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현성'프로그램 정보
재벌X형사 재벌X형사

방송일

방송 시작일 2024. 01. 26 ~ 2024. 03. 23
방송 요일,시간 금 토 22:00~00:

기획의도

철부지 재벌3세가 강력팀 형사가 되어 보여주는 '돈에는 돈, 빽에는 빽' FLEX 수사기

출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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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21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방송일

방송 시작일 2021. 10. 21 ~
방송 요일,시간 목 22:20~24:00

기획의도

◆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나'의 이야기 어느 날, 그 사건, 그 장면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눈길을 사로잡는 그 날, 그 사건으로부터 한 사람의 소시민으로서 '내'가 느낀 바를, 온전히 '나'의 시점에서 주관적으로 전달한다. ◆ 배워서 '너' 주는, 3人 3色 이야기 '너' 에게 꼭 들려주고 싶어! 친구, 배우자, 동료... 세 명의 '이야기꾼'이 스스로 공부하며 느낀 바를 각자의 '이야기 친구'(가장 가까운 지인)에게, 가장 일상적인 공간에서 1:1 로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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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시작일 2024. 01. 26 ~ 2024. 03. 23
방송 요일,시간 금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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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1,160
[꼬꼬무 찐리뷰] 살인자 김일곤, CCTV에 담긴 섬뜩한 미소…28명 죽이려 만든 충격의 '살생부' [꼬꼬무 찐리뷰] 살인자 김일곤, CCTV에 담긴 섬뜩한 미소…28명 죽이려 만든 충격의 '살생부' 등록일2025.04.11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10일 방송된 '김일곤의 살생부'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배우 임주환, 그룹 아이브 멤버 가을, 배우 박경혜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잘못된 만남 때는 2015년 7월, 어두컴컴한 저녁이야. 가로등도 없고, 인적도 드문 한 골목길에 중형차 한 대가 들어섰어. 운전자는 당시 20대 중반이었던 이성준(가명) 씨.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나오는데, 저 어둠 속에 까만 실루엣이 보여. 자세히 보니 한 남자가 서있어. 그런데, 그 사람 손에서 뭔가가 번쩍거려. 잘 보니, 칼이었어. 그 순간 골목엔, 정적만 흘러. 잠시 후, 성준 씨를 노려보던 그 남자가 입을 열었어. 내가 너, 죽여버릴 거야! 이게 무슨 상황일까? 성준 씨는 서울 영등포에서 가게를 운영하고 있어. 그의 가게는 술을 판매하는 노래방, 즉 노래주점이야. 그래서 보통 늦은 저녁 시간에 가게를 열어. 두 달 전인 5월 어느날 저녁, 성준 씨는 차를 몰고 출근을 하고 있었어. 골목으로 들어가 우회전을 하는데, 갑자기 오토바이 한 대가 차 앞으로 확! 끼어든 거야. 우회전을 하는데 그 틈으로 오토바이가 들어오는 바람에 사고가 날 뻔 했었어요. 그래서 경적을 두 번 울리고, 빨리 가라… 그러고 이제 주차를 했는데… -이성준(가명), 당사자 오토바이 운전자가 성준 씨를 쫓아온 거야. 오토바이 운전자는 40대 남성. 그런데 이 남자, 완전 막무가내야. 그냥 봤을 때 싸한 사람 있잖아요. 봤을 때 그냥 '위험하다'…눈을 뚫어져랴 쳐다보고, 그냥 욕설을 계속 해요. 반말을 하고 욕설이 오고 가다가… -이성준(가명), 당사자 성준 씨 말은 듣지도 않고, 이 오토바이 남자가 갑자기 막 욕을 퍼붓기 시작해. 야! 네가 먼저 길 막아 놓고, 왜 빵빵대고 난리야! 라면서. 성준 씨도 슬슬 열이 받기 시작했어. 결국 큰소리가 오갔고, 분위기는 아주 험악해졌어. 얼굴에다 손을 갖다 대면서 '뭐라 그랬어?' 하길래, '야, 뭐 할 거 아니면 그냥 가라' 그러고 무시했었어요. 근데 그 남자가 저를 잡아당기면서 팔에 상처가 생겼었어요. 손톱으로 긁히면서. 그래서 '이것도 폭력이야. 신고할 거야' 그래서 근방에 고깃집 사장님이 신고를 했어요. -이성준(가명), 당사자 이내 경찰이 도착했고, 둘은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어. 그 결과 성준 씨는 무혐의를 받았고, 그 오토바이 남자는 폭행죄로 벌금 50만 원을 내게 됐어. 성준 씨는 이때만 해도, 그냥 단순 해프닝으로 끝날 줄 알았어. 그런데 두 달 뒤, 성준 씨 앞에 그 남자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거야. 손에 칼을 쥔 채로. 다시 아까 그 때로 돌아가볼게. 칼을 든 남자를 마주한 성준 씨는 할 수 있으면 어디 한번 찔러보든가 라며 세게 나갔어. '할 수 있으면 해 봐라' 그렇게 된 거예요. 속으로는 겁 많이 먹었죠. 왜냐하면 흉기를 보면 달라져요 진짜로요. 근데 겁을 먹으면 죽거든요 그런 애들한테는. 기싸움이라는 게 있잖아요. -이성준(가명), 당사자 남자들만의 기세가 있잖아. 겁먹은 모습을 보여주면 안 되겠다 생각했대. 게다가 성준 씨, 대학생 때 운동선수였어. 그러니 몸이 다부졌어. 칼을 든 그 남자, 가만히 성준 씨를 보다가 이렇게 말해. 근데, 지금은 타이밍이 아니야. 그러더니 그대로 어둠 속으로 사라졌어. 그제야 긴장이 풀린 성준 씨는, 바로 경찰에 신고했어. 신변 보호 요청을 한 거야. 그 일이 있었던 이후, 성준 씨에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어. 하지만 그때만 해도 전혀 몰랐던 거야. 이 만남이, 앞으로 벌어질 끔찍한 일들의 서막이었다는 걸. ▲ 트렁크 살인사건 그리고 두 달이 더 흐른, 9월 11일. 장소는 서울 성동구의 한 빌라야. 오후 2시가 좀 넘은 시각, 조용했던 동네가 갑자기 발칵 뒤집혔어. 여기 불났어요! 라는 외침에,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뛰어 왔어. 빌라 1층 주차장에 있던 차에서 불이 나고 있었어. 흰색 SUV였는데, 차 안에서 불이 난 거야. 이 화재가 119 말고 또 신고가 접수된 곳이 있었어. 바로 경찰서. 성동경찰서 강력2팀 형사들이었어. '차가 불에 타고 있다' 이런 신고를 받게 됐거든요. 그런데 바로 옆에 인접 경찰서에서 한 10분, 15분 간격으로 계속 '흰색 SUV 차량이 뺑소니를 하고 있다'…근데 차가 또 SUV라고 하니까, 연관성이 있지 않나. '혹시 그 차 아닌가?' 했죠. -유태권,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뺑소니 차량에 대한 신고를 받았는데, 뒤에 또 화재 차량 신고가 들어온 거야. 근데 이 뺑소니 차량과 화재 차량, 모두 흰색 SUV야. 형사들은 서둘러 현장으로 갔어. 먼저 도착한 소방대원들이 화재를 진압하고 있었어. 그런데 이 차량 트렁크 안에 부탄가스통이 널브러져 있어. 그것도 세 개나. 그리고 기름 냄새도 나. 화재 원인은 트렁크 쪽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지른 것으로 확인이 됐어요. 누군가 고의적으로 방화를 했다… -김권익,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불이 다 꺼지자, 형사들은 차의 번호판을 확인했는데, 뺑소니로 수배됐던 그 차가 맞았어. 그런데 그때, 한 소방대원이 막 형사님! 여기 좀 빨리 보세요! 라며 소리를 질러. 이 외침과 함께, 이 사건의 진짜 정체가 드러났어. 깨진 차량 뒤 창문으로 보니까, 골판지 밑에 마네킹 비슷하게 형체가 있어 가지고. 이게 과연 사람인지 아니면 마네킹인지 확인을 해야겠더라고요. 그래서 먼저 손을 집어넣는 순간, 왠지 좀 머리가 서는 느낌. 막 촉촉한 그런 느낌이 들더라고요. 막 머리가 서고 굉장히 나쁜 그런 기분, 그런 느낌이 들었거든요. 아 이거 사람이구나… 생각이 딱 그렇게 들었습니다. -유태권,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트렁크에서 여성의 시신이 발견된 거야. 단순 뺑소니인 줄 알았던 게, 방화이자 살인사건이었던 거야. 근데 시신을 확인한 형사들은, 다시 한번 충격에 빠졌어. 그 위에 골판지가 덮여 있었고, 그래서 골판지를 드러내고 그 다음에 사체를 확인했는데. 보통 살아있는 사람이라든가 방금 죽은 사람은 피가 돌기 때문에 대부분 빨갛잖아요. 근데 거의 마네킹처럼 하�R어요. 핏기가 거의 없었으니까. -유태권,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제일 충격적인 게, 시체 훼손된 걸 보고 나서는 너무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너무 심하게 훼손이 됐기 때문에. '와 이건 진짜 큰일이다' 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어요. -김권익,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여러 강력 사건을 맡았던 형사들도, 이런 시신은 처음 봤어. 그만큼 잔인하게 훼손됐던 거야. 이 잔인하고 엽기적인 '트렁크 살인사건'은 그해 9월, 전국을 충격에 몰아 넣었어. ▲ 범인의 정체 형사들은 먼저 차 주인부터 확인해봤어. 불 탄 SUV는 죽은 여성의 차량이었어. 피해자는 30대 중반의 여성. 사인은 경부 압박 질식사. 목이 졸려서 살해당했다는 거야. 이후 범인은 시신을 잔인하게 훼손한 거지. 형사들은 피해자의 주소를 확인했는데, 피해자의 집이 천안이었어. 그러니까 천안에 사는 사람이 서울 한복판에서, 그것도 본인의 차에서 사망한 채 발견된 거야. 형사들은 피해 차량의 행적을 조사했는데, 좀 이상해. 천안에서 서울까지 오는데 이틀이 걸렸고, 그 사이에 경주, 울진, 포항, 강원도까지 전국을 돌아 다녔어. 차가 전국을 돌기 전에, 마지막으로 있던 곳은 충남 아산의 한 대형마트였어. 형사들은 해당 마트의 CCTV를 확인했어. 그런데 마트 주차장에 있는 CCTV에 이런 장면이 찍혀 있었어. 피해자가 차로 걸어가고, 운전석 문을 열어 차에 탔어. 10초 후, 다시 운전석 문이 열리고, 약 30초가 더 지난 뒤, 문이 닫혀. 그리고 와이퍼가 왔다갔다 움직이더니, 다시 3분이 지나. 그후 차는 출발하고, 그렇게 피해자의 SUV는 범인과 함께 사라졌어. 그리고 이틀 뒤, 서울 한복판에서 차량 주인이 살해된 채 발견됐어. 심지어 사체 훼손 정도도 매우 잔인해. 그리고 기름, 부탄가스를 이용해 모든 걸 다 불태우려 했어. 이 범인은, 어떤 사람일까? 시신의 상태나 뭐 이런 걸 볼 때는, 원한 아니면 사이코패스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이제 관련자들을 수사했는데 혐의점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유태권,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빌라 CCTV를 확인했는데, 그 중에서 특이하게 빌라를 바라보면서 살피는 남자가 있다… -김권익,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차량 화재 사건이 발생한 빌라 주변의 CCTV도 확인했어. 화재사건 당일, 흰색 SUV 차량이 빌라로 향해. 그리고 빌라 CCTV에 포착된 한 남성. 빌라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빌라 현관을 맴돌아. 잠시 후 SUV 차량 내부에 불이 붙고, 남자는 이를 멀리서 지켜봐. 불타는 SUV를 재차 확인하더니, 심지어 미소까지 지어. 범죄 개연성이 엄청 많았죠. 범죄 용의자로서 특정했죠 바로. -유태권,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CCTV에 용의자의 모습이 찍혔으니, 이제 잡는 건 시간 문제일까? 그런데, 그렇지 않아. CCTV 얼굴만 보곤, 이름도 나이도 알 수 없잖아. 이 남자가 누군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그런데 CCTV에서 아주 결정적인 장면이 포착됐어. 이 남자, 아주 큰 실수를 저질렀거든. 바로 이 장면이야. 남자가 빌라 문에 손을 댔을 때, 지문이 남았던 거야. 이 지문을 통해, 곧 이 남자의 정체가 밝혀졌어. 48세, 김 씨였어. 그는 과연 피해 여성과 무슨 사이였을까? 이 사람하고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 그 부분을 찾기 위해서 저희들이 계속 수사를 했었는데 그 부분을 찾지를 못했었고.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을 왜 그랬을까, 저희도 굉장히 의문이 많았습니다 그 당시에. -김권익,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전혀 일면식이 없는 사이입니다. 처음 보는 사이입니다. -유태권,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일면식도 없는, 생판 모르는 사람이었던 거야.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어. 김 씨가, 다른 사건으로 이미 수배 중인 거야. 2주 전에, 경기도 일산에서 똑같은 범행을 했던 거야. 마트에서 장을 보고 차에 타는 여성을 쫓아가서, 칼을 들고 위협하면서 납치하려 했대. 다행히 그때 피해 여성이 도망쳐서, 납치 미수 사건이 된 거야. 그걸 파악을 했을 때, 같이 했던 형사들은 다 멘붕이 된 거죠. 김 씨가 실패했기 때문에 또 다른 또 피해자를 노릴 수 있다, 그 전에 잡아야 된다, 이런 강박 관념이 많이 생겼죠. -유태권,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이 위험한 인물, 한시라도 빨리 잡아야 해. ▲ 김 씨의 흔적을 찾아라 형사들은 사건 현장인 빌라 근처 CCTV로 김 씨의 행적을 쫓았어. 보니까 사건 직후, 택시를 타고 빌라 근처에 있는 한 대형마트에 갔어. 마트에서 옷을 사서, 갈아입고 도주한 거야. 문제는, 이 뒤부터 행적을 쫓는 게 쉽지 않아. 10년 전이라, 지금처럼 CCTV가 많이 없었던 거야. 군자동 쪽에서 짜장면 먹은 것까지도 저희가 다 확인했었는데. 거기에서 행적이 안 잡혀 가지고 좀 어려움이 많이 있었습니다. -김권익,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형사들은 김 씨의 거주지로 갔어. 근데, 짐까지 싹 다 없어. 김 씨가 자신을 추적할 증거를 없애고 있는 거야. 형사들은 휴대전화 위치를 추적했어. 근데 위치가 안 나와. 진작에 전원을 꺼놓은 거야. 형사들이 이번엔 신용카드를 확인했어. 아까 마트에서 옷도 샀잖아. 근데, 범행 후 사용 내역이 전혀 없어. 현금만 쓰고 있는 거야. CCTV, 휴대전화, 신용카드… 그 어떤 방법으로도 추적 불가야. 김 씨 명의로 된 차량을 한 대 확인했어. 마침 그 차는 서울에 있는 한 자동차 정비소에 있었어. 근데 가서 보니까 정비소 직원이 차를 맡긴 지 한 달이 다 돼 가는데, 찾아 가지도 않고 연락도 안 된다 라고 하소연해. 김 씨가 차까지 버리고 도망간 거야. 김 씨, 마치 수사 진행상황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아주 교묘하고 철두철미하게 형사들의 추적을 따돌리고 있어. 제가 볼 때 평범한 사람의 패턴이 아니었어요. 쓰던 휴대폰 버리고 현금만 사용하고 걸어서 범행을 하고. 일반 통신 수사라든가 이런 게 전혀 그 작용을 할 수가 없었죠. -유태권,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이건, 김 씨가 저지른 전과들이야. 무려 전과 22범이었어. 교통법규 위반부터 강도, 상해까지. 범죄 종류가 다양해. 게다가 재판을 받은 법원이 전국 곳곳이야. 최초 범죄는 1984년도. 감방 생활만 20년 가까이 했어. 그가 형사들의 추적을 잘 피하는 이유, 이제 알겠지? 범죄 베테랑인 거야. 형사들은 김 씨의 가족들도 찾아봤어. 근데 가족들과도 연을 끊은 지 오래야. 최근엔 한 유통회사에서 식자재 배달일을 했는데, 동료들 말로는 평소에 남들과 교류도 거의 없었대. 그럼 이제 김 씨를 찾을 방법, 뭐가 있을까?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는데, 작은 단서조차 나오지 않아. 분명 어딘가에서 또 다른 범죄를 노리고 있을 거란 말이야. 그래서 형사들은 이 방법을 쓰기로 했어. 공개 수배를 한 거야. 이름, 김일곤. 나이 48세. 이렇게 트렁크 살인사건의 범인, 김일곤의 이름과 얼굴이 전국에 공개됐어. ▲ 김일곤 공개수배 그런데 그 시각, 누군가의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어. 이 전화를 받은 사람은, 성준 씨였어. 이성준 씨, 저 그때 폭행 사건 담당했던 경찰입니다. 당분간 외출 삼가시고요,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신고하셔야 합니다. 처음에 성준 씨에게 시비를 걸었던 그 오토바이 남자, 칼을 들고 죽이겠다고 한 그 남자. 그가 바로 김일곤이었던 거야. '그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도망간 상태고 뭐 공개 수배를 한다'고 그러더라고요. 그 때 알게 된 거예요. TV를 봤는데 그 사람이 나오니까, 이제 현실 직시가 되는 거죠. 그래서 제가 아마 그 사람 잡힐 때까지, 지인 집인가 호텔인가에서 아마 잤을 거예요. -이성준(가명), 당사자 사실, 김일곤이 칼을 들고 성준 씨를 찾아가기 전부터, 계속 이상한 일이 일어났었대. 하루는 옆 가게 사장이 성준 씨에게 이런 말을 하더라는 거야. 지난주부터 차 한 대가 성준 씨를 계속 쫓아다니는 것 같더라고. 내 착각일 수도 있는데, 혹시나 하고. 어느 날은, 성준 씨에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어. 받으니까, 이러더라는 거야. 야! 너 나 기억나지? 내가 너 찾아가서 죽여버릴 거야! 김일곤이었어. 근데 그는 어떻게 성준 씨 전화번호를 알아냈을까? 서로 연락처를 모르잖아요. 제가 '전화번호 어떻게 알아냈냐' 물어봤더니 주소랑 다 알아냈대요. 집을 알고 있어요. 주소를 물어보니까, 알아요. '네가 날 어떻게 죽일 건데?' 그때 했던 얘기가, 휘발유를 뿌린대요. 염산을 갖다 뿌린다 그래서, 인터넷에 검색을 해 보니까, 닿자마자 녹는대요 얼굴이. 그게 엄청 불안했죠 진짜. -이성준(가명), 당사자 성동경찰서에는 긴급하게 수사본부가 차려졌어. 형사들은 몇 날 며칠 집에 가지도 못하고 김일곤 검거 작전에만 매달렸어. 그러다 납치사건 발생 9일째인 2015년 9월 17일. 수사본부에 갑자기 무전이 울렸어. 성수동의 한 동물병원에서 강도 사건이 발생했다는 신고야. 한 남자가 병원에 와서 안락사 약을 달라고 하더래. 개를 안락사시키고 싶다고 얘기했는데, 개가 크다는 거예요. 아니 개도 안 데리고 오고 무슨 일인지 알겠어요? 우리는 '안 된다 약도 없고 줄 수도 없다. 가봐라'고 했어요. -동물병원 관계자 그리고 잠시 후, 이 남자가 칼을 들고 나타나 난동을 부렸다는 거야. 이 신고 내용을 들은 형사들은 촉이 딱 왔어. 직감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다 튀어 나갔어요. 진짜 제일 빨리 어떻게 그렇게 다 튀어 나갔는지. 굉장히 빨리 갔었어요 -김권익,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그 시각, 마침 인근 지구대 경찰 두 명이 그 동물병원 근처를 순찰하고 있었어. 그런 그들의 눈에 한 수상한 남자가 포착됐어. 순찰차를 보더니, 막 머뭇거리면서 피하는 거야. 근데 자세히 보니까 저 얼굴, 낯이 익어. 공개 수배된 그 얼굴이야. 지구대원이 차에서 내려서, 남자에게 다가갔어. 야 너, 김일곤이지? 김일곤은 칼을 꺼냈고, 경찰들과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어. 지나가던 시민들도 합세했고, 결국 남자의 손에 수갑을 채웠어. 드디어 김일곤이 잡힌 거야. ▲ 난 더 살아야 해 김일곤은 수사본부로 압송됐어. 봉고차에 내려서 취재진 앞에 선 김일곤은 이렇게 말했어. 난 잘못한 게 없습니다, 잘못한 게 없어요 난! 난 더 살아야 해... 난 잘못한 게 없고, 나는 더 앞으로 살아야 된다고. -김일곤 김일곤이 반복한 나는 더 살아야 한다 는 말. 이 말을 잘 기억해 봐. 누구도 상상치 못한, 아주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질 거야. 곧바로 김일곤 조사가 시작됐어. 김일곤은 경찰서 안에서 어찌나 난리를 치는지, 조사 자체를 못 할 정도야. 맨 처음에는 일체 진술을 거부했죠. 막 통제가 안 될 정도로 자기 행동을 하려고 했었고. -유태권,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내가 뭘 잘못했냐 고 소리치며 정상적인 대화조차 불가능한 상황이야. 어찌나 난리를 치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어. 형사들은 일단 김일곤을 차분히 달래기로 해. 알았으니까, 우리 밥부터 먹고 하자. 너 그동안 밥도 제대로 못 먹었을 거 아냐, 먹고 싶은 거 다 말해봐 라고 하자 김일곤은 그럼 나는 짜장면으로 시켜주쇼. 이왕이면 두 그릇으로 라고 말했어. 형사들은 짜장면 두 그릇을 시켜줬어. 