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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찐리뷰] '모래시계' 끝나면 만나 조폭들 싸움까지 중단시킨 레전드 드라마…모티브가 된 실화는?
등록일2025.09.07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4일 방송된 '특집: 더 레전드'의 2부 '그해 겨울, 모래시계의 전설'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마마무 화사, 배우 장동윤, 현봉식이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서울 거리가 텅 빈 이유 때는 30년 전인 1995년 1월. 밤마다 서울 시내에서 기이한 일이 벌어져. 매일 밤 특정 시간만 되면 거리의 사람들이 싹 사라지는 거야. 이때는 통금이 있던 시대도 아니야.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당시 거리에서 하염없이 손님을 기다리던 한 택시의 기사님한테 물어볼게. 그거 때문에 손님이 없잖아. 손님이 다 OOOO 보느라고. 손님이 없어 길에. 그거 대체 언제 끝나요? -택시기사 알고 보니 거리에서 사라진 사람들 모두 다, TV 앞에 있어. TV에서 방영하는 뭔가를 보려고, 거리에 나오지 않는 거야. 감이 좀 와? '우우우 우~우~, 우우우우~우~' 하는 멜로디가 유명한 드라마. 배우 최민수의 이렇게 하면 널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넌 내 여자니까! , 나, 떨고 있니? 하는 명대사가 있는 드라마. 오늘의 이야기, 바로 드라마 '모래시계'야. '모래시계'에는 당대 최고의 배우들이 나왔어. 태수 역의 최민수, 혜린 역의 고현정, 우석 역의 박상원. 그리고 재희 역의 이정재까지. 당시 신인급 배우였던 이정재가 신드롬에 가까운 인기를 얻게 된 것도 '모래시계' 덕분이었어. 최고 시청률이 무려 64.5%야. '모래시계'는 전설이 된 대한민국 대표 드라마야. 당시에 '모래시계' 때문에 생긴 유행어가 있었어. 바로 '모래시계'는 '귀가시계'라는 것. '모래시계'가 시작하는 밤 9시 50분 전에는 사람들이 TV를 보려고 다 귀가한다는 거야. 그게 어느 정도였냐. 서울 시내 교통량이 20% 이상 감소했을 정도야. 게다가 월, 화, 수, 목 주 4회 파격 편성이라, 평일 회식도 없어졌대. 그래서 식당, 술집 사장님들은 경제적으로 타격이 엄청났지만, 불만을 가질 틈이 없어. 본인들도 장사보다 그 '모래시계'를 봐야 하거든. 그야말로 신드롬이었어. 드라마가 너무 유행이다 보니, 공중목욕탕이나 사우나 안에 있던 진짜 모래시계를 가져가는 사람도 많았대. ▲ '모래시계' 신드롬 사람들은 왜 그 드라마에 열광했을까. 당시 생생한 현장에 있던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볼게. 먼저 '모래시계'에서 윤재용 회장 역을 했던 배우 박근형. 극 중 혜린의 아버지인 윤재용은 카지노 대부로, 권력을 탐하는 사업가이자 목표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야심가 캐릭터였어. 아주 장안에 굉장한 화제였던 거 같아요. 권력의 뒷면을 보는 맛이 있어 사람들의 흥미가 진진했고. 특히 카지노가 드라마에 나온 건 우리나라에 아마 최초일 거예요. 그래서 관심이 대단했던 거 같습니다 그때는. TV를 시청하시던 분들은 깜짝 놀랐을 거예요. 화면의 움직임이 굉장하고 역동적이었죠. 그 시절의 드라마라는 건, 프레임 안에 갇혀 대사 하는 정도였는데, 영화 보는 것 같았다는 분들이 많았어요. 그전에 있던 모든 걸 다 부숴버리는 그런 드라마라고 볼 수 있죠. -배우 박근형, '모래시계' 윤재용 회장 역 '모래시계'를 촬영한 촬영감독 서득원입니다. '모래시계'를 거의 1년 가까이 찍지 않았나. 김종학 감독님이 '영상으로 힘을 줘야 한다'고 해서 장면 하나 찍는데 5-6시간 이상을 허비하고. 그러다 보니까 완성도도 자연히 높아지고. 일단 주인공들의 감정 표현이나 그런 연기들이 있었기 때문에, '모래시계'가 좋은 호응을 얻지 않았나. 내용 자체가 굉장히, 광주 민주화운동이라던가 삼청교육대 얘기라던가. 사회적인 이슈가 많았고. 정치적인 얘기, 정경유착 관계된 얘기들이 다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시청자들의 호응도가 좋았던 거 같아요. -서득원, '모래시계' 촬영감독 때는 김영삼 대통령 시대였어.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던 군부 대통령의 시대가 끝나고 민간인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그간 성역처럼 여겨졌던 정치적 사건들이 전면에 다뤄졌어. 삼청교육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처음으로 다룬 드라마가 이 '모래시계'야. 5.18 민주화운동 당시 물을 전달하는 실제 자료 영상에 물을 받아마시는 배우의 촬영분을 연결하는 등, '모래시계'는 드라마 곳곳에 실제 영상을 삽입해 드라마의 현장성을 극대화시켰어. 특히 5.18 광주 민주화운동 에피소드는 실제로 광주에서 촬영했는데, 촬영 현장을 지켜보던 광주 시민들이 보조출연을 자청했다고 해. 굉장히 1994년도가 더웠어요. 엄청 더웠는데, 그때 엑스트라로 광주분들이 도와주셔서. 현장에 김밥도 싸 주시고, 달걀도 삶아서 챙겨주기도 하고. 자발적으로 뭐든 얘기하라고. 의상 입고, 피 분장까지 자처해서, 아주 즐겁게 하시더라고. 일하는데 큰 도움이 됐죠. -서득원, '모래시계' 촬영감독 '모래시계'는 단순 드라마를 넘어, 당시 하나의 사회 문화 현상이었어. 방송 철회를 요구하는 국방부의 압력에도 '모래시계'는 굴하지 않고, 아픈 역사를 세상에 알렸어. 하도 인기가 좋다 보니 드라마 시간엔 이런 것도 멈췄다고 해. 제가 정확하게 1984년부터 2010년까지 조폭생활을 하고 2010년에 은퇴했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모래시계' 하면 다, 싸움도 안 하고 그랬어요. '몇 시 후에 싸우자' 했죠. 그만큼 사람들이 좋아했었지. 그때 국민 정서로 '모래시계'가 좀 유명했었죠. 오죽했으면 조직폭력배들이 '모래시계' 한다고 '내일 싸움하자'고 할 정도인데. -이현수, 전직 조폭 대체 얼마나 재밌었길래, 조폭들도 싸움을 멈추고 볼 정도였을까. 드라마 내용을 짧게 알려줄게. 극 중 윤재용 회장에겐 운동권 대학생 딸이 하나 있었어. 고현정이 연기한 윤혜린이야. 한편 태수와 우석은 고등학생 때부터 절친 사이야. 그런데 태수는 폭력의 길로 들어서고, 우석은 법조인의 꿈을 품고 공부에 전념하며 다른 길을 가게 돼. 그러다 우석은 대학교에서 만난 혜린에게 반하고, 학생 운동 중 경찰에게 쫓기는 혜린을 숨겨줘.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에게 특별한 사이가 돼. 그러던 어느 날, 태수가 혜린의 존재를 알게 되고, 세 사람은 자주 함께 어울리게 돼. 그러다 혜린에게 특별한 감정을 갖는 태수. 혜린의 마음도 조금씩 태수를 향해. 이 세 주인공을 중심으로, 카지노 대부와 정치권, 조폭, 세 가지 축의 커넥션과 그 안에 담긴 사회 부조리들이 드라마에서 펼쳐져. 그들의 이야기 끝엔 어떤 결말이 펼쳐질까? 이 전설적인 드라마 '모래시계' 방송 2년 전인 1993년. 이 드라마의 모티브가 된 아주 굵직한 사건이 현실에 있었어. 조폭, 권력, 카지노를 둘러싼 은밀한 커넥션이 세상에 드러난,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 거야. '모래시계' 시대를 살았던 그 사람들의 진짜 그날 이야기. 드라마 대 현실, '모래시계' 대 실제 사건. 두 이야기의 엔딩은 같을까, 아니면 다를까? 이제부턴, 실화를 들려줄게. ▲ 정덕진 성공 신화 때는 1980년대, 서울 강남 일대에 돈으로 소문난 유명 인사가 있었어. 갈고리로 쓸어 담아야 할 정도 돈이 엄청 많다는 소문이 난 현금부자, 그의 이름은 정덕진이야.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자택은 물론, 미국 캘리포니아에도 지금 돈 80억 원 상당의 저택이 있었대. 정덕진 동생 정덕일 또한, 으리으리한 고급빌라에서 살았어. 정 씨 삼 형제가 보유한 부동산은 엄청났어. 정덕진 개인이 보유한 부동산은, 무려 112건이었어. 삼성동, 양재동 등 서울의 노른자 땅뿐만 아니라, 대전, 용인, 부산, 성남 등 주요 도시에 아파트와 땅을 엄청 갖고 있었어. 형제들이 보유한 부동산을 다 합치면 모두 216건, 당시 3천억 원 규모야. 지금 돈으로는 1조 원이 넘는 부동산 재벌인 거지. 정 씨 형제들의 리더 정덕진은 어떻게 부를 축적했을까. 정덕진은 한 때 서울 명보극장 앞에서 활동한 암표장사였어. 6.25 전쟁 때 부모님을 따라 월남한 터라, 가정 형편을 어려웠어. 그런데 성적은 좋았대. 서울 사대부고에서 늘 성적 상위권이었어. 그런데 가정형편 때문에 고1때 자퇴하고 뒷골목 생활을 시작했어. 그러던 스물다섯 무렵, 정덕진은 운명의 사람을 만나. 한 대학 교수인데, 그는 전공은 사학과인데, 특이하게 청계천에서 전자오락 기계를 만드는 회사를 경영하고 있었어. 정덕진은 그 교수를 찾아가 '돈은 없지만 사업을 하고 싶다'며, 전자오락기를 외상으로 지원해 준다면 잘 굴려서 돈을 갚겠다고 했어. 교수는 그의 호기로운 제안을 받아들였고, 정덕진은 전자오락기 스무 대를 지원받아서, 청량리 쇼핑몰 한 구석에 몰아넣고 가게를 열었어. 전자오락실의 주인이 된 거야. 근데 오락실 장사만으로는 큰돈을 벌 수 없지. 그러던 그에게 결정적인 기회가 찾아왔어. 교수가 유학을 떠나면서, 정덕진에게 오락기 전국 판매권을 양도한 거야. 당시에 전국 총판을 운영하며 정덕진은 처음으로 큰돈을 만지게 됐어. 그리고 얼마 후 정덕진에게 또 다른 사업 제안이 들어왔어. 여의도 관광호텔의 나이트클럽을 같이 운영하자는 제안이야. 당시 여의도는 개발 전의 진흙밭 상태였어. 그런데 정덕진은 이곳이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높다고 예측했어. 그래서 5년간 그 나이트클럽의 임대 계약을 맺었어. 하지만 여의도 나이트클럽으로 손님들은 오지 않았어. 전략이 필요했어. 정덕진은 택시기사들을 공략하기로 했어. 나이트클럽으로 손님들을 태워 올 때마다 기사들에게 천 원씩 팁을 주겠다고 했어. 지금 돈으로 5천 원 정도 하는 금액이야. 택시기사들은 택시에 탄 손님들을 여의도 나이트클럽으로 유도했어. 그렇게 석 달이 지나자, 사람들 사이에 여의도 나이트클럽이 입소문이 나고, 그 덕에 여의도 자체가 핫해져. 정덕진의 성공 가도는 이제 시작이야. 그의 다음 사업은 카바레였어. 한마디로 중노년층의 나이트클럽이야. 카바레를 운영하며 정덕진은 의외의 포인트에 집중해. 바로 화장실. 화장실을 고급스럽게 새단장하고, 늘 청결하게 유지해서 손님들 마음을 사로잡았어. 여자 손님들을 사로잡으니, 남자 손님들의 마음도 따라왔어. 정덕진이 손댄 다음 사업은 카지노였어. 정덕진은 강원도의 한 관광호텔 카지노를 인수해. 당시에 카지노는 내국인은 출입 금지라 외국인을 상대로 영업해야 했는데, 공항부터 카지노까지 이동하는 공항 셔틀 서비스를 운영한 거야. 결과는? 또 대박이 났어. 정덕진이 손대는 것마다 승승장구야. 사업이 점점 확장되면서 정덕진은 본격적으로 전국의 관광호텔을 사들이기 시작해. 그의 명함에는 떡 하니, '관광호텔 대표이사'라는 직함을 새겼어. 그런데 명함 뒷면엔 '제이 슬롯머신'이라 쓰여있어. 관광호텔의 부대시설인 슬롯머신업이 사실상 정덕진의 주력 사업이었던 거야. 처음 외상으로 빌렸던 전자오락기로 시작한 사업이 슬롯머신으로 진화하며 어마어마한 현금을 벌어들이기 시작했어. 사람들은 그를 '슬롯머신 대부' 정덕진이라 부르기 시작했어. 이 정덕진이, 드라마 '모래시계' 속 카지노 대부 윤재용 회장의 실제 모델이야. 멀리서 본 적은 있어요 그분을.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을까 의구심은 있었죠. 윤재용이라는 캐릭터가 권력에 대한 욕구가 대단한 사람인데도, 자제하고 부딪치고 이겨내는 면모들을 특별하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 캐릭터를 표현하는데 신이 났었어요. -배우 박근형, '모래시계' 윤재용 회장 역 슬롯머신 기계 옆의 손잡이를 당기면 가운데 세 개의 슬롯이 돌아가고, 세 개가 모두 '777'에 맞으면 상금이 제일 커. 몇 번 만에 당첨이 나오게 하느냐 하는 승률과, 이겼을 때 최고 상금을 얼마로 하느냐 시상금은, 법으로 정해져 있대. 그럼 당시 업소들이 이 규정을 따랐을까? 예전에는 승률이 8대 2. 80%는 가게, 손님들한테 20%, 그러니까 안 맞지. 이게 승부 조작을 할 거 아니에요. 발로 조작을 해. 카운트에서 버튼을 눌러요. 이게 선으로 다 연결돼서 발로 내가 카운터에서 딱 밟으면, 기계 불이 사정없이 들어오고 '777'로 맞아요. 수익은 우리가 월로 따지면 적게는 2억 원, 많게는 10억 원씩 해. 월 한 10억씩 버니까 그만큼 이권이 많은 거지. -이현수, 전직 조폭 승률은 낮추고 상금은 더 크게. 조작된 일부 기계에서 짜고 친 잭팟이 터지는 걸 옆에서 보면 욕심나지. 그래서 한 번만, 한 번만 더 하다가, 십 분에 몇 십만 원 잃는 건 일도 아니야. 슬롯머신 업장 한 달 매출이 10억 원. 지금으로 치면 약 40억 원이야. 슬롯머신 기계 하나하나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던 거야. ▲ 돈과 주먹 근데 돈 있는 곳에 부패 있고, 부패 있는 곳에 조폭이 있다고 하지? 조폭과 슬롯머신, 그 첫 번째 커넥션의 드라마가 시작돼. 예전에는 조직폭력배들은 거의 다 나이트클럽, 유흥업소, 슬롯머신, 이런 것에 무조건 개입되어 있었죠. 지역에서 이름 있는 사람들을 같이 합작으로 운영했었죠. 내가 뒤에서 돈을 댈 테니 네(조폭)가 운영을 해라. -이현수, 전직 조폭 1980년대 왕성하게 활동했던, 전국 10대 조폭 계보야. 조폭과 손을 잡은 건 정덕진도 마찬가지였어. 정덕진은 특히, 서방파의 김태촌과 커넥션이 있었어. 김태촌 알아? 김태촌은 뉴송도호텔 사장 피습사건 주범으로, 징역 5년, 보호감호 10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었어. 그러다 폐암이 발병돼 수감 3년 만인 1989년도에 형집행정지로 석방됐어. 천하의 김태촌도 돈줄인 정덕진 앞에선 고개를 숙였다고 해. 조폭들도 언제부턴가 돈과 권력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거든. 태촌이 형님께서 정덕진의 일을 많이 봐주고, 연줄이 되다 보니까. 어떻게 보면 형제 관계랑 비슷했지. 조폭들은 돈을 쫓아다니니까. -이현수, 전직 조폭 정덕진 씨를 만날 때면 보통 오백만 원, 오천만 원 그렇게 받았으니까. 정덕진이 돈을 건네주면, 김태촌의 금고가 있어서 제가 받아서 넣고 했으니까. -구상열, 1989년 김태촌의 운전기사 김태촌은 정덕진에게 2억 3천만 원, 지금 돈으로 약 7억 원 정도를 받아서 관광호텔의 슬롯머신 업장 하나를 꿰찼어. 그리고 매월 상당한 용돈을 받으며 다른 슬롯머신 업장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사건의 해결사 노릇을 했어. 정덕진과 김태촌, 돈과 주먹의 결탁. 이들 관계는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완벽한 공생 관계였을까? 법정에서 그때 정덕진이 조폭하고 본인의 관계가 나오니까, 자기를 협박을 하도 해서 어쩔 수 없이 지분을 넘겨줬다, 거기에 대해서 이제 김태촌은 '그게 아니었다 돈을 빌렸다', 이 표현을 우리가 주목해 봐야 하는데, 조폭들이나 주먹들은 절대 돈을 강탈했다고 안 해요. '돈을 빌려서 투자한 거다' 그렇게 얘기해요. -조성식, 검찰 출입 20년 기자 철저히 이익에 의해 맺어진 동맹. 이건 곧, 이익이 안되면 언제든 깨질 수 있는 관계라는 거야. 슬롯머신 업장을 운영하라면, 매우 중요한 커넥션 하나가 더 있어야 했어. 바로 '공권력'. 당시 단속 정보를 미리 알려주거나 단속을 막아줄 공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정기적으로 상납을 했어. 불법운영을 하다 보면 제일 필요한 게 뭐예요? 공권력이 있어야 해. 누가 정보를 줘야 하고 가게를 봐줘야 살아남을 수 있어. 유착은 기본이에요. 그거 없으면 영업 못 하니까. 우리가 경찰차를 조직 세계에서 '시차'라고 불러요. 시차들이 업장 앞에다 차를 대놓고, 그냥 무전으로 '사장 나와라' 해서 '자 오늘 뭔 날이니까 야식 좀 보내줘' 그러면 야식비 30~50만 원씩 주고 예전에는 다 그런 시절이었다니까. 그런 사람들이 한 달에 한 번씩, (수금하는) 날짜가 있을 거 아닙니까. 그러면 쇼핑백에 넣어 갖다 드려. 금액은 억 단위. 순수 만원 짜리로. -이현수, 전직 조폭 어떤 유력 인사들은 슬롯머신 사업장에 직접 지분 투자를 하기도 했어. 그럼 정덕진이 투자금에 따라 이익을 배당해 주는 거지. 