께 있던 병사들이 중대장님, 저희가 가겠습니다 라고 말했어. 그러자 김 대위는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해. 아니다. 위험하니까 내가 먼저 들어가서 상황을 보고 신호한다. 본인은 그건 전혀 계산이 안 했던 것 같아. 남편은 분명히 그분들이 살려달라고 했을 때 자기 부모님을 먼저 생각했을 거예요. 항상 내 부모님이면 어떨까? 내 동생이면 어떨까? 내 자녀면 어떨까? 이런 마음으로 항상 먼저 나서고 일을 하니까. -이윤정, 김영곤 대위 아내 김 대위는 가슴 높이까지 차오르는 물살을 헤쳐가며 난간을 잡고 마을회관으로 이동했어. 얼마나 지났을까? 대기하던 병사들 눈에 어둠 속에서 무언가 보여. 다행히 마을회관에서 구조된 노부부가 물살을 헤치며 나오고 있어. 그리고 병사들이 달려가서 노부부를 부축했어. 근데, 김영곤 대위는 보이지 않아. 김 대위는 마을회관에서 그 노부부를 구조하던 중에 갑자기 불어닥친 강풍과 밀려오는 물 때문에 중심을 잃고 휩쓸려가고 말았던 거야. 윤정 씨와 통화를 끝낸 직후 벌어진 일이었어. 사실 그때는 아무것도 안 들렸어요. 모든 게 받아들여지지가 않았죠. 그때는 이게 현실이 진짜 맞나? 안 와닿았죠. 제발 살아만 있어 달라는 생각밖에 없고. 그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디 다쳐서 부끄러워서 못 나오나. 내가 싫어서 가나. 이런 생각도 들고. 만약에 차라리 어디라도 살아있어서 나중에라도 왔으면 좋겠다. -이윤정, 김영곤 대위 아내 부대 사람들이 총동원돼서 김영곤 대위를 찾고 있었어. 그렇게 윤정 씨가 남편을 찾아 헤맨 지 벌써 나흘째. 어디에도 김 대위는 보이지 않았어. 9월 1일 날 올라가서 2일, 3일, 4일을 그때 어떻게 보냈는지 생각이 안 나요. 그냥 바다를 보면서 나도 뛰어 들어갈까. 내가 뛰어 들어가야 나타날 거냐고. 왜 안 나타나냐고… 사람들 다 지쳐갈 때, 그때 마지막 4일 날. 그때에서 저 멀리서 찾았다고, 영곤이 찾았다고. 아빠 친구가 뛰어와서… -이윤정, 김영곤 대위 아내 고인을 떠나보내는 영결식장에선 내내 통곡이 이어졌습니다. 가족도 친구도 부대 장병도 모두 울었습니다. 부인은 할 말을 잃었습니다. 얼마나 사랑했고 믿었던 남편인데 고인의 죽음이 끝내 믿기질 않습니다. 아빠의 죽음을 이해 못 하는 4살배기 외동딸, 영결식 내내 천진한 모습이어서 보는 이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중 시신을 보고도 안 믿어졌어요. 진짜 이 사람이 내 남편 맞나? 애 아빠 맞나? 영정사진 앞에서 우리 아빠라고. 우리 애도 아빠의 죽음을 안 받아들였고. 미안하다는 소리밖에 못했어요. 나를, 우리를 왜 두고 가냐고. -이윤정, 김영곤 대위 아내 김영곤 대위는 그렇게 사랑하는 가족의 곁을 떠나 국립현충원에 안장됐어. 이 두 사람, 여느 부부보다 각별한 사이였다고 해.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건 10년 전, 고3 때야. 그날은 윤정 씨의 생일이었어. 학교가 끝나고 동네 냇가에서 조촐하게 생일 파티를 하는데, 옆에 있던 남학생들이 오더니 윤정 씨의 생일을 축하해 준 거야. 그중 한 명이 바로 영곤 씨였던 거지. 전혀 모르는 사이였는데 생일 때 그렇게 만난 인연이 되어서. 생일 선물처럼 다가온 것 같아요. 첫인상이 개구졌지만 잘 생겼었어요. 잘생기고 굉장히 따뜻하고. 남편은 시내에 사시는 분이고 저는 시골 사람이고. 촌 애를 데리고 와서 돈가스도 사주고 할 정도로, 너무 잘하다 보니까… -이윤정, 김영곤 대위 아내 그 뒤로 계속 연락을 주고받던 두 사람은 친구에서 연인이, 그리고 부부가 됐어. 저는 사귀면 결혼하는 줄 알았어요. 친구로 만났지만 연인으로 지냈기 때문에 당연히 결혼을 생각했고. 지금도 그래요. 지금도 문 열고 들어올 것 같고, 전화 오면 '정아'하고 이름 부를 것 같고. 타이머신이 있으면 진짜 돌아가고 싶어요. 헤어지지 않았으면, 떨어져 살지 않았으면… -이윤정, 김영곤 대위 아내 사택이 나와 함께 사는 날만을 기다리던 윤정 씨가 남편을 마지막으로 본 건, 태풍 루사가 닥치기 보름 전인 8월 15일. 그때가 남편과 무려 8개월 만의 만남이었다고 해. 