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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예진부터 두기봉까지…제28회 BIFAN, 화려한 개막
등록일2024.07.05
[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제28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이하 BIFAN, 집행위원장 신철)가 드디어 축제의 막을 올렸다. 4일 오후 7시 부천아트센터에서 개막, 장도에 올랐다. 개막작 '러브 라이즈 블리딩'의 배우 안나 바리시니코프와 배우 특별전의 주인공 손예진, 배우 박중훈(심사위원장), 두기봉 감독(마스터클래스) 등 국내외 영화인과 관객 1,000여 명이 참석해 영화제 시작을 함께했다. 개막식 사회는 배우 정수정·장동윤이 맡았다. 박중훈·김선아·사부·송운화·제이슨 테일러 등 심사위원과 곽시양·권은비·김도연·김보성·김재중·김정난·문정희·박주현·박지훈·손수현·예지원·이현우·이호원·장미희·장성범·재현·정이서·정하담·조상구·조성하·최귀화·최다니엘·최명길·최재성·한상진·한지일과 두기봉·나카타 히데오·아누팜·야기라 유야 등 국내외 게스트가 참석, 자리를 빛냈다. 개막식 오프닝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의 삽입곡 'Also Sprach Zarathustra'(짜라투스트는 이렇게 말했다) 파이프 오르간 연주, 화려한 조명 쇼, 공식 아이디 필름 상영이 장식했으며, 배우 정수정·장동윤의 사회로 본격적인 축제의 막을 올렸다. 이어 정지영·조용익 조직위원장의 환영사와 개막선언으로 제28회 BIFAN의 출항을 알렸다. 정지영 조직위원장은 올해 BIFAN은 'BIFAN+ '를 통해 도약의 해가 될 것 이라며 올해 BIFAN의 포부를 밝혔다. 조용익 조직위원장은 올해는 특히나 AI를 활용해 콘텐츠의 저변을 넓히는 새로운 시도를 통해 BIFAN만이 지닌 예술적 도전 의식과 아시아 최대 장르 영화제로서의 면모를 보여줄 것 이라며, 앞으로도 BIFAN이 글로벌 관객들과 부천 시민 모두가 함께 누리고 즐길 수 있는 축제가 되도록 함께하겠다 고 밝혔다. 다음으로 AI 특별 영상을 상영했다. 상영 후 무대에 오른 신철 집행위원장은 영화의 환경이 변화하고 있다. 영화제도 진화해야 한다. 27년 판타스틱 영화제의 전통을 이어가며 미래를 향한 혁신을 올해 출발한다 며 국내 최초로 AI 영화 경쟁부문을 도입하고, 런웨이사의 영상 제작 AI 프로그램 GEN-3를 세계 최초로 활용하는 워크숍, 국내외 각 분야 선두의 국제적인 연사들을 모셔 부천 최초로 AI 국제 콘퍼런스를 개최한다 고 밝혔다. 거대자본 없이 할리우드 영화를 이길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부천에서 꽃피우겠다. 미래를 위한 노력과 한층 새로워진 영화, 이벤트들이 여러분을 즐겁게 해드릴 것 이라며 기대를 당부했다. 제3회 BIFAN '시리즈 영화상' 시상에선 '기생수: 더 그레이'의 연상호 감독과 변승민 대표(클라이맥스 스튜디오), 양유민 대표(와우포인트)가 수상의 영예를 차지했다. 클라이맥스 스튜디오 변승민 대표는 어느 영화제보다도 빠르게 변화를 맞이해 영화의 정의를 새롭게 만드는 BIFAN은 다양한 분야의 콘텐츠를 응원하는 영화제 라며 보내주신 응원에 힘입어 앞으로도 좋은 작품 만들겠다 고 각오를 밝혔다. 다음 무대는 심사위원단이 장식했다. 심사 위원장으로 위촉된 배우 박중훈과 단편 경쟁부문 심사위원인 배우 송운화가 무대인사를 가졌다. 개막식의 하이라이트는 배우 손예진과 안나 바리시니코프가 장식했다. 손예진 배우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배우 특별전'으로 관객들과 만나는 자리까지 마련해주셔서 영광스럽다 며 배우로서 '독.보.적.'이라는 수식어는 황홀할 정도로 멋진 말이다. 많은 배우들이 각자 독보적인 매력과 색깔이 있는데, 저만의 독보적인 색깔을 가치 있게 평가해 주셔서 감사하다 고 소감을 밝혔다. 개막작 '러브 라이즈 블리딩'의 배우 안나 바리시니코프는 BIFAN에 오게 되어 크나큰 영광이다. 한국에 처음 방문해 아주 아름다운 하루를 보냈다 라며 이 영화의 대본을 처음 읽었을 때 압도적인 창작물임을 알아봤다. 이상하면서도 로맨틱한 이 이야기가 사랑이 우리에게 하여금 어떠한 극단으로 다가갈 수 있게 만드는지를 보여준다 고 영화에 대한 소개를 전했다. 