음지의 힘 조폭, 양지의 힘 권력과 손 잡은 정덕진은 점점 더 거물이 되어 갔어. 그러자 정덕진에게는 더 큰 배후가 필요해져. 이제부턴 다른 공간, 다른 인물로 시선을 옮겨볼게. ▲ 거대 배후를 품다 드라마 '모래시계'에서 박상원 배우가 연기한 강우석은 사시에 합격해 강력부 검사가 됐지. 검찰 강력부는 조폭 잡는 부서였어. 서울지검 강력부는 1990년 범죄와의 전쟁 때 많은 두목급 조폭을 잡아들였어. 당시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김태촌도 범죄단체를 구성한 혐의로 다시 검거가 됐어. 하지만 서울지검 강력부의 이번 목표는, 김태촌이 아니야. 조폭 뒤의 진짜 배후, 정덕진이 조폭의 활동 자금을 대주고 있다는 소문은 이미 파다하게 퍼져 있었어. 하지만 정덕진은 단 한 번도 검찰의 수사를 받아본 적이 없어. 검찰이 내사를 시작하려 하면, 곧바로 내사를 중단하라는 명령이 위에서부터 내려왔거든. 이건 정덕진 뒤에, 더 강력한 배후가 있다는 뜻이야.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서며 서울지검장이 교체되고, 강력부 부장과 차장검사의 라인도 바뀌었어. 그러자 서울지검의 분위기가 좀 바뀌었어. 드디어 정덕진과 그 배후에 대한 수사를 개시할 수 있게 된 거야. 가장 먼저 서울지검은 정덕진을 긴급 체포했어. 제가 원래는 못 살다가, 좀 재산을 모아서 괜찮게 살다가 사회에 모범이 못 되게 호화스러운 생활을 했다는 죄인이지만, 분명히 말씀드릴 것은 전 깡패가 아닙니다. 깡패라는 사람들한테 칼잡이들한테 그놈의 영업을 하는 바람에 상당한 위협을 느끼고 사는 사람이지. 김태촌에게 1억 5천만 원을 준 사실은 있습니다. -정덕진 의외로 정덕진은 김태촌과의 관계는 쉽게 인정했어. 그런데 정작 배후에 대해선 불지 않아. 배후를 밝히라는 말에, 젊은 주임검사를 오히려 무시하는 거야. 세무조사를 다시 할 거라 압박해도, 끄떡 안 해. 사흘 나흘이 넘게 신경전이 계속 돼도 정 씨는 입을 열지 않아. 검찰은 정 씨가 미국 라스베이거스 카지노에서 상습적으로 도박한 혐의를 이미 찾고 있었어. 탕진한 돈이 당시 돈으로 10억 원 정도. 검찰은 당시 정덕진의 카지노 대출 내역서까지 이미 미국 수사관을 통해 다 확인해 뒀어. LA 저택을 사려고 160만 달러의 외화를 유출한 것도 파악해 뒀어. 당시 이 정도 액수의 외화 유출이면 징역 10년 이상까지도 가능한 중범죄였어. 평생 감옥에서 살던지 배후를 밝히던지 하라 며 추궁하자, 더 이상 빠져나갈 곳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정덕진은 드디어 입을 열었어. 우리가 '원자탄'을 사용했소. '원자탄'은, 원자폭탄급 위력을 가진 핵심 인물에게 뇌물을 바쳤다는 뜻이야. 그럼, 누굴 말하는 걸까? 그 주인공은, 노태우 정권 때, 국회의원과 장관을 지낸 실세 중에 실세 박철언 국회의원이었어. 정덕진 검찰 수사 3년 전인 1990년. 정덕진에 대한 특별 세무사찰이 이뤄졌어. 청와대 세무사찰은 국세청 세무조사보다 훨씬 더 강도 높은 수준이야. 정 씨 형제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지. 그래서 청와대를 움직일 수 있는 핫라인, 박철언 의원에게 접근했어. 박철언 쪽에 실제 돈을 건넨 건 동생 정덕일이었어. 정덕진은 동생 정덕일이 홍 씨 성을 가진 여자의 집에서 돈을 줬다 고 들었대. 그럼 홍 여인은 또 누구일까? 동생이 그 홍 여인한테 부천에 있는 장급 호텔을 산 적이 있어요. 정덕진은 검찰의 수사력을 테스트하듯, 일부 정보만 쓱 흘려. 검찰은 부천에 있는 장급 호텔들의 수년간의 매매 기록을 뒤진 끝에 한 여관 매도인의 이름에서 홍 씨를 발견해. 홍여인, 그녀는 재력가이자 사교계 유명 인사였어. 박철언 의원과도 친분이 있어. 검찰의 수사망이 좁혀지자 정덕진은 동생 정덕일에게 전화해 더 이상 버티지 말고 사실대로 다 이야기해 라고 말했어. 결국 동생 정덕일도 검찰에 출두해 사실을 털어놨어. 홍 여인의 주선으로 평창동 홍 씨 집에서 박 의원을 만나, 007 가방에 헌 수표와 현금으로 5억 원을 가득 채워 건넸대. 이후에도 특급 호텔 사우나 탈의실에서 따로 만나서 1억 원을 추가로 건넸다고 진술했어. 슬롯머신 업자에게 6공 실세이자 현직 국회의원이 6억 원의 뇌물을 받았다는 거야. 박철언 의원은 뇌물을 받은 사실을 인정했을까? 진실은 밝혀지기 마련입니다. (돈을 받은 일은) 물론 없죠. 새벽이 왔다고 소리치면서 닭의 목은 왜 비트는지 모르겠습니다. -박철언 장관까지 지낸 자신이 일개 슬롯머신 업자에게 돈을 받았겠냐고 사실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부인했어. 그러자 정덕일은 이걸 갖고 나타났어. 당시 건넨 것과 똑같은 가방. 만 원권과 헌 수표로 5억 원을 채웠대. 이런 정덕일의 구체적인 진술에도 박철언 의원은 부인했어. 만약 정덕일이 자신에게 돈을 줬다면, 홍 여인이 중간에서 가로챘을지 모른다는 거야. 이 말을 들은 홍 여인은 펄쩍 뛰었어. 자신은 정덕일의 부탁으로 소개 자리를 마련한 거 뿐인데, 관련도 없는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다며. 너무 심한 배신감을 느꼈대. 결국 홍 여인은, 언론을 통해 그날 상황에 대해 상세하게 밝혔어. 나는 두 손에 과일을 담은 쟁반을 들고 문간방으로 갔다. 양손에 든 쟁반으로 문을 밀치고 들어서는 순간, 두 사람 사이에 007 가방이 놓여 있었고, 반쯤 열린 가방 속에 수표 다발이 가득 들어있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얼마짜리였는지는 몰랐으나 노란 고무줄에 묶인 헌 수표인 것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순간 나는 멈칫했고, 두 사람도 어색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과일 쟁반을 놓자마자 도망치듯 그 방을 나왔다. 정 씨가 응접실로 들어서며 몹시 후련한 표정으로, '이제 됐다'는 요지의 말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홍 여인 이후에도 뇌물을 줬다, 안 받았다, 치열한 법정 공방이 이어졌고, 마침내 최종 판결이 났어. 피고인 박철언에게는 징역 1년 6개월과 금 6억 원 추징 선고가 나왔어. 검찰의 목표대로, 숨은 거물급 배후가 드디어 밝혀진 거야. 그렇다면 검찰의 분위기는 어땠을까? 이 일을 계기로 검찰 전체가 발칵 뒤집혔어. 이후로도 꼬리에 꼬리를 물 듯 고위 공직자들이 슬롯머신 비리에 연루된 사실이 밝혀졌거든. 청와대 비서관, 지방경찰청장 등 무려 고위 공무원 130명이 연루됐어. ▲ 최후의 커넥션 최후의 결정적 커넥션이 하나 더 남아 있어. 바로, 국가안전기획부. 안기부 기조실장 출신인 엄삼탁이야. 엄삼탁은 ROTC 장교 출신으로 25년간 군에서 복무한 직업군인이었는데 ROTC 출신 중에 가장 먼저 별을 단 인물이었어. 전두환, 노태우의 직속 부하였고, 안기부 기조실장 시절엔 안기부장도 제치고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할 정도로 안기부 내 실세였대. 그런데 엄삼택의 재산 목록에 서초동 소재 대형 음식점이 있었어. 그리고 뒤로 보이는 고급 빌라들. 그중 맨 뒤 빌라가 엄삼탁의 집이야. 또 식당과 엄상탁 빌라 사이에 있는 고급빌라, 여긴 정덕진의 집이야. 이전에 안기부가 정덕진 형제를 사찰한 적이 있어. 총선 당시 불었던 평민당 돌풍. 정 씨 형제가 이 평민당을 지원하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정 씨 형제의 자본을 추적한 거야. 엄삼택은 자본 추적을 무마해 주겠다며 1억 5천만 원을 받았다고 해. 그 후 엄삼탁은 끊임없이 정 씨 형제를 압박했어. 조폭과 슬롯머신 커넥션 중심에, 국가 정보기관인 안기부가 있었던 거야. 드라마 '모래시계'에서 윤 회장과 밀접한 관계로 등장하는 캐릭터 장도식. 그도 안기부 고위급 간부였어. 안기부는 돈이 필요할 땐 정덕진을, 주먹이 필요할 땐 주먹을 동원했어. 학생 운동을 저지할 무력이 필요하거나, 야당을 탄압하기 위해 물리력이 필요할 때 조폭을 정치깡패로 활용했던 게 바로 안기부였어. 드라마 '모래시계'에서도 정치적 목적으로 폭력에 투입되는 태수의 모습이 자주 나와. 혹시 '용팔이 사건'이라고 알아? 1987년 전두환 정권 하에, 국민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강력히 요구했어. 그런데도 전두환 정권이 내각제 개헌을 추진하려 하자, 이를 반대한 김영삼, 김대중이 반독재, 직선제 개헌이라는 공동 목표 아래 통일민주당을 창당하기로 해. 1987년 4월 20일, 통일민주당 창당대회가 예정된 날. 전국 통일민주단 사무실에 갑자기 사람들이 들이닥쳤어. 그들은 각목을 들고 통일민주당 사무실을 점거했어. 이들을 이끌었던 한 남자, 바로 조폭 '용팔이'야. 야당 창당 대회 방해 작전에 동원된 게 용팔이 사건이야. '용팔이' 이름으로 유명해졌죠. 조직 생활을 할 때인데, 정치인들이 한 3, 4명 정도가 와서 나한테 '김 동지가 맡아야 할 임무가 있다'는 거야. '저 같은 사람이 맡을 임무가 있겠습니까?' 하니까 '김 동지, 국가를 위해 일을 한 번 해보십쇼. 이 창당 대회 방해 임무가 끝나면 세상에서 가질 수 없는 것을 갖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더라고요. -김용남, 전직 조폭 '용팔이' 강력한 야당의 탄생을 막고 싶었던 정치인들이 창당대회를 무산시켜 달라 사주한 거야. 국가를 위해 일하라는 명분을 주면서까지. 제 역할이 행동대장이었어요. 창당대회에서 지휘봉을 세 번 두드리면, 신당이 탄생 돼요. 그래서 그것을 못하게, 창당을 못하게. 그 작업을 했죠. 최고의 정보부처인 안기부. '안기부장이 지휘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아라', '사고가 나도 다 해결되니'. 정부에서 나오는 건축, 건설, 이런 부분을 우리는 받기로 하고 그 일을 한 거죠. -김용남, 전직 조폭 '용팔이' 그럼, 조폭들은 약속한 대가를 받았을까? 언론의 취재가 시작되자 용팔이를 동원했던 안기부 쪽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어. 가서 기다리면 연락을 해줄 테니 기다려라, 그래서 기다렸는데도 연락이 없어요. 전화도 안 받으니 오기가 생기잖아요. 그때 느낀 것이 '정치인들은 전부 다 이렇구나'. 끝끝내 연락이 없었어요. 그거 하고 나서 배신감이 많이 느껴졌죠. -김용남, 전직 조폭 '용팔이' '용팔이 사건'으로 유명한 김용남도 있고, 그 외에도 많아요. 정치권에 연루됐던 조폭들이, 이 사람들도 나중에 다 이용만 되고 뒤통수를 맞아요. 큰 조직의 두목들 사이에선 엄삼탁에 대해서 이를 가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받을 건 다 받아놓고 나중에 보호는 안 해줬다, 이런 원망과 분노를 들었던 기억이 나요. -조성식, 검찰 출입 20년 기자 권력과 조폭 간 커넥션의 비루한 끝. 이게 바로 현실의 결말이야. 그런 일이 많았죠. 권력과 야합해서 벌어진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니까. 그런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었으니까. 그게 진짜처럼 실제로 느꼈던 거 같아요. -배우 박근형, '모래시계' 윤재용 회장 역 한마디로 권력의 추악한 이면이 드러난 것이거든요. 양지 권력과 음지 권력의 공생관계, 악어와 악어새 비슷한, 이런 관계를 세상에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도 별로 없었던 거 같아요. -조성식, 검찰 출입 20년 기자 ▲ 현실과 드라마의 결말 영원할 거 같았던 커넥션 끝엔 무거운 형벌만이 남았어. 슬롯머신 비리 사건으로 나라가 뒤집히고 5년 후, 정덕진이 모습을 드러낸 곳이 있어. 카지노로 유명한 필리핀이었어. 국내 사업을 모두 정리하고 필리핀에서 다시 카지노 사업으로 재기하려 했지만, 정덕진은 카지노 운영자가 아니라 도박 중독자가 되어 있었어. 국내에서 빼간 돈 37억 원 중 도박으로 20억 원을 탕진한 상태였어. 그럼, 드라마 '모래시계'의 결말은 어땠을까? 카지노로 정치자금을 대주던 기업가 윤 회장의 어떤 결말을 맞았을까? 마지막에는 기업과 정권에 대해 폭로하려고 기자회견 장소로 들어섰을 때 아무도 없고. 권력에 의해 다 막히고. 혼자서 앉아 기다리다가 심장 발작으로 약을 꺼내 먹으려다가 생을 마감하죠. -배우 박근형, '모래시계' 윤재용 회장 역 폭력으로 권력의 뒤를 쫓았던 조직폭력배, 이들의 돈과 힘을 이용했던 국가정보기관. 각자의 이익을 위해 서로를 이용하다가, 쓸모가 다 되면 간단히 교체되고 마는 냉혹한 생존 논리. 이건 현실도 드라마도 같았어. 하지만 드라마엔 현실과 다른 결말이 하나 남아있어. 검사인 우석은 친구이자 조폭인 태수의 담당 검사로서, 그의 죄가 무엇인지, 그 죄가 얼마나 무거운지 말해. 세상엔 상식이란 게 있습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물론 상식대로 사는 게 점점 어려워지는 시대라는 건 인정합니다. 피고인은 지난 30년간 살아오면서 여러 번 선택의 기로에 섰습니다. 그때마다 피고인은 좀 더 쉬운 길을 택했습니다. 자신의 힘을 사용하고, 힘 있는 자의 옆에 붙어서 지름길을 택했습니다. 본 검사는 범죄단체조직 및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에 의거, 사형을 구형합니다. -'모래시계' 우석 그렇게 태수의 사형이 집결돼. 마지막에 태수는 우석에게 이런 말을 남기지. 우석아. 나 떨고 있냐. 그게 겁나. 내가 겁날까 봐. 너… 괜찮아. 영원할 거 같은 권력과 힘을 자행하던 자들의 아귀다툼 속에, 결국 마지막에 남는 건 무엇이었을까. 그럼 왜 드라마의 제목이 '모래시계' 였을까. 모래시계가 보면, 위에 있던 모래가 아래로 다 떨어지면 끝이에요. 한정된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한 사람의 인생이든 어떤 정권이든, 또 어떤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유한하고 한정된 거죠. 사람들은 그걸 자꾸 잊어버려요. 한정된 그 시간과 공간 안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모래시계' 송지나 작가 인생도 힘도 권력도 세상 모든 것들은 유한하다는 의미를 담은 모래시계. 그리고 유리 안의 작은 모래 알갱이들은, 역사 속의 한 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상징한 거야. 모래시계 속 모래는 언젠가 다 내려오지만, 다시 뒤집는 순간부터 시간은 다시 시작돼. 새로 시작하는 시간은, 우리의 노력에 따라 다른 결과를 만들 수 있어. 저희 드라마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정말 진정한 용기 있죠. 그런 것들을 많이 잊어버리지 않았나. 후세들에게도, 용기 있는 사람이 돼라 보다는, 어떤 재능 있는 사람, 공부를 잘하라든지 이런 걸 더 많이 얘기하죠. 사람답게 사는 거 이런 면에 좀 초점을 두셔서 보시면, 더 많이 와닿지 않을까 싶습니다. -고현정, '모래시계' 혜린 역 우리는 정의로운가, 상식이 통하는 사회인가, 우리는 진정한 용기를 내며 살아가고 있는가. 오늘의 우리에게 질문을 던져 보기 위해 '모래시계' 이야기를 꺼내봤어. '모래시계' 다음의 시간. 우리가 만들고 있는 지금 이 시대의 드라마는 어떤 결말을 향해 가고 있을까.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
'세상에 이런일이' SNS 스타 '의왕 깡패 할아버지' 등장…전현무 어젯밤에도 봤어 깜짝