오랜만에 가족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헤어지기 전, 영곤 씨가 윤정 씨에게 이렇게 얘기했다고 해. 윤정아 우리 조금만 참자. 조금만 참으면 우리 금방 같이 살 수 있을 거야. 이 말이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거지. ▲ 남겨진 사람들의 아픔 그리고 사라진 가족을 찾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어. 두 딸과 아내를 잃어버린 규태 씨. 물살에 떠내려간 가족들을 찾으러 강릉 바닷가를 전부 돌아다녔지만 보이질 않아. 그때 규태 씨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와. 여기 강릉 경찰서입니다. 아내분 성함이 박경숙 씨 맞으시죠? 아내분 찾았습니다. 그다음 날 바로 찾았더라고. 바닷가에서 파도에 밀려 나온 걸 보고. 혹시 맞나 사진을 보냈더라고. 내가 먼저 보고 동생이 보고는 맞다고 그래서 갔죠. 동해의 병원으로 갔죠. 잠자는 것처럼 가만히 있더라고요. -염규태, 당시 강릉 대동 마을 주민 규태 씨 아내는 차디찬 시신으로 돌아왔어. 규태 씨는 그 뒤에도 강릉 바닷가와 하천을 떠돌며 아이들을 찾아 헤맸어. 제발 어디에라도 살아있어 달라는 마음으로. 두 딸 은미와 은희는 무사했을까? 태풍 루사가 닥쳤을 때 실종됐던 염은미 양이 37일 만에 마을 주민의 논에서 발견됐다. 마을 주민은 이날 논바닥에 누운 채 숨져있는 염 양을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당시 뉴스 보도 중 제정신이 아니다고 봐야죠. 제정신이면 이상하지. 내가 손을 놓친 게 있기 때문에, 그 당시 물살이 세 가지고 나가는 걸 내가 봤기 때문에. 손만 조금만 뻗어서는 살 수 있었는데… -염규태, 당시 강릉 대동 마을 주민 첫째 딸 은미는 근처 논에서 발견이 됐어. 그리고 한 달이 더 지나서 막내 은희도 발견이 돼. 한순간에 눈앞에서 가족을 모두 잃어버린 규태 씨. 그의 곁엔 수마로 얼룩진 가족들의 유품만이 남았어. 남겨진 가족들의 슬픔. 8월 31일은 둘째 은희의 생일이었잖아. 꿈꿨던 바다 여행도 가지 못하고, 그렇게 그날은 4살 은희의 마지막 생일이 됐어. 규태 씨는 아내와 아이들의 유골을 집 근처에 뿌렸다고 해. 그리고 지금까지도 매일 지니고 다니는 게 있대. 딸들의 사진이야. 항상 보고 있으니까요. 항상 마음이 있으니까 보지. 마음이 없으면 보겠어요. 지금 딸이 자랐으면 성년이 돼서 같이 다닐 수 있을 텐데. 가끔 문뜩 생각날 때 있어요. 생각날 때는 (아내와 딸을 안장한 곳) 그쪽으로 한 바퀴 돌고 들어오고. 잘 지내라는 말밖에 할 수 없죠. 잘 지내라고… -염규태, 당시 강릉 대동 마을 주민 보통 큰 피해를 입힌 태풍은 그 이름을 제명한다고 해. 이름을 없애버린다는 거야. 태풍의 이름을 떠올리며 고통스러워할 피해자를 존중하기 위해서야. 그래서 태풍 '루사' 이 이름도 영구적으로 사라졌어. 그런데 혹시 우리나라에 불었던 태풍 중에 기억나는 이름이 있어? 태풍 '매미'. 대부분 태풍 하면 떠올리는 이름이 루사가 있고 1년 후에 발생했던 태풍 매미야. 루사 역시 많은 기록을 남길 만큼 큰 피해를 입혔지만, 24년이 지난 지금 루사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지고 있어. 규태 씨는 24년이라는 긴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가족과 함께 지내던 그 집에서 살고 있어. 김영곤 대위의 영결식 날 아무것도 모르고 뛰어놀던 4살의 어린 딸은 어느덧 성인이 돼 결혼을 앞두고 있다고 해. 아빠를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다는 딸의 말에, 윤정 씨는 용기를 내서 카메라 앞에 섰다고 해. 단 하루 만에 무자비한 태풍으로 많은 사람들이 소중한 가족을 잃었어. 누군가는 여전히 그날의 기억 때문에 비가 오는 날 운전대를 잡지 못한다고 해. 그리고 또 누군가는 지금까지 사랑하는 사람을 가슴에 묻고 살아가. 루사라는 이름은 지워도 피해를 입으신 분들은 지우면 안 되겠지.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