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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찐리뷰] 맨몸으로 일본까지 헤엄쳐 간 조오련…그가 전설이 된 이유
등록일2024.06.14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13일 방송된 '그가 전설이 된 이유,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배우 정희태, 수영선수 출신 박태환, 배우 유이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수영에 미친, 낯선 녀석의 등장 때는 1968년 11월, 서울 종로야. 한 건물 안 사무실이 시끌시끌해. 까까머리 앳된 소년과 중년 남자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어. 소년은 사정사정하며 매달리고,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는 손사래를 쳐. 여기서 큰 목소리가 들리는 이유는, 이 작은 종이 한 장 때문이야. 수영장 회원권이야. 원래 11월 7일에 만료가 된 회원권인데, 소년이 7 앞에 2를 붙여서 27일로 바꿨다가 직원 아저씨한테 딱 걸린 거야. 제가 진짜 성공해서 꼭 갚을게요. 수영만 하게 해 주세요. 소년이 통 사정을 한 끝에, 한 번만 봐주기로 했어. 대신 소년은 벌로 수영장 청소를 하기로 했어. 이때가 1968년이야. 수영, 어떤 스포츠였을까? 수영 선수도 있고, 경기도 있을 때지만, 스포츠로 생각하진 않았어. 수영이란 건 단지, 생존 수영이나 물놀이 정도로 여겨졌지. 굳이 따지자면 특별한 사람들이나 하는 '고급 운동'이야. 이때 우리나라에 수영장이 단 세 개만 있었거든. 하나는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진 동대문운동장 수영장, 하나는 워커힐 호텔 수영장. 그리고 마지막 하나가 바로 여기, 종로에 있는 YMCA 건물 안에 실내 수영장이 있어. 연습용 실내 수영장은 딱 하나, 바로 이 YMCA 수영장뿐이었어. 좋은 기록을 내려면 연습을 많이 해야 하잖아. 근데 실내 수영장이 없으면 연습을 못 해. 겨울에 야외에서 수영할 수가 없으니까. 수영할 환경 자체가 척박한 거야. 아무나 수영을 할 수도 없어. 근데 형편도 넉넉지 않아 보이는 소년은, 왜 회원권을 위조하면서까지 수영을 하려는 걸까? 당시 학교 수영부 쌍두마차는 오산고와 양정고. 유명한 수영 명문고야. 전국체전에 나갔다 하면, 우승을 휩쓰는 게 두 학교야. 두 학교 선수들은, 학교 끝나면 다들 YMCA 수영장에 모여서 같은 꿈을 꾸면서 실력을 겨눴어. 근데 그 사이로, 웬 낯선 녀석이 나타났어. 회원권을 위조해서 수영장 청소를 하게 된 소년.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녀석이 와서 첨벙첨벙 물살을 신나게 가르는 거야. 소위 '개헤엄'이라고 하잖아? 영, 폼도 어설프고 본 적 없는 영법이야. 근데 이상하게 빨라. 까까머리 소년은 금세 수영장 유명인사가 됐어. 소년의 얼굴을 보여줄게. 혹시 누군지 알아보겠어?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이야. ▲ 해남 소년의 잠재력을 알아본 귀인 오련이는 저 멀리 땅끝마을 해남에서 왔어. 수영하겠다고 다니던 학교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왔단 거야. 시골에서 왔다고 툭툭 건드는 친구들도 있었고, 연습을 방해하는 것도 다반사야. 그런데 오련이는 기죽는 법이 없어. 수영장에 마지막까지 남아 끝까지 연습했대. 그런 오련이를 유심히 지켜보는 사람이 있어. 바로, 오산고 1학년 석기. 석기도 오련이처럼 항상 그 수영장에 마지막까지 남았거든. 석기는 수영에 대한 열정도 있었고, 집이 수영장이랑 가까워서 늦게까지 연습했어. 그런데 오련이는 집도 절도 없는 신세야. 그래서 수영장 근처 간판 가게에서 일하며 임시방편으로 숙식을 해결했어. 친구인 석기가 보기에, 오련이는 어떻게 보였을까? 오련아, 합숙소라 생각하고 그냥 내 방에서 지내. 엄마한텐 내가 말씀드릴게. 석기와 오련이는 그렇게 친구가 됐어. 참 따뜻하지? 둘은 신나게 수영장을 돌고, 집에 올 땐 라면을 사 들고 왔어. 둘이 얼마나 먹었을 것 같아? 무려 열 봉지. 운동하느라 얼마나 허기져. 그렇게 허겁지겁 먹고 기절하듯 바로 잠이 들어. 그리고 새벽 5시면, 종로에서 남산까지 매일 같이 뛰는 거야.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뭐라도 해보자는 마음으로 달렸어. 열일곱, 인생을 건 도전은 그렇게 시작됐어. 오련이의 고향은 전라남도 해남. 어린 시절엔 산과 물이 친구였어. 집 앞 저수지에서 신나게 수영하고 산에 올라서 젖은 몸을 말렸어. 그런데 오련이가 고등학교에 가면서 머릿속엔 미래에 대한 걱정이 가득했다. '돈 있는 애들은 다 서울 가서 공부한다는데, 이래서 대학은 가려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 한참 고민 많을 때잖아. 그때마다 생각나는 장면이 하나 있었어. 몇 년 전에 아빠 따라 제주도에 갔다가 우연히 한 수영대회를 봤는데, 1등 하는 학생을 보면서 '뭐야, 저 정도는 나도 하겠는데?' 하는 생각이 든 거야. 그래서 오련이는 결심했어. 내복 하나, 책 두 권 들고, 무작정 상경한 거야. 그리고 들고 온 용돈을 탈탈 털어서, 수영인들의 메카라는 YMCA 수영장에 무작정 등록을 했어. '내가 성공할 길은 수영뿐이다! 성공하기 전엔 안 내려가겠다' 다짐하면서. 오련이의 하루는 엄청 바빠. 아침운동을 하고 나면, 생활비를 벌기 위해 오후엔 간판 집에서 일하고. 오후엔 수영장 청소를 해야 해. 나머지 시간은 온통 수영이야. 이런 일과를 반복했어. 그러던 어느 날, 급히 우동 한 그릇 먹고, 또 수영장으로 뛰어들려고 하는데, 한 남자가 오련이를 붙잡아 세웠어. 학생이 학교도 안 가고 수영만 하는 거야? 그 수영은 대체 어디서 배운 거야? 수영장 회원 중에 장형숙 씨라고, '장 선생님'으로 불리는 분이 있었어. 소싯적에 수영부에서 활동을 좀 하신 분이었거든. 근데 장 선생님이 보니까 학생이 열심히는 하는데 뭔가 어설픈 거야. 장 선생님은 답답한 마음에 오련이한테 발차기하는 법을 좀 알려주고, 물 밖으로 나왔어. 씻고 사우나도 하고 한참 뒤에 탈의실을 나오는데, 저기 수영장 한쪽에서 쉴 새 없이 물보라가 일어. 오련이가 미친 듯이 발차기만 내내 하는 거야. '이놈 봐라?' 장 선생님은 곧장 오련이를 데리고 나가서 국밥 한 그릇을 먹였어. 그리고 '학생, 앞으로 수영비는 내가 내줄 테니 한 번 열심히 해봐'라고 말했어. 장 선생님이 오련이의 후원자가 되기로 한 거야. 왼쪽이 장 선생님이야. 장 선생님은 오련이의 개인 코치가 됐고, 친구들까지 불러다 일명 '조오련 후원회'를 만들었어. 이제 오련이가 할 수 있는 건 연습, 오직 연습뿐이야. 연습을 얼마나 열심히 했을 것 같아? 정말 미친 듯이 연습을 했대. 오련이 형은 기분에 따라 수영을 하지 않아요. 스케줄을 만약에, 이번 주에 10만 km을 잡아놨다 그러면 10만을 오전, 오후 해서 10만을 정확히 채워요. 새벽에 아침에 5시에 물에 들어가서 8시까지 3시간 운동을 해요. 그럼 밥 먹고 좀 쉬었다가 10시부터 또 2시간 더 하잖아요. 그다음 또 쉬었다가 4시부터 6시, 7시까지 또 하잖아요. 연습량이 너무 많고. 그 사람들이 1년간 했던 걸 자기는 한 달 만에 해본다든가. 이런 정도의 악이, 근성이 있었죠. -이관웅, 조오련의 수영 후배 ▲ 슈퍼스타의 탄생 오련이는 성공하겠다는 의지가 엄청났어. 그런데 이때 우리나라 수영 수준이라는 게, 수영에 기술이 필요하단 생각도 못 하던 때야. 그래서 장 선생님은 오련이에게 턴 기술을 집중적으로 가르쳤어. 자유형 때 턴하는 거 본 적 있지? 앞구르기 하듯 발로 벽을 힘껏 밀면서 나오잖아. 그 추진력으로 속도를 내는 거야. 일명, '퀵 턴', '플립 턴'이라고 해. 수영선수한테는 기본적인 기술이지. 근데 당시에는 플립 턴이 아니라, 헤엄치던 손으로 벽을 치고 도는 게 당연했어. 그러던 어느 날 '꼭 손으로 벽을 터치해야 하나?' 누군가 이런 생각을 한 거지. 당시 우리나라에 플립 턴은 아주 선구적인 기술이었어. 오련이는 이 기술을 집중적으로 연습했어. 그저 반복, 열심히 하는 것만이 답이야. 그리고 마침내, 기회가 찾아와. 1969년 6월, 전국체전. 학교 소속이 없던 오련이는 성인들이 뛰는 '일반부' 소속으로 경기에 출전했어. 결과는 어땠을까? 조오련 군이 남대부 자유형 1500 미터에 출전, 21분 18초로 대회 신기록을 수립해 주목을 끌었다. -당시 신문 기사 中 오련이는 쟁쟁한 일반부 선수들을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어. 사람들은 깜짝 놀랐어. 이때, 엄청난 일이 일어나. 대한체육회 회장님이 그 경기를 직관한 거야. 저 친구, 태릉 선수촌에 당장 입촌시켜! 이때가 마침, 태릉선수촌에 수영장이 막 만들어지던 때야. 타이밍 기가 막히지? 오련이에겐 그야말로 기적이 일어난 거야. 그 뒤론 일사천리였어. 해남에서 못다 마친 학교까지 다니게 됐어. 수영 명문, 양정고에 입학허가가 난 거야. 태릉선수촌에 입촌한 오련이는, 이제 돈 걱정 없이 온종일 수영을 할 수 있다는 게 가장 좋았대. 오련이는 연습에 더 박차를 가했어. 선수촌에서도 독한 놈으로 통해.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대. 저희들이 이제 50미터 잠수를 하고 다시 돌아서 75미터 이쯤에 물 위로 나온단 말이에요. 우리 같은 같이 하는 사람들은 75미터에서도 물 위로 나오고, 80미터에서도 나오잖아요. 오련이 형은 그거를 안 지려고, 오다가 기절해서 물속에 빠져버린 적도 있어요. 우리가 가서 끄집어내서 나오죠. 그러면 '또 하자, 또 하자' 그래요. 그 사람이 기본적으로 독한 거, 독한 면이 많아요. -이관웅, 조오련의 수영 후배 오련이는 승부욕이 어마어마해. 그렇게 태릉 선수촌에서 실력을 갈고닦았어. 그 뒤로 연달아 전국 대회에 나갔는데, 나가는 대회마다 우승을 휩쓸어. 그것도 매번 기록 경신. 한 해에만 11번의 한국 신기록을 깼어. 그야말로 혜성처럼, 한국에 수영 천재가 등장한 거야. 그리고 오련이는 마침내, 왼쪽 가슴에 태극 마크를 달게 됐어. 국가대표 발탁이야. 수영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채 1년도 안 됐을 무렵이야. 1970년, 제6회 아시안게임. 태국 방콕에서 열리는 경기야. 대한민국을 대표해서 레인 앞에 선 사람, 조오련. 불과 1년 전에 해남 저수지를 헤엄치던 소년이 국제무대에 서게 된 거야. 당시 아시아의 수영 강자는 일본. 지난 아시안게임에서 경영 남녀 종목은 총 26개였는데, 금메달 26개를 일본이 싹쓸이했어. 사실상 오련이에겐 한일전을 앞둔 거야. 첫 경기를 앞둔 오련이는 코치에게 이렇게 말했대. 어떻게 되든 일본 선수들과 한번 겨뤄 보겠습니다. 지쳐 자빠지면, 물에서 건져나 주십시오. 첫 경기는 자유형 400미터. 출발선에 일곱 명의 선수가 도열하고, 탕! 운명의 레이스가 시작돼. 오련이는 있는 힘을 다해 팔을 휘저었어. 치열한 접전에 장내는 고요해졌어. 일본의 독주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거지. 어느덧, 마지막 50미터. 선수들의 막판 스퍼트가 이어져. 오련이도 필사적으로 피치를 높였어. 그리고 마침내, 터치패드에 손을 찍었어. 눈꺼풀의 물방울을 털고 전광판을 보는데, 전광판 가장 위에 랭크된 건 'KOR'. 대한민국이었어. 만세!!! 조오련! 금메달!! 대한민국 경영 첫 금메달이 탄생하는 순간이야. 일본 선수를 무려 1초 앞지르고 승리했어. 당시 아시아 신기록이었어. 오련이의 기록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어. 이번 대회 영웅 조오련 선수는 수영 400미터 경기에서 아시아 신기록을 세운 뒤, 다시 남자 자유형 1500미터에서 17분 25초 7로 아시아 신기록을 세우고 우승, 우리나라 최초의 수영 2관왕이 됐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조오련은 무려 아시안게임 2관왕을 기록했어. 수영으로는 최초야. 일본을 꺾고,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선 거야. 어떻게 우리가 수영을 일본을 이길 수가 있지? 너무나 감격적이었고, 우리가 일본을 이겼다고 난리가 났었죠. -이관웅, 조오련 수영 후배 한국에 돌아온 오련이에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자마자 헹가래에, 여의도에서 시청을 가로질러 카퍼레이드까지 쫙 펼쳐졌어. 스포츠계를 뒤흔든 수영 스타의 등장이었어. 해남 소년은 '국민 영웅', '국민 남동생'이 됐어. 이때 생긴 별명이 바로 '아시아의 물개'야. 조오련의 등장으로 우리나라엔 수영 열풍이 불기 시작해. 전국에 수영장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하고, 수영을 배우겠단 강습생도 엄청 늘었어. '수영으로 성공할 수 있다' 이런 꿈을 꾸게 된 거야. 그중엔 우리가 잘 아는 분도 있어. 학교를 가는데 라디오에 온종일 그게 나오는 거예요. 조오련 선배에 대해서 뉴스에. '나도 수영을 해야 되겠다' 이미 금메달을 따고 나서의 그 일화는, 해남 섬마을 소년이 어떻게 고생했고 그런 게 쭉 나오는 거였어요. 그건 저뿐만이 아니라, 그거를 듣고 종로 YMCA에 와서 끊어서 하는 꿈을 안고 오는 친구들이 참 많았어요. 수영을 하려고. -노민상, 전 수영 국가대표 감독 전 수영 국가대표 감독인 노민상 감독도 조오련을 보면서 꿈을 키웠대. 손짓하나 눈빛 하나하나까지 다 닮으려고 했대. 우상이 하는 건 다 영웅같이 보이는 거예요. 아무리 그게 나쁘고 좋고 하더래도, 다 멋있게 보이는 거예요. 하물며 벙거지 모자 자체도 멋있게 보였으니까. -노민상, 전 수영 국가대표 감독 근데 진짜 닮고 싶은 건 정신력이었어. 조오련이 직접 쓴 수기가 있어. 선수촌에서 다른 선수들은 크로스컨트리를 맨몸으로 하나, 나는 8킬로의 모래주머니를 메고 뛰며, 선수촌에서 합숙 중 잠이 안 올 때면 운동장을 뛰곤 했다. 건방진 말인지 몰라도 적어도 남을 이기려면 남모르는 고통을 통한 무단의 노력이 필요하다. 나는 방콕에 와서도 복싱 선수들이 6시부터 시작하는 로드 워킹을 기다려 함께 뛰었다. '이 시간에는 일본 선수들이 잠자고 있겠지' 생각하면서. 그러나 나는 뛴다는 자부심을 가졌다. -조오련의 수기 中 그로부터 4년 후, 1974년 테헤란에서 열린 제7회 아시안게임. 오련이는 이번에도 출전했어. 이전 대회와 달리, 어느 정도 오련이의 전력이 다른 나라에 노출된 상태잖아. 당연히 견제가 들어오겠지. 하지만 조오련은, 이번에도 금메달을 땄어. 한국의 조오련 선수는 아시아대회 신기록으로 우승, 6회 대회에 이어 2연패 했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그런데 경기를 끝낸 오련이가 가방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 흰 모시옷과 고무신, 그리고 태극 머리띠야. 시상대에 오를 때, 보통 트레이닝복을 입잖아? 그런데 오련이는 한복을 입고 고무신을 신고 머리에 태극띠를 두르고 나타났어. 스물셋, 애국청년 오련이의 모습은 국민들에게 큰 위로와 감동을 줬어. 특히 오련이는 1500미터에 사활을 걸었대. 1500미터는 레이스가 길잖아? 자기가 선두에서 앞서가면, 그만큼 오래 대한민국을 뽐낼 수 있으니까. 하지만, 거기까지였어. 4년 후, 3연패를 꿈꾸며 아시안게임에 다시 출전했지만, 성적은 접영 200미터 동메달. 물론 새로운 종목에서 따낸 값진 메달이었지만, 찬란했던 시절은 지나고 있었어. 당시 나이 스물일곱. 지금이야 관리를 잘하면 선수들이 더 나이가 들어서도 선수 생활을 하지만, 그때만 해도 20대 후반이면 선수로서 전성기가 지났다고 했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가 이제 사라지고 있던 거야. 조오련은 이 아시안게임을 끝으로, 사실상 선수 생활 은퇴를 하게 돼. 근데 오련이의 이야기는 여기가 끝이 아니야. 진짜는 지금부터야. ▲ 수영장 밖, 원대한 계획 다시 땅끝마을, 해남이야. 고향 후배인 관웅 씨가 전화를 받았어. 목포 선착장에서 보자는 오련이 형의 연락이야. 호출을 받고 나갔더니, 오련이 형이 대뜸 배 한 척을 띄우고 그 배를 따라서 저 멀리 섬까지, 바다 수영을 하자는 거야. 전국 체전 끝나면 시간이 많잖아요. 그럼 목포에서 배를 갖고 가요. 배는 천천히 가고, 우리는 뒤에 따라 수영하고. '저 섬까지 가자' 하면 저 섬까지 가고요. 또 내려서 좀 쉬었다가 밥 먹고 또 '저 섬까지 가자'… -이관웅, 조오련 수영 후배 수영장도 아니고 종일 바다를 수영으로 돌면, 힘이 남아나겠어? 근데 오련이 형은 지치는 법이 없어. 현역인 관웅 씨가 못 따라갈 정도야. 저희들은 하루 바다 수영하면 입안이 팅팅 불어 터져 갖고, 입술이 여기까지 오거든요. 근데 그 형님은 다음 날 아침에 또 나가자고 해요. 밥만 먹고 나가자 그 얘기야. 그래서 '이상한 사람이네' 우리는 놀러 가는 걸로 생각을 하는데. 막 기를 쓰고 훈련하는 거예요. -이관웅, 조오련 수영 후배 한동안 그렇게 바다를 헤엄치던 어느 날. 조오련은 누군가를 찾아가. 바로 수영 선배, 지봉규 씨야. 지봉규 씨는 지금도 그날을 잊지 못한대. 하루는 오더니, '나 저기 대한해협을 건너가려는데 어떻겠어요?' 그래. '뭐 안 될 게 뭐 있어 하면 되지'. 다른 사람들한테 다 물어봤더니 안된다고 그러더래요. '네가 아시아의 1등인데, 아 그럼 못할 게 뭐 있냐. 하면 되지'… -지봉규, 조오련 수영 선배 대한해협을 건너겠다는 계획이야. 그러니까, 일본까지 헤엄 쳐서 가겠다는 거야. 장난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야. 대한해협은, 대한민국과 일본 규슈지방 사이의 바다를 말해. 일본까지의 최단 거리는, 부산 태종대에서 대마도 북단 사오자키 등대까지 약 48km야. 근데, 바다를 헤엄쳐 건너는 건 직선거리와는 달라. 해류를 생각하면 60km 정도로 봐야 해. 60km면 마라톤 풀코스를 한참 넘는 거리야. 시속 3km 정도로 간대도, 20시간을 헤엄쳐야 해. 이게 가능한 일일까? 만약 성공한다면, 대한해협을 건넌 최초의 인류가 되는 거야. 조오련이 도전장을 던진 것도, 그 이유야. 많은 사람들이 만류했지만, 선배 지봉규 씨는 확신했어. 이 사람은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이니까. 지봉규 씨는 대한해협 횡단 감독을 맡기로 해. 실내 수영과 바다 수영은 천지 차이야. 낮은 수온과 조류의 영향을 다 버텨내야 해. 물길을 안내해 줄 선장, 훈련을 함께할 코치와 감독, 도전을 기록할 기자단까지 한 팀이 꾸려졌어. 디데이는 그나마 수온이 오르는 7월에서 8월 사이로 정했어. 남은 시간은 8개월 정도.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엄청난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거야. ▲ 인간 한계에 도전하다 장거리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건 지구력이야. 