쉽게 말하면 좀 비위 맞춰주는, 밉지만 정말 안 해주고 싶지만. 뭐 이런 역할도 어쩔 수 없이 할 수 있는. 왜냐하면 저희는 얘 진술을 끌어내야 하기 때문에. -김권익,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천천히 라포를 형성하며, 하나씩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어. 너 먹고 사느라 많이 힘들었지? 너 고생 엄청 하는 거, 내가 다 안다. 아니 그래서, 이번엔 뭐가 널 그렇게 힘들 게 한 거야? 라며 살살 달래자, 김일곤은 이렇게 말했어. 하아… 형사님, 저 담배 하나만 주십쇼. 보통 범인들이 자백을 하기 전에 공통적으로 하는 행동이 있대. 첫 번째, 한숨을 쉬어. 그리고 두 번째, 담배를 달라고 해. 이 자백의 시그널만 나오면 끝나는 거야. 김일곤이, 형사에게 자백을 하기 시작해. ▲ 사건의 전말 김일곤의 자백을 따라, 처음 사건이 발생했던 그때로 돌아가 볼게. 9월 9일, 처음 사건이 발생했던 아산의 한 대형 마트야. 피해 여성이 납치되기 전, 김일곤은 마트 주차장을 돌아다니면서 범행 상대를 물색했어. 그러던 그의 눈에, 피해 여성이 들어왔어. 장을 본 피해자가 차로 이동해. 그때 김일곤은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여성을 뒤따라 가. 여성이 차에 짐을 싣고, 마트의 카트를 원위치하러 가는 모습을, 김일곤은 멀리서 숨어 지켜봐. 피해자가 돌아오자, 김일곤도 움직이기 시작했어. 피해자가 차에 타서 시동을 걸자 마자, 김일곤은 운전석 문을 벌컥 열었어. 소리 지르면 죽는다. 지금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흉기로 위협하며, 김일곤은 피해자를 조수석에 앉혔어. 그리고 자신은 운전석에 앉았어. 마트 주차장에서 벌어진 일인데, 이를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그렇게 운전대를 잡은 김일곤은 마트를 유유히 빠져나갔어. 얼마쯤 달렸을까. 흉기 앞에서 꼼짝 못 하고 끌려가던 피해 여성이,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했어. 김일곤은 근처 공터에 차를 세웠고, 피해 여성은 밖으로 나와 볼일을 보는 척 했어. 그리고 그 때, 살려주세요! 사람 살려! 외치며 온 힘을 다해 달아나기 시작했어. 하지만 뒤따라온 김일곤에게 다시 잡히고 말았어. 그리고 다시 차에 갇혔어. 이때 김일곤이 화가 나서, 피해 여성을 살해했어. 그런데도 분이 풀리지 않아서, 김일곤은 시신을 차 트렁크에 옮겨 잔인하게 훼손했어. 그리고 시신이 있는 차를 몰고, 이틀 동안 전국을 돌아다녔어. 시신을 유기할 곳을 찾아다닌 거지. 그러다 서울로 왔어. 그런데 여기서, 뜻밖의 사고를 쳐. 처음 형사들이 무전으로 들었던 그 뺑소니 사고야. 트렁크에 시신이 있잖아. 사고 처리고 뭐고, 그냥 도망갈 수밖에 없었던 거지. 멀리 도망갈 수는 없다는 걸 직감한 김일곤은 증거 인멸을 위해 근처 빌라에서 차에 불을 지른 거야. 그럼 대체 김일곤은 왜 일면식도 없던 여성을 납치한 걸까. 그가 말하는 범행동기가, 기가 막혀. 영등포에서 시비가 돼서 폭행 사건이 있었는데, 상대방은 무죄가 나왔고 자기는 벌금 50만 원이 나온 거죠. 이 부분이 자기는 억울했던 겁니다. -김권익,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내가 저놈을 한번 손을 봐야 하는데 방법이 없을까 생각한 게, (노래주점에서 일할) 접대부를 소개시킨다는 명목으로 나오게 해서 아마 범행을 하려고 했던 부분 같아요. 그래서 필요한 도구가 여자였고. -유태권,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성준 씨 폭행 사건을 얘기하는 거야. 아까 김일곤이 벌금 50만 원을 내야 했잖아? 그게 너무 억울해서, 성준 씨를 죽이려고 했다는 거야. 성준 씨가 노래주점을 운영했잖아. 여자를 납치해서, 노래방 도우미로 위장시킨 뒤, 성준 씨를 유인하려고 한 거야. 여자한테 성준 씨네 가게에서 일하겠다고 약속을 잡게 한 뒤, 성준 씨가 약속 장소에 나왔을 때 죽이겠다는 시나리오를 짠 거지. 이 허무맹랑한 복수극을, 김일곤은 진짜로 실행하려 했어. 일산에서 있었던 납치 미수 사건, 기억나지? 그게 바로 첫 번째 시도였던 거야. 그때 실패하고, 아산까지 가서 다시 납치사건을 벌였던 거지. 서울에서 전철 타고 천안까지 가서. (아산에서) 먼저 범행 대상이라든가 범행 장소를 물색을 했었죠. 그리고 4일 후에 가서 범행을 한 거고. -유태권,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김일곤 말로는, 처음엔 피해 여성을 죽일 생각은 없었대. 성준 씨를 죽이고 나면, 풀어주려 했다는 거야. 그럼, 왜 피해 여성을 잔혹하게 살인한 걸까. 피해 여성이 달아났다가 다시 잡혔잖아? 차에 다시 강제로 타게 된 피해 여성이, 계속 창문을 두드리면서 살려달라고 소리쳤대. 만약 누군가 이걸 보고 신고라도 할 까봐, 그럼 성준 씨한테 복수도 못 하고 잡힐 수 있으니까. 복수 계획이 틀어질까 미친듯이 화가 나서 살해했다는 거야. 그리고 시신을 잔인하게 훼손했어. ▲ 김일곤의 살생부 그런데, 여기서 더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났어. 처음 김일곤이 검거됐을 때 몸을 수색했거든? 그때 칼 두 자루와 함께, 주머니에서 이런 게 발견됐어. 28명의 사람들 이름이 쭉 적혀 있는 종이야. 성준 씨 이름도 있어. 바로, 살생부였어. 김일곤이 죽이려던 사람, 성준 씨 뿐만이 아니었던 거야. 그래서 그걸 한번 물어봤어요. '이게 다 과연 뭐냐' 그랬더니, 자기를 재판한 판사, 자기를 입건한 형사, 그리고 자기하고 시비 붙었던 업주. 그 다음에 나를 무시했던 간호사, 나한테 혜택을 안 준 동사무소 직원. 다 자기가 손을 봐야 될 죽여야 될 사람이라고 그러더라고요. 경찰에 와서 자백한 거죠. 그게 살생부라고. 섬�하죠. 자기가 죽일 사람의 명단을 갖고 다닌다는 것은. -유태권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김일곤은 이 살생부를 보면서 이것들을 다 죽여야 하는데 라고 중얼거렸대. 아까 김일곤이 잡혔을 때 했던 나는 더 살아야 한다 고 했던 그 말. 이제 무슨 뜻인지 알겠어? 더 살아서, 이 사람들을 다 죽여야 한다는 거야. 근데 좀 이상한 거 없어? 이 살생부, 이름만 있는 게 아냐. 어떤 사람들은 전화번호와 주소, 직장, 심지어 주민등록번호까지 적혀있어. 김일곤은 대체 이런 정보를 어떻게 알았을까? 피고인이 체포 당시 소지하고 있던 메모지에는 A 및 폭행 사건의 목격자 등의 인적사항이 기재되어 있음. 피고인은 위 폭행 사건 기록을 법원에서 열람, 등사하여 A 및 사건 목격자들 인적사항을 확보함. 소송 당사자의 경우, 법원에 요청을 하면 사건 기록을 열람할 수 있어. 재판이 끝난 사건은, 개인정보 보호 규정에 의해 인적사항이 비공개처리 돼. 그런데 재판 중인 사건은, 그 규정이 적용되지 않아. 전과 22범인 김일곤은 이 점을 알고 있었어. 그래서 폭행 사건 재판 때 성준 씨의 전화번호와 주소도 알아낸 거지. 심지어 당시 사건 목격자, 참고인의 인적 사항까지 알고 있었어. 연쇄살인마를 꿈꾸던 김일곤. 그는 납치, 살인, 사체 훼손 등 그 어떤 범죄도 주저하지 않았어. 게다가 피해 여성과 전혀 일면식도 없고, 살해 동기 역시 납득이 안돼. 사체 훼손 정도도 매우 잔인해. 그런데 면담하는 내내, 김일곤은 이렇게 말했대. 저는 그동안 너무 억울하게 살았어요. 항상 무시당하고, 불이익만 받았다니까요. 베테랑 형사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뻔뻔한 태도였어. 이걸 정말, 답이 안 나왔죠. 진짜 답이 없는 얘기를 하는데, 인간으로서 저렇게까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과연 또 있을까… -김권익, 당시 성동경찰서 형사 결국 형사들은 프로파일러를 투입 시켰어. 당시 김일곤을 면담한 프로파일러의 이야기를 들어볼게. 김일곤은 체계적이지도 않고, 패턴도 없이 짐작할 수 없는 아주 위험한 사이코패스 성향을 가진 살인범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사이코패스다'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살생부를 확보를 해서 검토를 했을 때도 구체적으로 '이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의 직업' 또 '거주지'. '어떤 방식으로 나한테 해를 끼쳤는지'를 꼼꼼하게 메모를 해놨었기 때문에. 그렇다면 이 사람이 갖고 있는 이 대상자에 대한 분노는 갑작스럽게 생겨난 것이 아니고, 오랫동안 형성되어 온 것이고, 이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지 못한 것이 결국은 쌓이고 쌓여서 이 임계점에 도달하지 않았을까. -권일용, 당시 담당 프로파일러 경찰 조사를 받고 나온 김일곤은 취재진한테 이렇게 말했어. 제가 영등포 폭행 사건 때 피해자였는데, 가해자로 돼서 벌금 50 만 원을 받았어요. OOO이 그놈으로 인해서 내가, OOO이를 죽이기 위해서 내가 이렇게 된 겁니다! ▲ 끝까지 반성은 없었다 얼마 뒤, 김일곤 재판이 시작됐어. 어떤 혐의들이 적용됐을까? 강도 살인, 특수강도미수, 일반자동차방화, 살인 예비, 자동차관리법위반, 사체손괴, 절도, 공기호부정사용, 부정사용공기호행사, 도로교통법위반, 특수공무집행방해, 특수강도,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 혐의만 13개야. 재판장에서 그는, 고개를 꼿꼿이 들고 있었어. 그러면서 이런 말들을 했어. 저는 정말 억울합니다. 제 억울함을 밝히는 게 고인을 위하는 길 같습니다. 어떻게 감히, 고인을 언급할 수 있는지. 하도 이러니까 한 번은, 판사가 이렇게 말했어. 피고, 그냥 시간을 드릴 테니까, 하고 싶은 말 다 하세요 라고. 그러자 김일곤은 이렇게 말했어. 제가 비록 전과는 많지만, 그 사건에선 제가 피해자였습니다. 그러나 법은 제 편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은 항상 저에게만 불리한 거 같아요. 이런 얘기를 무려 1시간 반이 넘도록 했대. 2016년 6월 3일, 김일곤의 선고 날이야. 선고가 나기 직전, 김일곤이 갑자기 소리쳤어. 잠시만요 재판장님! 꼭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저에게 5분만 시간을 주십시오. 판사가 허락하자, 김일곤이 말을 시작했어. 말할 수 있는 시간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형 선고가 내려질 거라고 짐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를 음해하고 모함한 놈들이 계속 잘 먹고 잘 산다면, 이건 죽은 분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겁니다. 끝까지, 반성은 없었어. 그리고 곧, 선고가 내려졌어. 주문, 피고인을 무기징역에 처한다. 그러자 김일곤이 다시 소리치기 시작했어. 잠깐만요! 그렇게 다들 저를 모함하고 음해했으면 사형 주려고 했던 거 아닙니까? 그냥 사형 주세요! 검찰의 항소로 이어진 2심 재판에서 김일곤은 결국 무기징역이 확정됐어. 사건이 있고 10년이 지났어. 살생부에 적힌 사람 중, 실제 살해를 당한 사람은 없어. 하지만 성준 씨는 아직도 그때의 트라우마를 지우지 못하고 있어. 이따금씩 생각이 나요. 뭐 한 달에 그냥 이렇게 멍하니 TV 보다가 살인사건이 나오면 불안한 거예요. 그 생각이 나요. 어쩔 수가 없어요 트라우마 때문에. 꿈도 엄청 꿨어요. 김일곤 나오는 꿈 꾸고. 꿈에서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는데 받으니까, 어떻게 해서 법이 바뀌어서 김일곤이 특사로 막 풀려났대요. 미쳐요 미쳐. -이성준(가명), 당사자 이제는 전과 23범이 된 무기수 김일곤. 무기징역은 말 그대로, 정해진 수감 기간이 없다는 뜻이야. 일정 기간이 지나면 법적 절차에 따라 가석방 대상이 될 수도 있어. 하지만 김일곤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어. 그가 우리 사회로 다시 돌아올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고. 아마 지금도 좁디좁은 감옥에서, 왜곡된 억울함에 사로잡혀서 괴롭게 지내고 있을 거라고. 그 뒤에도 개인정보 유출로 인한 크고 작은 사건들은 계속 발생했어. 2018년엔 성폭행 가해자에게 피해자의 인적사항이 적힌 판결문이 송달된 사건이 발생했고, 작년엔 가해자가 피해자의 주소를 알아내 구치소에서 편지를 보내 2차 가해를 벌인 일도 있었어. 피해자의 권리만큼, 피의자의 방어권도 중요하기 때문에 이를 제지할 제도를 만드는 게 쉽지 않대. 아직 이걸 해결할 답은 명확하게 나오진 않았어. 그리고 우린 이거 때문에 언제 어디서든 위험에 노출될 수 있어. 안전하고 평온한 세상에서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다는 것. 이건 꼭 지켜야 할 중요한 가치가 아닐까.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
[꼬꼬무 찐리뷰 ]임신하면 낙태 시키고, 죽으면 시체 해부까지…'비극의 섬' 소록도의 진실 [꼬꼬무 찐리뷰 ]임신하면 낙태 시키고, 죽으면 시체 해부까지…'비극의 섬' 소록도의 진실 등록일2025.04.06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3일 방송된 '낙인-아이를 가질 수 없는 섬'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배우 서영희, 배우 최원영, 가수 청하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금단의 장소에 있는 유리병 오늘은 사진 한 장 보여주면서 시작할게. 아이들이 일렬로 나란히 서 있는 사진이야. 이 아이들, 지금 뭘 하는 걸까? 이 사진은 엄청난 이야기를 담고 있어. 이 아이들이 있는 이 곳, 대체 어떤 곳일까 궁금하지? 그곳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들려줄게. 때는 1996년.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한 남자가 친한 형님, 동생들을 만나 아주 신이 났어. 제대로 술판이 벌어졌지. 그러다 술에 취해 깜빡 잠이 들었는데,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깬 남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꼭 해야 할 일이 생각났거든. 그 밤에, 대체 무슨 일이었을까? 술을 얼마나 마셨냐면 소주 너홉 들이를 갖다가 세 명이서 두 병을 마시고 갯벌에 가 가지고 조개 잡고, 바지락 잡고 야단블루스를 췄어요. 그걸 다 마시고 새벽에 딱 깨어났는데, 갑자기 이상하지. 새벽이었는데, 이걸 갖다가 사진을 찍었다는 이야기예요. -이창호(가명), 고향을 찾은 남자 남자는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에서 사진으로 꼭 남기고 싶은 게 있었어. 비몽사몽 술기운에 카메라를 챙겨 집을 나서. 깜깜한 밤, 파도 소리만 철썩철썩. 달빛에 의지해, 기억 속의 그곳을 향해 걸어갔어. 도착한 곳은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한 건물 앞이야. 남자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좌우를 살펴. 사람들 눈에 띄면 안 되거든. 조심스럽게 출입문을 미는데, 어라? 문이 열려.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그토록 카메라에 담고 싶던 그것에 렌즈를 대고 찰칵! 셔터를 눌렀어. 남자가 찍고 싶었다는 사진, 뭐였을지 궁금하지? 그런데 이 사진, 많이 충격적일 수 있어. 하지만 오늘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너무도 중요한 사진이야. 마음의 준비를 하고 봐. 유리병 안에 담긴 건, 태아야. 포르말린 용액에 담긴 태아의 표본. 팔, 다리, 손가락, 발가락, 신체가 온전히 형성돼 있어서 출생 시기가 거의 다 된 걸로 보여. 어떤 유리병엔 여러 태아가 한데 쌓여있기도 해. 태아 표본이 있는 이 붉은 벽돌 건물은 대체 어디일까? 사실, 현장엔 태아 외에도 또 다른 인체 부위 표본들이 있었어. 사람의 뇌나 간, 손이나 장기가 담긴 유리병이 한쪽 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거야. 표본이 담긴 유리병의 개수는 총 122개. 그중 14개의 유리병에 태아가 담겨 있어. 사진을 찍은 남자는 자라면서 내내 이곳이 궁금했어. 어릴 때, 아이들은 가지 못하게 하는 금단의 장소였거든. 나는 그때 초등학교 3학년인가 4학년인가 됐었어. 나처럼 호기심 많은 소년이 거기 가서 이제 심심하니까 어느 날 이걸 들여다본 거야. -이창호(가명), 표본 사진을 찍은 남자 세상 궁금한 게 많던 10살 소년 시절의 어느 날, 기회가 왔어.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슬금슬금 붉은 벽돌 건물로 다가갔는데, 마침 창문을 가렸던 창호지가 살짝 찢어져 있는 거야. 어린 소년은 창문에 눈을 바짝 갖다 댔지. 그리고 으악! 저게 뭐야!!! 소년은 건물의 비밀을 목격한 순간, 깜짝 놀라서 줄행랑을 쳤어. 그리고 어른들에게 가서 물었지. 쉿! 너 어디 가서 너 본 거 얘기하면 큰일난다. 못 본 걸로 해라! 어른들은 못 본 척 하라 했어. 그렇게 묻은 비밀, 살면서 내내 남아있던 잔상. 이건 뭔가 잘못된 거라는 걸 깨달은 소년은 비밀을 묻고 20년 후, 어른이 되어 찾아가 카메라에 담은 거야. 남자가 찾아간 곳은 어디이고, 그가 살았던 마을은 대체 어떤 곳일까. 지도에서 보여줄게. 이곳은 소록도. 혹시 들어본 적 있어? 전라남도 고흥군 녹동항을 마주하고 있는 작은 섬이야. 정부에 의해 외부인의 출입은 금지된 채, 한센병 환자들만 격리돼서 살았던 섬이야. 혹시 '한센병'이라고 알아? 한센병은 과거에 '나병'이라고 불리기도 했지. 한센병균 혹은 나균이 피부나 말초 신경계를 침범해서 조직을 변형시키는 전염병이야. 이 병에 걸리면 피부에 넓게 붉은 반점이 생기고, 손가락과 발가락 감각이 무뎌지면서 떨어져 나가기도 해. 얼굴과 손발 등 외모에 변형이 일어나기 때문에, 사람들은 한센병 환자들을 '문둥이'라고 부르며 노골적으로 꺼리는 경우가 많았어. 그런데 한센병 환자들이 사는 소록도에 왜, 태아 표본이 있는 걸까? 20년 만에 용기를 내어, 금단의 문을 열고 들어간 남자는 더욱 마음이 무거워졌어. 포르말린하고 그 사이에서 이게(용액이) 막 줄줄 흘렀어. 내가 이제 사진을 찍고 나서 했던 일이, 이 뚜껑을 열었어요. 유리병 뚜껑을 열어 가지고, 뭐랄까. 뭐라고 해야 하나… 쓰다듬어 줬단 이야기지. 내가 할 짓이 그거밖에 없으니까. 완전히 방치된 거지. 그러니까 더 서럽잖아. - 이창호(가명), 표본 사진을 찍은 남자 태아 표본이 방치돼 있었던 거야. 대체 왜, 누가, 태아 표본을 모아두고 관리도 안 한 건지. 한센병과 태아가 어떤 관계가 있는 건지, 그 비밀을 파헤쳐 볼게. ▲ 소록도에 격리된 사람들 시간을 거슬러서 때는 1954년 6월, 초여름이야. 출산이 임박한 산모가 있어. 그런데 이 출산 현장은 다른 곳과 좀 달라. 산모의 비명 소리가 문밖으로 새어 나갈까 노심초사야. 왜? 출산을 들키면 안 되거든. 소리를 죽이고 힘겹게 진통한 끝에, 사내아이가 태어났어. 그리고 아가 우는 소리도 조심시켜. 왜 이렇게 조용히, 조심스러워하는 걸까? 사실 여긴, 아이를 낳아서는 안 되는 곳이거든. 여기는 바로, 소록도야. 왜, 소록도에선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걸까. 남철이의 이야기 듣다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어. 전라남도 함평군의 한 초등학교 5학년생이던 남철이 몸에, 갑자기 이상한 증상이 생겨. 피부에 하나 둘, 발진이 생기는가 싶더니, 점점 부위가 넓어지고, 피부에서 감각이 느껴지지 않아. 한센병에 걸린 거야. 이 병 걸리면 후유증이 나와요. 아주 흉한 모습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쳐다봐요. 꺼리고. 그 쳐다보는 거 그게 제일 싫었어요. 얼마나 심하게 꺼리냐 하면은, 마을 공동 우물에 물 길러 가도 물을 못 길러가게 해요. 물동이가 혹시나 균이 오염되지 않았나 해가지고 못 오게 한 거예요. 그리고 사람도 샘가에 오지 마라... - 이남철, 한센병력자, 12세 발병 이웃들은 손가락질을 하고, 학교에 가면 친구들이 놀리고 곁에 오질 않아. 결국 학교에 나오지 말라는 소리를 들었어. 남철이는, 한센병 환자들만 격리해 치료한다는 소록도에 들어가기로 했어. 확실히 기억하죠. 1966년 59년 전에 5월 16일 날, 제가 아버지하고 같이 이곳에 (소록도에) 들어왔습니다. 그때는 치료받는다기 보다도 격리시킨다는 인식을 받고 왔어요. 아버지가 저를 여기다 놔두고 갈 적에 뱃머리까지 같이 나갔거든. 아버지 가는데 배웅하러. 아버지께서 '절대 뒤따라 보지 말고 그냥 가라. 들어가라' 그랬는데, 또 그럴 수가 있나요? 부모님, 아버님인데. 이렇게 뒤로 돌아보니까, 앉아 가지고 울고 계시더라고요. 부모님과 형제들과 영영 이별이구나.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병이 생겼는가… - 이남철, 한센병력자, 12세에 발병 작을 소, 사슴 록, 작은 사슴을 닮은 섬이라고 해서, '소록'이란 이름이 붙은 소록도. 면적은 여의도보다 조금 더 넓은데, 섬 전체가 한센병 환자들이 사는 7개의 마을로 이뤄져 있어. 많을 땐 6천여 명의 한센병 환자가 소록도에 살았어. 소록도는 1번지와 2번지로 나뉘어 있어. 소록도에 도착한 어린 남철이는 2번지에서 살게 됐어. 1번지는 직원 구역, 2번지는 환자 구역. 다른 이름으로 1번지는 무독 지대, 2번지는 유독 지대라고 불렀어. 