영화를 연출한 로즈 글래스 감독은 데뷔작 '세인트 모드'로 2019년 BIFAN에서 감독상을 받은 인연이 있다. 개막작 상영은 부천시청 어울마당에서 가졌다. '러브 라이즈 블리딩'은 예매 오픈 19초만에 매진됐다. 제28회 BIFAN 사상 최단시간 매진 기록이다. 개막식을 마친 제28회 BIFAN은 7월 14일까지 11일간의 본격적인 일정에 돌입한다. 49개국 253편의 상영작은 부천시청(잔디광장·어울마당·판타스틱큐브)·한국만화박물관·CGV소풍과 온라인 상영관 웨이브(wavve)에서 만날 수 있다. 다채로운 국내외 게스트가 참석하는 프로그램 이벤트와 GV도 상영과 함께 선보인다. 배우 특별전 '독.보.적. 손예진' 전시(7월 5일~7월 14일)는 현대백화점 중동점 유플렉스 1층에서 갖는다. XR 전시 '비욘드 리얼리티'는 부천아트벙커B39에서 열린다. 시민참여행사 '7월의 카니발'(7월 5일~7월 7일)은 부천시청 소향로 일대에서 시민·관객과 함께한다. ebada@sbs.co.kr
[씨네멘터리] 우묵배미의 사랑은 낙엽을 타고
등록일2024.01.07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달달한 핀란드 로맨스 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를 보러 갔다가 왜 갑자기 34년 전 한국영화 “우묵배미의 사랑”이 떠올랐는지 모르겠습니다. 박중훈·최명길 주연의 “우묵배미의 사랑”은 구질구질하고 궁상맞은 사랑(또는 불륜)을 담은 영화인데 말입니다. “미안해요. 미스 민이랑 첫날 밤이 될지도 모르는데 이런 구질구질한 여인숙에 데려와서” “여인숙이면 어때요. 내 사는데 비하면은 여긴 궁궐인 걸요. 저 창문 좀 봐요. 꼭 크리스마스카드같잖아요” '코리안 뉴 웨이브'의 대표작 중 하나인 장선우 감독의 “우묵배미의 사랑”은 산업화·도시화에 밀려나 서울 외곽에 사는 민중들의 삶을 해학을 섞어 사실적으로 묘사한 리얼리즘 영화의 걸작입니다. 반면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동화(童話)에 가깝습니다. 현실에서 저런 사랑이 과연 있을까 싶을 정도로 동화같은 로맨스. 단, 핀란드의 세계적인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왕자님과 공주님(혹은 신데렐라)의 사랑은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는 노동계급의 사랑을 말 그대로 사랑스럽게 그립니다. 글로 설명하기는 역부족인데(그러니까 영화라는) 최근 일 년 동안 제가 본 영화 가운데 가장 달달한 로맨스 영화입니다. * * * 유통 기한이 지나 버려야 하는 빵 한 봉지를 챙겨나가다 해고된 마트 비정규직 안사와 술 없이는 일할 수 없어 공장에서 몰래 음주했다가 잘린 일용직 홀라파는 가라오케에서 우연히 만나 눈이 맞지만 말도 못 붙인 채 헤어집니다. 생활비가 다 떨어진 안사는 시내 한 펍의 주방보조 자리를 구해서 열심히 그릇을 닦는데, 하필이면 첫 주급을 받는 날 주인이 대마초를 팔다 경찰에 붙들려 가버립니다. 다만 그 소동 때문에 길가던 홀라파와 우연히 다시 마주치게 되죠. 홀라파: 커피 한 잔 할래요? 시간 되시면 근처로 가시죠 안사: 시간은 있는데 돈이 없어요 홀라파: 제가 한 잔 살게요 (...) 홀라파: 그동안 돈 없어서 식사도 못하셨죠? 안사: 네 홀라파: 빵 좀 드세요 (안사가 빵을 주문하러 카운터로 간다) 사민주의 국가인 핀란드 사회 분위기가 원래 이런지 아니면 두 사람이 지나칠 정도로 담백한 사람들인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감출 수 없는 가난'은 안중에도 없는 솔직함과 당당함은 이 로맨스 영화의 백미(白眉)입니다. 커피숍에서 나온 두 사람은 극장에서 영화를 본 뒤 첫 볼 키스를 나누고 재회를 약속합니다. 가난과 재채기, 그리고 사랑 역시 감출 수가 없나 봅니다. 홀라파: 그럼 또 만날까요? 안사: 그러고 싶어요? 홀라파: 무척요 안사: 번호 줄게요 하지만 홀라파는 실수로 번호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백방으로 안사를 찾아다니고, 연락을 애타게 기다리던 안사는 안사대로 크게 낙담합니다. 며칠 뒤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헤어졌던 극장 앞을 서성이다 마침내 조우합니다. 안사: 딴 사람 만난 줄 알았어요 홀라파: 내가 바람둥이 같아요? 내 신발 좀 봐요. 당신을 찾느라 닳았잖아요 홀라파의 이 대사는 “우묵배미의 사랑”에서 재봉사 일도(박중훈)의 대사와 많이 닮았습니다. 