횡단 팀의 첫 코스는 도보 행군이었어. 서울에서 조오련의 고향, 땅끝 해남까지 걸었어. 이어지는 건, 잠 안 자고 버티기 훈련. 제주도를 무려 22시간 동안 쉬지 않고 돌았어. 이동한 거리만 91km야. 그 사이, 지 감독은 바다 상황을 계속 확인했어. 지역 어부들을 만나 자문을 구하는데, 흔한 일은 아니지만 상어가 나타날 가능성도 있대. 상어가 아니더라도, 여러 해상동물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거야. 며칠 동안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지 감독님은 고기 잡을 때 쓰는 족대를 활용하기로 했어. 커다란 그물 안전망을 제작하는 거야. 배에 그물을 연결해서 끌고 그 안에서 안전하게 헤엄치게 하는 거야. 조오련은 이제, 바다 적응 훈련에 집중해. 장거리 연습부터 캄캄한 밤 수영까지, 실전에 가까운 연습을 이어갔어. 그사이 몸에 큰 변화도 생겼어. 70킬로였던 몸무게가 85킬로까지 분 거야. 대한해협의 수온은 낮아도 한참 낮아. 그런 바다에서 장시간 수영하면, 저체온증으로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대. 그래서 지방을 늘리기로 한 거야. 한 달에 먹는 고기만 무려 100근이었대. 1980년 8월 11일 자정. 8개월을 준비한 도전, 바로 그날이야. 기상상황을 고려해 한밤중에 출발하는 거야. 바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누구도 알 수 없어. 칠흑같이 어두운 방파제 앞. 하얀 모자와 수영복을 입은 조오련이 나타나자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져. 8월 11일 00시 5분. 사람들의 응원을 뒤로한 채 풍덩! 조오련은 힘차게 물을 가르며 다대포항을 떠났어. 출발은 아주 좋아. 커다란 안전망이 조오련을 감싸고, 조오련은 빠른 속도로 앞으로 나아가. 시속 4km 정도의 속도로 한 시간을 가더니, 그다음 한 시간은 무려 시속 7km를 넘어섰어. 그런데 그때, 조오련이 신호를 보내. 금세 에너지가 떨어져 배가 고프다는 거야. 바다 수영하면서 식사, 어떻게 할 것 같아? 조오련은 바다에 뜬 채 따끈한 깨죽으로 첫 해상 식사를 했어. 그리곤 속이 거북할지 몰라 소화제를 탄 더운 물을 들이켰어. 따뜻한 죽을 먹이려고 배 안에선 종일 죽을 쑤고 있었대.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갑자기 문제가 생겼어. 갑자기 조오련이 괴로워하는 거야. 한두 시간 갔거든. 그랬더니 딱 멈춰달라고 그래요. '왜 그러냐' 그랬더니, '몸이 따가워서 아주 못하겠다'는 거야. 물에 들어가서 보니까, 그냥 해파리가 안전망에 꽉 붙었어요. -지봉규, 대한해협횡단 감독 지 감독이 급히 바다로 뛰어들었어. 근데 해파리가 많아도 너무 많아. 지 감독은 안전망 밖으로 오련이를 나가게 하고, 안전망을 반대로 돌렸어. 물살을 이용해 해파리를 떼내려고 한 거야. 다행히 해파리떼가 사라졌어. 그 뒤론 평온한 시간이 이어졌어. 컴컴한 망망대해의 물살을 가르는 사람 하나. 어둠 속의 바다, 헤엄쳐 본 적 있어? 조오련은 무섭기보단 환상적이었대. 수면 위로는 저 멀리 오징어잡이 배 불빛이 비추고, 바닷속은 형형의 빛이 가득 해. 플랑크톤이 빛을 받으면서 빛나는 거야. 조오련은 힘든 와중에도, 조명을 꺼달라 요청을 해왔대. 꿈같은 바다를 즐기려는 거야. 이때 마치 은하수 속을 떠가는 기분이었대. 어느덧 새벽 5시를 넘어섰어. 조오련은 무려 5시간 넘게 쉬지 않고 헤엄을 친 거야. 기진맥진하지. 그리고 같은 걸 무한 반복하니 지치고 지루해. 응원할 방법이 있을까? 조오련 팀은 음악을 준비했어. 넓고 푸른 바다 위로 신나는 음악이 울려 퍼져. 조오련은 음악의 효과인지, 더 힘차게 물살을 갈랐어. 하지만 위기가 또다시 찾아와. 새벽 되기 전에, 오련이가 자꾸 이상한 행동을 하는 거예요. '야 너 왜 그러냐' 하니까, 멀미가 난다는 거예요. 자꾸만 몸이. 물속 해류에 섞여 있는 것들이 물보라를 이렇게 치면 그게 싹 움직이면서 새파랗게 돼. 그러니까 바깥에 무덤가에 도깨비불 파랗게 떠다니는 것 같이 그렇게 돼. 하다가 보니까 어지러운 거지. -지봉규, 대한해협횡단 감독 오랜 시간 아무런 좌표도 없는 망망대해를 헤엄치고 있잖아. 그러다 보니 어지럽고 환각까지 보인다는 거야. 조오련은 그 와중에도 쉼 없이 팔을 젓고 있어. 이건 그냥,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 상황이지. ▲ 대한해협 횡단, '인류 최초'의 기록 어느덧 출발 12시간 째야. 그때, 지 감독 눈에 저 멀리 뭔가 보여. 저 멀리 어렴풋이 수평선이 펼쳐지더니 대마도 등대가 모습을 드러낸 거야. 예상보다도 엄청나게 빠른 페이스였어. 조오련의 얼굴엔 드디어 미소가 번져. 필사의 힘을 다해 팔을 내 저었어. 어느새 목적지가 1km 앞으로 다가와. 여기서부턴 배가 안전망을 끌고 갈 수 없어. 조류가 엄청 세거든. 이제 오련이 혼자 가야 해. 안전망 속을 헤엄치던 조오련은 힘차게 그물을 빠져나왔어. 혼신의 힘을 다해 이를 악물고 양쪽 팔을 저었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리고 마침내, 목적지인 대마도 등대에 도착해. 맨몸으로 수영해서 일본까지 건넌 거야. 조오련은 힘차게 태극기를 흔들었어. 기록은 13시간 16분 10초. 예상했던 기록을 6시간이나 앞당긴 거야. 그만큼 초인적인 힘으로 물살을 갈랐어. 입항 절차를 마치고 부두에 발을 딛자, 엄청난 환호가 쏟아졌어. 소식을 듣고 찾아온 재일 동포들이야. 기진맥진한 조오련을 향해 꽃다발을 막 안겨. 도전 후, 조오련은 이런 말을 했어. 내가 수영을 끊임없이 하는 진짜 이유는, 나를 이기는 힘. 있는 힘을 끝까지 다 써서 마지막에서 뭍으로 나와서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 때 쾌감을 자꾸만 다시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그때 느낀 희열과 쾌감, 엄청났겠지? 조오련은 다시 한번 아시아의 물개란 걸 증명했어. 영화 '친구'에 그런 대사가 나오잖아.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하고 바다 거북이하고 둘이 헤엄치기 시합하면 누가 이길 것 같노?'라는 대사. 그만큼, 조오련이란 이름은 이제 '수영' 하면 떠오르는 고유대명사가 됐어. 그 후 조오련은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오랜 꿈이던 수영 교실도 열었어. 이제 힘들었던 시절은 추억으로 남겨놓고 평온한 삶을 즐기기만 하면 돼. ▲ 다시 바다로, 20년 만의 도전 그런데, 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나 봐. 대한해협 횡단에 성공한 지 20년 후. 마흔아홉의 조오련은 다시 바다에 나타났어. 2000년 방영됐던, SBS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뷰티풀 라이프'의 '대한해협 횡단 프로젝트'를 통해서. 안녕하십니까? 조오련입니다. 제가 1980년도 8월 11일 날 대한해협을 횡단했지마는 그 당시에 한 50살이 넘으면 다시 한번 횡단해 봐야겠다, 국민들하고 약속을 했었는데. 계주로서, 훌륭하신 분들과 함께 릴레이로 대한해협을 횡단코자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배우 이훈, 소지섭, 그룹 베이비복스 등이 출연했던, 이 프로젝트 알아? 당시 2002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한국과 일본을 이어 줄 초대형 이벤트로 마련됐어. 조오련이 빠질 수 없잖아. 다시 한번 대한해협을 건너기로 한 거야. 근데 여러 사람이 하는 프로젝트라, 어찌 보면 더 험난할 지도 몰라. 저는 그때까지 수영을 못했어요. 그래서 '나는 안 한다'고 했는데, 조오련 선생님이 가능하다는 거예요. 제가 매일 수영 연습을 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아킬레스건염이 오고요. 수영을 한 일주일 쉬었어야 됐고. 그런데 조오련 선생님이 전화 오신 거예요. '너 더 이상 쉬면, 못 건너간다' 진짜로 저를 야단치기도 하고, 독하게 가르쳤죠 진짜. 고생 많이 했어요. -이훈, 연예인 횡단 팀장 횡단팀 팀장이었던 배우 이훈. 수영 실력은 부족했어. 하지만, 조오련은 열정적으로 팀원들을 챙겼어. 차츰 서로에 대한 믿음도 생기고 팀원 모두가 의기투합하기 시작해. 어느새 실력도 많이 발전했어. 마침내 그날이 됐어. 2000년 8월 12일, 대망의 대한해협 횡단 날이야. 횡단팀은 각자 소중한 사람들과 반드시 성공해 돌아오겠다는 인사를 나눴어. 떨리는 그 시작, 횡단 첫 주자는 누구일까? 바로 조오련. 조오련이 바위 위에 홀로 섰어. 스물아홉 나이로 대한해협을 건넜던 조오련이, 마흔아홉이 되어 다시 출발점에 선 거야.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 포기를 모르는 위대한 여정 시작은 순탄했는데, 예상치 못한 샛바람이 엄청나게 부는 거야. 파도가 높아지면서 안전망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배 안으로도 바닷물이 들이쳐. 기상이 더 나빠지면 위험해. 배가 전복될 수 있어. 결국 철수를 결정했어. 횡단을 시작한 지 벌써 10시간, 반 이상 오긴 했는데 거기까지였어. 안전이 중요하니까. 횡단팀은 다시 의지를 다지면서 2차 도전을 시작했어. 그런데 하늘이 맑은가 싶더니, 시간이 쌓일수록 파도가 높아져. 게다가 해파리 떼의 공격까지 시작됐어. 갖가지 역경을 헤치며, 그래도 바다를 계속 헤엄쳐 갔어. 내가 24년 동안 살면서 제일 길었던 한 시간이예요. -배우 소지섭 어느덧 출발한 지 15시간을 넘어섰어. 다들 지칠 대로 지쳤어. 그런데 그때! 대마도다 대마도! 마침내 대마도가 모습을 드러냈어. 20년 만에 맨몸으로 대마도에 다다른 거야. 마지막에 17명이 다 입수했어요. 그래도 대마도 땅을 밟을 때는… 지금 생각해도 짜릿할 정도로 성취감. 짜릿할 정도로 행복했죠. -이훈, 연예인 횡단 팀장 꼬박 18시간 11분을 헤엄친 끝에, 75km 대한해협 횡단에 성공했어. 여정이 마무리되는 순간, 다들 만세를 부르며 얼싸안았어. 20년 전 조오련이 홀로 싸워온 길을, 이번에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이겨낸 거지. 그런데, 조오련의 도전은 끝나지 않았어. 2005년, 일명 '물개가족 독도 횡단' 프로젝트. 두 아들과 함께 울릉도에서 독도까지 120km를 헤엄쳤어. 독도가 우리 땅인 걸 알리려고. 또 3년 후엔, 민족대표 33인을 기리는, 독도를 33바퀴 도는 도전을 했어. 7월 1일 도전을 시작해서 31일, 마지막 33바퀴를 도는 데 성공했어. 그때 그의 나이, 56세였어. 조오련은 왜, 이런 도전을 계속했을까. 주변에서 그를 본 사람들은, 조오련은 새로운 도전을 통해 국민들에게 계속 희망을 전하려 하는 거 같았대. 그에게 도전은, 삶의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2010년, 환갑을 앞둔 나이. 조오련은 고향 해남으로 돌아와서 마지막 도전을 선언했어. 30년 만에 대한해협을 다시 건너겠단 거야. 이번엔 혼자서. 조오련의 각오는 남달랐어. 한 기자가 물었어. 내일모레면 환갑을 바라보는데 힘들지 않으십니까 라고. 그러자 이렇게 대답했어. 힘든 게 걱정이겠소.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온몸을 내 던져야제. 그 어느 때보다 들뜬 모습이었어. 그런데, 그렇게 한창 바다로 갈 준비를 하던 어느 날, 조오련은 쓰러진 채로 발견돼. 심장마비였어. 그리고 그 길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버렸어. 너무도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된 거야. 국민들은 물론이고 동료들에게도 엄청난 충격이었어. 자기는 운동선수가 직업이니까 그것밖에 없다. 최선을 다해서 죽을 때까지 그걸 해야 된다, 그걸 딱 머릿속에 갖고 있었던 사람이에요. 다른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잖아요. 수영장도 했었고. 근데 자기는 그 수영장, 편한 것이 안 맞은 거예요. 자기는 도전을 해야 돼… 저희 형님 곁에 가서 다시 한번 수영하며 사는 그런 세상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형님, 보고 싶네요. -이관웅, 조오련 수영 후배 바다를 사랑한 만큼, 바다가 저한테 사랑을 주더라고요. 언제가 제일 좋냐 그러면, 전 배는 좀 나왔지만 수영복 입을 때가 제일 행복합니다. -조오련 생전 인터뷰 中 얻은 명성만으로 편안한 삶을 살 수도 있었는데, 조오련은 도전을 멈추지 않았어. 2020년, 조오련은 대한민국 스포츠 영웅으로 선정됐고, 체육인 중 6번째로 국립 현충원에 안장됐어. 조오련의 오랜 벗, 서울에 상경했을 때 방까지 내줬던 박석기 감독이 이런 이야기를 전해왔어. 저는 학교라는 울타리 속에서 성장을 했어요. 하지만 오련이는 일단 시작 자체가 도전이잖아요. 서울에 올라온 것 자체가 도전일 테고. 잠시도 그 친구는 긴장을 풀지 못했을 거예요. 처음부터 집념과 야망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라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면서 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오련이 덕에 저도 마음속으로 경주를 하면서 더 성장한 것 같습니다. 참 부러우면서도 응원하지 않을 수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이 서글펐어요. -박석기, 조오련 친구 양정고에 있는 조오련 기념비엔 조오련이 했던 말이 적혀 있어. '무모해 보일지 모르지만 시작하는 순간 도전이 된다'라고. 그에게 도전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
[꼬꼬무 찐리뷰] 맨몸으로 일본까지 헤엄쳐 간 조오련…그가 전설이 된 이유
등록일2024.06.14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13일 방송된 '그가 전설이 된 이유,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배우 정희태, 수영선수 출신 박태환, 배우 유이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수영에 미친, 낯선 녀석의 등장 때는 1968년 11월, 서울 종로야. 한 건물 안 사무실이 시끌시끌해. 까까머리 앳된 소년과 중년 남자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어. 소년은 사정사정하며 매달리고,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는 손사래를 쳐. 여기서 큰 목소리가 들리는 이유는, 이 작은 종이 한 장 때문이야. 수영장 회원권이야. 원래 11월 7일에 만료가 된 회원권인데, 소년이 7 앞에 2를 붙여서 27일로 바꿨다가 직원 아저씨한테 딱 걸린거야. 제가 진짜 성공해서 꼭 갚을게요. 수영만 하게 해 주세요. 소년이 통 사정을 한 끝에, 한 번만 봐주기로 했어. 대신 소년은 벌로 수영장 청소를 하기로 했어. 이 때가 1968년이야. 수영, 어떤 스포츠였을까? 수영 선수도 있고, 경기도 있을 때지만, 스포츠로 생각하진 않았어. 수영이란 건 단지, 생존 수영이나 물놀이 정도로 여겨졌지. 굳이 따지자면 특별한 사람들이나 하는 '고급 운동'이야. 이때 우리나라에 수영장이 단 세 개만 있었거든. 하나는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진 동대문운동장 수영장, 하나는 워커힐 호텔 수영장. 그리고 마지막 하나가 바로 여기, 종로에 있는 YMCA 건물 안에 실내 수영장이 있어. 연습용 실내 수영장은 딱 하나, 바로 이 YMCA 수영장뿐이었어. 좋은 기록을 내려면 연습을 많이 해야 하잖아. 근데 실내 수영장이 없으면 연습을 못 해. 겨울에 야외에서 수영할 수가 없으니까. 수영할 환경 자체가 척박한 거야. 아무나 수영을 할 수도 없어. 근데 형편도 넉넉지 않아 보이는 소년은, 왜 회원권을 위조하면서까지 수영을 하려는 걸까? 당시 학교 수영부 쌍두마차는 오산고와 양정고. 유명한 수영 명문고야. 전국체전에 나갔다 하면, 우승을 휩쓰는 게 두 학교야. 두 학교 선수들은, 학교 끝나면 다들 YMCA 수영장에 모여서 같은 꿈을 꾸면서 실력을 겨눴어. 근데 그 사이로, 웬 낯선 녀석이 나타났어. 회원권을 위조해서 수영장 청소를 하게 된 소년.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녀석이 와서 첨벙첨벙 물살을 신나게 가르는 거야. 소위 '개헤엄'이라고 하잖아? 영, 폼도 어설프고 본적 없는 영법이야. 근데 이상하게 빨라. 까까머리 소년은 금세 수영장 유명인사가 됐어. 소년의 얼굴을 보여줄게. 혹시 누군지 알아보겠어?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이야. ▲ 해남 소년의 잠재력을 알아본 귀인 오련이는 저 멀리 땅끝마을 해남에서 왔어. 수영하겠다고 다니던 학교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왔단 거야. 시골에서 왔다고 툭툭 건드는 친구들도 있었고, 연습을 방해하는 것도 다반사야. 그런데 오련이는 기죽는 법이 없어. 수영장에 마지막까지 남아 끝까지 연습했대. 그런 오련이를 유심히 지켜보는 사람이 있어. 바로, 오산고 1학년 석기. 석기도 오련이처럼 항상 그 수영장에 마지막까지 남았거든. 석기는 수영에 대한 열정도 있었고, 집이 수영장이랑 가까워서 늦게까지 연습했어. 그런데 오련이는 집도 절도 없는 신세야. 그래서 수영장 근처 간판 가게에서 일하며 임시 방편으로 숙식을 해결했어. 친구인 석기가 보기에, 오련이는 어떻게 보였을까? 오련아, 합숙소라 생각하고 그냥 내 방에서 지내. 엄마한텐 내가 말씀드릴게. 석기와 오련이는 그렇게 친구가 됐어. 참 따뜻하지? 둘은 신나게 수영장을 돌고, 집에 올 땐 라면을 사 들고 왔어. 둘이 얼마나 먹었을 것 같아? 무려 열 봉지. 운동하느라 얼마나 허기져. 그렇게 허겁지겁 먹고 기절하듯 바로 잠이 들어. 그리고 새벽 5시면, 종로에서 남산까지 매일 같이 뛰는 거야.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뭐라도 해보자는 마음으로 달렸어. 열일곱, 인생을 건 도전은 그렇게 시작됐어. 오련이의 고향은 전라남도 해남. 어린 시절엔 산과 물이 친구였어. 집 앞 저수지에서 신나게 수영하고 산에 올라서 젖은 몸을 말렸어. 그런데 오련이가 고등학교에 가면서 머릿속엔 미래에 대한 걱정이 가득했다. '돈 있는 애들은 다 서울 가서 공부한다는데, 이래서 대학은 가려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 한참 고민 많을 때잖아. 