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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찐리뷰] 53년 전에도 '비상계엄' 있었다…박정희 유신시대와 긴급조치의 진실
등록일2025.03.14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13일 방송된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방송인 홍석천, 배우 박효주, 아나운서 이인권이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서울 한복판에 나타난 탱크 때는 53년 전 서울, 평범한 가을날 저녁이야. 직장인들은 퇴근을 서두르고, 동네 곳곳에선 저녁을 준비하는 음식냄새가 솔솔 풍기고 있어. 그런데 그때 갑자기, 탱크를 몰고 중무장한 군인들이 서울 도심 한복판에 나타났어. 당시 태평로에 있던 국회의사당, 그리고 광화문 근처 중앙청에 서 있는 탱크의 모습이야. 시간은 저녁 7시, TV와 라디오를 통해 깜짝 놀랄만한 소식이 전해져. 박정희 대통령 각하는 10월 17일 오후 7시를 기해 비상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1972년 10월 17일 19시를 기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현행 헌법의 일부 조항 효력을 정지시킨다. 이와 같은 비상조치를 국민 앞에 선포한 박 대통령 각하는 우리 모두 일치단결하여 민주제도의 건전한 발전과 조국 통일의 기원이 성취되는 그날까지 힘차게 전진해 나갈 것을 촉구했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이 선포된 거야. 비상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있을 때 선포할 수 있어. 보통 이제 한국에서 비상계엄은 어떤 굉장히 큰 사회 혼란기나 아니면 6.25 전쟁과 같은 정말 전시에 주로 선포가 됐어요. 그런데 이 1972년 10월 17일에 선포된 비상계엄은 사실은 굉장히 평온한 때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때에 선포가 됐고.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혼란이라든지 어떤 위기라든지 뭐 전시라든지 이런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던 시기인데 느닷없이, 그야말로 느닷없이 비상계엄이 선포가 되었던 거죠. -오제연,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이렇게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앞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해줄게. ▲비상계엄과 특별선언 박정희 대통령은 비상계엄과 함께 '10.17 특별 선언'을 발표했어. 그 내용은 이래. 1972년 10월 17일 19시를 기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현행헌법의 일부 조항 효력을 정지시킨다. 일부효력이 정지된 헌법조항의 기능은 현행헌법의 국무회의가 수행한다. 비상국무회의는 1972년 10월 27일까지 조국의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헌법개정안을 공고하며 이를 공고한 날로부터 1개월 이내에 국민투표에 부쳐 확정시킨다. 헌법개정안이 확정되면 개정된 헌법절차에 따라 늦어도 금년 연말 이전에 헌정질서를 정상화시킨다. 헌법도 바꾸고, 국회를 해산하겠다는 거야. 아까 사진 봤지? 국회의사당 정문을 딱 가로막고 있는 탱크. '국회 해산'이란 게 가능한 걸까? 당시에도 대통령에게 국회해산권은 없었대. 그때도 사실은 헌법에 의하면 할 수가 없는 거였고, 지금도 역시 뭐 헌법에 의하면 국회 해산권을 갖고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할 수가 없는 거죠.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국회해산권이 없는 대통령이 국회를 그냥 임의로 해산시켜버린 거죠. 군인들이 쫙 깔린 상태에서 뭐 그런 상태에서는 사실 기존 헌법에 어떤 조항이나 범위나 이런 것들에 구애받지 않고, 대통령이 임의로 자신의 권력을 행사할 수가 있었던 거죠. -오제연,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그때도 국회는 계엄 해제를 요구할 수 있었어. 그런데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초법적 조치로 국회를 해산시켜버린 거야. 그래서 해제할 수 없었어. 설사 국회가 해산되지 않았어도, 당시 국회엔 박정희 대통령이 소속되어 있는 여당 의원이 더 많았어. 그러니 야당만으로는 계엄 해제 요구가 어려운 상황이지. 아무리 그래도, 반발이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주요 정치인들이 가택 연금을 당해. 대문 앞을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거야. 게다가, 느닷없이 끌려온 사람들이 옷이 벗겨진 채 사정없이 구타를 당해. 몽둥이질에 잠도 재우지 않고 물고문까지 이어져. 이렇게 고문을 당한 사람들은, 국회의원들이야. 이런 국회의원들에겐 공통점이 하나 있었어. 바로 '블랙리스트'. 비상계엄 한 달 전, 야당 의원들의 이름이 있는 블랙리스트 명단이 만들어졌다고 해.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블랙리스트에 적힌 사람 가운데 13명의 야당 의원들을 보안사에서 끌고 갔다는 거야. 이런 일들은 비상계엄 선포 후, 바로바로 진행됐어. 이렇게 국회도 해산하고, 헌법도 바꾸겠다고 해. 여기서 끝이 아니야. 얼마 뒤에 대통령 선거도 해. 불과 1년 전, 7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거든. 근데 임기 1년 만에 또 대통령 선거를 하는 거야. 왜 그랬을까? ▲ 1년 만에 다시 한 대통령 선거 3년 전인 1969년, 박정희 정권은 헌법을 개정했어. '3선 개헌'이라고 들어봤어? 헌법 제 69조 3항 '대통령의 계속 재임은 3기에 한한다'. 대통령을 3번까지 할 수 있다는 거야. 원래는 두 번까지만 할 수 있었거든. 이렇게 5대 6대 대통령을 역임한 박정희 대통령은 이 헌법 개정으로 3선에 도전하게 돼. 그리고 3선 개헌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하며 등장한 대선 라이벌이 있어. 바로 47살의 젊은 정치인, 김대중 후보. 두 후보의 경쟁은 엄청났어. 여러분 이번에 정권교체를 하지 못하면 이 나라는 박정희 씨의 영구 집권의 총통 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박정희 씨는 '3선 개헌은 절대로 안 한다', '나보고 3선 개헌한다는 것은 야당 놈들의 모략이다' 이렇게 말했어요. 그러더니 2년이 못 가서 재작년에 절대로 안 한단 3선 개헌을 정반대로 절대로 해 버렸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헌법을 고칠 때는 앞으로 이 나라에서 누구든 자기 한 사람의 영구집권을 위해서 헌법을 이리 고치고 저리 고치고 하는 일은 영원히 못 하도록 분명히 하는 것을 여러분에게 내가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김대중 후보의 유세 연설 中 유권자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에게 분명히 말씀드리거니와, '나를 대통령으로 한번 더 뽑아 주십시오' 하는 이런 정치 연설은 오늘 이 기회가 마지막 연설이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말씀드립니다. 지난 5대, 6대 대통령 선거에 있어서 유권자 여러분들은 이 사람을 대통령으로 두 번 뽑아 주셨습니다. 이번만 여러분들이 한번 더 이 사람을 지지를 해주시면, 일할 수 있는 그런 뒷받침을 해 주시면, 앞으로 4년 동안 여러분들을 위해서 있는 정력을 다 해서, 한번 멋있는 수도 서울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정희 후보의 유세 연설 中 그럼, 선거 결과 어땠을까? 결과는, 박정희의 승리였어. 53.2% 대 45.3%의 차이야. 서울에서는 김대중 후보가 앞서기도 했어. 그리고 한달 후, 박정희 대통령의 여당인 민주공화당이 113석, 야당인 신민당이 89석을 차지하면서, 그전에 비해 야당의 의석수가 늘어났어. 김종필 증언록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해. 그 다음엔 김대중이 될지도 몰라. 그러니 내가 좀 특수한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 그 '특수한 것'이 뭘까? 박정희 대통령 취임 1년 뒤인 1972년 5월. '풍년사업'이란 이름의 은밀한 작업이 진행돼. 이름만 보면 농업 관련 사업 같지 않아? 근데, 그 작업이 진행된 장소는 바로 여기야. 일명 '궁정동 안가'라 불리는 곳이야. '안가'는 안전가옥, 이곳은 대통령의 안전가옥이야. 아주 비밀스러운 곳이지. 여기서 뭘 했냐. 대만 총통제, 스페인 총통제, 프랑스 드골 헌법 등 해외사례를 연구하고 있어. 왜 이런 사례들을 연구할까? 대만의 총통이었던 장제스, 스페인 총통 프랑코, 두 사람 모두 본인들이 죽으면서 그 임기가 끝나. 종신 집권을 했다는 거야. 그렇게 은밀하게 진행된 풍년사업의 결과는, 다섯 달 뒤인 1972년 10월 세상에 공개됐어. '유신헌법'이라는 이름으로. ▲ 유신헌법 10월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헌법을 개정하고. 이게 바로 '10월 유신'이야. 유신, 사전적 의미는, 낡은 제도를 고쳐 새롭게 한다는 거야. 유신헌법에는 대통령이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카드들이 있었어. 먼저 '집권' 카드. 대통령 집권에 대한 강력한 변화가 생겨.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지 않는다는 얘기야. 그럼, 누가 뽑냐? 통일주체국민회의, 일명 '통대'라고 하는 기관에서 대통령을 선출하겠다는 거야. 그런데, 이 '통대'의 의장이 누굴까? 대통령 본인이야. 대통령이 의장인 기관에서 대통령을 뽑겠다는 거지. 대통령 임기도 4년에서 6년으로 늘어나. 그리고 대통령 중임 제한 폐지. 사실상 영구집권이 가능해진 거야. 두번째는 '밸런스' 카드. 권력의 밸런스를 파괴하는 카드야. 대통령에게 '국회 해산권'이 생겼어. 10.17 비상계엄 때는 국회 해산권이 없었다고 했잖아? 그걸 만든 거야. 이제 대통령이 입법권을 가진 국회를 해산할 수 있어. 그리고 국회의원 3분의 1을 대통령이 추천하고 이를 '통대'에서 선출하겠대. 게다가 대통령이 사실상 사법부의 모든 법관을 임명할 수 있게 됐어.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이 입법부에 사법부까지 손아귀에 쥐는 거야. 3권분립의 파괴야. 마지막 카드는 아주 강력한 힘이야. 바로 '긴급조치'야. 유신헌법 제53조 1항을 보면, '국정 전반에 걸쳐 필요한 긴급조치를 할 수 있다'는 거야. 필요한 조치라는 게, 어디까지 가능한 걸까? 무서운 거는 헌법에 규정돼 있는 국민의 기본권의 효력을 정지시킬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부여했죠. 조치에 대해서는 사법 심사를 할 수가 없도록 해놨어요. 그것이 헌법에 위반되었는지 이런 것 자체를 심사할 수 없도록, 헌법에 아예 명시해 놨어요. 긴급조치 위반했다고 그래서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이 긴급 조치는 위헌이다', '불법이다', 아무리 주장해 봤자 먹혀들 수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법원이 심사 자체를 못 했기 때문에… -정태호,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대통령의 판단에 따라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정지하고 처벌할 수 있다는 거야.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열흘 만에 공표된 이 유신헌법 개정안은 한달 뒤 국민투표에 부쳐져. 당시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 결과, 찬성률은 91.5%가 나와.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먼저, 유신이 내세운 명분 중 하나는 '평화통일'이었어. 유신 3개월 전,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돼. 분단 이후 남북이 처음으로 평화통일 원칙에 합의한 거야. 국민들의 통일에 대한 열망도 아주 높아졌어. 한마디로 '평화통일을 하려면 법과 체제를 바꿔야 한다', '10월 유신으로 한국적 민주주의를 이룩하자' 이런 명분으로 유신을 홍보한 거야. 유신헌법의 가장 큰 하나의 명분이 되는 것은 당시에 남북 관계가 획기적으로 변했다는 거죠. 그 이전에 남북의 어떤 대결, 특히 68년을 전후로 해서는 한반도의 안보 위기라고 부를 정도의 정말 곧 전쟁이 터질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었거든요. 그런데 이런 것들이 한순간에 갑자기 변해서 지금 남북이 대화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러한 대화 국면에서 어쨌든 우리가 북한과 제대로 대화를 하려면 체제를 바꿔야 된다, 이게 이제 가장 큰 명분이 되는 것이고. 그때 체제를 바꿀 때는 우리가 평화 통일을 지향하는 그런 헌법을 가져야 된다라고 하는 것이 이제 또 하나의 명분이 되는 거죠. -오제연,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실제로 박정희 대통령이 한 얘기가 있어. 만일 국민 여러분이 헌법 개정에 찬성치 않는다면 나는 이것을 남북 대화를 원치 않는다는 국민의 의사 표시로 받아들이고 조국 통일에 대한 새로운 방안을 모색할 것임을 아울러 밝혀두는 바입니다. -박정희, 10.17 대통령 특별선언 中 이런 선언과 함께, 유신 찬성을 위한 본격적인 홍보도 시작했어. 10월 유신, 100억 불 수출, 1,000불 소득 쭉 뻗은 도로, 기계화된 농촌, TV, 자동차까지... 잘 살려면 유신이 필요하다고 홍보하는 거야. 이것도 한 번 봐봐. 반대하면 파멸, 찬성하면 번영이래. 유신을 찬성해야 잘 살 수 있다는 거야. 그리고 효과적인 홍보 수단, 미디어도 활용했어. 이 시기에 모든 신문과 방송은 검열을 거쳐야만 했대. 혹여나 유신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가 나가면 안되니까. 문공부에서 주는 보도 자료를 한 자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써야 되니까.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적절한 법률이다', 그런 식으로 다 신문이 받아 썼었죠. '유신만이 살 길이다' 그런 구호를 신문에 꼭 넣고. 그 다음에 칼럼을 쓸 필자들 풀로 넘겨줘요, 우리 신문사에. 그래서 '이 중에 골라서 해라'. 그런 사람 외에는 쓰지 못하게 했어요. 완전히 언론 탄압을 무지막지하게 했죠 그 당시에는. 유명한 얘기가 있는데 광고 이론에 나오는데 '반복은 진실을 만든다'는 말이 있어요. 계속 반복하면 그렇게 세뇌되는 거예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요. -김동현, 당시 동아일보 기자 비상계엄이 선포된 1972년 10월 17일부터 유신 찬반 국민 투표일인 11월 21일까지, 유신 관련 좌담 방송이 398회, 유신지지 단독 해설이 218회, 유신 비전 제시 특별 프로그램이 58회 방송됐어. 이 정도면, 국민 투표에서 찬성률이 그렇게 높았던 이유가 좀 이해가 가지? 계엄 포고령에 따라 모든 집회, 시위는 금지됐어. 대학가는 계엄군이 지키고 있어. 유신을 반대하는 목소리는 들리기가 어려운 상황이야. 그렇게 비상계엄 체제 하에 유신헌법 국민 투표는 '찬성'이란 결과를 낳았어. 투표한 사람 중에서 90% 이상이 지지를 보냈으니까 '야 이건 정말 국민들이 모두 원했던 것이 아니냐' 얘기할 수도 있겠죠. 근데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역시 고려할 필요가 있겠어요. 일단 계엄령 아래에서 국민투표가 이루어졌다는 거예요. 한마디로 군대를 깔아놓고, 즉 바로 옆에 탱크, 장갑차, 무장한 군인들이 즐비한 상황에서 투표가 이루어졌다는 거죠. 두 번째가 여러 가지로 유신을 지지하고 찬양하는 목소리만이 허용됐던 그런 시절에, 정말 사람들은 그 얘기를 들을 수밖에 없고, 그 얘기 외에는 어떠한 판단의 근거도 마련돼 있지 않은 그런 상황에서는, 정부가 유도하는 대로 선거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숫자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것은 문제가 됩니다. -오제연,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그제서야 비상계엄도 해제됐어. 그렇게 유신 시대가 시작된 거야. ▲ 유신 시대의 시작과 반발 그리고 대통령 선거를 치른지 1년 만에, 8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져. 들어봤을 거야, '체육관 선거'.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대통령 선거가 이루어졌어. 당연히 유신헌법에 따라 국민은 투표를 할 수가 없어. 통일주체국민회의, 일명 '통대'의 대의원들이 대통령을 뽑아. 후보는 단 한 명, 박정희. 결과는? 찬성 2,357표, 반대표는 없어. 무효표만 2개야. 그래서 찬성률이 99.9%야. 앞에 나온 7대 대선 때 박정희 후보의 선거유세 기억나? '나를 한번 더 뽑아 주십시오' 하는 정치 연설은 오늘 이 기회가 마지막이라는 것을 확실히 말씀드립니다 라고 했던 거. 결과적으로 이 약속은 지켜졌어. 국민 앞에서 더 이상 지지를 호소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이때부터 1987년까지 무려 16년간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 직접선거가 이뤄지지 않았어. 그 문제점을 누구라도 조금만 들여다보면 알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오래갈 수가 없었던 거죠. 유신헌법에 대한 반대 투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거였죠. -정태호,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여기저기서 반발이 튀어나오기 시작해. 박정희의 라이벌, 김대중. 그가 일본에서 한 연설이 있거든. 한 번 들어봐. 요새 하고 있는 10월 유신이라는 거는 세상에 말도 안돼. 유신이 뭐야, 유신이. 일본 사람들이 100년 전에 써먹은 소리 아니요? 여러분, 다 기억하실 거예요. 재작년 선거 때 만일 이번에 박정희 정권의 종식을 짓지 못하면 이제 우리에게는 선거조차 없는 영구 집권의 총통제 시대가 온다고. 내가 몇 천 번 말했어요. 상당수 사람들이 '그래도 설마?' 그랬어. 그 설마가 사람 잡아요. 그렇게 됐어. 10월 18일 날 저는 박정희 씨의 조치를 정면으로 부인하고,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성명의 서두에 '박정희 씨의 이번 조치는 통일을 빙자해서 자기 자신의 영구집권을 획책하는 것이다' 이렇게 성명을 했습니다. -김대중 일본 하코네 연설 中 유신 발표 직후부터 김대중은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유신 반대 목소리를 냈어. 그러던 1973년 8월 8일 일본 도쿄의 한 호텔. 김대중은 호텔 스위트룸에서 약속을 마치고 막 방을 나서는 중이었어. 그 순간 웬 남자들이 나타나 김대중의 목을 낚아채고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고는 끌고 가. 중앙정보부가 김대중을 납치한 거야. 이 김대중 납치 사건은 국내외적으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게 돼. 반유신 운동에 불을 붙인 거야. 반유신 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움직인 사람들은, 대학생들이었어. 여러 학교에서 시국선언문을 발표하며 대학생들이 유신체제와의 투쟁을 선언했어. ▲ 긴급 조치의 시대 이 상황을 유신정권은 어떻게 했을까? 유신헌법에 아주 강력한 제재가 있었잖아. 바로 '긴급조치'. 1974년 1월 8일, 박정희 대통령은 긴급조치 1, 2호를 선포해. 1월 8일 박정희 대통령은 헌법 제53조에 의한 대통령 긴급 조치를 선포하여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고,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고 밝혔습니다. 이 조치에 위반하거나 비방한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며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하기로 했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유신헌법에 대해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어. 반대는 물론, 비방도 하면 안돼. 또 유언비어도 금지야. 위반하면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고, 징역이 무려 15년까지 가능해. 그리고 긴급 조치 2호는, 비상군법회의 설치에 대한 내용이야. 실제로 긴급조치 위반으로 학생들은 비상보통군법회의에 세워졌어. 긴급조치의 주된 내용들은 유신 체제를 보호하기 위한 그런 거였죠. '유신헌법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마라' '좋다 나쁘다 평가도 하지 마라' '유신헌법이 나쁘니까 개헌을 하자' 뭐 이런 얘기도 하지 마라. 그러니까 이게 민주주의의 근본 원리, 특히 국민주권 원리를 정면으로 부정한 거거든요. -정태호,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곧이어 발표된 긴급조치 3호에는 국민생활안정을 위한 조치들이 나열돼 있어. 불안해진 민심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을까? 그럼에도 여론은 심상치 않았어. 결국 박정희 대통령은 직접 나서 이야기해. 이런 판국에 전 국민이 혼연일체가 돼서 한 덩어리가 돼도 지금 이러한 난관을 뚫고 나아가기가 힘이 들고 힘이 부족한 판인데. 작년 연말부터 국내 일각에서는 일부 인사들 중에 현 체제에 대해서 정면으로 도전을 해오는가 하면 민심을 자꾸 선동을 하고 사회 혼란만을 조장하기 때문에, 그동안 수차 설득도 해보고 경고도 해 보았습니다만 설득이나 경고만 가지고는 이 사람들의 행동이 중지할 그런 뜻이 전혀 없다는 것을 판단을 해서 만부득이 대통령의 긴급조치를 발동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번에 긴급 조치가 선포된 그 배경, 이유라고 그럴까. 목적, 취지 이런 것을 여러분들이 잘 이해를 해 주시고, 적극적으로 협조를 해주십사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적극적으로 협조를 해 주시면 이 조치는 곧 필요 없게 될 것입니다. -박정희, 1974년 1월 연두 기자회견 중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은 긴급조치에 대한 영화도 만들었어. 영화 속 어머니 역할이 아주 온화한 말투로 정부의 긴급조치에 대한 입장을 줄줄 설명하곤 했어. 하지만, 유신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가. 긴급조치로 억압 받은 학생들은 더 많은 학생들과 연대를 해. 4월 3일, 대학가에서 시위를 준비한 거야. 그런데, 이를 사전에 파악한 유신정권은 대대적인 검거에 나서. 그리고 4월 3일 밤, 긴급조치 4호가 선포돼. 그 내용은 이래.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과 이에 관련되는 단체를 조직 또는 가입하거나, 활동에 동조하거나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이를 위반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긴급조치로 최대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어. 어떻게 학생들의 시위에 사형까지 언급됐을까? 여기에서 언급된 단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줄여서 '민청학련'이라 불러. 긴급조치 4호가 선포된 이유는, 바로 이거였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의 수사 상황을 발표했습니다. 과거 공산 불법단체인 인민혁명당과 제1 조총련, 국내 좌파 혁신계 기독교 학생단체, 그리고 일본 공산당원까지 포함된 약 20명의 배후 조종자가 스며들어 자금을 대는 등 학생들을 뒤에서 조종한 것이 드러났습니다. 4월 3일을 기해 폭동을 일으켜서 정부 주요기관을 점거하고 정권을 인수하려 했으며, 인혁당은 대한민국을 폭력으로 전복하고 공산정권을 수립할 목적으로 북한 괴뢰 지령에 따라 조직되고 활동한 반국가단체라고 밝혔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학생들이 북한의 조종을 받고 있고, 공산계 불법단체가 배후에 있다는 거야. 나라를 전복할 목적이래. 그런데, 이건 조작으로 밝혀졌어.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학생들의 시위를 배후세력까지 조작해서 국가전복 시도라는 시나리오를 쓴 거야. 그렇게 민청학련 사건으로 조사받은 사람만, 천 명이 넘어. 대부분 대학생들이었어. 그중 7명에게 사형이 구형됐고, 무기징역 7명, 징역 20년형이 12명이나 됐어. 이 사건의 변론을 맡았던 강신옥 변호사는 법정에서 이렇게 얘기를 했어. 법은 정치와 권력의 시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랏일을 걱정하는 애국 학생들을 빨갱이로 몰아 사형이니, 무기니 하는 형을 구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법을 악용하는 '사법 살인'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강 변호사가 이렇게 변론을 이어가는 도중, 갑자기 휴정이 선포되고 강 변호사는 연행됐어. 그날 밤, 남산 중정으로 연행된 강 변호사는 잔혹한 구타를 당했대. 그리고 결국 구속됐어. 그의 죄목은, '긴급조치 위반'이었어. ▲ 언론 통제와 저항 이런 사태들이 벌어지고 있지만 언론에선 제대로 보도하지 못했어. 학생들의 시위, 개헌운동 등은 기사가 빠지거나 최소화돼. 고문, 수사, 재판에 대한 문제점에도 침묵했어. 당시 언론사에는 기자도 아닌데 매일 출근 도장을 찍는 사람이 있다고 해. 기관원이라고, 중앙정보부에서 나온 사람이야. 기사를 빼고, 용어를 바꾸고. 중앙정보부에서 각 언론사별로 담당직원을 배치해 통제를 하는 거야. 유신 시기에 들어서서는 신문에 무슨 기사를 내지 말라, 내지 말라는 게 딱 아주 한정돼 있는데. '학생들 데모 기사는 절대로 내지 마라'. '저항하는 움직임에 대해서 아주 손끝 하나도 보도하지 말라' 이렇게 되는 거죠. -김학천, 당시 동아방송 PD 그 당시는 그 모든 걸 전부 통제하고, 누가 자살했다든지 뭐 어제 굶는다든지 어렵다든지 이런 건 기사 못 나가게 돼 있어요. 전부 다 밝은 기사만 쓰라 그러고. -김동현, 당시 동아일보 기자 보도할 때 쓰는 단어에도 제재가 있었어. 예를 들어 '물가 인상'은 '물가 현실화'. '세금 인상'은 '세제 개혁'. 묘하게 뉘앙스를 바꾼 거야. 이런 상황에 언론인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 당시에 데모하는 현장에 가면, 서울대학교에 가면 그쪽에서 써 놨어요. '개와 기자는 출입금지' 써놨어요. '기사 나가지도 않는데 왜 오는데, 올 필요 없다'고 해가지고. 그렇게 모욕을 받았어요. 그러니까 얼마나 괴로웠겠어요. 그때 보면서 '부끄럽다'는 걸 느꼈어요. 기자가 참 부끄럽다. 그걸 제대로 해서 국민에게 알려줄 의무가 있는데. '그런 걸 못하면서 말이야. 기자라고 언론이라고' 이거는 너무 창피했어요. 그때 우리들이 울었어요, 사실은… -김동현, 당시 동아일보 기자 이런 상황이 되자 언론도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 이 사진을 한번 볼래. 사진 속 족자에 적힌 글자는 '자유언론 실천선언'. 마지막 사진에 서 있는 분은 인터뷰를 해 주신 김학천 PD야. 그렇게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은 투쟁에 나섰어. 신문방송잡지에 대한 어떠한 외부 간섭도 배제한다 , 기관원의 출입을 거부한다 , 언론인의 불법 연행을 거부한다 라고 외쳤어. 그 후 매일매일이 치열한 싸움이야. 회사 건물 현관에 '기관원 출입 금지'라고 써 붙이고, 학생 시위에 대한 기사를 늘렸어. 그리고 라디오 방송에서는 비판적이고 풍자적인 멘트도 넣었어. 권력이란 무엇입니까. 한 번 잡으면 그렇게 놓기 싫은 겁니까? 라며 비판했어. 그리고 얼마 뒤, 아주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해. 저희는 동아일보에서 광고를 그만해야 할 것 같은데요. 이번 달 광고 예산이 아직 안 나와서. 광고를 더 못할 것 같은데... 무려 90% 정도의 광고가 해약돼. 그리고 12월 26일 동아일보 신문은 이렇게 발행돼. 아예 백지광고로 나간 거야. 무더기로 광고가 빠진 자리를, 그대로 보여준 거지. 그런데, 그 후로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 이건 다른 날 발행된 동아일보야. 빼곡히 채워진 광고의 정체. 격려 광고가 들어오기 시작한 거야. 대학생, 주부, 어린이, 해외 동포까지. 자발적으로 정성을 모아준 거야. '취학하는 석아, 그른 것은 절대 배우지 마라' ?