등록일2024.11.21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와!진짜? 세상에 이런일이'에 화제의 인물 '의왕 깡패 할아버지'가 등장한다. 21일 방송될 SBS '와!진짜? 세상에 이런일이'에는 데뷔 19년차 원조 예능돌 슈퍼주니어 은혁이 게스트로 출연한다. MC 전현무는 은혁을 한때 아시아의 멸치 라며 소개했고, 은혁은 운동을 통해 '근육 멸치'로 불렸다 고 맞받아치며 MC들과 환상의 호흡을 보여줬다. 이번 '와!진짜? 세상에 이런일이'에는 SNS 화제의 인물인 '의왕 깡패 할아버지'가 등장한다. 그는 나무위키에 등재될 정도의 강력한 화제성으로 SNS 알고리즘을 지배한 인물로, MC 전현무는 정확히 어젯밤에 봤다 며 반가움을 드러냈다. 제작진과 마주한 '의왕 깡패 할아버지'가 꽃무늬 치마를 입고 나타나자 이를 본 김호영은 세상에! 완전 젠더리스룩이잖아 라며 '의왕 깡패 할아버지'의 패션을 평했다. '젠더리스룩'을 입고 길거리 공연을 하는 일상과 '깡패'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 그가 가진 사연도 공개될 예정이다. 또 이번 방송에서는 '무대본, 무연출, 무주작'을 표방하며, 거리의 시민을 만나보는 '길바닥 인터뷰'라는 신상 코너를 공개한다. 이에 백지영은 게릴라 콘서트 생각난다 며 옛 추억에 젖었고 이에 김호영은 안대를 풀어주세요! 라고 외치며 모두를 폭소케 했다. 제작진은 AZ 패션의 성지 동묘와 MZ 패션의 중심 홍대를 찾아가 '빨강', '노랑', '파랑'의 깔맞춤 삼인방과 만나 큰 웃음을 이끌어냈다. 이 외에도 화려한 커스텀 오토바이를 탄 매드맥스남은 본인을 '배우 최민수 후배'라 주장했고, 바이크 커스텀 실력은 본인이 한 수 위라고 말했다. 이 외에도 블랙&&핑크 콘셉트의 '공주님 패션', 쫄쫄이 수트를 입은 스파이더맨이 등장, 새 코너 '길바닥 인터뷰'는 눈도장을 찍으며 화려한 시작을 알렸다. '신들린 목소리 친목회' 코너에서는 마이크 없이 에코 효과를 내는 '에코맨', 영상 조회수 217만 회의 레전드 출연자인 '동물 성대모사 男', 오직 혀로 음정과 박자를 맞추는 '혀 연주 음악가', 동물 소리로 소통하는 '동물 교감 능력자'까지 4인 4색의 화려한 라인업이 공개됐다. 한편 조회수 217만 회를 자랑하는 기존 회원 '동물 성대모사男'에게 도전장을 낸 신입 회원 '동물 교감 능력자'의 개, 말, 사슴, 매미 등 그 동물을 삼킨(?) 듯한 동물 소리를 듣던 출연진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와버튼'을 연타했다는 후문이다. 한편, 천안의 한 가정집에 매일 같이 찾아오는 고귀한 분의 사연도 공개된다. 제보자는 매일 공작님 수발드느라 정말 힘들다 며 솔직한 심정을 토로했다. 이에 출연진은 우리나라에 귀족 공작님이 있느냐 며 그 정체를 궁금해하던 중, 공작님의 정체는 다름 아닌 공작새로 밝혀졌다. 1년 전부터 이곳에 나타나기 시작한 공작은 제보자가 직접 재배한 땅콩을 무전취식하고 아무 데서나 변을 보는 등 수많은 갑질(?)을 일삼고 있다는데, 이 공작이 어떻게 천안 한 가정집에 나타나게 된 것인지 그 사연이 공개된다. 재미를 넘어 감동까지 선사하는 '와!진짜? 세상에 이런일이'는 21일 목요일 밤 오후 9시에 방송된다.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우등생 착한 아들→'징역 100년' 살인자 전락 …'꼬꼬무', 한인가정에 일어난 비극 조명
등록일2024.09.12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가 가족을 지키려다 징역 100년형을 선고받은 남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12일 방송될 '꼬꼬무'는 '징역 100년형의 굿 선(good son)' 편으로,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 땅을 밟은 한 이민가정의 착한 아들 앤드류 서의 이야기가 방송된다. 때는 1993년 9월 25일,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미국 시카고의 늦은 밤. 한 주택가 차고 안에서 품 안에 총을 감춘 채 불안함에 몸을 떨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바로 열아홉 살의 한인 2세 앤드류 프린스 서였다. 미국 동부 명문대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한 우등생이자, 전도유망한 청년이 어쩌다 범죄의 기로에 서게 된 것일까. 사건은 한 달 전, 누나 캐서린의 전화로부터 시작됐다. 오두베인은 우리 집안의 원수 라며 우리 집안의 아들로서 제발 네가 복수해 줘 라는 연락이었다. 누나의 간절한 부탁 속에 등장하는 이름인 로버트 오두베인은 누나 캐서린의 오래된 남자 친구다. 하루에도 수십 통씩 걸려 오는 누나의 전화에 앤드류는 선택의 기로에 서야만 했다. 1976년, 아메리칸드림을 품고 미국 시카고로 이민 온 앤드류네 가족. 아빠는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딸 해성이에겐 캐서린 서, 아들 승모에겐 앤드류 서라는 영어 이름을 지어줬다. 부부 모두 한국의 명문대 출신이었지만, 언어의 한계로 미국에서 자리 잡는 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밤낮으로 열심히 일한 끝에 마침내 작은 잡화점과 내 집 마련에 성공하고 가족은 아메리칸드림을 이뤄가는 것 같았다. 늘 부모님 곁에서 가게 일을 도왔던 착한 아들 앤드류와 달리 누나 캐서린은 자유로운 '아메리칸 걸'이 되길 원했다. 여전히 한국 문화에 익숙했던 아빠는 그런 딸이 못마땅했고, 부녀간에 세대 갈등, 문화적 갈등은 끊이질 않았다. 가족에게 비극의 그림자가 조용히 드리워지고 있다는 걸 이때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슈퍼맨처럼 가족을 지키던 아빠에게 이민 온 지 9년 만에 위암 선고가 내려졌다. 위암 진단 2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고야 만 아빠. 두 아이와 함께 홀로 남겨진 엄마는 어떻게든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작은 세탁소를 열고 하루하루 고군분투하며 살아갔다. 어느덧 8학년이 된 앤드류는 평소와 같이 하교 후 엄마의 세탁소로 향했다. 그런데 엄마의 가게 앞에 사람들이 웅성대며 모여 있었다. 그 사이로 익숙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누나의 남자 친구 로버트 오두베인과 그의 품에 안겨 오열하고 있는 누나 캐서린이었다. 오두베인은 앤드류에게 다가와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다. 엄마가 정체 모를 강도의 공격에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범인은 잡히지 않고 미제사건으로 남았다. 그런데 엄마 사망 6년 후, 누나 캐서린은 엄마의 죽음에 대한 충격적인 진실을 털어놓았다. 엄마를 죽인 범인이 바로 자신의 남자 친구 오두베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캐서린은 집안의 아들로서 오두베인에게 복수하라고 끊임없이 종용했다. 결국 오두베인에게 총구를 겨눈 앤드류는 우등생에서 징역 100년형의 살인자로 전락하고 만다. 한인사회뿐만 아니라 미국까지 큰 충격에 빠뜨렸던 비극적인 살인 사건이었지만 캐서린은 앤드류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감옥에서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된 앤드류. 캐서린이 숨긴 진실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꼬꼬무'에서 앤드류 서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번 '꼬꼬무'에는 배우 최영우, 방송인 강주은, 바이올리니스트 대니구가 이야기 친구로 나선다. 장도연의 이야기 친구로 최영우가 등장했다. 남다른 공감 능력을 선보이며 그날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던 그는 숨겨왔던 충격적인 비밀이 드러나자, 깊은 분노와 함께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배우 최민수의 배우자이자 미스코리아 캐나다 진 출신의 방송인 강주은이 장현성의 이야기 친구로 '꼬꼬무'에 방문했다. 녹화 시작부터 어디로 튈지 모르는 솔직 유쾌한 입담을 뽐내던 강주은은 잠시 후 믿기 힘든 이야기가 시작되자 한 사람이 경험했다고는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라며 끝내 뜨거운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클래식계 아이돌'이라 불리는 대니구가 장성규의 이야기 친구로 찾아왔다. 그는 '꼬꼬무' 최초로 공연장을 방불케 하는 감미로운 연주와 함께 등장해 순식간에 녹화장을 감성에 젖어들게 했다. 첫 SBS 출연에 설레는 마음을 드러내던 대니구는 유쾌한 모습은 잠시 뒤로한 채 진지한 자세로 이야기 속으로 몰입했다. 특히 미국에서 아시아 이민자로서 느끼는 설움과 아픔에 공감하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꼬꼬무'의 '징역 100년형의 굿 선(good son)' 편은 12일 목요일 밤 10시 20분에 방송된다.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
우등생 착한 아들→'징역 100년' 살인자 전락 …'꼬꼬무', 한인가정에 일어난 비극 조명
등록일2024.09.12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가 가족을 지키려다 징역 100년형을 선고받은 남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12일 방송될 '꼬꼬무'는 '징역 100년형의 굿 선(good son)' 편으로,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 땅을 밟은 한 이민가정의 착한 아들 앤드류 서의 이야기가 방송된다. 때는 1993년 9월 25일,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미국 시카고의 늦은 밤. 한 주택가 차고 안에서 품 안에 총을 감춘 채 불안함에 몸을 떨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바로 열아홉 살의 한인 2세 앤드류 프린스 서였다. 미국 동부 명문대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한 우등생이자, 전도유망한 청년이 어쩌다 범죄의 기로에 서게 된 것일까. 사건은 한 달 전, 누나 캐서린의 전화로부터 시작됐다. 오두베인은 우리 집안의 원수 라며 우리 집안의 아들로서 제발 네가 복수해 줘 라는 연락이었다. 누나의 간절한 부탁 속에 등장하는 이름인 로버트 오두베인은 누나 캐서린의 오래된 남자 친구다. 하루에도 수십 통씩 걸려 오는 누나의 전화에 앤드류는 선택의 기로에 서야만 했다. 1976년, 아메리칸드림을 품고 미국 시카고로 이민 온 앤드류네 가족. 아빠는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딸 해성이에겐 캐서린 서, 아들 승모에겐 앤드류 서라는 영어 이름을 지어줬다. 부부 모두 한국의 명문대 출신이었지만, 언어의 한계로 미국에서 자리 잡는 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밤낮으로 열심히 일한 끝에 마침내 작은 잡화점과 내 집 마련에 성공하고 가족은 아메리칸드림을 이뤄가는 것 같았다. 늘 부모님 곁에서 가게 일을 도왔던 착한 아들 앤드류와 달리 누나 캐서린은 자유로운 '아메리칸 걸'이 되길 원했다. 여전히 한국 문화에 익숙했던 아빠는 그런 딸이 못마땅했고, 부녀간에 세대 갈등, 문화적 갈등은 끊이질 않았다. 가족에게 비극의 그림자가 조용히 드리워지고 있다는 걸 이때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슈퍼맨처럼 가족을 지키던 아빠에게 이민 온 지 9년 만에 위암 선고가 내려졌다. 위암 진단 2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고야 만 아빠. 두 아이와 함께 홀로 남겨진 엄마는 어떻게든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작은 세탁소를 열고 하루하루 고군분투하며 살아갔다. 어느덧 8학년이 된 앤드류는 평소와 같이 하교 후 엄마의 세탁소로 향했다. 그런데 엄마의 가게 앞에 사람들이 웅성대며 모여 있었다. 그 사이로 익숙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누나의 남자 친구 로버트 오두베인과 그의 품에 안겨 오열하고 있는 누나 캐서린이었다. 오두베인은 앤드류에게 다가와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다. 엄마가 정체 모를 강도의 공격에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범인은 잡히지 않고 미제사건으로 남았다. 그런데 엄마 사망 6년 후, 누나 캐서린은 엄마의 죽음에 대한 충격적인 진실을 털어놓았다. 엄마를 죽인 범인이 바로 자신의 남자 친구 오두베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캐서린은 집안의 아들로서 오두베인에게 복수하라고 끊임없이 종용했다. 결국 오두베인에게 총구를 겨눈 앤드류는 우등생에서 징역 100년형의 살인자로 전락하고 만다. 한인사회뿐만 아니라 미국까지 큰 충격에 빠뜨렸던 비극적인 살인 사건이었지만 캐서린은 앤드류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감옥에서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된 앤드류. 캐서린이 숨긴 진실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꼬꼬무'에서 앤드류 서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번 '꼬꼬무'에는 배우 최영우, 방송인 강주은, 바이올리니스트 대니구가 이야기 친구로 나선다. 장도연의 이야기 친구로 최영우가 등장했다. 남다른 공감 능력을 선보이며 그날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던 그는 숨겨왔던 충격적인 비밀이 드러나자, 깊은 분노와 함께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배우 최민수의 배우자이자 미스코리아 캐나다 진 출신의 방송인 강주은이 장현성의 이야기 친구로 '꼬꼬무'에 방문했다. 녹화 시작부터 어디로 튈지 모르는 솔직 유쾌한 입담을 뽐내던 강주은은 잠시 후 믿기 힘든 이야기가 시작되자 한 사람이 경험했다고는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라며 끝내 뜨거운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클래식계 아이돌'이라 불리는 대니구가 장성규의 이야기 친구로 찾아왔다. 그는 '꼬꼬무' 최초로 공연장을 방불케 하는 감미로운 연주와 함께 등장해 순식간에 녹화장을 감성에 젖어들게 했다. 첫 SBS 출연에 설레는 마음을 드러내던 대니구는 유쾌한 모습은 잠시 뒤로한 채 진지한 자세로 이야기 속으로 몰입했다. 특히 미국에서 아시아 이민자로서 느끼는 설움과 아픔에 공감하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꼬꼬무'의 '징역 100년형의 굿 선(good son)' 편은 12일 목요일 밤 10시 20분에 방송된다.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꼬꼬무 찐리뷰] 전두환, 무기징역 받고 2년 만에 출소…왜 제대로 심판하지 못했나