그때마다 생각나는 장면이 하나 있었어. 몇 년 전에 아빠 따라 제주도에 갔다가 우연히 한 수영대회를 봤는데, 1등 하는 학생을 보면서 '뭐야, 저 정도는 나도 하겠는데?' 하는 생각이 든 거야. 그래서 오련이는 결심했어. 내복 하나, 책 두 권 들고, 무작정 상경한 거야. 그리고 들고 온 용돈을 탈탈 털어서, 수영인들의 메카라는 YMCA 수영장에 무작정 등록을 했어. '내가 성공할 길은 수영 뿐이다! 성공하기 전엔 안 내려가겠다' 다짐하면서. 오련이의 하루는 엄청 바빠. 아침운동을 하고 나면, 생활비를 벌기 위해 오후엔 간판 집에서 일하고. 오후엔 수영장 청소를 해야 해. 나머지 시간은 온통 수영이야. 이런 일과를 반복했어. 그러던 어느날, 급히 우동 한 그릇 먹고, 또 수영장으로 뛰어들려고 하는데, 한 남자가 오련이를 붙잡아 세웠어. 학생이 학교도 안 가고 수영만 하는 거야? 그 수영은 대체 어디서 배운 거야? 수영장 회원 중에 장형숙 씨라고, '장 선생님'으로 불리는 분이 있었어. 소싯적에 수영부에서 활동을 좀 하신 분이었거든. 근데 장 선생님이 보니까 학생이 열심히는 하는데 뭔가 어설픈 거야. 장 선생님은 답답한 마음에 오련이한테 발차기하는 법을 좀 알려주고, 물 밖으로 나왔어. 씻고 사우나도 하고 한참 뒤에 탈의실을 나오는데, 저기 수영장 한쪽에서 쉴 새 없이 물보라가 일어. 오련이가 미친 듯이 발차기만 내내 하는 거야. '이놈 봐라?' 장 선생님은 곧장 오련이를 데리고 나가서 국밥 한 그릇을 먹였어. 그리고 '학생, 앞으로 수영비는 내가 내줄 테니 한 번 열심히 해봐'라고 말했어. 장 선생님이 오련이의 후원자가 되기로 한 거야. 왼쪽이 장 선생님이야. 장 선생님은 오련이의 개인 코치가 됐고, 친구들까지 불러다 일명 '조오련 후원회'를 만들었어. 이제 오련이가 할 수 있는 건 연습, 오직 연습뿐이야. 연습을 얼마나 열심히 했을 것 같아? 정말 미친 듯이 연습을 했대. 오련이 형은 기분에 따라 수영을 하지 않아요. 스케줄을 만약에, 이번 주에 10만km을 잡아놨다 그러면 10만을 오전, 오후 해서 10만을 정확히 채워요. 새벽에 아침에 5시에 물에 들어가서 8시까지 3시간 운동을 해요. 그럼 밥 먹고 좀 쉬었다가 10시부터 또 2시간 더 하잖아요. 그 다음 또 쉬었다가 4시부터 6시, 7시까지 또 하잖아요. 연습량이 너무 많고. 그 사람들이 1년간 했던 걸 자기는 한 달 만에 해본다든가. 이런 정도의 악이, 근성이 있었죠. -이관웅, 조오련의 수영 후배 ▲ 슈퍼스타의 탄생 오련이는 성공하겠다는 의지가 엄청났어. 그런데 이때 우리나라 수영 수준이라는 게, 수영에 기술이 필요하단 생각도 못 하던 때야. 그래서 장 선생님은 오련이에게 턴 기술을 집중적으로 가르쳤어. 자유형 때 턴하는 거 본 적 있지? 앞구르기 하듯 발로 벽을 힘껏 밀면서 나오잖아. 그 추진력으로 속도를 내는 거야. 일명, '퀵 턴', '플립 턴'이라고 해. 수영선수한테는 기본적인 기술이지. 근데 당시에는 플립 턴이 아니라, 헤엄치던 손으로 벽을 치고 도는 게 당연했어. 그러던 어느 날 '꼭 손으로 벽을 터치해야 하나?' 누군가 이런 생각을 한 거지. 당시 우리나라에 플립 턴은 아주 선구적인 기술이었어. 오련이는 이 기술을 집중적으로 연습했어. 그저 반복, 열심히 하는 것만이 답이야. 그리고 마침내, 기회가 찾아와. 1969년 6월, 전국체전. 학교 소속이 없던 오련이는 성인들이 뛰는 '일반부' 소속으로 경기에 출전했어. 결과는 어땠을까? 조오련 군이 남대부 자유형 1500 미터에 출전, 21분 18초로 대회 신기록을 수립해 주목을 끌었다. -당시 신문 기사 中 오련이는 쟁쟁한 일반부 선수들을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어. 사람들은 깜짝 놀랐어. 이때, 엄청난 일이 일어나. 대한체육회 회장님이 그 경기를 직관한 거야. 저 친구, 태릉 선수촌에 당장 입촌시켜! 이때가 마침, 태릉선수촌에 수영장이 막 만들어지던 때야. 타이밍 기가 막히지? 오련이에겐 그야말로 기적이 일어난 거야. 그 뒤론 일사천리였어. 해남에서 못다 마친 학교까지 다니게 됐어. 수영 명문, 양정고에 입학허가가 난 거야. 태릉선수촌에 입촌한 오련이는, 이제 돈 걱정 없이 온종일 수영을 할 수 있다는 게 가장 좋았대. 오련이는 연습에 더 박차를 가했어. 선수촌에서도 독한 놈으로 통해.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대. 저희들이 이제 50미터 잠수를 하고 다시 돌아서 75미터 이쯤에 물 위로 나온단 말이에요. 우리 같은 같이 하는 사람들은 75미터에서도 물 위로 나오고, 80미터에서도 나오잖아요. 오련이 형은 그거를 안 지려고, 오다가 기절해서 물속에 빠져버린 적도 있어요. 우리가 가서 끄집어내서 나오죠. 그러면 '또 하자, 또 하자' 그래요. 그 사람이 기본적으로 독한 거, 독한 면이 많아요. -이관웅, 조오련의 수영 후배 오련이는 승부욕이 어마어마해. 그렇게 태릉 선수촌에서 실력을 갈고 닦았어. 그 뒤로 연달아 전국 대회에 나갔는데, 나가는 대회마다 우승을 휩쓸어. 그것도 매번 기록 경신. 한 해에만 11번의 한국 신기록을 깼어. 그야말로 혜성처럼, 한국에 수영 천재가 등장한 거야. 그리고 오련이는 마침내, 왼쪽 가슴에 태극 마크를 달게 됐어. 국가대표 발탁이야. 수영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채 1년도 안 됐을 무렵이야. 1970년, 제6회 아시안게임. 태국 방콕에서 열리는 경기야. 대한민국을 대표해서 레인 앞에 선 사람, 조오련. 불과 1년 전에 해남 저수지를 헤엄치던 소년이 국제 무대에 서게 된 거야. 당시 아시아의 수영 강자는 일본. 지난 아시안게임에서 경영 남녀 종목은 총 26개였는데, 금메달 26개를 일본이 싹쓸이 했어. 사실상 오련이에겐 한일전을 앞둔 거야. 첫 경기를 앞둔 오련이는 코치에게 이렇게 말했대. 어떻게 되든 일본 선수들과 한번 겨뤄 보겠습니다. 지쳐 자빠지면, 물에서 건져나 주십시오. 첫 경기는 자유형 400미터. 출발선에 일곱 명의 선수가 도열하고, 탕! 운명의 레이스가 시작돼. 오련이는 있는 힘을 다해 팔을 휘저었어. 치열한 접전에 장내는 고요해졌어. 일본의 독주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거지. 어느덧, 마지막 50미터. 선수들의 막판 스퍼트가 이어져. 오련이도 필사적으로 피치를 높였어. 그리고 마침내, 터치패드에 손을 찍었어. 눈꺼풀의 물방울을 털고 전광판을 보는데, 전광판 가장 위에 랭크된 건 'KOR'. 대한민국이었어. 만세!!! 조오련! 금메달!! 대한민국 경영 첫 금메달이 탄생하는 순간이야. 일본 선수를 무려 1초 앞지르고 승리했어. 당시 아시아 신기록이었어. 오련이의 기록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어. 이번 대회 영웅 조오련 선수는 수영 400미터 경기에서 아시아 신기록을 세운 뒤, 다시 남자 자유형 1500미터에서 17분 25초 7로 아시아 신기록을 세우고 우승, 우리나라 최초의 수영 2관왕이 됐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조오련은 무려 아시안게임 2관왕을 기록했어. 수영으로는 최초야. 일본을 꺾고,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선 거야. 어떻게 우리가 수영을 일본을 이길 수가 있지? 너무나 감격적이었고, 우리가 일본을 이겼다고 난리가 났었죠. -이관웅, 조오련 수영 후배 한국에 돌아온 오련이에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자마자 헹가래에, 여의도에서 시청을 가로질러 카퍼레이드까지 쫙 펼쳐졌어. 스포츠계를 뒤흔든 수영 스타의 등장이었어. 해남 소년은 '국민 영웅', '국민 남동생'이 됐어. 이때 생긴 별명이 바로 '아시아의 물개'야. 조오련의 등장으로 우리나라엔 수영 열풍이 불기 시작해. 전국에 수영장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하고, 수영을 배우겠단 강습생도 엄청 늘었어. '수영으로 성공할 수 있다' 이런 꿈을 꾸게 된 거야. 그 중엔 우리가 잘 아는 분도 있어. 학교를 가는데 라디오에 온종일 그게 나오는 거예요. 조오련 선배에 대해서 뉴스에. '나도 수영을 해야 되겠다' 이미 금메달을 따고 나서의 그 일화는, 해남 섬마을 소년이 어떻게 고생했고 그런게 쭉 나오는 거였어요. 그건 저 뿐만이 아니라, 그거를 듣고 종로 YMCA에 와서 끊어서 하는 꿈을 안고 오는 친구들이 참 많았어요. 수영을 하려고. -노민상, 전 수영 국가대표 감독 전 수영 국가대표 감독인 노민상 감독도 조오련을 보면서 꿈을 키웠대. 손짓하나 눈빛 하나하나까지 다 닮으려고 했대. 우상이 하는 건 다 영웅같이 보이는 거예요. 아무리 그게 나쁘고 좋고 하더래도, 다 멋있게 보이는 거예요. 하물며 벙거지 모자 자체도 멋있게 보였으니까. -노민상, 전 수영 국가대표 감독 근데 진짜 닮고 싶은 건 정신력이었어. 조오련이 직접 쓴 수기가 있어. 선수촌에서 다른 선수들은 크로스컨트리를 맨몸으로 하나, 나는 8킬로의 모래주머니를 메고 뛰며, 선수촌에서 합숙 중 잠이 안 올 때면 운동장을 뛰곤 했다. 건방진 말인지 몰라도 적어도 남을 이기려면 남모르는 고통을 통한 무단의 노력이 필요하다. 나는 방콕에 와서도 복싱 선수들이 6시부터 시작하는 로드 워킹을 기다려 함께 뛰었다. '이 시간에는 일본 선수들이 잠자고 있겠지' 생각하면서. 그러나 나는 뛴다는 자부심을 가졌다. -조오련의 수기 中 그로부터 4년 후, 1974년 테헤란에서 열린 제7회 아시안게임. 오련이는 이번에도 출전했어. 이전 대회와 달리, 어느 정도 오련이의 전력이 다른 나라에 노출된 상태잖아. 당연히 견제가 들어오겠지. 하지만 조오련은, 이번에도 금메달을 땄어. 한국의 조오련 선수는 아시아대회 신기록으로 우승, 6회 대회에 이어 2연패 했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그런데 경기를 끝낸 오련이가 가방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 흰 모시옷과 고무신, 그리고 태극 머리띠야. 시상대에 오를 때, 보통 트레이닝복을 입잖아? 그런데 오련이는 한복을 입고 고무신을 신고 머리에 태극띠를 두르고 나타났어. 스물셋, 애국청년 오련이의 모습은 국민들에게 큰 위로와 감동을 줬어. 특히 오련이는 1500미터에 사활을 걸었대. 1500미터는 레이스가 길잖아? 자기가 선두에서 앞서가면, 그만큼 오래 대한민국을 뽐낼 수 있으니까. 하지만, 거기까지였어. 4년 후, 3연패를 꿈꾸며 아시안게임에 다시 출전했지만, 성적은 접영 200미터 동메달. 물론 새로운 종목에서 따낸 값진 메달이었지만, 찬란했던 시절은 지나고 있었어. 당시 나이 스물일곱. 지금이야 관리를 잘하면 선수들이 더 나이가 들어서도 선수 생활을 하지만, 그때만 해도 20대 후반이면 선수로서 전성기가 지났다고 했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가 이제 사라지고 있던 거야. 조오련은 이 아시안게임을 끝으로, 사실상 선수 생활 은퇴를 하게 돼. 근데 오련이의 이야기는 여기가 끝이 아니야. 진짜는 지금부터야. ▲ 수영장 밖, 원대한 계획 다시 땅끝마을, 해남이야. 고향 후배인 관웅 씨가 전화를 받았어. 목포 선착장에서 보자는 오련이 형의 연락이야. 호출을 받고 나갔더니, 오련이 형이 대뜸 배 한 척을 띄우고 그 배를 따라서 저 멀리 섬까지, 바다 수영을 하자는 거야. 전국 체전 끝나면 시간이 많잖아요. 그럼 목포에서 배를 갖고 가요. 배는 천천히 가고, 우리는 뒤에 따라 수영하고. '저 섬까지 가자' 하면 저 섬까지 가고요. 또 내려서 좀 쉬었다가 밥 먹고 또 '저 섬까지 가자'… -이관웅, 조오련 수영 후배 수영장도 아니고 종일 바다를 수영으로 돌면, 힘이 남아나겠어? 근데 오련이 형은 지치는 법이 없어. 현역인 관웅 씨가 못 따라갈 정도야. 저희들은 하루 바다 수영하면 입안이 팅팅 불어 터져 갖고, 입술이 여기까지 오거든요. 근데 그 형님은 다음 날 아침에 또 나가자고 해요. 밥만 먹고 나가자 그 얘기야. 그래서 '이상한 사람이네' 우리는 놀러 가는 걸로 생각을 하는데. 막 기를 쓰고 훈련하는 거예요. -이관웅, 조오련 수영 후배 한동안 그렇게 바다를 헤엄치던 어느 날. 조오련은 누군가를 찾아가. 바로 수영 선배, 지봉규 씨야. 지봉규 씨는 지금도 그날을 잊지 못한대. 하루는 오더니, '나 저기 대한해협을 건너가려는데 어떻겠어요?' 그래. '뭐 안 될 게 뭐 있어 하면 되지'. 다른 사람들한테 다 물어봤더니 안된다고 그러더래요. '네가 아시아의 1등인데, 아 그럼 못할 게 뭐 있냐. 하면 되지'… -지봉규, 조오련 수영 선배 대한해협을 건너겠다는 계획이야. 그러니까, 일본까지 헤엄 쳐서 가겠다는 거야. 장난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야. 대한해협은, 대한민국과 일본 규슈지방 사이의 바다를 말해. 일본까지의 최단 거리는, 부산 태종대에서 대마도 북단 사오자키 등대까지 약 48km야. 근데, 바다를 헤엄쳐 건너는 건 직선거리와는 달라. 해류를 생각하면 60km 정도로 봐야 해. 60km면 마라톤 풀코스를 한참 넘는 거리야. 시속 3km 정도로 간대도, 20시간을 헤엄쳐야 해. 이게 가능한 일일까? 만약 성공한다면, 대한해협을 건넌 최초의 인류가 되는 거야. 조오련이 도전장을 던진 것도, 그 이유야. 많은 사람들이 만류했지만, 선배 지봉규 씨는 확신했어. 이 사람은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이니까. 지봉규 씨는 대한해협 횡단 감독을 맡기로 해. 실내 수영과 바다 수영은 천지 차이야. 낮은 수온과 조류의 영향을 다 버텨내야 해. 물길을 안내해 줄 선장, 훈련을 함께할 코치와 감독, 도전을 기록할 기자단까지 한 팀이 꾸려졌어. 디데이는 그나마 수온이 오르는 7월에서 8월 사이로 정했어. 남은 시간은 8개월 정도.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엄청난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거야. ▲ 인간 한계에 도전하다 장거리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건 지구력이야. 횡단 팀의 첫 코스는 도보 행군이었어. 서울에서 조오련의 고향, 땅끝 해남까지 걸었어. 이어지는 건, 잠 안 자고 버티기 훈련. 제주도를 무려 22시간 동안 쉬지 않고 돌았어. 이동한 거리만 91km야. 그 사이, 지 감독은 바다 상황을 계속 확인했어. 지역 어부들을 만나 자문을 구하는데, 흔한 일은 아니지만 상어가 나타날 가능성도 있대. 상어가 아니더라도, 여러 해상동물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거야. 며칠 동안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지 감독님은 고기 잡을 때 쓰는 족대를 활용하기로 했어. 커다란 그물 안전망을 제작하는 거야. 배에 그물을 연결해서 끌고 그 안에서 안전하게 헤엄치게 하는 거야. 조오련은 이제, 바다 적응 훈련에 집중해. 장거리 연습부터 캄캄한 밤 수영까지, 실전에 가까운 연습을 이어갔어. 그사이 몸에 큰 변화도 생겼어. 70킬로였던 몸무게가 85킬로까지 분 거야. 대한해협의 수온은 낮아도 한참 낮아. 그런 바다에서 장시간 수영하면, 저체온증으로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대. 그래서 지방을 늘리기로 한 거야. 한 달에 먹는 고기만 무려 100근이었대. 1980년 8월 11일 자정. 8개월을 준비한 도전, 바로 그 날이야. 기상상황을 고려해 한밤중에 출발하는 거야. 바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누구도 알 수 없어. 칠흑같이 어두운 방파제 앞. 하얀 모자와 수영복을 입은 조오련이 나타나자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져. 8월 11일 00시 5분. 사람들의 응원을 뒤로한 채 풍덩! 조오련은 힘차게 물을 가르며 다대포항을 떠났어. 출발은 아주 좋아. 커다란 안전망이 조오련을 감싸고, 조오련은 빠른 속도로 앞으로 나아가. 시속 4km 정도의 속도로 한 시간을 가더니, 그 다음 한 시간은 무려 시속 7km를 넘어섰어. 그런데 그때, 조오련이 신호를 보내. 금세 에너지가 떨어져 배가 고프다는거야. 바다 수영하면서 식사, 어떻게 할 것 같아? 조오련은 바다에 뜬 채 따끈한 깨죽으로 첫 해상 식사를 했어. 그리곤 속이 거북할지 몰라 소화제를 탄 더운 물을 들이켰어. 따뜻한 죽을 먹이려고 배 안에선 종일 죽을 쑤고 있었대.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갑자기 문제가 생겼어. 갑자기 조오련이 괴로워하는 거야. 한두 시간 갔거든. 그랬더니 딱 멈춰달라고 그래요. '왜 그러냐' 그랬더니, '몸이 따가워서 아주 못하겠다'는 거야. 물에 들어가서 보니까, 그냥 해파리가 안전망에 꽉 붙었어요. -지봉규, 대한해협횡단 감독 지 감독이 급히 바다로 뛰어 들었어. 근데 해파리가 많아도 너무 많아. 지 감독은 안전망 밖으로 오련이를 나가게 하고, 안전망을 반대로 돌렸어. 물살을 이용해 해파리를 떼내려고 한 거야. 다행히 해파리떼가 사라졌어. 그 뒤론 평온한 시간이 이어졌어. 컴컴한 망망대해의 물살을 가르는 사람 하나. 어둠 속의 바다, 헤엄쳐 본 적 있어? 조오련은 무섭기보단 환상적이었대. 수면 위로는 저 멀리 오징어잡이 배 불빛이 비추고, 바닷속은 형형의 빛이 가득 해. 플랑크톤이 빛을 받으면서 빛나는 거야. 조오련은 힘든 와중에도, 조명을 꺼달라 요청을 해왔대. 꿈 같은 바다를 즐기려는 거야. 이때 마치 은하수 속을 떠가는 기분이었대. 어느덧 새벽 5시를 넘어섰어. 조오련은 무려 5시간 넘게 쉬지 않고 헤엄을 친 거야. 기진맥진하지. 그리고 같은 걸 무한 반복하니 지치고 지루해. 응원할 방법이 있을까? 조오련 팀은 음악을 준비했어. 넓고 푸른 바다 위로 신나는 음악이 울려 퍼져. 조오련은 음악의 효과인지, 더 힘차게 물살을 갈랐어. 하지만 위기가 또다시 찾아와. 새벽 되기 전에, 오련이가 자꾸 이상한 행동을 하는 거예요. '야 너 왜 그러냐' 하니까, 멀미가 난다는 거예요. 자꾸만 몸이. 물 속 해류에 섞여 있는 것들이 물보라를 이렇게 치면 그게 싹 움직이면서 새파랗게 돼. 그러니까 바깥에 무덤가에 도깨비불 파랗게 떠다니는 것 같이 그렇게 돼. 하다가 보니까 어지러운 거지. -지봉규, 대한해협횡단 감독 오랜 시간 아무런 좌표도 없는 망망대해를 헤엄치고 있잖아. 그러다 보니 어지럽고 환각까지 보인다는 거야. 조오련은 그 와중에도 쉼 없이 팔을 젓고 있어. 이건 그냥,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 상황이지. ▲ 대한해협 횡단, '인류 최초'의 기록 어느덧 출발 12시간 째야. 그때, 지 감독 눈에 저 멀리 뭔가 보여. 저 멀리 어렴풋이 수평선이 펼쳐지더니 대마도 등대가 모습을 드러낸 거야. 예상보다도 엄청나게 빠른 페이스였어. 조오련의 얼굴엔 드디어 미소가 번져. 필사의 힘을 다해 팔을 내 저었어. 어느새 목적지가 1km 앞으로 다가와. 여기서부턴 배가 안전망을 끌고 갈 수 없어. 조류가 엄청 세거든. 이제 오련이 혼자 가야해. 안전망 속을 헤엄치던 조오련은 힘차게 그물을 빠져나왔어. 