아빠, 엄마 '양심에 호소하여 우리보다 참하게 살았으면 싶다'-어느 여자 직장인 '운전자와 손님이 합심하여 동아일보의 발전을 빌며'-택시 운전사와 손님 '데이트 자금으로 작은 지면을 삽니다'-순과 선 '이 나라에서 법을 공부하는 안타까운 이 마음과…' ?서울대 동창 남매 마침 그것도 이제 시민들이 성금 내듯이 그런 식으로 했으니까. 고무적이었죠. 우리를 후원하는 이런 사람들이 있구나, 우리 우군이 있구나, 우리가 외롭지 않다. 그런 걸 느꼈어요. -김동현, 당시 동아일보 기자 시민들의 격려 광고로 힘을 얻으며 저항을 이어오던 어느날, 김학천 PD는 아주 특별한 방송을 준비해. 주제는 바로, '감옥으로 보내는 편지'였어. 당시 긴급조치 위반으로 수감 중인 사람들의 가족들이 직접 쓴 편지를 방송하기로 한 거야. 방송이 시작되고, 수감 중인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어린 아들이 직접 읽어. 아버지! 난 아버지가 죄가 있어서 거기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요. 그래서... 편지는 이제 시작인데, 그 후는 꺽~꺽~ 우는 소리만 이어져. 그 다음은 자식을 감옥에 보낸 어머니의 편지였어. 아들아, 엄마가 엊그제 면회를 갔는데 면회를 시켜주지 않더구나. 내복 여러 벌 가지고 갔는데 전해주지 못했구나. 다른 재소자들이라도 입으라고 전부 두고 왔단다. 엄마는... 어머니도 더 이상 편지를 읽지 못하셔. 사무치는 울음소리만 전파를 타고 퍼져나가. 상당히 파국까지 왔다라는 생각이고, 꺾일 때 어떻게 꺾일 것인가. 어쨌든 난 아침 시간 15분, 내가 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때 뭐 감옥에 많이 들어가 있었지. 그 감옥에 아이들 또는 부모를 둔 사람들이 5분 동안 원고지 한 6~7장을 써서 읽으라고 했는데. 첫 번째 문장만 그냥 읽다가 그 다음에 다 우는 걸로 끝을 냈어요. '김학천 씨, 이거 여기서 끊을까요? 그냥 훌쩍훌쩍 울기만 하는데' 묻길래, '그냥 둬라. 그것도 메시지 아니냐'.. 한 1~2분 얘기하고 2~3분 우는 프로그램이 나갔어요. -김학천, 당시 동아방송 PD ▲ 분노한 대학생들 1972년에 유신이 시작되고 유신에 대한 저항과 이를 막으려는 조치들이 반복됐어. 긴급조치 5호와 6호는 앞서 선포된 조치들을 해제하려는 조치야. 긴급조치 해제를 위해 또 다른 긴급조치를 선포한 거야. 그리고 7호는, 고려대학교 한 학교를 휴교시키기 위해 선포됐어. 시위를 막으려고. 그리고 1975년 4월 8일. 또 한번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져. 긴급조치 4호 기억나지? 대학생들이 북한 세력의 조종을 받아 국가를 전복할 목적이라며 사형을 구형했던 거. 이날은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 세력으로 지목됐던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들의 최종 판결이 내려지는 날이야. 그리고 8명의 관련자들에게 최종적으로 사형이 선고됐어. 다음날, 사형 선고를 받은 이들의 가족들이 아침 일찍 구치소로 향했어. 구속 이후 1년 가까이 만나지 못해서, 형이 확정됐으니 면회라도 가능하겠지 싶어 만나러 간거야. 그날 찍힌 사진이 있어. 통곡하는 가족들. 이미 사형이 집행된 거야. 대법원 판결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 됐어. 이날은 사법 사상 암흑의 날로 기록돼. 훗날, 이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 사람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어. 이틀 뒤 서울대 백양나무 옆 잔디밭에 3백 명 가량의 학생들이 모였어. 그리고, 한 청년이 이들 앞으로 걸어 나와. 청년의 이름은 김상진이야. 서울대학교에 재학중이었던 상진이는 친구들과 함께 유신 반대 단식 집회를 준비하고 있었어. 김상진 학생에 대해 들어볼게. 우리 상진이가 착하고 진짜 속 썩이는 거 없었어요. 아버지 어머니 말을 잘 들었지. -김상운, 김상진 형 조용했습니다. 얌전하다고 할까요. 차분한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저하고 서울대학교 같은 과를 입학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유신헌법의 그 문제점들이 사회적으로 자꾸 농축돼 갔던 거죠. 75년도부터가 거의 폭발의 단계에 왔습니다. 그 폭발의 불쏘시개를 한 게 제2차 인혁당 사건입니다. 그 사건이 발생해서 8명이 사형 집행이 된 적이 있죠. 상진이가 매우매우 분노했습니다. -이호선, 김상진 친구 상진이는 학생들 앞에 서서 준비해 온 글을 읽기 시작해. 글의 제목은 '양심선언문'이야. 당시 상진이의 목소리를 녹음한 기록이 있어. 우리를 대변한 동지들은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신음하고 있고, 무고한 백성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가고 있다. 합법을 가장한 유신헌법의 모든 부조리와 악을 고발한다. 우리는 유신헌법의 자기중심적 이기성을 고발한다. 학우여 아는가! 민주주의는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투쟁의 결과라는 것을. 이것이 민족과 역사를 위하는 길이고, 이것이 우리 사랑스러운 조국의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길이며, 이것이 영원한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길이라면. 이 보잘 것 없는 생명 바치기에 아까움이 없노라. 나의 앞으로의 행동에 대해서 여러분은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완전한 이성을 되찾아서, 우리가 해야 할 바를 갖다가 명실상부하게 이끌어 나가길 바란다... -김상진의 양심선언문, 1975년 4월 11일 녹음분을 들어보면, 상진이의 이 말을 끝으로 갑자기 현장이 소란스러워져.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건 방송에는 처음 하는 얘기들입니다. 이걸 꼭 기록을 해주셔야 됩니다. 그 계단에서 이런 얘기를 저한테 했군요. '호선아 나는 이제 나의 신념을, 각오를 행동으로 표현할게. 유신이 없어지는 날, 나를 기억해 달라'는 그런 식의 얘기였습니다. 상진이가 서서 낭독하는 그 자리에서 10여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제가 앉아 있었어요. 상진이가 양심선언문을 읽자마자 가방에서 과도를 꺼냈습니다... 5초만 빨라도 됐습니다. 5초만 빨라도 됐어.. 칼로 찌르고 앞으로 넘어지기 직전에 제가 뒤에서 붙잡았습니다. -이호선, 김상진 친구 호선이는 상진이와 함께 병원으로 이동했어. 그 택시 안에서 상진이가 이런 이야기를 했대. 호선아, 애국가 불러줘 호선이는 큰 목소리로 애국가를 불렀어. 그리고 상진이는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어. ▲ 긴급조치 9호 김상진 열사의 죽음 뒤로, 저항의 목소리를 더욱 거세졌어. 그로부터 한 달 뒤, 긴급조치 8호로 긴급조치 7호가 해제되고, 동시에 긴급조치 9호가 선포돼. 유언비어 안 되고, 유신헌법에 대해 말해서도 안 되고, 시위는 물론 학생의 정치 관여도 안돼. 긴급 조치 9호는 어떤 특정한 사건에 대응하기 위해서 발동한 것이 아니라 그냥 항시적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유신 체제에 대해서 저항은 물론이고 어떠한 비판도 할 수 없도록 결국에는 아주 광범위하고 포괄적으로 유신에 대한 반대를 불허하는 그러한 조치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이런 것들을 우리가 보통 '긴급조치의 종합판'이다… -오제현,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이렇게 선포된 긴급조치 9호는 오랫동안 국민의 숨통을 조여왔어. 무려 4년 7개월 동안. 긴급조치가 9호가 이렇게 오래 지속되는 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때는 1978년 11월. 전북에서 꽤 잘 나간다는 한 학원이야. 이 학원에서 영어강사로 일하는 차봉현 씨. 봉현 씨는 여기저기 스카우트가 될 정도로 인기 강사였대. 봉현 씨는 영어뿐 아니라 정치 경제 윤리 강의도 하며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어. 어느날, 봉현 씨는 여느 날처럼 학원으로 출근을 했어. 수업 내용을 살펴보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남자 2명이 들어와. 학원으로 경찰들이 들이닥친 거야. 경찰이 물어보는 거예요. '당신이 유신 헌법 철폐하고 유신 헌법 없애자고 학생들 앞에 주장 안 했냐' 이제 이렇게 나온 거예요. '나는 절대 그런 말 안 했다' 내가 사회의 지도자가 아니고 내가 뭐 정당의 정당인도 아니고 내가 뭐 정치를 하는 사람도 아니고. 절대 부인한 거예요. -차봉현, 당시 영어학원 강사 봉현 씨가 강의 중 유신헌법 철폐를 주장했다는 거야. 봉현 씨는 강의 때 이렇게 얘기를 했대. 국회의 여당 의원 수가 많잖아요. 그건 헌법으로 설치된 통일주체국민회의가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뽑기 때문이에요. 이런 말이 문제 될 거라곤 생각도 못했어. 그 후, 봉현 씨는 여기저기 끌려 다니며 폭행을 당했어. 날이 갈수록 폭행의 강도는 점점 심해졌대. 둘이서 이제 때리기 시작한 거예요. 주먹으로 뺨도 때리고. 취조하는 실인데 거기 데리고 가서 옷을 벗겨요. 옷을 벗겨 가지고 빨가 벗겨서 몽둥이로 이제 때리는 거예요 둘이서. 또 무릎을 꿇고 앉으라고 해서 무릎 사이에 나무를 놔두고 거기서 밟아버려요. 그러면 무릎이 팍 깨져요. 그런 고문을 당했어요. 경찰서 정보과실에서. '나는 비판 정도를 했다' '헌법을 폐지해야 한다.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 이런 말은 절대 한 것 없다. 근데 그게 안 통한다니까. 자기가 써갖고 와서 이렇게 '이대로 해달라' 그러니까 내가 이제 안 맞으려고 사인해 줬죠. -차봉현, 긴급조치 피해자 자백을 받기 위해 봉현 씨를 고문한 거야. 봉현 씨는 1년 6개월의 형을 선고받았어. 근데 이런 일을 겪은 건 봉현 씨 뿐만이 아니야. 긴급조치 9호로 처벌받은 사례들을 보여줄게. 박정희는 군인 출신이기 때문에 정치를 잘할 수 없어. 100억 불 수출이라 하면서도 수입에 대해서는 은폐하고 있잖아. 언론의 자유도 없는 거야. 이런 말을 했다고 징역 8년을 선고받았어. 또 어떤 남자는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박정희 정치는 뭣~도 아니다 이렇게 외쳤어. 판결은 징역 1년. 자기야, 대통령이 내가 잘 아는 친구 언니와 애인 사이래 라는 가벼운 말. 이건 징역 1년을 선고받았어. 긴급조치 9호는 술 먹고 말 한마디 잘못해도 잡혀간다 해서 '막걸리 보안법'이라 불렸어. 심지어 노래도 마음대로 못 불렀어. 국가의 안전 수호와 사회 질서를 문란케 하는 대중문화가 있다는 거야. 그렇게 취한 조치가 '금지곡'. 1975년 한 해 동안 금지된 노래가 국내 가요만 222곡이야. 지금도 들으면 알만한 곡들이 이때 무더기로 금지가 돼. 김추자의 '거짓말이야'. 이 노래는 1971년 발매돼 아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어. 이 노래가 갑자기 금지된 이유는 '거짓말이야'라는 가사 때문에. '가사 내용 불신 조장', 그리고 창법도 저속하대. 신중현의 '미인'. 너무 유명한 노래지. '신중현과 엽전들'의 '미인'은 1974년에 발매돼 약 40만 장 이상의 앨범 판매를 올린 대히트곡이야. 이 곡이 금지된 이유는, 저속한 가사, 퇴폐한 곡이래. 어디가 저속하다는 걸까?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 이 가사를 학생들이 '한 번 하고 두 번 하고 자꾸만 하고 싶네~' 이렇게 개사해서 불렀대. 박정희 대통령이 대통령을 한 번 하고 두 번 한다고, 그렇게 비꼬고 풍자하니까 금지곡이 된 거 아니냐 라는 얘기가 있어. 그리고, 금지곡 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곡이 한 곡 더 있지. 바로 김민기의 '아침이슬'. 양희은이 부른 '아침이슬'이 많이 알려져 있지. 이 노래를 작사, 작곡한 사람이 바로 김민기야. 이 곡이 금지된 이유는, 없어. 기록에 금지 사유가 아예 적혀 있지 않아. 보통 이렇게 금지곡이 되려면 그 옆에 금지 사유가 있어야 돼요. 아무리 엉망으로 하더라도 사유가 있어야 되잖아요. 근데 '아침이슬'은 금지 사유가 없어요. 이걸 대학생들이 시위에 불렀다고 금지를 시키기에는 너무 논리가 옹색한 거죠. 금지 사유가 없어. -강헌, 음악평론가 유신 반대 시위 현장에서 많은 학생들이 김민기의 노래를 불렀어. 그렇게 김민기의 노래는 모두 금지곡이 되었고 그는 보안사 등 여기저기를 끌려 다니며 조사를 받고 활동 또한 탄압을 받았어. 금지라는 행위, 검열이라는 행위가 뭐가 나쁘냐면요. '상상력에 제한이 가해져서는 안 된다'라는 이유인 겁니다. 결국 검열은 상상력의 잠재력을 사실은 원천적으로 파괴시키는 행위예요. 알아서 기게 만드는 행위예요. 그걸 알아서 기는 예술가들이 어떤 작품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결국 그런 표현의 자유를 물리적인 공권력으로 억압한다는 얘기는 그냥 간단한 얘기예요. 그냥 단순히 '이 노래 부르지 마, 이 영화 보지 마, 이 책 읽지마'로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이것은 기본적으로 민주주의가 보장하고 있는, 헌법이 보장하는 모든 기본권이 '전부 구금될 수 있다'는 얘기이고 실제로 그렇게 됩니다. -강헌, 음악평론가 ▲ 유신의 종말 말 한 마디 조심하고, 노래도 마음대로 못 하는 시대는 몇 년 간 이어져. 그러던 중, 1979년 민중의 불만이 폭발하는 사건들이 일어나. 'YH 사건' 혹시 들어봤어? 8월 9일, 가발공장이었던 YH무역의 일방적인 폐업 공고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이 당시 야당인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이게 돼. 여공들의 호소를 받아 주고 당사로 받아준 사람이, 당시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야. 하지만, 곧 야당 당사에 경찰이 투입돼. 농성을 하던 노동자들을 경찰은 무차별 폭력과 강제 연행으로 진압했어. 이를 지켜 본 김영삼 총재는 박정희 정권과의 정면대결에 들어가. 그러다 김영삼 총재는 국회의원 제명을 당해. 제명된 후 이렇게 말했지. 아무리 닭의 목을 비틀지라도 새벽은 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10월 16일 부산. 유신철폐! 독재타도! 를 외치며, 김영삼의 정치적 본거지였던 부산 시민들이 들고 일어났어. 부산대에서 수백 명으로 시작된 시위는 수천 명으로 늘어났고, 결국 수 만명의 군중이 모였어. 그리고 부산에 비상계엄이 선포돼. 부산 시내에 탱크가 등장했어. 그러나 시민들은 물러서지 않았고 시위는 마산으로까지 번졌어. 바로 '부마항쟁'이야. 김재규의 법정 진술에 따르면, 부마항쟁을 보고 받은 박정희 대통령이 이런 말을 했다는 거야. 이제부터 사태가 악화되면 내가 발포 명령을 하겠다. 그리고 부마항쟁 열흘 뒤인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열린 연회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에 맞아 사망해. 이렇게 유신 시대는 끝을 맞게 돼.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궁정동 안가. 유신헌법의 초안이 작성된 장소 어디라고 했지? 그래 궁정동 안가. 거기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며 길고 길었던 유신 시대는 끝이 났어. 7년간 이어진 유신체제. 그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지. 언론의 자유를 위해 싸운 분들은 마지막까지 철야 농성을 하며 저항했지만, 결국 회사에서 강제로 끌려 나왔어. 당시 100 명이 넘는 언론인이 해임을 당하게 돼. 긴급조치 9호로 재판을 받던 학원강사 봉현 씨는 박정희의 사망 후 최종 면소 판결을 받고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어. 하지만 다시 강사로 취업할 수는 없었다고 해. 긴급조치는 30년이 훨씬 지나 2000년대에 들어서야 위헌 판결이 내려졌어. 2010년 대법원은 긴급조치 1호가 유신헌법, 현행헌법에 위험이라고 판단했고, 그 이후 긴급조치 4호, 9호 역시 위헌이라 했어. 2013년 헌법재판소에서는 긴급조치 1호, 2호, 9호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어. 그리고 2018년 대법원에서는 1972년 비상 계엄 포고령에 대해 이렇게 판단했어. 당시의 국내 정치 상황 및 사회 상황이 계엄법에서 정한 '군사상 필요할 때'에 해당한다고 할 수 없다. 계엄 포고는 헌법과 법률에서 정한 발동 요건을 갖추지 못한 채 발령되었고, 구 헌법, 현행 헌법, 구 계엄령에 위배되어 위헌이고 위법하여 무효이다. 노벨문학상 수상한 한강 작가가 이런 말을 했어.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라고.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현재도 언젠간 과거가 될 거야. 현재가 어떻게 기록될지는, 지금 우리의 몫이지 않을까?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
[꼬꼬무 찐리뷰]53년 전에도 '비상계엄' 있었다…박정희 유신시대와 긴급조치의 진실
등록일2025.03.14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13일 방송된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방송인 홍석천, 배우 박효주, 아나운서 이인권이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서울 한복판에 나타난 탱크 때는 53년 전 서울, 평범한 가을날 저녁이야. 직장인들은 퇴근을 서두르고, 동네 곳곳에선 저녁을 준비하는 음식냄새가 솔솔 풍기고 있어. 그런데 그때 갑자기, 탱크를 몰고 중무장한 군인들이 서울 도심 한복판에 나타났어. 당시 태평로에 있던 국회의사당, 그리고 광화문 근처 중앙청에 서 있는 탱크의 모습이야. 시간은 저녁 7시, TV와 라디오를 통해 깜짝 놀랄만한 소식이 전해져. 박정희 대통령 각하는 10월 17일 오후 7시를 기해 비상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1972년 10월 17일 19시를 기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현행 헌법의 일부 조항 효력을 정지시킨다. 이와 같은 비상조치를 국민 앞에 선포한 박 대통령 각하는 우리 모두 일치단결하여 민주제도의 건전한 발전과 조국 통일의 기원이 성취되는 그날까지 힘차게 전진해 나갈 것을 촉구했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이 선포된 거야. 비상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있을 때 선포할 수 있어. 보통 이제 한국에서 비상계엄은 어떤 굉장히 큰 사회 혼란기나 아니면 6.25 전쟁과 같은 정말 전시에 주로 선포가 됐어요. 그런데 이 1972년 10월 17일에 선포된 비상계엄은 사실은 굉장히 평온한 때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때에 선포가 됐고.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혼란이라든지 어떤 위기라든지 뭐 전시라든지 이런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던 시기인데 느닷없이, 그야말로 느닷없이 비상계엄이 선포가 되었던 거죠. -오제연,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이렇게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앞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해줄게. ▲비상계엄과 특별선언 박정희 대통령은 비상계엄과 함께 '10.17 특별 선언'을 발표했어. 그 내용은 이래. 1972년 10월 17일 19시를 기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현행헌법의 일부 조항 효력을 정지시킨다. 일부효력이 정지된 헌법조항의 기능은 현행헌법의 국무회의가 수행한다. 비상국무회의는 1972년 10월 27일까지 조국의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헌법개정안을 공고하며 이를 공고한 날로부터 1개월 이내에 국민투표에 부쳐 확정시킨다. 헌법개정안이 확정되면 개정된 헌법절차에 따라 늦어도 금년 연말 이전에 헌정질서를 정상화시킨다. 헌법도 바꾸고, 국회를 해산하겠다는 거야. 아까 사진 봤지? 국회의사당 정문을 딱 가로막고 있는 탱크. '국회 해산'이란 게 가능한 걸까? 당시에도 대통령에게 국회해산권은 없었대. 그때도 사실은 헌법에 의하면 할 수가 없는 거였고, 지금도 역시 뭐 헌법에 의하면 국회 해산권을 갖고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할 수가 없는 거죠.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국회해산권이 없는 대통령이 국회를 그냥 임의로 해산시켜버린 거죠. 군인들이 쫙 깔린 상태에서 뭐 그런 상태에서는 사실 기존 헌법에 어떤 조항이나 범위나 이런 것들에 구애받지 않고, 대통령이 임의로 자신의 권력을 행사할 수가 있었던 거죠. -오제연,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그때도 국회는 계엄 해제를 요구할 수 있었어. 그런데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초법적 조치로 국회를 해산시켜버린 거야. 그래서 해제할 수 없었어. 설사 국회가 해산되지 않았어도, 당시 국회엔 박정희 대통령이 소속되어 있는 여당 의원이 더 많았어. 그러니 야당만으로는 계엄 해제 요구가 어려운 상황이지. 아무리 그래도, 반발이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주요 정치인들이 가택 연금을 당해. 대문 앞을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거야. 게다가, 느닷없이 끌려온 사람들이 옷이 벗겨진 채 사정없이 구타를 당해. 몽둥이질에 잠도 재우지 않고 물고문까지 이어져. 이렇게 고문을 당한 사람들은, 국회의원들이야. 이런 국회의원들에겐 공통점이 하나 있었어. 바로 '블랙리스트'. 비상계엄 한 달 전, 야당 의원들의 이름이 있는 블랙리스트 명단이 만들어졌다고 해.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블랙리스트에 적힌 사람 가운데 13명의 야당 의원들을 보안사에서 끌고 갔다는 거야. 이런 일들은 비상계엄 선포 후, 바로바로 진행됐어. 이렇게 국회도 해산하고, 헌법도 바꾸겠다고 해. 여기서 끝이 아니야. 얼마 뒤에 대통령 선거도 해. 불과 1년 전, 7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거든. 근데 임기 1년 만에 또 대통령 선거를 하는 거야. 왜 그랬을까? ▲ 1년 만에 다시 한 대통령 선거 3년 전인 1969년, 박정희 정권은 헌법을 개정했어. '3선 개헌'이라고 들어봤어? 헌법 제 69조 3항 '대통령의 계속 재임은 3기에 한한다'. 대통령을 3번까지 할 수 있다는 거야. 원래는 두 번까지만 할 수 있었거든. 이렇게 5대 6대 대통령을 역임한 박정희 대통령은 이 헌법 개정으로 3선에 도전하게 돼. 그리고 3선 개헌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하며 등장한 대선 라이벌이 있어. 바로 47살의 젊은 정치인, 김대중 후보. 두 후보의 경쟁은 엄청났어. 여러분 이번에 정권교체를 하지 못하면 이 나라는 박정희 씨의 영구 집권의 총통 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박정희 씨는 '3선 개헌은 절대로 안 한다', '나보고 3선 개헌한다는 것은 야당 놈들의 모략이다' 이렇게 말했어요. 그러더니 2년이 못 가서 재작년에 절대로 안 한단 3선 개헌을 정반대로 절대로 해 버렸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헌법을 고칠 때는 앞으로 이 나라에서 누구든 자기 한 사람의 영구집권을 위해서 헌법을 이리 고치고 저리 고치고 하는 일은 영원히 못 하도록 분명히 하는 것을 여러분에게 내가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김대중 후보의 유세 연설 中 유권자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에게 분명히 말씀드리거니와, '나를 대통령으로 한번 더 뽑아 주십시오' 하는 이런 정치 연설은 오늘 이 기회가 마지막 연설이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말씀드립니다. 지난 5대, 6대 대통령 선거에 있어서 유권자 여러분들은 이 사람을 대통령으로 두 번 뽑아 주셨습니다. 이번만 여러분들이 한번 더 이 사람을 지지를 해주시면, 일할 수 있는 그런 뒷받침을 해 주시면, 앞으로 4년 동안 여러분들을 위해서 있는 정력을 다 해서, 한번 멋있는 수도 서울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정희 후보의 유세 연설 中 그럼, 선거 결과 어땠을까? 결과는, 박정희의 승리였어. 53.2% 대 45.3%의 차이야. 서울에서는 김대중 후보가 앞서기도 했어. 그리고 한달 후, 박정희 대통령의 여당인 민주공화당이 113석, 야당인 신민당이 89석을 차지하면서, 그전에 비해 야당의 의석수가 늘어났어. 김종필 증언록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해. 그 다음엔 김대중이 될지도 몰라. 그러니 내가 좀 특수한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 그 '특수한 것'이 뭘까? 박정희 대통령 취임 1년 뒤인 1972년 5월. '풍년사업'이란 이름의 은밀한 작업이 진행돼. 이름만 보면 농업 관련 사업 같지 않아? 근데, 그 작업이 진행된 장소는 바로 여기야. 일명 '궁정동 안가'라 불리는 곳이야. '안가'는 안전가옥, 이곳은 대통령의 안전가옥이야. 아주 비밀스러운 곳이지. 여기서 뭘 했냐. 대만 총통제, 스페인 총통제, 프랑스 드골 헌법 등 해외사례를 연구하고 있어. 왜 이런 사례들을 연구할까? 대만의 총통이었던 장제스, 스페인 총통 프랑코, 두 사람 모두 본인들이 죽으면서 그 임기가 끝나. 종신 집권을 했다는 거야. 그렇게 은밀하게 진행된 풍년사업의 결과는, 다섯 달 뒤인 1972년 10월 세상에 공개됐어. '유신헌법'이라는 이름으로. ▲ 유신헌법 10월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헌법을 개정하고. 이게 바로 '10월 유신'이야. 유신, 사전적 의미는, 낡은 제도를 고쳐 새롭게 한다는 거야. 유신헌법에는 대통령이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카드들이 있었어. 먼저 '집권' 카드. 대통령 집권에 대한 강력한 변화가 생겨.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지 않는다는 얘기야. 그럼, 누가 뽑냐? 통일주체국민회의, 일명 '통대'라고 하는 기관에서 대통령을 선출하겠다는 거야. 그런데, 이 '통대'의 의장이 누굴까? 대통령 본인이야. 대통령이 의장인 기관에서 대통령을 뽑겠다는 거지. 대통령 임기도 4년에서 6년으로 늘어나. 그리고 대통령 중임 제한 폐지. 사실상 영구집권이 가능해진 거야. 두번째는 '밸런스' 카드. 권력의 밸런스를 파괴하는 카드야. 대통령에게 '국회 해산권'이 생겼어. 10.17 비상계엄 때는 국회 해산권이 없었다고 했잖아? 그걸 만든 거야. 이제 대통령이 입법권을 가진 국회를 해산할 수 있어. 그리고 국회의원 3분의 1을 대통령이 추천하고 이를 '통대'에서 선출하겠대. 게다가 대통령이 사실상 사법부의 모든 법관을 임명할 수 있게 됐어.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이 입법부에 사법부까지 손아귀에 쥐는 거야. 3권분립의 파괴야. 마지막 카드는 아주 강력한 힘이야. 바로 '긴급조치'야. 유신헌법 제53조 1항을 보면, '국정 전반에 걸쳐 필요한 긴급조치를 할 수 있다'는 거야. 필요한 조치라는 게, 어디까지 가능한 걸까? 무서운 거는 헌법에 규정돼 있는 국민의 기본권의 효력을 정지시킬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부여했죠. 조치에 대해서는 사법 심사를 할 수가 없도록 해놨어요. 그것이 헌법에 위반되었는지 이런 것 자체를 심사할 수 없도록, 헌법에 아예 명시해 놨어요. 긴급조치 위반했다고 그래서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이 긴급 조치는 위헌이다', '불법이다', 아무리 주장해 봤자 먹혀들 수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법원이 심사 자체를 못 했기 때문에… -정태호,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대통령의 판단에 따라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정지하고 처벌할 수 있다는 거야.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열흘 만에 공표된 이 유신헌법 개정안은 한달 뒤 국민투표에 부쳐져. 당시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 결과, 찬성률은 91.5%가 나와.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먼저, 유신이 내세운 명분 중 하나는 '평화통일'이었어. 