독이 있는 곳과 없는 곳이란 거지. 1번지와 2번지 사이엔 길게 철조망이 쳐져 있어. 경계선의 감시소를 거치지 않고는 2번지에서 1번지로 갈 수 없어. 외출하려면 허가를 받아야 해. 완전히 단절돼 있는 거지. 뿐만 아니야. 소록도로 올 때 타는 배도, 환자용 배와 직원용 배가 다르고, 선착장마저 달라. 심지어 환자가 직원과 대화할 때의 규칙이 있었다고 해. '직원과 다섯 걸음 이상 거리를 유지해라', '말할 땐 45도 얼굴을 옆으로 돌리고 손으로 입을 가려야 한다', '직원이 바람을 등지고 서야 한다' 같은. 바람을 타고 혹시라도 병이 옮을까 봐. 환경도 열악해. 방 여러 개가 쭉 이어진 공동주택 형태였는데, 작은 방 한 칸을 8명이 같이 썼거든. 먹을 것도 변변치 않고 특히 겨울엔 너무 추워. 아침에 일어나면 걸레가 얼어 있을 정도야. 남철이는 소록도가 병원이나 요양소라기보다 일종의 강제수용소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 하지만 간장에다 밥만 먹어도 남철인 마음이 편했대. 이곳엔 자신을 이상하게 보는 시선이 없었으니까. 고단한 삶이지만, 남철인 어느덧 20대의 청년이 됐고, 소록도에서 일자리도 찾았어. 환자 중 몇 명을 '의료조무원', 일종의 간호조무사로 뽑았는데, 남철이도 뽑힌 거야. 아주 성실했거든. 혈압 재고, 열 재고, 이런 업무를 했지. 그런데 소록도는 몇 천 명이 사는 일종의 큰 마을이잖아. 남녀노소 여럿이 모여 살다 보니, 그 안에서 사랑도 싹 텄어. 바닷가 마을에서 조금 벗어나면 아주 예쁜 바위가 있는데 '연애바위'라는 바위가 있어. 왜 연애바위예요. 그게 거기서 많이 사랑을 나눴는가 보지... -이남철, 한센병력자, 소록도 거주 한센병 환자로 소록도에 들어왔지만, 사랑은 그 무엇도 막을 수 없어. 주변에선 결혼 적령기가 된 처녀, 총각들을 사람들은 막 이어주려고 해. 70년도에 와서 74년도 열아홉 살에, '너 그리 시집 가라' '시집 갈래?' 그러는 거예요. 난 모르겠다고 얘기했었지. 아무것도 몰라 그때는. 그러면 '그리 가라' 해서 (사람들이) 다 결혼 날짜 잡아놓고 다 해줘요. -정월선, 한센병력자, 소록도 거주 같이 한 마을에 살고 교회도 다니고 그러니까 거의 매일 보니까. 나도 장가를 한번 가봐야 될 거 아닙니까. 그래서 간다고 했죠. 결혼하는 날 같이 좋은 날이 없어. 우리는 생일이 한 날이에요. 만나보니까 생일이 같더라고. 그런 사람 없어요 소록도에. 옛날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어요. -이남철, 한센병력자, 소록도 거주 생일이 같은 내 운명의 상대. 그렇게 식을 올린 게 50년 전이야. 생일도 같으시더니 두 분 정말 닮으셨지? ▲ 아이를 가질 수 없다 그런데 소록도엔 결혼의 조건이 있었어. 소록도의 남자들은 결혼 전, 어떤 수술을 해야 했어. 수술의 이름은 '단종수술'이야. 당시 소록도 결혼의 조건이 적힌 문서가 있어. 음성으로 치유되었으나 사회 복귀하여 생활하기 어려운 노령자, 무의무탁자, 신체장애 환자들이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도록 부부 동거를 허용 하고 있다. 그러나, 가임환자가 동거를 원할 때에는 불임시술 후 동거하도록 하고 있다. 결혼을 하려면 불임수술을 하라, '단종수술'은 남성 불임수술을 뜻해. 한센병은 유전병이 아니라는 걸 당시에도 알고는 있었어. 설사, 어떤 병이 유전된다고 해서 임신을 금지한다는 게, 아니 이건 금지 정도가 아니지. 아예 임신을 할 수 없게, 불임수술을 받아야만 결혼을 허가한다는 건, 정말 말이 안 되는 일이잖아. 심지어 음성으로 치유된 사람도 불임수술을 해야 한대. 남철 씨는, 다행히 수술을 피했어. 몇 년마다 소록도 원장이 바뀌었는데, 마침 남철 씨가 결혼식을 올릴 당시의 원장은, 엄격한 스타일이 아니었거든. 얼마 뒤, 남철 씨와 월선 씨 사이엔 곧 아기도 생겼어. 그런데 두 분은 기뻐할 수가 없어. 소록도만의 기막힌 법이 또 하나 있었거든. 여기서 임신 못 하게끔 돼 있거든. 임신했다고 하면 병원 법을 어겼다고 해서 그렇게 낙태를 시켜버려요. 낙태할 때도 애기 엄마들이 많이 죽었대요. -이남철, 한센병력자, 소록도 거주 임신을 하면, 낙태를 시킨다는 거야. 당시 보건사회부는 소록도에 이런 지시 사항을 하달했어. '임신 가능한 자에 대해서는 단종수술을 적극 장려하여 가족계획에 완벽을 기할 것' '임신 가능한 자를 항상 조사 파악하여 출산을 최대한 억제토록 할 것' 이에 따라 소록도 병원은 매월 정기적으로 젊은 부녀자들의 임신 여부를 검진하고, 출산을 금지했어. 혼전 임신이나, 단종수술을 피한 틈에 임신이 되기도 했는데, 임신한 걸 들키면 낙태를 시킨 거야. 남철 씨와 월선 씨는 첫 아이에 이어, 두 번째 아이도 지킬 수 없었어. 그렇게 소록도의 많은 여인들이 아이를 잃었어. 저 같은 경우는 말하자면 이렇게 비밀로 임신했잖아요. 어느 날 간호사하고 의사하고 간호과장하고 다 와서 여자들 싹 나오라는 거예요. 이제 우리 동네에 그런 임신자가 생겼으면, 그거 보고가 들어가면, 딱 이렇게 사람들 다 눈치를 보고 배도 보고 행동도 보고 그래 갖고 딱 집어내. 도살장에 끌려가듯이 그렇게 끌려갔다고. 까마귀가 까마귀 낳지, 까치를 낳을 수가 있느냐고. 말하자면, 한센인이 한센인 낳는다는 그런 식으로. (낙태할 때) 그 주사를 맞았지 싶어요 여기(배)다가. 막 몸부림하다가 뒹굴다가 (태아가) 나와. 뒹굴다가. -장인심, 강제 낙태 피해자, 소록도 거주 아까 앞에 보여준 태아 표본 사진 있었지? 표본으로 만들어졌다 방치된 그 태아들은 소록도의 한센병 환자가 잉태했다는 이유로, 강제 낙태되어 세상을 만나지 못한 태아들이었어. 아이를 잃은 것도 원통한 데, 낙태 직후 너무도 끔찍한 일을 겪은 분도 있어. 세탁소 업무를 하다가 소록도에서 남편을 만나서 연애를 하다가 아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임신 사실을 숨길 수가 있었으나, 결국에는 배가 나오기 시작하자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었고 결국 병원으로 끌려갔습니다. (중략) 낙태 수술을 당하고 집에서 쉬고 있는데 어느 날 경찰이 오더니 아기를 보러 가자고 해서 뭔지 모른 채 끌려갔습니다. 병원에 갔더니 사산해서 낳은 태아를 알코올에 담긴 병에 넣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정말 통곡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나고, 차라리 보여주지를 말지.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악독합니다. - 낙태 피해 진술서 中 태아 표본을 보여준 의도가 뭐였을 거 같아? 한센병 환자는 절대로 임신해서는 안 된다는 법칙을 알려주려는 본보기용이었고 해. 남철 씨와 월선 씨가 두 번째 아이도 잃고 슬픔에 빠져 있는데, 마을 스피커가 떠들썩하게 울려. 이남철 씨, 지금 바로 수술실로 오세요 라며. 이제 더 버티지 말고 남철 씨에게 단종수술을 받으러 오라는 호출이야. 온 동네방네. 그러니까 남이 다 알아. 모르는 사람 없어. -정월선, 한센병력자, 소록도 거주 기분 나쁜 것 보다도, 진짜 진짜 죽겠대. 마음이 아파. 인간인데 인간 대접도 못 하고, 이렇게 살아야 되나. 그 당시에 딴 것이 강제가 아니고 이게 강제 수용소다. 그런 생각도 했었죠. 내 마음대로 못 하니까 강제 수용소나 마찬가지지. -이남철, 한센병력자, 소록도 거주 남철 씨는 결혼 4년 만에 결국 단종 수술대 위에 누웠어. 그마저 전문의사가 수술한 것도 아니야. '의학강습소' 출신에게 수술을 받았어. 한센병 환자 중 몇몇을 선발해 기초의학이나 해부학 공부를 시키는 의학강습소라는 게 있었거든. 여기 출신들에게 수술까지 시켰던 거야. 아예 복원이 불가능하게 수술하는 경우가 많았대. 한센병에 걸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남철 씨와 월선 씨는, 평생 아이를 갖지 못했어. ▲ 섬 안에 있던 아이들 그런데, 아까 무사히 태어났던 아이, 기억해? 그 아이는 어떻게 소록도에서 태어날 수 있었을까? 소록도에는 5~6천명이라는 많은 사람이 살다 보니, 감시의 눈이 닿지 않은 곳도 있었어. 원장마다 관리 스타일이 좀 달랐다고 했잖아. 임신 가능한 여성에 대한 조사가 좀 느슨했던 때였던 거지. 태어난 아이의 부모는 둘 다 한센병에 걸려 소록도에 들어왔다가, 결혼을 했고, 아이를 가졌어. 임신 기간 동안 엄마는, 점점 불러오는 배가 티나지 않게 천으로 배를 꽁꽁 동여맸어. 같은 방을 쓰는 사람들은 아무도 비밀을 말하지 않고 임신 사실을 숨겨줬어. 그렇게 세상에 태어난 아기의 이름은 김인수(가명). 그런데 인수가 몸이 좀 약해 보여. 임신 기간 내내 엄마가 맘을 졸이며 살았으니 그럴 만도 하지. 몸이 약해 오래 못 살 거 같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다행히 인수는 살아 남았어. 저희 어머님이 19살에 소록도 들어왔어요. 저희 아버님하고 소록도에서 만나 가지고 이제 두 분이서 부부의 연을 맺고, 저를 낳은 거지요. 저를 낳으시고, 이제 감춰야 되니까, 애를. 감출 데가 뭐 따로 없어서, 긴 광목 치마를 입고, 그 치마 속에 저를 감췄어요. 그 방 식구들이 여덟 명이 다 와 갖고, 한 집에 저희 어머니를 감추고, 저를 감추고 막 그랬대요. 애다 보니까 울음도 울어야 되고. 배고프면 울어야 되고. 젖을 못 먹으니까 울어야 되고. 그러니까 그게 뭐 얼마나 갔겠습니까? 그래 갖고 이제 발각이 돼 갖고... -김인수(가명), 한센병력자 2세 직원은, 엄마 품에 안겼던 인수를 떼어내서 소록도 안의 보육소로 데려갔어. 한센병에 걸린 부모와 함께 섬에 들어왔거나, 인수처럼 몰래 태어난 아이들을 키우는 보육소가 있었거든. 섬 밖에서 태어났든 섬 안에서 태어났든, 아이들에겐 부모가 있잖아, 그것도 같은 소록도 안에. 왜 아이들을 부모에게서 떼어내 보육소로 데려갔을까? 소록도에선 한센병 부모에게 태어난 아이들을 부르는 단어가 있어. 바로 '미감아'. '한센병 환자 부모에게서 태어나 아직 한센병에 감염되지 않은 아이'라는 뜻이야. 아직 병에 걸리지 않은 아이라는 건, 이건 그냥 건강한 아이라는 거잖아. 근데 '미감아'라는 말엔, 언젠간 걸릴 수 있을 거라는 의미가 내포돼 있는 거야. 아이들이 한센병 부모와 같이 살다가 전염이 될 수 있다며, 보육소에 모아서 키웠어. 보육소는 1번지, 직원 구역에 있었어. 그럼 2번지에 있는 엄마는 보육소를 방문할 수 없어. 면회 불가야. 두 구역을 나눠놓은 철조망을 넘을 수 없으니까. 엄마는 아이를 볼 수도 없다는 의미야.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잡혀 갔다고 그러는데, 뺏어간 거지. 우리 어머니께서 저를 보육원에 뺏기고 나서 3년을 고개 너머, 저를 보지는 못해도 내가 있는 곳을 향해서 3년을 이제 산을 넘었는데. 거기 가서 두세 시간 울고 3년은 우셨답니다. 서로 만나지도 못하고, 있는 곳으로 향해서 이제 내 자식 뺏겼다고. 3년을 하루도 안 빠지고, 365일 1년에 한 번도 안 빠지고, 철조망 밑에서 아들 부르면서 이제 우시는 거지. 너무나 눈이 전부 뭉개져가지고 시력이 완전히 갔어요. 눈이 짓눌려가지고, 봉사가 됐더라고. -김인수(가명), 한센병력자 2세 자식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지만, 매일같이 자식과 가장 가까운 곳까지 찾아와 아들을 부르며 우는 엄마. 한센병 후유증인지, 정말 눈물에 짓무르신 건지, 인수를 뺏긴 엄마는 결국 시력도 잃으셨어. 아기를 가질 수도, 낳을 수도, 키울 수도 없는 소록도. 그럼 보육소로 간 인수는 잘 지냈을까? 보육소 분위기는 소록도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다르지 않아. 아직 어린 아이들인데 완전 군대식 관리를 해. 아침 점호를 하고, 체벌도 있어. 큰 아이들이 어린 아이들을 때리기도 해. 무엇보다 한창 자라나는 아이들인데 먹을 것이 부족해. 최고로 기억에 남는 게 배고픔. 진짜 배고픔은 못 참겠더라고요. 명절이 되면 직원들은 막 고기에 뭐 해서 먹고 이제 구정물 통에 버려요. 그럼 애들이 그 뼈다귀 건져 먹으려고 구정물 통에 손을 넣어서 그 뼈다귀 건져서 뜯어먹고 그랬어요. -김인수(가명), 한센병력자 2세 ▲ 통곡의 수탄장 그런데, 이렇게 항상 배고픈 아이들이 유독 기다리는 날이 있었어. 그날이 오면, 갑자기 보육소에서 아이들을 깨끗이 씻기고 1년에 딱 두 벌 주는 외출복도 입혀. 지금 소록도 가시면 '통곡의 신작로' 일본말로 신작로라고 해요. 이 통곡의 신작로인데 한 달에 두 번도 아니고 세 번도 아니고 딱 한 번이야. '내일 아침에 엄마 아빠 만나러 간다. 먹을 거 많이 갖고 오겠다'… 그래서 저희가 이제 면회 때만 되면 잠을 안 자요. 애들이. -김인수(가명), 한센병력자 2세 한 달에 한 번, 엄마 아빠를 만나는, 면회 날이야. 한 달 내내 이날만 기다려 온 인수 엄마도 밤잠을 못 이뤘어. 추운데 동상은 안 걸렸으려나... 혹시라도... 우리처럼 한센병이 생기지 않았겠지... 아껴뒀던 쌀로 떡을 찌고, 계란을 삶고, 감자와 고구마도 쪄. 드디어 면회 당일이야. 엄마, 아빠들이 먼저 집을 나서. 1번지와 2번지, 직원 지대와 환지 지대 사이, 철조망이 쳐진 경계선 근처에 도착해. 동네별로, 아이 나이별로, 어른들이 먼저 한 줄로 길게 자리를 잡아. 소록도 안의 모든 부모가 한 번에 나와 줄을 서는데, 그 길이가 수백 미터는 됐어. 푸른 바다를 옆에 끼고 길게 늘어선 줄. 직원들은 부모들에게 바람을 마주해서 서라고 지시해. 행여나 부모를 스친 바람이 병을 옮게 할 까봐. 엄마, 아빠들이 자리를 잡으면, 이제 보육소에 있는 아이들이 출발할 차례야. 나이순으로 한 줄로 서서 하나, 둘, 하나, 둘, 발맞춰 가. 드디어 저 멀리, 엄마, 아빠들이 서 있는 모습이 보여. 두리번거리며 각자 자신의 엄마 아빠를 찾아 그 앞에 서. 한걸음, 두 걸음, 아이가 엄마에게 다가가려는 그 순간! 멈춰! 뒤로 뒤로! 2미터 간격 유지한다! 선생님이 호루라기를 불며 제지해. 엄마와 아이는, 2미터 간격을 유지해야 해. 그보다 가까이 다가갈 수는 없어. 엄마를, 아이를, 오직 눈으로만 봐야 해. 바라만 볼 뿐, 만지지도 안을 수도 없어. 아까 처음에 보여줬던 아이들이 일렬로 서 있었던 사진, 기억나? 사실 그게, 아이들을 마주 보고 엄마와 아빠가 서 있었던 거야. 사진 전체를 다시 보니 어때? 여기 서 있었던 아이 중 한 명이었을 인수 씨의 이야기, 들어볼게. 사감 선생이 호루라기를 불면 부모들은 가만히 있고 자녀들은 3보 이상 딱 가요 부모들 앞에. 그런데 바짝도 못 가고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손도 한번 못 잡거든요. 손 한 번 딱 잡으려고 하면 선생이 뛰어와서 부모 있는 데서 막 몽둥이로 때려 버리고 이랬거든요. 부모님들이 바리바리 싸가지고 와요. 내 자식 줄 거라고. 원래 그 자리에서 먹어야 해요. 왜냐하면 그걸 가지고 또 기숙사에 들어가면 큰 애들한테 다 뺏겨요 작은 애들이. 서로 배가 고프니까. 1시간 다 끝나면 면회 시간 끝나면 또 저쪽에서 호루라기 딱 불면 딱 헤어져야 돼. 이제 헤어질 때는 바로 눈물 바다입니다. 통곡하고 땅을 치고 부모들은 난리고 또 한 달을 기다려야 되니까. 한 서려서 울고 그렇습니다. -김인수(가명), 한센병력자 2세 이 길을 사람들은 탄식의 장소라는 의미로 '수탄장'이라고 불렀어.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통곡이 멈추지 않는 엄마와 아빠. 더 슬픈 사실은, 아이들은 너무 어릴 때부터 부모와 떨어져 살다 보니까, 부모에 대한 그리움보다 배고픔이 더 절실해. 한달에 한 번은 배불리 먹을 수 있으니까. 엄마, 아빠가 던져주는 음식을 허겁지겁 주워 먹기 바빠. 엄마는 행여 아이가 선생님에게 혼날세라, 아이를 와락 안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누군가는 이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어. '아이를 엄마에게서 데려간 게 아니라, 아이를 엄마에게서 뜯어갔다'고. 그렇게 눈물의 면회가 이뤄졌던 '수탄장'. 눈앞에 아이가 있는데 얼마나 안고 싶었을까. 이 사진이 참 저한테는 진짜 이 가슴 아프고. 부모가 있는데도 한 달에 한 번을 한 시간을 주어진 시간에서 만나야 되고. 죄인도 아닌데 부모를 함부로 만날 수도 없는 그런 세상이 왜 있었을까. 지금 생각하면 그 당시의 사회가 참 원망스럽고. 한센병이, 병력자들이 무슨 사회적으로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오로지 내가 병을 갖고 싶다 해서 병든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사회적으로 폄훼하고 완전히 죄수 수용하듯이 수용하고 이래 했을까. 생각만 하면 참, 하… 목이 멥니다. -김인수(가명), 한센병력자 2세 한 달에 한 번 면회마저도,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끝이야. 중학교는 소록도 밖으로 가야 했거든. 한센병 환자의 자녀들만 따로 격리해서 교육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삼육학원이란 기숙학교가 대구에 있어. 인수는 엄마, 아빠와 떨어져서 대구삼육학원으로 갔지. 이 곳 생활은 어땠을까? 군대더라고 군대. 신입생 1년동안 외출도 안 돼요. 교육기관이 아니고 순 사람 잡는다더라고. -김인수(가명), 한센병력자 2세 매주 토요일은 이유없이 매를 맞는 날. '빠따 맞는 날'이라고 했을 정도야. 신입생들은 1년 동안 외출도 안 돼. 2학년이 됐어도 엄마를 만나러 갈 수는 없어. 소록도에서 외부인이라고 자녀들의 출입을 통제했거든. 부모님과는 편지나 전보로만 연락할 뿐이야. ▲ 무너진 철조망 삼육학원의 생활이 너무 고돼서 견딜 수가 없던 인수는, 학교를 뛰쳐나왔어. 아는 사람, 기댈 친척 한 명 없다 보니 살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어. 공장, 철길 보수, 양계장, 농사일, 닥치는 대로 일을 하고 지내던 스무 살 무렵. 아버지로부터 전보 한 통이 왔어. '인수야, 철조망이 철거됐다' 직원과 환자 지대를 가로막았던 철조망을 없앴다는 거야. 인수 씨는 곧바로 소록도로 달려갔지. 제가 가장 행복했던 것은요. 철조망이 철거되는 그날이었습니다. 부모를 시간제한 없이 만날 수 있겠다. 이제 부모도 가서 품에 안을 수 있겠다. 철조망이 철거되고 엄마 품에 안겨서. 나이가 들었지만 응석도 부릴 수 있고. 또 엄마 볼도 한번 만져볼 수도 있고. 또 엄마가 주시는 밥도 직접 떠먹여 줄 수도 있고. 제가 어머니 밥을 떠먹였거든요. 그래서 그때가 가장 행복한 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제가 '엄마'라고 부르니까 품에 안고 얼굴을 한 1시간 동안 만지더라고요. 얼마나 보고 싶었겠습니까. 얼굴을 직접 보고 싶은데 한 시간 동안 안 놓고, 좀 놔라 해도 안 놓더라고. -김인수(가명), 한센병력자 2세 그렇게 품에 안고 싶던 내 아가 인수가, 다 큰 어른이 되어서야 엄마 품으로 돌아왔어. 말랑했던 아가의 손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거칠고 굵은 남자 손이 되었어. 덩치는 엄마보다 훨씬 더 커졌지만, 여전한 내 아가. 아들의 얼굴을 끝도 없이 어루만지는 엄마의 마음은 어떠셨을까. ▲ 낙인의 시작 아이를 가질 수도, 낳을 수도, 키울 수도, 그리고 만날 수도 없는 섬, 소록도. 한센병 환자들의 이 한 많은 삶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그 시작은 일제 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잇따라 승리한 일본은, '1등국' '문명국'에 도취돼 있었어. 이때 일본에선 '우생학'이 유행했어. 인간을 유전학적으로 개량해서 우등한 인류를 만들겠다는 게 우생학의 기본 개념이야. 우생학은 우월한 사람이 더 많은 자손을 남기도록 하고, 유전병과 장애를 지닌 사람의 출산을 억제시킨다는 논리로 이어져. 이 우생학을 근거로, 일본에서 '나예방법'이 만들어졌어. 예방이란 이름이 붙었지만, 한센병 환자들을 강제수용하는 법률이야. 일본에선 1909년부터 한센병 환자들을 강제 격리하고, 단종과 낙태 수술을 하기 시작했어. 그로부터 7년 후인 1916년, 일본은 식민지였던 조선의 소록도에도 한센병 치료 병원 자혜의원을 개원했어. '환자심득서'. 심득, 마음에 새기라는 거야. 일본은 소록도의 모든 환자들에게 이걸 암기하도록 시켰어. 입원환자는 치료상은 물론 위생 기타 동작 등에는 직원의 지시를 절대 준수한다. 환자는 허가없이 일정구역 외로 나갈 수 없다. 위 심득을 위반하는 자에 대해서는 그에 상당한 처분을 한다. 일본은 한센병 환자의 치료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환자를 강제 수용하기 위한 곳으로 소록도를 관리했어. 그리고 1933년, 악명높은 스오 마사토가 4대 원장으로 부임하면서부터 소록도 최악의 암흑기가 펼쳐져. 스오 원장은 소록도 자혜의원을 '소록도 갱생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한센병 환자는 전국 어디에서든 발각되는 즉시 소록도로 강제 이송하도록 했어. 700명 정도였던 환자 수는 5,000 명으로 급증해. 이 많은 환자를 수용하려면 건물이 필요하잖아. 스오는 환자들을 동원해 건물을 신축하고, 도로를 확장했어. 치료하라고 강제 수용해 놓고, 강제 노역을 시킨 거지. 소록도 환자들의 분노도 쌓여가는 가운데, 스오 원장이 이번엔 환자들의 돈을 걷어 가기 시작해. 돈을 걷은 이유는? 자신의 동상을 건립한다고. 이 사진을 봐. 동상을 만드는 데 쓸 커다란 바위를 환자들이 옮기고 있는데, 그 바위 위에 남자 한 명이 우뚝 서 있어. 이 남자는, 스오의 양아들이자 오른팔이었던 사토야. 바위 위에 올라서서 일하는 환자들에게 채찍을 휘둘렀어. 이런 상황이 자랑스럽다는 듯 포즈를 잡고 사진 찍은 걸 봐. 얼마 후, 동상이 완성되자 스오 원장은 아주 성대한 제막식을 열었지. 그리고 매일 새벽, 환자들이 동상 앞에서 참배하도록 했어. 심지어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군수품 생산에도 환자들을 동원했어. 