혼신의 힘을 다해 이를 악물고 양쪽 팔을 저었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리고 마침내, 목적지인 대마도 등대에 도착해. 맨몸으로 수영해서 일본까지 건넌 거야. 조오련은 힘차게 태극기를 흔들었어. 기록은 13시간 16분 10초. 예상했던 기록을 6시간이나 앞당긴 거야. 그만큼 초인적인 힘으로 물살을 갈랐어. 입항 절차를 마치고 부두에 발을 딛자, 엄청난 환호가 쏟아졌어. 소식을 듣고 찾아온 재일 동포들이야. 기진맥진한 조오련을 향해 꽃다발을 막 안겨. 도전 후, 조오련은 이런 말을 했어. 내가 수영을 끊임없이 하는 진짜 이유는, 나를 이기는 힘. 있는 힘을 끝까지 다 써서 마지막에서 뭍으로 나와서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 때 쾌감을 자꾸만 다시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그때 느낀 희열과 쾌감, 엄청났겠지? 조오련은 다시 한번 아시아의 물개란 걸 증명했어. 영화 '친구'에 그런 대사가 나오잖아.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하고 바다 거북이하고 둘이 헤엄치기 시합하면 누가 이길 것 같노?'라는 대사. 그만큼, 조오련이란 이름은 이제 '수영' 하면 떠오르는 고유대명사가 됐어. 그 후 조오련은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오랜 꿈이던 수영 교실도 열었어. 이제 힘들었던 시절은 추억으로 남겨놓고 평온한 삶을 즐기기만 하면 돼. ▲ 다시 바다로, 20년 만의 도전 그런데, 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나봐. 대한해협 횡단에 성공한 지 20년 후. 마흔 아홉의 조오련은 다시 바다에 나타났어. 2000년 방영됐던, SBS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뷰티풀 라이프'의 '대한해협 횡단 프로젝트'를 통해서. 안녕하십니까? 조오련입니다. 제가 1980년도 8월 11일날 대한해협을 횡단했지마는 그 당시에 한 50살이 넘으면 다시 한 번 횡단해봐야겠다, 국민들하고 약속을 했었는데. 계주로서, 훌륭하신 분들과 함께 릴레이로 대한해협을 횡단코자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배우 이훈, 소지섭, 그룹 베이비복스 등이 출연했던, 이 프로젝트 알아? 당시 2002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한국과 일본을 이어줄 초대형 이벤트로 마련됐어. 조오련이 빠질 수 없잖아. 다시 한번 대한해협을 건너기로 한 거야. 근데 여러 사람이 하는 프로젝트라, 어찌 보면 더 험난할 지도 몰라. 저는 그때까지 수영을 못했어요. 그래서 '나는 안 한다'고 했는데, 조오련 선생님이 가능하다는 거예요. 제가 매일 수영 연습을 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아킬레스건염이 오고요. 수영을 한 일주일 쉬었어야 됐고. 그런데 조오련 선생님이 전화 오신 거예요. '너 더 이상 쉬면, 못 건너간다' 진짜로 저를 야단치기도 하고, 독하게 가르쳤죠 진짜. 고생 많이 했어요. -이훈, 연예인 횡단 팀장 횡단팀 팀장이었던 배우 이훈. 수영 실력은 부족했어. 하지만, 조오련은 열정적으로 팀원들을 챙겼어. 차츰 서로에 대한 믿음도 생기고 팀원 모두가 의기투합하기 시작해. 어느새 실력도 많이 발전했어. 마침내 그날이 됐어. 2000년 8월 12일, 대망의 대한해협 횡단 날이야. 횡단팀은 각자 소중한 사람들과 반드시 성공해 돌아오겠다는 인사를 나눴어. 떨리는 그 시작, 횡단 첫 주자는 누구일까? 바로 조오련. 조오련이 바위 위에 홀로 섰어. 스물아홉 나이로 대한해협을 건넜던 조오련이, 마흔 아홉이 되어 다시 출발점에 선 거야.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 포기를 모르는 위대한 여정 시작은 순탄했는데, 예상치 못한 샛바람이 엄청나게 부는 거야. 파도가 높아지면서 안전망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배 안으로도 바닷물이 들이쳐. 기상이 더 나빠지면 위험해. 배가 전복될 수 있어. 결국 철수를 결정했어. 횡단을 시작한 지 벌써 10시간, 반 이상 오긴 했는데 거기까지였어. 안전이 중요하니까. 횡단팀은 다시 의지를 다지면서 2차 도전을 시작했어. 그런데 하늘이 맑은가 싶더니, 시간이 쌓일수록 파도가 높아져. 게다가 해파리 떼의 공격까지 시작됐어. 갖가지 역경을 헤치며, 그래도 바다를 계속 헤엄쳐 갔어. 내가 24년 동안 살면서 제일 길었던 한시간이예요. -배우 소지섭 어느덧 출발한 지 15시간을 넘어섰어. 다들 지칠 대로 지쳤어. 그런데 그때! 대마도다 대마도! 마침내 대마도가 모습을 드러냈어. 20년 만에 맨몸으로 대마도에 다다른 거야. 마지막에 17명이 다 입수했어요. 그래도 대마도 땅을 밟을 때는… 지금 생각해도 짜릿할 정도로 성취감. 짜릿할 정도로 행복했죠. -이훈, 연예인 횡단 팀장 꼬박 18시간 11분을 헤엄친 끝에, 75km 대한해협 횡단에 성공했어. 여정이 마무리되는 순간, 다들 만세를 부르며 얼싸 안았어. 20년 전 조오련이 홀로 싸워온 길을, 이번에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이겨낸거지. 그런데, 조오련의 도전은 끝나지 않았어. 2005년, 일명 '물개가족 독도 횡단' 프로젝트. 두 아들과 함께 울릉도에서 독도까지 120km를 헤엄쳤어. 독도가 우리 땅인 걸 알리려고. 또 3년 후엔, 민족대표 33인을 기리는, 독도를 33바퀴 도는 도전을 했어. 7월 1일 도전을 시작해서 31일, 마지막 33바퀴를 도는 데 성공했어. 그때 그의 나이, 56세였어. 조오련은 왜, 이런 도전을 계속 했을까. 주변에서 그를 본 사람들은, 조오련은 새로운 도전을 통해 국민들에게 계속 희망을 전하려 하는 거 같았대. 그에게 도전은, 삶의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2010년, 환갑을 앞둔 나이. 조오련은 고향 해남으로 돌아와서 마지막 도전을 선언했어. 30년 만에 대한해협을 다시 건너겠단 거야. 이번엔 혼자서. 조오련의 각오는 남달랐어. 한 기자가 물었어. 내일모레면 환갑을 바라보는데 힘들지 않으십니까 라고. 그러자 이렇게 대답했어. 힘든 게 걱정이겠소.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온몸을 내 던져야제. 그 어느 때보다 들뜬 모습이었어. 그런데, 그렇게 한창 바다로 갈 준비를 하던 어느 날, 조오련은 쓰러진 채로 발견돼. 심장마비였어. 그리고 그길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버렸어. 너무도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된 거야. 국민들은 물론이고 동료들에게도 엄청난 충격이었어. 자기는 운동선수가 직업이니까 그것밖에 없다. 최선을 다해서 죽을 때까지 그걸 해야 된다, 그걸 딱 머릿속에 갖고 있었던 사람이에요. 다른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잖아요. 수영장도 했었고. 근데 자기는 그 수영장, 편한 것이 안 맞은 거예요. 자기는 도전을 해야 돼… 저희 형님 곁에 가서 다시 한번 수영하며 사는 그런 세상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형님, 보고싶네요. -이관웅, 조오련 수영 후배 바다를 사랑한 만큼, 바다가 저한테 사랑을 주더라고요. 언제가 제일 좋냐 그러면, 전 배는 좀 나왔지만 수영복 입을 때가 제일 행복합니다. -조오련 생전 인터뷰 中 얻은 명성만으로 편안한 삶을 살 수도 있었는데, 조오련은 도전을 멈추지 않았어. 2020년, 조오련은 대한민국 스포츠 영웅으로 선정됐고, 체육인 중 6번째로 국립 현충원에 안장됐어. 조오련의 오랜 벗, 서울에 상경했을 때 방까지 내줬던 박석기 감독이 이런 이야기를 전해왔어. 저는 학교라는 울타리 속에서 성장을 했어요. 하지만 오련이는 일단 시작 자체가 도전이잖아요. 서울에 올라온 것 자체가 도전일 테고. 잠시도 그 친구는 긴장을 풀지 못했을 거예요. 처음부터 집념과 야망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라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면서 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오련이 덕에 저도 마음속으로 경주를 하면서 더 성장한 것 같습니다. 참 부러우면서도 응원하지 않을 수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이 서글펐어요. -박석기, 조오련 친구 양정고에 있는 조오련 기념비엔 조오련이 했던 말이 적혀 있어. '무모해 보일지 모르지만 시작하는 순간 도전이 된다'라고. 그에게 도전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꼬꼬무 찐리뷰] 아버지 다녀오마 3살 딸과의 약속…펜 대신 총 든 '시인 이육사'
등록일2024.04.05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4일 방송된 '칼날 위에서 노래하다, 이육사'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가수 이무진, 댄서 모니카, 배우 박효주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아버지에 대한 기억 네가 기억하는 '가장 어렸을 때의 기억'이 뭐야? 가장 오래된 기억 하면, 대부분 대여섯 살 때 기억을 떠올릴 거야. 하지만 오늘 소개할 분은 좀 특별해. 기억력이, 어릴 때 기억이 더 좋은 것 같아요. 제가 만 3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그렇게 많지 않아요. 제가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게... 포승줄이 꽁꽁 묶이고 발에는 쇠고랑을 차고 있었어요. 얼굴에는 그 용수, 밀짚으로 된 3단으로 된 용수를 쓰고. 너무나 선명해요. 그게... 저에게는 굉장히 놀랍고 보지 못한 모습이잖아요. 굉장히 충격이었죠. 이게 '용수'야. 원래는 술을 거를 때 쓰는 도구인데, 죄수의 얼굴을 가릴 때도 씌웠어.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봤을 때가 만 3살도 안 됐을 때야. 하지만 그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대.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런 모습을 하셨던 걸까? 할머니의 기억 속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줄게. 때는 1941년 3월 27일. 서울 명륜동에서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졌어. 이날은, 할머니가 세상에 태어난 날이야. 아기는 온 집안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어. 먼저 태어난 언니 오빠가 있었지만 모두 홍역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거든. 그 후에 얻은 자식이니 얼마나 소중하겠어. 아이가 태어났으니 이름을 지어줘야지. 삼촌들이 저마다 이름을 지어주겠다고 나서. 그러자 아버지가 딱 잘라 말했어. 내 딸 이름을 왜 너희들이 짓냐! 다들 나서지 마라 고. 그리고 생후 100일이 되는 날, 아버지는 온 집안 식구들 앞에서 아이의 이름을 공개했어. '기름질 옥(沃)'에 '아닐 비(非)'. 아버지는 딸에게 '옥비'라는 이름을 지어주셨어. 100일 날 아침에 말씀하시기를 '기름질 옥'자에 '아닐 비'자다. 이렇게 고심을 하셔서 지으셨대요. 보통 한문으로 '기름질 옥'자, 이거는 잘 안 쓰거든요. '아닐 비'자는 더욱 안 쓰죠. '기름지지 않다' 이런 뜻이잖아요. '욕심 없이 남에게 배려할 수 있는 사람', 또 간디와 같은 사람이 되라고 그 이름을 지어주셨대요. -이옥비 할머니 옥비 아버지는 안동의 유서 깊은 선비 가문에서 태어났어. 아주 유명한 분의 후손이야. 바로 이분.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 퇴계 이황의 14대손이야. 옥비 아버지는 여섯 형제 중 둘째였는데, 형제들이 모두 시와 서화에 능했대. 옥비 아버지는 형제들 중에서도 가장 엄격했대. 한번 결심을 하면 절대 굽히는 법이 없었다고 해. 할머니가 '둘째 아들이 들어오면 옷깃이 여며진다' 언니들도 삼촌들도 둘째 형님을 굉장히 두려워했대요. 야단을 치지도 않고. 그런데 무언중에 그 매서움이 느껴졌던가 봐요. -이옥비 여사 하지만 옥비에게는 누구보다 자상한 아버지였어. 아침마다 어린 옥비를 안고 놀아주셨대. 옥비 아버지를 기억하고 있는 또 다른 인물이 있어. 제가 조카고, 저의 큰아버님이 신석초 시인이십니다. 우리 큰아버지도 어려서부터 한문을 같이 하면서 한시도 보고, 한문 번역 책들 번역도 하고. 그런 점들이 (옥비 아버지와) 다 맞는단 말이에요, 다 똑같아. 서로 도와줬다는 그런 면들이 형제 같은 거 아니겠나. 서로들 마음이 통했던 것 같아요. -신홍순, 신석초 시인의 조카 신홍순 씨의 큰아버지는 한국 현대 시의 거장, 신석초 시인이야. 옥비 아버지와는 둘도 없는, 절친한 친구였어. 둘 중 하나가 서울을 떠났을 때를 제외하고는 하루도 함께 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해. 신석초 시인이 옥비 아버지에 대해 쓴 글이 있어. 그의 얼굴은 둥근 편이었다. 두렷한 달덩이 같은 얼굴이란 표현은 그와 같은 용모를 말함이리라. 얼굴빛이 그리 희지는 않았지만 유리처럼 맑고 깨끗하고 구김새가 없었다. 한 점 티끌이 없는 얼굴이었다. 그 위에 상냥하고 관대하고 친밀감을 주는 눈과 조용한 말씨, 제 일류의 신사적인 품격을 지니고 있었다. 어떤 모습인지 상상이 돼? 부드럽고 깔끔한 신사 이미지. 상상한 그 모습이 맞는지, 옥비 아버지의 실제 모습을 공개할게. 신석초 시인의 설명 그대로야. 항상 말끔한 정장 차림에 한점 흐트러짐이 없었대. 옥비 아버지의 이름은 이원록. 하지만 사람들이 기억하는 이름은 따로 있어. 장담하는데 너도 아는 사람이야. '꽃', 그리고 '청포도' 하면 생각나는 사람. 옥비의 아버지이자, 신석초 시인의 가장 가까웠던 친구. 그는 바로, 시인 이육사 야. 학교 다닐 때 배웠을 거야. 이육사 시인은 윤동주 시인과 더불어 민족시인, 저항시인이라고 불려. 윤동주 시인은 일제강점기의 암담한 현실 속에서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고 반성하는 시를 썼어. 일제에 체포돼 재판을 받을 땐, 독립에 대한 열망을 당당하게 드러냈어. 저항시인이란 말이 잘 어울려. 이육사 시인은 조금 달라. 한 손에는 펜, 또 다른 손에는 총을 들고, 무장투쟁의 의지를 불태운 투사였어. 평생 17차례 옥고를 치르면서도 단 한 번도 굽히지 않은, 초인과 같은 삶을 사신 분이야. 오늘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그동안 알고 있던 이육사라는 이름이 다르게, 그리고 좀 더 무겁게 느껴질 거야. ▲ 시인 이육사 이육사를 대표하는 시 '청포도' 알지? 교과서에 단골로 실리는 시야. &<청포도&> 내 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려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만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 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육사가 본격적으로 시를 쓰게 된 것은 석초와 만난 이후부터라고 해. 두 사람의 첫 만남은 1935년 봄으로 거슬러 올라가. 석초는 위당 정인보 선생의 집에서 육사를 처음 만났어. 석초의 나이 스물여섯, 육사는 서른하나였어. 나이 차이가 있지만 금방 오래된 친구처럼 가까워졌대. 얼마 후 두 사람은 같은 잡지사에서 일하게 돼. 하지만 운영자금이 부족해서 지면을 채우기가 힘들었다고 해. 그래서 두 사람이 직접 시를 쓰기 시작한 거야. 서로가 쓴 시를 봐주고 고심해 가며 골라서 잡지에 실었어. 신석초 시인은 만약 육사의 권고와 격려가 없었다면 시를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라고 말한 적이 있어. 이렇게 두 시인이 세상에 나오게 된 거야. 두 사람은 글 친구이자 술친구이기도 했어. 육사는 주량이 엄청났대. 전날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꼭두새벽부터 해장술을 마시는데 끄떡없었대. 술을 마실 땐 떠들지도 않았고 취하지도 않았대. 석초는 육사는 조용히 말술을 마시는 시인이었다 라고 표현했어. 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시를 쓰고 술을 마시고 여행도 다녔어. 천년고도 경주를 함께 여행했어. 석초는 육사와 함께 한 날들 중 이때가 가장 즐거웠다고 해. 그런데, 매일같이 붙어 다니던 두 사람이었지만 절대 건드리지 않는 비밀이 있었어. 여느 날처럼 친구들과 어울려 함께 술을 마실 때야. 육사가 갑자기 자리에서 스윽 일어나. 그러더니 내 잠시 다녀올 데가 있네. 자정 전에는 돌아올 테니 마시고들 있게 라며 나가. 어딜 가는지, 무슨 일 때문인지, 누굴 만나는지도 얘기하지 않아. 하지만 돌아온다는 시간은 어기질 않았대. 이런 일이 자주 반복됐어. 친구로서 서운할 수도 있지만, 석초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어. 육사가 말하지 않는다면 다 이유가 있겠지, 굳이 친구의 비밀을 들춰내려고 하지 않았어. 하지만 이런 두 사람에게 이별의 순간이 오고 말아. 1943년 1월 1일. 새해 첫날부터 큰 눈이 내렸어. 아침 일찍 육사가 석초를 찾아와. 이보게. 석초. 우리 눈 밟으러 가세. 그렇게 나선 산책길. 말없이 걷던 육사가 깜짝 놀랄 이야기를 꺼내. 신석초 시인이 그날의 기억을 적은 글이 있어. 조금 뒤에 우리는 청량리에서 홍릉 쪽으로 은(銀) 세계와 같은 눈길을 걸어갔다. 울창한 숲은 온통 눈꽃이 피어 가지들이 용사(龍蛇)로 늘어지고 길 양쪽에 잘 매만져진 화초 위로 화사한 햇빛이 깔려 있었다. 햇볕은 눈 위에 반짝이고 파릇파릇한 햇싹이 금방 돋아날 것만 같았다. '가까운 날에 난 북경엘 가려하네' 하고 육사는 문득 말하였다. 육사가 중국으로 떠난다는 거야. 그 말을 들은 석초는 걱정부터 앞서. 1943년 당시에는 태평양전쟁이 한창이었거든. 일본이 총력전을 펼칠 때였어. 이런 시기에 북경에 간다? 위험을 무릅쓸 만큼 중요한 일이 있는 게 분명해. 석초는 질문을 던지거나 걱정을 털어놓는 대신 가만히 육사의 눈을 쳐다봐. 평소와 다름없이 상냥하고 맑은 눈이야. 육사가 말해. 다음에도 같이 눈을 밟으러 가세. 그 약속을 남기고 육사는 떠났어. 