딴 살림을 차렸다가 왈패같은 마누라에게 들키는 바람에 헤어진 미싱사 공례(최명길)와 몇 달 만에 다시 만난 일도는 밀회 장소인 비닐하우스 안에서 말합니다. “얼마나 보고 싶었는 줄 알아요, 미스 민? 이 손톱 좀 봐. 미스 민 보고 싶을 때마다 물어 뜯어서 걸레 같잖아요” 두 영화는 음악과 대사가 혼연일체를 이룬다는 공통점도 있습니다. 주요 장면마다 삽입된 노래의 가사가 때로는 주인공들의 심정을 반영하는 대사처럼 쓰입니다. 안사와 홀라파가 가라오케에서 처음 만나 눈이 맞는 대목에서는 “내 노래는 밤새도록 당신에게 간청해요”로 시작하는 슈베르트의 세레나데가 흐르고, 공례가 일도와 함께 하기로 마음을 정리한 뒤 찾은 카페에서는 “그토록 다짐을 하건만 사랑은 알 수 없어요. 사랑으로 눈 먼 가슴은 진실 하나에 울지요”라는 최진희의 히트곡 '사랑의 미로'가 공례의 마음을 대변하며 흐릅니다. 안사가 창가에 우두커니 앉아 홀라파의 연락을 애타게 기다릴 때, 라디오에서는 “날 사랑할 용기가 없나요? 왜 아무런 대답이 없나요?”라는 가사의 노래가 나오고, 공장 노동자로 취직한 안사와 공사판 노동자로 일하게 된 홀라파가 서로를 그리워하는 장면에서는 '아침 비에'라는 곡이 흐릅니다. 이른 아침 빗속에서 / 동전 몇 푼을 쥐고 걷네 가슴은 찢어질 듯한데 / 주머니엔 모래만 한가득 여기가 어딘지도 모른 채 /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하네 “우묵배미의 사랑”에서는 일도가 재봉 공장에 취직해 공례와 처음으로 말을 섞을 때 주현미의 1989년도 히트곡 '짝사랑'이 카세트에서 흘러 나옵니다. 사랑스런 눈빛이 / 무엇을 말하는지 난 아직 몰라 / 난 정말 몰라 가슴만 두근두근 / 아 사랑인가 봐 두 영화의 톤과 다소 이질적인 로큰롤이 영화에 한 번씩 등장하는 것도 어쩜 그리 똑같은지요.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서는 핀란드 록그룹 허리게인스의 '겟온(Get On)'이란 곡이 나오고, “우묵배미의 사랑”에서는 일도가 가져온 카세트테잎을 틀자 엘비스 프레슬리의 '버닝 러브(Burning Love)'이 울려퍼집니다. 둘 다 신나는 리듬의 70년대 로큰롤입니다. * * * 물론 두 영화에 이렇게 낭만적인 장면만 있는 건 아닙니다. 핀란드의 21세기 동화와 한국의 20세기 말 리얼리즘 영화의 골계미(滑稽美) 사이 사이에는 당대 민중의 삶과 노동 현실이 넌지시 드리워져 있습니다. 홀라파는 업주가 제때 교체해주지 않아 잘 작동이 안되는 낡은 장비로 일하다 다치고, 안사는 아무 때나 통보없이 해고되거나 계약서조차 쓰지 않는 비정규직입니다. 공례는 심각한 가정 폭력에 시달리고, 일도는 일자리가 없어 서울에서 밀려난 하층민의 삶을 보여줍니다. 일도와 공례가 일하는 변두리 의류 공장 노동자들의 애환 또한 “우묵배미의 사랑”이 비추는 당대의 현실입니다. 이제야 알 듯 합니다. 왜 “사랑은 낙엽을 타고”를 보며 이 영화와는 아무 상관 없어보이는 80년대의 한국 영화가 제 머리 속에서 번쩍하며 연결되었는지. 달달하든 궁상맞든, 동화같든 실화같든, “사랑은 낙엽을 타고”와 “우묵배미의 사랑” 모두 서민들의 삶과 노동자의 사랑을 노래한 영화였습니다. 최근 우리는 한국 상업 영화에서 대체로 매끈하고 균질한 사랑과만 마주칩니다. 과거에 비해 이런 경향이 짙어졌습니다. 로맨스 영화에는 상류층의 사랑, 전문직의 사랑만 넘쳐 납니다. 기껏해야 상류층과 사랑에 빠진 신데렐라 스토리죠. 영화는 대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보기 때문일 겁니다. “사낙타”와 “우묵배미” 두 영화에 신데렐라는 없습니다. 가난과 사랑은 일반적인 인식 속에서 어울리는 단어는 아닙니다. 하지만 어울려서 안되는 단어의 조합은 아닙니다. 미국의 짐 자무쉬 감독은 “사랑은 낙엽을 타고” 에 대해 영화 속 웃긴 장면은 나를 슬프게 하고, 반대로 슬픈 장면은 나를 웃게 한다 고 말했습니다. 정확히 “우묵배미의 사랑”에도 들어맞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묵배미의 사랑”에는 당대의 스타 박중훈의 코믹 연기가 만만찮게 나오는데 그 순간들이 왜 그렇게 애처롭게 느껴질 때가 많던지요. 이 영화는 한국영상자료원 유튜브 채널인 '한국고전영화'에 무려 1,658만회의 조회수로 이 채널에 있는 330편의 역대 명작 한국 영화 중 4위에 랭크돼 있습니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나름 해피엔딩입니다. '음악 영화'답게, 두 사람이 함께 낙엽이 뒹구는 공원을 걸어가는 뒷모습을 길게 잡은 롱샷 엔딩씬에는 이브 몽탕이 불렀던 낭만적인 샹송 '고엽(枯葉)'의 핀란드어 버전이 흐릅니다.