연료로 쓸 송진 6,000kg, 가마니 30만장, 토끼 가죽 1500장, 숯 3만포를 매년 생산했다고 해. 그러다보니 환자들의 손발은 상처투성이가 되고, 병세는 나날이 악화돼. 가혹한 매질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생겨. 도주하려고 바다에 뛰어들었다가 거센 조류에 휩쓸려 물에 빠져 죽기도 했어. 만약에 소록도를 탈출하다 잡히면, 강제 단종수술을 시키는 거야. 한센병 환자들은 죽음조차 편안히 맞지 못했어. '환자심득서' 마지막 조항엔 이런 문구가 있어. '27항. 학술 연구를 위해 시체 해부가 필요한 경우 이에 응해야 한다.' 소록도 사람들의 특별한 기도문이 하나 있었다고 해. '주님, 부디 저를 부르실 땐 주일날 불러 주소서'라고. 그럴 수만 있다면, 일요일에 죽게 해달라는 거야. 일요일엔 직원들이 쉬어서, 해부를 피할 수 있었거든. 죽으면 무조건 해부를 다 해버려요. 그러니까 이제 공휴일 날 주일날은 해부를 안 해. 그러니까 죽더라도 해부 안 하고 화장하면 좋겠다. 그래서 그렇게 원을 해. 그러니까 이제 병들어 죽고 그냥 죽고 해부해서 죽고 세 번 죽는다고 그러잖아요. 그 누가 해부하는 걸 좋아하겠어. -강선봉, 한센병력자, 소록도 거주 몇 년 뒤, 해방이 됐어. 일본 직원들은 다 떠나고, 소록도엔 우리나라 직원들이 왔어. 우리나라 직원은 일본 직원과 달랐을까? '환자심득서' 대신 우리나라 직원들이 만든 '소록도 환자 준수사항' 문서에는 이런 내용이 있어. '환자는 치료는 물론, 위생 기타 일상생활에 있어서 직원의 지시를 엄수하여야 한다.' '부부동거는 정관수술을 받은 자에 한하여 이를 허가한다.' '미감아동은 절대로 환자와 동거함을 엄금한다.' '환자가 사망하였을 때는 학술 연구상 필요에 따라 사체를 해부할 수 있다.' - 수용 환자 준수사항 中 한센병 환자를 대하는 태도는 해방 후에도 다를 것이 없었어. 시신 해부도 1960년까지 이어졌고, 한센인에 대한 강제 격리 정책은 1970년대까지 유지됐어. 낙태 수술은 1980년대 후반까지 공공연히 이루어졌고, 심지어 단종수술은 1992년까지 시행됐어. 그런데, 이런 의문 들지 않아?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이 모든 말도 안 되는 정책들은, 한센병의 전염력에 대한 우려 때문이잖아. 옆에 서 있거나, 바람만 불어도 쉽게 전염된다고 생각했지. 그럼, 소록도에 근무했던 수많은 직원 중 한센병에 전염된 사람은 몇 명일까? 정답은 0명, 아무도 걸리지 않았어. 애초에 한센병은 전염력이 매우 낮아. 같은 3종 전염병인 결핵과 비교해도 2000분의 1 수준이야. 더구나 한센병 치료약도 있었어. 1940년대 초반 한센병 특효약인 DDS가 발명됐고, 1955년경에는 전국적으로 확대 보급됐어. 1958년, 동경 국제 나학회에선 '한센병은 완치된다'고 선언도 했어. 소록도에서도 1950년대 후반부터 치료약 덕분에 음성 환자가 늘고, 1960년대부터는 대부분의 환자가 완치되고 있었다고 해. 두 아이를 낙태시키고, 단종 수술을 받아야 했던 남철 씨와 월선 씨가 결혼식을 올린 게 1974년이었거든. 두 분은 이미 음성 판정을 받은 후였어. ▲ 소록도를 떠나지 못한 이유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하기도 해. 1970년대에 강제 격리 정책이 폐지됐으니, 그렇게 힘든 소록도에서 나와도 됐던 거 아니냐고. 그러면 아이를 가질 수도, 지킬 수도 있었던 거 아니냐고 말이지. 그럼, 한센병 환자들이 소록도를 떠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직접 안 겪어본 사람들이 하는 소리예요. -이남철, 한센병력자, 소록도 거주 건강하면 남의 일이라도 할 수 있지. 우리는 남의 일도, 누가 시켜줘요? 다른 한센 말고 장애자들 다 지금에 와서는 할 수 있어도, 우리 병 걸린 사람 중에는 직장 갖고 사는 사람 없어요. 안 받아주잖아. -정월선, 한센병력자, 소록도 거주 한센병 환자란 낙인이 찍힌 순간, 평범한 삶은 사라져. 마을 사람들이 단체로 한센병 환자 가정으로 몰려와서 마을을 떠나라고 강요해. 가족들이 호적을 파버려서 호적이 없는 분들도 많아. 이발소, 목욕탕, 식당... 너무도 일상적인 장소에서도 한센병 환자들은 눈총을 받고, 쫓겨나곤 했어. 항구의 상인들은 한센병 환자들이 물건을 사면, 손 대신 집게로 돈을 받아서 바닷물에 담그는 사람도 있었대. 소독해야 한다면서 말이지. 한센병 환자들이 치료를 목적으로 어린이를 공격한다는 헛소문이 돌기도 해. '개구리소년 실종 사건' 알지? 초등학생 다섯 명이 도롱뇽 알을 주우러 간다며 집을 나선 뒤 실종된 사건. 이때도 한센병 환자들이 범인이라는 허위 제보 전화가 들어왔어. 성서초등학교 학생들이 실종되고 경북 경찰청 폭력계에 한 제보가 들어왔다. '나환자 수용소의 지하실에 매장되어 있으니 파도록 하라'… 00일보는 매우 구체적으로 '칠곡나환자촌 건물지하실에 실종성서국교생 5명 암매장'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실었다. -개구리소년 실종 사건 한센환자 관련 기사 차별과 편견으로 부풀려지는 헛소문. 허위제보 전화 한 통에 한센병 환자들을 의심하는 기사가 나왔어. 한센병 환자들이 항의하자 그들은 '한센병 환자들이 폭력적이다'는 기사를 덧붙여. 얼마 지나지 않아 한센병 환자와 개구리소년 실종사건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어떤 곳에서도 사과나 정정 기사는 찾아볼 수 없었어. 현실이 이러니 한센병 환자들은 소록도를 나간다는 건 꿈도 못 꿔. 음성 판정을 받았어도, 그들에겐 여전히 한센병 환자라는 낙인이 찍혀 있으니까. 소록도를 나온 사람들이 살만한 정착촌이 전국 곳곳에 만들어졌지만, 주변 마을 사람들의 반대가 극심해. 정착촌 아이들과 자신의 아이들이 같은 학교에 다닐 수 없다고, 강력하게 반대 시위를 벌였지. 차별은 한센병 환자 2세까지도 이어졌어. 엄마가 꽁꽁 숨겨 낳은 인수 씨는, 본인은 병에 걸린 적이 없는데도, 한센병력자 자녀라는 게 알려지면서 취직도 어려워. 우리나라는 이미 1980년대에 한센병 퇴치 국가가 됐지만,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편견은 그 이후에도, 어쩌면 최근까지도 계속되고 있어. ▲ 치유를 위해 나선 사람들 2004년 5월. 서울의 한 변호사 사무실로 일본인 변호사가 연락을 해왔어. 소록도와 관련해서 한국 변호사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다는 거야. 일본인 변호사가 소록도를? 그것도 도움을 청한다? 대체 어떤 내용이었을까? 일본에 많은 한센병 환자들이 있었고, 우리보다 먼저 강제 격리의 피해를 당했다고 했지. 2001년, 일본의 한센병 강제 격리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대상으로 국가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고, 승소했어. 한센병 피해자에 대해 조사하던 일본 변호인단은 한국에도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소록도 갱생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 그래서 한국 변호사들에게 연락했던 거야. 정말 저희로서는 정말 놀랐죠. 그리고 좀 민망하기도 했고요. 나름은 그래도 우리가 인권 활동을 하고 있다고 조금 생각을 했는데 한센인들에 대해서 너무 무지하고 무관심했다는 그런 내용. 일본 변호사들은 이렇게 오래전부터 그런 문제에 천착해서 이렇게 소송을 해서 승소하고. 한국에까지 와서 한국 피해자들에게까지 이런 활동을 하려 하고 있고. 좀 부끄럽기도 하고 그래서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했죠. -박영립 변호사, 한센병 관련 소송 담당 피고는 일본 정부, 원고는 소록도의 한센병 환자들이야. 한센병 환자들로부터 피해 내용에 대한 진술을 듣고 증거를 찾아야 해. 한국 변호사가 몇 사람이 나눠가지고 빠르게 요점만 정리해서 그걸 일본에 보내면, 공동작업을 직접 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 그러니까 그 일본 변호사, 도쿠다 변호사님의 말씀이, 사실은 저희들이 좀 신선한 충격 같은 것을 받았는데. 이 진술서 작업을 하면서 그분들에게 진술할 기회를 드림으로써 그분들이 가슴에 가지고 있는 그 한을 풀어내고, 조금이라도 치유의 기회를 드리고 회복할 수 있는 그런 기회를 드리는 것이 또 중요하다… 승소를 받게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과정이 더 중요할 수 있다… -박영립 변호사, 한센병 관련 소송 담당 일본 변호사들은 진술서 작업을 위해 한 달에 한두 번 소록도를 꾸준히 찾았다고 해. 일본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들어와서 녹동항까지 버스와 택시를 타고 이동하고, 또다시 녹동항에서 배를 타고 소록도로. 힘든 여정일 텐데도 3년을 쉬지 않고 찾아왔어. 일본 변호사들은 오히려 가해자가 내민 손을 기꺼이 잡아 준 소록도 주민들에게 감사하다 고 했대. 그때마다 우리 한국 변호사님들도 함께 했지. 그들과 포옹하고, 손을 잡으며, 그동안 아무도 피해라고 말해주지 않았던, 그들의 피해 사실을, 일생을, 기록하셨어. 변호사들이나 그런 분들이 우리를 찾아서 가까이 하고 그러니까, 우리 인권이 살아나더라고. 인간적으로 대해주고 그러니까. 인간 대접받은 거… 가장 행복해요. -이남철, 한센병력자, 소록도 거주 우여곡절 끝에 2006년 일본 정부는, 일제 강점기 소록도에서 강제 격리, 강제 노역으로 피해를 본 우리나라 한센병 환자들에게도 피해 보상을 하기로 결정했어. 그렇게 우리나라 정부에 대한 국가 배상 청구 소송도 진행됐어. 1심 재판부는 정부의 책임을 인정하고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어. 하지만 우리 정부는 판결 보름 만에 항소했어. 낙태와 단종수술은, '당사자들의 동의를 받은 것으로 강제성이 없었다'고 주장했어. 소록도 사람들은 말해. 소록도에 살기 위해서는 낙태 수술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도 아이를 키우고 싶었다 라고. 그렇게 재판은 2심에 3심까지 이어졌어. 그리고 6년 만에, 마침내 '정부는 단종 낙태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배상하라'는 대법원 판결이 내려졌어. '신체를 훼손당하지 않을 권리'는 생명권과 더불어 인간 생존의 기본적 권리이며, 신체의 자유 중에서도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다. 또한 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하며, 국가는 이를 보장하고, 모성의 보호를 위하여 노력할 의무가 있으며, 모든 국민은 보건에 관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도록 되어 있다. -판결문 中 ▲ 소록도에 없는 두가지 소록도엔 두 가지가 없다는 말이 있어. 바로 '아이'와 '무덤'이야. 소록도에서 생을 마친 환자들은 화장 후 '만령당'이란 곳에 안치돼. 10년간 유골을 찾아가는 사람이 없으면, 만령당 뒤 봉분에 합장돼. 자식이 없는 분이 많다 보니까, 지금 그 곳엔 1만기가 넘는 유해가 잠들어 있어. 한센병은 완전히 정복된 병이야. '리팜피신'이란 항생제를 한 번만 복용하면 나균의 전염력이 99.99% 없어져. 결핵이나 성병 등과 달리 유독 한센병에 대해서만 강제격리정책이 시행됐던 이유는, 다른 전염병과 달리 외모에 변형이 생겼기 때문일 거야. 눈에 보이는 것에 따른 차별과 편견. 지금, 우리는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서울에서 5시간 차를 타고 가면 소록도까지 이어져. 2009년 소록대교가 완공돼서 차로도 갈 수 있거든. 현재 소록도는 주민 거주지 외엔 누구나 방문이 가능해. 지금 소록도에 계신 분들은 모두 한센병이 완치된 분들이고, 전염력도 없는 분들이야. 힘겨운 인생이 담겨 있었지만, 고향이 되어버린 소록도에서 여생을 보내고 계신 분들. 이제라도 그분들이 편안한 시간을 보내실 수 있길 기원해.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
[꼬꼬무 찐리뷰] 53년 전에도 '비상계엄' 있었다…박정희 유신시대와 긴급조치의 진실 [꼬꼬무 찐리뷰] 53년 전에도 '비상계엄' 있었다…박정희 유신시대와 긴급조치의 진실 등록일2025.03.14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13일 방송된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방송인 홍석천, 배우 박효주, 아나운서 이인권이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서울 한복판에 나타난 탱크 때는 53년 전 서울, 평범한 가을날 저녁이야. 직장인들은 퇴근을 서두르고, 동네 곳곳에선 저녁을 준비하는 음식냄새가 솔솔 풍기고 있어. 그런데 그때 갑자기, 탱크를 몰고 중무장한 군인들이 서울 도심 한복판에 나타났어. 당시 태평로에 있던 국회의사당, 그리고 광화문 근처 중앙청에 서 있는 탱크의 모습이야. 시간은 저녁 7시, TV와 라디오를 통해 깜짝 놀랄만한 소식이 전해져. 박정희 대통령 각하는 10월 17일 오후 7시를 기해 비상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1972년 10월 17일 19시를 기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현행 헌법의 일부 조항 효력을 정지시킨다. 이와 같은 비상조치를 국민 앞에 선포한 박 대통령 각하는 우리 모두 일치단결하여 민주제도의 건전한 발전과 조국 통일의 기원이 성취되는 그날까지 힘차게 전진해 나갈 것을 촉구했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이 선포된 거야. 비상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있을 때 선포할 수 있어. 보통 이제 한국에서 비상계엄은 어떤 굉장히 큰 사회 혼란기나 아니면 6.25 전쟁과 같은 정말 전시에 주로 선포가 됐어요. 그런데 이 1972년 10월 17일에 선포된 비상계엄은 사실은 굉장히 평온한 때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때에 선포가 됐고.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혼란이라든지 어떤 위기라든지 뭐 전시라든지 이런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던 시기인데 느닷없이, 그야말로 느닷없이 비상계엄이 선포가 되었던 거죠. -오제연,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이렇게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앞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해줄게. ▲비상계엄과 특별선언 박정희 대통령은 비상계엄과 함께 '10.17 특별 선언'을 발표했어. 그 내용은 이래. 1972년 10월 17일 19시를 기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현행헌법의 일부 조항 효력을 정지시킨다. 일부효력이 정지된 헌법조항의 기능은 현행헌법의 국무회의가 수행한다. 비상국무회의는 1972년 10월 27일까지 조국의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헌법개정안을 공고하며 이를 공고한 날로부터 1개월 이내에 국민투표에 부쳐 확정시킨다. 헌법개정안이 확정되면 개정된 헌법절차에 따라 늦어도 금년 연말 이전에 헌정질서를 정상화시킨다. 헌법도 바꾸고, 국회를 해산하겠다는 거야. 아까 사진 봤지? 국회의사당 정문을 딱 가로막고 있는 탱크. '국회 해산'이란 게 가능한 걸까? 당시에도 대통령에게 국회해산권은 없었대. 그때도 사실은 헌법에 의하면 할 수가 없는 거였고, 지금도 역시 뭐 헌법에 의하면 국회 해산권을 갖고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할 수가 없는 거죠.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국회해산권이 없는 대통령이 국회를 그냥 임의로 해산시켜버린 거죠. 군인들이 쫙 깔린 상태에서 뭐 그런 상태에서는 사실 기존 헌법에 어떤 조항이나 범위나 이런 것들에 구애받지 않고, 대통령이 임의로 자신의 권력을 행사할 수가 있었던 거죠. -오제연,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그때도 국회는 계엄 해제를 요구할 수 있었어. 그런데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초법적 조치로 국회를 해산시켜버린 거야. 그래서 해제할 수 없었어. 설사 국회가 해산되지 않았어도, 당시 국회엔 박정희 대통령이 소속되어 있는 여당 의원이 더 많았어. 그러니 야당만으로는 계엄 해제 요구가 어려운 상황이지. 아무리 그래도, 반발이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주요 정치인들이 가택 연금을 당해. 대문 앞을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거야. 게다가, 느닷없이 끌려온 사람들이 옷이 벗겨진 채 사정없이 구타를 당해. 몽둥이질에 잠도 재우지 않고 물고문까지 이어져. 이렇게 고문을 당한 사람들은, 국회의원들이야. 이런 국회의원들에겐 공통점이 하나 있었어. 바로 '블랙리스트'. 비상계엄 한 달 전, 야당 의원들의 이름이 있는 블랙리스트 명단이 만들어졌다고 해.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블랙리스트에 적힌 사람 가운데 13명의 야당 의원들을 보안사에서 끌고 갔다는 거야. 이런 일들은 비상계엄 선포 후, 바로바로 진행됐어. 이렇게 국회도 해산하고, 헌법도 바꾸겠다고 해. 여기서 끝이 아니야. 얼마 뒤에 대통령 선거도 해. 불과 1년 전, 7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거든. 근데 임기 1년 만에 또 대통령 선거를 하는 거야. 왜 그랬을까? ▲ 1년 만에 다시 한 대통령 선거 3년 전인 1969년, 박정희 정권은 헌법을 개정했어. '3선 개헌'이라고 들어봤어? 헌법 제 69조 3항 '대통령의 계속 재임은 3기에 한한다'. 대통령을 3번까지 할 수 있다는 거야. 원래는 두 번까지만 할 수 있었거든. 이렇게 5대 6대 대통령을 역임한 박정희 대통령은 이 헌법 개정으로 3선에 도전하게 돼. 그리고 3선 개헌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하며 등장한 대선 라이벌이 있어. 바로 47살의 젊은 정치인, 김대중 후보. 두 후보의 경쟁은 엄청났어. 여러분 이번에 정권교체를 하지 못하면 이 나라는 박정희 씨의 영구 집권의 총통 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박정희 씨는 '3선 개헌은 절대로 안 한다', '나보고 3선 개헌한다는 것은 야당 놈들의 모략이다' 이렇게 말했어요. 그러더니 2년이 못 가서 재작년에 절대로 안 한단 3선 개헌을 정반대로 절대로 해 버렸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헌법을 고칠 때는 앞으로 이 나라에서 누구든 자기 한 사람의 영구집권을 위해서 헌법을 이리 고치고 저리 고치고 하는 일은 영원히 못 하도록 분명히 하는 것을 여러분에게 내가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김대중 후보의 유세 연설 中 유권자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에게 분명히 말씀드리거니와, '나를 대통령으로 한번 더 뽑아 주십시오' 하는 이런 정치 연설은 오늘 이 기회가 마지막 연설이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말씀드립니다. 지난 5대, 6대 대통령 선거에 있어서 유권자 여러분들은 이 사람을 대통령으로 두 번 뽑아 주셨습니다. 이번만 여러분들이 한번 더 이 사람을 지지를 해주시면, 일할 수 있는 그런 뒷받침을 해 주시면, 앞으로 4년 동안 여러분들을 위해서 있는 정력을 다 해서, 한번 멋있는 수도 서울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정희 후보의 유세 연설 中 그럼, 선거 결과 어땠을까? 결과는, 박정희의 승리였어. 53.2% 대 45.3%의 차이야. 서울에서는 김대중 후보가 앞서기도 했어. 그리고 한달 후, 박정희 대통령의 여당인 민주공화당이 113석, 야당인 신민당이 89석을 차지하면서, 그전에 비해 야당의 의석수가 늘어났어. 김종필 증언록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해. 그 다음엔 김대중이 될지도 몰라. 그러니 내가 좀 특수한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 그 '특수한 것'이 뭘까? 박정희 대통령 취임 1년 뒤인 1972년 5월. '풍년사업'이란 이름의 은밀한 작업이 진행돼. 이름만 보면 농업 관련 사업 같지 않아? 근데, 그 작업이 진행된 장소는 바로 여기야. 일명 '궁정동 안가'라 불리는 곳이야. '안가'는 안전가옥, 이곳은 대통령의 안전가옥이야. 아주 비밀스러운 곳이지. 여기서 뭘 했냐. 대만 총통제, 스페인 총통제, 프랑스 드골 헌법 등 해외사례를 연구하고 있어. 왜 이런 사례들을 연구할까? 대만의 총통이었던 장제스, 스페인 총통 프랑코, 두 사람 모두 본인들이 죽으면서 그 임기가 끝나. 종신 집권을 했다는 거야. 