이후, 육사가 돌아왔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은 그해 여름이었어. 석초는 반가운 마음에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 모아 술과 잔을 준비해 놓고 육사를 기다렸어. 그런데 육사가 오질 않아.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한 마음은 점점 커져. 밤늦은 시간이 돼서야 누군가 문을 두드려. 육사의 동생이었어. 그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어. 형님이 일본 형사에게 끌려갔소. 석초는 분하고 원통한 마음에 더 이상 술잔을 들지 못했다고 해. 여기까지가 친구 육사에 대한 신석초 시인의 기억이야. 얼마 후 육사는 어린 옥비가 보는 앞에서 용수를 쓰고 충격적인 모습으로 나타난 거야. 그리고 북경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고 해. 육사는 대체 무슨 일을 했길래 이런 모습으로 끌려간 걸까? 그 답은 석초에게도 밝히지 못했던 비밀과 관련이 있어. ▲ 독립투쟁의 시작 육사의 비밀이 시작된 건, 오래전부터야. 1919년 봄. 종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거리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목청껏 대한독립 만세! 를 외쳤어. 3.1절 만세운동이야. 일제의 식민 통치에 항거하고 조선의 독립을 세계에 알리는 외침이었어. 경성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전국 각지, 해외까지 들불처럼 번져. 시위 횟수만 해도 약 1700 차례였다고 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일제의 폭력 앞에 쓰러지고 모진 고문과 핍박에 쓰러졌어. 그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비폭력만으로는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돼. 무력을 통해서 독립을 쟁취하려는 '의열투쟁'의 시대가 막을 열게 된 거야. 그 시작을 알린 사람은 아주 의외의 인물이었어. 그해 가을, 새로 부임한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남대문 정거장에 내려. 그가 마차로 옮겨 타려는 순간, 누군가 폭탄을 던졌어. 세 명이 사망하고 37명이 부상을 당했지만 사이토 총독은 무사했어. 그런데 이 폭탄을 던진 인물의 정체가 완전 예상 밖이야. 이분의 이름은 강우규 의사. 한약방을 운영하던 만 64세의 노인이었어. 환갑이 훌쩍 넘은 노인이 이런 일을 했다고? 아무도 상상을 못 했어. 일제는 강우규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해. 강우규 의사는 아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해.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그가 던진 폭탄은 청년들의 가슴에 큰 울림을 줬어. 이 의거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의열투쟁이 시작됐거든. 그해 11월, 만주 지린성. 열세 명의 청년이 한자리에 모여. 이들은 일제에 맞서 싸울 비밀결사대를 조직하고 스스로를 '의열단'이라고 칭하게 돼. 의열단은 김원봉을 단장으로 삼고, 일본 고관 암살, 관공서 파괴 등 의열투쟁을 시작해. 전에 '꼬꼬무'에서 소개했던 김상옥 의사, 기억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쌍권총을 들고 홀로 천 명의 경찰과 맞선 인물. 총알이 떨어지자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마지막 남은 한 발로 자결한 김상옥 의사. 그도 의열단 출신이야. 이렇게 의열투쟁이 곳곳에서 일어나던 그때, 청년 이육사는 뭘 하고 있었을까? 1924년 초, 스무 살이 된 육사는 일본으로 가는 배에 올라. 도쿄에 유학을 가기로 결심한 거야. 일본에 대해 더 잘 알기 위해서 그랬던 게 아닐까 싶어. 하지만 당시 일본은 그야말로 지옥이었어. 몇 개월 전 일본에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거든. 바로 '관동대지진'. 1923년 9월 1일, 규모 7.9 이상의 대지진이 관동지방을 뒤흔들었어. 가옥들이 무너지고 곳곳에 화재가 발생했어. 심지어 태풍까지 불어닥쳐서 피해는 더욱 커졌어. 어수선한 가운데 조선인들이 불을 지르고 다닌다 ,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등의 이상한 소문이 퍼져. 일본 내무성도 각 경찰서에 '조선인들이 방화와 약탈을 저지르고 있으니 주의하라'고 지시를 내려. 사회적 동요와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칼끝을 조선인에게 돌린 거야. 그러자 일본인들의 분노는 조선인들을 향하게 돼. 자경단이 조직되고 무자비한 조선인 사냥이 시작됐어. 처참한 학살이 벌어졌어. 공식적인 사망자만 무려 6,661명. 실제 사망자는 그 이상 얼마일지 몰라. 이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육사가 일본 도쿄에 간 거야. 일본에서 사는 조선인들의 모습을 보며 육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현실을 실감하지 않았을까? 다음 해 1월, 육사는 귀국선에 올라. 그리고 친형제들과 함께 비밀결사에 가입해. 이때부터 육사의 독립투쟁이 시작돼. ▲ 투사 이육사 이때부터 육사는 중국과 만주를 오가며 비밀스러운 행보를 이어가. 어떤 임무를 수행했는지는 철저히 비밀에 부쳤어.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첫 시련이 닥치게 돼. 1927년 10월 18일. 대구에 있는 조선은행. 식민지 수탈을 위해 일본이 세운 은행이야. 오전 11시 50분, 은행 앞으로 누군가 자전거를 몰고 와. 그리고는 싣고 온 나무상자 중 하나를 들고 은행 안으로 들어갔어. 은행 지점장 앞으로 온 선물이라며 건넨 상자. 그 안에는 꿀이 담긴 항아리가 있었어. 은행원이 상자를 받아 드는데, 뭔가 타는 냄새가 나. 상자를 열자 꿀 항아리와 타들어 가는 도화선이 보여. 꿀 항아리로 가장한 폭탄이었어. 은행원은 황급히 도화선을 잘라냈어. 일단 폭발은 막아낸 거야. 누군가가 식민지 경제 수탈의 본거지, 조선은행 대구 지점장을 노린 걸로 보여. 신고를 받은 대구경찰서에서 일제 경찰 수백 명이 곧바로 출동해. 사라진 배달부를 쫓고 은행 주변에 경계망을 펼쳐. 그때, 한 경찰이 뭔가를 가리켜. 은행 정문 앞에 서 있던 자전거야. 그 뒤에는 '꿀'이라고 적힌 상자가 세 개 실려있어. 지점장에게 배달된 나무상자와 똑같아. 상자를 확인하기 위해 다가간 순간, 쾅!!!! 자전거 뒤에 있던 상자들이 일제히 폭발해. 대구 전체가 울릴 만큼 커다란 폭발이었다고 해. 일제 경찰은 의심 가는 용의자들을 잡아들여. 그중에는 우리가 아는 인물이 끼여 있었어. '이원록', 바로 이육사야. 육사뿐만 아니라 형제들까지 체포돼. 집에 있는데도 호외가 막 나고 그러더래요. 그래서 어른들이 걱정하고 이게 무슨 일인가 그러니까 조선은행 폭탄 사건이 일어났다고. 꿀단지에 쓰인 글씨가 있었는데, 그 글이 누가 썼는지 삼촌 글씨와 똑같았대요. 우리 집안 어른들이 4형제가 다 붙들려 간 거잖아요. 우린 항상 요시찰 인물이니까, 무슨 일만 터졌다 하면 일단 먼저 구속시키고 보는 거예요. -이옥비, 이육사의 딸 육사와 형제들은 이 의거와 관련이 없었어. 근데 이렇게 큰 사건이 벌어졌으니 범인을 빨리 잡아야 하잖아? 그래서 경찰은 전부터 주시하고 있었던 육사와 형제들에게는 거짓 혐의를 씌운 거야. 중국에 갔다가 막 돌아온 육사에게는 폭탄을 밀수한 혐의를 씌우고, 폭탄 상자에 적힌 글씨가 동생 원일의 필체와 비슷하다며 억지를 부렸어. 범행을 인정하라며 가혹한 고문과 매질이 가해져. 하지만 육사는 끝까지 굽히지 않았대. 그렇게 1년 7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 끝에 육사는 석방돼. 그런데 그를 풀어준 이유가 기가 막혀. 공판에 회부한 범죄의 혐의가 없다. 아무런 혐의점이 없대. 아무런 증거도 없이 1년 7개월 동안 붙잡아놓고 고문한 거야. 참 어이가 없지. 이런 일을 겪고도 육사는 독립운동에 더욱 매진해. 그리고 이때부터 이름을 바꿔. 본명 이원록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이름, 이육사로. 일제가 붙여준 수인번호 '264'를 본인의 이름으로 삼은 거야. 더 당당하겠다는 다짐, 이 고통을 잊지 않겠다는 각오의 뜻이 아니었을까. 첫 옥고를 치르고 얼마 되지 않아 육사는 또다시 잡혀 들어가. 광주에서 학생들이 항일운동을 일으켰어. 이 사건이 전국으로 번질까 봐 일제는 요시찰인물들을 또다시 잡아들인 거야.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미리 붙잡아둔 거지. 늘 무슨 일만 딴 데서 터져도 아버지는 항상 요시찰인물의 명단에 들어있기 때문에 제일 먼저 피습하는 거죠. -이옥비, 이육사 딸 열흘 후에 풀려난 육사는 이듬해 또다시 체포되고 말아. 대구 시내에 일제를 배척하는 격문이 뿌려졌거든. 육사는 대구 격문 사건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돼서 또 한 번 옥고를 치러야 했어. 이때 받은 고문이 가장 혹독했다고 해. 대나무 있잖아요. 삐쭉삐쭉 잘라놓은걸, (다리 사이로 끼워서) 꿇어앉혀 놓고 훑으면 살이 다 떨어지잖아요. 나쁜 짓은 다 했지. 일본 사람들이. -이옥비, 이육사 딸 물고문에 전기 고문까지. 옥비 어머니는 매주 새 옷을 형무소에 넣어드렸어. 그러면 육사가 입던 옷을 내주는데 흰옷이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고 해. 옥고를 치를수록 육사의 몸은 점점 망가져 갔어.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으면 걷지 못할 정도였대. 하지만 그의 정신은 꺾이지 않았어. 그 무렵 육사의 모습을 보여줄게. 가장 최근에 발견된 육사의 사진이야. 한창 독립의 의지를 불태우던 20대 시절의 모습이야. 눈빛에서 강한 결의가 느껴져. ▲ 펜 대신 총을 든 이육사 1932년 봄, 육사가 갑자기 사라져. 일본 경찰은 육사의 행적을 찾지 못하자 바로 수배령을 내려. 육사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육사는 만주로 가서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천진과 북경을 거쳐 그해 가을, 남경에 도착해. 이곳에 온 목적은 '조선혁명 군사정치간부학교' 때문이야. 의열단이 세운 군사간부 양성기관이야. 사실 많은 이들이 그동안 지속해 온 의열투쟁의 한계를 느꼈어. 일제에 저항하는데 소수의 의거가 아니라, 이제는 대규모 부대를 결성해서 일본과 독립전쟁을 벌이기로 결심한 거야. 그러려면 병사들과 이들을 이끌 지휘관이 필요해. 이 군사학교는 병사들을 지휘할 독립군 장교를 양성하는 곳이야. 육사는 이곳에 1기생으로 입교해. 그리고 최고의 지휘관이 위한 군사훈련을 받아. 당시 일과표를 보여줄게. 매일 아침 여섯 시 기상해서 오전에는 군사학과 정치학 수업을 들어. 전쟁에서는 전략과 머리싸움도 중요하니까. 오후에는 고된 야외훈련을 받아야 해. 사격 훈련, 폭탄 제조, 암살 등의 비밀공작을 몸에 익히는 시간이야. 밤에는 중국어 수업과 토론수업이 있어. 신분이 노출되지 않도록 중국어를 써야 했거든. 밤 11시까지 빡빡하게 짜여져 있는 스케줄. 선비 집안에서 자란 육사가, 훈련을 잘 해냈을까? 이정기(독립운동가) 선생님이 그 이야기를 하시더라고. '너희 아버지는 사격의 명수일뿐더러 말을 타고 달릴 때도 사격을 하면 백발백중 명중하는 명사수였다'. 권총을 여섯 자루가 왔는데 밤에 호롱불을 꺼 놓고도 다 해체해서 조립하는 그런 걸 아주 정확하게 해냈다고. 변장술도 능했고, '육사는 언어의 마술사다' 중국어, 일어, 에스페란토어도 배우셨더라고요. -이옥비, 이육사 딸 펜이 아니라 총을 쥐고, 깔끔한 양복 대신 거친 군복을 입은 육사의 모습. 어때, 상상이 돼? 6개월의 훈련을 마친 대원들은 각자 임무를 부여받고 흩어졌어. 육사에게는 조선으로 돌아가서 의열단을 위해 사력을 다하라 는 임무가 부여됐어. 그렇게 육사는 경성으로 잠입했어. 청년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군사간부학교 2기생을 모집하라는 임무를 맡은 거야. 그런데 채 뜻을 펴기도 전에 육사는 또다시 체포되고 말아. 정보가 샜던 거야. 1기 졸업생들이 여기저기서 검거돼. 이 사진은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있을 때 육사의 모습이야. 몰라보게 초췌해진 모습이 마음 아프지? 모진 고초를 겪고 풀려난 후, 육사는 일생의 지기를 만나게 돼. 그게 바로, 1935년 위당 정인보 선생의 집에서 만난 신석초 시인이야. 처음에 만났을 때 아름다운 문인으로서 대했지만, 육사는 이미 그전에, 이 모든 과정을 겪었던 거야. '시인'이기 전에 '투사'였어. 하지만 육사는 석초에게 자신의 임무에 대해 절대 이야기하지 않았어. 자신으로 인해 친구가 해를 입을까 봐, 그걸 걱정했던 게 아닐까 싶어. 두 사람 사이에 알려지지 않은 일화가 있어. 육사가 중국에 갔다 왔던가. 어느 추운 날에 돌아왔는데, 굉장히 추운데 외투도 안 입고. 추워 보이고 막 그렇게 실제 추워하고 그래서 (큰아버지가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줬다고. 우리 어머니가 어디서 잃어버리고 오신 줄 알고 '아이고 왜 외투는 안 입고 들어오세요' 깜짝 놀라서 그러니까. '육사가 너무 추워 보이고 불쌍해서 아무 이유도 묻지 않고 내가 그냥 윗도리를 벗어줬다'.. -신홍순, 신석초 조카 이번에도 굳이 이유를 묻지 않은 석초. 석초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육사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그래도 석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 칼날 위에서 노래하다 석초와 만난 후 육사는 강렬한 시들을 써냈어. 그리고 시를 쓰는 것에 대해 이런 글을 남겼어. 정면으로 달려드는 표범을 겁내서는 한 발자국이라도 물러서지 않으려는 내 길을 사랑할 뿐이오. 그렇소이다. 내 길을 사랑하는 마음, 그것은 나 자신에 희생을 요구하는 노력이오. 행동은 말이 아니고, 나에게는 시를 생각한다는 것도 행동이 되는 까닭이오. 이래서 나는 내 기백을 키우고 길러서 금강심에서 나오는 내 시를 쓸지언정 유언은 쓰지 않겠소. 시 또한, 그가 현실에 맞서는 방법이었어. 이뿐만이 아니야. 육사는 자신이 쓴 시를 직접 해석한 적도 있어. 시인이 직접 자신의 시를 해석한다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지. 맨 처음 읽었던 '청포도' 기억나지? 그 시에 담긴 의미를 이렇게 이야기했대. 내 '고장'은 조선이고 '청포도'는 우리 민족인데, 청포도가 익어가는 것처럼 우리 민족도 익어간다. 그리고 곧 일본도 끝장난다. 육사는 한 치의 의심 없이 믿었던 것 같아. 일본의 패망, 그리고 조선의 독립을... 하지만 상황은 점점 더 안 좋아져. 일본은 전쟁을 지속하기 위해서 조선민족 말살정책에 박차를 가해. 내선일체, 신사참배 등 한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해서 조선인을 일본인에 동화시킨다는 거야. 일제강점기 중에서도 최악의 시기가 닥쳐왔어.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도 일본식 이름으로 바꿔야 해. 우리말과 글을 쓸 수도 없어. 글을 빼앗긴 문인들은 붓을 꺾거나 변절을 선택해. 육당 최남선, 춘원 이광수와 같은 민족문학의 거두들마저 친일로 돌아서고 말았어. 암담하기만 한 그 시기, 육사는 이런 시를 썼어. &<절정&>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보다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에 갔을 때를 회상하며 쓴 것 같아. 이 시의 제목은 '절정'이야. 육사는 이 시기를 절정이라 생각했나 봐. 이때만 지나가면 봄이 온다는 희망을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 무렵, 육사에게 기쁜 소식이 찾아와. 사랑스러운 딸, 옥비가 태어난 거야. 일찍이 1남 1녀를 홍역으로 잃었던 육사였어. 어렵게 얻은 딸인 만큼 얼마나 예뻤겠어. 독립운동 하느라 집에 자주 오지 못했지만, 집에 머물 때면 아침마다 옥비를 안고 놀아주곤 했대. 저희 집에는 다 글을 하는 사람이고 그러니까 낙관이 많았대요. 그래서 이렇게 펼쳐놓고 아버지가 '셋째 삼촌 낙관을 골라라' 이렇게 하나하나 보고 셋째 삼촌 낙관을 골라내면 맞으니까, 아버지가 그게 재미있어서 집에 계실 때는 아침에 저를 불러놓고 그런 걸 좀 자주 했고… -이옥비, 이육사 딸 생각만 해도 다정한 부녀의 모습이 떠오르지? 하지만 육사에게는 가족보다 더욱 중요한 일이 있었어. 바로 조국의 독립. 어린 딸을 두고 다시 중국으로 가야 했어. 떠나기 전에 육사는 옥비를 데리고 어딘가를 갔어. 당시 종로에 있던 조선에서 가장 큰 백화점인 화신백화점이었어. 옥비를 두고 떠나는 게 미안해서였을까. 여기서 딸을 위한 선물을 사. 핑크색 모자와 벨벳 투피스, 그리고 까만 구두. 우리가 형편이 굉장히 어려운 형편이었거든요. 화신백화점에 가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어머니랑 출타할 때는 꼭 그 옷을 입으면 아이들이 그게 예쁘다고 '한 번만 벗어봐라 입어보자' 막 그랬던 그런 기억이 나거든요. 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받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은 옷이잖아요. 마지막 선물이었죠. -이옥비 여사, 이육사 딸 그리고 육사는 친구 석초를 찾아가 함께 눈을 밟으며 작별인사를 건네. 그렇게 북경으로 위험한 여정을 떠났던 거야. 딸과 친구를 두고 떠나는 육사의 마음, 상상이 되니? 북경에 도착한 육사는 한 사람을 찾아가. 육사의 먼 친척이자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던 여성 독립운동가 이병희야. 북경 오실 때마다 오고 삼촌들도 이제 우리 집에 일가니까 다. 그러니까 찾아오시고 했는데, 하루는 육사가 날 찾아왔데. 찾아와서 '병희야. 나가자' 그래. '예. 나갑시다'. 그리고서는 '중경에서 너를 데려오라는 명령이 내려왔는데 너 갈래?' 그러데. '가죠' 그래서 '너 안내원도 왔다. 너 데리고 갈' 그래서 '널 연안으로 보내기로 했다. -故 이병희 생전 인터뷰 中 중경에는 당시 임시정부가 있었어. 