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 엔딩씬을 오마주한 그 장면에는 안사가 입양한 유기견도 함께 합니다. 유기견의 이름이 '채플린'입니다. “우묵배미의 사랑”은 '뜨내기 우리의 남루한 젊음'으로 시작되는 이경미의 노래 '우묵배미의 사랑'이 흐르는 가운데 공례와 헤어져 논두렁을 걷는 일도의 쓸쓸한 뒷모습으로 끝납니다. 클로즈 업으로 시작한 이 엔딩씬은 논두렁 저 너머로 기차가 지나가고 일도가 거의 점이 될 때까지 멀어지는 2분 가까운 원신 원컷의 롱샷으로 이어집니다. 영화 천재 채플린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in close-up)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in long shot) 희극이다” 영화는 때로는 꿈이 아니라 현실을 보여주기 때문에 볼만합니다. 아래로 스크롤하면 씨네멘터리 칼럼을 구독할 수 있습니다. 90여 편의 영화 이야기들이 독자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취재파일] 30세 청년 안중근의 하얼빈
등록일2022.08.13
'칼의 노래'와 '남한산성'의 소설가 김훈이 '하얼빈'을 출간했습니다. 이번에는 안중근 의사의 내면을 치밀하게 들여다봤습니다. 안중근의 일생 전체보다는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결심하고 결행하는 과정, 그리고 처형당하기까지의 기간을 특유의 짧은 문장들도 복원해냈습니다. 문학적인 성취나 평가는 전문가들의 분석과 일반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대신, 소설 출간을 맞아 김훈 작가가 직접 기자간담회에서 밝힌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소설의 기본 구조와 역사적 함의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소설은 세 가지 갈등 구조가 핵심 축이라고 김훈 작가는 밝힙니다. 우선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의 갈등 구조입니다. 그런데 단순한 선악 구도는 아닙니다.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 '죽어 마땅한 극악무도한 민족의 원수'라는 설정에서 벗어나 자신의 신념에 따라 움직인 역사 속 인물로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은 이미 뮤지컬 '영웅'에서도 볼 수 있었습니다. '영웅'의 뮤지컬 넘버인 '운명'이라는 곡에는 서로가 각자 조국을 위해 뛰었다 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안중근은 '조국의 평화'를 위해, 이토는 '일본의 번영'을 위해 각자 최선을 다하는 과정에서 운명적으로 만난 것이라는 해석이었죠.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두 번째 갈등 구조인데, 김훈 작가는 문명개화와 약육강식 사이의 시대적인 갈등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안중근과 이토 모두 '동양평화'를 목표로 삼았지만, 이토에게 동양평화는 각국이 일본의 지배하에서 문명개화를 이루는 것이었고, 안중근에게 동양평화는 독립된 각국의 진정한 평화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안중근을 둘러싼 종교적 갈등 구조입니다. 세례명 토마스로 천주교 신자였던 안중근의 내적 갈등도 있지만, 그 시대 한국에 와 있던 천주교 신부들의 현실과 이상도 갈등을 빚고 있습니다. 선교를 위해 서양에서 온 당시 신부들의 경우 반쯤은 천국에 속해 있고, 또 나머지 반쯤은 제국주의적 현실에 속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뮈텔 주교와 안중근에게 세례를 줬던 빌렘 신부가 그런 대립적인 측면을 드러내는데, 빌렘 신부는 '살인을 저지른' 안중근을 찾아가 고해성사를 베풀었고, 한국에 간신히 자리 잡은 천주교를 보호하기 위해 뮈텔 주교는 이에 반대했습니다. 