유신 3개월 전,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돼. 분단 이후 남북이 처음으로 평화통일 원칙에 합의한 거야. 국민들의 통일에 대한 열망도 아주 높아졌어. 한마디로 '평화통일을 하려면 법과 체제를 바꿔야 한다', '10월 유신으로 한국적 민주주의를 이룩하자' 이런 명분으로 유신을 홍보한 거야. 유신헌법의 가장 큰 하나의 명분이 되는 것은 당시에 남북 관계가 획기적으로 변했다는 거죠. 그 이전에 남북의 어떤 대결, 특히 68년을 전후로 해서는 한반도의 안보 위기라고 부를 정도의 정말 곧 전쟁이 터질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었거든요. 그런데 이런 것들이 한순간에 갑자기 변해서 지금 남북이 대화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러한 대화 국면에서 어쨌든 우리가 북한과 제대로 대화를 하려면 체제를 바꿔야 된다, 이게 이제 가장 큰 명분이 되는 것이고. 그때 체제를 바꿀 때는 우리가 평화 통일을 지향하는 그런 헌법을 가져야 된다라고 하는 것이 이제 또 하나의 명분이 되는 거죠. -오제연,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실제로 박정희 대통령이 한 얘기가 있어. 만일 국민 여러분이 헌법 개정에 찬성치 않는다면 나는 이것을 남북 대화를 원치 않는다는 국민의 의사 표시로 받아들이고 조국 통일에 대한 새로운 방안을 모색할 것임을 아울러 밝혀두는 바입니다. -박정희, 10.17 대통령 특별선언 中 이런 선언과 함께, 유신 찬성을 위한 본격적인 홍보도 시작했어. 10월 유신, 100억 불 수출, 1,000불 소득 쭉 뻗은 도로, 기계화된 농촌, TV, 자동차까지... 잘 살려면 유신이 필요하다고 홍보하는 거야. 이것도 한 번 봐봐. 반대하면 파멸, 찬성하면 번영이래. 유신을 찬성해야 잘 살 수 있다는 거야. 그리고 효과적인 홍보 수단, 미디어도 활용했어. 이 시기에 모든 신문과 방송은 검열을 거쳐야만 했대. 혹여나 유신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가 나가면 안되니까. 문공부에서 주는 보도 자료를 한 자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써야 되니까.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적절한 법률이다', 그런 식으로 다 신문이 받아 썼었죠. '유신만이 살 길이다' 그런 구호를 신문에 꼭 넣고. 그 다음에 칼럼을 쓸 필자들 풀로 넘겨줘요, 우리 신문사에. 그래서 '이 중에 골라서 해라'. 그런 사람 외에는 쓰지 못하게 했어요. 완전히 언론 탄압을 무지막지하게 했죠 그 당시에는. 유명한 얘기가 있는데 광고 이론에 나오는데 '반복은 진실을 만든다'는 말이 있어요. 계속 반복하면 그렇게 세뇌되는 거예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요. -김동현, 당시 동아일보 기자 비상계엄이 선포된 1972년 10월 17일부터 유신 찬반 국민 투표일인 11월 21일까지, 유신 관련 좌담 방송이 398회, 유신지지 단독 해설이 218회, 유신 비전 제시 특별 프로그램이 58회 방송됐어. 이 정도면, 국민 투표에서 찬성률이 그렇게 높았던 이유가 좀 이해가 가지? 계엄 포고령에 따라 모든 집회, 시위는 금지됐어. 대학가는 계엄군이 지키고 있어. 유신을 반대하는 목소리는 들리기가 어려운 상황이야. 그렇게 비상계엄 체제 하에 유신헌법 국민 투표는 '찬성'이란 결과를 낳았어. 투표한 사람 중에서 90% 이상이 지지를 보냈으니까 '야 이건 정말 국민들이 모두 원했던 것이 아니냐' 얘기할 수도 있겠죠. 근데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역시 고려할 필요가 있겠어요. 일단 계엄령 아래에서 국민투표가 이루어졌다는 거예요. 한마디로 군대를 깔아놓고, 즉 바로 옆에 탱크, 장갑차, 무장한 군인들이 즐비한 상황에서 투표가 이루어졌다는 거죠. 두 번째가 여러 가지로 유신을 지지하고 찬양하는 목소리만이 허용됐던 그런 시절에, 정말 사람들은 그 얘기를 들을 수밖에 없고, 그 얘기 외에는 어떠한 판단의 근거도 마련돼 있지 않은 그런 상황에서는, 정부가 유도하는 대로 선거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숫자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것은 문제가 됩니다. -오제연,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그제서야 비상계엄도 해제됐어. 그렇게 유신 시대가 시작된 거야. ▲ 유신 시대의 시작과 반발 그리고 대통령 선거를 치른지 1년 만에, 8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져. 들어봤을 거야, '체육관 선거'.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대통령 선거가 이루어졌어. 당연히 유신헌법에 따라 국민은 투표를 할 수가 없어. 통일주체국민회의, 일명 '통대'의 대의원들이 대통령을 뽑아. 후보는 단 한 명, 박정희. 결과는? 찬성 2,357표, 반대표는 없어. 무효표만 2개야. 그래서 찬성률이 99.9%야. 앞에 나온 7대 대선 때 박정희 후보의 선거유세 기억나? '나를 한번 더 뽑아 주십시오' 하는 정치 연설은 오늘 이 기회가 마지막이라는 것을 확실히 말씀드립니다 라고 했던 거. 결과적으로 이 약속은 지켜졌어. 국민 앞에서 더 이상 지지를 호소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이때부터 1987년까지 무려 16년간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 직접선거가 이뤄지지 않았어. 그 문제점을 누구라도 조금만 들여다보면 알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오래갈 수가 없었던 거죠. 유신헌법에 대한 반대 투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거였죠. -정태호,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여기저기서 반발이 튀어나오기 시작해. 박정희의 라이벌, 김대중. 그가 일본에서 한 연설이 있거든. 한 번 들어봐. 요새 하고 있는 10월 유신이라는 거는 세상에 말도 안돼. 유신이 뭐야, 유신이. 일본 사람들이 100년 전에 써먹은 소리 아니요? 여러분, 다 기억하실 거예요. 재작년 선거 때 만일 이번에 박정희 정권의 종식을 짓지 못하면 이제 우리에게는 선거조차 없는 영구 집권의 총통제 시대가 온다고. 내가 몇 천 번 말했어요. 상당수 사람들이 '그래도 설마?' 그랬어. 그 설마가 사람 잡아요. 그렇게 됐어. 10월 18일 날 저는 박정희 씨의 조치를 정면으로 부인하고,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성명의 서두에 '박정희 씨의 이번 조치는 통일을 빙자해서 자기 자신의 영구집권을 획책하는 것이다' 이렇게 성명을 했습니다. -김대중 일본 하코네 연설 中 유신 발표 직후부터 김대중은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유신 반대 목소리를 냈어. 그러던 1973년 8월 8일 일본 도쿄의 한 호텔. 김대중은 호텔 스위트룸에서 약속을 마치고 막 방을 나서는 중이었어. 그 순간 웬 남자들이 나타나 김대중의 목을 낚아채고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고는 끌고 가. 중앙정보부가 김대중을 납치한 거야. 이 김대중 납치 사건은 국내외적으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게 돼. 반유신 운동에 불을 붙인 거야. 반유신 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움직인 사람들은, 대학생들이었어. 여러 학교에서 시국선언문을 발표하며 대학생들이 유신체제와의 투쟁을 선언했어. ▲ 긴급 조치의 시대 이 상황을 유신정권은 어떻게 했을까? 유신헌법에 아주 강력한 제재가 있었잖아. 바로 '긴급조치'. 1974년 1월 8일, 박정희 대통령은 긴급조치 1, 2호를 선포해. 1월 8일 박정희 대통령은 헌법 제53조에 의한 대통령 긴급 조치를 선포하여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고,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고 밝혔습니다. 이 조치에 위반하거나 비방한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며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하기로 했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유신헌법에 대해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어. 반대는 물론, 비방도 하면 안돼. 또 유언비어도 금지야. 위반하면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고, 징역이 무려 15년까지 가능해. 그리고 긴급 조치 2호는, 비상군법회의 설치에 대한 내용이야. 실제로 긴급조치 위반으로 학생들은 비상보통군법회의에 세워졌어. 긴급조치의 주된 내용들은 유신 체제를 보호하기 위한 그런 거였죠. '유신헌법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마라' '좋다 나쁘다 평가도 하지 마라' '유신헌법이 나쁘니까 개헌을 하자' 뭐 이런 얘기도 하지 마라. 그러니까 이게 민주주의의 근본 원리, 특히 국민주권 원리를 정면으로 부정한 거거든요. -정태호,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곧이어 발표된 긴급조치 3호에는 국민생활안정을 위한 조치들이 나열돼 있어. 불안해진 민심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을까? 그럼에도 여론은 심상치 않았어. 결국 박정희 대통령은 직접 나서 이야기해. 이런 판국에 전 국민이 혼연일체가 돼서 한 덩어리가 돼도 지금 이러한 난관을 뚫고 나아가기가 힘이 들고 힘이 부족한 판인데. 작년 연말부터 국내 일각에서는 일부 인사들 중에 현 체제에 대해서 정면으로 도전을 해오는가 하면 민심을 자꾸 선동을 하고 사회 혼란만을 조장하기 때문에, 그동안 수차 설득도 해보고 경고도 해 보았습니다만 설득이나 경고만 가지고는 이 사람들의 행동이 중지할 그런 뜻이 전혀 없다는 것을 판단을 해서 만부득이 대통령의 긴급조치를 발동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번에 긴급 조치가 선포된 그 배경, 이유라고 그럴까. 목적, 취지 이런 것을 여러분들이 잘 이해를 해 주시고, 적극적으로 협조를 해주십사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적극적으로 협조를 해 주시면 이 조치는 곧 필요 없게 될 것입니다. -박정희, 1974년 1월 연두 기자회견 중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은 긴급조치에 대한 영화도 만들었어. 영화 속 어머니 역할이 아주 온화한 말투로 정부의 긴급조치에 대한 입장을 줄줄 설명하곤 했어. 하지만, 유신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가. 긴급조치로 억압 받은 학생들은 더 많은 학생들과 연대를 해. 4월 3일, 대학가에서 시위를 준비한 거야. 그런데, 이를 사전에 파악한 유신정권은 대대적인 검거에 나서. 그리고 4월 3일 밤, 긴급조치 4호가 선포돼. 그 내용은 이래.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과 이에 관련되는 단체를 조직 또는 가입하거나, 활동에 동조하거나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이를 위반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긴급조치로 최대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어. 어떻게 학생들의 시위에 사형까지 언급됐을까? 여기에서 언급된 단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줄여서 '민청학련'이라 불러. 긴급조치 4호가 선포된 이유는, 바로 이거였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의 수사 상황을 발표했습니다. 과거 공산 불법단체인 인민혁명당과 제1 조총련, 국내 좌파 혁신계 기독교 학생단체, 그리고 일본 공산당원까지 포함된 약 20명의 배후 조종자가 스며들어 자금을 대는 등 학생들을 뒤에서 조종한 것이 드러났습니다. 4월 3일을 기해 폭동을 일으켜서 정부 주요기관을 점거하고 정권을 인수하려 했으며, 인혁당은 대한민국을 폭력으로 전복하고 공산정권을 수립할 목적으로 북한 괴뢰 지령에 따라 조직되고 활동한 반국가단체라고 밝혔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학생들이 북한의 조종을 받고 있고, 공산계 불법단체가 배후에 있다는 거야. 나라를 전복할 목적이래. 그런데, 이건 조작으로 밝혀졌어.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학생들의 시위를 배후세력까지 조작해서 국가전복 시도라는 시나리오를 쓴 거야. 그렇게 민청학련 사건으로 조사받은 사람만, 천 명이 넘어. 대부분 대학생들이었어. 그중 7명에게 사형이 구형됐고, 무기징역 7명, 징역 20년형이 12명이나 됐어. 이 사건의 변론을 맡았던 강신옥 변호사는 법정에서 이렇게 얘기를 했어. 법은 정치와 권력의 시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랏일을 걱정하는 애국 학생들을 빨갱이로 몰아 사형이니, 무기니 하는 형을 구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법을 악용하는 '사법 살인'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강 변호사가 이렇게 변론을 이어가는 도중, 갑자기 휴정이 선포되고 강 변호사는 연행됐어. 그날 밤, 남산 중정으로 연행된 강 변호사는 잔혹한 구타를 당했대. 그리고 결국 구속됐어. 그의 죄목은, '긴급조치 위반'이었어. ▲ 언론 통제와 저항 이런 사태들이 벌어지고 있지만 언론에선 제대로 보도하지 못했어. 학생들의 시위, 개헌운동 등은 기사가 빠지거나 최소화돼. 고문, 수사, 재판에 대한 문제점에도 침묵했어. 당시 언론사에는 기자도 아닌데 매일 출근 도장을 찍는 사람이 있다고 해. 기관원이라고, 중앙정보부에서 나온 사람이야. 기사를 빼고, 용어를 바꾸고. 중앙정보부에서 각 언론사별로 담당직원을 배치해 통제를 하는 거야. 유신 시기에 들어서서는 신문에 무슨 기사를 내지 말라, 내지 말라는 게 딱 아주 한정돼 있는데. '학생들 데모 기사는 절대로 내지 마라'. '저항하는 움직임에 대해서 아주 손끝 하나도 보도하지 말라' 이렇게 되는 거죠. -김학천, 당시 동아방송 PD 그 당시는 그 모든 걸 전부 통제하고, 누가 자살했다든지 뭐 어제 굶는다든지 어렵다든지 이런 건 기사 못 나가게 돼 있어요. 전부 다 밝은 기사만 쓰라 그러고. -김동현, 당시 동아일보 기자 보도할 때 쓰는 단어에도 제재가 있었어. 예를 들어 '물가 인상'은 '물가 현실화'. '세금 인상'은 '세제 개혁'. 묘하게 뉘앙스를 바꾼 거야. 이런 상황에 언론인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 당시에 데모하는 현장에 가면, 서울대학교에 가면 그쪽에서 써 놨어요. '개와 기자는 출입금지' 써놨어요. '기사 나가지도 않는데 왜 오는데, 올 필요 없다'고 해가지고. 그렇게 모욕을 받았어요. 그러니까 얼마나 괴로웠겠어요. 그때 보면서 '부끄럽다'는 걸 느꼈어요. 기자가 참 부끄럽다. 그걸 제대로 해서 국민에게 알려줄 의무가 있는데. '그런 걸 못하면서 말이야. 기자라고 언론이라고' 이거는 너무 창피했어요. 그때 우리들이 울었어요, 사실은… -김동현, 당시 동아일보 기자 이런 상황이 되자 언론도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 이 사진을 한번 볼래. 사진 속 족자에 적힌 글자는 '자유언론 실천선언'. 마지막 사진에 서 있는 분은 인터뷰를 해 주신 김학천 PD야. 그렇게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은 투쟁에 나섰어. 신문방송잡지에 대한 어떠한 외부 간섭도 배제한다 , 기관원의 출입을 거부한다 , 언론인의 불법 연행을 거부한다 라고 외쳤어. 그 후 매일매일이 치열한 싸움이야. 회사 건물 현관에 '기관원 출입 금지'라고 써 붙이고, 학생 시위에 대한 기사를 늘렸어. 그리고 라디오 방송에서는 비판적이고 풍자적인 멘트도 넣었어. 권력이란 무엇입니까. 한 번 잡으면 그렇게 놓기 싫은 겁니까? 라며 비판했어. 그리고 얼마 뒤, 아주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해. 저희는 동아일보에서 광고를 그만해야 할 것 같은데요. 이번 달 광고 예산이 아직 안 나와서. 광고를 더 못할 것 같은데... 무려 90% 정도의 광고가 해약돼. 그리고 12월 26일 동아일보 신문은 이렇게 발행돼. 아예 백지광고로 나간 거야. 무더기로 광고가 빠진 자리를, 그대로 보여준 거지. 그런데, 그 후로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 이건 다른 날 발행된 동아일보야. 빼곡히 채워진 광고의 정체. 격려 광고가 들어오기 시작한 거야. 대학생, 주부, 어린이, 해외 동포까지. 자발적으로 정성을 모아준 거야. '취학하는 석아, 그른 것은 절대 배우지 마라' ?아빠, 엄마 '양심에 호소하여 우리보다 참하게 살았으면 싶다'-어느 여자 직장인 '운전자와 손님이 합심하여 동아일보의 발전을 빌며'-택시 운전사와 손님 '데이트 자금으로 작은 지면을 삽니다'-순과 선 '이 나라에서 법을 공부하는 안타까운 이 마음과…' ?서울대 동창 남매 마침 그것도 이제 시민들이 성금 내듯이 그런 식으로 했으니까. 고무적이었죠. 우리를 후원하는 이런 사람들이 있구나, 우리 우군이 있구나, 우리가 외롭지 않다. 그런 걸 느꼈어요. -김동현, 당시 동아일보 기자 시민들의 격려 광고로 힘을 얻으며 저항을 이어오던 어느날, 김학천 PD는 아주 특별한 방송을 준비해. 주제는 바로, '감옥으로 보내는 편지'였어. 당시 긴급조치 위반으로 수감 중인 사람들의 가족들이 직접 쓴 편지를 방송하기로 한 거야. 방송이 시작되고, 수감 중인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어린 아들이 직접 읽어. 아버지! 난 아버지가 죄가 있어서 거기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요. 그래서... 편지는 이제 시작인데, 그 후는 꺽~꺽~ 우는 소리만 이어져. 그 다음은 자식을 감옥에 보낸 어머니의 편지였어. 아들아, 엄마가 엊그제 면회를 갔는데 면회를 시켜주지 않더구나. 내복 여러 벌 가지고 갔는데 전해주지 못했구나. 다른 재소자들이라도 입으라고 전부 두고 왔단다. 엄마는... 어머니도 더 이상 편지를 읽지 못하셔. 사무치는 울음소리만 전파를 타고 퍼져나가. 상당히 파국까지 왔다라는 생각이고, 꺾일 때 어떻게 꺾일 것인가. 어쨌든 난 아침 시간 15분, 내가 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때 뭐 감옥에 많이 들어가 있었지. 그 감옥에 아이들 또는 부모를 둔 사람들이 5분 동안 원고지 한 6~7장을 써서 읽으라고 했는데. 첫 번째 문장만 그냥 읽다가 그 다음에 다 우는 걸로 끝을 냈어요. '김학천 씨, 이거 여기서 끊을까요? 그냥 훌쩍훌쩍 울기만 하는데' 묻길래, '그냥 둬라. 그것도 메시지 아니냐'.. 한 1~2분 얘기하고 2~3분 우는 프로그램이 나갔어요. -김학천, 당시 동아방송 PD ▲ 분노한 대학생들 1972년에 유신이 시작되고 유신에 대한 저항과 이를 막으려는 조치들이 반복됐어. 긴급조치 5호와 6호는 앞서 선포된 조치들을 해제하려는 조치야. 긴급조치 해제를 위해 또 다른 긴급조치를 선포한 거야. 그리고 7호는, 고려대학교 한 학교를 휴교시키기 위해 선포됐어. 시위를 막으려고. 그리고 1975년 4월 8일. 또 한번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져. 긴급조치 4호 기억나지? 대학생들이 북한 세력의 조종을 받아 국가를 전복할 목적이라며 사형을 구형했던 거. 이날은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 세력으로 지목됐던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들의 최종 판결이 내려지는 날이야. 그리고 8명의 관련자들에게 최종적으로 사형이 선고됐어. 다음날, 사형 선고를 받은 이들의 가족들이 아침 일찍 구치소로 향했어. 구속 이후 1년 가까이 만나지 못해서, 형이 확정됐으니 면회라도 가능하겠지 싶어 만나러 간거야. 그날 찍힌 사진이 있어. 통곡하는 가족들. 이미 사형이 집행된 거야. 대법원 판결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 됐어. 이날은 사법 사상 암흑의 날로 기록돼. 훗날, 이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 사람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어. 이틀 뒤 서울대 백양나무 옆 잔디밭에 3백 명 가량의 학생들이 모였어. 그리고, 한 청년이 이들 앞으로 걸어 나와. 청년의 이름은 김상진이야. 서울대학교에 재학중이었던 상진이는 친구들과 함께 유신 반대 단식 집회를 준비하고 있었어. 김상진 학생에 대해 들어볼게. 우리 상진이가 착하고 진짜 속 썩이는 거 없었어요. 아버지 어머니 말을 잘 들었지. -김상운, 김상진 형 조용했습니다. 얌전하다고 할까요. 차분한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저하고 서울대학교 같은 과를 입학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유신헌법의 그 문제점들이 사회적으로 자꾸 농축돼 갔던 거죠. 75년도부터가 거의 폭발의 단계에 왔습니다. 그 폭발의 불쏘시개를 한 게 제2차 인혁당 사건입니다. 그 사건이 발생해서 8명이 사형 집행이 된 적이 있죠. 상진이가 매우매우 분노했습니다. -이호선, 김상진 친구 상진이는 학생들 앞에 서서 준비해 온 글을 읽기 시작해. 글의 제목은 '양심선언문'이야. 당시 상진이의 목소리를 녹음한 기록이 있어. 우리를 대변한 동지들은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신음하고 있고, 무고한 백성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가고 있다. 합법을 가장한 유신헌법의 모든 부조리와 악을 고발한다. 우리는 유신헌법의 자기중심적 이기성을 고발한다. 학우여 아는가! 민주주의는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투쟁의 결과라는 것을. 이것이 민족과 역사를 위하는 길이고, 이것이 우리 사랑스러운 조국의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길이며, 이것이 영원한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길이라면. 이 보잘 것 없는 생명 바치기에 아까움이 없노라. 나의 앞으로의 행동에 대해서 여러분은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완전한 이성을 되찾아서, 우리가 해야 할 바를 갖다가 명실상부하게 이끌어 나가길 바란다... -김상진의 양심선언문, 1975년 4월 11일 녹음분을 들어보면, 상진이의 이 말을 끝으로 갑자기 현장이 소란스러워져.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건 방송에는 처음 하는 얘기들입니다. 이걸 꼭 기록을 해주셔야 됩니다. 그 계단에서 이런 얘기를 저한테 했군요. '호선아 나는 이제 나의 신념을, 각오를 행동으로 표현할게. 유신이 없어지는 날, 나를 기억해 달라'는 그런 식의 얘기였습니다. 상진이가 서서 낭독하는 그 자리에서 10여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제가 앉아 있었어요. 상진이가 양심선언문을 읽자마자 가방에서 과도를 꺼냈습니다... 5초만 빨라도 됐습니다. 5초만 빨라도 됐어.. 칼로 찌르고 앞으로 넘어지기 직전에 제가 뒤에서 붙잡았습니다. -이호선, 김상진 친구 호선이는 상진이와 함께 병원으로 이동했어. 그 택시 안에서 상진이가 이런 이야기를 했대. 호선아, 애국가 불러줘 호선이는 큰 목소리로 애국가를 불렀어. 그리고 상진이는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어. ▲ 긴급조치 9호 김상진 열사의 죽음 뒤로, 저항의 목소리를 더욱 거세졌어. 그로부터 한 달 뒤, 긴급조치 8호로 긴급조치 7호가 해제되고, 동시에 긴급조치 9호가 선포돼. 유언비어 안 되고, 유신헌법에 대해 말해서도 안 되고, 시위는 물론 학생의 정치 관여도 안돼. 긴급 조치 9호는 어떤 특정한 사건에 대응하기 위해서 발동한 것이 아니라 그냥 항시적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유신 체제에 대해서 저항은 물론이고 어떠한 비판도 할 수 없도록 결국에는 아주 광범위하고 포괄적으로 유신에 대한 반대를 불허하는 그러한 조치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이런 것들을 우리가 보통 '긴급조치의 종합판'이다… -오제현,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이렇게 선포된 긴급조치 9호는 오랫동안 국민의 숨통을 조여왔어. 무려 4년 7개월 동안. 긴급조치가 9호가 이렇게 오래 지속되는 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때는 1978년 11월. 전북에서 꽤 잘 나간다는 한 학원이야. 이 학원에서 영어강사로 일하는 차봉현 씨. 봉현 씨는 여기저기 스카우트가 될 정도로 인기 강사였대. 봉현 씨는 영어뿐 아니라 정치 경제 윤리 강의도 하며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어. 어느날, 봉현 씨는 여느 날처럼 학원으로 출근을 했어. 수업 내용을 살펴보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남자 2명이 들어와. 학원으로 경찰들이 들이닥친 거야. 경찰이 물어보는 거예요. '당신이 유신 헌법 철폐하고 유신 헌법 없애자고 학생들 앞에 주장 안 했냐' 이제 이렇게 나온 거예요. '나는 절대 그런 말 안 했다' 내가 사회의 지도자가 아니고 내가 뭐 정당의 정당인도 아니고 내가 뭐 정치를 하는 사람도 아니고. 절대 부인한 거예요. -차봉현, 당시 영어학원 강사 봉현 씨가 강의 중 유신헌법 철폐를 주장했다는 거야. 봉현 씨는 강의 때 이렇게 얘기를 했대. 국회의 여당 의원 수가 많잖아요. 그건 헌법으로 설치된 통일주체국민회의가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뽑기 때문이에요. 이런 말이 문제 될 거라곤 생각도 못했어. 그 후, 봉현 씨는 여기저기 끌려 다니며 폭행을 당했어. 날이 갈수록 폭행의 강도는 점점 심해졌대. 둘이서 이제 때리기 시작한 거예요. 주먹으로 뺨도 때리고. 취조하는 실인데 거기 데리고 가서 옷을 벗겨요. 옷을 벗겨 가지고 빨가 벗겨서 몽둥이로 이제 때리는 거예요 둘이서. 또 무릎을 꿇고 앉으라고 해서 무릎 사이에 나무를 놔두고 거기서 밟아버려요. 그러면 무릎이 팍 깨져요. 그런 고문을 당했어요. 경찰서 정보과실에서. '나는 비판 정도를 했다' '헌법을 폐지해야 한다.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 이런 말은 절대 한 것 없다. 근데 그게 안 통한다니까. 자기가 써갖고 와서 이렇게 '이대로 해달라' 그러니까 내가 이제 안 맞으려고 사인해 줬죠. -차봉현, 긴급조치 피해자 자백을 받기 위해 봉현 씨를 고문한 거야. 봉현 씨는 1년 6개월의 형을 선고받았어. 근데 이런 일을 겪은 건 봉현 씨 뿐만이 아니야. 긴급조치 9호로 처벌받은 사례들을 보여줄게. 박정희는 군인 출신이기 때문에 정치를 잘할 수 없어. 100억 불 수출이라 하면서도 수입에 대해서는 은폐하고 있잖아. 언론의 자유도 없는 거야. 이런 말을 했다고 징역 8년을 선고받았어. 또 어떤 남자는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박정희 정치는 뭣~도 아니다 이렇게 외쳤어. 판결은 징역 1년. 자기야, 대통령이 내가 잘 아는 친구 언니와 애인 사이래 라는 가벼운 말. 이건 징역 1년을 선고받았어. 긴급조치 9호는 술 먹고 말 한마디 잘못해도 잡혀간다 해서 '막걸리 보안법'이라 불렸어. 심지어 노래도 마음대로 못 불렀어. 국가의 안전 수호와 사회 질서를 문란케 하는 대중문화가 있다는 거야. 그렇게 취한 조치가 '금지곡'. 1975년 한 해 동안 금지된 노래가 국내 가요만 222곡이야. 지금도 들으면 알만한 곡들이 이때 무더기로 금지가 돼. 김추자의 '거짓말이야'. 이 노래는 1971년 발매돼 아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어. 이 노래가 갑자기 금지된 이유는 '거짓말이야'라는 가사 때문에. '가사 내용 불신 조장', 그리고 창법도 저속하대. 신중현의 '미인'. 너무 유명한 노래지. '신중현과 엽전들'의 '미인'은 1974년에 발매돼 약 40만 장 이상의 앨범 판매를 올린 대히트곡이야. 이 곡이 금지된 이유는, 저속한 가사, 퇴폐한 곡이래. 어디가 저속하다는 걸까?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 이 가사를 학생들이 '한 번 하고 두 번 하고 자꾸만 하고 싶네~' 이렇게 개사해서 불렀대. 박정희 대통령이 대통령을 한 번 하고 두 번 한다고, 그렇게 비꼬고 풍자하니까 금지곡이 된 거 아니냐 라는 얘기가 있어. 그리고, 금지곡 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곡이 한 곡 더 있지. 바로 김민기의 '아침이슬'. 양희은이 부른 '아침이슬'이 많이 알려져 있지. 이 노래를 작사, 작곡한 사람이 바로 김민기야. 이 곡이 금지된 이유는, 없어. 기록에 금지 사유가 아예 적혀 있지 않아. 보통 이렇게 금지곡이 되려면 그 옆에 금지 사유가 있어야 돼요. 아무리 엉망으로 하더라도 사유가 있어야 되잖아요. 근데 '아침이슬'은 금지 사유가 없어요. 