연안에는 김원봉이 만든 조선의용대가 있었다고 해. 육사는 임시정부와 조선의용대 사이를 연결하는 임무를 맡은 걸로 보여.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일이 생긴 거야. 작년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와 큰형의 첫 번째 제사가 다가오고 있었거든. 아버지도 세상을 떠난 터라 이젠 육사가 집안의 어른이야. 동생들한테만 맡겨놓을 순 없잖아. 하지만 막상 조선에 돌아가자니 아주 위험해. 경찰이 눈에 불을 켜고 있을 게 뻔하니까. 그럼 육사는 어떻게 했을까? 1943년 7월. 육사는 고향마을로 돌아갔어. 어머니와 형의 제사를 치른 후, 가족을 만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어. 그리고 일본 헌병대에 붙잡히고 말았어. ▲ 육사의 마지막 외침 20일간 조사를 받은 육사는 북경으로 압송이 결정돼. 손에는 포승줄이 묶이고 발에는 쇠고랑이 채워져. 얼굴에는 밀짚으로 엮은 용수가 씌워져. 육사가 북경으로 압송된다는 소식을 듣고 옥비 어머니는 어린 옥비를 안고 기다렸어. 저만치 용수로 얼굴을 가린 남편이 보이자 어린 옥비를 높이 쳐들어. 가기 전에 딸의 얼굴이라도 보고 가시라고... 그러자 육사가 걸음을 멈춰. 어린 옥비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서더니 작별 인사를 남겨. 아버지, 다녀오마. 그렇게 육사는 기차에 실려 북경으로 압송됐어. 아버지가 기차를 타면 떠나시는 거잖아요.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아버지 다녀오마' 이렇게 얘기하고 곧 오실 것처럼, '곧 다녀오마' 그런 거는 아무리 위급해도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그런 말이었죠. -이옥비, 이육사 딸 그날 이후 육사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은 딱 한 사람이야. 바로 북경에 남아있던 육사의 친척이자 독립운동가 병희. 병희는 걱정이 태산이었어. 육사가 돌아오기로 한 날짜가 지났는데 안 오니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길이 없으니 답답해. 그러던 어느 날, 일본 형사가 병희를 찾아와. 나하고 가서 얘기 좀 하자 며 병희를 잡아끌어. 그렇게 형사를 따라나선 병희는 지하감옥에 갇히고 말아. 그리고 그곳에서 육사를 만나. 그 순간 '이제 끝났구나' 생각이 들었대. 그 후 두 사람은 끔찍한 고문에 시달려야 했어. 그런데 얼마 후, 병희는 풀려나게 돼. 알고 보니, 육사가 자신이 보증한다며, 병희는 자신의 일과는 상관없으니 풀어달라 한 거야. 육사의 보증으로 병희는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어. 하지만 육사는 차가운 지하감옥에 남았어. 계절은 어느새 겨울이야. 육사는 잡혀 올 때 그대로 여름옷 차림이었대. 방에서는 연신 콜록거리는 기침 소리가 들렸다고 해. 병희가 풀려난 지 닷새쯤 지났을 때, 형무소에서 연락이 왔어. 이육사의 시신을 찾아가시오 라고. 날 찾아왔더라고. 찾아와서 육사가 죽었는데, 오늘 새벽 5시에 돌아가셨다 그러니까. 너밖에는 맡을 사람이 없으니 시체를 찾아가라 그러대. -故 이병희, 독립운동가 1944년 1월 16일 새벽. 육사는 북경 지하감옥에서 생을 마감했어. 그의 나이 마흔 살. 조국의 광복을 불과 1년 앞두고 가혹한 고문 끝에 숨을 거둔 거야. 그날 저녁, 병희는 형무소를 찾았어. 딱 들어가니까 육사가, 시체가 관에 있데. 그런데 관뚜껑을 딱 여니까 얼굴이 그냥 빨개지면서 코에서 피가 막 주르륵 나면서 눈을 뜨고 죽었더라고. 뒤처리는 내가 다 할 테니까 안심하고 곱게 가시라고. 그리고 (눈을) 쓰다듬으니까 다시 얼굴이 하얘지면서 죽은 사람으로 변하고 눈을 감더라고. -故 이병희, 독립운동가 아무 걱정 마시오. 조국의 독립은 후손들에게 맡기시고. 편히 가시오 라고 말하며 육사의 부릅뜬 눈을 세 번 쓰다듬자 그제야 스르르 눈을 감았다고 해. 갑자기 전보가 날아왔어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어머니가 방 하나를 달라고 그래서 머리를 풀고 그렇게 우시더라고요. 엄마가 우니까 나도 따라서 정확하게도 모르는데 울었죠. 같이 울고… -이옥비, 이육사 딸 병희는 육사의 시신을 수습하고 그가 남긴 유품을 챙겼어. 유품이라 해봐야 만년필 한 자루와 마분지 조각뿐이었어. 그 마분지에는 육사가 남긴 시가 쓰여 있었어. &<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참아 이곳을 범하든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육사는 시를 쓸지언정 유언을 쓰지 않겠다고 했잖아. 그 말처럼 유언 대신 시를 남기고 가신 거야. '광야', 우리에게도 너무 익숙한 시인데, 다른 느낌이지? 이 시에는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육사의 이야기, 독립에 대한 강렬한 염원이 담겨있어. ▲ 그가 세상에 남긴 것 육사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 그토록 기다리던 해방을 맞이해. 모두가 길거리로 나와 만세를 외쳤어. 그리고 육사가 순국한 지 2년 후인 1946년. 그의 첫 시집이 세상에 나와. 육사의 동생이 형이 남긴 시들을 모아 시집을 낸 거야. 석초를 비롯한 육사의 친구들이 서문을 적었어. 육사가 북경 옥사에서 영면한 지 벌써 2년이 가까워 온다. 그가 세상에 남기고 간 스무여 편의 시를 모아 한 권의 책을 만들었다. 그는 한평생 꿈을 추구한 사람이다. 시가 세상에 묻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안타까이 공중에 그린 무형한 꿈이 형태와 의상을 갖추기엔 고인의 목숨이 너무 짧았다. 신석초 시인은 평생 시와 함께 사시다가 1975년, 66세의 나이로 돌아가셨어. 조카 신홍순 씨는 유품을 정리하다가 뭔가 특별한 걸 발견했어. 생전에 육사가 큰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였어. 잦은 고문 때문에 폐병을 얻었던 육사가 요양차 내려간 경주에서 보낸 글이야. 석초 형! 내가 모든 의례와 형식을 떠나 먼저 붓을 들어 투병의 일단을 호소함은 얼마나 나의 생활이 고독한가를 형이 짐작하여 줄 줄 생각한다. 석초 형! 나는 지금 이 넓다는 천지에 진실로 내 하나만이 남아있는 외로운 넋인 듯 하다는 것도 형은 짐작하리라. 그래서 군(君)이 먼저 편지라도 한 장 하여주리라고 바라기는 하면서도 형의 게으름에 가망이 없어 내 먼저 주제넘게 호소치 않는가? 강하고 엄격한 육사가, 외롭다고 투정도 부리면서 왜 먼저 편지를 쓰지 않냐고 점잖게 보채기도 하지. 인간적인 모습을 거리낌 없이 내보일 만큼 두 사람의 사이가 가까웠던 거 같아. 조금 늦었지만 이제는 두 사람이 다시 만나 못다 나눈 술잔을 나누고 있지 않을까. 그만큼 따뜻하게 그분들이 지냈기 때문에 그랬던 거 아니겠냐. 이렇게 생각해요. 지금 하늘에서 만나셨겠지? 그래서 두 분이 역시 가깝게 시를 왔다 갔다 하고 쓰고 계실 거 같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신홍순, 신석초의 조카 그리고 이옥비 할머니는, 아버지가 남겨준 이름처럼 여전히 욕심 없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신대. 아버지가 쓰신 시가 좋다고 그러지만은, 내게는 지게꾼이라도 어깨를 두들기면서 '얘야 밥 먹자' 이렇게 다독거려주는 아버지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했었거든요. 그러니까 철이 없어서 그랬죠. 그때는... 그렇지만 이제는 저도 부끄러움이 없는 그런 삶으로 살아야 되지 않을까. 제 이름이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이, 욕심 없는 그런 이름이잖아요. 그래서 저는 '조금 모자란 듯하게 사는 게 제 삶이다' 이렇게 생각해요. -이옥비, 이육사 딸 아까 이육사라는 이름이 수인번호를 따서 만들었다고 했잖아. '二六四'라는 한자를 쓰지. 그런데 다른 한자를 쓰기도 해. '죽일 육' '역사 사', 역사를 죽이겠다는 뜻이야. 일제 치하의 그 역사를 부정하겠다는 거야. 집안 어른들은 이걸 보고 염려를 드러냈대. 괜히 화를 입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육사는 한 글자를 바꿨대. '땅 육'으로. 이게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육사의 한자야. 근데 조금 특이한 한자를 쓰신 적이 있어. '고기 육, 설사할 사'로. 뜻만 직역하면, '고기를 먹고 설사한다'는 거야. 이게 일제 치하의 세상을 조롱하는 의미로 해석되고 있어. 그런데 이런 의미로도 해석돼. 딸에게 기름지게 살지 말라는 의미로 '옥비'라는 이름을 지어줬잖아. 비슷한 의미로, '평생 편안하고 기름진 삶을 살지 않겠다'는 각오가 담겨 있는 건 아닐까?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
[꼬꼬무 찐리뷰] 아버지 다녀오마 3살 딸과의 약속…펜 대신 총 든 '시인 이육사'
등록일2024.04.05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4일 방송된 '칼날 위에서 노래하다, 이육사'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가수 이무진, 댄서 모니카, 배우 박효주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아버지에 대한 기억 네가 기억하는 '가장 어렸을 때의 기억'이 뭐야? 가장 오래된 기억 하면, 대부분 대여섯 살 때 기억을 떠올릴 거야. 하지만 오늘 소개할 분은 좀 특별해. 기억력이, 어릴 때 기억이 더 좋은 것 같아요. 제가 만 3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그렇게 많지 않아요. 제가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게... 포승줄이 꽁꽁 묶이고 발에는 쇠고랑을 차고 있었어요. 얼굴에는 그 용수, 밀짚으로 된 3단으로 된 용수를 쓰고. 너무나 선명해요. 그게... 저에게는 굉장히 놀랍고 보지 못한 모습이잖아요. 굉장히 충격이었죠. 이게 '용수'야. 원래는 술을 거를 때 쓰는 도구인데, 죄수의 얼굴을 가릴 때도 씌웠어.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봤을 때가 만 3살도 안 됐을 때야. 하지만 그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대.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런 모습을 하셨던 걸까? 할머니의 기억 속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줄게. 때는 1941년 3월 27일. 서울 명륜동에서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졌어. 이날은, 할머니가 세상에 태어난 날이야. 아기는 온 집안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어. 먼저 태어난 언니 오빠가 있었지만 모두 홍역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거든. 그 후에 얻은 자식이니 얼마나 소중하겠어. 아이가 태어났으니 이름을 지어줘야지. 삼촌들이 저마다 이름을 지어주겠다고 나서. 그러자 아버지가 딱 잘라 말했어. 내 딸 이름을 왜 너희들이 짓냐! 다들 나서지 마라 고. 그리고 생후 100일이 되는 날, 아버지는 온 집안 식구들 앞에서 아이의 이름을 공개했어. '기름질 옥(沃)'에 '아닐 비(非)'. 아버지는 딸에게 '옥비'라는 이름을 지어주셨어. 100일날 아침에 말씀하시기를 '기름질 옥'자에 '아닐 비'자다. 이렇게 고심을 하셔서 지으셨대요. 보통 한문으로 '기름질 옥'자, 이거는 잘 안 쓰거든요. '아닐 비'자는 더욱 안 쓰죠. '기름지지 않다' 이런 뜻이잖아요. '욕심 없이 남에게 배려할 수 있는 사람', 또 간디와 같은 사람이 되라고 그 이름을 지어주셨대요. -이옥비 할머니 옥비 아버지는 안동의 유서 깊은 선비 가문에서 태어났어. 아주 유명한 분의 후손이야. 바로 이분.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 퇴계 이황의 14대손이야. 옥비 아버지는 여섯 형제 중 둘째였는데, 형제들이 모두 시와 서화에 능했대. 옥비 아버지는 형제들 중에서도 가장 엄격했대. 한번 결심을 하면 절대 굽히는 법이 없었다고 해. 할머니가 '둘째 아들이 들어오면 옷깃이 여며진다' 언니들도 삼촌들도 둘째 형님을 굉장히 두려워했대요. 야단을 치지도 않고. 그런데 무언중에 그 매서움이 느껴졌던가 봐요. -이옥비 여사 하지만 옥비에게는 누구보다 자상한 아버지였어. 아침마다 어린 옥비를 안고 놀아주셨대. 옥비 아버지를 기억하고 있는 또 다른 인물이 있어. 제가 조카고, 저의 큰아버님이 신석초 시인이십니다. 우리 큰아버지도 어려서부터 한문을 같이 하면서 한시도 보고, 한문 번역 책들 번역도 하고. 그런 점들이 (옥비 아버지와) 다 맞는단 말이에요, 다 똑같아. 서로 도와줬다는 그런 면들이 형제 같은 거 아니겠나. 서로들 마음이 통했던 것 같아요. -신홍순, 신석초 시인의 조카 신홍순 씨의 큰아버지는 한국 현대 시의 거장, 신석초 시인이야. 옥비 아버지와는 둘도 없는, 절친한 친구였어. 둘 중 하나가 서울을 떠났을 때를 제외하고는 하루도 함께 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해. 신석초 시인이 옥비 아버지에 대해 쓴 글이 있어. 그의 얼굴은 둥근 편이었다. 두렷한 달덩이 같은 얼굴이란 표현은 그와 같은 용모를 말함이리라. 얼굴빛이 그리 희지는 않았지만 유리처럼 맑고 깨끗하고 구김새가 없었다. 한 점 티끌이 없는 얼굴이었다. 그 위에 상냥하고 관대하고 친밀감을 주는 눈과 조용한 말씨, 제 일류의 신사적인 품격을 지니고 있었다. 어떤 모습인지 상상이 돼? 부드럽고 깔끔한 신사 이미지. 상상한 그 모습이 맞는지, 옥비 아버지의 실제 모습을 공개할게. 신석초 시인의 설명 그대로야. 항상 말끔한 정장 차림에 한점 흐트러짐이 없었대. 옥비 아버지의 이름은 이원록. 하지만 사람들이 기억하는 이름은 따로 있어. 장담하는데 너도 아는 사람이야. '꽃', 그리고 '청포도' 하면 생각나는 사람. 옥비의 아버지이자, 신석초 시인의 가장 가까웠던 친구. 그는 바로, 시인 이육사 야. 학교 다닐 때 배웠을 거야. 이육사 시인은 윤동주 시인과 더불어 민족시인, 저항시인이라고 불려. 윤동주 시인은 일제강점기의 암담한 현실 속에서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고 반성하는 시를 썼어. 일제에 체포돼 재판을 받을 땐, 독립에 대한 열망을 당당하게 드러냈어. 저항시인이란 말이 잘 어울려. 이육사 시인은 조금 달라. 한 손에는 펜, 또 다른 손에는 총을 들고, 무장투쟁의 의지를 불태운 투사였어. 평생 17차례 옥고를 치르면서도 단 한 번도 굽히지 않은, 초인과 같은 삶을 사신 분이야. 오늘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그동안 알고 있던 이육사라는 이름이 다르게, 그리고 좀 더 무겁게 느껴질 거야. ▲ 시인 이육사 이육사를 대표하는 시 '청포도' 알지? 교과서에 단골로 실리는 시야. &<청포도&> 내 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려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만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 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육사가 본격적으로 시를 쓰게 된 것은 석초와 만난 이후부터라고 해. 두 사람의 첫 만남은 1935년 봄으로 거슬러 올라가. 석초는 위당 정인보 선생의 집에서 육사를 처음 만났어. 석초의 나이 스물여섯, 육사는 서른하나였어. 나이 차이가 있지만 금방 오래된 친구처럼 가까워졌대. 얼마 후 두 사람은 같은 잡지사에서 일하게 돼. 하지만 운영자금이 부족해서 지면을 채우기가 힘들었다고 해. 그래서 두 사람이 직접 시를 쓰기 시작한 거야. 서로가 쓴 시를 봐주고 고심해 가며 골라서 잡지에 실었어. 신석초 시인은 만약 육사의 권고와 격려가 없었다면 시를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라고 말한 적이 있어. 이렇게 두 시인이 세상에 나오게 된 거야. 두 사람은 글 친구이자 술친구이기도 했어. 육사는 주량이 엄청났대. 전날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꼭두새벽부터 해장술을 마시는데 끄떡없었대. 술을 마실 땐 떠들지도 않았고 취하지도 않았대. 석초는 육사는 조용히 말술을 마시는 시인이었다 라고 표현했어. 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시를 쓰고 술을 마시고 여행도 다녔어. 천년고도 경주를 함께 여행했어. 석초는 육사와 함께 한 날들 중 이때가 가장 즐거웠다고 해. 그런데, 매일같이 붙어 다니던 두 사람이었지만 절대 건드리지 않는 비밀이 있었어. 여느 날처럼 친구들과 어울려 함께 술을 마실 때야. 육사가 갑자기 자리에서 스윽 일어나. 그러더니 내 잠시 다녀올 데가 있네. 자정 전에는 돌아올 테니 마시고들 있게 라며 나가. 어딜 가는지, 무슨 일 때문인지, 누굴 만나는지도 얘기하지 않아. 하지만 돌아온다는 시간은 어기질 않았대. 이런 일이 자주 반복됐어. 친구로서 서운할 수도 있지만, 석초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어. 육사가 말하지 않는다면 다 이유가 있겠지, 굳이 친구의 비밀을 들춰내려고 하지 않았어. 하지만 이런 두 사람에게 이별의 순간이 오고 말아. 1943년 1월 1일. 새해 첫날부터 큰 눈이 내렸어. 아침 일찍 육사가 석초를 찾아와. 이보게. 석초. 우리 눈 밟으러 가세. 그렇게 나선 산책길. 말없이 걷던 육사가 깜짝 놀랄 이야기를 꺼내. 신석초 시인이 그날의 기억을 적은 글이 있어. 조금 뒤에 우리는 청량리에서 홍릉 쪽으로 은(銀) 세계와 같은 눈길을 걸어갔다. 울창한 숲은 온통 눈꽃이 피어 가지들이 용사(龍蛇)로 늘어지고 길 양쪽에 잘 매만져진 화초 위로 화사한 햇빛이 깔려 있었다. 햇볕은 눈 위에 반짝이고 파릇파릇한 햇싹이 금방 돋아날 것만 같았다. '가까운 날에 난 북경엘 가려 하네' 하고 육사는 문득 말하였다. 육사가 중국으로 떠난다는 거야. 그 말을 들은 석초는 걱정부터 앞서. 1943년 당시에는 태평양전쟁이 한창이었거든. 일본이 총력전을 펼칠 때였어. 이런 시기에 북경에 간다? 위험을 무릅쓸 만큼 중요한 일이 있는 게 분명해. 석초는 질문을 던지거나 걱정을 털어놓는 대신 가만히 육사의 눈을 쳐다봐. 평소와 다름없이 상냥하고 맑은 눈이야. 육사가 말해. 