그렇게 은밀하게 진행된 풍년사업의 결과는, 다섯 달 뒤인 1972년 10월 세상에 공개됐어. '유신헌법'이라는 이름으로. ▲ 유신헌법 10월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헌법을 개정하고. 이게 바로 '10월 유신'이야. 유신, 사전적 의미는, 낡은 제도를 고쳐 새롭게 한다는 거야. 유신헌법에는 대통령이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카드들이 있었어. 먼저 '집권' 카드. 대통령 집권에 대한 강력한 변화가 생겨.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지 않는다는 얘기야. 그럼, 누가 뽑냐? 통일주체국민회의, 일명 '통대'라고 하는 기관에서 대통령을 선출하겠다는 거야. 그런데, 이 '통대'의 의장이 누굴까? 대통령 본인이야. 대통령이 의장인 기관에서 대통령을 뽑겠다는 거지. 대통령 임기도 4년에서 6년으로 늘어나. 그리고 대통령 중임 제한 폐지. 사실상 영구집권이 가능해진 거야. 두번째는 '밸런스' 카드. 권력의 밸런스를 파괴하는 카드야. 대통령에게 '국회 해산권'이 생겼어. 10.17 비상계엄 때는 국회 해산권이 없었다고 했잖아? 그걸 만든 거야. 이제 대통령이 입법권을 가진 국회를 해산할 수 있어. 그리고 국회의원 3분의 1을 대통령이 추천하고 이를 '통대'에서 선출하겠대. 게다가 대통령이 사실상 사법부의 모든 법관을 임명할 수 있게 됐어.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이 입법부에 사법부까지 손아귀에 쥐는 거야. 3권분립의 파괴야. 마지막 카드는 아주 강력한 힘이야. 바로 '긴급조치'야. 유신헌법 제53조 1항을 보면, '국정 전반에 걸쳐 필요한 긴급조치를 할 수 있다'는 거야. 필요한 조치라는 게, 어디까지 가능한 걸까? 무서운 거는 헌법에 규정돼 있는 국민의 기본권의 효력을 정지시킬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부여했죠. 조치에 대해서는 사법 심사를 할 수가 없도록 해놨어요. 그것이 헌법에 위반되었는지 이런 것 자체를 심사할 수 없도록, 헌법에 아예 명시해 놨어요. 긴급조치 위반했다고 그래서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이 긴급 조치는 위헌이다', '불법이다', 아무리 주장해 봤자 먹혀들 수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법원이 심사 자체를 못 했기 때문에… -정태호,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대통령의 판단에 따라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정지하고 처벌할 수 있다는 거야.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열흘 만에 공표된 이 유신헌법 개정안은 한달 뒤 국민투표에 부쳐져. 당시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 결과, 찬성률은 91.5%가 나와.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먼저, 유신이 내세운 명분 중 하나는 '평화통일'이었어. 유신 3개월 전,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돼. 분단 이후 남북이 처음으로 평화통일 원칙에 합의한 거야. 국민들의 통일에 대한 열망도 아주 높아졌어. 한마디로 '평화통일을 하려면 법과 체제를 바꿔야 한다', '10월 유신으로 한국적 민주주의를 이룩하자' 이런 명분으로 유신을 홍보한 거야. 유신헌법의 가장 큰 하나의 명분이 되는 것은 당시에 남북 관계가 획기적으로 변했다는 거죠. 그 이전에 남북의 어떤 대결, 특히 68년을 전후로 해서는 한반도의 안보 위기라고 부를 정도의 정말 곧 전쟁이 터질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었거든요. 그런데 이런 것들이 한순간에 갑자기 변해서 지금 남북이 대화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러한 대화 국면에서 어쨌든 우리가 북한과 제대로 대화를 하려면 체제를 바꿔야 된다, 이게 이제 가장 큰 명분이 되는 것이고. 그때 체제를 바꿀 때는 우리가 평화 통일을 지향하는 그런 헌법을 가져야 된다라고 하는 것이 이제 또 하나의 명분이 되는 거죠. -오제연,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실제로 박정희 대통령이 한 얘기가 있어. 만일 국민 여러분이 헌법 개정에 찬성치 않는다면 나는 이것을 남북 대화를 원치 않는다는 국민의 의사 표시로 받아들이고 조국 통일에 대한 새로운 방안을 모색할 것임을 아울러 밝혀두는 바입니다. -박정희, 10.17 대통령 특별선언 中 이런 선언과 함께, 유신 찬성을 위한 본격적인 홍보도 시작했어. 10월 유신, 100억 불 수출, 1,000불 소득 쭉 뻗은 도로, 기계화된 농촌, TV, 자동차까지... 잘 살려면 유신이 필요하다고 홍보하는 거야. 이것도 한 번 봐봐. 반대하면 파멸, 찬성하면 번영이래. 유신을 찬성해야 잘 살 수 있다는 거야. 그리고 효과적인 홍보 수단, 미디어도 활용했어. 이 시기에 모든 신문과 방송은 검열을 거쳐야만 했대. 혹여나 유신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가 나가면 안되니까. 문공부에서 주는 보도 자료를 한 자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써야 되니까.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적절한 법률이다', 그런 식으로 다 신문이 받아 썼었죠. '유신만이 살 길이다' 그런 구호를 신문에 꼭 넣고. 그 다음에 칼럼을 쓸 필자들 풀로 넘겨줘요, 우리 신문사에. 그래서 '이 중에 골라서 해라'. 그런 사람 외에는 쓰지 못하게 했어요. 완전히 언론 탄압을 무지막지하게 했죠 그 당시에는. 유명한 얘기가 있는데 광고 이론에 나오는데 '반복은 진실을 만든다'는 말이 있어요. 계속 반복하면 그렇게 세뇌되는 거예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요. -김동현, 당시 동아일보 기자 비상계엄이 선포된 1972년 10월 17일부터 유신 찬반 국민 투표일인 11월 21일까지, 유신 관련 좌담 방송이 398회, 유신지지 단독 해설이 218회, 유신 비전 제시 특별 프로그램이 58회 방송됐어. 이 정도면, 국민 투표에서 찬성률이 그렇게 높았던 이유가 좀 이해가 가지? 계엄 포고령에 따라 모든 집회, 시위는 금지됐어. 대학가는 계엄군이 지키고 있어. 유신을 반대하는 목소리는 들리기가 어려운 상황이야. 그렇게 비상계엄 체제 하에 유신헌법 국민 투표는 '찬성'이란 결과를 낳았어. 투표한 사람 중에서 90% 이상이 지지를 보냈으니까 '야 이건 정말 국민들이 모두 원했던 것이 아니냐' 얘기할 수도 있겠죠. 근데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역시 고려할 필요가 있겠어요. 일단 계엄령 아래에서 국민투표가 이루어졌다는 거예요. 한마디로 군대를 깔아놓고, 즉 바로 옆에 탱크, 장갑차, 무장한 군인들이 즐비한 상황에서 투표가 이루어졌다는 거죠. 두 번째가 여러 가지로 유신을 지지하고 찬양하는 목소리만이 허용됐던 그런 시절에, 정말 사람들은 그 얘기를 들을 수밖에 없고, 그 얘기 외에는 어떠한 판단의 근거도 마련돼 있지 않은 그런 상황에서는, 정부가 유도하는 대로 선거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숫자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것은 문제가 됩니다. -오제연,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그제서야 비상계엄도 해제됐어. 그렇게 유신 시대가 시작된 거야. ▲ 유신 시대의 시작과 반발 그리고 대통령 선거를 치른지 1년 만에, 8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져. 들어봤을 거야, '체육관 선거'.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대통령 선거가 이루어졌어. 당연히 유신헌법에 따라 국민은 투표를 할 수가 없어. 통일주체국민회의, 일명 '통대'의 대의원들이 대통령을 뽑아. 후보는 단 한 명, 박정희. 결과는? 찬성 2,357표, 반대표는 없어. 무효표만 2개야. 그래서 찬성률이 99.9%야. 앞에 나온 7대 대선 때 박정희 후보의 선거유세 기억나? '나를 한번 더 뽑아 주십시오' 하는 정치 연설은 오늘 이 기회가 마지막이라는 것을 확실히 말씀드립니다 라고 했던 거. 결과적으로 이 약속은 지켜졌어. 국민 앞에서 더 이상 지지를 호소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이때부터 1987년까지 무려 16년간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 직접선거가 이뤄지지 않았어. 그 문제점을 누구라도 조금만 들여다보면 알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오래갈 수가 없었던 거죠. 유신헌법에 대한 반대 투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거였죠. -정태호,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여기저기서 반발이 튀어나오기 시작해. 박정희의 라이벌, 김대중. 그가 일본에서 한 연설이 있거든. 한 번 들어봐. 요새 하고 있는 10월 유신이라는 거는 세상에 말도 안돼. 유신이 뭐야, 유신이. 일본 사람들이 100년 전에 써먹은 소리 아니요? 여러분, 다 기억하실 거예요. 재작년 선거 때 만일 이번에 박정희 정권의 종식을 짓지 못하면 이제 우리에게는 선거조차 없는 영구 집권의 총통제 시대가 온다고. 내가 몇 천 번 말했어요. 상당수 사람들이 '그래도 설마?' 그랬어. 그 설마가 사람 잡아요. 그렇게 됐어. 10월 18일 날 저는 박정희 씨의 조치를 정면으로 부인하고,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성명의 서두에 '박정희 씨의 이번 조치는 통일을 빙자해서 자기 자신의 영구집권을 획책하는 것이다' 이렇게 성명을 했습니다. -김대중 일본 하코네 연설 中 유신 발표 직후부터 김대중은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유신 반대 목소리를 냈어. 그러던 1973년 8월 8일 일본 도쿄의 한 호텔. 김대중은 호텔 스위트룸에서 약속을 마치고 막 방을 나서는 중이었어. 그 순간 웬 남자들이 나타나 김대중의 목을 낚아채고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고는 끌고 가. 중앙정보부가 김대중을 납치한 거야. 이 김대중 납치 사건은 국내외적으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게 돼. 반유신 운동에 불을 붙인 거야. 반유신 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움직인 사람들은, 대학생들이었어. 여러 학교에서 시국선언문을 발표하며 대학생들이 유신체제와의 투쟁을 선언했어. ▲ 긴급 조치의 시대 이 상황을 유신정권은 어떻게 했을까? 유신헌법에 아주 강력한 제재가 있었잖아. 바로 '긴급조치'. 1974년 1월 8일, 박정희 대통령은 긴급조치 1, 2호를 선포해. 1월 8일 박정희 대통령은 헌법 제53조에 의한 대통령 긴급 조치를 선포하여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고,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고 밝혔습니다. 이 조치에 위반하거나 비방한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며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하기로 했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유신헌법에 대해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어. 반대는 물론, 비방도 하면 안돼. 또 유언비어도 금지야. 위반하면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고, 징역이 무려 15년까지 가능해. 그리고 긴급 조치 2호는, 비상군법회의 설치에 대한 내용이야. 실제로 긴급조치 위반으로 학생들은 비상보통군법회의에 세워졌어. 긴급조치의 주된 내용들은 유신 체제를 보호하기 위한 그런 거였죠. '유신헌법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마라' '좋다 나쁘다 평가도 하지 마라' '유신헌법이 나쁘니까 개헌을 하자' 뭐 이런 얘기도 하지 마라. 그러니까 이게 민주주의의 근본 원리, 특히 국민주권 원리를 정면으로 부정한 거거든요. -정태호,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곧이어 발표된 긴급조치 3호에는 국민생활안정을 위한 조치들이 나열돼 있어. 불안해진 민심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을까? 그럼에도 여론은 심상치 않았어. 결국 박정희 대통령은 직접 나서 이야기해. 이런 판국에 전 국민이 혼연일체가 돼서 한 덩어리가 돼도 지금 이러한 난관을 뚫고 나아가기가 힘이 들고 힘이 부족한 판인데. 작년 연말부터 국내 일각에서는 일부 인사들 중에 현 체제에 대해서 정면으로 도전을 해오는가 하면 민심을 자꾸 선동을 하고 사회 혼란만을 조장하기 때문에, 그동안 수차 설득도 해보고 경고도 해 보았습니다만 설득이나 경고만 가지고는 이 사람들의 행동이 중지할 그런 뜻이 전혀 없다는 것을 판단을 해서 만부득이 대통령의 긴급조치를 발동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번에 긴급 조치가 선포된 그 배경, 이유라고 그럴까. 목적, 취지 이런 것을 여러분들이 잘 이해를 해 주시고, 적극적으로 협조를 해주십사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적극적으로 협조를 해 주시면 이 조치는 곧 필요 없게 될 것입니다. -박정희, 1974년 1월 연두 기자회견 중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은 긴급조치에 대한 영화도 만들었어. 영화 속 어머니 역할이 아주 온화한 말투로 정부의 긴급조치에 대한 입장을 줄줄 설명하곤 했어. 하지만, 유신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가. 긴급조치로 억압 받은 학생들은 더 많은 학생들과 연대를 해. 4월 3일, 대학가에서 시위를 준비한 거야. 그런데, 이를 사전에 파악한 유신정권은 대대적인 검거에 나서. 그리고 4월 3일 밤, 긴급조치 4호가 선포돼. 그 내용은 이래.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과 이에 관련되는 단체를 조직 또는 가입하거나, 활동에 동조하거나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이를 위반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긴급조치로 최대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어. 어떻게 학생들의 시위에 사형까지 언급됐을까? 여기에서 언급된 단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줄여서 '민청학련'이라 불러. 긴급조치 4호가 선포된 이유는, 바로 이거였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의 수사 상황을 발표했습니다. 과거 공산 불법단체인 인민혁명당과 제1 조총련, 국내 좌파 혁신계 기독교 학생단체, 그리고 일본 공산당원까지 포함된 약 20명의 배후 조종자가 스며들어 자금을 대는 등 학생들을 뒤에서 조종한 것이 드러났습니다. 4월 3일을 기해 폭동을 일으켜서 정부 주요기관을 점거하고 정권을 인수하려 했으며, 인혁당은 대한민국을 폭력으로 전복하고 공산정권을 수립할 목적으로 북한 괴뢰 지령에 따라 조직되고 활동한 반국가단체라고 밝혔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학생들이 북한의 조종을 받고 있고, 공산계 불법단체가 배후에 있다는 거야. 나라를 전복할 목적이래. 그런데, 이건 조작으로 밝혀졌어.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학생들의 시위를 배후세력까지 조작해서 국가전복 시도라는 시나리오를 쓴 거야. 그렇게 민청학련 사건으로 조사받은 사람만, 천 명이 넘어. 대부분 대학생들이었어. 그중 7명에게 사형이 구형됐고, 무기징역 7명, 징역 20년형이 12명이나 됐어. 이 사건의 변론을 맡았던 강신옥 변호사는 법정에서 이렇게 얘기를 했어. 법은 정치와 권력의 시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랏일을 걱정하는 애국 학생들을 빨갱이로 몰아 사형이니, 무기니 하는 형을 구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법을 악용하는 '사법 살인'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강 변호사가 이렇게 변론을 이어가는 도중, 갑자기 휴정이 선포되고 강 변호사는 연행됐어. 그날 밤, 남산 중정으로 연행된 강 변호사는 잔혹한 구타를 당했대. 그리고 결국 구속됐어. 그의 죄목은, '긴급조치 위반'이었어. ▲ 언론 통제와 저항 이런 사태들이 벌어지고 있지만 언론에선 제대로 보도하지 못했어. 학생들의 시위, 개헌운동 등은 기사가 빠지거나 최소화돼. 고문, 수사, 재판에 대한 문제점에도 침묵했어. 당시 언론사에는 기자도 아닌데 매일 출근 도장을 찍는 사람이 있다고 해. 기관원이라고, 중앙정보부에서 나온 사람이야. 기사를 빼고, 용어를 바꾸고. 중앙정보부에서 각 언론사별로 담당직원을 배치해 통제를 하는 거야. 유신 시기에 들어서서는 신문에 무슨 기사를 내지 말라, 내지 말라는 게 딱 아주 한정돼 있는데. '학생들 데모 기사는 절대로 내지 마라'. '저항하는 움직임에 대해서 아주 손끝 하나도 보도하지 말라' 이렇게 되는 거죠. -김학천, 당시 동아방송 PD 그 당시는 그 모든 걸 전부 통제하고, 누가 자살했다든지 뭐 어제 굶는다든지 어렵다든지 이런 건 기사 못 나가게 돼 있어요. 전부 다 밝은 기사만 쓰라 그러고. -김동현, 당시 동아일보 기자 보도할 때 쓰는 단어에도 제재가 있었어. 예를 들어 '물가 인상'은 '물가 현실화'. '세금 인상'은 '세제 개혁'. 묘하게 뉘앙스를 바꾼 거야. 이런 상황에 언론인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 당시에 데모하는 현장에 가면, 서울대학교에 가면 그쪽에서 써 놨어요. '개와 기자는 출입금지' 써놨어요. '기사 나가지도 않는데 왜 오는데, 올 필요 없다'고 해가지고. 그렇게 모욕을 받았어요. 그러니까 얼마나 괴로웠겠어요. 그때 보면서 '부끄럽다'는 걸 느꼈어요. 기자가 참 부끄럽다. 그걸 제대로 해서 국민에게 알려줄 의무가 있는데. '그런 걸 못하면서 말이야. 기자라고 언론이라고' 이거는 너무 창피했어요. 그때 우리들이 울었어요, 사실은… -김동현, 당시 동아일보 기자 이런 상황이 되자 언론도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 이 사진을 한번 볼래. 사진 속 족자에 적힌 글자는 '자유언론 실천선언'. 마지막 사진에 서 있는 분은 인터뷰를 해 주신 김학천 PD야. 그렇게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은 투쟁에 나섰어. 신문방송잡지에 대한 어떠한 외부 간섭도 배제한다 , 기관원의 출입을 거부한다 , 언론인의 불법 연행을 거부한다 라고 외쳤어. 그 후 매일매일이 치열한 싸움이야. 회사 건물 현관에 '기관원 출입 금지'라고 써 붙이고, 학생 시위에 대한 기사를 늘렸어. 그리고 라디오 방송에서는 비판적이고 풍자적인 멘트도 넣었어. 권력이란 무엇입니까. 한 번 잡으면 그렇게 놓기 싫은 겁니까? 라며 비판했어. 그리고 얼마 뒤, 아주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해. 저희는 동아일보에서 광고를 그만해야 할 것 같은데요. 이번 달 광고 예산이 아직 안 나와서. 광고를 더 못할 것 같은데... 무려 90% 정도의 광고가 해약돼. 그리고 12월 26일 동아일보 신문은 이렇게 발행돼. 아예 백지광고로 나간 거야. 무더기로 광고가 빠진 자리를, 그대로 보여준 거지. 그런데, 그 후로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 이건 다른 날 발행된 동아일보야. 빼곡히 채워진 광고의 정체. 격려 광고가 들어오기 시작한 거야. 대학생, 주부, 어린이, 해외 동포까지. 자발적으로 정성을 모아준 거야. '취학하는 석아, 그른 것은 절대 배우지 마라' ?아빠, 엄마 '양심에 호소하여 우리보다 참하게 살았으면 싶다'-어느 여자 직장인 '운전자와 손님이 합심하여 동아일보의 발전을 빌며'-택시 운전사와 손님 '데이트 자금으로 작은 지면을 삽니다'-순과 선 '이 나라에서 법을 공부하는 안타까운 이 마음과…' ?서울대 동창 남매 마침 그것도 이제 시민들이 성금 내듯이 그런 식으로 했으니까. 고무적이었죠. 우리를 후원하는 이런 사람들이 있구나, 우리 우군이 있구나, 우리가 외롭지 않다. 그런 걸 느꼈어요. -김동현, 당시 동아일보 기자 시민들의 격려 광고로 힘을 얻으며 저항을 이어오던 어느날, 김학천 PD는 아주 특별한 방송을 준비해. 주제는 바로, '감옥으로 보내는 편지'였어. 당시 긴급조치 위반으로 수감 중인 사람들의 가족들이 직접 쓴 편지를 방송하기로 한 거야. 방송이 시작되고, 수감 중인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어린 아들이 직접 읽어. 아버지! 