이걸 대학생들이 시위에 불렀다고 금지를 시키기에는 너무 논리가 옹색한 거죠. 금지 사유가 없어. -강헌, 음악평론가 유신 반대 시위 현장에서 많은 학생들이 김민기의 노래를 불렀어. 그렇게 김민기의 노래는 모두 금지곡이 되었고 그는 보안사 등 여기저기를 끌려 다니며 조사를 받고 활동 또한 탄압을 받았어. 금지라는 행위, 검열이라는 행위가 뭐가 나쁘냐면요. '상상력에 제한이 가해져서는 안 된다'라는 이유인 겁니다. 결국 검열은 상상력의 잠재력을 사실은 원천적으로 파괴시키는 행위예요. 알아서 기게 만드는 행위예요. 그걸 알아서 기는 예술가들이 어떤 작품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결국 그런 표현의 자유를 물리적인 공권력으로 억압한다는 얘기는 그냥 간단한 얘기예요. 그냥 단순히 '이 노래 부르지 마, 이 영화 보지 마, 이 책 읽지마'로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이것은 기본적으로 민주주의가 보장하고 있는, 헌법이 보장하는 모든 기본권이 '전부 구금될 수 있다'는 얘기이고 실제로 그렇게 됩니다. -강헌, 음악평론가 ▲ 유신의 종말 말 한 마디 조심하고, 노래도 마음대로 못 하는 시대는 몇 년 간 이어져. 그러던 중, 1979년 민중의 불만이 폭발하는 사건들이 일어나. 'YH 사건' 혹시 들어봤어? 8월 9일, 가발공장이었던 YH무역의 일방적인 폐업 공고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이 당시 야당인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이게 돼. 여공들의 호소를 받아 주고 당사로 받아준 사람이, 당시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야. 하지만, 곧 야당 당사에 경찰이 투입돼. 농성을 하던 노동자들을 경찰은 무차별 폭력과 강제 연행으로 진압했어. 이를 지켜 본 김영삼 총재는 박정희 정권과의 정면대결에 들어가. 그러다 김영삼 총재는 국회의원 제명을 당해. 제명된 후 이렇게 말했지. 아무리 닭의 목을 비틀지라도 새벽은 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10월 16일 부산. 유신철폐! 독재타도! 를 외치며, 김영삼의 정치적 본거지였던 부산 시민들이 들고 일어났어. 부산대에서 수백 명으로 시작된 시위는 수천 명으로 늘어났고, 결국 수 만명의 군중이 모였어. 그리고 부산에 비상계엄이 선포돼. 부산 시내에 탱크가 등장했어. 그러나 시민들은 물러서지 않았고 시위는 마산으로까지 번졌어. 바로 '부마항쟁'이야. 김재규의 법정 진술에 따르면, 부마항쟁을 보고 받은 박정희 대통령이 이런 말을 했다는 거야. 이제부터 사태가 악화되면 내가 발포 명령을 하겠다. 그리고 부마항쟁 열흘 뒤인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열린 연회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에 맞아 사망해. 이렇게 유신 시대는 끝을 맞게 돼.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궁정동 안가. 유신헌법의 초안이 작성된 장소 어디라고 했지? 그래 궁정동 안가. 거기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며 길고 길었던 유신 시대는 끝이 났어. 7년간 이어진 유신체제. 그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지. 언론의 자유를 위해 싸운 분들은 마지막까지 철야 농성을 하며 저항했지만, 결국 회사에서 강제로 끌려 나왔어. 당시 100 명이 넘는 언론인이 해임을 당하게 돼. 긴급조치 9호로 재판을 받던 학원강사 봉현 씨는 박정희의 사망 후 최종 면소 판결을 받고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어. 하지만 다시 강사로 취업할 수는 없었다고 해. 긴급조치는 30년이 훨씬 지나 2000년대에 들어서야 위헌 판결이 내려졌어. 2010년 대법원은 긴급조치 1호가 유신헌법, 현행헌법에 위험이라고 판단했고, 그 이후 긴급조치 4호, 9호 역시 위헌이라 했어. 2013년 헌법재판소에서는 긴급조치 1호, 2호, 9호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어. 그리고 2018년 대법원에서는 1972년 비상 계엄 포고령에 대해 이렇게 판단했어. 당시의 국내 정치 상황 및 사회 상황이 계엄법에서 정한 '군사상 필요할 때'에 해당한다고 할 수 없다. 계엄 포고는 헌법과 법률에서 정한 발동 요건을 갖추지 못한 채 발령되었고, 구 헌법, 현행 헌법, 구 계엄령에 위배되어 위헌이고 위법하여 무효이다. 노벨문학상 수상한 한강 작가가 이런 말을 했어.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라고.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현재도 언젠간 과거가 될 거야. 현재가 어떻게 기록될지는, 지금 우리의 몫이지 않을까?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지금 시국과 딱…'꼬꼬무', 10월 유신과 긴급조치 다룬다
등록일2025.03.13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가 1972년 10월 유신과 긴급조치, 이후 발생한 사건들을 공개한다. 13일 방송될 '꼬꼬무'는 '유신 헌법과 긴급조치'를 주제로, 방송인 홍석천, 배우 박효주, 아나운서 이인권이 리스너로 출격한다. 앞서 진행된 녹화에서 '10월 유신과 긴급조치'에 대해 장도연이 오늘의 회차는 말에 관한 이야기이다 라고 밝히자 박효주는 요즘 말이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올해 들어서 말을 많이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고 말해 그 이유를 궁금케 했다. 미리 공개된 '꼬꼬무' 예고 영상에는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 선포 그리고 대통령의 특별선언, 그 후의 이야기가 예고됐다. 리스너들은 70년대 서울 도심 한복판에 군인과 탱크가 등장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고, 박정희 대통령 각하는 비상계염령을 선포해 조국 통일의 기원이 성취되는 그날까지 라는 멘트의 당일 뉴스 화면이 등장해 긴장감을 높였다. 이어 대통령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카드 3장과 함께 장현성, 장성규, 장도연은 각각 긴급조치 1호와 2호가 , 긴급조치 4호가 ,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됐어 라고 밝혀 리스너 이인권과 박효주를 놀라게 했다. 이번 '꼬꼬무'에서는 '술 먹고 말 한마디 잘 못해도 잡혀간다'는 의미에서 일명 '막걸리 보안법'이라 불렸던 '긴급조치 9호' 뿐만 아니라, 언론을 통제하던 중앙정보부에 저항한 매체에서 발생한 사건, 부산과 마산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부마민주항쟁'의 전후까지 공개된다. 이에 박효주는 와, 나 소름 돋았어 라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홍석천은 장현성에게 너랑 나랑은 좋은 어른이 됐으면 좋겠다 고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등 다채로운 반응을 보인다. '꼬꼬무'의 '유신 헌법과 긴급조치' 편은 13일 밤 10시 20분 방송된다.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팔색조 박성웅 주연 '필사의 추격' 개봉
등록일2024.08.22
&<앵커&> 쉴 틈 없는 행보로 주목받고 있는 박성웅 배우가 주연을 맡은 영화 '필사의 추격'이 이번 주 관객들을 찾아갑니다. 이번 주 개봉 영화 소식 김광현 기자가 전해 드립니다. &<기자&> [필사의 추격 / 감독 : 김재훈 / 주연 : 박성웅, 곽시양, 윤경호, 정유진, 박효주] 변장술을 써가며 남을 속이는 사기꾼 인해, 분노조절 장애인 형사 수광, 타이완의 폭력 조직 보스 린팡. 제주도 재래시장 유니 상가를 놓고 폭력 조직과 상인들의 갈등이 격화하면서 이들 세 남자의 운명도 한데 엮이기 시작합니다. [박성웅/인해 역 : 제가 촬영을 하다가 햄스트링이 끊어졌어요. 누가 이제 시사회를 보시고서 박성웅 쩔뚝거리는 연기 진짜 대박이다 했는데, 진짜 아파서 쩔뚝거리는 거니까 대박일 수밖에 없죠.] '필사의 탈출'은 2022년 영화 '악마들'로 데뷔한 김재훈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영화입니다. --- [늘봄가든 / 감독 : 구태진 / 주연 : 조윤희, 김주령] 남편의 유일한 유산인 한적한 시골 저택 늘봄가든으로 이사한 소희. 하지만 이후 이유를 알 수 없는 기이한 일들이 계속됩니다. 익숙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현실적인 공포를 담아낸 공포영화입니다. [조윤희/소희 역 : 저희 영화는 좀 이렇게 스토리가 있고 그 감정이 있고 거기에 좀 이렇게 얽힌 사연들이 있다 보니까. 좀 너무 무서움에 초점 보다도 그런 스토리가 있기 때문에 그런 걸 보시면 더 재밌을 것 같아요.] --- [프로이트의 라스트세션 / 감독 : 맷 브라운 / 주연 : 안소니 홉킨스, 매튜 구드, 리브 리사프라이스] 1939년 영국 런던, 암에 걸려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던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옥스퍼드대학의 젊은 교수 루이스를 자택으로 초대합니다. 전쟁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두 사람은 삶과 죽음, 전쟁과 종교에 대한 치열한 논쟁을 펼칩니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안소니 홉킨스의 열연이 돋보이는 영화로 국내에는 영화보다 먼저 연극으로 알려진 작품입니다. (영상취재 : 박대영, 영상편집 : 김병직)
[꼬꼬무 찐리뷰] 아버지 다녀오마 3살 딸과의 약속…펜 대신 총 든 '시인 이육사'
등록일2024.04.05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4일 방송된 '칼날 위에서 노래하다, 이육사'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가수 이무진, 댄서 모니카, 배우 박효주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아버지에 대한 기억 네가 기억하는 '가장 어렸을 때의 기억'이 뭐야? 가장 오래된 기억 하면, 대부분 대여섯 살 때 기억을 떠올릴 거야. 하지만 오늘 소개할 분은 좀 특별해. 기억력이, 어릴 때 기억이 더 좋은 것 같아요. 제가 만 3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그렇게 많지 않아요. 제가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게... 포승줄이 꽁꽁 묶이고 발에는 쇠고랑을 차고 있었어요. 얼굴에는 그 용수, 밀짚으로 된 3단으로 된 용수를 쓰고. 너무나 선명해요. 그게... 저에게는 굉장히 놀랍고 보지 못한 모습이잖아요. 굉장히 충격이었죠. 이게 '용수'야. 원래는 술을 거를 때 쓰는 도구인데, 죄수의 얼굴을 가릴 때도 씌웠어.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봤을 때가 만 3살도 안 됐을 때야. 하지만 그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대.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런 모습을 하셨던 걸까? 할머니의 기억 속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줄게. 때는 1941년 3월 27일. 서울 명륜동에서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졌어. 이날은, 할머니가 세상에 태어난 날이야. 아기는 온 집안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어. 먼저 태어난 언니 오빠가 있었지만 모두 홍역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거든. 그 후에 얻은 자식이니 얼마나 소중하겠어. 아이가 태어났으니 이름을 지어줘야지. 삼촌들이 저마다 이름을 지어주겠다고 나서. 그러자 아버지가 딱 잘라 말했어. 내 딸 이름을 왜 너희들이 짓냐! 다들 나서지 마라 고. 그리고 생후 100일이 되는 날, 아버지는 온 집안 식구들 앞에서 아이의 이름을 공개했어. '기름질 옥(沃)'에 '아닐 비(非)'. 아버지는 딸에게 '옥비'라는 이름을 지어주셨어. 100일 날 아침에 말씀하시기를 '기름질 옥'자에 '아닐 비'자다. 이렇게 고심을 하셔서 지으셨대요. 보통 한문으로 '기름질 옥'자, 이거는 잘 안 쓰거든요. '아닐 비'자는 더욱 안 쓰죠. '기름지지 않다' 이런 뜻이잖아요. '욕심 없이 남에게 배려할 수 있는 사람', 또 간디와 같은 사람이 되라고 그 이름을 지어주셨대요. -이옥비 할머니 옥비 아버지는 안동의 유서 깊은 선비 가문에서 태어났어. 아주 유명한 분의 후손이야. 바로 이분.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 퇴계 이황의 14대손이야. 옥비 아버지는 여섯 형제 중 둘째였는데, 형제들이 모두 시와 서화에 능했대. 옥비 아버지는 형제들 중에서도 가장 엄격했대. 한번 결심을 하면 절대 굽히는 법이 없었다고 해. 할머니가 '둘째 아들이 들어오면 옷깃이 여며진다' 언니들도 삼촌들도 둘째 형님을 굉장히 두려워했대요. 야단을 치지도 않고. 그런데 무언중에 그 매서움이 느껴졌던가 봐요. -이옥비 여사 하지만 옥비에게는 누구보다 자상한 아버지였어. 아침마다 어린 옥비를 안고 놀아주셨대. 옥비 아버지를 기억하고 있는 또 다른 인물이 있어. 제가 조카고, 저의 큰아버님이 신석초 시인이십니다. 우리 큰아버지도 어려서부터 한문을 같이 하면서 한시도 보고, 한문 번역 책들 번역도 하고. 그런 점들이 (옥비 아버지와) 다 맞는단 말이에요, 다 똑같아. 서로 도와줬다는 그런 면들이 형제 같은 거 아니겠나. 서로들 마음이 통했던 것 같아요. -신홍순, 신석초 시인의 조카 신홍순 씨의 큰아버지는 한국 현대 시의 거장, 신석초 시인이야. 옥비 아버지와는 둘도 없는, 절친한 친구였어. 둘 중 하나가 서울을 떠났을 때를 제외하고는 하루도 함께 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해. 신석초 시인이 옥비 아버지에 대해 쓴 글이 있어. 그의 얼굴은 둥근 편이었다. 두렷한 달덩이 같은 얼굴이란 표현은 그와 같은 용모를 말함이리라. 얼굴빛이 그리 희지는 않았지만 유리처럼 맑고 깨끗하고 구김새가 없었다. 한 점 티끌이 없는 얼굴이었다. 그 위에 상냥하고 관대하고 친밀감을 주는 눈과 조용한 말씨, 제 일류의 신사적인 품격을 지니고 있었다. 어떤 모습인지 상상이 돼? 부드럽고 깔끔한 신사 이미지. 상상한 그 모습이 맞는지, 옥비 아버지의 실제 모습을 공개할게. 신석초 시인의 설명 그대로야. 항상 말끔한 정장 차림에 한점 흐트러짐이 없었대. 옥비 아버지의 이름은 이원록. 하지만 사람들이 기억하는 이름은 따로 있어. 장담하는데 너도 아는 사람이야. '꽃', 그리고 '청포도' 하면 생각나는 사람. 옥비의 아버지이자, 신석초 시인의 가장 가까웠던 친구. 그는 바로, 시인 이육사 야. 학교 다닐 때 배웠을 거야. 이육사 시인은 윤동주 시인과 더불어 민족시인, 저항시인이라고 불려. 윤동주 시인은 일제강점기의 암담한 현실 속에서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고 반성하는 시를 썼어. 일제에 체포돼 재판을 받을 땐, 독립에 대한 열망을 당당하게 드러냈어. 저항시인이란 말이 잘 어울려. 이육사 시인은 조금 달라. 한 손에는 펜, 또 다른 손에는 총을 들고, 무장투쟁의 의지를 불태운 투사였어. 평생 17차례 옥고를 치르면서도 단 한 번도 굽히지 않은, 초인과 같은 삶을 사신 분이야. 오늘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그동안 알고 있던 이육사라는 이름이 다르게, 그리고 좀 더 무겁게 느껴질 거야. ▲ 시인 이육사 이육사를 대표하는 시 '청포도' 알지? 교과서에 단골로 실리는 시야. &<청포도&> 내 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려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만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 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육사가 본격적으로 시를 쓰게 된 것은 석초와 만난 이후부터라고 해. 두 사람의 첫 만남은 1935년 봄으로 거슬러 올라가. 석초는 위당 정인보 선생의 집에서 육사를 처음 만났어. 석초의 나이 스물여섯, 육사는 서른하나였어. 나이 차이가 있지만 금방 오래된 친구처럼 가까워졌대. 얼마 후 두 사람은 같은 잡지사에서 일하게 돼. 하지만 운영자금이 부족해서 지면을 채우기가 힘들었다고 해. 그래서 두 사람이 직접 시를 쓰기 시작한 거야. 서로가 쓴 시를 봐주고 고심해 가며 골라서 잡지에 실었어. 신석초 시인은 만약 육사의 권고와 격려가 없었다면 시를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라고 말한 적이 있어. 이렇게 두 시인이 세상에 나오게 된 거야. 두 사람은 글 친구이자 술친구이기도 했어. 육사는 주량이 엄청났대. 전날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꼭두새벽부터 해장술을 마시는데 끄떡없었대. 술을 마실 땐 떠들지도 않았고 취하지도 않았대. 석초는 육사는 조용히 말술을 마시는 시인이었다 라고 표현했어. 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시를 쓰고 술을 마시고 여행도 다녔어. 천년고도 경주를 함께 여행했어. 석초는 육사와 함께 한 날들 중 이때가 가장 즐거웠다고 해. 그런데, 매일같이 붙어 다니던 두 사람이었지만 절대 건드리지 않는 비밀이 있었어. 여느 날처럼 친구들과 어울려 함께 술을 마실 때야. 육사가 갑자기 자리에서 스윽 일어나. 그러더니 내 잠시 다녀올 데가 있네. 자정 전에는 돌아올 테니 마시고들 있게 라며 나가. 어딜 가는지, 무슨 일 때문인지, 누굴 만나는지도 얘기하지 않아. 하지만 돌아온다는 시간은 어기질 않았대. 이런 일이 자주 반복됐어. 친구로서 서운할 수도 있지만, 석초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어. 육사가 말하지 않는다면 다 이유가 있겠지, 굳이 친구의 비밀을 들춰내려고 하지 않았어. 하지만 이런 두 사람에게 이별의 순간이 오고 말아. 1943년 1월 1일. 새해 첫날부터 큰 눈이 내렸어. 아침 일찍 육사가 석초를 찾아와. 이보게. 석초. 우리 눈 밟으러 가세. 그렇게 나선 산책길. 말없이 걷던 육사가 깜짝 놀랄 이야기를 꺼내. 신석초 시인이 그날의 기억을 적은 글이 있어. 조금 뒤에 우리는 청량리에서 홍릉 쪽으로 은(銀) 세계와 같은 눈길을 걸어갔다. 울창한 숲은 온통 눈꽃이 피어 가지들이 용사(龍蛇)로 늘어지고 길 양쪽에 잘 매만져진 화초 위로 화사한 햇빛이 깔려 있었다. 햇볕은 눈 위에 반짝이고 파릇파릇한 햇싹이 금방 돋아날 것만 같았다. '가까운 날에 난 북경엘 가려하네' 하고 육사는 문득 말하였다. 육사가 중국으로 떠난다는 거야. 그 말을 들은 석초는 걱정부터 앞서. 1943년 당시에는 태평양전쟁이 한창이었거든. 일본이 총력전을 펼칠 때였어. 이런 시기에 북경에 간다? 위험을 무릅쓸 만큼 중요한 일이 있는 게 분명해. 석초는 질문을 던지거나 걱정을 털어놓는 대신 가만히 육사의 눈을 쳐다봐. 평소와 다름없이 상냥하고 맑은 눈이야. 육사가 말해. 다음에도 같이 눈을 밟으러 가세. 그 약속을 남기고 육사는 떠났어. 이후, 육사가 돌아왔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은 그해 여름이었어. 석초는 반가운 마음에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 모아 술과 잔을 준비해 놓고 육사를 기다렸어. 그런데 육사가 오질 않아.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한 마음은 점점 커져. 밤늦은 시간이 돼서야 누군가 문을 두드려. 육사의 동생이었어. 그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어. 형님이 일본 형사에게 끌려갔소. 석초는 분하고 원통한 마음에 더 이상 술잔을 들지 못했다고 해. 여기까지가 친구 육사에 대한 신석초 시인의 기억이야. 얼마 후 육사는 어린 옥비가 보는 앞에서 용수를 쓰고 충격적인 모습으로 나타난 거야. 그리고 북경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고 해. 육사는 대체 무슨 일을 했길래 이런 모습으로 끌려간 걸까? 그 답은 석초에게도 밝히지 못했던 비밀과 관련이 있어. ▲ 독립투쟁의 시작 육사의 비밀이 시작된 건, 오래전부터야. 1919년 봄. 종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거리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목청껏 대한독립 만세! 를 외쳤어. 3.1절 만세운동이야. 일제의 식민 통치에 항거하고 조선의 독립을 세계에 알리는 외침이었어. 경성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전국 각지, 해외까지 들불처럼 번져. 시위 횟수만 해도 약 1700 차례였다고 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일제의 폭력 앞에 쓰러지고 모진 고문과 핍박에 쓰러졌어. 그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비폭력만으로는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돼. 무력을 통해서 독립을 쟁취하려는 '의열투쟁'의 시대가 막을 열게 된 거야. 그 시작을 알린 사람은 아주 의외의 인물이었어. 그해 가을, 새로 부임한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남대문 정거장에 내려. 그가 마차로 옮겨 타려는 순간, 누군가 폭탄을 던졌어. 세 명이 사망하고 37명이 부상을 당했지만 사이토 총독은 무사했어. 그런데 이 폭탄을 던진 인물의 정체가 완전 예상 밖이야. 이분의 이름은 강우규 의사. 한약방을 운영하던 만 64세의 노인이었어. 환갑이 훌쩍 넘은 노인이 이런 일을 했다고? 아무도 상상을 못 했어. 일제는 강우규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해. 강우규 의사는 아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해.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그가 던진 폭탄은 청년들의 가슴에 큰 울림을 줬어. 이 의거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의열투쟁이 시작됐거든. 그해 11월, 만주 지린성. 열세 명의 청년이 한자리에 모여. 이들은 일제에 맞서 싸울 비밀결사대를 조직하고 스스로를 '의열단'이라고 칭하게 돼. 의열단은 김원봉을 단장으로 삼고, 일본 고관 암살, 관공서 파괴 등 의열투쟁을 시작해. 전에 '꼬꼬무'에서 소개했던 김상옥 의사, 기억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쌍권총을 들고 홀로 천 명의 경찰과 맞선 인물. 총알이 떨어지자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마지막 남은 한 발로 자결한 김상옥 의사. 그도 의열단 출신이야. 이렇게 의열투쟁이 곳곳에서 일어나던 그때, 청년 이육사는 뭘 하고 있었을까? 1924년 초, 스무 살이 된 육사는 일본으로 가는 배에 올라. 도쿄에 유학을 가기로 결심한 거야. 일본에 대해 더 잘 알기 위해서 그랬던 게 아닐까 싶어. 하지만 당시 일본은 그야말로 지옥이었어. 몇 개월 전 일본에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거든. 바로 '관동대지진'. 1923년 9월 1일, 규모 7.9 이상의 대지진이 관동지방을 뒤흔들었어. 가옥들이 무너지고 곳곳에 화재가 발생했어. 심지어 태풍까지 불어닥쳐서 피해는 더욱 커졌어. 어수선한 가운데 조선인들이 불을 지르고 다닌다 ,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등의 이상한 소문이 퍼져. 일본 내무성도 각 경찰서에 '조선인들이 방화와 약탈을 저지르고 있으니 주의하라'고 지시를 내려. 사회적 동요와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칼끝을 조선인에게 돌린 거야. 그러자 일본인들의 분노는 조선인들을 향하게 돼. 자경단이 조직되고 무자비한 조선인 사냥이 시작됐어. 처참한 학살이 벌어졌어. 공식적인 사망자만 무려 6,661명. 실제 사망자는 그 이상 얼마일지 몰라. 이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육사가 일본 도쿄에 간 거야. 일본에서 사는 조선인들의 모습을 보며 육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현실을 실감하지 않았을까? 다음 해 1월, 육사는 귀국선에 올라. 그리고 친형제들과 함께 비밀결사에 가입해. 이때부터 육사의 독립투쟁이 시작돼. ▲ 투사 이육사 이때부터 육사는 중국과 만주를 오가며 비밀스러운 행보를 이어가. 어떤 임무를 수행했는지는 철저히 비밀에 부쳤어.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첫 시련이 닥치게 돼. 1927년 10월 18일. 대구에 있는 조선은행. 식민지 수탈을 위해 일본이 세운 은행이야. 오전 11시 50분, 은행 앞으로 누군가 자전거를 몰고 와. 그리고는 싣고 온 나무상자 중 하나를 들고 은행 안으로 들어갔어. 은행 지점장 앞으로 온 선물이라며 건넨 상자. 그 안에는 꿀이 담긴 항아리가 있었어. 은행원이 상자를 받아 드는데, 뭔가 타는 냄새가 나. 상자를 열자 꿀 항아리와 타들어 가는 도화선이 보여. 꿀 항아리로 가장한 폭탄이었어. 은행원은 황급히 도화선을 잘라냈어. 일단 폭발은 막아낸 거야. 누군가가 식민지 경제 수탈의 본거지, 조선은행 대구 지점장을 노린 걸로 보여. 신고를 받은 대구경찰서에서 일제 경찰 수백 명이 곧바로 출동해. 사라진 배달부를 쫓고 은행 주변에 경계망을 펼쳐. 그때, 한 경찰이 뭔가를 가리켜. 은행 정문 앞에 서 있던 자전거야. 그 뒤에는 '꿀'이라고 적힌 상자가 세 개 실려있어. 지점장에게 배달된 나무상자와 똑같아. 상자를 확인하기 위해 다가간 순간, 쾅!!!! 자전거 뒤에 있던 상자들이 일제히 폭발해. 대구 전체가 울릴 만큼 커다란 폭발이었다고 해. 일제 경찰은 의심 가는 용의자들을 잡아들여. 그중에는 우리가 아는 인물이 끼여 있었어. '이원록', 바로 이육사야. 육사뿐만 아니라 형제들까지 체포돼. 집에 있는데도 호외가 막 나고 그러더래요. 그래서 어른들이 걱정하고 이게 무슨 일인가 그러니까 조선은행 폭탄 사건이 일어났다고. 꿀단지에 쓰인 글씨가 있었는데, 그 글이 누가 썼는지 삼촌 글씨와 똑같았대요. 우리 집안 어른들이 4형제가 다 붙들려 간 거잖아요. 우린 항상 요시찰 인물이니까, 무슨 일만 터졌다 하면 일단 먼저 구속시키고 보는 거예요. -이옥비, 이육사의 딸 육사와 형제들은 이 의거와 관련이 없었어. 근데 이렇게 큰 사건이 벌어졌으니 범인을 빨리 잡아야 하잖아? 그래서 경찰은 전부터 주시하고 있었던 육사와 형제들에게는 거짓 혐의를 씌운 거야. 중국에 갔다가 막 돌아온 육사에게는 폭탄을 밀수한 혐의를 씌우고, 폭탄 상자에 적힌 글씨가 동생 원일의 필체와 비슷하다며 억지를 부렸어. 범행을 인정하라며 가혹한 고문과 매질이 가해져. 하지만 육사는 끝까지 굽히지 않았대. 그렇게 1년 7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 끝에 육사는 석방돼. 그런데 그를 풀어준 이유가 기가 막혀. 공판에 회부한 범죄의 혐의가 없다. 아무런 혐의점이 없대. 아무런 증거도 없이 1년 7개월 동안 붙잡아놓고 고문한 거야. 참 어이가 없지. 이런 일을 겪고도 육사는 독립운동에 더욱 매진해. 그리고 이때부터 이름을 바꿔. 본명 이원록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이름, 이육사로. 일제가 붙여준 수인번호 '264'를 본인의 이름으로 삼은 거야. 더 당당하겠다는 다짐, 이 고통을 잊지 않겠다는 각오의 뜻이 아니었을까. 첫 옥고를 치르고 얼마 되지 않아 육사는 또다시 잡혀 들어가. 광주에서 학생들이 항일운동을 일으켰어. 이 사건이 전국으로 번질까 봐 일제는 요시찰인물들을 또다시 잡아들인 거야.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미리 붙잡아둔 거지. 늘 무슨 일만 딴 데서 터져도 아버지는 항상 요시찰인물의 명단에 들어있기 때문에 제일 먼저 피습하는 거죠. -이옥비, 이육사 딸 열흘 후에 풀려난 육사는 이듬해 또다시 체포되고 말아. 대구 시내에 일제를 배척하는 격문이 뿌려졌거든. 육사는 대구 격문 사건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돼서 또 한 번 옥고를 치러야 했어. 이때 받은 고문이 가장 혹독했다고 해. 대나무 있잖아요. 삐쭉삐쭉 잘라놓은걸, (다리 사이로 끼워서) 꿇어앉혀 놓고 훑으면 살이 다 떨어지잖아요. 나쁜 짓은 다 했지. 일본 사람들이. -이옥비, 이육사 딸 물고문에 전기 고문까지. 옥비 어머니는 매주 새 옷을 형무소에 넣어드렸어. 그러면 육사가 입던 옷을 내주는데 흰옷이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고 해. 옥고를 치를수록 육사의 몸은 점점 망가져 갔어.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으면 걷지 못할 정도였대. 하지만 그의 정신은 꺾이지 않았어. 그 무렵 육사의 모습을 보여줄게. 가장 최근에 발견된 육사의 사진이야. 한창 독립의 의지를 불태우던 20대 시절의 모습이야. 눈빛에서 강한 결의가 느껴져. ▲ 펜 대신 총을 든 이육사 1932년 봄, 육사가 갑자기 사라져. 일본 경찰은 육사의 행적을 찾지 못하자 바로 수배령을 내려. 