등록일2024.08.23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22일 방송된 '전두환, 심판의 날'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가수 겸 배우 김정민, 댄서 가비, 방송인 김지영이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특별한 재판 때는 1996년 3월 11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이야. 국내에서 일어나는 규모가 큰 사건들은 대부분 여기서 재판을 해. 이제 임관 5년 차인 황상현 판사가 재판을 위해 출근하고 있어. 근데 오늘따라 법원이 평소와는 달라. 법원 로비에 사람들이 가득해. 그 이유는 바로, 황판사가 오늘 맡은 재판 때문이야. 황판사는 이 재판 때문에 전날 밤잠까지 설쳤대. 그 당시에는 5년 차의 아주 경력이 일천한 판사였지만, 중요한 사건이라고 판단이 됐기 때문에 굉장히 저도 긴장하고. 과연 재판이 잘 진행될지에 대해서 걱정을 했던 그런 기억이 납니다. -황상현, 재판 당시 배석판사 황 판사는 선배 판사들과 함께 재판에 들어갈 준비를 해. 세 명의 판사들 모두 초긴장 상태야. 선배 판사 두 명이 먼저 입장하고, 황 판사가 그 뒤를 따라. 그때, 재판장을 맡은 선배 판사가 마지막으로 들어오는 황 판사한테 들어올 때 문 잠그고 들어와 라고 말했어. 문을 안에서, 법정 안에서 잠그질 않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의 경우에는 문을 잠그라고 하셨던 기억이 나요. 제가 그때 그 이유를 여쭤봤더니, 혹시라도 이상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재판 진행 도중에 법대로 올라와서 소란을 피운다던가 그런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런 지시를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황상현, 재판 당시 배석판사 당시엔 기자들의 법정 출입을 허용하지 않을 때야. 근데 이 재판엔, 방송사 기자들까지 출입해 있었어. 촬영도 진행된다는 거야. 또 법원 소송의 경위들도 엄청 많이 배정됐어. 그 당시에 통상 법정 하나에 법정경위 한 분이 제복을 입고 질서유지를 하는 게 일반적인데, 서울중앙지방법원 내 법정경위 분들이 총동원 돼서 한 30명은 넘었던 거 같아요. -황상현, 재판 당시 배석판사 이 사건, 심상치 않아 보이지? 잠시 후, 피고인들이 법정에 들어와. 피고인만 무려 16명이야. 그중에 가장 먼저 들어온 피고인한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어. 조용했던 법정이 술렁이기 시작해. 어떤 사람들은 그 피고인을 향해 응원의 박수를 보내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며 욕을 하기도 해. 이 피고인은 죄가 무려 9개야. 그중 첫 번째 죄목이 '반란수괴'. 국가를 전복할 목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집단의 우두머리라는 거야. 이 피고인의 정체, 누구일 거 같아? 바로 이 사람이야. 전두환.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무고한 광주 시민들을 무력으로 짓밟은 사람.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이 된 후에, 노동, 종교, 언론 등 사회 전 계층을 탄압했어. 그리고 불법 비자금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어. 1996년 12.12 군사 반란을 일으킨 지 17년 만에, 전직 대통령 전두환이 법정에 섰어. 국내뿐 아니라 해외 언론까지 주목했던 그날이야. '꼬꼬무' 시청자들 사이에서 전두환의 별칭이 있어. '꼬꼬무 남주', 즉 '꼬꼬무'의 남자주인공이라는 이야기야. 그만큼 많이 등장했다는 말이지. 그동안 '꼬꼬무'는 12.12 군사반란, 하나회 등 전두환의 행적을 집중 조명해 왔어. 오늘은, '꼬꼬무 남주' 전두환을 보내주는 날이야. '전두환 3부작'의 마지막 편, 이름하여 '전두환 심판의 날'이야. ▲ 첫 번째 심판의 기회 사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퇴임한 직후부터 심판할 기회는 여러 번 있었어. 전두환에 이어 대통령이 된, 전두환의 절친이자 조력자 노태우. 함께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간접선거로 대통령이 된 친구와는 달리, 노태우 전 대통령은 직선제로 당선됐어. 전 정권보다는 상대적으로 당당했겠지. 하지만 노태우 정부는 초반부터 큰 난관에 봉착해. 헌정사상 처음으로 여소야대 정국이었거든. 13대 국회의원의 선거 결과야. 노태우 대통령이 속한 민주정의당보다, 야당의 의석수가 더 많아. 야당이 힘을 합치면 정국을 주도할 수 있는 상황이야. 노태우 전 대통령은 야당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어. 김영삼과 김대중을 필두로 한 야당은, 전 정권의 비리와 5.18에 대한 진상규명을 해야 한다고 주장해. 전두환에 대한 심판의 칼을 꺼내든 거지. 곧장, 특별위원회가 설치되고 청문회가 열렸어. 이게 바로 '제5공화국 청문회'야. 지금은 국회 청문회가 자주 열리지만, 이 5공 청문회가 헌정사상 최초의 청문회였어. 전국민적 관심 속에 TV 생중계도 했어. 5공 청문회의 시청률은 무려 81%. 사실상 전 국민이 다 본 셈이야. 등장인물이, 장난 아니야. 장세동 전 안기부장에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까지 소환됐어. 그리고 전두환 전 대통령도 직접 증인석에 출석했어. 전두환 전 대통령은 5.18에 대한 사과 없이, 발포 명령은 정당한 자위권 행사였다고 주장했어. 당시 (1980년) 5월 22일 자위권 발동도 가능하다는 계엄사령부의 작전 지침이 지휘계통을 통해 하달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위급한 상황에 처한 현지 지휘관들이 자위권 행사의 불가피성을 강조했으나… -전두환 전두환의 증언에 야당 의원들은 거세게 항의했어. 발포 책임자도 밝혀! 살인마 전두환! 사람 죽여놓고 자위권 발동이 뭐야! 장내가 아수라장이 됐지만, 전두환은 질의응답 없이 미리 작성한 발표문만 낭독하고는 황급히 자리를 피했어. 청문회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전두환 전 대통령의 형, 사촌동생 등 일가친척들과 측근들이 구속됐어. 하지만 정작 전두환 본인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어. 참으로 면목이 없는 일입니다. 진심으로 사죄를 드리며 머리를 숙여서 용서를 빕니다. -1988년 11월 23일, 전두환 대국민 사과 中 불법 비자금에 대해 사과하고 사회환원을 약속했지만, 지켜지지 않았지. 사상 최초의 청문회는 그렇게 흐지부지 되고 말아. ▲ 두 번째 심판의 기회 시간은 흘러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섰어.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32년간 이어진 군부 출신이 아닌, 민간인 출신이 대통령이 된 거야. 바로, 대한민국 14대 대통령 김영삼. 김영삼 대통령은 박정희 정권 때부터 군부독재에 강하게 반발한 인물이야. 그래서 전두환과 사이가 아주 안 좋았어. 전두환은 대통령 시절 정적인 김영삼을 굉장히 탄압했어. 툭하면 가택연금 조치를 시키고, 수시로 정계은퇴하라고 협박하며 김영삼 측근들을 안기부로 끌고 가서 고문했어. 이렇게 모진 세월을 겪은 김영삼이 대통령이 된 거야. 두 번째 심판의 기회가 찾아온 거야. 대통령이 된 김영삼은 가장 먼저 뭘 했을까? 바로 '하나회' 숙청. 하나회는 전두환이 이끈 사조직으로, 12,12 군사 반란을 주도한 세력이야. 김영삼 정부 때까지 온갖 요직을 장악하고 있었어. 김영삼 대통령이 인사권을 발동해서 군 수뇌부를 대거 교체하기 시작해. 하나회 해체 작업을 단행한 거지. 취임 후 한 달도 채 안된 시점이었어. 김영삼 대통령의 이런 행보에, 국민들은 절대적인 지지를 보냈어. 김영삼 대통령은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며 인기를 구사했어. 그리고 취임식 석 달 후인 1993년 5월 13일. 김영삼 대통령은 5.18 관련 담화문을 발표해. 저는 분명히 말하거니와 오늘의 정부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 위에 서 있는 민주정부입니다. 저는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상규명과 그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주장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특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고 듣고 있습니다. -5.18 관련 담화문 내용 中 하나회 해체를 넘어, 5.18 가해자들도 단죄하려는 움직임일까? 국민들은 기대감에 찼어. 그런데, 담화문 뒷내용을 들어봐. 그러나 진상규명은 역사를 올바르게 바로잡고 정당한 평가를 받자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결코 암울했던 시절의 치욕을 다시 들추어내어 누구를 벌하자는 것은 아닐 겁니다. 이는 훗날의 역사에 맡기는 것이 도리라고 믿습니다. -5.18 관련 담화문 내용 中 지금 당장은 단죄하지 않겠다는 말로 들리지? 김영삼 대통령은 왜 이런 결정을 한 걸까? 과거에 했던 약속 하나가, 김영삼 대통령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야. 그 답을 알기 위해,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기 전으로 시간을 돌려볼게. 아까 13대 국회의원선거 결과가 '여소야대'로, 노태우 대통령에게 불리한 상황이었지? 하지만, 통일민주당을 이끌던 김영삼도 깊은 고민에 빠졌어. 같은 야당이지만, 김대중의 평화민주당보다 의석수가 적었거든. 이대로라면, 다음 대통령 선거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인 거지. 그래서 김영삼은 고민 끝에 파격적인 결단을 내렸어. 당시 여당이었던 민정당과 손을 잡기로 한 거야. 노태우 당시 대통령과의 연합이야. 김종필 총재가 이끄는 신민주공화당도 여기에 합세했어.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이제 여야 정당이 합당하여 새로운 국민 정당이 탄생됩니다. 이게 바로 '3당 합당'이야. 이 과정에서 김영삼은 문제의 그 '약속'을 하게 돼. 바로, '5공 군부에 대한 처벌 감형'. 노태우가 이끄는 민정당 의원 대부분이 5공 관련 인사들이었어. 이제 그들과 같은 당이 됐으니, 뭔가 약속을 해야 했겠지. 또 김영삼 대통령이 전두환을 직접 처단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어. 대통령에겐 사법권이 없어. 하나회 척결은 대통령에게 군 인사권이 있기에 가능했어. 하지만 누군가를 처벌하는 일은, 헌법상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검찰의 기소와 법원의 판결이 필요한 일이야. 그럼 검찰의 입장은 어땠을까? 검찰은, 전두환에 대한 수사를 개시하긴 했어. 왜냐하면 누군가 전두환 전 대통령을 고소했거든. 바로 이 사람이야. 12.12 군사반란 당시 신군부에 저항했던,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장군. 영화 '서울의 봄'에서 정우성이 연기한 이태신 캐릭터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야. 12.12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정승화 장군과 함께 반란 및 내란목적살인죄로 전두환을 검찰에 직접 고소했어. 전두환 전 대통령, 검찰에 출두했을까? 1994년 1월 10일, 전두환은 출두하긴 했어. 그런데 검찰로 출두한 게 아니야. 김영삼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최규화 전두환 노태우 전직 대통령과 만나 국정 현황을 설명하면서 국정 운영에 대한 적극적인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1994년 1월 13일 대한뉴스 전두환 고소 건에 대해 검찰에서 수사 중이었던 상황인데도, 김영삼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과의 만찬에 전두환을 초대한 거야. 청와대에서 만찬을 마치고 귀가한 전두환은 이런 말을 했어. 오늘 칼국수 맛있게 잘 먹었죠. 안보 문제에 대해서 각별히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고, 조언을 해드렸다면 조언이라고 그럴까. 김 대통령께서도 잘 알고 계시더라고. 대통령이 이런 식으로 나오니까, 검찰은 어땠겠어. 1994년 10월, 검찰은 정승화-장태완 장군의 고소건에 대해 '기소유예' 처분을 내려. 전두환의 죄는 인정하나 기소는 미루겠다는 거야. 당시 검찰의 입장을 이랬대. 위 피해자 등을 기소하는 경우 불필요하게 국력을 소모할 우려가 있고, 국가 발전에도 지장을 초래하는 결과를 야기할 수 있음. 이 사건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는 후세에 맡기고, 관련자들에 대한 사법적 판단은 이번 검찰의 결정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것. 이번에도 평가는 후세에 맡기겠다는 결론이야. 김영삼 대통령이 발표했던 5.18 담화문과 기조가 같아. 검찰과 정부의 소극적인 모습에 국민들은 실망을 많이 했어. 이때부터 전국민적으로 비판 여론이 들끓기 시작해. 이런 여론을 반영하듯, 5.18을 다룬 드라마까지 등장했어. 바로 배우 최민수, 고현정 주연의 SBS 드라마 '모래시계'야. 나 떨고 있니? 라는 유명한 대사가 있지. 이 드라마는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최초의 드라마야. 드라마에 5.18 민주화운동 실제 영상을 삽입하며 당시의 참상을 생생하게 전달했어. SBS의 올타임 레전드 드라마야. 평균 시청률이 46%였고, 최종회는 무려 64.5%였어. 드라마를 보려고 다들 집에 빨리 귀가한다고 해서 '귀가시계'라는 애칭도 있었어. 이렇게 과거청산에 대한 온 국민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이 상황을 반전시킬만한 사건이 또 발생했어. 장태완-정승화 장군에 이어 5.18 피해자와 유가족들도 전두환과 노태우를 고소했거든. 혹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는 말 들어본 적 있어? 당시 이 사건을 맡았던 담당 검사가 했던 말이야. 장태완-정승화 장군의 고소건은 '기소유예' 처분이 나왔지. 그런데, 5.18 관련 고소건은 '공소권 없음'으로 결론이 났어. '기소유예'는 기소를 할 수 있지만 미루는 것이고, '공소권 없음'은 기소 자체를 안 하겠다는 거야. 그동안 미온적 태도를 보였던 김영삼 대통령도 이번만큼은 격분했대. 그렇게 발표한 검사를 내가 혼을 내줬습니다. 뭐 독일에 그런 이야기가 있다 그래요. 나는 그거는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성공하든 실패하든 쿠데타는 쿠데타죠. 어디서 지식을 알아도 말이야 그런 거 못된 거 배워 가지고 말이야. -김영삼 사실 김영삼 대통령이 태세를 전환해야 했던 이유가 있어. 당시 정부에 대한 민심이 최악이었거든. 국정지지율이 28%까지 떨어졌어. 하나회를 해체하고 금융실명제를 실시했던 국정 초기에는 지지율이 80%가 넘었었어. 2년 만에 민심이 급격하게 돌아선 이유는 뭘까.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 붕괴 사고, 그리고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이런 대형 참사가 연달아 터졌어. 그러니까 정부에 대한 신뢰가 바닥을 찍고, 민심이 급속도로 악화된 거지. 김영삼 정부는 국민들의 지지를 회복해야 했어. 그래서 고심 끝에 칼을 빼들었어.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으로 과거사 청산을 단행하기로 한 거지. 하지만, 문제가 있었어. 검찰이 이미 불기소 처분을 내린 사건이라, 또다시 수사할 수가 없다는 거야. 김영삼 대통령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법을 새로 만들었어. 대통령이자 여당의 총재였던 김영삼 대통령은 국회에 5.18 특별법 제정을 지시했고, 일사천리로 통과됐어. 광주민주화운동이 역사적인 재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됐고 쿠데타를 주도한 신군부 세력에 대해 단죄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됐습니다. ▲ 특별한 인연 칼자루는 다시 검찰로 넘어갔어. 하지만 지금 검찰 내부 사정이 복잡해. 그간 검찰의 처분은 '기소유예', '공소권 없음'이었는데, 이 기조를 뒤집어야 하는 상황이야. 조금 곤란했겠지. 하지만 이 분의 생각은 달랐어. 최환 검사장. 5.18 특별법이 통과되기 두 달 전에 서울중앙지검장에 임명됐어. 서울중앙지검은 전국 검찰청 중 핵심이야. 정치 경제적으로 중요한 사건들 대부분을 서울중앙지검에서 담당해. 아주 중요한 시기, 중요한 곳에 최환 검사장이 임명됐어. 최환 검사장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던 기존의 검찰 기조와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어. 성공한 쿠데타도 쿠데타이기 때문에 (수사를) 밀어붙인다 이거예요. 어찌 됐건 쿠데타를 한 사람인데 그 당시 군 형법상으로는 다른 요지가 없었기 때문에 그대로 밀고 가야지. 거기서 검사장이 우왕좌왕하거나 주저주저했으면 안 따라오죠. 책임은 내가 진다 도장 찍고… 지금 생각하면 그런 용기 있는 결단은 검사장이 안 하고는 안 돼요. -최환, 당시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 놀랍게도, 최환 검사장은 전두환 전 대통령과 특별한 인연이 있어. 그 이야기가 영화 소재가 되기도 했어. 바로 영화 '1987'이야.