난 아버지가 죄가 있어서 거기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요. 그래서... 편지는 이제 시작인데, 그 후는 꺽~꺽~ 우는 소리만 이어져. 그 다음은 자식을 감옥에 보낸 어머니의 편지였어. 아들아, 엄마가 엊그제 면회를 갔는데 면회를 시켜주지 않더구나. 내복 여러 벌 가지고 갔는데 전해주지 못했구나. 다른 재소자들이라도 입으라고 전부 두고 왔단다. 엄마는... 어머니도 더 이상 편지를 읽지 못하셔. 사무치는 울음소리만 전파를 타고 퍼져나가. 상당히 파국까지 왔다라는 생각이고, 꺾일 때 어떻게 꺾일 것인가. 어쨌든 난 아침 시간 15분, 내가 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때 뭐 감옥에 많이 들어가 있었지. 그 감옥에 아이들 또는 부모를 둔 사람들이 5분 동안 원고지 한 6~7장을 써서 읽으라고 했는데. 첫 번째 문장만 그냥 읽다가 그 다음에 다 우는 걸로 끝을 냈어요. '김학천 씨, 이거 여기서 끊을까요? 그냥 훌쩍훌쩍 울기만 하는데' 묻길래, '그냥 둬라. 그것도 메시지 아니냐'.. 한 1~2분 얘기하고 2~3분 우는 프로그램이 나갔어요. -김학천, 당시 동아방송 PD ▲ 분노한 대학생들 1972년에 유신이 시작되고 유신에 대한 저항과 이를 막으려는 조치들이 반복됐어. 긴급조치 5호와 6호는 앞서 선포된 조치들을 해제하려는 조치야. 긴급조치 해제를 위해 또 다른 긴급조치를 선포한 거야. 그리고 7호는, 고려대학교 한 학교를 휴교시키기 위해 선포됐어. 시위를 막으려고. 그리고 1975년 4월 8일. 또 한번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져. 긴급조치 4호 기억나지? 대학생들이 북한 세력의 조종을 받아 국가를 전복할 목적이라며 사형을 구형했던 거. 이날은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 세력으로 지목됐던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들의 최종 판결이 내려지는 날이야. 그리고 8명의 관련자들에게 최종적으로 사형이 선고됐어. 다음날, 사형 선고를 받은 이들의 가족들이 아침 일찍 구치소로 향했어. 구속 이후 1년 가까이 만나지 못해서, 형이 확정됐으니 면회라도 가능하겠지 싶어 만나러 간거야. 그날 찍힌 사진이 있어. 통곡하는 가족들. 이미 사형이 집행된 거야. 대법원 판결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 됐어. 이날은 사법 사상 암흑의 날로 기록돼. 훗날, 이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 사람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어. 이틀 뒤 서울대 백양나무 옆 잔디밭에 3백 명 가량의 학생들이 모였어. 그리고, 한 청년이 이들 앞으로 걸어 나와. 청년의 이름은 김상진이야. 서울대학교에 재학중이었던 상진이는 친구들과 함께 유신 반대 단식 집회를 준비하고 있었어. 김상진 학생에 대해 들어볼게. 우리 상진이가 착하고 진짜 속 썩이는 거 없었어요. 아버지 어머니 말을 잘 들었지. -김상운, 김상진 형 조용했습니다. 얌전하다고 할까요. 차분한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저하고 서울대학교 같은 과를 입학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유신헌법의 그 문제점들이 사회적으로 자꾸 농축돼 갔던 거죠. 75년도부터가 거의 폭발의 단계에 왔습니다. 그 폭발의 불쏘시개를 한 게 제2차 인혁당 사건입니다. 그 사건이 발생해서 8명이 사형 집행이 된 적이 있죠. 상진이가 매우매우 분노했습니다. -이호선, 김상진 친구 상진이는 학생들 앞에 서서 준비해 온 글을 읽기 시작해. 글의 제목은 '양심선언문'이야. 당시 상진이의 목소리를 녹음한 기록이 있어. 우리를 대변한 동지들은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신음하고 있고, 무고한 백성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가고 있다. 합법을 가장한 유신헌법의 모든 부조리와 악을 고발한다. 우리는 유신헌법의 자기중심적 이기성을 고발한다. 학우여 아는가! 민주주의는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투쟁의 결과라는 것을. 이것이 민족과 역사를 위하는 길이고, 이것이 우리 사랑스러운 조국의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길이며, 이것이 영원한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길이라면. 이 보잘 것 없는 생명 바치기에 아까움이 없노라. 나의 앞으로의 행동에 대해서 여러분은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완전한 이성을 되찾아서, 우리가 해야 할 바를 갖다가 명실상부하게 이끌어 나가길 바란다... -김상진의 양심선언문, 1975년 4월 11일 녹음분을 들어보면, 상진이의 이 말을 끝으로 갑자기 현장이 소란스러워져.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건 방송에는 처음 하는 얘기들입니다. 이걸 꼭 기록을 해주셔야 됩니다. 그 계단에서 이런 얘기를 저한테 했군요. '호선아 나는 이제 나의 신념을, 각오를 행동으로 표현할게. 유신이 없어지는 날, 나를 기억해 달라'는 그런 식의 얘기였습니다. 상진이가 서서 낭독하는 그 자리에서 10여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제가 앉아 있었어요. 상진이가 양심선언문을 읽자마자 가방에서 과도를 꺼냈습니다... 5초만 빨라도 됐습니다. 5초만 빨라도 됐어.. 칼로 찌르고 앞으로 넘어지기 직전에 제가 뒤에서 붙잡았습니다. -이호선, 김상진 친구 호선이는 상진이와 함께 병원으로 이동했어. 그 택시 안에서 상진이가 이런 이야기를 했대. 호선아, 애국가 불러줘 호선이는 큰 목소리로 애국가를 불렀어. 그리고 상진이는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어. ▲ 긴급조치 9호 김상진 열사의 죽음 뒤로, 저항의 목소리를 더욱 거세졌어. 그로부터 한 달 뒤, 긴급조치 8호로 긴급조치 7호가 해제되고, 동시에 긴급조치 9호가 선포돼. 유언비어 안 되고, 유신헌법에 대해 말해서도 안 되고, 시위는 물론 학생의 정치 관여도 안돼. 긴급 조치 9호는 어떤 특정한 사건에 대응하기 위해서 발동한 것이 아니라 그냥 항시적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유신 체제에 대해서 저항은 물론이고 어떠한 비판도 할 수 없도록 결국에는 아주 광범위하고 포괄적으로 유신에 대한 반대를 불허하는 그러한 조치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이런 것들을 우리가 보통 '긴급조치의 종합판'이다… -오제현,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이렇게 선포된 긴급조치 9호는 오랫동안 국민의 숨통을 조여왔어. 무려 4년 7개월 동안. 긴급조치가 9호가 이렇게 오래 지속되는 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때는 1978년 11월. 전북에서 꽤 잘 나간다는 한 학원이야. 이 학원에서 영어강사로 일하는 차봉현 씨. 봉현 씨는 여기저기 스카우트가 될 정도로 인기 강사였대. 봉현 씨는 영어뿐 아니라 정치 경제 윤리 강의도 하며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어. 어느날, 봉현 씨는 여느 날처럼 학원으로 출근을 했어. 수업 내용을 살펴보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남자 2명이 들어와. 학원으로 경찰들이 들이닥친 거야. 경찰이 물어보는 거예요. '당신이 유신 헌법 철폐하고 유신 헌법 없애자고 학생들 앞에 주장 안 했냐' 이제 이렇게 나온 거예요. '나는 절대 그런 말 안 했다' 내가 사회의 지도자가 아니고 내가 뭐 정당의 정당인도 아니고 내가 뭐 정치를 하는 사람도 아니고. 절대 부인한 거예요. -차봉현, 당시 영어학원 강사 봉현 씨가 강의 중 유신헌법 철폐를 주장했다는 거야. 봉현 씨는 강의 때 이렇게 얘기를 했대. 국회의 여당 의원 수가 많잖아요. 그건 헌법으로 설치된 통일주체국민회의가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뽑기 때문이에요. 이런 말이 문제 될 거라곤 생각도 못했어. 그 후, 봉현 씨는 여기저기 끌려 다니며 폭행을 당했어. 날이 갈수록 폭행의 강도는 점점 심해졌대. 둘이서 이제 때리기 시작한 거예요. 주먹으로 뺨도 때리고. 취조하는 실인데 거기 데리고 가서 옷을 벗겨요. 옷을 벗겨 가지고 빨가 벗겨서 몽둥이로 이제 때리는 거예요 둘이서. 또 무릎을 꿇고 앉으라고 해서 무릎 사이에 나무를 놔두고 거기서 밟아버려요. 그러면 무릎이 팍 깨져요. 그런 고문을 당했어요. 경찰서 정보과실에서. '나는 비판 정도를 했다' '헌법을 폐지해야 한다.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 이런 말은 절대 한 것 없다. 근데 그게 안 통한다니까. 자기가 써갖고 와서 이렇게 '이대로 해달라' 그러니까 내가 이제 안 맞으려고 사인해 줬죠. -차봉현, 긴급조치 피해자 자백을 받기 위해 봉현 씨를 고문한 거야. 봉현 씨는 1년 6개월의 형을 선고받았어. 근데 이런 일을 겪은 건 봉현 씨 뿐만이 아니야. 긴급조치 9호로 처벌받은 사례들을 보여줄게. 박정희는 군인 출신이기 때문에 정치를 잘할 수 없어. 100억 불 수출이라 하면서도 수입에 대해서는 은폐하고 있잖아. 언론의 자유도 없는 거야. 이런 말을 했다고 징역 8년을 선고받았어. 또 어떤 남자는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박정희 정치는 뭣~도 아니다 이렇게 외쳤어. 판결은 징역 1년. 자기야, 대통령이 내가 잘 아는 친구 언니와 애인 사이래 라는 가벼운 말. 이건 징역 1년을 선고받았어. 긴급조치 9호는 술 먹고 말 한마디 잘못해도 잡혀간다 해서 '막걸리 보안법'이라 불렸어. 심지어 노래도 마음대로 못 불렀어. 국가의 안전 수호와 사회 질서를 문란케 하는 대중문화가 있다는 거야. 그렇게 취한 조치가 '금지곡'. 1975년 한 해 동안 금지된 노래가 국내 가요만 222곡이야. 지금도 들으면 알만한 곡들이 이때 무더기로 금지가 돼. 김추자의 '거짓말이야'. 이 노래는 1971년 발매돼 아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어. 이 노래가 갑자기 금지된 이유는 '거짓말이야'라는 가사 때문에. '가사 내용 불신 조장', 그리고 창법도 저속하대. 신중현의 '미인'. 너무 유명한 노래지. '신중현과 엽전들'의 '미인'은 1974년에 발매돼 약 40만 장 이상의 앨범 판매를 올린 대히트곡이야. 이 곡이 금지된 이유는, 저속한 가사, 퇴폐한 곡이래. 어디가 저속하다는 걸까?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 이 가사를 학생들이 '한 번 하고 두 번 하고 자꾸만 하고 싶네~' 이렇게 개사해서 불렀대. 박정희 대통령이 대통령을 한 번 하고 두 번 한다고, 그렇게 비꼬고 풍자하니까 금지곡이 된 거 아니냐 라는 얘기가 있어. 그리고, 금지곡 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곡이 한 곡 더 있지. 바로 김민기의 '아침이슬'. 양희은이 부른 '아침이슬'이 많이 알려져 있지. 이 노래를 작사, 작곡한 사람이 바로 김민기야. 이 곡이 금지된 이유는, 없어. 기록에 금지 사유가 아예 적혀 있지 않아. 보통 이렇게 금지곡이 되려면 그 옆에 금지 사유가 있어야 돼요. 아무리 엉망으로 하더라도 사유가 있어야 되잖아요. 근데 '아침이슬'은 금지 사유가 없어요. 이걸 대학생들이 시위에 불렀다고 금지를 시키기에는 너무 논리가 옹색한 거죠. 금지 사유가 없어. -강헌, 음악평론가 유신 반대 시위 현장에서 많은 학생들이 김민기의 노래를 불렀어. 그렇게 김민기의 노래는 모두 금지곡이 되었고 그는 보안사 등 여기저기를 끌려 다니며 조사를 받고 활동 또한 탄압을 받았어. 금지라는 행위, 검열이라는 행위가 뭐가 나쁘냐면요. '상상력에 제한이 가해져서는 안 된다'라는 이유인 겁니다. 결국 검열은 상상력의 잠재력을 사실은 원천적으로 파괴시키는 행위예요. 알아서 기게 만드는 행위예요. 그걸 알아서 기는 예술가들이 어떤 작품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결국 그런 표현의 자유를 물리적인 공권력으로 억압한다는 얘기는 그냥 간단한 얘기예요. 그냥 단순히 '이 노래 부르지 마, 이 영화 보지 마, 이 책 읽지마'로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이것은 기본적으로 민주주의가 보장하고 있는, 헌법이 보장하는 모든 기본권이 '전부 구금될 수 있다'는 얘기이고 실제로 그렇게 됩니다. -강헌, 음악평론가 ▲ 유신의 종말 말 한 마디 조심하고, 노래도 마음대로 못 하는 시대는 몇 년 간 이어져. 그러던 중, 1979년 민중의 불만이 폭발하는 사건들이 일어나. 'YH 사건' 혹시 들어봤어? 8월 9일, 가발공장이었던 YH무역의 일방적인 폐업 공고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이 당시 야당인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이게 돼. 여공들의 호소를 받아 주고 당사로 받아준 사람이, 당시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야. 하지만, 곧 야당 당사에 경찰이 투입돼. 농성을 하던 노동자들을 경찰은 무차별 폭력과 강제 연행으로 진압했어. 이를 지켜 본 김영삼 총재는 박정희 정권과의 정면대결에 들어가. 그러다 김영삼 총재는 국회의원 제명을 당해. 제명된 후 이렇게 말했지. 아무리 닭의 목을 비틀지라도 새벽은 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10월 16일 부산. 유신철폐! 독재타도! 를 외치며, 김영삼의 정치적 본거지였던 부산 시민들이 들고 일어났어. 부산대에서 수백 명으로 시작된 시위는 수천 명으로 늘어났고, 결국 수 만명의 군중이 모였어. 그리고 부산에 비상계엄이 선포돼. 부산 시내에 탱크가 등장했어. 그러나 시민들은 물러서지 않았고 시위는 마산으로까지 번졌어. 바로 '부마항쟁'이야. 김재규의 법정 진술에 따르면, 부마항쟁을 보고 받은 박정희 대통령이 이런 말을 했다는 거야. 이제부터 사태가 악화되면 내가 발포 명령을 하겠다. 그리고 부마항쟁 열흘 뒤인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열린 연회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에 맞아 사망해. 이렇게 유신 시대는 끝을 맞게 돼.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궁정동 안가. 유신헌법의 초안이 작성된 장소 어디라고 했지? 그래 궁정동 안가. 거기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며 길고 길었던 유신 시대는 끝이 났어. 7년간 이어진 유신체제. 그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지. 언론의 자유를 위해 싸운 분들은 마지막까지 철야 농성을 하며 저항했지만, 결국 회사에서 강제로 끌려 나왔어. 당시 100 명이 넘는 언론인이 해임을 당하게 돼. 긴급조치 9호로 재판을 받던 학원강사 봉현 씨는 박정희의 사망 후 최종 면소 판결을 받고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어. 하지만 다시 강사로 취업할 수는 없었다고 해. 긴급조치는 30년이 훨씬 지나 2000년대에 들어서야 위헌 판결이 내려졌어. 2010년 대법원은 긴급조치 1호가 유신헌법, 현행헌법에 위험이라고 판단했고, 그 이후 긴급조치 4호, 9호 역시 위헌이라 했어. 2013년 헌법재판소에서는 긴급조치 1호, 2호, 9호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어. 그리고 2018년 대법원에서는 1972년 비상 계엄 포고령에 대해 이렇게 판단했어. 당시의 국내 정치 상황 및 사회 상황이 계엄법에서 정한 '군사상 필요할 때'에 해당한다고 할 수 없다. 계엄 포고는 헌법과 법률에서 정한 발동 요건을 갖추지 못한 채 발령되었고, 구 헌법, 현행 헌법, 구 계엄령에 위배되어 위헌이고 위법하여 무효이다. 노벨문학상 수상한 한강 작가가 이런 말을 했어.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라고.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현재도 언젠간 과거가 될 거야. 현재가 어떻게 기록될지는, 지금 우리의 몫이지 않을까?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
[꼬꼬무 찐리뷰]53년 전에도 '비상계엄' 있었다…박정희 유신시대와 긴급조치의 진실 [꼬꼬무 찐리뷰]53년 전에도 '비상계엄' 있었다…박정희 유신시대와 긴급조치의 진실 등록일2025.03.14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13일 방송된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방송인 홍석천, 배우 박효주, 아나운서 이인권이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서울 한복판에 나타난 탱크 때는 53년 전 서울, 평범한 가을날 저녁이야. 직장인들은 퇴근을 서두르고, 동네 곳곳에선 저녁을 준비하는 음식냄새가 솔솔 풍기고 있어. 그런데 그때 갑자기, 탱크를 몰고 중무장한 군인들이 서울 도심 한복판에 나타났어. 당시 태평로에 있던 국회의사당, 그리고 광화문 근처 중앙청에 서 있는 탱크의 모습이야. 시간은 저녁 7시, TV와 라디오를 통해 깜짝 놀랄만한 소식이 전해져. 박정희 대통령 각하는 10월 17일 오후 7시를 기해 비상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1972년 10월 17일 19시를 기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현행 헌법의 일부 조항 효력을 정지시킨다. 이와 같은 비상조치를 국민 앞에 선포한 박 대통령 각하는 우리 모두 일치단결하여 민주제도의 건전한 발전과 조국 통일의 기원이 성취되는 그날까지 힘차게 전진해 나갈 것을 촉구했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이 선포된 거야. 비상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있을 때 선포할 수 있어. 보통 이제 한국에서 비상계엄은 어떤 굉장히 큰 사회 혼란기나 아니면 6.25 전쟁과 같은 정말 전시에 주로 선포가 됐어요. 그런데 이 1972년 10월 17일에 선포된 비상계엄은 사실은 굉장히 평온한 때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때에 선포가 됐고.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혼란이라든지 어떤 위기라든지 뭐 전시라든지 이런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던 시기인데 느닷없이, 그야말로 느닷없이 비상계엄이 선포가 되었던 거죠. -오제연,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이렇게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앞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해줄게. ▲비상계엄과 특별선언 박정희 대통령은 비상계엄과 함께 '10.17 특별 선언'을 발표했어. 그 내용은 이래. 1972년 10월 17일 19시를 기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현행헌법의 일부 조항 효력을 정지시킨다. 일부효력이 정지된 헌법조항의 기능은 현행헌법의 국무회의가 수행한다. 비상국무회의는 1972년 10월 27일까지 조국의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헌법개정안을 공고하며 이를 공고한 날로부터 1개월 이내에 국민투표에 부쳐 확정시킨다. 헌법개정안이 확정되면 개정된 헌법절차에 따라 늦어도 금년 연말 이전에 헌정질서를 정상화시킨다. 헌법도 바꾸고, 국회를 해산하겠다는 거야. 아까 사진 봤지? 국회의사당 정문을 딱 가로막고 있는 탱크. '국회 해산'이란 게 가능한 걸까? 당시에도 대통령에게 국회해산권은 없었대. 그때도 사실은 헌법에 의하면 할 수가 없는 거였고, 지금도 역시 뭐 헌법에 의하면 국회 해산권을 갖고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할 수가 없는 거죠.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국회해산권이 없는 대통령이 국회를 그냥 임의로 해산시켜버린 거죠. 군인들이 쫙 깔린 상태에서 뭐 그런 상태에서는 사실 기존 헌법에 어떤 조항이나 범위나 이런 것들에 구애받지 않고, 대통령이 임의로 자신의 권력을 행사할 수가 있었던 거죠. -오제연,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그때도 국회는 계엄 해제를 요구할 수 있었어. 그런데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초법적 조치로 국회를 해산시켜버린 거야. 그래서 해제할 수 없었어. 설사 국회가 해산되지 않았어도, 당시 국회엔 박정희 대통령이 소속되어 있는 여당 의원이 더 많았어. 그러니 야당만으로는 계엄 해제 요구가 어려운 상황이지. 