육사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육사는 만주로 가서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천진과 북경을 거쳐 그해 가을, 남경에 도착해. 이곳에 온 목적은 '조선혁명 군사정치간부학교' 때문이야. 의열단이 세운 군사간부 양성기관이야. 사실 많은 이들이 그동안 지속해 온 의열투쟁의 한계를 느꼈어. 일제에 저항하는데 소수의 의거가 아니라, 이제는 대규모 부대를 결성해서 일본과 독립전쟁을 벌이기로 결심한 거야. 그러려면 병사들과 이들을 이끌 지휘관이 필요해. 이 군사학교는 병사들을 지휘할 독립군 장교를 양성하는 곳이야. 육사는 이곳에 1기생으로 입교해. 그리고 최고의 지휘관이 위한 군사훈련을 받아. 당시 일과표를 보여줄게. 매일 아침 여섯 시 기상해서 오전에는 군사학과 정치학 수업을 들어. 전쟁에서는 전략과 머리싸움도 중요하니까. 오후에는 고된 야외훈련을 받아야 해. 사격 훈련, 폭탄 제조, 암살 등의 비밀공작을 몸에 익히는 시간이야. 밤에는 중국어 수업과 토론수업이 있어. 신분이 노출되지 않도록 중국어를 써야 했거든. 밤 11시까지 빡빡하게 짜여져 있는 스케줄. 선비 집안에서 자란 육사가, 훈련을 잘 해냈을까? 이정기(독립운동가) 선생님이 그 이야기를 하시더라고. '너희 아버지는 사격의 명수일뿐더러 말을 타고 달릴 때도 사격을 하면 백발백중 명중하는 명사수였다'. 권총을 여섯 자루가 왔는데 밤에 호롱불을 꺼 놓고도 다 해체해서 조립하는 그런 걸 아주 정확하게 해냈다고. 변장술도 능했고, '육사는 언어의 마술사다' 중국어, 일어, 에스페란토어도 배우셨더라고요. -이옥비, 이육사 딸 펜이 아니라 총을 쥐고, 깔끔한 양복 대신 거친 군복을 입은 육사의 모습. 어때, 상상이 돼? 6개월의 훈련을 마친 대원들은 각자 임무를 부여받고 흩어졌어. 육사에게는 조선으로 돌아가서 의열단을 위해 사력을 다하라 는 임무가 부여됐어. 그렇게 육사는 경성으로 잠입했어. 청년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군사간부학교 2기생을 모집하라는 임무를 맡은 거야. 그런데 채 뜻을 펴기도 전에 육사는 또다시 체포되고 말아. 정보가 샜던 거야. 1기 졸업생들이 여기저기서 검거돼. 이 사진은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있을 때 육사의 모습이야. 몰라보게 초췌해진 모습이 마음 아프지? 모진 고초를 겪고 풀려난 후, 육사는 일생의 지기를 만나게 돼. 그게 바로, 1935년 위당 정인보 선생의 집에서 만난 신석초 시인이야. 처음에 만났을 때 아름다운 문인으로서 대했지만, 육사는 이미 그전에, 이 모든 과정을 겪었던 거야. '시인'이기 전에 '투사'였어. 하지만 육사는 석초에게 자신의 임무에 대해 절대 이야기하지 않았어. 자신으로 인해 친구가 해를 입을까 봐, 그걸 걱정했던 게 아닐까 싶어. 두 사람 사이에 알려지지 않은 일화가 있어. 육사가 중국에 갔다 왔던가. 어느 추운 날에 돌아왔는데, 굉장히 추운데 외투도 안 입고. 추워 보이고 막 그렇게 실제 추워하고 그래서 (큰아버지가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줬다고. 우리 어머니가 어디서 잃어버리고 오신 줄 알고 '아이고 왜 외투는 안 입고 들어오세요' 깜짝 놀라서 그러니까. '육사가 너무 추워 보이고 불쌍해서 아무 이유도 묻지 않고 내가 그냥 윗도리를 벗어줬다'.. -신홍순, 신석초 조카 이번에도 굳이 이유를 묻지 않은 석초. 석초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육사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그래도 석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 칼날 위에서 노래하다 석초와 만난 후 육사는 강렬한 시들을 써냈어. 그리고 시를 쓰는 것에 대해 이런 글을 남겼어. 정면으로 달려드는 표범을 겁내서는 한 발자국이라도 물러서지 않으려는 내 길을 사랑할 뿐이오. 그렇소이다. 내 길을 사랑하는 마음, 그것은 나 자신에 희생을 요구하는 노력이오. 행동은 말이 아니고, 나에게는 시를 생각한다는 것도 행동이 되는 까닭이오. 이래서 나는 내 기백을 키우고 길러서 금강심에서 나오는 내 시를 쓸지언정 유언은 쓰지 않겠소. 시 또한, 그가 현실에 맞서는 방법이었어. 이뿐만이 아니야. 육사는 자신이 쓴 시를 직접 해석한 적도 있어. 시인이 직접 자신의 시를 해석한다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지. 맨 처음 읽었던 '청포도' 기억나지? 그 시에 담긴 의미를 이렇게 이야기했대. 내 '고장'은 조선이고 '청포도'는 우리 민족인데, 청포도가 익어가는 것처럼 우리 민족도 익어간다. 그리고 곧 일본도 끝장난다. 육사는 한 치의 의심 없이 믿었던 것 같아. 일본의 패망, 그리고 조선의 독립을... 하지만 상황은 점점 더 안 좋아져. 일본은 전쟁을 지속하기 위해서 조선민족 말살정책에 박차를 가해. 내선일체, 신사참배 등 한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해서 조선인을 일본인에 동화시킨다는 거야. 일제강점기 중에서도 최악의 시기가 닥쳐왔어.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도 일본식 이름으로 바꿔야 해. 우리말과 글을 쓸 수도 없어. 글을 빼앗긴 문인들은 붓을 꺾거나 변절을 선택해. 육당 최남선, 춘원 이광수와 같은 민족문학의 거두들마저 친일로 돌아서고 말았어. 암담하기만 한 그 시기, 육사는 이런 시를 썼어. &<절정&>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보다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에 갔을 때를 회상하며 쓴 것 같아. 이 시의 제목은 '절정'이야. 육사는 이 시기를 절정이라 생각했나 봐. 이때만 지나가면 봄이 온다는 희망을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 무렵, 육사에게 기쁜 소식이 찾아와. 사랑스러운 딸, 옥비가 태어난 거야. 일찍이 1남 1녀를 홍역으로 잃었던 육사였어. 어렵게 얻은 딸인 만큼 얼마나 예뻤겠어. 독립운동 하느라 집에 자주 오지 못했지만, 집에 머물 때면 아침마다 옥비를 안고 놀아주곤 했대. 저희 집에는 다 글을 하는 사람이고 그러니까 낙관이 많았대요. 그래서 이렇게 펼쳐놓고 아버지가 '셋째 삼촌 낙관을 골라라' 이렇게 하나하나 보고 셋째 삼촌 낙관을 골라내면 맞으니까, 아버지가 그게 재미있어서 집에 계실 때는 아침에 저를 불러놓고 그런 걸 좀 자주 했고… -이옥비, 이육사 딸 생각만 해도 다정한 부녀의 모습이 떠오르지? 하지만 육사에게는 가족보다 더욱 중요한 일이 있었어. 바로 조국의 독립. 어린 딸을 두고 다시 중국으로 가야 했어. 떠나기 전에 육사는 옥비를 데리고 어딘가를 갔어. 당시 종로에 있던 조선에서 가장 큰 백화점인 화신백화점이었어. 옥비를 두고 떠나는 게 미안해서였을까. 여기서 딸을 위한 선물을 사. 핑크색 모자와 벨벳 투피스, 그리고 까만 구두. 우리가 형편이 굉장히 어려운 형편이었거든요. 화신백화점에 가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어머니랑 출타할 때는 꼭 그 옷을 입으면 아이들이 그게 예쁘다고 '한 번만 벗어봐라 입어보자' 막 그랬던 그런 기억이 나거든요. 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받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은 옷이잖아요. 마지막 선물이었죠. -이옥비 여사, 이육사 딸 그리고 육사는 친구 석초를 찾아가 함께 눈을 밟으며 작별인사를 건네. 그렇게 북경으로 위험한 여정을 떠났던 거야. 딸과 친구를 두고 떠나는 육사의 마음, 상상이 되니? 북경에 도착한 육사는 한 사람을 찾아가. 육사의 먼 친척이자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던 여성 독립운동가 이병희야. 북경 오실 때마다 오고 삼촌들도 이제 우리 집에 일가니까 다. 그러니까 찾아오시고 했는데, 하루는 육사가 날 찾아왔데. 찾아와서 '병희야. 나가자' 그래. '예. 나갑시다'. 그리고서는 '중경에서 너를 데려오라는 명령이 내려왔는데 너 갈래?' 그러데. '가죠' 그래서 '너 안내원도 왔다. 너 데리고 갈' 그래서 '널 연안으로 보내기로 했다. -故 이병희 생전 인터뷰 中 중경에는 당시 임시정부가 있었어. 연안에는 김원봉이 만든 조선의용대가 있었다고 해. 육사는 임시정부와 조선의용대 사이를 연결하는 임무를 맡은 걸로 보여.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일이 생긴 거야. 작년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와 큰형의 첫 번째 제사가 다가오고 있었거든. 아버지도 세상을 떠난 터라 이젠 육사가 집안의 어른이야. 동생들한테만 맡겨놓을 순 없잖아. 하지만 막상 조선에 돌아가자니 아주 위험해. 경찰이 눈에 불을 켜고 있을 게 뻔하니까. 그럼 육사는 어떻게 했을까? 1943년 7월. 육사는 고향마을로 돌아갔어. 어머니와 형의 제사를 치른 후, 가족을 만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어. 그리고 일본 헌병대에 붙잡히고 말았어. ▲ 육사의 마지막 외침 20일간 조사를 받은 육사는 북경으로 압송이 결정돼. 손에는 포승줄이 묶이고 발에는 쇠고랑이 채워져. 얼굴에는 밀짚으로 엮은 용수가 씌워져. 육사가 북경으로 압송된다는 소식을 듣고 옥비 어머니는 어린 옥비를 안고 기다렸어. 저만치 용수로 얼굴을 가린 남편이 보이자 어린 옥비를 높이 쳐들어. 가기 전에 딸의 얼굴이라도 보고 가시라고... 그러자 육사가 걸음을 멈춰. 어린 옥비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서더니 작별 인사를 남겨. 아버지, 다녀오마. 그렇게 육사는 기차에 실려 북경으로 압송됐어. 아버지가 기차를 타면 떠나시는 거잖아요.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아버지 다녀오마' 이렇게 얘기하고 곧 오실 것처럼, '곧 다녀오마' 그런 거는 아무리 위급해도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그런 말이었죠. -이옥비, 이육사 딸 그날 이후 육사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은 딱 한 사람이야. 바로 북경에 남아있던 육사의 친척이자 독립운동가 병희. 병희는 걱정이 태산이었어. 육사가 돌아오기로 한 날짜가 지났는데 안 오니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길이 없으니 답답해. 그러던 어느 날, 일본 형사가 병희를 찾아와. 나하고 가서 얘기 좀 하자 며 병희를 잡아끌어. 그렇게 형사를 따라나선 병희는 지하감옥에 갇히고 말아. 그리고 그곳에서 육사를 만나. 그 순간 '이제 끝났구나' 생각이 들었대. 그 후 두 사람은 끔찍한 고문에 시달려야 했어. 그런데 얼마 후, 병희는 풀려나게 돼. 알고 보니, 육사가 자신이 보증한다며, 병희는 자신의 일과는 상관없으니 풀어달라 한 거야. 육사의 보증으로 병희는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어. 하지만 육사는 차가운 지하감옥에 남았어. 계절은 어느새 겨울이야. 육사는 잡혀 올 때 그대로 여름옷 차림이었대. 방에서는 연신 콜록거리는 기침 소리가 들렸다고 해. 병희가 풀려난 지 닷새쯤 지났을 때, 형무소에서 연락이 왔어. 이육사의 시신을 찾아가시오 라고. 날 찾아왔더라고. 찾아와서 육사가 죽었는데, 오늘 새벽 5시에 돌아가셨다 그러니까. 너밖에는 맡을 사람이 없으니 시체를 찾아가라 그러대. -故 이병희, 독립운동가 1944년 1월 16일 새벽. 육사는 북경 지하감옥에서 생을 마감했어. 그의 나이 마흔 살. 조국의 광복을 불과 1년 앞두고 가혹한 고문 끝에 숨을 거둔 거야. 그날 저녁, 병희는 형무소를 찾았어. 딱 들어가니까 육사가, 시체가 관에 있데. 그런데 관뚜껑을 딱 여니까 얼굴이 그냥 빨개지면서 코에서 피가 막 주르륵 나면서 눈을 뜨고 죽었더라고. 뒤처리는 내가 다 할 테니까 안심하고 곱게 가시라고. 그리고 (눈을) 쓰다듬으니까 다시 얼굴이 하얘지면서 죽은 사람으로 변하고 눈을 감더라고. -故 이병희, 독립운동가 아무 걱정 마시오. 조국의 독립은 후손들에게 맡기시고. 편히 가시오 라고 말하며 육사의 부릅뜬 눈을 세 번 쓰다듬자 그제야 스르르 눈을 감았다고 해. 갑자기 전보가 날아왔어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어머니가 방 하나를 달라고 그래서 머리를 풀고 그렇게 우시더라고요. 엄마가 우니까 나도 따라서 정확하게도 모르는데 울었죠. 같이 울고… -이옥비, 이육사 딸 병희는 육사의 시신을 수습하고 그가 남긴 유품을 챙겼어. 유품이라 해봐야 만년필 한 자루와 마분지 조각뿐이었어. 그 마분지에는 육사가 남긴 시가 쓰여 있었어. &<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참아 이곳을 범하든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육사는 시를 쓸지언정 유언을 쓰지 않겠다고 했잖아. 그 말처럼 유언 대신 시를 남기고 가신 거야. '광야', 우리에게도 너무 익숙한 시인데, 다른 느낌이지? 이 시에는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육사의 이야기, 독립에 대한 강렬한 염원이 담겨있어. ▲ 그가 세상에 남긴 것 육사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 그토록 기다리던 해방을 맞이해. 모두가 길거리로 나와 만세를 외쳤어. 그리고 육사가 순국한 지 2년 후인 1946년. 그의 첫 시집이 세상에 나와. 육사의 동생이 형이 남긴 시들을 모아 시집을 낸 거야. 석초를 비롯한 육사의 친구들이 서문을 적었어. 육사가 북경 옥사에서 영면한 지 벌써 2년이 가까워 온다. 그가 세상에 남기고 간 스무여 편의 시를 모아 한 권의 책을 만들었다. 그는 한평생 꿈을 추구한 사람이다. 시가 세상에 묻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안타까이 공중에 그린 무형한 꿈이 형태와 의상을 갖추기엔 고인의 목숨이 너무 짧았다. 신석초 시인은 평생 시와 함께 사시다가 1975년, 66세의 나이로 돌아가셨어. 조카 신홍순 씨는 유품을 정리하다가 뭔가 특별한 걸 발견했어. 생전에 육사가 큰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였어. 잦은 고문 때문에 폐병을 얻었던 육사가 요양차 내려간 경주에서 보낸 글이야. 석초 형! 내가 모든 의례와 형식을 떠나 먼저 붓을 들어 투병의 일단을 호소함은 얼마나 나의 생활이 고독한가를 형이 짐작하여 줄 줄 생각한다. 석초 형! 나는 지금 이 넓다는 천지에 진실로 내 하나만이 남아있는 외로운 넋인 듯 하다는 것도 형은 짐작하리라. 그래서 군(君)이 먼저 편지라도 한 장 하여주리라고 바라기는 하면서도 형의 게으름에 가망이 없어 내 먼저 주제넘게 호소치 않는가? 강하고 엄격한 육사가, 외롭다고 투정도 부리면서 왜 먼저 편지를 쓰지 않냐고 점잖게 보채기도 하지. 인간적인 모습을 거리낌 없이 내보일 만큼 두 사람의 사이가 가까웠던 거 같아. 조금 늦었지만 이제는 두 사람이 다시 만나 못다 나눈 술잔을 나누고 있지 않을까. 그만큼 따뜻하게 그분들이 지냈기 때문에 그랬던 거 아니겠냐. 이렇게 생각해요. 지금 하늘에서 만나셨겠지? 그래서 두 분이 역시 가깝게 시를 왔다 갔다 하고 쓰고 계실 거 같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신홍순, 신석초의 조카 그리고 이옥비 할머니는, 아버지가 남겨준 이름처럼 여전히 욕심 없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신대. 아버지가 쓰신 시가 좋다고 그러지만은, 내게는 지게꾼이라도 어깨를 두들기면서 '얘야 밥 먹자' 이렇게 다독거려주는 아버지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했었거든요. 그러니까 철이 없어서 그랬죠. 그때는... 그렇지만 이제는 저도 부끄러움이 없는 그런 삶으로 살아야 되지 않을까. 제 이름이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이, 욕심 없는 그런 이름이잖아요. 그래서 저는 '조금 모자란 듯하게 사는 게 제 삶이다' 이렇게 생각해요. -이옥비, 이육사 딸 아까 이육사라는 이름이 수인번호를 따서 만들었다고 했잖아. '二六四'라는 한자를 쓰지. 그런데 다른 한자를 쓰기도 해. '죽일 육' '역사 사', 역사를 죽이겠다는 뜻이야. 일제 치하의 그 역사를 부정하겠다는 거야. 집안 어른들은 이걸 보고 염려를 드러냈대. 괜히 화를 입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육사는 한 글자를 바꿨대. '땅 육'으로. 이게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육사의 한자야. 근데 조금 특이한 한자를 쓰신 적이 있어. '고기 육, 설사할 사'로. 뜻만 직역하면, '고기를 먹고 설사한다'는 거야. 이게 일제 치하의 세상을 조롱하는 의미로 해석되고 있어. 그런데 이런 의미로도 해석돼. 딸에게 기름지게 살지 말라는 의미로 '옥비'라는 이름을 지어줬잖아. 비슷한 의미로, '평생 편안하고 기름진 삶을 살지 않겠다'는 각오가 담겨 있는 건 아닐까?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
[꼬꼬무 찐리뷰] 아버지 다녀오마 3살 딸과의 약속…펜 대신 총 든 '시인 이육사'
등록일2024.04.05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4일 방송된 '칼날 위에서 노래하다, 이육사'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가수 이무진, 댄서 모니카, 배우 박효주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아버지에 대한 기억 네가 기억하는 '가장 어렸을 때의 기억'이 뭐야? 가장 오래된 기억 하면, 대부분 대여섯 살 때 기억을 떠올릴 거야. 하지만 오늘 소개할 분은 좀 특별해. 기억력이, 어릴 때 기억이 더 좋은 것 같아요. 제가 만 3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그렇게 많지 않아요. 제가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게... 포승줄이 꽁꽁 묶이고 발에는 쇠고랑을 차고 있었어요. 얼굴에는 그 용수, 밀짚으로 된 3단으로 된 용수를 쓰고. 너무나 선명해요. 그게... 저에게는 굉장히 놀랍고 보지 못한 모습이잖아요. 굉장히 충격이었죠. 이게 '용수'야. 원래는 술을 거를 때 쓰는 도구인데, 죄수의 얼굴을 가릴 때도 씌웠어.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봤을 때가 만 3살도 안 됐을 때야. 하지만 그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대.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런 모습을 하셨던 걸까? 할머니의 기억 속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줄게. 때는 1941년 3월 27일. 서울 명륜동에서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졌어. 이날은, 할머니가 세상에 태어난 날이야. 아기는 온 집안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어. 먼저 태어난 언니 오빠가 있었지만 모두 홍역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거든. 그 후에 얻은 자식이니 얼마나 소중하겠어. 아이가 태어났으니 이름을 지어줘야지. 삼촌들이 저마다 이름을 지어주겠다고 나서. 그러자 아버지가 딱 잘라 말했어. 내 딸 이름을 왜 너희들이 짓냐! 다들 나서지 마라 고. 그리고 생후 100일이 되는 날, 아버지는 온 집안 식구들 앞에서 아이의 이름을 공개했어. '기름질 옥(沃)'에 '아닐 비(非)'. 아버지는 딸에게 '옥비'라는 이름을 지어주셨어. 100일날 아침에 말씀하시기를 '기름질 옥'자에 '아닐 비'자다. 이렇게 고심을 하셔서 지으셨대요. 보통 한문으로 '기름질 옥'자, 이거는 잘 안 쓰거든요. '아닐 비'자는 더욱 안 쓰죠. '기름지지 않다' 이런 뜻이잖아요. '욕심 없이 남에게 배려할 수 있는 사람', 또 간디와 같은 사람이 되라고 그 이름을 지어주셨대요. -이옥비 할머니 옥비 아버지는 안동의 유서 깊은 선비 가문에서 태어났어. 아주 유명한 분의 후손이야. 바로 이분.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 퇴계 이황의 14대손이야. 옥비 아버지는 여섯 형제 중 둘째였는데, 형제들이 모두 시와 서화에 능했대. 옥비 아버지는 형제들 중에서도 가장 엄격했대. 한번 결심을 하면 절대 굽히는 법이 없었다고 해. 할머니가 '둘째 아들이 들어오면 옷깃이 여며진다' 언니들도 삼촌들도 둘째 형님을 굉장히 두려워했대요. 야단을 치지도 않고. 그런데 무언중에 그 매서움이 느껴졌던가 봐요. -이옥비 여사 하지만 옥비에게는 누구보다 자상한 아버지였어. 아침마다 어린 옥비를 안고 놀아주셨대. 옥비 아버지를 기억하고 있는 또 다른 인물이 있어. 제가 조카고, 저의 큰아버님이 신석초 시인이십니다. 우리 큰아버지도 어려서부터 한문을 같이 하면서 한시도 보고, 한문 번역 책들 번역도 하고. 그런 점들이 (옥비 아버지와) 다 맞는단 말이에요, 다 똑같아. 서로 도와줬다는 그런 면들이 형제 같은 거 아니겠나. 서로들 마음이 통했던 것 같아요. -신홍순, 신석초 시인의 조카 신홍순 씨의 큰아버지는 한국 현대 시의 거장, 신석초 시인이야. 옥비 아버지와는 둘도 없는, 절친한 친구였어. 둘 중 하나가 서울을 떠났을 때를 제외하고는 하루도 함께 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해. 신석초 시인이 옥비 아버지에 대해 쓴 글이 있어. 그의 얼굴은 둥근 편이었다. 두렷한 달덩이 같은 얼굴이란 표현은 그와 같은 용모를 말함이리라. 얼굴빛이 그리 희지는 않았지만 유리처럼 맑고 깨끗하고 구김새가 없었다. 한 점 티끌이 없는 얼굴이었다. 그 위에 상냥하고 관대하고 친밀감을 주는 눈과 조용한 말씨, 제 일류의 신사적인 품격을 지니고 있었다. 어떤 모습인지 상상이 돼? 부드럽고 깔끔한 신사 이미지. 상상한 그 모습이 맞는지, 옥비 아버지의 실제 모습을 공개할게. 신석초 시인의 설명 그대로야. 항상 말끔한 정장 차림에 한점 흐트러짐이 없었대. 옥비 아버지의 이름은 이원록. 하지만 사람들이 기억하는 이름은 따로 있어. 장담하는데 너도 아는 사람이야. '꽃', 그리고 '청포도' 하면 생각나는 사람. 옥비의 아버지이자, 신석초 시인의 가장 가까웠던 친구. 그는 바로, 시인 이육사 야. 학교 다닐 때 배웠을 거야. 이육사 시인은 윤동주 시인과 더불어 민족시인, 저항시인이라고 불려. 윤동주 시인은 일제강점기의 암담한 현실 속에서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고 반성하는 시를 썼어. 일제에 체포돼 재판을 받을 땐, 독립에 대한 열망을 당당하게 드러냈어. 저항시인이란 말이 잘 어울려. 이육사 시인은 조금 달라. 한 손에는 펜, 또 다른 손에는 총을 들고, 무장투쟁의 의지를 불태운 투사였어. 평생 17차례 옥고를 치르면서도 단 한 번도 굽히지 않은, 초인과 같은 삶을 사신 분이야. 오늘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그동안 알고 있던 이육사라는 이름이 다르게, 그리고 좀 더 무겁게 느껴질 거야. ▲ 시인 이육사 이육사를 대표하는 시 '청포도' 알지? 교과서에 단골로 실리는 시야. &<청포도&> 내 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려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만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 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육사가 본격적으로 시를 쓰게 된 것은 석초와 만난 이후부터라고 해. 두 사람의 첫 만남은 1935년 봄으로 거슬러 올라가. 석초는 위당 정인보 선생의 집에서 육사를 처음 만났어. 석초의 나이 스물여섯, 육사는 서른하나였어. 나이 차이가 있지만 금방 오래된 친구처럼 가까워졌대. 얼마 후 두 사람은 같은 잡지사에서 일하게 돼. 하지만 운영자금이 부족해서 지면을 채우기가 힘들었다고 해. 그래서 두 사람이 직접 시를 쓰기 시작한 거야. 서로가 쓴 시를 봐주고 고심해 가며 골라서 잡지에 실었어. 신석초 시인은 만약 육사의 권고와 격려가 없었다면 시를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라고 말한 적이 있어. 이렇게 두 시인이 세상에 나오게 된 거야. 두 사람은 글 친구이자 술친구이기도 했어. 육사는 주량이 엄청났대. 전날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꼭두새벽부터 해장술을 마시는데 끄떡없었대. 술을 마실 땐 떠들지도 않았고 취하지도 않았대. 석초는 육사는 조용히 말술을 마시는 시인이었다 라고 표현했어. 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시를 쓰고 술을 마시고 여행도 다녔어. 천년고도 경주를 함께 여행했어. 석초는 육사와 함께 한 날들 중 이때가 가장 즐거웠다고 해. 그런데, 매일같이 붙어 다니던 두 사람이었지만 절대 건드리지 않는 비밀이 있었어. 여느 날처럼 친구들과 어울려 함께 술을 마실 때야. 육사가 갑자기 자리에서 스윽 일어나. 그러더니 내 잠시 다녀올 데가 있네. 자정 전에는 돌아올 테니 마시고들 있게 라며 나가. 어딜 가는지, 무슨 일 때문인지, 누굴 만나는지도 얘기하지 않아. 하지만 돌아온다는 시간은 어기질 않았대. 이런 일이 자주 반복됐어. 친구로서 서운할 수도 있지만, 석초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어. 육사가 말하지 않는다면 다 이유가 있겠지, 굳이 친구의 비밀을 들춰내려고 하지 않았어. 하지만 이런 두 사람에게 이별의 순간이 오고 말아. 1943년 1월 1일. 새해 첫날부터 큰 눈이 내렸어. 아침 일찍 육사가 석초를 찾아와. 이보게. 석초. 우리 눈 밟으러 가세. 그렇게 나선 산책길. 말없이 걷던 육사가 깜짝 놀랄 이야기를 꺼내. 신석초 시인이 그날의 기억을 적은 글이 있어. 조금 뒤에 우리는 청량리에서 홍릉 쪽으로 은(銀) 세계와 같은 눈길을 걸어갔다. 울창한 숲은 온통 눈꽃이 피어 가지들이 용사(龍蛇)로 늘어지고 길 양쪽에 잘 매만져진 화초 위로 화사한 햇빛이 깔려 있었다. 햇볕은 눈 위에 반짝이고 파릇파릇한 햇싹이 금방 돋아날 것만 같았다. '가까운 날에 난 북경엘 가려 하네' 하고 육사는 문득 말하였다. 육사가 중국으로 떠난다는 거야. 그 말을 들은 석초는 걱정부터 앞서. 1943년 당시에는 태평양전쟁이 한창이었거든. 일본이 총력전을 펼칠 때였어. 이런 시기에 북경에 간다? 위험을 무릅쓸 만큼 중요한 일이 있는 게 분명해. 석초는 질문을 던지거나 걱정을 털어놓는 대신 가만히 육사의 눈을 쳐다봐. 평소와 다름없이 상냥하고 맑은 눈이야. 육사가 말해. 다음에도 같이 눈을 밟으러 가세. 그 약속을 남기고 육사는 떠났어. 이후, 육사가 돌아왔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은 그해 여름이었어. 석초는 반가운 마음에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 모아 술과 잔을 준비해 놓고 육사를 기다렸어. 그런데 육사가 오질 않아.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한 마음은 점점 커져. 밤늦은 시간이 돼서야 누군가 문을 두드려. 육사의 동생이었어. 그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어. 형님이 일본 형사에게 끌려갔소. 석초는 분하고 원통한 마음에 더 이상 술잔을 들지 못했다고 해. 여기까지가 친구 육사에 대한 신석초 시인의 기억이야. 얼마 후 육사는 어린 옥비가 보는 앞에서 용수를 쓰고 충격적인 모습으로 나타난 거야. 그리고 북경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고 해. 육사는 대체 무슨 일을 했길래 이런 모습으로 끌려간 걸까? 그 답은 석초에게도 밝히지 못했던 비밀과 관련이 있어. ▲ 독립투쟁의 시작 육사의 비밀이 시작된 건, 오래전부터야. 1919년 봄. 종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거리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목청껏 대한독립 만세! 를 외쳤어. 3.1절 만세운동이야. 일제의 식민 통치에 항거하고 조선의 독립을 세계에 알리는 외침이었어. 경성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전국 각지, 해외까지 들불처럼 번져. 시위 횟수만 해도 약 1700 차례였다고 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일제의 폭력 앞에 쓰러지고 모진 고문과 핍박에 쓰러졌어. 그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비폭력만으로는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돼. 무력을 통해서 독립을 쟁취하려는 '의열투쟁'의 시대가 막을 열게 된 거야. 그 시작을 알린 사람은 아주 의외의 인물이었어. 그해 가을, 새로 부임한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남대문 정거장에 내려. 그가 마차로 옮겨 타려는 순간, 누군가 폭탄을 던졌어. 세 명이 사망하고 37명이 부상을 당했지만 사이토 총독은 무사했어. 그런데 이 폭탄을 던진 인물의 정체가 완전 예상 밖이야. 이분의 이름은 강우규 의사. 한약방을 운영하던 만 64세의 노인이었어. 환갑이 훌쩍 넘은 노인이 이런 일을 했다고? 아무도 상상을 못 했어. 일제는 강우규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해. 강우규 의사는 아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해.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그가 던진 폭탄은 청년들의 가슴에 큰 울림을 줬어. 