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으로 시작되는 영화지. 1987년 당시 서울대 학생이었던 박종철 군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중 모진 고문으로 사망한 사건이야. 당시 경찰은 이 사건을 덮으려 했어. 그런데 그에 맞서서 진실을 밝히려던 검사가 한 명 있었어. 영화에서 배우 하정우가 연기했던 그 검사. 사건 은폐를 위해 급하게 시신을 화장하려는 경찰에 맞서, 부검을 통해 진실을 밝히려던 검사 캐릭터. 그 실존인물이 바로, 최환 검사장이야. 경찰에서 수사를 하다가 수사하던 피의자가 사망을 했다. 너무 어처구니없게 나한테 와서 설명을 자기들 딴에는 때리거나 고문한 것도 없이 그냥 소리 한 번 크게 질렀더니 억하고 죽었다 이런 식이에요. 그걸 누가 믿을 수가 있나요? -최환, 당시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 최환 검사는 이 사건을 철저하게 조사하기 시작했어. 그런데, 누군가에게 전화가 걸려와. 전두환 전 대통령이었어. 대통령으로서 명령하는 건데 그건 이제 전화로 '경찰에서 열심히 하면서 고생해서 조사하다가 그거 참 이 일이 벌어진 거 같다 그거 그냥 덮어라' 그랬어요. 그 점에 대해서는 검사가 대통령이 '덮어라' 한다고 해서 덮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그냥 적당히 할 처지가 못 된다 해서 대통령께 '안됩니다' 얘기를 했어요. 대통령이 덮어버리라고 하는 사건을 끝까지 우겨가면서.. -최환, 당시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 당시 최환 검사는 전두환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했대. 각하, 이 사건 철저하게 진상을 규명해야 합니다. 이제 곧 올림픽이 열립니다. 이 뻔한 사실을 이렇게 숨기면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웃음거리가 될 겁니다. 1년 뒤에 열릴 88 서울올림픽을 언급한 거야. 이 말을 들은 전두환은, 묵묵부답이었다고 해. 최환 검사는 그렇게 어마어마한 외압을 이겨내고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데 성공했어.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은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고, 그렇게 전두환 정권은 끝이 났어. 그리고 8년 뒤, 최환 검사는 서울중앙지검장이 되어 전두환 수사에 의지를 불태우고 있어. ▲ 전직 대통령 체포작전 1995년 11월 30일, 최환 검사장은 기자회견을 열고 오늘부로 12.12사태와 5.18에 대한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하고 두 사건에 대한 수사를 재개합니다 라고 발표했어. 검찰의 묵직한 첫 공격이야. 특별수사본부에는 날고 기는 에이스 검사들이 차출됐어. 이틀 뒤인 1995년 12월 2일 아침, 연희동 전두환 자택 앞. 전두환은 이런 발표를 해. 저는 오늘 이 자리가 우리나라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고 또 어디로 가고자 하는지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채, 침통한 마음으로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저는 대한민국의 전임 대통령 자격으로 김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해서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조언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취임 후 3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에 와서 김 대통령은 갑자기 저를 내란의 수괴라 지목하며 과거 역사를 전면 부정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의 진상 규명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다분히 현 정국의 정치적 필요에 따른 것이라고 보아 저는 검찰의 소환요구 및 여타의 어떤 조치에도 협조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반격이야. 이날은 검찰이 출두 명령을 내린 날이었어. 이에 반발한 전두환이 자신의 자택 앞에 기자들을 모아놓고 '골목성명'을 발표한 거야. 이건 정치보복이라며, 자신은 출두에 응할 수 없다면서. 느낌이 그 당시에 보면 '너무 당당하다' 그때 온 국민의 관심사 속에서 겸손한 모습이라던지 그런 모습을 기대했었는데 오히려 진짜 보무도 당당하게 걸어 나와서 '나는 당당하다, 죄지은 거 없다' '다 끝난 얘기 가지고 인제 와서 또…' 이런 식으로 하니까. 너무 어이없고 오히려 이게 또 황당한 느낌이 들었던 것 같아요. -김균종 SBS기자, 당시 영상취재 전두환은 골목성명 발표 후 고향인 합천으로 향했어. 특별수사본부는 긴급회의를 열어. 내일이 조모 제사라서 합천에 간다는 전두환 측의 설명을 믿지 않았어. 그걸 핑계로 도주하려는 거 아니냐며, 긴급 체포를 결정했어. 사상 초유의 전직 대통령 체포작전. 검찰은 체포조를 꾸려 합천으로 향했어. 합천경찰서에 모여서, 어떻게 체포할지 밤새 작전회의를 했대. 다음날 새벽 6시, 전두환 체포를 위해 출동했어. 목적지는 전두환이 머물고 있는 5촌 조카의 집. 체포를 위해 출동한 수사관들. 그들을 막아서는 마을 청년들. 양측의 첨예한 대립. 이 모습을 취재하려는 기자들까지, 모두가 한데 뒤엉켰어. 그야말로 아수라장. 30여 분의 실랑이 끝에 수사관들이 집 진입에 성공했어. 전두환은 그때 뭘 하고 있었을까? 놀랍게도, 자고 있었대. 밖에서 그 난리인데. 잠에서 깬 전두환은 아주 여유로웠어. 조금만 기다리라며, 옷을 갈아입고 세수를 하며 20분가량 지체했어. 잠시 후, 대문 밖으로 전두환이 모습을 보였어. 수사관들이 으레 하듯 양쪽에서 팔짱을 끼니까, 신경질적으로 뿌리쳤어. 전두환의 연행을 본 친척들과 측근들은 각하! 안됩니다! 하면서 울부짖었대. 근데 전두환의 반응은 손을 흔들어주기도 하며 여전히 너무나 여유로웠어. 어쨌든 압송은 시작됐어. 목적지는 안양교도소. 합천에서 안양으로 가려면, 고령군에서 88고속도로에 진입해서 구마고속도로, 경부고속도로를 거쳐 가야 해. 전두환 압송 차량은 총 7대로 편성됐는데, 전두환은 그중 3번째 차량이었어. 그 뒤로 100여 대의 취재진 차량이 따라붙었어. 국내는 물론 외신 기자들도 따라붙었대. 전대미문의 전직 대통령 압송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창문을 열고 몸을 밖으로 내밀기까지 하면서 사활을 걸었다고 해. 전두환이 탄 차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압송 차량이 추풍령 부근을 지날 무렵, 금강휴게소에 들르기로 했어. 전두환이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했거든. 근데 이때, 또 하나의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해. 맨 앞에 있던 순찰차가 금강휴게소를 그냥 지나쳐버린 거야. 압송 차량은 다 같이 움직여야 해. 어쩔 수 없이 나머지 차들도 그렇게 휴게소를 그냥 지나쳤어. 그래서 수사관들은 다음 휴게소에 가기로 해. 이번엔 모든 차량이 휴게소에 제대로 진입했지만, 화장실에 갈 수가 없어. 전두환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취재진이 벌떼같이 몰려든 거야. 내려서 화장실을 가려고 하는데 취재진들이 뺑 둘러싸서 가로막고 이러니까 실랑이가 있었어요. 검찰 수사관들하고 '왜 용변을 보러 가는데 그러느냐?' 하니까 '취재할 기회를 줘야 될 거 아니냐' 그래서 거기서 실랑이를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거기서도 용변을 못 봤어요. 전두환 씨가 가자고 그랬어요. 그냥 올라가자고. -유병태, 당시 압송 담당 경찰 결국 전두환은 화장실을 포기하고 다시 차에 탔어. 이후에도 휴게소에 못 들를 가능성이 크지. 또 기자들이 몰릴 테니까. 수사관들은 고민 끝에 한 가지 결정을 내려. 전두환에게 깡통 하나를 건네준 거야. 본인이 어떻게 여기에 소변을 볼 수 있겠는가? 전두환은 여유롭게 거절했대. 어쨌든 이런 우여곡절 끝에, 안양교도소에 도착했어. 이 때도 수많은 취재진과 시민들, 경찰들이 뒤섞여서 북새통을 이뤘다고 해. 입소절차를 마치고 수용실로 이동한 전두환. 교도소 측에서 점심식사를 제공해. 전직 대통령에게 내놓은 교도소의 첫 식사. 당시의 식단을 그대로 재현했어. 밥, 미역국, 김, 김치. 특별대우 없이 교도소 식단 그대로였어. 전두환은 먹지 않았대. 일종의 시위 같은 거였대. 측근들과 가족들은 물론, 교도소장까지 나서 만류했지만, 보름이 넘도록 단식투쟁이 이어졌어. 수감 전에 74kg이었던 몸무게가 64kg까지 빠졌어. 결국 건강악화로 실신까지 하게 된 전두환은 병원으로 이송됐어. ▲ 세기의 재판 전두환이 건강을 어느 정도 회복한 이후에 법정에 서게 돼. 그게 바로 아까 황상현 판사의 그날이야. 당시 모습이야. 전두환 옆에 선 노태우 전 대통령. 절친답게 두 사람은 법정에서 손을 꼭 잡고 있는 모습이야. 노태우는 왜 전두환과 같이 법정에 섰을까? 노태우 전 대통령은 사실, 친구보다 보름 먼저 구속 수감됐어. 전두환이 체포되기 한 달 반 전으로 돌아가볼게. 1995년 10월 19일 여의도 국회의사당. 이날은 국회 본회의가 있는 날이야. 본회의장 단상에 선 민주당 박계동 의원은 뜻밖의 얘기를 꺼냈어.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금액의 비자금이 존재합니다. 그러면서 주장한 비자금은 무려 4천억 원. 정말 어마어마한 금액이지. 국민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어. 노태우 전 대통령은 처음에는 자신과 무관한 일이라며, 법적 대응하겠다고 발뺌했어. 하지만 진실은 곧 밝혀졌지. 김대중 총재가 자신도 대선 당시 노태우로부터 20억 원을 받았다고 고백한 거야.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노태우 전 대통령은 결국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고 비자금의 존재를 인정했어. 못난 노태우 외람되게 국민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국민 여러분의 상처받은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 드릴 수만 있다면, 또 그것이 속죄의 길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습니다. -1995년 10월 27일 노태우 기자회견. 조사 결과, 무려 2,300억 원이 넘는 뇌물수수혐의가 밝혀졌고, 11월 16일에 서울구치소에 구속 수감됐어. 전두환보다 보름 먼저 구속된 거야. 헌정 사상 최초로 구치소에 들어간 대통령이 됐지. 국내는 물론 외신까지 당시 상황을 주목했어. 그리고 보름 뒤, 전두환 전 대통령도 구속된 거지. 이렇게 전직 대통령 둘이 나란히 법정에 서게 된 거야. 두 사람은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나눴을까. 전두환이 먼저 친구에게 말을 걸었는데, 첫마디는 이거였대. 자네 구치소에는 계란프라이 나오나? 라고. 그러자 노태우는 아니 안 나와 라고 말했고, 전두환은 다시 우리도 안 나와 라고 했다고 해.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고 수많은 사람을 죽게 한 죄로 재판을 받는데, 두 사람의 대화는 너무 평온하지. 이런 태도는 재판 내내 이어졌대. 심지어, 팔짱을 끼고 앉아 이따금 다리를 흔들거나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기도 했어. 이 재판에는 온 국민의 관심이 집중됐어. 오죽했으면, 이런 일도 있었대. 그때만 해도 요즘과 달리 방청권을 추첨한다는 그런 시스템이 확립되어 있지 않을 때라서, 선착순으로 방청권을 배포했는데요. 법원 입구에서 배포했는데, 처음에는 월요일 오전 재판이다 그러면 한 토요일 오후부터 줄을 섰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심부름센터를 고용해서 거기에 거액의 보수를 주고 방청권을 받아서 방청할 정도로 굉장히 방청 열기가 뜨거웠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황상현, 재판 당시 배석판사 이 세기의 재판은, 1심에서만 무려 28차까지 진행됐어. 27차 공판이 있던 1996년 8월 5일은, 전두환의 최후 진술이 있던 날이야. 그 내용 중 일부야. 본인은 전직 대통령으로서 이 법정에 서게 된 것을 본인 부도덕의 소치로 생각하며, 이 재판을 이끌어 온 재판부에 대해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나 현실의 권력이 제아무리 막강하다 하여도 역사를 자의로 정의하고 재단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본인은 생각합니다. 또한 국가의 계속성과 올바른 발전을 위해서도 정권이 바뀌었다고 하여 과거 정권의 정통성을 시비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전두환 일말의 반성 없이 정치적 희생양이라는 주장뿐이야. 이런 최후 진술이 끝나자 방청석 일부에선 박수세례가 터져 나왔어. 재판을 참관했던 전두환의 지지자들이었어. 반면, 이걸 지켜본 5.18 유가족 분들의 속에선 천불이 났어. 욕설과 고함으로 재판정은 난리가 났어. 그렇게 한차례 소란이 마무리되고 재판이 거의 끝나갈 무렵, 한 여자가 손을 번쩍 들어 전두환에게 한마디 물어보고 싶다! 고 외쳤어. 재판장은 소란을 막기 위해 해당 여성에게 퇴정 명령을 내렸어. 여성은 강제 퇴정을 당하면서도 이렇게 외쳤어. 한열이 왜 죽였냐! 한열이 왜 죽였냐!!! 바로 이한열 열사. 1987년 6월 전두환 정권에 항거하다가 전투경찰이 쏜 최루탄에 피격당해 사망한 학생운동가. 법정에서 강제 퇴정 당한 그분은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였어. 1996년 8월 26일, 최종 선고날. 전두환 측 변호인의 입장은 한결같았어. 죄가 없다는 거야. 쟁점이 되는 몇 가지를 보면, 먼저 12.12 군사반란은 공소시효가 만료됐대. 1979년 12월에 있었던 사건이니 15년 후인 1994년 12월에는 시효가 끝났다는 거야. 5.18에 대해 전두환 측은, 내란을 목적으로 살해 행위를 한 게 아니라,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해. 또 자위권을 지시했을 뿐, 시민들을 향한 발포명령은 없었다고 주장했어. 이런 전두환 측의 주장, 받아들여졌을까? 1심 판결문은 무려 125페이지 분량이었는데, 이런 판결이 나왔어. 피고인 전두환을 사형에, 피고인 노태우를 징역 22년 6개월에 각 처한다. 변호인 측이 12.12 군사반란의 공소시효를 말했는데, 법원은 공소시효가 아직 남았다고 판단했어. 헌법 제84조에 따르면, 대통령은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직 중 형사상의 소추를 받지 않아.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재임한 7년 6개월 동안은 공소시효가 정지된다는 거야. 그럼 아직 공소시효가 5년이나 남은 게 되는 거지. 그리고 5.18 당시 자위권 발동만을 지시했다는 전두환 측 주장에 대해 법원은 이렇게 판단했어. 당시에 시위상황이 계엄군과 시위대 모두 극도로 감정이 악화되어 있고 시위대가 일부 무장을 시작하여 계엄군들에게 자위권 발동을 지시할 경우에는 상호 간에 교전이 벌어질 수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위권 발동 지시를 함으로써 위 피고인들의 위 자위권 발동 지시는 실질적으로 발포명령이었다고 볼 것이어서 위 피고인들의 이 부분 주장 역시 이유 없다. 발포명령을 한 것과 다름없다고 판단한 거야. 황상현 판사는 당시 피고 전두환의 모습을 이렇게 기억해. '사'자가 나오면 사형이고 '무'자가 나오면 무기징역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사' 자라는 단어가 재판장님 입에서 나오는 순간, 전두환 피고인의 표정이 상당히 일그러지는 그런 것을 보면서, 아 이게 대한민국에서 8년 동안 대통령을 한 사람도 사람인 이상 본인을 사형에 처한다는 그런 형량을 재판부에서 선고를 하니, 역시 그 표정이 저렇게 안 좋아지는구나, 하는 그런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황상현, 재판 당시 배석판사 그런데 이어진 2심에서는 감형됐어. 