다음에도 같이 눈을 밟으러 가세. 그 약속을 남기고 육사는 떠났어. 이후, 육사가 돌아왔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은 그해 여름이었어. 석초는 반가운 마음에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 모아 술과 잔을 준비해 놓고 육사를 기다렸어. 그런데 육사가 오질 않아.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한 마음은 점점 커져. 밤늦은 시간이 돼서야 누군가 문을 두드려. 육사의 동생이었어. 그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어. 형님이 일본 형사에게 끌려갔소. 석초는 분하고 원통한 마음에 더 이상 술잔을 들지 못했다고 해. 여기까지가 친구 육사에 대한 신석초 시인의 기억이야. 얼마 후 육사는 어린 옥비가 보는 앞에서 용수를 쓰고 충격적인 모습으로 나타난 거야. 그리고 북경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고 해. 육사는 대체 무슨 일을 했길래 이런 모습으로 끌려간 걸까? 그 답은 석초에게도 밝히지 못했던 비밀과 관련이 있어. ▲ 독립투쟁의 시작 육사의 비밀이 시작된 건, 오래전부터야. 1919년 봄. 종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거리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목청껏 대한독립 만세! 를 외쳤어. 3.1절 만세운동이야. 일제의 식민 통치에 항거하고 조선의 독립을 세계에 알리는 외침이었어. 경성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전국 각지, 해외까지 들불처럼 번져. 시위 횟수만 해도 약 1700 차례였다고 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일제의 폭력 앞에 쓰러지고 모진 고문과 핍박에 쓰러졌어. 그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비폭력만으로는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돼. 무력을 통해서 독립을 쟁취하려는 '의열투쟁'의 시대가 막을 열게 된 거야. 그 시작을 알린 사람은 아주 의외의 인물이었어. 그해 가을, 새로 부임한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남대문 정거장에 내려. 그가 마차로 옮겨 타려는 순간, 누군가 폭탄을 던졌어. 세 명이 사망하고 37명이 부상을 당했지만 사이토 총독은 무사했어. 그런데 이 폭탄을 던진 인물의 정체가 완전 예상 밖이야. 이분의 이름은 강우규 의사. 한약방을 운영하던 만 64세의 노인이었어. 환갑이 훌쩍 넘은 노인이 이런 일을 했다고? 아무도 상상을 못 했어. 일제는 강우규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해. 강우규 의사는 아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해.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그가 던진 폭탄은 청년들의 가슴에 큰 울림을 줬어. 이 의거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의열투쟁이 시작됐거든. 그해 11월, 만주 지린성. 열세 명의 청년이 한자리에 모여. 이들은 일제에 맞서 싸울 비밀결사대를 조직하고 스스로를 '의열단'이라고 칭하게 돼. 의열단은 김원봉을 단장으로 삼고, 일본 고관 암살, 관공서 파괴 등 의열투쟁을 시작해. 전에 '꼬꼬무'에서 소개했던 김상옥 의사, 기억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쌍권총을 들고 홀로 천 명의 경찰과 맞선 인물. 총알이 떨어지자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마지막 남은 한 발로 자결한 김상옥 의사. 그도 의열단 출신이야. 이렇게 의열투쟁이 곳곳에서 일어나던 그때, 청년 이육사는 뭘 하고 있었을까? 1924년 초, 스무 살이 된 육사는 일본으로 가는 배에 올라. 도쿄에 유학을 가기로 결심한 거야. 일본에 대해 더 잘 알기 위해서 그랬던 게 아닐까 싶어. 하지만 당시 일본은 그야말로 지옥이었어. 몇 개월 전 일본에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거든. 바로 '관동대지진'. 1923년 9월 1일, 규모 7.9 이상의 대지진이 관동지방을 뒤흔들었어. 가옥들이 무너지고 곳곳에 화재가 발생했어. 심지어 태풍까지 불어닥쳐서 피해는 더욱 커졌어. 어수선한 가운데 조선인들이 불을 지르고 다닌다 ,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등의 이상한 소문이 퍼져. 일본 내무성도 각 경찰서에 '조선인들이 방화와 약탈을 저지르고 있으니 주의하라'고 지시를 내려. 사회적 동요와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칼끝을 조선인에게 돌린 거야. 그러자 일본인들의 분노는 조선인들을 향하게 돼. 자경단이 조직되고 무자비한 조선인 사냥이 시작됐어. 처참한 학살이 벌어졌어. 공식적인 사망자만 무려 6,661명. 실제 사망자는 그 이상 얼마일지 몰라. 이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육사가 일본 도쿄에 간 거야. 일본에서 사는 조선인들의 모습을 보며 육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현실을 실감하지 않았을까? 다음 해 1월, 육사는 귀국선에 올라. 그리고 친형제들과 함께 비밀결사에 가입해. 이때부터 육사의 독립투쟁이 시작돼. ▲ 투사 이육사 이때부터 육사는 중국과 만주를 오가며 비밀스러운 행보를 이어가. 어떤 임무를 수행했는지는 철저히 비밀에 부쳤어.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첫 시련이 닥치게 돼. 1927년 10월 18일. 대구에 있는 조선은행. 식민지 수탈을 위해 일본이 세운 은행이야. 오전 11시 50분, 은행 앞으로 누군가 자전거를 몰고 와. 그리고는 싣고 온 나무상자 중 하나를 들고 은행 안으로 들어갔어. 은행 지점장 앞으로 온 선물이라며 건넨 상자. 그 안에는 꿀이 담긴 항아리가 있었어. 은행원이 상자를 받아 드는데, 뭔가 타는 냄새가 나. 상자를 열자 꿀 항아리와 타들어 가는 도화선이 보여. 꿀 항아리로 가장한 폭탄이였어. 은행원은 황급히 도화선을 잘라냈어. 일단 폭발은 막아낸 거야. 누군가가 식민지 경제 수탈의 본거지, 조선은행 대구 지점장을 노린 걸로 보여. 신고를 받은 대구경찰서에서 일제 경찰 수백 명이 곧바로 출동해. 사라진 배달부를 쫓고 은행 주변에 경계망을 펼쳐. 그때, 한 경찰이 뭔가를 가리켜. 은행 정문 앞에 서 있던 자전거야. 그 뒤에는 '꿀'이라고 적힌 상자가 세 개 실려있어. 지점장에게 배달된 나무상자와 똑같아. 상자를 확인하기 위해 다가간 순간, 쾅!!!! 자전거 뒤에 있던 상자들이 일제히 폭발해. 대구 전체가 울릴 만큼 커다란 폭발이었다고 해. 일제 경찰은 의심 가는 용의자들을 잡아들여. 그중에는 우리가 아는 인물이 끼여 있었어. '이원록', 바로 이육사야. 육사뿐만 아니라 형제들까지 체포돼. 집에 있는데도 호외가 막 나고 그러더래요. 그래서 어른들이 걱정하고 이게 무슨 일인가 그러니까 조선은행 폭탄 사건이 일어났다고. 꿀단지에 쓰인 글씨가 있었는데, 그 글이 누가 썼는지 삼촌 글씨와 똑같았대요. 우리 집안 어른들이 4형제가 다 붙들려 간 거잖아요. 우린 항상 요시찰 인물이니까, 무슨 일만 터졌다 하면 일단 먼저 구속시키고 보는 거예요. -이옥비, 이육사의 딸 육사와 형제들은 이 의거와 관련이 없었어. 근데 이렇게 큰 사건이 벌어졌으니 범인을 빨리 잡아야 하잖아? 그래서 경찰은 전부터 주시하고 있었던 육사와 형제들에게는 거짓 혐의를 씌운 거야. 중국에 갔다가 막 돌아온 육사에게는 폭탄을 밀수한 혐의를 씌우고, 폭탄 상자에 적힌 글씨가 동생 원일의 필체와 비슷하다며 억지를 부렸어. 범행을 인정하라며 가혹한 고문과 매질이 가해져. 하지만 육사는 끝까지 굽히지 않았대. 그렇게 1년 7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 끝에 육사는 석방돼. 그런데 그를 풀어준 이유가 기가 막혀. 공판에 회부한 범죄의 혐의가 없다. 아무런 혐의점이 없대. 아무런 증거도 없이 1년 7개월 동안 붙잡아놓고 고문한 거야. 참 어이가 없지. 이런 일을 겪고도 육사는 독립운동에 더욱 매진해. 그리고 이때부터 이름을 바꿔. 본명 이원록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이름, 이육사로. 일제가 붙여준 수인번호 '264'를 본인의 이름으로 삼은 거야. 더 당당하겠다는 다짐, 이 고통을 잊지 않겠다는 각오의 뜻이 아니었을까. 첫 옥고를 치르고 얼마 되지 않아 육사는 또다시 잡혀들어가. 광주에서 학생들이 항일운동을 일으켰어. 이 사건이 전국으로 번질까 봐 일제는 요시찰인물들을 또다시 잡아들인 거야.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미리 붙잡아둔 거지. 늘 무슨 일만 딴데서 터져도 아버지는 항상 요시찰인물의 명단에 들어있기 때문에 제일 먼저 피습하는 거죠. -이옥비, 이육사 딸 열흘 후에 풀려난 육사는 이듬해 또다시 체포되고 말아. 대구 시내에 일제를 배척하는 격문이 뿌려졌거든. 육사는 대구 격문 사건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돼서 또 한 번 옥고를 치러야 했어. 이때 받은 고문이 가장 혹독했다고 해. 대나무 있잖아요. 삐쭉삐쭉 잘라놓은걸, (다리 사이로 끼워서) 꿇어앉혀 놓고 훑으면 살이 다 떨어지잖아요. 나쁜 짓은 다 했지. 일본 사람들이. -이옥비, 이육사 딸 물고문에 전기 고문까지. 옥비 어머니는 매주 새옷을 형무소에 넣어드렸어. 그러면 육사가 입던 옷을 내주는데 흰옷이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고 해. 옥고를 치를수록 육사의 몸은 점점 망가져 갔어.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으면 걷지 못할 정도였대. 하지만 그의 정신은 꺾이지 않았어. 그 무렵 육사의 모습을 보여줄게. 가장 최근에 발견된 육사의 사진이야. 한창 독립의 의지를 불태우던 20대 시절의 모습이야. 눈빛에서 강한 결의가 느껴져. ▲ 펜 대신 총을 든 이육사 1932년 봄, 육사가 갑자기 사라져. 일본 경찰은 육사의 행적을 찾지 못하자 바로 수배령을 내려. 육사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육사는 만주로 가서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천진과 북경을 거쳐 그해 가을, 남경에 도착해. 이곳에 온 목적은 '조선혁명 군사정치간부학교' 때문이야. 의열단이 세운 군사간부 양성기관이야. 사실 많은 이들이 그동안 지속해 온 의열투쟁의 한계를 느꼈어. 일제에 저항하는데 소수의 의거가 아니라, 이제는 대규모 부대를 결성해서 일본과 독립전쟁을 벌이기로 결심한 거야. 그러려면 병사들과 이들을 이끌 지휘관이 필요해. 이 군사학교는 병사들을 지휘할 독립군 장교를 양성하는 곳이야. 육사는 이곳에 1기생으로 입교해. 그리고 최고의 지휘관이 위한 군사훈련을 받아. 당시 일과표를 보여줄게. 매일 아침 여섯 시 기상해서 오전에는 군사학과 정치학 수업을 들어. 전쟁에서는 전략과 머리싸움도 중요하니까. 오후에는 고된 야외훈련을 받아야 해. 사격 훈련, 폭탄 제조, 암살 등의 비밀공작을 몸에 익히는 시간이야. 밤에는 중국어 수업과 토론수업이 있어. 신분이 노출되지 않도록 중국어를 써야 했거든. 밤 11시까지 빡빡하게 짜여져 있는 스케줄. 선비 집안에서 자란 육사가, 훈련을 잘 해냈을까? 이정기(독립운동가) 선생님이 그 이야기를 하시더라고. '너희 아버지는 사격의 명수일뿐더러 말을 타고 달릴 때도 사격을 하면 백발백중 명중하는 명사수였다'. 권총을 여섯 자루가 왔는데 밤에 호롱불을 꺼 놓고도 다 해체해서 조립하는 그런 걸 아주 정확하게 해냈다고. 변장술도 능했고, '육사는 언어의 마술사다' 중국어, 일어, 에스페란토어도 배우셨더라고요. -이옥비, 이육사 딸 펜이 아니라 총을 쥐고, 깔끔한 양복 대신 거친 군복을 입은 육사의 모습. 어때, 상상이 돼? 6개월의 훈련을 마친 대원들은 각자 임무를 부여받고 흩어졌어. 육사에게는 조선으로 돌아가서 의열단을 위해 사력을 다하라 는 임무가 부여됐어. 그렇게 육사는 경성으로 잠입했어. 청년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군사간부학교 2기생을 모집하라는 임무를 맡은 거야. 그런데 채 뜻을 펴기도 전에 육사는 또다시 체포되고 말아. 정보가 샜던 거야. 1기 졸업생들이 여기저기서 검거돼. 이 사진은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있을 때 육사의 모습이야. 몰라보게 초췌해진 모습이 마음 아프지? 모진 고초를 겪고 풀려난 후, 육사는 일생의 지기를 만나게 돼. 그게 바로, 1935년 위당 정인보 선생의 집에서 만난 신석초 시인이야. 처음에 만났을 때 아름다운 문인으로서 대했지만, 육사는 이미 그 전에, 이 모든 과정을 겪었던 거야. '시인'이기 전에 '투사'였어. 하지만 육사는 석초에게 자신의 임무에 대해 절대 이야기하지 않았어. 자신으로 인해 친구가 해를 입을까 봐, 그걸 걱정했던 게 아닐까 싶어. 두 사람 사이에 알려지지 않은 일화가 있어. 육사가 중국에 갔다 왔던가. 어느 추운 날에 돌아왔는데, 굉장히 추운데 외투도 안 입고. 추워 보이고 막 그렇게 실제 추워하고 그래서 (큰아버지가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줬다고. 우리 어머니가 어디서 잃어버리고 오신 줄 알고 '아이고 왜 외투는 안 입고 들어오세요' 깜짝 놀라서 그러니까. '육사가 너무 추워 보이고 불쌍해서 아무 이유도 묻지 않고 내가 그냥 윗도리를 벗어줬다'.. -신홍순, 신석초 조카 이번에도 굳이 이유를 묻지 않은 석초. 석초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육사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그래도 석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 칼날 위에서 노래하다 석초와 만난 후 육사는 강렬한 시들을 써냈어. 그리고 시를 쓰는 것에 대해 이런 글을 남겼어. 정면으로 달려드는 표범을 겁내서는 한 발자국이라도 물러서지 않으려는 내 길을 사랑할 뿐이오. 그렇소이다. 내 길을 사랑하는 마음, 그것은 나 자신에 희생을 요구하는 노력이오. 행동은 말이 아니고, 나에게는 시를 생각한다는 것도 행동이 되는 까닭이오. 이래서 나는 내 기백을 키우고 길러서 금강심에서 나오는 내 시를 쓸지언정 유언은 쓰지 않겠소. 시 또한, 그가 현실에 맞서는 방법이었어. 이뿐만이 아니야. 육사는 자신이 쓴 시를 직접 해석한 적도 있어. 시인이 직접 자신의 시를 해석한다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지. 맨 처음 읽었던 '청포도' 기억나지? 그 시에 담긴 의미를 이렇게 이야기했대. 내 '고장'은 조선이고 '청포도'는 우리 민족인데, 청포도가 익어가는 것처럼 우리 민족도 익어간다. 그리고 곧 일본도 끝장난다. 육사는 한 치의 의심 없이 믿었던 것 같아. 일본의 패망, 그리고 조선의 독립을... 하지만 상황은 점점 더 안 좋아져. 일본은 전쟁을 지속하기 위해서 조선민족 말살정책에 박차를 가해. 내선일체, 신사참배 등 한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해서 조선인을 일본인에 동화시킨다는 거야. 일제강점기 중에서도 최악의 시기가 닥쳐왔어.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도 일본식 이름으로 바꿔야 해. 우리 말과 글을 쓸 수도 없어. 글을 빼앗긴 문인들은 붓을 꺾거나 변절을 선택해. 육당 최남선, 춘원 이광수와 같은 민족문학의 거두들마저 친일로 돌아서고 말았어. 암담하기만 한 그 시기, 육사는 이런 시를 썼어. &<절정&>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보다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에 갔을 때를 회상하며 쓴 것 같아. 이 시의 제목은 '절정'이야. 육사는 이 시기를 절정이라 생각했나 봐. 이때만 지나가면 봄이 온다는 희망을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 무렵, 육사에게 기쁜 소식이 찾아와. 사랑스러운 딸, 옥비가 태어난 거야. 일찍이 1남 1녀를 홍역으로 잃었던 육사였어. 어렵게 얻은 딸인 만큼 얼마나 예뻤겠어. 독립운동 하느라 집에 자주 오지 못했지만, 집에 머물 때면 아침마다 옥비를 안고 놀아주곤 했대. 저희 집에는 다 글을 하는 사람이고 그러니까 낙관이 많았대요. 그래서 이렇게 펼쳐놓고 아버지가 '셋째 삼촌 낙관을 골라라' 이렇게 하나하나 보고 셋째 삼촌 낙관을 골라내면 맞으니까, 아버지가 그게 재미있어서 집에 계실 때는 아침에 저를 불러놓고 그런 걸 좀 자주 했고… -이옥비, 이육사 딸 생각만 해도 다정한 부녀의 모습이 떠오르지? 하지만 육사에게는 가족보다 더욱 중요한 일이 있었어. 바로 조국의 독립. 어린 딸을 두고 다시 중국으로 가야 했어. 떠나기 전에 육사는 옥비를 데리고 어딘가를 갔어. 당시 종로에 있던 조선에서 가장 큰 백화점인 화신백화점이었어. 옥비를 두고 떠나는 게 미안해서였을까. 여기서 딸을 위한 선물을 사. 핑크색 모자와 벨벳 투피스, 그리고 까만 구두. 우리가 형편이 굉장히 어려운 형편이었거든요. 화신백화점에 가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어머니랑 출타할 때는 꼭 그 옷을 입으면 아이들이 그게 예쁘다고 '한 번만 벗어봐라 입어보자' 막 그랬던 그런 기억이 나거든요. 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받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은 옷이잖아요. 마지막 선물이었죠. -이옥비 여사, 이육사 딸 그리고 육사는 친구 석초를 찾아가 함께 눈을 밟으며 작별인사를 건네. 그렇게 북경으로 위험한 여정을 떠났던 거야. 딸과 친구를 두고 떠나는 육사의 마음, 상상이 되니? 북경에 도착한 육사는 한 사람을 찾아가. 육사의 먼 친척이자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던 여성 독립운동가 이병희야. 북경 오실 때마다 오고 삼촌들도 이제 우리 집에 일가니까 다. 그러니까 찾아오시고 했는데, 하루는 육사가 날 찾아왔데. 찾아와서 '병희야. 나가자' 그래. '예. 나갑시다'. 그리고서는 '중경에서 너를 데려오라는 명령이 내려왔는데 너 갈래?' 그러데. '가죠' 그래서 '너 안내원도 왔다. 