이 의거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의열투쟁이 시작됐거든. 그해 11월, 만주 지린성. 열세 명의 청년이 한자리에 모여. 이들은 일제에 맞서 싸울 비밀결사대를 조직하고 스스로를 '의열단'이라고 칭하게 돼. 의열단은 김원봉을 단장으로 삼고, 일본 고관 암살, 관공서 파괴 등 의열투쟁을 시작해. 전에 '꼬꼬무'에서 소개했던 김상옥 의사, 기억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쌍권총을 들고 홀로 천 명의 경찰과 맞선 인물. 총알이 떨어지자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마지막 남은 한 발로 자결한 김상옥 의사. 그도 의열단 출신이야. 이렇게 의열투쟁이 곳곳에서 일어나던 그때, 청년 이육사는 뭘 하고 있었을까? 1924년 초, 스무 살이 된 육사는 일본으로 가는 배에 올라. 도쿄에 유학을 가기로 결심한 거야. 일본에 대해 더 잘 알기 위해서 그랬던 게 아닐까 싶어. 하지만 당시 일본은 그야말로 지옥이었어. 몇 개월 전 일본에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거든. 바로 '관동대지진'. 1923년 9월 1일, 규모 7.9 이상의 대지진이 관동지방을 뒤흔들었어. 가옥들이 무너지고 곳곳에 화재가 발생했어. 심지어 태풍까지 불어닥쳐서 피해는 더욱 커졌어. 어수선한 가운데 조선인들이 불을 지르고 다닌다 ,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등의 이상한 소문이 퍼져. 일본 내무성도 각 경찰서에 '조선인들이 방화와 약탈을 저지르고 있으니 주의하라'고 지시를 내려. 사회적 동요와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칼끝을 조선인에게 돌린 거야. 그러자 일본인들의 분노는 조선인들을 향하게 돼. 자경단이 조직되고 무자비한 조선인 사냥이 시작됐어. 처참한 학살이 벌어졌어. 공식적인 사망자만 무려 6,661명. 실제 사망자는 그 이상 얼마일지 몰라. 이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육사가 일본 도쿄에 간 거야. 일본에서 사는 조선인들의 모습을 보며 육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현실을 실감하지 않았을까? 다음 해 1월, 육사는 귀국선에 올라. 그리고 친형제들과 함께 비밀결사에 가입해. 이때부터 육사의 독립투쟁이 시작돼. ▲ 투사 이육사 이때부터 육사는 중국과 만주를 오가며 비밀스러운 행보를 이어가. 어떤 임무를 수행했는지는 철저히 비밀에 부쳤어.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첫 시련이 닥치게 돼. 1927년 10월 18일. 대구에 있는 조선은행. 식민지 수탈을 위해 일본이 세운 은행이야. 오전 11시 50분, 은행 앞으로 누군가 자전거를 몰고 와. 그리고는 싣고 온 나무상자 중 하나를 들고 은행 안으로 들어갔어. 은행 지점장 앞으로 온 선물이라며 건넨 상자. 그 안에는 꿀이 담긴 항아리가 있었어. 은행원이 상자를 받아 드는데, 뭔가 타는 냄새가 나. 상자를 열자 꿀 항아리와 타들어 가는 도화선이 보여. 꿀 항아리로 가장한 폭탄이였어. 은행원은 황급히 도화선을 잘라냈어. 일단 폭발은 막아낸 거야. 누군가가 식민지 경제 수탈의 본거지, 조선은행 대구 지점장을 노린 걸로 보여. 신고를 받은 대구경찰서에서 일제 경찰 수백 명이 곧바로 출동해. 사라진 배달부를 쫓고 은행 주변에 경계망을 펼쳐. 그때, 한 경찰이 뭔가를 가리켜. 은행 정문 앞에 서 있던 자전거야. 그 뒤에는 '꿀'이라고 적힌 상자가 세 개 실려있어. 지점장에게 배달된 나무상자와 똑같아. 상자를 확인하기 위해 다가간 순간, 쾅!!!! 자전거 뒤에 있던 상자들이 일제히 폭발해. 대구 전체가 울릴 만큼 커다란 폭발이었다고 해. 일제 경찰은 의심 가는 용의자들을 잡아들여. 그중에는 우리가 아는 인물이 끼여 있었어. '이원록', 바로 이육사야. 육사뿐만 아니라 형제들까지 체포돼. 집에 있는데도 호외가 막 나고 그러더래요. 그래서 어른들이 걱정하고 이게 무슨 일인가 그러니까 조선은행 폭탄 사건이 일어났다고. 꿀단지에 쓰인 글씨가 있었는데, 그 글이 누가 썼는지 삼촌 글씨와 똑같았대요. 우리 집안 어른들이 4형제가 다 붙들려 간 거잖아요. 우린 항상 요시찰 인물이니까, 무슨 일만 터졌다 하면 일단 먼저 구속시키고 보는 거예요. -이옥비, 이육사의 딸 육사와 형제들은 이 의거와 관련이 없었어. 근데 이렇게 큰 사건이 벌어졌으니 범인을 빨리 잡아야 하잖아? 그래서 경찰은 전부터 주시하고 있었던 육사와 형제들에게는 거짓 혐의를 씌운 거야. 중국에 갔다가 막 돌아온 육사에게는 폭탄을 밀수한 혐의를 씌우고, 폭탄 상자에 적힌 글씨가 동생 원일의 필체와 비슷하다며 억지를 부렸어. 범행을 인정하라며 가혹한 고문과 매질이 가해져. 하지만 육사는 끝까지 굽히지 않았대. 그렇게 1년 7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 끝에 육사는 석방돼. 그런데 그를 풀어준 이유가 기가 막혀. 공판에 회부한 범죄의 혐의가 없다. 아무런 혐의점이 없대. 아무런 증거도 없이 1년 7개월 동안 붙잡아놓고 고문한 거야. 참 어이가 없지. 이런 일을 겪고도 육사는 독립운동에 더욱 매진해. 그리고 이때부터 이름을 바꿔. 본명 이원록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이름, 이육사로. 일제가 붙여준 수인번호 '264'를 본인의 이름으로 삼은 거야. 더 당당하겠다는 다짐, 이 고통을 잊지 않겠다는 각오의 뜻이 아니었을까. 첫 옥고를 치르고 얼마 되지 않아 육사는 또다시 잡혀들어가. 광주에서 학생들이 항일운동을 일으켰어. 이 사건이 전국으로 번질까 봐 일제는 요시찰인물들을 또다시 잡아들인 거야.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미리 붙잡아둔 거지. 늘 무슨 일만 딴데서 터져도 아버지는 항상 요시찰인물의 명단에 들어있기 때문에 제일 먼저 피습하는 거죠. -이옥비, 이육사 딸 열흘 후에 풀려난 육사는 이듬해 또다시 체포되고 말아. 대구 시내에 일제를 배척하는 격문이 뿌려졌거든. 육사는 대구 격문 사건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돼서 또 한 번 옥고를 치러야 했어. 이때 받은 고문이 가장 혹독했다고 해. 대나무 있잖아요. 삐쭉삐쭉 잘라놓은걸, (다리 사이로 끼워서) 꿇어앉혀 놓고 훑으면 살이 다 떨어지잖아요. 나쁜 짓은 다 했지. 일본 사람들이. -이옥비, 이육사 딸 물고문에 전기 고문까지. 옥비 어머니는 매주 새옷을 형무소에 넣어드렸어. 그러면 육사가 입던 옷을 내주는데 흰옷이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고 해. 옥고를 치를수록 육사의 몸은 점점 망가져 갔어.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으면 걷지 못할 정도였대. 하지만 그의 정신은 꺾이지 않았어. 그 무렵 육사의 모습을 보여줄게. 가장 최근에 발견된 육사의 사진이야. 한창 독립의 의지를 불태우던 20대 시절의 모습이야. 눈빛에서 강한 결의가 느껴져. ▲ 펜 대신 총을 든 이육사 1932년 봄, 육사가 갑자기 사라져. 일본 경찰은 육사의 행적을 찾지 못하자 바로 수배령을 내려. 육사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육사는 만주로 가서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천진과 북경을 거쳐 그해 가을, 남경에 도착해. 이곳에 온 목적은 '조선혁명 군사정치간부학교' 때문이야. 의열단이 세운 군사간부 양성기관이야. 사실 많은 이들이 그동안 지속해 온 의열투쟁의 한계를 느꼈어. 일제에 저항하는데 소수의 의거가 아니라, 이제는 대규모 부대를 결성해서 일본과 독립전쟁을 벌이기로 결심한 거야. 그러려면 병사들과 이들을 이끌 지휘관이 필요해. 이 군사학교는 병사들을 지휘할 독립군 장교를 양성하는 곳이야. 육사는 이곳에 1기생으로 입교해. 그리고 최고의 지휘관이 위한 군사훈련을 받아. 당시 일과표를 보여줄게. 매일 아침 여섯 시 기상해서 오전에는 군사학과 정치학 수업을 들어. 전쟁에서는 전략과 머리싸움도 중요하니까. 오후에는 고된 야외훈련을 받아야 해. 사격 훈련, 폭탄 제조, 암살 등의 비밀공작을 몸에 익히는 시간이야. 밤에는 중국어 수업과 토론수업이 있어. 신분이 노출되지 않도록 중국어를 써야 했거든. 밤 11시까지 빡빡하게 짜여져 있는 스케줄. 선비 집안에서 자란 육사가, 훈련을 잘 해냈을까? 이정기(독립운동가) 선생님이 그 이야기를 하시더라고. '너희 아버지는 사격의 명수일뿐더러 말을 타고 달릴 때도 사격을 하면 백발백중 명중하는 명사수였다'. 권총을 여섯 자루가 왔는데 밤에 호롱불을 꺼 놓고도 다 해체해서 조립하는 그런 걸 아주 정확하게 해냈다고. 변장술도 능했고, '육사는 언어의 마술사다' 중국어, 일어, 에스페란토어도 배우셨더라고요. -이옥비, 이육사 딸 펜이 아니라 총을 쥐고, 깔끔한 양복 대신 거친 군복을 입은 육사의 모습. 어때, 상상이 돼? 6개월의 훈련을 마친 대원들은 각자 임무를 부여받고 흩어졌어. 육사에게는 조선으로 돌아가서 의열단을 위해 사력을 다하라 는 임무가 부여됐어. 그렇게 육사는 경성으로 잠입했어. 청년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군사간부학교 2기생을 모집하라는 임무를 맡은 거야. 그런데 채 뜻을 펴기도 전에 육사는 또다시 체포되고 말아. 정보가 샜던 거야. 1기 졸업생들이 여기저기서 검거돼. 이 사진은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있을 때 육사의 모습이야. 몰라보게 초췌해진 모습이 마음 아프지? 모진 고초를 겪고 풀려난 후, 육사는 일생의 지기를 만나게 돼. 그게 바로, 1935년 위당 정인보 선생의 집에서 만난 신석초 시인이야. 처음에 만났을 때 아름다운 문인으로서 대했지만, 육사는 이미 그 전에, 이 모든 과정을 겪었던 거야. '시인'이기 전에 '투사'였어. 하지만 육사는 석초에게 자신의 임무에 대해 절대 이야기하지 않았어. 자신으로 인해 친구가 해를 입을까 봐, 그걸 걱정했던 게 아닐까 싶어. 두 사람 사이에 알려지지 않은 일화가 있어. 육사가 중국에 갔다 왔던가. 어느 추운 날에 돌아왔는데, 굉장히 추운데 외투도 안 입고. 추워 보이고 막 그렇게 실제 추워하고 그래서 (큰아버지가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줬다고. 우리 어머니가 어디서 잃어버리고 오신 줄 알고 '아이고 왜 외투는 안 입고 들어오세요' 깜짝 놀라서 그러니까. '육사가 너무 추워 보이고 불쌍해서 아무 이유도 묻지 않고 내가 그냥 윗도리를 벗어줬다'.. -신홍순, 신석초 조카 이번에도 굳이 이유를 묻지 않은 석초. 석초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육사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그래도 석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 칼날 위에서 노래하다 석초와 만난 후 육사는 강렬한 시들을 써냈어. 그리고 시를 쓰는 것에 대해 이런 글을 남겼어. 정면으로 달려드는 표범을 겁내서는 한 발자국이라도 물러서지 않으려는 내 길을 사랑할 뿐이오. 그렇소이다. 내 길을 사랑하는 마음, 그것은 나 자신에 희생을 요구하는 노력이오. 행동은 말이 아니고, 나에게는 시를 생각한다는 것도 행동이 되는 까닭이오. 이래서 나는 내 기백을 키우고 길러서 금강심에서 나오는 내 시를 쓸지언정 유언은 쓰지 않겠소. 시 또한, 그가 현실에 맞서는 방법이었어. 이뿐만이 아니야. 육사는 자신이 쓴 시를 직접 해석한 적도 있어. 시인이 직접 자신의 시를 해석한다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지. 맨 처음 읽었던 '청포도' 기억나지? 그 시에 담긴 의미를 이렇게 이야기했대. 내 '고장'은 조선이고 '청포도'는 우리 민족인데, 청포도가 익어가는 것처럼 우리 민족도 익어간다. 그리고 곧 일본도 끝장난다. 육사는 한 치의 의심 없이 믿었던 것 같아. 일본의 패망, 그리고 조선의 독립을... 하지만 상황은 점점 더 안 좋아져. 일본은 전쟁을 지속하기 위해서 조선민족 말살정책에 박차를 가해. 내선일체, 신사참배 등 한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해서 조선인을 일본인에 동화시킨다는 거야. 일제강점기 중에서도 최악의 시기가 닥쳐왔어.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도 일본식 이름으로 바꿔야 해. 우리 말과 글을 쓸 수도 없어. 글을 빼앗긴 문인들은 붓을 꺾거나 변절을 선택해. 육당 최남선, 춘원 이광수와 같은 민족문학의 거두들마저 친일로 돌아서고 말았어. 암담하기만 한 그 시기, 육사는 이런 시를 썼어. &<절정&>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보다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에 갔을 때를 회상하며 쓴 것 같아. 이 시의 제목은 '절정'이야. 육사는 이 시기를 절정이라 생각했나 봐. 이때만 지나가면 봄이 온다는 희망을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 무렵, 육사에게 기쁜 소식이 찾아와. 사랑스러운 딸, 옥비가 태어난 거야. 일찍이 1남 1녀를 홍역으로 잃었던 육사였어. 어렵게 얻은 딸인 만큼 얼마나 예뻤겠어. 독립운동 하느라 집에 자주 오지 못했지만, 집에 머물 때면 아침마다 옥비를 안고 놀아주곤 했대. 저희 집에는 다 글을 하는 사람이고 그러니까 낙관이 많았대요. 그래서 이렇게 펼쳐놓고 아버지가 '셋째 삼촌 낙관을 골라라' 이렇게 하나하나 보고 셋째 삼촌 낙관을 골라내면 맞으니까, 아버지가 그게 재미있어서 집에 계실 때는 아침에 저를 불러놓고 그런 걸 좀 자주 했고… -이옥비, 이육사 딸 생각만 해도 다정한 부녀의 모습이 떠오르지? 하지만 육사에게는 가족보다 더욱 중요한 일이 있었어. 바로 조국의 독립. 어린 딸을 두고 다시 중국으로 가야 했어. 떠나기 전에 육사는 옥비를 데리고 어딘가를 갔어. 당시 종로에 있던 조선에서 가장 큰 백화점인 화신백화점이었어. 옥비를 두고 떠나는 게 미안해서였을까. 여기서 딸을 위한 선물을 사. 핑크색 모자와 벨벳 투피스, 그리고 까만 구두. 우리가 형편이 굉장히 어려운 형편이었거든요. 화신백화점에 가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어머니랑 출타할 때는 꼭 그 옷을 입으면 아이들이 그게 예쁘다고 '한 번만 벗어봐라 입어보자' 막 그랬던 그런 기억이 나거든요. 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받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은 옷이잖아요. 마지막 선물이었죠. -이옥비 여사, 이육사 딸 그리고 육사는 친구 석초를 찾아가 함께 눈을 밟으며 작별인사를 건네. 그렇게 북경으로 위험한 여정을 떠났던 거야. 딸과 친구를 두고 떠나는 육사의 마음, 상상이 되니? 북경에 도착한 육사는 한 사람을 찾아가. 육사의 먼 친척이자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던 여성 독립운동가 이병희야. 북경 오실 때마다 오고 삼촌들도 이제 우리 집에 일가니까 다. 그러니까 찾아오시고 했는데, 하루는 육사가 날 찾아왔데. 찾아와서 '병희야. 나가자' 그래. '예. 나갑시다'. 그리고서는 '중경에서 너를 데려오라는 명령이 내려왔는데 너 갈래?' 그러데. '가죠' 그래서 '너 안내원도 왔다. 너 데리고 갈' 그래서 '널 연안으로 보내기로 했다. -故 이병희 생전 인터뷰 中 중경에는 당시 임시정부가 있었어. 연안에는 김원봉이 만든 조선의용대가 있었다고 해. 육사는 임시정부와 조선의용대 사이를 연결하는 임무를 맡은 걸로 보여.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일이 생긴 거야. 작년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와 큰형의 첫 번째 제사가 다가오고 있었거든. 아버지도 세상을 떠난 터라 이젠 육사가 집안의 어른이야. 동생들한테만 맡겨놓을 순 없잖아. 하지만 막상 조선에 돌아가자니 아주 위험해. 경찰이 눈에 불을 켜고 있을 게 뻔하니까. 그럼 육사는 어떻게 했을까? 1943년 7월. 육사는 고향마을로 돌아갔어. 어머니와 형의 제사를 치른 후, 가족을 만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어. 그리고 일본 헌병대에 붙잡히고 말았어. ▲ 육사의 마지막 외침 20일간 조사를 받은 육사는 북경으로 압송이 결정돼. 손에는 포승줄이 묶이고 발에는 쇠고랑이 채워져. 얼굴에는 밀짚으로 엮은 용수가 씌워져. 육사가 북경으로 압송된다는 소식을 듣고 옥비 어머니는 어린 옥비를 안고 기다렸어. 저만치 용수로 얼굴을 가린 남편이 보이자 어린 옥비를 높이 쳐들어. 가기 전에 딸의 얼굴이라도 보고 가시라고... 그러자 육사가 걸음을 멈춰. 어린 옥비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서더니 작별 인사를 남겨. 아버지, 다녀오마. 그렇게 육사는 기차에 실려 북경으로 압송됐어. 아버지가 기차를 타면 떠나시는 거잖아요.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아버지 다녀오마' 이렇게 얘기하고 곧 오실 것처럼, '곧 다녀오마' 그런 거는 아무리 위급해도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그런 말이었죠. -이옥비, 이육사 딸 그날 이후 육사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은 딱 한 사람이야. 바로 북경에 남아있던 육사의 친척이자 독립운동가 병희. 병희는 걱정이 태산이었어. 육사가 돌아오기로 한 날짜가 지났는데 안 오니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길이 없으니 답답해. 그러던 어느 날, 일본 형사가 병희를 찾아와. 나하고 가서 얘기 좀 하자 며 병희를 잡아끌어. 그렇게 형사를 따라나선 병희는 지하감옥에 갇히고 말아. 그리고 그곳에서 육사를 만나. 그 순간 '이제 끝났구나' 생각이 들었대. 그 후 두 사람은 끔찍한 고문에 시달려야 했어. 그런데 얼마 후, 병희는 풀려나게 돼. 알고 보니, 육사가 자신이 보증한다며, 병희는 자신의 일과는 상관없으니 풀어달라 한 거야. 육사의 보증으로 병희는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어. 하지만 육사는 차가운 지하감옥에 남았어. 계절은 어느새 겨울이야. 육사는 잡혀 올 때 그대로 여름옷 차림이었대. 방에서는 연신 콜록거리는 기침 소리가 들렸다고 해. 병희가 풀려난지 닷새쯤 지났을 때, 형무소에서 연락이 왔어. 이육사의 시신을 찾아가시오 라고. 날 찾아왔더라고. 찾아와서 육사가 죽었는데, 오늘 새벽 5시에 돌아가셨다 그러니까. 너밖에는 맡을 사람이 없으니 시체를 찾아가라 그러대. -故 이병희, 독립운동가 1944년 1월 16일 새벽. 육사는 북경 지하감옥에서 생을 마감했어. 그의 나이 마흔 살. 조국의 광복을 불과 1년 앞두고 가혹한 고문 끝에 숨을 거둔 거야. 그날 저녁, 병희는 형무소를 찾았어. 딱 들어가니까 육사가, 시체가 관에 있데. 그런데 관뚜껑을 딱 여니까 얼굴이 그냥 빨개지면서 코에서 피가 막 주르륵 나면서 눈을 뜨고 죽었더라고. 뒤처리는 내가 다 할 테니까 안심하고 곱게 가시라고. 그리고 (눈을) 쓰다듬으니까 다시 얼굴이 하얘지면서 죽은 사람으로 변하고 눈을 감더라고. -故 이병희, 독립운동가 아무 걱정 마시오. 조국의 독립은 후손들에게 맡기시고. 편히 가시오 라고 말하며 육사의 부릅뜬 눈을 세 번 쓰다듬자 그제야 스르르 눈을 감았다고 해. 갑자기 전보가 날아왔어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어머니가 방 하나를 달라고 그래서 머리를 풀고 그렇게 우시더라고요. 엄마가 우니까 나도 따라서 정확하게도 모르는데 울었죠. 같이 울고… -이옥비, 이육사 딸 병희는 육사의 시신을 수습하고 그가 남긴 유품을 챙겼어. 유품이라 해봐야 만년필 한 자루와 마분지 조각뿐이었어. 그 마분지에는 육사가 남긴 시가 쓰여 있었어. &<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참아 이곳을 범하든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육사는 시를 쓸지언정 유언을 쓰지 않겠다고 했잖아. 그 말처럼 유언 대신 시를 남기고 가신 거야. '광야', 우리에게도 너무 익숙한 시인데, 다른 느낌이지? 이 시에는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육사의 이야기, 독립에 대한 강렬한 염원이 담겨있어. ▲ 그가 세상에 남긴 것 육사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 그토록 기다리던 해방을 맞이해. 모두가 길거리로 나와 만세를 외쳤어. 그리고 육사가 순국한 지 2년 후인 1946년. 그의 첫 시집이 세상에 나와. 육사의 동생이 형이 남긴 시들을 모아 시집을 낸 거야. 석초를 비롯한 육사의 친구들이 서문을 적었어. 육사가 북경 옥사에서 영면한 지 벌써 2년이 가까워 온다. 그가 세상에 남기고 간 스무여 편의 시를 모아 한 권의 책을 만들었다. 그는 한평생 꿈을 추구한 사람이다. 시가 세상에 묻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안타까이 공중에 그린 무형한 꿈이 형태와 의상을 갖추기엔 고인의 목숨이 너무 짧았다. 신석초 시인은 평생 시와 함께 사시다가 1975년, 66세의 나이로 돌아가셨어. 조카 신홍순 씨는 유품을 정리하다가 뭔가 특별한 걸 발견했어. 생전에 육사가 큰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였어. 잦은 고문 때문에 폐병을 얻었던 육사가 요양차 내려간 경주에서 보낸 글이야. 석초 형! 내가 모든 의례와 형식을 떠나 먼저 붓을 들어 투병의 일단을 호소함은 얼마나 나의 생활이 고독한가를 형이 짐작하여 줄 줄 생각한다. 석초 형! 나는 지금 이 넓다는 천지에 진실로 내 하나만이 남아있는 외로운 넋인 듯 하다는 것도 형은 짐작하리라. 그래서 군(君)이 먼저 편지라도 한 장 하여주리라고 바라기는 하면서도 형의 게으름에 가망이 없어 내 먼저 주제넘게 호소치 않는가? 강하고 엄격한 육사가, 외롭다고 투정도 부리면서 왜 먼저 편지를 쓰지 않냐고 점잖게 보채기도 하지. 인간적인 모습을 거리낌 없이 내보일 만큼 두 사람의 사이가 가까웠던 거 같아. 조금 늦었지만 이제는 두 사람이 다시 만나 못다 나눈 술잔을 나누고 있지 않을까. 그만큼 따뜻하게 그분들이 지냈기 때문에 그랬던 거 아니겠냐. 이렇게 생각해요. 지금 하늘에서 만나셨겠지? 그래서 두 분이 역시 가깝게 시를 왔다 갔다 하고 쓰고 계실 거 같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신홍순, 신석초의 조카 그리고 이옥비 할머니는, 아버지가 남겨준 이름처럼 여전히 욕심 없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신대. 아버지가 쓰신 시가 좋다고 그러지만은, 내게는 지게꾼이라도 어깨를 두들기면서 '얘야 밥 먹자' 이렇게 다독거려주는 아버지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했었거든요. 그러니까 철이 없어서 그랬죠. 그때는... 그렇지만 이제는 저도 부끄러움이 없는 그런 삶으로 살아야 되지 않을까. 제 이름이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이, 욕심 없는 그런 이름이잖아요. 그래서 저는 '조금 모자란 듯하게 사는 게 제 삶이다' 이렇게 생각해요. -이옥비, 이육사 딸 아까 이육사라는 이름이 수인번호를 따서 만들었다고 했잖아. '二六四'라는 한자를 쓰지. 그런데 다른 한자를 쓰기도 해. '죽일 육' '역사 사', 역사를 죽이겠다는 뜻이야. 일제 치하의 그 역사를 부정하겠다는 거야. 집안 어른들은 이걸 보고 염려를 드러냈대. 괜히 화를 입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육사는 한 글자를 바꿨대. '땅 육'으로. 이게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육사의 한자야. 근데 조금 특이한 한자를 쓰신 적이 있어. '고기 육, 설사할 사'로. 뜻만 직역하면, '고기를 먹고 설사한다'는 거야. 이게 일제 치하의 세상을 조롱하는 의미로 해석되고 있어. 그런데 이런 의미로도 해석돼. 딸에게 기름지게 살지 말라는 의미로 '옥비'라는 이름을 지어줬잖아. 비슷한 의미로, '평생 편안하고 기름진 삶을 살지 않겠다'는 각오가 담겨 있는 건 아닐까?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꼬꼬무 찐리뷰] 사라진 약혼녀, 이름만 4개에 존속살해 피의자…10년 넘게 지명수배 중
등록일2023.11.10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9일 방송된 '완벽한 타인'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댄스크루 라치카의 리더 가비, 배우 김민재, 박효주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사라진 예비 신부 때는 2011년 8월, 인천의 한 나이트클럽. 신나게 춤추는 사람들 사이로 한 남자, 30대 회사원 수찬(가명) 씨가 쭈뼛쭈뼛 서있어. 나이트클럽에 처음 와 봤는지, 영 어색해. 그때, 수찬 씨 테이블로 두 여성이 다가와. 시큰둥했던 수찬 씨도 점점 흥이 올라. 둘 중 한 여성한테 마음이 갔거든. 수찬 씨는 그녀의 참한 모습에 매력을 느꼈어. 그리고 대화도 너무 잘 통해. 술도 못 마신다고, 억지로 끌려왔다고 하더라고요. L* 다닌다고, 업체들 매장 관리하는 거 사무실에서. 그런 일을 한다고 처음에 소개했죠. 그때 당시에는 술을 별로 안 먹고 자리에 좀 있다가 일어서는, 그런 상황이었어요. -김수찬(가명), 대역 재연 그녀의 얼굴을 보여줄게. 이름은 김세아(가명), 34살 직장인이야. 수찬 씨는 세아 씨의 연락처를 용기를 내서 물었고, 세아 씨는 연락처를 줬어. 그렇게 두 사람의 만남이 시작됐어. 세아 씨는 그야말로 꿈에 그리던 이상형이었어. 취미로 봉사 활동을 다닐 만큼 마음씨가 고왔거든. 그리고 집안도 좋았어. 세아 씨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갔는데, 마치 주말드라마의 한 장면 같았대. 화목하고 다복한 집안 그 자체야. 인사를 다녀온 수찬 씨는 결심했어. 이 여자와 결혼해야겠다고. 만나지 6개월 만의 일이었어. 아무리 사이좋은 커플이라도, 결혼 준비를 할 땐 싸운다고 하잖아? 수찬 씨 커플도 그랬어. 특히 신혼집 때문에 싸웠어. 세아 씨가 유독 고집한 아파트가 있었는데, 두 사람 형편에는 좀 과했거든. 세아 씨는 계속 수찬 씨를 설득했고, 심지어 카드 대출까지 받자고 했어. 이 일로 두 사람은 크게 싸웠지만, 결국 수찬 씨는 신혼집을 위해 어렵게 돈을 마련했어. 그런데 수찬 씨가 송금을 하려는 그 찰나, 세아 씨가 특이한 요구를 하나 했어. 신혼집 대금을 친구 계좌로 보내달라는 거야. 본인 통장은 아버지가 다 관리를 해서 일일이 허락을 받아야 한다며, 친구라는 '박은지' 계좌로 돈을 보내달래. 수찬 씨는 조금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예비 신부를 믿으니까, 친구 박은지의 계좌로 돈을 입금했어. 금액은 무려 1억 5천만 원. 그런데 얼마 후, 세아 씨의 휴대폰이 꺼져있어. 하루, 이틀, 며칠이 지나도 연락이 안 돼. 수찬 씨는 뒤통수가 서늘했어. 그래서 한 가지를 확인해 보기로 해. 바로, 세아 씨가 샀다는 아파트의 등기부등본. 그런데 거기엔 '김세아'라는 소유주는 없었어. 설마 하는 마음에 아버지 소유라던 본가도 확인했는데, 다른 사람의 집이야. 완전 멘붕이야. 예비신부와 수찬 씨의 전재산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거야. 수찬 씨는 경찰에 신고부터 했어. 이 사건을 맡은 곳은 일산 경찰서. 수사팀은 곧바로 세아 씨를 찾기 시작했고, 곧 세아 씨를 찾았어. 경찰의 연락을 받은 수찬 씨는 한달음에 경찰서로 달려갔어. 그런데 눈앞에 난생처음 보는 여자가 '김세아'라면서 조사를 받고 있었어. 신분증을 확인해 보니, 이름이 '김세아'가 맞아. 심지어 생년월일도 똑같아. 하지만 수찬 씨가 만나온 그 사람이 아니야. 이름, 나이, 그리고 집 주소까지 모든 게 다 거짓말이었던 거야. 그러니까 그때 당시에 처음에는 멘붕이었지 뭐. 일단은 사람이 돈도 문제지만 저는 진심으로 그 사람을 대했는데, 모든 한마디 한마디가 다 거짓이었다는 게 6개월 동안. 만나거나 커피 마시거나 밥 먹었다든가 이런 것들이 하나도 진심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면 그게 너무 진짜… 이렇게 사람이 바보가 될 수 있구나. -김수찬(가명), 대역 재연 그렇게 수찬 씨가 상심에 빠져 지내던 어느 날, 머릿속에 단서 하나가 번뜩 떠올랐어. 바로, 신혼집 대금을 보내달라고 했던 친구 '박은지' 계좌의 입금내역. 혹시 그녀의 진짜 이름이 박은지인 걸 아닐까? ▲ 세 개의 '가짜' 이름 일산서 형사들은 '박은지'를 추적하기 시작했어. 그런데 아주 뜻밖의 사실이 밝혀졌어. 박은지를 찾고 있는 또 다른 사람이 있는 거야. 바로 30대 남성 안준우(가명) 씨. 준우 씨는 작년 여름 나이트클럽에서 박은지를 처음 만났대. 수찬 씨가 김세아를 만났던 시기, 방식, 모든 게 비슷해. 형사는 준우 씨에게 김세아의 사진을 보여줬어. 그랬더니, 맞대. 이 여자가 박은지래. 그런데 준우 씨한테는, 결혼해서 아들이 하나 있는 엄마라고 자신을 소개했대. 그렇게 준우 씨는 나이트클럽에서 박은지를 처음 본 이후 몇 번 만났는데, 어느 날부터 이상한 요구를 하더래. 얼굴은 두세 번 봤는데, 차 한잔 마시자고 해서 만났죠. 이것저것 힘드니까, 뭐 가정에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돈을 빌려달라고 해서 안 빌려줬죠. 제가 회사 비밀을 유출한다면서 제 회사에 전화해서 뭐 그런 식으로 회사 비밀을 얘기해 주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안준우(가명), 당시 통화 박은지가 준우 씨를 협박했던 거야. 심지어 준우 씨의 회사까지 연락해서, 직원 비위를 제보할 테니 500만 원을 달라고 요구했대. 이 일로 준우 씨는 직장까지 잃을 뻔했어. 그래서 준우 씨가 박은지를 신고한 거야. 수찬 씨의 사라진 예비 신부 김세아, 그리고 준우 씨를 협박한 박은지. 모두 동일인물이야. 며칠이 지나, 수찬 씨가 다시 일산 경찰서를 찾아갔어. 