아무리 그래도, 반발이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주요 정치인들이 가택 연금을 당해. 대문 앞을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거야. 게다가, 느닷없이 끌려온 사람들이 옷이 벗겨진 채 사정없이 구타를 당해. 몽둥이질에 잠도 재우지 않고 물고문까지 이어져. 이렇게 고문을 당한 사람들은, 국회의원들이야. 이런 국회의원들에겐 공통점이 하나 있었어. 바로 '블랙리스트'. 비상계엄 한 달 전, 야당 의원들의 이름이 있는 블랙리스트 명단이 만들어졌다고 해.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블랙리스트에 적힌 사람 가운데 13명의 야당 의원들을 보안사에서 끌고 갔다는 거야. 이런 일들은 비상계엄 선포 후, 바로바로 진행됐어. 이렇게 국회도 해산하고, 헌법도 바꾸겠다고 해. 여기서 끝이 아니야. 얼마 뒤에 대통령 선거도 해. 불과 1년 전, 7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거든. 근데 임기 1년 만에 또 대통령 선거를 하는 거야. 왜 그랬을까? ▲ 1년 만에 다시 한 대통령 선거 3년 전인 1969년, 박정희 정권은 헌법을 개정했어. '3선 개헌'이라고 들어봤어? 헌법 제 69조 3항 '대통령의 계속 재임은 3기에 한한다'. 대통령을 3번까지 할 수 있다는 거야. 원래는 두 번까지만 할 수 있었거든. 이렇게 5대 6대 대통령을 역임한 박정희 대통령은 이 헌법 개정으로 3선에 도전하게 돼. 그리고 3선 개헌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하며 등장한 대선 라이벌이 있어. 바로 47살의 젊은 정치인, 김대중 후보. 두 후보의 경쟁은 엄청났어. 여러분 이번에 정권교체를 하지 못하면 이 나라는 박정희 씨의 영구 집권의 총통 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박정희 씨는 '3선 개헌은 절대로 안 한다', '나보고 3선 개헌한다는 것은 야당 놈들의 모략이다' 이렇게 말했어요. 그러더니 2년이 못 가서 재작년에 절대로 안 한단 3선 개헌을 정반대로 절대로 해 버렸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헌법을 고칠 때는 앞으로 이 나라에서 누구든 자기 한 사람의 영구집권을 위해서 헌법을 이리 고치고 저리 고치고 하는 일은 영원히 못 하도록 분명히 하는 것을 여러분에게 내가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김대중 후보의 유세 연설 中 유권자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에게 분명히 말씀드리거니와, '나를 대통령으로 한번 더 뽑아 주십시오' 하는 이런 정치 연설은 오늘 이 기회가 마지막 연설이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말씀드립니다. 지난 5대, 6대 대통령 선거에 있어서 유권자 여러분들은 이 사람을 대통령으로 두 번 뽑아 주셨습니다. 이번만 여러분들이 한번 더 이 사람을 지지를 해주시면, 일할 수 있는 그런 뒷받침을 해 주시면, 앞으로 4년 동안 여러분들을 위해서 있는 정력을 다 해서, 한번 멋있는 수도 서울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정희 후보의 유세 연설 中 그럼, 선거 결과 어땠을까? 결과는, 박정희의 승리였어. 53.2% 대 45.3%의 차이야. 서울에서는 김대중 후보가 앞서기도 했어. 그리고 한달 후, 박정희 대통령의 여당인 민주공화당이 113석, 야당인 신민당이 89석을 차지하면서, 그전에 비해 야당의 의석수가 늘어났어. 김종필 증언록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해. 그 다음엔 김대중이 될지도 몰라. 그러니 내가 좀 특수한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 그 '특수한 것'이 뭘까? 박정희 대통령 취임 1년 뒤인 1972년 5월. '풍년사업'이란 이름의 은밀한 작업이 진행돼. 이름만 보면 농업 관련 사업 같지 않아? 근데, 그 작업이 진행된 장소는 바로 여기야. 일명 '궁정동 안가'라 불리는 곳이야. '안가'는 안전가옥, 이곳은 대통령의 안전가옥이야. 아주 비밀스러운 곳이지. 여기서 뭘 했냐. 대만 총통제, 스페인 총통제, 프랑스 드골 헌법 등 해외사례를 연구하고 있어. 왜 이런 사례들을 연구할까? 대만의 총통이었던 장제스, 스페인 총통 프랑코, 두 사람 모두 본인들이 죽으면서 그 임기가 끝나. 종신 집권을 했다는 거야. 그렇게 은밀하게 진행된 풍년사업의 결과는, 다섯 달 뒤인 1972년 10월 세상에 공개됐어. '유신헌법'이라는 이름으로. ▲ 유신헌법 10월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헌법을 개정하고. 이게 바로 '10월 유신'이야. 유신, 사전적 의미는, 낡은 제도를 고쳐 새롭게 한다는 거야. 유신헌법에는 대통령이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카드들이 있었어. 먼저 '집권' 카드. 대통령 집권에 대한 강력한 변화가 생겨.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지 않는다는 얘기야. 그럼, 누가 뽑냐? 통일주체국민회의, 일명 '통대'라고 하는 기관에서 대통령을 선출하겠다는 거야. 그런데, 이 '통대'의 의장이 누굴까? 대통령 본인이야. 대통령이 의장인 기관에서 대통령을 뽑겠다는 거지. 대통령 임기도 4년에서 6년으로 늘어나. 그리고 대통령 중임 제한 폐지. 사실상 영구집권이 가능해진 거야. 두번째는 '밸런스' 카드. 권력의 밸런스를 파괴하는 카드야. 대통령에게 '국회 해산권'이 생겼어. 10.17 비상계엄 때는 국회 해산권이 없었다고 했잖아? 그걸 만든 거야. 이제 대통령이 입법권을 가진 국회를 해산할 수 있어. 그리고 국회의원 3분의 1을 대통령이 추천하고 이를 '통대'에서 선출하겠대. 게다가 대통령이 사실상 사법부의 모든 법관을 임명할 수 있게 됐어.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이 입법부에 사법부까지 손아귀에 쥐는 거야. 3권분립의 파괴야. 마지막 카드는 아주 강력한 힘이야. 바로 '긴급조치'야. 유신헌법 제53조 1항을 보면, '국정 전반에 걸쳐 필요한 긴급조치를 할 수 있다'는 거야. 필요한 조치라는 게, 어디까지 가능한 걸까? 무서운 거는 헌법에 규정돼 있는 국민의 기본권의 효력을 정지시킬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부여했죠. 조치에 대해서는 사법 심사를 할 수가 없도록 해놨어요. 그것이 헌법에 위반되었는지 이런 것 자체를 심사할 수 없도록, 헌법에 아예 명시해 놨어요. 긴급조치 위반했다고 그래서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이 긴급 조치는 위헌이다', '불법이다', 아무리 주장해 봤자 먹혀들 수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법원이 심사 자체를 못 했기 때문에… -정태호,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대통령의 판단에 따라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정지하고 처벌할 수 있다는 거야.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열흘 만에 공표된 이 유신헌법 개정안은 한달 뒤 국민투표에 부쳐져. 당시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 결과, 찬성률은 91.5%가 나와.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먼저, 유신이 내세운 명분 중 하나는 '평화통일'이었어. 유신 3개월 전,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돼. 분단 이후 남북이 처음으로 평화통일 원칙에 합의한 거야. 국민들의 통일에 대한 열망도 아주 높아졌어. 한마디로 '평화통일을 하려면 법과 체제를 바꿔야 한다', '10월 유신으로 한국적 민주주의를 이룩하자' 이런 명분으로 유신을 홍보한 거야. 유신헌법의 가장 큰 하나의 명분이 되는 것은 당시에 남북 관계가 획기적으로 변했다는 거죠. 그 이전에 남북의 어떤 대결, 특히 68년을 전후로 해서는 한반도의 안보 위기라고 부를 정도의 정말 곧 전쟁이 터질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었거든요. 그런데 이런 것들이 한순간에 갑자기 변해서 지금 남북이 대화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러한 대화 국면에서 어쨌든 우리가 북한과 제대로 대화를 하려면 체제를 바꿔야 된다, 이게 이제 가장 큰 명분이 되는 것이고. 그때 체제를 바꿀 때는 우리가 평화 통일을 지향하는 그런 헌법을 가져야 된다라고 하는 것이 이제 또 하나의 명분이 되는 거죠. -오제연,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실제로 박정희 대통령이 한 얘기가 있어. 만일 국민 여러분이 헌법 개정에 찬성치 않는다면 나는 이것을 남북 대화를 원치 않는다는 국민의 의사 표시로 받아들이고 조국 통일에 대한 새로운 방안을 모색할 것임을 아울러 밝혀두는 바입니다. -박정희, 10.17 대통령 특별선언 中 이런 선언과 함께, 유신 찬성을 위한 본격적인 홍보도 시작했어. 10월 유신, 100억 불 수출, 1,000불 소득 쭉 뻗은 도로, 기계화된 농촌, TV, 자동차까지... 잘 살려면 유신이 필요하다고 홍보하는 거야. 이것도 한 번 봐봐. 반대하면 파멸, 찬성하면 번영이래. 유신을 찬성해야 잘 살 수 있다는 거야. 그리고 효과적인 홍보 수단, 미디어도 활용했어. 이 시기에 모든 신문과 방송은 검열을 거쳐야만 했대. 혹여나 유신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가 나가면 안되니까. 문공부에서 주는 보도 자료를 한 자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써야 되니까.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적절한 법률이다', 그런 식으로 다 신문이 받아 썼었죠. '유신만이 살 길이다' 그런 구호를 신문에 꼭 넣고. 그 다음에 칼럼을 쓸 필자들 풀로 넘겨줘요, 우리 신문사에. 그래서 '이 중에 골라서 해라'. 그런 사람 외에는 쓰지 못하게 했어요. 완전히 언론 탄압을 무지막지하게 했죠 그 당시에는. 유명한 얘기가 있는데 광고 이론에 나오는데 '반복은 진실을 만든다'는 말이 있어요. 계속 반복하면 그렇게 세뇌되는 거예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요. -김동현, 당시 동아일보 기자 비상계엄이 선포된 1972년 10월 17일부터 유신 찬반 국민 투표일인 11월 21일까지, 유신 관련 좌담 방송이 398회, 유신지지 단독 해설이 218회, 유신 비전 제시 특별 프로그램이 58회 방송됐어. 이 정도면, 국민 투표에서 찬성률이 그렇게 높았던 이유가 좀 이해가 가지? 계엄 포고령에 따라 모든 집회, 시위는 금지됐어. 대학가는 계엄군이 지키고 있어. 유신을 반대하는 목소리는 들리기가 어려운 상황이야. 그렇게 비상계엄 체제 하에 유신헌법 국민 투표는 '찬성'이란 결과를 낳았어. 투표한 사람 중에서 90% 이상이 지지를 보냈으니까 '야 이건 정말 국민들이 모두 원했던 것이 아니냐' 얘기할 수도 있겠죠. 근데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역시 고려할 필요가 있겠어요. 일단 계엄령 아래에서 국민투표가 이루어졌다는 거예요. 한마디로 군대를 깔아놓고, 즉 바로 옆에 탱크, 장갑차, 무장한 군인들이 즐비한 상황에서 투표가 이루어졌다는 거죠. 두 번째가 여러 가지로 유신을 지지하고 찬양하는 목소리만이 허용됐던 그런 시절에, 정말 사람들은 그 얘기를 들을 수밖에 없고, 그 얘기 외에는 어떠한 판단의 근거도 마련돼 있지 않은 그런 상황에서는, 정부가 유도하는 대로 선거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숫자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것은 문제가 됩니다. -오제연,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그제서야 비상계엄도 해제됐어. 그렇게 유신 시대가 시작된 거야. ▲ 유신 시대의 시작과 반발 그리고 대통령 선거를 치른지 1년 만에, 8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져. 들어봤을 거야, '체육관 선거'.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대통령 선거가 이루어졌어. 당연히 유신헌법에 따라 국민은 투표를 할 수가 없어. 통일주체국민회의, 일명 '통대'의 대의원들이 대통령을 뽑아. 후보는 단 한 명, 박정희. 결과는? 찬성 2,357표, 반대표는 없어. 무효표만 2개야. 그래서 찬성률이 99.9%야. 앞에 나온 7대 대선 때 박정희 후보의 선거유세 기억나? '나를 한번 더 뽑아 주십시오' 하는 정치 연설은 오늘 이 기회가 마지막이라는 것을 확실히 말씀드립니다 라고 했던 거. 결과적으로 이 약속은 지켜졌어. 국민 앞에서 더 이상 지지를 호소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이때부터 1987년까지 무려 16년간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 직접선거가 이뤄지지 않았어. 그 문제점을 누구라도 조금만 들여다보면 알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오래갈 수가 없었던 거죠. 유신헌법에 대한 반대 투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거였죠. -정태호,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여기저기서 반발이 튀어나오기 시작해. 박정희의 라이벌, 김대중. 그가 일본에서 한 연설이 있거든. 한 번 들어봐. 요새 하고 있는 10월 유신이라는 거는 세상에 말도 안돼. 유신이 뭐야, 유신이. 일본 사람들이 100년 전에 써먹은 소리 아니요? 여러분, 다 기억하실 거예요. 재작년 선거 때 만일 이번에 박정희 정권의 종식을 짓지 못하면 이제 우리에게는 선거조차 없는 영구 집권의 총통제 시대가 온다고. 내가 몇 천 번 말했어요. 상당수 사람들이 '그래도 설마?' 그랬어. 그 설마가 사람 잡아요. 그렇게 됐어. 10월 18일 날 저는 박정희 씨의 조치를 정면으로 부인하고,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성명의 서두에 '박정희 씨의 이번 조치는 통일을 빙자해서 자기 자신의 영구집권을 획책하는 것이다' 이렇게 성명을 했습니다. -김대중 일본 하코네 연설 中 유신 발표 직후부터 김대중은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유신 반대 목소리를 냈어. 그러던 1973년 8월 8일 일본 도쿄의 한 호텔. 김대중은 호텔 스위트룸에서 약속을 마치고 막 방을 나서는 중이었어. 그 순간 웬 남자들이 나타나 김대중의 목을 낚아채고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고는 끌고 가. 중앙정보부가 김대중을 납치한 거야. 이 김대중 납치 사건은 국내외적으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게 돼. 반유신 운동에 불을 붙인 거야. 반유신 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움직인 사람들은, 대학생들이었어. 여러 학교에서 시국선언문을 발표하며 대학생들이 유신체제와의 투쟁을 선언했어. ▲ 긴급 조치의 시대 이 상황을 유신정권은 어떻게 했을까? 유신헌법에 아주 강력한 제재가 있었잖아. 바로 '긴급조치'. 1974년 1월 8일, 박정희 대통령은 긴급조치 1, 2호를 선포해. 1월 8일 박정희 대통령은 헌법 제53조에 의한 대통령 긴급 조치를 선포하여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고,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고 밝혔습니다. 이 조치에 위반하거나 비방한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며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하기로 했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유신헌법에 대해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어. 반대는 물론, 비방도 하면 안돼. 또 유언비어도 금지야. 위반하면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고, 징역이 무려 15년까지 가능해. 그리고 긴급 조치 2호는, 비상군법회의 설치에 대한 내용이야. 실제로 긴급조치 위반으로 학생들은 비상보통군법회의에 세워졌어. 긴급조치의 주된 내용들은 유신 체제를 보호하기 위한 그런 거였죠. '유신헌법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마라' '좋다 나쁘다 평가도 하지 마라' '유신헌법이 나쁘니까 개헌을 하자' 뭐 이런 얘기도 하지 마라. 그러니까 이게 민주주의의 근본 원리, 특히 국민주권 원리를 정면으로 부정한 거거든요. -정태호,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곧이어 발표된 긴급조치 3호에는 국민생활안정을 위한 조치들이 나열돼 있어. 불안해진 민심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을까? 그럼에도 여론은 심상치 않았어. 결국 박정희 대통령은 직접 나서 이야기해. 이런 판국에 전 국민이 혼연일체가 돼서 한 덩어리가 돼도 지금 이러한 난관을 뚫고 나아가기가 힘이 들고 힘이 부족한 판인데. 작년 연말부터 국내 일각에서는 일부 인사들 중에 현 체제에 대해서 정면으로 도전을 해오는가 하면 민심을 자꾸 선동을 하고 사회 혼란만을 조장하기 때문에, 그동안 수차 설득도 해보고 경고도 해 보았습니다만 설득이나 경고만 가지고는 이 사람들의 행동이 중지할 그런 뜻이 전혀 없다는 것을 판단을 해서 만부득이 대통령의 긴급조치를 발동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번에 긴급 조치가 선포된 그 배경, 이유라고 그럴까. 목적, 취지 이런 것을 여러분들이 잘 이해를 해 주시고, 적극적으로 협조를 해주십사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적극적으로 협조를 해 주시면 이 조치는 곧 필요 없게 될 것입니다. -박정희, 1974년 1월 연두 기자회견 중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은 긴급조치에 대한 영화도 만들었어. 영화 속 어머니 역할이 아주 온화한 말투로 정부의 긴급조치에 대한 입장을 줄줄 설명하곤 했어. 하지만, 유신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가. 긴급조치로 억압 받은 학생들은 더 많은 학생들과 연대를 해. 4월 3일, 대학가에서 시위를 준비한 거야. 그런데, 이를 사전에 파악한 유신정권은 대대적인 검거에 나서. 그리고 4월 3일 밤, 긴급조치 4호가 선포돼. 그 내용은 이래.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과 이에 관련되는 단체를 조직 또는 가입하거나, 활동에 동조하거나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이를 위반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긴급조치로 최대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어. 어떻게 학생들의 시위에 사형까지 언급됐을까? 여기에서 언급된 단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줄여서 '민청학련'이라 불러. 긴급조치 4호가 선포된 이유는, 바로 이거였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의 수사 상황을 발표했습니다. 과거 공산 불법단체인 인민혁명당과 제1 조총련, 국내 좌파 혁신계 기독교 학생단체, 그리고 일본 공산당원까지 포함된 약 20명의 배후 조종자가 스며들어 자금을 대는 등 학생들을 뒤에서 조종한 것이 드러났습니다. 4월 3일을 기해 폭동을 일으켜서 정부 주요기관을 점거하고 정권을 인수하려 했으며, 인혁당은 대한민국을 폭력으로 전복하고 공산정권을 수립할 목적으로 북한 괴뢰 지령에 따라 조직되고 활동한 반국가단체라고 밝혔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학생들이 북한의 조종을 받고 있고, 공산계 불법단체가 배후에 있다는 거야. 나라를 전복할 목적이래. 그런데, 이건 조작으로 밝혀졌어.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학생들의 시위를 배후세력까지 조작해서 국가전복 시도라는 시나리오를 쓴 거야. 그렇게 민청학련 사건으로 조사받은 사람만, 천 명이 넘어. 대부분 대학생들이었어. 그중 7명에게 사형이 구형됐고, 무기징역 7명, 징역 20년형이 12명이나 됐어. 이 사건의 변론을 맡았던 강신옥 변호사는 법정에서 이렇게 얘기를 했어. 