전두환은 무기징역에 추징금 2,205억 원. 노태우는 징역 17년에 추징금 2,628억 원으로. 해당 판결은 대법원에서도 확정됐어. 이렇게 두 대통령의 수감 생활이 시작됐어. 다들 교도소 안에서 나름 특별대우를 받으며 지내지 않겠나, 온갖 억측이 나왔어.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고 해. 두 전직 대통령들은 다른 수용자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고, 똑같은 메뉴의 식사를 했대. 다른 재소자들과의 마찰을 막기 위해, 안전상의 문제로 다른 수용자들과 격리된 독립 사동에서 생활했다고 해. 수용실 구조는 일반 수감자들과 다르지 않았어. TV나 에어컨이 없는, 3.5평짜리 공간이야. 대신 혼자 생활하다 보니 다른 수용자들보단 조금 더 넓게 생활할 수가 있고, 운동이나 목욕도 혼자 할 수 있었다고 해. 그럼, 두 사람의 수감생활 태도는 어땠을까? 의외로 두 사람은 잘 지냈대. 아무래도 군인 출신이라 그런지, 규칙적인 생활이나 공동취사 등 교도소 생활에 잘 적응했다고 해. 전두환 전 대통령은 그렇게 책을 많이 읽었대. 정치, 사상, 고전문학 등 다양한 장르의 서적을 두루 섭렵했대. 그중에 의외의 장르가 있었는데, 바로 동화책.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책을 많이 읽었대. 출소하면 손자들에게 들려주려고 그랬다고 해. 그런데 그 손자가 나중에 커서 할아버지를 어떻게 평가했는지, 어떤 폭로를 했는지 우리가 잘 알고 있지. 교도소 생활에서 가장 힘든 건 뭘까? 현직 교도관이 주저 없이 꼽는 하나는, 바로 '더위'래. 지금도 교도소에는 여름에 사건사고가 많이 터진다고 해. 더우면 예민해지고 짜증 나고, 그게 싸움으로 번지니까. '꼬꼬무'가 어렵게 구한 자료가 있어. 노태우 전 대통령이 옥중에서 직접 자필로 쓴 수감생활 노트야. -1997년 8월 19일. 말복이 지난 지도 3일이나 되었는데 왜 이렇게 더운지. 어제와 오늘은 찜통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몸이 천 근이나 된 것 같이 무겁다. -1997년 8월 20일. 어젯밤은 수면제를 먹고 잤는데도 별 효과가 없었다. 여러 번 깼고 소변도 두 번이나 보았다. 날씨가 무덥고 또 불쾌지수가 높으니 몸의 컨디션이 극히 좋지 않다. 아침에 일어나니 온몸이 우리하게 아프다.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의 권력자였다 해도, 더위 앞에선 어쩔 수 없었나 봐. 그렇게 시간은 흘러 여름이 가고, 겨울이 찾아왔어. 1997년 12월 22일. 이날 전 국민이 깜짝 놀랄 일이 벌어져. ▲ 반성 없는 가해자 교도소 생활이라는 게 여러분들은 교도소 가지 마시오. 그것만 내가 얘기하고 싶습니다. 전두환이 구속 750일 만에 출소했어. 노태우는 구속 767일 만에 출소했어. 전두환은 무기징역, 노태우는 징역 17년이었는데. 두 사람은 불과 2년 만에 출소했어. 거기엔, 정치적인 이유가 있어. 1997년 겨울, 15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어. 그런데 당시 대선에 나섰던 모든 후보들이, 전두환과 노태우의 사면을 공약으로 걸었어. 명분은 '국민 대화합'. 실상은, 보수층의 표를 얻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그로 인해, 두 사람은 모두 교도소에서 나오게 돼. 출소 뒤 전두환의 행적은? 알다시피 아주 잘 지냈어. 대통령 취임식 전직 대통령 만찬에도 꼬박꼬박 참석했어. 그 모습을 영 마땅치 않게 본 한 사람이 있었어. 바로, 김영삼 전 대통령이야. 전두환이는 와 불렀노? 저거 대통령도 아니데이. 죽어도 국립묘지에는 못 간다. 2010년 이명박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들을 초대한 자리. 그때 김영삼이 전두환을 보자마자 이렇게 한마디 했대. 이어진 식사자리에서 전두환이 와인을 찾자, 또 한마디 했대. 니는 청와대에 술 쳐무러 왔나? 이후에도 전두환은 반성의 기미는커녕, 5.18을 '폭동'이라 표현하기도 했어. 광주는 총기를 들어 일어난 하나의 폭동이야. 추징금 미납문제로 법원에 출석해서 희대의 '29만 1천 원' 발언도 했지. 검사가 조사를 해서 (돈이) 없으니까 못 가져간 거 아냐. 마당에 숨겨놓은 게 있으면 마당 가서 파보면 되잖아. 2017년엔 2천 페이지에 달하는 회고록을 출간하기도 했어. 그리고 그 회고록에서 5.18 진상규명에 힘쓴 故조비오 신부를 '가면 쓴 사탄이다,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다'라고 비난했지. 조비오 신부의 유족들은 사자명예훼손으로 전두환을 고소했어. 1심에선 전두환에게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형을 선고했어. 그런데 항소심 결심 공판을 6일 앞둔, 2021년 11월 23일. 전두환은 자택 화장실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고, 결국 사망했어. 마지막 심판은 영원히 받지 못하게 된 거야. 근데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어. 전두환 사망 당일, 전남 강진의 한 저수지에서 변사체가 발견됐어. 바로 이 분이야. 이름은 이광영. 광영 씨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피해자였어. 승려 생활을 하던 광영 씨는 1980년 5월 광주에 있었어. 부처님오신날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거든. 광주에서 계엄군의 만행을 목격한 광영 씨는 부상자 이송, 의약품 모으기 등 적극적인 구호 활동에 나섰어. 그러다 계엄군이 쏜 흉탄이 광영 씨의 척추에 박혀. 그렇게 하반신 불구로 살게 됐고, 한평생 5.18 진상규명 활동에 앞장섰어. 하지만 척추에 박힌 파편 때문에 통증이 너무 심해서 매일 진통제 주사를 맞으며 생활해야 했어. 그냥 통증이 하도 심해서 날이면 날마다 그걸 이겨내는 게 가장 힘들어요. 이렇게 고통받고 처절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저 혼자뿐만이 아니겠죠. 그 많은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소외받고 그리고 관심 밖에서 이렇게 살고 있거든요. 그렇게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광영 씨. 천수를 누리다 병으로 사망한 가해자와, 평생을 고통 속에 살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피해자. 5.18의 가해자와 피해자 두 사람이 같은 날 사망한 거야. '과거를 잊어버리는 자는 그것을 또다시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지. 법적 처벌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지만, 우리는 이 사건을 가슴 한 편에 무겁게 새기고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거야.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
[꼬꼬무 찐리뷰] 전두환, 무기징역 받고 2년 만에 출소…왜 제대로 심판하지 못했나
등록일2024.08.23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22일 방송된 '전두환, 심판의 날'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가수 겸 배우 김정민, 댄서 가비, 방송인 김지영이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특별한 재판 때는 1996년 3월 11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이야. 국내에서 일어나는 규모가 큰 사건들은 대부분 여기서 재판을 해. 이제 임관 5년 차인 황상현 판사가 재판을 위해 출근하고 있어. 근데 오늘따라 법원이 평소와는 달라. 법원 로비에 사람들이 가득해. 그 이유는 바로, 황판사가 오늘 맡은 재판 때문이야. 황판사는 이 재판 때문에 전날 밤잠까지 설쳤대. 그 당시에는 5년 차의 아주 경력이 일천한 판사였지만, 중요한 사건이라고 판단이 됐기 때문에 굉장히 저도 긴장하고. 과연 재판이 잘 진행될지에 대해서 걱정을 했던 그런 기억이 납니다. -황상현, 재판 당시 배석판사 황 판사는 선배 판사들과 함께 재판에 들어갈 준비를 해. 세 명의 판사들 모두 초긴장 상태야. 선배 판사 두 명이 먼저 입장하고, 황 판사가 그 뒤를 따라. 그때, 재판장을 맡은 선배 판사가 마지막으로 들어오는 황 판사한테 들어올 때 문 잠그고 들어와 라고 말했어. 문을 안에서, 법정 안에서 잠그질 않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의 경우에는 문을 잠그라고 하셨던 기억이 나요. 제가 그때 그 이유를 여쭤봤더니, 혹시라도 이상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재판 진행 도중에 법대로 올라와서 소란을 피운다던가 그런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런 지시를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황상현, 재판 당시 배석판사 당시엔 기자들의 법정 출입을 허용하지 않을 때야. 근데 이 재판엔, 방송사 기자들까지 출입해 있었어. 촬영도 진행된다는 거야. 또 법원 소송의 경위들도 엄청 많이 배정됐어. 그 당시에 통상 법정 하나에 법정경위 한 분이 제복을 입고 질서유지를 하는 게 일반적인데, 서울중앙지방법원 내 법정경위 분들이 총동원 돼서 한 30명은 넘었던 거 같아요. -황상현, 재판 당시 배석판사 이 사건, 심상치 않아 보이지? 잠시 후, 피고인들이 법정에 들어와. 피고인만 무려 16명이야. 그중에 가장 먼저 들어온 피고인한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어. 조용했던 법정이 술렁이기 시작해. 어떤 사람들은 그 피고인을 향해 응원의 박수를 보내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며 욕을 하기도 해. 이 피고인은 죄가 무려 9개야. 그중 첫 번째 죄목이 '반란수괴'. 국가를 전복할 목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집단의 우두머리라는 거야. 이 피고인의 정체, 누구일 거 같아? 바로 이 사람이야. 전두환.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무고한 광주 시민들을 무력으로 짓밟은 사람.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이 된 후에, 노동, 종교, 언론 등 사회 전 계층을 탄압했어. 그리고 불법 비자금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어. 1996년 12.12 군사 반란을 일으킨 지 17년 만에, 전직 대통령 전두환이 법정에 섰어. 국내뿐 아니라 해외 언론까지 주목했던 그날이야. '꼬꼬무' 시청자들 사이에서 전두환의 별칭이 있어. '꼬꼬무 남주', 즉 '꼬꼬무'의 남자주인공이라는 이야기야. 그만큼 많이 등장했다는 말이지. 그동안 '꼬꼬무'는 12.12 군사반란, 하나회 등 전두환의 행적을 집중 조명해 왔어. 오늘은, '꼬꼬무 남주' 전두환을 보내주는 날이야. '전두환 3부작'의 마지막 편, 이름하여 '전두환 심판의 날'이야. ▲ 첫 번째 심판의 기회 사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퇴임한 직후부터 심판할 기회는 여러 번 있었어. 전두환에 이어 대통령이 된, 전두환의 절친이자 조력자 노태우. 함께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간접선거로 대통령이 된 친구와는 달리, 노태우 전 대통령은 직선제로 당선됐어. 전 정권보다는 상대적으로 당당했겠지. 하지만 노태우 정부는 초반부터 큰 난관에 봉착해. 헌정사상 처음으로 여소야대 정국이었거든. 13대 국회의원의 선거 결과야. 노태우 대통령이 속한 민주정의당보다, 야당의 의석수가 더 많아. 야당이 힘을 합치면 정국을 주도할 수 있는 상황이야. 노태우 전 대통령은 야당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어. 김영삼과 김대중을 필두로 한 야당은, 전 정권의 비리와 5.18에 대한 진상규명을 해야 한다고 주장해. 전두환에 대한 심판의 칼을 꺼내든 거지. 곧장, 특별위원회가 설치되고 청문회가 열렸어. 이게 바로 '제5공화국 청문회'야. 지금은 국회 청문회가 자주 열리지만, 이 5공 청문회가 헌정사상 최초의 청문회였어. 전국민적 관심 속에 TV 생중계도 했어. 5공 청문회의 시청률은 무려 81%. 사실상 전 국민이 다 본 셈이야. 등장인물이, 장난 아니야. 장세동 전 안기부장에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까지 소환됐어. 그리고 전두환 전 대통령도 직접 증인석에 출석했어. 전두환 전 대통령은 5.18에 대한 사과 없이, 발포 명령은 정당한 자위권 행사였다고 주장했어. 당시 (1980년) 5월 22일 자위권 발동도 가능하다는 계엄사령부의 작전 지침이 지휘계통을 통해 하달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위급한 상황에 처한 현지 지휘관들이 자위권 행사의 불가피성을 강조했으나… -전두환 전두환의 증언에 야당 의원들은 거세게 항의했어. 발포 책임자도 밝혀! 살인마 전두환! 사람 죽여놓고 자위권 발동이 뭐야! 장내가 아수라장이 됐지만, 전두환은 질의응답 없이 미리 작성한 발표문만 낭독하고는 황급히 자리를 피했어. 청문회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전두환 전 대통령의 형, 사촌동생 등 일가친척들과 측근들이 구속됐어. 하지만 정작 전두환 본인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어. 참으로 면목이 없는 일입니다. 진심으로 사죄를 드리며 머리를 숙여서 용서를 빕니다. -1988년 11월 23일, 전두환 대국민 사과 中 불법 비자금에 대해 사과하고 사회환원을 약속했지만, 지켜지지 않았지. 사상 최초의 청문회는 그렇게 흐지부지 되고 말아. ▲ 두 번째 심판의 기회 시간은 흘러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섰어.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32년간 이어진 군부 출신이 아닌, 민간인 출신이 대통령이 된 거야. 바로, 대한민국 14대 대통령 김영삼. 김영삼 대통령은 박정희 정권 때부터 군부독재에 강하게 반발한 인물이야. 그래서 전두환과 사이가 아주 안 좋았어. 전두환은 대통령 시절 정적인 김영삼을 굉장히 탄압했어. 툭하면 가택연금 조치를 시키고, 수시로 정계은퇴하라고 협박하며 김영삼 측근들을 안기부로 끌고 가서 고문했어. 이렇게 모진 세월을 겪은 김영삼이 대통령이 된 거야. 두 번째 심판의 기회가 찾아온 거야. 대통령이 된 김영삼은 가장 먼저 뭘 했을까? 바로 '하나회' 숙청. 하나회는 전두환이 이끈 사조직으로, 12,12 군사 반란을 주도한 세력이야. 김영삼 정부 때까지 온갖 요직을 장악하고 있었어. 김영삼 대통령이 인사권을 발동해서 군 수뇌부를 대거 교체하기 시작해. 하나회 해체 작업을 단행한 거지. 취임 후 한 달도 채 안된 시점이었어. 김영삼 대통령의 이런 행보에, 국민들은 절대적인 지지를 보냈어. 김영삼 대통령은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며 인기를 구사했어. 그리고 취임식 석 달 후인 1993년 5월 13일. 김영삼 대통령은 5.18 관련 담화문을 발표해. 저는 분명히 말하거니와 오늘의 정부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 위에 서 있는 민주정부입니다. 저는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상규명과 그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주장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특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고 듣고 있습니다. -5.18 관련 담화문 내용 中 하나회 해체를 넘어, 5.18 가해자들도 단죄하려는 움직임일까? 국민들은 기대감에 찼어. 그런데, 담화문 뒷내용을 들어봐. 