박은지를 찾았다는 연락을 받았거든. 그런데 경찰이 말하길, 박은지의 주소지를 추적해 찾아갔더니 비슷한 나이의 여성이 있긴 한데, 사진 속 얼굴과는 달랐대. 하지만 이름이 똑같아서, 경찰은 긴가민가하며 일단 경찰서로 데려왔어. 수찬 씨가 확인해보니, 그 여성은 자신이 만났던 예비신부와 얼굴이 완전히 달랐어. 이번에도 다른 사람이야. 결국, '박은지'라는 이름도 가짜였던 거야. 경찰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진짜 박은지 씨한테 사진을 보여주며 이 여자를 아냐고 물었어. 은지 씨는 사진을 보더니, 자신이 아는 사람이라는 거야. 은지 씨가 기억하는 그녀의 이름은 '최수진'. 일하던 가게에 새로 온 종업원이었대. 자기는 애가 두 명 있고 딸 하나 아들 하나 있고, 자기가 큰 화장품 사업을 했대요. 그걸 망했대요. 그래서 시댁에서 쫓겨났다고 하더라고요. -박은지(가명), 대역 재연 은지 씨는 최수진의 사연에 안타까워하며 살뜰히 챙겼어. 심지어, 갈 곳 없는 수진 씨를 자기 집에서 먹여주고 재워줬대. 그렇게 한 달 정도 같이 지내다가 나갔는데, 그 후로 이상한 일이 생기기 시작해. 자신의 신분이 이곳저곳에서 도용되고 있던 거야. 특히 수상한 계좌 거래 내역이 포착됐어. 가는 은행마다 자꾸 제 통장이 만들어져 있었죠. 남자가 한 두 명이 아니야, 입출금이 다 남자 이름이에요. 통장 내역을 보면 알잖아요. 200만 원을 빌려요. 한 3일 뒤에 갚아요. 또 빌려요, 또 갚아요. 이걸 일주일 내내 하다가 한방에 확 더 큰 금액을 빌리는 거죠. -박은지(가명) 그 수상한 거래 내역에, 수찬 씨의 이름도 있었어. 신혼집 대금을 박은지 계좌로 달라고 했잖아. 바로 이 계좌였던 거야. 최수진이 은지 씨한테, 자신이 '나쁜 엄마'라고 말한 적이 있대. 시댁에서 쫓겨나 애들 얼굴도 못 보고 있다며, 학원비라도 보내주고 싶은데 자신이 신용불량자라 통장도 못 만든다는 거야. 이 이야기를 들은 은지 씨는, 자기 명의로 휴대폰도 개통해주고, 은행 통장도 만들어줬어. 최수진을 믿고 호의를 베푼 건데, 그 호의를 이용해서 은지 씨의 명의를 도용하고 다닌 거지. 경찰이 발견한 그녀의 이름만 3개야. 수찬 씨의 예비 신부 '김세아', 준우 씨를 협박한 '박은지', 은지 씨의 명의를 도용한 '최수진'. 이 세 여자가 모두 한 사람이라는 거잖아. 그럼 이제 누구를 찾아야 할까? 바로 최수진. 형사들은 은지 씨가 알려준 정보대로, 77년생 최수진을 찾기 시작했어. 그런데 못 찾았어. 비슷한 나이대의 최수진을 전부 조사했는데, 사진 속 여성은 어디에도 없어. 그런데, 의외의 장소에서 실마리가 잡혔어. ▲ 그녀의 진짜 정체 어느 날, 한 여성이 급히 구조요청을 해. 경찰이 급히 출동해 봤더니, 신고를 한 여성의 온몸엔 멍이 가득하고 옷이 막 여기저기 찢겨있어. 일단 여자를 진정시키고, 경찰서로 향했어. 2012년 8월, 경기도 동두천 경찰서야. 그때 당시 내연남한테 폭행을 당해서 안면부 쪽에 멍이 좀 많이 들어있었고 머리 부분도 헝클어진 상태로 울고 있었던 상황으로 기억합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었고, 수 회에 걸쳐서 피해가 발생됐다고 진술했었습니다. -이영진, 신고 당시 동두천 경찰서 근무 경찰서에 가면, 신원 조회부터 하잖아. 신분증을 달라고 했더니, 그 폭행 피해 여성이 신분증을 안 가져왔다며, 갑자기 신고를 취소하겠대. 그래도 신원을 확인해야 하니까,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라도 불러달라 했어. 그랬더니 그 여자, 자신의 이름이 '박은지'라고 말했어. 그래 맞아. 이 여자가 바로, '김세아', '박은지', '최수진'으로 신분을 숨겨온, 그 사람이야. 수상함을 느낀 경찰은 바로 이 사람의 지문 조회에 들어갔어. 그리고 드디어, 이 여자의 진짜 이름을 알아냈어. 바로, 장서희(가명). 나이는 34살이야. 20대 초반에 일찍 결혼해 어린 딸과 아들을 둔 두 아이의 엄마야. 장서희는 은지 씨 집에서 나온 뒤, 내연남 고 씨를 만났어. 그러다 동거를 하게 됐는데, 장서희가 고 씨의 지갑에 손을 대기 시작해. 이 일로 두 사람의 싸움이 격해졌고, 폭행으로까지 이어진 거야. 참다못한 장서희가 신고를 했는데, 자기가 덜미를 잡혀버린 거야. 장서희의 사기행각은 생각보다 더 치밀했어. 이 신분증 속 사진의 얼굴은 장서희. 그런데 이름은 박은지야. 은지 씨 이름으로, 운전면허증까지 발급받은 거야. 한마디로 위조 신분증이야. 장서희는 그야말로 완벽한 타인으로 살아가고 있었어. 그러면 대체 왜, 이러고 산 걸까? 장서희에게 진짜 숨기고 싶었던 비밀이 있었던 걸까? 결정적인 단서는 신고 여성이 주민등록번호를 제시했을 때 눈동자가 흐려지고 진술의 신빙성에 좀 의심이 가서 지문 조회를 했던 거죠. 깜짝 놀랐죠. 존속살해 피의자로 지명수배 돼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죠. 일반적으로 살인 피의자 지명 수배되어 있는 경우는 거의 흔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도 존속 살해 피의자 A수배로 밝혀지기는 거의 힘든 부분이기 때문에 깜짝 놀랐죠. -이영진, 신고 당시 동두천 경찰서 근무 단순한 사기꾼이 아니었어. 장서희가 그토록 숨기고 싶어 했던 진짜 정체는, 무려 1년째 도주 중인 지명수배자였어. 그것도 존속 살해 혐의로. 동두천서 형사들은 어디론가 급히 전화를 걸었어. 장서희를 애타게 찾고 있었던 또 한 사람이 있었거든. 지금까지, 30년이 넘는 세월을 통틀어 가장 잊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장서희래. 바로, 이 사람이야. 잊어버릴 수가 없죠. 왜냐하면, 제가 지금 경찰 생활 한지 35년 차인데요. 많은 범죄자들을 검거해 봤지만, 이런 여성은 진짜 처음입니다. 평범하지 않은 여인이다. 그 여성과 관련된 사람들은 피해자가 계속 발생하는 거죠. 안 좋은 일들이 계속 일어나는 거죠. 어떻게 보면 미스터리하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그 미스터리한 퍼즐을 맞추기 시작한 거죠. -이대우 경정, 당시 서대문경찰서 강력팀장 이대우 형사. 별명이 '범죄 사냥꾼'이야. 절도단, 마약단, 조직 전체를 일망타진하기로 유명해. 지금까지 잡은 범죄자들만 1000명 이상이야. 강력계의 레전드야. 바로 이 형사가 1년 전, 장서희를 존속살해 혐의로 수배한 경찰이야. 두 사람의 길고 긴 악연, 그 끝엔 충격적인 결말이 기다리고 있어. ▲ 악연의 그림자 시계를 거꾸로 돌려, 2010년 9월 서울 수유동. 한 골목 끝에 있는 2층 집에서 불이 났어. 집을 다 삼켜버릴 기세로 불길이 활활 타올라. 그때, 불난 집 창문에서 엄마와 어린 딸이 살려달라고 소리쳤어. 다행히 그 방은 불길이 번지지 않아서, 이웃들이 창문을 통해 모녀를 구출했어. 현장에 도착한 소방대원들은 겨우 불을 진압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어. 그런데 안방에서 시신을 발견했어. 먼저 구출된 아이 엄마의 친어머니야. 불에 완전히 탄 상태야. 화재에서 구출된 아이 엄마, 바로 우리가 아는 그 장서희야. 그날 무슨 일이 있었길래, 장서희와 딸은 살고, 어머니만 사망한 걸까? 장 씨의 진술에 따르면, 사건 전날 밤 장 씨는 딸과 함께 어머니의 집을 방문했어. 안방에서 함께 술을 마셨는데, 어머니가 담배를 피우려고 했다는 거야. 자기는 딸이 있으니, 딸을 데리고 작은 방으로 가서 잤대. 그러고 나서 새벽에 불이 났다는 거야. 현장에서는 이게 발견돼. 담배처럼 생긴 라이터. 초기 조사에서는 이 라이터, 혹은 담배꽁초가 화재의 원인이라고 판단했어. 그런데 장 씨와 딸은 탈출했잖아? 장 씨의 어머니는 왜 탈출하지 못했을까? 혈액 및 위내용물에서 졸피뎀이 검출되고 혈중 농도가 1.1mg/L로서 독성농도를 상회하며… -어머니 사망 부검 감정 결과 中 어머니의 부검 감정서야. 수면제의 일종인 졸피뎀이 시신에서 다량 검출됐어. '독성농도'는 치사량에 가까운 수치야. 이에 대해 장 씨는 이렇게 진술했어. 엄마가 평소 수면제를 복용하셨어요. 수면제를 먹고 하루 종일 자는 것도 봤어요. -어머니 사망 관련 장 씨의 2차 진술 中 당시 경찰은 장 씨의 진술대로, 어머니가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잠이 들어 차마 불길을 피하지 못했다고 판단하고 단순 화재사로 마무리지었어. 그런데, 또 다른 사건이 벌어져. 화재 사고 5개월 뒤인 2011년 2월, 고양시의 한 아파트야. 해도 뜨지 않은 새벽, 경비원이 순찰을 돌다가 누가 화단에서 잠들어 있는 걸 발견해. 술에 취했겠거니 싶어, 몸을 흔들어 깨우는데, 아무리 흔들어도 일어나질 않아. 심지어 몸이 나무토막처럼 굳어 있어. 잠든 게 아니라,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시신이었어. 사인은 추락사. 특히 머리 부분이 크게 손상되어 있었어.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고층에서 추락한 거라 추측하고 변사자의 집을 찾아 나섰어. 그렇게 찾은 변사자의 집. 죽은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람, 바로 장서희였어. 어머니 사망 5개월 만에, 아버지도 시신으로 발견된 거야. 아버지가 담배를 피우고 싶어 했어요.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균형을 잃고 떨어진 것 같습니다. -추락사고 당시 장 씨의 1차 진술 中 장 씨의 진술에 따르면, 아버지가 폐암으로 입원 중이셨는데 동생 결혼식이 있어서 집으로 모셔왔대. 그날 혼자 거실에서 주무셨는데, 새벽에 베란다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다 변을 당하신 것 같다는 거야. 당시 장 씨의 집 베란다에선, 실제로 담배꽁초가 여러 개 발견됐어. 유족 진술, 현장 증거가 모두 일치하고, 외부인 침입이나 타살 정황도 없어. 이 사고도, 단순 추락사로 마무리 됐어. 정리하면, 5개월 간격으로 장 씨 부모님이 연달아 사망했어. 공교롭게도, 현장에 모두 장 씨가 있었어. 하지만 당시 조사에서는 장 씨에게 별다른 혐의점이 없다고 봤어. 두 사건 모두 다. 그런데 이 사건을 지나치지 못한 한 사람이 있어. 바로 '범죄 사냥꾼' 이대우 형사. 단순하게 생각해도 어머니 사건에도 그 여인이 관여돼 있고, 아버지 사건에도 그 여인이 관여돼 있고. 왜 그 여인이 있을 때마다 부모가 희생이 되느냐. 의문이 들잖아요. 우연치고는 너무 겹치는 거잖아요. -이대우, 당시 서대문 경찰서 강력팀장 이 형사의 눈에 이상한 점이 발견됐어. 바로 보험. 장 씨의 아버지 앞으로 암 보험이 하나 있었어. 그런데 아버지가 사망하기 전, 장서희가 보험사에 3차례 전화를 걸었어. 그리고 '상해 사망' 담당자와 통화를 했다는 거야. 아버지는 암환자인데, 이 보험에 '상해사망 특약'이 있었던 거야. 사고로 죽으면 보험금이 나온다는 거지. 이건 계약변경 승인신청서, 보험금 수익자를 변경한다는 서류야. 이 보험의 수익자는 원래 아버지의 동거녀였어. 그런데 그게 장서희로 바뀐 거야. 그것도, 사고 보름 전에. 아버지의 동거녀는 딸이 집요하게 날 괴롭혔다. 하루에도 전화를 수십 통 씩 하고, 우리집 문까지 따고 들어왔다 라고 말했어. 이렇게 집요하게 괴롭히니까, 결국 수익자를 장 씨로 바꿨다는 거야. 화재사고로 사망한 어머니. 어머니한테는 사망보험이 없었어. 다만 운전자 보험이 하나 있었는데, 공교롭게 여기에도 상해사망 특약이 걸려 있었어. 사고로 사망할 경우, 보험금이 1억이야. 그런데 장 씨가 보험금을 받아간 상황이 좀 묘해. 보험금을 청구한 지 겨우 6개월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빨리 보험금을 달라고 보험사를 재촉했어. 사고 경위를 조사해야 하니 한 달만 기다려달라 했더니 막무가내로 돈을 요구했어. 그러더니, 1억이 아닌 7천만 원만 받을 테니, 당장 돈을 보내라고 했어. 보험금을 깎아서라도 얼른 받겠다는 거야.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죠. 누구나 봤을 때 이거 좀 뭔가 이상하지 않나. 그리고 그 사건마다 보험이 관련되어 있고, 그 사건 때마다 함께 있었다는 것. 그런 우연과 우연이 겹치고 그런 강력사건으로 판단이 되다 보니까, 이런 건 수사를 안 할 수가 없는 거죠. -이대우, 당시 서대문 경찰서 강력팀장 이대우 형사는 이런 정황을 바탕으로 2011년 4월, 장 씨를 존속 살해 혐의 피의자로 특정하고 본격 재수사에 돌입했어. 그런데, 조사를 받던 장 씨가 갑자기 사라졌어. 잠적해 버린 거야. 바로 전국으로 수배를 내렸어. 그런데 머리카락 한 올도 찾지 못해. 왜? 계속 다른 이름으로 살았으니까. 수배자 신분을 감추려고 가짜 이름을 썼던 거야. 심지어 이 기간에 사기 행각까지 벌였어. ▲ 진술의 모순을 찾아라 다시 2012년 8월로 돌아와, 폭행 신고로 덜미가 잡힌 장서희. 이대우 형사팀은 장 씨를 긴급 체포했어. 도주한 지 1년 만이었어. 존속살해 혐의를 조사해야지. 그런데, 장 씨는 경찰서를 유유히 걸어 나가. 왜? 구속영장이 안 나왔거든. 범죄혐의점도 있고 도주의 우려도 있었어. 그래서 당연히 나올 줄 알았는데, 구속영장이 기각된 거야. 검찰이 구속영장을 기각한 이유는, '장 씨 부모님 사망사건을 보험 살인이라고 보기 힘들다'는 거야. 보통의 보험사기는, 여러 개의 보험에 중복 가입하고, 과도한 보험료를 납부하는 경우가 많대. 그런데 이 사건은 안 그랬어. 보험도 하나였고, 보험료도 많지 않아. 그리고 무엇보다, 보험에 가입한 것도 보험료를 낸 것도 모두 장 씨가 아니야. 그래서 장 씨가 아무리 수익자를 무리하게 바꿨어도, 보험금을 아무리 독촉했어도, 이걸 살인의 직접적인 증거로는 볼 수 없다는 거야. 하지만, 구속을 하지 말라는 거지, 장 씨를 조사하지 말라는 건 아니잖아? 그래서 이 형사 팀은 장 씨를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했어. 그런데 조사가 쉽지 않아. 당시 막내였던 홍종현 형사의 이야기를 들어볼게. 장 여인의 말투를 보면 굉장히 공격적이고 말이 굉장히 빠릅니다. 여러가지 생각을 많이 해서 말을 잘 꾸며서, 미리 상황을 다 짜놓고 얘기하듯 이야기를 해서. 여태까지 경찰 활동을 하면서 많은 나쁜 사람들을 봤지만, 모든 것을 대비하고 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생각했습니다. -홍종현 형사, 당시 소환 조사 담당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으면, 보통 사람들은 떨려서 말도 제대로 못 해. 죄가 있든 없든 그 분위기에 압도당하거든. 그런데 장 씨는 어떤 질문에도 막힘이 없어. 마치 미리 대본을 짜놓은 것 같았대. 게다가, 조사를 받다가 아이가 운다고 나가고, 바쁘다며 안 오고. 이건 뭐, 피의자가 아니라 거의 상전이야. 이렇게 당할 수만은 없어서 조금 세게 나갔더니, 강압수사를 받았다며 수사관을 교체해달라 민원까지 넣어. 수사가 힘든 이유는 또 있어. 이미 1년도 지난 사건들이니, 현장 주변 CCTV도 없고 목격자도 찾기 힘들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장 씨의 진술서에서 찾았어. 이대우 형사 팀은 초동 수사 당시 장 씨의 진술들을 다시 하나하나 분석하기 시작했어. 분명 허점이 있을 거라 믿으며. 먼저, 아버지 사망에 대한 장 씨의 진술을 확인해보면 아버지가 담배를 피우고 싶어 했다.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다 균형을 잃고 떨어진 것 같다 라고 말했어. 아버지의 건강 상태, 폐암으로 입원 중이었다고 했잖아? 게다가 사고 보름 전에 두개골을 절개하는 대수술을 받았어. 그때 (아버지) 외출 허락을 안 해줬었거든요. 혼자서 이렇게 걸을 수가 없는 상태였던 거 같아요. 그러니까 부축이라든지 아니면 휠체어 정도 타고 겨우 이제 이동하실 수 있는 정도. 이렇게 보내도 되나 싶어서, 사실은 한번 거동해보시라 했거든요. 근데 겨우 부축해서 겨우 발걸음을 때는 정도의… -우광무, 당시 아버지 주치의 거동조차 불편했다는 장 씨의 아버지가, 베란다로 혼자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이대우 형사는 사건 현장을 다시 찾아갔어. 그리고 이 형사는 진술을 재연해보기로 했어. 이건 당시 사건 현장에 있던 난간을 똑같은 크기로 구현한 거야. 아버지의 키는 172센티미터 정도. 이 높이에서 균형을 잃고 떨어질 수 있을까. 실수로 균형을 잃고 떨어지기에는, 난간 높이가 꽤 높아. 장 씨의 아버지, 정말 사고사일까? 이번엔 어머니 사망에 대한 진술을 검토해볼 차례야. 이 사건은 현장이 이미 불타 없어진지 오래라 더 막막해. 다행히 사진이 몇 장 남아 있어서 보고 또 보는데, 한 사진 앞에서 형사들의 눈빛이 달라져. 바로 이 사진. 사진 속 창문. 사고 당시, 창문도 방문도 모두 닫힌 밀폐된 공간이었어. 그렇다면 밀폐된 공간에서 담뱃불로 그렇게 큰 불이 날 수 있을까? 이걸 실험하기 위해, 수사팀은 현장을 다시 만들기로 해. 사고 현장을 그대로 재현한 실험을 하기로 했어. 당시 상황과 동일하게 완전히 공간을 밀폐한 후, 전소된 침구류와 동일한 이불을 준비해 불이 붙은 담배를 이불 위에 올려뒀어. 담배는 점점 타들어 갔어. 하지만 다 탄 담배는 그대로 꺼져버렸어. 담배에서 나오는 열 대부분이 가연물(이불)에 전달이 안 되고 그냥 허공으로 열이 다 방사가 되어 버리고 극히 일부분만 가연물에 전달이 되기 때문에 그 열로는 이 조건이라면 이불에 불이 붙을 확률은 적죠. -김흥렬, 당시 건설기술연구원 박사 타고 있는 담배 위에 다른 물건을 올린 조건으로도 실험을 진행했어. 이번에도 불씨는 살아나지 않았어. 반면, 라이터로 불을 붙여 이불에 던지는 경우에는 불길이 치솟았어. 라이터 불로는 큰 불이 나는 게 가능하다는 걸 확인했어. 그래서 이대우 형사는 이 화재는 '방화'일 거라 생각했어. 그리고 확인해야 할 또 한 가지. 어머니가 복용했다는 '수면제'. 장 씨는 어머니가 우울증 때문에 수면제를 복용해 왔다고 진술했어.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치사량에 가까운 수면제를 한꺼번에 먹었다는 게 이상해. 일단 어머니가 수면제를 처방받은 기록이 있는지 찾아봤어. 어머니는 수면제를 처방받은 적도, 우울증 치료를 받은 적도 없어. 그런데 뜻밖의 이름이 진료 기록에서 발견돼. 바로 장서희. 심지어 시신에서 검출된 성분과 똑같은 성분의 수면제를 처방받았어. 그것도 사고 전날에. 이대우 형사 팀은 이제 거의 확신했어. 장 씨를 당장 소환해서 물어봤지. 그러자 장 씨는 본인이 먹으려고 처방받았다고 진술했어. 엄마가 수면제 먹는 걸 보고 저도 수면제를 먹기 시작했어요. 2006년이었나. 우울증 때문에요. -어머니 사망 관련 장 씨의 3차 진술 수사팀은 각종 실험, 진술을 종합해서 구속영장을 다시 신청했어. 하지만, 이번에도 기각이야. 도대체 왜 자꾸 기각되는 걸까. 검사출신 변호사한테 그 이유를 직접 들어볼게. (검사가) 되게 고민이 깊었을 거 같아요. 왜냐면 범죄 소명은 좀 부족한데 도망의 우려는 되게 높잖아요. 근데 여기서는 라이터를 구매한 내역이라든지 들고 들어갔다라든지, 범행을 사전에 모의했다는 CCTV나 범행 도구 구입 내역이나 그런 거에 대한 입증이 없잖아요. 일단은 '죄를 저지른 거 같아' 거기다가 '구속하지 않으면 도망가거나 증거를 없앨 거 같아'가 두 번째인 거지, 소명조차 되지 않는 사람을 도망갈 거 같으니까 구속시킬 수 없는 거잖아요. 검사 입장에서, 형사소송법도 그러하고. -이고은 변호사 도주의 우려가 있다 할지라도, 범죄 소명이 부족한 피의자를 구속할 수 없다는 거야. 형사들의 입장은 어땠을까? 정황증거만으로도 구속되고 유죄까지 받는 경우가 있었대. 이번 사건은 왜 이리 기준이 높은 건지, 답답하고 아쉬웠대. 그리고 무엇보다, 장 씨가 또 도망갈까 초조했어. ▲ 억울하다는 사람의 이상한 한마디 그런데 장 씨가 이번엔 생각지도 못한 행동을 해. 바로 TV출연. 한 지상파 방송에 나와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시작해. 어떻게 불이 났는지 저도 모르겠는데 그냥 저는 소방서에서 나온 결과가 '담뱃불로 추정됨'이었으니까 '아 그래요?' 그런 줄 알았고. 아빠 조사 결과도 일산경찰서에서 '사고사로 추정됨' 이렇게 나왔으니까 그런 줄 알았고 믿었으니까. 경찰관분들을 그때는. 서대문 경찰서에서는 제가 던졌대요. 아빠를 번쩍 들어서. 말이 되냐고요. 그렇게 했다는 증거가 있으면 영장도 기각 안 됐을 거고. 수배 중인 사람이 영장이 기각되지는 않잖아요. -2012. 10. 19. 장 씨의 '궁금한 이야기Y' 출연 영상 中 장 씨는 모든 혐의를 부인했어. 담뱃불 때문에 불났다고 말한 적도 없고, 아버지가 담배 피우다 떨어졌다는 것도 경찰의 추측에 동의했을 뿐이래. 심지어는 이런 하소연도 했어. 엄마 아빠가 정말 이혼뿐만이 아니라 되게 비정상적인 가정이었어요. 엄마는 우울증에다가 의부증이 좀 심했던 것 같아요 남자들한테. 몇 번은 재혼했을 때는 잘 살려고 노력했었는데 되게 두들겨 맞은 적도 있나 봐요. 폭행을 당한 적도. 정말 마음에 병이 들었던 것 같아요 엄마가. -2012. 10. 19. 장 씨의 '궁금한 이야기Y' 출연 영상 中 이런 가정사 때문에 경찰이 자신을 색안경을 끼고 보고 있다는 거야. 비록 평범한 삶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부모님을 죽일 이유는 전혀 없다는 거야. 이 방송을 본 형사들은 어땠을까. 심증은 있는데 물증은 없지, 정황 증거로는 구속영장도 안 나와. 게다가 방송까지 나와서 억울하다고 해. 그야말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이대로 포기할 '범죄사냥꾼'이 아니지. 당장 장 씨를 구속할 수는 없지만, 기소의견('범죄 혐의가 인정된다는 의견'을 검찰에 전달하는 것)으로 검찰에 송치할 수는 있어. 보험사기, 존속살해 혐의에 대해 다시 한번 장 씨를 철저하게 조사했어. 그리고 새로운 게 더 발견됐어. 조사를 하면 할수록, 장 씨의 사기 행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드러나. 동생, 시어머니, 친인척한테 갈취한 금액만 4억 5천만 원이야. 장 씨에게 가족은, 어떤 의미였던 걸까. 그리고 왜 이렇게까지 돈에 집착한 걸까. 장 씨의 내연남 고 씨가 한 진술이 있어. 주식에 환장을 하는 그런 스타일이었어요. 막말로 마약에 금단현상 있는 사람이 마약을 봤을 때 환장하고 진짜 미친다 그러잖아요. 돈을 보면 그렇게 사람이 변해요 -장 씨의 내연남 고 씨의 진술 中 주식으로 생긴 빚이 많았는데, 돈이 생겨도 빚을 갚기는커녕 또다시 주식에 올인. 중독이 엄청 심했대. 어머니 사망 전 3억 4천만 원이었던 빚이, 아버지 사망 후에 4억 2천만 원으로 늘어나 있었어. 장 씨는 돈이 필요했던 건 맞지만, 부모님 죽음과는 무관하다고 끝까지 주장했어. 하지만 경찰이 의심을 지울 수 없었던, 마지막 결정적 이유가 있었어. '네가 엄마 아빠를 그렇게 했을 거라는 거는 이해가 안 간다. 그렇게 안 믿겨지는데?' 그러니까 자기가 갑자기 장난인지 잘 모르겠는데 '내가 했는데?' 그렇게 하고 그냥 넘어가더라고요. -내연남 고 씨(가명), 당시 통화 장 씨가 본인이 직접 범행을 저질렀다고 털어놨다는 거야. 물론 이건 고 씨의 주장일 뿐이야. 통상적으로 범행을 한 사람들도 누군가에게는 말하고 싶은 그런 심리가 있는데요. 무의식 중에 발현된 것이 아닌가… -홍종현, 당시 소환 담당 형사 이런 고 씨의 주장이 증거로 효력이 있을까. 다행히 대질신문을 통해서 진술이 서로 일치만 한다면, 상당히 유력한 증거가 될 수 있대. 자, 이제 마지막 단계야. ▲ 또 사라졌다,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끝까지 수사력을 모았던 이대우 형사팀은 최종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사건을 넘겼어. 범죄혐의가 있다는 의견을 마지막까지 피력한 거야. 최선을 다해 진실을 밝혀내려 했던 서대문의 장 씨 재수사팀은 그렇게 각자 다른 부서로 뿔뿔이 흩어졌어. 그럼, 장 씨는 어떻게 됐을까? 기소가 돼서 재판을 받았을까? 유죄는 인정받았을까? 피의자 소재 불명으로 기소중지 결국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어. 검찰조사를 앞두고 장 씨가 또 종적을 감춰버린 거야. 전국에 수배령이 내려졌는데, 찾을 수가 없어. 그야말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거야.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까지도, 장 씨는 지명수배 상태야. 장 여인에 대한 수사를 엄청 방대하게 진행했는데 계속 잡았다가 놓치고 잡았다가 놓치고 이런 상황들이 너무 허탈하고. 당시 구속영장이 청구되었다면, 재판하는 과정 중에 충분히 자백을 받아낼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구속영장이 청구되지 않아서 사실 원망스러운 부분도 있었습니다. -홍종현, 당시 소환 조사 담당 형사 이게 제가 강력팀장으로 재직하면서 맡은 마지막 사건이거든요. 사건을 시작하고 뼈대까지 세워놨지만 마무리를 못했어요. 하나의 사건을 종결을 했어야 됐는데 그걸 못하고 떠났기 때문에 그 사건에 대한 미련이 많이 남아 있었는데. 그게 아직도 재판에 회부되지 않고 당사자인 그 여인이 도망 중이라는 거에 깜짝 놀랐습니다. 조금 충격이었습니다. -이대우, 당시 서대문 경찰서 강력팀장 차라리 무죄를 받았다면, 그래서 혐의를 벗고 사건이 마무리 되었다면. 지금까지 이런 악연으론 남지 않았을지도 몰라. 그리고 2023년 현재까지도, 이 장서희를 추적하고 있는 사람이 있어. 바로 이대우 형사. 이 형사는 아직 이 사건을 놓지 않았어. 이미 검찰로 넘어갔지만, 조사가 가능한 선에서 생활반응을 계속 추적 중이래.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나온 건 없어. 수사 기관에서 추적하고 있다는 걸 100% 알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의 신분으로 된 모든 것을 차단해 놓고 제3자의 명의로 생활하고 있다는 거죠. 그동안의 범죄 형태를 봤을 때, 또 다른 피해자는 분명히 누군가는 지금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고 저는 확신해요. 그래서 그걸 예방도 하고 빨리 조기검거를 해서 법의 심판대에 세워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냥 법정에 세우고 싶어요. 그래서 정말 진실이 뭔지 밝여야겠죠. -이대우, 당시 서대문 경찰서 강력팀장 사실 '꼬꼬무'가 인터뷰를 처음 제안했을 때, 많이 망설이셨어. 형사 입장에서는 피의자를 놓친 오점일 수 있잖아. 하지만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는 건 막아야 하니까, 어렵게 결심을 하신 거야. 형사들의 용기로 만들어진 오늘의 이야기가, 부디 또 다른 피해자를 막을 수 있길 바랄 뿐이야. '꼬꼬무'가 오늘의 이야기를 준비하며 고민이 많았어. '무죄 추정의 원칙' 알지? 형사사건의 피고인은 유죄 판결이 확정되기 전엔 무죄로 추정해야 한다는 것. 장 씨도 마찬가지야. 아무리 의심이 가더라도, 아무리 다른 범죄를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장 씨를 존속살해범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돼. 그럼에도 '꼬꼬무'가 오늘 이 이야기를 하는 건, 장 씨가 수사기관의 정당한 요구를 무시하고 숨어버렸기 때문이야. 끔찍한 존속살해 혐의를 벗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는데도 말이지. 이 잔혹한 미스터리의 진실을 알고 있는 단 한 사람, 장서희. 그녀가 하루빨리, 진실의 입을 열어주길 바랄 뿐이야.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
[꼬꼬무 찐리뷰]사라진 약혼녀, 이름만 4개에 존속살해 피의자…10년 넘게 지명수배 중