법은 정치와 권력의 시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랏일을 걱정하는 애국 학생들을 빨갱이로 몰아 사형이니, 무기니 하는 형을 구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법을 악용하는 '사법 살인'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강 변호사가 이렇게 변론을 이어가는 도중, 갑자기 휴정이 선포되고 강 변호사는 연행됐어. 그날 밤, 남산 중정으로 연행된 강 변호사는 잔혹한 구타를 당했대. 그리고 결국 구속됐어. 그의 죄목은, '긴급조치 위반'이었어. ▲ 언론 통제와 저항 이런 사태들이 벌어지고 있지만 언론에선 제대로 보도하지 못했어. 학생들의 시위, 개헌운동 등은 기사가 빠지거나 최소화돼. 고문, 수사, 재판에 대한 문제점에도 침묵했어. 당시 언론사에는 기자도 아닌데 매일 출근 도장을 찍는 사람이 있다고 해. 기관원이라고, 중앙정보부에서 나온 사람이야. 기사를 빼고, 용어를 바꾸고. 중앙정보부에서 각 언론사별로 담당직원을 배치해 통제를 하는 거야. 유신 시기에 들어서서는 신문에 무슨 기사를 내지 말라, 내지 말라는 게 딱 아주 한정돼 있는데. '학생들 데모 기사는 절대로 내지 마라'. '저항하는 움직임에 대해서 아주 손끝 하나도 보도하지 말라' 이렇게 되는 거죠. -김학천, 당시 동아방송 PD 그 당시는 그 모든 걸 전부 통제하고, 누가 자살했다든지 뭐 어제 굶는다든지 어렵다든지 이런 건 기사 못 나가게 돼 있어요. 전부 다 밝은 기사만 쓰라 그러고. -김동현, 당시 동아일보 기자 보도할 때 쓰는 단어에도 제재가 있었어. 예를 들어 '물가 인상'은 '물가 현실화'. '세금 인상'은 '세제 개혁'. 묘하게 뉘앙스를 바꾼 거야. 이런 상황에 언론인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 당시에 데모하는 현장에 가면, 서울대학교에 가면 그쪽에서 써 놨어요. '개와 기자는 출입금지' 써놨어요. '기사 나가지도 않는데 왜 오는데, 올 필요 없다'고 해가지고. 그렇게 모욕을 받았어요. 그러니까 얼마나 괴로웠겠어요. 그때 보면서 '부끄럽다'는 걸 느꼈어요. 기자가 참 부끄럽다. 그걸 제대로 해서 국민에게 알려줄 의무가 있는데. '그런 걸 못하면서 말이야. 기자라고 언론이라고' 이거는 너무 창피했어요. 그때 우리들이 울었어요, 사실은… -김동현, 당시 동아일보 기자 이런 상황이 되자 언론도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 이 사진을 한번 볼래. 사진 속 족자에 적힌 글자는 '자유언론 실천선언'. 마지막 사진에 서 있는 분은 인터뷰를 해 주신 김학천 PD야. 그렇게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은 투쟁에 나섰어. 신문방송잡지에 대한 어떠한 외부 간섭도 배제한다 , 기관원의 출입을 거부한다 , 언론인의 불법 연행을 거부한다 라고 외쳤어. 그 후 매일매일이 치열한 싸움이야. 회사 건물 현관에 '기관원 출입 금지'라고 써 붙이고, 학생 시위에 대한 기사를 늘렸어. 그리고 라디오 방송에서는 비판적이고 풍자적인 멘트도 넣었어. 권력이란 무엇입니까. 한 번 잡으면 그렇게 놓기 싫은 겁니까? 라며 비판했어. 그리고 얼마 뒤, 아주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해. 저희는 동아일보에서 광고를 그만해야 할 것 같은데요. 이번 달 광고 예산이 아직 안 나와서. 광고를 더 못할 것 같은데... 무려 90% 정도의 광고가 해약돼. 그리고 12월 26일 동아일보 신문은 이렇게 발행돼. 아예 백지광고로 나간 거야. 무더기로 광고가 빠진 자리를, 그대로 보여준 거지. 그런데, 그 후로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 이건 다른 날 발행된 동아일보야. 빼곡히 채워진 광고의 정체. 격려 광고가 들어오기 시작한 거야. 대학생, 주부, 어린이, 해외 동포까지. 자발적으로 정성을 모아준 거야. '취학하는 석아, 그른 것은 절대 배우지 마라' ?아빠, 엄마 '양심에 호소하여 우리보다 참하게 살았으면 싶다'-어느 여자 직장인 '운전자와 손님이 합심하여 동아일보의 발전을 빌며'-택시 운전사와 손님 '데이트 자금으로 작은 지면을 삽니다'-순과 선 '이 나라에서 법을 공부하는 안타까운 이 마음과…' ?서울대 동창 남매 마침 그것도 이제 시민들이 성금 내듯이 그런 식으로 했으니까. 고무적이었죠. 우리를 후원하는 이런 사람들이 있구나, 우리 우군이 있구나, 우리가 외롭지 않다. 그런 걸 느꼈어요. -김동현, 당시 동아일보 기자 시민들의 격려 광고로 힘을 얻으며 저항을 이어오던 어느날, 김학천 PD는 아주 특별한 방송을 준비해. 주제는 바로, '감옥으로 보내는 편지'였어. 당시 긴급조치 위반으로 수감 중인 사람들의 가족들이 직접 쓴 편지를 방송하기로 한 거야. 방송이 시작되고, 수감 중인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어린 아들이 직접 읽어. 아버지! 난 아버지가 죄가 있어서 거기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요. 그래서... 편지는 이제 시작인데, 그 후는 꺽~꺽~ 우는 소리만 이어져. 그 다음은 자식을 감옥에 보낸 어머니의 편지였어. 아들아, 엄마가 엊그제 면회를 갔는데 면회를 시켜주지 않더구나. 내복 여러 벌 가지고 갔는데 전해주지 못했구나. 다른 재소자들이라도 입으라고 전부 두고 왔단다. 엄마는... 어머니도 더 이상 편지를 읽지 못하셔. 사무치는 울음소리만 전파를 타고 퍼져나가. 상당히 파국까지 왔다라는 생각이고, 꺾일 때 어떻게 꺾일 것인가. 어쨌든 난 아침 시간 15분, 내가 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때 뭐 감옥에 많이 들어가 있었지. 그 감옥에 아이들 또는 부모를 둔 사람들이 5분 동안 원고지 한 6~7장을 써서 읽으라고 했는데. 첫 번째 문장만 그냥 읽다가 그 다음에 다 우는 걸로 끝을 냈어요. '김학천 씨, 이거 여기서 끊을까요? 그냥 훌쩍훌쩍 울기만 하는데' 묻길래, '그냥 둬라. 그것도 메시지 아니냐'.. 한 1~2분 얘기하고 2~3분 우는 프로그램이 나갔어요. -김학천, 당시 동아방송 PD ▲ 분노한 대학생들 1972년에 유신이 시작되고 유신에 대한 저항과 이를 막으려는 조치들이 반복됐어. 긴급조치 5호와 6호는 앞서 선포된 조치들을 해제하려는 조치야. 긴급조치 해제를 위해 또 다른 긴급조치를 선포한 거야. 그리고 7호는, 고려대학교 한 학교를 휴교시키기 위해 선포됐어. 시위를 막으려고. 그리고 1975년 4월 8일. 또 한번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져. 긴급조치 4호 기억나지? 대학생들이 북한 세력의 조종을 받아 국가를 전복할 목적이라며 사형을 구형했던 거. 이날은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 세력으로 지목됐던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들의 최종 판결이 내려지는 날이야. 그리고 8명의 관련자들에게 최종적으로 사형이 선고됐어. 다음날, 사형 선고를 받은 이들의 가족들이 아침 일찍 구치소로 향했어. 구속 이후 1년 가까이 만나지 못해서, 형이 확정됐으니 면회라도 가능하겠지 싶어 만나러 간거야. 그날 찍힌 사진이 있어. 통곡하는 가족들. 이미 사형이 집행된 거야. 대법원 판결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 됐어. 이날은 사법 사상 암흑의 날로 기록돼. 훗날, 이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 사람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어. 이틀 뒤 서울대 백양나무 옆 잔디밭에 3백 명 가량의 학생들이 모였어. 그리고, 한 청년이 이들 앞으로 걸어 나와. 청년의 이름은 김상진이야. 서울대학교에 재학중이었던 상진이는 친구들과 함께 유신 반대 단식 집회를 준비하고 있었어. 김상진 학생에 대해 들어볼게. 우리 상진이가 착하고 진짜 속 썩이는 거 없었어요. 아버지 어머니 말을 잘 들었지. -김상운, 김상진 형 조용했습니다. 얌전하다고 할까요. 차분한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저하고 서울대학교 같은 과를 입학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유신헌법의 그 문제점들이 사회적으로 자꾸 농축돼 갔던 거죠. 75년도부터가 거의 폭발의 단계에 왔습니다. 그 폭발의 불쏘시개를 한 게 제2차 인혁당 사건입니다. 그 사건이 발생해서 8명이 사형 집행이 된 적이 있죠. 상진이가 매우매우 분노했습니다. -이호선, 김상진 친구 상진이는 학생들 앞에 서서 준비해 온 글을 읽기 시작해. 글의 제목은 '양심선언문'이야. 당시 상진이의 목소리를 녹음한 기록이 있어. 우리를 대변한 동지들은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신음하고 있고, 무고한 백성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가고 있다. 합법을 가장한 유신헌법의 모든 부조리와 악을 고발한다. 우리는 유신헌법의 자기중심적 이기성을 고발한다. 학우여 아는가! 민주주의는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투쟁의 결과라는 것을. 이것이 민족과 역사를 위하는 길이고, 이것이 우리 사랑스러운 조국의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길이며, 이것이 영원한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길이라면. 이 보잘 것 없는 생명 바치기에 아까움이 없노라. 나의 앞으로의 행동에 대해서 여러분은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완전한 이성을 되찾아서, 우리가 해야 할 바를 갖다가 명실상부하게 이끌어 나가길 바란다... -김상진의 양심선언문, 1975년 4월 11일 녹음분을 들어보면, 상진이의 이 말을 끝으로 갑자기 현장이 소란스러워져.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건 방송에는 처음 하는 얘기들입니다. 이걸 꼭 기록을 해주셔야 됩니다. 그 계단에서 이런 얘기를 저한테 했군요. '호선아 나는 이제 나의 신념을, 각오를 행동으로 표현할게. 유신이 없어지는 날, 나를 기억해 달라'는 그런 식의 얘기였습니다. 상진이가 서서 낭독하는 그 자리에서 10여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제가 앉아 있었어요. 상진이가 양심선언문을 읽자마자 가방에서 과도를 꺼냈습니다... 5초만 빨라도 됐습니다. 5초만 빨라도 됐어.. 칼로 찌르고 앞으로 넘어지기 직전에 제가 뒤에서 붙잡았습니다. -이호선, 김상진 친구 호선이는 상진이와 함께 병원으로 이동했어. 그 택시 안에서 상진이가 이런 이야기를 했대. 호선아, 애국가 불러줘 호선이는 큰 목소리로 애국가를 불렀어. 그리고 상진이는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어. ▲ 긴급조치 9호 김상진 열사의 죽음 뒤로, 저항의 목소리를 더욱 거세졌어. 그로부터 한 달 뒤, 긴급조치 8호로 긴급조치 7호가 해제되고, 동시에 긴급조치 9호가 선포돼. 유언비어 안 되고, 유신헌법에 대해 말해서도 안 되고, 시위는 물론 학생의 정치 관여도 안돼. 긴급 조치 9호는 어떤 특정한 사건에 대응하기 위해서 발동한 것이 아니라 그냥 항시적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유신 체제에 대해서 저항은 물론이고 어떠한 비판도 할 수 없도록 결국에는 아주 광범위하고 포괄적으로 유신에 대한 반대를 불허하는 그러한 조치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이런 것들을 우리가 보통 '긴급조치의 종합판'이다… -오제현,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이렇게 선포된 긴급조치 9호는 오랫동안 국민의 숨통을 조여왔어. 무려 4년 7개월 동안. 긴급조치가 9호가 이렇게 오래 지속되는 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때는 1978년 11월. 전북에서 꽤 잘 나간다는 한 학원이야. 이 학원에서 영어강사로 일하는 차봉현 씨. 봉현 씨는 여기저기 스카우트가 될 정도로 인기 강사였대. 봉현 씨는 영어뿐 아니라 정치 경제 윤리 강의도 하며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어. 어느날, 봉현 씨는 여느 날처럼 학원으로 출근을 했어. 수업 내용을 살펴보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남자 2명이 들어와. 학원으로 경찰들이 들이닥친 거야. 경찰이 물어보는 거예요. '당신이 유신 헌법 철폐하고 유신 헌법 없애자고 학생들 앞에 주장 안 했냐' 이제 이렇게 나온 거예요. '나는 절대 그런 말 안 했다' 내가 사회의 지도자가 아니고 내가 뭐 정당의 정당인도 아니고 내가 뭐 정치를 하는 사람도 아니고. 절대 부인한 거예요. -차봉현, 당시 영어학원 강사 봉현 씨가 강의 중 유신헌법 철폐를 주장했다는 거야. 봉현 씨는 강의 때 이렇게 얘기를 했대. 국회의 여당 의원 수가 많잖아요. 그건 헌법으로 설치된 통일주체국민회의가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뽑기 때문이에요. 이런 말이 문제 될 거라곤 생각도 못했어. 그 후, 봉현 씨는 여기저기 끌려 다니며 폭행을 당했어. 날이 갈수록 폭행의 강도는 점점 심해졌대. 둘이서 이제 때리기 시작한 거예요. 주먹으로 뺨도 때리고. 취조하는 실인데 거기 데리고 가서 옷을 벗겨요. 옷을 벗겨 가지고 빨가 벗겨서 몽둥이로 이제 때리는 거예요 둘이서. 또 무릎을 꿇고 앉으라고 해서 무릎 사이에 나무를 놔두고 거기서 밟아버려요. 그러면 무릎이 팍 깨져요. 그런 고문을 당했어요. 경찰서 정보과실에서. '나는 비판 정도를 했다' '헌법을 폐지해야 한다.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 이런 말은 절대 한 것 없다. 근데 그게 안 통한다니까. 자기가 써갖고 와서 이렇게 '이대로 해달라' 그러니까 내가 이제 안 맞으려고 사인해 줬죠. -차봉현, 긴급조치 피해자 자백을 받기 위해 봉현 씨를 고문한 거야. 봉현 씨는 1년 6개월의 형을 선고받았어. 근데 이런 일을 겪은 건 봉현 씨 뿐만이 아니야. 긴급조치 9호로 처벌받은 사례들을 보여줄게. 박정희는 군인 출신이기 때문에 정치를 잘할 수 없어. 100억 불 수출이라 하면서도 수입에 대해서는 은폐하고 있잖아. 언론의 자유도 없는 거야. 이런 말을 했다고 징역 8년을 선고받았어. 또 어떤 남자는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박정희 정치는 뭣~도 아니다 이렇게 외쳤어. 판결은 징역 1년. 자기야, 대통령이 내가 잘 아는 친구 언니와 애인 사이래 라는 가벼운 말. 이건 징역 1년을 선고받았어. 긴급조치 9호는 술 먹고 말 한마디 잘못해도 잡혀간다 해서 '막걸리 보안법'이라 불렸어. 심지어 노래도 마음대로 못 불렀어. 국가의 안전 수호와 사회 질서를 문란케 하는 대중문화가 있다는 거야. 그렇게 취한 조치가 '금지곡'. 1975년 한 해 동안 금지된 노래가 국내 가요만 222곡이야. 지금도 들으면 알만한 곡들이 이때 무더기로 금지가 돼. 김추자의 '거짓말이야'. 이 노래는 1971년 발매돼 아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어. 이 노래가 갑자기 금지된 이유는 '거짓말이야'라는 가사 때문에. '가사 내용 불신 조장', 그리고 창법도 저속하대. 신중현의 '미인'. 너무 유명한 노래지. '신중현과 엽전들'의 '미인'은 1974년에 발매돼 약 40만 장 이상의 앨범 판매를 올린 대히트곡이야. 이 곡이 금지된 이유는, 저속한 가사, 퇴폐한 곡이래. 어디가 저속하다는 걸까?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 이 가사를 학생들이 '한 번 하고 두 번 하고 자꾸만 하고 싶네~' 이렇게 개사해서 불렀대. 박정희 대통령이 대통령을 한 번 하고 두 번 한다고, 그렇게 비꼬고 풍자하니까 금지곡이 된 거 아니냐 라는 얘기가 있어. 그리고, 금지곡 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곡이 한 곡 더 있지. 바로 김민기의 '아침이슬'. 양희은이 부른 '아침이슬'이 많이 알려져 있지. 이 노래를 작사, 작곡한 사람이 바로 김민기야. 이 곡이 금지된 이유는, 없어. 기록에 금지 사유가 아예 적혀 있지 않아. 보통 이렇게 금지곡이 되려면 그 옆에 금지 사유가 있어야 돼요. 아무리 엉망으로 하더라도 사유가 있어야 되잖아요. 근데 '아침이슬'은 금지 사유가 없어요. 이걸 대학생들이 시위에 불렀다고 금지를 시키기에는 너무 논리가 옹색한 거죠. 금지 사유가 없어. -강헌, 음악평론가 유신 반대 시위 현장에서 많은 학생들이 김민기의 노래를 불렀어. 그렇게 김민기의 노래는 모두 금지곡이 되었고 그는 보안사 등 여기저기를 끌려 다니며 조사를 받고 활동 또한 탄압을 받았어. 금지라는 행위, 검열이라는 행위가 뭐가 나쁘냐면요. '상상력에 제한이 가해져서는 안 된다'라는 이유인 겁니다. 결국 검열은 상상력의 잠재력을 사실은 원천적으로 파괴시키는 행위예요. 알아서 기게 만드는 행위예요. 그걸 알아서 기는 예술가들이 어떤 작품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결국 그런 표현의 자유를 물리적인 공권력으로 억압한다는 얘기는 그냥 간단한 얘기예요. 그냥 단순히 '이 노래 부르지 마, 이 영화 보지 마, 이 책 읽지마'로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이것은 기본적으로 민주주의가 보장하고 있는, 헌법이 보장하는 모든 기본권이 '전부 구금될 수 있다'는 얘기이고 실제로 그렇게 됩니다. -강헌, 음악평론가 ▲ 유신의 종말 말 한 마디 조심하고, 노래도 마음대로 못 하는 시대는 몇 년 간 이어져. 그러던 중, 1979년 민중의 불만이 폭발하는 사건들이 일어나. 'YH 사건' 혹시 들어봤어? 8월 9일, 가발공장이었던 YH무역의 일방적인 폐업 공고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이 당시 야당인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이게 돼. 여공들의 호소를 받아 주고 당사로 받아준 사람이, 당시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야. 하지만, 곧 야당 당사에 경찰이 투입돼. 농성을 하던 노동자들을 경찰은 무차별 폭력과 강제 연행으로 진압했어. 이를 지켜 본 김영삼 총재는 박정희 정권과의 정면대결에 들어가. 그러다 김영삼 총재는 국회의원 제명을 당해. 제명된 후 이렇게 말했지. 아무리 닭의 목을 비틀지라도 새벽은 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10월 16일 부산. 유신철폐! 독재타도! 를 외치며, 김영삼의 정치적 본거지였던 부산 시민들이 들고 일어났어. 부산대에서 수백 명으로 시작된 시위는 수천 명으로 늘어났고, 결국 수 만명의 군중이 모였어. 그리고 부산에 비상계엄이 선포돼. 부산 시내에 탱크가 등장했어. 그러나 시민들은 물러서지 않았고 시위는 마산으로까지 번졌어. 바로 '부마항쟁'이야. 김재규의 법정 진술에 따르면, 부마항쟁을 보고 받은 박정희 대통령이 이런 말을 했다는 거야. 이제부터 사태가 악화되면 내가 발포 명령을 하겠다. 그리고 부마항쟁 열흘 뒤인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열린 연회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에 맞아 사망해. 이렇게 유신 시대는 끝을 맞게 돼.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궁정동 안가. 유신헌법의 초안이 작성된 장소 어디라고 했지? 그래 궁정동 안가. 거기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며 길고 길었던 유신 시대는 끝이 났어. 7년간 이어진 유신체제. 그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지. 언론의 자유를 위해 싸운 분들은 마지막까지 철야 농성을 하며 저항했지만, 결국 회사에서 강제로 끌려 나왔어. 당시 100 명이 넘는 언론인이 해임을 당하게 돼. 긴급조치 9호로 재판을 받던 학원강사 봉현 씨는 박정희의 사망 후 최종 면소 판결을 받고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어. 하지만 다시 강사로 취업할 수는 없었다고 해. 긴급조치는 30년이 훨씬 지나 2000년대에 들어서야 위헌 판결이 내려졌어. 2010년 대법원은 긴급조치 1호가 유신헌법, 현행헌법에 위험이라고 판단했고, 그 이후 긴급조치 4호, 9호 역시 위헌이라 했어. 2013년 헌법재판소에서는 긴급조치 1호, 2호, 9호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어. 그리고 2018년 대법원에서는 1972년 비상 계엄 포고령에 대해 이렇게 판단했어. 당시의 국내 정치 상황 및 사회 상황이 계엄법에서 정한 '군사상 필요할 때'에 해당한다고 할 수 없다. 계엄 포고는 헌법과 법률에서 정한 발동 요건을 갖추지 못한 채 발령되었고, 구 헌법, 현행 헌법, 구 계엄령에 위배되어 위헌이고 위법하여 무효이다. 노벨문학상 수상한 한강 작가가 이런 말을 했어.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라고.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현재도 언젠간 과거가 될 거야. 현재가 어떻게 기록될지는, 지금 우리의 몫이지 않을까?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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