소설 '하얼빈'의 현재적인 의미에 대해 안중근을 그 시대에 가둬두고 싶지 않았다 는 구절이 보도자료에 있는데 앞뒤에 별다른 설명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 기자가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고 질문하자 작가는 그다음 문장을 쓰기가 쉽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지금의 동북아 정세가 안중근의 시대보다 오히려 더 엄혹한 환경'이라는 말에서 그런 고민의 일단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일본 제국주의만이 문제였다면, 지금은 남북으로 갈린 채 미국·일본·중국·러시아 등 주변 4국의 상호 견제와 중국의 급격한 부상으로 훨씬 복잡해진 관계 속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안중근의 동양평화 사상을 지금 어떻게 부활시키느냐에 대해서는 정답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이번 소설이 '반일 민족주의'로 읽히는 것에 대해서도 경계의 목소리를 분명히 했습니다. 국권이 짓밟힌 안중근 시대에는 민족주의가 국민을 하나로 모으는 정신적 동력이 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민족주의가 국민을 하나로 통합하는 이데올로기로서 매우 허약 해졌다고 말합니다. 요즘처럼 모든 이념과 갈등이 대립하는 사회에서 민족주의가 사회를 통합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낭만적이고 시대착오적 이라는 것입니다. 안중근의 삶을 소설화하는 것이 '일생의 과업'이었다는 표현도 보도자료에 있었는데, 이 부분에 대한 설명도 있었습니다. 일생 또는 필생의 과업이라고 할 수 있으려면, 그 주제에 대해 평생을 붙들고 있었어야 했는데 자신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젊어서 접했던 안중근 이야기가 엄청난 충격이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합니다. 대학시절 자신을 사로잡은 책으로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일본인들이 작성한 '안중근 심문 조서'를 꼽았습니다. 그 두 작품이 자신의 생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다만, 끊임없이 생각을 해왔던 것은 아니고 중간에 잊고 지내던 시기가 분명히 있었기 때문에 '필생의 과업'이라고 하기는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김훈 작가는, 자신의 작품은 '역사소설'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칼의 노래'의 이순신이나, '남한산성'의 최명길과 김상헌, 그리고 '하얼빈'의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 모두 자신이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익숙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했지만, 그 역사적 환경에 대응하는 인간의 정신적 내면과 살아있는 삶을 그리려고 했다는 취지입니다. 이번 소설 '하얼빈'에서도 안중근의 삶 전체가 아니라 이토 히로부미 저격 시점의 30살 청년 안중근을 그리고 싶었다고 합니다. 뜻을 함께 했던 우덕순과의 대화를 간결하게 그려내며 청춘은 정말로 찬란하구나. 청춘이라는 것이, 더 나이 먹어서 완성된 세월을 기다리는 그 기다림의 세월이 아니라 그 순간에 이미 완성돼서 폭발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는 말로 청년 안중근에 대한 헌사를 정리했습니다. 김훈 작가의 설명을 듣다 보면, 소설의 서사 못지않게 역사 인식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인물들 모두 역사 속 각자 자기의 자리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려고 했던 사람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진=문학동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