그러나 진상규명은 역사를 올바르게 바로잡고 정당한 평가를 받자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결코 암울했던 시절의 치욕을 다시 들추어내어 누구를 벌하자는 것은 아닐 겁니다. 이는 훗날의 역사에 맡기는 것이 도리라고 믿습니다. -5.18 관련 담화문 내용 中 지금 당장은 단죄하지 않겠다는 말로 들리지? 김영삼 대통령은 왜 이런 결정을 한 걸까? 과거에 했던 약속 하나가, 김영삼 대통령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야. 그 답을 알기 위해,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기 전으로 시간을 돌려볼게. 아까 13대 국회의원선거 결과가 '여소야대'로, 노태우 대통령에게 불리한 상황이었지? 하지만, 통일민주당을 이끌던 김영삼도 깊은 고민에 빠졌어. 같은 야당이지만, 김대중의 평화민주당보다 의석수가 적었거든. 이대로라면, 다음 대통령 선거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인 거지. 그래서 김영삼은 고민 끝에 파격적인 결단을 내렸어. 당시 여당이었던 민정당과 손을 잡기로 한 거야. 노태우 당시 대통령과의 연합이야. 김종필 총재가 이끄는 신민주공화당도 여기에 합세했어.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이제 여야 정당이 합당하여 새로운 국민 정당이 탄생됩니다. 이게 바로 '3당 합당'이야. 이 과정에서 김영삼은 문제의 그 '약속'을 하게 돼. 바로, '5공 군부에 대한 처벌 감형'. 노태우가 이끄는 민정당 의원 대부분이 5공 관련 인사들이었어. 이제 그들과 같은 당이 됐으니, 뭔가 약속을 해야 했겠지. 또 김영삼 대통령이 전두환을 직접 처단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어. 대통령에겐 사법권이 없어. 하나회 척결은 대통령에게 군 인사권이 있기에 가능했어. 하지만 누군가를 처벌하는 일은, 헌법상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검찰의 기소와 법원의 판결이 필요한 일이야. 그럼 검찰의 입장은 어땠을까? 검찰은, 전두환에 대한 수사를 개시하긴 했어. 왜냐하면 누군가 전두환 전 대통령을 고소했거든. 바로 이 사람이야. 12.12 군사반란 당시 신군부에 저항했던,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장군. 영화 '서울의 봄'에서 정우성이 연기한 이태신 캐릭터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야. 12.12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정승화 장군과 함께 반란 및 내란목적살인죄로 전두환을 검찰에 직접 고소했어. 전두환 전 대통령, 검찰에 출두했을까? 1994년 1월 10일, 전두환은 출두하긴 했어. 그런데 검찰로 출두한 게 아니야. 김영삼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최규화 전두환 노태우 전직 대통령과 만나 국정 현황을 설명하면서 국정 운영에 대한 적극적인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1994년 1월 13일 대한뉴스 전두환 고소 건에 대해 검찰에서 수사 중이었던 상황인데도, 김영삼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과의 만찬에 전두환을 초대한 거야. 청와대에서 만찬을 마치고 귀가한 전두환은 이런 말을 했어. 오늘 칼국수 맛있게 잘 먹었죠. 안보 문제에 대해서 각별히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고, 조언을 해드렸다면 조언이라고 그럴까. 김 대통령께서도 잘 알고 계시더라고. 대통령이 이런 식으로 나오니까, 검찰은 어땠겠어. 1994년 10월, 검찰은 정승화-장태완 장군의 고소건에 대해 '기소유예' 처분을 내려. 전두환의 죄는 인정하나 기소는 미루겠다는 거야. 당시 검찰의 입장을 이랬대. 위 피해자 등을 기소하는 경우 불필요하게 국력을 소모할 우려가 있고, 국가 발전에도 지장을 초래하는 결과를 야기할 수 있음. 이 사건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는 후세에 맡기고, 관련자들에 대한 사법적 판단은 이번 검찰의 결정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것. 이번에도 평가는 후세에 맡기겠다는 결론이야. 김영삼 대통령이 발표했던 5.18 담화문과 기조가 같아. 검찰과 정부의 소극적인 모습에 국민들은 실망을 많이 했어. 이때부터 전국민적으로 비판 여론이 들끓기 시작해. 이런 여론을 반영하듯, 5.18을 다룬 드라마까지 등장했어. 바로 배우 최민수, 고현정 주연의 SBS 드라마 '모래시계'야. 나 떨고 있니? 라는 유명한 대사가 있지. 이 드라마는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최초의 드라마야. 드라마에 5.18 민주화운동 실제 영상을 삽입하며 당시의 참상을 생생하게 전달했어. SBS의 올타임 레전드 드라마야. 평균 시청률이 46%였고, 최종회는 무려 64.5%였어. 드라마를 보려고 다들 집에 빨리 귀가한다고 해서 '귀가시계'라는 애칭도 있었어. 이렇게 과거청산에 대한 온 국민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이 상황을 반전시킬만한 사건이 또 발생했어. 장태완-정승화 장군에 이어 5.18 피해자와 유가족들도 전두환과 노태우를 고소했거든. 혹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는 말 들어본 적 있어? 당시 이 사건을 맡았던 담당 검사가 했던 말이야. 장태완-정승화 장군의 고소건은 '기소유예' 처분이 나왔지. 그런데, 5.18 관련 고소건은 '공소권 없음'으로 결론이 났어. '기소유예'는 기소를 할 수 있지만 미루는 것이고, '공소권 없음'은 기소 자체를 안 하겠다는 거야. 그동안 미온적 태도를 보였던 김영삼 대통령도 이번만큼은 격분했대. 그렇게 발표한 검사를 내가 혼을 내줬습니다. 뭐 독일에 그런 이야기가 있다 그래요. 나는 그거는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성공하든 실패하든 쿠데타는 쿠데타죠. 어디서 지식을 알아도 말이야 그런 거 못된 거 배워 가지고 말이야. -김영삼 사실 김영삼 대통령이 태세를 전환해야 했던 이유가 있어. 당시 정부에 대한 민심이 최악이었거든. 국정지지율이 28%까지 떨어졌어. 하나회를 해체하고 금융실명제를 실시했던 국정 초기에는 지지율이 80%가 넘었었어. 2년 만에 민심이 급격하게 돌아선 이유는 뭘까.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 붕괴 사고, 그리고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이런 대형 참사가 연달아 터졌어. 그러니까 정부에 대한 신뢰가 바닥을 찍고, 민심이 급속도로 악화된 거지. 김영삼 정부는 국민들의 지지를 회복해야 했어. 그래서 고심 끝에 칼을 빼들었어.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으로 과거사 청산을 단행하기로 한 거지. 하지만, 문제가 있었어. 검찰이 이미 불기소 처분을 내린 사건이라, 또다시 수사할 수가 없다는 거야. 김영삼 대통령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법을 새로 만들었어. 대통령이자 여당의 총재였던 김영삼 대통령은 국회에 5.18 특별법 제정을 지시했고, 일사천리로 통과됐어. 광주민주화운동이 역사적인 재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됐고 쿠데타를 주도한 신군부 세력에 대해 단죄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됐습니다. ▲ 특별한 인연 칼자루는 다시 검찰로 넘어갔어. 하지만 지금 검찰 내부 사정이 복잡해. 그간 검찰의 처분은 '기소유예', '공소권 없음'이었는데, 이 기조를 뒤집어야 하는 상황이야. 조금 곤란했겠지. 하지만 이 분의 생각은 달랐어. 최환 검사장. 5.18 특별법이 통과되기 두 달 전에 서울중앙지검장에 임명됐어. 서울중앙지검은 전국 검찰청 중 핵심이야. 정치 경제적으로 중요한 사건들 대부분을 서울중앙지검에서 담당해. 아주 중요한 시기, 중요한 곳에 최환 검사장이 임명됐어. 최환 검사장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던 기존의 검찰 기조와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어. 성공한 쿠데타도 쿠데타이기 때문에 (수사를) 밀어붙인다 이거예요. 어찌 됐건 쿠데타를 한 사람인데 그 당시 군 형법상으로는 다른 요지가 없었기 때문에 그대로 밀고 가야지. 거기서 검사장이 우왕좌왕하거나 주저주저했으면 안 따라오죠. 책임은 내가 진다 도장 찍고… 지금 생각하면 그런 용기 있는 결단은 검사장이 안 하고는 안 돼요. -최환, 당시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 놀랍게도, 최환 검사장은 전두환 전 대통령과 특별한 인연이 있어. 그 이야기가 영화 소재가 되기도 했어. 바로 영화 '1987'이야.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으로 시작되는 영화지. 1987년 당시 서울대 학생이었던 박종철 군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중 모진 고문으로 사망한 사건이야. 당시 경찰은 이 사건을 덮으려 했어. 그런데 그에 맞서서 진실을 밝히려던 검사가 한 명 있었어. 영화에서 배우 하정우가 연기했던 그 검사. 사건 은폐를 위해 급하게 시신을 화장하려는 경찰에 맞서, 부검을 통해 진실을 밝히려던 검사 캐릭터. 그 실존인물이 바로, 최환 검사장이야. 경찰에서 수사를 하다가 수사하던 피의자가 사망을 했다. 너무 어처구니없게 나한테 와서 설명을 자기들 딴에는 때리거나 고문한 것도 없이 그냥 소리 한 번 크게 질렀더니 억하고 죽었다 이런 식이에요. 그걸 누가 믿을 수가 있나요? -최환, 당시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 최환 검사는 이 사건을 철저하게 조사하기 시작했어. 그런데, 누군가에게 전화가 걸려와. 전두환 전 대통령이었어. 대통령으로서 명령하는 건데 그건 이제 전화로 '경찰에서 열심히 하면서 고생해서 조사하다가 그거 참 이 일이 벌어진 거 같다 그거 그냥 덮어라' 그랬어요. 그 점에 대해서는 검사가 대통령이 '덮어라' 한다고 해서 덮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그냥 적당히 할 처지가 못 된다 해서 대통령께 '안됩니다' 얘기를 했어요. 대통령이 덮어버리라고 하는 사건을 끝까지 우겨가면서.. -최환, 당시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 당시 최환 검사는 전두환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했대. 각하, 이 사건 철저하게 진상을 규명해야 합니다. 이제 곧 올림픽이 열립니다. 이 뻔한 사실을 이렇게 숨기면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웃음거리가 될 겁니다. 1년 뒤에 열릴 88 서울올림픽을 언급한 거야. 이 말을 들은 전두환은, 묵묵부답이었다고 해. 최환 검사는 그렇게 어마어마한 외압을 이겨내고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데 성공했어.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은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고, 그렇게 전두환 정권은 끝이 났어. 그리고 8년 뒤, 최환 검사는 서울중앙지검장이 되어 전두환 수사에 의지를 불태우고 있어. ▲ 전직 대통령 체포작전 1995년 11월 30일, 최환 검사장은 기자회견을 열고 오늘부로 12.12사태와 5.18에 대한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하고 두 사건에 대한 수사를 재개합니다 라고 발표했어. 검찰의 묵직한 첫 공격이야. 특별수사본부에는 날고 기는 에이스 검사들이 차출됐어. 이틀 뒤인 1995년 12월 2일 아침, 연희동 전두환 자택 앞. 전두환은 이런 발표를 해. 저는 오늘 이 자리가 우리나라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고 또 어디로 가고자 하는지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채, 침통한 마음으로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저는 대한민국의 전임 대통령 자격으로 김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해서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조언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취임 후 3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에 와서 김 대통령은 갑자기 저를 내란의 수괴라 지목하며 과거 역사를 전면 부정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의 진상 규명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다분히 현 정국의 정치적 필요에 따른 것이라고 보아 저는 검찰의 소환요구 및 여타의 어떤 조치에도 협조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반격이야. 이날은 검찰이 출두 명령을 내린 날이었어. 이에 반발한 전두환이 자신의 자택 앞에 기자들을 모아놓고 '골목성명'을 발표한 거야. 이건 정치보복이라며, 자신은 출두에 응할 수 없다면서. 느낌이 그 당시에 보면 '너무 당당하다' 그때 온 국민의 관심사 속에서 겸손한 모습이라던지 그런 모습을 기대했었는데 오히려 진짜 보무도 당당하게 걸어 나와서 '나는 당당하다, 죄지은 거 없다' '다 끝난 얘기 가지고 인제 와서 또…' 이런 식으로 하니까. 너무 어이없고 오히려 이게 또 황당한 느낌이 들었던 것 같아요. -김균종 SBS기자, 당시 영상취재 전두환은 골목성명 발표 후 고향인 합천으로 향했어. 특별수사본부는 긴급회의를 열어. 내일이 조모 제사라서 합천에 간다는 전두환 측의 설명을 믿지 않았어. 그걸 핑계로 도주하려는 거 아니냐며, 긴급 체포를 결정했어. 사상 초유의 전직 대통령 체포작전. 검찰은 체포조를 꾸려 합천으로 향했어. 합천경찰서에 모여서, 어떻게 체포할지 밤새 작전회의를 했대. 다음날 새벽 6시, 전두환 체포를 위해 출동했어. 목적지는 전두환이 머물고 있는 5촌 조카의 집. 체포를 위해 출동한 수사관들. 그들을 막아서는 마을 청년들. 양측의 첨예한 대립. 이 모습을 취재하려는 기자들까지, 모두가 한데 뒤엉켰어. 그야말로 아수라장. 30여 분의 실랑이 끝에 수사관들이 집 진입에 성공했어. 전두환은 그때 뭘 하고 있었을까? 놀랍게도, 자고 있었대. 밖에서 그 난리인데. 잠에서 깬 전두환은 아주 여유로웠어. 조금만 기다리라며, 옷을 갈아입고 세수를 하며 20분가량 지체했어. 잠시 후, 대문 밖으로 전두환이 모습을 보였어. 수사관들이 으레 하듯 양쪽에서 팔짱을 끼니까, 신경질적으로 뿌리쳤어. 전두환의 연행을 본 친척들과 측근들은 각하! 안됩니다! 하면서 울부짖었대. 근데 전두환의 반응은 손을 흔들어주기도 하며 여전히 너무나 여유로웠어. 어쨌든 압송은 시작됐어. 목적지는 안양교도소. 합천에서 안양으로 가려면, 고령군에서 88고속도로에 진입해서 구마고속도로, 경부고속도로를 거쳐 가야 해. 전두환 압송 차량은 총 7대로 편성됐는데, 전두환은 그중 3번째 차량이었어. 그 뒤로 100여 대의 취재진 차량이 따라붙었어. 국내는 물론 외신 기자들도 따라붙었대. 전대미문의 전직 대통령 압송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창문을 열고 몸을 밖으로 내밀기까지 하면서 사활을 걸었다고 해. 전두환이 탄 차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압송 차량이 추풍령 부근을 지날 무렵, 금강휴게소에 들르기로 했어. 전두환이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했거든. 근데 이때, 또 하나의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해. 맨 앞에 있던 순찰차가 금강휴게소를 그냥 지나쳐버린 거야. 압송 차량은 다 같이 움직여야 해. 어쩔 수 없이 나머지 차들도 그렇게 휴게소를 그냥 지나쳤어. 