등록일2023.11.10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9일 방송된 '완벽한 타인'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댄스크루 라치카의 리더 가비, 배우 김민재, 박효주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사라진 예비 신부 때는 2011년 8월, 인천의 한 나이트클럽. 신나게 춤추는 사람들 사이로 한 남자, 30대 회사원 수찬(가명) 씨가 쭈뼛쭈뼛 서있어. 나이트클럽에 처음 와 봤는지, 영 어색해. 그 때, 수찬 씨 테이블로 두 여성이 다가와. 시큰둥했던 수찬 씨도 점점 흥이 올라. 둘 중 한 여성한테 마음이 갔거든. 수찬 씨는 그녀의 참한 모습에 매력을 느꼈어. 그리고 대화도 너무 잘 통해. 술도 못 마신다고, 억지로 끌려왔다고 하더라고요. L* 다닌다고, 업체들 매장 관리하는 거 사무실에서. 그런 일을 한다고 처음에 소개했죠. 그때 당시에는 술을 별로 안 먹고 자리에 좀 있다가 일어서는, 그런 상황이었어요. -김수찬(가명), 대역 재연 그녀의 얼굴을 보여줄게. 이름은 김세아(가명), 34살 직장인이야. 수찬 씨는 세아 씨의 연락처를 용기를 내서 물었고, 세아 씨는 연락처를 줬어. 그렇게 두 사람의 만남이 시작됐어. 세아 씨는 그야말로 꿈에 그리던 이상형이었어. 취미로 봉사 활동을 다닐 만큼 마음씨가 고왔거든. 그리고 집안도 좋았어. 세아 씨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갔는데, 마치 주말드라마의 한 장면 같았대. 화목하고 다복한 집안 그 자체야. 인사를 다녀온 수찬 씨는 결심했어. 이 여자와 결혼해야겠다고. 만나지 6개월 만의 일이었어. 아무리 사이 좋은 커플이라도, 결혼 준비를 할 땐 싸운다고 하잖아? 수찬 씨 커플도 그랬어. 특히 신혼집 때문에 싸웠어. 세아 씨가 유독 고집한 아파트가 있었는데, 두 사람 형편에는 좀 과했거든. 세아 씨는 계속 수찬 씨를 설득했고, 심지어 카드 대출까지 받자고 했어. 이 일로 두 사람은 크게 싸웠지만, 결국 수찬 씨는 신혼집을 위해 어렵게 돈을 마련했어. 그런데 수찬 씨가 송금을 하려는 그 찰나, 세아 씨가 특이한 요구를 하나 했어. 신혼집 대금을 친구 계좌로 보내달라는 거야. 본인 통장은 아버지가 다 관리를 해서 일일이 허락을 받아야 한다며, 친구라는 '박은지' 계좌로 돈을 보내달래. 수찬 씨는 조금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예비 신부를 믿으니까, 친구 박은지의 계좌로 돈을 입금했어. 금액은 무려 1억 5천만원. 그런데 얼마 후, 세아 씨의 휴대폰이 꺼져있어. 하루, 이틀, 며칠이 지나도 연락이 안 돼. 수찬 씨는 뒤통수가 서늘했어. 그래서 한가지를 확인해보기로 해. 바로, 세아 씨가 샀다는 아파트의 등기부등본. 그런데 거기엔 '김세아'라는 소유주는 없었어. 설마 하는 마음에 아버지 소유라던 본가도 확인했는데, 다른 사람의 집이야. 완전 멘붕이야. 예비신부와 수찬 씨의 전재산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거야. 수찬 씨는 경찰에 신고부터 했어. 이 사건을 맡은 곳은 일산 경찰서. 수사팀은 곧바로 세아 씨를 찾기 시작했고, 곧 세아 씨를 찾았어. 경찰의 연락을 받은 수찬 씨는 한달음에 경찰서로 달려갔어. 그런데 눈 앞에 난생 처음 보는 여자가 '김세아'라면서 조사를 받고 있었어. 신분증을 확인해 보니, 이름이 '김세아'가 맞아. 심지어 생년월일도 똑같아. 하지만 수찬 씨가 만나온 그 사람이 아니야. 이름, 나이, 그리고 집 주소까지 모든 게 다 거짓말이었던 거야. 그러니까 그때 당시에 처음에는 멘붕이었지 뭐. 일단은 사람이 돈도 문제지만 저는 진심으로 그 사람을 대했는데, 모든 한마디 한마디가 다 거짓이었다는 게 6개월 동안. 만나거나 커피 마시거나 밥 먹었다든가 이런 것들이 하나도 진심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면 그게 너무 진짜… 이렇게 사람이 바보가 될 수 있구나. -김수찬(가명), 대역 재연 그렇게 수찬 씨가 상심에 빠져 지내던 어느날, 머릿속에 단서 하나가 번뜩 떠올랐어. 바로, 신혼집 대금을 보내달라고 했던 친구 '박은지' 계좌의 입금내역. 혹시 그녀의 진짜 이름이 박은지인 걸 아닐까? ▲ 세 개의 '가짜' 이름 일산서 형사들은 '박은지'를 추적하기 시작했어. 그런데 아주 뜻밖의 사실이 밝혀졌어. 박은지를 찾고 있는 또 다른 사람이 있는 거야. 바로 30대 남성 안준우(가명) 씨. 준우 씨는 작년 여름 나이트클럽에서 박은지를 처음 만났대. 수찬 씨가 김세아를 만났던 시기, 방식, 모든 게 비슷해. 형사는 준우 씨에게 김세아의 사진을 보여줬어. 그랬더니, 맞대. 이 여자가 박은지래. 그런데 준우 씨한테는, 결혼해서 아들이 하나 있는 엄마라고 자신을 소개했대. 그렇게 준우 씨는 나이트클럽에서 박은지를 처음 본 이후 몇 번 만났는데, 어느날부터 이상한 요구를 하더래. 얼굴은 두 세번 봤는데, 차 한잔 마시자고 해서 만났죠. 이것저것 힘드니까, 뭐 가정에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돈을 빌려달라고 해서 안 빌려줬죠. 제가 회사 비밀을 유출한다면서 제 회사에 전화해서 뭐 그런 식으로 회사 비밀을 얘기해주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안준우(가명), 당시 통화 박은지가 준우 씨를 협박했던 거야. 심지어 준우 씨의 회사까지 연락해서, 직원 비위를 제보할 테니 500만원을 달라고 요구했대. 이 일로 준우 씨는 직장까지 잃을 뻔했어. 그래서 준우 씨가 박은지를 신고한 거야. 수찬 씨의 사라진 예비 신부 김세아, 그리고 준우 씨를 협박한 박은지. 모두 동일인물이야. 며칠이 지나, 수찬 씨가 다시 일산 경찰서를 찾아갔어. 박은지를 찾았다는 연락을 받았거든. 그런데 경찰이 말하길, 박은지의 주소지를 추적해 찾아갔더니 비슷한 나이의 여성이 있긴 한데, 사진 속 얼굴과는 달랐대. 하지만 이름이 똑같아서, 경찰은 긴가민가하며 일단 경찰서로 데려왔어. 수찬 씨가 확인해보니, 그 여성은 자신이 만났던 예비신부와 얼굴이 완전히 달랐어. 이번에도 다른 사람이야. 결국, '박은지'라는 이름도 가짜였던 거야. 경찰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진짜 박은지 씨한테 사진을 보여주며 이 여자를 아냐고 물었어. 은지 씨는 사진을 보더니, 자신이 아는 사람이라는 거야. 은지 씨가 기억하는 그녀의 이름은 '최수진'. 일하던 가게에 새로 온 종업원이었대. 자기는 애가 두 명 있고 딸 하나 아들 하나 있고, 자기가 큰 화장품 사업을 했대요. 그걸 망했대요. 그래서 시댁에서 쫓겨났다고 하더라고요. -박은지(가명), 대역 재연 은지 씨는 최수진의 사연에 안타까워하며 살뜰히 챙겼어. 심지어, 갈 곳 없는 수진 씨를 자기 집에서 먹여주고 재워줬대. 그렇게 한달 정도 같이 지내다가 나갔는데, 그 후로 이상한 일이 생기기 시작해. 자신의 신분이 이곳저곳에서 도용되고 있던 거야. 특히 수상한 계좌 거래 내역이 포착됐어. 가는 은행마다 자꾸 제 통장이 만들어져 있었죠. 남자가 한 두 명이 아니야, 입출금이 다 남자 이름이에요. 통장 내역을 보면 알잖아요. 200만원을 빌려요. 한 3일 뒤에 갚아요. 또 빌려요, 또 갚아요. 이걸 일주일 내내 하다가 한방에 확 더 큰 금액을 빌리는 거죠. -박은지(가명) 그 수상한 거래 내역에, 수찬 씨의 이름도 있었어. 신혼집 대금을 박은지 계좌로 달라고 했잖아. 바로 이 계좌였던 거야. 최수진이 은지 씨한테, 자신이 '나쁜 엄마'라고 말한 적이 있대. 시댁에서 쫓겨나 애들 얼굴도 못 보고 있다며, 학원비라도 보내주고 싶은데 자신이 신용불량자라 통장도 못 만든다는 거야. 이 이야기를 들은 은지 씨는, 자기 명의로 휴대폰도 개통해주고, 은행 통장도 만들어줬어. 최수진을 믿고 호의를 베푼 건데, 그 호의를 이용해서 은지 씨의 명의를 도용하고 다닌 거지. 경찰이 발견한 그녀의 이름만 3개야. 수찬 씨의 예비 신부 '김세아', 준우 씨를 협박한 '박은지', 은지 씨의 명의를 도용한 '최수진'. 이 세 여자가 모두 한 사람이라는 거잖아. 그럼 이제 누구를 찾아야 할까? 바로 최수진. 형사들은 은지 씨가 알려준 정보대로, 77년생 최수진을 찾기 시작했어. 그런데 못 찾았어. 비슷한 나이대의 최수진을 전부 조사했는데, 사진 속 여성은 어디에도 없어. 그런데, 의외의 장소에서 실마리가 잡혔어. ▲ 그녀의 진짜 정체 어느날, 한 여성이 급히 구조요청을 해. 경찰이 급히 출동해 봤더니, 신고를 한 여성의 온 몸엔 멍이 가득하고 옷이 막 여기저기 찢겨있어. 일단 여자를 진정시키고, 경찰서로 향했어. 2012년 8월, 경기도 동두천 경찰서야. 그때 당시 내연남한테 폭행을 당해서 안면부 쪽에 멍이 좀 많이 들어있었고 머리 부분도 헝클어진 상태로 울고 있었던 상황으로 기억합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었고, 수 회에 걸쳐서 피해가 발생됐다고 진술했었습니다. -이영진, 신고 당시 동두천 경찰서 근무 경찰서에 가면, 신원 조회부터 하잖아. 신분증을 달라고 했더니, 그 폭행 피해 여성이 신분증을 안 가져왔다며, 갑자기 신고를 취소하겠대. 그래도 신원을 확인해야 하니까,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라도 불러달라 했어. 그랬더니 그 여자, 자신의 이름이 '박은지'라고 말했어. 그래 맞아. 이 여자가 바로, '김세아', '박은지', '최수진'으로 신분을 숨겨온, 그 사람이야. 수상함을 느낀 경찰은 바로 이 사람의 지문 조회에 들어갔어. 그리고 드디어, 이 여자의 진짜 이름을 알아냈어. 바로, 장서희(가명). 나이는 34살이야. 20대 초반에 일찍 결혼해 어린 딸과 아들을 둔 두 아이의 엄마야. 장서희는 은지 씨 집에서 나온 뒤, 내연남 고 씨를 만났어. 그러다 동거를 하게 됐는데, 장서희가 고 씨의 지갑에 손을 대기 시작해. 이 일로 두 사람의 싸움이 격해졌고, 폭행으로까지 이어진 거야. 참다못한 장서희가 신고를 했는데, 자기가 덜미를 잡혀버린 거야. 장서희의 사기행각은 생각보다 더 치밀했어. 이 신분증 속 사진의 얼굴은 장서희. 그런데 이름은 박은지야. 은지 씨 이름으로, 운전면허증까지 발급받은 거야. 한마디로 위조 신분증이야. 장서희는 그야말로 완벽한 타인으로 살아가고 있었어. 그러면 대체 왜, 이러고 산 걸까? 장서희에게 진짜 숨기고 싶었던 비밀이 있었던 걸까? 결정적인 단서는 신고 여성이 주민등록번호를 제시했을 때 눈동자가 흐려지고 진술의 신빙성에 좀 의심이 가서 지문 조회를 했던 거죠. 깜짝 놀랐죠. 존속살해 피의자로 지명수배 돼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죠. 일반적으로 살인 피의자 지명 수배되어있는 경우는 거의 흔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도 존속 살해 피의자 A수배로 밝혀지기는 거의 힘든 부분이기 때문에 깜짝 놀랐죠. -이영진, 신고 당시 동두천 경찰서 근무 단순한 사기꾼이 아니었어. 장서희가 그토록 숨기고 싶어 했던 진짜 정체는, 무려 1년 째 도주 중인 지명수배자였어. 그것도 존속 살해 혐의로. 동두천서 형사들은 어디론가 급히 전화를 걸었어. 장서희를 애타게 찾고 있었던 또 한 사람이 있었거든. 지금까지, 30년이 넘는 세월을 통틀어 가장 잊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장서희래. 바로, 이 사람이야. 잊어버릴 수가 없죠. 왜냐하면, 제가 지금 경찰 생활 한지 35년차인데요. 많은 범죄자들을 검거해 봤지만, 이런 여성은 진짜 처음입니다. 평범하지 않은 여인이다. 그 여성과 관련된 사람들은 피해자가 계속 발생하는 거죠. 안 좋은 일들이 계속 일어나는 거죠. 어떻게 보면 미스터리하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그 미스터리한 퍼즐을 맞추기 시작한 거죠. -이대우 경정, 당시 서대문경찰서 강력팀장 이대우 형사. 별명이 '범죄 사냥꾼'이야. 절도단, 마약단, 조직 전체를 일망타진하기로 유명해. 지금까지 잡은 범죄자들만 1000명 이상이야. 강력계의 레전드야. 바로 이 형사가 1년 전, 장서희를 존속살해 혐의로 수배한 경찰이야. 두 사람의 길고 긴 악연, 그 끝엔 충격적인 결말이 기다리고 있어. ▲ 악연의 그림자 시계를 거꾸로 돌려, 2010년 9월 서울 수유동. 한 골목 끝에 있는 2층 집에서 불이 났어. 집을 다 삼켜버릴 기세로 불길이 활활 타올라. 그때, 불난 집 창문에서 엄마와 어린 딸이 살려달라고 소리쳤어. 다행히 그 방은 불길이 번지지 않아서, 이웃들이 창문을 통해 모녀를 구출했어. 현장에 도착한 소방대원들은 겨우 불을 진압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어. 그런데 안방에서 시신을 발견했어. 먼저 구출된 아이 엄마의 친어머니야. 불에 완전히 탄 상태야. 화재에서 구출된 아이 엄마, 바로 우리가 아는 그 장서희야. 그날 무슨 일이 있었길래, 장서희와 딸은 살고, 어머니만 사망한 걸까? 장 씨의 진술에 따르면, 사건 전날 밤 장 씨는 딸과 함께 어머니의 집을 방문했어. 안방에서 함께 술을 마셨는데, 어머니가 담배를 피우려고 했다는 거야. 자기는 딸이 있으니, 딸을 데리고 작은 방으로 가서 잤대. 그러고 나서 새벽에 불이 났다는 거야. 현장에서는 이게 발견돼. 담배처럼 생긴 라이터. 초기 조사에서는 이 라이터, 혹은 담배꽁초가 화재의 원인이라고 판단했어. 그런데 장 씨와 딸은 탈출했잖아? 장 씨의 어머니는 왜 탈출하지 못했을까? 혈액 및 위내용물에서 졸피뎀이 검출되고 혈중 농도가 1.1mg/L로서 독성농도를 상회하며… -어머니 사망 부검 감정 결과 中 어머니의 부검 감정서야. 수면제의 일종인 졸피뎀이 시신에서 다량 검출됐어. '독성농도'는 치사량에 가까운 수치야. 이에 대해 장 씨는 이렇게 진술했어. 엄마가 평소 수면제를 복용하셨어요. 수면제를 먹고 하루 종일 자는 것도 봤어요. -어머니 사망 관련 장 씨의 2차 진술 中 당시 경찰은 장 씨의 진술대로, 어머니가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잠이 들어 차마 불길을 피하지 못했다고 판단하고 단순 화재사로 마무리지었어. 그런데, 또 다른 사건이 벌어져. 화재 사고 5개월 뒤인 2011년 2월, 고양시의 한 아파트야. 해도 뜨지 않은 새벽, 경비원이 순찰을 돌다가 누가 화단에서 잠들어 있는 걸 발견해. 술에 취했겠거니 싶어, 몸을 흔들어 깨우는데, 아무리 흔들어도 일어나질 않아. 심지어 몸이 나무토막처럼 굳어 있어. 잠든 게 아니라,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시신이었어. 사인은 추락사. 특히 머리 부분이 크게 손상되어 있었어.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고층에서 추락한거라 추측하고 변사자의 집을 찾아 나섰어. 그렇게 찾은 변사자의 집. 죽은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람, 바로 장서희였어. 어머니 사망 5개월 만에, 아버지도 시신으로 발견된 거야. 아버지가 담배를 피우고 싶어 했어요.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균형을 잃고 떨어진 것 같습니다. -추락사고 당시 장 씨의 1차 진술 中 장 씨의 진술에 따르면, 아버지가 폐암으로 입원 중이셨는데 동생 결혼식이 있어서 집으로 모셔왔대. 그날 혼자 거실에서 주무셨는데, 새벽에 베란다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다 변을 당하신 것 같다는 거야. 당시 장 씨의 집 베란다에선, 실제로 담배꽁초가 여러 개 발견됐어. 유족 진술, 현장 증거가 모두 일치하고, 외부인 침입이나 타살 정황도 없어. 이 사고도, 단순 추락사로 마무리 됐어. 정리하면, 5개월 간격으로 장 씨 부모님이 연달아 사망했어. 공교롭게도, 현장에 모두 장 씨가 있었어. 하지만 당시 조사에서는 장 씨에게 별다른 혐의점이 없다고 봤어. 두 사건 모두 다. 그런데 이 사건을 지나치지 못한 한 사람이 있어. 바로 '범죄 사냥꾼' 이대우 형사. 단순하게 생각해도 어머니 사건에도 그 여인이 관여돼 있고, 아버지 사건에도 그 여인이 관여돼 있고. 왜 그 여인이 있을 때마다 부모가 희생이 되느냐. 의문이 들잖아요. 우연치고는 너무 겹치는 거잖아요. -이대우, 당시 서대문 경찰서 강력팀장 이 형사의 눈에 이상한 점이 발견됐어. 바로 보험. 장 씨의 아버지 앞으로 암 보험이 하나 있었어. 그런데 아버지가 사망하기 전, 장서희가 보험사에 3차례 전화를 걸었어. 그리고 '상해 사망' 담당자와 통화를 했다는 거야. 아버지는 암환자인데, 이 보험에 '상해사망 특약'이 있었던 거야. 사고로 죽으면 보험금이 나온다는 거지. 이건 계약변경 승인신청서, 보험금 수익자를 변경한다는 서류야. 이 보험의 수익자는 원래 아버지의 동거녀였어. 그런데 그게 장서희로 바뀐 거야. 그것도, 사고 보름 전에. 아버지의 동거녀는 딸이 집요하게 날 괴롭혔다. 하루에도 전화를 수십 통 씩 하고, 우리집 문까지 따고 들어왔다 라고 말했어. 이렇게 집요하게 괴롭히니까, 결국 수익자를 장 씨로 바꿨다는 거야. 화재사고로 사망한 어머니. 어머니한테는 사망보험이 없었어. 다만 운전자 보험이 하나 있었는데, 공교롭게 여기에도 상해사망 특약이 걸려 있었어. 사고로 사망할 경우, 보험금이 1억이야. 그런데 장 씨가 보험금을 받아간 상황이 좀 묘해. 보험금을 청구한 지 겨우 6개월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빨리 보험금을 달라고 보험사를 재촉했어. 사고 경위를 조사해야 하니 한 달만 기다려달라 했더니 막무가내로 돈을 요구했어. 그러더니, 1억이 아닌 7천만원만 받을 테니, 당장 돈을 보내라고 했어. 보험금을 깎아서라도 얼른 받겠다는 거야.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죠. 누구나 봤을 때 이거 좀 뭔가 이상하지 않나. 그리고 그 사건마다 보험이 관련되어 있고, 그 사건 때마다 함께 있었다는 것. 그런 우연과 우연이 겹치고 그런 강력사건으로 판단이 되다 보니까, 이런 건 수사를 안할 수가 없는 거죠. -이대우, 당시 서대문 경찰서 강력팀장 이대우 형사는 이런 정황을 바탕으로 2011년 4월, 장 씨를 존속 살해 혐의 피의자로 특정하고 본격 재수사에 돌입했어. 그런데, 조사를 받던 장 씨가 갑자기 사라졌어. 잠적해버린거야. 바로 전국으로 수배를 내렸어. 그런데 머리카락 한 올도 찾지 못해. 왜? 계속 다른 이름으로 살았으니까. 수배자 신분을 감추려고 가짜 이름을 썼던 거야. 심지어 이 기간에 사기 행각까지 벌였어. ▲ 진술의 모순을 찾아라 다시 2012년 8월로 돌아와, 폭행 신고로 덜미가 잡힌 장서희. 이대우 형사팀은 장 씨를 긴급 체포했어. 도주한 지 1년 만이었어. 존속살해 혐의를 조사해야지. 그런데, 장 씨는 경찰서를 유유히 걸어나가. 왜? 구속영장이 안 나왔거든. 범죄혐의점도 있고 도주의 우려도 있었어. 그래서 당연히 나올 줄 알았는데, 구속영장이 기각된 거야. 검찰이 구속영장을 기각한 이유는, '장 씨 부모님 사망사건을 보험 살인이라고 보기 힘들다'는 거야. 보통의 보험사기는, 여러 개의 보험에 중복 가입하고, 과도한 보험료를 납부하는 경우가 많대. 그런데 이 사건은 안 그랬어. 보험도 하나였고, 보험료도 많지 않아. 그리고 무엇보다, 보험에 가입한 것도 보험료를 낸 것도 모두 장 씨가 아니야. 그래서 장 씨가 아무리 수익자를 무리하게 바꿨어도, 보험금을 아무리 독촉했어도, 이걸 살인의 직접적인 증거로는 볼 수 없다는 거야. 하지만, 구속을 하지 말라는 거지, 장 씨를 조사하지 말라는 건 아니잖아? 그래서 이 형사 팀은 장 씨를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했어. 그런데 조사가 쉽지 않아. 당시 막내였던 홍종현 형사의 이야기를 들어볼게. 장 여인의 말투를 보면 굉장히 공격적이고 말이 굉장히 빠릅니다. 여러가지 생각을 많이 해서 말을 잘 꾸며서, 미리 상황을 다 짜놓고 얘기하듯 이야기를 해서. 여태까지 경찰 활동을 하면서 많은 나쁜 사람들을 봤지만, 모든 것을 대비하고 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생각했습니다. -홍종현 형사, 당시 소환 조사 담당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으면, 보통 사람들은 떨려서 말도 제대로 못해. 죄가 있든 없든 그 분위기에 압도당하거든. 그런데 장 씨는 어떤 질문에도 막힘이 없어. 마치 미리 대본을 짜놓은 것 같았대. 게다가, 조사를 받다가 아이가 운다고 나가고, 바쁘다며 안 오고. 이건 뭐, 피의자가 아니라 거의 상전이야. 이렇게 당할 수만은 없어서 조금 세게 나갔더니, 강압수사를 받았다며 수사관을 교체해달라 민원까지 넣어. 수사가 힘든 이유는 또 있어. 이미 1년도 지난 사건들이니, 현장 주변 CCTV도 없고 목격자도 찾기 힘들어. 이제, 어떻게 해야할까? 답은, 장 씨의 진술서에서 찾았어. 이대우 형사 팀은 초동 수사 당시 장 씨의 진술들을 다시 하나하나 분석하기 시작했어. 분명 허점이 있을 거라 믿으며. 먼저, 아버지 사망에 대한 장 씨의 진술을 확인해보면 아버지가 담배를 피우고 싶어 했다.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다 균형을 잃고 떨어진 것 같다 라고 말했어. 아버지의 건강 상태, 폐암으로 입원 중이었다고 했잖아? 게다가 사고 보름 전에 두개골을 절개하는 대수술을 받았어. 그때 (아버지) 외출 허락을 안해줬었거든요. 혼자서 이렇게 걸을 수가 없는 상태였던 거 같아요. 그러니까 부축이라든지 아니면 휠체어 정도 타고 겨우 이제 이동하실 수 있는 정도. 이렇게 보내도 되나 싶어서, 사실은 한번 거동해보시라 했거든요. 근데 겨우 부축해서 겨우 발걸음을 때는 정도의… -우광무, 당시 아버지 주치의 거동조차 불편했다는 장 씨의 아버지가, 베란다로 혼자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이대우 형사는 사건 현장을 다시 찾아갔어. 그리고 이 형사는 진술을 재연해보기로 했어. 이건 당시 사건 현장에 있던 난간을 똑 같은 크기로 구현한 거야. 아버지의 키는 172센티미터 정도. 이 높이에서 균형을 잃고 떨어질 수 있을까. 실수로 균형을 잃고 떨어지기에는, 난간 높이가 꽤 높아. 장 씨의 아버지, 정말 사고사일까? 이번엔 어머니 사망에 대한 진술을 검토해볼 차례야. 이 사건은 현장이 이미 불타 없어진지 오래라 더 막막해. 다행히 사진이 몇 장 남아 있어서 보고 또 보는데, 한 사진 앞에서 형사들의 눈빛이 달라져. 바로 이 사진. 사진 속 창문. 사고 당시, 창문도 방문도 모두 닫힌 밀폐된 공간이었어. 그렇다면 밀폐된 공간에서 담뱃불로 그렇게 큰 불이 날 수 있을까? 이걸 실험하기 위해, 수사팀은 현장을 다시 만들기로 해. 사고 현장을 그대로 재현한 실험을 하기로 했어. 당시 상황과 동일하게 완전히 공간을 밀폐한 후, 전소된 침구류와 동일한 이불을 준비해 불이 붙은 담배를 이불 위에 올려뒀어. 담배는 점점 타들어 갔어. 하지만 다 탄 담배는 그대로 꺼져버렸어. 담배에서 나오는 열 대부분이 가연물(이불)에 전달이 안 되고 그냥 허공으로 열이 다 방사가 되어 버리고 극히 일부분만 가연물에 전달이 되기 때문에 그 열로는 이 조건이라면 이불에 불이 붙을 확률은 적죠. -김흥렬, 당시 건설기술연구원 박사 타고 있는 담배 위에 다른 물건을 올린 조건으로도 실험을 진행했어. 이번에도 불씨는 살아나지 않았어. 반면, 라이터로 불을 붙여 이불에 던지는 경우에는 불길이 치솟았어. 라이터 불로는 큰 불이 나는 게 가능하다는 걸 확인했어. 그래서 이대우 형사는 이 화재는 '방화'일 거라 생각했어. 그리고 확인해야 할 또 한가지. 어머니가 복용했다는 '수면제'. 장 씨는 어머니가 우울증 때문에 수면제를 복용해 왔다고 진술했어.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치사량에 가까운 수면제를 한꺼번에 먹었다는 게 이상해. 일단 어머니가 수면제를 처방 받은 기록이 있는지 찾아봤어. 어머니는 수면제를 처방받은 적도, 우울증 치료를 받은 적도 없어. 그런데 뜻밖의 이름이 진료 기록에서 발견돼. 바로 장서희. 심지어 시신에서 검출된 성분과 똑 같은 성분의 수면제를 처방받았어. 그것도 사고 전날에. 이대우 형사 팀은 이제 거의 확신했어. 장 씨를 당장 소환해서 물어봤지. 그러자 장 씨는 본인이 먹으려고 처방 받았다고 진술했어. 엄마가 수면제 먹는 걸 보고 저도 수면제를 먹기 시작했어요. 2006년이었나. 우울증 때문에요. -어머니 사망 관련 장 씨의 3차 진술 수사팀은 각종 실험, 진술을 종합해서 구속영장을 다시 신청했어. 하지만, 이번에도 기각이야. 도대체 왜 자꾸 기각되는 걸까. 검사출신 변호사한테 그 이유를 직접 들어볼게. (검사가) 되게 고민이 깊었을 거 같아요. 왜냐면 범죄 소명은 좀 부족한데 도망의 우려는 되게 높잖아요. 근데 여기서는 라이터를 구매한 내역이라든지 들고 들어갔다라든지, 범행을 사전에 모의했다는 CCTV나 범행 도구 구입 내역이나 그런 거에 대한 입증이 없잖아요. 일단은 '죄를 저지른 거 같아' 거기다가 '구속하지 않으면 도망가거나 증거를 없앨 거 같아'가 두번째인 거지, 소명조차 되지 않는 사람을 도망갈 거 같으니까 구속시킬 수 없는 거잖아요. 검사 입장에서, 형사소송법도 그러하고. -이고은 변호사 도주의 우려가 있다 할지라도, 범죄 소명이 부족한 피의자를 구속할 수 없다는 거야. 형사들의 입장은 어땠을까? 정황증거만으로도 구속되고 유죄까지 받는 경우가 있었대. 이번 사건은 왜 이리 기준이 높은 건지, 답답하고 아쉬웠대. 그리고 무엇보다, 장 씨가 또 도망갈까 초조했어. ▲ 억울하다는 사람의 이상한 한마디 그런데 장 씨가 이번엔 생각지도 못한 행동을 해. 바로 TV출연. 한 지상파 방송에 나와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시작해. 어떻게 불이 났는지 저도 모르겠는데 그냥 저는 소방서에서 나온 결과가 '담뱃불로 추정됨'이었으니까 '아 그래요?' 그런 줄 알았고. 아빠 조사 결과도 일산경찰서에서 '사고사로 추정됨' 이렇게 나왔으니까 그런 줄 알았고 믿었으니까. 경찰관분들을 그 때는. 서대문 경찰서에서는 제가 던졌대요. 아빠를 번쩍 들어서. 말이 되냐고요. 그렇게 했다는 증거가 있으면 영장도 기각 안 됐을 거고. 수배중인 사람이 영장이 기각되지는 않잖아요. -2012. 10. 19. 장 씨의 '궁금한 이야기Y' 출연 영상 中 장 씨는 모든 혐의를 부인했어. 담뱃불 때문에 불났다고 말한 적도 없고, 아버지가 담배 피우다 떨어졌다는 것도 경찰의 추측에 동의했을 뿐이래. 심지어는 이런 하소연도 했어. 엄마 아빠가 정말 이혼뿐만이 아니라 되게 비정상적인 가정이었어요. 엄마는 우울증에다가 의부증이 좀 심했던 것 같아요 남자들한테. 몇 번은 재혼했을 때는 잘 살려고 노력했었는데 되게 두들겨 맞은 적도 있나 봐요. 폭행을 당한 적도. 정말 마음에 병이 들었던 것 같아요 엄마가. -2012. 10. 19. 장 씨의 '궁금한 이야기Y' 출연 영상 中 이런 가정사 때문에 경찰이 자신을 색안경을 끼고 보고 있다는 거야. 비록 평범한 삶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부모님을 죽일 이유는 전혀 없다는 거야. 이 방송을 본 형사들은 어땠을까. 심증은 있는데 물증은 없지, 정황 증거로는 구속영장도 안 나와. 게다가 방송까지 나와서 억울하다고 해. 그야말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야. 이제 어떻게 해야할까? 이대로 포기할 '범죄사냥꾼'이 아니지. 당장 장 씨를 구속할 수는 없지만, 기소의견('범죄 혐의가 인정된다는 의견'을 검찰에 전달하는 것)으로 검찰에 송치할 수는 있어. 보험사기, 존속살해 혐의에 대해 다시 한 번 장 씨를 철저하게 조사했어. 그리고 새로운 게 더 발견됐어. 조사를 하면 할수록, 장 씨의 사기 행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드러나. 동생, 시어머니, 친인척한테 갈취한 금액만 4억 5천만원이야. 장 씨에게 가족은, 어떤 의미였던 걸까. 그리고 왜 이렇게까지 돈에 집착한 걸까. 장 씨의 내연남 고 씨가 한 진술이 있어. 주식에 환장을 하는 그런 스타일이었어요. 막말로 마약에 금단현상 있는 사람이 마약을 봤을 때 환장하고 진짜 미친다 그러잖아요. 돈을 보면 그렇게 사람이 변해요 -장 씨의 내연남 고 씨의 진술 中 주식으로 생긴 빚이 많았는데, 돈이 생겨도 빚을 갚기는커녕 또 다시 주식에 올인. 중독이 엄청 심했대. 어머니 사망 전 3억 4천만원이었던 빚이, 아버지 사망 후에 4억 2천만원으로 늘어나 있었어. 장 씨는 돈이 필요했던 건 맞지만, 부모님 죽음과는 무관하다고 끝까지 주장했어. 하지만 경찰이 의심을 지울 수 없었던, 마지막 결정적 이유가 있었어. '네가 엄마 아빠를 그렇게 했을 거라는 거는 이해가 안 간다. 그렇게 안 믿겨지는데?' 그러니까 자기가 갑자기 장난인지 잘 모르겠는데 '내가 했는데?' 그렇게 하고 그냥 넘어가더라고요. -내연남 고 씨(가명), 당시 통화 장 씨가 본인이 직접 범행을 저질렀다고 털어놨다는 거야. 물론 이건 고 씨의 주장일 뿐이야. 통상적으로 범행을 한 사람들도 누군가에게는 말하고 싶은 그런 심리가 있는데요. 무의식 중에 발현된 것이 아닌가… -홍종현, 당시 소환 담당 형사 이런 고 씨의 주장이 증거로 효력이 있을까. 다행히 대질신문을 통해서 진술이 서로 일치만 한다면, 상당히 유력한 증거가 될 수 있대. 자, 이제 마지막 단계야. ▲ 또 사라졌다,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끝까지 수사력을 모았던 이대우 형사팀은 최종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사건을 넘겼어. 범죄혐의가 있다는 의견을 마지막까지 피력한 거야. 최선을 다해 진실을 밝혀내려 했던 서대문의 장 씨 재수사팀은 그렇게 각자 다른 부서로 뿔뿔이 흩어졌어. 그럼, 장 씨는 어떻게 됐을까? 기소가 돼서 재판을 받았을까? 유죄는 인정 받았을까? 피의자 소재 불명으로 기소중지 결국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어. 검찰조사를 앞두고 장 씨가 또 종적을 감춰버린 거야. 전국에 수배령이 내려졌는데, 찾을 수가 없어. 그야말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거야.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까지도, 장 씨는 지명수배 상태야. 장 여인에 대한 수사를 엄청 방대하게 진행했는데 계속 잡았다가 놓치고 잡았다가 놓치고 이런 상황들이 너무 허탈하고. 당시 구속영장이 청구되었다면, 재판하는 과정 중에 충분히 자백을 받아낼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구속영장이 청구되지 않아서 사실 원망스러운 부분도 있었습니다. -홍종현, 당시 소환 조사 담당 형사 이게 제가 강력팀장으로 재직하면서 맡은 마지막 사건이거든요. 사건을 시작하고 뼈대까지 세워놨지만 마무리를 못했어요. 하나의 사건을 종결을 했어야 됐는데 그걸 못하고 떠났기 때문에 그 사건에 대한 미련이 많이 남아 있었는데. 그게 아직도 재판에 회부되지 않고 당사자인 그 여인이 도망 중이라는 거에 깜짝 놀랐습니다. 조금 충격이었습니다. -이대우, 당시 서대문 경찰서 강력팀장 차라리 무죄를 받았다면, 그래서 혐의를 벗고 사건이 마무리 되었다면. 지금까지 이런 악연으론 남지 않았을지도 몰라. 그리고 2023년 현재까지도, 이 장서희를 추적하고 있는 사람이 있어. 바로 이대우 형사. 이 형사는 아직 이 사건을 놓지 않았어. 이미 검찰로 넘어갔지만, 조사가 가능한 선에서 생활반응을 계속 추적 중이래.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나온 건 없어. 수사 기관에서 추적하고 있다는 걸 100% 알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의 신분으로 된 모든 것을 차단해 놓고 제3자의 명의로 생활하고 있다는 거죠. 그 동안의 범죄 형태를 봤을 때, 또 다른 피해자는 분명히 누군가는 지금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고 저는 확신해요. 그래서 그걸 예방도 하고 빨리 조기검거를 해서 법의 심판대에 세워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냥 법정에 세우고 싶어요. 그래서 정말 진실이 뭔지 밝여야겠죠. -이대우, 당시 서대문 경찰서 강력팀장 사실 '꼬꼬무'가 인터뷰를 처음 제안했을 때, 많이 망설이셨어. 형사 입장에서는 피의자를 놓친 오점일 수 있잖아. 하지만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는 건 막아야 하니까, 어렵게 결심을 하신 거야. 형사들의 용기로 만들어진 오늘의 이야기가, 부디 또 다른 피해자를 막을 수 있길 바랄 뿐이야. '꼬꼬무'가 오늘의 이야기를 준비하며 고민이 많았어. '무죄 추정의 원칙' 알지? 형사사건의 피고인은 유죄 판결이 확정되기 전엔 무죄로 추정해야한다는 것. 장 씨도 마찬가지야. 아무리 의심이 가더라도, 아무리 다른 범죄를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장 씨를 존속살해범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돼. 그럼에도 '꼬꼬무'가 오늘 이 이야기를 하는 건, 장 씨가 수사기관의 정당한 요구를 무시하고 숨어버렸기 때문이야. 끔찍한 존속살해 혐의를 벗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는데도 말이지. 이 잔혹한 미스터리의 진실을 알고있는 단 한 사람, 장서희. 그녀가 하루 빨리, 진실의 입을 열어주길 바랄 뿐이야.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