너 데리고 갈' 그래서 '널 연안으로 보내기로 했다. -故 이병희 생전 인터뷰 中 중경에는 당시 임시정부가 있었어. 연안에는 김원봉이 만든 조선의용대가 있었다고 해. 육사는 임시정부와 조선의용대 사이를 연결하는 임무를 맡은 걸로 보여.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일이 생긴 거야. 작년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와 큰형의 첫 번째 제사가 다가오고 있었거든. 아버지도 세상을 떠난 터라 이젠 육사가 집안의 어른이야. 동생들한테만 맡겨놓을 순 없잖아. 하지만 막상 조선에 돌아가자니 아주 위험해. 경찰이 눈에 불을 켜고 있을 게 뻔하니까. 그럼 육사는 어떻게 했을까? 1943년 7월. 육사는 고향마을로 돌아갔어. 어머니와 형의 제사를 치른 후, 가족을 만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어. 그리고 일본 헌병대에 붙잡히고 말았어. ▲ 육사의 마지막 외침 20일간 조사를 받은 육사는 북경으로 압송이 결정돼. 손에는 포승줄이 묶이고 발에는 쇠고랑이 채워져. 얼굴에는 밀짚으로 엮은 용수가 씌워져. 육사가 북경으로 압송된다는 소식을 듣고 옥비 어머니는 어린 옥비를 안고 기다렸어. 저만치 용수로 얼굴을 가린 남편이 보이자 어린 옥비를 높이 쳐들어. 가기 전에 딸의 얼굴이라도 보고 가시라고... 그러자 육사가 걸음을 멈춰. 어린 옥비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서더니 작별 인사를 남겨. 아버지, 다녀오마. 그렇게 육사는 기차에 실려 북경으로 압송됐어. 아버지가 기차를 타면 떠나시는 거잖아요.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아버지 다녀오마' 이렇게 얘기하고 곧 오실 것처럼, '곧 다녀오마' 그런 거는 아무리 위급해도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그런 말이었죠. -이옥비, 이육사 딸 그날 이후 육사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은 딱 한 사람이야. 바로 북경에 남아있던 육사의 친척이자 독립운동가 병희. 병희는 걱정이 태산이었어. 육사가 돌아오기로 한 날짜가 지났는데 안 오니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길이 없으니 답답해. 그러던 어느 날, 일본 형사가 병희를 찾아와. 나하고 가서 얘기 좀 하자 며 병희를 잡아끌어. 그렇게 형사를 따라나선 병희는 지하감옥에 갇히고 말아. 그리고 그곳에서 육사를 만나. 그 순간 '이제 끝났구나' 생각이 들었대. 그 후 두 사람은 끔찍한 고문에 시달려야 했어. 그런데 얼마 후, 병희는 풀려나게 돼. 알고 보니, 육사가 자신이 보증한다며, 병희는 자신의 일과는 상관없으니 풀어달라 한 거야. 육사의 보증으로 병희는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어. 하지만 육사는 차가운 지하감옥에 남았어. 계절은 어느새 겨울이야. 육사는 잡혀 올 때 그대로 여름옷 차림이었대. 방에서는 연신 콜록거리는 기침 소리가 들렸다고 해. 병희가 풀려난지 닷새쯤 지났을 때, 형무소에서 연락이 왔어. 이육사의 시신을 찾아가시오 라고. 날 찾아왔더라고. 찾아와서 육사가 죽었는데, 오늘 새벽 5시에 돌아가셨다 그러니까. 너밖에는 맡을 사람이 없으니 시체를 찾아가라 그러대. -故 이병희, 독립운동가 1944년 1월 16일 새벽. 육사는 북경 지하감옥에서 생을 마감했어. 그의 나이 마흔 살. 조국의 광복을 불과 1년 앞두고 가혹한 고문 끝에 숨을 거둔 거야. 그날 저녁, 병희는 형무소를 찾았어. 딱 들어가니까 육사가, 시체가 관에 있데. 그런데 관뚜껑을 딱 여니까 얼굴이 그냥 빨개지면서 코에서 피가 막 주르륵 나면서 눈을 뜨고 죽었더라고. 뒤처리는 내가 다 할 테니까 안심하고 곱게 가시라고. 그리고 (눈을) 쓰다듬으니까 다시 얼굴이 하얘지면서 죽은 사람으로 변하고 눈을 감더라고. -故 이병희, 독립운동가 아무 걱정 마시오. 조국의 독립은 후손들에게 맡기시고. 편히 가시오 라고 말하며 육사의 부릅뜬 눈을 세 번 쓰다듬자 그제야 스르르 눈을 감았다고 해. 갑자기 전보가 날아왔어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어머니가 방 하나를 달라고 그래서 머리를 풀고 그렇게 우시더라고요. 엄마가 우니까 나도 따라서 정확하게도 모르는데 울었죠. 같이 울고… -이옥비, 이육사 딸 병희는 육사의 시신을 수습하고 그가 남긴 유품을 챙겼어. 유품이라 해봐야 만년필 한 자루와 마분지 조각뿐이었어. 그 마분지에는 육사가 남긴 시가 쓰여 있었어. &<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참아 이곳을 범하든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육사는 시를 쓸지언정 유언을 쓰지 않겠다고 했잖아. 그 말처럼 유언 대신 시를 남기고 가신 거야. '광야', 우리에게도 너무 익숙한 시인데, 다른 느낌이지? 이 시에는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육사의 이야기, 독립에 대한 강렬한 염원이 담겨있어. ▲ 그가 세상에 남긴 것 육사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 그토록 기다리던 해방을 맞이해. 모두가 길거리로 나와 만세를 외쳤어. 그리고 육사가 순국한 지 2년 후인 1946년. 그의 첫 시집이 세상에 나와. 육사의 동생이 형이 남긴 시들을 모아 시집을 낸 거야. 석초를 비롯한 육사의 친구들이 서문을 적었어. 육사가 북경 옥사에서 영면한 지 벌써 2년이 가까워 온다. 그가 세상에 남기고 간 스무여 편의 시를 모아 한 권의 책을 만들었다. 그는 한평생 꿈을 추구한 사람이다. 시가 세상에 묻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안타까이 공중에 그린 무형한 꿈이 형태와 의상을 갖추기엔 고인의 목숨이 너무 짧았다. 신석초 시인은 평생 시와 함께 사시다가 1975년, 66세의 나이로 돌아가셨어. 조카 신홍순 씨는 유품을 정리하다가 뭔가 특별한 걸 발견했어. 생전에 육사가 큰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였어. 잦은 고문 때문에 폐병을 얻었던 육사가 요양차 내려간 경주에서 보낸 글이야. 석초 형! 내가 모든 의례와 형식을 떠나 먼저 붓을 들어 투병의 일단을 호소함은 얼마나 나의 생활이 고독한가를 형이 짐작하여 줄 줄 생각한다. 석초 형! 나는 지금 이 넓다는 천지에 진실로 내 하나만이 남아있는 외로운 넋인 듯 하다는 것도 형은 짐작하리라. 그래서 군(君)이 먼저 편지라도 한 장 하여주리라고 바라기는 하면서도 형의 게으름에 가망이 없어 내 먼저 주제넘게 호소치 않는가? 강하고 엄격한 육사가, 외롭다고 투정도 부리면서 왜 먼저 편지를 쓰지 않냐고 점잖게 보채기도 하지. 인간적인 모습을 거리낌 없이 내보일 만큼 두 사람의 사이가 가까웠던 거 같아. 조금 늦었지만 이제는 두 사람이 다시 만나 못다 나눈 술잔을 나누고 있지 않을까. 그만큼 따뜻하게 그분들이 지냈기 때문에 그랬던 거 아니겠냐. 이렇게 생각해요. 지금 하늘에서 만나셨겠지? 그래서 두 분이 역시 가깝게 시를 왔다 갔다 하고 쓰고 계실 거 같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신홍순, 신석초의 조카 그리고 이옥비 할머니는, 아버지가 남겨준 이름처럼 여전히 욕심 없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신대. 아버지가 쓰신 시가 좋다고 그러지만은, 내게는 지게꾼이라도 어깨를 두들기면서 '얘야 밥 먹자' 이렇게 다독거려주는 아버지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했었거든요. 그러니까 철이 없어서 그랬죠. 그때는... 그렇지만 이제는 저도 부끄러움이 없는 그런 삶으로 살아야 되지 않을까. 제 이름이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이, 욕심 없는 그런 이름이잖아요. 그래서 저는 '조금 모자란 듯하게 사는 게 제 삶이다' 이렇게 생각해요. -이옥비, 이육사 딸 아까 이육사라는 이름이 수인번호를 따서 만들었다고 했잖아. '二六四'라는 한자를 쓰지. 그런데 다른 한자를 쓰기도 해. '죽일 육' '역사 사', 역사를 죽이겠다는 뜻이야. 일제 치하의 그 역사를 부정하겠다는 거야. 집안 어른들은 이걸 보고 염려를 드러냈대. 괜히 화를 입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육사는 한 글자를 바꿨대. '땅 육'으로. 이게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육사의 한자야. 근데 조금 특이한 한자를 쓰신 적이 있어. '고기 육, 설사할 사'로. 뜻만 직역하면, '고기를 먹고 설사한다'는 거야. 이게 일제 치하의 세상을 조롱하는 의미로 해석되고 있어. 그런데 이런 의미로도 해석돼. 딸에게 기름지게 살지 말라는 의미로 '옥비'라는 이름을 지어줬잖아. 비슷한 의미로, '평생 편안하고 기름진 삶을 살지 않겠다'는 각오가 담겨 있는 건 아닐까?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이민호부터 지수까지…영화로 재탄생하는 '전지적 독자 시점', 화려한 캐스팅
등록일2024.01.24
동명의 인기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이 이민호, 안효섭, 채수빈, 신승호, 나나, 박호산, 최영준, 지수 등의 캐스팅을 확정 짓고 지난해 12월 크랭크인 했다. '전지적 독자 시점'은 10년 동안 연재된 소설처럼 멸망해버린 현실에서 유일하게 결말을 알고 있는 김독자(안효섭)가 소설 속 주인공 유중혁(이민호)과 함께 세상을 구하기 위한 대장정을 그린 영화다. 2018년 네이버시리즈 연재 이후 현재 누적 조회수 2억 뷰 돌파 및 해외에서도 인기를 모으며 큰 성공을 이룬 동명의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괴물이 판치는 판타지 소설이 현실이 되어버린 기발한 설정의 세계관을 배경으로 소설을 끝까지 읽은 유일한 독자인 김독자와 소설의 원래 주인공 유중혁 및 변해버린 세계에서 새롭게 만난 동료들이 결말을 바꾸기 위한 장대한 여정에 나선다. '더 테러 라이브', 'PMC: 더 벙커'로 극강의 몰입감과 신선한 연출력을 선보인 김병우 감독이 연출을 맡았고, 쌍천만 관객 신화를 이룬 '신과함께' 시리즈의 제작사 리얼라이즈픽쳐스가 함께해 신뢰도를 높인다. 또한 '크로스파이어', '로스트아크' 등 전 세계에 IP와 콘텐츠를 선보이는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그룹 스마일게이트는 첫 한국 영화 투자로 '전지적 독자 시점'을 선택했다. 웹소설계를 강타한 작품에 완벽한 싱크로율의 배우 라인업이 더해져 '전지적 독자 시점'을 향한 관심은 매우 뜨겁다. '더 킹 : 영원의 군주', '푸른 바다의 전설', '강남 1970'에 이어 '파친코'로 한층 성숙된 연기력을 보여준 이민호가 죽어도 끊임없이 회귀하는 능력을 가진 소설 속 주인공 유중혁을 연기한다. 유중혁은 범접할 수 없는 외모에 막강한 전투 실력으로 멸망한 소설 속 세계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캐릭터다. '너의 시간 속으로', '낭만닥터 김사부', '사내맞선'으로 글로벌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안효섭은 소설 '멸망하는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법'의 결말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김독자로 출연해 첫 스크린 데뷔에 나선다. 김독자는 평범한 직장인이자 소설의 주인공 유중혁에게 빠져 아무도 읽지 않는 연재 소설을 완독한 유일한 사람이다. 현실이 되어버린 소설 속 세계에서 김독자와 여정을 함께하는 동료들도 있다. '새콤달콤', '그대 이름은 장미' , '더 패뷸러스', '너와 나의 경찰수업' 등의 채수빈은 독자의 전 직장 동료이자 김독자와 함께 멸망해버린 세상의 시작을 함께하는 유상아 역을 맡는다. 유상아는 매일 생존 전투를 치러야 하는 세계에 빠르게 적응하며 김독자에게 힘이 되어준다. '환혼', 'D.P.', '열여덟의 순간', '에이틴' 등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신승호와 '자백', '꾼', '마스크걸', '글리치' 등 매번 탁월한 연기로 감탄을 자아내는 나나는 유중혁과 함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이자 김독자와도 만나게 되는 캐릭터를 맡았다. 신승호가 맡은 이현성은 군인 출신으로 막강한 방어력을 통해 분투하고, 나나가 맡은 정희원은 뛰어난 공격력으로 정의의 여신처럼 활약하는 캐릭터다. '낙원의 밤', '콜', '나의 해피엔드', '멧돼지사냥', '괴이', '인간수업', '나의 아저씨'에서 출중한 연기와 존재감을 보여준 박호산이 부를 이용해 사람들의 생사를 휘두르는 공필두 역으로, '경성크리처', '사냥개들', '우리들의 블루스', '빈센조' 및 연극과 뮤지컬에서도 맹활약 중인 최영준이 김독자의 직장 상사이자 유상아에게 접근했다가 졸지에 시나리오에 휘말리게 되는 한명오 역으로 분해 극의 긴장감을 더할 예정이다. 끝으로 '설강화: snowdrop'로 배우로 발돋움한 블랙핑크 지수가 소설에서 대단한 전투력으로 유중혁과 함께 많은 위기를 넘긴 동료 이지혜로 분해 김독자의 여정에도 함께 하게 된다. 대본 리딩을 위해 모인 배우들은 화기애애하게 인사를 나누다가도 리딩이 시작되자 역할에 200% 몰입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뜨거운 열기와 에너지로 현장을 가득 채웠다는 후문이다. 지난해 12월 크랭크인 한 '전지적 독자 시점'은 촬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SBS연예뉴스 김지혜 기자)
이민호부터 지수까지…영화로 재탄생하는 '전지적 독자 시점', 화려한 캐스팅
등록일2024.01.24
[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동명의 인기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이 이민호, 안효섭, 채수빈, 신승호, 나나, 박호산, 최영준, 지수 등의 캐스팅을 확정 짓고 지난해 12월 크랭크인했다. '전지적 독자 시점'은 10년 동안 연재된 소설처럼 멸망해 버린 현실에서 유일하게 결말을 알고 있는 김독자(안효섭)가 소설 속 주인공 유중혁(이민호)과 함께 세상을 구하기 위한 대장정을 그린 영화다. 2018년 네이버시리즈 연재 이후 현재 누적 조회수 2억 뷰 돌파 및 해외에서도 인기를 모으며 큰 성공을 이룬 동명의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괴물이 판치는 판타지 소설이 현실이 되어버린 기발한 설정의 세계관을 배경으로 소설을 끝까지 읽은 유일한 독자인 김독자와 소설의 원래 주인공 유중혁 및 변해버린 세계에서 새롭게 만난 동료들이 결말을 바꾸기 위한 장대한 여정에 나선다. '더 테러 라이브', 'PMC: 더 벙커'로 극강의 몰입감과 신선한 연출력을 선보인 김병우 감독이 연출을 맡았고, 쌍천만 관객 신화를 이룬 '신과함께' 시리즈의 제작사 리얼라이즈픽쳐스가 함께해 신뢰도를 높인다. 또한 '크로스파이어', '로스트아크' 등 전 세계에 IP와 콘텐츠를 선보이는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그룹 스마일게이트는 첫 한국 영화 투자로 '전지적 독자 시점'을 선택했다. 웹소설계를 강타한 작품에 완벽한 싱크로율의 배우 라인업이 더해져 '전지적 독자 시점'을 향한 관심은 매우 뜨겁다. '더 킹 : 영원의 군주', '푸른 바다의 전설', '강남 1970'에 이어 '파친코'로 한층 성숙된 연기력을 보여준 이민호가 죽어도 끊임없이 회귀하는 능력을 가진 소설 속 주인공 유중혁을 연기한다. 유중혁은 범접할 수 없는 외모에 막강한 전투 실력으로 멸망한 소설 속 세계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캐릭터다. '너의 시간 속으로', '낭만닥터 김사부', '사내맞선'으로 글로벌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안효섭은 소설 '멸망하는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법'의 결말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김독자로 출연해 첫 스크린 데뷔에 나선다. 김독자는 평범한 직장인이자 소설의 주인공 유중혁에게 빠져 아무도 읽지 않는 연재소설을 완독한 유일한 사람이다. 현실이 되어버린 소설 속 세계에서 김독자와 여정을 함께하는 동료들도 있다. '새콤달콤', '그대 이름은 장미' , '더 패뷸러스', '너와 나의 경찰수업' 등의 채수빈은 독자의 전 직장 동료이자 김독자와 함께 멸망해 버린 세상의 시작을 함께하는 유상아 역을 맡는다. 유상아는 매일 생존 전투를 치러야 하는 세계에 빠르게 적응하며 김독자에게 힘이 되어준다. '환혼', 'D.P.', '열여덟의 순간', '에이틴' 등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신승호와 '자백', '꾼', '마스크걸', '글리치' 등 매번 탁월한 연기로 감탄을 자아내는 나나는 유중혁과 함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이자 김독자와도 만나게 되는 캐릭터를 맡았다. 신승호가 맡은 이현성은 군인 출신으로 막강한 방어력을 통해 분투하고, 나나가 맡은 정희원은 뛰어난 공격력으로 정의의 여신처럼 활약하는 캐릭터다. '낙원의 밤', '콜', '나의 해피엔드', '멧돼지사냥', '괴이', '인간수업', '나의 아저씨'에서 출중한 연기와 존재감을 보여준 박호산이 부를 이용해 사람들의 생사를 휘두르는 공필두 역으로, '경성크리처', '사냥개들', '우리들의 블루스', '빈센조' 및 연극과 뮤지컬에서도 맹활약 중인 최영준이 김독자의 직장 상사이자 유상아에게 접근했다가 졸지에 시나리오에 휘말리게 되는 한명오 역으로 분해 극의 긴장감을 더할 예정이다. 끝으로 '설강화: snowdrop'로 배우로 발돋움한 블랙핑크 지수가 소설에서 대단한 전투력으로 유중혁과 함께 많은 위기를 넘긴 동료 이지혜로 분해 김독자의 여정에도 함께 하게 된다. 대본 리딩을 위해 모인 배우들은 화기애애하게 인사를 나누다가도 리딩이 시작되자 역할에 200% 몰입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뜨거운 열기와 에너지로 현장을 가득 채웠다는 후문이다. 지난해 12월 크랭크인 한 '전지적 독자 시점'은 촬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ebada@s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