그래서 수사관들은 다음 휴게소에 가기로 해. 이번엔 모든 차량이 휴게소에 제대로 진입했지만, 화장실에 갈 수가 없어. 전두환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취재진이 벌떼같이 몰려든 거야. 내려서 화장실을 가려고 하는데 취재진들이 뺑 둘러싸서 가로막고 이러니까 실랑이가 있었어요. 검찰 수사관들하고 '왜 용변을 보러 가는데 그러느냐?' 하니까 '취재할 기회를 줘야 될 거 아니냐' 그래서 거기서 실랑이를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거기서도 용변을 못 봤어요. 전두환 씨가 가자고 그랬어요. 그냥 올라가자고. -유병태, 당시 압송 담당 경찰 결국 전두환은 화장실을 포기하고 다시 차에 탔어. 이후에도 휴게소에 못 들를 가능성이 크지. 또 기자들이 몰릴 테니까. 수사관들은 고민 끝에 한 가지 결정을 내려. 전두환에게 깡통 하나를 건네준 거야. 본인이 어떻게 여기에 소변을 볼 수 있겠는가? 전두환은 여유롭게 거절했대. 어쨌든 이런 우여곡절 끝에, 안양교도소에 도착했어. 이 때도 수많은 취재진과 시민들, 경찰들이 뒤섞여서 북새통을 이뤘다고 해. 입소절차를 마치고 수용실로 이동한 전두환. 교도소 측에서 점심식사를 제공해. 전직 대통령에게 내놓은 교도소의 첫 식사. 당시의 식단을 그대로 재현했어. 밥, 미역국, 김, 김치. 특별대우 없이 교도소 식단 그대로였어. 전두환은 먹지 않았대. 일종의 시위 같은 거였대. 측근들과 가족들은 물론, 교도소장까지 나서 만류했지만, 보름이 넘도록 단식투쟁이 이어졌어. 수감 전에 74kg이었던 몸무게가 64kg까지 빠졌어. 결국 건강악화로 실신까지 하게 된 전두환은 병원으로 이송됐어. ▲ 세기의 재판 전두환이 건강을 어느 정도 회복한 이후에 법정에 서게 돼. 그게 바로 아까 황상현 판사의 그날이야. 당시 모습이야. 전두환 옆에 선 노태우 전 대통령. 절친답게 두 사람은 법정에서 손을 꼭 잡고 있는 모습이야. 노태우는 왜 전두환과 같이 법정에 섰을까? 노태우 전 대통령은 사실, 친구보다 보름 먼저 구속 수감됐어. 전두환이 체포되기 한 달 반 전으로 돌아가볼게. 1995년 10월 19일 여의도 국회의사당. 이날은 국회 본회의가 있는 날이야. 본회의장 단상에 선 민주당 박계동 의원은 뜻밖의 얘기를 꺼냈어.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금액의 비자금이 존재합니다. 그러면서 주장한 비자금은 무려 4천억 원. 정말 어마어마한 금액이지. 국민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어. 노태우 전 대통령은 처음에는 자신과 무관한 일이라며, 법적 대응하겠다고 발뺌했어. 하지만 진실은 곧 밝혀졌지. 김대중 총재가 자신도 대선 당시 노태우로부터 20억 원을 받았다고 고백한 거야.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노태우 전 대통령은 결국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고 비자금의 존재를 인정했어. 못난 노태우 외람되게 국민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국민 여러분의 상처받은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 드릴 수만 있다면, 또 그것이 속죄의 길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습니다. -1995년 10월 27일 노태우 기자회견. 조사 결과, 무려 2,300억 원이 넘는 뇌물수수혐의가 밝혀졌고, 11월 16일에 서울구치소에 구속 수감됐어. 전두환보다 보름 먼저 구속된 거야. 헌정 사상 최초로 구치소에 들어간 대통령이 됐지. 국내는 물론 외신까지 당시 상황을 주목했어. 그리고 보름 뒤, 전두환 전 대통령도 구속된 거지. 이렇게 전직 대통령 둘이 나란히 법정에 서게 된 거야. 두 사람은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나눴을까. 전두환이 먼저 친구에게 말을 걸었는데, 첫마디는 이거였대. 자네 구치소에는 계란프라이 나오나? 라고. 그러자 노태우는 아니 안 나와 라고 말했고, 전두환은 다시 우리도 안 나와 라고 했다고 해.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고 수많은 사람을 죽게 한 죄로 재판을 받는데, 두 사람의 대화는 너무 평온하지. 이런 태도는 재판 내내 이어졌대. 심지어, 팔짱을 끼고 앉아 이따금 다리를 흔들거나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기도 했어. 이 재판에는 온 국민의 관심이 집중됐어. 오죽했으면, 이런 일도 있었대. 그때만 해도 요즘과 달리 방청권을 추첨한다는 그런 시스템이 확립되어 있지 않을 때라서, 선착순으로 방청권을 배포했는데요. 법원 입구에서 배포했는데, 처음에는 월요일 오전 재판이다 그러면 한 토요일 오후부터 줄을 섰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심부름센터를 고용해서 거기에 거액의 보수를 주고 방청권을 받아서 방청할 정도로 굉장히 방청 열기가 뜨거웠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황상현, 재판 당시 배석판사 이 세기의 재판은, 1심에서만 무려 28차까지 진행됐어. 27차 공판이 있던 1996년 8월 5일은, 전두환의 최후 진술이 있던 날이야. 그 내용 중 일부야. 본인은 전직 대통령으로서 이 법정에 서게 된 것을 본인 부도덕의 소치로 생각하며, 이 재판을 이끌어 온 재판부에 대해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나 현실의 권력이 제아무리 막강하다 하여도 역사를 자의로 정의하고 재단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본인은 생각합니다. 또한 국가의 계속성과 올바른 발전을 위해서도 정권이 바뀌었다고 하여 과거 정권의 정통성을 시비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전두환 일말의 반성 없이 정치적 희생양이라는 주장뿐이야. 이런 최후 진술이 끝나자 방청석 일부에선 박수세례가 터져 나왔어. 재판을 참관했던 전두환의 지지자들이었어. 반면, 이걸 지켜본 5.18 유가족 분들의 속에선 천불이 났어. 욕설과 고함으로 재판정은 난리가 났어. 그렇게 한차례 소란이 마무리되고 재판이 거의 끝나갈 무렵, 한 여자가 손을 번쩍 들어 전두환에게 한마디 물어보고 싶다! 고 외쳤어. 재판장은 소란을 막기 위해 해당 여성에게 퇴정 명령을 내렸어. 여성은 강제 퇴정을 당하면서도 이렇게 외쳤어. 한열이 왜 죽였냐! 한열이 왜 죽였냐!!! 바로 이한열 열사. 1987년 6월 전두환 정권에 항거하다가 전투경찰이 쏜 최루탄에 피격당해 사망한 학생운동가. 법정에서 강제 퇴정 당한 그분은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였어. 1996년 8월 26일, 최종 선고날. 전두환 측 변호인의 입장은 한결같았어. 죄가 없다는 거야. 쟁점이 되는 몇 가지를 보면, 먼저 12.12 군사반란은 공소시효가 만료됐대. 1979년 12월에 있었던 사건이니 15년 후인 1994년 12월에는 시효가 끝났다는 거야. 5.18에 대해 전두환 측은, 내란을 목적으로 살해 행위를 한 게 아니라,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해. 또 자위권을 지시했을 뿐, 시민들을 향한 발포명령은 없었다고 주장했어. 이런 전두환 측의 주장, 받아들여졌을까? 1심 판결문은 무려 125페이지 분량이었는데, 이런 판결이 나왔어. 피고인 전두환을 사형에, 피고인 노태우를 징역 22년 6개월에 각 처한다. 변호인 측이 12.12 군사반란의 공소시효를 말했는데, 법원은 공소시효가 아직 남았다고 판단했어. 헌법 제84조에 따르면, 대통령은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직 중 형사상의 소추를 받지 않아.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재임한 7년 6개월 동안은 공소시효가 정지된다는 거야. 그럼 아직 공소시효가 5년이나 남은 게 되는 거지. 그리고 5.18 당시 자위권 발동만을 지시했다는 전두환 측 주장에 대해 법원은 이렇게 판단했어. 당시에 시위상황이 계엄군과 시위대 모두 극도로 감정이 악화되어 있고 시위대가 일부 무장을 시작하여 계엄군들에게 자위권 발동을 지시할 경우에는 상호 간에 교전이 벌어질 수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위권 발동 지시를 함으로써 위 피고인들의 위 자위권 발동 지시는 실질적으로 발포명령이었다고 볼 것이어서 위 피고인들의 이 부분 주장 역시 이유 없다. 발포명령을 한 것과 다름없다고 판단한 거야. 황상현 판사는 당시 피고 전두환의 모습을 이렇게 기억해. '사'자가 나오면 사형이고 '무'자가 나오면 무기징역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사' 자라는 단어가 재판장님 입에서 나오는 순간, 전두환 피고인의 표정이 상당히 일그러지는 그런 것을 보면서, 아 이게 대한민국에서 8년 동안 대통령을 한 사람도 사람인 이상 본인을 사형에 처한다는 그런 형량을 재판부에서 선고를 하니, 역시 그 표정이 저렇게 안 좋아지는구나, 하는 그런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황상현, 재판 당시 배석판사 그런데 이어진 2심에서는 감형됐어. 전두환은 무기징역에 추징금 2,205억 원. 노태우는 징역 17년에 추징금 2,628억 원으로. 해당 판결은 대법원에서도 확정됐어. 이렇게 두 대통령의 수감 생활이 시작됐어. 다들 교도소 안에서 나름 특별대우를 받으며 지내지 않겠나, 온갖 억측이 나왔어.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고 해. 두 전직 대통령들은 다른 수용자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고, 똑같은 메뉴의 식사를 했대. 다른 재소자들과의 마찰을 막기 위해, 안전상의 문제로 다른 수용자들과 격리된 독립 사동에서 생활했다고 해. 수용실 구조는 일반 수감자들과 다르지 않았어. TV나 에어컨이 없는, 3.5평짜리 공간이야. 대신 혼자 생활하다 보니 다른 수용자들보단 조금 더 넓게 생활할 수가 있고, 운동이나 목욕도 혼자 할 수 있었다고 해. 그럼, 두 사람의 수감생활 태도는 어땠을까? 의외로 두 사람은 잘 지냈대. 아무래도 군인 출신이라 그런지, 규칙적인 생활이나 공동취사 등 교도소 생활에 잘 적응했다고 해. 전두환 전 대통령은 그렇게 책을 많이 읽었대. 정치, 사상, 고전문학 등 다양한 장르의 서적을 두루 섭렵했대. 그중에 의외의 장르가 있었는데, 바로 동화책.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책을 많이 읽었대. 출소하면 손자들에게 들려주려고 그랬다고 해. 그런데 그 손자가 나중에 커서 할아버지를 어떻게 평가했는지, 어떤 폭로를 했는지 우리가 잘 알고 있지. 교도소 생활에서 가장 힘든 건 뭘까? 현직 교도관이 주저 없이 꼽는 하나는, 바로 '더위'래. 지금도 교도소에는 여름에 사건사고가 많이 터진다고 해. 더우면 예민해지고 짜증 나고, 그게 싸움으로 번지니까. '꼬꼬무'가 어렵게 구한 자료가 있어. 노태우 전 대통령이 옥중에서 직접 자필로 쓴 수감생활 노트야. -1997년 8월 19일. 말복이 지난 지도 3일이나 되었는데 왜 이렇게 더운지. 어제와 오늘은 찜통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몸이 천 근이나 된 것 같이 무겁다. -1997년 8월 20일. 어젯밤은 수면제를 먹고 잤는데도 별 효과가 없었다. 여러 번 깼고 소변도 두 번이나 보았다. 날씨가 무덥고 또 불쾌지수가 높으니 몸의 컨디션이 극히 좋지 않다. 아침에 일어나니 온몸이 우리하게 아프다.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의 권력자였다 해도, 더위 앞에선 어쩔 수 없었나 봐. 그렇게 시간은 흘러 여름이 가고, 겨울이 찾아왔어. 1997년 12월 22일. 이날 전 국민이 깜짝 놀랄 일이 벌어져. ▲ 반성 없는 가해자 교도소 생활이라는 게 여러분들은 교도소 가지 마시오. 그것만 내가 얘기하고 싶습니다. 전두환이 구속 750일 만에 출소했어. 노태우는 구속 767일 만에 출소했어. 전두환은 무기징역, 노태우는 징역 17년이었는데. 두 사람은 불과 2년 만에 출소했어. 거기엔, 정치적인 이유가 있어. 1997년 겨울, 15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어. 그런데 당시 대선에 나섰던 모든 후보들이, 전두환과 노태우의 사면을 공약으로 걸었어. 명분은 '국민 대화합'. 실상은, 보수층의 표를 얻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그로 인해, 두 사람은 모두 교도소에서 나오게 돼. 출소 뒤 전두환의 행적은? 알다시피 아주 잘 지냈어. 대통령 취임식 전직 대통령 만찬에도 꼬박꼬박 참석했어. 그 모습을 영 마땅치 않게 본 한 사람이 있었어. 바로, 김영삼 전 대통령이야. 전두환이는 와 불렀노? 저거 대통령도 아니데이. 죽어도 국립묘지에는 못 간다. 2010년 이명박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들을 초대한 자리. 그때 김영삼이 전두환을 보자마자 이렇게 한마디 했대. 이어진 식사자리에서 전두환이 와인을 찾자, 또 한마디 했대. 니는 청와대에 술 쳐무러 왔나? 이후에도 전두환은 반성의 기미는커녕, 5.18을 '폭동'이라 표현하기도 했어. 광주는 총기를 들어 일어난 하나의 폭동이야. 추징금 미납문제로 법원에 출석해서 희대의 '29만 1천원' 발언도 했지. 검사가 조사를 해서 (돈이) 없으니까 못 가져간 거 아냐. 마당에 숨겨놓은 게 있으면 마당 가서 파보면 되잖아. 2017년엔 2천 페이지에 달하는 회고록을 출간하기도 했어. 그리고 그 회고록에서 5.18 진상규명에 힘쓴 故조비오 신부를 '가면 쓴 사탄이다,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다'라고 비난했지. 조비오 신부의 유족들은 사자명예훼손으로 전두환을 고소했어. 1심에선 전두환에게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형을 선고했어. 그런데 항소심 결심 공판을 6일 앞둔, 2021년 11월 23일. 전두환은 자택 화장실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고, 결국 사망했어. 마지막 심판은 영원히 받지 못하게 된 거야. 근데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어. 전두환 사망 당일, 전남 강진의 한 저수지에서 변사체가 발견됐어. 바로 이 분이야. 이름은 이광영. 광영 씨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피해자였어. 승려 생활을 하던 광영 씨는 1980년 5월 광주에 있었어. 부처님오신날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거든. 광주에서 계엄군의 만행을 목격한 광영 씨는 부상자 이송, 의약품 모으기 등 적극적인 구호 활동에 나섰어. 그러다 계엄군이 쏜 흉탄이 광영 씨의 척추에 박혀. 그렇게 하반신 불구로 살게 됐고, 한평생 5.18 진상규명 활동에 앞장섰어. 하지만 척추에 박힌 파편 때문에 통증이 너무 심해서 매일 진통제 주사를 맞으며 생활해야 했어. 그냥 통증이 하도 심해서 날이면 날마다 그걸 이겨내는 게 가장 힘들어요. 이렇게 고통받고 처절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저 혼자뿐만이 아니겠죠. 그 많은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소외받고 그리고 관심 밖에서 이렇게 살고 있거든요. 그렇게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광영 씨. 천수를 누리다 병으로 사망한 가해자와, 평생을 고통 속에 살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피해자. 5.18의 가해자와 피해자 두 사람이 같은 날 사망한 거야. '과거를 잊어버리는 자는 그것을 또다시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지. 법적 처벌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지만, 우리는 이 사건을 가슴 한 편에 무겁게 새기고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거야.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